명작 수첩 : 사진 명작 수첩
발 윌리엄스 지음, 박우정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Every picture tells a story.


여기서 픽처는, 일반적으로는 그림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림이 스토리를 말하고 있음은, 미술 이론을 조금이마나 접한 이들은 다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요즘 나온 미술 관련 서적들을 보세요. "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모토 아래, 그림 안에 얼마나 많은 상징과 비유, 역사, 작가의 의도가 녹아 있는지 가르쳐 주는 게 그 미션입니다. 이 미션은 인문적 소명과 상업적 속셈을 둘 다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픽처가 스토리를 말하는 건, 격언의 형태로 알려 주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소리다 이겁니다.


음악과 같은 시간 예술도 아니고, 미술 같은 공간 예술이 "스토리, 내러티브(시간성이 그 핵심인)"를 지니고 있다 함은 그러나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면 있습니다. 아무리 배워서 알고 있다 하나, 진정한 직관은 인식과 이성을 배신하는 수 있기 때문이죠. 뭐 좋습니다. 그림은 그렇다고 칩시다. 허나 사진도 스토리를 지니고 있습니까? 사진은 순간의 포착, 모사가 그 본질이 아닙니까? 영어의 picture에는 "사진"이란 뜻도 있음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저 문장의 picture를 사진이라는 뜻으로 새겨도 되는 것인지요. 우리의 돌사진, 수학 여행 기념 사진, 대학 입학-졸업 사진, 엠티 가서 찍은 사진, 그(그녀)와 둘만이서 은밀한 장소 은밀한 사연을 배경으로 한 채 야시꾸리하게 찍(어서 폰에만 저장되)어진 사진 등이야 우리가 그 배경을 알기에 분명 뭔가 "스토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 일반이, 개인차를 고려 함 없이, 공감의 화법으로 보통의 스토리를 일반 대중에게, 바벨 탑 공사 현장에서의 방언적 교란 없이 쩌렁쩌렁, 혹은 조곤조곤 전달하는 게 가능하냐 이 말입니다.


그게 그런 줄, 구체적인 케이스에 적용하며 개별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는 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이 책의 원제목을 보십시오.

What Makes Great Photography


무엇이 위대한 사진을 만드는가.


조금만 문장을 바꿔 보겠습니다.

What Makes Photography Great

무엇이 사진(술 일반)을 위대하게 만드는가.


이 책의 기획 의도는 제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위대한 명작 사진을 보자, 안데르스 페테르센, 래리 설튼, 로버트 카파(얼마 전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호르스트 P 호르스트, .. 왜 이들이 찍은 광학물질은, 간단한 셔터 누름 동작 이외 어떤 고차원적 사고나 해석이 개입하지 않을 것 같은 "저차원 창조 행위의 산물"이, 미켈란젤로나 고흐의 피나는 손놀림의 자식들과 같은 차원의 "위대함"을 지니는가?

그것은 플라톤 이래 인류가 인식해 온 그 먼 곳에 있는 이데아(이 책의 목차에 따르자면 일, 이야기, 집, 갈등, 아름다움,.. 야외에서 등)를 저 작가들은 순간의 포착 능력과 이미 장착하고 있던 미학의 프레임으로 필름 안에 담아 내는 일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묘하게 번지는 수면 위의 기름띠가 가장 절묘한 곡선과 면의 배치를 이룰 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떠 내는 능력이 마블링 예술가에게 중요하듯, 사진작가 역시 기계적 기교와 편집의 테크닉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가장 vivid한 컷으로 담아 내는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제가 바꿔 놓은 두 번째 문장을 보십시오,

What Makes Photography Great

본디 사진술이란 그리 위대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진을 위대하게 만드는 건, 작가의 인생관과 통찰 능력입니다. 그가 남긴 명작을 그 사진작가의 인생과 개성과 함께 고찰하여, 사진의 숨은 위대함을 간파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여성 사진작가이자 런던 정경대 교수인 저자 발 윌리엄스의 의도입니다. 그녀는 과연 페미니스트답게, 부조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잡아 내어 비판의 아고라에 올려 두는 작가들에 더 치중하여, 사진의 사회 참여적 기능까지 더 절절하게 부각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카 파가 빌바오에서 찍은 그 유명한 사진(p124)을 보세요, shock and awe로 넋이 나간 사람들의 시선 정중앙에, 오불관언이라는 듯 냉소적 체념, 현실 도피를 시도하는 여인을 배치한 대담함을 보시고, 왼쪽 아래에 두려움 없이 패기와 증오심 가득한 눈으로 적기(敵機)를 응시하는 아이를 보십시오. 이게 위대함이라는 겁니다. 이 구도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이로부터 40년 가까이 지난 후에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영화 <대부 2>에서 소년 코를레오네가 대서양을 건너 미 대륙 항구에 도착하는 그 장면을 찍으면서 이와 똑같은 구도로 모방했겠습니까? (그냥 제 생각일 뿐이니 너무 큰 신뢰와 권위는 주지 마세요^^  제가 보기엔 그랬습니다) 영화가 괜히 motion picture가 아닌 게 이래서라는 거죠.



무엇이 위대한 사진을 만드는가? 나도 만약 위대한 사진 작가 까지는 아니더라도, 위대한 사진 몇 컷이라고 남기고 싶다면, 이 책에 수록된 컷을 휴대하고 수시로 참고하면서, 무작정이나마 그 구도와 색감을 모방해 볼 만합니다. 세세한 디테일을 암만 배워도, 잔재주는 늘 수 있으나 "위대함"에 이르는 길의 진도는 제자리걸음이기 쉽죠. 위대함을 내것으로 하려면, 인문의 바탕이 있어야 합니다, 이 책은 위대한 "사진"과, "위대한" 사진, 둘에 대한 가르침을 동시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p99 에서, "마지막 유원지"로 번역된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last resort를 옮긴 건데, 이 어구에는 최후의 의존 수단이라는 뜻이 더 강하고, 그렇게 새겨야 본문의 내용대로 퇴락해가는 영국의 국세를 암울하게 전달한다는 맥락과 통합니다. "마지막 유원지"라고 하면 얼핏 들어도 뭔가 어색합니다. Martin Parr의 이 작품은 저 한 컷뿐이 아니고(책에도 연작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수십 장의 모음으로 구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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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수첩 : 미술 명작 수첩
앤디 팽크허스트.루신다 혹슬리 지음, 박상은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책 제목이 "수첩"으로 되어 있어 다소는 낯설어하실 분들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화첩"이라는 형태로 대화가의 작품집을 꾸리는 일을 하나의 컨벤션으로 삼았습니다. 저술가에게 "문집"이 있다면, 화가에게는 "화첩"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확실히, 마스터피스의 모음을 책 한 권의 모습으로 꾸리고 휴대하는 일은, 그 예술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뿌듯함과 전 우주를 휴대한 듯 벅찬 감격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예술가는 그가 생전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든 간에,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나 먼 후대인(이를테면 우리)들에 대해서나, 작은 창조주나 마찬가지의 위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 로렌초 데 메디치나 율리우스 2세를 모르는 이는 숱하지만,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거만 봐도 이 말의 타당성이 입증됩니다.


저는 라루스 미술사 세트를 소장하고 있으며, 기타 예쁘고 장중한 도록집을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수시로 펼쳐 봐 주곤 하는 사람입니다(미술품은, 돈이 없어, 애장하고 있는 게 없습니다만). 하지만 초등학생 시절부터 품어 오던 한 가지 의문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어요.

"어떻게 미술을 감상할 것인가?"

이 말은 제가 어려서 보던 백과사전의 미술편 첫머리에 나온 말이었습니다. 풍부하게 수록된 명화(그 중에는 사춘기에 막 접어든 제게 모종의 생리적 변화와 설렘을 안겨 주는 아름다운 인체 묘사를 담고 있는 게 많았죠)를 비록 지면을 통해서나마, 그리고 간간히 찾을 수 있었던 전시회를 통해, 제법 눈과 영혼을 통해 익힐 기회가 적지 않았지만, 아직도 한 편의 미술 작품을 보고서, "와 잘 그렸다, 와 잘 빚었네?" 를 넘어, 어디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 지 속시원하게 가르쳐 주는 책이 없었습니다. 미 술 평론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미술품 시장에서의 가격 형성과 변동에 불건강하지 않은 수준으로 영향을 끼쳐야 할 외재 변수를 마련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모두가 스탕달일수는 없어서, 걸작 명작을 두고 영혼의 충격을 올바른 방법으로 느끼는 것도 생래의 특권만은 아닙니다. 과거의 전통과 관습, 그리고 이의 현대적 변용을 온전한 방식으로 터득한 스승의 코칭이 있어야, "아 나도 이제 느낌 아니까!"가 정직하게 나올 수 있는 거죠. 이의 레슨은 결국 "언어"를 통해, 다소 인위적인 방법으로라도 습득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창조는 고사하고 올바른 감상조차, 모두에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 미술은 음악보다도 인문적 교양이 깊숙히 개입하는 영역입니다.


이 책은 영국에서, 고전 지식의 엑기스를 좋은 환경에서 가장 알뜰히 배우고, 여기에 현대의 최신 트렌드를 스스로의 재 능으로 익히거나 창조까지 해 내는 두 분의 동시대 저자가 쓴 책입니다. 명작 앤솔로지이니 당연히 지난 시대의 명작이 고스란히 실려 있고, 물론 명작이라도 한정된 지면에 망라할 수는 없기에 저자들의 안목이 반영된 엄선 과정을 거쳐 리스팅, 에디팅이 이뤄졌으며, 제가 이 책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요소로, "어떻게 그림을 독해해야 하는가(일단 총체적 직관이 순조롭지 않은 이라면)?"의 원칙을 제대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좌우로 늘씬하게 벌어지는 판형에, 대체로 왼쪽에는 명작의 도판을, 오른쪽에는 저자의 해설을 담았는데, 이 해설 부분이 기가 막히다는 뜻입니다. 글을 글로 푸는 일(문학 평론)보다, 다른 매체와 분야인 그림을 글로 푸는 작업이, 우리 선입견과는 달리 더 절실한 필요성과, 수요를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 이 책을 보면서 절실히 들었습니다.


이 책의 빼어난 점은, 그림(or 조소)과 그 창조주에 대한 알뜰하고 핵심 있는 해설 외에, 다른 이의 명언을 함께 수록하여, 일종의 아포리즘 컬렉션까지 겸하고 있다는 거죠. 아주 속물적인 의도로, 이 책을 가지고 있으면 "미술에 관한 그럴싸한 명언"을 주제에 맞춰서 그때그때 찾아 요긴하게 써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잘난 척하고 싶을 때 명언을 동원할 수는 있겠지만, 그 명언을 적시에 써 먹지는 못한다면, 오히려 큰 망신을 당할 수도 있을 건데요, 이 책은 시대별로 그림을 죽 나열한 체제가 아니라, 키워드 주제어에 의해 카테고리를 나눠 놓았기 때문에 , 처한 상황에 맞춰 요령껏 끄집어 낼 수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이 책은 동양권 작가의 작품들도 고루 싣고 있어 더 마음에 듭니다(물론 우리 조상들의 솜씨라든가, 유사한 풍의 작품이 빠져 아쉽습니다만). 보시면 가스시카 호쿠사이의 <어부 아내의 꿈>이 나오죠. 참 대담하다고밖에 할 수 없네요. 에로틱하다기보다는, 당시 시대상을 감안할 때 어떻게 이런 표현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경이감이 우선입니다.  책 맨 뒤에 나온  <가나가와의 거대한 해일>을 그린 화가와 동일 인물입니다.


이 그림은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대망> 전집의 어느 한 권에 뒤표지 디자인으로 실려 있기도 합니다. 묘한 우연입니다.



아래 그림 중 왼쪽 컷은 이 책 p158, p160, 두 군데에 실려 있습니다. 안드레아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입니다.

(책에는 "죽은 예수"라고 나와 있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같은 화가의 <십자가형Crocifissione>입니다. 이 책에는 안 나와 있으나, 예수의 처형을 다룬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므로 다들 아실 겁니다.

이 책의 저자는, "왜곡"이라는 챕터에서 이 그림("죽은 그리스도" . 左)을 다루며, 원근법이라는 혁신의 기념비적 등장을 알립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그토록이나 당연한 테크닉이, 이처럼 입체적이고 분류사적인 조망 아래 새로운 의미로 다가 오는 거죠. 오른쪽 그림에서도 원근법과 소실점 기법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습니다.


이처럼 이 책은, 미술 작품의 구체적인 기법을, 역사적 맥락과 동시에 전달하고 있어, 구경이 아닌 공부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습니다.



자, 어디 가서 미술 좀 안다고 잘난 척 하고 싶은, 속물적이지만 귀여운 당신, 이 책을 주머니 안에 두고 마음껏 비서로 부리십시오, 스마트폰이 못 해주는 일을 이 친구가 해 줄 겁니다.

어 디 가서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을 요란하게 떠벌이는 모습 몹시도 혐오하며, 나 자신과 절대자 앞에 떳떳한 순수 내공만을 기르고 싶어하는 착하고 고상한 당신,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고르십시오. 앞의 녀석보다 이 책은 오히려 당신께 필요합니다. 집에 있는 두꺼운 책 일단 젖혀 놓고, 눈높이에 맞는 레슨을 해 줄 이 책을 당신의 진짜 스승으로 모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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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추적자들 -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인들의 발칙한 에덴 탐험기
브룩 윌렌스키 랜포드 지음, 김소정 옮김 / 푸른지식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어떤 책을 읽을 때, 염두에 두게 되는 기준은 두 가지 정도입니다.

1) 표현이나 내용이 매우 기발하고 독창적이라 페이지를 넘기는 재미가 있다.

2) 유익한 정보, 혹은 도덕적인 가치가 충분히 담겨 있다.


이 책은 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담은, 정말 유쾌하면서도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인 간은 흔히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최소한의 생존 욕구가 충족된 후에는, 사랑이라든가 명예와 같은, 한 차원 높은 범주의 다른 상위 욕구로 그 지향이 옮아감은, 심리학의 매슬로우가 이미 밝혀 낸 사실이죠. 그런데 인간은, 가장 고차원의 자아 실현 욕구를 채운 후에도,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을, 혹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 형이상학적, 초월적 욕구를 여전히 지닙니다. 이는, 경우에 따라, (보이지 않는 피안을 향할 때) 종교적 열정이 되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물리 세계를 향할 때) 극지, 험지, 오지를 찾아 나서는 탐험에의 열정이 되기도 합니다.

책의 테마를 담은 예쁜 책갈피가 딸려 있어요.


이 책은 이 두 가지 욕구와 야망을 둘러싸고, 실존했던 유명인 14명과, 이 14인의 주위를 맴돌거나 큰 영향을 주고 받았던 각종의 인간 군상이 연출했던 희극, 혹은 비극을 재미 있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정신적 욕구와 물리 세계에서의 모험이 동시에 얽혀 있는 경우는,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매우 드문 게 당연한데요, 이런 드문 주제를 책 한 권에 관철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성서 속의 주제인 "에덴 동산"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숱한 논쟁과 소동, 혹은 촌극에 대해 이 책이 망라적으로, 또 디테일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 하나로 책 한 권을 다 채운단 말인가? 의문이 들 만도 하지만, 이 책은 정말로 그런 일을 해 내고 있습니다.


첫 째 장은 보스턴 대학의 학장이자 감리교 목사인 윌리엄 워런의 이야기입니다. 보스턴은 영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온 청교도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도시로 잘 알려져 있고, 현재는 그 도시를 포함한 메사추세츠 주 전체의 성향이 그렇듯 대단히 진보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배경이자 워런이 살았던 19세기만 해도, 엄격한 청교도 교리와 분위기가 정관계를 지배하는 곳이기도 했죠. 헌데 우리는 여기서, 현대 미국 남부를 지배하는 기독교 원리주의 같은 걸 생각하면 좀 곤란하겠습니다.


그 는 정통 신앙를 고집하되, 최신 과학 이론으로 무장한 새로운 흐름을 무작정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과 대화가 통하는 방법으로 전쟁을 벌여, 마침내 불신자들을 설복시킨다는 심산이었습니다. 한참 후에 등장한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리면 "담론 윤리"가 뭔지 이해를 한 사람이었죠. 그런데, 그 결과가 반드시 성공적이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심각하게 역사의 진실을 또박또박 전하고 있으나, 읽는 내내 폭소를 멈출 수 없는 내러티브로 가득 한 이 책에 실려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치 챌 수 있지만,... 윌리엄 워런은, "북극에 에덴 동산이 있었다."는, 오늘날의 눈으론 터무니없고 황당한 주장을, 두꺼운 책 한 권에 가득 싣고, 각종의 인용문헌과 증빙을 부가하여 길게 서술하여 보급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 주장 하나로, 현대(그의 동시대)에 만연한 불건강하고 불온한 반(反) 기독교 사상을 일소하겠다는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엄청나게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했다 뿐이지, 대단히 논리적입니다. 우리가 어떤 주장의 진위를 판단함에 있어 동원하고 있는 기준 중, 1) 직관 2) 권위 3) 논리 의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결정적인 4) 증거가 부족했고, 이는 이후의 발달한 과학 지식이 결정적으로 오류임을 보이기까지 그런 대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했습니다! 자, 에덴 동산이 북극에 있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그 직관으로 벌써 이 억설을 기각해 버립니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던 이들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다는 게 가장 놀라운 점이었습니다. 이 1장에는 그 외에도, 우리가 북극을 가장 먼저 밟은 인간으로 기억하는 피어리에 대해서도 잠시 나와 있는데, 그가 그런 영예를 차지하게 된 배경에는 정치적 로비력이 결정적이었다는 점도 밝히고 있습니다. 종교건 과학이건 탐험이건, 그 진가를 평가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추악한 정치가 빠질 수 없다는 게 가슴 아픈 깨우침으로 다가 왔습니다.



디음 장에 등장하는 사람은 더 재미있습니다. 유 태인의 혈통으로 태어났으나, 주류 사회에 합류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이런 유태인들은 제법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사람이죠)한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훈육과 최상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프리드리히 델리치라는 학자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후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평생을 시달렸던 그는(이는 이 책 저자의 해석일 뿐이며, 다른 시각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라크(옛 메소포타미아)로 달려가 놀라운 고고학적 발견을 해냅니다. 이 로부터 얻어 낸 결론이란, 구약성서란 한갓 고대 바빌론 신화의 표절물에 불과했다는 거죠! 이는 지금 와서야 현대인의 상식이 되었습니다만, 기독교적 세계관이 확고히 지배하던 당시의 유럽으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겁니다. 순수 학문의 영역에 정치가 개입하자, 상황은 진흙탕싸움으로 변합니다. 저자는 대단히 재미있게도, 이 델리치 역시 황제의 눈에 들어 영달을 도모하던 정치적 인물 그 이상이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셋 째 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독일감리교의 일파인 "형제단" 소속 목사였던 한 미국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진정 엉뚱하게도, 미국 오하이오 주에 위치한 어떤 인디언 유적지를 두고, 에덴 동산의 증거라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킵니다. 사실 이를 둘러 싼 소동은, 이 책에 실려 있는 다른 나머지 13인의 촌극에 비해 역사적 중요성 면에서 비중이 떨어지는 편이라, 과연 수록될 가치가 있었을 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원주민을 집단 학살하고 그 터전을 빼앗아 현재의 삶을 일군 미국인들의 집단 죄의식을 반영하는 작자의 의도로 읽히기도 합니다,



이 책은 뒤로 가면 갈수록 재미있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다분히 계획적으로, 저자가 보편적 상식에 비추어 더 파격이다 싶은 캐릭터를 점층적으로 배치한 까닭이 아닙니다. 맨 마지막의 조셉 스미스(현재 한국에도 선교사가 많이 파견되어 있으며, 지난 번 대선 후보였던 미트 롬니의 종교이기도 한 몰몬 교의 창시자입니다)를 제외하면, 이 14인의 인물들은 단순한 에덴 동산의 탐사자, 몽상가가 아닙니다. 우리 현대사의 굴곡과 모순을 그대로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들입니다, 다시 저 위로 돌아가 2장의 델리치를 보십시오. 이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선량한 인격자였으나, 결국 그의 사상은 이후 나치 발호의 한 토양을 마련하게 됩니다. 5장에 나오는 홍콩의 사회운동가 사찬태(謝纘泰)를 통해, 우리는 에덴 동산이 東투르키스탄에 위치해 있다는 식의 황당한 코미디를 접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중국 근현대사의 일단인 의화단 운동, 그리고 신해 혁명에 이르는 거대 흐름의 한 지류를 엿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인물들의 현대사적 비중이, 뒤 시대일수록 우리의 감정과 가치관과 교차하거나 혹은 크게 역행하는 요소가 많을 테니, 더 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게 당연할 밖에요. 



알 고 보면 은근 심각한 주제와 도덕적인 교훈을 다루고 있기는 하나, 저자의 문장과 위트가 너무도 빼어나서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웃느라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습니다. 213~221페이지에 실린 스콥스 재판은, 그 내용상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위트와 자기 패러디가 진하게 배어 있어, 이 책의 압권으로 생각될 만큼이었습니다.


몇 가지 재미있었던 부분을 추려 보면,


p46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가능한 일일지도 → 이런 이슈가 기독교의 신구 종파를 가릴 리 없죠, 종교상의 대립을 풍자한 명 위트였고요.

p141 문명이 끝나려고 하는데(일차 대전 발발 직전) 문명의 기원(에덴동산)을 고려할 여유가 없음은 당연했다. 블랙 유머죠. 학문적 논쟁이라고 해도 결국 소속 국가의 이해를 반영하여 전개되는 게 보통이었던 당시의 쓰디쓴 상황을 풍자합니다.

같은 페이지 "한 사람(델리치)은 청력을 잃고, 한 사람(세이스)은 시력을 잃어 대화가 될 지 의문이었다. " 신체상의 기능 장애를 거론하는 게 좀 불편할 수도 있지만, 성격의 See No Evil 같은 구절이 연상되어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역시, 국가 간의 탐욕으로 인한 전쟁열기를 풍자한 대목입니다. 

p131 "뱀에 물린 그는 뱀의 사악함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코미디 대본처럼 웃음이 나왔던 부분입니다.

p213  학장 생일은 그 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고령의 워런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서술하는 부분이 매우 우스웠습니다.


책에는 잘못된 부분도 적지 않게 보였습니다.

p58 에 보면 1903년에 오스만(유러피안 페이션트)이 무너졌다고 하고 있으나, 오스만 제국은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에야 문을 닫습니다. 이 시기는 오히려 술탄이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나라를 추스리던 시기입니다. p167에 보면 그 이후에 제국이 건재했음이 잘 나와 있고, p180 청년 투르크 당의 혁명을 언급한 부분도 있습니다. 책 자체만 놓고 봐도 말이 안 되는 서술입니다.

p58에 보면 "토리아"라는 인명이 나오지만, 이런 발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Viktoria는 독일식으로도 그저 "토리아"일 뿐입니다. 독일어라고 해서 V가 언제나 [f]로 발음되는 게 아니며, 이 경우는 외래어이므로 예외입니다.


p172에 보면 "강의로부터 5년 후"라고 되어 있지만 틀렸습니다. 바빌론과 성서(Babel and Bible인데 이걸 독일어로 읽으면 바벨 운트 비벨입니다, 기발하죠)라는 강의는 1902년에 있었으므로, 6년이 정확합니다. p216의 1903년 운운도 틀린 것입니다.


p151의 역자 주 the boxesthe boxers의 잘못입니다.


p63에서 '조엘'은 "요엘' 이 맞을 것입니다.


p297 "바레인은 섬나라였다." 바레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섬나라이므로 과거형 시제는 눈에 거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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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모든 순례가 놀라운 것은 아니고, 모든 인생 혹은 그 인생의 한 특정 체험이나 여정이 "순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순례는 설령 그것이 자신의 성지(聖地)를 향한 것이라고 해도, 범속하거나 루틴하기가 쉬우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상업적이기까지 합니다. 주변에 종교(어떤 종교라도요)를 믿는 분들이, 성지 순례를 어떤 기분으로 다녀 오고, 또 돌아 오신 후 어떤 영적 고양을 맛보는지 지켜 보시는 분들은 공감할 것입니다. 주위에서 흔히 보는 순례는 아쉽게도 대개는 그 순례자의 before & after에 차이가 없습니다. 순례는 거의 "거듭남"의 효과를 보려 감연한 용기를 내어 행하는 것임에도 불구, 우리는 그저 종래의 안온한 껍데기를 벗어 날 생각를 하지 못한 채, 이 번잡한 여행, 예식을 통해 외관의 대청소를 행하는 데에 그칩니다. 그러니 그게 놀라울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모든 일상과 체험이 규격화의 편한 틀로 재단되어 생산, 소비되는 요즘, 어떤 감동과 환희도 그저 있을 법한 일,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likely할 뿐입니다.


하물며 더 많은 이들에게는, 살아 왔거나 살아 갈 인생 통째부터가 범속한 일상의 연속이며, 패키지 상품으로서의 원거리 여행조차도 드물게 맞는 전환점일 뿐입니다. 제 두 발로 걸어서, 혹은 대단히 고달픈 전통적 수단에만 의존해서 어느 타방을 다녀 온다든가 하는 일은 좀처럼 겪기 힘듭니다. 만약 누가 그런 체험을 실제로 마쳐 내었거나, 단지 결심만 해 보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만 해도, 아마 주위로부터 대단히 별난 사람 취급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은 대단히 unlikely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례라는 이름만 붙었다 뿐 참다운 자아와 궁극자를 발견함과는 거리가 먼 행차, 의식이 그 명칭의 진정성을 배신하기 일쑤인 세상에서, 그저 직장에서의 책무와 할당과업 수행에만 자신의 정력을 봉헌한 인생, 퇴직한 직장으로부터 변변한 보상이나 대우도 받지 못 한 채,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자신처럼 늙어 버린 아내로부터의 보살핌, 개입, 리딩, 승낙의 연속체에 둘러 싸여 어정쩡한 노년을 맞고 있는 해럴드 프라이 씨에게라면, 더더군다나 무슨 순례 같은 것이 일어날 법하지 않습니다. unlikely는 이처럼 일어날 가망 자체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또 그 일어난 순례의 내용이 대단히 이색적이었다는 점에서도 그 정의(定義)를 충족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unlikely한 순례의 촉발 동기는 대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해럴드 프라이 씨는 여느 날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불길하리만치 평범한 어느 날 오전에, 편지 하나를 받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잉글랜드 서남부 중에서도 땅끝이라 할 사우스데본으로, 저 동북 방향으로 그 대척에 자리한 노섬벌랜드의 버윅(-어폰-트위드)로 부터 서신이 도착한 것입니다(잉글랜드의 끝이라고 해도 됨니다. 그 위는 스코틀랜드니까요). 처음에는 무슨 착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던 바로 그 무렵부터 최근까지, 자신의 일생을 바쳐 온 직장에서 고락을 같이하던 동료가, 어느 의료 시설에서 암에 걸려 죽어간다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소식을 전해 온 것입니다. 


"여보, 퀴니가 암에 걸렸다는군. 어쩌면 좋지?"

"암은 낫기 힘들어."


아내 모린은 매정하거나 타산에만 밝은 여성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해럴드 자신처럼 그 지루하면서도 잔인하게 단조로운 일상과 숱한 책임으로부터 마모되고 탈진되어 많은 것을 잊고 있을 뿐입니다. 더군다나 퀴니란 이름과 존재, 그 불행한 만년의 운명이 동료였던 자신에게만큼이나 큰 충격을 줄 리가 없습니다.


"소용 없어."


어느 새 아내는 편지 발신인을 화제에서 배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 다시 복귀해. 내일을 어제만큼이라도 안전하게 챙기려면, 오늘에 그제처럼 매몰되야만 하니까.'


그러나 해럴드 프라이 씨는 더 이상 경화된 나무등걸처럼 루틴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뭐라도 행동에 나서서, 그간 애써 외면해 온 소중한 무엇인가를 먼지구덩이로부터 찾아 와야만 합니다. 하지만 더 불행한 일은, 대체 이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아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이죠. 편 지를 쓰고 부치려고 하나, 그는 재게 내딛는걸음 솜씨가 야속하게 느껴질 만큼, 다가 오던 우체통이 그의 목전에 와 닿을 때마다 외면하고 끝내 지나칩니다. '다음 우체통에 넣도록 하지. 아직 수거 시간이 남았으니까.' 그는 이러다가 평상에서 결코 닿아 본 적 없는 먼 지점까지 와 버립니다. 그리고 거기서 마주친 한 임시직 종사 소녀로부터 unlikely한 충고를 듣습니다.


"간절히 그것을 바란 적이 있으세요? 이루어 질 수 있다니까요."


여태 아내 모린으로부터 일상의 사소한 일에까지 승낙을 들은 후에야 모종의 실행에 나섰던 그는, 소녀의 이 차분한 넋두리를 벽력 같이 영혼을 때라는 계시(?)로 인지하여, 터무니없는 순례를 걸어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물론 아파 죽어가는 퀴니에게로 향한 것입니다. "살아 있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내가 도착할 때까지 살아 있으라고."


우리는 노인의 결심이 언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 그는 일단 편지부터 부치고 여행을 결행하지 않았을까요? 집에 돌아가서 여장을 꾸린다든가 하는 일은 그 자신의 작중(作中) 해명을 통해, 그 불가한 사유를 우리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알지도 못한 채로 며칠을 보낼 수 있는데, 그는 선착의 통보도 없이 기약도 없는 출발부터 무작정 하고 봅니다. 다음으로, 그는 병자를 보겠다면서, 가능한 한 가장 빠른 교통편을 챙길 생각은 하지 않고, 시간의 경과로 이미 상대를 산 채로 만나지 못 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도보편을 선택합니다. 그 길은, 우리 식으론 아마 목포에서 함흥 정도까지의 거리인 800km, 이천 리에 달하는 거리입니다. 이 길을 걸어서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가 전주에서 영흥으로 엑소더스를 결행할 때는 최소한 사회적, 정치적 압박이라는 외부 추동력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 해럴드 프라이 노인은, 그저 영혼의 충격 하나만으로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감행하려 합니다.


그 배경과 내심에 희극적 요소나 정신병리학적 색채가 없다 뿐이지, 상식과 제약 조건에 비추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이런 순례에의 출발은, 마치 문호 세르반테스의 "아들'" 돈 키호테의 그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나이가 좀 많다 뿐, 그의 정신은 아직 맑습니다. 오히려 그 도덕적 건강성은 여느 젊은이 못지 않게 고양된 상태죠. 그 는 돈 키호테 못지 않게, 그 긴 여정의 사이사이에 참으로 많은 이들과 그 사연을 만나게도 되며, 이 "있을 법하지 않은" 순례를 구경하는 우리도 덩달아, 갖은 인간 군상의 곡절과 미묘한 심리 일단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세일즈맨으로 평생을 살아 왔습니다. 세일즈맨이 무엇입니까. 성공하고 인정 받건 그렇지 못하건, 불특정 고객의 마음에 들어야 그 생존 최소 조건이 실현되는 부평초 같은 인생입니다. 남의 "예스"를 거 치지 않으면 존재가 부정되는 직종입니다. 이래서, 아서 밀러의 "아들" 윌리 노먼은, 직장에서 번-아웃되고 모기지 상환으로 솔드-아웃된 자신의 운명에 절망하여 처량한 죽음을 맞게 되었던 거죠. 우리의 해럴드 프라이 씨는, 말하자면 예정된 추락과 퇴장을 거부하고 반대편을 주시하며 일어서되, 호기나 광기에 의존하지 않은 채 로키 발보아의 정제된 오기로 기적을 꿈꾸는 오디세이를 시작하는 중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주인공이고 싶지만, 결국 대부분은 초라한 단역으로 소모되어 정해진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처분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해럴드 프라이는, 슬프고 부당한 소식을 눈과 영혼으로 접한 후, 그저 해럴드 프라이 자신이 과연 원래 누구였으며, 여태 무엇이었는지 그 하나만 확인하러, 산 채의 동료 퀴니를 만나야겠다는, 기이하나 건강한 확신으로 무장한 채 도보 순례를 떠납니다. 저는 그 결말을 현재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 모르는 분들은 이 잔잔하고 다정한 장편에의 순례를 통해 영혼의 정화와 함께 그 호기심을 충족하는 건 어떨지 권해 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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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죽기로 결심하다 - 어느 날 문득 삶이 막막해진 남자들을 위한 심리 치유서
콘스탄체 뢰플러 외 지음, 유영미 옮김 / 시공사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죽기로 결심한 남자가, 우리 곁 아니라 먼발치, 나아가 TV 등 미디어에 그 소식이 잠시 비치기만 해도, 전혀 안면이 없을 우리들조차 가슴이 철렁합니다. 얼마 전 비극적인 사건이 실제 있기도 했었거니와, (이 책 본문에 나오듯) 자기 인생의 절정기에 있을(혹은, 있어야 할) 40, 50대의 남성이, 가장 극명한 패배와 좌절의 징표인 "자살"을 선택했다면, 설사 전혀 친분이 없는 입장이라 해도, 인간 일반으로서 갖는 공감의 주파대역이 있기에, 뭔가 안타까움, 당혹스러움, 나아가 (나에게도 혹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비록 그 나이는 아니라도- 하는) 경계심이 들기도 합니다.


이 책은 제목이 얼핏 비치는 인상처럼, 특정인이건 남자 일반이건 그의 자살에 대한 일반론을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확정인증, 자살로 가는 직전 단계인, 우울증, 그 중에서도 남성 우울증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이에 대한 진지하고 진솔하며 실용적인 해결책들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자살로 향하는 가장 흔한 직전 스텝이 우울증이고, 우울증에 이르는 매우 흔한 관문이 "번아웃 증후군(= 능력 소진, 탈진 신드롬)"이라는 게 이 책의 입장이므로, 직장과 가정에서 여러 이유로 심리적, 감정적 한계 상황에 몰린, 왠지 그간 발휘해 온 활력과 기능의 한계점을 절감하고 있는 40, 50대 남성들이 독자로서 꼭 접했으면 하는 게 이 책의 집필, 기획 의도인 것으로 보이므로, 한국어 번역 제목이 저렇게 붙여진 모습은 적절해 보입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표지에 나와 있듯, maenner weinen nicht 입니다. 해석하면, "남자는 울지 않는다."가 되겠습니다. ("남자"는 대표복수로서 "남자들, 남자 일반"의 의미입니다) 7페이지 중간쯤에 나온 문장을 보면, 마치 <남자,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문구가 책의 원제목과 일치하는 번역인 것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합니다만, 이 책의 독일어 원제목은 본문 169페이지(아래에서 10째줄)에 나오듯, 우리말로 "사나이는 울지 않는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성 우울증은 발병 후 다양한 신체 질환(정신 질환은 물론이고)을 크고 작은 방식으로 유발하며, 이 책 처음인 p17, 마지막인 p273 이하에 나오듯, 건강하고 의지 굳은 남성이든 그렇지 않은 쪽이든 가리지 않고, 죽음이라는 결과로 몰고 가곤 하는, 치사율이 매우 높은 병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울지 않으려고 애쓰던 사나이, 참고 참다 치명적인 우울증에 걸리고 말다."로 해석해도 되겠습니다.


솔 직한 말로, 우울증이 과연 병인지에 대한 확고한 사회적 합의도 아직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하물며, 그 병의 보유자가 남성인 경우에는, 이를 일소에 붙이거나, 의지의 부족 따위로 가볍게 보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설사 남성이 강한 의지로 세상의 모진 풍파를 헤쳐 나가는 자세가 당위(sollen.當爲)라고 하더라도(이 책의 입장은 정반대입니다. 앞으로 논급해 보겠습니다), 이미 그 남성들이 속한 사회에서 숱한 자살자가 발생하고, 그것이 일관된 흐름과 지속성, 현상적인 현저성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런 당위는 이미 존재 기반을 상실한 것입니다. 원칙과 명분("나는 남자다워야 해!")을 지키려다 장렬히 전사(?)하기보다는, 전사(戰士)의 체면이 다소 손상되더라도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 나아가 그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중한 감정과 유대관계를 보전하는 편이 현명한 선택이자, 본질적인 의무 아니겠습니까?


이 책은 독일인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책입니다. 독일의 사회적 분위기는, 여타의 서유럽 선진국의 그것과 다소 차이 나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의 선입견과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남자들이 마초적 개성을 가진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학교나 직장에서의 분위기도 이를 조장하는 편입니다. 또한 생산 현장에서의 직분 수행에 대한 프레셔도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이러다 보니, 이 책 74페이지에 나오듯, 남자들의 번-아웃 증후군이 사회 문제화가 되기에 이릅니다. 저자들의 표현처럼, "미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이 용어(번-아웃 증후군)이, 미국에서보다 독일에서 더 널리 쓰일"  정도였죠. 남성 우울증에 대해 정보 혹은 처방과 바른 인식을 얻기 위해, 의학, 생리학, 사회심리학 분야에서 최첨단의 발전을 달리는 미국에서 나온 책이 아닌, 이 독일인 저자들의 책을 읽게 되는 것도 이 점에서 분명한 정당성이 생기는 셈입니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나이는 울지 않는다!" 이 문장이 결국 이 책의 핵심입니다. 저자는 (이 책 p25 : 7에 나오듯)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우울증은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고 동일한 비율로 발생할 뿐이라고 합니다. 독일에서도 공식 통계 지표는, 여전히 남성 우울증의 유병률이 여성의 그것보다 2~3배 높다고 하지만(이 팩트는 이 책 여러 군데에서 자주 나옵니다), 볼퍼스도르프 등 많은 남성 우울증 전문가들 은 이를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국가 통계에 그처럼 거침 없는 불신의 의사 표현을 하려면, 학문적 근거와 확고한 신념이 뒤따라야 할 텐데요. 저자들은 그러한 논지를 다양한 사례의 제시와 설득력 있는 논증을 통해, 대체로 자분자분한 어조로 책에서 펼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면, 남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그릇된(!) 강박 관념을 버리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며, 혼자 지고 있는 짐은 가능한 한 가족이나 친우, 동료와 나누어야 한다는 게 핵심입니다. 또한 이를 위해, 항우울제 처방, 복용을 통한 화학적 치료에 주저함이 없어야 하고, 세라피스트를 통한 심리 치료를 병행하여야 하며, 재발률이 워낙 높은 만큼(이 책에서 계속 인용되고 있는 st. pauli 소속 안드레아스 비어만처럼) 임의로 치료를 중단할 게 아니라 꾸준히 지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물이 항(抗)우울 효능을 보려면 어떤 기제를 통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상식으로는 어디까지나 정신 문제일 것만 같은 우울증이, 몇 가지 약물을 복용 혹은 주입한다고 해서 호전을 보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저자들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몇 가지 호르몬들의 생성과 분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울증이라고 통일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병에 걸린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세 가지 호르몬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장애와 비정상 상태를 노출합니다.

㉠ 세로토닌 - 이 호르몬은 요즘 각종 저서에서 그 제목이나 주제어로 많이 노출되었으므로 익숙한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별명이 "행복 호르몬"이고, 그 중요성을 이 책의 저자들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 노르에피네프린 - 이 책에서는 노르아드레날린이라고 표기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책에 없는 내용을 좀 적어 보자면, 이 호르몬은 스트레스 호르몬인데, 정상인이라면 긴장과 행동 통제가 수시로 이루어져야 하므로, 이 호르몬의 분비도 원활히 이루어져야 생존에 위협이 되는 "방심 상태"를 피할 수 있습니다(책을 읽으시는 분들은, 왜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와야 한다는 걸까, 그 반대가 아니고? 하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들은 마음에 생긴 상처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의식 혹은 무의식의 경로를 통해 결국 스트레스호르몬의 유통을 차단하기에 이르는데, 스트레스호르몬이 작용하지 않으면 결국 주의력 결핍 장애를 유발하여, 생존에 크나큰 위험이 근접해도 이에 대한 적당한 방비를 세우지 않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도파민- 이 호르몬은 과다 분비되었을 경우 조증(躁症)을 초래합니다. 우울증은 조증의 반대이니, 결국 이 도파민의 과소 분비가 우울증과 밀접 관련이 있다는 건 당연하겠습니다.


책 은 이어서, 왜 남성 우울증이 더 위험한가의 문제와, 남성 우울증은 여성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저자들(뢰플러와 바그너는 둘 다 여성입니다)의 진단에 의하면, 남성은 자신의 결점과 한계를 자발적으로,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에 무척 무능하며, 바로 이 점이 우울증의 치유를 더 심각한 양상으로 방해하고, 병의 발생을 촉진하며(저자들은 통계 수치와는 정반대로, 남성의 발병률이 오히려 더 높다고까지 주장합니다), 그 결과도 더욱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우울증이란 여성의 전유물에 불과해!"이기는커녕, "우울증이야말로 남성 질환이야!"를 주장하는 셈이죠. 남성 우울증의 특징은, ⓐ슬픔ⓑ화/공격성ⓒ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경향(예를 들어 폰 빙엔)이라고 하는데, 현대에 와서는 여기에 ⓓ사회적 지위 하락ⓔ적대감(노골적 혹은 암묵적)ⓕ걱정과 슬픔을 부인하는 태도가 추가(예를 들어 윌리엄 폴락의 입장 같은)된다고 합니다. 이 중 와 ⓔ는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겠고, ⓒ는 주로 중독 증상의 발현, ⓕ는 과잉보상으로 나타나는 게 서로 차이라면 차이이겠습니다.


저 는 이 책을 읽는 중 두 가지의 이미지가 교차하여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희대의 전쟁광 히틀러의 경우입니다. 그는 대단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성인이 되어서도 변변한 성취를 이루지 못한 채 잦은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이러한 상흔이, 그에게 남성 우울의 전형적 증상을 불러일으켰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습니다. p68에 인용된 코미디언 부슬러의 말을 보십시오. "우울한 여성은 게걸스레 음식을 먹거나 쇼핑을 나간다. 우울한 남성? 그는 전쟁을 꿈꾼다." 전 독일과 유럽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 넣은 그의 악행을 생각하면 소름끼칠 만큼 정확한 말입니다. 그의 얼굴을 보십시오, 지독히도 우울한 병적 표정이 그대로 새겨져 있습니다.

다 른 하나는 독일과의 전쟁 중 조종하던 비행기의 격추로 사망한 생떽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술꾼입니다. 어린왕자가 사연을 묻자 술꾼은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술을 마신다고 합니다. 뭐가 부끄럽냐고 하니까 술꾼은 다시, "술을 마신다는 게 부끄러워!"라고 외칩니다. 이 책에도 나오듯, 알콜 중독은 우울증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어느 것이 선이고 후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닭과 달걀의 관계). 다만 우울증의 기본 속성, 요소인 ⓒ와 어떤 본질적 연계가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뿐입니다. 


번 역 관련 몇 가지 의문을 적어 보겠습니다, 대체로 이 책은, 쉽게 풀어 쓴 문장을 구사하고, 원문의 여성적인 문체와 어조를 잘 살려서, 읽기에 편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의학 사항을 서술하는 책이 이처럼 편하게 읽히는 건 흔히 보는 게 아닙니다.  다만 몇 가지는 눈에 거슬리는 게 있었습니다.

p76 아래에서 5째 줄에 보면, 허버트 프덴버라는 인명이 "번아웃 증후군"의 개념 창시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이름은 Herbert Freudenberger입니다(책에는 본문 등 어디에도 철자가 나와 있지 않지만, 제가 다른 경로로 확인을 했습니다). 그 발음은 '프로이덴버'가 맞습니다. 아마 역자는 이 철자를 fruedenberger 로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움라우트 우'가 되어, '위'로 발음되죠. p80에 보면,  로드 "슈"타이거라는 이름이 나오나, 이 사람은 독일인이 아니고 미국인입니다. 그의 먼 조상이 독일계이긴 하나, 그는 나면서부터 줄곧 미국에서만 성장한 인물이므로 독일식으로 저렇게 읽혀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로드 스타이거'가 정확한 발음이고 표기입니다.



Herbert Freudenberger는 잘 알려져 있듯 번아웃 증후군 용어의 창시자입니다. 그런데, 볼퍼스도르프는 그의 규정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면서, "번아웃이란 일종의 위조상표라고 맹공을 가합니다(p75). 그의 논지는, "번아웃은 그 문학적 환기의 면에서 뭔가 비장한 느낌을 주어 대중으로부터 애용되는 말이긴 하나, 과학적으로는 아무 실체가 없는 마케팅 용어"라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저 "위조 상표"가 과연 독일어 원어로 무엇이었을지 원서를 구해 알아 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이 리뷰에서 시원한 해명은 못 해드리는 게 유감입니다. "명칭사기"라는 뜻을 가진 독일어로 Titelbetrug라는 말이 있기는 합니다. 저는 혹시 이 말이 원 텍스트에서 사용되지 않았을까 짐작했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이 시점까지 사실 여부를 알 수가 없네요.



이게 번역의 문제인지, 아니면 독일어 원 텍스트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몇 가지 지적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p26의 3~4째줄을 보면, 1.3% 증가한 비율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1.3%가, 아마도 1.3%포인트의 미스프린트가 아닐까 짐작이 되는 거에요. 문맥상, 1.3%의 증가라면, 그렇게까지 저자(혹은 누구라도)가 염려스러운 투로 거론할 수치(數値)는 아니거든요. % %포인트(퍼센트포인트)의 차이는 다들 아시는 바이므로 생략하겠습니다.

p163 에서는, "일란성 쌍둥이의 어느 한쪽이 우울증에 걸렸을 경우, 다른 한쪽마저 걸릴 확률은 50%에 달한다."고 하면서, 이상하게도 결론은 "우울증에는 유전과 환경 모두 영향을 미친다."는 모호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확률은 이른바 조건부 확률로서, 아무 조건이 부가되지 않았을 경우 10%가 채 되지 않을 확률이 갑자기 5배로 뛴다면, 조건과 결과(통계학 용어로는 사건이리고 합니다) 사이에는 대단히 밀접한 상관관계(통계용어로 종속이라고도 합니다)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팩트를 논거로 사용하는 중이라면, "우울증에는 유전 소이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해야 논리적 서술이 됩니다. p165 : 4 에는 정반대로, "우울증은 결국 외부적 환경(非유전 소인)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며, 앞에서 애써 제시한 통계학적 스터프를 별 소용 없는 걸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건 저자가 치밀한 저술 준비를 하지 않고 절충적으로 써 내려갔다는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책 의 공저자는 저기 보시는 대로, 2인의 의료 전문 저술가와 진짜 의학박사인 만프레드 볼퍼스도르프 3인 공저로 되어 있습니다만, 마지막 인물은 어찌 된 일인지 책 중에서 단 한 번도 1인칭으로 표시되지 않고, 제3자로서의 인용으로만 계속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볼퍼스도르프가, 정식으로 집필 과정에 관여하지 않고 감수자 정도의 역할에 그쳤던 데서 비롯하지 않나 짐작하게 합니다. 어디까지나 제 짐작일 뿐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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