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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의 법칙
전광섭 지음 / 작가와비평 / 2013년 6월
평점 :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할게요. 회사원 재호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나, 서울 시내 소재 대학을 졸업하고 버젓한 외모를 지닌 회사원입니다. 일솜씨가 아주 빼어난 것도 아니고, 탁월한 특기가 있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무난히 맡은 일을 잘 처리하며, 다소 내향적인 스타일로 보이는 그가, 중견 제화 기업의 오너의 딸과 연인 관계라는 점으로부터, 아마 이 주인공 재호가 (소설 속에서는 분명히 드러나진 않지만) 평균을 상회하는 외모의 소유자인 것 같습니다(차를 잃어버리고 2차를 한 업소를 찾아갔을 때, 접대부가 냉랭하게 대했다는 걸 보면 그렇다고 연예인급은 아니었나 봐요. 물론 그쪽 업계 종사자의 인성을 고려해야 하지만).
재호는 어느 날부터인가, 자기가 소지한 물건이 하나 둘 없어진다는 걸 깨닫습니다. 사라지기도 하고, 엉뚱한 장소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이 점이 결말과 진상에의 힌트죠). 스마트폰을 잃고서는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무턱대고 허둥댄다거나 아예 망각의 힘을 빌린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냉정하고 분석적인 성향의 그는, 치밀한 논리를 동원해서 그 원인을 캐려고 애를 씁니다. 때로 회사 동료인 영표의 도움을 청하기도 하는데, 이 소설에서 주인공 재호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동료인 그는, 처음에도 유용한 조언을 해 주고, 소설의 절정에서 (읽는 독자를 안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마지막까지 소설의 의미를 캐치하는 데 기여를 합니다. 오히려 별 존재감도 없는 여자친구보다 돋보일 만큼요.
재호의 일상에 큰 위기는 세 번에 걸쳐 찾아 옵니다. 하나는, 웬 동네 말썽꾼 녀석의 농구공 사건입니다. 농구공이 재호네 집 담을 넘어 들어왔고, 재호 역시 그 공을 보았는데,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진 겁니다. 재호는 애들이 알아듣도록 설명을 하지만, 그 중 한 아이(또래에 비해 체격도 크고 성질도 있으며 까탈스러운 부친을 둔)는 재호에게 집요하게 항의합니다. 분명히 당신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간 공이고, 당신이 그 공을 발로 건드리는 모습까지 보았는데 딴소리냐. 그러나 재호는 재호대로, 자기가 인지하는 진상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믿으려 들지 않고, 몰래 재호네 집 대문에 손괴를 가하기까지 합니다. 제법 시일이 지나, 농구공은 언제나 자물쇠로 잠겨 있는 창고에서 발견됩니다. 비밀번호는 생각이 잘 나지 않은 데다, 식구들 중 누구도 자주 출입을 하지 않으며, 하물며 대단치도 않은 농구공을 애써 문까지 잠긴 곳에 숨겨 둘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게 습관인(다소 비정상일 만큼이죠. 이는 그의 형이 대단히 고지식한 교사인 것로 미뤄, 집안의 내력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몹시 괴로워하니다.
느닷 회사에서 그는 상사(팀장)의 매서운 추궁을 받습니다. 팀장은 본디 성마르고 괄괄한 타입이지만, 이번엔 화를 내다 못해 재호에게 사표를 쓰라고까지 합니다. 재호는 이 일 자체가 사표를 쓸 만큼의 중대사는 아니라고 여긴데다(그렇긴 하지만 제 생각에는 무책임한 태도였고, 징계감은 충분히 되는 사안이었습니다), 두 달도 넘은 일을 왜 지금 와서 문제삼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이는 재호가 자기 합리화를 시도한다기보다, 그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성격임을 암시합니다). 신입사원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그는, 퇴근 시각 이후 다시 회사로 돌아가 약간의 재치로 구내 진입에 성공하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팀장과 전 직원의 PC를 공장초기화해 버립니다('포맷'은 부정확한 용어이므로 저는 피하겠습니다). 이 대목이 저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요. 나중에 재호의 생각으로도 드러나지만 이는 복수치고는 참 찌질한 수단입니다. 건조물 불법 침입에 손괴, 업무방해까지 저지른데다, 이미 CCTV 촬영이 이뤄지고 있음도 정보로 지니고 있음에도, 순간의 화를 못 이겨 오히려 자신에게 큰 피해를 가져올 짓을 벌인다는 게 말이죠. 그러면서도 단골 음식점을 찾아가 파스타를 즐긴다... 만약 제가 재호라면 더 치밀한 복수를 계획하거나, 적어도 그날 식사는 삼갈 것 같습니다.
세번째 시련은, 앞의 두 일이 어느 정도, 혹은 완전한 해피 엔딩, 해결(내용은 스포일러이므로 밝히지 않겠습니다)을 본 뒤에 벌어집니다. 물론 이 일 역시 좋게 해결되지만, 정신적 충격으로는 앞의 두 일 못지 않게 큰 영향을 남겼으므로, 전 이 사건을 세번째 시련으로 규정하고 싶어요. 애마 렉스턴(왜 이런 차를 좋아할까요? 제가 상관 할 일은 아니지만)이 갑자기 사라진 일입니다. 차가 갑자기 없어지는 건, ㄷ게이빗 카퍼필드의 마술쇼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더 좋게 매조지된 이 세 시련은, 마지막 사건, 영표에게서 빌려 온 캠코더로 창고를 촬영하고 나서 발견한 충격적 영상, 장면을 통해 다시 재호에게 주관적 위기로 다가와 그 절정에 달합니다. 그간 이상하게도 물건이 없어진다 싶더니, 캠코더에 찍힌 영상은 그 물건들이 제 멋대로 어둠 속에서 떠도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대체 이 놀라운 일을 누구에게 가서 밝힐까요? 언제나 냉정하고 현명하며 재호 못지 않은 논리까지 갖춘 캠코더 주인 영표는, 재호에게 분명한 진상을 차근히 알려 줍니다. 소설 내내 미스테리로 독자와 재호를 괴로혔던 진상은, 비로소 싱겁게 드러나고 맙니다.
재호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사물이 그 자리에 안정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가벼운 강박을 처음부터 지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갈릴레오가 발견한 물리계의 제 1법칙은 관성의 법칙입니다. 다른 우주에서의 사정이 어떠한지와는 무관하게, 우리가 발을 디디는 이 세계는 관성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재호를 괴롭히는 "관성의 반대"로서의 이동은 이 소설에서 크게 네 가지입니다. 1) 애인과의 결혼- 독신 생활에서(더군다나 그는 아직 부모 형제로부터 독립도 하지 않은 채입니다) 여자와 결혼, 자식까지 ?F는다는 일은 그에게 두려움으로 인지됩니다. 2) 직장의 이동- 애인의 집안은 장래의 사위가 중소기업의 영업사원이라는 신분을 마땅치 않아 하고, 사직 후 자신의 회사로 옮겨 올 것을 권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쌍수를 들어 환영하겠으나, 그는 자존심, 자립심이 강한 타입이라, 설사 비전이 부족하다 해도 나름 열의를 들여 수 년 간 공을 들인 직장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3) 정보의 이동을 통한 신뢰와 질서의 붕괴- 재호의 대사를 통해서도 암시되지만, 이 세상은 능력과 노력을 발휘해서 실적을 올리고, 그 결과에 따라 승진(일종의 이동입니다)이 이뤄져야 합니다. 아니면 세상은 붕괴의 위험에 놓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서를 아주 정면으로 배반하는. 파렴치한 도둑질이 업계에서 벌어집니다. 재호는 전혀 뜻하지 않게(오히려 의사와는 반대로) 이런 산업스파이 행위로부터 자신의 회사(가 아니게 될 뻔도 했던)를 보호합니다. 이 사건은, 의도치 않은 "이동"을 겪었던 그의 상처를 보상이라도 하듯, 정보와 비밀을 반(反) 이동, 즉 관성으로 그 자리에 있게 한 재호의 "무의식적" 공헌이 컸습니다. 이동이 그에게 상처를 안겼다면, 이 관성은 그에게 큰 보상을 부여했습니다.
소설은 혹여 우리의 주인공을, 카프카적 파멸로 몰고 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독자를 내내 조마조마하게 만들다, 결국은 안온한 관성으로 마무리짓습니다. 그러나 싱겁다기보다는 안심이 되는 것이, 결국 이동은 뭔가 질서에의 교란이요, 관성은 우리가 안주할 질서인데, 그 이동의 법칙이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움직이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무의식의 장난일 뿐이었습니다. 재호는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았고, 우리 역시 초자연의 책동으로부터 우려를 놓습니다. 소설은 어떤 것이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네요.
오타가 있었습니다.
렉스턴를 → 렉스턴을 (187p 아래로부터 9째줄)
맞는다고 → 맞다고 (p191 맨아래)
저류를 → 서류를 (p157 아래로부터7째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