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즐거운 말을 먹고 자란다 - 아포리즘 행복 수업
김환영 지음 / 이케이북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아포리즘은 경구(의 모음)인데요. 처음에 책 소개에 아포리즘 책이라고 해서, 그리고 받아 본 책의 디자인이 너무 예쁘기도 해서 저는 달달한 내용만 가득 담긴 청소년용, 혹은 중년 주부용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예를 들어 <자기계발 대사전>에서 수록하고 있는 다양한 격언, 지침들처럼, 스스로를 다잡고 처세의 지침으로 쓸 만한 내용이 가득 담겨 있더라고요. 최근에 저는 <고수>라 는,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께서 쓰신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만, 그 책이 수필에 가까운 형식으로 처세의 원리를 친절히 해설해 놓고 계셨다면, 이 책은 아포리즘의 비중이 보다 강하고, 수록된 명언의 수가 더 많으며, 게다가 저자 김환영님의 평론, 의견 개진, 젊은 세대와 동시대인에 향한 충언이 가미되었다는 게 차이가 아닐까 해요.


다시 말해서 이 책은, 겉모습은 따스한 인생 가이드, 정서 함양에 좋을 말랑말랑 컨텐츠로 가득할 것 같은 인상이지만, 속 내용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입니다. "일침"에 가까운 뜨끔한 격언도, 저자 김환영 선생의 요긴한 코멘트와 함께 잘 담아져 있습니다.


전 세계 다양한 출처,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인, 혹은 익명의 입에서 나온 여러 명언들은, 가능한 경우에는 그 언어의 원형이 함께 제시되어 있습니다. 서양의 경우 편의상 영어로 대체되어 있기도 합니다. 특히 저는, 아포리즘을 읽으면서 영어 공부도 함깨 할 수 있는 점이 무척 좋았습니다.



책 p24에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말이 실려 있습니다.

"사랑 빼놓고는 모두 바꿔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 같지 않으세요? 회장님께서 아주 창의력이 뛰어난 분은 아니셨군요, 최소한!


제가 좋아하는 경제학자(모든 저작에서 냉철하고 도덕적인 서?D에 곁들여, 위트와 유머를 잊지 않으시는 분이죠)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명언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책 그 다음 페이지에 나와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는 것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중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증명이란 얼마나 어렵습니까? 영어에서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prove it!'이죠, 못 하면 앞으로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후자를 선택한다."


마음을 바꾼다는 것, 기존의 어리석은 실수를 흔쾌히 인정하고 들어가는 일을,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가장 꺼려한다는 뜻이겠습니다. 체면이 깎이고 자존심을 상하느니 차라리 생고생을 사서 하겠다는 말이죠. 저부터도 이런 자세를 갖지 않도록 정진해야 할 것 같아요.


조직과 개인에 대한 재미있는 말도 있습니다. 49p입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경쟁은 반목을 낳고 사기를 저하시키지만,

조직과 조직 사이의 경쟁은 사기를 진작하고 창의성을 고무한다."


하지만 이 말이 무한정으로 적용 가능, 타당한 건 아니겠습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처럼, 중재자가 없거나 포괄적 룰이 합의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지난 세기의 역사에서 보듯 전쟁으로 치달을 위험도 상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에 읽은, 이숲의 <스무 살엔 몰랐던 내한민국>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정월 대보름을 즈음해서 세시 풍속의 일환으로, "석전"이라고 불리는 패싸움을 즐겨 했다는군요. 건전한 상식이 부재한 형편이라면, 조직이건 개인이건 그 경쟁이 반드시 건설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참고로 위의 저 말은 서양인의 명언인 것 같기는 하나, 김환영 선생은 출전을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p53에 보면 오히려 조직 무용론 같은 입장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조직은 참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조직이 뭔가 위대한 일을 하려면, 위대한 개인을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다."


이 말은 미 육참총장, 국무장관을 역임한 콜린 파월의 말입니다. 저자 김환영은 "이 말에는 다소 과장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뿐 아니라 책 전체에 소개된 명언 여럿을 두고 김환영 선생은 이 점을 지적하는데, 수사(레토릭)은 속성상 본디 과장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과장 없이는 멋진 말이 안 나오니까요.


사랑에 대해 프랑스의 작가 앙리 드 몽떼를랑의 말도 좋습니다. p61입니다.

우리는 무엇무엇 때문에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무엇무엇에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한다.

논리적으로 두 진술을 양립하기 힘들지만, 두 진술은 저렇게 나란히 붙어 있을 때 더 그 진가를 크게 발하네요.


훌륭한 사람의 말만 실린 게 아닙니다. 깡패의 명언(?)도 있습니다. (p65)

"상냥한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에 칼과 총이 덧붙여졌을 때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알 카포네)


이 책에는 없습니다만, 카포네보다 한 40살 정도 더 먹은 귀족 정치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죠.

"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 you will go far." (말은 상냥하게 하되, 큰 몽둥이를 하나 지니고 다녀라. 멀리멀리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아프리카 속담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사파리를 무척 즐겼다고 하니까요.


이 책의 좋은 점은, 책 뒤에 인덱스가 따로 실려 있어 사람 이름을 찾아 보고 싶을 때 쉽게 활용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멋진 말 유식한 척 인용하면 폼 나겠다 싶을 때, 이 책 하나 있으면 효용이 쏠쏠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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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 태양과 청춘의 찬가
김영래 엮음 / 토담미디어(빵봉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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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떤 점에서는,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만 말하는 존재이므로, "이 사람이 모년 모월에 무엇을 했고, 하는 식의 서술은, 오히려 평전의 포맷으로 부적합할 수도 있습니다. 이 작가(혹은 시인), 이 연도에 이런 작품을 썼는데, 그 중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문인에게는, 그를 두고 평전을 써도 이런 형식으로 쓰는 게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도 듭니다.


알베르 카뮈는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지만, 고전의 운명이 흔히 그렇듯 안다고 착각하기에, 의외로 잘 안 읽히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근 고전 르네상스 바람이 나름 불고 있고, 최근 문학동네에서 이기언 교수의 번역으로 (제목도 색다르게) <異人>으로 번역되어 나온, 그리고 호세 무뇨스가 작업한 일러스트판이 나오기도 한 <L'Étranger>의 경우에서 보듯, 카뮈의 인기는 한국에서 여전합니다.


좀 나이 든 세대에게 여쭤 보면, "카뮈는 시원찮고, 사르트르가 더 천재고 더 화끈하다."며 그를 평가절하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사실 아주 유치한, 이념의 스펙트럼을 무식하게 짜 보자면, 말로가 맨 오른쪽(나중에 드골에게 '부역'했으니까요), 카뮈가 중간 쯤(그는 여튼 노벨상도 기분 좋게 받고, 부르주아지에 대해 어느 정도 타협적인 스탠스였죠), 그리고 완전 과격파를 일단 잊자면, 사르트르가 왼쪽에 놓이는 게 맞긴 하죠. 실제로 (이 책에도 나오지만) 카뮈는 가난한 집안(게다가 알제리라는 식민지) 출신에다 학교 교육도 변변히 못 받은 사람이지만, 사르트르는 '빠히' 고등사범 수석인데다 확실한 좌파였으니까요. 근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사르트르 책은 보는 분이 잘 없던데, 카뮈는 이처럼이나 여전히 읽힙니다. 이는 어느 정도, 시대를 초월하여 카뮈가 더 큰 보편성을 획득했다는 증거 아닐까 합니다.


책은 1부, 2부, 3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1부는 10개의 키워드(라고 썼다가 카페 분위기가 생각나서 열쇳말로 고칩니다)를 먼저 제시하고, 그 각각의 키워드에 맞는 다양한 출처의 카뮈 어록, 인용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키워드는 임의적인 게 아니라, 카뮈 자신이 어느 인터뷰에서 직접 거론한 것이랍니다(어느 인터뷰인지는 저자 김영래님도 모르시고, 심지어 카뮈 자신도 모릅니다. 인터뷰라고 해서 매체와의 인터뷰를 꼭 지칭한다는 법도 없고, 누가 그냥 지나가다 물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 하지만 이 열 개의 주제어가, 카뮈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관통하는 개념, 이데아임은 분명합니다.


1부, 열 개의 거울에 비춰 본 카뮈는 이런 인용문을 제시하고, 그 출처를 각각 말미에 밝혀 놓습니다(대부분 <작가수첩>이 출처입니다). 어떤 구절, 잠언은 그 말을 한 연도만 표시되어 있고, 출처가 없는데요. 이런 경우는 앞의 것과 출처가 같다는 뜻입니다. 계속 같은 출처가 이어지다가 바뀌기 직전에는, 다시 문헌이나 작품 제목을 명기해 주는 작가님의 센스가 돋보입니다. 빠짐 없이 같은 말을 다 적으면 독자도 괜히 피곤해지거나 산만해지죠.


2부 카뮈를 읽다라는 제목입니다. <이방인>과 <페스트>, 그리고 그 주옥 같은 명편인 <시지프의 신화>에서 핵심 부분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방인>은 몰라도, <페스트>는 사실 굉장히 깁니다. 저 같은 게으른 독자는 아무리 카뮈와 이 작품이 위대하다 해도, 중학교 그 시절은 물론 지금도 끝까지 꼼꼼히 읽어 낼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독자에게, 이런 편집과 구성은 사실 아주 고마운 서비스입니다. 마치 공부 안 한 수험생에게 은밀히 건네지는 족보처럼요. 책 이름은 프랑스식으로 <시지프..>이고, 그 안의 장 이름은 그리스식으로 <시시포스..>인지 저는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3부카뮈를 만나다입니다. 그 가 행한 노벨상 수락 연설, 가난한 소년을 세계적인 문호로 키운 은사 장 그르니에에게 보낸 서신과 답장(아것들만 뽑아 펴 낸 책도 국내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저자 김영래 시인께서 많이 참고하신, 이 분야 대가  김화영 선생의 번역으로 도서출판 책세상에서 나왔죠) 끝에는 김영래 님이 적은 간단한 연대기도 있습니다.


읽어 보면 "이게 정말 다 한 사람의 입과 머리에서 나옴?" 같은 놀라움이 절로 일게, 진심 주옥 같은 명언으로 가득가득합니다. 정말 놀랄 만큼이죠. 뭐 물론 하나하나 다 전폭 공감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 대한 그의 입장 같은 것입니다.... 제가 요즘 헤세의 <싯다르타>를 다시 읽어 보면, 서양인이 바라보는 부디즘, 불교란, 정말 "허무주의" + "기 수련 모임" 그 이상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카뮈도 마찬가집니다. 불교를 두고 "종교로 변한 무신론"이라고 합니다만, 사실 동양의 불교는 유신론/무신론의  이분법을 멀리 초월해 있는 종교죠. 그 심원함은, 기독교가 자체적으로 규정하는 "종교"의 협소한 틀을 훨씬 초월합니다. 서양인의 관점에서는 불교가 종교도 아닌 것 같고, 무신론의 변형으로 보이겠지만, 불교는 기독교보다 더 오픈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일견 무신론이기도 하면서 더 큰 섭리/진리를 긍정하므로 유신론이기도 합니다. 카뮈의 이런 해석은 역시 이 문제에 한해, 서양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뭐 이런 걸 읽으면, 좀 깬다 싶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알던 모든 문호들, 사상가들은 지금 성숙한 눈, 메타적 시각으로 보아 어렸을 때 그 경외의 눈으로 대하던 그만큼의 크기는 아닙니다. 마치 <큰바위얼굴>에서 어네스트가 느끼는 그런 감정과도 비슷하게요. 시인 김영래 선생은, 그러나 영혼의 큰 비중을 이 카뮈로 채우고 일생을 살아 온 분 같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인용으로 재구성한 연대기 앤솔로지를 지을 엄두가 나지 않을 테니까요. 덕분에 우리도, 다른 사람의 평가나 해석이 개입되지 않은 채의, 순전히 카뮈 자신의 입으로만 말하는 생각들의 크로니클을 이렇게 편한 포맷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사태의 발전, 경과를 파악함에 있어서, 그 시계열적 배열이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해 왔는데요. 연대순으로 이렇게 짜여진 구성 덕분에 "요약된 한 편의 전기나 평전을 읽는 기회"를 정말 멋지게 가져 본 것 같습니다. 시인께 감사를 드리고요. 하지만 어려서 읽던 그 숱한 대문호의 고전문학을, 여전히 순수 경모의 스탠스로 바라지 못 하는 게 순수성의 상실, 혹은 영적 타락의 탓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카뮈와 잠시 거리를 두고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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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의 법칙
전광섭 지음 / 작가와비평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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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할게요. 회사원 재호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나, 서울 시내 소재 대학을 졸업하고 버젓한 외모를 지닌 회사원입니다. 일솜씨가 아주 빼어난 것도 아니고, 탁월한 특기가 있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무난히 맡은 일을 잘 처리하며, 다소 내향적인 스타일로 보이는 그가, 중견 제화 기업의 오너의 딸과 연인 관계라는 점으로부터, 아마 이 주인공 재호가 (소설 속에서는 분명히 드러나진 않지만) 평균을 상회하는 외모의 소유자인 것 같습니다(차를 잃어버리고 2차를 한 업소를 찾아갔을 때, 접대부가 냉랭하게 대했다는 걸 보면 그렇다고 연예인급은 아니었나 봐요. 물론 그쪽 업계 종사자의 인성을 고려해야 하지만).


재호는 어느 날부터인가, 자기가 소지한 물건이 하나 둘 없어진다는 걸 깨닫습니다. 사라지기도 하고, 엉뚱한 장소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이 점이 결말과 진상에의 힌트죠). 스마트폰을 잃고서는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무턱대고 허둥댄다거나 아예 망각의 힘을 빌린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냉정하고 분석적인 성향의 그는, 치밀한 논리를 동원해서 그 원인을 캐려고 애를 씁니다. 때로 회사 동료인 영표의 도움을 청하기도 하는데, 이 소설에서 주인공 재호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동료인 그는, 처음에도 유용한 조언을 해 주고, 소설의 절정에서 (읽는 독자를 안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마지막까지 소설의 의미를 캐치하는 데 기여를 합니다. 오히려 별 존재감도 없는 여자친구보다 돋보일 만큼요.


재호의 일상에 큰 위기는 세 번에 걸쳐 찾아 옵니다. 하나는, 웬 동네 말썽꾼 녀석의 농구공 사건입니다. 농구공이 재호네 집 담을 넘어 들어왔고, 재호 역시 그 공을 보았는데,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진 겁니다. 재호는 애들이 알아듣도록 설명을 하지만, 그 중 한 아이(또래에 비해 체격도 크고 성질도 있으며 까탈스러운 부친을 둔)는 재호에게 집요하게 항의합니다. 분명히 당신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간 공이고, 당신이 그 공을 발로 건드리는 모습까지 보았는데 딴소리냐. 그러나 재호는 재호대로, 자기가 인지하는 진상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믿으려 들지 않고, 몰래 재호네 집 대문에 손괴를 가하기까지 합니다. 제법 시일이 지나, 농구공은 언제나 자물쇠로 잠겨 있는 창고에서 발견됩니다. 비밀번호는 생각이 잘 나지 않은 데다, 식구들 중 누구도 자주 출입을 하지 않으며, 하물며 대단치도 않은 농구공을 애써 문까지 잠긴 곳에 숨겨 둘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게 습관인(다소 비정상일 만큼이죠. 이는 그의 형이 대단히 고지식한 교사인 것로 미뤄, 집안의 내력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몹시 괴로워하니다.


느닷 회사에서 그는 상사(팀장)의 매서운 추궁을 받습니다. 팀장은 본디 성마르고 괄괄한 타입이지만, 이번엔 화를 내다 못해 재호에게 사표를 쓰라고까지 합니다. 재호는 이 일 자체가 사표를 쓸 만큼의 중대사는 아니라고 여긴데다(그렇긴 하지만 제 생각에는 무책임한 태도였고, 징계감은 충분히 되는 사안이었습니다), 두 달도 넘은 일을 왜 지금 와서 문제삼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이는 재호가 자기 합리화를 시도한다기보다, 그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성격임을 암시합니다). 신입사원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그는, 퇴근 시각 이후 다시 회사로 돌아가 약간의 재치로 구내 진입에 성공하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팀장과 전 직원의 PC를 공장초기화해 버립니다('포맷'은 부정확한 용어이므로 저는 피하겠습니다). 이 대목이 저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요. 나중에 재호의 생각으로도 드러나지만 이는 복수치고는 참 찌질한 수단입니다. 건조물 불법 침입에 손괴, 업무방해까지 저지른데다, 이미 CCTV 촬영이 이뤄지고 있음도 정보로 지니고 있음에도, 순간의 화를 못 이겨 오히려 자신에게 큰 피해를 가져올 짓을 벌인다는 게 말이죠. 그러면서도 단골 음식점을 찾아가 파스타를 즐긴다... 만약 제가 재호라면 더 치밀한 복수를 계획하거나, 적어도 그날 식사는 삼갈 것 같습니다.


세번째 시련은, 앞의 두 일이 어느 정도, 혹은 완전한 해피 엔딩, 해결(내용은 스포일러이므로 밝히지 않겠습니다)을 본 뒤에 벌어집니다. 물론 이 일 역시 좋게 해결되지만, 정신적 충격으로는 앞의 두 일 못지 않게 큰 영향을 남겼으므로, 전 이 사건을 세번째 시련으로 규정하고 싶어요. 애마 렉스턴(왜 이런 차를 좋아할까요? 제가 상관 할 일은 아니지만)이 갑자기 사라진 일입니다. 차가 갑자기 없어지는 건, ㄷ게이빗 카퍼필드의 마술쇼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더 좋게 매조지된 이 세 시련은, 마지막 사건, 영표에게서 빌려 온 캠코더로 창고를 촬영하고 나서 발견한 충격적 영상, 장면을 통해 다시 재호에게 주관적 위기로 다가와 그 절정에 달합니다. 그간 이상하게도 물건이 없어진다 싶더니, 캠코더에 찍힌 영상은 그 물건들이 제 멋대로 어둠 속에서 떠도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대체 이 놀라운 일을 누구에게 가서 밝힐까요? 언제나 냉정하고 현명하며 재호 못지 않은 논리까지 갖춘 캠코더 주인 영표는, 재호에게 분명한 진상을 차근히 알려 줍니다. 소설 내내 미스테리로 독자와 재호를 괴로혔던 진상은, 비로소 싱겁게 드러나고 맙니다.


재호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사물이 그 자리에 안정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가벼운 강박을 처음부터 지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갈릴레오가 발견한 물리계의 제 1법칙은 관성의 법칙입니다. 다른 우주에서의 사정이 어떠한지와는 무관하게, 우리가 발을 디디는 이 세계는 관성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재호를 괴롭히는 "관성의 반대"로서의 이동은 이 소설에서 크게 네 가지입니다. 1) 애인과의 결혼- 독신 생활에서(더군다나 그는 아직 부모 형제로부터 독립도 하지 않은 채입니다) 여자와 결혼, 자식까지 ?F는다는 일은 그에게 두려움으로 인지됩니다. 2) 직장의 이동- 애인의 집안은 장래의 사위가 중소기업의 영업사원이라는 신분을 마땅치 않아 하고, 사직 후 자신의 회사로 옮겨 올 것을 권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쌍수를 들어 환영하겠으나, 그는 자존심, 자립심이 강한 타입이라, 설사 비전이 부족하다 해도 나름 열의를 들여 수 년 간 공을 들인 직장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3) 정보의 이동을 통한 신뢰와 질서의 붕괴- 재호의 대사를 통해서도 암시되지만, 이 세상은 능력과 노력을 발휘해서 실적을 올리고, 그 결과에 따라 승진(일종의 이동입니다)이 이뤄져야 합니다. 아니면 세상은 붕괴의 위험에 놓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서를 아주 정면으로 배반하는. 파렴치한 도둑질이 업계에서 벌어집니다. 재호는 전혀 뜻하지 않게(오히려 의사와는 반대로) 이런 산업스파이 행위로부터 자신의 회사(가 아니게 될 뻔도 했던)를 보호합니다. 이 사건은, 의도치 않은 "이동"을 겪었던 그의 상처를 보상이라도 하듯, 정보와 비밀을 반(反) 이동, 즉 관성으로 그 자리에 있게 한 재호의 "무의식적" 공헌이 컸습니다. 이동이 그에게 상처를 안겼다면, 이 관성은 그에게 큰 보상을 부여했습니다.


소설은 혹여 우리의 주인공을, 카프카적 파멸로 몰고 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독자를 내내 조마조마하게 만들다, 결국은 안온한 관성으로 마무리짓습니다. 그러나 싱겁다기보다는 안심이 되는 것이, 결국 이동은 뭔가 질서에의 교란이요, 관성은 우리가 안주할 질서인데, 그 이동의 법칙이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움직이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무의식의 장난일 뿐이었습니다. 재호는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았고, 우리 역시 초자연의 책동으로부터 우려를 놓습니다. 소설은 어떤 것이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네요.


오타가 있었습니다.

렉스턴를 → 렉스턴을 (187p 아래로부터 9째줄)
맞는다고 → 맞다고 (p191 맨아래)
저류를 → 서류를 (p157 아래로부터7째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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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가 답이다 - 당신을 둘러싼 모든 문제를 풀어줄 관계의 기술
켄 블랜차드 외 지음, 정경호 옮김 / 더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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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블랜차드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칭찬은 고래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은 그의 단독 저작은 아니고요. 신시아 옴스테드, 마사 로렌스 두 분 여성과 공저입니다. 올해 새로 나온 이 책은, 간단하면서도 명쾌하고, 따라하기 쉬운 자기계발서입니다.


언제나 그는 자신만의 내러티브 특기인, 우화를 통해 사물을 쉽게, 그리고 그 이면을 통찰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뉩니다. 1부에선 말하는 동물들(마치 둘리틀 선생 이야기나, 브레멘의 악단 같은 느낌입니다)이 등장하여, 우리에게 상징적인 설정으로 문제를 제기합니다.


베리힐 씨는 집에 여러 마리의 가축과 애완동물을 기르고 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이들 동물들을 무척 사랑하지만(7살 소녀 카일리와 갓난쟁이 빌리는 가끔 이들에게 고통의 원인이 되기도 하죠), 정작 가장 베리힐 씨는 동물들이 탐탁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이 위스커스와 개 우프는 싸움을 벌입니다. 둘은 평소에도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기어코 사소한 일을 빌미(우프가 위스커스의 꼬리를 밟습니다)로 큰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베리힐 씨는 이들 어리석은 동물들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한심한 고양이와 개 뿐 아니라, 이참에 동물들 모두를 갖다 버리려고 합니다. 동물들도 큰일이지만, 동물들을 아끼는 아내와 아 이들 역시 마음 졸여합니다. 이제 동물들은 뭔가를 보여 줘야 합니다.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는 걸 실증과 행동으로 분명히 표시해야 하고,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베리힐 씨는 이미 최후 통첩을 끝냈고, 부인과 아이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신뢰의 구축은 동물들의 몫이며, 누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 해 내야 할 과업입니다.


동물들은 그들만의 비대위(?)를 구성합니다. 일단 가장 말썽 많은 고양이 위스커스와 개 우프에게 다짐을 받아 내어야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뢰라는 게 어디 하루아침에 완성되겠습니까? 이 둘은 일단, 그들 자신 사이에 진정한 신뢰를 만들어야 하죠. 그리고 그 신뢰를, 바깥을 향해(특히 베리힐씨) 확증시켜야 합니다. 위스커스와 우프는 그나나 순탄치도 않은 과정, 때로는 더 심한 관계 악화까지 다 겪고 나서, 비로소 그들 사이에 신뢰를 완성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지도 않은 시련이 다가오네요. 베리힐 씨는 그 자신의 의지와도 관계 없이, 그 자신의 능력을 인정 받아, 좋은 포스트로 승진하게 된 것입니다. 근데 이 과정에서 베리힐 씨는 이사를 해야 하고, 새로운 거주지에서는 동물들과 동반한 삶을 살기가 적절치 않습니다. 기껏 어려운 과업을 해 내었더니, 이제는 외부에서 새로운 고난이 닥친 것입니다. 이는 내부자들의 의지만으로 어찌할 수 없고, 심지어 손에 닿은 모든 변수를 어렵사리 통제한다 해도 해결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동물들은 결국 해 내고(make it), 정든 인간 식구들과의 이별을 모면합니다. 이는 어찌된 일일까요? 답은 책에 있으니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조직이건 내부 불화, 내부 균열을 막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직장은, 서로 피 한 방울안 섞인 이들이 모여, 현실적인 이익을 취하기 위해 모인 집단입니다. 이익 사회, 혹은 2차 집단이라고도 하죠. 어느 직장이건 내부 성원 간의 불화와 알력이 있기 마련인데, 모든 조직의 일차 과제는 이를 화학적으로 치유하는 것입니다. 요증은 일시적인 봉합만으로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이 단계가 마치 이 우화의 위스커스와 우프의 다툼과 유사합니다. 그런데, 개별 성원 간의 다툼과 이견은, 경우에 따라 조직 전체의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습니다. 베리힐 씨가 거추장스러운 동물 전체를 청산해야겠다고 결심한 게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때 내부 신뢰를 다지기 위한 첫 단계가 바로 능력 있는 존재임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우프가 위스커스에게 어필한 것은 그저 말뿐인 아첨이나 감정적 제스처가 아니라, "내가 너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임"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우리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른 점이더군요. 블랜차드 할아버지는, 결국 '능력 없는 사람과의 신뢰란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고도 보입니다. 어찌 보면 참 냉혹해 보이지만, 이 책이 도덕 교과서가 아닌 자기계발 서적임을 감안할 때, 실리적인 해법을 제시했다고 봐야겠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보면, 이것저것 다 가능한 옵션이 있을 때, 신뢰를 쌓고 싶은 상대에게 가장 확실한 시그널을 보내는 방법은 "나에게 너를 도울 능력이 있음"을 보이는 것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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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애피타이저 달콤한 디저트 - 하나님 안에서 마음껏 날기 위한 기독 청년 매뉴얼
문상현 지음 / 베가북스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어쩌면 인생 자체가 이 말 하나로 정리될 수 있을 것도 같아요. 물론, 태어나면서부터 은수저를 물고 세상에 고고의 성을 울린 인생이라면 모르지만, 설사 그런 축복 받은 경우라도 학교생활, 사회생활을 겪으면서부터는 가정과는 다른 분위기로부터의 시련, ordeal, '시험'에 들 수도 있을 테니 말이죠.


에모리 대학은 미국 동부에서 명문으로 치는 오랜 사학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20년 전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홍구 씨 같은 분이 한국인으로서 이 대학의 동문입니다. 저 자 문상현 목사님은 감신대를 졸업하고, 석사를 이 에모리 대학에서 마치신 분입니다. 이 책에는 목회자의 길을 완성하기 위해, 머나먼 타국에서 힘든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따라가느라, 한편으로는 예수의 참된 길을 놓치지 않고 진리요 생명의 길로 이끄는 그 실마리를 부여잡느라 분투 중인 젊은 유학생의 모습이 선하게 담겨 있습니다. 종교를 떠나서, 유학 혹은 단기 연수라도 미국 땅에서 겪어 본 분이라면,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에 공감할 수 있을 것 ?J습니다.


심각한 고민을 함께 해야 할 것 같은 에피소드가 있는가 하면, 아 목사님들 역시 우리 보통 사람들이 겪는 고민, 아니 훨씬 한심한 수준의 갈등을 다 치러 내는 중이구나 하는 대목이 많았습니다. 우리 국내 학교에서도, 시험 일자는 다가오는데 준비해 둔 건 없고... 막막할 때가 있죠. 저자분도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엉엉 울어버린 일이 부지기수라고 합니다. 그때마다 필생의 반려자인 분의 격려가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따스한 원호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름 아닌 공부가 한 인생의 앞길에 시련, 시험으로 작용했다면 피식 실소를 머금을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어디 세상 사람이 다 원희룡 천정배 반기문이겠습니까. 그 사람들도 알고 보면 공부가 힘든 시간이 다 있었을 겁니다.


편의점에서 5천원을 거슬러 받아야 할 것을, 어설픈 알바생이 5만원을 거슬러 줬다고 합니다. 아마 그 알바생은 나중에 결산 시에 점장님께 치도곤을 맞았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우리의 목사님도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지, 한순간 이걸 그냥 가져? 하고 고민을 하셨답니다. 사람이 참 거기서 거기죠? 헌데 저 같으면, 주인도 아니고 그 알바생이 불쌍해서라도 바로 돌려 줬을 것 같네요. 5만원 가지고 요즘 같은 물가에 뭘 푸짐하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깨끗하게 양심대로 사는 게 오히려 약은 길입니다. 챙기는 건 자기 노력, 자기 머리가 조금이라도 개입된 일이거나, 내가 양보해 봐야 아무 수가 안 날때나 챙기는 거죠.


아무튼 이 책은 저자의 솔직함이 돋보여서 좋습니다. 인생은 과연 첫술에 배부르지 않고, 전채를 쓰디쓴 맛으로 만들어 안기는 게 보통입니다. 이게 일종의 백신 접종이죠. 하지만 그 다음은? 어지간히 약골이거나 운이 나쁘지 않고서야 같은 질환을 두 번 되풀이하지는 않습니다. 어 떤 이들은 과잉적응라도 하는 건지, 극복한 시련으로부터 나쁜 교훈을 배워 타인에게 고통을 안기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고, 그로부터 자아가 받는 고통 역시 다채롭고도 심대합니다. 하지만 이런 은총으로서의 시련을 다 치른 후, 영적 육적 건강을 고루 갖춘 성도가 되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까요? 그에게는 주의 축복이 이미 먼 천국이 아닌, 지척에서 그 향내를 풍길 것입니다.


이 책 103페이지를 보십시오. 창세기에서 신은 인간을 창조할 때, 생기를 불러 넣었다고 말합니다. 유태인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기독교는 이를 두고 성령(holy spirit)으로 해석하죠. 히브리어의 רוח라 는 단어는이 장(이 책에서 말하는 창세기 2장 7절)에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어쨌든 이 대목이 신의 숨결을 지칭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바로 신약에서의 프뉴마와 동일하죠.(책에는 오타가 나와 있습니다. pnema가 아니라 pneuma입니다. 헬라어 철자로는 πνεῦμα라고 씁니다)


젊은 시절은 언제나 오류와 방황으로 가득한 시간입니다. 걷잡을 수 없는 열정은 청년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기도 하고, 때로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만듭니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지만, 세상의 공평한 이치인지 리스크 역시 만만찮은가 봅니다. 이 책은 특히 기독교 신지이면서 유학생인 분들께 좋은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우리 젊은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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