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풀 크리처스 - 그린브라이어의 연인,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3-1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3
캐미 가르시아.마거릿 스톨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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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뱀파이어들의 이야기가, 영원히 그 싱싱한 젊음을 유지하고만 싶을 틴에이저들을 겨냥한 판타지물의 주제로 애용되기 시작했다. 철없는 젊은이들은 저희들의 청춘이 마냥 영원할 것이라고만 착각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본능적 영악함은 그 터질 듯한 꽃봉오리의 선도가 어느 한 순간 낙화의 처연함을 맛볼 것이라는 점도 잘 안다. 잔인하고 철두철미한 시장의 계산은 이들의 환상과 집착을 정조준함이 당연했고, 여기에 <나이의 초월과 망각>을 새 화두로 내세운 시대의 한 트렌드, <어모털리티>의 의식 조작적 선동도 한 몫 한 바 있다.


여기에 기묘함(queerness)를 더하는 건 두 공동저자의 문화적 배경과 개인적 커리어다. 한 저자인 캐미 가르시아는, 작중 애마 트루도를 대변하듯 아직도 남부 고유의 자부심과 설욕 의식이 에고 한 구석을 떠나지 않은 정통 남부 출신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생업의 대종을 10대 청소년을 상대하고 교육하는 일로 이어가는 중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기막힌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한 이 <남부>와 <틴에이저> 키워드 둘의 조합은, 끝없이 이어져 식상하다 싶은 에버그린 흡혈귀 스토리에 새로운 활력과 호기심 요소를 충전한다. 한편 다른 한 사람의 공저자인 마가렛 스톨은, 역시 영화와 소설 분야 모두에서 그 뱀파이어 피처의 열기와 활력이 식지 않고 있는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교육 받은 하이브리드성의 교육 배경을 지닌 신인 작가다. 그녀의 교육 자산 역시 정통 영문학의 영역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 발은 첨단의 성장 산업인 비디오 게임 제작에 들여 놓은, 고전과 모던의 혼성 크리에이티브를 요하는 이력을 완성해 나가는 중이다.


예 전, 수학자 겸 철학자인 레이먼드 스멀리언은 그의 저서 <이 책의 제목은 무엇인가>에서, 책 말미에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퍼즐 형식으로 간단하게 소개하며, "그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할 경우, 세계가 멸망하는 그런 여인은 과연 존재하는가?" 라는 명제의 진위를 논리학적으로 검증한 적이 있었다. 그에 대한 해답은 우리의 상식을 크게 벗어나게도,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1998년 프랑스의 영화 감독 뤽 베송은 역시, 그녀(과연 성별상 '그녀'의 카테고리였을까?)가 그 미션에 실패할 경우, 지구는 물론 전 우주가 파국의 운명을 맞을 수 있는, 궁극의 에너지원 '제 5원소'를 체화한 어느 소녀의 어드벤처를 영상으로 옮긴 바 있다. 삼라만상은 정해진 섭리에 의해 탄생하고(만약 그 시작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운행을 그 고유의 항상성 원리에 의해 지속하며, 주어진 엔트로피의 탄성이 교란 한계점을 맞이하면 소멸하게 된다. 허나, 그 코스모스에 갇힌 피조물(크리처)들은, 이 분명하고도 불가역한 페이트에 맞서 절망적이고도 영웅적인 저항을 지속하는데, 그것 또한 소립자들의 입자 가속기 속 격렬한 운동이나 마찬가지로 물리계의 법칙 준수 양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분명 파국을 향해 질주한다. 그러나 그 파국은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그 결말을 회피하려 든다. 여기에 개입하여 운명의 분수령을 변환하려 드는 건 아직은 약하고 미성숙하게만 보이는 제 5 원소의 잔다르크적 출정(出征)이다.


4 월 18일 제법 그 면면이 흥미로운 진용까지 갖춰 화려한 스크린으로까지 옮겨져 우리에게 전면적으로 다시 선뵈는 이 이색적인 판타지물은, 이러한 오랜 문학적-신화적-종교적 전통의 외피와 얼개 위에다, 미국 고유의 흑역사적 상처까지 접합하여 기묘한 템포와 색채로 전개해 나가는 <뜻하지 않은 여정의 시작>이다. 리나(Lena)와 이선(Ethan)은 과연 이 은하계적 변곡점의 중력 교차의 난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 타개, 탈출, 최종적 조율 작업을 행할 것인지? 한 개인의 성숙과 통과의례가 전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기막힌 미시와 거시의 상호 얽힘은 알고 보면 소설 속에서의 허구만은 아니다. <체인지메이커>라고 했던가. 결국 보잘것없어 보이는 개인의 실천과 인연이 씨줄, 날줄로 얽혀, 거대한 흐름의 근본 흐름을 바꾸는 건 우리 인류가 익히 접해 왔던 우주의 섭리에 가깝다. 청소년 판타지에서 오랜 진리와 교조를 확인하는 뜻밖의 소득은 깨어 있는 독자에게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며, 하물며 수업시대를 견실한 인문학적 소양으로 수놓고 담금질한 능력 있는 저자들의 손을 통해서라면 당연 기대함직한 멋진 체험이다. 소설과 영화는 알고 보면 상호 대체 관계가 아닌, 입체적 인식의 개안을 돕는 다용도 키트를 구성하는 쌍둥이 형제이니, 이 변덕스러우나 설레는 기후의 4월에 우리를 저 흥겨운 놀이동산으로 신나게 띄워줄 청룡열차라 안심하고 의지해도 좋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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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와의 대화 - 마키아벨리 군주론에 입각한 강력한 리더십의 정체를 묻다 아시아의 거인들 1
리콴유 & 톰 플레이트 지음, 박세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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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대담 형식의 책이 성공하려면,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상호 철저한 이해를 그 대화의 바탕으로 하거나, 아미면 둘 사이에 어떤 수준의 공감이 미리 두텁게 형성되어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아니면 예전 호메이니를 인터뷰한 마 이크 월리스처럼, 공감은커녕 상호 교차점이나 공감사항이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인터뷰라야 최소한 보는 재미라도 생기는 것 아닐까. 무슨 말이냐 하면, 이처럼 서로를 전혀 모른다고도 할 수 없고, 처한 위치와 성장 배경, 개인적인 성향 따위가 워낙 다르기에 그렇다고 가뜩이나 사소한 공감대가 더 성장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 실로 미묘한 관계에 놓인 두 사람이, 하나는 인터뷰어로, 다른 상대는 그 질문을 받는 사람의 위치에서 진행하는 인터뷰가 과연 큰 과실을 거둘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의문 말이다.


이 런 느낌이 책을 읽기 전이 아닌, 책을 다 읽은 후에 들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책을 다 읽은 후의 느낌이 그러했다면, 그 독서는 거의 실패에 가까운 것 아닐까? 그런데, 정직하게 느낌을 다시 한 번 resume해도, 그렇게까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이런 복합적이고도 미묘한 독서 후 느낌은 그 정체가 무엇일까?


분 명히 말하지만, 인터뷰어인 톰 플레이트가 분명 인간 리콴유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우선 리 전 수상과 상당한 나이 차가 나는데, 이는 그가 성장할 당시에 겪고 그의 성장 토양이 되어 주었을 문화적 배경이 리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 다름 아니다. 그 는 또한, 식민지로서 민감한 태도로 대할 수밖에 없는 영국에서 젊은 시절 유학을 마친 리를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그저 뼈속까지 뉴요커인 리버럴에 불과하다. 결정적으로, 그는 백인종이고, 인터뷰 대상인 리는 중국계의 피가 흐르는 동양인이다. 체형만 봐도 그는 통통한데다 느긋한 낙관주의자이고, 리는 깡마른 원칙주의자요 남이나 자신이나 흐트러진 구석을 참고 보지 못하는 규율의 사나이로 일생을 살아왔다.


이 런 두 사람이 만나서, 비록 이전부터 약간의 친분이 있었다고는 하나 과연 얼마나 생산적인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나의 이런 불안감은, 사실 플레이트가 <고슴도치와 여우론>을 대화의 화제 중 하나로 삼는 대목을 읽으면서 거의 극에 달했다. 리 처럼 자신을 세상에 둘도 없는 유니크한 존재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사람에게, 둘 중 어느 유형에 속하겠냐는 진부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무리한 시도일 거라는 짐작에서였다.  당연히, 리는 이 질문에 당혹스러움과 어이없음의 심경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플레이트 자신의 주관적인 묘사 중에서도 그런 점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게 드러나고 있다. 더군다나 자신을 여우도 아닌 고슴도치로 규정하려 드는 플레이트의 태도에서, 리는 거의 열등 분자를 대하는 태도까지 암시한다. 내심 "녀석하곤, 쯧쯧... 살이나 빼야 머리가 돌아가려나.."하고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하 지만 이런 불협화음 중에 분명히 드러나는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과 서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식의 차이이며, 다른 한 편으로 서로가 너무나 다름을 민감히 인식하면서도, 어떻게든 상호 공존을 모색하려는 나름의 진지한 노력이다. 이 책은 물론, 인터뷰어 톰 플레이트가 주인공이 아닌, 대담 대상자 리콴유가 주인공인 책이다. 하지만 인터뷰어 역시 나름 거물급 언론인, 혹은 독자에게 스타급으로 인식된 그(우리 인터넷 포털 네이버에도 그의 이름은 자동 완성 대상인 검색어이며, 최근에는 반기문 사무총장과의 인터뷰로 더 관심을 받기도 했다)이기에, 그 의 개성은 리콴유의 그것 못지 않게 이 책의 재미 핵심을 이룬다. 이런 점에서, 골수에 유교정신과 효율성 추구, 혹은 엘리트정신이 흐르는 독재자 리콴유의 내심을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데에는 다소 미흡했을지 모르나, 대신 호기심어린 눈으로 동양을 주시하는 서양의 평범한 시민의 시선이 극동의 영혼과 만났을 때, 어떤 파장과 주파수의 불꽃이 튀는지 정도는 재미있게 보여준 책 아니었나 싶다. 결론은, <재미있는 책>이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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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비사 - 은이 지배한 동서양 화폐전쟁의 역사
융이 지음, 류방승 옮김, 박한진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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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은 얼마 전에, '역전 앞' 같은 중복잉여 표현을 두고, 반드시 문법적 오류로 볼 필요 없고, 민족 정서의 일부가 반영된 수사로 파악하면 충분하다고 했다. 언어의 규범적 고찰을 두고 반드시 권위자의 언술을 인용할 필연적 이유는 없고, 건전한 어문학적 감각과 지식을 갖춘 이가 편견 없이 숙고하는 결과로 그 당부는 얼마든지 평가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은'은 그 속성이 본디 흰 것인데, 이를 두고 앞에 다시 '휠 백'이라는 한정어를 붙임은 문법적으로 타당한가? 아니라면, 더 널리 쓰이는 '황금'의 예는 어떠한가? 물론 금에는 '백금'이라는 다른 예가 존재하니 이와 나란히 둘 일만은 아니지만, 언어의 usage를 두고 정오를 가르는 일은, 바로 언어학의 기본 명제가 언어의 기능 중 하나로 '감성의 전달'을 꼽고 있기에, 도무지 그 언중의 감성적 코드와 분할해서 수행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실로 어려운 작업이다.


일개 단어, 기계적으로 거대 시스템 안의 한 부속으로 제 기능만 잘 수행하면 그만인 듯한 일개 단어의 경우에도, 그 작동의 바르고 그름을 가르는 일이 힘들다. 하물며, 정치-경제 복합체 내에서의 제도를 두고서 과연 그 최적 효율의 기준만으로 채택-폐기의 당-부당을 쉬이 결정하는 일은 어떠할까? 효율의 기준만을 내세우는 건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지상과제'에 가까우니, 말하는 자가 정치적 스탠스의 어느 편에 서 있건 처음에 내세운 약속이나마 충실히 이행하면, 이를 두고 딱히 타매할 근거는 마련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애초에 내건 조건들을 모조리 가장행위로 전락시키는, 속내 시커먼 은닉행위가 따로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효율을 빙자한 강자 이익만의 관철이라는 트로이의 목마는, 유사 이래 어느 집단, 어느 결제체제, 어느 생산 기제에서도 존재하는 게 보통이었으니, 최대 이익의 실현과 최고 수위의 거래 안전 도모라는 지극히 기계적인 미덕만 성취하면 그만일 것 같아도, 기실 그 내막에는 경제 패권과 동전의 앞뒤처럼 결부된 정치적 파워 게임의 복잡 다단한 사연이 숨어 있을 밖에.


은의 통화 지위는 생각 외로 공고하며, 깊기도 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건륭제 말기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유럽의 경제력, 생산 스톡의 토털은 중국 일권역의 그것에 비겨, 초라하다 할 만큼 미치지 못했다. 산업 혁명의 극성기를 상당 기간 경과한 후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대체 수천 년 동안 진정한 의미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완결적 경제 단위였던 중국과 유럽은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세계(정치/경제)사의 터닝 포인트이자 티핑 포인트였던 아편 전쟁을 거친 후라고 해도, 여전히 중국의 생산은 양적 질적으로 유럽에 떨어지는 바 크지 않았으니, 결국 중국의 정체와 몰락은 자체 모순의 누적과 병발이 아닌, 외부 무력의 강제에 기인했다는 분석이 자연스레 도출될 만하며, 이는 서양 제국주의의 폭력적 성격을 고발하는 면마저 겸한다. 대포와 폭약을 통한 침략, 살상 이후에야 양 진영의 우열이 역전되었으니, 로마 시절까지 소급해 가는 양 세계의 경제력 우열 비교란 새삼스러울 뿐이며, 그 장구한 기간의 대부분을 결제 수단으로 '우월한 세계에서' 사랑 받아온 은이, 다시금 세계 무역의 중심 수단으로 부활한다 한들 이상할 구석이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이 책의 논지는 이 점을 납득시키는 데에 방점이 놓인다.


중국의 처절한 몰락 과정은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기보다, 그 유리한 초기 조건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채 나태와 방종, 무기력으로 일관하다 후발 주자에 추월당한 어리석음의 표본으로 인식되는 면이 강했었다. 정치사와 경제사를 분리 불가능한 일체로 파악할 때, 은의 경제사는 곧 세계무역사요, 한정수식어를 불요하는 world history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 장구하고 사연 많은 역사에서, '중국'이란 주어를 '은'으로 바꾸기만 해도 이처럼이나 많은 분량이 효과적으로 전달, 이해되니 대체 인간이란 그 심성과 영혼의 어느 정도를 '경제'에 빛지고 있는 걸까? 과연 그 존재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단일어 외 어떤 형용도 잉여로 돌릴 만한 타산적 존재일까? 은이 그 임잣말의 지위를 회복한 크로니클에서 이처럼이나 절실한 공감을 이끌어낸다면, '칙칙한 중국'의 테마가 여태 우리에 빚은 경멸감은 그저 근거 없는 승자편승, 비겁한 세컨 게스가 아니었던가! 은의 '복위'는 시대착오적인, 패권 찬탈의 거지떼가 음흉히 꾸미는 가망 없는 역적모의가 아닌, 그 오랜 상속권과 전통을 비로소 회복하려는 정당한 권리자의 침착한 소송 노력 이상이 아니었던 걸까? 빛나는 은의 리사이틀은 그저 금붙이 은의 초라한 넋두리가 아니라, 한 맺힌 중국 민족의 장엄한 공소장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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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터[454]번째 책이야기

통섭적 인생의 권유 / 최재천

내가 몰랐던 책 책이야기 텍스터(www.texter.co.kr)
통섭적 인생의 권유 / 최재천
최재천 교수, 우리에게 ‘통섭적 인생’이라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권하다
《통섭적 인생의 권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니크한’ 지식인이며 통섭학자로 불리는 최재천 교수가 지난 2011년부터 대중 독자들과 보다 적극적인 소통을 위해 명진출판과 함께 기획한 ‘최재천 컬렉션’의 완결판이다(최재천 컬렉션: 《과학자의 서재》, 《통섭의 식탁》, 《최재천 스타일》, 《통섭적 인생의 권유》). 이 책은 미국에서의 교수 생활을 마감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지난 15년 동안 그가 발언해 온 어젠다 중에서 공감의 기록으로 남길 만한 것들을 골라 정리한 것이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오랜 관찰과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섭적 사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그의 발언을 12개의 어젠다로 분류해 제시한다. 생물 다양성, 그린 비즈니스, 의생학(자연을 표절하는 학문), 미래형 인재, 기획 독서, 여성 시대, 경계를 허무는 삶 등 최재천만의 독특한 시각이 담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통섭적 인생’이란 과연 어떻게 사는 삶인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통섭은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최재천 교수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통섭’의 개념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통섭의 대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통섭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만, 대체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학문적인 노력쯤으로 이해하며 우리 삶과는 별 상관없는 개념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최재천 교수는 이번 책을 통해 삶의 방식과 태도의 개념을 담은 ‘통섭...
◆ 참가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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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서평단 가입 게시판에 "통섭적 인생의 권유 서평단 신청합니다"라고 써주시고 간단한 서평단 가입의도를 적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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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무기력이다 - 인지심리학자가 10년 이상의 체험 끝에 완성한 인생 독소 처방
박경숙 지음 / 와이즈베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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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처음 봤을 때 그리 큰 기대가 가지 않았다. '문제가 무기력'이라고만 하면, 과연 그런 진단에서 효과적인 해답이 나올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당신의 문제는 무기력(helplessness)입니다'고 해 주는 충고는, 과연 그의 현실을 얼마나 개선해 줄 수 있는 도움(help)일까?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라야지, '무기력' 같은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병명'으로 규정을 한대봐야, 그것은 '문제를 문제로 답하는', 그야말로 '무기력한' 처방일 뿐 아닐까 생각했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은 충격에 가까웠다. 나는 종교를 갖지 않아 모르겠지만, 예컨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영적 부흥회' 등에 다녀 오고 느끼는 정신적 고양이 이 비슷한 느낌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스스로를 '무기력증 환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내게, "너의 문제는 바로 다름 아닌 무기력이었어!"라고 정면으로 깨우쳐 주는, 그러면서도 그 치밀하고 구체적인 논리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는, 묵직하면서도 섬세한 구절구절들이 내 감정과 지성을 강타했기 때문이리라.

 


무기력은 학문적 개념이었다. 이 분야에 무지했던 나는, 예컨대 심리학과 정신병리학 분야에 '마틴 셀리그먼 교수' 같은 이가 있어, '무기력 연구의 세계적 전문가'로 인류에 큰 기여를 하는 줄 몰랐다. 무기력이란 단지 정신적 슬럼프를 가리키는 일시적이고 막연한 일상어가 아니라, '인플루엔자'만큼이나 뚜렷한 실체를 지니고 있는 terminology였던 것이다. 

 


무기력은 그 구체화의 역사가 생각보다 깊은 개념이었다. 저자 박경숙 박사는 니체의 저작에서 시적으로 표현된 심상을 예로 들며, 인간의 정신 활력도를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3단계로 구분하고, 이 '무기력 상태'를 낙타의 그것으로 비유한다. 위험에 직면해서 개체로서의 안위를 걱정하여 최소한의 방위를 시도하는 건 생명의 본능이고 본성인데, 특정한 이유로 '무기력을 학습한 생명체'는, 해로운 자극과 당면한 위험 앞에서도 수동적인 모습만을 노출한다. 물론 모든 개체가 이런 행동 양식을 드러내지는 않으나, 상당수의 예에서 이처럼 체계적인 패턴으로 '무기력 증상'을 보이는 것은, 생명의 환경 적응이나 진화의 작동 기제가 생각만큼 단순한 것이 아님을 입증한다.  

 


무기력 중에서도 '사람의 무기력'은, 인간 정신과 문명의 발전 단계에 따라, 동물의 그것이나 인류라는 종 이전 상태와는 새로운 국면을 드러내는 특성이 있었다. 과거 노예 노동의 단계에 머물러 있던 경제 체제에서는, 피지배 계급은 그저 최소한의 생존만을 도모하려 육체적 동작에 노동을 결부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후 산업 혁명을 거쳐 본격 대량 생산 체제에 돌입한 후로는, 예를 들어 헨리 포드의 '대폭 주급 인상' 같은 경영 혁신책이 생산성 향상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전의 감독과 통제, 강제적 규율이 지배하던 공장 생산 환경이, 처음으로 '인센티브'라는 효과적 자극을 경영 기법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놀랍게도, 이제는 '인센티브의 부여가 오히려 노동 생산성 저하를 유발한다'고까지 한다. 포디즘의 대성공 이래 노동이란, 그 진작에 채찍 못지 않게 당근이 필요하며, 이 당근의 공급량에 대체로 선형적 비례성을 보이는 게 생산성임은 이미 확고불변한 상식이 되어 버렸다. 이런 우리의 확신에 반하는 주장은, 처음에야 상당한 당혹을 부를 수밖에 없다. 저자의 예증은 간단하다. MS의 야심찬 프로젝트 '엔카르타'를 간 곳 없이 주저앉혀 버린 '위키피디아' 대성공의 예에서 보듯, 이제 인류의 증대한 복지 수준에 걸맞은 의식의 고양은, '그저 창조적인 즐거움(labor of love)에서 유발된 동기를, 한갖 '돈 몇 푼 더'가 끌어내는 '타율적 자율', '혹은 타락한 자원(volunteering)'이 도저히 능가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흔히 '타고난 머리가 노력하는 근성을 못 따라잡고, 그런 노력도 즐기면서 하는 품에는 결국 밀리고 만다'고들 하지만, 조직행동론이나 인사관리의 전통적 도그마를 정면으로 뒤집다시피 하는 이런 구체적인 예증 앞에서, 정말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미증유의 빅뱅에 다름 아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일과 놀이'가 일치되는 이상향은 단지 머나먼 꿈 속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 되어 가고 있으며, 이런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될 수도 있는 냉혹한 현실이 그것도 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상황을 가능한 한 지배,통제하려 하고, 자신이 손을 뻗치는 대부분의 단계에 스스로 부여한 의미가 충족되었으면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저자는 오래된 이론인 '매슬로우의 5단계설'을 시의적절하게도 이 대목에서 응용하고 있는데, 기본적인 생존 욕구가 충족된 후라면 인간은 이제 더 높은 단계에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려 들며, 하위 욕구란 일정 수위를 넘어서면 아무리 양적 공급이 이루어져도 그에 합당한 효용이 창출되지 못한다는 것이다(경제학에서 말하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고급의 욕구가 좌절될 때, 무기력은 새로운 국면으로 마음의 동력을 잠식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무기력'이 이처럼이나 보편적으로, 또 심각한 양상으로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이처럼 역사적, 환경적 맥락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문제가 무기력이다'라는 진단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극복 방안까지 친절하면서도 절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기계발 서적이라면, 화려한 수사와 명구를 나열하여 문제를 다양한 표현으로 서술하면서도, 말의 성찬에 그칠 뿐 정작 대안의 제시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박경숙 박사의 이 책은, 상업적 성과를 위한 판매용 처방전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 수기와 학문적 성취를 한 권에 응축한 인격 표출에 가까웠는데, 자신이 겪은 절절한 고통과 의문, 그리고 진지한 성찰이 담뿍 들어 있어, 단지 구색을 맞추기 위한 프레임에서는 볼 수 없는, 영혼의 진정성이 느껴져서 좋았다. 저자 자신이 심연과도 같은 무기력으로 큰 피해를 본 처지인지라, 비슷한 곤욕을 치르는 잠재적 독자에 대해 그야말로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할 말을 다 쏟아 놓고 마는 절실함과 진솔함이 있어서 좋았다.

 

진정성만으로 어떤 책이 양서가 되지는 않는다. 책은 그저 감정적 진실 하나로 독자의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 시대와 공간, 환경의 차이를 뛰어 넘은 보편적 적용성이 있어야 효용이 커지는 법인데, 이는 학문적 치밀성으로만 구현이 가능하다. 아무리 저자가 무기력증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고 해도, 그가 대한민국 전체를 두고 내로라하는 일급의 학자가 아니었다면, 대담하게 '문제는 무기력이다'는 명제로 병리를 규정할 수도 없었을 테고, 대체 '문제인 무기력'이 무엇인지 이처럼 구체적으로 독자에게 깨우쳐 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단순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단정'은 보통 뒷감당을 못하고 제풀에 넘어지는 게 보통인데, 이 책은 읽어나가는 동안 의혹을 가득 품었던 오만한 독자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는 압도적인 지적 바탕이 있었다. 문제를 이처럼이나 치밀하게 분석하고 들어가면, 답은 일일이 말로 나열하지 않아도 반 이상이 도출된 거나 다름없다. 다만 무기력이라고 해도 각론이나 개별 케이스로 들어가면 다양한 변종이 존재할 텐데(모든 병이 마찬가지), 이 책 후반부에 제시된 그 상세하고 성실한 처방으로도 아마 모든 경우를 커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 자신의 절절한 내러티브가 풍기는 활력과 진정성만으로도, 수동적인 파블로프의 개가 아닌 능동적 사자, 창조력 충만의 어린아이로 이미 복귀하다시피 한 독자는 맞춤형 해법을 스스로 내어 놓을 수 있으니, 책 한 권의 소임은 다하고도 남은 셈이다. 이 책은 아마, 박경숙 박사가 그의 오랜 트라우마였던 '무기력증'의 관에 내지르는 마지막 못질로도 읽히며, '병은 자랑하랬다'는 옛말이 맞는 확증으로도 읽힌다. 

 

오 타가 몇 군데 있다. '호킨스의 의식 지도' 오른편 페이지에서, 대법원 판사'같은 표현은 부적절한데, '대법원판사'는 유신시절의 용어이기 때문이다. 인디언끼리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시절의 종족 절멸책으로 인한 무기력 책동을 다룬 일화에서 '이로쿠오스'를 iroqnois라고 적은 건 잘못이며, iroquois가 맞다(n을 u로 잘못 봄). 66쪽의 Richter는 '리처'가 아니며, 미국에서는 '릭터'라고 읽고, 기원인 독일에서는 '리히터'라는 흔한 성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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