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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무기력이다 - 인지심리학자가 10년 이상의 체험 끝에 완성한 인생 독소 처방
박경숙 지음 / 와이즈베리 / 2013년 2월
평점 :
책 제목을 처음 봤을 때 그리 큰 기대가 가지 않았다. '문제가 무기력'이라고만 하면, 과연 그런 진단에서 효과적인 해답이
나올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당신의 문제는 무기력(helplessness)입니다'고 해 주는 충고는, 과연 그의 현실을 얼마나
개선해 줄 수 있는 도움(help)일까?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라야지, '무기력' 같은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병명'으로 규정을 한대봐야, 그것은 '문제를 문제로 답하는', 그야말로 '무기력한' 처방일 뿐 아닐까 생각했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은 충격에 가까웠다. 나는 종교를 갖지 않아 모르겠지만, 예컨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영적 부흥회' 등에
다녀 오고 느끼는 정신적 고양이 이 비슷한 느낌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스스로를 '무기력증 환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내게, "너의 문제는 바로 다름 아닌 무기력이었어!"라고 정면으로 깨우쳐 주는, 그러면서도 그 치밀하고 구체적인 논리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는, 묵직하면서도 섬세한 구절구절들이 내 감정과 지성을 강타했기 때문이리라.
무기력은 학문적
개념이었다. 이 분야에 무지했던 나는, 예컨대 심리학과 정신병리학 분야에 '마틴 셀리그먼 교수' 같은 이가 있어, '무기력
연구의 세계적 전문가'로 인류에 큰 기여를 하는 줄 몰랐다. 무기력이란 단지 정신적 슬럼프를 가리키는 일시적이고 막연한 일상어가
아니라, '인플루엔자'만큼이나 뚜렷한 실체를 지니고 있는 terminology였던 것이다.
무기력은 그
구체화의 역사가 생각보다 깊은 개념이었다. 저자 박경숙 박사는 니체의 저작에서 시적으로 표현된 심상을 예로 들며, 인간의 정신
활력도를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3단계로 구분하고, 이 '무기력 상태'를 낙타의 그것으로 비유한다. 위험에 직면해서
개체로서의 안위를 걱정하여 최소한의 방위를 시도하는 건 생명의 본능이고 본성인데, 특정한 이유로 '무기력을 학습한 생명체'는,
해로운 자극과 당면한 위험 앞에서도 수동적인 모습만을 노출한다. 물론 모든 개체가 이런 행동 양식을 드러내지는 않으나, 상당수의
예에서 이처럼 체계적인 패턴으로 '무기력 증상'을 보이는 것은, 생명의 환경 적응이나 진화의 작동 기제가 생각만큼 단순한 것이
아님을 입증한다.
무기력 중에서도 '사람의 무기력'은, 인간 정신과 문명의 발전 단계에 따라, 동물의
그것이나 인류라는 종 이전 상태와는 새로운 국면을 드러내는 특성이 있었다. 과거 노예 노동의 단계에 머물러 있던 경제
체제에서는, 피지배 계급은 그저 최소한의 생존만을 도모하려 육체적 동작에 노동을 결부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후 산업 혁명을 거쳐
본격 대량 생산 체제에 돌입한 후로는, 예를 들어 헨리 포드의 '대폭 주급 인상' 같은 경영 혁신책이 생산성 향상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전의 감독과 통제, 강제적 규율이 지배하던 공장 생산 환경이, 처음으로 '인센티브'라는 효과적 자극을 경영 기법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놀랍게도, 이제는 '인센티브의 부여가 오히려 노동 생산성 저하를
유발한다'고까지 한다. 포디즘의 대성공 이래 노동이란, 그 진작에 채찍 못지 않게 당근이 필요하며, 이 당근의 공급량에 대체로
선형적 비례성을 보이는 게 생산성임은 이미 확고불변한 상식이 되어 버렸다. 이런 우리의 확신에 반하는 주장은, 처음에야 상당한
당혹을 부를 수밖에 없다. 저자의 예증은 간단하다. MS의 야심찬 프로젝트 '엔카르타'를 간 곳 없이 주저앉혀 버린 '위키피디아'
대성공의 예에서 보듯, 이제 인류의 증대한 복지 수준에 걸맞은 의식의 고양은, '그저 창조적인 즐거움(labor of
love)에서 유발된 동기를, 한갖 '돈 몇 푼 더'가 끌어내는 '타율적 자율', '혹은 타락한 자원(volunteering)'이
도저히 능가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흔히 '타고난 머리가 노력하는 근성을 못 따라잡고, 그런 노력도 즐기면서 하는
품에는 결국 밀리고 만다'고들 하지만, 조직행동론이나 인사관리의 전통적 도그마를 정면으로 뒤집다시피 하는 이런 구체적인 예증
앞에서, 정말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미증유의 빅뱅에 다름 아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일과 놀이'가 일치되는 이상향은 단지
머나먼 꿈 속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 되어 가고 있으며, 이런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될 수도 있는 냉혹한
현실이 그것도 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상황을 가능한 한 지배,통제하려 하고, 자신이 손을
뻗치는 대부분의 단계에 스스로 부여한 의미가 충족되었으면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저자는 오래된 이론인 '매슬로우의 5단계설'을
시의적절하게도 이 대목에서 응용하고 있는데, 기본적인 생존 욕구가 충족된 후라면 인간은 이제 더 높은 단계에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려 들며, 하위 욕구란 일정 수위를 넘어서면 아무리 양적 공급이 이루어져도 그에 합당한 효용이 창출되지 못한다는
것이다(경제학에서 말하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고급의 욕구가 좌절될 때, 무기력은 새로운 국면으로
마음의 동력을 잠식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무기력'이 이처럼이나 보편적으로, 또 심각한 양상으로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이처럼 역사적, 환경적 맥락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문제가
무기력이다'라는 진단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극복 방안까지 친절하면서도 절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기계발 서적이라면,
화려한 수사와 명구를 나열하여 문제를 다양한 표현으로 서술하면서도, 말의 성찬에 그칠 뿐 정작 대안의 제시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박경숙 박사의 이 책은, 상업적 성과를 위한 판매용 처방전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 수기와 학문적 성취를 한 권에 응축한
인격 표출에 가까웠는데, 자신이 겪은 절절한 고통과 의문, 그리고 진지한 성찰이 담뿍 들어 있어, 단지 구색을 맞추기 위한
프레임에서는 볼 수 없는, 영혼의 진정성이 느껴져서 좋았다. 저자 자신이 심연과도 같은 무기력으로 큰 피해를 본 처지인지라,
비슷한 곤욕을 치르는 잠재적 독자에 대해 그야말로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할 말을 다 쏟아 놓고 마는 절실함과 진솔함이 있어서
좋았다.
진정성만으로 어떤 책이 양서가 되지는 않는다. 책은 그저 감정적 진실 하나로 독자의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 시대와 공간, 환경의 차이를 뛰어 넘은 보편적 적용성이 있어야 효용이 커지는 법인데, 이는 학문적
치밀성으로만 구현이 가능하다. 아무리 저자가 무기력증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고 해도, 그가 대한민국 전체를 두고 내로라하는 일급의
학자가 아니었다면, 대담하게 '문제는 무기력이다'는 명제로 병리를 규정할 수도 없었을 테고, 대체 '문제인 무기력'이 무엇인지
이처럼 구체적으로 독자에게 깨우쳐 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단순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단정'은 보통 뒷감당을 못하고 제풀에
넘어지는 게 보통인데, 이 책은 읽어나가는 동안 의혹을 가득 품었던 오만한 독자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는 압도적인 지적 바탕이
있었다. 문제를 이처럼이나 치밀하게 분석하고 들어가면, 답은 일일이 말로 나열하지 않아도 반 이상이 도출된 거나 다름없다. 다만
무기력이라고 해도 각론이나 개별 케이스로 들어가면 다양한 변종이 존재할 텐데(모든 병이 마찬가지), 이 책 후반부에 제시된 그
상세하고 성실한 처방으로도 아마 모든 경우를 커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 자신의 절절한 내러티브가 풍기는 활력과
진정성만으로도, 수동적인 파블로프의 개가 아닌 능동적 사자, 창조력 충만의 어린아이로 이미 복귀하다시피 한 독자는 맞춤형 해법을
스스로 내어 놓을 수 있으니, 책 한 권의 소임은 다하고도 남은 셈이다. 이 책은 아마, 박경숙 박사가 그의 오랜 트라우마였던
'무기력증'의 관에 내지르는 마지막 못질로도 읽히며, '병은 자랑하랬다'는 옛말이 맞는 확증으로도 읽힌다.
오
타가 몇 군데 있다. '호킨스의 의식 지도' 오른편 페이지에서, 대법원 판사'같은 표현은 부적절한데, '대법원판사'는 유신시절의
용어이기 때문이다. 인디언끼리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시절의 종족 절멸책으로 인한 무기력 책동을 다룬 일화에서 '이로쿠오스'를
iroqnois라고 적은 건 잘못이며, iroquois가 맞다(n을 u로 잘못 봄). 66쪽의 Richter는 '리처'가 아니며,
미국에서는 '릭터'라고 읽고, 기원인 독일에서는 '리히터'라는 흔한 성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