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시간과공간사 클래식 1
헤르만 헤세 지음, 송용구 옮김 / 시간과공간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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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공간사에서 이제 고전을 본격적으로 시리즈화하여 펴내는 듯하여 독자로서 기대됩니다. 송용구 교수님은 시인이기도 하고 지금껏 독일권 저작들을 독자들에게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으로 소개해 온 분입니다. 첫권이 헤세의 <데미안>이라 설렙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37 하단에는 역주가 있는데 벌써 이런 배려가 독자에게는 가외의 레슨이 되는 것입니다. 헤세의 다른 작품 <수레바퀴 아래서>를 보면 주입식 암기 공부 때문에 지독하게 고생을 한 주인공 한스의 비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역자의 말대로 헤세 역시 마울브론 신학교에서 이 비슷한, 혹독한 체험을 거쳤기에 작품마다 유사한 환기, 세팅이 지나가듯 등장하는데 그런 과정을 거쳐 이런 문호가 탄생했으니 공부는 설령 그 부작용이라고 해도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솔직히 모든 학교는 크램스쿨이라야지, 지금처럼 죽도밥도 아닌 시스템이 최악이라는 주의입니다ㅋ. 그게 싫으면 나가서 검정고시 치면 됩니다. 그 중에 또 헤세가 나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데미안은 p84 이하에서 기독교의 결함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만물을 창조한 신이라면 사람한테 아름답고 선하고 거룩한 것만 보여줘야지, 조금이라도 더러운 게 있으면 모조리 사탄 타령이니 이게  얼마나 무책임하냐는 게 그 핵심입니다. 독일인들은 저 무렵 중동, 특히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대 문물을 접하고 연구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그 결과 전통적인 기독교 문명을 메타적으로, 시니컬하게 보는 게 크게 유행했었습니다. 헤세의 작품 곳곳에도 그 흔적이 배어나며,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소설의 이 대목 데미안의 비판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저 청소년의 투정, 넋두리입니다. 우리 독자들도 지금 사춘기가 아니기 때문에, 데미안의 일장연설을 얼마든지 비판적으로 독해할 수 있습니다. 단,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에서 이반의 도도한 설파에 대해서는 그게 여전히 쉽지 않더군요.

온전히 묵살된 악마의 세계에 대해서도 대변(代辯), 혹은 어떤 해명이 필요하지 않냐는 싱클레어의 공감, 동조, 고백은 물론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런 건 이 세상과 자연 속에 던져져 보면 바로 지옥의 실감이 피부로 다가오므로 따로 변설이 불필요합니다. 자연 역시 약자가 강자에게 생으로 살점이 뜯기고 심지어 암컷이 밴 태아가, 그 모체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배가 갈리고 하이에나의 강한 턱과 이빨에 피투성이로 분리되는 게 정글에서는 일상으로 마주하는 바입니다. 새삼 종교다 철학이다가 뭘 번거롭게 말로 설명할 가치가 없습니다. 한 번만 구경해도 책 만 권 분량의 각성이 1나노초만에 내 정신에 입력 이식됩니다.

p106을 보면 여전히 불안정하고 자기중심적인 청소년 싱클레어의 독백이 이어집니다. 어쩔 수 없는 게 청소년 때에는 다 저런 거죠. 세상이 나를 위해 더 좋은 자리를 내어놓지 않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세상이 입어야 한다... 다만 헤세도 주인공 싱클레어의 생각이란 걸 저런 식으로 표현한다는 자체가, 그 미숙함을 독자 앞에 절절하게 드러내는 의도이겠습니다. 이렇게 내 마음에 파문을 던져 놓고 수습까지를 안 해 줘서 고뇌와 갈등에 빠지게 한 데미안에 대한 원망(p108), 한때 영적 구원자, 육적인 보호자로까지 고마워했던 데미안에게 이젠 이런 마음을 품으니 사람이라는 게 이처럼 얼척없고 간사합니다. 이게 다 우리 자신의 어리석고 한심한 모습입니다.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 인생의 적절한 시기에 등장하여 적절한 충고를 해 줍니다. 아무래도 인생 연륜의 깊이가 다르니 입에서 나오는 말도 훨씬 성숙하며 그저 데미안류의 화려함이 없을 뿐입니다. 헤세의 작품에 대놓고 그런 말은 없지만 그의 이런저런 수상록을 봐도 헤세나 그의 주인공들이 가장 고뇌했던 건 육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헤세는 몇 살 때 어떠어떠한 여성들이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작업을 걸었다 어쨌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습니다만, 저는 남아 있는 그의 사진 같은 것을 보았을 때 과연 그런 일이 그에게 일어나기나 했을지 극히 의문스러웠습니다. 물론 지식이 많으니 말빨로 여자를 홀릴 수도 있었겠으나 헤세는 왠지 체질적으로 그런 것도 힘겨워했을 듯합니다. 사람은 그에게 결여된 걸 놓고 가장 괴로워하게 마련이며, 청소년 싱클레어 역시 그에게 제일 아쉬운 욕구가 해소가 안 되니 엉뚱한 핑계를 찾아대는 것입니다. p156 같은 데를 보면 피스토리우스가 노련하게 애를 꿰뚫어보고 딱 맞는 충고를 해 주지 않습니까.

고전은 언제 읽어도 고전만의 묵직한 울림이라는 게 있습니다. p203에서 언급되는 카발라 교도, 톨스토이 숭배 모임 같은 세팅도 읽을 때마다 새 해석의 여지가 있으며 역자의 적절한 역주가 독해에 도움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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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게임체인저다 - 나는 JP모건을 버리고 트럭 비즈니스의 판을 바꾸고 있습니다!
정혜인 지음 / 라온북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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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면 저자 정혜인 대표가 어렸을 때 화장실에 가는 길을 묻자 "엄마도 아빠도 모른다"며 스스로 길을 찾을 것을 요구했던 어렸을 때의 일화가 나옵니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주변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며 정신 안의 개념과 개성을 완성해 나갑니다. 그러나 모방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만으로 해내는 어떤 breakthrough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저자 정혜인 대표는 원래 JP 모건에 근무하던 분인데, 전혀 무관한 분야인 상용트럭 플랫폼을 설립하여 운영 중인데, 그녀의 이런 도전 정신을 일구는 데는 저런 어렸을 때의 체험도 그 바탕이 된 듯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한국에서 휴대전화가 일반화한 것은 대략 1998년 정도, 스마트폰은 2011년쯤이면 누구라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바일 인프라가 잘 갖춰진 나라에서는, 그걸 최대한 활용해야 나의 큰 돈이 소요되지 않고 비교적 적은 부담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도 최대한 이 한국적인 환경의 이점을 볼 수 있는 사업 전략을 짜려고 애썼으며 교보문고 등에서 플랫폼 서적을 많이 들추며 연구했다고 합니다.

저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p71을 보면 저자는 10년 전 한국은 부동산 중개 시장이 플랫폼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기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는 대중교통연결, 법조서비스 등이 독자 플랫폼을 마련하는 단계였죠(배달은 한참 앞). 다만 트럭 중개는, 과연 한국에 얼마나 많은 트럭이 민간 차주에 의해 보유되는 지도 모르고, 도로에 불법 주차된 차량만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정도라서, 여기서 사업성을 찾았다면 저자의 눈썰미가 대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미 대륙에는 트럭 소유주가 무척 많으므로 아마 거기서 어떤 힌트를 얻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p116을 보면 저자는 원래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다고 자부하는 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아이트럭을 창업하고 이런저런 직원을 겪다보니 예상치 못한 많은 피해를 받았나 봅니다.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심지어는 업무 파일을 모두 삭제하고 퇴사해 버린 사람(이런 건 업무방해로 형사고소를 해야죠), 퇴사 후 악성 후기를 남긴 사람 등 테어나서 처음 겪어 보는 악질들 때문에 고생하신 기록이 책에 잘 나옵니다. 아마 미국, 캐나다 등에서는 이런 타입의 인간 유형을 못 겪어 보셨겠죠.

그런데 저는 솔직히 정 대표님이 사람을 대할 때, 북미식으로 그저 부품이나 타자처럼 대하신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국의 인적자원관리는 그 나름의 독특한 특징이 있어서 내 치밀한, 합리적인, 그리고 일방적인 계획만으로는 사람 다루기가 힘듭니다. 무조건 잘해주라는 게 아니라, 합리성만으로 사람 상대하려면, 니가 나한테 복수라도 하려 들 때 어떤 불이익이 따르는지 상대에게 확실하게 (암묵적, 명시적) 고지를 해야 합니다(경제학의 게임이론에도 나오죠). 어설프게 내 할 도리만 다하면 반드시 저런 탈이 납니다. 아니면 한국 특유의 방식으로 잘해 주든지 말입니다.

한국은 사회에 신뢰라는 게 없어서 남의 일거리를 약탈적으로 뺏고, 간도 쓸개도 다 빼 줄 듯하면서 쓰레기 점포를 권리금까지 받고 떠넘기는 사기꾼들이 버글버글합니다. 중고트럭을 매입하고 돈도 안 주고 잠적하는 등 상상을 초월한 쓰레기들이 있으며, 그러고선 "속은 게 등신이지!"를 외치며 손뼉을 치고 좋아들 합니다. 한국의 이런 독특한 현실을 파고들어, p148같은 데를 보면 구매동행서비스 같은 걸 개발하여 척박한 상황에서 운전자, 차주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개발하신 듯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에게 감성적으로 접근하면 그래도 이 험한 세상에서 내편이라는 게 있구나, 여긴 좀 다르구나 같은 생각에 이용자로서 로열하게 되죠. p182에 나오듯 플랫폼 기업이라고 하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투자사들의 태도까지 바꿔놓은 데는 이처럼 비범한 구석이 꼭 있기 마련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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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내집마련, 우리 아이 시작점
재테크 캠퍼스 명예의 전당 14가족 지음 / 진서원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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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제 눈에 먼저 띄었던 건 앞표지보다는 뒤표지였습니다. 빼곡하게 작은 글씨로 68가족, 112가족, 177가족 등의 명단(닉네임들)이 표로 정리되었는데, 처음에는 뭔지도 못 알아보고 한참을 응시했습니다. 이게, 재테크캠퍼스라는 사설 교육기관이 있는데, 이곳의 교육 방침을 충실히 따라 기어이 그 힘들다는 강남 입성에 성공한 이들의 목록입니다.

(*책좋사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물론 재테크라는 게 매뉴얼대로만 한다고 다 의도대로 성과가 나는 것도 아니고 다양한 변수가 끼기 마련이며, 출발점도 회원마다 다 다르기 마련이라서 같은 노력을 투입해도 그 효율이 같다고는 도저히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초의 목표를 끝내 성취해 낸 사람들의 걸음걸음에는 남다른 그 무엇이 분명히 깔려 있게 마련이며, 재테크 지식이나 마인드가 괜찮다고 나름 자부하는 사람이라 해도 "내집마련 사관학교"에서 다년 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정리한 방법론이라면 자세를 가다듬고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분들 사연이 다 나오는 건 아니고 그 중 14분의 잘 정리된 수기가 재미있게 수록되었습니다.

그저 사람 사는 이야기로만 읽어도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02번 사연에 실린 다이아님, 부주사님 부부의 사연은 재테크도 재테크지만, 저렇게까지나 살아온 배경, 가치관이 전혀 다른 이들이 만나서 어떻게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교본으로 읽혔네요. 이사를 해도 전 거주자의 일정과 아다리가 딱 맞지 않으면 보관이사를 또 하는 등 비용 부담이 생깁니다. 이런 디테일에도 일일이 신경을 써야, 어디서인지 모르게 줄줄 새는 돈을 막을 수 있습니다.

p108을 보면 쏘쿨님한테 좋은 팁을 얻은 로지님이, 남편인 강남별님이 부동산 중개인과 라포(rapport)를 형성하여 좋은 정보를 얻는 과정을 지켜보는 대목이 살짝 나옵니다. 이 책뿐 아니라 예컨대 제가 전에 읽었던 경매책을 봐도, 임장할 때 그냥 무작정 여기저가 돌아다닐 게 아니라 현지의 중개사들과 교유하며 거기서만 얻을 수 있는 알짜 정보를 내 것으로 만드는 넉살과 센스가 중요합니다. 많은 필자들이 젊은 커플들이라서 젊은 감각 특유의 활기찬 표현이 많았고 뭔가 좋은 기운까지 전해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잘 읽어 보면 필자 부부들이 다 상황이 다른 건 물론이고 심지어 부부끼리도 경제적으로 처음부터 넉넉했던 경우, 그렇지 않고 자린고비처럼 아껴 살아야 했던 경우 등 다양합니다. 이 수기 모음을 보면 재테크 과정도 과장 없이 매우 솔직하게들 쓰고 계십니다. "물론 우리 부부 월급의 대부분이 원리금(상환)으로 나가고 있지만..." 같은 대목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독자들과 정직하게 소통하시려는 MZ 알뜰 부부들의 필치라서 내용에 몰입이 잘 됩니다.

얼마 전 한은에서 기준금리를 내리기는 했지만 우리 나라 이자율은 신흥국치고는 아직 높은 편이며 특히 코로나 전 십 년 간은 초저금리로 살아들 왔기 때문에 자칫하면 하우스푸어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또 똑똑한 한 채 전략이 과연 향후 십 년 기간에도 여전히 통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이 14가족, 나아가 재테크캠퍼스의 비전, 전략은 다소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고 봐도 됩니다. 여튼 이분들은 전략을 그리 잡고서 뒤돌아보지 않고 빈틈없이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굳힌 분들이라서, 이 비전에 동감하는 분들에게는 글자 하나하나가 공감이 되고 흥미로울 것입니다.

이런 상급지에다 소중한 집을 장만하셨으니 얼마나 소중하고 자랑스럽겠습니까. "그야말로 집순이가 되었으며, 집이 제일 재미있고 어느 호텔보다도 편안하고 행복해요.(p136)" 사실 꼭 상급지가 아니라고 해도 내 집 첫 장만은 감격스럽고 벅찹니다. 설령 넉넉한 환경에서 살아온 분이라 해도, 재테크사관학교애서 마련한 패러다임대로 실천하다보니 다들 짠돌이 짠순이가 되었습니다만 마음만은 성취감으로 가득합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치밀한 계획 수립과 실천을 거친 이들의 석세스스토리는 이처럼 제3자가 봐도 짜릿하고 흐뭇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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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神 보이는 神
이승남 지음 / 문이당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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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단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은 생각도 못할 이야기를 이렇게 장엄하게 전개하신 결과물을 보면, 창작의 배경에 어떤 다른 사연이 따로 있지 않으실까 짐작도 잠시 했습니다만, 독자로서 일단 지나친 개인적 비약은, 이 서평 중에는 잠시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김동리의 단편 <무녀도>라든가 그 확대 개작 <을화> 같은 걸 보면, 한반도의 토착 무속 신앙과 christianity의 한판 대결상이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고등종교가 이끄는 인간 영혼의 정화와 의화는 일개 푸닥거리의 사이비 혼씻김과는 근본에서부터 구별되는 이성적, 영적 과정이겠습니다만 어찌된 일인지 21세기 한국에서는 아직도 전근대적인 미신이 강남 번화가에서까지 활개를 칩니다. 그래서 일선 정통 교회의 목회자들이라든가 독실한 중견 신도들까지도, 엄연히 현실에서 힘을 떨치는 샤머니즘과 맞서 투쟁을 힘겹게 펼치는 중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참된 기독교 신앙을 가꾼다고 가꾸지만, 마음 속에는 수천년 반도인의 유전자 안에 내려오는 잡귀 숭배의 본능이 여전히 꿈틀댐을 자각하고, 끝없이 그를 몰아내기 위해 투쟁하는 어느 은퇴장로님의 처절한 고백이라고 이 작품을 해석해도 될 듯합니다.

신(神)은 본래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알라이든 야훼이든 혹은 부처님이든 속성상 눈에 보이지 않아야 사리에 맞습니다. 신의 역사함은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에 두루 미치나, 신 자체가 보인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아마도 사이비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해서는 딱히 새로울 게 없고, 보이는 신 이야기가 이 소설 속에서 정말 재미있게, 살벌하게 전개되는 것이니 독자가 여기에 포인트를 두고 읽어야 합니다. 사이비가 사이비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마음 속 사이비의 유혹이 워낙 달콤하여 그를 쉽게 떨칠 수가 없는 게 우리들 약한 인간의 처지입니다. 도륙도 사실 사탄의 도구로 비참하게 끌려다니는 불쌍한 인생일 뿐, 그를 미워하고 단죄하는 게 성도의 본분은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도륙 같은 자도 (그를 도륙하기보다는) 온전히 진리와 빛의 세계로 이끌어야 하며, 그래서 이 장편 안에서 힘겹게 전개되는 주인공의 투쟁이 더 눈물겹다고 하겠네요.

이 소설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참 많습니다. 예를 들어 p88 같은 곳을 보십시오. 보송암의 무당 선구슬은 전도사가 개인적 만남을 세속적 장소에서 청하자 기다렸다는 듯 전혀 망설임 없이 수용합니다. 암자에서는 손님을 압도하려는 기싸움을 벌이려던 노련한 직업 무당이었는데, 상대방이 단정한 신사이고 타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품과 매력이 있으니까 커피숍(아마도?)에서는 바로 양순하고 다소곳한 여인의 자태로 나옵니다. 이게 남성과 여성의 차이이기도 하며, 이성과 명징한 사고를 중시하기도 하는 고등종교와 무속의 엇갈림이기도 합니다. 큰무당이든 새끼박수이건 간에 무속인은 그저 제 본능에 충실할 뿐 어떤 에고나 초자아에 대한 충성심 같은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걸 두고 전도사가 방심하여, 아 이 사탄을 주님의 길로 이끄는 방법이 생각보다 쉽겠구나 여긴다면 크나큰 착각입니다. 진짜 지옥문은 지금부터 열리는데 저는 벌써부터 짐작이 되었더랬고 아니나다를까 줄거리는 그쪽으로 흘러갑니다.

사탄의 전도에도 성공한 성도의 교회는 큰 명성을 얻어 번창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사탄이 전략적으로 일보 후퇴하여 교회를 몸주삼아 세상 돈을 빨아들여 궁극의 승리를 이루려는 암수였습니다. 끝내 전도사는 식물인간이 되어 보송암으로 도로 모셔져 크나큰 무속 비즈니스의 도구로 쓰이는 비참한 지경에 빠지는데, 이처럼 "다음 기회를 노리는" 사탄의 간교함이란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입니다. 사탄만 탓할 게 아니라 사실 전도사한테도 문제가 큽니다. 자신이 매력으로 무당을 반하게 만들었다 여겼겠으나, 사실은 거꾸로 자신이 여인네의 색기에 정복된 게 아니었습니까? 또 세상의 칭찬과 인정에 도취하여, 예수의 참된 가르침은 잊고 교회를 돈벌이 소굴로 타락시키지는 않았습니까? 사탄과 무당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을 진솔하게 성찰할 일입니다. p196에 나오듯 사탄 역시 신의 피조물이며 크게 보면 다 신의 뜻을 구현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의 얕은 수에 넘어가는 우리 인간이 문제일 뿐입니다.

색에 빠지면 의인도 짐승과 다를 바 없이 타락합니다. p213을 보면 모세도 젊은 여인을 취했고 처첩 천 명을 둔(정말요?) 솔로몬 왕도 또 쳐녀를 가지려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 겨레를 애급의 노예 꼴로부터 해방시킨 모세도 죽을 때까지 가나안의 복지에 안착하지 못했고(꼭 그것때문만은 아니겠습니다만), 솔로몬의 사후 아들 르호보암의 대에 왕국은 두 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p233에 나오듯 죽음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눈에 보이면 그건 이미 죽음의 현상이 아니고 살아 있는 뇌가 장난을 치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는 어디이며 천국은 어디 있습니까?(p257)" p276 이하에 펼쳐지는 "사탄의 총리대신"이라는 챕터는 마치 21세기판 요한 계시록을 읽듯 장엄하고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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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영화 레시피 - 10대의 고민, 영화가 답하다 특서 청소년 인문교양 19
김미나 지음 / 특별한서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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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세상과 역사를 압축한 텍스트라서 잘만 찾는다면 그 안에 모든 질문의 답들이 예비되었을 수 있습니다. 10대들은 성장 과정에서 온갖 고민이 있겠고, 그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답을, 적절한 작품 안에서 관련 있는 시퀀스에서 감상한 후 강렬한 감동과 함께 수용할 수 있겠습니다. 책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자신감, 용기, 깨달음, 친구, 위로, 미래의 꿈 등이 필요할 때에 활용할 수 있을, 저자 김미나 씨가 제시한 레시피가 담겼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게, 마치 실용서 편제처럼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레시피들이 죽 나열된 게 아니고,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는 마녀(?)와, 중3 박준희의 우연한 만남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가 책의 메인입니다. 그 안에서 잠재적 독자의 마음은 이 박준희가 대변하는 역할입니다. 마녀는 생긴 것뿐 아니라 이름도 중성적인데 이준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마녀 이준은 영화 감상이 취미인데 "쭌"으로 친구 사이에 통하는 박준희가 고민이 있으면 그걸 미처 털어놓기도 전에 마녀가 십 리 앞을 내다보고 영화로 처방을 척척 해 줍니다. 영화 레시피도 레시피지만 마녀와 쭌의 이런 티키타카도 재미있습니다.

아이 필 프리티는 2018년에 나온 영화인데 저도 몇 년 전 어느 일요일 낮에 EBS에서 틀어 주길래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 영화도 (제목과는 달리) 안 예쁜 여자들이 잔뜩 나와 자존을 찾아가는 이야기인데, 젊었을 때 세계를 주름잡은 슈퍼모델 나오미 캠벨도 조연으로 나옵니다. 이게 원래는 고전 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에서 여주인공 마리아(충분히 예쁜)가 남친 토니를 생각하며 들떠 부르는 노래인데, 로큰롤의 아버지이자 천재 뮤지션인 리틀 리처드가 (남자인데도) 코믹하게 부르는 다른 버전도 있습니다(이 영화와는 직접 관계는 없지만 노래가 극중에 나오긴 합니다).

쭌도 안 예쁜데다 공부도 못해서 고민인데, 마녀는 좀 놀라운 처방을 내립니다. 애니 말고 실사판 2019년작 <알라딘>을 대조하여, <아이 필 프리티>의 주인공 르네는 겉은 안 예쁘지만 내면이 성숙하고, 반면 알라딘은 어찌어찌 지니의 도움으로 왕자가 되었지만 내면, 실질은 그저 고아에다 찌질한 도둑놈일 뿐인데, 쭌 너는 과연 둘 중에 누구를 닮아야 하겠냐며 마녀가 단칼에 고민을 정리합니다. 허, 그걸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나 싶었는데, 감독 가이 리치가 혹 이 의견을 듣기라도 한다면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ㅋㅋ 아니 그게 아니라 이준이 아마 같은 마씨 계열인 지니한테 무슨 정보를 얻고서 하는 소리일 수도 있죠. 뭐 꿩 잡는 게 매라고, 이런 충고를 듣고 쭌이 힘을 얻기라도 한다면 뭔 상관이겠습니까. 이렇게 두 영화를 나란히 놓고 레시피가 진행되어서 더 생동감이 있습니다.

"거짓말 중에 가장 최악은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이다(p102)." 마녀가 쭌에게 일침을 놓습니다. 마녀의 가르침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삼아서인지 꽤나 생생하고 실감나는데 "생각이라는 게 한번 굳으면 잘 안 바뀐다"는 말에서도 그런 느낌이 듭니다. p113에서 마녀는 I can speak의 뜻이 영어를 (그간의 노력을 통해) 드디어 몇 마디 하게 되었다는 뜻도 되고, 이제는 나의 참된 자존을 찾아 내 언어(위안부 강제 연행에 대한 이야기 포함)를 내 뜻대로 말하게 되었다는 뜻도 된다며 교과서적으로 모범적인 해석을 내립니다. 민족의 아픈 역사 한 자락을 개인의 몫으로 살아낸 이 위대한 할머니 역을 맡아 나문희씨가 좋은 연기를 보였죠. 반면, 나이 칠십을 먹어도 여중생 수준의 지능으로 되지도 않은 환상을 우기며 본인을 연예인으로 여겨달라는 어딴 노파의 투정이란 참으로 추합니다.

예전에 송건호 선생은 기독교 성경 구절을 다소 변형하여  "언론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일어서 소리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p210 이하를 보면 2015년작 <스포트라이트>가 소개되는데, 보스턴 글로브가 폭로한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 실화를 소재로 삼았습니다. 여기서는 쭌과 마녀의 개인적 스토리가 살짝 톤을 낮추고 객관적인 담론이 메인입니다. 청소년 중에는 커서 기자 되기를 꿈꾸는 이들도 있겠는데, 언론인의 핵심 자질은 현란한 문장력이 아니라 진실 앞에 눈감지 않는 용기와 양심이라고 마녀는 준엄히 이릅니다. 에필로그에서 마녀는 쭌과 다음 영화를 고르며 포근한 대화를 재개합니다. 쭌의 방학이 대단히 값지게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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