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사람 열린책들 한국 문학 소설선
고수경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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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 보호법>, <옆사람> 등 모두 여덟 단편이 실렸습니다. 고수경 소설가는 5년 전쯤 데뷔한 신인 작가분인데,  이 책에 대한 추천사로는 작년(2024) 이상문학상을 받은 조경란 작가가 쓴 게 책 뒤표지에 나옵니다. 누가 이웃이고 누가 타인인지 가장 민감한 감성을 발동하여 판별해야 하는, 온갖 기만과 폭력과 협잡이 난무하는 이 21세기에, 따뜻하고 차분하게, 독자로 하여금 모종의 성찰을 하게 돕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Life goes on. 여태 자신을 돌봐 주던 할아버지가 곧 돌아가실지 모르지만 지우에게는 "공부"하느라고 여유가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책도 학교도 학원도 아닌 유튜브가 첫째가는 스승이라서, 지우는 (학교 공부가 아닌) 혼자 살아남는 방법 공부를 하느라고 열심히 영상을 봅니다. 안쓰럽기도 하지만, 절망이나 불안감에 빠지지 않고 저렇게 의연하게 생존의 스텝을 밟으니 대단합니다. 젊은 교사 강은 읊조립니다. "윤아야 지우야, 너희 정말 괜찮을까?(p41)" 괜찮을 리가 없지만 아이들의 시선과 생각은 또 다릅니다. 불행이 느닷 행복으로 반전하진 않겠으나 사람의 귀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한, 세상은 덜컹거리면서 어떻게든 돌아는 갑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허용된 공간이 있는데 이건 상속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방>에 나오는 연호와 소희에게처럼 계약에 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소설 속 상황이긴 하지만 이 둘은 아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계약의 디테일을 꼼꼼하게 따져 가며 자신들에게 허여된 공간의 경계를 조심스레 지키려 듭니다. "그럼 우리는 주아 세대 창고에 살고 있는 거야?(p58)"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공간은 알고 보면 누군가의 창고, 헛간, 화장실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 방이 아닌데 뭐.(p61)" 마지막 문장이 의미심장한데, 여튼 집에 머무르는 동안 열쇠는 이 젊은 커플의 점유임이 확실하며 아직은 신선한 상대의 장점도 또렷이 인정될 수 있겠지요. 

호수에 알파벳이 붙으면 그건 사람 사는 공간이 아니라, 예컨대 무슨 생떽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소행성 이름으로나 적합한 걸까요? 독자인 저는, 송에게 구태여 그런 말(p91)을 하는 "나"의 태도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알파벳이 다른 글자도 아니고 B였다는 게 진짜 문제였을지 모릅니다. 여튼 송은, "나"의 거소 증명을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이웃입니다. 이렇게 존재의 구체성을 소홀히 관리했다는 게 "나"의 잘못이라면 잘못입니다. 집주인인 김정훈(p101)은 비상시 마스터키를 갖고 다 열어 볼 권능이 있으니 세입자들은 그 이유라면 이 사람 앞에서 작아집니다. 밤이라고 해도 더우면 에어컨을 켜야지 어쩌겠습니까. 

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질 않으면 그건 이미 분실이지, 객관 주관을 가릴 건 아닙니다(객관적으로는 아니지만 주관적으로는 분실이다). 입대한 남 제대날짜는 눈깜짝할 새 다가오듯 남이 끌고 다니는 짐은 정당한 사연이 있는(?) 내 짐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은희가 지영에게 무심히 던진 저 말(p142)은 이기적인 세상사 그 핵심을 압축합니다. 은희는 아대만 차고 있을 뿐 테니스 치는 것도 싫어하는데(p123), 저는 이 작품집 통틀어서, 단순 공감을 넘어 이해까지 하고 싶어진 유일한 인물이 바로 은희였습니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건 새뿐이 아닙니다. "아내"는, 베란다 난간에 일단 앉아 가출을 위협하는 "소금"한테, 일단 말로 하자며 무기력한 회유를 시도합니다. 남편뿐 아니라 밖에서 보는 독자도 기가 막힙니다. 우리 개는 물지 않는다며 주위를 설득하는 애견인의 변호가 설득력없듯, 아내가 "웬만한 애보다 순해요"라며 감싸는 시도는 부리의 긺과 날카로움에 대한 지적 앞에 논파됩니다. 배송비를 충분히 냈다면 스크래치 없이(p175) 욕조가 안전히 설치되어야 하듯,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오르는 수위처럼 우리의 소박한 기대도 어느 정도까지는 만족되어야 하지만 이걸 가장 악착같이 가로막는 건 숱한 그 타인들의 장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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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공중 호텔 텔레포터
정화영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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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 떠 유유히 하늘을 유람하는 호텔. 보통 공중OO이라고 하면 바빌론의 공중 정원처럼 그저 높은 고도에 불가사의하게 위치를 잡았다는 뜻인데요. 이 소설에서는 문자 그대로 그런 놀라운 기술이 구현되어, 마치 20세기 후반의 유람선 퀸엘리자베스처럼 돈 많은 이들, 혹은 이런저런 사연이 있는 인생들의 욕구를 충족시킵니다. 19세기 SF 소설가 쥘 베른의 <바다 밑 20만리>에 나오는 고독한 네모 선장의 노틸러스호도 연상되는데, 사실 "비밀의 공중 호텔"의 컨셉에 더 가까운 건 저 개인적으로는 60년 전 영화 007 <여왕폐하 대작전(On her majesty's service)>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억지이지만, 굳이 그런 걸 찾자면 말이죠). 고액을 지불하면 특별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이 시설 측의 공식 안내를 보자면 더욱 그런 느낌이 깊게 들었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KD의 원작과 폴 버호벤의 영화판이 공히 주제로 삼는 바는, 진정한 삶의 흔적이 정직히 녹아든 기억이 온전해야 그게 인간이지, 인위적으로 조작 가공된 환상에 집착한다면 그건 당장이라도 죽어 없어져 마땅한 쓰레기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사람은 80년 가까운 생 동안 별의별 시련, 좌절, 상처를 다 만나게 마련이며 그 결과로 아픈 기억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갖고서 삽니다. 이걸 스스로의 인격 도야와 수양으로 성숙하게 극복을 해 내야지, 만만해 보이는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미친 모노드라마(아무도 안 봐 주는)를 제 혼자 공연하려 든다면 그건 스스로의 상처를 치명적으로 덧나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 주변의 온갖 미친 사람들(늙으나 젊으나)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호텔 벨보이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왓쳐(p33)라 불립니다. 그냥 번호로만 인식되고 처우되어도 아무 상관 없다고 그들 스스로 말합니다. 1인칭 주인공 차석준은 이 지극히 낯선 환경에 당황하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본연의 목적을 이루려 애씁니다. p41에서 석준은 충격적인 진단을 마스터한(p148에서 드디어 그 본색이 나오는!)으로부터 듣습니다. "기억이 파편화되었네요." 이 진단을 석준은 기억의 그림자화로 해석합니다. "내 병은 내가 알아." 같은 말을 흔히 듣기도 하는데, 사람은 아무리 전문 지식이 부족하다 해도 자신이 가진 문제점은 자신이 잘 압니다. 석준이 바로 "그림자"라는 보조개념을 입에 올리는 대목에서 그가 여태 얼마나 스스로의 상처를 힘겹게 보듬었을지 짐작되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영화 <토탈 리콜>에도 리트리벌 큐(p41, p64)에 해당하는 게 나왔죠. 

일란성 쌍둥이는 출생 시각이 미세하게만 차이나는 게 보통이라서 sibling rivalry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심하기도 합니다. 소설에서 송예지와 언니 송예빈(p96)은 어떠했을까요? 아직 엄마는 언니 예지가 죽은 걸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안타까운 모습인데, 이럴수록 살아남은 자매 한쪽은 그만큼 깊은 상처와 강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십시오. 마스터의 권유에 따라 트라우마를 인위적으로 삭제하라는 처방을 받았으나 예지 엄마의 기억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립니다. 자신이 과거 식모로 살았는지 첩으로 취급받았는지 귀부인으로 놓았는지 전혀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쟁이 늙은 폐인이 되어 버린 인생도 우리 주변에는 있습니다. 그에 반해, 소설 속의 예지는 나이에 비해 참 의젓합니다. "기억을 지워 버리면 떠난 사람에게 미안하잖아." 사람은 무릇 이래야 어른이고, 온전한 인격체입니다. 망각과 자기기만은 육체와 정신을 좀먹는 마약과도 같습니다. 상처는 스스로 극복해 내어야 합니다. 

p126에 충격적인 진실이 또 드러납니다. "실종되었던 사람들이 다 여기 감금되었던 거야?" 구태여 미셸 푸코의 철학 이론을 원용하지 않더라도, 감금과 처벌, 인간소외와 폭력은 결코 따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p154에서 하이힐 원피스 차림의 여인이 등장하여 석준의 간절한 그리움이 드디어 채워지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왜 엄마의 얼굴이 아빠와 똑같을까요? 제가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대목이었습니다. 아, 사람의 기억이란, 참 기만적이고 교묘한 방법으로 아포리아로부터의 출구를 모색하기도 합니다. p160 이하에서 드러나는 진상은 더욱 충격인데, 작가의 상상력에 정말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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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책 번역이 쉽다고?
김서정 지음 / 책고래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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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나 미국 등에서는 어린이의 정서 함양과 발달(만)을 위한 책들이 섬세하고 정교하게 기획, 제작, 출판됩니다. 한국도 요즘은 우수한 어린이 책이 많이 나오지만 아직도 아쉬운 점들이 있는데, 그래서 김서정 선생님 같은 전문가의 손으로 해외 우수 어린이 도서들이 특히 번역될 필요가 절실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정이 그런데도, 어린이 책 번역은 막연히 쉽겠거니 하는 선입견을 받기 쉬운 게 또한 현실입니다. 

(*책좋사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김서정 선생님이 p14에서 특히 설명하는 것처럼 그림책의 경우 그림의 고유한 문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게 비전문가가 보기에는 무심히 지나치거나 의미를 곡해하기 쉬워도 전문가의 눈에는 이미 심심상인(心心相印)의 경지처럼 사소한 표현에서도 메시지가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외국 그림책을 번역할 때에는 번역가가 일러스트 안에 작가가 분명히 심어 놓은 메시지까지를 모두 캐치하고 텍스트의 번역에 이를 담아야 하는데, 아동 컨텐츠 번역가는 그래서 문학, 넌픽션, 회화에 두루 소양을 갖춰야 기획의 당초 목표가 달성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제목이 "어린이 책 번역이 쉽다고?"이긴 하지만 저는 약간은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p77 같은 곳을 보십시오. 여기서 저자는 성공하는 어린이 책 공통 요소 10개 사항을 자신의 관점과 경험에 의해 추출하시는데, 후~~ 읽고 소비하기는 쉬워도 어린이 책이라는 게 제대로 만들기가 이렇게나 어려운 작업인가, 나아가 여태 내가 제대로 어린이 책을 읽어 온 게 맞나 하는 회의감까지 느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책 자체가 평소에 어린이 책 출판 과정 일반에 대한 깊은 고민과 연구를 거친 독자라야, 저자의 의도가 정확히 전달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어린이 책 번역이 쉽다고?'라는 책이 쉽다고? 과연?"이라며 메타 질문을 한 번 더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피터 래빗 프랜차이즈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논의가 p89 이하에 나옵니다. 좀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책 저자 김서정 선생님 같은 최고의 전문가라 해도, 이론상으로 이 분야에 깊은 관심이 있었거나 대단히 열성적인 어머니가 아니고서야 그 성함까지는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1996년 한국프뢰벨에서 나왔던 <피터 래빗 이야기>는 아직도 이 고전을 놓고서 한국어 번역본의 결정판으로 꼽히는데, 김서정 선생님과 함께 작업하셨던 신지식 선생님에 대해서는 아마 아동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분이라면 그 존함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아동문학의 문외한이지만) 독자인 저만 해도 신지식 선생님의 창작 동화(아주 다작을 하신 분입니다)를 읽고 자란 세대입니다. 신지식 선생님은 5년 전 향년 90세로 타계하셨습니다. 아무튼 이 대목을 읽어 보면, 정확하고 올바른 번역이 이뤄지기 위해 어떤 노력이 기울어져야 하는지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습니다. 

독자인 저는 예를 들어 p93의 ④ 같은 지적을 몇 번이고 읽고 그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대목은 가뜩이나 잘된 번역으로 꼽히는 저 한국어판에 대해, 공역자였던 저자께서 스스로를 반성하며 치밀하게 서술한 곳이라서 매우매우 유익합니다. 지금 김서정쌤의 이 책에 버릴 곳이란 한 군데도 없으나 특히나 압권이라 부를 만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And then he ate some radishes.라는 원문을, 공역자들은 "싱싱한 무도 조금 맛보았지요."라고 옮겼는데, 이제와서 보면 부연(이 자체는 경우에 따라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순화, 오역된 부분이 보인다는 겸손한 말씀입니다. 싱싱하다 뭐다 하는 부연은, 이 대목 원저자의 의도를 생각할 때 불필요하게 옆으로 퍼지면서, 행동의 일직선 방향성과 박자를 방해할 뿐이라는 저자의 자성을 읽으며 저는 정말 감탄했습니다. 이런 지적은, 우리들 일반인이 무슨 아동문학 번역이란 분야에 전문적으로 종사하지 않아도, 영문학을 원어 그대로 감상하거나 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포인트인 것입니다. 

"싱싱함"이 불필요한 번역인 줄은 알겠으나, 단, 왜 ate가 부정확한 번역인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스스로 지적(자성)만 하시고 이 책 중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독자인 제가 주관적으로 짐작하여 몇 마디를 이 후기 중에 적어 볼까 합니다. 무를 조금 맛보았다는 건 낱개를 먹고 그 일부를 남겼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상황은, 아마도 무가 쌓여 있고, 그 중에 몇은 완전히 먹어치웠다는 데 가깝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1개의 2/10만 먹고 남긴 것과, 10개 중 2개를 싹 먹어치운 건 다르겠지요. some이란 단어가 한국어로 변용되며 끼칠 수 있는 오해의 양상은 다양합니다. 단, 저자께서 이 파트에서 지적하시는 다른 중요한 오류에 비하면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동화는 기술 서적이 아니기에 기본적인 심상을 해치지 않는다면 한국말의 흐름을 살리는 범위에서 용인할 만한 문장입니다(라는 건 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어린이 책 번역에 대한 현실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방법론과 예시가 많기에 쉽고 가볍게 읽히는 책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꼭 아동문학 관련이 아니라도, 무엇이 영문학 일반의 바른 감상과 독해일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본 독자라면 흥미롭게 몰입할 수 있는 멋지고 유익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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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인사
함정임 지음 / 열림원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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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작가 함정임 선생의 이 신작을 보고 막연히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이란 장편이 생각났었습니다. 2021년 7월 그 작품은 영국의 대거(Dagger) 상도 받았더랬는데, 대략 11년 전인 2013년 11월에 제가 쓴 리뷰도 있습니다. 당시 퇴근길에 허겁지겁 귀가하여 간신히 서평 데드라인을 맞췄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신작 뒤표지에 윤고은 작가의 추천사도 있어서 더 흥미를 갖고, 두 작품을 비교하며 읽게도 되었습니다. 물론 제목에 "밤"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점 말고는 형식적인 공통점이 거의 없으나, 아무튼 개인적 기억에 더 힘입어 몰입감 있는 독서를 하게도 되었네요. "호모 비아토르(떠도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책좋사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10년 전인 2015년 1월,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테러로 인해 프랑스의 만평가인 엡도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분개한 프랑스와 전세계의 시민들이 "내가 샤를리다(Je suis Charlie)"를 외치며 불관용과 폭력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전개했었는데, p30에 "하나의 현상이 되어 버렸다"며 그 일이 언급됩니다. 허핑턴포스트는 한국에서도 나오고 그 훨씬 전부터 프랑스에서도 나왔는데, 그걸 "허핑턴프랑스"라고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조아킴 롱생(Joachim Roncin)이라는 분(p15 등)이 그 창안자("창시자". créateur. p31)라고 당시에 말들 했었는데 이 소설에도 언급이 됩니다. 미나는 저 창시자라는 말이 눈에 띈다고 하는데 독자인 저는 본문 중에 악상(accent)까지 정확히 박은 섬세함이 눈에 띄었습니다. p84를 보면 장(Jean)이, 삼성, 엘지 등 한국 기업 이름을 말할 때 액센트까지 넣는다는 미나의 말도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글자를 잘못 읽고 파리-n으로 봤는데 다시 정확히 보니 파라-n(p17)이었습니다. 요즘 이런저런 독서모임이 많은데 이 그룹은 독특하게도 "묵독(默讀)" 컨셉입니다. 한때 낭독의 발견이라는 TV 프로그램도 있었지만 독서모임을 갖는 이유는 성원들 간의 대화, 유쾌하고 고양된 감정이 깃든 소리로 채우는 게 주된 목적 중 하나인데, 침묵으로 오롯이 텍스트에 집중한다니 뭔가 특이하면서도 한편으로 그게 맞겠다는 생각도 들었네요.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이 분위기에 살짝 생경하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는 오히려 잘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phantasmagoria는 침묵 중에 더 잘 구현되지 않겠습니까. 

미나가 윤중과 카톡을 주고받는 동안 장은 느긋하게 속도를 밟으며 파리 교외 국도를 달립니다. 이대로 어디를 향할까. 리용, 마르세유, 니스만 해도 꽤 먼데 뭐 로마까지 달리자고? 장 다운 얼척없는 제안입니다. 장은 모스크바 체류 시절의 기억을 말합니다. 굼(Gum)이라는 백화점을 느닷 말하는데 키릴 문자로는 Гум이라고 쓰죠. 여기서도 또 발터 벤야민이 나오는데(p84) 독일인이면서도 영원한 국외자로 떠돌았던 그는 볼셰비키 혁명 9년 후인 1926년 이곳을 들러 마트료슈카를 구입합니다. 발터 벤야민과는 달리(?) 여전히 장은 굼의 파사쥬에 주목합니다. 장의 대사대로, 19세기 말도 아닌 공산혁명 직후에도 바로 폐쇄되지 않고 자본주의 허영의 상징(장이 이런 말까지 하진 않았습니다만)을 열심히 디스플레이한 이 백화점의 운명이 기이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니스와 산레모는 그리 멀지 않은데 서울에서 가평까지의 직선거리보다 짧습니다. 그러나 산레모는 중세부터 제노바 공화국 소속이었고 근대 들어서는 피에몬테 왕국에 병합되었던 이탈리아 영토입니다. p110에서 언급되는 사랑의 아픔, 원제목은 책에도 나오듯이 Je suis malade인데 묘하게도 저 앞의 조아킴 롱생의 챈트하고도 어구가 일부 겹치네요. 미나는 저 노래에 대해 산레모 가요제 참가곡인 것처럼 말하는데, 제가 알기로는 세르주 라마(이분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가 이 노래로 산레모에 출전한 적은 없습니다. "조금만, 이대로.(p151)" 좁은 공간에서 장과 미나의 키스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영원히 지속될 듯한데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둘의 자유로운 영혼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밤의 진실을 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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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 너의 별은 특서 청소년문학 42
하은경 지음 / 특별한서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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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경 작가님이 간만에 쓴 청소년 SF물입니다. 비록 배경은 우리 은하 전체에 걸쳐 다른 행성들을 넘나드는 범위지만, 독자인 저는 개인적으로, 근래 들어 국경과 문명 사이에 높고 험한 장벽을 쌓아올리는 미국이란 나라의 고립주의, 폐쇄주의가 바로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힘들게 국경을 넘어온 엄마한테서 아이을 뺏고, 간신히 호구지책을 마련한 노동자에게 불법이민자의 낙인을 찍으며 쫓아내고, 심지어는 범죄자의 누명을 씌우기까지 합니다. 1923년 일본의 간토 지역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해지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며 집단 광기, 살인을 부추긴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어지러운 세상에서 소수자와 이방인은 가장 손쉬운 희생양이 되기 마련이죠. 

(*북뉴스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영미법에서 쓰는 용어 중에 alien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방인, 외국인이라는 뜻도 되지만(한국인들은 어느 SF 프랜차이즈의 영향으로, 입에서 강산성액을 내뿜는 우주 괴물을 바로 떠올리겠죠) 대개는 불법체류자를 가리킵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격인 알마는 실제 다른 별(아르파라)에서 오기도 한 처지이며, 원 거주자들에게 핍박받는다는 이유에서도 alien이 맞습니다. alien이라면 품은 꿈도 박탈당해야 할까요? 알마처럼 나이가 어린 영혼에게 일어난 곤란이고 비극이어서 지켜보기가 더욱 가슴 아픕니다. 다른 행성에서 온 알마에게 살인 혐의가 던져지자 친구 김윤설은 크게 분노합니다. "어떻게, 잘 알아 보지도 않고...?" 

돌아가신(마약범과의 총격전 중 사망. p95) 아버지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경찰직을 젊은 나이에 지원하는 젊은이. 현실에서나 픽션 속에서나 자주 우리들이 접하며 이 소설에서도 강시오가 그런 역할입니다. 그를 바라보는 서 국장, 생전에 강시오의 부친과 둘도없는 친구이기도 했고 살벌한 치안 유지 업무 수행에 있어서도 서로를 의존했던 직장 동료였습니다. 서 국장은 강시오를 무척 아끼지만, 의욕이 지나치게 앞서 사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인내가 부족한 걸 안타깝게도 여깁니다. 

한편, 알마한테 살해당했다고 의심되었던 희생자는 젊은 클론이었는데 이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해집니다. 박영모(p33)라는 사람은 클론을 만들어낸 장본인인데, 미래 사회에서 클론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는 있으나 전혀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들이며 이 참상을 만들어낸 박영모가 큰 비판을 받는 이유입니다. 여튼 이래서 클론 인권운동가(p65)라는 직분까지 생겼을 정도죠. 

한편, 도심 한복판에서 외계인들을 추방하라는 혐오 시위(p45)가 자주 벌어지고, 이는 발크란 행성 같은 타지에서 지구인들이 잔혹하게 처분된 실제 사례 때문에 더 큰 동력을 얻습니다. 발크란 같은 강력한, 불의한 타자(他者)의 존재가 사회의 극우화를 더욱 부추기게 마련이죠. 전아린 센터장도 지구인인 이상 혐오 시위대의 주장에 전혀 귀를 닫을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지성인으로서의 양심이 우선입니다. 

이 소설의 세계관에서도 언제나 근본적인 문제는 경제입니다. 왜 미국이 우크라이나와 그린란드에 눈독을 들일까요? 자기 나라에 없는 자원이 묻혔거나, 그 자원을 손쉽게 가공할 수 있어서입니다. p92에서 서 국장은 강시오의 부친이 왜 죽었는지 그 진상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암브로시오라는 쌍떡잎식물이 마약의 원료로 쓰이고, 미나바르 행성인들과 잘못 엮여 결국 그런 사고가 터졌음을 알고 시오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한편 타르칸 제국은 은하를 지배하는, 매우 폭력적인 성향의 집단인데, 알마는 그들의 강요로 인해 자신이 추구하지 않는 방향성을 무용에 표현할 처지에 몰립니다. 마치 박 정권 하에서 대통령 찬가 작곡을 강요받았다는 신중현의 예도 생각나게 되네요.   

이 소설에서 스마트링크(p17, p141 등)라는 인프라가, 마치 우리들이 쓰는 인터넷이나 인트라넷처럼 소설에 자주 등장합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사람의 거친 욕망이나 불의한 충동은 미래에도 전혀 변하지 않아 씁슬하지만, 시오의 정의롭고 예리한 지성은 사건의 진상을 백일하에 드러내기 위해 쉬지 않고 목표룰 향해 나아갑니다. 마지막에 전혀 예상치 않았던 반전이 있어 더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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