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내집마련, 우리 아이 시작점
재테크 캠퍼스 명예의 전당 14가족 지음 / 진서원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에서 제 눈에 먼저 띄었던 건 앞표지보다는 뒤표지였습니다. 빼곡하게 작은 글씨로 68가족, 112가족, 177가족 등의 명단(닉네임들)이 표로 정리되었는데, 처음에는 뭔지도 못 알아보고 한참을 응시했습니다. 이게, 재테크캠퍼스라는 사설 교육기관이 있는데, 이곳의 교육 방침을 충실히 따라 기어이 그 힘들다는 강남 입성에 성공한 이들의 목록입니다.

(*책좋사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물론 재테크라는 게 매뉴얼대로만 한다고 다 의도대로 성과가 나는 것도 아니고 다양한 변수가 끼기 마련이며, 출발점도 회원마다 다 다르기 마련이라서 같은 노력을 투입해도 그 효율이 같다고는 도저히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초의 목표를 끝내 성취해 낸 사람들의 걸음걸음에는 남다른 그 무엇이 분명히 깔려 있게 마련이며, 재테크 지식이나 마인드가 괜찮다고 나름 자부하는 사람이라 해도 "내집마련 사관학교"에서 다년 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정리한 방법론이라면 자세를 가다듬고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분들 사연이 다 나오는 건 아니고 그 중 14분의 잘 정리된 수기가 재미있게 수록되었습니다.

그저 사람 사는 이야기로만 읽어도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02번 사연에 실린 다이아님, 부주사님 부부의 사연은 재테크도 재테크지만, 저렇게까지나 살아온 배경, 가치관이 전혀 다른 이들이 만나서 어떻게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교본으로 읽혔네요. 이사를 해도 전 거주자의 일정과 아다리가 딱 맞지 않으면 보관이사를 또 하는 등 비용 부담이 생깁니다. 이런 디테일에도 일일이 신경을 써야, 어디서인지 모르게 줄줄 새는 돈을 막을 수 있습니다.

p108을 보면 쏘쿨님한테 좋은 팁을 얻은 로지님이, 남편인 강남별님이 부동산 중개인과 라포(rapport)를 형성하여 좋은 정보를 얻는 과정을 지켜보는 대목이 살짝 나옵니다. 이 책뿐 아니라 예컨대 제가 전에 읽었던 경매책을 봐도, 임장할 때 그냥 무작정 여기저가 돌아다닐 게 아니라 현지의 중개사들과 교유하며 거기서만 얻을 수 있는 알짜 정보를 내 것으로 만드는 넉살과 센스가 중요합니다. 많은 필자들이 젊은 커플들이라서 젊은 감각 특유의 활기찬 표현이 많았고 뭔가 좋은 기운까지 전해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잘 읽어 보면 필자 부부들이 다 상황이 다른 건 물론이고 심지어 부부끼리도 경제적으로 처음부터 넉넉했던 경우, 그렇지 않고 자린고비처럼 아껴 살아야 했던 경우 등 다양합니다. 이 수기 모음을 보면 재테크 과정도 과장 없이 매우 솔직하게들 쓰고 계십니다. "물론 우리 부부 월급의 대부분이 원리금(상환)으로 나가고 있지만..." 같은 대목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독자들과 정직하게 소통하시려는 MZ 알뜰 부부들의 필치라서 내용에 몰입이 잘 됩니다.

얼마 전 한은에서 기준금리를 내리기는 했지만 우리 나라 이자율은 신흥국치고는 아직 높은 편이며 특히 코로나 전 십 년 간은 초저금리로 살아들 왔기 때문에 자칫하면 하우스푸어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또 똑똑한 한 채 전략이 과연 향후 십 년 기간에도 여전히 통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이 14가족, 나아가 재테크캠퍼스의 비전, 전략은 다소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고 봐도 됩니다. 여튼 이분들은 전략을 그리 잡고서 뒤돌아보지 않고 빈틈없이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굳힌 분들이라서, 이 비전에 동감하는 분들에게는 글자 하나하나가 공감이 되고 흥미로울 것입니다.

이런 상급지에다 소중한 집을 장만하셨으니 얼마나 소중하고 자랑스럽겠습니까. "그야말로 집순이가 되었으며, 집이 제일 재미있고 어느 호텔보다도 편안하고 행복해요.(p136)" 사실 꼭 상급지가 아니라고 해도 내 집 첫 장만은 감격스럽고 벅찹니다. 설령 넉넉한 환경에서 살아온 분이라 해도, 재테크사관학교애서 마련한 패러다임대로 실천하다보니 다들 짠돌이 짠순이가 되었습니다만 마음만은 성취감으로 가득합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치밀한 계획 수립과 실천을 거친 이들의 석세스스토리는 이처럼 제3자가 봐도 짜릿하고 흐뭇하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이지 않는 神 보이는 神
이승남 지음 / 문이당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말 대단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은 생각도 못할 이야기를 이렇게 장엄하게 전개하신 결과물을 보면, 창작의 배경에 어떤 다른 사연이 따로 있지 않으실까 짐작도 잠시 했습니다만, 독자로서 일단 지나친 개인적 비약은, 이 서평 중에는 잠시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김동리의 단편 <무녀도>라든가 그 확대 개작 <을화> 같은 걸 보면, 한반도의 토착 무속 신앙과 christianity의 한판 대결상이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고등종교가 이끄는 인간 영혼의 정화와 의화는 일개 푸닥거리의 사이비 혼씻김과는 근본에서부터 구별되는 이성적, 영적 과정이겠습니다만 어찌된 일인지 21세기 한국에서는 아직도 전근대적인 미신이 강남 번화가에서까지 활개를 칩니다. 그래서 일선 정통 교회의 목회자들이라든가 독실한 중견 신도들까지도, 엄연히 현실에서 힘을 떨치는 샤머니즘과 맞서 투쟁을 힘겹게 펼치는 중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참된 기독교 신앙을 가꾼다고 가꾸지만, 마음 속에는 수천년 반도인의 유전자 안에 내려오는 잡귀 숭배의 본능이 여전히 꿈틀댐을 자각하고, 끝없이 그를 몰아내기 위해 투쟁하는 어느 은퇴장로님의 처절한 고백이라고 이 작품을 해석해도 될 듯합니다.

신(神)은 본래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알라이든 야훼이든 혹은 부처님이든 속성상 눈에 보이지 않아야 사리에 맞습니다. 신의 역사함은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에 두루 미치나, 신 자체가 보인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아마도 사이비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해서는 딱히 새로울 게 없고, 보이는 신 이야기가 이 소설 속에서 정말 재미있게, 살벌하게 전개되는 것이니 독자가 여기에 포인트를 두고 읽어야 합니다. 사이비가 사이비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마음 속 사이비의 유혹이 워낙 달콤하여 그를 쉽게 떨칠 수가 없는 게 우리들 약한 인간의 처지입니다. 도륙도 사실 사탄의 도구로 비참하게 끌려다니는 불쌍한 인생일 뿐, 그를 미워하고 단죄하는 게 성도의 본분은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도륙 같은 자도 (그를 도륙하기보다는) 온전히 진리와 빛의 세계로 이끌어야 하며, 그래서 이 장편 안에서 힘겹게 전개되는 주인공의 투쟁이 더 눈물겹다고 하겠네요.

이 소설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참 많습니다. 예를 들어 p88 같은 곳을 보십시오. 보송암의 무당 선구슬은 전도사가 개인적 만남을 세속적 장소에서 청하자 기다렸다는 듯 전혀 망설임 없이 수용합니다. 암자에서는 손님을 압도하려는 기싸움을 벌이려던 노련한 직업 무당이었는데, 상대방이 단정한 신사이고 타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품과 매력이 있으니까 커피숍(아마도?)에서는 바로 양순하고 다소곳한 여인의 자태로 나옵니다. 이게 남성과 여성의 차이이기도 하며, 이성과 명징한 사고를 중시하기도 하는 고등종교와 무속의 엇갈림이기도 합니다. 큰무당이든 새끼박수이건 간에 무속인은 그저 제 본능에 충실할 뿐 어떤 에고나 초자아에 대한 충성심 같은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걸 두고 전도사가 방심하여, 아 이 사탄을 주님의 길로 이끄는 방법이 생각보다 쉽겠구나 여긴다면 크나큰 착각입니다. 진짜 지옥문은 지금부터 열리는데 저는 벌써부터 짐작이 되었더랬고 아니나다를까 줄거리는 그쪽으로 흘러갑니다.

사탄의 전도에도 성공한 성도의 교회는 큰 명성을 얻어 번창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사탄이 전략적으로 일보 후퇴하여 교회를 몸주삼아 세상 돈을 빨아들여 궁극의 승리를 이루려는 암수였습니다. 끝내 전도사는 식물인간이 되어 보송암으로 도로 모셔져 크나큰 무속 비즈니스의 도구로 쓰이는 비참한 지경에 빠지는데, 이처럼 "다음 기회를 노리는" 사탄의 간교함이란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입니다. 사탄만 탓할 게 아니라 사실 전도사한테도 문제가 큽니다. 자신이 매력으로 무당을 반하게 만들었다 여겼겠으나, 사실은 거꾸로 자신이 여인네의 색기에 정복된 게 아니었습니까? 또 세상의 칭찬과 인정에 도취하여, 예수의 참된 가르침은 잊고 교회를 돈벌이 소굴로 타락시키지는 않았습니까? 사탄과 무당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을 진솔하게 성찰할 일입니다. p196에 나오듯 사탄 역시 신의 피조물이며 크게 보면 다 신의 뜻을 구현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의 얕은 수에 넘어가는 우리 인간이 문제일 뿐입니다.

색에 빠지면 의인도 짐승과 다를 바 없이 타락합니다. p213을 보면 모세도 젊은 여인을 취했고 처첩 천 명을 둔(정말요?) 솔로몬 왕도 또 쳐녀를 가지려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 겨레를 애급의 노예 꼴로부터 해방시킨 모세도 죽을 때까지 가나안의 복지에 안착하지 못했고(꼭 그것때문만은 아니겠습니다만), 솔로몬의 사후 아들 르호보암의 대에 왕국은 두 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p233에 나오듯 죽음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눈에 보이면 그건 이미 죽음의 현상이 아니고 살아 있는 뇌가 장난을 치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는 어디이며 천국은 어디 있습니까?(p257)" p276 이하에 펼쳐지는 "사탄의 총리대신"이라는 챕터는 마치 21세기판 요한 계시록을 읽듯 장엄하고 생생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의 영화 레시피 - 10대의 고민, 영화가 답하다 특서 청소년 인문교양 19
김미나 지음 / 특별한서재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는 세상과 역사를 압축한 텍스트라서 잘만 찾는다면 그 안에 모든 질문의 답들이 예비되었을 수 있습니다. 10대들은 성장 과정에서 온갖 고민이 있겠고, 그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답을, 적절한 작품 안에서 관련 있는 시퀀스에서 감상한 후 강렬한 감동과 함께 수용할 수 있겠습니다. 책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자신감, 용기, 깨달음, 친구, 위로, 미래의 꿈 등이 필요할 때에 활용할 수 있을, 저자 김미나 씨가 제시한 레시피가 담겼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게, 마치 실용서 편제처럼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레시피들이 죽 나열된 게 아니고,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는 마녀(?)와, 중3 박준희의 우연한 만남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가 책의 메인입니다. 그 안에서 잠재적 독자의 마음은 이 박준희가 대변하는 역할입니다. 마녀는 생긴 것뿐 아니라 이름도 중성적인데 이준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마녀 이준은 영화 감상이 취미인데 "쭌"으로 친구 사이에 통하는 박준희가 고민이 있으면 그걸 미처 털어놓기도 전에 마녀가 십 리 앞을 내다보고 영화로 처방을 척척 해 줍니다. 영화 레시피도 레시피지만 마녀와 쭌의 이런 티키타카도 재미있습니다.

아이 필 프리티는 2018년에 나온 영화인데 저도 몇 년 전 어느 일요일 낮에 EBS에서 틀어 주길래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 영화도 (제목과는 달리) 안 예쁜 여자들이 잔뜩 나와 자존을 찾아가는 이야기인데, 젊었을 때 세계를 주름잡은 슈퍼모델 나오미 캠벨도 조연으로 나옵니다. 이게 원래는 고전 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에서 여주인공 마리아(충분히 예쁜)가 남친 토니를 생각하며 들떠 부르는 노래인데, 로큰롤의 아버지이자 천재 뮤지션인 리틀 리처드가 (남자인데도) 코믹하게 부르는 다른 버전도 있습니다(이 영화와는 직접 관계는 없지만 노래가 극중에 나오긴 합니다).

쭌도 안 예쁜데다 공부도 못해서 고민인데, 마녀는 좀 놀라운 처방을 내립니다. 애니 말고 실사판 2019년작 <알라딘>을 대조하여, <아이 필 프리티>의 주인공 르네는 겉은 안 예쁘지만 내면이 성숙하고, 반면 알라딘은 어찌어찌 지니의 도움으로 왕자가 되었지만 내면, 실질은 그저 고아에다 찌질한 도둑놈일 뿐인데, 쭌 너는 과연 둘 중에 누구를 닮아야 하겠냐며 마녀가 단칼에 고민을 정리합니다. 허, 그걸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나 싶었는데, 감독 가이 리치가 혹 이 의견을 듣기라도 한다면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ㅋㅋ 아니 그게 아니라 이준이 아마 같은 마씨 계열인 지니한테 무슨 정보를 얻고서 하는 소리일 수도 있죠. 뭐 꿩 잡는 게 매라고, 이런 충고를 듣고 쭌이 힘을 얻기라도 한다면 뭔 상관이겠습니까. 이렇게 두 영화를 나란히 놓고 레시피가 진행되어서 더 생동감이 있습니다.

"거짓말 중에 가장 최악은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이다(p102)." 마녀가 쭌에게 일침을 놓습니다. 마녀의 가르침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삼아서인지 꽤나 생생하고 실감나는데 "생각이라는 게 한번 굳으면 잘 안 바뀐다"는 말에서도 그런 느낌이 듭니다. p113에서 마녀는 I can speak의 뜻이 영어를 (그간의 노력을 통해) 드디어 몇 마디 하게 되었다는 뜻도 되고, 이제는 나의 참된 자존을 찾아 내 언어(위안부 강제 연행에 대한 이야기 포함)를 내 뜻대로 말하게 되었다는 뜻도 된다며 교과서적으로 모범적인 해석을 내립니다. 민족의 아픈 역사 한 자락을 개인의 몫으로 살아낸 이 위대한 할머니 역을 맡아 나문희씨가 좋은 연기를 보였죠. 반면, 나이 칠십을 먹어도 여중생 수준의 지능으로 되지도 않은 환상을 우기며 본인을 연예인으로 여겨달라는 어딴 노파의 투정이란 참으로 추합니다.

예전에 송건호 선생은 기독교 성경 구절을 다소 변형하여  "언론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일어서 소리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p210 이하를 보면 2015년작 <스포트라이트>가 소개되는데, 보스턴 글로브가 폭로한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 실화를 소재로 삼았습니다. 여기서는 쭌과 마녀의 개인적 스토리가 살짝 톤을 낮추고 객관적인 담론이 메인입니다. 청소년 중에는 커서 기자 되기를 꿈꾸는 이들도 있겠는데, 언론인의 핵심 자질은 현란한 문장력이 아니라 진실 앞에 눈감지 않는 용기와 양심이라고 마녀는 준엄히 이릅니다. 에필로그에서 마녀는 쭌과 다음 영화를 고르며 포근한 대화를 재개합니다. 쭌의 방학이 대단히 값지게 마무리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옆사람 열린책들 한국 문학 소설선
고수경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싹 보호법>, <옆사람> 등 모두 여덟 단편이 실렸습니다. 고수경 소설가는 5년 전쯤 데뷔한 신인 작가분인데,  이 책에 대한 추천사로는 작년(2024) 이상문학상을 받은 조경란 작가가 쓴 게 책 뒤표지에 나옵니다. 누가 이웃이고 누가 타인인지 가장 민감한 감성을 발동하여 판별해야 하는, 온갖 기만과 폭력과 협잡이 난무하는 이 21세기에, 따뜻하고 차분하게, 독자로 하여금 모종의 성찰을 하게 돕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Life goes on. 여태 자신을 돌봐 주던 할아버지가 곧 돌아가실지 모르지만 지우에게는 "공부"하느라고 여유가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책도 학교도 학원도 아닌 유튜브가 첫째가는 스승이라서, 지우는 (학교 공부가 아닌) 혼자 살아남는 방법 공부를 하느라고 열심히 영상을 봅니다. 안쓰럽기도 하지만, 절망이나 불안감에 빠지지 않고 저렇게 의연하게 생존의 스텝을 밟으니 대단합니다. 젊은 교사 강은 읊조립니다. "윤아야 지우야, 너희 정말 괜찮을까?(p41)" 괜찮을 리가 없지만 아이들의 시선과 생각은 또 다릅니다. 불행이 느닷 행복으로 반전하진 않겠으나 사람의 귀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한, 세상은 덜컹거리면서 어떻게든 돌아는 갑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허용된 공간이 있는데 이건 상속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방>에 나오는 연호와 소희에게처럼 계약에 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소설 속 상황이긴 하지만 이 둘은 아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계약의 디테일을 꼼꼼하게 따져 가며 자신들에게 허여된 공간의 경계를 조심스레 지키려 듭니다. "그럼 우리는 주아 세대 창고에 살고 있는 거야?(p58)"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공간은 알고 보면 누군가의 창고, 헛간, 화장실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 방이 아닌데 뭐.(p61)" 마지막 문장이 의미심장한데, 여튼 집에 머무르는 동안 열쇠는 이 젊은 커플의 점유임이 확실하며 아직은 신선한 상대의 장점도 또렷이 인정될 수 있겠지요. 

호수에 알파벳이 붙으면 그건 사람 사는 공간이 아니라, 예컨대 무슨 생떽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소행성 이름으로나 적합한 걸까요? 독자인 저는, 송에게 구태여 그런 말(p91)을 하는 "나"의 태도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알파벳이 다른 글자도 아니고 B였다는 게 진짜 문제였을지 모릅니다. 여튼 송은, "나"의 거소 증명을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이웃입니다. 이렇게 존재의 구체성을 소홀히 관리했다는 게 "나"의 잘못이라면 잘못입니다. 집주인인 김정훈(p101)은 비상시 마스터키를 갖고 다 열어 볼 권능이 있으니 세입자들은 그 이유라면 이 사람 앞에서 작아집니다. 밤이라고 해도 더우면 에어컨을 켜야지 어쩌겠습니까. 

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질 않으면 그건 이미 분실이지, 객관 주관을 가릴 건 아닙니다(객관적으로는 아니지만 주관적으로는 분실이다). 입대한 남 제대날짜는 눈깜짝할 새 다가오듯 남이 끌고 다니는 짐은 정당한 사연이 있는(?) 내 짐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은희가 지영에게 무심히 던진 저 말(p142)은 이기적인 세상사 그 핵심을 압축합니다. 은희는 아대만 차고 있을 뿐 테니스 치는 것도 싫어하는데(p123), 저는 이 작품집 통틀어서, 단순 공감을 넘어 이해까지 하고 싶어진 유일한 인물이 바로 은희였습니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건 새뿐이 아닙니다. "아내"는, 베란다 난간에 일단 앉아 가출을 위협하는 "소금"한테, 일단 말로 하자며 무기력한 회유를 시도합니다. 남편뿐 아니라 밖에서 보는 독자도 기가 막힙니다. 우리 개는 물지 않는다며 주위를 설득하는 애견인의 변호가 설득력없듯, 아내가 "웬만한 애보다 순해요"라며 감싸는 시도는 부리의 긺과 날카로움에 대한 지적 앞에 논파됩니다. 배송비를 충분히 냈다면 스크래치 없이(p175) 욕조가 안전히 설치되어야 하듯,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오르는 수위처럼 우리의 소박한 기대도 어느 정도까지는 만족되어야 하지만 이걸 가장 악착같이 가로막는 건 숱한 그 타인들의 장벽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밀의 공중 호텔 텔레포터
정화영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중에 떠 유유히 하늘을 유람하는 호텔. 보통 공중OO이라고 하면 바빌론의 공중 정원처럼 그저 높은 고도에 불가사의하게 위치를 잡았다는 뜻인데요. 이 소설에서는 문자 그대로 그런 놀라운 기술이 구현되어, 마치 20세기 후반의 유람선 퀸엘리자베스처럼 돈 많은 이들, 혹은 이런저런 사연이 있는 인생들의 욕구를 충족시킵니다. 19세기 SF 소설가 쥘 베른의 <바다 밑 20만리>에 나오는 고독한 네모 선장의 노틸러스호도 연상되는데, 사실 "비밀의 공중 호텔"의 컨셉에 더 가까운 건 저 개인적으로는 60년 전 영화 007 <여왕폐하 대작전(On her majesty's service)>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억지이지만, 굳이 그런 걸 찾자면 말이죠). 고액을 지불하면 특별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이 시설 측의 공식 안내를 보자면 더욱 그런 느낌이 깊게 들었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KD의 원작과 폴 버호벤의 영화판이 공히 주제로 삼는 바는, 진정한 삶의 흔적이 정직히 녹아든 기억이 온전해야 그게 인간이지, 인위적으로 조작 가공된 환상에 집착한다면 그건 당장이라도 죽어 없어져 마땅한 쓰레기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사람은 80년 가까운 생 동안 별의별 시련, 좌절, 상처를 다 만나게 마련이며 그 결과로 아픈 기억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갖고서 삽니다. 이걸 스스로의 인격 도야와 수양으로 성숙하게 극복을 해 내야지, 만만해 보이는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미친 모노드라마(아무도 안 봐 주는)를 제 혼자 공연하려 든다면 그건 스스로의 상처를 치명적으로 덧나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 주변의 온갖 미친 사람들(늙으나 젊으나)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호텔 벨보이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왓쳐(p33)라 불립니다. 그냥 번호로만 인식되고 처우되어도 아무 상관 없다고 그들 스스로 말합니다. 1인칭 주인공 차석준은 이 지극히 낯선 환경에 당황하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본연의 목적을 이루려 애씁니다. p41에서 석준은 충격적인 진단을 마스터한(p148에서 드디어 그 본색이 나오는!)으로부터 듣습니다. "기억이 파편화되었네요." 이 진단을 석준은 기억의 그림자화로 해석합니다. "내 병은 내가 알아." 같은 말을 흔히 듣기도 하는데, 사람은 아무리 전문 지식이 부족하다 해도 자신이 가진 문제점은 자신이 잘 압니다. 석준이 바로 "그림자"라는 보조개념을 입에 올리는 대목에서 그가 여태 얼마나 스스로의 상처를 힘겹게 보듬었을지 짐작되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영화 <토탈 리콜>에도 리트리벌 큐(p41, p64)에 해당하는 게 나왔죠. 

일란성 쌍둥이는 출생 시각이 미세하게만 차이나는 게 보통이라서 sibling rivalry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심하기도 합니다. 소설에서 송예지와 언니 송예빈(p96)은 어떠했을까요? 아직 엄마는 언니 예지가 죽은 걸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안타까운 모습인데, 이럴수록 살아남은 자매 한쪽은 그만큼 깊은 상처와 강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십시오. 마스터의 권유에 따라 트라우마를 인위적으로 삭제하라는 처방을 받았으나 예지 엄마의 기억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립니다. 자신이 과거 식모로 살았는지 첩으로 취급받았는지 귀부인으로 놓았는지 전혀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쟁이 늙은 폐인이 되어 버린 인생도 우리 주변에는 있습니다. 그에 반해, 소설 속의 예지는 나이에 비해 참 의젓합니다. "기억을 지워 버리면 떠난 사람에게 미안하잖아." 사람은 무릇 이래야 어른이고, 온전한 인격체입니다. 망각과 자기기만은 육체와 정신을 좀먹는 마약과도 같습니다. 상처는 스스로 극복해 내어야 합니다. 

p126에 충격적인 진실이 또 드러납니다. "실종되었던 사람들이 다 여기 감금되었던 거야?" 구태여 미셸 푸코의 철학 이론을 원용하지 않더라도, 감금과 처벌, 인간소외와 폭력은 결코 따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p154에서 하이힐 원피스 차림의 여인이 등장하여 석준의 간절한 그리움이 드디어 채워지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왜 엄마의 얼굴이 아빠와 똑같을까요? 제가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대목이었습니다. 아, 사람의 기억이란, 참 기만적이고 교묘한 방법으로 아포리아로부터의 출구를 모색하기도 합니다. p160 이하에서 드러나는 진상은 더욱 충격인데, 작가의 상상력에 정말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