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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터 - 휴먼 게임의 위기, 기후 변화와 레버리지
빌 맥키번 지음, 홍성완 옮김 / 생각이음 / 2020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사는 지구는 그 표면의 일부를 인간에게 허용할 뿐이지만, 인간은 마치 지구 전체를 독점 소유하는 양 방만한 자유를 누립니다. 특히 화석 연료 사용 이후 인간은 환경을 치명적으로 오염시켰으며, 그 결과는 불가역적으로 악화된 대기, 토양, 해양만을 인간 포함 모든 생명체 앞에 직면하게 했습니다. 공기는 모두에게 주어진 자유재라고 불러 왔으나 이제는 맑은 대기로 숨 쉬는 것도 자유롭지 않고, 깨끗한 물을 마시거나 정결한 토양에서 재배된 농산물을 먹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환경 오염에 대한 경각심은 일찍부터 많은 학자, 활동가들이 일깨워 왔으나, 저자 빌 맥키번처럼 "기후 변화의 위험성"을 지적한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지속적으로 내뿜는 탄소가 일종의 온실 막을 형성하여 온난화를 유발하고, 그 결과 지구의 빙하가 녹아 해수면을 상승시키며, 작물의 생육 환경을 변화시켜 농산물의 산출 결과에 큰 영향을 주는 등의 사실은 그 상당수가 이 저자 맥키번의 최초 환기에 기댄 바 큽니다. 그래서 그의 새 책은 많은 뜻있는 독자들로 하여금 호기심과 기대감을 품게 합니다. 기후 변화에 대해 여전히 확신을 못 갖는 이들도 맥키번의 정연하고 참신한 논증에는 귀를 일단 기울이게 됩니다.
이산화탄소의 높은 농도는 육체적 건강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 인지능력까지 저하시킨다고 합니다. 이러이러한 나쁜 결과가 생길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밝힐수 있다면, 대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차라리 다행스럽습니다. 맥키번은, 가장 위험한 결과라고 하면 어떤 악몽이 우리를 기다릴 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그 자체를 꼽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하면서, 이것이 그저 독자들을 겁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님을 부연합니다. 사실 미래의 어떤 끔찍한 결과에 대해, 불성실하고 현실도피적 성향을 갖는 대중이 보이는 반응이란 일단 애써 신뢰성을 폄하하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중요한 게, 팩트와 과학적 원리를 분명히 이해하고 이를 이웃과 공유하는, 이지적이고 체계적인 태도입니다.
신석기 혁명 이래 대량으로 재배하는 작물들은, 고맙게도 인간의 수요에 잘 순응해 왔습니다. 품종 개량이 되어도 큰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잘 자라주어 많은 인류를 기아로부터 구해 왔죠. 그러나 탐욕스러운 인류가 변화시킨 기후 아래에서는, 이런 작물들도 더 이상 종전처럼 잘 자랄 수 없습니다. 한 예로 옥수수는 생육 과정에서 조금만 고온에 노출되어도 탈이 난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이제 애써 발전시켜 온 먹거리 확보 기술에마저 탈을 끼치기 시작한 겁니다.
저자가 앞서도 지적했지만 "그 앞날을 알 수 있는 재앙"은 그나마 대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고마운 편입니다. 진짜 무서운 적은 그 정체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재앙이죠. 얼마 전 코비드19의 악영향으로 살던 집에서 내쫓기는 미국인 수가 늘어나리라는 보도가 나왔는데, 맥키번은 이와는 별개로 2050년이면 기후 난민 때문에 본연의 터전에서 내쫓기는 "기후 난민"이 대폭 증가하리라는 예측을 내놓습니다. 그린란드 빙하가 녹기 시작한다는 충격적인 뉴스는 벌써 많은 이들을 걱정시켰고, 주거 가능 지역이 늘어난다거나 원유가 발견되었다는 소식도 문제의 본질을 개선하지는 못합니다. 부작용이 순작용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아무리 변화하는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고 혁신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사람이란, 혹은 종족이란, 수백 수천 년 동안 살아온 고유한 패턴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전통과 습속이 흔들릴 때, 인성도 파괴되고 민심도 흉흉해지기 마련입니다. "그 지대 중 일부는 삼십 년 전만 해도 물에 잘 잠기는 곳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 어느 주민이 했다는 이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매년 나는 홍수인 것 같아도 그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뜻이죠. 치수 기술과 각종 인프라가 발달하는 속도를, 기후 변화로 인한 재앙의 증가세가 압도해 버리는 겁니다.
"지옥에서 온 문제". 이 말은 저자가 어느 정치학자와 인터뷰 했을 때, 그가 기후 파생 이슈를 가리켜 쓴 표현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런 비유도 씁니다. "으르렁거리는 호랑이는 (으르렁거리는) 정확한 그 순간에 우리를 잡아 먹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30년 안에는 이 호랑이가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 분명하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디 30년씩이나 걸리겠습니까? 눈을 감고 호랑이를 그저 못 본 척하는 인간은 당장 몇 초 후에 살과 뼈가 찢기는 고통을 겪을 게 분명하죠. 반대로, 정신만 잘 차려 대비하면 설령 호랑이 입에 물려 어디로 끌려가는 중이라도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역대 어느 권력자보다도 진보성향임에 분명하지만, 그 역시 역설적이게도 재임 기간 중 치명적인 기술 하나를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셰일가스 채굴 기법이 그것인데요. 우습지만 처음에는 환경주의자들도 이에 대해 환영하는 태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모두가 아는 상식이 되었듯이, 셰일에서 가스 혹은 오일을 뽑아내는 파쇄술은 물을 많이 소모할 뿐 아니라 주변 환경을 치명적으로 더립힙니다. 저자가 특히 가슴 아파하는 게 이 대목입니다. 트뤼도 총리 역시 "잘생기고" 진보적인 정치인이지만 "자기 나라에 1730억 배럴 오일이 있는 걸 알고도 가만 놔둘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닙니다. 안타깝지만 우리 역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이해하지만 동시에 반대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p116에 나오는 엑슨의 CEO 렉스 틸러슨은 트럼프 행정부 초대 국무장관을 맡았다가 석연치 않은 과정으로 물러난 사람이라서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름이 눈에 익습니다. 이사람이 엑슨 CEO로 재직시 집행한 광고에는 환경주의자들(이 책 저자 맥키번 같은 이들)을 두고 유나바머나 찰스 맨슨 같은 자들이라고 비난한 게 있다는데, 후자는 몰라도 유나바머는 그 취한 방법이 아주 지독하게 범죄적이었을망정 메시지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사실은 있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 즈음에 검거되어 큰 화제를 불렀었죠.
"초보자용 슬로프였던 것이 이제는 최상급자용이 되었다." 파리 기후협약 체결 당시에는 그리 달성하지 어렵지 않았던 목표치가 이제는 거의 불가능 수준으로 치달은 결과에 대해, 지구물리학자 마이클 만이 한 말이라는군요. 많은 이들이 경각심을 갖고 활동했지만 현재 인간이 내뿜는 CO2의 배출 속도에는 오히려 액셀러레이터가 밟히는 수준이라니 놀랍습니다.
2부 시작에선 저자 개인사가 잠시 나오는데 흥미로웠습니다. 그는 자신을 "순진했던 청년"으로 소개하며, 1960년이기에 "위대한 사회" 같은 슬로건에 익숙했다고도 하는데 존슨의 재임기에 그는 유아~ 초등 저학년 정도였겠으므로 읽으면서 조금 고개가 갸웃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그가 고교를 졸업했을 무렵 기록된 (하나의) 빈부 격차 지표가 역대 가장 낮은 수치였으며, 지금도 이 기록이 깨어지지 않는다는 씁쓸한 팩트입니다. 이것은 무슨 기득권층의 횡포 같은 게 아니라, 중산층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거나, 산업 구조가 더 이상 대량 생산 대량 소비 패턴이 아니라는 점에도 기인하며, 소수의 혁신가가 부를 독점하는 4차 산업 혁명 추세와도 무관치 않습니다.
철학자, 사상가, 문학가를 평가할 때는 어떤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그가 속한 시대를 얼마나 잘 대변하는지로 정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아인 랜드가 소개되는데, "자기 할 일이나 잘하자"는 아메리카식 실용주의가 강조되는 부분이죠. 이어 러시아 혁명 때문에 모든 부와 사회적 지위를 빼앗긴 그녀의 가계애 대해 자세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녀의 <파운틴헤드>에 나오는 건축가 로크는 트럼프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하는데, 실제로 트럼프의 주된 필드인 부동산 개발 역시 건축가의 일과 어느 정도는 통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저자 맥키번이 이토록 길게, 작가 랜드와 트럼프를 인용하는 이유는 물론 랜드의 작품 곳곳에 녹아 있는 개인주의적 보수 이념을 신랄히 비판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 이 소개와 비판을 읽고 오히려 랜드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된 이들도 (역설적이지만) 있을 겁니다.
빌 클린턴은 특히 미 흑인 유권자에게 큰 은인으로 평가될 만큼 진보적인 정책을 편 대통령이었지만 이 책에서는 그의 세계화 정책 등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또 석유 재벌 코크 형제 역시 다뤄지는데 p155에 제인 메이어의 책 <다크 머니>가 인용되는 중에서이며 저도 이 책을 읽고 3년 전에 리뷰를 남긴 적 있습니다. 여기서는 볼셰비키 혁명의 참된 진로(그런 게 혹 있다면 말이죠)를 크게 퇴색시키며 자본가들과 검은 협업을 도모한 스탈린도 비판되는데, 이런 걸 보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등이 얼마나 탁월한 예언서(?)였는지 새삼 실감됩니다.
재생가능에너지 운동은 그저 기술적 장벽에만 부딪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보수적 반대 세력에 의해서도 좌절됩니다. 티파티 진영에선 이에 대해서도 그 결과를 과학적으로 불신한다든가 해서 반대하며, 태양광 발전이 현재 노정하는 비효율성은 이들의 좋은 타겟이 됩니다. 그러나 저자는 여튼 태양과 바람으로만 산출되는 에너지가 우리 인간이 기댈 곳이 되어야 하며 그런 세상이 반드시 오리라 확신합니다. 여기서도 그는 "휴먼 게임의 무력화"를 걱정하는데, 서두에 나왔지만 이걸 그가 구태여 "게임"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결과의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큰 히트를 친 <특이점이 온다>의 저자 레이 커즈와일도 이 책에서 다뤄지네요. 저자와는 개인적 친분도 있어서 그는 3부 초두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하는데 이건 책에서 직접 읽어 보십시오. 3부의 제목은 "게임의 이름"인데, 이것은 영어 숙어 중 "진짜 중요한 것"을 가리켜 "네임 오브 더 게임"이라 부르는 것에서 유래합니다. 또 이 책의 부제에서 인류의 오랜 여정을 두고 "휴먼 게임"아라 스스로 명명한 점에도 주목해야겠죠. 맥키번은 이처럼 짜임새 있고 입체적, 다중적으로 의미가 통하는, 치밀한 한 권의 책을 참 잘 쓰는 재능이 탁월한 저자입니다.
커즈와일이 미래에 대한 또하나의 멋진 책을 써 줄 주기가 되었는데, 여튼 최근에 알파고로 큰 걸음을 디딘(혹은 그렇다고 세인들이 말하는) 인공지능에 대해 그가 뭐라고 새로운 비전을 펼칠지도 기대되지만 그의 지인(?)인 맥키번의 "썰"도 재미있습니다. 아직은 약(弱)인공지능만이 시중에 등장했으나, 컴퓨터 한 대가 범용으로 인간만한 지능에 도달하는 시대가 열린다면, 이는 호박벌 한 마리가 케인즈 경제학을 이해하는 만큼이나 놀라운 결과라고 말합니다. 사실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은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을 개척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이해 못하며, 또다른 사람은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걸 이해하는 양 거짓말을 일삼고 코미디를 연출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같은 바보를 뛰어난 사람들이 상처 준다며 저주까지 합니다.
기존의 인간적 결함을 새 기술이 그저 교정하는 수준에 그친다면 이는 휴먼 게임에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퍼 기술은 어떻습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인간 게놈 지도가 완성되었다면 서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공동으로 발표까지 했습니다만 현재까지도 우리 인간이 어떤 질환을 획기적으로 치료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무지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쟁자들은 분명 한계를 뛰어넘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런 기술들이 이제 휴먼 게임에 종지부를 찍을 만큼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히틀러 같은 악마들이 추종하는 유전적 수월성을 인위적으로 갖춘 맞춤형 아기의 등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노벨상을 젊었을 때 받은 왓슨 역시 "누가 못난 아기를 원하겠는가?"라고 한 적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물려받은 유전자적 무작위성은, 결정론으로부터 어떤 정신적 자유를 우리 자신에게 허용한다." 물론 특정 정치적 지도자로부터 내려받는 지령이 절대 진리인 줄 아는 일부 몰지각한 인간들에게는 이런 자유가 큰 의미를 갖지 못하겠지만, 인류가 근세 이후 이룬 계몽주의적 자각은 현재의 번영과 부를 낳은 주된 원동력임에 분명합니다. 이제 기술의 발달로 이런 혜택을 반납해야 한다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겠습니다.
"신이 사람을 창조했을 때, 죽음도 그 일부가 되게 했다." 이는 수메르의 신화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불멸을 추구하는 건, 그 불멸이란 게 추구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결과를 부른다는 게 저자의 통찰입니다. 또 이 책에서 계속 반복되는 논지 "휴먼 게임"에 종지부를 찍는 셈이 되는 거죠. 어니스트 베커도 여기서 다시 인용되는데 그는 프로이트를 두고 틀렸다고 단정하면서, "섹스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죽음을 대하는 태도"라고 합니다. 하긴 인간이 성에 그토록 집착하는 건 바로 자신의 죽음을 극복하려는 (무의미한) 발버둥이라 봐도 되죠.
레스터 써로는 1990년대에 <헤드 투 헤드>를 써서 한국에서도 큰 유명세를 탄 경제학자입니다. 일종의 게임 이론 사례인데, 누구나 다 하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 결정을 한 사람만 하지 않으면 그 사람만 공동체에서 바보가 된다는 거죠. 그러나 정의를 위한 투쟁이 결국 무력하기만 하겠습니까? 저자는 "비폭력은, 행동하는 다수가 무자비한 소수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규정합니다. 저자는 이를 환경보호운동에 그대로 적용하여, 우리가 각자의 마음과 심장까지 바꿀 수 있다면 저 무자비한 소수, 즉 산업 자본 엘리트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는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의 시기를 낙관적으로 바라봅니다. 그가 보기에 이 시기에는, 많은 대중들의 지적 수준, 인지 능력, 공감대 등이 기록적으로 확산한 성과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는 스티븐 핑커를 주로 인용하며 자신의 논거로 삼습니다. 그는 비인간적으로 연산 능력만 확대된 존재를 "로봇"이라 보며, 평범한 시민들의 공감과 연대야말로 이런 악의 세력을 격퇴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 규정합니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공감과 연대의 가치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며, 그런 공동체는 결코 "falter"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