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시장의 조건 - 동양의 애덤 스미스 이시다 바이간에게 배우다
모리타 켄지 지음, 한원 옮김, 이용택 감수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엇이 정의로운 시장일까요? 그 전에, 시장이란 게 정의로워질 수는 있을까요? 경제학의 개조 애덤 스미스는 일찍이 "사람들의 자비심이나 정의감에 호소하기보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이기심에 기대는 게 효율성 면에서 훨씬 바람직한 시장을 낳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후 수백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말이 결국 지극히 타당하다는 게 드러났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효율적이기만 한 것보다, 정의롭고 공정한 시장까지를 실현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당연히 가집니다. 이런 바람을 가지는 걸 보면 그간 어지간히 효율적인 시장을 달성하기는 했나 봅니다. 여튼 우리는 정의로운 시장을 가질 자격이 있고, 또 그를 추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시다 바이간은 아직 덕천 막부의 교묘한 통치술이 열도를 잘 지배하던 17세기에 태어나 18세기에 활약한 인물입니다. 일본도 당시 우리처럼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가 사회를 통제하던 시절이지만, 우리보다는 경제적으로 훨씬 풍요했던 듯하며 이는 김인겸의 일동장유가 등 다양한 문헌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튼 이시다 바이간은 "성씨"를 지닌 집안에서 태어나고 훈육된 것으로 보아 "적어도 빈농은 면한 환경"인 것으로 보인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제가 보기엔 그 정도로 박한 평가에 그칠 게 아니라, 적어도 가업 같은 걸 논할 만한 풍족한 집안이었던 듯하며, 자식에게 어떤 생업의 기술(그것도 물리적인 기술이 아닌), 기법 같은 걸 전수할 정도면 상당히 재산을 모았다고 봐야 할 듯합니다. 18세기 일본 같은 신분제 사회였다면 더더욱 말입니다.

여튼 이시다 바이간은 마치 초년의 벤자민 프랭클린처럼(생몰 연도도 비슷하네요) 청년시기 여기저기 고용살이를 하며 사회 생활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가 한 일도 다양한 점포의 지배인 비슷한 것이었는데 이 점에서도 프랭클린과 비슷합니다(물론 후자는 찢어질 듯 가난한 출신이었지만).

세상에는 기이하게도 죽고 나서야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들이 꼭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불꽃 같은 생을 살았으나 생전에는 전혀 인정을 못 받다시피했죠. 이시다 바이간은 무난한, 지극히 무난한 생을 살았을 뿐이었으나, 대체로는 그처럼 상인이었던 제자들에 의해 그의 "사상"이 연구되었고, 나중에는 상인 계급을 넘어 무사들까지 그를 존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어쩌면 조선과 일본이 결정적으로 근대 이후에 갈라지는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조선의 지배 계급은 지극히 편협한 성리학적 세계관을 갈수록 교조화했으나, 일본은 반대로 일개 상인의 "생각"이라는 것을 사회 개량과 진보를 위해 연구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석문심학은 결과적으로 우수한 노동자를 길러내는 사상이었다" 바로 뒤에는 "그렇다고, 노동자의 정신을 마비시켜 시스템에서 효율적으로 부려 먹는 도구를 길러내는 건 아니었다"고 뒷붙입니다. 역시 저는 개인적으로 이 점에서도 프랭클린 사상과 비슷한 점을 발견합니다. 정치가 안정되면 활발한 계층 이동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고, 사람들은 가업 비슷한 테두리 안에서만 자아 실현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자기 분야에서 더 뚜렷한 성취를 이루거나,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상에 보다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사상에서 강조하는 노동자상은 "근면 검약 정직"입니다. 뭐 현대가 요구하는 직업인상과 그리 큰 차이가 나지도 않습니다. 4차 산업혁명이 아무리 창의력을 강조하더라도, 게으르고 허황한 거짓말을 일삼는 이가 대우 받을 리야 없지 않겠습니까.

저자는 책 내내 석문심학, 즉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과 애덤 스미스의 사상 체계에서 유사한 점을 발견합니다. p73에서는 스미스의 명저 <도덕감정론>의 일부가 인용됩니다. 그 책은 대체로 종교를 거르고 이성과 논리의 영역에서 도덕을 정의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되었으므로, 오늘날 우리 독자가 지레 착각하듯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기"만을 강조한 책은 아닙니다. 공맹을 숭앙하는 유교 문화권에서는 어떤 일방적인 지령, 주문이 도덕의 전부인 양 착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서양 고전은 도덕의 배후를 캐며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를 더 깊게 파고듭니다. 물론 칸트는 정언 명법이라는 것도 지적했으나, 그 방법론에 정언명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자체가, 이유 불문하고 뭘 무조건 해야 한다는 맹목적 사고를 지양하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이기심을 억제하고 박애를 발휘하는 것이 인간 본성의 완성이다." 이기심이 시장 작동의 근원임을 강조한 <국부론>의 핵심 테마를 생각하면, 이것이 과연 같은 저자에게서 나온 말인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지만 애초에 스미스가 "이기심 예찬, 만능론자"는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당연한 말입니다. 그 전에, "이기심이면 다 된다"를 외치는  사람이라면 제 정신이 아니라고 봐야겠죠. 책에는 더 의미심장한 말도 나옵니다. "시장참여자라면 일단 도덕적이라야 한다." 오히려 이기심에 의해 작동되는 시장이므로, 참여자가 비도덕적이라면 바로 그 시장과 체제는 파탄이 나기 마련입니다.

이시다 바이간 역시 자신의 저서에서 공맹의 법리를 인용합니다. 아니 인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당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듯 공맹의 사상, 심지어 그에 주석을 단 주희의 말마저도 "모두 천리에 공명하는 것"이라며 도그마화합니다. 이 대목에서 실망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사람은 그가 산 시대의 한계를 절대 벗어날 수 없고, 오히려 시대의 요구에 적응하여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설파한 바이간의 지혜에 감탄하는 게 맞습니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고 설파하려는 자는 대체로 그 의도부터가 순수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저는 최근에 어느 공직 후보자의 모난 언동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미국 같은 나라에서 저런 사람이 고위직이 되려고 나섰다는 자체가 예삿일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고 할지.

예전에 고 정운영 교수 같은 분은 "소비가 미덕이라는 얼빠진 말을 하는 자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도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의 어떤 정치인을 겨냥하여) "돈을 많이 쓰면 쓸수록 경기도 점점 좋아집니다" 같은 발언을 맹비판합니다. 소비이건 뭐건 공동체 구성원이 인정한 범위 안에서만 인정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의도이며, 또 그가 인용하는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 핵심이라는 겁니다. 사실 이 말, 즉 소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 디플레의 함정을 벗어나기 위한 정책적 독려이며 특정 시대 일본 특정 정치인만이 아니라 누구든 해 온 말이지만, 여튼 저자는 비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정치인은 우리 한국인도 잘 아는 누구이지 싶습니다.

일본인들은 불교 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사회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우리도 그랬으나 조선의 성립 이후에는 불교가 천시되었고, 그의 건설적인 유산은 정신적으로 거의 배제되다시피했습니다. 물론 이에는 불교가 고려 시대 내내 관제화, 형식화, 부패한 자체 잘못이 크게 작용했지만, 이는 일본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귀한 것은 천한 것을 죽여도 좋다" 같은 바이간의 말은 일견 충격적이지만, 동아시아 당대 풍조를 생각하면 상식선에서 받아들여지는 정도였을 겁니다. 어떤 선비라면 이를 "파사현정" 정도의 맥락으로 해석했겠지요.

조선도 수시로 찾아오는 자연 재해에 큰 타격을 받았지만 18세기의 교도 역시 사회적 재난에 신음하는 이가 많았나 봅니다. 바이간 역시 자원 봉사 활동에 나서 많은 이들을 구제하였으며, 바로 이런 점에서 그가 입으로 떠드는 위선자에 그치지 않고, 아는 바를 실천에 옮기는 지성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내것으로 받아들여라." "소비에 매몰되어 본분을 잊지 말라.""환경을 탓하기 전에 나의 문제를 돌아보라." 어느 시대에나 두루 적용될 만한 금언이요 행동 철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상가를 배출할 만한 역량이 갖추어졌기에 에도 중후반기가 그토록 번성했던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K-POP 이노베이션 - 세상을 흔든 한국형 혁신의 미래
이장우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재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국 산업 발전의 원동력 중 하나라면 당연 K-POP의 선전입니다. 한류 열풍이 일어난지는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만, 트렌드라는 것은 특히 엔터테인먼트계에서는 수시로 바뀌는 것이어서 과연 얼마나 한류가 오래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방탄소년단이 미국 빌보트 차트 정상에 오름에 따라, 이제 한류는 일시적인 마이너 트렌드가 아닌, 세계인이 즐겨 소비하는 문화 흐름 중 뚜렷한 하나의 지류가 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새로운 산업 섹터로의 자리매김이며, 무엇이 이런 괄목할 만한 성공을 가능케 했는지는 분명 경영학의 관점에서 분석될 가치가 있습니다.

책에서는 먼저 우리 한국인이 정작 K-POP에 대해 갖고 있는 온당치 못한 선입견에 대해 짚습니다. 우리도 다들 기억하지만 1990년대 후반에서 21세기 초에 걸쳐, 갑작스럽게 인터넷 인프라가 확산 보급됨에 따라 그 부작용 중 하나로 불법 공유 문화가 널리 퍼졌습니다. 물론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미국도 냅스터 등의 문제가 심각했고, 중국은 지금도 무법천지나 마찬가지입니다. 여튼 K-POP은 이처럼이나 불리한 여건에서 출발했으며, 현재까지도 정부가 나서서 대중 문화를 보호하는 중국과는 천지차이라 할 만큼이었습니다. K-POP은 이런 걸 보면 거의 자수성가형 산업 역군입니다.

확실히 현재의 한국 대중음악은 1990년대, 그 당시 기준으로 "신세대 문화"라 일컬어지던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이 당시 음악은 외국, 그 중에서도 미국이나 일본의 댄스 뮤직류를 베끼는 경향이 뚜렷했죠. 그런데 책에서는(또 주류의 평가는) "현재 K-POP은 아이돌 중심으로 사업 모델을 설정한다"고 하여, 어느 나라에서도 잘 볼 수 없는 개성을 띤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이뿐만 아니라 현재의 대중음악은 안무나 곡의 완성도 면에서 과거 한국 음악과 비교할 게 아니며, 컨셉을 분명히 잡은 곡의 스타일, 또 아이돌 멤버들의 칼군무와 라이브 가창 실력면에서 분명 진화를 이뤘습니다. "진화"라는 표현은 예전 가수 주현미씨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뿐만 아니라 K-POP은 틈새시장을 공략한, 전략적으로 뚜렷한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성장한 산업이기도 합니다. 사실 제가 개인적으로 보기에도 해외에서 K-POP을 소비하는 젊은층은, 약간은 기존에 소외되고 주변으로 밀려나 보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K-POP이 이들의 니즈를 매우 정확히 짚고 그들을 공략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멋지게 성공한 것입니다. 한국에서 K-POP을 흔하게, 심드렁하게 봐 오던 이들은 정작 이 점을 그저 간과하기 쉽습니다. K-POP의 성공에는 그 나름의 "철학"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산업의 관점에서 K-POP을 다루니만큼 그 혁신의 중심에 어떤 파이오니어들이 있었는지에도 주목합니다. 이수만, 이호연, 박진영, 방시혁, 양현석이 그들입니다. 이수만은 일찍이 현진영과 와와라는 새로운 컨셉의 연예인을 데뷔시켰으며, 이후의 성공담은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호연 회장은 이 책에 그 경력의 시작이 체육 교사라고 나오는데 개인적으로는 새롭게 얻은 정보였습니다. 물론 카라, 핑클 등을 론칭한 분이며, 그 외에도 "아이돌"이라는 2인조 그룹을, 한국에서는 최초로 (말 그대로) 아이돌 컨셉으로 데뷔시킨 인물이기도 하죠. 다만 이분은 시련이 많아서, 책에도 나오듯이 코스닥 상폐라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고인이 되었죠.

K-POP은 결코 평탄한 성장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는커녕 타국도 아닌 본토 한국에서의 푸대접 때문에 오히려 싹도 못 틔우고 말라 죽을 뻔했다는 게 책의 평가입니다. 이 때문에 방시혁은 모교 서울대학교 졸업 연설에서 자신을 키운 게 분노였다는 말도 한 적 있습니다. 그 "분노"라는 게 물론 음악인들을 향한 처우 문제가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K-POP은 그래서, 입지를 이만큼이나 다진 현재에서조차, 앞으로 당면할 미래의 도전이 매우 험난하리라 예상됩니다. 보통 산업이 어떤 입지를 다진 후라면 앞으로는 좀 편한 진로를 잡겠거니 기대가 되는데, K-POP은 심지어 그렇지조차 못하다는 뜻입니다. 책에서는 다만 혁신가의 행태와 신세대 프로듀서들이 절묘한 협업을 이뤄, 더욱 질 좋은 산출물을 빚어 감에 따라 미래를 대단히 희망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유연한 혁신의 리더십과 태도는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벤치마킹해 마땅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양 서양미술 인문여행 시리즈 14
샤를 블랑 지음, 정철 옮김, 하진희 감수 / 인문산책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술, 혹은 어떤 분야이건, 기존에 어떤 성과가 이뤄졌으며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켜 왔고, 어떤 기법으로 예술가가 자신의 영혼, 의도를 담아내는지에 대한 "언어적 설명" 같은 게 필요합니다. 일류 예술가의 솜씨까지는 당연히 몰라도, 어떤 감식안(eye for beauty) 같은 것이나마 모두가 갖출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타고난 눈이 없다면, 그걸 갖춘 사람한테 말로나마 설명을 들어야 일류들(과 그들의 작품)에게 최소한의 공감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죠. 그 공감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최상의 상태로 끌어올려 구상의 형태로 남긴 그 의지와 성취를 엿보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도 조금이나마 그 비슷한 사람이 될 수 있겠으니.

"전통적이고 억지로 꾸민 듯한 회화에서 자유롭고 활기찬 회화로 변해가는 것을 우리는 바티칸의 '서명의 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p64)" 이 구절을 읽으며 저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서유럽 기사들의 자유로운 놀이 문화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는 역사서의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어떤 문화, 문명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아니고의 한 기준은, 그 문명권에 속한 사람들이 얼마나 자유롭고 활기차게 자신의 감정과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예전에 시진핑도 <태양의 후예>를 보고 "왜 이런 작품이 중국에서는 안 나오냐"며 탄식했다고 하죠. 어떤 드라마 같은 게 무슨 미켈란젤로의 작품처럼 위대한 가치를 지녔다는 게 아니라,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이미 사육되는 동물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게 저의 의도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자유롭기만 해서 예술의 성취가 완료되는 건 아닙니다. 피카소는 "나는 소년 시절부터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릴 수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데서도 알 수 있듯, 자유니 파격이니 하는 것도 기존의 전통이 성취하고 집약한 모든 기법을 달통한 후에야 의미를 가집니다. 첵에서도 "라파엘로의 <디푸스타>의 경우 초창기 회화의 엄격한 규칙을 그대로 따랐다"고 서술합니다. 그래야 "그 반대편에 있는" <아테나 학당>의 창조적인 시도와 결과가 비로소 빛이 (더) 나는 거죠.

천재들은 구태여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심심상인처럼 눈빛만으로 서로 통하는 어떤 경지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말로 설명을 해 줘야 궁극의 경지에 대해 어림짐작이라도 할 수 있죠. 샤를 블랑은 우리가 잘 알듯 19세기 노동 관련 사상가로 평가되는 루이 블랑의 동생인데, 이 책 서문에도 나오듯 당시 부르조아 계층에 미술을 감상하는 관점과 취향의 어떤 표준을 제시한 게 바로 이 저자입니다.

이 책은 당시 부르주아적 미술관의 집약과 표준을 담았지만, 사실 지금의 우리가 읽어도 별 거부감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니 부르주아 아닌, 그들이 혁명을 통해 타도했던 귀족의 패러다임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명작이라 이해하는 거의 모든 예술가의 명작들이 그런 관점에 대부분 기초하여 창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혹 그런 고전으로부터 그렇지 않은 점을 찾아내는 혜안을 갖췄다면, 그 사람이 바로 일류 평론가(혹은 예술가)이겠고 말입니다.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샤를 블랑의 이 책을 탐독하고 이전 시대와 동시대 예술의 정수를 더 잘 이해했다고 하는데, 그 점을 방증이라도 하듯 책에는 저자의 자부심 담긴 구절이 여럿 있습니다. "뒤러, 쿠쟁, 비뇰의 저서 들은 이미 알려진 것 이상의 내용은 담고 있지 못하다(p86)" 같은 말이 그렇습니다. 이 바로 앞 구절에 보면 "가스파르 몽주가 기초를 놓은 도형기하학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원근법에 대한.."이란 말이 있는데, 수학사를 공부한 이들은 알겠지만 수학자 가스파르 몽주는 기하학 외에도 많은 업적을 남긴 천재였죠. 이책 출판보다 훨씬 뒤에 창작된 달리의 한 작품은, 십자가를 4차원으로 해석한 결과를 화폭에 멋지게 담아내었습니다. 천재들이기에 전혀 다른 학문의 성과를 끌어와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말로 설명되는 희극 배우의 무언극(無言劇)은 눈으로만 말을 하는 화가의 무언극과 같은 것이 될 수 없다(p129)." 사실 우리들 관객은 매우 멍청하기에, 저자의 말마따나 과장된 몸짓 아니면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디서든, 정확하게 표현하면서도 강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이야말로 모든 예술의 고충, 즉 완전하고 흠결 없는 표현을 하면서도 동시대 (멍청한) 관객과 소통도 해야 하는 고충을 잘 집약한 것입니다. 반면, 미술가는 그렇게, 즉 정확하면서도 "강하게" 표현한다는 게 어렵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배우와 화가의 공통점은, 둘 다 희극에 가까울수록 개별적인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이다."

"왜 시정(詩情) 그 자체의 원천으로 거슬러올라가지 않고 그 해석에 연연하는가?" 사실 저자의 이 말은, 명작을 보고도 명작인 줄을 몰라서 이런 책(물론 명저입니다만)에 의존을 해야 하는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되는 명언입니다. "보여 주는 장면이 고상해지고 훌륭하게 된다면, 스타일은 (저절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p303)" 이 말 역시, 화가 같은 창조자뿐 아니라 우리 어리석은 관객들도, 마음 속에 아름다움과 품위에 대한 바른 눈이 생긴다면, 구태여 이론서를 통해 어떤 기법상의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작품 자체를 보고 온전히 감탄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이 아닌 손가락만 보고 있겠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유물과 유적으로 매 순간 다시 쓰는 다이나믹 한국 고대사 서가명강 시리즈 12
권오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는 유물과 유적에 의해 구체적인 내용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막연히 그러려니 하는 상상과 억측에 의해 지탱되는 분야가 아니겠습니다. 저자 권오영 교수는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 등에 출연하여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분이라고 하며, 천안 청당동 유적, 순천 대곡리 유적을 발굴한 당사자라고 책날개의 설명에 나옵니다. 저자의 이런 이력이, 우리 독자들로 하여금 "유물, 유적에 의해 밝혀지는 역사의 진실, 그리고 반전"에 대해 공감을 보내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도 같습니다.

행주산성이라 하면 임진란 당시 권율 장군이 주도한 대첩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이 성의 축조 사실 자체는 무려 7세기 삼국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자의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통설은 계속 무너지고 있다(p22)." 어느 학문 분야이건 한 시점의 압도적 통설이 계속 그 자리를 유지하는 일은 드뭅니다. 그러나 특히 국민들이 중등 교육 과정에서 배워 알아 오던 사항 중 통설들이 바뀌는 것은, 혹은 심지어 "계속 무너지는" 건, 적잖이 충격적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역사, 특히 한국사의 "반전"도 대개 이를 가리키는 취지겠습니다. 물론 진실을 향한 반전은 설령 충격적일망정 결국은 누구에게나 유쾌한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중국에서는 목간이 계속 출토되어, 서력 기원 즈음이나 그 이전의 사실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자료가 나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목간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하며, 종이로 쓰인 문헌이래봐야 7세기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게 드물다고 합니다. 전란과 외침을 많이 겪은 한국사라서 그러려니 이해하지만, 뭔가 크게 아쉽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자는 p25에서 "조금 힘들더라도 쏟아지는 고고학적 물질자료에 눈을 돌려 보석을 캐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책을 계속 읽어 보기 전까지는, 고고학적 물질자료마저 "쏟아지듯" 풍성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짐작했으나, 다음 페이지에서 저자가 말씀하시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독자인 제게는 일종의 반전으로 다가왔을 만큼.

"쏟아지듯"의 이유는 국토 곳곳에서 이뤄지는 건설, 토목 공사의 왕성한 진행 상황에 있다고 합니다(p26). 발굴조사의 건수는 매년 1500~1800건 정도나 된다고 합니다. 상고사의 문헌 자료는 빈약하게 남았으나, 워낙 이 반도에 조상들이 터잡고 산 역사가 길다 보니 이런 종류의 유물은 풍성하게 나오는 거겠죠.

유물 유적 발굴 연구의 최대 적은 바로 도굴꾼입니다. 책에서도 여러 번 이 기막힌 도굴꾼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p32의 창원 다호리 유적이라든가, p;106의 함안 밀산리 유적 등이 그것입니다. 함안 아라가야의 유물을 훔쳐 간 자들은 버젓이 붉은 페인트로 현장에 "196X년 부산 삼부자 다녀감"이라 적어 놓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한국처럼 단일 민족 공동체의 자부심이 강한 나라가 또 없고, 학교 교육 과정에서 민족적 윤리관을 강조하는 사례가 없는데 이런 사람들이 여튼 나오는 걸 보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유물을 혹 사후에 회수하더라도 한번 도굴꾼의 손을 타면 그 가치가 C급으로 전락한다는 말씀도 있네요.


예전 국사교과서에서 잘 다루지 않다가 근래 중요성이 높아진 게 "환호"입니다. 한자를 그대로 읽으면 둘러싼 호수란 뜻이겠는데, 방형을 한 내부의 환호를 하나 더 짓는 양식은 종전까지 일본의 요시노가리 유적에서나 볼 수 있는 그들 고유의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으나, 최근 춘천 중도 유적 발굴(p145)로 그런 통념이 깨어졌습니다. 여기서도 문헌 위주의 연구가 아니라 유적 발굴에 의해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고 이의 타당성을 심화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튼 여기서 저자는 취락의 발전과 계급의 탄생이라는 명제를 다시 끌어냅니다.

한국에서는 도처에서 볼 수 있는 게 산성이고 그 시대도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올라가지만 (위에서 행주산성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좀처럼 이런 게 발견 안 된다고들 했는데, 저자는 이를 두고 기술적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건 대륙으로부터 최신의 기술을 익힌 백제의 인력이 가세해야 했다는 거죠.

백제는 오래 전부터 현재의 서울 지역에 본거지를 둔 국가였습니다.  책에서도 여러 번 강조되지만 풍납토성 유적의 경우 현재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의 반발 때문에 본격 연구와 발굴이 여러 난관에 봉착하는데, 역으로 고대 유적 하면 무조건 지방에 소재한 걸 떠올리는 현대인들에게, 서울의 꽤 발달한 주거지에 이런 유적이 있다는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기도 합니다. 고대부터 한강 유역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삼국 간에 각축이 벌어졌고, 이를 선점했던 백제가 뛰어난 문명을 누린 선진 권역이었겠음은 자연스럽게 추측이 가능합니다. 남쪽의 풍요한 산출과 노동력을 노린 고구려가 이후 남진해 왔고, 백제가 공주, 부여 등으로 도읍을 옮긴 건 오히려 국력 쇠퇴의 추세와 궤를 같이합니다. 본디 백제는 북방에서 남하한 이들이 주도 세력이었으니 말입니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좁은 한반도에 애써 우리의 역사공간을 한정할 게 아니라 멀리 터키, 중앙아, 심지어 동남아로 시선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중은 오히려 역사 지평의 확대에 환호하지만, 사실 요즘 지적으로 크게 각성한 일반인들은 더 많은 과학적 근거와 연구 성과에 목말라합니다. 학자들이 충실한 연구 성과를 더 많이 내어놓을 때, 이미 준비된 마음가짐을 한 대중은 보다 편한 마음으로 이를 수용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폴터 - 휴먼 게임의 위기, 기후 변화와 레버리지
빌 맥키번 지음, 홍성완 옮김 / 생각이음 / 2020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사는 지구는 그 표면의 일부를 인간에게 허용할 뿐이지만, 인간은 마치 지구 전체를 독점 소유하는 양 방만한 자유를 누립니다. 특히 화석 연료 사용 이후 인간은 환경을 치명적으로 오염시켰으며, 그 결과는 불가역적으로 악화된 대기, 토양, 해양만을 인간 포함 모든 생명체 앞에 직면하게 했습니다. 공기는 모두에게 주어진 자유재라고 불러 왔으나 이제는 맑은 대기로 숨 쉬는 것도 자유롭지 않고, 깨끗한 물을 마시거나 정결한 토양에서 재배된 농산물을 먹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환경 오염에 대한 경각심은 일찍부터 많은 학자, 활동가들이 일깨워 왔으나, 저자 빌 맥키번처럼 "기후 변화의 위험성"을 지적한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지속적으로 내뿜는 탄소가 일종의 온실 막을 형성하여 온난화를 유발하고, 그 결과 지구의 빙하가 녹아 해수면을 상승시키며, 작물의 생육 환경을 변화시켜 농산물의 산출 결과에 큰 영향을 주는 등의 사실은 그 상당수가 이 저자 맥키번의 최초 환기에 기댄 바 큽니다. 그래서 그의 새 책은 많은 뜻있는 독자들로 하여금 호기심과 기대감을 품게 합니다. 기후 변화에 대해 여전히 확신을 못 갖는 이들도 맥키번의 정연하고 참신한 논증에는 귀를 일단 기울이게 됩니다.

이산화탄소의 높은 농도는 육체적 건강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 인지능력까지 저하시킨다고 합니다. 이러이러한 나쁜 결과가 생길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밝힐수 있다면, 대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차라리 다행스럽습니다. 맥키번은, 가장 위험한 결과라고 하면 어떤 악몽이 우리를 기다릴 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그 자체를 꼽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하면서, 이것이 그저 독자들을 겁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님을 부연합니다. 사실 미래의 어떤 끔찍한 결과에 대해, 불성실하고 현실도피적 성향을 갖는 대중이 보이는 반응이란 일단 애써 신뢰성을 폄하하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중요한 게, 팩트와 과학적 원리를 분명히 이해하고 이를 이웃과 공유하는, 이지적이고 체계적인 태도입니다.

신석기 혁명 이래 대량으로 재배하는 작물들은, 고맙게도 인간의 수요에 잘 순응해 왔습니다. 품종 개량이 되어도 큰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잘 자라주어 많은 인류를 기아로부터 구해 왔죠. 그러나 탐욕스러운 인류가 변화시킨 기후 아래에서는, 이런 작물들도 더 이상 종전처럼 잘 자랄 수 없습니다. 한 예로 옥수수는 생육 과정에서 조금만 고온에 노출되어도 탈이 난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이제 애써 발전시켜 온 먹거리 확보 기술에마저 탈을 끼치기 시작한 겁니다.

저자가 앞서도 지적했지만 "그 앞날을 알 수 있는 재앙"은 그나마 대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고마운 편입니다. 진짜 무서운 적은 그 정체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재앙이죠. 얼마 전 코비드19의 악영향으로 살던 집에서 내쫓기는 미국인 수가 늘어나리라는 보도가 나왔는데, 맥키번은 이와는 별개로 2050년이면 기후 난민 때문에 본연의 터전에서 내쫓기는 "기후 난민"이 대폭 증가하리라는 예측을 내놓습니다. 그린란드 빙하가 녹기 시작한다는 충격적인 뉴스는 벌써 많은 이들을 걱정시켰고, 주거 가능 지역이 늘어난다거나 원유가 발견되었다는 소식도 문제의 본질을 개선하지는 못합니다. 부작용이 순작용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아무리 변화하는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고 혁신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사람이란, 혹은 종족이란, 수백 수천 년 동안 살아온 고유한 패턴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전통과 습속이 흔들릴 때, 인성도 파괴되고 민심도 흉흉해지기 마련입니다. "그 지대 중 일부는 삼십 년 전만 해도 물에 잘 잠기는 곳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 어느 주민이 했다는 이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매년 나는 홍수인 것 같아도 그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뜻이죠. 치수 기술과 각종 인프라가 발달하는 속도를, 기후 변화로 인한 재앙의 증가세가 압도해 버리는 겁니다.

"지옥에서 온 문제". 이 말은 저자가 어느 정치학자와 인터뷰 했을 때, 그가 기후 파생 이슈를 가리켜 쓴 표현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런 비유도 씁니다. "으르렁거리는 호랑이는 (으르렁거리는) 정확한 그 순간에 우리를 잡아 먹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30년 안에는 이 호랑이가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 분명하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디 30년씩이나 걸리겠습니까? 눈을 감고 호랑이를 그저 못 본 척하는 인간은 당장 몇 초 후에 살과 뼈가 찢기는 고통을 겪을 게 분명하죠. 반대로, 정신만 잘 차려 대비하면 설령 호랑이 입에 물려 어디로 끌려가는 중이라도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역대 어느 권력자보다도 진보성향임에 분명하지만, 그 역시 역설적이게도 재임 기간 중 치명적인 기술 하나를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셰일가스 채굴 기법이 그것인데요. 우습지만 처음에는 환경주의자들도 이에 대해 환영하는 태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모두가 아는 상식이 되었듯이, 셰일에서 가스 혹은 오일을 뽑아내는 파쇄술은 물을 많이 소모할 뿐 아니라 주변 환경을 치명적으로 더립힙니다. 저자가 특히 가슴 아파하는 게 이 대목입니다. 트뤼도 총리 역시 "잘생기고" 진보적인 정치인이지만 "자기 나라에 1730억 배럴 오일이 있는 걸 알고도 가만 놔둘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닙니다. 안타깝지만 우리 역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이해하지만 동시에 반대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p116에 나오는 엑슨의 CEO 렉스 틸러슨은 트럼프 행정부 초대 국무장관을 맡았다가 석연치 않은 과정으로 물러난 사람이라서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름이 눈에 익습니다. 이사람이 엑슨 CEO로 재직시 집행한 광고에는 환경주의자들(이 책 저자 맥키번 같은 이들)을 두고 유나바머나 찰스 맨슨 같은 자들이라고 비난한 게 있다는데, 후자는 몰라도 유나바머는 그 취한 방법이 아주 지독하게 범죄적이었을망정 메시지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사실은 있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 즈음에 검거되어 큰 화제를 불렀었죠.

"초보자용 슬로프였던 것이 이제는 최상급자용이 되었다." 파리 기후협약 체결 당시에는 그리 달성하지 어렵지 않았던 목표치가 이제는 거의 불가능 수준으로 치달은 결과에 대해, 지구물리학자 마이클 만이 한 말이라는군요. 많은 이들이 경각심을 갖고 활동했지만 현재 인간이 내뿜는 CO2의 배출 속도에는 오히려 액셀러레이터가 밟히는 수준이라니 놀랍습니다.

2부 시작에선 저자 개인사가 잠시 나오는데 흥미로웠습니다. 그는 자신을 "순진했던 청년"으로 소개하며, 1960년이기에 "위대한 사회" 같은 슬로건에 익숙했다고도 하는데 존슨의 재임기에 그는 유아~ 초등 저학년 정도였겠으므로 읽으면서 조금 고개가 갸웃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그가 고교를 졸업했을 무렵 기록된 (하나의) 빈부 격차 지표가 역대 가장 낮은 수치였으며, 지금도 이 기록이 깨어지지 않는다는 씁쓸한 팩트입니다. 이것은 무슨 기득권층의 횡포 같은 게 아니라, 중산층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거나, 산업 구조가 더 이상 대량 생산 대량 소비 패턴이 아니라는 점에도 기인하며, 소수의 혁신가가 부를 독점하는 4차 산업 혁명 추세와도 무관치 않습니다.

철학자, 사상가, 문학가를 평가할 때는 어떤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그가 속한 시대를 얼마나 잘 대변하는지로 정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아인 랜드가 소개되는데, "자기 할 일이나 잘하자"는 아메리카식 실용주의가 강조되는 부분이죠. 이어 러시아 혁명 때문에 모든 부와 사회적 지위를 빼앗긴 그녀의 가계애 대해 자세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녀의 <파운틴헤드>에 나오는 건축가 로크는 트럼프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하는데, 실제로 트럼프의 주된 필드인 부동산 개발 역시 건축가의 일과 어느 정도는 통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저자 맥키번이 이토록 길게, 작가 랜드와 트럼프를 인용하는 이유는 물론 랜드의 작품 곳곳에 녹아 있는 개인주의적 보수 이념을 신랄히 비판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 이 소개와 비판을 읽고 오히려 랜드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된 이들도 (역설적이지만) 있을 겁니다.

빌 클린턴은 특히 미 흑인 유권자에게 큰 은인으로 평가될 만큼 진보적인 정책을 편 대통령이었지만 이 책에서는 그의 세계화 정책 등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또 석유 재벌 코크 형제 역시 다뤄지는데 p155에 제인 메이어의 책 <다크 머니>가 인용되는 중에서이며 저도 이 책을 읽고 3년 전에 리뷰를 남긴 적 있습니다. 여기서는 볼셰비키 혁명의 참된 진로(그런 게 혹 있다면 말이죠)를 크게 퇴색시키며 자본가들과 검은 협업을 도모한 스탈린도 비판되는데, 이런 걸 보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등이 얼마나 탁월한 예언서(?)였는지 새삼 실감됩니다.

재생가능에너지 운동은 그저 기술적 장벽에만 부딪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보수적 반대 세력에 의해서도 좌절됩니다. 티파티 진영에선 이에 대해서도 그 결과를 과학적으로 불신한다든가 해서 반대하며, 태양광 발전이 현재 노정하는 비효율성은 이들의 좋은 타겟이 됩니다. 그러나 저자는 여튼 태양과 바람으로만 산출되는 에너지가 우리 인간이 기댈 곳이 되어야 하며 그런 세상이 반드시 오리라 확신합니다. 여기서도 그는 "휴먼 게임의 무력화"를 걱정하는데, 서두에 나왔지만 이걸 그가 구태여 "게임"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결과의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큰 히트를 친 <특이점이 온다>의 저자 레이 커즈와일도 이 책에서 다뤄지네요. 저자와는 개인적 친분도 있어서 그는 3부 초두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하는데 이건 책에서 직접 읽어 보십시오. 3부의 제목은 "게임의 이름"인데, 이것은 영어 숙어 중 "진짜 중요한 것"을 가리켜 "네임 오브 더 게임"이라 부르는 것에서 유래합니다. 또 이 책의 부제에서 인류의 오랜 여정을 두고 "휴먼 게임"아라 스스로 명명한 점에도 주목해야겠죠. 맥키번은 이처럼 짜임새 있고 입체적, 다중적으로 의미가 통하는, 치밀한 한 권의 책을 참 잘 쓰는 재능이 탁월한 저자입니다.

커즈와일이 미래에 대한 또하나의 멋진 책을 써 줄 주기가 되었는데, 여튼 최근에 알파고로 큰 걸음을 디딘(혹은 그렇다고 세인들이 말하는) 인공지능에 대해 그가 뭐라고 새로운 비전을 펼칠지도 기대되지만 그의 지인(?)인 맥키번의 "썰"도 재미있습니다. 아직은 약(弱)인공지능만이 시중에 등장했으나, 컴퓨터 한 대가 범용으로 인간만한 지능에 도달하는 시대가 열린다면, 이는 호박벌 한 마리가 케인즈 경제학을 이해하는 만큼이나 놀라운 결과라고 말합니다. 사실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은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을 개척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이해 못하며, 또다른 사람은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걸 이해하는 양 거짓말을 일삼고 코미디를 연출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같은 바보를 뛰어난 사람들이 상처 준다며 저주까지 합니다.

기존의 인간적 결함을 새 기술이 그저 교정하는 수준에 그친다면 이는 휴먼 게임에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퍼 기술은 어떻습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인간 게놈 지도가 완성되었다면 서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공동으로 발표까지 했습니다만 현재까지도 우리 인간이 어떤 질환을 획기적으로 치료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무지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쟁자들은 분명 한계를 뛰어넘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런 기술들이 이제 휴먼 게임에 종지부를 찍을 만큼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히틀러 같은 악마들이 추종하는 유전적 수월성을 인위적으로 갖춘 맞춤형 아기의 등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노벨상을 젊었을 때 받은 왓슨 역시 "누가 못난 아기를 원하겠는가?"라고 한 적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물려받은 유전자적 무작위성은, 결정론으로부터 어떤 정신적 자유를 우리 자신에게 허용한다." 물론 특정 정치적 지도자로부터 내려받는 지령이 절대 진리인 줄 아는 일부 몰지각한 인간들에게는 이런 자유가 큰 의미를 갖지 못하겠지만, 인류가 근세 이후 이룬 계몽주의적 자각은 현재의 번영과 부를 낳은 주된 원동력임에 분명합니다. 이제 기술의 발달로 이런 혜택을 반납해야 한다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겠습니다.

"신이 사람을 창조했을 때, 죽음도 그 일부가 되게 했다." 이는 수메르의 신화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불멸을 추구하는 건, 그 불멸이란 게 추구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결과를 부른다는 게 저자의 통찰입니다. 또 이 책에서 계속 반복되는 논지 "휴먼 게임"에 종지부를 찍는 셈이 되는 거죠. 어니스트 베커도 여기서 다시 인용되는데 그는 프로이트를 두고 틀렸다고 단정하면서, "섹스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죽음을 대하는 태도"라고 합니다. 하긴 인간이 성에 그토록 집착하는 건 바로 자신의 죽음을 극복하려는 (무의미한) 발버둥이라 봐도 되죠.

레스터 써로는 1990년대에 <헤드 투 헤드>를 써서 한국에서도 큰 유명세를 탄 경제학자입니다. 일종의 게임 이론 사례인데, 누구나 다 하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 결정을 한 사람만 하지 않으면 그 사람만 공동체에서 바보가 된다는 거죠. 그러나 정의를 위한 투쟁이 결국 무력하기만 하겠습니까? 저자는 "비폭력은, 행동하는 다수가 무자비한 소수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규정합니다. 저자는 이를 환경보호운동에 그대로 적용하여, 우리가 각자의 마음과 심장까지 바꿀 수 있다면 저 무자비한 소수, 즉 산업 자본 엘리트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는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의 시기를 낙관적으로 바라봅니다. 그가 보기에 이 시기에는, 많은 대중들의 지적 수준, 인지 능력, 공감대 등이 기록적으로 확산한 성과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는 스티븐 핑커를 주로 인용하며 자신의 논거로 삼습니다. 그는 비인간적으로 연산 능력만 확대된 존재를 "로봇"이라 보며, 평범한 시민들의 공감과 연대야말로 이런 악의 세력을 격퇴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 규정합니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공감과 연대의 가치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며, 그런 공동체는 결코 "falter"하지 않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