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판". 사람은 죽고 나서 심판의 자리에 선다는 게 동서양 불문하고 거의 공통된 상상의 지점입니다. 물론 죽어 보고 나서 귀환한 사람이 없기에 정확한 실상은 알 수 없지만, 주어진 생을 열심히, 보람되게 사는 게 인간의 도리이며 생각이 그에 미치지 못 하면 사람 값어치를 못함이나 다름 없다는 판단이, 문명권을 가리지 않고 공통적으로 보이는 결과가 좀 신기하기도 합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이 작품은 희곡인데, 옮긴이의 권말 해설을 보면 "첫 희곡 <인간>은 전통적인 형식을 좇지 않아 소설로도 읽혔다"고 합니다. 이 작품도 지문이 그리 많지 않아 아주 전통적인 희곡 형식이라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대신, 대화 위주로 구성되었기에 독자가 읽기에는 편합니다. 지문도 거의 없고 배경 설명이 적기에, 이런 형식은 정말 저승의 심판장에서 극히 제한된 이동만으로 이뤄지는 이야기에 적합한 듯합니다.

일제 강점기 소설가인 김동인의 단편 중에 <명문>이라는 게 있는데, 진실된 기독교 신앙을 갖고 평생을 살다 마침내 사후세계의 주재자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만 그 심리가 아주 부조리하고 부당합니다. 항의하는 주인공에게 재판장은 "하하, 여기도 그저 법정일 뿐이다!"라며 비웃습니다. 명감독 리들리 스콧의 다소 속물스런 영화 <프로메테우스>를 보면 "피조물보다 열등한 조물주"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지금 베르베르의 이 희곡에도 "사려깊지 못하고 그저 직업적 관성으로 피고인들을 다루는" 저세상 법조인들이 등장하는데, 정말 이런 사람들이 영혼을 다룬다면 이 생을 열심히 사는 우리들의 두 어깨에서 맥이 쫙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도 이들 역시 어떤 최종 결정권자는 아니어서, 이승으로 환생하기도 하고(안 하려 드는 게 보통이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진짜 신의 존재를 의식하는가 봅니다. 그저 "의식"할 뿐 확신하는 게 전혀 아니어서, 세상의 궁극적 이치에 대해 무지한 건 우리 물질계의 인간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베르베르의 요 직전 작품 <기억>에도 환생, 윤회의 테마가 다뤄졌더랬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억>에서는 환생만 소재로 쓰였으며, 이 작품에서처럼 무슨 죗값이라든가 업보(業報), 카르마 같은 것은 언급되지 않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지상에서 예컨대 주인공 아나톨 피숑 같은 이가 재판장으로서 함부로 피고인들을 저승으로 보내든가 하면, 그 남겨진 업보가 이승의 일, 개별 영혼의 행로를 어지간히 꼬이게 한다는 식의 설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피숑 씨가 (동종 업계에 종사함에도 불구하고) 저승의 법정에서 유난히 푸대접을 받는 겁니다. 일을 똑바로 안했다는 거죠.

재판장 가브리엘은 이런 이유, 즉 일을 슬로피하게 진행했다는 이유로 피숑 씨를 갈굽니다(그러니 동종 직종인으로서 무능자에 대한 경멸감, 견책 같은 게 작용했습니다)만, 검사 베르트랑은 좀 다른 이유에서 피숑 씨를 부당하게 취급합니다. 저승의 법정에서 마땅히 취급되어야 할 사안인 듯은 하지만, 피숑 씨가 인성과 감수성, 공감 능력, 정직성 따위가 부족했다는 이유로 그를 몰아세웁니다. 주어진 진짜 재능을 발휘하지 않고 속물스럽게 판사직을 택한 것도 죄목 중 하나라는군요. 제 갈 길을 갔다면 제라르 드파르듀 같은 배우를 능가했겠다는데, 작품 후반부에는 유언을 분명히하고 오겠다는 피숑 씨는 "국세청한테 사기친다"는 부당한 비판도 듣습니다. 근데 자칭 진보파인 드파르듀도 탈세 비슷한 짓을 저질러 큰 비난을 받았죠.ㅎ

베르트랑이 유독 이런 태도를 취한 이유는 카롤린을 짝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변호인 카롤린은 피숑 씨의 생애 내내 그의 수호천사였습니다. 그러니 마치 영화 <토탈 리콜(1990)>에서 마이클 아이언사이드가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미워하는 것처럼(ㅋ) 피숑 씨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겠죠? 존경 받는 법관이었던(과연?) 피숑을 함부로 "아나톨"이라 이름을 부르고(친하지도 않으면서), 그를 "자기중심적이고 단선적으로 세계를 보는 멍청이들"의 범주에 함부로 집어 넣습니다. 물론 피숑 씨가 실제로 그런 멍청이였을 수도 있으나, 제 생각에는 뺀질뺀질하고 이기적인 속물이었을망정 멍청이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멍청이의 정의가 대단히 자의적이긴 합니다만, 70페이지가 지나도록 아나톨 피숑은 자신이 죽은 사실을 못 깨닫습니다. 우리 독자들은 두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벌써 눈치를 다 채었는데도 말입니다. 판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이 멍청이라면 다른 시민들이 참 피곤하고 불안해지는 게 사실입니다. 피숑 씨가 다소 이기적인 건 맞지만(출세를 위해, 또 충동적인 기분에 의해 첫사랑을 버림), 멍청했으면 과연 그런 높은 자리에 올라갔겠습니까? 그가 아주 늦게 사실을 깨달은 건, 생에 대한 집착이 그만큼 강했고, 속물적으로 선택한 삶의 경로가 일단 정해진 후에는 하나하나의 처분에 매우 집요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는 그가 자신의 생을 그만큼 사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자신이 죽었다는 현실을 깨달은 후에는 그의 판단이 매우 빨라집니다. "생이 감옥이었으니 차라리 여기 머물겠다"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정말로 멍청한 이승의 장삼이사들에게선 이런 말도 안 나옵니다. 항소하는 권리가 없는 법정이 어디 있냐며 지금 절차를 만들라는 정당한 항변도 합니다. 가브리엘도 명색이 판사인데 이런 말에 귀를 닫을 수 없습니다. 카롤린은 "그의 영혼은 아직 어리다(p87)"는 말도 하는데 이게 철이 덜 들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나이에 비해 아직 열기가 죽지 않은 순수함에 대한 지적일 수도 있습니다.

(내용 누설에 주의하십시오)
아나톨 피숑은 막판에 마음을 바꿉니다. 그러자 재판관인 가브리엘이 이번에는 자신이 환생하여 아무개 씨의 아기로 태어나겠다고 자원합니다. 그 자리는 (아마도 생각보다는 괜찮은, 우리 독자들이 선입견[베르트랑 때문에 생긴]을 지우고 보면 그럭저럭 좋은 법관이었을 듯한) 아나톨 피숑 씨가 대신해도 될 듯합니다. 이 역시, 한 번 정도는 생을 살아 보고 더 좋은 법관이 되고 싶었던 가브리엘의 회심이라지만, 피숑 씨의 태도로부터 약간은 영향을 받은 게 아니었을까요?

가브리엘은 아마, 지상의 삶으로부터 너무 오래 떨어져 지내다 보니 지리 감각을 잊은 듯합니다. ㅎㅎ 작품 중에는 "티롤 근처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어느 나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티롤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사이에 자리한 지방입니다. 여기에서 스칸디나비아는 멀고도 멀죠. "너를 죽게 하지 못한 건, 다 너를 강하게 만든 것이다"라는 말은 얼마 전 출간되었던 <기억> 중에서도 나왔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년사업가 김대중 3 - 길이 아니어도 좋다
스튜디오 질풍 지음 / 그린하우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나마 안경잡이 과장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 여직원의 서랍 안에서 복표가 발견되자 바로 가책을 느끼며 부장과 상의하려 들지만, 부장 이놈이 인간이 아닙니다.

"어차피 조선인 하나 나간다고 문제 될 것 없어."
"이건 처음부터 잘못된 겁니다!"

아무튼 과장은 생각보다 강한 태도로 제 잘못을 바로잡고, 주인공뿐 아니라 "그의 책상"도 함께 사무실로 다시 들입니다.

이 대목에서 주인공은 드디어 미인 차용애씨와 장래를 약속합니다. 선남선녀가 연을 맺는 장면은 언제나, 누가 봐도 흐뭇합니다. 한편 강남진도 친구에 질세라 홍숙희라는 여인을 데리고 오는데, 초면인 주인공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고 "그짝 야그는 이짝에게 많이 들었소."라며 걸쭉한 서남 방언으로 말을 건네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매력적입니다. 이 시절에도 이처럼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여성이 있었겠죠. 후편에서 이 캐릭터가 맹활약하는 에피소드들이 나올까요? 왠지 기대가 되면서도 살짝 걱정이 앞섭니다.

주인공은 말을 더듬으며 대답합니다. "반갑습니다. 김대중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이 장면에서도 가네보 공장의 혹독한 착취상이 다시 언급됩니다. 이야기가 우습고 재미있어서 서사 자체에 빠져들다가도 독자로 하여금 곧 긴장의 고삐를 잡게 하는 이런 점이 뛰어납니다.

성격이 괄괄한 홍숙희는 예비 신랑을 다그치며 당장 공장을 관두라고 합니다. 알고 보면 생각이 깊고 나이 어린 남편을 배려하는 마음이 사실 지극한 점이 이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강남진은 올 때마다 빈대떡만 시키는데, 아주머니는 정겹게 나무라며 물리지도 않냐고 말합니다.

양동시장은 예나 지금이나 명물이죠. 작품에서는 세피아 톤으로 이 시대 풍경을 잘 살려 표현하여 나이 든 독자에게나 젊은 층에게나레트로 정서를 어필하도록 세심한 배려를 베풉니다.

이제 상황은 바뀌고 일본인들이 물러간 후 대앙조선공업의 간부들이 찾아와 청년 주인공(위원장)에게 대표직 취임을 부탁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조선인들이므로 대화 중에 다 사투리를 씁니다. 여기서 큰 포부를 다지게 된 주인공은 다시 회사를 나오고 자신이 창업하여 "목포해운공사"를 차립니다. 월급도 많이 주는데 구태여 왜 힘든 창업을 하냐는 질문에, 주인공은 "답이 앞에 있지 않냐"고 대꾸합니다.

창업하면 고생길이 훤하죠. 맞습니다. 그래도 큰 뜻을 품은 사람은 자기 사업을 해야 합니다. 또 주인공과 같은 사람은 어딜 가도 보스 노릇을 해야지 남 밑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또 일은 야무지게 해서 어느 보스 밑에서도 인정을 받고 출세를 하는 타입이지만 말입니다.

주인공의 대사 중에서 "가당치도 않아라~"에서 "않어라"라고 했으면 더 서남 방언 다웠을 뻔했다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대양조선공업 전무의 대사가 참 우스운데 "김대중 위원장님 참 거시기하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가 그것입니다. 주인공도 이 말에 당황했는지 "거시기.요?"로 말을 받습니다.

대표로 취임한 주인공의 표정은 야심만만하면서도 샤프합니다. 멋지게 태평양으로 갈 일만 남았다는 현장 감독의 설명에, 최선을 다해달라고 주인공은 부탁합니다.

"저 배는 제 꿈이자 희망입니다."

어떤 정치인, 인물의 전기라고 구태여 생각할 필요 없이, 스토리가 치밀하게 짜여진 한 편의 재미있는 만화로 얼마든지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특별한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이는 당연 독자의 몫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년사업가 김대중 2 - 이름을 건 약속
스튜디오 질풍 지음 / 그린하우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당시 유럽이나 미국 실상을 담은 기록 영화 같은 걸 보면 여성들이 노출을 최대한 자제한 원피스 수영복에 머리수건을 두른 모습을 보곤 하는데 이 만화에도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차이가 있다면 피사체가 조선, 혹은 일본 여성들이라는 점뿐입니다.

여기서 주인공의 친구 차용식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 여동생이 차용애씨이며 바로 이분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첫번째 부인입니다. 이분과는 나중에 사별하게 되죠. 여튼 잘생기고 능력도 좋은 주인공한테 마음을 설레어하는 여성이 한둘이었을 리 없습니다. 게다가 위기에 몰리면 나쁜 놈의 소중이를 걷어차는 임기응변 능력까지 뛰어나지 않습니까? 물론 놈과는 나중에 화해하고 감복까지 시키며 선생님이란 소리까지 들었으므로 문제가 될 건 없습니다 ㅎㅎ

차용애씨와는 이 시점으로부터 1년 전, 유달 해수욕장에서 처음 만난 걸로 나옵니다.

"나 원참 이런 촌놈 XX들! 암튼 멋을 몰라도 한참을 모른당께~ 진정한 모던보이는 더위를 타지 않아부러!"
"땀 아녀! 이것은 목포의 눈물이여!"

참고로 유행가 목포의 눈물은 1935년에 발표되었으므로 아나크로니즘은 아닙니다. 이런 디테일까지도 고증이 정확해서 이 만화가 더 마음에 듭니다. 위 대사는 차용식씨의 몫으로 만화에 나옵니다. 주인공은 꽤 근엄한 분인데 설마 저런 말을.... ㅎㅎ

그러나 다음 대사를 보십시오.
"누구라도 뛰어 들었을거야.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성을 위해서라면."

오 이건 마치, 엘리자베스 1세를 위해 자신의 겉옷을 진흙탕에 깐 랄리 경의 고사를 연상케 합니다. 하긴 미인을 얻으려면 이 정도 능청(책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은 부릴 줄 알아야죠.

"X신 같은 놈들이 XX을 한다. 2원이 돈이냐? 그냥 니 돈으로 채워 넣으면 안 돼?"

전도 유망한 조선 청년이 직장에서 윗사람의 굄을 받고 잘나가면 꼭 이런 못난 놈들이 시비를 걸고 음모를 꾸미기 마련입니다. 고발을 한다느니 뭘 일러바친다느니 병X 같은 수작을 부리지만, 그런 돌머리들의 책동이 어디 잘 풀릴 리가 있겠습니까?

주인공은 정치인으로 활약할 당시에도, "외강내유"라는 말을 곧잘 들었습니다. 이는 그와 정반대 진영에 있던 어느 언론인(아주 유명한 사람이죠)이 한 말인데, 이 말만큼은 딱히 악의를 갖고 한 건 아니라고 저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그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사면복권이 된 후 망월동 묘지를 찾아가 오열했는데, 이 외에도 그는 눈물을 보인 적이 많았습니다. 서러우니까 눈물을 보이는 건 뭐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정입니다. 나라를 잃은 청년이 어디 기댈 곳이나 있었겠습니까. 저는 이런 솔직하고 과장 없는 묘사 때문에 이 만화가 더 좋아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타게다의 반응을 보십시오.
"야 일어나봐! 기차역에서 나하고 붙었던 그 김대중이는 지금 어디 간거야? 아무리 상대가 많아도 싸웠던 그 김대중은 지금 어디 간 거냐고!"

이 대사는 이후 그의 행적을 보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가망 없는 투쟁을 벌이다가 결국 이긴 인물 아니겠습니까.

"자존심을 밟아 줘야지! 잔인할 만큼 말이야!"
생긴 것도 아주 밥맛 떨어지게 생긴 왜놈이 또 음모를 꾸밉니다.

한편 친구 강남진이 광주에 있는 가네보 공장에 취직하려고 하자, 주인공은 이를 말립니다. 저 1권 중에서도 여성 직공을 착취하는 어떤 시설에 대해 소년이 우려하는 장면이 나왔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년사업가 김대중 1 - 섬마을 소년
스튜디오 질풍 지음 / 그린하우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위대한 사람의 발자취를 뜨겁게 더듬는 작업은 역시 그 어린 시절부터가 되어야 할 듯합니다. 운동 신경이 뛰어난 스포츠맨(여성 포함)들도 그렇고, 요즘 저는 왜 뛰어난 사람들이 이렇게 벽지, 섬 지역에서 많이들 출생할까 하는 의문을 가진 적 있습니다. 농담으로 하는 말 중에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 나야 한다" 같은 게 있듯, 맑고 웅대한 자연과 접하며 성장해야 한 인물의 가슴 안에 어떤 웅지 같은 게 배양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소년 김대중은 우리가 다들 잘 알듯 전남 신안 하의도 태생입니다. 이 1권에서는 아주 어린 시절은 생략하고, 1930년대 일제가 편 민족 말살 정책에 따라 "조선어"를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심지어 말하지도 못하게 하는 조치를 편 시점부터 그 시작을 잡습니다. 항구에 큰 배가 들어올 때 다른 아이들은 그저 그 사이즈에 감탄하지만, 소년은 "저처럼 큰 배에,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아닌, 모두가 잘 살게끔 물자와 인력을 싣고 교류하면 얼마나 좋을까?" 같은 생각을 합니다. 같은 물을 마셔도 독사가 마시면 독액이 되며,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는 이치와 비슷합니다.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 저희 아버지도 아주 가끔, 자주는 아니고 가끔 우산을 들고 학교까지 찾아와 주시곤 했는데, 이 만화에서도 그 가부장적인 풍조가 지배하던 시절 소년의 부친께서 찾아와 아들의 손을 잡고 귀가하려 합니다. 이때, 소년의 친구 중 하나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학교에서는 조선말 쓰면 안되는데요."

북한에서도 어려서부터 주제사상, 유일체제의 우월성을 열심히 가르치기에 어린이들이 멋도 모르고 독재자를 찬양하는 게 몸에 배어 있을 겁니다. 1930년대에는 이처럼 민족 말살 정책이 치를 떨 만큼 집요하게 이뤄졌기에, 저 철없는 어린이가 동급생의 부친에게 이치에 닿지 않는 저런 말을 하는 겁니다. 뭐 아저씨가 혹 훈도에게 제재나 받지 않을까 염려되어 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여튼 어린이한테 이런 몹쓸 일을 시키는 게 가장 가슴 아프다는 느낌입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 혹 생각이 난다면 얼마나 수치심과 죄책감이 크게 떠오르겠습니까. 물론 그런 걸 모르는 한심한 성인, 자기 자신의 잘못을 전혀 성찰 못하는 인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우리 커서 큰사람이 되불자."
사실 어린이들의 대부분은 이런 야망, 야무진 뜻 같은 걸 품지 못합니다. 그저 들판을 뛰놀고 흘러내린 코를 들이마시며 친구들과 웃고 떠들 뿐이죠. 하지만 먼 훗날 역사에 족적을 남기는 큰 인물은 어려서부터 그 태도가 남다르죠. 이런 큰 인물은 철없는 친구들에게조차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래서 저 말을, 그 뜻도 모르면서 친구들이 같이 되뇌는 겁니다. "되"는 "돼"로 썼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 봤습니다. 서남 방언의 "되불자"는 "되어 버리자" 정도의 뜻인데, 그렇다면 연결 어미 "~어"가 생략된 꼴이기 때문입니다. 서남방언에서 "왜"와 "외"는 대체로 구별이 되는 편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예전에는 고교생 정도면 골격이 다 자라 거의 성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요즘은 학부생이라고 해도 아직 어린 인상이죠. 아무튼 상급 학교(당시 명문이었던 공립 목상)에 진학한 그는, 또래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을 빚습니다. 물론 원인 제공은 일인들이 먼저 한 것인데, 조선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소년은 일인들을 혼 내 주는데, 이 때문에 저쪽에서도 힘 좀 쓴다는 놈이 찾아와 대결을 요청합니다. 이름은 타케다라고 나오는데, 행실이 불량해서인지 상의를 거의 탈의한 상태입니다. 이런 양아치들이 특정 동네에 가면 요즘도 자주 보이죠. ㅋ

이때 저 타케다라는 덩치의 대사가 걸작인데,
"나라를 빼앗기고, 여자들마저 빼앗길 것 같은 위기의식에서 나온 질투가 원인인 건가?"
입니다. 물론 말도 안되는 헛소린데, 그래도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양아치 입에서 나온 것치고는 제법 말의 구조를 갖춘 꼴이니 말입니다.

소년은 일단 "선빵"을 맞는데, 반격을 하다 그의 "소중이(이 책에 나오는 표현입니다)"를 걷어차고, 이를 보며 격분한 왜놈 학생들이 금기를 깼다며 떼로 그를 공격합니다. 콧수염을 키운 히라이시 준위라는 자가 폭력 사태를 저지하고, 소년은 학교에서 심한 체벌을 받습니다. 잘못은 왜인 학생들이 먼저 저질렀는데도 말입니다.

"나라 잃은 설움이란 이런 것이구나!" 소년은 절규합니다.

여러 곡절을 거쳐, 저 타케다와 주인공은 이제 제법 친한 사이가 되며, 지금도 그렇지만 영어 잘하는 사람에게 각별한 존경심을 갖는 경향이 있는 일본인들은, 제법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 주인공을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이때부터도 "선생님"이란 호칭을 얻게 되네요.

일 잘하는 주인공은 그 젊은 나이에 조선은행 목포지점 지점장으로부터 직접 전화까지 받습니다. 여기 나오는 일인들은, 지점장부터 그 준위, 또 타케다까지 거진 모두 코 밑에 수염을 기르는 게 독특합니다. 여튼 지점장과의 회식 자리에서 주인공은 "일본이 밀리고 있다"는 전황(2차대전) 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다시 한 번 지점장과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지점장은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사태를 정확히 직시했던 현인이었던 거죠. 하긴 그런 안목이 있으니 사람도 알아 본 것이고 말입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뭐 있나. 맞는 말을 했을 뿐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대담한 제안 - 사상 최악의 불황을 극복하는 12가지 경제 이론
린다 유 지음, 안세민 옮김 / 청림출판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름 난 경제학자들 중에는 시스템의 본질과 인간 본성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을 가진 이들이 많았습니다. 존 메어나드 케인즈는 알프레드 마셜의 수학자 입문 권유에 대해 "수학 같은 걸 하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다"는 말을 했는데, 수학처럼 천재의 영역인 학문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한 가지 외에 다른 분야의 재능까지 두루 타고난 이에게 경제학 같은 보다 복합적인 전공이 더 어울린다는 뜻이겠습니다. 경제의 필드는 다양한 인간들이 복합적인 욕망을 안고 참여하는 장이므로, 일차원 아닌 다차원 변수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이라야 정확히 이해가 가능할 것 같고, 그런 이유에서, 지난 시대의 경제학자들이 제시한 처방 중 오늘날에도 적용될 만한 게 없겠는지 살피는 노력이 매우 유익, 유용할 듯합니다. 조순 전 서울시장은 "경제학은 아이디어는 돌고 도는 것"이라며 자신의 저서 <경제학 원론>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책 처음에는 애덤 스미스가 나옵니다. 故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교수라든가 유시민 같은 사람은 애덤 스미스 같은 독특한 지성을 배출한 스코틀랜드의 풍토에 대해 지적한 적 있습니다. 한 나라의 경제는 정부에 의해 어떤 재조정이 필요한가? 필요 없다는 이론을 정초한 사람이 바로 애덤 스미스("보이지 않는 손")이며, 수백 년 후 이에 수정을 가한 사람이 케인스입니다. 책에서는 두 입장을 교차시켜 가며 이 오래된 입장들의 대결을 설명합니다. 케인스 이야기는 뒤의 6장에서 다시 나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책은 그저 지난 시대 경제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요약, 소개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오늘의 이슈"와 관련하여 어떤 시사점을 던져 주느냐를 또 집중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문제를 독자들은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으며, 사실 애쓰지 않아도 저자가 노련하게 두 논점을 잘 교차시켜가며 결론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유시민은 그의 책 중에서 "아이디어는 탁월하나 읽기에 너무도 까다로운, 대책 없는 서투른 문장을 구사한" 리카도에 대해 자세한 소개를 했었습니다. 이 책 저자는 문장력에 대한 언급은 길게 하지 않고, 대신 그의 놀라운 투자 수완(당대에 그를 거부로 만든)에 대해 칭찬합니다(유시민 책에도 이 말은 있습니다). 천재답게 그는 당시 영국이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으며, 그 해답은 바로 과감한 자유무역이었고, 이는 동시대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렀습니다.

자유무역이라 해서 만능의 해답은 아니지만, 분명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한 해답이 됩니다. 일례로 2000년대 초반 노 대통령이 미국과 FTA를 추진하려 들 때, 노동계 등에서 격렬한 반대를 했으며, 많은 이들은 미국에 크게 종속되는 패자의 게임이 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14년 정도가 지난 지금, 오히려 미 대통령 트럼프가 "끔찍한 협상"이라 비판하며 재개정 내지 폐기를 주장할 만큼 우리에게 유리한 거래가 되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미국에서 최근 리쇼어링 붐이 일어나는 것도, 자유무역의 폐해 그 일단을 드러내는 증거 중 하나입니다. 저자는 폴 새무얼슨의 말을 인용하여, 리카도의 자유무역 이론이 "틀림없이 타당하지만, 가장 높은 지능을 가진 이들에게도 쉬이 납득이 되지는 않는 이론"이라고 합니다. 책에서 누누이 강조하듯, 제조업 분야에서는 선진국이 손해를 대체로 보며, 이를 서비스업의 우위로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메꾼다고 합니다. 아마도 FTA 협상 당시, 미국이 실수를 하여 우리 국민이 미국 서비스(3차 산업) 분야를 잘 소비하지 못하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미국이 당시 법률 서비스 수입 쪽에 역점을 두었는데, 현재까지도 "미국 변호사"를 매매, 등기, 교통사고, 채권 회수 등 사건에 우리가 고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기업이 국제 소송에서 저들을 많이 활용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3장은 칼 마르크스 이야기인데, 저자는 이것 관련하여 "중국이 과연 성장을 계속하여 강대국이 될 수 있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끌어내려 합니다. 삼십 년 전만 해도 국내의 진보 성향 경제학자들은, 덩샤오핑의 노선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을 가할 만큼, 중국의 노선은 사실 마르크스의 입장과는 궤가 아주 다른데도 말입니다. 책에는 안 나오지만 실제 중국은 저 독일 남서부에 위치한 트리에르까지 가서 마르크스 관련 사업을 후원하고 현재 자신들이 그의 입장을 계승했다며 대대적으로 선전하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첫째 노동력의 이동("요소 재배치")이 중국에서는 대단히 제한적이며, 두번째 중국의 공업 시설은 다른 개도국의 그것과는 달리 "재공업화의 과정"을 거쳤으므로 순수하게 맨땅에 헤딩 식은 아니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니 앞 단계에서 마오 주도의 거대한 실패까지 다 감안하면 보다 비용이 큰, 비효율적인 성장이었다는 소립니다.

알프리드 마셜은 (부분적으로) 케인스의 스승이었고 따뜻한 마음을 강조한 학풍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경제학에서 수요와 공급 중 어느 요소가 가격을 결정하는지에 대한 난제를, "가위의 두 날"이라 정리하여 명쾌하고 지혜롭게 해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불평등의 문제"가 다시 대두하였고 이 덕분에 버니 샌더스나 코빈 같은 이가 미국, 영국의 정계에서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이 불평등 이슈를 칼 마르크스가 아니라 마셜에게서 단서를 잡은 저자의 태도가 독특하죠.

부자는 소비 성향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적으므로, 가난한 사람한테 가는 몫을 더 늘여야 그들이 돈을 더 많이 써서 경제 전체가 살아난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고, 이런 입장의 먼 단초가 마셜이었습니다. 마셜은 그 외에도 조세 제도, 복지 시스템의 정비를 주장했죠. 그러나 우리 시대의 원로 폴 크루그먼은 이에 반대했고, 오히려 부자가 돈을 더 많이 써 경제 회복에 기여한다고 말합니다. 젊은 토마 피케티도 이제는 중요 사상가로 대우되며 불평등의 근원적 독소에 대해 지적합니다(라고 이 책에서 인용됩니다). 부자의 소비 성향이 설령 생각보다는 크더라도, 그들이 새로 소비하는 분야가 비 전통적인 섹터이며, 이런 섹터에서의 생산자가 그리 많지 않으므로 경기 회복의 정도가 더딘 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섹터로 빨리 진출, 적응하게 경제 활동 인구의 참여를 돕는(재교육 지원 등) 게 하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어빙 피셔가 (다른 책들에서보다는)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경기 회복을 위해 어느 정도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점은 같으나 케인즈가 워낙 그 천재성을 매력으로 앞세워 인기를 끌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고 책은 말합니다(p183 마지막줄 역자 설명에 "평창→팽창" 오타 있습니다). 책은 그의 입장을 버냉키라든가, 하이먼 민스키의 최근 해석과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특히 미국인들)이 08년 위기를 아직 완전히 극복 못했거나 그에 대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으므로 디플레이션, 리세션에 대한 핸들링은 매우 중요합니다. "재평가가 필요한 최고의 경제학자" 이것이 책의 평가입니다.

08년에 세계적인 금융위기 조짐이 보이며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12년도에는 그리스가 국가 부도 위기까지 몰리며 또다시 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공공투자와 저금리의 효과적인 활용"이 등장하며, 전자는 케인스의 재정정책, 후자는 피구 등의 금융통화정책을 대변합니다. (거시)경제학 교과서에서 지겹도록 강조하는 것처럼, 케인스는 "저축과 투자는 자동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 서투른 기제를 정부가 적극 개입해 보완해야 한다"는 입장이며, 피구 등은 "그래봐야 소용없다!"(구축 효과 등 때문에)에 가깝습니다.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는 노동의 착취를 통해서만 창출이 가능하다"고 했으며, 이에 대해 슘페터는 사실상 완벽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아니다. 혁신을 통해 자본가 역시 잉여가치를 만든다." 만약 누가 애플의 아이폰을 사면서 "스티브 잡스의 혁신이라는 명분"을 찬양한다면, 그 사람은 어디 가서 마르크스를 원용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겁니다(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죠). 슘페터는 분명 자본주의가 자기 완결적이 아니며 대단한 취약한 시스템이나, 자본가(뭐 당연 노동자도 가능합니다)의 혁신이 언제나 그런 위기를 돌파하는 계기를 마련한다고 합니다. 본질은 혁신이지 계급 대립이 아니라는 거죠. 여기서 저자는 중국 경제를 날카롭게 비판하는데,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라고 반드시 자체 모순을 해결하고 타국 경제에 도움을 주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이유는 무엇인가? 저가의 가격 경쟁력에 만족하고 혁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핵심을 찌른 지적 아니겠습니까.

하이에크는 우리 시대의 경영 구루였던 피터 드러커의 스승이며, 그렇게도 비판 받는 신자유주의의 원류로 꼽히지만 정작 진보 진영에서 이 사람을 그리 막 표적으로 삼아 공격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좌파를 자칭하면서도 하이에크 이야기가 나오면 "위대한 사상가" 정도로 대충 넘어가는 걸 보면 실소가 나오기도 합니다. 하이에크는 <노예에의 길>을 써서 큰 반향을 얻었고, 헤르만 파이너는 이에 대해 <반동(reaction)에의 길>을 저술하여 반박했죠.

조앤 로빈슨은 우리 나라에서 한때 추종자가 많았으며, 이 책에서는 독립된 항목으로 다뤄지고 케인즈의 "제자"로도 성격 규정됩니다. 반면 일각에서는 "경제학을 파괴하려는 사람"으로 비난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녀의 영원한 토픽은 바로 "오르지 않는 임금"이죠. 앞에서는 밀턴 프리드먼이 나오는데 저자는 "하이에크가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으로 그 의의를 높이 둡니다.

더글러스 노스는 경제 성장에 있어 중요한 건 "제도"임을 강조하고 이 때문에 왜 어떤 나라는 번영하고 어떤 나라는 그렇지 못한지, 즉 "실패한 국가"가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경로의존성에 의한 이런 설명은 "중국은 아프리카에 비해 성공한 국가이며 큰 위기도 없고 빈곤을 거의 근절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만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겠습니다.

"잃어버린 30년" 때문에라도 오늘날 일본을 성공 사례로 꼽는 입장은 이제 거의 없다시피합니다. 저성장은 과연 그럼 우리 모두의 미래인가? 한국에 대해서도 그런 길을 걸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으나 최근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자는 여기서 로버트 솔로의 모델을 소개하며, 그 요체는 "역동적인 투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