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였을 때
민카 켄트 지음, 공보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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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내가 나이길 바라며, 그저 동물적인 욕구나 충족된다고 삶에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나라는 정체성은 오랜 세월 동안 나에 의해 형성되며, 비록 그 결과가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면이 있더라도 내가 오랜 동안 소중히 가꿔 온 만큼 내가 사랑하고 또 내가 책임을 지는 대상인 것입니다.

브리엔은 몇 달 전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이상한 건 그 일이 있은 후 주변의 모든 이들이 자신에게서 떠났으며, 머리를 다친 탓인지 몇몇 기억이 분명치 못하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호화로운 저택에 살지만 사고 후 그 큰 집에 혼자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젠틀한 의사인 나이얼을 세입자로 들입니다.

나이얼은 나무랄 데 없는 매너와 인성, 훌륭한 직업을 가진 남성인으로 브리엔 눈에 보이는데, 이해가 안 되는 건 그가 부인 케이트와 별거 중이라는 사실입니다(이렇게나 훌륭한 남자인데, 어떤 여자가 감히... 같은 생각이죠). 브리엔은 차츰 세입자인 그에 대해 깊이 알아가지만, 또 하나 이상한 점은 그가 처음에 알던 나이얼에 대한 이런저런 사항이 알고 보니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겁니다(p55에 "이 사람이 그 얘길 했던가"라며 고민하는 모습 나옵니다). 하긴 이 역시 브리엔 자신이 사고의 충격으로부터 채 회복을 못한 탓일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모두 자신이 성치 못하다고 하니, 브리엔 자신이 매사 조심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p11에는 수혈을 통해 낯선 이의 피가 내게 흐르는 느낌이라는 브리엔의 말이 나옵니다(이게 1부 말미의 어떤 사건에 복선 구실을 하죠). 작품은 크게 3부로 나뉘었는데 1부는 브리엔, 2부는 나이얼, 3부는 두 사람의 시점이 교차 서술됩니다. 음.... 우리 독자들은 1부 내내 1인칭 시점에서 이어지는 브리엔의 말을 조심스레 따라갑니다만, 브리엔 본인도 뭔가 확신이 없고, 이 여성이 스스로 그리 지각(perceive)한다는 것일 뿐 진상은 전혀 다른 곳에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조금씩 품게 됩니다.

브리엔은 그저 사고 후유증 때문에 고민하는 게 아닙니다. 우연히 그는 자신과 이름, 신분 사항, 심지어 외모까지도 똑같은 여성을 웹상에서 보았는데, 자신의 많은 지인, 친척들마저 그녀의 소셜 미디어 계정에 연결하고 있는 걸 보고 경악합니다. 도대체 누가 나를 사칭하고 다니는 걸까? 그것도 하필 자신이 사고를 당한 후 취약,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 후에 말입니다. 정신과는 아니고 종양학 전공이지만 의사인 세입자 나이얼에게 도움을 청할까 생각도 해 보지만 조심스럽습니다.

이런 힘든 상황일수록 누구에게건 친구가 필요합니다. 브리엔이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하는 부분에선 유독 친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예를 들면 p27의 "내가 괴한에게 습격당한 후 네 친구들은 내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다." 라든가, p66의 버려졌다 운운하는 대목, p81에서 (세입자이자 이제는 유일한 친구인) 나이얼마저 잃고 싶지 않다고 하는 부분 등이 있습니다. 나이얼과 식당에서 근사한 한 끼를 먹는 대목(p85)에서 전에 친했던 앰버를 만나는 대목도 그렇죠. 참고로 저는 여기서 이 앰버라는 친구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그렇지는 않고, 뒤에 가면 마리솔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그 몫을 대신(?) 하더군요. 조금 맥거핀 같아 보였습니다.

p105에서 그녀는 다시 "나이얼은 가장 친한 친구"라며 의존하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진상이 다 밝혀진 p282에서는 "내가 가장 힘든 순간에 왜 모든 친구들이 나를 버렸는지"를 알아내게 됩니다만 사실 독자들은 여기쯤에서는 별반 궁금함을 품지 않게 됩니다. 바로 그 몇십 페이지 앞에서 누가 진상을 다 이야기했기 때문이며,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더 앞에서 다 알아챌 만도 했습니다. p154에서 "나에게 친구는 있어요?"라고 그녀가 말하는데 이 대목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 때 꼭 남의 흉을 보며 뒷담화를 일삼는 이들이 있죠. 여기서도 브리엔은 이웃인(아마도) 두 아줌마를 의식하며 괴로워합니다(p32).
p19에선 "내가 괴물이 아님"을 분명히하고 싶다고도 하는데 독자가 보기에도 왜 일이 이 지경까지 왔을지가 의아하죠.

브리엔은 이 사고가 아니었더라도 가뜩이나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음이 p56에 나옵니다. 그녀의 생모가 어렸을 때 부모(즉 브리엔의 조부모)와 불화하고 집을 나간 후 완전히 떨어져 산 거죠. 조부모의 가정이 매우 윤택했으므로 브리엔은 별 불편을 겪지는 않았으나 생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이 큰 상처가 아닐 수는 없었을 텝니다. 뭐랄까, 다친 사람이 더 자주 다치는 경향처럼.

브리엔의 조부모가 했다는 말, "졸부는 요란하고 거부는 조용하다."에서 어느 정도 집안 분위기가 짐작됩니다. p96에서 "아직 외조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헐지 않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우리는 뭔가 이분이 자신만의 환각 속에 사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됩니다. 일단은 말이죠.(대충 이런 말이 나오면, 이 장르의 관습상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이 소설에는 여러 번 레거시 미디어의 명칭이 등장해서 문화 코드를 환기합니다. p58의 "ESPN 하이라이트나 보며 곯아떨어지는...", p79의 "데이트라인을 마치 노부부처럼 시청하는..." p168의 "NPR 채널에서 클래식락을 들었다"는 부분 등이 그렇습니다. p58의 저 문장은 그래서 그런 남자하고는 엮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인데 문득 엠스플 베이스볼 투나잇을 보며 잠드는 저하고 비슷하다 싶어서 뜨끔해지기도 했습니다. p161에는 "찌그러진 기아차Kia"라는 말이 나오는데 물론 우리 한국의 그 자동차 메이커가 만든 상품을 가리킵니다. 기아차라고 하면 한국 독자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이런 대목에서조차 고유명사라고 영어를 병기한 출판사의 태도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물론 꼼꼼하고 일관된 편집 원칙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브리엔은 점잖고 조신한 여성인데 작품 중에서는 거친 말이 자주 등장해서 약간은 당황스러웠습니다(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지만). 예를 들면 p67의 "싸가지 없는 것들에게는 사과 따윈 하지 않는다."라든가, p75의 "돼먹지않은 개새x" 같은 게 그렇습니다. 이 둘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p290)"를 향한 게 아니라서 이상하죠(물론 놈한테라면 상관 없습니다만). p267에서는 회계사(진짜 고맙고 일 잘하는 사람ㅋ)와의 통화 후 비로소 모든 걸 알게 되어 "그 개자식이 내 재산을 털었다."고 합니다만 이건 뭐 당연한 반응이겠고요.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아직 안 읽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스포일러라고는 했으나 2부 시작부터 벌써 나이얼이 자신의 정체와 의도를 모두 독자 앞에 밝히기 때문에, 이후에는 마치 "재능있는 리플리씨"가 어떻게 법의 추적을 피하는지 구경하는 느낌으로 이 스릴러를 읽게 됩니다. 3부 끝무렵에는 나이얼이 본인 입으로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처럼(p303)"이란 말을 하기도 하죠. 그는 거의 평생 좀도둑질과 사기, 자기 합리화로 점철된 삶을 살았는데 마지막에 만만히 봤던 브리엔에게 정신적으로 치명타를 맞습니다. 근본이 잘못된 인간이기는 하나 꽤나 치밀한 편이었던 그가 마지막에 실책을 연달아 저지르는 건 아마 이 타격이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이얼, 아니 소설 후반부에 셰인 넛센이라고 본명이 밝혀지는 범죄자는 여튼 본인 딴에는 꽤나 유능하다며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이 자가 어떻게 브리엔을 알게 되었는가. 그에게는 계모이자 인생의 사표였던 소냐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이 계모는 고생고생하며 피 한 방울 안 섞인 셰인을 키웠습니다. 이 점에서 아 소냐라는 이름의 그녀나 그 아들 셰인이나 근본이 나쁘지는 않은 사람들이구나 하고 잠시 착각도 했습니다만, 나중에 브리엔이 "그 수많은 편지 중 너(셰인)에 대한 언급은 한 번도 없었다"며, 일종의 세뇌, 가스라이팅 대상으로 셰인을 갖고 놀았다는 것, 혹은 세상에 자신의 복제품 하나를 내놓는 걸로 보람을 삼았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사만다는 어렸을 때부터 셰인이 동료로 삼은 여성인데 셰인은 내내 그녀에 대해 애정이 아니라 "충성심"을 확인하며 만족합니다. 물론 사만다는 충성심과 애정을 동시에 품었겠습니다만 후자는 셰인에게 큰 의미가 없었을 텝니다. 그렇다고 셰인이 (나중에 사만다가 "깨달은" 대로) 그녀를 철저히 이용만 한 건 아니지 싶고, 적절한 보상이랄까 대접은 해 줄 생각이었던 듯합니다.

반면 무고한 피해자이기만 한 브리엔에게는 나중에 "죽일" 생각까지 품었는데, 이 역시 계모 소냐의 가스라이팅이 성공적으로 먹힌 결과입니다. p177에 "꿈을 이루는 녀석"이라는 평가가 나오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죠. p186, p172에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다"며 셰인은 다짐을 거듭하거나 합리화를 시도 중인데 역시 계모에게 세뇌된 결과입니다. p153에서 셰인은 브리엔에게 "장모님은 교과서처럼 꼬장꼬장하며 자기도취 성향이 강하다"고 하는데 이걸 보아 그의 계모가 비정상이었음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이런 장르는 독자들이 익숙한 분야인데 p128에선 대프니 듀모리에가 직접 언급(오마쥬)되며, 그 장편(<레베카>)의 배경인 만달레이 별장과 관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p210에 랭곤크랩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p338에서야 이 소설의 전체 주제이다시피한 "가스라이팅"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p373에는 윌리엄 윌키 코린스의 장편 제목이기도 한 "월장석"이 언급되네요.

p245에서 브리엔은 "수 개월 동안 살아 오다 왜 지금 정신병원에 나를 보낸" 나이얼이 이상하다며 의사를 설득하는데 이 점은 독자들도 이상하게 생각했던 대목이며, 작게 봐서는 나이엘의 계획이, 좀 크게 보면 소설의 구성이 다소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게는 저 말이 작가의 솔직한 고백처럼도 들렸습니다.

p306을 보면 브리엔이 본명을 알아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친구 마리솔에게 말하는데 미국 사법제도가 이처럼 허술한 면이 있나 싶기도 했습니다. 범죄자 특정이야 필요하지만 우리 같으면 경찰이 충분히 수사에 나설 만한 사안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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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외 서커스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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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외"란 단어는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고는 하나 우리말에서는 그리 널리 쓰이지 않습니다. 다만 "인외마경" 같은 말에서 접하는 정도죠.

이 판타지 스릴러는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인외"와 "서커스"를 다룹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유명한 서커스단이 파산 보호 신청을 했다는 뉴스도 나왔습니다만 유행병이 아니라 해도 요즘 세상에 서커스를 구경하긴 힘듭니다. 엄청난 완력을 지닌 데다 거의 불로불사에 가까운 흡혈귀 역시 마찬가지(?)지요. 어렸을 때는 모르겠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인외든 서커스든 그리 큰 관심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말입니다.

소설은 별다른 서두도 없이 대뜸 흡혈귀와 인간 사이의 격렬한 전투 씬부터 시작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흡혈귀는 완력이 매우 강하며 일부는 비행도 가능한데(대체로 판타지에 피처링되는 흡혈귀는 날 수 있긴 합니다만), 이에 대항하는 인간들은 수가 많고 무기가 강력할 뿐 그저 인간일 뿐인데도 기술과 용기가 범상치 않아 자기 임무를 잘 해 냅니다(한참 뒤 p253에, 평범한 인간은 흡혈귀를 절대 이길 수 없으며 예외 조건을 어느 녀석이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서두의 전투 씬을 이미 구경한 독자는 수긍할 수밖에 없겠죠). 그렇다고는 쳐도 무슨 소설이 대놓고 본론부터 펼쳐지나 싶었는데, 그건 제 착각이더군요.

서두를 장식한 인간 콘서시움(소설 속에서 이런 용어를 씁니다)은 알고 보니 일종의 바람잡이였고, 작품의 진주인공들은 가난한 유랑 서커스단원들로서 훈련을 통해 몇 가지 특별한 기술을 갖춘 것 말고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흡혈귀는 본래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원기를 유지하는 놈들이니 사람을 죽이는 건 이상할 게 없으나 왜 하필 이 서커스단원을 표적으로 삼았는가. 앞부분에서 흡혈귀만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콘서시움이 서커스단으로 위장했다는 말을 듣고 혹 이들이 그들이 아닌지 착각해서였습니다. 가뜩이나 경영난에 시달리며 고생하던 단원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는 격입니다. 아무튼 소설의 진짜 사연은 지금부터 펼쳐집니다.

소설은 판타지 장르이지만 여러 곳에서 작가의 깊은 성찰의 산물일 듯한 인간사 보편의 진리가 읊어지는 점이 좋았습니다. 소설 내내 인물들은 누가 적이고 누가 내 편인지, 피아식별의 과제와 의무감을 마주합니다. 사르트르도 "타인은 그저 지옥"이라 말했지만, 사람은 설령 가까운 친구, 친척이라 해도 마냥 동질감과 유대를 형성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란 본디 개체로서의 강렬한 느낌과 독자성을 자각하며 사는 동물입니다.

흡혈귀는 신체적으로 탁월한 존재이지만 개체 생존을 고집하는 건 아니라서 캐릭터인 그리즐리와 그의 부하들은 조직을 이뤄 살아갑니다. 반면 미티어처럼 "고독한 늑대"처럼 사는 녀석도 있나 봅니다. p248에 보면 어떤 놈(스포일러)이 자신을 가리켜 "무리에 속해 있긴 한데 권력관계일 뿐 애정은 없다"고 하는데,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 중에 나온 소리이지만 이 부분만큼은 진짜인 듯 보였습니다. p290에서 누가 하는 말 중 "녀석들이 죽었다고 별 느낌은 없어"라든가, p321에서 "녀석들의 분열은 놀랄 일도 아니"라는 전문가의 말에서처럼, 흡혈귀 종족의 연대감과 윤리의식, 성숙도는 가히 최악 수준입니다.

어쨌든 간에 흡혈귀들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터라, 과연 그들이 우리와 같은 생물인지부터 의심스럽지만 중반 이후 등장하는 도쿠 노인의 분석에 따르면 "신체의 조직 강도 자체는 우리 인간과 비슷"하며 나중에 란도가 (누구의 도움을 받아) 약점을 밝혀 내듯, 급소는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있으며 정말 우리와 닮은 바 많더군요....

서커스단원들은 여인 기프티라든가 단장 피에로처럼 나이 많은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젊은이들입니다. 그래서 서투르고 미숙한 점도 많지만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정신의 키가 크는 모습이 독자 입장에서 또 볼만합니다. p122에서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해"라며 자신의 기술이 존중 받아야 함을 주장하자, 누가(알고보니 이게 일종의 복선이었음) "그건 네 생각이지 관객의 논리가 아냐."라며 냉정한 현실을 일깨우는 대화 같은 게 재미있었습니다. p130에는 이동전화 기지국 타령도 나오는데 비록 판타지 장르지만 독자는 이런 상황 설정에서 현대인으로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p133에 "하늘을 나는 건 우리잖아?"라고 하는 말이 큰 웃음을 주는데, 사실 공중 곡예사에 지나지 않음은 모를 리가 없건만 이 절망적인 대치 상황에서 용기를 잃지 말자는 유머지요. p142에서 흡혈귀 캐터피라(책의 표기를 따릅니다)가 "하늘을 나는 새는 총에 맞고 싶겠냐고?"라며 비꼬는 대목은 그들의 잔인성을 일깨우지만 인간들도 이 대목에서 자성할 필요가 있죠. 소설 말미에 누가(스포일러) 란도더러 "너희들은 바퀴벌레인데 무슨 연민을 느끼겠냐?"고 하는 말도 뭐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커스단에는 곡예사뿐 아니라 마술사도 있는데 란도와 슈티가 이 작에서 거의 주인공 비중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마술의 비밀이 여럿 설명되는데 작가는 아마 이런 테크니컬한 면에 평소부터 관심이 많았던 분 같습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마술사가 당당히 살펴 보라고 하니 당연히 아무것도 없겠지" 같은 건 우리 관객들이 빠지기 쉬운 심리적 함정입니다. 만약 등장인물 중 누가 누군지 헷갈린다면 p97이하에 비교적 몰아서 소개가 나오니 그쪽을 수시로 참조하십시오. 등장 인물들의 개성을 좀 세밀히 파악을 해야, 뒤에 기다리는 대반전이 더욱 충격으로 다가올 겁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판타지 장르인데도 곱씹어 볼 만한 좋은 말이 자주 나옵니다. 주인공격인 란도는 물 속에서 탈출하는 묘기가 전문인데 공연 중 잘못하다 죽을 뻔합니다. 자신이 세밀히 설계한 장치였는데 하청업체에서 불량품을 넘겨 준 까닭입니다. 이 실패 후 그는 큰 좌절에 빠지는데 이 사정을 간접으로 전해 들은 도쿠 노인은 p167에서 "그를 도울 수 있는 건 그 자신뿐이니 네가 조바심칠 것 없다"며 참으로 현명한 충고를 해 줍니다. 일종의 휴브리스가 그의 발목을 잡은 셈인데 오만과 과신의 함정에 빠진 건 란도만은 아닙니다.

흡혈귀는 여기서 거의 절대 불멸의 존재지만 진짜 약점은 그들의 오만과 그에 따른 방심하는 습성입니다. p282에는 죽은 누구한테 도쿠 노인이 "같은 실수를 반복했던 걸 보니 아직 어린 녀석이었구나"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p203에는 "인간은 우리에게 상대가 안 된다고. ....라기라도 하면 모를까 말야."라고 하는 말이 있고, 같은 페이지에서 "오빠들" 어쩌구 하는데 이걸 보면 확실히 녀석이 어리긴 하죠. 어리긴 어린데 이루말할 수 없이 못됐습니다. 이런 녀석에게 어떤 잔인한 분풀이를 해도 무방할 듯하지만 p283에는 "우린 괴물이 아니니 그럴 수 없다"고 말리는 장면도 있습니다. 허나 니체도 말했듯이 "괴물과 싸우는 자는 (어쩔 수 없이) 괴물이 되기 마련"이죠. 슬프게도 말입니다. 이 대목은 영화 <에너미 게이트>에서 베우 에드 해리스가 잘 소화한 나치 장교의 대사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오만함의 폐해"가 잘 지적된 대목은 p171에서 캐터피라의 오만함, p165에서 역시 자신감 과잉 등을 지적한 곳, p186 그렇다면 그 요구는 부당해 슈티는 정론을 말하고 있다이 있네요.

책에는 상당히 잔인한 묘사가 많은데 앞서 말한 대로 작품 전체는 서사와 교훈, 유머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니 너무 걱정은 안해도 됩니다. 인외마경, 엽기적인 잔혹성을 파고드는 미학은 20세기 전반의 에도가와 란포가 유명한데 p168에는 "신을 모독하는 교잡종" 어쩌구 하는 부분이 있어 더욱 그를 떠올리게 되네요.

p175에서 캐터피라(얘가 제일 못됐죠)가 쿠와이에게 "너, 왜 아직 도망치지 않지?"라고 물어보는 대목이 있는데, 우리 인간이 인간이며 괴물 수준으로 안 떨어지는 이유를 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겠죠? 여기서 독자들은 결코 동료를 버리지 않고(동료뿐 아니라 동물들도 버리지 않습니다) 분투하는 그들, 거의 이길 가망이 없는 싸움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반면 흡혈귀들의 본성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이 독후감 앞부분에서 말했습니다.

p186에서 슈티는 민법 지식에도 꽤 밝은 듯한데(ㅋ), 설계가 잘못되었다고 그 업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고, 그 업자가 그런 사정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어야 한다면서 마치 민법 교과서의 한 대목을 읽는 듯해서 우스웠습니다.("그렇다면 그 요구는 부당하다며 슈티는 정론을 말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작가는 기술적인 면에 꽤 관심이 많은 분인 듯한데, p187에는 아들자가 나오며, p201, p291에는 바이스가 등장합니다. 아들자는 버니어 캘리퍼스라고 불리는 건데 책에도 설명이 나옵니다. 저는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이걸 배웠는데 아니 무슨 실업계 고교도 아니고 일반 중학교에서 국영수 아닌 이런 걸 왜 가르치는지가 몹시 짜증났습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역시 남자의 로망은 공구의 자유로운 활용이며 인터넷에도 DIY를 잘한다며 자랑 삼아 작품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더군요.

뭐 그건 그렇고 바이스에다 머리를 넣어 조이는 잔인한 장면은 1995년 스콜세지 영화 <카지노>에도 나오는데 여기서 거기 머리가 끼인 사람은 압력 때문에 안구가 튀어나옵니다. 작가분이 그 영화를 혹 보기라도 했는지 이 소설 속 묘사 역시 잔인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p179에 보면 "불의 추격 속도가 훨씬 빨라서" 홀랑 타 버리는 흡혈귀의 한심한 최후가 나오는데 이런 장면은 1990년 영화 <다이하드 2>의 마지막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말도 안되는 상대에게는 말도 안되는 방법을 써야 한다는 말이 p210에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오케하자마 전투가 생각났습니다. 여기서 요지는 지나치게 강해 이길 가망이 없는 상대에게는 기습으로 공격을 가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는 거죠. 일반인에게 존재를 알리지 않고 흡혈귀를 처단하고 다니는 건 1997년 영화 <멘 인 블랙>(그 이전에도 마블 원작이 있었지만)도 생각나는 대목입니다(흡혈귀가 외계인으로 바뀌었지만).

묘사가 잔인하지만 마지막에 코끼리, 사자 등 맹수와 힘을 합쳐 놈들을 무찌르는 건 마치 동화 <브레멘의 음악대>가 생각났습니다. 하나하나는 힘이 약하지만 지혜와 용기를 모으면 무찌르지 못할 강적은 없다는 교훈면에서도 그러하죠. 다 읽고 보면 마음이 뿌듯해지는 게, 작가의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세계관이 결국은 효과적으로 작 중에 잘 녹아들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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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경계선 - 사람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그어지는
아포 지음, 김새봄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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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을 보면 특정 위도를 따라 기나긴 일직선으로 이어집니다. 인위적 경계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어떤 무엇이 인위적이라는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해체해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품게 합니다. 이는 마치, 민족, 인종이 달라도 두 남녀 사이에 언제든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음과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든 느낌은, 경계선이라는 게 그리 만만한 존재가 결코 아니며, 애초에 지상에 없던 경계선을 구태여 만든 인간의 마음 안에 우리가 쉽게 극복 못할 어떤 무엇이 단단히 응어리져 있지 않나 하는 일종의 근원적인 절망감이었습니다.

阿撥이라고 한자로 쓰는 이름(우리식 발음으로는 아발)의 저자는 대만 출신의, 아직은 젊은 인류학자입니다. 전 처음에 중국 대륙에서 나고 자란 분인 줄 알았습니다. 공산 중국은 표면상으로 중국 경계 안에 터잡고 사는 다양한 민족들에 각각의 생존권과 자존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잔혹한 탄압과 일률적 동화 정책에 가깝습니다. 이런 당국의 이념과 스탠스에 동조하는 저자가 "슬픈 경계"를 논한다면 독자 입장에서 진정 슬픈 독후감이 빚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그렇지 않았고, 그래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만에서 나고자란 이의 시선과 입장이라는 게 의의로 큰 보편성을 담보할 수 있구나, 나아가 대만과 우리 나라의 젊은 세대가 생각 밖으로 많은 공통의 지평을 가졌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베트남은 저 개인적으로 몇 주 전 책프 독후감에서도 말한 것처럼 중국과의 항쟁 역사가 그 주된 정체성을 차지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책 저자는 분명 "중국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대만인으로서의 무심함(이 "무심함"은 아마 대륙 출신이라면 도저히 유지하기 힘들 겁니다)과 중립성도 그 영혼에 분명 배어 있었습니다. 베트남은 본디 중국과 짧지만은 않은 경계를 공유하지만, 대만과는 바다를 사이에 둘 뿐입니다. 비단 베트남뿐 아니라 대만은 섬나라이기에 주변국 모두와 바다를 경계삼죠.

베트남은 분명 베트남으로서의 독자성을 갖고 있습니다만, 사실 외국인 눈에는 남중국과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분간이 힘듭니다(아마 우리 한국도, 밖에서 보기엔 북중국과 큰 구분이 안 될 겁니다). 베트남 주류 민족은 그 먼 근원을 중국에 두기까지 합니다. 이런 베트남에 심지어 "화교"까지 많이 사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배트남 국민인 이상 그들은 중국에 근원적 경계심을품고 삽니다. 중국과 베트남은 같은 사회주의 이념을 공유하지만, p27에 나오듯 국가 차원에서 유리한 계약을 거부할 만큼 "어두운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서의 중국을 경원시합니다.

한국의 문 대통령도 몇 달 전 캄보디아를 방문하고 앙코르와트 유적 앞에서 "이렇게 큰 나라가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었던가"라고 발언했다고 합니다. 수도 프놈펜도 그렇고 캄보디아 곳곳에는 과거한때 찬연한 문화를 발전시킨 흔적이 뚜렷합니다. 그런데 캄보디아 인들의 마음 속에는 "폴포트, 또 그가 거느린 크메르 루즈"에 대한 공포감이 가득합니다. "아주 무서운 사람". 뭐 두 말이 필요 없죠. 이 폴포트를 겨냥하여 이웃 베트남이 쳐들어오기도 했고 베트남 역시 캄보디아 인들에게는 가공할 만한 앙숙입니다. 베트남인들도 "나는 캄보디아 인들을 증오해(p61)."라 말할 만큼 감정의 골이 깊습니다.

p81에는 리처드 뮤어의 말이 나옵니다. "국경은 영토의 접촉면이다. 이에는 수직이 있을 뿐, 수평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호한 평면의 공간이 아니라, 철저하고 확실한 단절이다." 저자는 식민주의자들이 일별하고 파악하기 쉽게, 마치 백화점의 진열 공간처럼 재편집해 둔 것이 바로 근대 국가의 지도라고 합니다. 저자는 묻습니다. "이 땅이, 식민주의자에 의해 모습을 갖추기 전에는 어떠했는가?"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잘못도 무척 큽니다만, 그 이전 중국은 어떨까요? 수평이 없고 수직만 존재하는 경계에서, 인간은 누가 누구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는 힘의 논리를 위에서 아래로 강요할 뿐입니다. "사실 내 눈에는 모든 동남아시아인들이 비슷해 보였다(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를 가리지 않고)." 그러나 실제는 말도 풍습도 다르며, 이것들이 서로 차이 나는 그 이상으로 그들은 서로를 경계(警戒)하며 진한 경계(境界)를 짓습니다.

인도네시아도 수많은 부족들이 인위적 경계 안에 부대끼며 사는 광대한 나라입니다. 논과 보르부드르 사원이 우리 곁에 있는 한, 이슬람이 외부에서 침입한 이래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다(p89)." 저자도 말하듯 인류학에서 어찌 보면 영원한 한계가 되는 게 "연구자와 타자 사이의 간극"입니다. "스스로가 짜낸 의미의 그물망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기에, 일단 연구자는 나 자신(연구자가 비서구인일 때)의 관점과 서구인의 관점(주류) 중 하나를 선택하고 첫 출발을 잡아야 합니다. 스스로의 관점을 당연히 정립하고 첫 발을 떼어도 죄의식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는데 이런 어려움까지 있으니... 저자는 이 다양한 부족의 모자이크가 이루는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에서 새삼 그 한계를 절감합니다.

인도네시아는 독립 운동 영웅이었던 수카르노 치하에서 한때 열광적인 유일 체제를 만들었지만, 그가 용공 노선을 취하고부터 커다란 불안에 시달리다 결국 수하르토 장군의 쿠데타를 겪고 군사 독재 시스템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때 수하르토 장군은 의도적으로 반 화교 노선을 취했으며, 무려 삼십 년이 지나 민주화 바람이 부는 와중에 역설적이게도 이 나라는 또 한 번 화교 대학살을 겪었습니다. 자구의 한 구석에서는 중국인이 비(非) 중국인을 향해 잔혹한 탄압을 가하는 현실을 보면 참으로 개탄할 만한 사태였습니다. "경계에 대한 맹목적 신봉"은 이처럼이나 위험하고 무섭습니다.

오키나와는 류큐라고도 불렸으며(역사적으로 둘의 범위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 책에도 어떤 아주머니가 충셩[중승이라는 지명의 중국식 발음], 오키나와, 류큐를 목적지로 각각 표기한 여행을 다녀온 후, "어쩜 그렇게 서로 똑같대?"라며 놀라는 유머러스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조선, 왜, 중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자존을 유지했습니다만 근대 들어 일본에 병합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다룬 사연도 여러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그 안타까운 사연의 정한이란 정말 놀라울 정도입니다.

일제의 패망 후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지금까지 주둔합니다만, 놀랍게도 이들은 미군 당국에 의해 모멸감을 새로이 겪고 심각한 차별과 착취 정책을 경험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주장이 주장일 뿐이라 생각했고, 특정 정치 진영에 의해 과장되었다고 여겼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미군이 물러가고 즉시 일본에 재편입되게 하려는 운동이 다 벌어졌겠습니까. 이 일로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아시아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웃지 못할 일입니다. 어떻게 된 게, 우리 아시아에는 경계를 둘러싸고 벌어진 비극을 품지 않은 나라가 없다는 게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놀라움이었습니다.

한국이 또 이 학자의 여정에서 빠질 수 없습니다. 대만인답게 한국을 보는 시선과 감정은 복잡미묘합니다만, 인류학자가 꼭 아니라 해도 개인으로서 저자 아포의 스탠스는 담백하고 중립적이며 교육적이고 유익하기까지 해서 고마웠습니다. 역시 한국인들은 누가 봐도 근면하고 역동적이며, 무엇보다 세계를 휩쓰는 한류 열풍의 배경이자 근원입니다. 한국에서 저자가 만난 친구 신아영은 독특한 열정을 지닌 여성인데, 그녀는 대만인들이 쓰는 번자체를 낯설어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수천 년 동안 한자를 써 왔는데 이는 당연히 (현대에 들어와서야 번자체로 불리는) 정자를 뜻합니다. 그러던 겨레가 불과 수십 년만에 한자를 모두 잊고 대륙에서 쓰는 (다소 격 떨어지게까지 보이는) 간체자를 원칙으로 삼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보르네오라는 섬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경계를 사이에 두고 공유하는 지역입니다. 말레이시아 역시 화교의 영향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며, 이슬람 술탄들이 돌아가며 국가 수반을 차지하는 데서도 볼 수 있듯 종교의 영향이 아래 이웃 인도네시아만큼이나 큰 나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역시 이주 중국인들이 그 형성에 많은 족적을 남겼으니 경계의 무상함이 이보다 클 수 없습니다. "종족 사이 마음에 진 응어리를 풀려면 정말이지 갈 길이 앞으로 한참 먼 것 같아." (p257) 여행을 함께한 친구뿐아니라, 그 기록을 간접적으로 구경하는 독자의 소회도 이와 별 다를 바 없습니다.

앞에서 어떤 근원적 절망을 느꼈다고 했지만, 국적과 혈통을 떠나 이처럼 열린 마음으로 나와 타자의 경계를 허물고 이웃을 포용할 수 있는 저자 같은 젊은 세대의 비전을 접하면서 새로운 희망이 싹튼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몇 달 전 이용수 할머니가 "젊은 세대는 서로 소통하고 교류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역시 참 옳은 말씀이다 싶었습니다. 경계는 결국 어리석은 환상일 뿐이며, 그러잖아도 많은 슬픔이 침노하는 우리네 마음에 뭐하러 이런 인위적이고 쓸데없는 근심거리를 또 하나 들일까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선이 아니라 공간이 이웃과 이웃 사이에 무심히 노닐게 하는 게 앞으로의 과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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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경제 생태계 만들기 - 채이배가 말하는 한국 경제 위기의 유일한 해법
채이배 지음, 주준형 인터뷰어 / 헤이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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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노력하지만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회가 무한 경쟁으로만 성원들을 몰아가는 것도 문제지만, 살인적인 경쟁을 거치고도 정작 엉뚱한 이들에게 성과가 배분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나친 경쟁을 강요하고도 결과가 정의롭지 못하기에 많은 국민들이 불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앞장 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민중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시스템이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채이배 전 의원은 재벌기업 내부의 오랜 폐단을 자세히 비판합니다. 예컨대 기업에는 시스템 통합(SI) 업무라는 게 있는데, 그룹의 각각 계열사(물론 모두 독립된 법인이죠) 내부에서 처리되어야 할 이 업무를 모두 뽑아내어 별개 회사로 또 설립하고, 이 회사에다 SI를 몰아주기라도 한다, 그리고 그 회사가 총수 일가의 사유물이 되게 한다, 이러면 아주 쳬계적이고도 망라적으로 "오너 가문에 일감 몰아주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젊은 경영인들이 의욕적으로 SI만 전문으로 삼는 스타트업을 만들 수도 있을 텐데, 이런 문어발의 첨병 때문에 이들은 아예 자신들의 장기가 될 수 있는 분야에 발도 못 들여놓게 되죠. 명백한 불의(不義)입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채 전 의원은 IBM(물론 우리가 잘 아는, 전에는 컴퓨터 제조 회사로만 유명했던 그곳입니다), 오라클, SAP(요즘 빅데이터 관련으로 일반인들도 잘 알게 된) 같은 SI 전문 기업이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성장하지 못한다고 하며, 심지어 재별 계열사가 물류 섹터도 과점하는 통에 중견기업의 씨가 마른다고 합니다. 듣고 보니 과연 그런 듯합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저를 포함) 잘 모를 이가 많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일 만합니다.

물류 섹터를 재벌이 독점하는 폐해로 저는 H 택배, C 택배 같은 곳을 떠올렸지만 사실 이런 곳은 자영업자를 관리하는 센터 비슷한 체제이기에 상대적으로 그리 심각한 건 아니죠. 채 의원이 드는 예는 현대글로비스로서, 현대차(화주)와 일반 차주를 연결, 주선하는 데 (많은 투자 없이도) 분명 기존의 유리한 위치만 활용하여 업계의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습니다. 땅짚고 헤엄치기에 다름 아닙니다. SI 센터도 가상의 위험이 아니라 SK C&C가 이미 그 큰 그룹 내의 전산 용역을 독점하는 중입니다. 이래서야 공정경쟁이 될 리가 없고, 청년 창업 같은 게 꽃필 수가 없습니다.

재벌들이 일감 몰아주기를 하는 이유는 상속세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런 일감 몰아주기의 가장 근원적 문제는, 야심찬 젊은 업체들을 결국 재벌가의 하청사로 계열화한다는 것입니다. 창의력 발휘의 대가가 딱히 이유 없이 대기업 오너 가문으로 그 상당 부분이 빨려 들어간다면 이는 전근대적, 봉건적 사회에서 착취당하는 농노나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와중에서 젊은 개혁 성향 국회의원으로서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해 온 채 전 의원은, 그런 노력을 통해 정의선, 정경선 같은 현대가(家) 후계자들이 보다 전향적으로 스탠스를 전환하기도 했다고 스스로 뿌듯하게 말하는군요.

1998년 외환 위기 이후 도산법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p74), 이는 이른바 기촉법 등 당시로서는 새로운 입법이 순기능을 발휘한 바 큽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관치 주도(혹은 책의 표현을 빌리면 "가장 보수적인 기관인 은행" 위주)의 시스템이며 채 의원 같은 젊은 개혁 성향 의원들이 주장했던 건, 이런 법제가 보다 민간 주도가 되어 작동해야 한다는 쪽이었습니다. 여기서 민간이라 함은 아마 그가 몸담았던 참여연대 등의 단체를 가리키는 것 같다고 지레짐작했으나, 책을 꼼꼼히 읽어 보니 그렇지도 않더군요. 이게 좀 놀라웠습니다(솔직히 좀 부끄럽기도 했고요).

회사가 파산지경에 도달했을 때 가진 잔여재산 다 팔고 그나마 채권자들을 최대한 만족시키는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청산이 우선이냐, 아니면 노동자들에게 일단 밀린 임금을 지불(이들 노동자들도 분명 채권자이며, 다만 정부, 특히 노동부에서는 임금 채권의 만족 순위를 낮추지 말자는 취지입니다)해야 하느냐. 후자의 근거는, 임금을 지불 받은 근로자들은 의욕을 찾고 열심히 근로에 복귀하여 노동을 계속하겠으며, 이는 기업의 생산을 재개하여 진정한 의미의 "회생"을 촉진할 것이라는 전망에 있습니다. 남은 채권자들도 낡은 집기나 건물, 혹은 부지를 팔아 얻는 몇 푼 안 되는 변제를 받느니 이 편이 낫지 않겠냐는 뜻이겠죠. 설득력이 대단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현실론으로 회의를 품는 이들도 있겠습니다. 성과, 가치 창출의 원천이 노동이냐, 아니면 다른 요소의 기여가 더 크냐에 대한 오랜 의견 대립의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입니다.

채 전 의원은 모험 자본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입니다. "신산업을 육성하고, (제대로 된) 구조조정을 통한 일자리를 지키고, 나아가 제조업을 몰락시키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p79). 회생 절차에서 이런 모험 자본에 우선 순위를 주면(심지어 임금 채권보다도), 앞선 청산 절차에서 모든 일자리가 완전 없어질 위기를 일단 막은 기여에 대한 보상 아니겠냐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과거에 정부가 그저 모태 펀드에 대해 지원한다거나(개별 기업을 찾으려는 노력을 않고), 은행 팔 비틀어서 돈을 대는 식의 "격화소양"식 처방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성과물이 바로 20대 국회에서 멋지게 통과된 "채무자회생법"이란 거고요. 글쎄 사람마다 진보다 보수다 하여 입장이 갈릴 수는 있겠지만, 이런 개혁은 노선이나 세계관의 차이 불문하고 모두가 긍정할 수 있는 해법 아닐까요? 더군다나 이런 방안은 기본적으로 민간 자본(이윤 추구가 최우선인)에 주도권을 준다는 점에서 효율성을 해하지 않고(오히려 제고하고) 시장 친화적이기까지 합니다. 관이 개입하지 않고 민간 기업의 문제(또한 노동 문제)를 민간 안에서 찾아 해결하는 셈이지 않습니까.

대기업과 (한국인 대부분이 일하는) 중소기업의 상생을 위해서는 어떤 인센티브가 있는 제도적인 틀 마련이 중요하며, 이게 꼭 경제적인 것일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경영 자율성 존중만으로도 기업은 크게 만족할 것이라고 하네요. 이는 문재인 정부가 주창하는 스튜어드십코드와도 색깔이 다른 입장 같아 보입니다. 한국이 이제 질적인 성장 궤도에 진입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주장을 여러 면에서 곱씹게 되는 유익한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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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미래보고서 2035-2055
박영숙.제롬 글렌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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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예측하는 건 역사상 언제나 우리 인류에게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앞으로 발생할 일을 정확히 내다보는 사람은 집단의 존경을 받았고, 미럐 예측에 신경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인류의 진화를 촉진했습니다. 생존을 위협하는 스케일의 위기라 해도 발생 시점과 진로를 정확히 예측만 할 수 있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고, 또 성공적으로 그래 왔기에 지금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번영을 누리며 살 고 있는 거죠.

코로나 19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통에 시달리며, 그렇지 않은 이들도 걱정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과연 이 질병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근심이지만, 설령 극복이 된다 해도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은(never be the same)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특별한 다른 전략이 필요한지도 큰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가뜩이나 한국 독자들에게 그간 큰 도움을 줘 온 이 시리즈가, 이런 시국에 더 반갑고 더 각별한 의미로 읽힐 수밖에 없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변하지 않은 질서가 무너지다(p67)." 사실 그 이전에도 예컨대 30년 전 소련이 붕괴했다든가, 12년 전 금융위기로 미국의 위상에 큰 손상이 생겼다든가 하는 일로 기성 질서는 심상치 않은 요동을 맞아 왔습니다. 그런데 책에서는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엄청난 수의 사상자가 생겼고, 이들 나라가 세계를 향해 리더십을 행사하지 못한 것은 물론 심지어 자국의 사정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점을 특히 지적합니다.

반면 중국은 (진짜 내막이 어떠했든 간에) 뭐 엄청난 희생을 통해 초기에 사태의 확산을 막았다느니, 현재 확고하게 사태를 통제하고 있다느니 하며 적어도 자국 내 리더십이 선명이 작동 중임을 대외적으로 선전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세계의 헤게모니가 바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세계사는 이보다 더 어이없어 보였던 사소한 계기로도 중대한 변곡점을 맞았던 사례가 드물지만도 않았으니 말입니다. 또 그 결과가 인류에 행운이 될지 그 반대가 될지도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책에서는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 통제의 시도로 그 신뢰가 떨어졌다"며 중국을 비판하는데 일종의 중립 기어 박기로 보입니다.

큰 시련이 닥치면 예전 사람들은 어떻게 현명한 대처를 보였는지(아니라면, 지금 우리가 지표를 디디고 서 있지도 못하겠죠)를 참고하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도 유익한 대처입니다. 저는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가, 저자들이 그 풍부한 지식과 통찰력에 기대어 과거의 유용한 사례를 언제나 적절히 리뷰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고, 잘 알려진 예와 그렇지 않은 예를 두루 섞어가며 독자들에게 설시합니다. 이런 건 그저 이야기로만 읽어도 재미가 있습니다.

책은 특히 전반에 걸쳐 미래학자 제이미 메츨의 연구 결과와 진단을 광범위하게 인용합니다. "결코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p80)"도 특히 이분이 한 언급입니다. 대체로 이 매츨이란 분은 (1990년대부터 지속되어 온) 세계화 트렌드에 대해 비판적이고, 그 훨씬 이전에 설립된 각종 국제 기구의 효율성과 정당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긍정적 역할도 있다며 부분 긍정의 스탠스를 취합니다.

흥미롭게도 예전 공산주의 이론가인 그람시는 "구질서는 무너져 가나 신질서는 아직도 태동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재는 괴물의 시간"이라 했다는데, 이 말을 반 세기가 지난 지금 메츻이 다시 인용(p81)합니다. 메츨은 "우리가 이 싸움에 가져 가는 도구는, 우리 조상들이 가졌던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다"고 하는데, 책의 저자들도 이 점에 공명합니다. 예전 같으면 전파, 내면화하는 데 수천 년이 걸렸을지 모르는 지식과 정보 들이 지금은 발생 후 수 초만에 공유되기도 합니다. 저자들은, 지금이 "우리가 함께 모일 시간(p86. 메츨의 말 재인용)"이며, 어느 때보다도 높은 문해율, 강한 인맥(=네트워크), 성취 동기 등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자들은 "가뜩이나 무의미한 직업일수록 급여가 높았던 풍조가, 코로나 이후에는 더욱 만연하게 될 것"이라 합니다. 무슨 뜻인지 궁금해할 이들이 많겠는데, 금융인이니 광고업자니 컨설턴트니 하는 직업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직업이 아니며, 농부, 공장 노동자, 쓰레기 청소부 등은 그것이 없어질 시 개인과 공동체가 즉시 생존 위협을 맞닥뜨리게 될 직업이라고 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체계는 정반대로 책정되었죠). 물론 사회에 이런 양극단의 분류만 있는 건 아니며 그 중간지대도 폭 넓게 존재할 것입니다. 또, 저 "무의미한 직종"이 과연 의미가 없기만 하겠냐며 저자들과 (저자들이 인용한)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많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무엇이 본질인지"에 대한 성찰은 한번 시도해 볼 필요가 있겠죠.

일찍부터 애덤 스미스 같은 이들은 가치의 양분화를 지적하며, 사용가치와 교환 가치가 따로 노는 현실의 모순을 짚었습니다. 이 관점을 "교환 가치 중심이 된 세상에 대한 비판"으로 발전시킨 이들도 많으며, 저자들이 이 책에서 취하는 문명 성찰 스탠스는 주로 이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영국, 스페인, 덴마크 등은 "국가 자본주의"의 예로 파악하며, 그 예를 명시적으로 들지는 않으나(중국이라고 명언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국가 사회주의"의 패턴도 거명하는데, 단 후자의 경우 권위주의를 내세우다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고는 합니다. 이 둘(혹은, 그에서 비롯한 현실)이, "두려움에 대한 근거 못지 않게 희망의 근거도 남겨 놓고 있다"고 저자들은 말합니다. (p102)

위기는 물론 많은 구성원들을 불확실성 속에 몰아넣지만, 시스템의 모순을 드러내게 하고 낡은 체제의 유효성에 대해 집단적 회의를 부른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기능도 수행합니다. 자급자족 산업이 부상하고(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 책은 교환가치를 대체로 부정하고 사용가치 중심 사회로 복귀하자는 쪽입니다) 태양광 발전 도입이 촉진되며, 드론 기술의 발전, 기본 소득 지급 확산, 원격 산업, 분산형 프로토콜(인터넷 등에서), 지도자에 대한 불신, 코로나 베이비 붐, 노 코드 웹 플랫폼 등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특히 한국의 경우라면 태양광 도입은 이미...

코로나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자살한 어느 부자의 이야기가 엊그제 기사로 나왔는데, 저자들이 벌써 이 책에서 "외로움에 대한 재평가"를 거론했네요. 그래서 로봇 산업이 크게 발달하며, 인간이 그리움과 정을 무생물에게까지 투사함에 따라 환경 보호도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진단, 예측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다는 게 좀 놀라웠습니다.

스마트 시티 테크놀로지는 이미 수 년, 십 수 년 전부터 논의가 이뤄졌고 발달도 빨라지는 경향입니다. 특히 책에서는 한국과 싱가포르를 모범 사례로 듭니다. "개인 정보는 보호하고 위치는 추적(p185)"한다지만 이런 분별과 자제가 어느 단계까지 잘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걱정이 적지 않죠. 

"과학이 매번 1년씩 당신의 삶을 연장한다." 최근 장수 시너지 세포에 대한 획기적인 연구가 예쁜꼬마선충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이제 노화는 치유 가능한 질병 정도 수준으로 여겨지기 시작(p214)했으며, 노화가 만병을 초래하는 만큼 노화 하나를 잘 공략하여 만병을 다스리는 식의 획기적인 접근이 가능하다는 전망입니다. 또 이제 질병의 치유보다는 빅데이터나 IoT를 통해 예방의 관점에서 의료 서비스가 이뤄지며, (이 책 전체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원격 진료도 관련 규제의 벽을 넘어 전향적으로 접근됩니다. 과연 그대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더 나이 먹기 전에(이 책 p283에서는 "그저 20년만 더 살라"고도 합니다).

트랜스휴먼, 즉 인간과 기계의 구별이 없어지는 건 예전 사이버네틱스에서도 널리 암시되었고 십 수 년 전 커즈와일 같은 사람이 대담하고 구체적인 가설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기계와 인간의 작동기제와 언어가 다르며, 칩 등을 인간의 신체에 심을 때 부작용이나 위화감 없이 얼마나 일체적으로 작동하겠냐에 있겠는데, 이른바 신경 인터페이스 이슈 역시 최근에 큰 발전을 보았다고 하는군요.

단백질 접힘 현상은 "슈퍼컴퓨터로도 에측할 수 없"기에(p281) 연구에 장애를 더합니다. 요즘은 항암제도 표적형이 대세이며, 정확한 지점에, 적시에, 해당 물질을 전달할 수 있다면 모든 과제가 풀리는 셈입니다. 코로나 19 백신 개발(이 늦어지는 이유)도 결국 이 이슈와 연관이 있다는군요.

항생제의 발견은 인류에 큰 축복이었지만 이는 우연의 산물이었고,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세균은 사실 이 정도를 큰 난관으로 여기지 않는 듯 나날이 진화를 거듭하니 인류는 성급한 승전보를 울린 셈입니다. 그러나 빅데이터, 또 이를 이용한 인공지능이 (개발자들도 채 예측 못한 방법으로) 신약을 개발하고 있으며, 결국에 더 맞춤형의 효과를 내면서 부작용도 적은 물질이 나오리라고들 본답니다.

3D 프린터의 개발로 만인 생산자의 시대가 열렸다는 전망이 예전부터 나왔는데, 이제는 이 장비가 음식도 "인쇄"한다는군요. 농업은 이를 통해 더욱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진화하며 동시에 친환경의 과제까지 달성합니다. 비행 자동차는 교통 정체와 환경 파괴라는 악재를 동시에 돌파하며, 저자들은 "그저 규모의 문제가 남았을 뿐 이미 실현 단계에 접어들었다(p333)"고까지 말합니다.

제레미 리프킨은 <소유의 종말>에서 "집속과 이용의 시대 도래"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p381). 이것이 소유 패턴 자체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바꾸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자동차 소유를 기피하고 공유 트렌드를 이끄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 가능합니다. 그래서 미래는 "구독(,subscription) 경제"가 될 것이라고 하며, 넷플릭스는 이의 서막을 열었고, 로봇 역시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는 게 아니라 일부에게는 혜택을 줄 것이라고 합니다. 미래에는 일자리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생계는 기본소득 지급으로 이뤄지며, 일은 일자리가 아닌 일거리로 변화한다고도 합니다(p385). pp.391~495에서는 새로 탄생하는 일자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며, 이들 일자리들이 과거 인간소외를 낳았던 고강도의 비인간적인 노동이 아닌, 자아 구현에 기여하는, 보다 인간적인 일거리가 될 것이라고도 합니다.

비건인들이 늘어나는 건 체질적인 이유도 있겠으나 육식을 위해 벌어지는 동물에 대한 가혹한 처우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하겠죠, 그래서 최근에는 배양육이라 하여, 고기의 특정 부위를 먹기 위해 동물을 사육하지 않는 분야가 발달한다고 합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고기"인 셈인데, 어느 정도나 인간의 식감과 취향을 만족시킬지는 두고 볼 일이며 GMO 이슈는 어떻게 피해갈지도 관심사입니다.

양자컴퓨터는 인류의 오랜 불가능성 한계였던 "동시에 두 곳에 존재" 이슈를 극복하게 도와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건 "무엇이 인간 존재와 본성의 실체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배신하지 않게 돕느냐"의 고민이라고 하겠습니다. 기술과 인도주의는 지금까지 독립적으로 발전했고, 이 둘의 괴리가 모든 비극을 낳았습니다.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소외를 초래하지 않으려면 앞으로 이 영역의 상호 통합을 지향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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