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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ㅣ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평점 :
이어령 선생의 신작은 언제나 독자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여태 우리가 봐 오던 일상의 풍경과 흔한 루틴 속에서도 선생님은 비범한 흐름과 독창적인 의미를 짚어 내십니다. 이어령 선생의 담론에 대해서 모든 한국의 독자들이 찬사를 보내는 건 아닙니다. 어떤 이를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억지라며 비판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제게 든 생각은, "그런 비판이 딱히 근거를 갖춘 게 아니라, 자신이 보지 못한 걸 선생이 날카롭고도 깊게 캐치했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질투심의 발로"란 것이었습니다. 이 책 에서도 선생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소재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그 끄집어낸 이야기들은, 평범한 우리가 전혀 감을 못 잡던 기발하고 신기한 담론들입니다.
혹 지구 반대편의 낯선 문명을 두고 짚은 의미라면 어차피 내가 모르는 동네니 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텐데, 저분도 나도 똑같이 몇 십 년을 두고 지켜 봐 오던 것에서 나만 못 보고 지나친 걸 저분이 지적하니 질투심이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석학과 일반 독자가 보는 눈이 같을 수야 물론 없겠고, 선생이 거론하시는 소재들이 그만큼이나 일상적인 것들이기에 더욱 "나는 왜 못 봤나 하는 불편한 마음(?)"이 커지는 것이겠죠. 이 책에는 그만큼 평범한 일상과 전통 풍속에서부터 한 올 한 올 끄집어 내 엮은 거대한 의미의 담론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p107에는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ㅎㅎ 전엔 몰랐는데(몰랐던 제가 바보겠고요) 선생님 같은 석학께서 참 어지간히 국뽕이시라는 점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국뽕은 국뽕이신데 인문의 깊이와 근거를 갖춘 국뽕이니 더이상 "뽕"도 아닌 셈이지만요. 왜 김연아 선수가 아사다 마오보다 잘 할 수밖에 없는지를 "다른 사람들이 거론하는 사주"를 들기도 하시고, 선생 자신만의 논거도 드시는데 사실 김연아 이야기라기보다는 선생 고유의 인문 담론입니다(본래 인문이 이런 것이지요). 인생을 떠받치는 네 가지 기둥이 물론 무작정 맹신할 건 아니지만 여튼 선생의 설명을 거치면 새삼 "아 그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삼신 할머니와 배꼽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이 책은 이어령 선생의 독자적인 담론 말고도 다른 민속학자, 인문학자들의 주장이 여럿 인용되고 확대됩니다. 이어령 선생 정도면 자신만의 주장과 착상을 도도히 펼치시고 다른 데 잘 눈길을 안 주실 만도 한데(좋은 건 아니죠) 그 연세에도 후배 학자들의 책과 논문을 이처럼 많이, 자주 찾아 읽으신다는 사실 자체가 또 놀라웠습니다. 삼신 할머니, 석 삼(三)이라는 글자에 "삶"이 들어있다는 주장은 물론 다른 학자분 주장의 인용이기는 하나 선생의 확대 해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듯도 했습니다. 물론 "배꼽" 이야기는 한국 고유의 전통만은 아니죠. 전 개인적으로 세계의 배꼽 운운하는 예전 고 이윤기 선생 책을 읽은 적 있는데 그리스나 인도 등에서도 널리 신봉하는 전통입니다.
기저귀에 대한 담론은 선생께서 일찍이 여러 칼럼이나 다른 책에서도 거론하신 바 있습니다만 이 책에서 총정리가 된 듯합니다. 서양에서는 산모와 신생아를 가급적 분리시키는 문화인 반면, 우리는 "업어서 키운다"는 말이 있을 만큼 엄마와 아기가 밀착되어 생활합니다. 아기가 엄마의 젖을 빠는 힘은 생각 외로 강하며, 엄마 역시 아기에게 젖을 물릴 때 별개의 호르몬이 나옴도 지적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여럿의 의학 논문과 연구 결과가 인용되는데 주장의 당부를 떠나 책을 이런 자세로 저술하신다는 자체가 경이로웠습니다.
다만 예컨대 서양, 그 중에서도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서 영아 살해를 가벼이 여긴다는 말씀에는 100% 동의하긴 어려웠습니다. 물론 영아살해죄가 일찍부터 유럽에서 고안, 규율된 게 만연한 살해 풍조의 반영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만 사실 한국전 당시 고아의 폭증에서 보듯 이런 문제에서 한국 역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죠. 여튼 어려서부터 엄마와 유난히 밀착해서 자라는 한국의 아이들이 커서도 풍부한 감성을 갖게 되고 문화 예술에서 독보적 재능을 발전시킨다는 결론(명시적으로 그 말이 나온 건 아니나 결국은?ㅎ)은 고개를 끄덕이게도 됩니다.
p175에 보면 "조이다"와 "매다"를 대비시킨 한국, 일본의 문화 차이에 대한 상세한 담론이 있습니다. 사실 이런 파트야말로 선생의 전문 분야, 아무도 따라 못 할 독보적인 사고라고 할 만합니다. "도리 시마리 야꾸"라 읽는 取締役(취체역)이란 단어가 있는데 일제 잔재지만 해방 후에도 널리 실무에서 썼습니다. 책에서는 CEO라고 하시는데 엄밀히 말하면 "감사"입니다. 전 저 단어의 일본어 발음이 "도리 시마리 야꾸"인 줄 처음 알았고, 두번째 어근 諦자가 "조이다"란 뜻인줄도 처음 알았기에 이 대목 읽으면서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발굽 蹄의 가차로 쓰고 비유적 의미로 살핀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여튼 일본식으로는 "잡아 죄치다"란 의미이며, 한국어의 "매다"하고는 국민성이 너무도 다른 게 극명히 드러나는 대목 중 하나라는 결론이었습니다.
p101 근방에선 출산의 아픔에 대한 말이 나옵니다. 남성이라고 해도 어지간히 둔한 사람 아니고선 여성만이 겪는 출산의 고통이 어느 정도는 짐작이 되며, 이 책에서는 여러 논거를 인용하며 독자에게 그 절절한 감각을 (지면에서 허옹하는 한 최대로) 전달합니다. "좁은 문을 통과헤야..."라는 성경 말씀도 인용되고, 좁디좁은 그 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생명을 얻는 그 과정에 대한 묘사가 가슴을 울립니다.
책 후반부에는 유독 우리 나라에만 있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한 살을 먹는" 문화에 대한 지적이 있으며, 재미있게도 책 앞부분에는 요즘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는 "태명 문화"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선생님 책에서 항상 느끼는 건, 젊은이들 사이에서의 유행, 감각, 문화 같은 데에 선생이 항상,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귀를 쫑긋 세우시고 이처럼 책에 반영을 하신다는 점입니다. 반면 꼰대(선생님보다도 훨씬 젊은)는 대개 젊은이들 문화에 대한 무관심, 무지가 큰 벼슬인 줄 착각한다는 게 공통점이죠.
생명만 가졌다고 다 사람인 게 아니라, 엄마 품에서 적어도 삼 년을 품기고 그 살가운 정성을 다 묻혀 내야 비로소 "사람", 그 중에서도 "한국 사람"이 된다는 게 선생의 결론입니다. 안 그러면 사람이 채 못 된 채 "생쑈"를 하는 반편이로 떨어진다는 거죠. 여기서 선생은 공자의 어록(이자 우리 민족이 오랜 동안 경전으로 모신) <논어>를 인요하여 재아와 그 스승 공자가 "계급장 떼고 맞장뜨는" 장면을 인용합니다. 말씀은 백 번 맞으나 저는 항상 의아했던 게 왜 공자쯤 되는 대스승이 면전에서 제자를 깨우치지 않고 마치 뒷담화하듯 마무리를 지으셨냐는 거죠. 과연 공자님이라서 면전에서 차마 싫은 말씀을 못 하신...?
세계에서 엉덩이에 반점을 갖고 태어나는 민족이 우리만인 줄 알았으며, 소설가 한강의 십 몇 년 전 작품 <몽고반점>도 이를 소재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선생은 꼭 그렇지가 않으며, 다만 삼신할미가 엉여 세상에 나가라는 뜻으로 후려갈긴 흔적이라며 의미를 부여하는 건 우리뿐이라는 취지이십니다. 삼신할미는 유독 한국에서만 큰 위상을 갖는 독특한 신화적 존재인데, 우리가 이런 존재를 무속과 전통에서 섬기는 이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p305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푸르스트"라고 나오는데 "프루스트"가 맞겠네요. 여튼 프루스트의 소설 유명한 서두를 통해 서양 아이들은 "어머니와 헤어지는 데서 얻게 되는 스트레스"를 어린 나이에서부터 지각하는 반면, 한국 아이들은 그런 게 없다는 겁니다. 맞는 말씀이긴 하나 과연 그게 순기능만 있는지는 ㅎㅎ 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아무튼 책은 매우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에는 그저 맞는 결론, 정보만 습득하는 게 아니라 저자의 생각을 비판적으로도 따져 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성숙시키는 데에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선생님처럼 익숙한 우리 전통의 소재를 놓고 이처럼 흥미진진한 담론을 펼치는 책을 읽노라면, 채 당부를 따지기도 전에 그 흐름에 빨려 들어간다는 게 신기합니다. 나라가 어려운 국면에 놓일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근본을 살펴 따지고 우리를 이 먼 미래에까지 살려 놓은 조상들의 깊은 얼과 배려(이게 곧, 비유적 의미에서의 "모태"입니다)를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이 책은 또한 형식, 편집이 독특합니다. 마치 아포리즘 모음이나 시처럼 짧은 단락이 구분되었는데 내용상 물론 죽 이어지는 줄글이지만 주(note, 註)가 각 단락 밑에 달려 있고, 이런 형식상의 배려 덕분에 마치 서사시를 읽는 듯 즐거운 착시를 부릅니다. 여튼 이런 파격도 서슴지 않고 독자 앞에 베푸는 저자의 젊디젊은 상상력과 혁신 정신도 엿보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