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익스체인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2
최정화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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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은 어디서 근거할까요? 사람은 당장의 곤궁을 모면하기 위해 못 할 짓이 없어 보이는, 때로는 참으로 초라하고 비천한 존재입니다. 물론 루머에 불과하겠으나 과거 군사정권 당시 대규모 개발에 쫓긴 도시 빈민들은 자기 자식을 삶아 먹었다는 충격적인 소문도 있었습니다. 먼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면 자식을 바꿔 먹기도 하고(조선 경신대기근), 딸을 팔아 생계에 보태기도 하는 등(중국 청조 말기) 인간이 굶주림과 가난 앞에서 못할 짓이란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곤경이 과거형으로만 회고되는 건 물론 아닙니다. 이 책 뒤편 해설에도 나오듯, 멀지도 않은 한국 제주에 체류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난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TV 광고를 통해 전세계의 딱한 처지에 처한 이들, 특히 어린이들에 대한 도움이 절실하다는 메시지를 항상 접하다시피 합니다. 그럴 일이야 없겠으나, 이 코로나 위기가 장기적으로 지속되어 혹 한국 경제가 파탄이라도 난다면 저런 곤경과 기근이 우리에게도 닥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인간 존엄이 우리의 의지, 자존감, 그리고 "기억"에 달려 있음을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합니다. 제가 찾은 대목만 해도 p30, p38, p59, p70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또 누가 우리의 굴욕을 강요해도,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갖고 단호하게 그에 대해 No라고 말해야 한다는 점, 우리의 자존은 우리 스스로가 지킬 때 비로소 처음부터 있던 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작품은 SF 형식을 띱니다.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지만, 사건 위주로 진행되기보다 사건과 사태에 처한 인물들의 처절한 감정 표백이 주된 내레이션이라서 어떤 독자들은 갈피를 조금 잡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책 뒤에는 다른 평론가분의 "해설"이 딸려 있습니다. 물론 해설의 주된 이유는 (위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 이야기가 그저 SF로 읽힐 게 아니라 "난민 문제 등 현재의 모순을 살아가는 우리의 사정"임을 강조하는 데 있겠습니다만.

"니키라고? 그 이름은 어쩐지 여자 같습니다만." 그러나 반다는 자신이 니키임을, 최소한 니키의 기억 상당부분을 머리에 짐졌음을 자각하고 이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반다는 니키이고 니키는 반다인데, 그 니키는 이제 도라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존재와 기억을 바꿔 살게 된 건 물론 누가 총칼로 강요한 건 아닙니다만 사실상 체제가 개인을 한계 상황으로 몰아 넣은 결과입니다. 결국 그들은 현재가 만족스럽든, 아니면 만족스럽지 못한 현재를 약이나 전자파의 효과로 망각하며 연명하든 간에, 자존을 포기하고 짐승 같은 삶을 꾸려 나가는 셈입니다.

p24에는 화성인들, 즉 지구인들을 천시하는 "주류 계급"의 머리형이 타원형으로 뾰족하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리고 기억을 팔아넘기곤 도라로 탈바꿈한 니키 역시 머리 모양이 어느새 그리 바뀐다는 암시도 있죠. 이런 이미지는 예전 코미디 영화 <콘헤드 대소동>이 잠시 생각나는 대목이었습니다.

p14, p21에는 그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하에, 순간의 고통을 망각하고 현실 도피를 꾀하는 수용자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마치 불교 설화 "호랑이에게 쫓겨 벼랑 끝에 매달린 통에 잠시 산딸기의 달콤한 맛을 보는"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흥분지수의 단위는 pp요, 온순행동지수의 단위는 qrp인데, p54, p62에 각각 나옵니다. 단위가 통일되었으면 어땠을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생소한 말도 많이 나오는데 비록 짧은 소설이지만 용어집 같은 게 있어서 독자의 이해를 도모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p33에는 무소르기 미후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아마 가상의 예술가인가 보죠? p13, p62에는 "데스트 이블"이라는 재앙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작품 내내 끝까지 설명이 없어 궁금했습니다. 물론 몰라도 맥락 이해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p54에는 "전에 다리를 다쳐 본 적이 없는지 목발 짚는 게 서투른" 모습이 나오는데 사실 다리를 목발 짚을 만큼 다쳐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 더 많을 겁니다. 아마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혹독한 환경을 암시하는 듯도 하고요. p67에는 화성인의 사고로 "지구인은 사고가 복잡하기는 하나 필요한 과제에 집중 못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화성인은 아니지만) 영화 <프레데터>의 외계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들이 보기에 인간이란 경증 주의력 집중 장애 환자이거나 정신 병자일 지도 모르겠네요.

p90에 나오듯 결국 사람들에게서 기억을 뺏는 행위는 영혼을 침탈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영화 <토탈 리콜>에서도 인물들이 그렇게 맹렬히 저항하는 거죠. 혹, 난민이거나 소수 인종 출신인데 주류 사회에 착실히 적응해서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전 장관처럼) 본래부터 그들인 양 행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도라/니키"처럼 영혼을 판 인간들일까요?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모를 일입니다. 답하기가 쉽지 않을 듯하죠?

책은 시집처럼 예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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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대중의 탄생 - 흩어진 개인은 어떻게 대중이라는 권력이 되었는가
군터 게바우어.스벤 뤼커 지음, 염정용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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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떤 이슈,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대중의 의사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언제나 그랬던 건 아닙니다. 유능한 장군, 좋은 혈통을 타고난 귀족, 큰 돈과 재화의 유통을 다루는 상인 등 극소수가 여사의 흐름을 좌우하던 시절이 훨씬 길었죠. 20세기 들어 매스 미디어가 발전하고 교통 통신 수단이 개발됨에 따라 대중이 비로소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를 악용해서 대중을 선동하고 그들의 의사와 감정을 조작하는 히틀러와 괴벨스 같은 악한 정치인 유형이 새로 등장하는 등 부작용도 속출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주체인 국민은 선하지만 대중은 경우에 따라 악할 수 있다는 게 일반적인 믿음이지만, 도대체 국민/인민/대중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유럽, 미국, 그리고 그 외의 세계에서는 새롭게 정의된 의미의 대중이 다시 관심을 받습니다. 대중이 중요하다 아니다, 혹은 어떤 대중이라야 정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식의 당위론을 제기하는 것 역시 우리 같은 대중이라는 점도 아이러니합니다. 대중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대중이 아닌 척 대중을 타자화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적인 대중이 기존의 담론을 벗어나서 열심히 자기 목소리를 내고, 그 와중에 불의나 혼란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러니 대중의 실체가 뭔지, 어떤 식으로 현실에 참여하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한 이런 책을 안 읽어 볼 수가 없습니다.

저자들은 말합니다. "20세기는 대중의 시대였고, 21세기는개인의 시대이다." 그래서 요즘의 대중에게는 어떤 획일화한 선동이 잘 먹히지 않는 면 분명히 있습니다. TV나 라디오 뉴스에 영향을 받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유튜브 스타의 요란한 원맨쇼에 더 몰입하니 말입니다. 과거에는 1인 매체가 있지도 않았지만(기술상의 애로 등 이유), 설령 있었다 해도 그렇게 편향되고 권위를 못 갖춘 의견을 아마 외면했을 겁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고, 나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스피커가 어떤 권위자보다 더 존중을 받습니다.

바로 이 과정이 중요합니다. 결국 기존의 대중은 작은 단위로 쪼개어졌다뿐, 또다시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1990년대 초반 신세대들이라 자처했던 젊은이(지금은 그들 역시 꼰대, 혹은 소위 "틀딱"이 되었죠)들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며 "이게 나의 개성"임을 내세웠지만 밖에서 보기엔 "친구들이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따라하는" 또하나의 몰개성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개성인 줄 착각하는 또하나의 획일이 바로 21세기식 대중의 특징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중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하나로 뭉쳐 정치적 변혁을 이끌어내는 건 때로 감동적입니다. 책 p74에서는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 심지어 몇 세기 전의 프랑스 대혁명 등이 예시되며, 놀랍게도 2016년의 한국 촛불 시위까지 언급됩니다. 이 책을 보면 "박근혜는 완전히 고립되어 자리에서 쫓겨나기까지 그들만의 축제를 벌였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저자들은 이처럼 비슷한 형태로 역사의 여러 국면에서 반복되는 대중의 힘, 행동, 특성에 대해 주목합니다.

1990년대 초반 공산 동독에서 일어난 대중의 움직임은 놀라웠습니다. 슈타지라는 비밀 경찰에 의해 매순간 감시 받고 억압당하던 그들이 그처럼 짧은 시간에 결집하여 단호히 행동하는 건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었죠. 또 비교적 최근인 십여 년 전 북아프리카, 중동에서 일어난 일련의 독재자 축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역사는 자유와 개인의 행복을 위한 방향으로 흐른다면서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나라에서 벌어지는 최근의 혼란상은 어떻습니까?

최근 유럽과 미국의 이슈는 단연 포퓰리즘입니다. 책 p160 이하에서는 본격적으로 포퓰리스트들의 특성을 다룹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포퓰리즘이란 국가와 공동체의 건강한 역량을 갉아 먹는 병증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어찌되었든 이런 포퓰리스트 움직임도 대중이 시작하고 추동하는 정치적 행동입니다. 어떤 때에는 정의로운 국민이며, 대체 어떤 때에는 그럼 무지하게 선동당한 "대중"이 되는 걸끼요? 그 경계는 모호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전 드라마 <모래시계>를 보면 학생 운동가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들마저 이러면 어떡하냐고!" 그런데 지식인이나 혁명 엘리트들은 그런 민중, 대중에 비해 어떤 우월성이 있기에 이런 단정, 단죄를 쉽게 하는 걸까요? 그들이 소수 지배 계층을 적대하고 전복할 때에는 거리낌 없이 민중의 이름과 권위에 기대면서 말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엘리트층은 문화 대중에 보편성에 대한 권리를 인정할 용의가 없었다(p160)."

"엥겔스와 보들레르의 목표는 얼핏 여겨지는 것처럼 그리 많은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p240)." 여기서 저자는 보들레르의 한 작품을 통해 "폭력을 수단으로 동등성을 획득한 어느 거지의 자존"을 논합니다. "군중으로부터 분리되지도 않은, 또 매개 인물을 필요로 하지도 않은 채" "군중과 함께 섞여 목욕할 기회를 얻는 건 하나의 예술임"을 주장하는 보들레르의 이 작품은 제목부터가 "군중"입니다. 대중, 군중의 뿌리를 추적함에 있어 근대로까지 소급해 올라가는 저자들의 폭 넓은 시야가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대중은 오히려 인간의 원초적 존재 형태다(p289)."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부사 "오히려"입니다. 사실 현대에 들어 대중이 이처럼 문제가 되는 건, 원래부터, 안 그랬을 법한 "원초"에서부터 그 씨앗을 배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이건 지식인이건 그렇다는 걸 뻔히, 일찍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 했을 뿐이지요. "대중은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우리들'로 변한다.(p353)" 위험하지만 때로는 고맙고 착하기 짝이 없는 대중이란 것의 실체를 똑바로 알려면 결국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금언대로 "우리 자신을 먼저 냉철히 들여다 볼" 수밖에 없겠습니다. 설령 그 안에서 간간히 괴물이 목격된다 해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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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의 인연 2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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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거의 모든 편의 특징은, 확실히 일단 손에 잡고 나면 도저히 궁금해서 도중에 중단할 수 없게 독자를 이끈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1권에서도 고이치는 자신이 세운 전략을 가능한 한 천천히, 신중하게 이어가는데 이에 대해 캐릭터 본인의 입으로 설명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애써 생각해 낸 그 답에 더 집착한다."(p19)

이런 말은 1권에서도 나왔죠. 아마 시즈나의 대사일 건데 "똑똑한 여자들을 속이는 게, 그렇지 못한 여자를 속이는 것보다 더 쉽다."였습니다. 똑똑하지 못한 여자는 자신도 자신의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의 느낌과 판단을 못 믿고 신중하게 굴 수가 있죠. 이런 사람은 속이려 드는 사기꾼은 (결과적으로) 잘 퇴치할지 몰라도, 지인 등이 이런 사람 설득할 때 아주 애를 먹습니다. 본인한테 뭐가 이로운지 판단을 못하고 무조건 이 사람 저 사람 말만 들으며 주관없이 흔들리니까요.

그렇다고 똑똑한 사람을 속이기 쉽다는 건 일반적으로야 그럴 리 없고 여기 시즈나 남매처럼 고단수의 협업이 되는 사기꾼 수완으로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여튼 이들의 말에 의하면, 바로 상대방이 철석 같이 믿을 만한 대목(대부분은 착각이지만, 자신의 약점이기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부분)을 "사기꾼의 생각 아닌 자신의 생각인 양" 속이는 데에 포인트가 있다는 소리겠네요

여튼 그래서 고이치는 자신이 조작한(영어로는 plant한) 증거들을 경찰 앞에 교묘히 깔아 놓습니다. 경찰은 뜻하지 않게 이 증거들을 "발견하게" 되며, 그래서 조작이나 모함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채 "자신들의 노력에 의한 성과"로 자랑스럽게 가꿔 가며, 아마도 소추 과정에서 강한 집념으로 밀어붙일 것입니다. 서양 미스테리 장르에는 이처럼 범인의 시야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의심을 벗어나거나 완전범죄를 꿈꾸는 설정이 많으며, 묘하게도 우리 독자들은 "범인이 성공하거나 적어도 큰 망신은 당하지 않고 상황을 모면했으면" 하고 바람을 갖게 됩니다. 아마도 주인공들에게는 (이 작처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식으로 합리화의 발판이 마련된 채 말이죠.

고이치 들은 세심하게도 변명거리를 마련해 둡니다. 평소에도 아주 사소한 것까지, 누가 들었을 때 수상하게 안 느끼도록 말입니다. 이런 대목에서 저는 "너무 그처럼 완벽하게 모든 언행에 대한 핑계와 이유, 배경 사정이 준비되어 있으면 더 어색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p69에 보면, "인간의 모든 행동에 어떤 이유가 꼭 있으라는 법은 없"다는 취지의 문장이 나옵니다. 아마도 이런 세팅 프로세스에 대해 독자가 느낄 법한 피로감 내지 위화감을 어느 정도 예상한 작가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소하지만 p164:4에 "천창"이라는 오타 있습니다.

p239에 "그 사람이면 그렇게 할 수도..?"라는 말이 나오죠. 여기까지 읽으신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OOOO는 과연 자신의 OOO에 대해 저렇게까지 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여기서 약간의 의구심이 들어, 혹시 이 부분에 반전의 암시가 있지 않나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이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거야." 그런데 그런 사람은 아마 극히, 극히 드물 것입니다. OOOO는 좀 특별한 사람일까요? 시즈나 남매는, 특히 시즈나는 OOOO에 대해 "절대 우리가 사기나 칠 만큼 멍청한 사람이 아니고 똑똑하다"고 평가합니다.

이 점은 앞서 시즈나가 곤경에 몰렸을 때 OOOO가 나타나선 마치 시즈나에게 빚이라도 받을 게 있다는 듯 짐짓 연극을 한 장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XXXX는 자리를 피하는데, 골치 아픈 일이겠기도 하고 OOOO가 무서워서(그런 외모 묘사는 없었지만요)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시즈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않았기에 그리한 것 아니겠습니까. 상황도 모면했지만 이 과정을 통해 시즈나는 다소나마 죄의식을 덜어내고(그러나 그게 끝은 아닙니다). 동시에 상대에게도 "자신의 떳떳지 못한" 동기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는데 이 모든 게 (어리숙해 보였던) OOOO의 덕이라는 점 우리 독자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OOOO은 이미 여기서부터 대단한 사람이었음을 작가는 복선으로 보여 준 겁니다.

역자 양윤옥 선생은 OOOO가 가장 멋진 사람이었다고 후기에서 말하는데 사실 그 정도 평가에 그칠 게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OOO를 위기에서 구했을 뿐 아니라 삼남매 모두를 끔찍한 범죄에서 벗어나게 도운 것입니다. 마지막에 삼남매는 자신들이 저지른 모든 죄를 씻어내려 하는데 이는 1권 중반부에서 독자인 제가 느낀 불편함을 완전히 해소해 주었고, 작가의 역량을 확인케 해 주는 대목입니다. 떡밥이 남아 있는 채 작품을 끝내는 작가는 힘이 부족한 거죠.

p262에서 "그걸 그대로 믿으라는 건 아니겠죠? 무슨 증거라도.."라고 말하는데 사실 고이치 같이 똑똑한 친구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닙니다. 그 사람이 그걸 왜 증명해야 합니까? 소송법에는 "입증책임"의 문제라는 게 있는데, 사리가 부족한 사람은 그저 자기 감정에만 충실하게 폭주할 뿐 자신이 무슨 무리수를 두는지 남에게 폐를 끼치는지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천하의 고이치도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판단력이 흐트러지나 보죠. 아니면 무대 밖의 우리 독자들을 배려한 추임새...?

아무튼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긍정적이고 선한 세계관으로 결국 마무리되는 점, 참 절로 감탄이 나오더군요. 이렇게 우리 독자들이 영혼이 깨끗이 정화되는 시간을 마련해 준 점에 대해 독후감을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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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0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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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은 그저 말을 아름답게만 꾸미는 기술이 아닙니다. 정확하고 간결하게 나의 의사를 전달하면서도, 듣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의 의견에 최종적으로 감복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 플라톤이며, 그 플라톤의 스승이 소크라테스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시대는 거짓을 진실로 윤색해 대는 기술에 능했던 소피스트가 큰 돈을 벌며 사회에 영향을 행사했던 무렵이었습니다. 이러니 사회에 불신 풍조가 만연했고, 스승이라는 이들이 제자에게 고작 서 푼짜리 거짓을 레슨하면서 연명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말고도 <수사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한 이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수사학들이 번지르르한 요설을 강론하는 테크닉의 열거에 그쳤고, 이후의 수사학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 그 아류에 그쳤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책이 갖는 의의는 무겁고도 넓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수사"를 넘어 우리가 일상에서 내뱉는 말의 의의와 당위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라틴어로 된 사람의 학명 중 하나는 "호모 로쿠엔스"입니다. 말하는 존재인 인간은 말로서 비로소 자신의 존엄을 표현하고 완성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말"을 통해, 개인이 사회에서 존중받고 나아가 사회에 공헌하는 존재가 되는 방법을 궁구하고 성찰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미워하고 한때 큰 다툼을 벌인 적수를 떠올릴 때, 항상 괴로움을 느낄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고 하며, 오히려 "큰 쾌감을 느낀다"고까지 단정합니다(p75). 물론 그 일을 겪던 당시에는 아마 큰 블쾌감이 남았다든가, 찢어지는 듯한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헌데 세월이 지나 그저 돌이켜 보는 회고의 대상이 된 후에는, 거꾸로 그 일을 떠올리며 맹렬히 상대를 질타하고 저주하는 와중에 기쁨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을 통해 불순한 감정을 씻어내고 설욕의 의지를 채우는 과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찌질한(?)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말이 갖는 배설과 정화의 기능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드라마 <스토브리그>에 보면 "그러면 단장님이 돌아오시나요?"라는 (답이 뻔한 질문에) "아뇨, 하지만 나중에 '좋은 단장이었지'라며 추억을 할 수 있게 되죠."라고 답하는 권경민 배역의 대사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해당 대목에서 인용한 구절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온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책 하단에 각주로 설명되는데, 현대지성 고전 시리즈의 상당 권을 번역하시는 박문재 선생님의 정성 들인 문장을 통해서도 우리 독자들은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위대한 지성이자 스승이었던 공자는 "소인배와 여자는 상종할 대상이 못 된다."고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기심이나 중상 모략에 대해 단죄하는 태도에 그치지 않고 그 본질에 대해 자세히 분석합니다(p146). 그의 통찰은 놀라운데, 이에 따르면 "우리는 남의 장점과 성공에 대해 시기하면서 어떤 유형적인 이익을 꾀하는 게 아니라, 남의 장점 그 자체를 불편해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장점이 있는 경쟁 상대를 밀어내면 물론 내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등 어떤 가시적인 이익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가망이 없어도, 즉 남을 미워하고 헐뜯는 행위, 표현 자체가 이미 쾌감을 갖다 주며, 보통 사람의 마음에는 남의 장점 그 자체가 이미 큰 상처를 안기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헌데,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하필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일까요? 해답은 뒤에 나옵니다. 당신이 혹 배심원 앞에서 어떤 효과를 노리고 무슨 말을 할 때,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배심원의 시기심을 자극하는 언사를 발설한다면, 당신이 애초에 꾀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뿐이라는 걸 저자는 다소 짓궂게도 지적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고전의 (당시 기준으로) 실용서적인 성격도 엿볼 수 있습니다.

p153에 보면 장노년과 대비되는 "청년"의 특성에 대해 논합니다. 시대가 수천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통성은 그리 많이 변하지는 않았기에 이런 구절들은 지금 읽어도 크게 공감이 됩니다. 그에 따르면 청년들은 세상 경험이 많지 않기에 악의보다는 선의를 갖고 행동하며 희망으로 넘치고 쾌활하다고 합니다. "삶 속에서 아직 굴욕을 당한 적이 없고, 자신의 의사에 반해 무엇을 해 본 적이 없기에 희망에 가득차 있다"는 말도 백 번 타당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 페이지에 주목해 보십시오. "청년이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남에게 해악을 끼치려는 이유가 아니라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고 남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한 동기이다."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언행이 합리화될 수는 없고 청년이든 장노년이든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건 자명합니다. 다만 저자는 "청년의 악행은 그저 유치한 우쭐거림에서 비롯할 뿐 어떤 본질적 악의가 있지는 않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을 겁니다. 또, 청년은 기지와 재치를 좋아하는데 이는 그것이 "우월감을 표현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도 박문재 션생의 박학다식함이 돋보입니다. 각주를 보시면 "원문은 '카쿠르기아 때문이 아니라 휘브리스 때문이다'라고 간략하게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이 문장은 역자 박문재 선생의 사실상 강연이나 다름 없고, 우리는 원문의 난해함을 역자의 설명 덕에 자세히 풀어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된 번역, 또 고전 원어(여기서는 헬라어, 즉 고대 그리스어)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역자의 번역이 이런 데서 돋보이는 거죠.

"수사학"이다 보니 우리가 현재 고전 논리학의 핵심으로 알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법칙에 대해서도 소개와 논증이 자세합니다. 아니 이 부분은 그가 창시했다고 해도 될 만큼 역사가 오랜 것들이죠. 삼단논법, 즉 대전제, 소전제, 결론으로 이어지는 논증의 구조는 아마 이 분야에서 가장 오래된 논리학의 업적이겠습니다. 이를 다시 수천 년 후에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가 연역법으로 집대성한 바 있습니다.

이 책에서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략삼단논법"에 대해 자주 논급합니다. 형식적으로 "삼단"이 명확히 드러난 것은 구태여 분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일상 언어에서, 저 대전제와 소전제 중 어느 하나가 생략되었는지 아닌지를 판별할 때입니다. 만약 생략이 되었다면 그 논증은 유효하나, 그렇지 않고 엉뚱한 문장이 (명시적으로건 암묵적으로건) 끼어들어갔다면 이는 이른바 "논리의 비약"이 됩니다. 이를 잘 살피는 건 나의 주장이 더욱 강력한 설득력을 갖게 하는 데 도움이 되고, 또 상대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논파하는 데도 일정 구실을 합니다.

수천 년 전의 위대한 지성이, 우리 후손들이 기를 쓰고 공부하거나 공부를 해도 습득하기 어려운 지혜의 본체를 낱낱이 해부해 두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서양 고전은 결과가 새로워서가 아니라,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를 그 이른 시기에 철저히 분석해 두었다는 사실 때문에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고전을 읽고, 사람의 말 그 설득력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나의 이성과 말솜씨는 과연 보편 타당한 법칙에 기대어 작동하는지를 진지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을 그저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정신이 맑고 건강하게 유지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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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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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의 신작은 언제나 독자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여태 우리가 봐 오던 일상의 풍경과 흔한 루틴 속에서도 선생님은 비범한 흐름과 독창적인 의미를 짚어 내십니다. 이어령 선생의 담론에 대해서 모든 한국의 독자들이 찬사를 보내는 건 아닙니다. 어떤 이를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억지라며 비판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제게 든 생각은, "그런 비판이 딱히 근거를 갖춘 게 아니라, 자신이 보지 못한 걸 선생이 날카롭고도 깊게 캐치했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질투심의 발로"란 것이었습니다. 이 책 에서도 선생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소재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그 끄집어낸 이야기들은, 평범한 우리가 전혀 감을 못 잡던 기발하고 신기한 담론들입니다.

혹 지구 반대편의 낯선 문명을 두고 짚은 의미라면 어차피 내가 모르는 동네니 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텐데, 저분도 나도 똑같이 몇 십 년을 두고 지켜 봐 오던 것에서 나만 못 보고 지나친 걸 저분이 지적하니 질투심이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석학과 일반 독자가 보는 눈이 같을 수야 물론 없겠고, 선생이 거론하시는 소재들이 그만큼이나 일상적인 것들이기에 더욱 "나는 왜 못 봤나 하는 불편한 마음(?)"이 커지는 것이겠죠. 이 책에는 그만큼 평범한 일상과 전통 풍속에서부터 한 올 한 올 끄집어 내 엮은 거대한 의미의 담론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p107에는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ㅎㅎ 전엔 몰랐는데(몰랐던 제가 바보겠고요) 선생님 같은 석학께서 참 어지간히 국뽕이시라는 점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국뽕은 국뽕이신데 인문의 깊이와 근거를 갖춘 국뽕이니 더이상 "뽕"도 아닌 셈이지만요. 왜 김연아 선수가 아사다 마오보다 잘 할 수밖에 없는지를 "다른 사람들이 거론하는 사주"를 들기도 하시고, 선생 자신만의 논거도 드시는데 사실 김연아 이야기라기보다는 선생 고유의 인문 담론입니다(본래 인문이 이런 것이지요). 인생을 떠받치는 네 가지 기둥이 물론 무작정 맹신할 건 아니지만 여튼 선생의 설명을 거치면 새삼 "아 그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삼신 할머니와 배꼽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이 책은 이어령 선생의 독자적인 담론 말고도 다른 민속학자, 인문학자들의 주장이 여럿 인용되고 확대됩니다. 이어령 선생 정도면 자신만의 주장과 착상을 도도히 펼치시고 다른 데 잘 눈길을 안 주실 만도 한데(좋은 건 아니죠) 그 연세에도 후배 학자들의 책과 논문을 이처럼 많이, 자주 찾아 읽으신다는 사실 자체가 또 놀라웠습니다. 삼신 할머니, 석 삼(三)이라는 글자에 "삶"이 들어있다는 주장은 물론 다른 학자분 주장의 인용이기는 하나 선생의 확대 해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듯도 했습니다. 물론 "배꼽" 이야기는 한국 고유의 전통만은 아니죠. 전 개인적으로 세계의 배꼽 운운하는 예전 고 이윤기 선생 책을 읽은 적 있는데 그리스나 인도 등에서도 널리 신봉하는 전통입니다.

기저귀에 대한 담론은 선생께서 일찍이 여러 칼럼이나 다른 책에서도 거론하신 바 있습니다만 이 책에서 총정리가 된 듯합니다. 서양에서는 산모와 신생아를 가급적 분리시키는 문화인 반면, 우리는 "업어서 키운다"는 말이 있을 만큼 엄마와 아기가 밀착되어 생활합니다. 아기가 엄마의 젖을 빠는 힘은 생각 외로 강하며, 엄마 역시 아기에게 젖을 물릴 때 별개의 호르몬이 나옴도 지적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여럿의 의학 논문과 연구 결과가 인용되는데 주장의 당부를 떠나 책을 이런 자세로 저술하신다는 자체가 경이로웠습니다.

다만 예컨대 서양, 그 중에서도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서 영아 살해를 가벼이 여긴다는 말씀에는 100% 동의하긴 어려웠습니다. 물론 영아살해죄가 일찍부터 유럽에서 고안, 규율된 게 만연한 살해 풍조의 반영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만 사실 한국전 당시 고아의 폭증에서 보듯 이런 문제에서 한국 역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죠. 여튼 어려서부터 엄마와 유난히 밀착해서 자라는 한국의 아이들이 커서도 풍부한 감성을 갖게 되고 문화 예술에서 독보적 재능을 발전시킨다는 결론(명시적으로 그 말이 나온 건 아니나 결국은?ㅎ)은 고개를 끄덕이게도 됩니다.

p175에 보면 "조이다"와 "매다"를 대비시킨 한국, 일본의 문화 차이에 대한 상세한 담론이 있습니다. 사실 이런 파트야말로 선생의 전문 분야, 아무도 따라 못 할 독보적인 사고라고 할 만합니다. "도리 시마리 야꾸"라 읽는 取締役(취체역)이란 단어가 있는데 일제 잔재지만 해방 후에도 널리 실무에서 썼습니다. 책에서는 CEO라고 하시는데 엄밀히 말하면 "감사"입니다. 전 저 단어의 일본어 발음이 "도리 시마리 야꾸"인 줄 처음 알았고, 두번째 어근 諦자가 "조이다"란 뜻인줄도 처음 알았기에 이 대목 읽으면서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발굽 蹄의 가차로 쓰고 비유적 의미로 살핀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여튼 일본식으로는 "잡아 죄치다"란 의미이며, 한국어의 "매다"하고는 국민성이 너무도 다른 게 극명히 드러나는 대목 중 하나라는 결론이었습니다.

p101 근방에선 출산의 아픔에 대한 말이 나옵니다. 남성이라고 해도 어지간히 둔한 사람 아니고선 여성만이 겪는 출산의 고통이 어느 정도는 짐작이 되며, 이 책에서는 여러 논거를 인용하며 독자에게 그 절절한 감각을 (지면에서 허옹하는 한 최대로) 전달합니다. "좁은 문을 통과헤야..."라는 성경 말씀도 인용되고, 좁디좁은 그 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생명을 얻는 그 과정에 대한 묘사가 가슴을 울립니다.

책 후반부에는 유독 우리 나라에만 있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한 살을 먹는" 문화에 대한 지적이 있으며, 재미있게도 책 앞부분에는 요즘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는 "태명 문화"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선생님 책에서 항상 느끼는 건, 젊은이들 사이에서의 유행, 감각, 문화 같은 데에 선생이 항상,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귀를 쫑긋 세우시고 이처럼 책에 반영을 하신다는 점입니다. 반면 꼰대(선생님보다도 훨씬 젊은)는 대개 젊은이들 문화에 대한 무관심, 무지가 큰 벼슬인 줄 착각한다는 게 공통점이죠.

생명만 가졌다고 다 사람인 게 아니라, 엄마 품에서 적어도 삼 년을 품기고 그 살가운 정성을 다 묻혀 내야 비로소 "사람", 그 중에서도 "한국 사람"이 된다는 게 선생의 결론입니다. 안 그러면 사람이 채 못 된 채 "생쑈"를 하는 반편이로 떨어진다는 거죠. 여기서 선생은 공자의 어록(이자 우리 민족이 오랜 동안 경전으로 모신) <논어>를 인요하여 재아와 그 스승 공자가 "계급장 떼고 맞장뜨는" 장면을 인용합니다. 말씀은 백 번 맞으나 저는 항상 의아했던 게 왜 공자쯤 되는 대스승이 면전에서 제자를 깨우치지 않고 마치 뒷담화하듯 마무리를 지으셨냐는 거죠. 과연 공자님이라서 면전에서 차마 싫은 말씀을 못 하신...?

세계에서 엉덩이에 반점을 갖고 태어나는 민족이 우리만인 줄 알았으며, 소설가 한강의 십 몇 년 전 작품 <몽고반점>도 이를 소재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선생은 꼭 그렇지가 않으며, 다만 삼신할미가 엉여 세상에 나가라는 뜻으로 후려갈긴 흔적이라며 의미를 부여하는 건 우리뿐이라는 취지이십니다. 삼신할미는 유독 한국에서만 큰 위상을 갖는 독특한 신화적 존재인데, 우리가 이런 존재를 무속과 전통에서 섬기는 이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p305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푸르스트"라고 나오는데 "프루스트"가 맞겠네요. 여튼 프루스트의 소설 유명한 서두를 통해 서양 아이들은 "어머니와 헤어지는 데서 얻게 되는 스트레스"를 어린 나이에서부터 지각하는 반면, 한국 아이들은 그런 게 없다는 겁니다. 맞는 말씀이긴 하나 과연 그게 순기능만 있는지는 ㅎㅎ 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아무튼 책은 매우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에는 그저 맞는 결론, 정보만 습득하는 게 아니라 저자의 생각을 비판적으로도 따져 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성숙시키는 데에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선생님처럼 익숙한 우리 전통의 소재를 놓고 이처럼 흥미진진한 담론을 펼치는 책을 읽노라면, 채 당부를 따지기도 전에 그 흐름에 빨려 들어간다는 게 신기합니다. 나라가 어려운 국면에 놓일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근본을 살펴 따지고 우리를 이 먼 미래에까지 살려 놓은 조상들의 깊은 얼과 배려(이게 곧, 비유적 의미에서의 "모태"입니다)를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이 책은 또한 형식, 편집이 독특합니다. 마치 아포리즘 모음이나 시처럼 짧은 단락이 구분되었는데 내용상 물론 죽 이어지는 줄글이지만 주(note, 註)가 각 단락 밑에 달려 있고, 이런 형식상의 배려 덕분에 마치 서사시를 읽는 듯 즐거운 착시를 부릅니다. 여튼 이런 파격도 서슴지 않고 독자 앞에 베푸는 저자의 젊디젊은 상상력과 혁신 정신도 엿보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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