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체리듬의 과학 - 밤낮이 바뀐 현대인을 위한
사친 판다 지음, 김수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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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리듬"이라고 해서 한국에서도 1990년대 초반부터 큰 주목을 받은 게 있었습니다. 일간신문에서도 자신의 생일생시 기준으로 오늘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려 주는 코너가 있었을 정도였는데요. 이후 이에 대한 "과학적 비판"이 일어나며 신뢰가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중은 과학적 근거 유무에 무관하게, 나의 두뇌와 신체가 최상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어떤 주기가 있긴 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던 듯합니다.

이 책의 저자 사친 판다는 일종의 "게임 체인저"와도 같은 젊은 학자분입니다. 생체리듬이란 분명히 존재하며, 이것의 작동 원리가 막연한 기분, 컨디션 따위가 아니라 유전자 단위에서 기인한다는 겁니다. 이 "유전자 시계"는 일제히 켜졌다가 꺼지며, 켜지는 계기는 빛의 지각이나 영양분의 섭취 등인데, 무엇을 섭취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언제"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에 대해 분명한 증명, 근거를 갖춘 연구는 이분이 참여한 프로젝트가 세계 최초였다고 하네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생체리듬은 그저 컨디션 조절 수준의 문제가 아니며, 우리 몸에 생기는 자잘한 병은 바로 이 생체 시계를 조절 못해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몸은 본디 병 안 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리듬이 정해져 있는데, 사람이 나쁜 습관으로 이를 흩뜨리기 때문에 병이 생긴다고 하네요. 그저 습관을 고치는 것만으로 유전자 시계를 제때 켜고 끌 수 있다는 결론이 놀랍습니다. 또, 이런 기제를 조절하는 신체 부위는 뇌에 한정한 게 아니라 우리 몸 전체라는 결론입니다. 그저 마음만 굳세게 먹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어 바른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거죠.

"1900년에 태어난 아기는 기대 수명이 47세에 불과했다(p88)." 이 생에 육신을 갖고 태어난 것만으로도 축복인데 고작 47년밖에 못 산다면 슬퍼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도 인간이 자신의 수명에 대해 그 정도 기대밖에 못 가졌다는 사실이 또한 충격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파스퇴르 같은 학자의 위대한 일생에 대해 배우기도 하지만, 사람을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사실은 그만큼 경이롭고 감사한 일입니다. 인간은 본디 맹수의 폭력으로부터도 취약한 신체구조이며, 아무리 도구를 써서 문명을 발달시키고 자기 보호에 능해졌다 한들 미생물 차원에서 신체를 좀먹고 드는 데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서양 문명이 이런 문제를 먼저 극복한 건 정말 큰 공헌이며, 동양인들이 서세 동점 추세(그보다 한 세기는 먼저 시작된)에 수동적으로 굴복한 것도 어쩌면 이런 성과에 기인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이야 동양 출신의 훌륭한 학자들도 많지만 말입니다.

저자는 인도 분입니다. 인도를 비롯해서 우리 동양인들이 서양 의학의 한계를 지적할 때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치료는 그저 증상에만 작용할 뿐이다(p81)." 병을 근본에서부터 잡으려면 증상이 아닌, 그 원인을 알아내고 이에 효과적으로 접근해야 하죠. 생체 리듬이 분명히 존재하며, 이를 다스림으로써(조율함으로써) 만병을 치유한다는 생각은 확실히 우리 동양인들이 대뜸 가질 수 있는 탁월한 아이디어가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이 책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무엇 못지 않게 중요한 건 '언제'이다"라는 결론입니다. 하긴 생체 시계 이야기니까 타이밍을 지적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는 어떤 강박 관념, 혹은 과도한 문제의식 때문에 "무엇"을 먼저 따지지 "언제"의 문제는 부차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분명 있습니다. 또, "결론은 알았으니 일단 됐다"는 식으로 문제 해결을 미루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잘못이라고 저자는 지적하며, 답을 알았으면 머리 말고 몸이 즉시 실천에 옮길 일이라고 일침을 놓습니다.

p112에는 체크리스트가 나오는데 기상 시각, 첫 음료 섭취 시각 같은 걸 꼼꼼하게 묻습니다. 이런 제안을 하는 전문가(?), 책 저자는 여러 명 있었겠으나 사친 판다 박사님은 과학적 근거를 세계 최초로 밝힌 분들 중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 무게가 다릅니다. 게다가, 학자들이 이처럼 일반인의 일상에 바로 적용할 수 있게 구체적인 자료, 방법론을 제공하는 건 드물기도 하기에 더욱 귀한 내용이겠습니다.

"좋은 습관은 (다른) 좋은 습관들을 더 많이 가져 온다." 이런 속담이 인도에는 있나 봅니다. 여튼 우리 주변에 운동 잘 하는 분들, 채식 위주의 습관을 지닌 분들(너무 극단적인 분 말고요)을 보면, 첫 습관을 잘 들이지 않고는 몸에 붙이기 힘든 다른 행동도 실천에 잘 옮긴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상위 결단, 근본적인 결단"이 중요하며 아주 유익한 출발점으로 작용한다는 뜻이죠.

"호르몬 균형이 회복되면 면역 체계, 수면, 행복감, 성욕이 함께 향상될 수 있다(p115)." 그리고 이 호르몬 균형을 회복하는 첫걸음이 바로 생체 리듬의 회복이요, 올바른 타이밍을 찾아 모든 습관을 조율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야식은 위산 역류의 원인이다(p141)." 특히 시리얼 같은 건 혈당 상승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고 같은 페이지에서 저자는 지적합니다.

식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제한할 수 있을까요? p181에서 저자는 "8시간 제한법을 영구적으로 할 마음은 안 생기겠지만, 10~12시간 제한은 누구나 손쉽게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가끔 원칙을 어길 때도 있겠지만 과하게 자책하며 공황상태에 빠질 게 아니라 가급적 빠르게 원래 궤도로 복귀할 것을 권합니다. 직장인이나 학생들은 특히 오후에 각성 상태를 원할 수 있는데, 이때 물 한 잔이나 카페인 없는 차 한 잔, 과자 등(p205)을 권하는데 그 중에서도 물 한 잔이 가장 좋다고 하십니다.

책에서 특히 저자가 강조하는 건 하루의 언제 우리가 첫번째 "빛"을 맞이할지의 문제입니다. 박사님의 원래 전공 문제이기도 하며 생쥐에다 빛을 쪼여 그의 생체 시계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관찰하다가 이 모든 놀라운 결론을 발견했다는 말이 책 전반부에 내내 나옵니다. 특히 청색광 센서(이 책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인 멜라놉신의 활성화가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라고 하는군요.

저자는 실내 생활을 많이 하는 현대인에게 빛을 언제 얼마나 쪼이느냐가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건물 설계 역시 이런 팩터를 충분히 고려한 후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p208에 밤과 낮에 따라 얼마나 빛을 쬐게 되는지 잘 정리된 표가 나옵니다. p247를 보면 전자기기에서 내뿜는 빛을 거론하며, 특히 청색광 스펙트럼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쥐들에게 특정 유전자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실험 결과를 설명합니다. 유전자가 아예 태어나면서부터 손상되었을 수도 있고, 앞서 말한 대로 켜져야 할 것이 꺼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건 생체가 어떻게 고유의 리듬을 관리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뇌는 정보 처리 장치로서 가장 중요하지만, 사실 인체의 모든 세포가 서로 소통하며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되다시피했습니다. p69을 보면 시교차 상핵의 개념이 나옵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략적으로" 뇌의 아랫면 중앙, 즉 시상하부에 위치합니다(같은 페이지). 저자는 바로 이 SCN이 일상리듬의 중심을 이룬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또, "SCN은 빛과 시간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라고도 합니다(같은 페이지). 책 중후반부는 우리가 일상에서 실천할 팁이 잔뜩 나오지만, 그 전에 이 p69 근방을 꼼꼼히 읽어 두시면 이 모든 주장의 학문적 근거를 우리 독자가 매우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 동양인들은 머리만으로 세상을 파악하고 몸을 다스리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팔다리와 몸통, 머리가 모두 하나라는 관념을 갖고 신체 전체의 수련을 강조하는 삶을 오래 전부터 살아왔습니다. 책 머리말에 보면 인도인인 저자가 서양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체험을 어떻게 민감하게 인식했는지 간단한 개인적 술회가 나옵니다. 그런 독특한 개인적 배경이 결국 이 놀라운 연구 성과를 낳게 한 자양분이 되었다는 건데, 자신이 가진 자원, 때로는 자원인지 아닌지도 모를 고유한 조건마저도 모두 자원으로 승화, 전환시키는 능력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참고해야 할 바가 아닌지도 생각해 봅니다. 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에너지원을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조화롭게 쓰는 방식이 바로 생체시계의 회복이라는 책의 주제와도 서로 통하겠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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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대화 - 너는 왜 그렇게 말하고 나는 왜 이렇게 힘들까
이진희 지음 / 청림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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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안 통하는 관계가 가장 답답합니다. 사람은 유일하게 정교한 음성 수단, 문자 매체로 통해 정보, 의사, 감정을 교류하는 동물입니다. 그런 인간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짐승 수준으로 관계가 타락하는 건 순식간입니다. "너는 왜 그렇게 말하고 나는 왜 이렇게 힘들까" 한의사이신 이진희 저자가 처방하는 "고장 난 대화"의 치료법을 읽고, 우선 앞서 든 생각은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말하고..."를 뒤집어 생각하면, "나는 왜 '그/그녀'에게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했을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무심히 던진 말이 결국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거고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사과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요.(p70)" 예전 드라마 <사랑과 전쟁>의 어느 에피소드에도 보면 남편이 "뭐가 잘못인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내가 잘못했으니 제발 용서해 줘."라고 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이에 아내는 "봐, 당신은 당신 잘못이 뭔지 모르잖아? 그러니 우리는 서로 안 맞는 거야. 이혼해."라고 대꾸합니다. 저자께서는 애매한 경우라도 일단 자신이 먼저 사과하는 버릇을 들였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무조건, 기계적 사과가 만능책이 아님을 곧 깨닫습니다. "영혼 없는 사과에 본인이 먼저 지치고(p71)", 그 이전에 대화의 정석은 "자신의 느낀 감정을 솔직히 털어 놓는 게(같은 페이지)" 우선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대충 "에이 그냥 이거 먹고 떨어지라고 하지" 같은 소통은 오히려 상대에 대한 모욕입니다(그가 설령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한 저질이라고 해도). 미안하다는 기계적 반응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기에 이런 행동을 한 것인데,. 라며 경위를 말하고 상대의 진심 어린 이해를 구하는 게 더 인간적이고 정중한 선택입니다. 한의사 역시 사람 상대를 많이 하는 직종이긴 하나 한의사쯤이나 되어도 이렇게 상대방을 섬세한 방식으로 배려해야 하니 한국이 참 관계 피로도가 과한 나라인 건 틀림 없습니다.

어느 재벌 총수 가문 때문에 "분노 조절 장애"라는 병명이 유명세를 탔습니다. p50 이하에는 이 증상에 대한 설명이 자세한데, 사실 저는 우리 한국인들 대부분이 작게든 크게든 이런 "병"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당장 저부터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자신이 타인의 반응에 대해 불건전하고 비이성적 분노를 (대놓고든 아니든 간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멀쩡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정말 답이 없죠. 저자는 첫째 "이 일은 당신과 당신의 가정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걸 강조합니다. 한의사이시니 만큼 다양한 환자들을 겪으실 터이며,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자신의 증상이 특이하다고 여기겠으나 그들을 그룹으로 다루다시피 하는 입장에선 전형성이 캐치되는 거죠. 이런 이들에게 "당신만 이런 일로 힘들어하는 게 아닙니다"라는 말 한 마디(사실은 팩트인데)를 건네 주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존심, 권위, 체면이 몹시 중요하다(p73). 그것들이 무너지면 세상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여긴다." 안타깝지만 이런 장애를 가진 이들 역시 우리 주위에 매우 많습니다. 일단 이런 분들은 실제보다 자신의 능력을 매우 부풀려 평가합니다. 똑똑하지도 못하고 직감도 예리하지 못하며 가문의 배경도 시원찮은데, 그 반대로, 자기 기대대로 남들이 받아들이며 존중하기를 기대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가족과 친구를 힘들게 하며, 어디서 새로운 사람을 알아 그 사람이 자신의 말에 잘 맞춰 주면 즉시 기존의 지인에게 "이 사람이 날 대하듯 너도 나를 대해!"라며 새로운 미션을 부과합니다. 내가 잘 되는 게 곧 네가 잘 되는 거라며 남에게 말도 안 되는 희생을 부과합니다. 우습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코믹한 망상에 시달리며 그 포로가 된 인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세련된 표현이 전부가 아니죠. 저자께서는 "나이도 어린데 어찌나 세련되고 부드럽게 표현하는지 부럽기도 하다.(p83)"고 하시는데, 사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좀 의외였습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제가 부러운 사람은 세련된 말보다는 일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말 잘하는 사람, 세련된 말재주를 가진 사람이 부럽다면, 혹 내가 하는 일이 일의 결과, 질에 비해 남들에게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던 적이 잦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여튼 저자는 "처음부터 잘 할 수 없고, 혹 소통이 서툴렀다고 해도 나 자신에게 토닥토닥해 줄 수 있으면 좋다"고 하십니다. 어쩐지 이 대목은, 나름 소통에서 상처를 입으신 적도 있던 저자가 아마도 자신에게,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지닌 독자들을 향해 특히 던지는 충고 같습니다. "자존감은 비판과 비난이 아닌, 사랑과 믿음을 통해 성장한다(p85)."는 말씀은 우리가 꼭 기억해 두어야겠습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같은 시 구절도 있지만,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바 상처 입은 바 싫어하는 바만 정확히 알아 자기 마음만 정확히 짚어도 평화와 안식이 절로 올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여기서 "꼰대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잠시 말씀합니다(p145). 요즘 유행하는 대로 꼰대들은 "나 때(소위 "라떼")는 말이야.."를 버릇처럼 되닙니다. 그런데 이처럼, 상대가 듣고 싶어하지도 않는 "나 때" 타령을 하면, 상대의 감정을 별개로 하고 말하는 꼰대 자신은 과연 만족을 느낄까요? 만족은 결국 그 말을 듣는 상대가 자신의 의사, 감정을 알아 듣고 그대로 반응해 줘야 진짜 만족이 오기 마련인데, 꼰대는 일시적으로 자기 만족에 빠질 뿐 결국 상대가 그를 무시하므로 궁극의 만족은 못 얻습니다. 그래서 꼰대짓이란, 가면 갈수록 자신을 고립에 빠뜨려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불행하게 만듭니다. 꼰대들이 흔히 하는 말이 "너, 역지사지를 좀 해봐!'인데, 이건 "너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고 그에 맞춰!"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전혀 남과 소통하려 들지 않으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죠.

"자기계발 서적을 읽는 사람은 남에게 도움을 구하려는 루저(p191)". 이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이 책을 쓴 저자가 대학생때 가진 생각이라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대개 세계관이 염세적이라고도 하시네요. 도움은 남한테 구할 수도 있으며 그게 민폐가 아닌 이상 얼마든지 소통의 일환으로 추구할 수 있는 거죠. 자신이 자기 완결적이라고 착각하는 건 자신만 망가뜨리고 고립시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주변, 그리고 자신이 몸 담은 조직까지 다 망치는 길입니다. "영어 잘하려면 반복, 반복 잘 하면서, 관계를 행복하게 만드는 말은 왜 반복하지 못하는가?"(p193) 두고두고 반복하며 새길 만합니다.

남에게 진짜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은, 이런저런 상처도 받고 경험도 많이 겪으면서 그를 통해 진짜 교훈을 추출하고, 이를 잘 정리해서 남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한의사로서 권위 있는 처방과 진단도 많았지만, "인간 이진희"가 자신의 인생에서 치러 낸 여러 시행 착오를 진솔하게 토로하는 대목도 많았습니다. 책의 주제가 진솔한 소통이며, 그런 주제를 표현하는 방법 역시도 역시 진솔한 소통이니 겉과 속이 일치하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겪는 많은 불편과 고통은 알고 보면 말과 행동이 달라서이며, 고장 난 그 숱한 대화 역시 서로에게 진실해지기만 해도 "낫는" 경우가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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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20-02-03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화를 통해 풀어라고 조언은 많이 하지만, 정작 서로 원활하게 대화하기가 얼마나 힘들고 대화를 위해서 어떤 노력과 기술이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다루기는 참 힘든 작업이라고 봅니다. 책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회사는 유치원이 아니다 - 꼰대의 일격!
조관일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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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보통 "신세대를 이해해야 한다. 그들과 잘 소통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은 책은 자주 접합니다. 구세대는 그저 시대의 뒤안으로 퇴장해야 할 이들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저 "혁신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이와 반대로, "니네들 꼰대 맛을 알아?"라며, 꼰대의 미덕과 당당함을 설파하는 책은 극히 드뭅니다. 따지고 보면 구세대가 앞장 서서 이만큼이나 길을 닦아 놓았기에 신세대가 그 바탕에서 더 진화하고 더 세련된 감성을 발휘할 수 있는 거죠. 뉴턴 역시 갈릴레오 같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털어 놓기도 했습니다. 어른 없이 태어난 아이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 나라의 구세대들은 다른 나라에 좀처럼 없는 특별한 분들입니다. 고도 성장의 숨가쁜 시대를 그들처럼 치열히 산 세대는 아마 세계 역사를 놓고 봐도 드물 것입니다. 이런 분들을 놓고 "꼰대"라 비칭하는 것도 이미 대단히 부당한 처사입니다. 스스로를 꼰대라고 부르며 자기 객관화가 가능하다면 그는 이미 꼰대가 아닙니다. 이 책은 그런 "꼰대 아닌 꼰대"가 니네들 젊은 세대는 이런이런 게 아쉽다며 거침 없이 충고를 던지는 책입니다. 그러니 나이 든 세대는 그간 구닥다리라며 주위에서 받은 시선의 서러움을 이 책을 읽고 떨칠 수 있으며, 젊은 세대는 속으로 품어 온 "어떻게 하면 선배들에게 인정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숙제를 이 책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IT에는 능하지만 멘탈이 약한 요즘 애들!" 저자는 과감하게 이런 편견은 편견이 아니라, 일말의 강력한 진실을 담고 있는 강력한 진단이라고 합니다. 신입 사원에게 한 소리를 했더니 그 부모한테서 전화가 왔다거나(p86), 더 심한 건 군대에서 "우리 아이가 신발 끈을 잘 못 묶는데..." 같은 호소, 민원을 받는 장교가 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을 겪는 고참 간부, 군대의 장교는 마치 "유치원 교사가 된 듯"한 느낌이라는데, 이 책의 제목("회사는 유치원이 아니다!")가 전달하는 바도 같은 취지 아니겠습니까. 그 뒤에 더 쎈 말도 나옵니다. "철 없는 젊은 날은 죽어야 한다!(p88)" 백 번 천 번 맞는 말이고, 나중에 한 집안의 가장이 되고 한 조직의 리더가 될 젊은이라면 일단 강해져야 합니다. 강하지 못한 자는 결국 남에게 짐이 되고 민폐만 끼칩니다.

"사람은 많고 할 일은 없다(p107)." 이 비슷한 제목, 아니 어찌 보면 정반대되는 구절로 책 제목을 단 김우중씨의 예도 있었지요. 조선 시대에도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어떤 고관이 그런 말을 한 적 있다고 합니다. "조정에 사람은 이미 많고, 자리는 부족한데 유생들은 이 점을 모른다. 글 잘 하는 사람, 일하는 사람이 차고 넘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세상은 그때와 별로 달라진 바 없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에는 내가 세상 최고의 인재인데, 세상은 관심도 없습니다. 세상이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그게 아니라 젊은이들이 제 주제 파악이 덜 되어서입니다. 저는 대학 다닐 때 어느 교수님, 고시 채점, 출제위원을 지내신 분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습니다. "여러분, 아니 세상이, 어른들이, 무슨 자네들의 부형(父兄)이 아니라고!" 이런데도 누울 자리를 못 보고 발을 뻗는, 아무데서나 미친 어리광을 부리는 이들이 꼭 있습니다. 대접은 받고 싶고, 정작 지는 남들 대접 해 주기 싫고, 참 답이 없죠.

p140 이하에는 "꼰대"에 대조되는 "빤대"가 있습니다. 주인정신이 없고 하인 노릇만 간신히 하다 조직을 떠나는 군식구를 일컫는 말입니다.  저 역시 읽으면서 "이게 꼭 젊은이들에게만 해당될까?"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저자께서도 혹 오해 하지 말라는 듯 "빤대는 나이와는 원칙적으로 무관하다"고 책 중에서 말씀 하시네요. 그래도 1) 빤질거린다(p142 이하에서 저자가 직접 쓰는 표현들입니다) 2) 괜히 삐딱하고 반항적이다 3) 기존 질서를 무시한다 같은 특징들이, 아마도 나이 든 세대에서는 좀 찾기 힘든 특징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뒤에 나오는 4번, 5번은 꼭 그렇지도 않지만요. 여튼 저자가 하는 말은, 너희들은 신세대가 되어야지 "빤대"가 되면 안된다는 겁니다. 어른들도 어른이 아닌 "꼰대"가 되어서 안 되는 이유가 같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 많이 합니다. 그런데 같은 말을 놓고도 요즘은 쓰는 사람마다 그 숨은 의도가 다른 것 같습니다. 저자는 p149 이하에서 이를 두고 재미있는 분석을 시도합니다. 젊은이들은 "그래서 어쩌라구? 나이만 먹으면 다냐?"라며 대드는 뜻으로 해석하며, 시니어들은 반대로 "난 아직 죽지 않았어. 연부역강,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 기력도 강성해지고 의지도 굳어지며 일처리 솜씬 전혀 녹슬지 않았거든?" 라는 뜻으로 이 말에 기댑니다. 후자의 태도는 사실 젊은이가 보기에도 좋습니다. 이런 시니어들을 보면서 "야 나도 정말 정신 차려야겠다. 난 나이 먹고 저 정도가 과연 나올 자신 있나?" 싶을 때 진정한 자기 계발도 가능하니 말입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나이 젊은 건 자랑이 아니다."라며 젊은이가 경각심을 갖는 "세번째 의미"라고 말합니다(p149).

이 책에는 방탄소년단, 특히 그 중에서 김남준에 대한 일종의 저격도 있습니다. 특히 이 대목이 재미있어서 주의 깊게 읽었는데요. 전 전혀 몰랐는데 "난 세상에서 자기계발서가 제일 싫어,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개소리들" 같은 가사를 그가 읊조린다고 합니다. 비교적 젊은 편인 저도 전혀 모르는 사항을, 요즘 가수들 랩이든 가사든 참 알아듣기 힘든데 그걸 찾아가며 들어는 보신 그 열정에 일단 박수를 보낼 일입니다(관심 없으면 이런 시도도 못합니다). 더 읽어 보면 저자는 사실 김남준을 저격한 게 아니라, "같은 말을 해도 BTS가 하면 감동이고, 우리가 하면 꼰대질이냐?(p194)"며 메신저가 아닌 메시지에 더 집중하라고 합니다. 사실 이 말씀은 김남준의 메시지에 대한 부분 긍정이기도 하기에 그의 팬이라도 별로 불편해할 건 아닌 듯합니다만 여튼 재미있었습니다.

이 책은 대책 없는 꼰대 예찬론이 아닙니다. 책 말미에는 "꼰대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며 일종의 자성론까지 전개됩니다. "리더가 되면 왜 꼰대가 꼭 되어야 하나?(p251)" 근거 없는 자기 확신, 자기 도취가 이런 현상을 낳는데 이는 나이와는 사실 무관합니다. 젊은이는 가진 게 없고 아직 성취한 바가 부족하므로 이런 폭주는 잘 않지만, 사람 나름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신에 헛바람만 든 미친 광대, 리더 코스프레를 하는 미친 녀석도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알라(p240)"는 충고를 베풀 필요가 있죠.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저런 충고도 훈계처럼 해 주지 말고 "제안하듯(p286)" 하라고 합니다. 심판하지 말(p267)고, 말허리를 자르지 말(p280)고, 자신의 청년 시절을 돌아보라(p265)"고 합니다. 책 뒤에는 YQ테스트가 있는데 이를 통해 자신의 젊음지수를 잴 수 있다는군요. 결국 이 책은 "꼰대가 되라"는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젊은이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되 그들이 배울 게 있는 멋진 선배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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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역사 다이제스트 100 New 다이제스트 100 시리즈 17
한일동 지음 / 가람기획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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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한 정치 단위인 브리튼 섬의 연합 왕국 근방에서 핍박과 설움의 역사를 겪었다는 점에서 아일랜드는 우리 나라와 비슷한 성정을 지녔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한국인들도 "음주와 가무"를 즐기는 편인데 아일랜드인들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이 책에도 p30⑧에 나옵니다). 이 책을 읽고 그렇게 피상적으로 알던 단계에서 벗어나, 세상 반대편에 우리와 너무도 닮은 겨레가 그들 나름의 삶을 자랑스럽게 일궈 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뿌듯한 느낌을 가슴에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나라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을 때, 마치 국사 교과서처럼 체계적이고 반듯한 목차, 구성으로 된 책이라면 물론 신뢰는 생기지만 접근성, 가독성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반면 이 책은 제목에서 보듯 다이제스트 형식 100장면 중심으로 독자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 전체를 통독하기 어려운(혹은, 그럴 엄두가 쉬이 나지 않는) 독자라면 자신의 관심 파트(여행, 음식 문화 라든가)만 골라서 먼저 읽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권말에 가나다순 사항 색인이 있어 내가 알고 싶은 키워드에 대해 쪽수를 바로 찾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에메랄드빛 아일랜드"(p26). 아일랜드는 독특하게 한글로 저렇게 쓰면 고유명사 Ireland도 되고, "섬"이란 일반명사(island)도 되는데 어떻게든 다 뜻이 통합니다. 물론 영어 발음으로는 미세하게 서로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이 나라, 이 섬의 사연 중 독특한 건 남북으로 분단이 된 상태라는 건데 기묘하게도 그런 것까지 우리하고 닮았습니다. 책에는 남아일랜드가 460만명, 북아일랜드가 180만명이라고 친절한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p26). 사실 460만명의 인구라면 한국 제2의 도시인 부산의 그것을 백만 정도 넘는 수치라서, 우리뿐 아니라 어느 나라의 기준으로도 그리 많은 수는 아닙니다. 180만 인구라면 한국에도 그 정도 규모의 도시가 여럿 있습니다. 이 정도 인구를 갖고 그토록이나 풍부한 문화를 빚어내고 오랜 세월 영국과 맞섰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우리 지난 역사가 생각 나 가슴이 아파 오기도 합니다.

이 책은 물론 아일랜드의 여러 모습을 자세하게, 또 입체적으로 다룹니다만 우리가 책을 읽고 크게 깨닫는 바 하나는 "그들 문화의 다채로움과 깊이"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도 그의 저서 중에서 "오로지 우리가 갖고 싶은 바는 문화의 힘"이라고 하셨습니다. 영국 근대 낭만주의 3대 시인 중에 예이츠가 있는데, 이 예이츠가 바로 아일랜드 출신입니다. 이 책 p188이하에는 아일랜드의 자랑이자 영국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에 대해 재미있고 상세한 소개가 나옵니다. p191에서 한 문장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예이츠는 자신의 경험을 시의 소재로 삼는 시인이었지만 그의 시가 위대한 것은 개인의 경험을 작품 속에 용해하여 인류 보편의 정서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앞서 제가 그를 3대 낭만주의 시인이라고 했지만 책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같은 페이지). "...그가 초기의 낭만적 자세에서 벗어나 인간과 사회와 역사를 보는 철학이 견실해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책은 아일랜드 문화, 역사, 경제, 정치의 소개에 그치지 않고 문학,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실려 있어 좋았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보면 수도원에서 성경을 베끼고(필사) 그 여백에 그림을 그리는(채색, 채식) 수도사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책 p118에는 "북 오브 켈스"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라 없이 유랑하는 민족이었으나 유대인들은 주위의 다른 겨레들에게 함부로 무시당하지 않았는데, 이는 예언자 마호멧도 말한 것처럼 "피플 오브 더 북". 즉 자신들만의 문화 코드를 책 한 권에 담아 후손들에게 길이 전할 줄 알았기 때문이죠. 우리 민족도 몽침 시절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여 국난을 극복하려 들었는데, 이 역시 북 오브 켈스처럼 겨레와 세계의 소중한 보물입니다.

p25에는 그 유명한 이니스프리 호수가 나오죠. 시인 예이츠, 미국인 데이비드 서로 등이 이곳을 찾아 상념을 정리하고 주옥 같은 글을 남긴 사실로 유명한데, 그 외에도 있습니다. 책을 조금만 뒤로 넘겨 보시면 p33 밑에서 두번째 줄에 "크랜베리스"라고 나오는데, 1990년대에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모은 밴드이며 이들의 대표곡 중에 "The Lake Isle Of Innisfree"라는 게 있습니다. p23에는 예이츠의 시 원문이 다 나와 있습니다(크랜베리스가 예이츠의 시에 곡을 붙인 겁니다. 마치 우리 나라 가수 마야가 소월의 시에 곡을 붙여 불렀듯) 저자께서 크랜베리스에겐 별 관심이 없으셨나 봅니다^^ 뒤 페이지에 보면 코어스에 대한 설명은 꽤 자세한데 활동 시기는 서로 비슷하거든요. 이 외에도 엔야라든가, 교황의 사진을 찢어 더 유명해진(책에 나오듯 아일랜드인들은 대부분이 가톨릭 교도입니다) 시네이드 오코너라든가... 아일랜드 출신 뮤지션은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차라리 음악세계에 아일랜드의 지방색을 구현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그저 아일랜드 출신이기만 한) 이들을 가리는 게 더 편할 정도입니다.

앞에서 잠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언급했는데 고대 유럽에서 라틴어로 이곳을 "히베르니아"로 불렀고 이 책 p17 중간쯤에 보면 "로마인들이 하이버니아로 불렀다"는 말이 있는데 같은 뜻입니다. 좀 나이 있으신 분들은 아일랜드를 "에이레"로도 알고 있는데 역시 p17 중간에 같은 설명이 나옵니다. 요즘 한국 교과서에서 아일랜드를 "에이레"로 표기하는 경우는 전무하다고 해도 됩니다.

이 책은 여행책 류가 아니기 때문에 역사와 문화에 대한 소개가 자세하며 사실 이 부분을 놓치면 독자로서 큰 손해를 보는 겁니다. p170 이하에는 감자 대기근의 여파가 상세히 설명되는데 아일랜드 역사에서 이 대목은 결코 간과될 수 없고, 특히 한국에서 진보 프레임으로 인문적 분석을 할 때 논의가 많이 되는 부분이니 아직 이슈에 대해 낯선 독자라면 정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잘 아는 편이라서(또, 읽다 보면 마음이 아파져서) 이 책 읽을 때에는 해당 챕터를 빠른 속도로 읽었습니다만 여튼 이 책 저자님 특유의 간명하고 핵심만 찌르는 서술이 매우 좋았습니다.

아일랜드의 역사는 브리튼 섬 역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령껏 정리된 이 책의 아일랜드사를 읽으면 영국 역사의 핵심 포인트 일부까지 같이 정리되는 점이 또 좋습니다. 올리버 크롬웰, 피트 경 등 굵직한 이름들이 줄줄이 나오며, 또 현대에 들어서는 마운트배튼 경의 암살 사건도 다뤄집니다. 한국이 무려 900회가 넘는 외침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아일랜드가 겪은 간난신고에 비하면 차라리 양반이었다는 느낌도 과장만은 아닐 겁니다.

p107에 보면 브레혼 법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고대인들의 훈훈한 연대 의식(solidarity), 휴머니즘이 내비치기에 읽으면서 연신 미소가 지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아일랜드인의 국민성 중 하나로 '호의적 태도'"를 드는데 병원이라는 단어 hospital도 본디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환대"라고도 옮겨지죠). 다만, 우리 독자들이 읽으면서 주의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해당 구절을 잠시 그대로 인용하자면 "부족의 구성원은 미성년자, 광인, 노인을 제외한 모든 이방인에게 환대를 베풀어야 한다"인데, 잘못 읽으면 "아니, 왜 미성년자, 광인, 노인은 제외하는 거지?"라고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성년자, 노인, 광인이야말로 어찌 보면 최우선적인 배려가 베풀어져야 할 대상이니까요. 브레혼 법의 해당 구절은 현대 영어로는 다음과 같이 보통 표현되는데요.

"...The only exceptions are minor children, madmen, and old people..."

여기서 "예외'는 환대를 받는 예외가 아니라, 그 반대로, 환대를 베풀어야 할 주체의 예외입니다. 따라서 이방인에게 환대를 베풀어야 할 의무가, 미성년자, 광인, 노인에게는 면제된다는 뜻입니다. 영문에서도 조금 모호해지는 대목이긴 합니다. 브레혼 법은 권말 사항 색인에 p107이 지시됩니다만 p57에도 잠시 언급이 있으므로 독서를 꼼꼼히 하시는 분들은 그 페이지를 추가로 메모하셔도 되겠네요.

후반부에는 아일랜드의 복잡다단한 현대사가 요약됩니다. 보면 그저 테러, 진압, 복수, 테러, 테러.. 의 연속입니다. 원 이래갖고 사람이 살 수가 있겠습니까. 책에는 20세기 독립 후의 아일랜드가 내내 유럽 최빈국이었으며 "병자"로 비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아일랜드는 (역시 책에도 잘 나오지만) 유럽에서 가장 높은 1인당 GDP를 자랑하는 윤택한 나라입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끌고 왔을까요? 역시 책에 잘 나오듯(그 중에서도 특히 p275), 1998년 이뤄진 벨파스트 협정 이후 양국 사이에 평화가 정착되어서입니다. 이 결과로 아일랜드만 잘 살게 된 게 아닙니다.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은 1970년대에 IMF 구제금융까지 받을 만큼 경제가 어려웠는데 아일랜드 정정 불안이 그 큰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데다 EU 통합 움직임 덕분에 영국- 아일랜드 양안은 물론 대륙과도 교역의 통로가 활짝 열렸으니 어디 경제가 안 살아날 방도가 있겠습니까. 평화는 이처럼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것입니다. 책에는 역시 현대 들어 성숙해진 아일랜드 여러 정파가 노조의 무분별한 파업을 막고 노사정 협의체를 통해 대타협을 꾀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좋은 선례를 본받아야 경제 회생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책은 재미있으면서도 필요한 정보만 잘 정리되어 있어서 좋습니다. 멋진 문장이 많아서, 두 구절의 인용으로 이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렇다. 아일랜드는 우리나라처럼 어둡고 슬픈 과거를 지닌 나라이자, 약함과 강인함, 순종과 저항정신을 동시에 지닌 모순덩어리의 나라이다." (p26)

"물질 만능의 어지러운 세상이 중심을 잃고 파멸의 막다른 골목과 늪을 향해 줄달음칠 때에도 에메랄드빛 아일랜드는 영원하리라."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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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쁜 곤충은 없다 - 플라스틱 먹는 애벌레부터 별을 사랑한 쇠똥구리 까지 우리가 몰랐던 곤충의 모든 것
안네 스베르드루프-튀게손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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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EBS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그 주어가 "곤충"으로 바뀌었을 때 아마 많은 분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거나 펄쩍 뛰기도 할 것 같습니다. 당장 바퀴벌레만 해도, 그의 "악함, 혐오스러움"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같기에 말입니다. 알고 보면 이는 우리 인간들의 지극히 주관적인 편견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익숙한 느낌대로 계속 가길 원하지, 설령 반증이 드러난다 한들 종래의 생각이 바뀌길 원치 않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이 흥미진진한 과학 교양서입니다.

"교미를 끝내면 수컷을 잡아먹는 암컷." 사실 많은 동물들에게 있어 성적 교합 행위는 대체로 "슬픕니다." 그 교합이 오래 가지도 않고 대체로는 이 고달픈 릴레이 경주를 끝내는 마지막 바톤 터치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손 번식을 위한 과정에서 그토록 큰 쾌감을 느낄 뿐 아니라, 자손 번식과 무관하게 성적 쾌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축복 받은 존재입니다. 때로 이 성적 본능을 제대로 통제 못 해 큰 곤경을 겪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무분별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여튼 "내 아이의 아빠는 내가 고른다"는 이 사마귀의 재미있는 행태를 보면서, 생명체의 진화와 투쟁 이면에 놓인 궁극의 원리가 과연 무엇일지 깊이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에도 생태계가 암컷만으로 채워지자 알아서 성별을 바꾸는 개체가 등장합니다만 도대체 번식이라는 게 한쪽 성만으로도 한편에서 가능하다는 자체가 우리 인간에게는 놀라움을 안겨 줍니다. 대체로 유전자 배합의 다양성을 기하기 위해 양성 생식이 생겨났다고 알려졌지만, 단성 생식이 저처럼 편리한데 과연 이 과정, 그 힘든 과정이 어떻게 생겨나기나 했는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수벌의 고환은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순간 '폭발'한다." 우리 인간에게도 이 비슷한 기제가 작동했다면 아마 세상에서 벌어지는 그 끔찍한 사건들 중 상당수는 아예 상상의 단계에서도 배제되었을 텐데요.

저자께서 여성이셔서 그런지는 모르나, 주도권을 주로 암컷이 장악하는 곤충들의 세계에 대해 특별한 열정과 의미 부여가 잇다르는 대목이 많이 보입니다. 과학자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우리 남성 독자들도 뭐 겸손히 따를 뿐입니다 ㅎㅎ

해리 포터 시리즈를 지어낸 조앤 K 롤링 여사의 통찰력에 대해선 언제나 감탄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여사의 창작 사전 작업의 밀도도 참 만만치 않은 것이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망토를 펄럭이며 사람들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디멘터"는 암풀룩스 데멘토르라는 말벌의 학명에서 따온 것이며, 그 행태도 서로 굉장히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퀴벌레의 천적이 세상에 어디 좀 없냐며 만날 불평이지만, 바로 이 말벌이 바퀴벌레에게는 명왕과도 같습니다. 이 말벌이 자신의 "호구"를 사냥하는 모습은 대단히 잔인하고 냉철하기에, 우리는 생전 처음으로 바퀴벌레에게 동정심이 들기까지 합니다.

개미가 농사를 짓는다는 말은 상식으로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개미가 "축산업을 영위한다"는 말도 처음 배우게 되었습니다. 진딧물은 자기 방어 능력이 부족한데, 개미는 이 진딧물로부터 일정 이익을 얻으므로 그걸 지키기 위해서라도 보디 가드 노릇을 자청합니다. 물론 공짜 경호만 해 주는 게 아니라 다른 구역으로 옮아가지 못하도록 날개를 물어뜯는 등 이기적인 폭력도 행사하는군요. 그렇다고 개미가 최강자라는 건 아니고, 이들 개미의 지나친 번식도 곰이 나타나 적절히 제한함으로써 식물계 역시 착취를 방지당합니다. 자연계의 신비와 조화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곤충으로 초밥을 먹는다?" 상상만 해도 토할 것 같으며 영화 <빠삐용> 등에서 보듯 사람이 그저 극한상황에 몰릴 때에나 벌레를 주워 먹기 마련이지만 알고 보면 벌레들은 단백질 덩어리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먹어라." 발명왕 에디슨의 시대에도 미국 중산층의 가정에서조차 바퀴벌레가 그렇게 들끓어서 테이블 보에 은박을 입혀 전기를 흐르게 하는 방법으로 퇴치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지난 세기 영국의 학자 홀트는 "더러운 벌레로 골치를 썩일 게 아니라, 노동자와 빈곤층은 자신의 집에 들끓는 벌레를 요리해 먹으라"는 충고를 했다는군요. 물론 대중이 격분할 만한 말이지만, 저자는 "아마도 수백 년이 흐른 후 사람들은 결국 홀트가 옳았음을 인정할 것"이라 합니다. 곤충 요리는 레시피에 따라 지상에 일찍이 없던 맛까지 지녔다고 하니 말입니다. 하긴, 요즘 웰빙으로 주목 받는 잡곡류의 경우 조선 시대에는 상민들의 식탁에나 오른 품목이었죠. 흰쌀밥이 이처럼 푸대접 받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면 구더기로 상처를 낫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미신이나 근거 없는 민간 요법, 혹은 픽션 속의 가짜가  아니라 이 책 p205에서 그 원리가 자세히 설명된, 엄연히 효능 높은 하나의 요법이기까지 합니다. <람보 2>를 보면 베트남 군과 소련군이 구더기가 창궐하는 웅덩이에 람보를 빠뜨려 고통과 굴욕을 주는 장면이 있지만, 저자는 사실 구더기는 인간에게 엄청난 효용을 제공한다고 합니다. 구더기는 결핵균의 증식을 막기도 하며, 사실 낚시꾼들에게는 벌써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이런 착하디착한 구더기를 놓고 무조건 침을 뱉거나 혐오감을 표시하는 우리들이야말로 배은망덕한 종족 아니겠습니까. 아니 구더기가 뭐 어때서요? 착하기만 하구만.

다윈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새로운 종이 생기기까지는 수십만 세대는 아니라도 수천 세대는 지나야 한다." 곤충은 우리 인류보다 훨씬 앞서 지표를 누비던 대 선배들이며, 나중에 출현한 우리와 얼마든지 풍요로운 공생 방법까지 제공하는 믿음직한 존재입니다. 쓸데없이 환경을 파괴하는 살충제나 찍찍 뿌려대는 인간은 반면 다른 종을 말살하는 아주 이기적인 종자들입니다. 곤충에 대해 열린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부터 벌써 더 풍요롭게 가꿔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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