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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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라는 이름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아일랜드계의 어느 부녀가 억센 생명력과 열정으로 가꾸던 그 농장의 이름과 같습니다. 이 장편 논픽션을 읽으면서 저는 내내 그 대하소설의 주인공 스칼렛이 떠올랐는데요. 차이점이 있다면 스칼렛의 부친은 다정한 인성(적어도 자기 딸한테는), 합리적인 세계관과 성실한 태도로 그 딸을 위험에 빠뜨리는 무모함은 저지르지 않았던 반면, 이 논픽션의 저자이자 주인공의 부친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외에도, 스칼렛과 달리 이 작의 주인공에게는 모친과 오빠들이 있었죠)

대뜸 그 고전 장편이 떠올랐을 만큼 이 책은 흥미진진하고 다이내믹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 고전이 역경과 위기 속에서도 건전하고 생산적으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여성의 흐뭇한 사연인 반면, 이 책에 담긴 사연은 여튼 해피 엔딩이긴 하나 내내 어둡고 무거우며 끔찍한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이 책의 배경이 무슨 백 수십 년 전이 아니라 우리와 동시대라는 점, 더군다나 세계 최선진국인 미국의 한 지방이라는 점도 놀라움을 더합니다.

장애인 헬렌 켈러의 경우 신체적으로 가장 비극적인 곤경에 처한 분이었지만 가정 환경은 유복했고 가족들도 대체로 상식적인 위인(그 이상이었죠 사실)이었다는 점에서 이 저자, 주인공만큼 불우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한 사람의 인생 성패가 자신의 의지와 노력, 재능에 달렸다 해도 이분만큼 환경이 나빴다면 도무지 방법이 없을 듯도 합니다. 여튼 이분은 그 모든 역경을 딛고 최후의 승자가 되어 이런 멋진 책을 우리 독자들에게 선사했으며, 그 자체가 위대한 업적이라 할 만합니다.

모르몬 교 신도들은 그 출발 시점에선 이단 취급을 받았으나 현재는 버젓이 미국 주류 사회에 편입되어 존경을 받는 집단입니다. 가깝게는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사업가 밋 롬니가 있었고, 불과 며칠 전 지병인 암으로 세상을 떠난 크리스텐슨 하버드 경영대 교수는 한국에 모르몬 선교사로 체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개인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벽촌에 머물며 근본주의적 삶을 고집한 분이 있었고, 보편적 삶의 원리를 거부한 그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아내, 부모(특히 그의 모친, 즉 저자의 할머니), 자녀 등 모든 가족을 궁지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습니다(본인은 결코 그리 여기지 않겠으나 제3자 입장에서는 다른 판단의 여지가 없을 듯).

외골수 신념으로 세상을 살려 하니 그들 가족에게 남은 일거리란 험한 노동밖에 없을 테죠. 부친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데, 이를 두고 그는 "중앙 정부의 독재, 압제를 거부하는 자유인의 결단"이라며 의미 부여합니다. 이 역시 전혀 뜬금없는 스탠스는 아니어서, 본디 미국이라는 나라가 중앙 정부에 대한 반항을 계기로 삼아 세워진 나라이고, 시민들의 자율적 삶이 권리 장전에 헌법적 권리로 보장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런 삶을 무작정 막을 수는 없는데, 다만 부모로서, 시민으로서 양심에 과연 어긋나지 않는 결단인지 그 시민이 정직하게 성찰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죠.

이 가족의 삶은 비참합니다. 오빠 중 하나인 션은 위험한 환경에서 노동하다(그 부친의 책임이 크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크게 다칩니다. 기묘한 건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도 외견상 아무 이상 없는 듯 보인다는 건데, (당시 아직 사리 분별을 하기에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쳤어야 할 게 저리 멀쩡히 보인다면 안 보이는 부분(내장 기관이나 정신)이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을까 하는 걱정(정확한 판단)을 이 소녀, 주인공, 저자가 이미 하고 있다는 점이 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의식이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도 션은 아끼는 여동생 타라의 이름을 부릅니다.

한 번도 부족해서 션은 한참 후 위험한 기계를 다루다 또 팔을 크게 다칩니다. 본인뿐 아니라 그 여동생도, 혈육이 이런 사고를 자주 겪어 육체적 정신적 모두 정상인 삶이 어렵게 되면 그걸 지켜 보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리기 직전까지 갈 만하지 않습니까. 모친도 이런 사람과 살다 보니 건전한 판단을 못 합니다. 딸(이 책 저자)이 지금 몇 살인지도 모르고 독립해서 나가 살라고 하다가 이제 겨우 열 여섯이라는 걸 일러 주자 "그랬구나, 내일 당장 안 나가도 좋아."라고 말합니다. 종교도 좋고 다 좋은데 사람이 일상을 살아나갈 때 최소한의 맑은 정신은 붙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가정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경제적 곤궁은 둘째 치고라도) 과연 어떻게 정상적 삶이 가능할지 참 읽는 내내 마음이 막막해졌습니다.

이 책의 배경이 무슨 에이브러햄 링컨이 통나무집에 살 무렵도 아니고 20세기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독자로서 기가 막히기도 했습니다. 여튼 타라는, 자신의 삶에 가로놓은 그 숱한 장애를 오로지 배움에의 열정으로 헤쳐 나갑니다. 말이 쉽지 이런 환경에서 뭘 배우려고 해도 제대로 책이 읽어나지겠습니까. 제가 관심 깊게 본 건, 이 어린 소녀 타라가 과연 뛰어난 지능을 가지기는 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그녀는 이런 책도 쓰고, 지성의 전당인 대학(그것도 명문)에서 자기 자리를 굳힐 만큼 성공한 인생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특히 "고등 대수학" 등에서 고전했다는 말로 보아 그리 엄청난 지능을 갖고 태어난 편은 아닌 듯 보였습니다. 물론 그렇기에, 즉 탁월한 머리라는 무기도 없이 나쁜 환경에서 이만큼 왔기에 더 위대한 성취가 되는 거겠죠.

경제적으로 겪는 어려움은 그 과정에서 터득한 강인한 의지, 자신만의 지혜 등이 부산물로 따라올 수 있기에(꼭 그런 건 아니지만) 마냥 불리한 여건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을 가장 살뜰히 돌봐 줘야 할 부모가 뭔가 비정상적인 가치관을 가졌기에, 정서적으로 베풀어야 할 보호를 등한히하고, 나아가 남들 다 받는 교육마저 부실하게 받게 한다면 그 밑에서 자라나는 애가 정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비뚤어지고 왜곡된 인성은 물론, 사리 판단을 합리적으로 할 수 없기에 자신의 과제도 제대로 해결 못 합니다.

미국은 개인주의적 삶이 지배적인 데다 광대한 영토에 남 일 신경 안 쓰는 분위기라서 이런 비극적인 가정(에서의 위대한 성취)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한국은 좁은 땅에 남들 눈치 보고 살며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 사람 취급을 받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사실 타라 웨스트오버 박사님 같은 비극적인 출발점을 맞이하는 인생은 거의 없습니다. 이분이 어린 소녀 시절, 배움이 얼마나 간절히 목말랐겠습니까. 그런 분이 만약 한국처럼 입시 위주의 교육, 줄세우기 풍조 같은 걸 겪었다면 아마 천국도 이런 천국이 없다며 환희에 찼을지도 모릅니다. 한국의 교육 풍조가 마냥 좋다는 게 아니라, 우리는 혹 배부른 푸념에 젖어 더 중요한 걸 잊고 있지나 않는지 반성을 할 일입니다.

책 속에는 대체로 보편적 지혜와 상식, 인류 공통이 동의할 만한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어린 타라 웨스트오버는 이 점을 알고 그 희미한 불빛을 제대로 좇았기에 지옥으로부터 광명의 세계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제발 부모님 감사한 줄, 내가 처한 환경에 감사한 줄 알고 주어진 여건을 소중히 활용하며 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무섭고도 치열한 책을 읽으며 독자로서 제게 남은 감상은 그것뿐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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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이코노미스트 세계경제대전망
영국 이코노미스트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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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래를 예측하는 건 언제나 어렵습니다. 미래를 제법 잘 예측하는 사람은 큰 돈을 벌기도 합니다. 사회에서 올리는 수입은 성원들이 그의 능력과 기여에 대해 베푸는 평가의 척도이기도 하니, 미래를 잘 예측하는 일은 그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편안하게 해 주는 아주 중요한 과업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예측이라 함은 우리가 아무의 말이나 믿지 않고, 여태 공신력 있게 세상을 바라보고 정확한 진단을 해 온 전문가 집단에서 나온 말들을 믿습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큰 공신력을 지닌 미디어 중 하나가 영국의 주간 이코노미스트일 것입니다. 잡지의 역사도 오래되었고 필진의 무게와 설득력도 여전히 대단합니다. 세상사를 가벼히 논하는 태도는 누구에게라도 용납이 안 되겠으나 특히 경제 문제를 따질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가 달려 있으므로 각별히 신중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경제 이슈 분석에는 경제 본연의 영역뿐 아니라 정치, 사회, 가까운 역사 정보까지 총동원되며, 경제 영역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경제 정책의 향방을 결정하는 게 (그게 바람직하든 아니든 간에) 언제나 정치였지 않았습니까.

2020년은 새해 벽두부터 중요한, 위험한 국지적 충돌로 장식되었습니다. 이 책은 2020년을 전망하지만, 사실 책이 쓰여지고 출판되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하므로 대부분의 아티클들은 꽤 오래 전에 자작성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많은 글들은 여전히 흥미로우며, 아직도 열 한 달 이상 남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어서 유용합니다. 어떤 글은 그 실현 여부를 바짝 앞두고도 있기에, 과연 이 글이 "지면상의 성지글"이 될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게 다 독자로서의 특권입니다. 필자들은 조마조마하겠지만 말입니다.

"출판되기까지 꽤 긴 시간..." 운운했습니다만 마치 전혀 아니라는 듯이, 이 책 p91이하에서 다루는 이슈는 바로 잉글랜드 은행을 새로 이끌 총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잉글랜드 은행은 우리 식으로(사실은 일본식으로) "영란은행"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아주 유서 깊은 기관인데요. 바로 십수 일 전에 이와 관련된 뉴스가 전파를 타기도 했기에 이 책의 해당 분석글이 더욱 큰 실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카니의 통치는 끝났다.". 영국이나 미국이나 저널리즘 기사투는 대단히 문학적(?)이며 때로는 과장이 섞여 있습니다. 사십여 년 전 닉슨이 특별검사를 해임했을 때에도 "학살'이란 표현이 즐겨 사용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사건은 그리 불리기도 하죠. 카니 총재의 행보나 스타일도 여튼 전횡이라 일컬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글의 필자는 그 나름 복잡한 소회를 피력하는군요. 여튼 어디서나 브렉시트가 문제입니다. 이제 해결의 갈피를 잡아 갑니다만 말이죠.

수십 년 전부터 중국이 새로운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른다느니, 사실 지난 수천 년 간 누려 오던 자리를 되찾을 뿐이라느니 하는 말이 유행했지만 어떻게 된 게 최근의 그들 행보는 갈수록 전망이 나빠집니다. 언제까지 그들은 "이름 뿐인 금융 중심지(이 책의 표현입니다)"인 상해를 목표 지점에 올려 놓을까요? 이 글에서는 말미에 뜻밖에도 축구 이야기를 꺼내는데, 이코노미스트 같은 점잖은 매체에서 다루기에 가벼운 소재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축구 이야기가 결국은 정치 이야기이고 경제 이야기더군요. 이 책 나오고 나서 얼마 후에 히딩크가 대표팀에서 짤리기도 했기에 더욱 시의성이 높습니다.

이 책은 바로 지금 사서 읽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꼭 지금이 새해 벽두라서가 아닙니다. 대만의 총통 선거 이슈, 홍콩의 시위, 페르시아 만의 위기 등등이 마치 사전에 조율이라도 한 양 지금 연달아 핫 이슈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하필 지금 읽는 독자는 "와 과연 이코노미스트라서 이슈가 될 만한 일들을 잘도 엮었구나."하고 감탄할 만도 한데(TV만 틀면 그 뉴스들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사실 이는 우연의 일치이지 이코노미스트의 필진이 탁월한 데에만 기대는 건 아닙니다(그건 신이라고 해도 불가능하지 않을지...). 하긴 모르죠. 내공 깊은 필진이라 정말로 적중을 시키고 있는 중일지도요. 여튼 이분들이 하는 이야기는 특히나 신년 정초에 한번쯤 차분하게 귀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분명.

책 말미에 실린 간단한 세계 전망에는 한국 이야기도 나오는데, 한국의 4월 총선에 대해 제법 대담한 예측도 꺼냅니다. 보통 이런 데서 하는 이야기는 두루뭉술 펼쳐지기 마련인데 이 책의 태도는 그 기준보다는 훨씬 직설적입니다. 오랜 명성은 괜히 생기는 게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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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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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에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건 가장 큰 무례일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그것이 망자와 유가족들에 대한 최상의 배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소중한 생명을 부여받아 이 거친 세상, 때로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열심히 부대끼며 사는 중입니다. 그 와중에서 우리를 가장 슬프게 하는 건 바로 "죽음"이라는 운명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죽음이란 무서운 관문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할 운명이며 이를 피해갈 방법은 전혀 없죠. 그런데 우리가 품위 있게 이 비참한 운명을 접대하고 잘 정리할 방법은 있습니다. 바로 달관입니다. 그리고 그 달관이 가능하려면, 어느 정도는 여유를 갖고 이 죽음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과 웃음은 경우에 따라 매우 잘 어울립니다. 이 유쾌한 소설은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때는 살짝 엉덩이가 처지긴 했어도 전체적으로 괜찮은 몸매였는데(p175)." 한창 때의 여성은 마치 초원을 활짝 아름답게 수 놓는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지구를 밝히는 미의 결정체이구나 싶게끔요. 한창 때 여인의 환한 미소를 보면 세상 근심 걱정이 다 없어집니다. 체형은 마치 터질 듯 부풀어오르면서도 절묘한 균형을 잡아 보는 사람이 다 흐뭇합니다. 거친 세상에서 먹을 것을 마련해 오는 수고는 남성들이 대개 도맡습니다만, 세상 살 맛을 제공해 주는 건 아름다운 여성입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삼라 만상의 존재 이유를 구성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여성도 어느 새 전성기가 지나 쭈글쭈글한 할머니가 되어 냉혹한 죽음을 언젠가는 맞아야 합니다.

"아우야, 바위는 산의 일부였을 적을 기억하는 법이야(p338)." 우리 모두는 기억을 갖고 삽니다. 그 기억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고, 위기를 맞았을 때 중요한 참고 자료를 제공하기도 하며, 힘든 순간이 닥쳤을 때 이를 이겨낼 감정적인 힘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어떤 기억은 우리에게 큰 웃음을 선사합니다. 그런 유쾌한 기억은 죽음 앞에 섰을 때조차 우리에게 무한한 용기를 제공합니다.

미겔 엔젤 역시 그런 기억에 기대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들의 일원입니다. 그는 하필, 가장 기쁜 순간을 기념해야 할 자신의 생일에 존속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맞습니다. 우리도 흔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라든가,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표현을 씁니다. "크루스"는 스페인어로 십자가라는 뜻인데, 저들 문화권의 중요한 원천이었던 기독교에서는 "누구나 다 자신만의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가르침을 공유합니다. 그 십자가는 결코 자신이 감당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는다고도 가르칩니다. 만약 그 범위를 넘는다고 느낀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에게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웃음"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얼마 전 등장한 트럼프하라는 정치인이 두 나라 사이에 쌓은 장벽. 그 장벽의 이편과 저편에서 갖가지 양태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의 작가도 그렇고,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도 국경의 이편저편을 넘나들며 갖가지 양상으로 삶과 부대끼며 살아갑니다. 가장 축복받은 인생은 그의 주변 인물들이 조용한 박수를 쳐 주며 그가 모은 재산의 다과에 무관하게 언제나 응원을 보내 주는, 그런 흐뭇한 장노년이 아닐까 싶습니다. 빅 엔젤은 정말 인생 제대로 산 분입니다. 그에게 설령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되었건 간에, 그는 자신의 주변에 잔잔한 웃음을 주고 꺼지지 않는 햇살을 비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그를 향해 미소를 띄울 때, 우리 자신들도 아마 언젠가는 찾아올 우리들의 죽음을 놓고 아마 보다 편한 마음이 되어 있을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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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나는 의심한다 - 세계적인 신경과학자 보 로토의 ‘다르게 보기’의 과학
보 로토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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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보는 노력은 그 자체로 위함하고, 적어도 부담이 됩니다. 회사에서도 남들이 예스를 외칠 때 홀로 노를 말하는 이는 경계, 질시의 대상이 되기 일쑤이죠. 하지만 요즘은 일상에서조차 혁신을 강조하는 세상입니다. 루틴에 젖으면 언제 도태될지 모르며, 그걸 떠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이 작은 행복이라도 찾으려면 다르게 보기를 습관으로 길들일 필요가 있기도 합니다.

신경과학자 보 로토 교수의 이 책은, 대체 우리의 생각과 느낌이라고 믿는 많은 것들이 어느 정도까지나 우리 자신의 것인지, 혹은 그저 길들여지는 과정일 뿐인지 우리 독자들에게 근본적인 반성의 계기를 제공합니다. 세상은 끊임 없이 변화하며, 뇌는 어떤 식으로건 이를 해석하고 정보를 정리해야만 합니다. 쉼 없이 어떤 판단을 행하는 우리이지만 그 기초가 되는 정보는 "눈으로 본다"고 여기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 생각과 다른 판단을 말하면 "그거 내 눈으로 분명히 본 거거든?"이라며 길길이 뛰기도 합니다. 본인은 본인 눈으로 본 명백한 "팩트"를 부정당하는 게 참을 수 없습니다. 사실은 야얄팍한 자존에 상처를 입었을 뿐인데도 마치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양 "정의(착각입니다)"의 분노를 쏟아냅니다. 그리고, 이런 착각에 빠진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어지러워집니다. 이성과 논리에 의해 세상사가 결정되어야 하는데 그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길 가능성이 커지는 만큼 말입니다.

"러브 스토리"는 그저 에릭 시걸의 픽션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회색질의 대뇌 피질(명탐정 에르퀼 푸아로가 내세우던 모토이기도 하죠), 그리고 시상은 우리가 사물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데, 저자는 이를 두고 환상적인 "러브 스토리"라 성격 규정합니다(p113). 저자는 이 책 전체를 통하여 세상 자체가 끊임 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성격임을 강조하며, 동시에 피질과 시상(세포) 역시 서로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불태우며 그 의존, 상호 관계를 진화시켰음을 주장합니다.

과연 사랑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며, 이 세상이 날이면 날마다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게 가꿔지는 원동력임이 분명한 듯합니다. 물론 과학으로 증명될 만한 명제는 아니지만, 과학자의 날카로운 통찰이 아니겠습니까.

편향과 가정,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주관적 뿌리(p240)는 어찌 보면 두려움에 기인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로로든 이미 뇌 속에 익숙하게 자리한 것을 근거도 없이 진리로 규정하고, 그 반대의 것을 그르다며 폭주를 일삼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객관은 그런 우리 마음 속의 불건전한 요동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모습을 유지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미약한 신경 더미들이 채 따라잡기도 전에 그 모습을 바꿉니다. 만약 우리가 이 과정에서 긴장을 풀고 종래의 확증 편향 속에 나태하게 빠져든다면 아마 판단의 착오는 임계를 넘어 위험 수위에 치달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는 건 아마도 파멸의 결과뿐이겠습니다.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필요 없는 정보를 걸러 내며 생존을 위해 유익한 예측을 해야 하는(p337) 과제는 사실 진화의 기본 방향이기도 합니다. 이런 과제를 수행하려면 "의식적 사고"가 필요하며(p167) 그런 사고는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가능합니다. 

이 책은 참으로 멋진 표현들을 담습니다. 진화는 어떻게 이뤄졌을까요? 특히 사람처럼 뇌 부분을 별나게 진화시킨 종이 한사코 기피하려 든 건 바로 "불확실성"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사실이야말로 모든 두려움의 근원이며, 우리는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이처럼이나 탁월한 지성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의식적 사고가 어떻게 가능한지. 답은 "그 불확실성 속으로 결코 두려움 없이 밀고 들어가는" 선택과 결단에 있습니다. 마치 우리 전통 속담처럼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 법"이니 말입니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을까요, 아니면 자유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을까요? 뉴턴 같은 과학자도 결정된 미래를 그저 수학적으로 계산해 낼 뿐이라며 암울한 결론을 암시한 바 있습니다. 반대로, 미래가 자유의지에 따라 설령 바꿀 수 있더라도 우리의 의지가 기여하는 바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저자는 그저 의지만으로 미래가 바뀌는 건 아니라며 정직한 확률을 말해 줍니다. 허나 그 과정에서 필사적으로 진실과 객관을 발견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있고, 그것은 아름답다고도 일러 줍니다. 이 책은 과학책이지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유력한 가설 하나도 일러 줍니다.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가 이 거친 세상에서 하루를 버티며 생명의 불꽃을 틔우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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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도 - <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네 번째 이야기 페러그린 시리즈 4
랜섬 릭스 지음, 변용란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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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불교에서는 생로병사의 인과 연으로 오묘한 수수께끼를 설명하려 들지만 정답이 무엇인지는 우리들 중 누구도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순간순간 다가오는 힘든 현실의 숙제를 해결하는 데 골몰하고, 대체로 우리는 이런 이들을 성실하고 현실적이라며 칭찬합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정신이 딴세상에 가 있는 양 집중을 못하고 산만한데,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평판이 좋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상한" 사람들은 혹시 어떤 특별한 사명을 띠고 다른 세상 다른 시간대에서 하는 일이 따로 있었던 건 아닐까요?

"예의 바른 사람들은 남의 대화를 엿듣는 게 아니다.(p21)" 그렇다고는 해도 때로는 예의 바른 이들조차 달갑지 않은 엿듣기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제이콥은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에 적응해 나가지만, 만약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어느 정신병원에나 끌려갔을지도 모르는 위태위태한 신세입니다. 이 시리즈에 나오는 "이상한" 아이들, 이상한 사람들이 으례 그렇듯, 이들은 자신들을 이상하게 보는 주위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열심히 세상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분명 남 보기에 이상한 사람들, 아이들이지만 그들에게는 분명한 목적 의식이 있다는 게 중요하죠. 또, 알고 보면 이 세상이 이런 이상한 사람들의 노력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에게는 놀랍습니다. 물론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금은 설레며 할 수 있다는 게 페러그린 시리즈를 읽으며 언제나 느끼는 바이기도 합니다.

이상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즉 우리)에 의해 방해 받기도 합니다. "그들을 죽일 수도 있나요?" "그레서는 안 된단다." (p65) 규칙이 그러하며, 우리 생각에도 그 선을 넘으면 이미 세상을 지킨다는 그들의 명분이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합니다. 생명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며 이런 절실한 마음가짐 하나하나가 세상을 지탱하는 큰 기둥이기도 합니다. 남의 목숨과 재산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나쁜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지만 그 수가 일정 선을 넘는 순간 세상은 붕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한" 사람들을 이처럼 응원하게 된다는 자체가 우리 독자들에게는 드물고 때로는 벅찬 경험입니다.

돌이켜 보면 세상은 언제나 위태로웠습니다. 특별한 악의를 갖고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는 인간들로 위기에 처했으며, 이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딱히 있지도 않았습니다. 많은 경우 나쁜 자들이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며 그들이 응징을 받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세상은 용케 버티며 여기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피부색이 검다고 이유 없는 차별을 받기도 했으며 도저히 용서 못 받을 살상이 끔찍하게 벌어졌고, 그럼에도 반성이란 전혀 없이 보복이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도 그들 나름대로는 명분과 합리화가 있습니다. 들어 보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우리도 어떤 식으로건 풀어야 한다"며 필사적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그들의 못된 의지를 막으려는 선한 움직임에 저항하며 "이상하다, 잘못되었다"를 자격도 없이 외칩니다. 참 뭐가 정상이고 이상한 건지 끝없이 헷갈리는 판입니다.

세상을 지키려는 누군가(들)의 몸부림이 없었다면 우리 사는 세상은 진즉에 망했을 터입니다. 페러그린 여사와 이상한 아이들은 자신들의 소명이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압니다. 그 하는 일이 얼마나 막중한데도 밖에서 이들의 분투를 엿보는 우리들은 유쾌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들은 과연 자신들이 세상을 망치는 데 가담하는지, 아니면 작은 무엇이라도 기여하는지, 그저 낄낄거리며 방관하는지 의식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들 누구나 특별해지기 위해 애쓰지만, 그 첫걸음은 착한 마음의 회복과 냉철하고 정직한 반성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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