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금의 가치를 지닌 생각도, 효과적인 화술을 통해 상대에게 전달하지 못하면
그런 고귀하고 유용한 생각이란 처움부터 부재(不在)함만 못합니다. 현대는 바야흐로 소통의 시대라고 하나, 이미 이 시절부터 데일 카네기는 그
소통의 비중과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대중에게 깨우치려고 했던 거죠.
총 15장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각 챕터가 모두 실용적이고 효과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으며, 실전에서 잠시라도 잊어선 안 될 교훈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개인 사이의 대화(물론 비즈니스 상대일 수가
많습니다)"와,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 연설", 이 둘로 크게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경제 활동을 하는 이에게 필수적 생존 스킬이며,
후자는 사람에 따라 큰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직업적으로 많은 이들 앞에 나서야 하지 않더라도, 예컨대 회사에서 높은 분들을
상대로 PT를 할 때에도, 이 책에 나와 있는 원칙들은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아니, 잊어선 안 될 원칙들이 전부라고 해도
됩니다.
데일 카네기는 링컨의 사례를 여러 군데에서, 거의 쉼 없이 인용하고
예거합니다. 그만큼 링컨이라는 인물의 자취가, 데일 카네기라는 이 저자, 그리고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영향을 끼친 바가 컸다는 뜻입니다. 링컨은
이 셋째 권, <성공대화론>에서도 예외 없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는 일단 메모를 중시하는, 몸에 밴 습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전(事前)의 준비란 누구에게도, 또 어떤 목표를 위해서도 필수로 요구되는 과정입니다. 즉흥의 연기, 수행이 언제라도 가능한 사람은
천재이겠으나, 그런 사람은 애초에 극히 그 수가 드뭅니다. 아무리 능수능란한 사람이라 해도 사전의 준비는 필요합니다. 메모는 이 연설에 있어
사전준비의 필수 요소였습니다.
그런데 메모만 평소에 열심히해 둔다고 반드시 실전 상황에서 훌륭한 수행이
보장될까요? 링컨은 평소에, 즉 실전에 임박해서가 아니라 평소부터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정리하고 다듬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준비된 연설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 역시, 이런 그의 깊이 사색된 상념과, 이를 타인에게 정확하고도 간곡히
전달하려는 그의 성심 성의가 반영된 결과물이었습니다.
이 제3권이 아닌, 다음 편 제4권에 나오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 교과서에서까지 필수로 공부하게 하는 명문 중 명문인 이 게티스버그 연설이, 과연 당대, 아니 게티스버그 싸움터 바로 그 현장에서,
연설 당일의 청중들에게 얼마나 큰 호응을 받았을까요? 데일 카네기가 전해듣고 연구한 바로는, 요즘 말로 "분위기가 싸해지는" 실패작이었다고
합니다. 왜인가? 당대의 일반적 관행이었던 긴 길이의 상투적 표현 가득한, 기독교적 훈계와 엄숙함으로 가득한 연설이 아니고, 담백하고 짧은
내용이었기 때문이죠. 당시 청중들의 기준으로는 "뭐 저런 성의 없는 연설이 다 있어?" 정도였을 겁니다.
이 사실은, "효과적이고 감동적인 소통"의 실천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잘 증명해 주는 일화라고도 하겠습니다. 나의 진심과 깊은 고민을 가득 담았는데, 막상 그 현장에 모인 이들에게는 별 공감을 자아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저 실패작으로 비난받아야 할까요? 데일 카네기는 이애 대해,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진인사 대천명" 정도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최선을 다했으니 그만"이라는 자기만족적 합리화는 아닙니다. 정당한 노력을 투입하고 나의 진실성을 담은 소통은, 당대 아니면
후대에라도 올바른 평가를 받는다는, 그만의 긍정적, 실용적 가치 중시의 견해에 결론적으로 부합한다 하겠습니다. 이 책에는 2장, 10장 등 여러
곳에서 이 링컨의 사례가 원용되고 있습니다.
자신감이 언제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왜 타인 앞에서 분명한 자기 의사를
전달하는 데에 실패하는가? 로이드 조지와 같은 명연설가도, 정치 초년생 시절, 비유적 표현이 아닌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혀가 입천장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연설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일단 혀가 풀리고 분위기에 적응하면, "하던 연설을 중단하느니 차라리 총을
맞겠다" 고 할 정도로, 대규모 청중 앞에서 자기 말을 열심히 전달하는 경험은 마약처럼 매혹적이라고 합니다. 시작이 반인 셈인데, 그 시작을
상쾌하게 떼기가 그 무엇보다 어렵습니다. 데일 카네기는 "심사 숙고가 자신감을 만들고, 자신감이야말로 멋진 소통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결론냅니다.
인간관계의 기본 원칙이 이 연설과 대화에도 적용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왜 청중들이 연사의 말에 하품을 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거나 주의를 흐뜨릴까요? 그것은, 연단에 올라서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말하는
이가, 자신들의 관심사와는 전혀 무관한 주제를 갖고 자기만의 소통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청중을 매혹하려면, 청중이 가장 관심있어 하는 주제와
소재를 정면으로 부각하고 다뤄야 합니다. 좋지 않은 사례이긴 하나, 히틀러 같은 자가 독일 국민들을 그토록 매혹한 것도, 그들의 좌절에서 비롯한
불건강한 욕구와 갈망을 정확히 꿰뚫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서 예로 든 링컨의 연설도, 당시 기준으론 너무 짧다는 이유만으로 현장의
청중에게 반감과 실망을 유발했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말할 것도 없고, 시대를 관통하는 청중의 욕구란 "길지 않고 요령 있는 연설"이라는 게
카네기의 주장입니다. 흥미롭게도 카네기는 사도 바울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1장에서 그는 성공적인 소통의 예로 예수의 산상 수훈을 거론하기도
하는데, 물론 그가 종교적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당대 독자에게 가장 쉬운 예시를 들려는 의도였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때로 독설가의 면모를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당신의 가르침이 생소하니 우리에게 설명을 해달라"는 대중의 요구에 그가 "당신들은 미신적입니다."라며 대뜸 면박부터 주고
시작했던 행적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데일 카네기의 원칙에 부합하는 행동은 아닙니다. 그의 가르침은 언제나
"상대방의 감정과 자존을 공연히, 아니 어떤 경우에도, 자극하지 말라"는 걸 상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이 행동은,
"짧게, 현대 단위로 2분 정도의 시간 안에 연설을 끝냈다"는 장점 때문에,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물론 그의 가르침에 야유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으나, 짧은 시간 덕에 청중들은 주의를 최대한 집중할 수 있었고, "그게 다는 아닐 터이니, 당신의 다음 가르침은 무엇인가?" 라는
일종의 앵콜 요청을 받을 수 있었다는 거죠.
이로 미루어 볼 때, 대화와 소통, 그리고 강연의 요체는, 상대와의 공감과
소통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왜 대화에 약한가? 상대의 마음과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어떤 이들은 성공하는가? 그는 상대의 감정을
정확히 포착해 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성이다 원칙이다 합리성이다를 냉정히 내세우기 전, 상대방의 감정이란 요소를 먼저 생각하고
고려해 보라"라는, 데일 카네기의 일관된 원칙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