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건설업 회계와 세무실무
이강오.임종석 지음 / 광교(광교이택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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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移延)"이란 말은 미룬다는 뜻입니다. 이주한다는 "이"에 늘인다는 "연" 자를 씁니다. "이연"이란 개념은 법인세법 소득세법 가리지 않고 자주 등장하며 회계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인세는 당해 사업연도의 실적을 측정하여 당기에 부과되고 이를 납부하면 끝인데 여기에 "이연"의 개념이 낄 여지가 뭐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연법인세라는 건 쉽게 말해, 덜 냈기에 앞으로 내어야 법인세와, 반대로 더 내어서 앞으로 돌려받아야 할 법인세액, 이 둘을 가리킵니다. 회계는 자산이든 부채든 그것이 발생한 시기에 인식하는 게 하나의 원칙이므로, 환급 받을 세액이든 더 내어야 할 금액이든 실제 돈이 오갈 때 그때 가서 장부에 적으면 그만이지 않겠냐면서 안이하게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현금이 오가는 건 아니지만 가까운 장래에 그리 되리라는 예상 하에 앞에 "이연"을 붙여 취급하는 거죠.


회계상 발생하는 모든 "거래 사건"은 자산, 부채, 자본, 비용, 수익, 이 다섯 중의 하나입니다. 만약 아니라면 억지로라도 저 다섯 중의 하나에 끼워 넣어야 합니다. 내가 더 내어야 할 법인세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 납부를 안 했을 뿐이라면 이는 "부채"입니다. 마치 외상매입금이나 미지급금과 같습니다. 반대로 더 낸 세금이라면 이는 과세당국으로부터 돌려받아야 할 "자산"입니다. 이는 외상 매출금이나 미수금처럼 취급합니다.


이 외에도, 이번 사업연도에 이익이 전혀 안 나고 손해만 봤을 경우, 세무상 결손금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이 중 혹시 이번 연도뿐 아니라 차기 연도로 이월이 가능한 부분이 있다면, 그 금액만큼 법인세 납부액이 줄어들 예정이 되는 셈입니다. 이때 그 부분을 또한 "이연 법인세 자산"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꼭 무슨 결손금 같은 암울한 조건에서만 이런 게 생기는 건 아니고, 세액 공제를 받을 경우 이게 꼭 당해 연도에만 적용되지 않고 다음 해 이월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면, 그 부분만큼 차연도에 법인세를 덜 내어도 되는 겁니다. 이 역시 이연법인세 자산으로 미리 인식합니다. 


이연자산은 대개 미래 시점에서 현실화할 금액으로 측정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3년 후에 받을 빚 3억이 있으면 그건 지금 시점에서 결코 3억이 아니고, 일정 이율에 따라 "할인"하여 대개 2억 9천 얼마 정도로 더 적게 인식하는 게 원칙이죠. 그러나 여기서 이연법인세자산(부채)는 기간이 길지도 않고 대개 소액이므로 번거롭게 할인을 하지 않고 액면가대로 처리합니다. 회계상의 원칙 중 "중요성"에 의거한 조치이겠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연법인세 "자산"의 인식은 그저 그런 조짐이 보였다고 바로 장부에 적지는 않고, "그럴 가능성이 제법 큰 경우"에만 한정합니다. 반면 "부채"의 인식은 보다 보수적이라서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바로 인식한다는 게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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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마음편한 인생선택 -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23가지 인생 선택과 결말
스즈키 노부유키 지음, 유가영 옮김 / 한샘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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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플라스 후작이 "폐하, 저는 가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라고 도도한 언명을 한 이래 결정론적 세계관은 더욱 큰 위력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만, 사실 결정론/비결정론의 대립은 질문의 설정 자체가 잘못된, 비생산적인 논의일지도 모릅니다.

멘탈의 중요성을 어느 정도로나 평가할지에 따라, 세상사는 이미 결과가 다 결정되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일체가 이미 거대한 방정식에 의해 해(解)가 도출되어 있음"이라 체념하는 것보다, 적극적인 의지의 개입을 통해 무엇이건 조금이라도 변화를 가할 수 있지 않을까 판단하는 쪽이, 다분히 건설적인 사고 방식이라 여깁니다. 또한 유한한 인생을 보다 보람있게 영위하는 길도, 미미한 개인의 존재가 발버둥치고 땀흘리며 설령 결과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손쳐도 무엇인가 작은 변화라도 도출하는 그 과정 자체에 위대함, 숭고한 의의를 부여하기 마련이죠.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위명 높은 문호, 철학자, 사상가들이 거의 의견이 일치하는 바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몇 주 전에도 한 번 언급한 적 있습니다만 프로야구에서 전설로 통했던 모 감독의 경우, "피나는 노력을 통해 종전의 나와 전혀 다른 나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느끼는 희열이 얼마나 큰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소위 "외인구단식 지옥 훈련"도 선수들에게 서슴없이 부과했던 건데... 설사 이런 식의 가혹한 단련 과정에다 고유의 가치를 인정한다 쳐도, 그게 개인이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피치 못할 단계로 받아들인 후에야 소정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재 젊은 세대는 강압적 훈련(분야 불문)에 대해 거의 가치를 부정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재미있고 봐야 한다는 주의란 말이죠. 강압은 그 자체로 부도덕하고 무의미하다고들 여기는 게 보통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멘탈 혁신이 이 박영곤 소장님처럼 자발적 수용과 내면화를 통해 개인의 내면에 침투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파르타식 강압, 주입에 몸서리를 치는 세대라고 해도(솔직히 어디 어린 세대들 뿐이겠습니까만), 현재 자신이 나태함, 게으름, 자기 합리화의 악성 루틴에 빠져 있다고 자가진단할 수도 있고, "아,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뭔가 간절히 변화를 모색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외인구단"에의 스카웃(?), 가입은 또 원치 않을 거란 말이죠. 이런 이들에게 "멘탈 혁신" 과정은 인생에서 한 번 정도는 꼭 거칠 만한 체험, 학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거창하게 어느 시설에 입소해서 집단으로 거치는 코스는 싫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위해, 책 한 권으로 간편히(대신 진지하게) 마치는 커리큘럼이라면 심적 부담이 덜하기도 하겠고 말입니다.

저자께서 핵심 프레임으로 설정한 CR/NCR은, Consensus Reality/Non- Consensus Reality의 약자입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아인슈타인의 핵심 동료이자 후원자이기도 했죠. 또 이른바 양자심리학의 거두인 아놀드 민델의 책에도 자세히 구명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론적 바탕이 있기 때문에, 또, 이미 한 세기 전에 제시된 양자의 역설이 아직도 명쾌히 해명된 바 없기 때문에, 혹시 그 해답이 멘탈 영역에의 집요한 탐구를 통해 일거에 획득될 수 있을지 하는 희망은 많은 진지한 학자들이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그 전에, 개인들의 일상적 삶이 그저 다른 물리적 투자 없이 "멘탈 혁신"을 통해 개선될 수만 있다면 이 역시 어떤 위대한 학문적 업적보다 후순위에 구태여 놓일 필요가 없는 기적 같은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 다른 것보다, CR/NCR 프레임을 개인적 생활 습관 개선에 이 정도로나 응용이 가능하다는 데에 더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역시, 일독을 권할 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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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보수와 퇴직금 규정 작성매뉴얼 - 개정판
강석원 지음 / 코페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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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금"이란 좀 특이한 제도입니다. 요즘이야 그런 생각을 하는 이가 없지만 과거에는 고용주가 나를 써 주는 처사에 대해 일종의 은혜로 알고 직장을 다니다가 퇴직할 때 목돈까지 챙겨주니 고맙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죠. 그런데 이 퇴직금은 근로자(사무직 직원 포함) 본인의 급여 일부가 적립되고, 여기에 사용자가 따로 자기 부담부분을 붓는 시스템이니 엄밀히 말해 "이연(=미뤄서) 지급되는 급여", 혹은 "노동에 대한 대가"일 뿐 어떤 시혜 같은 건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미 반 세기도 전에 제정된 근로기준법의 법정의무사항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노태우 정부 당시 한창 노사분규가 심했을 때, 노동자의 임금이 어디까지 범위가 책정되어야 하는지를 두고 정말 치열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때 확립된 원칙이 "무노동 무임금"이라든가(그래서 지금도 소위 "노조전임자" 급여에 대해 까다로운 기준이 적용됩니다), "통상임금"의 범위 문제 같은 것입니다. 통상임금에는 지금도 "상여금"은 포함 안 된다고 하며(통상임금이 왜 중요하냐면 해고라든가 산업 재해 같은 게 발생할 시 몇 개월치의 통상임금 지급금을 정할 때 아주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이죠), 대신 명절 떡값은 포함된다는 게 판례의 태도라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문 정부 들어서 드디어 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시키려는 입법 시도가 (올해 상반기에) 있었는데 지금 경기가 최악이고 거의 YS 때 외환위기 수준의 불안감이 사회 전체를 엄습하는 터라 그 귀추가 주목됩니다.

노태우 정부 당시에 임금의 범위, 혹은 본질이 무엇인지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는데 그래도 그 당시에는 많이 배우고 책임 있는 중량감 있는 논리가 오가는 면이 있었네요. 지금은 뭐 막돼먹은 인간들이 아무 근거도 없이 엉터리 같은 유언비어, 낭설로 치고박는 판이라서... 아무튼 당시 이른바 "생계 보장 부분"이 임금에 포함이 되느냐, 아니면 순수하게 노동의 대가로만 구성되느냐를 놓고 정말 대단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근데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너무 임금 도그마에만 집착할 건 아니라고 생각도 됩니다. 요즘 그... ISO 26000을 보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명시까지 되어 있습니다. 기업은 이미 이윤 추구에만 몰입하는 조직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사회적 책임도 분담할 책무가 있는 거죠.

이런 퇴직금 제도 하나만 봐도, 근로자들의 최소 생존 부분을 국가와 기업이 어느 정도는 나눠서 지는 게 현대 사회 구조의 본질 중 하나입니다. 다만 그 범위, 한도가 어디까지냐가 문제인 거겠고... 소탐대실이라고, 모든 걸 가지려 들면 정말 필요한 것까지 다 놓칠 수도 있습니다.

퇴직금 관련해서는 우리나라는 기업이 좀 많은 부담을 지는 구조입니다. 즉 그 직원의 퇴직 직전 임금을 기준으로, 그게 얼마가 되든 그의 일정배수를 두말않고 사측이 지불해야만 합니다. 반면 외국에서는 확정기여형(이른바 DC)을 주로 채택하는데, 기업은 일정 금액(그 근로자의 급여와 무관하게)을 금융 기관에 납입만 하면 끝입니다. 이 기금을 금융기관이 굴려 대박이 나든 쪽박을 차든 퇴직시 그 결과물을 지불하면 됩니다. 한국은 금융기관의 운용기술이 매우 후진적인데다 이 방식대로라면 많은 근로자들의 노후 설계가 위협받게 되므로 이 방식이 아닌 확정 급여형(보통 DB라고 부르는 방식)을 채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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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마주서는 용기 - 하버드대 10년 연속 명강의
로버트 스티븐 캐플런 지음, 이은경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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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온 힐, 데일 카네기 같은 저술가(분명 자계서 저자)들의 책을 자계서로만 인식하는 이들은 오히려 적습니다. 무슨 톨스토이 인생독본처럼 경건한 고전이라든가, 넓은 범위의 경영서에 한 자락 걸치는 명저처럼 받아들이는 게 보통이죠. 정말 직장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전시키려는 용도로 자계서를 (곧이곧대로 순수하게) 소화하고 싶다면, 그리고 요즘 나온 책 중 알곡과 쭉정이를 바로 고르는 데에 자신이 없다면, 정평이 난 자계서 고전을 고르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이 로버트 슐러의 책도 그런 범주에 들어갑니다.

직급이 뭐든 간에 회사에서 "배짱있게 살아갈 용기"라는 제목을 단 책을 펼쳐 놓고 읽을 때, 남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이걸 내가 부하들, 혹은 동료 보는 데 펼쳐 놓고 있으면 뭔가 스스로 추진력이 부족하다는 걸 노출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OO은 자계서를 읽을 만큼 상황이 한가한가? 등등. 그런데 책이 재미있으면, 또 (고전이 흔히 그렇듯) 시대를 초월해서 참 적실성 있는 교훈이다 싶은 걸 요점만 착착 잘 제시하면, 어느 새 책의 저자와 정신 없는 소통에 빠져 현실의 소소한 눈치가 하찮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 이거? 다 읽고 나서 잠시 빌려 줄게." 사실 이런 직접적 반응에서의 자신감, 확신이 상대에게도 더 효과 있게 전달되기 마련이기에, 앞 단계에서의 사소한 교란은 진정성 아래 덮이는 게 보통입니다(소위 moment of truth).

이 오래된 책의 원제는 <Let's learn with Boldness>입니다. 당신을 둘러싼 객관적 상황이 어떠한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지혜가 무엇인지, 너 자신의 진짜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 이런 것들을 배우기 위해 결코 망설이거나 머뭇거리지 말라는 의미죠. 영어에서 "배짱"은 grit라든가, 혹은 gut 같은 단어를 써서 표현하기 때문에 좀 그렇긴 합니다만, 한국에서는 어쩌면 모든 문제가 "직장인 자신의 자신감 부족"에서 비롯하는 게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형 자계서의 원조라 할 이시형 닥터의 그 책에도 제목에 "배짱"이란 단어가 들어가죠. 집단에 끼기라도 하면 무서울 게 없는데, 혼자 서면 확신도 없고 뭘 해야할 지 모르는 한국인들의 흔한 속성 때문에 아마도 특히 강조되는 덕목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배짱"만으로도 충분한데, "용기"까지 피수식어로 한 번 더 들어갔으니 역자분의 의도가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초기 자계서 저자들 중에는 기독교적(정확히 말하면 "청교도적") 도덕관을 사상적 배경으로 지니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 저자 로버트 슐러도 목사님이라서 그런 경향성은 한층 더한 편인데요. 현재의 자계서 주류에서 흔히 접하는 "세속주의적 솔직함"과는 거리가 멀게(그렇다고 저자가 솔직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슐러 목사님은 물질적 탐욕과 집착에 젖은 사람은 참된 성공,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걸 갖고 싶다면, 결코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 이를 자신의 삶 속에서 몸소 실천한 저자의 경우, 비슷한 표현을 쓰는 것 같아도 아주 청신하고 경건하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을 때 언제나 감동을 받는 건, 그게 그저 흘낏 시선을 줄 수 있었던 책 앞표지의 저자 이름란을 확인한 후 비로소 시전하는 위선적인 "결과론"만은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그게 그 (이름난) 저자의 말이라서가 아니라, 그 말 자체가 내 영혼에 진정으로 파장과 공명을 주기 때문에 감동이 밀려 오는 게 분명하죠. 반면 평범한 저자의 경우, 그게 진심의 순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독자도 밋밋한 반응에 그치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사회에서 성공하려는 자, 남 앞에 두드러진 성과를 내려는 자가, 진정 제 목표를 달성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에게 정직하라는 가르침을 펴고 있습니다. ㅎㅎ 제목대로 너무 "배짱"만 강조한다거나 안면몰수식 추진력만 내세우는 내용은 아닙니다. 영어의 "boldness"라는 게,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는 뉘앙스가 기본으로 깔려 있거든요. 당신이 안주하는 현실이 어느 순간 재앙, 심지어 죄악으로 화할 수 있다는 게, 그래서 언제나 의존할 것은 도덕적, 객관적, 보편적 진실밖에 없다는 게 이 저자의 일관된 기조입니다. 자계서에서 대체 왜 "물질"의 가치를 낮잡아 말하는가, 그 점이 의아하셨던 분들은 이런 배경을 알고 책을 읽어 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직장에서 차라리 더, 직원의 일관된 인격, 캐릭터, 개성이 더 필요하고, 이게 흔들리지 않으려면 먼 근본에서는 물질에 초연한 자세가(역설적이지만) 더 필요합니다.

뉴질랜드에 가 보거나, 혹은 친지를 두고 있는 분들이 요즘은 한국에 많죠(대략 십오 년 전부터 이주자가 확 늘었으니). 뉴질랜드는 의외로 정부 정책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나라인데, 이 책이 쓰여진 당시에도 자유방임주의하고는 거리가 좀 멀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 말씀처럼 진심으로 구하면 이루어지지 못할 바 없다는 내용인데, 그 예를 저자는 뉴질랜드 최초의 상업(민영) 방송국 허가 에피소드를 통해 들고 있네요(기독교 관련 내용은 아니고요). 제가 또 하나 느낀 건, 독창성 높은 자계서일수록 이처럼 다른 책에서 못 보던(얼핏 봐선 이상하게까지 들리는)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는 겁니다. 모르겠습니다, 만약 제가 이 책 최초 출간시점과 동시대의 저자라면 적어도 이 이야기만 읽고서 큰 감흥이 못 느껴졌을 수도 있는데요. 사실 공무원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뭐 하나 허가를 따 내거나 승인을 받으려면 이분들 대하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만큼이나 많은 비리가 생기고 사건이 터지는 거겠습니다만,.. 여튼 저는 1970년대 뉴질랜드에서 인허가 관련 이런 재미있는 사실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주로 미국에서 활동한 저자가 이런 형편에까지 밝을 만큼 인맥이 넓다는 점에도 주목했습니다.

명연설 명설교 명저술로 유명했던 저자지만, 구수하게 풀어 놓는 경험담이나 유익한 일화에만 치중하지 않고, 특히 11장 같은 데서는 좀 독자 머리에 부담이 느껴질 만큼 강렬한 명제화, 교훈화를 시도합니다. 이런 걸 보니 이 책 자계서 맞구나 싶을 만큼요. 내가 최소한 이 정도는 내 실제 인생에서 다 실천해 보고 쓴맛단맛 다 보고 나서 하는 소리다, 뭐 이런 "어조"가 느껴지게, 결론 파트에서 독자에게 교훈을 압축적으로 정리하는 "포스"가 장난 아닙니다. 대담하게 인생을 산 사람이, 같은 말을 해도 훨씬 강렬한 진정성과 교훈을 담아 "대담하게" 결론을 이렇게 추려낼 수 있는 거겠죠? 내가 내 자신에게 "배짱 좋게" 심층 내면을 향해 다가서고 불필요한 감정의 잔가지, 잔해를 정리해 낼 수 있다면, 그 참된 배짱이 대인 관계에서, 혹은 공적 소통에서도 자연스럽게 제 기능을 합니다. 그릇된 외관에서 비롯한 헛된 욕심을 버리라는 그 깨끗한 가르침이 왜 많은 독자들을 설복했는지 잘 알게 하는 고전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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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공부하는가 - 인생에서 가장 뜨겁게 물어야 할 질문
김진애 지음 / 다산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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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착륙 음모론이 이상하게도 어린 세대 사이에서 인기입니다. 음모론은 본디 귀를 기울일 게 못 됩니다만, 당대인들도 의심 없이 믿었다고 하는 걸 왜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 와서 새삼 의혹의 눈길이 쏠리는지는 의아할 뿐입니다. 이에는 아마, 1980년대 후반 들어 성과가 지지부진하고, 간헐적으로 (그저 실패에 그친 게 아니라) 대형 참사까지 몇 건 발생하기도 했던 게 한몫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실 나사의 이런저런 프로젝트는 성과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게 "달 착륙" 만큼 대중에 임팩트를 주지는 못한 탓도 있죠. 앞으로도 무엇을 성취하건, 인간이 달에 한 발을 내디딘 것만큼 큰 인상을 남긴 사건은 좀처럼 다시 벌어지기 힘들 것입니다.

여튼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역시, 1960년대의 미국 같은 초강대국은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겠죠)이 뭘 주도해서 인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준 이벤트가 재연이 안 되는 상황에서, 다만 성장 과정에서 저 달 착륙에 대해 엄청난 감명을 받고 자란 세대(솔직히, 그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그저 그러려니, 역사적 사실의 하나로 여길 뿐인데)는, 우주에 몸(정신적으로야 그간 인류가 이룬 간접 성과를 통해 얼마든지 침잠시킬 수 있죠)을 보다 가까이 접근해 보려는 꿈을, 국가 단위가 아닌 개인 차원에서 내 것으로 삼아 보려 들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극소수는 이를 (아직은 미미한 단계에서나마)실천에까지 옮겼고, 이런 이들의 노력을 통해 어쩌면 (성장 동력이 모두 소진되어 간다는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세계 경기 재생의 힘찬 모티브 중 하나로 발전할 가능성마저 보입니다. 아마존 창업자이자 현 CEO인 베조스 같은 이의 몸부림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이들이야 또 그런 꿈을 가진다 쳐도, 아무 배경도 없이 그저 동네 아저씨(할아버지?) 같은 분이 이런 야무진 희망을 현실에서 일부나마(일부라고 헐하게 표현하고 말기에는 제법 성과가 중대해 보입니다) 이루었다면, 그건 참 놀랍고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 우에마쓰 쓰토무(이분은 노력이라는 努자를 쓰시는데, 일본에는 쓰토무의 경우 단 한 글자로 이처럼 이름을 짓곤 하더군요. 개인마다 뜻이 통하는 다른 한자들을 두루 적용해 가면서)씨는, 시골 탄광 마을에서 태어나, 간신히 진학(책을 읽어 보면 정말 천신만고 끝의 과정이더군요)에 성공한 후, 어려서부터 키운 꿈 그 원형대로 별반 타협도 없이 자신의 진로를 펴 나갔습니다. 이분도 부친의 철물점을 이어받긴 했으니 가업 계승이 이뤄지긴 한 셈인데, 그게 그저 철물점에 그친 게 아니라 재활용 전자석 기업으로 확장, 재탄생했으니, 부친의 이름을 이보다 더 빛낸 아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하겠습니다.

재활용 전자석 분야의 개척적 기업이라고는 하나, 책에 보면 나오지만 사실상 도심 외곽이나 시골에서 볼 수 있는 작은 공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의 공장에는 대졸자가 단 한 명도 없는데, 사실 기업이라는 게 그렇더군요.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이 직원으로서 필요하지, 학벌이나 심지어 능력 요소조차 그리 긴절한 건 아니더라는 겁니다. 학벌과 능력이 좋아도 조직에서 겉도는 사람은, 회사에 장기적으로 해만 끼칩니다. 하긴 뭐 일도 안 하고 내가 원래는 뭐였네 이런 데서 일할 계제가 아니네 하며 환상에만 빠진(나이까지 많으면서 지하고 나이 차도 몇 살 안 나는 남들더러 어르신 소리는 악착같이 붙이고 다니죠. 그래서 애들 같은 싸구려 패션을 걸치고 다니나 봅니다) 인간보다는, 그래도 인맥이라도 갖췄거나 맡은 업무라도 야무지게 해 내는 사람이 물론 낫기는 합니다만(충성심이야말로 진정, 흔히 볼 수 있는 미덕이 아닙니다).

근데 저는, 뭔가 자기 분야에서 안 될 만한 상황을 극복하고, 남들 보기에 가망 없는 일을 해낸 분일수록, 그분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명언"이 있다는 게 참 신기하더라구요. "안 해 본 사람은, 안 되는 이유만을 남에게 가르쳐 줄 수밖에 없다." 거 참, 맞는 말입니다. 뭐 정주영 창업자의 "이봐, 해봤어?" (해 보기나 하고 그런 소리를 하라는 뜻) 처럼, 기업가 정신은 일단 되든 안 되든 현장에서 부딪혀 보고, 안 되면 안 된 대로 뭔가 교훈을 얻어내기라도 하라는, 대단히 질박한 성격의 것입니다.

반대로, 일단 해 보고 작은 성과라도 얻어낸 사람은, 남한테 "이렇게 하면 되더라"를 가르쳐 줄 만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하면 안 돼"를 말하는 사람과, (아무리 작은 거라도) "이렇게 하면 할 수 있어"를 말하는 사람, 얼마나 타인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의 차이가 큰지를 말입니다. 그냥 말동무를 삼고 싶은 사람이라고 해도,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끌릴 것입니다. 탄광촌에서 로켓을 쏘아 올릴 꿈이라니 얼마나 허황하고 실속도 없이 들립니까. 그러나 순수한 자기만의 열정을 품은 이였기에, 지금 대기업들이 눈독 들일 만한 소소한 특허(개중에는 중대한 것도 보유)를 저리 여럿 따 낸 거죠. 그게 탄광촌에서 불평불만이나 품고 거짓말이나 일삼는 인생이었으면 어디 가능이나 할 법했겠습니까. 인간은 이래서, 진정성 있는 인성의 세팅이 그만큼이나 중요한 겁니다. 근본 없고 가식과 뻘소리만 일삼는 늙은 스토커의 헛발질과는 엄청 큰 차이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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