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흐름을 꿰뚫어보는 금리의 미래
박상현 지음 / 메이트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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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환율을 눈여겨 보라, 어떤 이는 금리가 중요하다 등등 경제 현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각자 중시하는 팩터는 제각기 최우선 순위에 올리는 항목이 다릅니다. 그러나 들어보면 모두 일리가 있는 지적이며, 현명한 투자자(라기보다 거의 모든 경제활동 참여자)는 이 모든 사정을 감안하여 의사를 결정하는 법이지요. 내가 죽고사는 문제를 어디 동전던지기 식으로, 한 가지 변수에 전적으로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경제 이슈는 어디까지나 직접 자기 손으로 머리로 정보를 찾고 그를 통해 신중히 내린 판단이 모든 결정과 해답 도출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루머에 휩쓸려 생돈을 날린 개미라고 해서 일일이 면죄부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불법 파일 공유하다 최초 업로더와 덩달아 쇠고랑을 차는 한심한 인생처럼, 어리석고 못난 판단의 결과는 애도 아니고 성인인 이상 자신이 스스로 책임을 져야 마땅한 법입니다. 하물며 개미 축에 끼지도 못하는 밑바닥 피라미가 그 무지와 지려천박만을 핑계 삼아 무슨 자동 사면을 받을 턱이 있겠습니까. 공부를 하고 어디 끼어도 끼어야 낭패를 안 당할 텐데, 공부를 할 머리가 애초에 안 되니 딴에는 딱하기도 합니다. 하긴 중등 기초 대수학, 함수도 모르는 인간이 IT 전문가를 사칭하는 세상이니 딱히 놀라거나 할 일도 아니긴 합니다만.

저금리 저성장 시대로 접어든지 근 이십 년이 넘어갑니다. 과거에는 하다못해 시중은행 정기예금만 잘 들어두어도 일정 수익이 보장되던 세상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어림도 없습니다. 무지의 영역에 대해 도매금으로 "몰라도 되며 모르고 싶은" 범주에 집어 넣는 밑바닥 인생이 아닌, 정상적인 경제 활동 참여자들은 그래서 "경제 공부"를 합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금리 이슈는, 어디어디가 좋은 조건이라더라 같은 카더라 영역이 아니라, 현재 미국에서 가파르게 오르는 중인 금리의 낌새가 심상치 않으며, 이 징후가 향후 경제의 전 영역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점쳐 보는 유익한 논의입니다. 금리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장차 닥쳐올 후과를 명백히 예고하는 지표이며, 그를 넘어 스스로가 경제 프레임을 시초적으로 형성하는 유력 독립변수이기까지 합니다.

지금 이런 특수 국면(트럼프 행정부가 은근 조장하는 듯한, 호황을 넘어 거품 국면)이 아니라도, 과거 오바마나 부시 행정부에서도 그린스펀이나 버냉키 같은 이가 금리에 대해 어떻게 입을 뗄지 지켜만 보는 풍조가 언제나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를 넘어, 이처럼 심상찮게 오르는 금리가 향후 터져도 크게 터질지 모르는 거품의 징조가 아닌지 걱정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사실 어제만 해도 전월의 미국 무역 수지 현황을 알리는 뉴스가 나오자 다들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어떤 이는 이야말로 미국 가계 수입(revenue)이 늘어나 활발한 소비를 보이는 좋은 징후라고 주장하며, 어떤 이는 상대국 물품에 관세를 부과했는데 오히려 적자 폭이 늘어났다는 게 정상이냐며, 내수가 늘어나지 않고 빚(기본적으로, 세계 기축 통화인 달러가 누리는 이점입니다)에 기대어 대외 소비(import)를 줄일 줄 모르는 미국의 고질적인 악성 체질, 풍조를 거론하며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일단 미국 경제가 건실해지려면 저 비판자의 논지대로 "내수가 늘어나야 정상"인데, 지표상 명백히 그렇지를 못합니다. 이 대목은 누구 입장에서도 반박이 어려운 엄연한 팩트에 속합니다. 다만, 지금은 관세 전쟁의 아직 초입이고 트럼프가 중국산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경고는 그전부터 여러 번 있었으니 가격이 오르기 전 물량을 미리 확보하려는 수요도 있었겠음을 고려는 해야 할 듯합니다. 다음달 정도는 되어야 누가 승자이고 패자인지, 혹은 져도 누가 더 크게 졌는지 윤곽이 드러나겠네요.

저자는 특히 가파른 상승세를 보일 조짐인 현 미국 금리에 대해 깊은우려를 드러냅니다. 요즘 세대들은 2008년의 그 끔찍한 글로벌 경제 붕괴 위기만 기억하겠지만, 1987년 10월에도 느닷 주가가 20%나 폭락하여 미국은 물론 전세계 경제에 암운을 드리운 적이 있습니다. 저 경우는 거품의 붕괴라기보다 주가 하락 헷징 상품이 (말이 씨가 된다고) 진짜 하락을 부채질한 걸로 드러나긴 했습니다만, 여튼 모든 주가 폭락은 시장이 거품(작건 크건 간에)에 대해 내리는 일종의 심판입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많은 이들이 "요즘 미국 증시 너무 강세라서 좋다"며 입을 모으지만, 이게 과연 건실한 생산력이 뒷받침된 결과인지, 그저 트럼프의 펌프질이 빚은 거품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건실한 생산력"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건 "그것이 없을 경우 헛바람을 탄 호황 가면은 반드시 모두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기고야 만다"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하긴 사람이 잘못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지, 어디 얼렁뚱땅 넘어가고 마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겠습니까. 분수를 넘는 욕심과 만용이야말로 죄 중에 가장 큰 죄이며, 분수를 파악하는 과제 자체가 밑바닥에게는 가장 어렵다고나 하겠습니다.

트럼프가 현재 펼치는 정책의 기조랄까 의도는 명백합니다. 세금을 줄여 주고, 규제를 풀고, IT 기업보다는 제조업 쪽에 혜택을 주어 고용을 늘리고 경기를 대폭 띄우겠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연방정부 입장에서 보면 세수가 (단기적으로는) 분명 감소합니다. 과거에도 미국은 오일쇼크가 불러온 스태그플레이션의 악몽(1970년대) 때문에, 폴 볼커 연준 의장 같은 이가 대폭 금리를 올려 일단 과하게 풀린 달러를 대거 회수해 들인 적이 있습니다. 이때 직격탄을 맞았던(당장 대출금리가 십 몇 퍼센트가 동반상승했다고 가정하면 월급쟁이들이 얼마나 힘들어질지 생각해 보세요) 미국 중산층이 심한 고초를 겪기도 했고 당장 경기침체의 수렁에 빠져들기는 했습니다. 책에서 말하는 "금리 상승이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은 이를 두고 이르는 것입니다. 허나 만약, 일시적으로 활력과 동기가 부여되기는 한 미국 제조업이 (아직은 금리가 상승하기 전인) 이 국면에서 성장의 한 발판을 마련하기라도 하면, 좋은 약이 입에 쓰다고 한번 크게 거둬들여진 거품이 제거도 되었겠다 "진짜 실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론적인 강세 달러 요인과 현실적인 달러 약세 요인"이 묘하게 충돌하는 국면에서, 과연 강달러 팩터와 세계 경제 위기의 동반 엄습이라는 과거의 불길한 패턴이 반복될지 다소의 우려를 제기합니다.

한국처럼 규모가 작고 철저히 개방된 데다 대외 의존도가 극단적으로 높은 경제에서, 미국 아니라 중국이 기침 한 번만 해도 즉시 감기가 아닌 폐렴에 걸릴 만한 판에 이런 국제 경제의 심상찮은 조짐에 눈 감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특히 저자는 "기준 금리의 한미 양국 역전 현상"에 주목하라고 합니다. 한국 같은 나라가 미국보다 오히려 금리가 낮다는 게 정상이 아닌데, 사실 이번에도 연율 적용으로 부풀려진 경향이 없지 않다고는 합니다만(이 역시 단순네제곱 요인만 제거한다고 보정이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식의 통계 산정이 수십년 간 일관되게 이어져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현실을 그 나름대로 반영한다고 봐야 합니다) 가뜩이나 성장 저조에 시달리는 한국이, 국내 정책상의 자체 이유가 아닌, 그저 미국 고금리에 수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기준 금리를 올린다면, 그에 따른 파장이 매우 심각하리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예측할 수 있습니다. 설령 피할 수 없는 경제 대재앙이라 해도(그런 일은 물론 없어야겠지만요) 현명한 경제주체가 각자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냉철히 파악하여 자기 방어는 일일이 자신이 해 낸다면 그 피해가 최소화합니다. 오로지 해로운 건, 소문과 루머에 따라 자신도 망치고 남도 망치는 밑바닥 부회뇌동 패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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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과 부당행위계산부인
김종관.전동흔 지음 / 조세통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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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하다보면 이익을 내기는 고사하고 손해를 보는 연도도 얼마든지 지내기 마련입니다. 이때 회사가 본 적자는 "결손금'이란 말로 표현되는데, 번 소득에 대해 일정 세금이 매겨지면 까먹은 재산에 대해서는 국가가 일정 부분을 보전이라도 해 줘야 덜 억울할 듯합니다. 그래서 1999년 즈음에 이사 등 경영진의 과실에 대해 책임 추궁을 거쳐 회사 재산을 보전시켜야 한다는 입법론이 일어날 때, 경영자들은 "아 그런가? 그럼 경영상의 성과에 대해서는 거액의 포상을 법제화해야겠군!"이란 말로 응수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상당수 법인에서 딱히 성과가 없는데도 수시로 경영진 포상(정체불명의)이 이뤄진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좀 지나쳤던 반응으로 생각도 됩니다. 물론 경영 실패시마다 가혹할 만큼 책임이 추궁되거나 손실 보전이 강요된다면 아무도 힘들여 사업을 영위하지 않을 것입니다. 애써 형성된 자본은 비생산적인 금전대여업에나 몰릴 뿐이고, 사회는 고용이 축소되며 유의미한 성장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이 결손금에 대해서도 세법은 일정 부분 배려를 합니다. 대개 결손금은 (소득)공제의 형식으로 세법 절차에 반영이 되는데, 하나는 그전 사업 연도의 실적에까지 반영을 시키는(기업 입장에서는 참 좋죠. 일종의 더 낸 세금을 돌려 받는 격이니) 방식이고, 이후 사업 연도의 소득(아직 발생하지 않은)에 이월하여 공제시켜 주는 방식도 있습니다. 물론 결손금이 크게 발생했을 때(여기에 일정 요건이 추가되어야 하고요)의 일이고, 액수가 적으면 당해 사업 연도의 소득에서 일부가 공제되는 데 그칩니다.

한국에서는 소급 공제를 무한정 확장하면 정부 재정 건전도에 큰 위협이 됩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좋지만, 현재 장사가 잘 안된다고 전에 냈던 세금 좀 돌려달라고들 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게다가 정부는 지네들 쓰려고 세금을 거두는 게 아니라(물론 그런 부분도 있지만), (환급을 요청하는 그 기업을 포함해서) 국민 전체에 필수 불가결한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미 불특정 다수를 위해 이뤄진 지출을 다시 어떻게 되돌리겠습니까. 그럼 정부도 "좋습니다. 대신 예를 들어 정부 소속의 경찰관들이 서초동에 열심히 순찰 도는 덕택에 사장님 댁에 도둑이 안 들었으니, 확률 비례로 사장님이 도둑 안 맞으신 부분 중 일정 액을 다시 거둬 들여야하겠습니다." "아 우리 집 포함해서 일정 블럭은 사설 경비원이 지키거든? 모르시나 보네."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그 경비원 보니까 초소 안에서 한 발짝도 안 나오는 게 보통이더군요. 그럼 그 양반이 커버하는 방범 셰어가 얼마나 될까요? 이런거 저런거 다 감안해서 과학적으로 쿼터로 charge 해 보자 이겁니다." 같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고, 이렇게 따지다 보면 몇 푼 안 되는 돈의 환수와 재환입의 행렬이 끝도 없겠습니다. 그래서 결손금 공제 제도는, 어떤 원칙의 당연한 실현이라기보다 기업 경기 진작을 위한 일종의 정책적 시혜, 배려의 수단이라고 보는 게 더 합당합니다.

이처럼 결손금을 인정하여 세금 부담을 덜어주기도 하지만, 특수관계인과의 사이에서 실제 이뤄지지도 않은 거래를 이뤄졌다고 가장하여 세금을 빼돌리고(하긴 TV를 보고서도 안 봤다고 사기치고 그 푼돈을 아끼자는 추접한 미친 늙은이가 다 있으니 탈세범은 차라리 우아한 예술가라고 봐야겠죠) 기업 재무구조를 부실화하는 예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별 까닭 없이, 명확한 설명도 없이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 주고 회사 재정에 타격을 주는 경우, 이 사람은 (실제로 받지는 않았으나) 그 타인에게 돈을 빌려 주고 마땅히 받아야 할 이자를 받은 걸로 간주하여(단지 세무 신고만 안 했을 뿐), 일정 금액을 익금에 산입(번 것으로 치고 소득액을 늘림)합니다. 이걸 두고 "인정 이자"라고 부릅니다. 이 모두는 이른바 "부당행위계산의 부인"으로서, 한국 등의 세무행정현실이 얼마나 난맥으로 가득했는지, 그간 탈세범들의 잔머리가 어느 정도나 극성을 떨었는지도 능히 짐작이 가능한 증거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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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무엇에 집중하는가 - 성장 기업의 세 가지 조건
신경수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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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성해야 할 과제는 많은데, 역량과 자원, 심지어 시간마저도 어느 기업에게나 제한된 게 현실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주식시장에서 투자를 해 온 베테랑들(루머에 죽고사는 초보자들이 아닌, 몇 대째 고유의 감과 통찰을 길러 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증권맨들이 우리보다 아는 건 더 많아. 그런데 쓸데없는 것까지 많이 알지. 반면 우리는 필요한 것만 알거든." 물론 아는 게 오직 풍문과 헛욕심뿐이라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범죄에까지 가담하게 되는 입만 산 어느 한심한 인생과 비교할 건 아닙니다. 확실히 요즘처럼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세상, 딱 필요한 사항에만 집중하는 미덕은 어느 개인, 어느 기업에나 절실히 요구됩니다.

분명 나를 둘러싼 현실은 변화하고 있다는 걸 아는데, 이런 현실을 올바로 직시하고 그에 적응하기란 정말 어려운 과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북 스마트 유형"입니다. 책에서 보고 배운 것을 절대시하며 인식과 행동화의 알고리즘도 잘 작동하지만 막상 현실의 변수가 급격히 바뀔 때 이에 적시 적응하는 일을 잘 못합니다. 반면 "스트리트 스마트 유형"도 있는데, 물론 현실에서 닳고 닳았기에 잘 발달한 "일머리"를 활용하여 당면한 현실적 과제를 척척 헤쳐나가는 일에 능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겪은 매우 협소한 범위의 체험을 지나치게 일반화, 절대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p59)


요즘은 아무리 후미진(혹은, 종래 그렇게 잘못 인식되었던) 고장이라 해도 각 지역의 특색과 개성에 맞춰 재미난 축제를 꾸려 내어 외부인의 관심을 모으려 애씁니다. 이것이 해당 지역의 경제가 살아남는 길이며, 토착 거주민들 자신에게도 정체성을 새롭게 부각하여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방식입니다. 고 정주영 현대 창업주는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던 말이 "이봐, 해 봤어?"였다고 하죠. 고구마로 유명한 함평의 이석형 전 군수는 "이런 후미진 곳까지 곤충을 보러 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같은 회의적 시각에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 "나비가 없으면 타 지역에서 공수해서 들여오면 되지!" 같은 낙천적인 생각으로 이 프로젝트를 밀어붙였습니다. 이처럼이나 그 시작이 미미했던 함평 나비 축제는 지금 세계적인 행사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습니다.

"out of box"란 기존의 체념적 타성에서 벗어나, 아무도 시도 않던 방법을 과감히 채용하여 기어이 혁신을 이루고 마는 어떤 마인드셋을 가리킵니다.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이 일궈낸 "싱글스데이" 행사, 위에서 예거한 "3무의 고장 함평"이 처음으로 이뤄낸 성과 등은, 모두 이 "out of box" 같은 필사적인 도전 정신이 일궈낸 멋진 돌파와 성공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소비자 자신감 지수" 같은 걸 매 기간마다 산정하고, 심지어 소비자들의 자신감을 제고하기 위해 정부 예산의 일정 부분을 들여 홍보 활동도 벌인다고 합니다. 이런 정책은 물론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진리는, "확신이 부족하면 사람들은 지갑을 잘 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번 2018 피파 월드컵 기간에도 우리는 TV 화면을 통해 경기장 펜스에 둘러쳐진 현대 자동차 광고를 자주 구경했습니다만, 2009년 슈퍼볼 당시 현대는 이런 광고를 즉석에서 론칭했다고 합니다.

"혹시 당신이 직장에서 해고되어 신용 등급이 내려가더라도, 그 전 해에 현대차를 산 고객은 그에 무관하게 차를 반환할 수 있습니다."

참 기발합니다. 마케팅의 핵심, 본질이 어디 있어야 하는지를 잘 예시해 주는 문구,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사람은 누구나 "최악의 사태"를 항상 상정하고 오늘의 선택 내용을 채워 나갑니다. 2009년이면 아직도 "R(리세션의 약자)의 공포"가 미국인들의 마음을 어둡게 짓누를 시절입니다. 슈퍼볼을 구경하러 온 이들 역시 마음이 편해서 비싼 돈 내고 경기장까지 찾아온 건 아니었겠으며, 집에서 이를 TV로 시청하는 이들 역시 "그저 오늘도 내일도 어제의 현상이나 유지하는 날들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거대한 행사를 (예년처럼) 보고 있었을 터입니다. 여태 해 오던 습관에 푹 빠져 있으면 재앙도 자신을 비껴가리라는 안타깝기까지 한 심리도 분명 작용하죠. 헌데, 이런 이들에게 마치 그 마음을 읽었다는 듯 한 줄 띄운 저 광고가 얼마나 큰 효력을 발휘했겠습니까.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제 생각에 우리는 아직도 "상대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는 마케팅이 신기술개발보다 더 우위에 놓인"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이치를 생각하면,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또 집중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는 답이 나오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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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처럼 술술 읽히는 철학 입문
가게야마 가츠히데 지음, 김선숙 옮김 / 성안당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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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 에우클레이데스가 이집트에 터잡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어느 귀한 신분에게 던진 일침이라고 합니다. 허나 우리 모두는 위대한 철학자들에게 사유의 위대한 길을 모두 빚진 셈입니다. 오로지 배운 것 없는 천한 닭머리만이 무엇을 선현에게 얼마나 의존했는지 도통 감을 못 잡고 제멋대로의 망령 든 소리를 떠들기 마련이죠.

이 책은 "왕도 중의 왕도, 철학자 28인을 이 한 권에 담았음"을 선언합니다. 전혀 과언이 아닌 것이, 철학자들의 선견지명과 패러다임 건설이 아니었다면, 그저 평범한 두뇌의 소유자일 뿐인 우리들은 아예 짐승의 단계를 여태 탈피하지 못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기술적 지식의 광범한 축적만으로 운용될 수 없습니다. 지식의 디테일을 관통하는 원리, 이치의 발견이 있어야만 응용과 발전이 가능하고, 나아가 유한한 인생의 덧없음이 부르는 끝없는 권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그야말로 축사 속에 사육되는 졸혼 돼지(그나마 공과금도 납부 못하며 회피의 핑계만 찾아대는, 경제적으로 궁핍하기까지 한)와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들은 대개 중등 교육 과정(중학교+고등학교)에서 서양 철학의 진수와 요약을 공부합니다. 헌데 교과서라는 게 흔히 그렇듯 서술이 딱딱하기 짝이 없고, 자세하지도 않게 간략한 요점만 던져 주듯 선언하고 끝을 내기 일쑤입니다. 이래서야 어디 그 위대한 철학자들이 얼마나, 또 어떻게 위대했는지 올바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심오한 학적 맥락을 이해도 못 하면서, 어렵고 모를 법한 지식 체계에 대한 밑바닥스러운 적개심이 마치 교양의 증명인 양 큰 착각을 하고 추태를 떨지 않으려면, 우리는 예컨대 어느 달인의 요령 넘치는 가이드를 통해서라도 그 철학 체계의 진수에 대해 좀 배워야 합니다. 그런 시도도 사실 지금껏 없지는 않았으나, 아무래도 까다로운 철학 이론 체계를 단 한 권만의 숙독으로 일별하기란 역시 쉽지 않습니다.

이 책은 일단 초심자들에게 쉽게 다가옵니다. 마치 일상에서 친숙한 대화나 나누듯 캐주얼하게 펼쳐지는 말투 속에, 아 그들(위대한 철학자들)이 바로 이 말을 하고자 함이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물론 초심자 레벨에서는 뭘 읽어도 새롭고, 하나하나가 맹인의 개안을 시켜 주는 듯 신선한 충격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 마디를 배우고서 이후 수십 년 동안 지적 자양분 노릇을 해 줄 알짜 명제의 집합 텍스트를 만나기는 그게 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유년 시절에 정말 잘 읽은 책 한 권은 일생을 두고 지혜의 자침 기능을 해 주니 그런 책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윤리와 사상 파트를 특히 어려워하는 중고생들에게, 이 책을 교과서 대신으로 추천해 주면 아마 고난도의 수능 (해당과목) 문항을 푸는 데에도 아주 요긴히 쓸 수 있을 듯합니다.

"신의 힘으로 철학 따위는 엎어 버릴 수 있다고요." 오로지 책 속에만 갇혀서(물론 자발적인 감금입니다만) 신의 명령과 섭리를 탐구했던 토마스 아퀴나스 다운 언명입니다. 물론 신은 개념상 전지전능하므로 철학 아니라 그 어떤 것이든 전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학문(철학 포함)은 신학의 시녀로 불리기도 했던 것(이 책 p132)입니다. 한편으로, 단단히 구축된 (이상적) 철학은 이미 신학과 동급이므로 사실 완전한 섭리를 주재하는 신이라면 (그런) 철학을 엎을 이유가 없겠습니다. 이 언명이 은근 함의하는 결론으로는, 철학이 신학(그리고 종교)에 대해 견제하는 역할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이후 그 쟁쟁한 계몽철학자들이 근대에 어떤 맹렬한 활약을, "철학의 이름으로" 수행했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이들은 과학자이기 이전에 철학자였기에 교회가 지배하던 중세를 전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천한 닭대가리라야 "철학은 뭔지 모르겠고 과학이 최고다"라는, 완전한 자가당착의 헛소리를 떠들 수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무지와 몽매의 신을 엎어버린(p171) 건" 바로 철학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위대한 이유는, 벌써 저 제목에서부터 표방하고 있듯 "과연 보편과 이상은 실존하는가, 아니면 그저 이름만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떠돌 뿐인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작품 속에 잘 형상화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찔한 게, 어쩌면 당대 직계의 사제 관계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서 이처럼이나 첨예하고도 심오한 "입장의 대립"이 태동할 수 있었냐 하는 점입니다. 이후 천 년이 지나도록, 유럽의 철학자들은 두 거인의 대립 지점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셈 아니었습니까.

이 책에도 나오는 이븐 루시드 등 아랍권 학자들의 공적(그리스 황금 고전기의 업적을 잘 보전, 발전시켜 후대에 이어 줌)도, 사실 근본의 문제를 터치하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집대성한 자연과학 중 기술적 부분에만 집중했을 뿐이지요. 그래서 문명 자체가 진화를 이루려면 철학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중국 문명이 그토록 빼어난 기술적 업적(종이,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을 이뤘어도, 결국 한대, 당대, 송대, 명대를 거치면서 내내 사회 구조가 제자리걸음에 그쳤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한 시절을 풍미했었던 중빠 조셉 니담의 이론은 벌써 극복되어 가는 중).

17세기의 영국은 물론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이긴 했지만, 국교회는 가톨릭을 제외한 어느 교파에 대해서도 대개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가톨릭도, 또 그와 첨예하게 맞선 청교도(퓨리턴)들도 타 종파를 용납하지 않는 스탠스였기에, 오직 이들만이 영국의 체제 안에서 배척되기에 이릅니다. 책에서는 이런 영국, 즉 체제 자체를 위협하지만 않으면 전적으로 중립, 관용의 자세로 대하는 열린 사회 분위기에 대해 다른 유럽 사회에서 매우 큰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보았다고 전합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아는 용기와 사용하는 용기"라고 표현하는데, 이야말로 중세의 암흑과 질곡에서 유독 그들(서유럽인들)만이 빠져 나올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지금 이슬람을 한번 보십시오. 또 배타적 민족주의, 국수주의의 누에고치 속에 다시 파고들어가려는 중국인들을 보십시오. 가장 자폐적이고 극성스러운 밑바닥이 "과학"운운하는 것처럼 참담한 코미디가 다시 없습니다.

칸트의 체계란, 사실 철학을 수십 년 전업으로 연구한 학자에게도 어렵습니다. 하긴 어디 어려운 게 그뿐이겠습니까. 그 앞 시기에 활동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철학자들의 이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칸트는 당시(자신의 동시대)에 이뤄어진 모든  자연과학 체계를 자신의 철학 안에 통합하려 들었고, 실제로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 p185 이하에 나오는 대로, 그는 대륙의 합리론과 브리튼의 경험론을 놓고 위대한 "종합"을 이루는 데 깔끔하게 안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감성→오성(인과관계의 분석)→"이들을 정리하는 편집실 같은 장소로서의" 이론이성 등 3단계로 정리합니다. 물론 이 모두는 칸트의 오리지널 업적이지만, 저 "편집실 같은 장소" 같은 표현은 이 저자의 독창적인 설명이고 정리, 해석입니다.

히틀러에게도 (비뚤어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되는 니체의 철학은, 사실 진정한 천재적 사유의 산물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독창적입니다. 칸트나 헤겔처럼 종전의 모든 사유와 업적을 단일 체계로 종합한 업적도 대단하지만, 그야말로 파천황, 평지돌출의 희한한 사유를 독자 철학으로까지 완성한 니체 같은 류의 사고방식은 과연 독일 지성만이 보유한 긍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약자를 미화하는 철학, 종교"는 전세계에서 박해를 받으며 떠돌던 유대교의 개성이었고, 이것이 그리스도교로 그대로 전수되어 "노예 철학"의 완성으로 귀결되었다는 겁니다. 사실 형식화한 로마 가톨릭을 온몸으로 배척한 것도 독일의 루터였는데, 이 니체(역시 독일인인)의 단계에 이르면 아예 기독교 자체를 배격하기에 이른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본래 게르만의 체질에는 애초부터 기독교나 헤브라이즘 요소가 맞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그의 언명 배경에는 이처럼 기독교 자체의 모순이 한계 상황에 이를 만큼 표면한 시대 상황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볼만한 대목은 20세기 이후 들불처럼 대두한 실존 철학을 설명한 후반부입니다. 저자 자신이 이 실존 철학의 핵심 논지에 전적으로 공명하는 분이기에, 마치 만화의 대사처럼 거리낌없이 자유분방하면서도 오히려 핵심을 찌르는 일갈로 해당 조류(철학자별)을, 누구에게나 와 닿는 감성적 표지로 잘 전달합니다. 서양 철학은 비단 철학이라는 단일 분야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의 지향, 지표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각종 담론, 예컨대 슬라보예 지젝이라든가 박노자의 주장이 과연 뭘 말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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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대비 세무대책 - 2004
김진호 지음 / 안진회계법인(조세신보사)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대개 기업의 접대비를 두고 장부 계상 가액 그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취지는 이렇게들 설명합니다. "... 접대비는 자본성 지출이 아니라 소모성 경비이므로, 무한정 이를 경비로 인정하면 기업의 재무구조를 부실 조장할 수 있고 과소비와 향락 풍조를 부추길 우려가 있어 이의 손금 산입 범위를 규제한다...." 그러나 이 외에도 접대비 명목으로 이뤄지는 탈세, 비자금 조성 등을 막기 위한 목적이 매우 큽니다.

일단 기업 입장에서는 분명히 빠져나간 지출인데(물론, 쓰지도 않고 어디 꿍쳐 두었으면서 썼다고 허위로 기재하는 경우도 많죠), 왜 쓴 걸 안 썼다고 "부인"당해야 하는지 억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예를 들면, 사업 소득 말고 기타소득 같은 것도, 설령 간수, 관리를 잘 못해서 (예를 등들어 한 1억원 공돈이 생겼는데) 모조리 탕진하고 수중에 한 푼도 안 남았다 쳐도, 법에 정해진 소득세는 (일단 과세원이 포착된 이상) 납부를 해야 합니다. 소득은 내 손에 장기간 남아 있어서 그 여유를 보고 매겨지는 게 아니라, 일단 거주자가 획득한 이상 그에 대한 일정 부분을 납부할 의무가 원천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법에서 접대비를 특히 한도를 정해 규제하는 건, 이런 쪽에다 가급적이면 지출을 하지 말라는 정책적 목적도 있는 셈입니다. 몇 년 전 수저 논란이 한창 일었습니다만, 고급 룸살롱에서 손님들한테 접대 같은 접대도 하지 않으면서 고액의 수입을 올리는 접대부들을 두고 "룸수저"라는 우스갯소리가 한때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저도 샐러리맨들 뼈빠지게 일해서 고작 매춘부들이나 그 포주들만 좋은 일 시키게 사회 구조가 대단히 잘못 짜여져 있는 게 아닌지 깊은 회의가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건 뭐 누가 쓰기를 강제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남성들 스스로가 의식을 각성해서 그런 쓸데없는 데다 돈이 낭비되지 않게 조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법상의 손금불산입 예시에서는 "기부금처리"라는 항목도 있는데, 업무와 전혀 무관한 데다 지출되는 여러 비용을 그리 일괄합니다. 과거에는 증빙만 갖추면 접대비 지출을 비교적 광범위하게 인정해 왔습니다만 현재는 투명경영, 정경유착 근절이라는 취지에서 이를 철저히 규제해 나갑니다. 사실 우리는 미국이나 서유럽처럼 상식과 규칙에 맞는 거래 관행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품질과 수익 향상, 매출과 무관하게 그저 좋은 장소(?)에서 접대만 잘하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이런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관습은 정말 개탄스러운데, 원산지인 일본에서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며, 부정부패가 판을 친다는 중국도 이만큼이나 썩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접대비 지출이 많으면 많을수록 해당 기업만 손해라는 인식이 하루빨리 정착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중국에서 이런 식으로 공무원 접대하다가 사람만 우습게 보이고 돈은 돈대로 날린 일이 허다합니다.

재미있는 건 접대비의 경우 "발생주의"를 채택합니다. 그래서 실제 지출행위가 뒤에 이뤄졌어도 접대라는 사건 자체가 발생한 시점에서 이를 (회계 사건으로) 인식한다는 겁니다. 거래는 공평하게 이뤄져야 하는데 우리는 유독 친인척 회사, 개인 등 특수관계인과의 불투명한 거래가 자주 이뤄집니다. 서유럽의 경우 그토록 장구한 세월 동안 사업 거래 시스템이 정착하면서도 네포티즘이 비교적 덜 기승을 부렸는데, 유독 우리 동아시아만 혈연 위주의 못된 관행이 뿌리를 내려 탈세와 회계 부정이 마치 취미생활처럼 독버섯처럼 근절되지 못하는게 큰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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