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처럼 술술 읽히는 철학 입문
가게야마 가츠히데 지음, 김선숙 옮김 / 성안당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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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 에우클레이데스가 이집트에 터잡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어느 귀한 신분에게 던진 일침이라고 합니다. 허나 우리 모두는 위대한 철학자들에게 사유의 위대한 길을 모두 빚진 셈입니다. 오로지 배운 것 없는 천한 닭머리만이 무엇을 선현에게 얼마나 의존했는지 도통 감을 못 잡고 제멋대로의 망령 든 소리를 떠들기 마련이죠.

이 책은 "왕도 중의 왕도, 철학자 28인을 이 한 권에 담았음"을 선언합니다. 전혀 과언이 아닌 것이, 철학자들의 선견지명과 패러다임 건설이 아니었다면, 그저 평범한 두뇌의 소유자일 뿐인 우리들은 아예 짐승의 단계를 여태 탈피하지 못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기술적 지식의 광범한 축적만으로 운용될 수 없습니다. 지식의 디테일을 관통하는 원리, 이치의 발견이 있어야만 응용과 발전이 가능하고, 나아가 유한한 인생의 덧없음이 부르는 끝없는 권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그야말로 축사 속에 사육되는 졸혼 돼지(그나마 공과금도 납부 못하며 회피의 핑계만 찾아대는, 경제적으로 궁핍하기까지 한)와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들은 대개 중등 교육 과정(중학교+고등학교)에서 서양 철학의 진수와 요약을 공부합니다. 헌데 교과서라는 게 흔히 그렇듯 서술이 딱딱하기 짝이 없고, 자세하지도 않게 간략한 요점만 던져 주듯 선언하고 끝을 내기 일쑤입니다. 이래서야 어디 그 위대한 철학자들이 얼마나, 또 어떻게 위대했는지 올바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심오한 학적 맥락을 이해도 못 하면서, 어렵고 모를 법한 지식 체계에 대한 밑바닥스러운 적개심이 마치 교양의 증명인 양 큰 착각을 하고 추태를 떨지 않으려면, 우리는 예컨대 어느 달인의 요령 넘치는 가이드를 통해서라도 그 철학 체계의 진수에 대해 좀 배워야 합니다. 그런 시도도 사실 지금껏 없지는 않았으나, 아무래도 까다로운 철학 이론 체계를 단 한 권만의 숙독으로 일별하기란 역시 쉽지 않습니다.

이 책은 일단 초심자들에게 쉽게 다가옵니다. 마치 일상에서 친숙한 대화나 나누듯 캐주얼하게 펼쳐지는 말투 속에, 아 그들(위대한 철학자들)이 바로 이 말을 하고자 함이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물론 초심자 레벨에서는 뭘 읽어도 새롭고, 하나하나가 맹인의 개안을 시켜 주는 듯 신선한 충격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 마디를 배우고서 이후 수십 년 동안 지적 자양분 노릇을 해 줄 알짜 명제의 집합 텍스트를 만나기는 그게 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유년 시절에 정말 잘 읽은 책 한 권은 일생을 두고 지혜의 자침 기능을 해 주니 그런 책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윤리와 사상 파트를 특히 어려워하는 중고생들에게, 이 책을 교과서 대신으로 추천해 주면 아마 고난도의 수능 (해당과목) 문항을 푸는 데에도 아주 요긴히 쓸 수 있을 듯합니다.

"신의 힘으로 철학 따위는 엎어 버릴 수 있다고요." 오로지 책 속에만 갇혀서(물론 자발적인 감금입니다만) 신의 명령과 섭리를 탐구했던 토마스 아퀴나스 다운 언명입니다. 물론 신은 개념상 전지전능하므로 철학 아니라 그 어떤 것이든 전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학문(철학 포함)은 신학의 시녀로 불리기도 했던 것(이 책 p132)입니다. 한편으로, 단단히 구축된 (이상적) 철학은 이미 신학과 동급이므로 사실 완전한 섭리를 주재하는 신이라면 (그런) 철학을 엎을 이유가 없겠습니다. 이 언명이 은근 함의하는 결론으로는, 철학이 신학(그리고 종교)에 대해 견제하는 역할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이후 그 쟁쟁한 계몽철학자들이 근대에 어떤 맹렬한 활약을, "철학의 이름으로" 수행했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이들은 과학자이기 이전에 철학자였기에 교회가 지배하던 중세를 전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천한 닭대가리라야 "철학은 뭔지 모르겠고 과학이 최고다"라는, 완전한 자가당착의 헛소리를 떠들 수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무지와 몽매의 신을 엎어버린(p171) 건" 바로 철학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위대한 이유는, 벌써 저 제목에서부터 표방하고 있듯 "과연 보편과 이상은 실존하는가, 아니면 그저 이름만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떠돌 뿐인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작품 속에 잘 형상화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찔한 게, 어쩌면 당대 직계의 사제 관계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서 이처럼이나 첨예하고도 심오한 "입장의 대립"이 태동할 수 있었냐 하는 점입니다. 이후 천 년이 지나도록, 유럽의 철학자들은 두 거인의 대립 지점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셈 아니었습니까.

이 책에도 나오는 이븐 루시드 등 아랍권 학자들의 공적(그리스 황금 고전기의 업적을 잘 보전, 발전시켜 후대에 이어 줌)도, 사실 근본의 문제를 터치하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집대성한 자연과학 중 기술적 부분에만 집중했을 뿐이지요. 그래서 문명 자체가 진화를 이루려면 철학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중국 문명이 그토록 빼어난 기술적 업적(종이,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을 이뤘어도, 결국 한대, 당대, 송대, 명대를 거치면서 내내 사회 구조가 제자리걸음에 그쳤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한 시절을 풍미했었던 중빠 조셉 니담의 이론은 벌써 극복되어 가는 중).

17세기의 영국은 물론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이긴 했지만, 국교회는 가톨릭을 제외한 어느 교파에 대해서도 대개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가톨릭도, 또 그와 첨예하게 맞선 청교도(퓨리턴)들도 타 종파를 용납하지 않는 스탠스였기에, 오직 이들만이 영국의 체제 안에서 배척되기에 이릅니다. 책에서는 이런 영국, 즉 체제 자체를 위협하지만 않으면 전적으로 중립, 관용의 자세로 대하는 열린 사회 분위기에 대해 다른 유럽 사회에서 매우 큰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보았다고 전합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아는 용기와 사용하는 용기"라고 표현하는데, 이야말로 중세의 암흑과 질곡에서 유독 그들(서유럽인들)만이 빠져 나올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지금 이슬람을 한번 보십시오. 또 배타적 민족주의, 국수주의의 누에고치 속에 다시 파고들어가려는 중국인들을 보십시오. 가장 자폐적이고 극성스러운 밑바닥이 "과학"운운하는 것처럼 참담한 코미디가 다시 없습니다.

칸트의 체계란, 사실 철학을 수십 년 전업으로 연구한 학자에게도 어렵습니다. 하긴 어디 어려운 게 그뿐이겠습니까. 그 앞 시기에 활동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철학자들의 이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칸트는 당시(자신의 동시대)에 이뤄어진 모든  자연과학 체계를 자신의 철학 안에 통합하려 들었고, 실제로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 p185 이하에 나오는 대로, 그는 대륙의 합리론과 브리튼의 경험론을 놓고 위대한 "종합"을 이루는 데 깔끔하게 안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감성→오성(인과관계의 분석)→"이들을 정리하는 편집실 같은 장소로서의" 이론이성 등 3단계로 정리합니다. 물론 이 모두는 칸트의 오리지널 업적이지만, 저 "편집실 같은 장소" 같은 표현은 이 저자의 독창적인 설명이고 정리, 해석입니다.

히틀러에게도 (비뚤어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되는 니체의 철학은, 사실 진정한 천재적 사유의 산물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독창적입니다. 칸트나 헤겔처럼 종전의 모든 사유와 업적을 단일 체계로 종합한 업적도 대단하지만, 그야말로 파천황, 평지돌출의 희한한 사유를 독자 철학으로까지 완성한 니체 같은 류의 사고방식은 과연 독일 지성만이 보유한 긍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약자를 미화하는 철학, 종교"는 전세계에서 박해를 받으며 떠돌던 유대교의 개성이었고, 이것이 그리스도교로 그대로 전수되어 "노예 철학"의 완성으로 귀결되었다는 겁니다. 사실 형식화한 로마 가톨릭을 온몸으로 배척한 것도 독일의 루터였는데, 이 니체(역시 독일인인)의 단계에 이르면 아예 기독교 자체를 배격하기에 이른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본래 게르만의 체질에는 애초부터 기독교나 헤브라이즘 요소가 맞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그의 언명 배경에는 이처럼 기독교 자체의 모순이 한계 상황에 이를 만큼 표면한 시대 상황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볼만한 대목은 20세기 이후 들불처럼 대두한 실존 철학을 설명한 후반부입니다. 저자 자신이 이 실존 철학의 핵심 논지에 전적으로 공명하는 분이기에, 마치 만화의 대사처럼 거리낌없이 자유분방하면서도 오히려 핵심을 찌르는 일갈로 해당 조류(철학자별)을, 누구에게나 와 닿는 감성적 표지로 잘 전달합니다. 서양 철학은 비단 철학이라는 단일 분야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의 지향, 지표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각종 담론, 예컨대 슬라보예 지젝이라든가 박노자의 주장이 과연 뭘 말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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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대비 세무대책 - 2004
김진호 지음 / 안진회계법인(조세신보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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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기업의 접대비를 두고 장부 계상 가액 그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취지는 이렇게들 설명합니다. "... 접대비는 자본성 지출이 아니라 소모성 경비이므로, 무한정 이를 경비로 인정하면 기업의 재무구조를 부실 조장할 수 있고 과소비와 향락 풍조를 부추길 우려가 있어 이의 손금 산입 범위를 규제한다...." 그러나 이 외에도 접대비 명목으로 이뤄지는 탈세, 비자금 조성 등을 막기 위한 목적이 매우 큽니다.

일단 기업 입장에서는 분명히 빠져나간 지출인데(물론, 쓰지도 않고 어디 꿍쳐 두었으면서 썼다고 허위로 기재하는 경우도 많죠), 왜 쓴 걸 안 썼다고 "부인"당해야 하는지 억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예를 들면, 사업 소득 말고 기타소득 같은 것도, 설령 간수, 관리를 잘 못해서 (예를 등들어 한 1억원 공돈이 생겼는데) 모조리 탕진하고 수중에 한 푼도 안 남았다 쳐도, 법에 정해진 소득세는 (일단 과세원이 포착된 이상) 납부를 해야 합니다. 소득은 내 손에 장기간 남아 있어서 그 여유를 보고 매겨지는 게 아니라, 일단 거주자가 획득한 이상 그에 대한 일정 부분을 납부할 의무가 원천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법에서 접대비를 특히 한도를 정해 규제하는 건, 이런 쪽에다 가급적이면 지출을 하지 말라는 정책적 목적도 있는 셈입니다. 몇 년 전 수저 논란이 한창 일었습니다만, 고급 룸살롱에서 손님들한테 접대 같은 접대도 하지 않으면서 고액의 수입을 올리는 접대부들을 두고 "룸수저"라는 우스갯소리가 한때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저도 샐러리맨들 뼈빠지게 일해서 고작 매춘부들이나 그 포주들만 좋은 일 시키게 사회 구조가 대단히 잘못 짜여져 있는 게 아닌지 깊은 회의가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건 뭐 누가 쓰기를 강제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남성들 스스로가 의식을 각성해서 그런 쓸데없는 데다 돈이 낭비되지 않게 조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법상의 손금불산입 예시에서는 "기부금처리"라는 항목도 있는데, 업무와 전혀 무관한 데다 지출되는 여러 비용을 그리 일괄합니다. 과거에는 증빙만 갖추면 접대비 지출을 비교적 광범위하게 인정해 왔습니다만 현재는 투명경영, 정경유착 근절이라는 취지에서 이를 철저히 규제해 나갑니다. 사실 우리는 미국이나 서유럽처럼 상식과 규칙에 맞는 거래 관행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품질과 수익 향상, 매출과 무관하게 그저 좋은 장소(?)에서 접대만 잘하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이런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관습은 정말 개탄스러운데, 원산지인 일본에서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며, 부정부패가 판을 친다는 중국도 이만큼이나 썩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접대비 지출이 많으면 많을수록 해당 기업만 손해라는 인식이 하루빨리 정착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중국에서 이런 식으로 공무원 접대하다가 사람만 우습게 보이고 돈은 돈대로 날린 일이 허다합니다.

재미있는 건 접대비의 경우 "발생주의"를 채택합니다. 그래서 실제 지출행위가 뒤에 이뤄졌어도 접대라는 사건 자체가 발생한 시점에서 이를 (회계 사건으로) 인식한다는 겁니다. 거래는 공평하게 이뤄져야 하는데 우리는 유독 친인척 회사, 개인 등 특수관계인과의 불투명한 거래가 자주 이뤄집니다. 서유럽의 경우 그토록 장구한 세월 동안 사업 거래 시스템이 정착하면서도 네포티즘이 비교적 덜 기승을 부렸는데, 유독 우리 동아시아만 혈연 위주의 못된 관행이 뿌리를 내려 탈세와 회계 부정이 마치 취미생활처럼 독버섯처럼 근절되지 못하는게 큰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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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
마리오 푸조 지음, 이은정 옮김 / 늘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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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영화의 원작소설인데 이제서야 완독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태 책프에 참여하며 이분 작품을 읽기로는, 10기 33주차의 <더 패밀리>가 있었습니다. 같은 작가의 <마지막 대부>도 재미나게 읽었는데  책프 독후감으로는 기록을 남기지 않은 듯합니다. (찾아보니 안 나오네요)

영화가 워낙 작품성이 빼어나면, 영화 내적으로 줄거리를 세세히 알려주지 않아도 남겨진 그 여백을 관객이 스스로 채워 넣는 재미와 맛이 있습니다. 코폴라 감독의 <대부>도 제게는 그랬는데 막상 이 원작 소설을 세세히 읽어 보니 그냥 상상 속에서 즐기는 만도 못했다는 생각이 좀 듭니다. 푸조의 이 작품은 물론 영화화에 앞서 소설로서도 미국 독자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더랬습니다.

영화에서 마이클을 밀착 경호하며 거물 바르지니를 암살하는 알 네리는 스크린에서 경찰로 위장하고 이 일을 완수하는 걸로 나오는데 소설에 설명된 배경으로는 본래부터가 경찰 출신이기도 하다고 그러네요. 그것도 딴에는 젊은 이상주의자였는데 현실과 환경에 크게 배신당하고는 엉뚱하게도 마피아에 가담하게 되었다는 사연입니다. 또 의외로 느껴진 건, 부패한 경찰서장 매클러스키 역시 어떤 선을 결코 넘지 않는 성실한 가장이자 모범적인 경찰로서의 초년생 시절이 있었다는 겁니다. 암살 당시에는 "우둔하고 동작이 꿈떠서 (마이클이) 죽이기에(= 암살하기에) 별 무리 없는" 위인으로 소설 중에는 나오는데, 영화를 보면 그렇지는 않고 나이에 비해 우아하게 늙은 편인데다 버질 솔로초 못지 않게 위협적인 거동이죠.

소설은 다소 씁쓸한 해피엔딩에 가깝습니다. 케이는 결국 집안 분위기에 적응하는 데다, 남편 마이클의 피치 못할 처지를 이해한다는 식으로 운명이 결정되지만, 영화에서는 1편도 뭔가 개운치 않고 안타까운 파멸을 짙게 암시하는데다, 2편에서는 낙태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결국 완전히 갈라섭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에서의 진행이 훨씬 나았다는 생각입니다. 소설 끝에서는 탐 헤이건이 "세상에 마이클이 결코 해치지 못할 세 사람이 있는데, 부인과 두 아드님입니다."라든가, "기관총을 들고 해치러 올 줄 알았다니 부인에 대해 이만저만 실망이 아니네요!"라고 짐짓 화를 내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런 건 영화에 전혀 없습니다. 이 역시 극의 분위기 통일성을 해치므로 영화에서 백 번 잘 뺐다는 생각이 듭니다.

케이가 여기서는 아들 둘을 낳고, 딸 메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아들이 둘이 생기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지는데, 영화에서는 일찍부터 아들 하나 딸 하나로 확실히 방향을 결정짓습니다. 영화에서는 비토 코를레오네를 누가 죽였는지 소니가 바로 눈치로 알아챈다고 하는데, 소설에서는 통화 기록을 유심히 살펴 하필 일이 생길 때만 파울리 가또가 어디론가 공중전화를 건 사실로부터 단서를 잡았다고 합니다. 말은 이쪽이 더 말이 됩니다만 그래도 영화가 더 멋집니다. 영화 2편에서 젊은 비토가 돈 파누치를 죽이는 과정만큼은 소설에 아주 충실하게 잡았습니다. 영화에서는 시뇨르 로베르토가 두려움에 떤 나머지 집세를 더 인하하지만 소설에서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군요. 소설에서는 이 시뇨르 로베르토가 북부 이탈리아인이라서 남부 출신들을 멸시하고, 항만에 내린 이민자들을 트럭으로 실어 인력 시장에 팔아 넘긴다는 사정이 더 추가됩니다.

마이클이 시칠리아로 피신했을 때 타자라는 노인 한 사람을 더 알게 되어 그와 교분을 나누고, 아폴로니아와 진한 첫날밤을 보내는 장면이 더 세밀히 묘사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파울리 가토가 마이클의 학교 동창이라는 점도 더 추가된 게 흥미롭고, 아폴로니아와 자신을 죽이려 든 게 사실은 돈 토마지노 암살 미수로 교묘히 덮어 씌우려 들었다는(그래야 바르지니가 의심을 안 받죠) 사정도 새로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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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 어떻게 일할 것인가 - 기하급수 기업을 만드는 비즈니스 혁신 전략
전성철 외 지음 / 리더스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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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급수 기업". 이 책을 읽으면서 단연 첫눈에 들어왔던 키워드입니다. 영어에는 exponential(ly)라는 형용사(혹은 부사)를 일상어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혹 "그게 원래 어디서 무슨 의미로 쓰던 말인지 아느냐?"고 물으면 대답들을 못합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미국의 중고등학생 수학 수준은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떨어지기 때문이죠. 여튼 완만한 직선형 상승 추세를 보여도 그게 무서운 징조인데, 하물며 추세를 재는(측정하는) 매 단계마다 폭발적인 상승세라면 나중에는 어느 지경까지 갈지를 모릅니다.

어느 현자가 인도의 왕(페르시아의 샤라고 하기도 하고, 아랍의 술탄이라는 버전도 있습니다)에게 포상을 요구하며, "오늘은 1전, 내일은 2전(혹은 곡식 두 알이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모레는 4전,... 하는 식으로 매일 두 배씩 불려 주십시오."라고 하자,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왕은 흔쾌히 수락합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자 왕국의 전 예산을 동원해도 갚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는... (물론 현실에서 진짜 전제군주를 상대로 이런 수작을 벌였다간 무슨 죄목을 뒤집어쓰고 죽을지 모르죠)

사람들은 처음에 전산 장치가 등장했을 때, 혹 연산 능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사람만이 갖는 고유한 판단 능력"의 면에서는 결코 기계가 인간을 능가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책 p28에서는, "바로 그 판단 능력이야말로 인공지능이 인간을 앞서게 될" 진정으로 무서운 장점이 될 것으로 예견합니다. 근거는, 이세돌 9단을 이겨 유명세를 탄 구글의 상품(?) 알파고가, 이제는 기보학습 없이도 스스로의 학습만으로 실력을 발전시켜 바둑 고수를 연전연파할 수 있게 된 사실을 듭니다. 그래서 앞으로 아이들은 기계가 좀처럼 따라하기 힘든 "감수성의 영역, 창의력이 중시되는 영역(p32)이야말로 미래의 직업을 선택하는 데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허나 저자들의 의견이 따르면, 이 역시 언제 기계에 추월당할지 모르는 형편입니다. 그 예로는 구글이 개발한 딥드림, 또 MS와 네덜란드 전문가들이 합작으로 밀고 있는 "넥스트 렘브란트(인공지능의 이름입니다)", <현인강림"이란 소설을 쓴 일본의 어느 인공지능 소설가 등을 듭니다. 이제 "아 그래도 인공지능이 인간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어" 같은 생각은 어설픈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저자들은 말합니다(p33).

그럼 인간들은 속수무책으로 이들 인공지능에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할까요? 첫째로 저자들은 "집단 지성의 힘"을 강조합니다. 무려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 유전학자 프랜시스 골턴은 "황소의 몸무게 알아맞히기 대회"에서 800명의 비전문가 집단이 제출한 수치를 어림해 보니 거의 정답에 근접한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사례가 있다고 합니다(p50). 자동차 제조업에서 디자인의 수월성은, 회사 전체의 명운을 가를 만한 중요 요소입니다. 현기차도 우수한 디자이너를 초빙해 오고서야 비로소 메이저 브랜드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불과 77인의 직원만을 고용한 미국의 "로컬 모터스"는, 처음에 전문가 그룹의 자문을 받아 대략의 아웃라인만 마련한 후, 자사를 좋아하는 커뮤니티 회원들에게 공모를 받아 최종안을 완성합니다. 이렇게 하니 개발 비용도 덜 들 뿐 아니라, 바로 그 커뮤니티 회원들에게 직판로(누구보다 길게 로열할)를 개척할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입니다.

거래비용, 판촉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게 바로 현대 기업의 일차 생존 과제입니다. 스테어리 보드의 창업자 젱차오(曾超. 증초)의 경우, 본인 자신이 전동스케이트보드의 마니아였는데, 보드 아래에 모터와 배터리가 붙어 있는 모습이 너무 싫고 무겁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해커 온라인 모임에 가입하여 보드 안에 더 얇아진 배터리와 모터를 집어넣는 아이디어를 연구, 발전시키고 이를 상용화하기에 이르렀죠. 현재 그는 중국에서 손 꼽는, 성공한 스타트업 경영자 중 한 명입니다(p56).

비전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수익이 안 납니다. 비전을 실제 사업 모델로 바꿀 수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 두고 저자들은 회사의 전 직원들이 신이 나서 참여하여 조직의 실제 생리, 작동 원칙으로 바꿔 나가는 "참여의 법칙"이라고 칭합니다. "참여"의 원동력과 인센티브는 실로 엄청난 것이어서, 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이런 참여의 아잰다가 아예 정부의 모토로까지 승격된 적 있습니다. 1970년대 혁신에 성공했고, 이후 엔고의 시련까지 다 극복해 내며 북미 시장에서 큰 셰어를 점하는 일본 자동차 메이커 도요타 역시, 공장 직원들의 "참여"를 통해 오늘날의 지위를 이뤄낸 것입니다.

일찍이 레이 커즈와일은 <특이점이 온다>라는 저서를 통해 한번 도래한 특이점은 이후 모든 산업상의 장점과 개성을 혼연일체로 엮어 대도약을 향해 질주한다는 주제를 세계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이점이란 개념을 좀 좁게 잡으면 linear가 exponential로 변환되는 바로 그 지점을 일컫는다고도 하겠는데, 저자들은 이를 가리켜 다음의 4단계 프로세스로 요약합니다.

1) 디지털 환경 분석
2) 비즈니스 기회의 포착
3) 비즈니스 모델 설계
4) 실행 프로세스와 체제의 마련 (pp.71~72)

이를 현실화한 좋은 모범으로 책은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방크를 들고 있습니다(p84). 손 회장은 IoT가 제품 시장의 패러다임은 물론, 이를 둘러싼 소비자 대중의 라이프스타일까지 확 바꿔 놓으리라 예견했습니다. 이케아 역시 종전의 DIY 모델편향에서 벗어나(그 자체도 이미 대혁신이라며 칭송의 대상이었건만) 도시 거주자들의 취향 변화를 선도하며 도심한복판에 픽업 매장(한국만 해도 가구 중심 거리가 부심 쪽에 따로 몰린 오랜 구조가 좀처럼 안 바뀝니다)을 늘려가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오랜 동안 불량 짝퉁 이미지를 못 벗던 중국 가전 하이얼은 어느덧 자국 내에서는 업계를 선도하는 주자로 이미지를 변신하는 중입니다. 스타벅스는 외부에서 보기로는 뭐하러 저러나 싶은, 애덤 브로트먼 같은 특수 경력을 지닌 이를 CDO(그 이름도 낯설지만 "사내 디지털 최고 책임자"라고 하는군요)로 영입하여 웹과 모바일 소통 업무를 전담시켰다고 합니다(p101). 화장품 메이커인 로레알에 무슨 디지털 부서가 필요하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이런 회사에 일찍부터 절실히 요구되었고 이미 자리를 굳히기도 한 R&D 부서의 확장판도 겸하여 물리학자, 생물학자, UX(user experience의 약칭입니다) 디자이너 등을 대거 포진시켰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세계 각지에서 불고 있는 혁신의 몸부림입니다.

저자들은 "4차 산업혁명에서 가장 힘든 건 일하는 방법의 혁신"이라고 맣합니다. 아까 서평 저 위에서, 산업 현장 근로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 경영자는 결국 혁신에도 실패한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현장의 목소리에만 끌려다닌다고 장땡은 아닙니다. 대개 무능하고 무기력한 자들이나 "다수의 목소리에 따르는 게 안전하지." 같은 무사안일함에 젖게 마련이며, 이런 강단 없는 기업은 그 잘나가던 과거를 뒤로 하고 결국 다 망했습니다. 상황의 국면을 잘 분별하여, 아 여기서는 이게 아니겠다 싶을 때에는 단호해져야 합니다. 외부에서 전문가를 영입하여 신기술을 공장에 심는 건 차라리 쉽습니다. 진정으로 어려운 과제는, 노동자나 경영인이나 현장의 오래된 관행에 꽉 붙잡혀, 이게 생리고 진리라고 아주 생각이 콱 굳어버린 경우입니다.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래"처럼 현장의 발전을 가로막는 무서운 폐습은 없습니다.

요즘 편의점이나 기타 프랜차이즈의 과다 출점 때문에 자영업자의 권익이 크게 위협받는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는 한 가지 관점에서만 볼 게 아니라, 그 지점을 출점 않으면 결국 타 프랜차이즈에 매출이 모두 넘어갈 수 있으므로 장악을 해야 하느냐(자영업자 입장에서도 같은 CU만 야속한 게 아니라 GS 역시 경쟁자인 건 마찬가지입니다), 아니면 동일 지점의 권익을 고려해서 그냥 포기하느냐의 문제인데 개별 지점의 매출이 악화되면 본점에도 그만큼 손해이고 컴플레인 문제도 엄연히 본사의 손해입니다. 책(p192)에는 청계천에서 스타벅스를 검색하면 십여개가 넘는 매장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런 사정은 뭐 비단 청계천뿐 아니라 저 잠실이나 압구정이나 다 비슷합니다(그래서 약속 장소 잘 찾으려면 정확히 지점명을 알고 나가야). 이를 두고 저자들은 프랜차이즈의 횡포라기보다 해당 브랜드파워의 팩터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긴 출점이 많아 타격 받는 점포라고 소문 나면 아예 가입 신청이 안 이뤄지지 않겠습니까.

저자들은 여전히 GDP 대비 비중이 높은 게 한국에서 제조업이라고 하며(자영업자 등 3차 산업은 매출액보다는 종사자의 "수"입니다), 앞으로 미래를 개척해 나가려면 스마트팩토리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4차 산업혁명을 세계 차원에서 선도해 나가는 곳은 바로 독일인데, 이 독일과 미국이 현재 스마트 팩토리 분야에서 앞서 나가는 중이며, 일본도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저자들이 특히 강조하는 건, 지난 산업화 시대와는 달리 이 스마트팩토리 트렌드는 특히 독일도 미국도 일본식도 아닌, 한국형 패턴에 철저히 현지화해 나가야 성공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하긴 4차 산업 혁명의 정의가 애초에 뭔데 모방으로 일의 추진이 이뤄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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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 유진오 평전 - 헌법기초자
김삼웅 지음 / 채륜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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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 유진오 선생은 현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법학자입니다. 물론 헌법의 최종 문언을 완성하는 데에는 권승렬의 안(案)도 참고되었습니다만 대다수의 한국인들(그나마 나이 드신 분들이지만)은 이 현민 유진오 박사를 헌법의 아버지로 알고들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민법, 형법까지 다 유 박사가 기초한 줄 아는데 그건 아무리 법학의 천재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고요. 어느 나라가 진정으로 독립을 이루느냐 여부는 그 나라가 버젓한 헌법을 갖추고 이를 작동하게 하느냐에 달려 있으므로 이 이름은 진정 큰 울림을 갖습니다.

현민 유진오는 어려서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나 하인들의 수발을 듣고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수재였고 당시 이름난 문사들이 다들 그러했던 것처럼 청년이 되어서는 소설 창작 등에 잠시 한 발을 담그기도 했습니다. 요즘 학생들이 배우는 문학 교과서 등에 안 나오기 때문에(안 나오는 줄로 압니다. 사실 저희가 배우던 교과서에도 안 나왔으니까요) 무슨 유진오 박사가 소설을 썼느냐고 대뜸 되묻는 게 보통의 반응일 겁니다(그 전에, 유진오라는 이름자나 알기나 하면 그나마 형편이 낫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저희 집에 비치되어 있던 <한국문학대계> 전집에 이분의 단편, 즉 이 책 p50 등에서 인용하는 <김 강사와 T 교수>, <창랑정기> 등을 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다 잠시 생각이 나서 그 작품들까지 간만에 들춰 보았는데, 지금 읽어 봐도 엘리트 특유의 담백하고 청아한 기풍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현민 유진오는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고 얼마 안 될 무렵 전국 학생들을 상대로 한 예과 모의 입학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천재였습니다. 이런 면모가 있었기에 그의 이름은 이후 무슨 행동을 해도 사람들 입에 널리 오르내렸고, 당시 수재들이 (정말 취미 삼아서라도 한 번 정도는 관심을 가졌던) 맑시즘에 심취했던 계기를 이곳에서 갖기도 했습니다. 부잣집 자제들의 호사하는 취미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오늘날까지도 맑시즘이 어딘가 대단히 이지적이고 신비한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에는 이런 과거의 트렌드가 끼친 영향이 매우 큽니다. 물론 근본 없는 상것은 심지어 이런 곁다리 사정조차 주워 듣지를 못해서 무슨 시대에 뒤떨어졌다느니 뭐니(정작 뒤떨어진 건 "무조건 노조를 만들어서 해결" 운운하는 경박한 생각의 먼 조상이 어딘지도 감 못 잡는 자신의 자가당착 무지몽매함과 비천한 밑바닥 출신이죠)를 떠드는 구제불능 졸혼 인생이겠습니다.

책에는 <맹자> 離婁上(정확하게는 離婁章句上)에서 인용한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 이 역시 현행 고등학교 국어, 문학 시간에 다들 배우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맹자>의 해당 대목에서 특정 저자의 솜씨로 인용하는 게 아니라 "有孺子歌曰"이란 설명이 앞에 붙어 있습니다. 또, 우리 한국인들이 더 친숙해할 출처로서 굴원의 어부사(두 인물의 생몰 연도, 활동 시기는 비슷합니다)에도 "어부"의 말 자격으로 기록되어 있고 말이죠. 많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춘추시대의 민요 정도로 추정합니다. 아무튼 이 말이 저자 김삼웅 선생에게나 우리 독자들에게 그토록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이후 큰 논란이 되었던 현민의 친일 훼절 관련하여 뭔가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그저 취미삼아일지는 모르나" 공산주의에 잠시 관심을 보였던 현민의 문학적 성향이 잠시 언급되었습니다. 우리가 역시 국문학 시간에 배우곤 했던 개념 중에 "동반 작가"라는 게 있는데, 현민도 이 그룹의 일원으로 자주 거명됩니다. 동반 작가라 함은, 비록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들의 이념에 공명하여 작품을 통해 지지의사를 드러낸 이들을 가리킵니다. 2015년 <녹색평론>(학생들이 주로 "녹평"이라고 약칭하는)에 보면 정태욱의 논문 중에 현민 유진오를 심도 있게 연구한 글이 실렸고, 이 책 역시 그 논문 중 상당 부분을 인용합니다.

"... 맑시즘의 공식 그 간단명료함에 찬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그것이 옳고 그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판단이... "(p87, 또 정태옥의 녹평 논문 재인용). 헌데 이 역시 현민의 정치경제학 이해라는 게 그리 깊은 수준이 못 되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간단명료한 게 그 자체로 찬탄의 대상이 될 수는 없고, 사회과학 이론이라면 현실 설명력이 있어야 무슨 평가의 가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당시만 해도 맑시즘의 예측은 상당 부분이 다 맞아떨어지는 국면이었죠. 물론 현재(또 저 시대의인접 구간 중 슘페터가 설명을 시도한 지점)에는 너무나 많은 시대적 격변이 있었기에, 꼭 맑스의 잘못이 아니라 이미 죽은지 백 삼십 년이 지난 그가 뭘 해명하고 어쩌구 할 판국이 아니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아울러, 진정한 승자는 "혁신"을 강조한 슘페터이기도 하고요. (요즘 경영학은 물론 어느 학문 분야에서도 혁신을 논하지 않는 곳이 과연 어디 있는지를 살핀다면....)

".. 지드가 보기에 소련의 가장 큰 결함은 획일주의, 비개성화, 인간성의 무시였던 것이다... " 참 희한한 게, 기존 체제의 온갖 결함을 통렬히, 통쾌하게 비판하여 집권에 성공하고 전세계 민중과 지식인의 성원을 등에 입은 공산주의 체제가, 이후에는 태세를 싹 바꿔 오히려 비판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유일 가치 선호, 숭배로 치달았다는 사실입니다. 앙드레 지드는 물론 <좁은 문> 등으로 한국에서도 폭 넓은 독자층을 한때 확보했던 프랑스의 대표 작가 중 한 분이죠. 아무튼 이 지드의 <소련 방문기>를 읽고 현민 역시 결정적으로 공산주의를 외면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그 외면의 대상이 "공산주의"에 한정되었으면 좋았을 걸, 이족의 압제 하에 시달리던 민족 전체의 참상이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 국민은... " 시작이 꽤 박력 있고 심오한 정신을 담은 게 이 헌법 전문(9차의 개정을 거쳤지만 여전히 지금도 저 문구 등 포함에서 상당 부분이 그대로입니다)인데, 이 역시 현민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근데 원래 현민이 쓴 어휘는 "국민"이 아니라 "인민"이요, 바로 뒤에 나오는 "3. 1 운동" 역시 "3. 1 혁명"이 원안이었다고 하는군요. 물론 "인민"이란 본디 특정 정치 이념을 담은 용어가 (특히나 현민의 활동기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후대인의 눈으로 보면 역시 진보적 색채가 물씬 배어나는 말임에 틀림없고, "3. 1 운동"을 "혁명"으로 표현한 데에서는 뭐 더 생각하고 말고 할 여지도 없습니다. 1980년대까지도 예컨대 이현희 교수 같은 이(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었으니 당연히 보수 인사입니다)는 "동학 혁명"이라는 용어가 맞다고 주장했으나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책에는 또 조봉암 선생(당시 국회의원 신분)이, "대한"의 "대(大)"는 그저 봉건적 자존비타심의 발상이요, 궁극적으로는 사대주의 표현이다"라고 통렬히 비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p116). 여기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고 리영희 선생의 어느 글을 봐도 "쬐끄만 나라가 무슨 대 자를 붙여 대한민국인가. 이는 대청제국, 중화민국 하는 것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대목이 있습니다.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김삼웅 선생의 책을 보면 이처럼 어떤 부대사정에 대해서도 지식이 늘고, 상황을 그저 뼈대만 앙상하게(이런 건 대부분 진실의 왜곡이며, 밑바닥들이 지네들 머리 아프니까 그저 결론만 요구하는 비천한 심리의 산물 이상이 아닙니다) 추려 놓은 엉터리 책과는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이 책을 보면 1966년 유 박사가 고대 총장직에서 물러나 쉬고 있을 때 민중당에 영입되어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민중당은 윤보선, 장택상, 박순천 등 당시 야당의 거물들이 결집한 정치 결사였으나, 이후 강온파의 분당이 이뤄져 강경파는 신한당을 만들어서 나가고, 남은 온건파 중심 민중당의 대통령 후보였다는 뜻입니다. "단일화"가 무슨 김영삼 김대중 양김씨 시절이나, 문재인 안철수 때에만 유행한 말이 아니라, 벌써 이 무렵에도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에 대항하여 야당 단일 대오를 짜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결국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후보직을 몰아주었기에 우리는 "유진오 후보"가 대선에서 몇 표나 획득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습니다(출마 자체가 결국은 없었으니).

박정희 대통령이 초기에는 경제 건설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국민들의 성원이 좋았으나(1967년 선거에서 윤 후보는 참패했습니다. 4년 전 선거[군사정변 직후]에서는 불과 15만표 차이였지만[당시 인구 수 기준으로도 초 근접전]), 이후 3선 개헌을 추진하는 과정이 상당히 좋지 않았습니다. 여당인 공화당 안에서도 정구영 당 의장 같은 분은 끝까지 반대를 하고 나섰지요. 정치색이 없는 국민들도 "왜 최고 지도자가 말을 바꾸느냐?"를 두고 적잖은 실망을 한 게 엄연한 사실입니다. 어떤 치우친 이념(그나마 이념을 올바로 이해할 능력도 없는)에 찌든 사람들의 획일적인 불평은 곧이들을 게 없겠으나, 이처럼 소박하고 정직한 백성들의 소리에마저 귀를 닫는다면 그런 정치인의 처신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아무튼 이 무렵 민의를 바로 읽었는지 현민은 바로 야당 당수직을 맡아 올곧은 비판을 하며 지식인의 도리를 다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현실적으로 (소위)꿀보직 제의를 마다하고 자청해서 가시밭길을 걸은 이 무렵의 현민이 가장 멋진 행보를 보였던 듯합니다.

삼인출판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회고록 등 여러 책을 낸 곳인데, 딱 그 무렵 이문영 선생의 <겁 많은 자의 용기>라는 책도 여기서 나온 듯합니다. 이무튼 김삼웅 저자는 그 책을 인용하며, 이문영 선생이 "전두환의 국정자문위원을 지낸 자가 고려대학에 빈소를 마련할 수 없다!"며 분연히 저항한 일화를 소개합니다. 말년에 정신이 혼미해져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에도 명확한 인식이 없을 수 있었던 현민의 행적에까지 너무 가혹한 비판의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겠으나, 여튼 이문영 선생의 저런 의기는 정말(그때야말로 남산에서 나와 어디로 끌고 가 고문을 해 댈지 모르던 무서운 시절이죠. 지금이야 아무나 아무 말을 다 해대는 시절이지만)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저런 분이야말로 현민의 진짜 제자라 불릴 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최고의 역사 관련 출판사인 채륜에서 낸, 최고의 평전 저자인 김삼웅 선생의 책은 이번에도 결코 실망스럽지 않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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