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강민호 지음 / 턴어라운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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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잘 팔리는 것은 분명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반면, 안 팔리는 아이템에 대해서는, 성능이나 효과가 뛰어나도 마케팅이 부진해서 시장에서 큰 빛을 못 보고 사장되는 경우도 있겠거니, 동정 섞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 강민호 대표는, "여러분의 상품과 서비스가 잘 안 팔린다면, 그것은 그만큼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고 아주 잘라서 말합니다. 사실 요즘은 회사원이든 자영업자든 어떤 에고로 자신을 보호하려 들지 않고, 잘되면 잘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냉정하게 "주제 파악"을 하는 습관이 다들 들어가는 추세입니다. 그래서 예컨대 강대표 같은 분이 이런 직설적 충고를 해도 "맞는 말씀"이라며 대체로는 수긍을 하는 분위기가 대세입니다. 나쁜 점 안 고치고 계속 자기 합리화만 하려 들면 그 사업체는 평생 그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뀌어야 할 건 (세상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뿐이었다." 미국 영화배우 캐서린 헵번의 유명한 말이죠.

"마케팅의 본질은 진정성에 있다." 아주 나쁜 습관이 든 사람들은 실제보다 부풀려 과장하고, 없는 장점도 앞에 걸고 내세우며, 듣기 좋은 번지르르한 말로 치장하는 작업이 제대로 된 마케팅인 줄 착각합니다. "진정성은 하층민의 속성"이라고 말하는, 단단히 잘못된 어느 하층민의 말도 들은 적 있습니다. 기가 찰 뿐이죠. 영국의 어느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일약 스타로 부상한 폴 포츠라는 이는, 그 특유의 성량과 가창력뿐 아니라, 보잘것없이 살아온 라이프스토리 덕분에 더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반면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배경을 내세운 이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출중한 실력을 뽐내었으나, 그의 이력이 다소 과장된("불우한 환경" 운운) 사실이 드러나고부터 대중의 관심은 급격히 식었습니다. 저자는 여기서, "진정성"이란 요소의 중요도가 얼마나 큰지 잘 드러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 못된 놈일수록, 잘해주는 사람한테 더 기어오르고 속보이는 잔머리를 굴리기 마련이죠.

<히든 싱어>애서 가수 거미보다 더 그녀의 개성을 잘 살려 노래한다는 평을 들을 만큼 뛰어난 소질을 보인 출연자가 있었습니다. 확실히 한국에는 노래 잘하시는 분들이 참 많다는 점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음원을 구매할 때, 거미와 (어쩌면 오리지널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르는) 모창가수의 음원 중 무엇을 사겠습니까?" 질문의 답도, 의도도 명백하며, 오리지널의 아우라란 그만큼이나 무섭다는 걸 이 간단한 질문 하나로 누구나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한편, "과연 그렇겠구나" 하고 바로 독자의 공감을 유도하는 이런 저자의 능력에도 다시 감탄하게 됩니다.

여기서 마케팅의 핵심, 본질이 무엇일지는 어느 정도 답이 나온 셈입니다.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오리지낼리티의 중요성, 또 과장이나 허위가 없는 진정성, 이 둘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대중, 소비자라도 마음에 품고 구매를 원하는 가치임에 틀림 없습니다. 얼마 전 장장 7년을 끌어 온 삼성과 애플의 소송전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소송 초기에 애플은 삼성더러 "우리는 애플의 카피캣이었다"는 한 마디 성명만 발표하면 손해배상금 요구 없이 합의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걸었습니다. 삼성 역시 그 말을 들을 만큼 바보가 아니었기에 소송을 끌어 왔고, 이제 양측은 더 이상 싸움을 계속할 실익이 없어 긴 싸움을 끝낸 것입니다. 애플 역시 그간 삼성이 2인자로서건 뭐건 그 나름의 입지를 시장 속에서 확보했다고 봤기에 현실적인 결단을 내린 셈입니다.

기능이 단 1%만큼이라도 우수하면 그만큼의 대접을 시장에서 받게끔 될까? 저자는 미소한 기술우위는 본원적 우위가 결코 아님을 강조합니다. 경제학 철칙 중 하나인 "효용 체감의 법칙"이란 게 있으며, 두 배가 나아진다고 해도 소비자가 체감하는 바는 결코 두 배의 체감이 못 된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또한, "어디까지나 기술은 모방하기 쉬움"을 지적합니다. 벤치마킹이든 역공학이든 산업스파이의 도용을 통해서든요.

경제학에서 입문자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개념 중 하나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구분"입니다. 공기는 단 몇 초만 결핍되어도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지만, 다이아몬드는 어떤 생리적 편익을 제공하는 바 없어도 천정부지의 가격을 시장에서 형성합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정서적 편익"으로 정리합니다. 가격 싸고 성능 좋은 상품을 외면하고, 그저 명품만 바라봐도 마음이 설레는 건 모두 이 정서적 편익"에 해당합니다. 애플은 영리하게도 자사 제품(기껏해야 가전제품 영역일 뿐인데도)에 이 확고한 이미지를 심어 놓았던 것입니다. 애플의 제품이야 최종소비재라 또 그렇다 치더라도, 1990년대 중반의 앤디 그루브는 일개 중간재(부품)에 불과한 CPU의 가치를 소비자에게 직접 각인시켜, "인텔 인사이드" 로고가 붙은 PC라야 시장에서 안심하고 팔리게끔 만드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했습니다(물론 지금은 타업체의 약진으로 그때와는 시장 상황이 크게 다릅니다. 애초에 부품은, 소비자에게 "환상"을 심어 주기 어려운 존재죠).

이처럼 편익은 다양한 방향으로 형성됩니다. 소비자는 기능-정서-경험-사회 등 여러 요소를 모두 고려하여 효용을 재므로, 성공적인 마케터는 이 모두를 전략에 반영하여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편익이 이런 4요소로 이뤄진다면, 편익을 반드시 밑돌아야 할 "비용"은 어떨까요? "경제, 시간, 신체, 심리"의 4요소를 역시 꼽을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시간과 신체 비용이란, 아무리 좋은 상품, 서비스라 해도 이를 판단, 결정하는 데 너무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면 소비자가 기피하는 경향을 말합니다(신체 비용은 그 반대로, 이케아 가구처럼 체험을 위해 일정 시간 비용은 내[소비자]가 떠맡겠다고 나서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심리적 비용은, 지출하는 편이 훨씬 이익인데도 "이것만은 못 내놓겠는걸"하고 소비자가 끝까지 미련을 갖는 영역을 뜻합니다(반대로, 알고보면 큰 지출인데도 이건 기꺼이 써야 한다며 소비자의 마음을 현혹하는 경우 역시 여기에 속하겠습니다). 마케터가 언제나 염두에 둬야 하는 건, 소비자의 "심리 비용을 낮춰 주기"입니다. 같은 현상을 두고도 말을 이처럼 그럴싸하게 표현하는 일 역시 마케팅의 자질임에 분명합니다.

현상유지 편향(status quo bias)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팔 때에는, 처음부터 모든 옵션을 포함한 가격을 기본으로 제시(디폴트 옵션)하는 방식입니다(p88). 사람은 누구나 제시된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하며, 내게 필요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변화가 생기는 걸 본능적으로 싫어한다는 거죠. 반면, 제로에서 시작하여 하나하나 포함시켜 나간다면, 고객은 자신에게 긴요하지 않은 옵션을 비교적 냉철하게 걸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일즈맨의 경우, 성과급을 지불하기보다, 목표 미달시 애초에 주었던 급여를 뺏는 방식으로 운영하면 더 필사적으로 업무에 매진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구체적 업장의 환경에 따라 차이가 날 것이며, (세일즈맨이 자영업이라곤 하나) 근로 윤리 문제도 제기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예시가 그러하다는 취지겠죠.

아무리 치밀한 마케팅 전략과 모델을 고안해도, 현대의 소비자들은 영리하기 때문에 이른바 체리피커 문제를 피해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예전 잡지의 고가 부록 이슈에서도 드러났듯, 어떤 마케팅은 분명 배보다 배꼽이 더 큰데도 기업들이 무리하게 비용을 지출하기도 합니다. 2011년 당시 3G 무제한 요금제가 이슈가 되었을 때, 모 회사는 "이 문제는 마케팅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다른 2사가 반대할 때 요금제 존치를 주장했습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기업들이 고객 생애 가치, 혹은 브랜드 레버리지 효과를 노려서라고 합니다. 한번 좋은 인상이 남으면, 사람들은 다른 더 좋은 기회를 탐색하는 수고를 아낀 채 현상에 머무르려 듭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된) "현상 유지 편향"과도 관계 있으며, 혹은 "시간 비용" 개념으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모두를 위한 것은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다."
 저자는 현대 마케팅의 요체가 STP, 즉 시장 세분화(segmentation), 타깃 선정, 고객 마음 속의 위치(positioning)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합니다. 주먹보다는 송곳, 송곳보다는 바늘이라는 원칙을 명심하며, 거래보다 "관계", 유행보다는 "기본", 현상보다는 "본질"을 중시할 줄 아는 깊은 통찰과 수양, 내공이 필요합니다. 근본 없고 겉멋만 든 얼치기일수록 이 모든 원칙과 진실에 거스르기 마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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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어의 자기 시험을 위하여 Bridge Book 시리즈 2
쇠얀 키에르케고어 지음, 이창우 옮김 / 샘솟는기쁨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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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한없이 깊은 명상 속에서 자신과 마주할 때 비로소 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자신의 무지 한계 바깥의 것을 범주적으로 적대하며, 현명한 사람은 무지에 직면하여 비로소 겸손을 배우고 (감히) 영원을 응시하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도 극한의 공포와 무력감 끝에 신을 대하는 다른 방법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데, 오래 전부터 한국에서도 널리 읽혀 온 키르케고르(키에르케고어. 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름) 역시 그의 저술 행간 곳곳에 그런 깊은 경지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의 저술들)는 꼭 중등교육 윤리 교과서에서 배워서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한국 독자들이 (믿는 종교에 무관하게, 혹은 무교라도) 교양과 품격 있는 대화를 위해 필독서로 읽혀 왔습니다. <잠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같은 책은 꽤 유명했었으나 근 한 20년 사이 무슨 곡절인지 필독서 범주에서 사라져 버린 듯합니다. 여튼 파스칼의 <팡세>처럼, 그의 청아하면서도 맑고 정직한, 그리고 심오한 고독은 시대를 초월하여 독자들에게 폭 넓은 호응을 얻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그래, 그러나 성경은 원어로 쓰여 있다니까."
이 말은, 성경 한번 꼭 읽어 보라고 권하는 여자친구에게, 남자가 대꾸하는 대목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읽을 생각 없어." 같은 메시지를 에둘러 표현하는 거죠. 원어(헤브류어, 헬라어)를 내가 어떻게 읽느냐며 엄살을 피우고 사실상 거부하는 건데.... 키에르케고르의 시대 덴마크는 물론 신교(新敎)를 받아들인지 꽤 오래 지난 시점이었습니다만 본디 세속적인 이들 국민들은 서서히 교회 다니는 빈도를 늦춰 가고 있었죠. 당연히 넉넉히 세속화한 풍토 속에, 따분한 성경을 뭐하러 읽느냐는 반응이 자연스럽게 나올 만했습니다. 지금은 복지 국가 시스템이 잘 자리잡혀 세계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누리는 그들이지만, 이 책 출간, 그리고 저자의 죽음 십 수 년 후에는, 유럽 열강으로 부상한 프로이센과 전쟁에 휘말려 영토를 잃고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여러 모로 격동을 앞둔 전환기, 많은 방황을 그 국민들이 겪고 있었을 무렵이었겠네요.

이 간단한 (가정 속의) 대화를 보면, 왜 키에르케고르가 시대를 초월하여 세계 곳곳에서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는지 그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끝없이 깊은 사유의 세계를 구축한 인물이지만, 독자들과 대화할 때 한없이 낮은 레벨로 내려와 격의 없고 솔직한 소통이 가능한 특별한 능력까지를 지녔던 것입니다. "당신의 소박하고 속된 고민, 내가 이미 다 이해하고 있다." 성경 읽기 싫고 도덕을 묵상하기 버겁지만, 그래도 이대로는 곤란하겠다 싶은 많은 이들의 고뇌와 망설임, 죄책감, 갈증 등의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 깨끗한 언어로 빚어내었기에, 그의 책은 올 타임 스테디셀러로 우리 곁에 남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운명을 알았다." 몰랐다면 그건 이미 구세주도 아니고 독생자도 뭣도 아닙니다. 지금은 기적을 행하기에 군중들이 몰려 들어 그를 환호하지만, 곧이어 더 강고한 세속 권력이 들이닥쳐 그를 어떤 식으로건 징죄하고 처형하려 들 줄(그리고 이 어리석운 군중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그를 향해 침을 뱉고 조롱하리라는 미래를) 그는 이미 알았습니다. 요나 역시 현명하고 선택받은 이였기에, 그의 운명을 내내 피해다녀 마침내 고래 뱃속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죠. 그저 예언자일 뿐이었던 요나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점에서까지 차이가 났던 것입니다. 그는 매순간 자신의 운명을 명확히 깨닫고 있었으며, 한 순간도 이를 거부할 마음을 품은 적 없습니다.

"그래, 그분은 피할 수도 있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처음 깨달을 무렵 무한한 환희와 선택받았다는 벅참이 느껴진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곧 무거운 책임감, 나아가 세상과의 충돌 때문에 닥쳐올 엄청난 갈등의 예감으로 바뀌며, 이때 선택받은 자는 현명하기에 이 모든 예감이 곧 필연임까지 깨닫습니다. "오,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나의 재능은 곧 십자가이기도 하며, 이미 피할 수도 버릴 수도 없다는 것을 말이죠."

"이 길이 그리스도의 길이며, 이 길은 너무도 좁은 길이다. 이 길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 좁아진다."

역시 지난시절 키에르케고르의 수상록 만큼이나 널리 읽히는 베스트셀러였던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도(제목부터가 "좁은 문"입니다. 영어인 Strait is the Gate로도 유명하고, 불어 원제인 La Porte Étroite로는 말할 필요도 없죠. "좁은 문"이 올바른 번역인데 불어 맛을 살리려고[혹은 문학적 전통 한 자락에 기대어] 영역은 저리 이뤄졌습니다. 마태복음 7장 14절이 출전) 천국에 이르는 험난함을 비유적으로 이른 바 있습니다. 올바른 길은 좁고도 험하나, 또 그 길의 끝에 다다라 본들 결국 죽음을 맞을 뿐이나(필멸의 존재이므로), 이 길을 피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처럼 순명해야 함(그가 모범으로 보인 것처럼)을 그와 그의 독자(즉 우리들)은 마음으로부터 수긍하고 순종합니다.

대체로 인지(人智)가 무지몽매했던 과거에는 도무지 통제가 불가능한 자연, 예측할 수 없이 다가오는 자연 재해 때문에, 그저 간절히 흉을 피하고 길함을 바라는 마음으로 종교를 미신처럼 믿었을 겁니다. 이후 자연과학과 각종 공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구태여 종교에 기대어 화를 피할 필요가 없음을 영악하게 깨달았습니다. 고등 종교와 미개한 미신이 이 지점에서 갈리는 건데, 물질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정신이 산산조각나는 듯한 괴로움과 위기를, 바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겪습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이제 혹한과 혹서(혹서는 좀...ㅋ), 기아와 질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악의와 음모와 사악한 감정 등이 빚는 관계로부터의 질병입니다. 암에 걸리는 이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은 영양이 부족해서, 타고난 유전병의 사슬에서 못 벗어나서가 아니라, 바로 타인이 주는 스트레스를 못 배겨내어서입니다. 그럴 때, 180년 전의 현인 키에르케고르가 권하는 여러 처방이 있습니다. 꼭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해도(솔직한 말로, 종교 믿어서 더 암 걸릴 것 같다는 이들도 많을 겁니다. 어디 교회 안이라고 사람 사이의 질시, 불화, 갈등이 없겠습니까?) 이 책을 읽고 본디 인생이 고해(告海)임을 깨달은 후 묵묵히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청신한 삶의 본령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전이 고전인 건 다 이유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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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99%는 환율이다
백석현 지음 / 메이트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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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환율이 99%이다." 책을 펴 읽으면서 그렇게까지나 될까 생각도 했었으나, 이 잘 쓰여진 책의 앞부분 1%만 읽고도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저자의 설명을 요약하면, 그 나라 경제의 실력, 상태, 건강도가 모두 반영된 게 결국은 환율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처럼 한 나라의 경제가 대외적으로 폐쇄된 경우를 상정한다면 또 모르겠으나, 현대에는 어느 나라건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에 의존하여 경제를 꾸려 나갑니다. 그러니 환율은 세계 시장에서 가장 냉정하고 정확하게 그 나라의 경제 성적표를 매겨 주는 지표이며, 앞으로 이 나라의 경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알려주는 예리한 징조이기도 합니다.

환율이 이처럼 중요하다는 걸 알려준 책 처음의 1%만으로도 중요한 가르침을 얻었지만, 책의 나머지 99%는 유익함과 재미를 동시에 얻어 가며 읽었습니다. 사실 어떤 주제건, 올바른 방향이 제대로 잡히면 그 다음부터는 순풍에 돛을 단 듯 빠른 진도를 나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 속에 일단 올바른 맵이 형성되면, 지식의 살을 붙여 나가기도 무척 쉽습니다. 환율이 거시 경제 이해에 그만큼 중요하다는 올바른 시선이 일단 잡힌 후에는, 지금까지 파편적으로 떠돌던 경제현상에 대한 여러 잡다한 지식(오해 포함)이 바른 체계를 이뤄 나가게 되더군요.

환율은 기본적으로 두 나라 통화 간의 교환 비율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체계가 제로섬 게임, 즉 누구 하나는 이익을 본 만큼 다른 당사자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또 흔히 한국 미디어에서 쓰는 표현, "환율이 절상되었다/절하되었다"는 옳지 않다고 합니다. 환율이 오르고 내리는 데에는 여러 변수가 개입하는데, 마치 단일한 의지가 일괄적으로 무엇을 올렸다 내렸다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 표현도 소개되는데 REVALUE/DEVALUE 등은 현 경제 체제에서 쓸 일이 많이 않을 듯합니다. 시장이 하는 일은 인위적 조작 같은 게 아니라 일일이 통제할 수 없는 많은 방향의 힘들이 끼어든 결과이기 때문이죠.(뿐 아니라, 절상, 절하가 문자 그대로의 뜻이라면, 이 책 p18d에 나오는 대로 그 나라가 아마도 환율 조작의 혐의를 쓸 가능성마저 있습니다. 잘 되지도 않지만)

어느 나라의 통화나 "지불 수단"으로서의 기능 외에 "가치 저장" 노릇을 따로 합니다. 그러나 세계의 기축 통화인 달러에 비하면 이런 역할은 상대적으로 아주 미미할 뿐입니다. 저자는 "달러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그 가치 저장 수단"이라고 평하는데, 세계 경제 주체 어느 누구도 달러를 그저 한 나라의 통화 정도로 여기지 않고, 비상시에 대비한 특별한 자산으로 간주합니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는 초강대국 미국의 위신을 급격히 떨어뜨리고, 패권 교체의 기회까지 유발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세계 각국은 미국 달러를 (여전히) 대량 보유하는 선택을 했고, 중국 위안화를 마구 서둘러 사들이는 액션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한국도 마찬가지라서, 앞으로 세계에불확실성이 거친다 싶을 때 일시적으로 금값이 오르긴 했으나, 조선족 거주지로 몰려가 "장차 세계의 패권국은 중국이 될 터이니 위안화 꿍쳐 둔 것 좀 주세요! 다 살 테니!"라고 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지요. 시장의 심판은 본시 이처럼 냉정한 법입니다. 축구 경기와 다른 점은, 난다긴다 하는 축구 전문가, 도박사들도 결과 예측에 실패하여 돈을 날리기도 하지만, 시장의 "도박사"들은 그저 시장과 세상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판지을 뿐이라는 겁니다(전쟁이 나서 기존 판도가 무력, 군사력에 의해 바뀌는 경우 제외. 심지어 그런 경우에도, 시장과 환율은 [혹 가동을 한다면] 전쟁의 성패를 앞서 예견할 수 있을 겁니다).

달러화는 세계 외환 시장의 흐름도 좌우할 만큼 영향력이 강합니다. 저자는 흥미로운 말씀을 하는 게, 달러/원 환율의 결정에서 달러와 원이 비슷한 비중으로 (마치 상품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어떤 물건의 가격을 결정할 때 같은 만큼 작용을 하듯) 결과를 만들 듯해도(사실, 그런 상식에 의존하는 이들도 별로 없을 듯합니다), 실제로는 압도적으로 달러의 비중이 크다고 합니다(당연하죠). 달러는 원화뿐 아니라, 비슷한 시점에서 다른 통화와 엮여 만드는 환율 쌍(雙) 속에서도 대개 같은 방향으로 동인을 만들 만큼 그 영향이 강합니다.

뉴스를 보시면 원달러, 원엔, 원유로 등은 다른 방향으로 각개약진해도(엔은 오르는데 달러는 내린다든가), 달러가 묶인 곳은 거의 같은 방향으로 형성되는 걸 흔히 보는 게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달러를 가치 저장 수단으로(지금 당장 한국에 전쟁이라도 나서[그런 일이 절대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외국 통화를 챙겨야 한다면 과연 뭘 손에 넣으려 들지 자신의 심리를 살펴 보면 뻔합니다. 당연히 답은 달러입니다) 간주하기 때문에, 외환 시장의 움직임이 이렇게 가는 겁니다.

세계 경제 주제 관련 어느 대중서에서도 다루는 게 "트리핀의 딜레마"입니다. 쉽게말해, 국제기축통화 구실을 하려면 부지런히 달러를 찍어야 하는데, 이렇게 무한정 하다 보면 가치가 떨어져 결국 기축 통화 자격에 지장이 온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적게 찍거나 회수하면 국제 통화 노릇을 또 원활히 못하게 되고요. 이는 그러나 미국에게만 불리한 게임은 아니며, 달러화를 많이 보유한 나라는 미국이 강할 때 덩달아 이익을 누리게 되나, 미국이 약해지면 자신이 보유한 달러의 가치도 같이 떨어지므로 결국 손익계산서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셈도 됩니다.

저자는 1990년 통독 직후 통일 비용 지출로 거의 파산 상태까지 갔던 독일이 지금처럼 초호황을 누리는 비결은, 단연 유로화의 도입 덕분이라고 합니다. 전 유럽이 같은 통화를 쓰니 이 권역 안에 별 제약 없이 독일 물건을 싼 가격에 수출할 수 있고, 또 원체 독일의 상품이 경쟁력이 강하다 보니 유로존 곳곳에 잘 침투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과 미국(그 외에도 여러 나라들)이 벌이는 자유무역협정 시스템만 해도 완전한 자유무역이라 보기엔 한계가 뚜렷하고, 얼마 전에 봤듯이 한 나라가 불만이 있으면 자유로 탈퇴할 수 있는 등 문제가 큽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강력한, 단일 통화 도입이 (FTA 등보다도) 십 년 앞서 이뤄졌으니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책 맨앞에, "환율은 제로섬 게임이다"라는 저자의 말이 있었던 걸 떠올려 보십시오. 환율 문제를 무려 "단일통화"라는 수단으로 돌파했으나, 유로존 각국이 아예 단일 재정 - 단일 정부로 통합되지 않는 이상에는, 독일이 이익을 보면 다른 나라는 손해를 본다는 뜻도 됩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유로존이 독일에 조금씩 보조금을 지불하는 셈"이라 요약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독일은 강한 유로, 더 통합된 EU를 지향할 것인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독일은 이제부터 유로존의 다른 국가들에 더 많은 걸 나눠줘야만 할 것입니다. 이때, 지금까지 다른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독일 안에서도, 이익보다는 손해를 보는 계층이 늘어납니다(국가 전체로는 이익이라고 해도). 저자는 만약 메르켈 현 총리 이후 그만한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가 다시 나오지 않는다면, 독일은 자국 국민을 더 우선 달래기 위해(여태 거둔 혜택을 타국보다는 자국 국민에게 먼저 나눠 주기 위해) 지금까지와는 정반대로 EU를 먼저 깨고 나올 수도 있다고 내다봅니다. 상황이 바뀌면 전략도 바뀌는 건 너무도 당연하고, 저자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p141에 보면 "... 한국에서 기준 금리를 인상하면 주식 시장에서 자본 유출 요인이 채권 시장에서 자본 유입 요인보다 강하게 작용하여 오히려 원화 약세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경제를 이해할 때 가장 난감한 점은, A라는 사건(원인, 요인)이 반드시 B라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anti-B, 정반대 방향으로 튀기도 한다는 겁니다. 한국은행에서 기준 금리를 올리면, 이자율이 유리하니 1) 해외 자금이 한국의 채권 시장에 몰려 듭니다. 그러면 다들 원화를 가지려 하니 원화는 강세를 띨(가치가 올라갈) 수 있죠. 그런데 본디 금리가 오르면 주식시장의 매력이 떨어지고, 특정 국가에서 주가가 대체로 떨어진다 싶으면 외국인 자본은 2) 주식과 원화를 동시에 팔아치울 겁니다. 이러면 이건 원화 가치가 떨어지는 요인이 됩니다.

1)과 2), 두 반대 방향의 힘 중 무엇이 더 강하겠습니까? 답은 아무도 모릅니다. 일단 외국인이 보유한 주식 가치 볼륨이, 채권의 그것보다 거의 여섯 배 가까이 크기 때문에, 2)의 힘이 더 크므로 원화는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 그럴 수 있습니다" 정도로 확신의 강도를 약화시킵니다. 이유는, 이 역시 몇 가지 변수만 고려한 지극히 단순한 모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사가 매우 복잡하게 돌아가는데, 몇 가지 단순한 이치만 머리에 넣어 두고 그대로 되기만을 기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태도가 또 없습니다.

내가 A라는 여자한테 잘해준다고 치죠. 이런 멋진 매너가 소문 나서, 앞으로 공동체 내 다른 여성 모두에게 두루 인기가 높아질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정반대 역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이런 잔머리 굴리는 전략적 태도가 A에게건, 혹은 이를 객관적으로 지켜 보는 다른 여성에게건 티가 나서, 이 남자가 가볍다고, 딴 속셈이 있다고 소문이라도 확 나면, 이런 tactics는 안 하느니만도 못한 결과가 날 수 있습니다. 간단한 애정사가 돌아가는 이치도 이렇거니와, 훨씬 더 복잡한 다양한 변수들의 개입으로 인해 작동하는 시장 경제 체제에서, 각주구검, 수주대토, 교주고슬만큼 어리석은 대응 방안이 또 없습니다. 경쟁력을 키우려면 얄팍한 밑천으로 피우는 잔재주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본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짓도 안 벌여도 여자는 이런 기본 실력이 탄탄한 남자한테, 그저 호기심 때문에라도 저절로 접근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화가 절상되면 무역에 불리하게만 작용하여 손해인가 보다 여기기 쉽습니다. 실제로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의 현실에 대부분 맞는 이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역으로, 강세를 띤 원화로 더 많은 해외 자산을 사들일 수 있다는 점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플라자 합의에서 일본이 서방 국가들의 압력에 굴복해 탈탈 탈려 오늘의 "잃어버린 OO년"을 불러왔다고만 생각하지만, 강해진 엔화를 기반으로 일본 역시 얼마든지 큰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그들이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해 빚은, 자초한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과연, 경제의 99%가 환율로 다 설명이 될까? 우리는 흔히 실물 섹터의 중요성만 생각하고, 그의 그림자에 불과한 자본 분야의 비중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으니까) 간과하기 일쑤입니다. p136의 "원포인트 레슨"을 보면, 무역에 수반되는 외환 거래는, 순수 외환거래로만 이뤄지는 물량에 비해, 고작, 고작 1/40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중국이 기축 통화국이 되기 위해, 예컨대 쑹홍빙의 <화폐 전쟁>에 나오듯(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은, 금 등(특히 은)을 과거처럼 본위로 삼는 새 외환 제도가 필요하다고 나오는 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무역으로 백날 돈을 벌어봐야, 현재 미국이 장악하는 자본 시스템에 새발의 피도 안 되는 도전에 불과함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참고로 저 개인적으로 지금 쑹홍빙이 간만에 낸 후편 새책 읽는 중이니 기대해 주세용)

이 책은 환율이 돌아가는 이치도 잘 설명하지만, 우리가 지금 뉴스를 보며 대체 왜 저러는지 고개가 갸웃해지는 여러 현상에 대해, 아주 직관적인 답을 내어놓습니다(그러면서도 신중합니다). 벌써 십 년 전, 이십 년 전부터 세계 패권을 미국에게서 뺏어온다는 중국은 왜 십 년 가까이 더 나가지도 못하고 제자리걸음일까요? 요즘 인터넷에 보면 "십 년 전부터 중국 망한다고들 했지만 이처럼 굳건하다"고 하는 댓글이 많은데, 어설픈 물타기입니다. 왜 중국의 성장이, 애초 떠들었던 대로 파죽지세가 아니고 오히려 신창타이니 뭐니 하며 구차한 변명이나 내놓는지를 먼저 봐야 합니다. 십년 전부터 이뤄진다던 패권은 어딜가고 고작 "아직 안 망했다"는 게 전부입니까? 그간 궁금하던 사항이 책에 시원하게 잘 해명되어 있어 읽고 난 기분이 너무도 가뿐합니다. 별 열 개도 아깝지 않네요. 앞으로 나오는 대중 경제서들이 좀 본받아야 할 내공이고 포맷입니다. 이렇게 후련하고 막힘 없는 책은 근래 처음 읽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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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더 나은 삶을 꿈꾸는 당신에게
로먼 크르즈나릭 지음, 강혜정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역사가 E H Carr는, 역사를 두고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요약한 적 있습니다. 그의 말 그대로, 역사는 과연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이며, 역사가 과거에만 묶여 있을 시 이는 참된 역사일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가 사는 현재와 끊임 없이 대화를 나누고, 그를 통해 우리에게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로먼 크로즈나릭 교수님은 좀 다른 면에서 저 유명한 말을 재해석합니다. 역사가 "현재"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매개를 통해 우리와 대화하는 게 아니라, 중간에 끼는 이 없이, 다이렉트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는 겁니다. 그럴 수도 있을까? 사실 저자의 모국인 영국 아닌 프랑스에서는 이미 "아날 학파"가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 거대 정치사나 형이상의 의미 부여가 아닌, "소소한 일상으로 이뤄진 역사"에 대해 집중 탐구를 시작한 적 있습니다. 그들과 이 저자가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역사적 사건(거대한 맥락의)과 일상사(의 메시지)를 애써 구별하지 않고, "당신들, 바쁜 현대인들은 왜 그렇게 무의미한 관념과 선입견에 파묻혀 인생의 소중한 의미를 잊고 사는가?"에 대해 정면으로 교훈을 추출하여 우리에게 건넨다는 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요? 역사책이나 그 역사책에 등장하는 철학자, 현인들은, 시대가 많이 흘러 다분히 이해가 어렵게 된 언어로 표현했었다뿐, 실제로는 매우 명쾌하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혹은, 여전히 어려운 관념이었으나 저자 크로즈나릭 교수님이 이 책에서 비로소 쉽게 풀어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개념은 물론 우리들이 고교 과정 "윤리와 사상" 등에서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 등의 구분으로 배우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개념사항들을 넘어, 사람이 사람에게 갖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공감, 순수한 호감, 도와 주고 싶은 마음, 연대 의식 같은 게 우리 역사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알려 줍니다. 어찌보면, 그런 순수한 가치를 담지 못하는 역사는 벌써 역사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악할까요, 아님 그래도 선하게 바뀔 여지가 있기는 한, 척박하게 버려진 땅 같은 걸까요? 저자는 p100에서 일단 비관적인 답을 내어놓습니다. 2차 대전 당시의 아우슈비츠, 십자군 전쟁, 식민지 개척 전쟁, 현대의 이기적이고 약탈적인 기업들이 저지르는 환경 오염... 인간이 악하다는 증거는 끝도 없습니다. 저자는 나아가 "타인을 해치는 비상한 능력을 지녔으며, 불의를 보고도 수동적인 태도로 수수방관하는 능력" 역시 인간이 탁월하다고 비판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봐도 부끄럽지만 타당한 지적이며, 우리 인류의 미래에 대해 암울한 생각을 비껴갈 수 없게 합니다. 이런 관점의 대표자로 책에서는 토마스 홉스 같은 이를 들며, 우리 동양권의 독자들이 잘 아는 논자로는 순자 같은 이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불길하게만 세상과 인간을 볼 일은 아닙니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인간 본성과 인간사에서 그와 반대되는 희망적인 불씨에 주목한 인물도 있으며, 그 대표격으로 경제학의 창시자인 애덤 스미스를 꼽습니다. 애덤 스미스가 직접 쓴 표현은 아니지만 저자는 그를 가리켜 인간을 "호모 엠파티쿠스"로 본 몇 안 되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스미스를 경제학 개조로만 알지만, 그의 시대에는 도덕철학이라는 게 지식인, 석학의 필수 논의 과제였으므로 그의 정력과 시간, 재능도 주로 이쪽에 쏟아졌던 게 맞습니다. 경제 관련 논변, 연구는 오히려 가외의 취미 비슷한 것이었죠.  

저자는 이어 18~19세에도 상당수의 백인들이 노예제 폐지를 입 모아 주장했으며 이것이 바로 타인의 이유 없는 불행에 눈감지 않는 공감의 징표라고 말합니다(p122). 이런 공감의 목소리, 행동, 협력이 모이고 모여 변화를 이끌어내며 역사의 근본적인 흐름을 바꾼다는 취지입니다. 윌리엄 월버포 같은 당시 영국의 정치가가 실제 행동으로 보여 준 노력은 감동적입니다. 미국의 토머스 클럭슨 같은 분의 인도주의적 행적은 또 어떻습니까. 이분, 또 스토 부인 같은 사람들은 펜으로도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노예제의 비참한 실태를 알리고 고발했는데 이 책에도 얼마나 잔혹하게 노예들에 대해 태형이 이뤄졌는지에 대한 기록 인용이 있습니다. 

퀘이커 교도는 한때 미국에서 소수파 이단으로 멸시, 탄압받았습니다. "퀘이커"라는 말 자체가 비칭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이 한때 멸칭이었던 프로테스탄트에 자랑스럽고 적극적인 아이덴티티를 새로 정립한 것처럼, 퀘이커 교도들 역시 "그래! 우리는 퀘이커다!"를 선언하고 오히려 주류 기독교인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사회 문제와 모순에 대해 해결의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p222에서는 존 울먼이라는 운동가를 소개하는데, 소신과 지조 굳은 한 인간이 세상을 어느 정도나 크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 주는 모범적인 예시입니다. 18세기 중반인 울먼의 시대에도 영국에서 아직도 인클로저 운동이 진행 중이라는 말을 듣고 울먼은 대서양을 건너기까지 합니다. 행동을 하지 않고서는 몸이 근질거려 못 견디는, 살아 움직이는 양심의 표본입니다.    

우리는 행운의 숫자를 7로 여기지만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5에다가 세상의 비밀과 이치를 모두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자연계를 구성하는 요소도 다섯 개요, 인간의 (외부) 감각도 시, 청, 촉, 후, 미 다섯 개입니다. 그는 이런 전제 아래에서 인간에게 내부 감각이라는 게 있다는 주장을 해부학적으로 뒷받침하려 했는데, 근대에 들어 이 주장은 가차없이 버려졌습니다(하지만 현대 들어 뇌신경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런 황당해 보이는 학설도 어떻게 재조명이 이뤄질지 모릅니다). 

특히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은 감각 세계와 정신 사이에 날카로운 선을 그었다"고 평가된다고 합니다(p241). 이 해석이 하도 근사하게 보여서 후주(p494)와 참고문헌 목록(p474)을 찾아 보니, 콘스탄스 클래슨이 36세에 썼던 책이 그 출처라고 나오네요.  

서유럽 역사에서 부러운 건, 온갖 역경을 헤치고 먼 거리로 탐험을 떠나 기어이 (그들 입장에서) 발견을 해 내고 마는 모종의 용기입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에도, 막부에서 남만인(이베리아 출신), 홍모인(네덜란드인) 등을 폄하하자 "그래도 그 먼 거거에서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보통내기들이 아니"라며 감탄하는 장면이 있죠. 19세기 탐험가 메리 킹슬리는 첫째 정규 교육을 전혀 못 받았고 둘째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가득했던 시절 대담하게도 아프리카로 떠나 많은 업적을 이뤄냈고 현지인들에 대해 동조적이고 호의적인 평가를 기록으로 남긴 점도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반면 동시대인이라 볼 수 있는 찰스 다윈의 글은 대단히 심각한 편견을 드러냅니다. 

개개 국민을 농노의 위치에서 끌어올리는 데에는 국민교육의 실시가 큰 몫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으며, 인종주의와 증오를 조장한 면 작지 않고, 국경 밖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대해 냉혹해지거나 오히려 적극 가담케 하는 기능도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결과 두 차례에 걸쳐 큰 규모의 전쟁이 벌어졌고 휴머니티 가치 자체가 훼손되었습니다. 이런 불의와 부도덕,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감과 연대의식 회복이 필수이며 우리는 그런 목소리와 교훈을 다름아닌 역사를 통해 실감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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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법인세법 - 제2판
노현섭.김영화 지음 / 피앤씨미디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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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개인 소득세를 내고, 법인은 법인세를 냅니다. 법인은 법(종류 불문)에 의해 "인(人)"으로 여겨지는 단위를 말합니다. 자연인이 사람으로 인정받는 데에는 출생 신고 외에 특별한 절차가 필요 없지만, 법인은 설립의 절차가 따로 요구됩니다. 그래서 법인세를 실제 내기도 하고 법인 해산 판결도 내려지지만 이런 법인이 존재하는 건지, 아니면 있지는 않으나 있다고 가정하고 사회 생활과 제도의 편의를 도모할 뿐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이미 법인세를 냈는데 또 개인(주주 등)에게 소득세를 부과하는 건 이중과세라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법인 실재설의 경우, 엄연히 법인은 자연인과 구별되는 실재 단위이므로 이런 과세 정책이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법인 의제설은 반대로 이중과세의 부당함을 지적합니다.

"법인세란 그저 조세의 편의를 위한 제도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라 해도, 반드시 후자의 입장에 서는 건 아닙니다. 양설의 대립 여부를 떠나, 법인세 제도를 마련해서 기업 단위에서 먼저 세금을 걷는 건 조세 당국 입장에서 매우 편하기는 합니다. 이 때문에, 현대 학계에서 실재/의제의 대립은 대부분 무의미하다고 보며, 법인의 존재는 조세 징수의 편익에도 큰 이유가 있다는 제3의 입장이 너른 지지를 받습니다.

어떤 학자분(한국에서는 김현동 교수 등)은 "법인이라는 길목"에서 일단 조세를 거두어들여야, 수없이 복잡하게 꼬여 있는 개인 소유 관계의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지분이나 소유권 관계가 투명하지 않은 것은 대부분 탈세를 목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걸 일일이 세무 당국에서 추적한다면 막대한 인적 자원, 경비가 소요될 터입니다.

한국에서는 그로스업 방식으로 이중과세 논란을 해결합니다. 일단 주주 소득에다, 법인세 단계에서 납부했던 금액을 도로 더한다는 게 중요합니다(실제로 주주가 받은 돈은 법인세 납부 후 줄어든 배당액인데도요). 이렇게 해서 일단 소득세를 계산한 후, 세액 공제 방식으로 법인세 납부 부분만큼을 빼 줍니다. 앞서 세액 표준 계산시 (받지도 않았는데) 합쳐진 돈보다, 이처럼 세액 공제 방식으로 덜어지는 돈이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로 소득공제보다는 세액 공제가 유리하다는 점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그럼 그로스업은 왜 해 주느냐? 나중에 세액 공제를 해 줄텐데 애초에 법인세 납부 후 금액이 표준이 된다면 그야말로 이중 공제를 해 주는 셈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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