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해석학 첫걸음
허민 지음 / 경문사(경문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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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부정적분과 정적분은 사실 개념상 배타적이라거나 병렬 관계에 놓일 것은 아닙니다. 부정적분은 "일종의 공식"이고, 정적분은 그 공식에다가 숫자를 대입한 값입니다. 아주 거칠게 말하면 부정적분은 넓이는 구하는 식이고, 정적분은 그 식에다가 숫자를 대입해서 실제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넓이를 구해 놓은 구체적 결과입니다. 이 맥락에서 영어의 indefinite와 definite는 면적의 수치가 구체적으로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의 차이밖에 없습니다. 우리말(한자어)의 "부정(不定)"과 "정"의 사용례와는 너무 달라서 가벼운 혼란이 오는 것뿐입니다.

"넓이'에는 음(陰. 마이너스)의 값이 있을 수 없으므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마이너스 값은 일일이 플러스로 바꿔 준 후 그 총합을 구합니다. 중학교 들어가면 "절댓값"의 개념을 배우는데 학생들이 절댓값의 개념은 어려워해도 저 앞의 경우처럼 "넓이에는 마이너스가 없다" 같은 이치는 쉽게 받아들입니다. 사실 절댓값도 이런 구체적 상황으로부터 일반화를 시켜 도출된 개념이므로, 아이들에게 이해를 시키려면 이런 예를 들어 주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정적분은 "넓이'라고 거칠게 정의내렸으나, 넓이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게 정적분에서는 x축 밑으로 내려간 곡선 부분은 (-) 값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래서 어느 책에서건, "반드시 f(x)≥0가 가정되었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뉴턴의 위대함은, 까다롭기 그지없는 문제를 두고, 그저 숫자 대입 몇 번만으로 바로 답을 구할 수 있는 원리를 발견해 내었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미적분학은, "어쩜 그렇게 엄청난 원리를 찾아내었을까?" 같은 놀라움, 발견 과정의 지난(至難)함이 대단한 것이지, 그 결과는 일반인이 배우기에 그리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말도 안 되게 어려운 걸 누구나 익힐 수 있는 쉬운 결과로 바꾸어 놓았기에 그가 위대한 거죠.

테일러 정리를 발견한 브룩 테일러도 뉴턴 그 다음 시대에 활동한 수학자인데, 공대에서 테일러 급수가 얼마나 자주, 요긴히 쓰이는지를 생각하면 의외로 인지도가 낮은 편입니다. 이 정리의 놀라운 면은, 어느 미분가능하며 매끄러운 함수("매끄럽다"는 건 수학 용어입니다. 무한 번 미분이 가능하다는 뜻이고, 따라서 저 앞의 "미분가능"은 잉여적 표현입니다)를 놓고서도, 다항함수의 멱급수로 나타낼 수 있으며, 그 구체적인 식까지 제시해 둔 것입니다. "매끄러운 함수"가 식이 복잡한 경우를 넘어서서, 아예 뭔지도 모를 경우에조차 근사식을 구할 수 있다는 정리이죠. 단 한 개의 점에서 이런 놀라운 식의 도출이 가능하니, 근대적 이성의 위력에 시대가 경의를 표한 건 당시로서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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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해석의 기본
이창영 지음 / 교문사(청문각)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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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분에서, 뉴튼의 방법이다, 심프슨의 방법이다 해서 다양한 기법들이 쓰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법들은 엄밀한 공식을 통해, 그야말로 0.00000001의 오차도 없이 값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근삿값을 통해, 정답에 가장 근접한 숫자를 얻고 만족하는 거죠.

심프슨의 방법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이 책의 3부 8장에서 다뤄지는데요. 존재하는(혹은 상상 가능한) 함수들 중 상당수는 역도함수를 찾아 적분할 수가 없습니다. "역(逆)도함수"는 예전 중등 교과 과정에서 원함수, 또는 원시함수라 부르던 것의 다른 이름입니다. 물론 미분이 안 되는 것도 꽤 많지만, 적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어찌 보면 "원칙적으로 안 되고 운이 좋아야 가능한 것"으로 보는 게 맞습니다.

삼각함수 중 지극히 예외적인 형태, 무리함수의 대부분 등은 원시함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은 역도함수(antiderivative)를 못 구합니다. 공학용 계산기에 넣고 돌려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학부 과정에서 시험에 나오는 문제들은, 아무리 그 겉모습이 복잡해도, 결국엔 답이 나오도록 출제자가 고민해서 짜낸 것들입니다.

안되는가 보다 하고 말 게 아니라, 본래 적분(식, 값)을 구하는 목적은, 함수의 그래프를 그리고 그 곡선 아래 부분의 넓이를 구하는 데에 있습니다(정확하게는, 그 곡선의 아래로부터 내려와서, x축으로 둘러싸인 부분까지의 넓이). 그렇다면, 꿩 잡는 게 매라고, 결과에서 극히 작은 차이만 날 뿐이라면, 근삿값을 구해서 (실제에) 응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고, 오히려 전쟁에서 성문을 정면 돌파할 수 없으면 개구멍이라도 찾아서 돌파하는 요령이 칭찬 받아 마땅한 것(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천재)입니다. 애초에 적분의 목적이 이쪽이므로 머리 좋은 학자들은 근삿값을 정밀히 구하는 기법을 일찍부터 발전시켜 왔습니다. 근삿값이라고 하면 초 5, 중 1 정도에 마지막으로 배우고 이후에는 본격(?) 정밀 수학만 제대로 쳐 주는가 보다 처럼 여길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근삿값 기법 역시 수학의 한 본령을 이룹니다. (공학 수학에 더 가까운 성격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뚜렷한 분화가 이뤄지지 않았겠죠)

미적분의 기초에서 다항함수(엑스의 제곱, 세제곱, n제곱 등등의 곱과 합으로 표현되는 것들)을 미분, 적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정도는 고교에서 문과생들도 다 다루는 것입니다(7차만 제외). 방법은 매우 쉬우므로(구구단보다 쉽습니다. 구구단은 72개의 긴 식들을 외우는 과정이라도 거치죠), 누구나 다 조금만 시간을 투자해서 쉽게 갖고 놀 수 있습니다.

생긴 것만 봐도 까다로운 삼각함수, 로그함수 들 중 상당수 불가능한 꼴은, 이 다항함수 중 가장 근사한 식을 찾아서, 그 다함함수의 정적분으로 값을 구해내면 됩니다. 이와 그 취지가 비슷한 것 중에 테일러 급수(전개)라는 것도 있는데, 이 책의 2부 4장에서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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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라이프 - 내 삶을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최인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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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가 기를 쓰고 돈을 벌며 경쟁에서 승리하려 애 쓰는 건 결국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손에 쥔 효용보다 써 버린 자원, 희생한 기회비용이 더 크다면, 그런 삶은 결코, 누구의 관점에서도 잘 산 삶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 버린 인생, 주객이 전도된 분투의 과정은, 당사자의 노력에 불구하고 결국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남들 시선을 따라 일단 내 자신이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종착점이 무엇인지 먼저 그 기준을 바르게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먼저 "행복, 행복"이라 말은 쉽게들 하지만, 대체 이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자고 합니다. 사전을 아무리 찾아 봐도 행복의 정의에 대해 거창한 설명은 많지만, 이 심오한 설명을 깊이 궁구한다고 해서 어떤 깨달음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깨달음이 혹 온다 한들, 문자 그대로 내가 행복해지지 않으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사전의 해명 중에는, "우연히 찾아오는 복"이란 말도 있다고 합니다. 책에도 나오지만(p31), 영어의 happy 역시 haphazard("닥치는 대로의")라는 단어에도 그 형태소 일부가 들어 있듯, 인생의 목표가 그저 우연에 기대는 것이라면, 열심히 살 필요가 없다는 허망한 결론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정말로 이렇게 믿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까지 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인생은 무가치한 오탈자, 솜사탕 먹다가 이빨은 물론 잇몸을 통째 잃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잉여 단위일 것입니다.

저자는 조건이나 정의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체험"에 행복의 본질이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하긴 아무리 철학자의 신묘한 통찰로 행복의 정의를 구성했다 쳐도, 그 철학자 본인이 감정으로 육신으로 마음가짐으로 행복해 본 적이 없다면 이는 일개 말의 성찬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그런 말의 성찬은 다른 누구에게도 작은 효용조차 가져다 주지 못할 것입니다.

행복이란 단어에 그저 행복의 "조건"만이 표현되었다면, "쾌족(快足)"이란 단어를 통해 행복의 "체험"을 담을 수 있습니다. 심리학은 개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행복의 측정 기준도 제시하는데, 이 중에 PANAS(positive and negative effects after schedule)라는 게 있다고 합니다. positive의 항목들에는 "관심있는, 신나는, 강렬한, 자랑스러운, 정신이 맑게 깨어 있는" 등이 포함되는데, 저자는 이 중 놀랍게도 "행복한"이 정작 빠져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행복하기 위해 정말로 "행복함"이란 단일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다른 부수적인 긍정 정서를 두루 경험하면 족하다는 뜻(p37)도 됩니다.

저자는 이런 지적도 합니다. 흔히 지식인들은, "행복"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니체는 "행복? 그런 것은 영국 치들이나 추구하는 거야!"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머리가 좋고, 범인들이 꿈도 못 꾸는 경지를 내다볼 능력이 있어도 그 자신은 지독히도 불행한 삶을 사는 게 보통인데, 어쩌면 이런 예외적인 경우는 그 불행 속에서 오히려 쾌감을 찾아내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그나마 나은 편이며, 대다수의 사이비들은 말(물론 거짓말)로만 달관을 가장할 뿐 속으로는 끊임없는 불안과 자기기만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텨낼 뿐입니다. 이런 사이비들은 머리 속에 최소한으로 채워 넣은 지식도 없으면서 주워 들은 말로 거짓된 에고를 꾸미는 게 고작입니다.

책은 이어서, PANAS에서 제시하는 긍정, 부정 항목의 하나하나를 잘게 해설합니다. 순서가 중요하지는 않으나 여튼 긍정 섹터의 처음에 오는 것은 "관심있는(interested)"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몰입할 때, 반드시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여튼 감정과 지적 능력이 가장 활기를 띠는 건 사실이죠. 저자는 여기서, 니체 같은 사람이 행복의 "피상적이고 얕음"을 비웃었으나 설령 그런 이도 이 "관심있는" 상태를 두고 그런 비난을 할 수는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실제 니체 역시, 그의 영감어린 저작을 구상하고 신들린 듯 글을 써내려갈 때 가장 "관심있는(무엇을 향해서건 간에)" 상태였으며, 또한 가장 "행복"하지 않았겠습니까? 독자인 제 생각이지만 PANAS의 구성자들은 아마도 니체 같은 이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일종의 방어논리까지 다 고려하여 이런 체계를 만들어낸 듯합니다.

PANAS에는 부정적인 감정 역시 포함되는 점 앞에서 본 바 있습니다. 저자는, 사람이 행복을 제대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체험의 pool 안에 부정적 감정이 일정 부분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게 PANAS의 암묵적 전제로 깔렸다고 말합니다. 하긴, 내내 몽롱하게 행복하기만 한 체험의 연속이라면, 종국에 가서는 그게 행복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지루함으로 변환되어, 일종의 고통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습니다. 단맛은 쓴맛과 대비될 때 자신의 정체성을 더 분명히합니다. 바버라 프레드릭슨(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교수이며 올해 54세입니다) 등은 2013년의 한 실증 연구에서, 행복과 불행이 대략 3:1 정도의 비율로 섞이는 게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는군요. 이런 연구를 두고 아주 피상적 태도로 비난하는 자도 있으나, 실증 연구에 제대로 몸 담아 본 적도 없는 철저한 무식자나 쉽게 내뱉는 비난이며, 예컨대 "튜링 테스트" 같은 건 인공지능 이론 중에서 가장 주관적이며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자의적 설정이라는 점을 전혀 이해 못하고 함부로 날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에 캐나다로 이민 간 분들이 꽤 많습니다만, 설령 "행복의 나라"에 간다고 해도(한대수 씨의 노래가 생각나는군요), 그 구체적인 개개인이 꼭 행복해진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어느 연구 결과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는 답을 내어놓습니다. 출신국(꼭 한국이라는 게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등 여러 나라)에서는 현저한 불행을 체험했던 이들이, 새로 정착한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평균적 시민이 누릴 만한 수준의 만족을 체험했다는 거죠. 저자는 이를 두고 "사회의 질이 유전의 힘을 이길 수 있다(p75)"는 멋진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물론 사회의 질이 뛰어나도 유전자의 질이 워낙 나쁜 닭대가리의 경우 끝없는 허언과 망상을 통해서나 그 못된 천성의 해악을 감당해낼 수 있죠.

과연, 유전의 힘은 생각 외로 강하기도 합니다. 책 p81에는 필립 브릭먼의 등의 1971년 연구를 인용하며, 이른바 "hedonic treadmill(번역은 '쾌락의 쳇바퀴')"라는 개념이 소개됩니다. 일시적으로 어떤 자극을 받아 감정이 고양되었다고 해도, 마치 인체가 항상성을 유지하듯, 일정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균형점으로 되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이런 균형점은 누구라도 자신의 고유값을 가지며, 가령 예를 들면 복권 당첨이란 극단적 체험을 해도("행복이 요행"이라는 고전 정의에 가장 잘 부합한다고 봐야겠죠), 사람이 칠칠치 못하면 제 타고난 복이 고작 그것이라고 거금을 탕진한 채 도로 출발점으로 돌아오곤 하는 게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혹은, 어설픈 독후감이 신문 독자 투고란 같은 후미진 구석에 게재되거나 판촉 공모 행사에 당첨되어 푼돈의 상금을 받은 후 흡사 작가 반열에나 오른 양 큰 착각과 나댐에 빠졌으나, 결국 제 초라한 실업자의 분수가 전에 비해 다를 바 하나 없어진 걸 깨닫는 초라하고 씁쓸한 자각과도 같죠

행복은 과연 환경의 힘, 유전의 힘 중 어디에 더 크게 좌우되는가? 행동유전학자들은 후자의 연구에 보다 치중하고, 환경론자들은 전자를 변수화하여 구체적 상관관계를 계산해 내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절대적이지 않으며, 다만 인생의 특정 국면을 보다 정밀하게 들여다 볼 어떤 계기를 마련해 줄 뿐입니다. 이후 책은, 환경론자의 방법, 그리고 심리학자의 방법을 번갈아 가며 소개합니다. 전자는 행복을 위해 먼저 환경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취지이며, 후자는 "그저 마음 먹기에 달린 거야!" 같은 내용입니다. 저자는 분명 심리학자이지만, 개인에게 역으로 과부하를 안기는 후자의 방법에 대해 일정 정도 한계선을 긋고 논의를 전개합니다. 즉, 개인의 행복에는 "환경의 변수"가 큰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소박한 상식에도 크게 부합하는 결론입니다. 성인, 초인이 아니고서야 어찌 인격 수양이나 의지만으로 평정의 경지에 도달하겠습니까. 절대 불가능이죠.

1. 잘하는 일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

이 역시 우리가 흔히 듣는 지침과는 반대방향을 걷는 명제입니다. 오히려, 좋아하고 않고는 주관적 착각일 수 있으니 객관이 검증해 놓은 "잘하는 일"에 매달려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많이들 권하죠. 둘이 일치하는 사람은 가장 운 좋은 편이겠으나, 많은 경우 이는 불일치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젊은이들의 클리셰라면서) "네 마음의 소리를 들어!"란 주문에 정말로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하긴 한 번뿐인 인생, 어떤 여한이 남아서도 내내 불행하지 않겠습니까.

2. 되어야 하는 나보다 되고 싶은 나를 본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당위를 위해 실존을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는 양,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양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self-denial)이란 결국 고통과 인욕의 과정이며, 대체 그렇게나 큰 대가를 치르고서 얻는 완성, 성취라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지 한 번쯤은 의심을 품어 봐도 됩니다. 책에는 첼리스트 요요마의 일화가 나오는데, 자신이 오래 준비해 온 연주가 "매우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게 19때의 일이라고 회고합니다. should를 want to로 바꾼 것이, 연주자로서의 깊이를 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 그리고 이 전환점이 59세가 아닌 19세에 마련되었던 게 얼마나 큰 행운이냐는 그의 말도 있습니다. 근데 독자로서 저는, 이처럼 성취의 과정에 독특한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게, 행복한 연주자로서 그의 능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예에서 배워야 할 건 "말 자체"가 아니라, 그가 뿌듯이 느끼는 행복감 그 자체에 전염되는 체험이기 때문이죠.

요즘 소확행이란 말을 흔히 듣고 씁니다. 영어의 savoring은, 작은 것도 귀하게 여기는 행복한 삶의 기술이라고 합니다.(p132). "젊어서는 쾌락이요, 나이 들어서는 의미"라는 말도 참 멋집니다. 그런데, 기왕이면 젊어서도 의미를 함께 탐구하고, 늙어서도 적절한 관리와 절제를 통해 쾌감을 함께 누리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물론 망령이 난 닭대가리처럼 나잇값 진상을 떠는 건 곤란하겠지만 말입니다. 특히 저자는, 한국인들처럼 "어떤 의미"를 중시하는 민족에게 이 과정은 특히 깊이 탐구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p182에는 안니발레 카라치(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입니다)의 <헤라클레스의 선택>이라는 명화가 나오는데, 헤라클레스는 이 그림 속에서 두 여인을 두고 고민합니다. 한 여인은 고통스럽지만 의미로 가득한 탁월한 자의 삶을 살라고 권유하며, 다른 여인은 한 번뿐인 인생 즐겁고 신나야 하지 않겠냐고 합니다. 근데 저자는 마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듯, 왜 이 둘 중 반드시 택일을 해야 하느냐며 반문합니다.  앞 문단에서 제가 미리 예측한 결론대로, "삶은 택일의 문제가 결코 아님"을 깨닫는 게 참된 행복의 시작이라는, 책의 훌륭한 통찰이 비로소 전개되는 겁니다.

저자는 삶의 4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일, 사랑, 영혼, 초월

이 명제는 ROBERT A. EMMONS 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가 정립하였으며(이 책 p282의 후주에 나옵니다), 그 외에도 자계서 저자로 유명한 폴 피어슬 박사의 저서에도 등장합니다. 일 없이 성취 없이 망상으로만 오탈허송세월하는 자는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그저 불행의 원천일 뿐입니다. 가족에게 배척당하고 불륜상대나 찾아다니는 노파에게 행복이 있을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다 한들 제 영혼을 잃고 수전노 신세로 떨어진다면 그 사람은 자신 아닌 남의 행복을 간수하는 불쌍한 노예입니다. 초월에 대해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미천한 짐승입니다.

행복은 물론 자기 자신의 행복이 메인입니다만, 자기 중심성을 극복 못하는 자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게 심오한 역설입니다. 저자는 이 책을 마치며, 책의 명제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반드시 자신만의 자작곡을 지어 볼 것을 권유합니다. 하긴 행복해지겠다면서 남의 행복론만을 암송하는 모습도 엄청난 모순이죠. "굿 라이프"란 결국 어깨에 힘 빼고, 집착을 버리고, 내면의 정직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이웃과 소통하는 가운데 발견하고 이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저자의 <프레임>도 함께 읽어 보시면(이미 베스트셀러지만)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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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왕조실록 - 이야기 역사신학, 열왕기서 새로 읽기
배경락 지음 / 샘솟는기쁨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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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는 제목부터가 북이스라엘, 남유다를 다스린 여러(列) 군주(王)들의 기록(記)이며, 엄연히 역사서입니다. 그래서 역사책처럼 재미있게 읽었으면 하는 소망이 언제나 있었으나, 막상 성경책을 펼쳐 보면 그리 쉽게 읽히지를 않습니다. 왕들의 연대기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찬란한 업적과 성취로 가득한 기록이 아니라, 오히려 우행과 실패와 죄업의 연속으로 점철되었으며, 이를 준열히 꾸짖는 예언자, 선지자들의 행적이 매우 큰 비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디서부터가 history이며, 어디까지가 종교적 가르침인지가 잘 분간되지 않기 일쑤이며, 끝에 가서는 "역시 성경책이야."하는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덮곤 했죠.

이 책은 열왕기의 내용을 저자 배경락 목사님이 최대한 쉽게 풀어서 들려 주는 구성입니다. 그래서 일독 후에 열왕기의 사적이 머리 속에 일단 잘 정리는 되었고, 이것만으로도 책을 (처음에) 꺼내들었던 목표는 120% 달성되었습니다. 헌데 책을 다 읽고 난 감회랄까.... 어떤 보람 같은 것은 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역시 열왕기는, 재미 있는 역사로 읽을 주제만은 아니었어." 이 오래된 느낌을 이제 일종의 각성으로서 재확인하게도 되었네요.

열왕기뿐 아니라 모든 성경이 마찬가지입니다만, 성경의 기자는 어떤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영감을 받아(성령이 임한 채로) 기술을 하게 마련입니다. 배 목사님은 열왕기가 바빌론 포로 시절 이국에서 모진 고생을 하던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과오를 반성하게 하려는 의도로 쓰여졌음을 말합니다. 너희들의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희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이런 식으로 대가를 치르게 함이라는 취지이죠. 실제로 열왕기 시절에는 강성한 이웃의 침략에 의해 이스라엘, 유다 왕국이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하고, 모압 같은 속방(屬邦)이 경제적 풍요를 앞세워 분리 독립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두가, 이른바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그들 열두 지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시련이자 고통, 치욕이었습니다. 선택을 받았다면서 왜 이런 험한 일을 당합니까? 이뿐 아니라 성경 속에는 욥의 간난사 등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숱한 부조리가 다 나옵니다. 왜 선인에게 복을 내려주지는 못할망정, 사람으로서 견딜 수 없는 치욕과 수고를안깁니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저자 배경락 목사님이 선명하고 똑부러진 목소리로, 그에 대한 신앙인의 답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독자(신도) 개인의 몫이지만, 적어도 기독교 서적이라면 모호하지 않은 뚜렷한 답을 이처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열왕기에도, "이유 없이 핍박 받는 선인, 의인의 사연"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중 대표자가 예언자 엘리야입니다. 무수한 예언자 중에서 특히 열왕기의 엘리야가 특히 유명한 이유는,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 통치기에 왕에 대해 직언을 서슴지 않던 용기 있는 현인의 아이콘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도 왕의 권력에 의해 탄압 받고 쫓기면서 모진 고생을 하고,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같은 약한 소리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강철 같은 의지와 순도 높은 신앙으로만 무장했을 것 같은 그의멘탈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범부만도 못 한 이런 약한(더군다나 불경스럽기까지 한 - 생명과 출생은 신이 내린 가장 큰 선물이니까요) 언사를 내뱉는다는 게 우리로선 몹시도 의외입니다. 이럴 때 신은 홀연이 나타나 불호령 대신 따스한 말로 그를 격려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신은 이런 지점에서 역시 같은 분임이 확인됩니다.

앞서 말했듯 열왕기의 주인공은 오히려 열왕(아합, 르호보암, 여로보암 등)이 아니라, 고독한 선지자들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탄압과 착취의 대상이었던 불쌍한 민중들입니다. 아합은 구약의 서술을 표면적으로 읽기만 하면 아주 나쁜 폭군으로만 보이지만(또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만), 경제적으로는 이 자의 치세에 무척이나 번영을 누린 게 이스라엘 왕국입니다. 못된 왕비 이세벨의 꼬임(이라기보다 목사님은 오히려 이 부부 관계를 주종 성격으로 파악합니다)에 넘어가 바알 신앙에 빠진 게 아합이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잘 살아 보자, 남 일에 신경 끄고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 이런 개인주의 물질주의를 지향한 게 바알주의라고 저자는 정리합니다. 아 그럼 잘한 거 확실히 하나는 있었군, 저 북한처럼 백성들 배도 주리게 하면서 못살게만 구는 미친 폭군은 아닌가 보군, 뭐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허나 저자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웃의 고초와 궁핍을 외면하고, 나의 욕심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채우는 세속주의의 극치 바알(바알은 특정한 신의 이름이 아니며, 이 시대의 바알은 멜카르트라는 시돈의 신이었다고 합니다) 숭배야말로 여호와의 뜻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죄악이자 우상 숭배였다고 저자는 파악합니다. 바알은 그저 여호와의 질투를 받는 다른 땅의 신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물질주의와 배금주의의 표상입니다. 사람은 이웃과 함께 나누고 공감하는 데서 존재의 가치와 고결함을 유지합니다. 바알로 대표되는 물질주의는 그런 인간 본성의 가치를 파괴합니다. 확실히 이런 해석이라야, 꼭 신앙을 떠나서도, 왜 그렇게 유다의 신은 자신만에의 복종과 순명을 강요하는가, 너무 독선적이지 않는가 같은 의아함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유대 민족주의 역시, 편협한 종족적 고립을 떠나, 보편적 윤리와 도덕으로 승화할 수 있겠고 말입니다.

이 책은 열왕기의 시대적 해설과 주석에 그치지 않습니다. 열왕기 역시 훨씬 후대 바빌론 유수에 대한 애널러지로 독해할 수 있듯(물론 역사로서의 성격도 잃지 않습니다. 예컨대 모압 독립 건만 해도 고고학적 증거가 출토됨으로써 구약은 그 역사성을 입증했다고 이 책에도 나오죠. 메사 석비에 대한 언급은 각기 다른 곳에 두 차례 등장합니다), 저자는 열왕기에 기재된 숱한 정치적 혼란과 난맥상을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고난에 빗대어 해석합니다. 책은 직설적으로 혹은 우회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우행과 오판을 신랄히 비판합니다. 지도자가 자신만의 편견과 고집에 싸여 있을 때, 어떤 비극적 결과가 발생하는지는 동과 서, 역사의 고금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마치 선지자의 목소리처럼 통렬히 지적합니다.

책의 기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런 못나고 어리석은 정치가 파탄에 이르게 방치한 모든 침묵과 위선, 비겁을 꾸짖습니다. 엘리야의 시대에는 그 말고도 백 인의 선지자가 더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동굴에 은거하며 현실의 부조리를 외면했습니다. 저자의 의견은, 이들의 죄 역시 우군의 악행과 견주어 조금도 가볍지 않다는 쪽입니다. 기독교는 예로부터 현실 참여를 결코 소홀히하지 않는 기풍을 유지해 왔고, 이런 태도가 설령 구약의 사적에 대해서인들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그저 외골수, 현실 도피, 맹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르틴 루터가 용감하게 로마 가톨릭의 폐해를 지적하며 내세운 교의 중 "오직 믿음(sola fides)"이라는 게 있는데, 이것이 왜곡되어 마치 눈을 감고 믿는 어리석은 신앙이 최고의 미덕인 양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성 역시 신앙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이며, 명확하고 냉철한 현실 인식 위에 기반을 다진 신앙이라야 그 내용도 올바르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신앙과 사랑은 잘못과 죄악에 대해서 무작정 포용하는 눈먼 감정이 아닙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박형대 교수의 이론을 인용하여 "진멸(殄滅)"이란 개념으로 파악하는데, 뜻은 그야말로 신의 진노가 죄인들에 미쳐 모조리 절멸시킨다는 겁니다. herem이란 단어는 심지어 영어 사전에도 나올 정도인데, 히브리어 חרם은 헌신, 축복, 파문, 징계 등 뜻이 다양하나 역시 문맥에 따라 "진멸"로 쓰일 때 가장 서늘히 와 닿습니다. 열왕기뿐 아니라 구약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의 모든 수난사는, 이처럼 신의 뜻을 거역하고 오만방자하게 죄악과 독선에 빠지거나 물질문명의 해악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그들에게 미친 "진멸의 손길"이었습니다. 설령 엘리야인들 어찌 과오가 없었겠습니까?

이 책에는 열왕기의 어려운 구절에 대해 저자의 식견으로 명쾌히 해명하는, 주석서 같은 대목이 많아서 역시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령 제자 엘리사가 "곱절의 몫"을 스승에게 요구할 때, 혹 선지자로서의 기적과 권능이 그 스승을 두 배로 능가한다는 뜻인지 오해가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적통의 승계자로서 자격을 요청하는 대목이며, 이에 엘리야가 "나의 승천을 네가 볼 수 있다면'이란 말로 대답하는 구절까지 일관된 이해가 가능합니다. 이뿐 아니라 벧엘의 꼬마들이 엘리사더러 "대머리여 올라가라"라고 조롱한 건, "대머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 스승처럼 하늘로 올라가는 기적을 보여 보라는 불경이 그 포인트인데, 이로서 벧엘은 초기의 신성을 잃고 물질주의의 지옥으로 화했다는 게 저자의 해석입니다. 책에 이처럼 일관된 관점이 있기에, 읽고 나서 강렬한 느낌이 남았습니다. 저자도 암시하듯, 이 열왕기의 벧엘은 곧 21세기의 한국이며, 성도이건 문외한이건 모두 물욕의 늪에 빠져 죄악의 응보를 면하기 어려운, 말하자면 herem의 표적으로 변해간다는 게 또한 저자의 시각입니다. 1907년의 평양 대부흥 같은, 철저한 영적 각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된다는 저자의 결론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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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로 만나는 우리 땅 이야기 2 - 경기도 두 발로 만나는 우리 땅 이야기 2
신정일 지음 / 박하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한 말로 경기도라지만 너무도 넓고 넓은 고장입니다. 북과 남의 환경, 지세가 완연히 다른가 하면, 서울과 경계를 접한 지역들은 생활 패턴이나 시가지 구조가 서울과 다를 바 별로 없고, 그 외 농업생산에 주로 기대는 지역들은 말 그대로 시골, 심지어 버스편도 뜸하게 다니기에 자가용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너른 지역이지만 저자 신정일 선생께서는 부지런히 발로 뛴 답사를 통해 멋진 기행문과 문화유적 답사기를 우리에게 선사해 주시네요. 서문을 보면 그 말미에 "온전한 고을 전주에서"란 한 마디가 적혔는데, 아직 전라도 편까지 감상하려면 많이 기다려야 할 듯하지만 한자말 지명 하나도 우리말로 되새길 때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는 점 깨닫습니다.

세종대왕과 소현왕후가 함께 모셔진 곳이 여주 북성산 기슭인 영릉(英稜)입니다. 이곳을 개토할 때 "마땅히 동방의 성인(聖인)이 안장될 곳"이라는 푯말부터가 먼저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설화와 전승의 객관적 신빙을 따지기에 앞서, 군주가 얼마나 그 백성들로부터 큰 존경과 신망, 앙모의 감정을 얻었는지를 간접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여주라고 하면 그저 차편으로 멀고도 멀리 달려야 하는 고장으로만 알고 있었으나, 이제 혹 근처에 들를 일이라도 생기면 마땅히 챙겨 볼 유적지가 한 군데 확실히 생겼습니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를 꼽으라면(책에는 "중기"라는 한정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정구, 신흠, 장유, 이식 등 네 분을 꼽습니다. 이 네 분을 일컬어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고도 부르죠. 이 중 이식은 "성리학적 학풍이 중심이며, 화려한 문장을 선보였고, 명문대가 출신"임이 그 주된 개성이라고 저자는 정리합니다. "본뜬다고 다 고문(古文)이 아니라 그 나름의 창의와 바른 마음가짐이 깃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특히 새겨들어야 하며, 망령이 든 닭대가리라면 함부로 따라할 수 없는 높은 경지입니다. 이분이 (아호이기도 한) 택풍당을 짓고 책만 읽으며 은거한 곳이 바로 현재의 양평군 양동면이라고 합니다. 여주보다 조금 북쪽으로 올라와야 하죠.

한때 부동산 로또(?)라며 주목을 받았고 요즘도 중산층의 거주지로 선호되는 판교는 그 이름의 유래가 청계산에서 발원하는 운중천의 범람에서 비롯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판교에서 청계산까지 가려면 대략 10km 정도를 판교로, 운중로 등을 거쳐 달려야 합니다. 이 책에 나온 대로 문화 유산 답사 코스를 밟으려면 꽤 재미가 날 듯합니다.

청계산에서 다시 동편으로 이동하면 광주시가 나오는데 천주교 신자라면 반드시 한 번은 답사, 순례해야 할 성지가 있다고 합니다. 천주교 박해도 조선 후기의 사실이므로 이들 성지 역시 엄연히 문화유산의 일부가 맞습니다. 다시 조금 북쪽으로 이동하면 하남시, 미사리 등이 나오는데 백제 유적지 위례성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추정), 우리들 속된 현대인들은 그저 이 일대를 불륜 드라이브 코스 정도로나 인식할 뿐이죠. 조상님들께 많이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고려시대 문화재인 동사지 오층석탑, 삼층석탑 역시, 이 책에서 읽었으니 답사시 사진에 반드시 담아와야 하겠습니다.

광해군은 제주도로 유배된 후에도 제법 고령의 나이에 유형 생활을 시작했으면서 꽤 장수한 분입니다. 반면 연산군은 젊은 나이에 폐위되어 서울서 그리 멀지도 않은(제주에 비하면) 섬 교동도로 안치되었는데, 울화를 참지 못하고 서른 하나에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건강은 인성 요소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산보다 훨씬 이전 사람(여말 선초)인 목은 이색은 이곳의 독특한 풍광과 사람 사는 모습을 보고 그윽한 시도 한 수 남겼나 봅니다. 풍수지리학상 이곳 교동도는 개성에게 외안산이 되며, 반대로 한강은 교동도에 대해 안수가 된다고 책에는 나오네요. 어떤 절대적 위상이라는 게 풍수에는 존재치 않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희 장군이라고 하면 세 치 혀의 놀림만으로 강토의 회복을 꾀하여 성취한 담대한 외교관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워낙 출중한 인물이었던 만큼 여러 일화가 있습니다. 안산시 단원구(이 구 명칭도 단원 김홍도에서 따온 것이죠)에는 당시 송나라로 떠나기 위한 항구가 마련되었는데, 내부시랑직이었던 서희가 이곳에서 일박할 당시 경순왕의 비인 홍씨와 그 모친 안씨가 소복(책에는 "소박"이라 나오는데 미스프린트인 듯합니다)하고 꿈에 나타나선 억울한 죽음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이후로 잿머리 성황재가 실시되었는데, 물론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이런 설화 하나에서도 안산 일대에 큰 세력을 형성한 순흥 안씨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경주 김씨인 경순왕과 이들 호족의 정치적 연합은 결국 실패했다는 뜻이죠. p151:9의 "1984년"은, 모르긴 해도 "1894년"의 오타이겠습니다.

안성은 책에 나오는 대로 수원의 동쪽이며(<택리지>에서의 재인용), 사실 동쪽이라기보다는 먼 남동쪽인데 여튼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호남 바닷가와 경기 사이에 위치하여 공장과 장사꾼이 모여 드는" 번영한 고장 정도로 기술합니다. 사실 바닷가와도 꽤 멀고, 다만 멀리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강의 상류가 이곳이긴 하죠. 호남은 지금의 전라도를 가리킨다기보다 인근 아산호 일대를 지칭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안성맞춤"으로 잘 아는 안성 유기가 유명한데, 이 때문에 사실 당대 백성들은 공납 공출의 요구 때문에 무지 핍박을 격었으며, 새 수령이 부임하면 부임 첫날부터 송덕비를 세우는 게 차마 웃지 못할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안성 도기동의 경우,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기에 예로부터 중시된 고장이며, 큰 시장이 섰을 뿐 아니라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에도 이곳에서 매점매석을 벌여 큰 돈을 모은 허생의 일화(물론 가상이지만)가 나옵니다. 안성이라고 다 풍요로웠던 고장은 물론 아니며, 죽산면에는 훗날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당시 비운의 죽음을 당한, 우리 국어 교과서에도 게재된 "송인(送人)"의 작자인 정지상이, 분행역을 지나며 남긴 시의 자취가 스며 있습니다.

귀주는 앞서 말한 서희 장군이 거란에게서 뺏어온 강동 육주(저 북방 압록강 동안) 중 하나인데, 세월이 흘러 송문주 장군이 한때 주둔하던 중 새로이 발흥한 몽골군이 어떤 식으로 성을 공략하는지 그 진법의 정수를 보고 배운 곳이기도 하나 봅니다. 우리가 몽골에 결국 항복하여 이후 고려 왕실과 조정이 원(元) 제국의 간섭을 받았으나, 치욕의 역사뿐인 건 아니어서 이 송문주 장군의 경우 몽골과 항쟁(그 이전)하며 그들의 습성을 낱낱이 알아 대비하였기에 기어이 죽주산성이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나 동유럽보다 우리가 훨씬 근거리였고 더 고도의 정예군이 파병되어 침략을 받았는데도 이런 유능한 사령관이 있어 국지적 침략을 막아 내었다는 건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안성시 근방에는 미리내라고 불리는 천주교 성지가 있는데, 밤이면 집집마다 불을 켜고 천주교학을 연구하던 모습이 미리내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책에 나옵니다. 이 근처에는 유명한 김대건 신부의 유적지가 있는데, 출중한 외모와 반듯한 성품으로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초지를 지켜 젊은 나이에 순교한 위대한 성인(책에도 나오지만 무려 1925년에 복자품을 받았고, 1984년에 방한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이 되었습니다)입니다. 그가 순교한 건 4대 박해 시절은 아닌 병오박해 때의 일입니다. p198:3의 "한남금맥정맥"은 아마 "한남금북정맥"의 오타인 듯합니다.

천주교뿐 아니라 서학(西學)에 대한 안티테제 격으로 등장한 동학, 즉 후대에 이르러 천도교로 개칭되는 흐름도 있었죠. 이 종교의 2대 교조가 최시형인데, 이분이 순교한 곳이 이천(利川)입니다. 이천은 예나 지금이나 밥맛 좋은 쌀로 유명하며(제가 최근에 마트에서 사 보니 4kg 기준 타 상품보다 5천원이나 비싸더군요 켁), 사실 경기도가 이름이 경기(京畿)인 이유는 딴 데 있지도 않습니다. 관리들에게 지급할 양질의 봉록이 근처에 소재해야 하니 말입니다. 책 맨처음에 다뤄진 여주의 바로 서쪽에 위치한 고장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도 이천에 첫발을 디뎌 가장 먼저 나오는 화제가 바로 진상미입니다.

수원의 문화재라고 하면 대뜸 우리는 정약용의 화성(華城)부터 떠올리며, 교통도 편한 까닭에 서울 시민에 쉽게 찾을 수 있는 대표적 문화재이기도 합니다. 특히 경기도 남부의 중소규모 도시라면 버스만 잘 골라 타도 이곳을 얼마든지 통과할 수 있으며 근처의 백화점 등 다른 명소도 실컷 구경 가능하죠. 경기도 남부는 황해안과 면한 곳이 많아(저 위에 언급한 안산 잿머리처럼) 중국으로 사신길을 떠나다 "뭔 일"을 겪은 이들의 일화, 전설이 많이 남습니다. 인천도 예외가 아닌데 이 길게 남북으로 뻗은 항구도시의 경우 사실 언급해야 할 대목이 너무 많지만, 빼놓지 않고 중국행 사신의 에피소드가 문학상 인근 등에 얽혀 있습니다. 인천은 또한 비류백제가 터전을 정한 고장이기도 하니 매우 유서 깊은 문화 유적지이기도 하다는 점 처음 알았습니다.

경기도는 초기 백제의 중심지여서인지 곳곳에 그 아득한 옛적 백제 왕들의 이야기가 인용됩니다. 남양주 양수리에는 팔당댐이 소재하기도 했는데, 이곳은 다시 (앞서 언급되었던) 하남시 미사리와 연결되죠, 백성 도미의 부인을 뺏은 못된 군주 개루왕의 전설도 이곳을 근거로 하는데, 고구려와 전투 끝에 죽은 개로왕은 한참 후대인 21대 임금입니다. 수종사라는 절에는 조선 초기 임금 세조(수양대군)와 후대의 실학자 정다산이 다시 자취를 남깁니다. 정다산만 해도 이 책에서 대체 몇 번을 등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위대한 학자요 경세가였던 그는 한국 삼천리 강산에의 열혈 답사가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고양과 파주는 그저 남북 대치 상황 때문에 개발이 안 된 벽지인가 여겼는데, 이 책을 보니 곳곳이 서원이고 유적입니다. 하긴 민족 분단, 대립이란 꿈도 꾸지 않았던 조선 시대에야 훨씬 북쪽인 개성도 그만큼이나 번성한 고장이었는데, 거기보다 서울에 훨씬 가까운 이곳 경기 북부야 일러 무엇하겠습니까. 부대찌개나 미군 기지(켐프 레드클라우드) 정도로나 알려진 의정부에도, 사문난적으로 노론에게 몰려 죽은 <사변록>의 저자 박세당의 묘가 있으니 뜻있는 이들은 꼭 찾아볼 일입니다.

경기도 하면 그저 농촌이나 드라이브 코스 정도로만 알아도, 실상은 오백 년 도읍인 서울, 그보다 더 이전에도 역시 (고려 도읍 송도의) "경기" 구실을 했던 고장이니 곳곳이 문화재요 발 디디는 처처마다 조상님들의 숨결로 가득합니다. 이번 여름에는 경기도 문화 유산 답사부터 시도해 봐야겠으며, 이 책을 세 번 정도 더 읽고 계획을 짤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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