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비주얼 클래식 Visual Classic
오스카 와일드 지음, 박희정 그림, 서민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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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읽을 때마다 새롭다는 느낌입니다. 읽을 때마다 새롭고 아니고는 개인 차로 돌릴 수도 있겠으나, 이 작품을 즐겨찾는 이들은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역시 읽을 때마다 그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갈 겁니다. 이는 이른바 "나쁜 남자의 매력"과는 또 다른 류라 생각하는데, 어딘가 불쌍하다는 동정 비슷한 게 바로 그 이상한 끌림의 주된 원인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 도리언은 사교계 데뷔 당시 그리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생김새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자기 확신이 부족하고,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는 해도 그 이유를 스스로도 잘 모르는, 타인을 위한 관상용으로 고안된 전시품 같은 소외감에서 벗어날 줄 몰랐던 위태한 멘탈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머리가 비었고, 출신이 한미(p74 이하에 나오듯 귀천상혼 출신)했기 때문에, "인기, 선망"과 "자존(매우 유리한 조건이었건만)"을 일치시킬 수 없었지요.

"그만! 그만하세요. 너무나 당혹스럽군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뭔가 대꾸할 말을 찾고 싶은데.... (중략) 아니,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게 낫겠어요." (p44)

사실 여기서뿐 아니라 도리언은 아무 생각이 없을 때가 가장 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 소년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도리언은 이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별안간 삶이,(쉼표는 제가 넣었습니다) 타는 듯 강렬하게 보였다. 자신이 불길 속을 걸어온 것처럼 보였다. 왜 진작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p46)

마치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뱀의 꾐에 넘어가 결국 부끄러움을 알게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었으면 도리언은 아마 미모를 급속히 잃게 되었을 텐데(음?? 누구 맘대로)....

"그레이군, 자네의 외모는 놀랍도록 아름답네. 찡그리지 말게. 사실이 그러니까(아름다움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말에 도리언이 반응한 듯). 그리고 미모는 천재성의 한 형태일세(헉!). 아름다움은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위대한 요소 중 하나야. ..... (중략)... 시간은 자네를 시기한 나머지 백합 같고 장미 같은 미소에 전쟁을 선포할 걸세... (하략)"

화가 홀워드는 이런 열렬한 확신의 표백을 그저 말에 그치지 않고, 신이 자기에게 따로 부여한 천재성을 발휘하여 화폭에 실천으로 옮깁니다. 말은 그러나 예컨대 도리언의 (아래) 표현처럼, 생각보다 위력이 강한 것이었습니다.

"... 음악이 우리 내면에서 창조한 것은 오히려 혼란이었다. 하지만 말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얼마나 명백하고 잔인하며 생생한 것인지! 세상의 그 누가 말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얼마나 미묘한(앞에서 명백하다고 한 것과 대조하여) 마법이 들어 있는가!"

여튼 화가 바질 홀워드의 손에 내려진 (신의)축복과, 유일한 자존의 근거가 사람들이 선망하는 화사한(resplendent) 미모에 있게 됨을 비로소 깨달은 도리언의 간절한 희구(p58에 나옵니다)의 위력을 함께 받아서이기라도 한지, 홀워드 필생의 역작인 초상화는 그 주인공 도리언을 대신하여 나이를 먹습니다.

여기서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전 이 작품을 아동용 버전으로 초3때 처음 읽었는데, 그 서문에 보니 "... 어린이 여러분이 이해 못 할 만한 대목이 많이 나오므로 본서(어려운 표현인데)에서는 몇 군데를 고쳐서 소개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초상화가 나이를 먹고 사람은 그대로란 설정이 왠지 아이들 동화에나 나오는 설정같이 느껴졌으므로 아마 "고친 곳"이라면 여기이겠으며, 원작에는 "아이들이 이해 못 할" 훨씬 복잡하게 꼬인 "변신 스토리"가 나오거나, 아예 초현실적 요소가 제거된 진행이겠거니 짐작했더랬습니다.

근데 일 년 후 삼성세계문학 중 이 중편이 끼어든 권이 있다는 걸 뒤늦게 발견하고 열심이 읽었더랬는데(故 이가형 譯 - 해문 추리소설 번역 참여로 유명한 그분이죠), 뭐 거의 그대로라는 걸 알고 오히려 당황했습니다. 지금 관점과 판단으로도 장담할 수 있는데, 제가 당시 읽었던 그 아동판은 성인 버전(이란 게 따로 없지만)이나 완역본과 별 차이가 없었고, 아마도 당시 역자들은 원작에 스며든 동성애 팩터를 우려하여 몇 대목(낯간지러워지는 대사 중 몇 구절)을 쳐낸 걸 두고 그리 말했던 듯합니다. 아니면 후반부에 등장하는 화학자 앨런 캠벨과 그가 사실은 그렇고그런 관계였다든지...

헌데 오스카 와일드의 실제 생이 어떠했건 간에, 이 작품에는 외견상 이른바 퀴어 요소가 (그 숨은 주제를 제외하곤) 거의 없으며, 도리언 그레이는 작중에서 잘 드러나듯 의심의 여지 없는 이성애자입니다(오히려 정도가 지나침ㅋ). 혹 서두에서 화가 홀워드와 헨리 경이 이 젊은이를 농락하고 버린 일에 한이 맺혀, 여성을 상대로 한 엽색 행각에 빠져들었다는 대목이라도 들어갔다면 모르겠습니다만(아주 제가 창작을 하는군요).

이 역본에도 잘 드러나듯 당대의 정치 현실에 대해 언급한 몇 대목은 있습니다. 이를테면 p69에 올버니의 파머 경을 두고 그 성향을 설명하면서 "... 정치적으로는 토리 당을 지지했는데 정작 토리 당이 집권할 무렵에는 '급진주의자들의 무리'라며 호되게 비판을 가했다" 같은 말을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식으로 따지면 "자유한국당 그것들 영 못 쓰겠더구만! 웬 종복 좌파들이 그렇게 많아?"라고 하는 식인데, 어느 정도 보수 성향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이무렵 젊은이들[출신 계층 불문하고]에게 토리 당이 인기 없었던 건 잘 알려진 사실)"... 이처럼 그는 영국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이었지만, 정작 그는 영국이 망해가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 거 참. 이 책은 예언서(?)를 겸한 것이, 실제로 영국은 이 파며 경이 우려(!)했던 대로 완전히 망할 뻔했다가 1980년대 들어서야 기사회생을 했다는...

헨리 경도 그 피가 어디 안 간다고 보수적인 건 매한가지라서, p87 같은 데를 보면 "날씨를 제외하면 전 영국에서 어떤 것도 개선되길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물론 농담조로 한 말이지만). "요즘 영국 남자들은 기껏해야 돼지고기 가공업이나 벌이던 가문의 미국 여자들과 결혼하는 게 유행인데...." 같은 대목도 나오는데, 대표적인 게 윈스턴 처칠 경의 양친이었죠. 유행을 잘 따라서인지 그런 트렌드의 소생 중에 이런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으니(이 양반도 초년에는 휘그당에 몸을 두었다가 나중에 보수당으로 옮겼지요) 유행이 마냥 해롭거나 가볍거나 속물적이라고 비난할 건 아닙니다. 흠.

도리언이 일생을 두고 타락하게 된 게, 불쌍한 여배우 시빌 베인을 버리고 자살하게 만든 후부터인데, 이 책에도 나오지만 그녀 역시 귀천 상혼 소생(부모 스탠스가 바뀌긴 했습니다만)이었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이 대목에서 도리언이 제 스스로를 부정하고 파멸시킨 터닝 포인트로 상징을 삼았을지 모릅니다. 아직 열여섯 살이었던 남동생 짐(제임스 베인)은 도리언의 마음 한구석에 남은 마지막 정의감의 잔해이고 말입니다.

"오, 내 철부지 동생아, 그분은 신사이고 왕자님이셔. 너도 보면 그분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완벽한 분이라는 걸..." 정작 너무도 철이 없었던 건 물론 그녀였지만 말입니다. 어째서 여자들이란 한번 눈에 콩깍지가 씌면 이처럼 분별을 잃게 되는 건지. 이런 천하에 쓰레기 같은 놈팽이를 두고 말입니다. 시빌 베인이 말한 "이상형의 왕자님"이란 구절은 물론 원 텍스트의 "프린스 차밍"입니다. 제가 어려서 읽은 아동판에는 오히려 처음에 역주 한 번만 넣어 주고 이 "프린스 차밍"이 번역도 없이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덕분에 영어 공부도 했다는...) 프랑스어처럼 수식어가 피수식어를 뒤에서 꾸미는 구조로도 볼 수 있고, "차밍"이 그 프린스의 이름이라고도 새길 수 있죠.

"하지만 당신은 언젠가 책 한 권으로 나를 타락시켰어요. 전 그 일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해리, 누구에게도 그 책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책 한 권이 문제가 아니라 이 헨리 경 같은 놈하고 엮이게 된 자신의 운수, 아니 자신 속에 싹트고 있던 못된 씨알머리를 먼저 탓해야 옳겠습니다만 우리는 도리언 같은 새xxx한테 애초에 뭘 기대할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압니다. 요즘 같이 책이 대량으로 인쇄, 보급되는 시절이라면, 설령 진짜 마력을 지닌 책이 있다손 쳐도 아마 대중의 "입" 앞에서 그 에너지가 15도로 희석되지 않을까요? 우리 전승 문학 <구지가>를 봐도, 여러 사람의 입이란 쇠도 녹일 정도라고 하니 ㅋ

마지막은 사람들이 "아주 초라하게 늙은 사내의 손에 끼어진 반지를 보고서야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인데, 제가 읽었던 아동판에서는 이처럼 원문에는 전혀 없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신이 모시던 분인가요?"
"아뇨". 햐녀는 대답했습니다.
"우리 주인님은 저 초상화에 그려진 분처럼 젊고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어떻게 된 게, 저는 그 아동판의 결말이 훨씬 마음에 더 듭니다. 아마도 그 각색하신 분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너무도 몰입을 한 나머지 아예 자기식으로 창작까지 한 듯한데(ㅎㅎ), 이게 오히려 더 원작의 유미주의 분위기를 잘 살려서 그럴싸해지는 결말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영원한 경의와 애모의 메시지도 잘 살고 말이죠. 또, 죽고나서 신원이 밝혀지면 가뜩이나 생전에 평판이 안 좋았던 그레이가 말 그대로 "유취만년" 신세로 떨어지는 거 아닙니까. 이런 변형된 결말은 그 아름다움을 봐서 행해지는 마지막 "사면(pardon)"으로 볼 수도 있고 말입니다.

박혜정 작가님의 일러스트는 평소에 우리가 잘 알듯 날카로움과 퇴폐적 아름다움이 동시에 구현된 참으로 미묘한 그녀만의 스타일 덕분에, 혹시 이런 기획이 나온다면(아니면 팬 서비스 차원에서 혹시 그녀만의 각색판이 그려진다면) 최적의 작가겠다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이런 책이 나와서 놀랐습니다. 단, 일러스트가 좀 더 많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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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영혼을 꿈꾸다
임창석 지음 / 아시아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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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살아 있다." 사상가나 철학자들뿐이 아니라 자연과학자들 상당수마저, 표면에 기생하는 하잘것없는 생명체들을 거대한 힘과 호흡으로 굽어보는 지구의 "영혼"을 두고 가이아 이론으로 체계화한 바 있습니다. 이는 그 실체나 논거가 구비되어 있느냐 여부와는 무관하게, 양식 있는 지구인들로부터 옹호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지구 온난화 이론 같은 것도 사소한 논거 흠결을 빌미삼아 반대진영으로부터 트집을 잡히기도 합니다만, 우리 대부분은 탄소 원료 저감 등의 실천을 통해 이 추세가 반드시 가로막아져야 한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생존의 절박한 문제 앞에서 논거를 따지고든다는 건 참 한가한 짓입니다. 말 안 듣는 못된 아이들은 엄마한테 호되게 엉덩이를 맞는다는 건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진리 아니겠습니까.

임창석 저자는 (지난번 리뷰에서도 말했지만) 현직 정형외과 전문의이자, 이 책의 유려한 문장에서도 잘 드러나듯 등단 시인이며, (아마도 우리 독자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사진을 참 잘 찍으시는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수상록(잠언서?)마저 읽고 나서 든 느낌은, "은근한 예언자"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단지 무슨 구약성서 등에 나오는, 눈빛 심상치 않고 거동 살벌한 그런 예언자풍이 아니라, 잔잔히 지혜를 일깨우고 좋은 말로 엄마처럼 타이르는 단정(端正)한 현인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과연, 우리들은 선지식처럼 어머니 지구에 영혼이 있음을 알았지만, 세파와 이기심에 부대끼면서 우리 자신에게 영혼이 있는줄조차 까맣게 잊고 지냈습니다. 이 책, 즉 "지구의 영혼"에 대해 자근자근 싱기시키는 가르침이란, 먼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궁극의 진리를 다시 상기시킵니다. "너 자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서로와 연결된 하나이며, 인간들 역시 자연과 일체가 된 존재이다." 그러니 개인만 살겠다며 스스로의 몸을 해쳐 대는 짓거리란 얼마나 우습고도 어리석습니까.

이 책은 겉으로 보아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실제 소설로 읽어도 됩니다. 아주 두드러진 사건이 없어도, 등장인물들이 담담히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의 자신을 짚어가는 포멧은 역시 익히 확립되었던 전통 중 하나입니다. 마치 저자 본인의 페르소나라고 봐도 될 듯한 "의대생(레지던트) 제임스"의 회고 액자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제임스는 장래가 창창한 예비 의사이고 역량과 솜씨도 좋지만 알지 못할 한 가닥 회의를 마음 속에서 지우지 못합니다. 온갖 인종이 모여드는 뉴욕 허드슨 강가에서 각종의 정물, 혹은 역동적 풍경을 스케치하는 그의 모습 역시 저자 자신의 상(像)을 어느 정도는 반영하는 듯합니다. 해부, 해부,... 제임스는 마치 전역 후 얼마 안 된 군인이 다시 내무반 생활로 돌아간 악몽에서 깨어나듯,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 반복되는 루틴과, 칼을 쥐고 낯선 노인의 시든 육체를 가르는 역겨움에서 벗어날 방법이 무엇일지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이런 그에게 느닷 다가온 건 어느 소녀의 일기장이었습니다. 소녀의 이름은 "마티"인데, 마티는 들으면 꼭 남자 애 이름 같지만 Matrha의 애칭으로도 볼 수 있으므로 여자애한테도 흔히 씁니다. 남자는 Marty라고 살짝 철자가 다르다고도 하는데 뭐 꼭 그렇지만고도 않습니다. 여튼 이 소설에선 일부러 Marti라고, 소녀 이름의 정확한 철자까지 제시됩니다.(성씨는 "하비". 마치 해부학의 아버지 윌리엄 하비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마티는 엄마가 없습니다. 어느날 생전의 엄마와 함께 놀던 뉴욕 바닷가를 떠올리며, 새로 이사 온 오하이오 주 이리 호수 근처에서 뛰어다니다 구덩이에 빠져 크게 다칠뻔하고 기절까지 합니다. 뉴욕은 바다에 면해 있지만 이곳 이리(Eerie) 호수도 바다처럼 넓기에 소녀에게 기시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여튼, 정신을 차려 보니 큰 몸집의 갈매기가 자신의 아래에 깔려 죽어 있느데, 따스하기도 했고 푹신하기도 하다가 이제는 싸늘해진 무엇이 바로 지금 갈매기의 사체인 걸 알고 소녀는 놀랍니다. 이 사실을 아빠에게 말해주자 하비 씨는 차분히 딸의 머리를 어루만집니다.

"엄마가 너를 지켜 줬나 보다...."
"네에....?"

한편, 장면이 바뀌어 소녀 마티와 리처드는 그전부터 자주 만났지만(?), 이번에 제대로 인사를 나누며 통성명까지 거칩니다. 무슨 소린가 하니, 리처드는 본래가 오하이오 출신이고 거기서 학부까지 마쳤지만 의대(콜롬비아대) 공부 때문에 뉴욕까지 온 거고, 아까 말했듯 마티는 뉴욕에서 나고 자랐으나 어머니를 잃은 후 이곳 오하이오로 아빠 따라 이사 온 겁니다. 그러니 둘은 고향과 거주지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교환(?)한 셈입니다. 리처드가 오하이오 체류 시절 호숫가에서 뛰놀던 마티를 먼발치에서 본 건데, 그때는 리처드 본인도 개인 마티를 의식한 건 아니었고 그저 풍경의 일부로 받아들인 듯합니다.

앞에서 마티가 엄마를 잃은 소녀라고 했는데, 리처드 역시 비슷한 상실의 아픔을 안고 자랐습니다. 형 에릭이 전쟁터에서 죽었는데, 주변에서는 영웅의 죽음으로 떠받들지만 어린 리처드에게는 영문 모를 큰 시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소년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현인 아첵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문까지 닫았습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작가님의 다른 책 <자신의 영혼에 꽃을 주는 100가지 이야기>의 한 대목을 들춰 보게 됩니다. 사람은 정신과 육체 외에 "영혼"이라는 구성 요소를 갖는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문화권에서, 양심이나 행동 원칙의 일관성 같은 게 결여된 채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사람을 두고 "영혼을 악마에게 판 자"라는 비난을 하곤 했죠. 겉치레로 반듯한 예의를 지키고 치밀한 계산 하에 행동하기는 하나 결국 이웃을 해칠 궁리만 하는 사람에게 영혼이란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치가 어찌 기독교 문화권에만 통하겠습니까? 바른 마음을 지니고 공동체에 속하며, 이웃과 가족에게 뜻있는 결과를 남기려 애 쓰는 인간 문명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치이겠습니다.

 

저런 나쁜 유형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영혼을 잃기로 작정하고 이기심만을 키우는 사이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런 인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영혼에 꽃을 주는" 행위와 마음가짐이 때로는 의식적으로 필요합니다. 척박한 황무지에 절로 꽃이 필 수 없습니다. 딴에는 정성스레 가꾸는 화분에 꽃 한 송이가 피기까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실제로 꽃을 다뤄 본 사람이라야 실감합니다. 하물며, 악이 언제나 방문객으로 깃들기 쉬운 우리 인간의 경우야 일러 무엇하겠습니까? 

 

저자는 말합니다. "인간이란, 우주에 플러스 효과를 일으키는 존재입니다.(p31)" 무슨 뜻일까요? 영혼의 안식이 깃들 여유가 없는 척박한 물리계에서 1+1은 언제나 2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따뜻한 마음, 풍부한 상상력,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여유 등은, 1+1의 결과를 때로 3으로 만듭니다. 자연 법칙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1+1=3이야말로 인간에게 맞는 산술법"이라고 합니다. 1+1=3을 때로 만들지 못하면, 그 사람은 인간으로서 어쩌면 결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사람이라면 기계적 산술 법칙을 때로 초월할 줄 알아야 합니다.

 

"원주민들은 죽은 이의 슬픔보다도,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 속에 남겨진 죽음을 더 비극으로 생각한단다.(p60)." 그렇습니다. 물론 돌아가신 분, 더 이상 우리와 살을 맞대고 조곤조곤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분의 죽음이란 그 자체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비극이고 아픔입니다. 그러나 먼 천국에서 여전히 우리를 내려다보며 그리워하실 망자의 마음도 마음이지만, 더 찢어질 듯 아픈 건 살아남아 여전히 이승에서 삶을 부대끼는 우리들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또 어디 내 마음만 잘 추스른다고 그게 다이겠습니까. 다른 유가족들, 친구들, 협업자들, 추종자들의 설움도 달래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구란 행성은 아직도 불완전한 단계란다... 이 넓은 시공간에 질서를 유지하고 착한 주파수를 쏘아대는 뇌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들처럼 진화된 집단 생명체의 조화된 뇌세포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단다.(p96)." 가슴이 뭉클해지는 말씀입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 적 있습니다. "우주는 너무도 광대하며 인간은 티끌보다도 작다. 그러나 거대한 공간인 우주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반면 그 작은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티끌보다 작은 인간이 우주 전체보다도 존엄하다는 것입니다. 생명체가 스스로를 복제하고 거의 끊임없이 대를 이어가며 심지어 우주 전체의 작동 원리까지 궁구해 낼 단계까지 이르렀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그런 존엄한 생명체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타 생명체와 교감하며 희로애락을 느끼고.. 이것이 그저 한 개인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런 순간에도 우주를 향해 주파수를 뿜어내는 것입니다. 그 주파수가 모이고 모여 감히 저 거대한 우주에 영향을 끼치며 마침내 어떤 운명조차도 바꿀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하찮은 개체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씀이나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의해서 벌써 우주에다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벌써 하나의 우주입니다. 함부로 살아서 될 일이겠습니까. 책임이란 걸 의식해야 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보다 성숙해지면 종교 간의 갈등도 사라질 것이고 지구의 영혼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인류 전체의 마음이 싹트게 될 것이다.(p115)" 인류의 마음입니다. 철수와 영희의 마음이 아니라, 70억 인구가 하나되어 뿜어내는 "하나의 거대한 마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마음은 저 차갑고 외로운 우주 검은 구석조차 온기로 데울 수 있습니다. 어떤 거창한 레이더나 인공 발열 장치를 통해서? 아닙니다. 그런 걸 만들려면 환경을 해치고 탄소를 다량 발생시켜야 합니다. 그건 자연과 우주와의 교감, 화해가 아니라 또하나의 전쟁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착한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이웃과 공유하고 우주로 향해 뿜어낼 수 있다면 그순간 우주는 환히 밝혀지고 암울한 팽창을 멈춥니다. 우리는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마침내 죽음도 넘어설 것입니다. 이 모든 게 다 우리 개인개인이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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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분적분과 벡터해석
박종안 외 지음 / 북스힐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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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체로 대학 교과서들은 지나친 수식적 엄밀함을 동원하여 설명을 해 나가므로 초심자, 혹은 갓 대학 학부 수준 수학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는 게 사실입니다. 한편으로 학부 수준 수학이라 해도 이미 고교 시절부터 상당한 소양을 쌓았거나 특출한 적성을 보유한 이들이 이 과목을 수강하는 게 보통이므로, 다른 과목과 달리 수학은 초보자의 사정을 봐 주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내용 전개가 이뤄지는 게 사실입니다. 타 분야에서는 "힘들지? 호~호~" 하며 어린이 돌보듯 배려하는 대중서도 많으나, 수학은 그런 책이 좀처럼 쓰여지지도 않습니다. (구태여 찾자면 예전 김용운 교수님 형제분이 쓰신 학생용 책들이 있긴 합니다)

해석학(철학의 그 해석학이 아닙니다) 역시 차분히 한 걸음씩 떼어가며 자신만의 자질을 닦아 나가려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좌절을 안기기 일쑤이니, 몇 페이지 넘겨 보고 "어 재밌군?" 같은 느낌이 바로 와 닿지 않으면 아예 시도도 않는 편이 낫습니다. 어떤 분들은 학창 시절에 수학을 소홀히했던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지 사회인이 된지 오래인데도 늦게나마 도전해 보고 싶어하기도 하는데, 그 의기는 멋지지만 성과가 잘 나지 않으므로 시도 후 괜히 마음에 상처만 더 커지는(?) 데다, 애써 머리에 몇 가지 지식을 넣는다 해도 어디 마땅히 쓸 데도 없습니다.

그래도 공학도들, 혹은 여러 이유로 수학과에 적(籍)을 두게 된 이라면. 수학이라는 기초 위에 지식의 체계를 쌓아 나가야만 하며 이 길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가능하면 친절하게 이 분야 입문을 도와 주는 책이 필요한데, 초심자에게 도무지 친절하려야 할 수가 없는 구조적, 숙명적 난점을 그나마 최대한 완화해 주는 교재가 이만큼 성의를 보이기도 드물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학부 초보 수준에서, 이 책 p43 이하에 본격적으로논의되는 "음함수의 미분법" 만큼 활용도가 높은 정리가 또 없겠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예컨대 치환적분 같은 것도, 치환적분(이 책 p118 이하에서 다룹니다)의 기본 테크닉에 너무 의존 않고도, 음함수의 미분 기초 원리만 갖고서도 어찌어찌 풀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방법을 자기 힘만으로 생각해 낼 정도면 영재 소리를 들어 마땅한데, 그렇다 쳐도 이후 과정을 보며 아 이 방법이 훨씬 편리하구나 싶으면 다시는 그런 원시적인 수단에 의존 않게도 되죠.


한국에서는 선행학습이다 뭐다 해서 너무 문제 풀이 위주로 진도 빼기 경쟁을 하다보니, 웬만큼 잘하는 학생들(수학 영재가 아닌 공부 잘 하는 공대생 정도 레벨)도 그냥 죽지 못해 진도에 끌려 가는 고역을 겪곤 합니다. 수학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가며 자신만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쾌감이 다른 영역에서는 도무지 맛볼 수 없는 성격인데, 너무도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우등생들도 이 상쾌한 지점을 종종 잊습니다. 그래서, 수식(數式)을 너무 강조하지 않고 이처럼 최대한 말과 직관으로 풀어주는 책이 더 필요하기도 합니다.

부분적분은 꽤나 기교적입니다. 하나의 법칙이라기보다는 계산 과정에서의 테크닉에 가깝죠. 미분을 배울 때 처음 다루는 게 곱미분입니다. 두 식의 곱으로 이뤄진 함수는, 하나씩 미분하고 다른 하나는 원 상태를 유지한 후, 도출되는 둘을 합으로 표현한 게 그 도함수라는 원리 말입니다. 그건 또 어떻게 해서 그런 게 나오냐고 묻는다면, 뉴턴이 처음 제시한 "극한을 통해 도함수를 유도하는 방법"을 아주 교과서적으로 차분히 되짚는 방법이 있겠습니다.

여튼 이 곱미분의 원리를 이용하여, 까다로운 모습을 띤 함수를 (미분의 반대 과정으로) 적분해 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쉽사리 적분 못 하는 함수도 부지기수이나, 여튼 비교적 손쉽게 적분할 수 있게 애초에 세팅이 된 함수라면 괜히 뺑뺑 돌아가지 않고 이 "부분적분법"으로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원리는, 로그함수, 다항함수, 삼각함수, 지수함수의 우선 순위를 둔 후, 이들 모양에 최대한 가까운 걸 f(x)로, 다른 남은 하나를 g'(x)로 놓고(기호는 저것들 아닌 다른 뭐로 삼아도 무방합니다), 곱미분 원리의 역(逆)에서 나온 대로 정해진 공식에 그저 대입하는 것입니다. g'(x)는 나중에 원함수인 g(x)로 돌려야 하므로, 가능하면 적분이 가장 편하게 이뤄질 만한 식과 매칭시켜야 이후 계산에 힘이 덜 든다는 점에 착안했죠. 앞에서도 말했듯 어떤 법칙이라기보다 계산상의 요령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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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부가가치세 실무
황종대.강인.신정기 지음 / 삼일인포마인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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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부가(附加)가치(價値)세는 1970년대 후반에 한국에 도입된 대표적인 간접세입니다. 현재는 국가 재정의 중요 부분을 지탱할 만큼 비중이 커졌습니다만 도입 초창기만 해도 조세 저항이 너무도 컸었죠. 어떤 사람들은 이 세제의 도입 시기가 행여 조금만 늦었어도 과연 한국에 안착할 수 있었겠냐며, 중소 상인들에게까지 큰 부담을 안기는 제도 자체의 특성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미국에는 아직까지도 부가가치세가 시행되지 않고 있으며 주(州)마다 영업세(sales tax)가 부가되기는 하나 이는 통일적이지 않습니다. 영국은 용케도 1970년대 전반에 이 세제를 도입했으며,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늦은 1989년이 그 시초입니다.

부가가치세 도입이 늦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의 담세자인 상인들에게 너무도 큰 불편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영수증의 교부는 요즘이야 당연한 일상이 되었지만 부가세를 시행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거래시(매입, 매출)마다 이를 작성한다는 게 꿈 같은 일입니다. 물론 부가세를 시행 안 해도 거의 어느 나라나 소득세(사업소득) 납부 의무는 있으므로 거래 증빙 자료는 갖춰야만 합니다. 한편, 요즘처럼 신용 카드 거래가 보편화하고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현금 영수증"교부가 필요해진 시스템인데, 차라리 1970년대 후반이 아니라 1990년대 후반쯤에 이 제도가 전면 시행되었다면, 다른 건 몰라도 "조세 저항" 부분에서는 훨씬 무난한 분위기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게 전력 시스템 변경에서 110V → 220V 승압 조치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고도 여깁니다. ㅎㅎ

여튼 부가가치세 과세 대상 재화를 어느 업체가 사 들였을 경우, 업체는 판매자로부터 매입 대금의 10%를 추가로 내야 합니다. 비록 납세자와 담세자가 일치하지 않는 간접세라고 하나,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도입 초기에서 모든 상인들이 대단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거죠. 내가 판매자에게 지불한 10% 금액은 그의 것이 아니라, 나중에 과세 당국에 그가 납부해야 할 것을 임시로 보관할 뿐입니다. 이후, 이 물건에 나만의 가공을 더하든지, 혹은 그대로 팔든지 간에, 나는 내가 물건 혹은 서비스를 파는 이로부터 다시 부가가치세 명목으로 10%를 더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 10%는 그대로 과세 당국에 다 납부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전에 부담한 부분만큼은 빼고 내는 것입니다(이를 매입 세액 공제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나는 나만의 마진을 더 붙이고 팔았겠으므로, 내가 내어야 할 금액은 (매입 세액 공제를 감안하더라도)다만 얼마라도 더 남아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이처럼 상인들에게 심각한 부담을 안기는 것 같이 보이지 않아도(매입 세액 공제까지 받는 데다, 내가 물건을 판 상대로부터 금액을 징수하는 것일 뿐이므로) 실제로는 영수증 작성 의무라든가, 10% 가격 상승 부분 때문에 매출이 감소하는 등(어떤 이유로든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어드는 건 시장 경제의 철칙입니다), 이 제도는 이만저만 큰 원성을 사는 게 아닙니다. 차마 폐지까지는 거론 못 해도 세율을 현행 10%에서 8% 정도로 낮추자는 주장은 꾸준히 있었습니다. 간접세이므로 사실상 소득 분포 역진성이 구현된다는 면에서도 점수를 깎아먹으나, 이 제도가 궁극적으로 세원 확보에 큰 기여를 하고, 경기 활성화에도 장기적으로 긍정적이란 점을 많은 학자들이 지적합니다. 여튼 세제의 이런 이면에 대한 이해가 이뤄지면, 마트 같은 데서 영수증 받을 때 VAT 인쇄 파트가 좀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책값이 상당히 비싼데 개인보다는 업체 등에서 한 권 비치하고 두고두고 참조하는 용도가 메인이죠. (아니면 조세 관련 전문 직종이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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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 출간 30주년 기념판
로버트 풀검 지음, 최정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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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요람기의 추억을 그리워하거나, 거친 세파에 시달리며 초심을 잃어가는 성인 독자들에게, 미국뿐 아니라 30년 전 한국에서도 큰 호응을 얻었던 힐링 도서의 제목을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이 구절은 다양하게 패러디되거나 기발한 변형으로 대중들 사이에 퍼지기도 했는데, 아마도 "알아야 할 모든 것"의 강렬한 함의와, "유치원"이란 단어가 품는 따스한 심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덕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 이치는 원어인 영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자 로버트 풀검은 목사님으로 보통 소개되지만, 그 이전이나 이후나 다양한 직업을 거쳤던 분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분야에 진득하게 정을 못 붙이고 시선을 불안하게 바꾸는, 주위와 대체 융화를 못하는 떠돌이 같은 타입이 아니라, 머물던 어느 구석에서도 인생의 궁극 이면을 지긋이 응시하며 진리를 관조하는 인격자 같은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설픈 지사(志士) 타입을 흉내내거나 편협한 정치관을 남에게 강요하며 목소리만 높이는 되다 만 실업자(이런 사람은 좌파라고 해도 수구꼴통이나 마찬가지로 머리통이 콱 굳은 인간이죠), 얼치기가 아니라, "본질은 그게 아니지 않나요?"를 잔잔히 일깨워주는 듬직한 노 스승의 은근한 목소리가 이 책 안에서 힘차게 공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30년 전에는 저자 풀검 역시 아직도 팔팔한 장년의 남성이었겠지만, 그 무렵부터 그는 노숙한 지혜를 이미 정신에 장착하고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이 책에는 뻔하고 식상한 힐링 동화만 실려 있는 게 결코, 결코 아닙니다. 로버트 풀검 저자가 그 다채로운 주유 천하 여정만큼이나, 실제로 자신이 겪은 일상의 경험, 혹은 있을법하지 않은 장소에서 드물게 만날 법한 이들과 겪은 묘한 조우에 얽힌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펼쳐집니다. 이런 체험담이 일상 잡기로 그치는 게 전혀 아니라, 그 안에서 분명한 "교훈의 정리"가 함께 이뤄집니다.

예를 들어 p132를 보면, 아이다호 주(州)의 남파에서 온 어느 영어 교사 부부와 치른 작은 소동에 대한 일화가 나옵니다. 배터리 방전 때문에 점퍼 케이블이 필요해서 저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우리 독자들도 다 잘 알지만) 풀검 목사는 기꺼이 이들을 도울 마음을 품었습니다. 풀검 목사가 특별히 선량해서라기보다, 우리들 역시 이런 상황에서 거리낌 없이 부부를 도우려 나섰을 겁니다. 문제는 저자가, 이들을 도울 정확한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영화에 보면 한 캐릭터가 "당연히 흑인은 (도둑놈처럼) 자물쇠 따는 법을 알고라도 있다고 생각하는거냐?"라고 퉁명스레 받아치는 장면도 나오지만, 기대를 잔뜩 했던 부부에게 (의외로 관련 기술이 부족하고 손놀림이 서툴렀던[이건 진짜 의외더군요]) 풀검은 제대로 된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그 부부로부터 따뜻한 격려가 담긴 서신과 선물까지 함께 받은 풀검이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작가 자신을 가리킵니다)이 바로 옆에 있고, 열심히 도우려고 해도, 그가 어리석으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 "굿 사마르탄"은 선의도 있었고, 환자를 적시에 구조할 요령이랄까 침착성을 갖춘 사람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니 수식어인 good는 "착하다"는 뜻 못지 않게 "쓸모있는"이란 뜻도 함께 가졌던 셈입니다(!). good but useless한 Samartan이었다면, 아마 예수님이 그 수훈 중에 인용할 가치를 못 가지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네 생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어서, 설령 의욕이 충만하고 야심이 하늘을 찔러도 그에 걸맞은 지식과 요령, 혹은 포괄적인 능력이 없으면 그 대찬 각오랄까 계획 전반까지가 실제에서 별반 소용이 없습니다. 이게 유치원을 졸업한지 한참 지난 우리들이 사회에서 실제 겪고 쓰라리게 배운 교훈입니다. 엄청 깨지고 난 후 뭔가 각성이라도 하면 좋은데, 그렇지 않고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면서 어디에도 안 통할 외골수만 부리는 게 인격의 가치라고 착각하는 모습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도 봅니다. 아마 더 참담한 실패를 겪고 나서도 여전히 마찬가지일 겁니다.

위 문단에서 "소용, 쓸모"에 대한 언급을 했습니다만, 저자께서 확실히 인생의 쓴잔도 적지 않게 들이킨 분이라서인지 책 곳곳에 이 말이 자주 나옵니다. p93을 보면 최초의 열기구 비행에 대한 일화가 나오는데, 무지몽매한 농부들이 몰려들어 땅에 떨어진 열기구를 갈갈이 찢었다는 우스운 촌극이 빚어졌다고 하죠. 몽매한 대중 속에 숨은 폭력 선호 경향은 이처럼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낙오자 특유의 피해의식과 광기가 집단 군중 심리 속에 감춰져 정의를 사칭할 때 빚어지는 참극 역시 이와 같습니다. 여튼, 이 일화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이 "대체 그런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라는 질문에 "그럼, 갓난아기는 어디다 쓴답니까?"라고 되받아친 일화가 아주 유명하죠. 이 이야기는 그 주인공이 마이클 패러데이로 바뀌어서 전승되기도 합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을 것만 같으나, 이 책에서 인용되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한 법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저는 <패러독스 이솝 우화>라는 책에서 어느 주인공이 "신이시여, 정말 세상을 더럽게도 다스리는군요!"라고 절규하던 장면을 읽은 적 있습니다. 그래도 세상엔 아름다운 국면이 많지만, 우리는 아마도 "참 드럽게도 돌아가는 세상"에 분노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대체로 분노의 경우가 더 잦으면, ㅎㅎ 그건 아마도 본인이 인생을 더럽게 살고선 애먼 신(있는지 없는지도 모를)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저자는 어려서(이거는 정말로 유치원 때의 경험이겠죠) 숨바꼭질을 무척 못했는지(솜씨가 서툴렀는지), p42에서 "유독 숨는 재주가 뛰어났던 아이"를 떠올리곤 합니다.

독자들이 놀라게 되는 대목은, "신 역시 그 아이와 비슷한 존재 아닌가" 하는 쪽으로 결론이 옮아가는 부분입니다. 이에는 여러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대체 어디 숨어 계시길래 세상에 이리 불의가 횡행하며, 저능한 실업자나 노망한 닭대가리가 끝도 없이 헛소리를 지껄이게 방치하시는가 하는 원망일 수도 있고(ㅋㅋㅋㅋ), 반대로 신의 이치란 참으로 오묘하여 범상한 인간의 눈으로 그 신묘함을 도무지 알아챌 수 없다는 한탄일 수도 있습니다. 애매함과 속 깊음은 사실 저자(혹은 화자)의 내공에 따라 확연히 갈리는 편인데, 이 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치한 영탄조나 (반대로) 찌질한 원망 일변도가 아니라, 이처럼 두 영역의 경계에서 묘한 통찰을 담담히 읊어대는 저자의 실력이 크게 작용도 한 것입니다. 챕터 말미에는 중세 신학자를 인용하며 "신은 본디 숨은 존재(Deus absconditus)"라는 말까지 인용합니다. 이 라틴어는 영어에도 그 직접 흔적을 현재까지 남기고 있습니다.

이웃을 잘 만나야 신상이 편한 법인데, 풀검 목사는 주택 경계에 피어난 민들레를 못 참아 제초제를 뿌리고 만 어느 이웃과 겪은 작은 트러블도 소개합니다(p170 이하). "이보쇼, 당신이 죽인 잡초는 내게는 소중한 민들레였단 말이오!" "개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이웃은 고개를 돌리는데, 이 판국에서도 저자는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응시합니다. ("나의 광기 어린 표정과 시선을 뒤로 하고 그는...") 저는 이런 숨은 유머가 이 책의 가치를 한층 높였다고도 생각합니다. 많은 삼류 저자들은 자신의 책에서 자신을 절대 선, 억울한 피해자, 정의의 독점 대변자로 포장합니다. 그러나 풀검 목사는 다분히 비정상적이고 찌질한 면까지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데, 이게 오히려 여유 있고 의젓한 저자의 성숙한 면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찌질이도 자기 약점을 그대로 노출할 때가 있는데, 대개 더 물러설 곳 없는 궁지에 몰렸거나 미숙한 유아가 엄마를 애타게 찾듯 싸구려 위안을 간절하게 바랄 경우가 고작입니다. 결코 성찰이나 달관의 산물 같은 게 아니죠.

"잊지 말자. 요즘 유행하는 말마따나 스트라이크 세 번이면 아웃이란 걸." 이 구절은 확실히 시대상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빌 클린턴 대통령이 저 무렵 범죄자가 전과 3범이면 종신형에 처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죠. 이 법은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연방 정부의 적자폭만 부풀리거나 교도소에 납품하는 업자들의 배만 불려줬다는 부작용이... 여튼 저자는 "대체 시민의 자격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아마도 미국 국민의 절반 가량은, 정기적으로 갱신되어야 하는 시민의 자격이 문제되는 세상에서라면 바로 터전을 잃을 수 있으며, 추하고 늙고 화를 잘 내는 내 친구 대부분은 당연히 실격"이라며 다분히 냉소적인 결론, 혹은 비판을 제기합니다. 사실 이 말도 농담인지 진담인지가 구분이 모호한데, 이런 챕터는 확실히 미국 밖에서보단 안에서 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을 법하죠. 안타까운 일은, 30년전이나 지금이나 이민자 문제, 부평초처럼 떠도는 이들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심지어 미국 바깥으로까지 확산(지난주에 크게 이슈화한 이탈리아의 난민 수용 거부라든가)된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더군다나 현재 미국에는 이상한 자가 이상한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다며 볼썽 사나운 자화자찬까지 하고 있으니...

잘은 몰라도 이 목사님은 근사한 여성과 데이트하는 즐거움을 구태여 포기할 분 같지는 않습니다. p239에서 저자는 어느 근사한 여성에게 "추궁"받은 신랄한 질문에 대해 여느때처럼 근사하게 둘러치며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살면서 끝없는 우울과 절망에 빠져들 때 나는 어떻게 빠져나왔던가?" "'무릎을 꿇어라, 여기 천사의 소리가 들린다.'" 사실 뒤의 것은 그와 종파를 달리하는 모르몬 성가대의 노랫소리였습니다만, 목사님은 이 챕터에서도 "아니, 그래서 목사님은 어떻게 빠져나왔다는 건데요?"라는, 분노 어린(?) 질문에 대해 직접적으로 답은 안 합니다. 그가 들려 주는 충고는 그저 "베토벤"입니다. 베토벤은 자신의 굴곡 많은 인생에 대해 "작품"이란 답을 내놓았는데, 그가 거둔 인생의 승리는 (이 저자의 말처럼) 9번 교향곡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이거, 들리는 사람만 들리고 백치의 닫힌 돌 같은 머리통에는 스며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절절한 교훈을 저자는 그리 뻐겨대지 않고, 마치 유치원 꼬마가 무용담이나 말하듯 잔잔하게 소박하게 유머러스하게 우리 독자들에게 들려 주는 것입니다. 성공한 책에는 확실히 그 무엇이든 선명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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