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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 출간 30주년 기념판
로버트 풀검 지음, 최정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5월
평점 :
아득한
요람기의 추억을 그리워하거나, 거친 세파에 시달리며 초심을 잃어가는 성인 독자들에게, 미국뿐 아니라 30년 전 한국에서도 큰
호응을 얻었던 힐링 도서의 제목을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이 구절은 다양하게
패러디되거나 기발한 변형으로 대중들 사이에 퍼지기도 했는데, 아마도 "알아야 할 모든 것"의 강렬한 함의와, "유치원"이란
단어가 품는 따스한 심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덕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 이치는 원어인 영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자
로버트 풀검은 목사님으로 보통 소개되지만, 그 이전이나 이후나 다양한 직업을 거쳤던 분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분야에 진득하게
정을 못 붙이고 시선을 불안하게 바꾸는, 주위와 대체 융화를 못하는 떠돌이 같은 타입이 아니라, 머물던 어느 구석에서도 인생의
궁극 이면을 지긋이 응시하며 진리를 관조하는 인격자 같은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설픈 지사(志士) 타입을 흉내내거나 편협한
정치관을 남에게 강요하며 목소리만 높이는 되다 만 실업자(이런 사람은 좌파라고 해도 수구꼴통이나 마찬가지로 머리통이 콱 굳은
인간이죠), 얼치기가 아니라, "본질은 그게 아니지 않나요?"를 잔잔히 일깨워주는 듬직한 노 스승의 은근한 목소리가 이 책 안에서
힘차게 공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30년 전에는 저자 풀검 역시 아직도 팔팔한 장년의 남성이었겠지만, 그 무렵부터 그는
노숙한 지혜를 이미 정신에 장착하고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이
책에는 뻔하고 식상한 힐링 동화만 실려 있는 게 결코, 결코 아닙니다. 로버트 풀검 저자가 그 다채로운 주유 천하 여정만큼이나,
실제로 자신이 겪은 일상의 경험, 혹은 있을법하지 않은 장소에서 드물게 만날 법한 이들과 겪은 묘한 조우에 얽힌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펼쳐집니다. 이런 체험담이 일상 잡기로 그치는 게 전혀 아니라, 그 안에서 분명한 "교훈의 정리"가 함께 이뤄집니다.
예를
들어 p132를 보면, 아이다호 주(州)의 남파에서 온 어느 영어 교사 부부와 치른 작은 소동에 대한 일화가 나옵니다. 배터리
방전 때문에 점퍼 케이블이 필요해서 저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우리 독자들도 다 잘 알지만) 풀검 목사는 기꺼이 이들을 도울
마음을 품었습니다. 풀검 목사가 특별히 선량해서라기보다, 우리들 역시 이런 상황에서 거리낌 없이 부부를 도우려 나섰을 겁니다.
문제는 저자가, 이들을 도울 정확한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영화에 보면 한 캐릭터가 "당연히 흑인은 (도둑놈처럼)
자물쇠 따는 법을 알고라도 있다고 생각하는거냐?"라고 퉁명스레 받아치는 장면도 나오지만, 기대를 잔뜩 했던 부부에게 (의외로
관련 기술이 부족하고 손놀림이 서툴렀던[이건 진짜 의외더군요]) 풀검은 제대로 된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그 부부로부터
따뜻한 격려가 담긴 서신과 선물까지 함께 받은 풀검이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작가 자신을 가리킵니다)이 바로
옆에 있고, 열심히 도우려고 해도, 그가 어리석으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 "굿 사마르탄"은 선의도 있었고, 환자를 적시에 구조할 요령이랄까 침착성을 갖춘 사람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니
수식어인 good는 "착하다"는 뜻 못지 않게 "쓸모있는"이란 뜻도 함께 가졌던 셈입니다(!). good but useless한
Samartan이었다면, 아마 예수님이 그 수훈 중에 인용할 가치를 못 가지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네 생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어서, 설령 의욕이 충만하고 야심이 하늘을 찔러도 그에 걸맞은 지식과 요령, 혹은 포괄적인 능력이 없으면 그 대찬 각오랄까 계획
전반까지가 실제에서 별반 소용이 없습니다. 이게 유치원을 졸업한지 한참 지난 우리들이 사회에서 실제 겪고 쓰라리게 배운
교훈입니다. 엄청 깨지고 난 후 뭔가 각성이라도 하면 좋은데, 그렇지 않고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면서 어디에도
안 통할 외골수만 부리는 게 인격의 가치라고 착각하는 모습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도 봅니다. 아마 더 참담한 실패를 겪고 나서도
여전히 마찬가지일 겁니다.
위
문단에서 "소용, 쓸모"에 대한 언급을 했습니다만, 저자께서 확실히 인생의 쓴잔도 적지 않게 들이킨 분이라서인지 책 곳곳에 이
말이 자주 나옵니다. p93을 보면 최초의 열기구 비행에 대한 일화가 나오는데, 무지몽매한 농부들이 몰려들어 땅에 떨어진 열기구를
갈갈이 찢었다는 우스운 촌극이 빚어졌다고 하죠. 몽매한 대중 속에 숨은 폭력 선호 경향은 이처럼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낙오자 특유의 피해의식과 광기가 집단 군중 심리 속에 감춰져 정의를 사칭할 때 빚어지는 참극 역시 이와 같습니다. 여튼, 이
일화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이 "대체 그런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라는 질문에 "그럼, 갓난아기는 어디다 쓴답니까?"라고 되받아친
일화가 아주 유명하죠. 이 이야기는 그 주인공이 마이클 패러데이로 바뀌어서 전승되기도 합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을 것만
같으나, 이 책에서 인용되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한 법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저는 <패러독스 이솝 우화>라는 책에서 어느 주인공이 "신이시여, 정말 세상을 더럽게도 다스리는군요!"라고 절규하던
장면을 읽은 적 있습니다. 그래도 세상엔 아름다운 국면이 많지만, 우리는 아마도 "참 드럽게도 돌아가는 세상"에 분노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대체로 분노의 경우가 더 잦으면, ㅎㅎ 그건 아마도 본인이 인생을 더럽게 살고선 애먼 신(있는지 없는지도
모를)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저자는 어려서(이거는 정말로 유치원 때의 경험이겠죠) 숨바꼭질을 무척
못했는지(솜씨가 서툴렀는지), p42에서 "유독 숨는 재주가 뛰어났던 아이"를 떠올리곤 합니다.
독자들이
놀라게 되는 대목은, "신 역시 그 아이와 비슷한 존재 아닌가" 하는 쪽으로 결론이 옮아가는 부분입니다. 이에는 여러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대체 어디 숨어 계시길래 세상에 이리 불의가 횡행하며, 저능한 실업자나 노망한 닭대가리가 끝도 없이 헛소리를
지껄이게 방치하시는가 하는 원망일 수도 있고(ㅋㅋㅋㅋ), 반대로 신의 이치란 참으로 오묘하여 범상한 인간의 눈으로 그 신묘함을
도무지 알아챌 수 없다는 한탄일 수도 있습니다. 애매함과 속 깊음은 사실 저자(혹은 화자)의 내공에 따라 확연히 갈리는 편인데, 이
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치한 영탄조나 (반대로) 찌질한 원망 일변도가 아니라, 이처럼 두 영역의 경계에서 묘한 통찰을
담담히 읊어대는 저자의 실력이 크게 작용도 한 것입니다. 챕터 말미에는 중세 신학자를 인용하며 "신은 본디 숨은 존재(Deus
absconditus)"라는 말까지 인용합니다. 이 라틴어는 영어에도 그 직접 흔적을 현재까지 남기고 있습니다.
이웃을
잘 만나야 신상이 편한 법인데, 풀검 목사는 주택 경계에 피어난 민들레를 못 참아 제초제를 뿌리고 만 어느 이웃과 겪은 작은
트러블도 소개합니다(p170 이하). "이보쇼, 당신이 죽인 잡초는 내게는 소중한 민들레였단 말이오!" "개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이웃은 고개를 돌리는데, 이 판국에서도 저자는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응시합니다. ("나의
광기 어린 표정과 시선을 뒤로 하고 그는...") 저는 이런 숨은 유머가 이 책의 가치를 한층 높였다고도 생각합니다. 많은 삼류
저자들은 자신의 책에서 자신을 절대 선, 억울한 피해자, 정의의 독점 대변자로 포장합니다. 그러나 풀검 목사는 다분히 비정상적이고
찌질한 면까지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데, 이게 오히려 여유 있고 의젓한 저자의 성숙한 면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찌질이도
자기 약점을 그대로 노출할 때가 있는데, 대개 더 물러설 곳 없는 궁지에 몰렸거나 미숙한 유아가 엄마를 애타게 찾듯 싸구려 위안을
간절하게 바랄 경우가 고작입니다. 결코 성찰이나 달관의 산물 같은 게 아니죠.
"잊지
말자. 요즘 유행하는 말마따나 스트라이크 세 번이면 아웃이란 걸." 이 구절은 확실히 시대상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빌 클린턴
대통령이 저 무렵 범죄자가 전과 3범이면 종신형에 처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죠. 이 법은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연방 정부의 적자폭만 부풀리거나 교도소에 납품하는 업자들의 배만 불려줬다는 부작용이... 여튼 저자는 "대체 시민의 자격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아마도 미국 국민의 절반 가량은, 정기적으로 갱신되어야 하는 시민의 자격이 문제되는 세상에서라면 바로
터전을 잃을 수 있으며, 추하고 늙고 화를 잘 내는 내 친구 대부분은 당연히 실격"이라며 다분히 냉소적인 결론, 혹은 비판을
제기합니다. 사실 이 말도 농담인지 진담인지가 구분이 모호한데, 이런 챕터는 확실히 미국 밖에서보단 안에서 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을 법하죠. 안타까운 일은, 30년전이나 지금이나 이민자 문제, 부평초처럼 떠도는 이들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심지어 미국 바깥으로까지 확산(지난주에 크게 이슈화한 이탈리아의 난민 수용 거부라든가)된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더군다나 현재
미국에는 이상한 자가 이상한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다며 볼썽 사나운 자화자찬까지 하고 있으니...
잘은
몰라도 이 목사님은 근사한 여성과 데이트하는 즐거움을 구태여 포기할 분 같지는 않습니다. p239에서 저자는 어느 근사한
여성에게 "추궁"받은 신랄한 질문에 대해 여느때처럼 근사하게 둘러치며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살면서 끝없는 우울과 절망에 빠져들
때 나는 어떻게 빠져나왔던가?" "'무릎을 꿇어라, 여기 천사의 소리가 들린다.'" 사실 뒤의 것은 그와 종파를 달리하는 모르몬
성가대의 노랫소리였습니다만, 목사님은 이 챕터에서도 "아니, 그래서 목사님은 어떻게 빠져나왔다는 건데요?"라는, 분노 어린(?)
질문에 대해 직접적으로 답은 안 합니다. 그가 들려 주는 충고는 그저 "베토벤"입니다. 베토벤은 자신의 굴곡 많은 인생에 대해
"작품"이란 답을 내놓았는데, 그가 거둔 인생의 승리는 (이 저자의 말처럼) 9번 교향곡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이거, 들리는
사람만 들리고 백치의 닫힌 돌 같은 머리통에는 스며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절절한 교훈을 저자는 그리 뻐겨대지 않고,
마치 유치원 꼬마가 무용담이나 말하듯 잔잔하게 소박하게 유머러스하게 우리 독자들에게 들려 주는 것입니다. 성공한 책에는 확실히 그
무엇이든 선명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