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라이터
사미르 판디야 지음, 임재희 옮김 / 나무옆의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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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중국보다도 더 많은 인구를 가졌다고 추정하는 이들도 있고, 동셔양에 고루 끼친 방대한 문화적 영향 때문에라도 엄청 중요한 나라입니다. 이런 인도만의 지방색이, 인류 보편 관심사와 정서, 주제와 맞닿을 때 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편이었다고 저 개인적으로 기억됩니다.


소설은 한 남자의 회고로 시작됩니다. 진로를 마땅히 정하지 못해 바황하던 대학원생 시절을 되돌아보는 문장인데, 소재가 된 시간적 배경과 집필 시점(실제 작가의 집필이든, 아니면 가공 인물인 라케시의 기준에서건)이 꽤 차이가 나는 듯합니다. 결말에 가서 보면 "문제의 그분이 맞은 어떤 운명(내용 누설이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겠습니다)"이라든가, 이후 1인칭 화자 라케시 신상에 닥친 상당한 변화(어떤 것은 그가 간절히 원하던 것, 어떤 건 그가 끝내 피하고 싶던 것)가 자세히 나옵니다. 출판사에서는 이 책을 줌파 라히리의 작품 세계와 비견하던데, 저는 오히려 얀 마텔(인도인은 아니지만)의 <파이 이야기>와 좀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봐, 그건 젊은이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치고는 너무 암울한 전망 아닌가?"

완성도 높고 공감을 끌어내는 소설은, 주제 자체의 무게도 무게지만 이처럼 캐릭터 간의 소통이 실감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의 탐독과 감상은 정치인이나 종교인의 훈계(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청취와는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독자 생각에도 저 말이 나와야 하지 싶은 바로 정확한 타이밍에 딱 맞는 코멘트를 던져 주는 (사실상 주인공인) 아닐 작가의 한 마디를 듣고(읽고), 가뜩이나 흥미진진했던 작중 세계에 한층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생후 몇 개월도 채 안 된 시기에 시력을 완전히 잃고(화자 라케시의 말에 따르면 "뭔가 기억의 편린이라도 부랴부랴 챙기기조차 너무 이른 시점"), 이후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 들어간 위대한 정신. 이미 사회로부터 확립된 평판을 받은 분이라지만 왠지 자신만의 세계에 꽉 틀어박혔거나, 상처가 깊은 만큼 편견(무엇이든 간에)에도 단단히 사로잡혔을 것만 같은데, 전혀 아니었다는 걸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었다는 뜻입니다.

육안이 멀었으면서 오히려 심안이 널리 뜨인 현자의 원형으로는 그리스 신화의 테이레시아스 같은 캐릭터가 있겠습니다. 작중의 문호 아닐도 그런 유형이겠는데, 불편한 일상을 도와 주려 시급을 받고 일하게 된 알바생 라케시는 오히려 이 늙은 지성인과 함께 지내며 단단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저 유명하다는 정도만 알았을 뿐 구체적으로 아닐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그는, 채용 즈음에 그의 책을 비로소 읽어가며 이 거인의 생에 대해 촘촘히 공부합니다. 본래가 영민한 자질의 젊은이였던 만큼 책도 빨리 읽어 내고 인물 학습의 속도도 신속하지만, 앞으로 그가 이 위대한 정신과 함께 지내면서 배우고 깨우칠 경지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했습니다.

"요즘은 뷰익 같은 미국 차를 잘 안 타나 보지?" <양들의 침묵>의 연쇄 살인마 닥터 렉터는 수감 중에도, 면회 온 스탈링의 체취만 맡고서 그녀의 출신 배경까지 다 밝혀 내는 신기를 과시하죠. 특정 감각(특히 시각)에 장애가 생기면 다른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한다는 말도 있지만, 그런 사람이나 그렇지 어디 장애인이라고 모두 타 감각의 보상을 받겠습니까. 그런 기제가 개체의 예외 없이 공통이면 장애인이라고 딱히 불편할 바도 없으니 누구나 장애인 되게요 어디. 이 아닐은, 타고날 때부터 명철한 정신을 갖췄기에, 엔진 소리만 듣고 차종까지 분별해 내는 신통함을 보일 수 있는 겁니다.

상경계를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하고(라케시는 학창 시절 내내 일등을 안 놓치던 수재라고 나옵니다) 금융회사로부터 좋은 자리까지 제의 받았던 청년은 단지 "나의 진짜 꿈은 글쓰기"란 낙관 하나로 좋은 기회를 흘려 보냅니다. 내심으로는 그의 부친이 "녀석아,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거야!"라며 따귀라도 후려쳐 주길 기대했지만, 자신만큼이나 신중하고 사려 깊은 부친이야 그 아들이 "알아서 잘 하기를 바랄뿐" 그런 적극적, 월권적 훈육에 나설 리 없었죠. 영리한 아들이 이 또한 모를 리 없건만 이런 햄릿 형은 언제나 "이뤄지지 않았고 이뤄질 수도 없었던 가능성에 집착"하기 마련입니다.

눈먼 거인에게 "또다른 아버지상"을 기대했던 라케시는 왜 지원했느냐는 질문에 "돈이 궁해서요."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라케시는 여러 번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잘 하는데, 독자들도 알고 작중 인물들도 다 알듯 그 전부가 "화이트 라이"일 뿐입니다. 라케시가 얼마나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지 이 현인, 그리고 현인의 젊은 아내가 모를 리 없습니다. 라케시가 처음 아닐의 저택을 찾았을 때 우선 놀란 건 그 젊은 아내 미라의 놀라운 아름다움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 "나와 남편이 너무 나이 차가 많이 나죠?"라는 질문에 대뜸 부정부터 하는 것도 그의 "귀여운, 그리고 속 뻔히 보이는 거짓말" 중 하나입니다.

라케시는 아닐에게서 "제2의 아버지"를 기대하는 건 우리 독자들 눈에 뻔히 보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하나 눈에 띈 건, 은근 이 라케시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채 극복 못한 상태였다는 겁니다. 라케시는 어머니에 대해 채워지지 않은 애정과 배신감이 그 마음 속에 혼재해 있습니다. 사춘기, 혹은 그 이전 단계 애들이나 겪을 이런 혼란스런 상태로부터, 이 똑똑한 대학원생이 아직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물론 그 어머니의 잘못이 큽니다. "슬립 바바"라는 현자(라고는 하나 이런 류의 사이비 종교 창시자가 인도 국적자 중에 많았죠. 바다를 건너와서까지 포교하며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다 봉변을 겪기도 한 실존 인물 중엔 오쇼 라즈니시 같은 이도 있었는데, 다 이 소설의 시대상을 반영합니다)에게 빠져 기어이 가출을 한 라케시의 모친. 행여 어떤 선을 넘지는 않았으면 하고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지만 가능성이 현저히 낮음은 자신도 잘 압니다. 소설 후반부에 가면 이 바바와 라케시의 만남까지 이뤄집니다. 이 상처가 잘 마무리되어야 헬렌하고도 진도가 빠질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라케시가 미라를 바라보는 시선에 각별한 열정이 실린 건 이런 굴곡 있는 개인사, 가정사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게 제 느낌입니다. 물론 미라는 (라케시의 뜨거운 주관적 묘사가 아니라도) 누구 눈에도 아름답게 비칠 만한 미인입니다. 이런 미인을, 나이도 많고 눈도 멀었으면서 장악할 수 있었던 아닐이야말로 작업의 신이라고 불러야 마땅하겠습니다. 사실 아닐은 눈만 멀었다뿐, 체격이 탄탄하고 현란한 말빨을 자랑(머리가 좋으니 당연하죠)한 덕에 장애인이면서도 여자들에게 성장기 동안 인기가 좋았나 봅니다(게다가 부잣집 아들 ㅋ).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의 각별한 "크기"라는 사정도... (더 이상은 생략하겠습니다)

아닐은 특이하게도 "사회주의 중국 VS 소위 민주주의 인도" 중 전자를 더 옹호했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시대상이 드러나죠. 얼마 전에도 두 나라가 군사적 대립으로 일촉즉발의 위기를 빚었는데 만약 아닐이 요즘 사람이었다면 (딱히 조국에 대해 원한을 품은 출신도 아닌데) 정치적으로 저런 스탠스를 품을 이유가 없었을 텝니다. 라케시는 옆에서 신문이나 잡지를 읽어 주는 일을 하려고 고용된 건데, 예컨대 GQ에 실린 모델이 신디 크로포드라고 가르쳐 준다든가요. 이 무렵이면 어떤 잡지에도 ("수퍼모델"이란 말을 처음 대중화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그녀만 실릴 시절이죠. 재미있게도 작중의 아닐은, 신디 크로포드와 직접 만나 인사까지 했다고 말합니다ㅋㅋ

"페드로는 메츠에 가장 어울리는 선수야(p55)." 이 무렵은 우리도 박찬호 때문에 메이저리그를 한창 지켜 볼 때였죠. 메츠와 양키가 나란히 각각의 플레이오프를 치를 무렵이면 1999년입니다. 이때(이 직전) 메츠에 있었던 "페드로"가 누군지 모르겠네요(페드로 마르티네스는 우리가 잘 알듯 이무렵 보스턴에 있었구요). 여튼 "빌 클린턴이 나한테 욌으면 여자 관련 절제하는 법을 가르쳐 줬을 텐데" 같은 말로 보아 배경은 거의 확실합니다.

아닐 트리베디는 이 픽션 속에서 필립 로스(며칠 전인 2018. 5. 22에 타계했죠), 가르시아 마르케스, 레이먼드 카버 등과 함께 놓이는 위상입니다. 눈먼 노인과 함께 지내며 자신의 성장까지 함께 이루는 소년의 이야기는 일찍부터 우리에게 친숙한데 예컨대 영화로 잘 알려진 <여인의 향기> 같은 게 있었죠. 야구 이야기부터 해서 끊임 없이 시사에 대한 수다가 오가는 장면으로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도 매우 익숙합니다. 따뜻한 서사와 분위기이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의외의 파격까지 결말에서 예비하는, 그러면서도 분량마저 부담이 안 되는 적정 수준이라서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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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데이터 수집의 기술
타쿠로 사사키 지음, 김경록 옮김 / 한빛미디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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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은 정보의 보고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원이 많다 해도 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방법론을 갖추지 못하면 허공에 뜬 별을 향해 손짓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은, 무엇을 위해, 어떤 용도로 데이터를 수집할지 먼저 목표의식, 혹은 전략 지향부터 분명히 정해야 하며, 이를 위해 가장 경제적이고도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 내어야 합니다.

책에서는, 2020년 경 웹에는 대략 35제타바이트 정도의 정보가 축적될 것으로 예측합니다. 제타바이트란, 인간의 머리로 그 어림짐작조차 힘든 방대한 양입니다. 현재 많이들 쓰는 하드디스크(HDD 기준)이 대략 4테라 수준인데, 이 다음(즉 천 배를 한 것)이 페타, 그 다음이 엑사, 그 다음이 제타입니다. 제타를 영어(뿐 아니라 다른 언어에서도 역시 같습니다)로 쓸 때에는 zetta-를 쓰는데, 여러 모로 재미있는 접두어입니다.

우선 헬라어 자모로 숫자를 표기할 때 7을 나타내던 게 바로 ζ, 즉 제타입니다(물론 이때에는 t를 한 번만 쓰는 게 표준표기입니다만). 7이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건, 이 제타가 1000의 7제곱(즉 10의 21제곱)이기 때문이죠. 헬라어에서 7은 "헵타", 라틴어에서는 "셉툼"으로 불렸고 어원도 같습니다. 그래서 본디는 "엡타" 정도로 불려야 옳았겠으나, 일단 "페타" 등과 운을 맞추고(단, 페타에서는 t가 하나입니다), 앞에 선명하게 자음을 달아서 더 음가 분별을 높이려 한 의도로 보입니다. 이 "제타" 다음에는 "요타"인데, 역시 t는 두 개이고, 앞으로 단위가 올라갈수록 z, y, x 등으로 거꾸로 알파벳을 달아가겠다는 뜻입니다.

데이터는 물론 디지털 형태로만 생성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 추세대로라면, 분석의 대상이 되는 유의미한 정보의 94%는 디지털 포맷이며, 이 비율은 앞으로 점점 늘어가리라는 게 저자의 추측입니다. 구글은 일찍부터 가장 효과적인 데이터 추출 방법 고안에 정력을 쏟았으며, 벌써 10년 전에도 회사의 정보 담당 관리자들은 "구글에서 언제 이런 것까지 다 뽑아갔대?"라며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감탄이 아니고 불쾌, 경계의 반응이 우선이지만 말입니다. 당시만 해도 데이터의 가치를 낮게 평가했고, 그저 흘러가거나 버리는 쓰레기를 용케도 잘 활용한다거나, 미디어를 비롯 세간의 칭찬을 받아 마땅한 대견한 스타트업 정도로 여겼겠죠.

스크린 스크래핑이라는 말을 보통 쓰는데 화면에 보이는 것만 일단 대상으로 삼아서이며, 그저 우리 직관대로 "웹 스크래핑"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봇(bot)"이라 보통 부르는 건 크롤러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사람이 일일이 검색어를 설정하고 가치를 정제하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이 스스로 알아서 다음 단계의 검색을 상정하고 자체 Db를 갱신하기까지 합니다. 이 단계가 중요한데, 많은 이들은 BI, 즉 비즈니스 인텔리전스를 두고, 이미 스스로 가치 판단이나 의미의 추출을 알아서 행하는 단계, 능력까지를 요구합니다.

정보화 시대에 그저 사람의 지성과 판단의 보조 도구로 쓰인 게 컴퓨터였다면, 이제 이들은 "주인"이 뭘 요구하기 전 한 발 앞서서 "주인이 요구할 만한" 정보를 미리 정리, 정제하고 가치를 창출한 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웹에서 정보를 추출하는 작업도 어느새 사람의 손을 떠난지 꽤 되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긴장이 되기도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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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 IT 트렌드 따라잡기 - 보통신기술 ICT융합, 0과 1 알고리즘을 더블클릭하다
오컴 외 지음 / 살림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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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컴"은 이 저자분들(혹은 집필 커뮤니티)의 필명(pseudonym)인데 더 자세한 정보는 책에 안 나옵니다. 통신사와 스타트업에서 요금 설계를 담당했다는 분, 현재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연구교수 재직 중인 분, 삼성전자에서 소프트웨어 품질관리 및 개발프로세스 업무를 담당하는 분 등 다양한 구성입니다. 저도 재작년(2016)에 이분들이 쓰신 <스타트업 코리아>를 읽고 제 블로그에 서평을 남긴 적 있습니다.

"수확 체감(遞減)의 법칙"은 150여년 전 초창기 고전파 경제학의 토대를 이룬 도그마 중 하나이며, 20세기 중반에도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에도 언급되었을 만큼(물론 그는 경제학자이긴 하나 일차로 저널리스트였으니 이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잘 알려져 있습니다. 수확 체감의 법칙이 처음으로 그 타당성에 도전받기 시작한 건 정보화 혁명이 본격 전개되고부터인데, 요즘은 더군다나 4차 산업혁명 때문에 더욱 회의적인 시선으로 관측됩니다.

4차 산업혁명은 "아직은 만들어진 개념"이라 규정하는 태도가 흥미롭습니다. 완전히 이뤄지지도 않은, 그저 전망에 불과한 여러 미래상을 두고 지나친 호들갑을 떠는 분위기라는 시각도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자들이 반드시 지적하는 건, 여태 인류가 겪어 보지 못한 속도로 빠르게 혁신이 일어나는 중이며, 심지어 딥 러닝을 설계한 엔지니어마저 대체할 수 있는(변호사나 회계사는 물론이고) 인공지능이 머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등장하리라는 징후가 도처에서 감지되기 때문입니다.

"교통사고가 끊이지 않아도 일반 자동차나 대중교통이 꾸준히 도로를 달리듯이…", 자율주행차도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도입되고 말리라는 게 저자들의 전망입니다. 책이 신간이라서 몇 달 전에 벌어진 우버, 테슬라의 교통사고도 언급이 되는데, 책에 보면 " ... 우리는 이제 정신 무장과 윤리적 알고리즘도 잘 갖추어 인공지능의 무방비 공격과 법률적 책임 소재에 잘 대비해야만 한다."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문장의 함의(물론 저자분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때문에라도, 자율주행이 그리 순탄하게 현실에 도입되지는 않을 듯합니다.

마차에서 자동차로 교통이 이행할 때는 분명한 유인과 동력이 작용했습니다. 속도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고, 사고시 책임 소재 규명과 배상 문제도 오히려 마차 시절보다 더 명확해진 면이 있었습니다(해상 사고 등에 쓰이던 보험 제도가 도로교통 이슈에도 도입되는 등). 허나 자율주행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과연 모든 이들에게 강렬한 유인(誘因)을 제공할까요?

어떤 이들은 "운전대는 내 손으로 안 잡으면 안 된다"고 고집할 수도 있습니다. 사적인 공간에서 자율 모드와 수동 모드로 전환할 때, 과연 누구의 과실로 사고가 난 건지 뚜렷이 책임을 따지기 어려운 경우도 발생합니다. 물론 번잡한 출퇴근 시간대에 운전은 차에 맡겨 두고 책을 읽는다든가 업무 준비를 하는 등 짜투리 시간을 선용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사적 시공간이 충분히 확보된 만큼 대중 교통 수요가 줄어들어, 교통 체증은 (자율 주행 덕에 훨씬 효율적으로 바뀔 교통 분배에도 불구하고) 더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수확체감이란 사실 아득한 예전 농경 혁명 시절부터 인류의 의식을 영원히 가로막을 것만 같았던 뿌리 깊은 생산의 장벽이었습니다. 이러던 것이 디지털 혁명으로 그 이론적, 실제적 기반이 와해되고, 한정된 경지에 농경 인력을 아무리 투입한들 오히려 한계생산량, 노동의 한계 생산성이 줄어든다는 법칙(의 현실)이 처음으로 극복되기 시작한 건 대단히 고무적입니다. 반면, 여태 인간의 전유 영역으로만 여겨진 다양한 사무와 기능에 대해, 인공지능이 압도적인 능률을 보이며 대체한다는 전망은, 우수한 두뇌에 대한 긍지(이는 3차 정보화 혁명 당시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프로그램을 만드는 명석한 정신이 영구적으로 이들 전산장치를 장악한다는 자부심이 더 높아졌죠)를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을 만합니다.

<웨스트월드>나 <터미네이터> 등을 보고 아 앞으로는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겠구나 같은 생각은 SF를 지극히 피상적으로 즐기는, 나쁜 머리에 대한 콤플렉스만 가득한 이들이나 품는 변태적 기대로 치부했었습니다. 어디 앞으로 현실이 어떻게 펼쳐질지, 저자들 말대로 "정신 무장과 윤리적 알고리즘도 잘 갖출" 필요도 있다고 여겨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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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인재를 말하다
김성준 지음 / 인더비즈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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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직 빅데이터의 랜덤 워크 향연이 빚어내는 성과가 어느 정도에 이를지는 아무도 쉬운 예단을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저자는 소셜 빅데이터가 과연 어느 정도나 효용을 발휘할지 꽤나 미심쩍어하는 입장입니다. 흔히 정보화 3세대는 구조화한 프레임에 의존하고, 4세대는 비구조화한 언어, 데이터를 마음껏 활용한다고 하지만, 이는 AI가 고도의 발전 단계에 이르러야 낙관할 수 있는 전망이요 단계입니다. 향후 이 분야에 대해 과감하고 개척적인 투자가 이뤄져야 함은 물론이겠으나, 다만 아직 손에 쥐어지지 않은 인프라에 기반하여 섣불리 무엇을 기대하기도 그리 신중한 태도는 아닙니다.

저자 김성준 선생은 "소셜 데이터보다 구조화되어 있어서 목적 지향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인적자원 빅데이터를 인재경영이라는 화두 아래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이 책 주제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선생의 이력을 보면 다소 독특한 부분이 있는데, "소싯적 방황으로 실업계 고교를 나와 불루칼라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는 대목입니다. 이후 전북대를 졸업한 그는, (현재는) 명문대 졸업생들도 입사하기 힘들다는 롯데 그룹에 입사하여 인재 육성이라는 중책을 맡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을 보면 LG전자에서 최고 엔지니어로 평가받으며 현재는 대표이사 부회장직까지 오른 조성진 같은 분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조 부회장이야 물론 불미스러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으나 사실 관계가 아주 확실한 건 아니니 말입니다.

어려운 수능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고 명문대에서 가장 뛰어난 스승들에게 학문을 이수해도 예컨대 통계학 같은 건 어느 두뇌에게나 쉽사리 문을 열어 주는 난이도가 결코 아닙니다. 저자는 과감하게도 "상관관계는 이제 잊고 원인파악과 결과 예측으로만 주의를 기울이라"고 충고합니다. 이론상의 중요도나 이론적 발전 단계를 떠나 실무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인과관계의 바른 추론과 예측 작업이라는 뜻입니다. 초급 통계에서 매우 중요히 다뤄지는 게 공분산입니다. 두 자료의 분포가 얼마나 서로 밀접한 관계를 이루느냐인데, 같은 방향으로 가면 (+)이며 반대방향이면 (-)이죠. 제 기억으로 여기까지는 중2 교과서에서도 배웠더랬는데(요즘 애들이 어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너무 상식적인 내용이라서 당시에는 미처 그 중요성을 알아채지 못했더랬습니다.

회귀분석 역시 학부 4학년 정도에서 다들 다룹니다. 저자는 이를 "인재의 우수성과 조직 적응 성공도에 적용하는 쓰임"에까지 확장합니다. 물론 모형화 과정에서 숱한 인위적, 주관적 지표가 끼어들겠으나 여튼 채용과 승진, 퇴출, 성과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추적해 보는 건 실로 흥미롭고도 (조직에) 유익한 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John Boudreau와 Wayne Cascio, 또 John W. Boudreau 등이 이론화한 LAMP 모델에 대해서는 아래 그림을 참조하십시오. (출처: http://futurehrtrends.eiu.com/report-2016/putting-workforce-analytics-into-practice/) 물론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각 단계의 머릿글자를 딴 약어입니다.



요즘 Business Anaytics가 대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종래 비즈니스 인텔리전스가 그저 CEO의 의사결정을 도와 주는 방대한 자료의 더미에 불과했다면, BA는 알아서 "당신이 무슨 의문을 떠올려야 마땅하고, 그에 대한 답은 무엇인지 미리 추려주기까지 하는" CEO를 대신, 아니 능가할 만한 존재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인재를 고르고 육성할 때 언제나 유념해야 할 사항을 세심히 지적하는 저자의 태도에서, "성과도 좋고 효율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사람이 우선임"을 잊지않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 방식"이 꽤 마음에 크게 와 닿았습니다. AI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깊이 새길 만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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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메시스, 때로는 약이 되는 독의 비밀 - 나쁘다고 알려져 있는 것들에 대한 재발견
리햐르트 프리베 지음, 유영미 옮김 / 갈매나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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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하지만 한국인들의 고단한 생존 이력을 잘 보여주는 관용어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먹고 안 죽으면 보약이다." 원, 일단 섭취한 후 당장 치명적인 부작용만 발생 안 시켰다뿐 두고두고 몸을 축낼 몹쓸 성분이 왜 없겠습니까만, 한국전 같은 극한의 시련을 겪고 용케도 여기까지 끈질긴 생존을 이어 온 집단에서 당연 나올 법도 한 말이지 싶습니다.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니체는 대체로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오랜 정신적 혼란과 방황을 겪은 인물이긴 하나 삶의 신조 중 하나로 저런 말을 표현해 내기에는 대체로 안정된 환경에서 산 사람입니다. 들을 때마다 이해가 잘 안되지만 여튼 (그의 다른 명언들처럼) 강렬한 진실의 일단을 간직한 말이긴 합니다. 물론 트집을 잡자면 한도 없는 예외와 반증에 취약한 테제이기도 하죠. 엊그제 죽은 모 재벌 그룹 총수의 삶이 생각나기도 하고요.

여튼 살면서 적절한 스트레스가 없다면 오히려 그 개체는 체질이 약해지고 이른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는 건 꼭 (니체와 국적이 같다거나) 뛰어난 생물학자가 아니라 해도 오래 전부터 여러 현인들(독일인도 아니고 생물학 전공도 아닌)이 해 온 말입니다. 소가 적당히 파리를 쫓기 위해 꼬리도 흔들어야 건강이 유지되는 것처럼, 외침(外侵)없이 장기간 평화만 이어지는 나라는 망한다고 본 학자도 있습니다.

책날개에서 (아마도 이 책 편집자가 정리한 글이겠지만) "호르메시스"는 "적응적 스트레스 반응"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본문 중에서는 p62:10에 정확히 이 어구가 등장합니다). 서문에서 저자는 "그리스에서 유래한 말로, 자극을 뜻한다"고 합니다. 정확한 어원은 ὀρ′μαειν(호르마에인. 맨 앞의 따옴표같이 생긴 부호가 h 발음을 지시하죠)이란 동사이며, "자극하다"란 뜻을 가집니다. 고대 그리스어에 "호르메시스"란 말이 코인되었던 건 아니고, 한참 후 근세에 들어 독일의 약물학자들이 이 말을 창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 리하르트 프리베 박사는 1970년생입니다.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이지만, 예를 들어 "오늘날 젊은이들은 예전 세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안온하고 유리한 환경에 살면서... " 같은 말을 꺼내는 통에 약간 의아해지기도 했습니다. 여튼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처럼 좋은 환경 속이라고는 하나, 앞선 세대보다 덜 움직이고 더 먹어대는 젊은이들은 오히려 평균 수명이 더 짧아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프리베 박사가 한창 젊었던 시절 유행한 트렌드 중 하나가 바로 카오스 이론입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그리 느꼈던지, "사람들은 선형적이고 딱 나눠떨어지는 걸 좋아하지, 불규칙적이고 비선형적인, 예컨대 카오스적인 걸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태도는 사실 지금 젊은이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그 정도나 지났으면 이제는 상식이 되었을 법도 하고 그 이론적 구조가 더 속시원히 해명되었을 법도 한데, 아직도 비선형 세계관은 그 실체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현상적 기술에 머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분명히 설명되는 인과관계를 숭배하고 강조하며, 그렇지 못한 건 신비의 영역에 맡기거나 신의 권능 정도로 얼버무리며 묻어두길 더 선호한다."

왜 어떤 독성 물질은 사람을 죽이는 지경까지 가지 않고, 면역력을 오히려 강화시킬까요? 사실 제너가 250년 전 종두법을 발명했을 때 그가 착안한 이치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애들을 엄하게 키워야 인간이 된다면서, 감기라도 들면 한겨울에 홀랑 벗겨서 밖에다 세워 놓는 경우도 과거에는 허다했습니다. 저자가 하는 말은, 분명 어떤 한계를 넘지 않는 자극은 인체의 면역력과, 그 외 아직 명쾌히 규명되지 않은 어떤 적응력의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 배로 비싼 레스토랑에서의 식사가 세 배의 기쁨을 주지는 않는다. 밭에 비료를 뿌렸는데 그냥 방치했을 때보다 더 수확이 적을 때도 있다." 사실 저자가 말하는 "비선형적 진행"이라든가 상식에 반하는 인과관계 등이, 모두 호르멘시스의 신비한 효능과 관계를 갖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세기 전에 비해 많은 편익을 누리긴 하지만, 여전히 모르는 게 많고 (선조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기대했을 법한 수준보다) 더 캄캄한 무지에 싸인 현실을 냉정히 직시할 수 있는 좋은 말들이 많았습니다.

"진화의 기본 속성은 변이성(variability)이다." 그 위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적응적인'이란 말은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형용사다" 이 대목은 책 전체에서 결국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돕는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자극이 없는 환경에서 개체는 무엇에든 적응하려 들지 않습니다. 험난한 환경에서 시련을 딛고 살아난 종족은 이후 외부를 향해 거대한 정복의 행진을 시도하는데, 과거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무슬림들이 그러했고, 노르만 바이킹들도 마찬가지였으며, 몽골의 정복자들, 또 몽골의 압제를 오랜 동안 겪다가 떨치고 일어난 러시아인들도 이후 무서운 기세로 시베리아로 동잔해 왔습니다. 반면 훨씬 풍요로운 삶을 누리며 번영하다 몽골에 정복당하고서 계속 숨을 죽여야 했던 우크라이나 인들은 지금도 내분에 시달리는 형편입니다.

파라켈수스는 저자처럼 처음에 약리학으로 학문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이들에개 꽤 흥미로운 삶을 산 사람입니다. 오백 년 전에 살다 간 이 약리학자의 이름을 놓고 저자는 이런저런 분석을 시도합니다. 출생시 거의 무작위로 붙은 사람 이름자 하나에 무슨 그런 큰 의미가 있을까만은 여튼 실제 생의 궤적과 인물이 품은 가능성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기라도 한지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 대목이 흥미롭기는 합니다 여튼 여기서 그가 강조하고 싶은 건 "동종요법"의 신비한 효능입니다.

오래된 서양의 민담 속에, 똑 같이 생긴 환약(알약) 둘 중 하나를 고르게 하며, 희한하게도 상대가 무엇을 고르든 반드시 이 자가 살고 상대방은 죽게 되는 이야기가 있죠. 답은, 평소에 이 자가 조금씩 조금씩 독성을 섭취하여 면역력을 길러 두었다는 게 비결입니다. 이 이야기가 BBC 드라마 <셜록> 1화에도 등장하는데, 바보 같은 셜록은 50/50의 확률에 목숨을 걸다 왓슨의 명사격 솜씨가 아니었으면 죽을 뻔한 위기에 빠지고, 끝까지 놈의 속임수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하등동물이든 고등동물이든 호르메시스의 장점을 이용하지 않는 생물은 없다. 인간 역시 야생초를 오래 전부터 치료제로 활용해 왔고, 운동의 이로움을 깨달았으며... " 운동도 사실 아주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신체 역량과 열량의 무의미한 낭비이며 노화의 촉진 계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는 여기지 않고, fitness를 위해 하루 일정량의 운동은 필수로 받아들입니다. 이 역시 저자의 관점에선 호르메시스 기제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포 영역에서 건강을 유지하는 메커니즘 중 하나가, 더 이상 건강하지 않은 세포를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이다." (p231) 놀라운 것은 이 과정을 통해, 미래에 종양을 유발할지도 모르는 병든 세포(암세포는 엄연히 자기 체계의 일부이며, 기생충과 동일시하는 건 극단적인 무지의 소치이죠)를 제거하며, 저자는 수컷 초파리가 일부러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이런 세포를 조기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 수명을 연장하는 게 관측되었다고도 합니다.

"호르메시스는 쉽게 무력화되지 않고, 엄청난 잠재력을 갖는다."

인간은 플라스틱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노화하고 무력화합니다. 저자는 이런 의심을 품어 보았다고 합니다. "왜 인간은 일단 생식 능력이 없어진 후에도 바로 사멸하지 않고, 너무나 긴 잉여의 시간 동안 생존하다가 죽는 걸까?" 이 책에도 나오지만, 손자 손녀를 돌보며 오히려 건강이 좋아지고 지병의 증세가 완화되었다는 노인들도 우리 주변에 많죠. 저자는 책에서 위트를 여러 번 구사하는데, 이 경우도 "아이 돌보는 스트레스가 즐거움을 능가하지 않는 한에서만 그렇다"고 단서를 답니다. 이 책의 주제가 스트레스 관리를 통한 면역력 강화라는 점에서 꽤 우습기도 한 서술이죠.

모르는 영역은 그저 미지의 상태로 남겨 놓아야 사람은 더 흥분과 보람을 느끼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비선형 인과관계에 어떤 "설명"을 시도하는 카오스 이론에 대해 반감(일단 저자는 그러시다고...)을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고 말이죠. 그러나 이 호르메시스라는 판도라의 상자는, 오랜 동안 개봉 안 된 채 남아 있었으나 이제 신비의 거풀이 한 자락 한 자락 벗겨지며 오히려 인류에 희망을 안기는 원천이 되었다고 저자는 평가합니다. 사실 이는 체계적으로 매뉴얼화한 학자들의 도움보다, 우리 일반인들도 자기 일상에서 선을 넘지 않고 실천에 옮길 수 있기에 더 유익한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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