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맑스 - 엥겔스가 그린 칼 맑스의 수염 없는 초상
손석춘 지음 / 시대의창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관포지교라든가 지음(知音)의 고사에서 잘 보듯, 서로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아껴 주며 존중하는 친구 간의 우정은 동서고금을 초월하여 우리의 심금을 울리곤 합니다.

칼 마르크스(이하, 책의 표기에 맞춰, 또 저자 손석춘 선생과 같은 연배이신 모든 80년대 학번 어르신들의 공감대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써 "맑스"라고 쓰겠습니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우정과 교분도 또한 이와 같았는데, 관포를 놓고 볼 때 관중 쪽으로 아무래도 능력의 추가 많이 기울고, 뛰어난 감상자, 평론가인 종자기보다는 연주자 백아가 더 중요한 인물이었던 사실과 달리, 맑스와 엥겔스(이 팩션의 공동 주인공이자 1인칭 내러티브)는 사회학(뿐 아니라 인접 모든 학문에 두루)사상 엥겔스의 비중을 결코 가벼이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일각에서 맑스의 학문적 업적은 그간 사회상이 격변한 까닭에 그저 "역사적" 가치만을 고려할 뿐이라고 낮춰 말하기도 하나, 엥겔스의 노작과 자취에 대해서는 (워낙 이분이 방대한 영역에 걸쳐 연구를 남긴 까닭에) 그리 말할 여지도 없습니다.

2008년 이후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큰 약점을 노출하고, 누구나 열심히만 일하면 넉넉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과 지표에 큰 상처가 남겨질 만큼 양극화가 많이 진행된 작금에, 뜻밖에도 칼 맑스의 사상과 학문 체계에 다시 주목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끈 피케티의 저작은 (본격 경제학 서적인데도) 그 자체가 맑스의 대작에 대한 오마쥬 구실을 겸했으며, 현재 극장가에는 <청년 마르크스>라는 영화가 상영관에서 뜻있는 관객들과 소통하는 중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 운동가, 우국지사였던 심산 김창숙을 기려 특정 대학교 학생들이 "청년 심산"을 현창하듯, 혹은 철학도들이 (서양인 중에서도 천수를 다 누렸다 할 만한) 헤겔을 두고 "청년 헤겔"을 기리듯(이 책 p29, p30, p46 등에도 나옵니다), 맑스 역시 그 짧다 못할 수명(1818-81이라서 외우기가 편합니다. 또 보시다시피 올해가 탄생 200주년입니다)에도 불구하고 "청년 맑스"란 호칭이 참 익숙합니다. 80년대 학번 어르신들 사이에선 동아리, 토론회 명칭으로도 눈에 선한 구절이기도 하죠.

반면 마땅히 배워야 할 걸 못 배운 밑바닥 노파의 비천한 라면사리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 어쩌구를 떠들다가 뒤늦게서야 현재의 모든 진보 동향이 이에 아득한 기원을 두고 있다는 걸 눈치 챈 후 재빨리 "폭력이 문제였다느니 뭐니"를 떠들고 얼버무리지만 말입니다. 하긴 이런 극단의 밑바닥 근성과 저능이 가장 심각한 폭력의 변이 형태이기도 합니다. 아마 노동 계급이 주도하는 혁명 운운하는 게, 자신이 가상으로 속했다고 착각하는 부유층 타령(1000퍼센트 헛소리입니다)과 잘 안 맞고, 다음으로는 워낙 어리석고 저능해서 웬만하면 한 번 정도는 공부했던 사회과학 트렌드에 단 한 번도 끼지 못한 한심한 처지였기 때문이죠. 남들 마땅히 거칠 걸 못 거친 인생은 이래서 불행하고 비참하며, 마침내는 가정까지 파탄이 나게 마련입니다.

칼 맑스의 저작은 날카롭고 정확한 통찰로도 물론 유명하지만, 그 표현하는 문장 하나하나가 중의적 구조를 지니고 서양의 고전을 일일이 오마쥬하는 듯한 절묘한 풍취가 또한 일품입니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사장과 경전에 두루 능한 진정한 문사라고 할 수 있었겠죠. 이책 p46을 보면, 학생 시절 귀족과 결투를 벌이다 눈 위의 작은 상처 정도로 마무리된 "사고"를 두고, 작중 화자 엥겔스(물론 진짜 엥겔스가 아니라 손 선생의 페르소나입니다)가 하는 말이 일품입니다.

"자네를 살려 준 신께 감사할 뿐이네. 자네가 그때 죽었더라면, '종교는 아편'이라는 명구절이 아마도 탄생하지 못할 뻔하지 않았는가?"

신이 혹시 세상을 다채롭게 가꾸는 게 진짜 목적(그렇다면, 좀 이상한 분이군요)이라면, 1838년에 혹시 실수로 그를 살려 둔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누가 알겠습니까. 근데, 비슷한 해에(지리적으로도 가깝네요) 수학 천재 에바리스트 갈루아를 (역시 결투의 현장에서) 냉큼 어린 나이에 데려가신 걸 보면, 아마 이 천재는 수학사상 큰 업적을 더 이상 못 남기리라(할 일 다 마치고 천재성이 조로함) 여기시고 그리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갈루아가 몇 살 형이고 급진 공화파였음을 감안하면 실제 둘이 못 만난 게 아쉽기도 한데, 역시 모두가 신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에바리스트 갈루아보다는 좀 험악하게 생긴 맑스는, 엥겔스에게 평생의 지기였을 뿐 아니라, 마치 김승옥을 김현이 경탄했듯 일종의 우상으로 군림했던 면이 있습니다. 출신 성분에서 앞서고 그 자신 역시 일세의 지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 면에서 "신으로부터 받았다고밖에는 말 못할" 천재성을 보면 과연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1장을 보면 "악마가 된 랍비"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칼 맑스는 유대인이었고(물론 유대교와는 거의 아무 상관도 없는, 그 이상 세속적일 수도 없을 철저한 반종교주의자였습니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유독 사상의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결벽증, 혹은 교주적 카리스마 같은 게 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프로동의 <빈곤의 철학>을 신랄하게 비꼬며, <철학의 빈곤>을 통해 자신의 사상 일단을 나타낸 데뷔가 대단히 인상적이었죠. 이 과정에서 그는 이른바 "공상적 사회주의"를 극복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로 무장하여 "역사의 필연"을 대비하자고 역설합니다. 이 책에서 화자 엥겔스(사실은 저자 손 선생)는 "그전까지만 해도 사회주의는 오히려 기독교적 박애주의와 한 손을 잡는 게 보통이었는데, 맑스 이후 사회주의가 '과학적 사회주의, 나아가 과격 혁명 노선'으로만 인식되며 기독교와는 영영 절연하게 된 사정을 잠시 언급합니다.

예전에 누가 케인즈에게 "혹시 <자본론>을 읽어 본 적 있냐"고 묻자,  "아니다. 물론 나는 <코란>도 읽은 적 없는 사람이다."라고 대꾸했다는 일화가 있죠(이 이야기는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에도 소개될 정도입니다). 사실 맑스를 보면 저 이란의 故 호메이니라든가(특히 덥수록하게 기른 수염이라든가 형형한 안광 등), 현재까지도 그를 추종하는 여러 아야툴라들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습니다. 셈 족 특유의 옹고집, 외골수 기질 등이 긴 세월의 침식에도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다는 점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p107에 보면 아내 예니 폰 베스트팔렌(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녀는 귀족 출신입니다)을 가리켜 "예니헨"이라 불렀다는 맑스의 버릇이 소개되죠. -chen은 독일어에서 흔히 쓰는 지소사(指小辭), diminutive이죠. 박식한 손석춘 선생께서 본문엔 일일이 설명도 달아 주십니다. Mädchen(소녀), Hündchen(강아지) 같은 중성명사에서 저런 예를 잘 볼 수 있죠.

p207을 보면 손 선생의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 세계 자본주의의 수도로 들어갈 때 우리가 신사의 나라에서 악마로 살리라곤 전혀 예상 할 수 없었지. 물론 앞 문장에서 "악마"와 "신사"가 들어갈 자리가 살짝 바뀌었지만 말이야." 세련되고 빈틈없는 신사의 매너 속에, 타인과 약자를 사정 없이 갈취하여 눈부신 세계 제국을 이룬 당대 영국의 거대한 위선과 음모를 빗댄 구절이기도 합니다. 악마와 싸우다 보면 오히려 천사가 검댕과 오물을 뒤집어쓸 때도 있으니 말입니다.

메리와 칼도 금슬이 참 좋아 여러 아이를 둔 사실이 유명한데, 음악의 아버지 바흐도 빈민굴에서 살며 아이를 여럿 두어 고생을 자초하기도 했죠(사실 바흐는 좀 경우가 다른, 무책임하고 잡스러운 가장의 일면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책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실제로 부유한 자본가의 아들이었던 엥겔스가 이런 그의 가정에 자주 원조를 했기 때문입니다.

p384에 보면 헨리 하인드먼의 말을 빌려 "엥겔스는 런던의 달라이 라마"라고 한 평가가 나옵니다. 20세기 초라고 해도, 티벳 불교의 달라이 라마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교황" 처럼 성직자(를 넘어 생불)의 직분명(을 넘어 生佛)이므로 작중 화자 엥겔스는 "내가 만약 달라이 라마라면, 자네는 붓다가 아닌가!"를 외칩니다. 사실 생전에 그토록 종교를 혐오한 그들이었지만(경쟁상대라서?), 세월이 지나도록 그의 추종자, 혹은 객관적 관찰자들도 어느 정도 종교 지도자를 바라보는 외경감과 신비감으로 그들을 대하게 되는 건 그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맑스나 엥겔스 못지 않게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시는 손 선생의 깐깐한 스타일과 재치는 책 여러 곳에서 묻어납니다. 예컨대 "노동자"는 "노동인"으로 바꿔 써야 한다거나, "독불연보"는 "독프연보"로 달리 불러야 한다는 대목 등이 그것입니다. 촛불 혁명의 먼 기원은 누가 뭐래도 한국에서는 1980년대 학생 운동이며, 이것이 2016년에 이르러 드디어 최종적 복권을 이룬 셈입니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새로운 마음으로, 차라리 "우리들의 1980년대'를 회상하고 채색하는 이 책은, 그래서 더욱 한국적 현실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린테라
소현수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렸을 때 SF 읽으면서 가장 이해가 안 되었던 게, 왜 우주를 "스페이스"라고 표현하는지였습니다. "스페이스"는 그냥 "공간"인데, 그게 우주를 뜻하려면 앞에 다른 한정어가 붙어야 하는 것 아닌가 같은 생각. 이는 우리 한자 문화권이 한 음절 단어를 단어로서가 아니라(예: 물을 그냥 "수'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물질로서는 "수분, 마시는 물이라면 "음용수" 등으로 꼭 앞뒤에 말을 덧붙이죠) 형태소로 교묘히 활용하여 의미 분화를 이루는 관행과 저쪽 사정이 꽤 대조적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저쪽 사정을 폄하할 건 아니고, 저쪽은 저쪽대로 pragmatic에 기대어, 혹은 일종의 "제유법"으로 사상의 분기를 표현하는 겁니다. 이런 경향은 독일어에서는 좀 덜하고, 프랑스어가 아주 심한 편이죠. 영어는 후자의 영향을 받은 거고.

아무튼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쓴 SF를 읽으면, 적어도 이런 번역상의 오해, 미숙 때문에 괜한 착오를 할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번역은 아무리 잘 해도, 그 최상의 포맷 속에서도 벌써 독자를 착오로 이끄는 겁니다. 의역을 통해 말을 길게 늘이면 원문의 간결한 함축미가 확 줄어듭니다. 그렇다고, 일일이 역주를 단다 한들, 대체 원문만의 그윽한 맛이 전달될 길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솜씨와 센스, 상상력, 과학적 지식 등의 기반이 탄탄한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많이 활약해야 할 필요가 따로 있다는 거죠. 한국어만의 감각과 풍미, 우리 동시대인이 공감하는 박자 속에 표현된 sf의 세계가 과연 어떨지 아직 우리 독자들은 본때를 보지 못했다고 해야 합니다.

밀리터리 sf 장르에 대해 잘 모르실 법한 분들도, 유사 내용 게임 탄생의 모태가 된 폴 버호벤 감독의 <스타십 트루퍼스>는 익숙할 것입니다. 이를 지루해하는 이들은 내내 얼떨떨한 기분으로 관람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이런 명작, 볼거리가 다 있냐면서 정줄을 놓고 빨려들더군요. 씬과 시퀀스가 액션으로만 채워질 때, 이에 특별한 선호나 공감대가 없는 관객은 이를 쏜다, 부순다, 죽인다 같은 텍스트로 만 바로 해석, 정리하기 때문에 아주 지루해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 <프린테라>처럼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a가 품에서 총(혹은 무슨 중화기라도)을 꺼내 b를 쏜다, 파괴한다, 내장을 조각낸다(...) 같은 단순한 동작 묘사의 반복이 아니라(불가능하죠. 누가 그런 걸 읽겠습니까?), 작가만의 찰진 감각으로 영리한 묘사가 이어지면 사정이 또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장르 문학이란, 그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층에게도 어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여태 좋아하지 않았기에) 이번의 소비가 처음으로 뜨는 한 술인 독자에게는 말입니다. 이후, 이걸로 충분하다며 다시는 같은 장르를 안 접할 이들도 있겠으나, 심지어 이 경우에도 이 작품만은 성공을 제한적이나마 거둔 셈입니다.

어떤 사람은 패기 있고 가능성 창창한 작품에 대해서도 천박한 정치적 계산 끝에 생각없는 폄하를 하며, "까다로운 독자" 티를 남들 앞에(그래봤자 지극히 미미한, 똑같이 무지한 거짓말 수다쟁이들에 불과하지만) 꾸미려는 목적으로 온갖 희한한 거짓 감상을 다 지어내는 걸 다 봤습니다. 이런 사람은 작품을 읽고 내실을 가꾸려는 게 아니라, 있지도 않은 허상을 꾸미고 가당치 않은 자기 만족을 위해 혼자 연극을 벌이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자꾸 반복해 봐야 그 속에서 파묻혀 즐거운 건 자신뿐인데도 이 정도면 남들도 같이 속겠거니 어리석은 착각에 빠지는 거죠.

군더더기 없고 클리셰(장르소설이니까요)의 깔끔한 활용으로 독자에게 최소한의 노력으로 경제적인 감흥을 안기는 진행이 참 좋았습니다. 우리가 데이빗 카퍼필드의 쇼에 찾아가는 건 정말로 바보 같이 속고 싶어서가 아니라(속는 게 기분 좋은 사람도 있을까요?), 익숙한 경로 속에 매번 맛보아도 묘한 쾌감이 느껴지는 체험을 반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반전도 알고 줄거리도 훤히 꿰는 명작을 두 번 세 번 읽는 이유도 대체로는 같습니다. 이걸 모르고 엉뚱한 데서 잘난척(도 아닌 못난 척)을 늘어 놓는, 중화요리 맛집에서 캐비어 안 나온다고 헛소리나 늘어놓는 건 참.

"테라포밍"은 우주 식민지 개척의 하위 장르로서, 지구와 똑같은 환경 여건을 갖춘(우리 어렸을 때는 이런 뉴스가 참 자주 전파를 탔죠. 찾았다는 소식부터 여전히 어렵다는 '현황"만을 전문가의 입을 통해 재확인하는 허탈한 "교양 뉴스"까지) 행성 알아내기가 그야말로 하늘에 별따기란 걸 알게 된 후, 자연스럽게 작가(만화가, 웹툰 작가들 포함 - 이제는 당연하지만)나 독자들 머리에 떠오를 법한 생각입니다. "어려우면, 황무지 개척하듯 아무데나 들어가서 하나 개척하면 되지 않을까?"

물론 개척에도 한계가 있어서 최소한 중력 조건이나 행성 표면에 도달하고 복사되는 에너지 준위는 일맞게 충족되어야죠. 문제는, 이런 장르에서 테라 포밍 "과정"이 꽤 잔인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기에, 어린 독자들에게 특히 주의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저희 어렸을 때와 달리 지금은 정보를 얻는 원천이 너무 많고, 자극을 왕성히 받아 머리가 활발히 작동하는 것도 좋지만 그 과정에서 불건전한 쪽으로 자꾸 자극을 원하는 것도 위험천만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역시 "내장"이 종종 목격(?)되는 등 고어 풍이 도처에서 나오고, 투쟁 과정도 잔혹하고 살벌한 면이 있습니다만, 이는 장르 경향을 생각할 때 뭐 다른 방법이 없었을 듯도 합니다. "야후"라는 종족명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에는 고전, 신화에서 영향을 받은 작명이 많이 눈에 띄며, "대충 거머리탄으로 부르기로 했다(p205)"는 등 한국적인 단순화 센스, 소탈한 구어의 매력도 웃음을 부릅니다. (꼭 SF가 아니라도) 밀리터리 장르에서 이런 구어(막말?)의 털털한 매력이야말로 독자(나 관객)를 사로잡는 요소 중 하나죠.

여전사의 역할이란, 아무리 장르물을 많이 봐서 머리에 인이 박인 독자라고 해도 또 볼때마다 눈이 갑니다. 여기서는 엘리가 나오는데.. 예전에 만화가 박무직은 영화 <컨택트>를 보고 조디 포스터의 "우는 연기"를 그렇게나 맹렬히 질타하더군요. 울지 말라는 게 아니라(안 우는 것도 물론 중요 옵션이 됩니다) 아무리 장르 속이라고 해도 뭔가 개연성이 있어야 하는데, 저 영화에서 여배우는 물론 감독까지 함깨 욕을 먹을 상황이었고, 저 역시 그 사정없는 혹평에 속이 다 후련해졌더랬습니다. 엘리를 꼬옥 안아주는 그, 왜 우는지 알겠다는 그이지만 글쎄요. 제가 구태여 불만이 있다면 (다른 클리셰 말고) 바로 여기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두고 반전이 상쾌하다고들 많이 하십니다. 반전은 잘 맞히면 맞히는 재미가 있고, 아무래도 너무 내가 잘 아는 반전이 나올 것 같아 예측은 최대한 자제하고 작가가 세팅한 대로 착하게 스토리만 따라가든지, 캐릭터에만 푹 빠지겠다고 결심하며 나중에 가서야 (독자로서의 능력, 관록을 푹 죽인 후) 다른 평범한 독자들과 함께 화들짝 놀라 "주는" 그런 독자도 있습니다. 본디 장르물은 정말 신기하고 놀라워서 읽는 게 아니라, 공감대 맞는 이들끼리 막 놀란 척하며 같이 노는 맛에 읽는 겁니다. 그런 이유에서 이 작품, 참 재미있습니다. 박카스 마신다고 정말 몸이 좋아지거나 자양강장 효과가 팍팍 나는 게 아니라, 시원하게 목을 축였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와 그녀의 꽃들
루피 카우르 지음, 신현림 옮김 / 박하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다큐멘터리를 보며 자연계에서 "성폭력"이란 게 과연 어떤 양상으로 존재할까 같은 게 궁금해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후 젠더 담론에 대한 여러 교양서적을 읽으며 인간은 확실히 이런 이유에서도 대단히 폭력적이고 파괴적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고, 비뚤어진 개체의 생존 욕구와 자연의 공존, 조화가 어디까지 가능할지에 대해서도 깊은 의문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요즘 특히나 미투 움직임 때문에 사회 곳곳이 심상찮은 분위기이기도 하고, 이처럼 상황이 (그나마) 호조건으로 개선되는 속에서도 여전히 피해자로서 그늘에 갇혀 밖으로 과감히 못 나오시는 안타까운 분들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가해자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낯뜨겁고 추악하며 비틀린 추태를 떨기도 합니다. 어떤 자는 이 와중에 비천한 부화뇌동 심리를 발동하여 신나게 범죄 행각에 가담하다가, 일이 심상치 않게 풀린다 싶자 나쁜 머리를 최대한 활용하여 싸~악 잊고는 관전자 모드로 돌변하여 특유의 어색한 연극을 혼자서 요란하게 펼치기도 합니다. 세상사 참으로 요지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 루피 카우르는 시인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실제로 성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지닌 이런 깊은 상처가 개인 차원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속한 문화권 전체가 안은 원죄라든가, 제도에 깊이 스민 비뚤어진 우월 의식, 편견 따위가 최상위의 범죄 교사자로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하긴 이런 말을 하면, 마치 피해자에 깊이 공감하는 듯 위선을 떨다가 "빈곤한 후진국에서 입에 풀칠이나 간신히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같은, 차라리 비하나 조소에 가까운 표현 속에 희한한 우월감, 병적 쾌감을 담는 자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컨대 한진그룹의 모 전무처럼 진짜 금수저 출신이기나 하다면 그러려니 포기하고 그나마 말도 안 하겠는데. 진짜 간신히 차상위나 모면한 인간이 말도 안 되는 허세 속에 환각의 신분 상승 의식을 혼자 치르고 있으니 그저 아연할 밖에요.

"오늘 폭탄들은
모든 도시들을 무릎 꿇렸다.
난민들은 보트에 올라탔다.

지난달 방문한 고아원은
쓰레기처럼 버려진 아기를 위한 곳이었다.

어찌 내 삶이
기적에 못 미친다 하겠는가
이 모든 혼란 속에서
이 삶을 얻었는데"

(책 p134 <상황>에서 일부 발췌)

보트피플이라고 하면 1970년대 후반 월남 패망 후 동남아에 속출했던 난민들을 주로 가리켰으나, 현재는 지중해 일대에서 떠도는 난민들이 대뜸 떠오르죠. 루피 카우르는 자신도 피해자였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으면서, 자신보다 훨씬 못한 어린 고아들을 동정하며 자신의 삶을 "기적"으로 에스컬레이트합니다. 가장 불행한 인간은 일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터무니없는 환각을 지어내어야만 버틸 수 있는 자이고, 이 SNS 시인 카우르처럼 스스로의 삶이 "기적"임을 알아볼 수 있는 영혼이야말로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낄 자격이 있다 하겠습니다.

"당신은
이전에도
내 삶에
다녀갔어."

(책 p192 <또다른 생애> 全文)

시인이 본디 인도 분이다 보니 우리처럼 윤회 사상에 매우 익숙한 발상을 갖고 있습니다. 하긴 "우리처럼"이 아니라 우리가 저들 문화권에서 수입한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생의 유한함에 절망하고, 고통스러울망정 윤회, 재생(reincarnation)을 통해 존재가 한번 죽음으로 사멸하고 끝이 아님을 상정하고 싶은 마음은, 인류 통성이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영으로 육으로 깊은 교감을 나눈 이성이라면, 당연 전생에서의 기시감이 그 정(情)에 투영될 만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먹여 준 사람들의
접시를 채우지 않고
낯선 이들의 접시만 채우고 있다면
나는 무슨 소용인가"

(p220 <가족> 전문)

가장 잘못된 인간은 배우자와 불화하며, 자신에게 비뚤어진 가치관만 심어 준 범죄 형질의 DNA만 퇴행적 추억 안에 간직한 부류입니다. 이런 자는 가족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 속의 병든 형질을 애무하며 비뚤어진 망상에 취하는 거죠. 시인은 그간 여러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위 시 <상황>에서 보았듯) 절망적 처지에 놓인 고아, 난민들에 대한 진정성 가득한 봉사에도 몸 담았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도, 나를 보듬어 주고 수렁에서 건져 주고 외부의 상처에서 보호해 준 가족들에 대한 "보은(報恩)"이 후순위라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아주 소박하면서도 솔직한 고백이 독자의 마음을 훈훈하게 채웁니다.

너무 어두운 쪽으로만 선입견을 갖지 마시고, 미국 SNS를 뜨겁게 달군 스타 네티즌이었던 그녀의 다양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시집이니 그저 시를 만난다고 여기고 부담 없이 책을 펼쳤으면 합니다. 물론 자신의 상처가 있는 분들이야 직접 공감대를 지닌 시인의 표백이니 특별한 기대를 품어도 되겠지만 말입니다. 박하의 책이라서 여전히 예쁜 장정 덕분에 독자는 더 행복합니다. 원문이 힌디어가 아니라 영어이므로 관심 있는 분들은 그녀의 인스타나 페북에 가서 직접 감상, 교감할 수도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셔츠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3
예브게니 그리시코베츠 지음, 이보석.서유경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그런 생각에 젖을 때가 있습니다. "왜 이처럼, 시대를 앞서 가는 조류와 각성이 꼭 러시아에서 비롯할까?" 역사 중 그러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면 유일하게 공산주의 체제가 지배하던 구간이며, 심지어 이 시절에도 (지난번 리뷰에서 말한 것처럼) 디나 루비나 같은 빛나는 여성 작가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일각을 이끈 사례를 보기도 했습니다. 두 세기 전 활동한 고골의 단편들 역시, 지금 읽는 감각으로도 얼마나 모던, 아니 포스트모던한지 모릅니다. 멍텅구리 바보나 그저 제 하찮은 감각에 낯설다고 해서 당치도 않게 "예전 작품" 운운할 뿐이죠.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작가"란 직종은 따로 구별되지 않고, 만인 창작 만인 향유의 구조로 바뀔지도 모릅니다. 이런 게 꼭 좋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수련이나 소양이 불비한 채 그저 어리석은 대중에게 말초적인 어필이나 하는 영리한 통속물의 생산자나, 무책임한 선동가가 고작 득세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예브게니 그리시코베츠가 스스로를 일러 "현대 러시아 인문의 선구"를 자처하는 건 그래서 한편으로 마음이 든든합니다. 러시아 문학 같은 유서 깊고 뼈대 탄탄한 가문에 자격 있는 적장자가 출현한 셈이니 말입니다.

안톤 체홉의 단편 <약혼녀>가 대뜸 떠오르는 건, 꼭 등장인물 샤샤가 이름이 비슷해서만은 아닙니다. <약혼녀>애서 집안의 결정에 따라 알렉세이와 혼인하기로 정해진 나쟈는, 한편으로 나의 인생이 이렇게 타의에 의해, 다른 어떤 가능성도 꽃피워 보지 못한 채 고정된 궤도만 운행하는 게 과연 올바를까 하는 깊은 회의에 잠깁니다. 이 나쟈에게 "당신 생각대로 의지대로 해 보세요!"라며 마치 남자 팅커벨처럼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히치콕 감독의 <서스피션>에서와는 달리, 나쟈는 대단히 파격적이고 과감한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러운 미래를 꾸려 갈 수 있었지만, 아마도 많은 경우 현실은 나쟈 아닌 리나의 경로를 따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샤샤는 이혼남입니다. 대도시에서 그러저럭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었으나 이혼 후 실의와 회의에 젖어 낙향하는 이들은 종종 봤지만, 샤샤처럼 반대로 기존의 터전을 떠나 모스크바 같은 대처로 이전하는 건 처음 봅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시골, 중소도시를 떠나는 건 차라리 흔해도, 샤샤는 "거대한 모스크바"에서 오히려 그 빈곤하고 틀에 박힌 가능성의 영양실조에 몸부림을 칩니다. 허나 독자인 제 생각에, 이런 샤샤의 호들갑은 그저 에고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호들갑, 혹은 사전 정지 작업에 가까웠던 듯합니다. 실제로 그는 "기적과도 같이" 그녀를 발견했기 때문이죠.

기적과도 같이 발견한 그녀와 함께, 샤샤는 전혀 새로운 일생의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을까요? 혹시 이 작가 예브게니 그리시코베츠를 영화에서 보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분은 사실 무대에 더 자주 서는 배우이고, 출연한 영화는 러시아 영외에서 잘 상영되지 않습니다만(흥행 전망이 불투명하니 당연하죠) 운 좋게 몇 년 전에 개인적으로 한 편을 감상한 적 있습니다. 이분이 어떤 배역을 맡든, 그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배역보다는 배우 자신의 이미지가 관객한테 깊이 다가와서 박힙니다. 소설을 읽으며 소심한 주인공 샤샤가 지금 뭘 말하려는지 감이 안 오는 분들은, 한번 그의 영화를 구해서 연기를 구경해 보십시오. 샤샤가 꼭 그리시코베츠의 페르소나 같아서 지금 하는 말입니다.

잘 차려입고 즐겁게 외출하려는 찰나 꼭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청하는 고향 친구에 대한, 약간 죄스러운 짜증 경험해 보신 적 있습니까? 제 생각에는 이 소설 속에서 "현실"을 대변하는 건 친구 막스와의 소통과 접촉뿐입니다. "기적처럼 만난 그녀"는 과연 현실이 맞을까요? 전처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생의 동력 주요 부분이 꺼져 버린 샤샤에게, "기적"은 그런 현실을 탈피할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 정도 아니었을까요? 기적과 유쾌한 도락은 사실 샤샤가 "잠" 속에서만 체험할 수 있었고, "현실"은 따분하고 부담스러운 친구 막스와의 접촉이 고작인 거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병주 교수의 조선 산책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 산책". 말만 들어도 그윽한 느낌이 바로 전해져 옵니다. 수려한 산천의 풍경에, 흐르는 물을 국자로 그냥 떠 마셔도 병든 닭의 비뚤어진 신진대사와 썩은 영혼을 그대로 씻어 줄 것만 같은 천혜의 아름다운 강산. 하늘이 내렸다 할 이토록 아름다운 국토 한복판에 도읍한 신(新) 조선의 제제는, 첫째 이민위천(以民爲天)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본격 민본의 행정을 지향했고, 둘째 청렴하고 유능한 신진 관료 사대부를 대거 등용하여 통치의 효율을 기했습니다. 그래서, 비단 아름다운 풍수와 역사의 순리에 기대어 신 왕조가 개창한 게 아니라, 문물 제도의 세밀한 실제 곳곳에서 과연 볼 만한 것 평가할 만한 것이 많아 그 위에서 넉넉히 상념의 "산책"이 가능했다 하겠습니다.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조선"의 이미지를 물으면, 첫째 약하다(약했다), 둘째 시대의 흐름에 뒤처졌다 등 부정적인 게 많습니다. 그러나 저자 신병주 교수님의 이 책은, 대륙에서 이삼백년짜리 왕조가 흥성과 쇠망을 번잡스레 반복할 때 그 위신과 체제를 오백여 년이나 이어  온 이 왕국의 제도와 사정에, 다시 새길 만한 미덕과 장점이 많았다는 쪽입니다. "와, 이런 게 다 있었어?" 무릇 산책이란, 마음을 명경지수의 단계에 가만히 둔 후, 격물치지하고 위민찰물하여 나와 내 주변에 감춰져 있던 그 무엇을 재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어진(御眞)은 한 강역을 다스리는 지존의 금상을 비단 등에 붓으로 옮긴, 사진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로는 통치자의 모습을 격지와 후세에 두루 전할 참으로 중요한 예술품이자 소통의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아슬아슬하게나마 전하는 몇몇 어진들은, 국립 고궁 박물관이 특별 전시회라도 열어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을 만큼 일반에 노출되는 예가 매우 적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전 와중에서 이 소중한 문화 유산 중 상당수가 멸실하여, 현재 일부라도 남아 전하는 건 다섯 분의 임금 몫뿐입니다.

저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용모와 기풍을 평하면서, 예컨대 연잉군(이후 영조)의 경우 젊었을 때나 노년(이는 물론 한참 후대에 그려진 것입니다만)에나 깐깐한 성품, 혹은 체형이 그대로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가 장수한 데에는 이처럼 철저한 자기 관리가 큰 기여를 했으리라고 현대적 해석을 덧붙입니다. 하나 상기하고 싶은 건, 이처럼 특별한 전시회라도 열려 평소에 접하기 힘든 소중한 유산을 만날 기회에 대한 정보는, 우리들이 스스로 알아서 챙겨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꼭지는 2015년 12월 19일에 작성되었다고 책에 나옵니다. 이 무렵이면 모 전직 대통령이 느닷 사거(死去)할 시점이기도 한데, 그에 따른 저자의 소회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앵두"가 현재는 표준어이지만 어원은 앵도(櫻桃)라고 합니다. 책에는 꾀꼬리가 잘 먹고 복숭아를 닮아서 이름이 그리 붙었다고 합니다. 혹 그렇다면 앵(櫻)은 앵(鶯)으로 바뀌어야 할 듯합니다. 여튼 효성이 지극했던 문종은 왕세자 시절 부왕의 질환을 돌보기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고, 후원에 따로 이 나무를 길러 그 열매를 따 바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봉건주의의 잔재라든가 하여 왕실의 이런 훈훈한 미담을 체제의 프로파간다로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대뜸 이런 생각부터 드는 사람은 제 부모에 불효하고 스스로의 삶도 불성실하게 영위하는 실패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천한 밑바닥은 정작 사람 같은 사람의 행적에 선뜻 공감을 못하게 마련이니 말입니다.

당시 궁중에서 최고 실권을 휘두르던 문정왕후에 대해 일개 과부로 폄하하고, 명종(조선 13대 임금)은 고사(孤嗣)로 칭해 큰 논란을 야기했던 북인의 영수 남명 조식의 일화도 책에 전합니다. 남명 조식은 조선 유가 사색당파 중 한 무리의 개조로 일컬어질 만큼 학덕이 높은 대유(大儒)였는데, 저기서 "고사(孤嗣)"라 함은 고아나 마찬가지인 외로운 처지로서 대(代)를 이은 장손이라는 뜻이니, 새기기에 따라서 나이 들고 깨달음이 큰 선비가 젊은 군주에 보내는 지극한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 말하듯 "그냥 임금이 된 사람" 정도로 비아냥대는 뜻이 결코 아니죠. 이 일화는 명유의 "상소"가 조야에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했는지, 언로(言路)의 트임이 정치의 청탁(淸濁)에 얼마나 결정적 기여를 베풀었는지 엿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한 영조도 집권 후 탕평책을 시도했는데, 사실 당쟁의 폐단은 그보다 훨씬 앞선 선조, 광해군 연간부터 심각한 정정 불안을 낳던 수준이었습니다. 오리 정승으로 유명한 이원익은 남인 출신이었는데도, 광해군 시절에 정권을 전단(專斷)했던 북인들조차 그의 덕망을 높이 사 중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가에 따라 간신으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오래 전 당나라의 역사를 봐도 여튼 이림보 같은 노회한 정치인이 재임할 때엔 정치적 균형이 달성되어 군사 변란 등이 일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고려 말 이인임이 그렇게 욕을 먹어도 여튼 그의 수완으로 조정이 붕괴되는 지경은 면했던 것입니다. 광해군과 북인이 이 오리 정승을 조금만 후대했어도, 서인의 쿠데타로 끔찍한 비극이 벌어지는 사태는 미연에 방지되었을 겁니다.

저자는 특히 숙종 연간에 종종 파견되었던 "암행어사" 직책에 대해 언급하며,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어사는 "당하시종신"이었으므로, 예컨대 소설(혹은 판소리 대본) <춘향전>에서처럼 갓 과거에 급제한 신참이 어사로 임용되는 예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어사는 종 6품이상의 품계여야 했으며, 당하관은 정3품 하계부터 종 9품을 두루 일컫는 말입니다. 장원급제자의 경우 종6품으로 바로 시작할 수 있었으니 소설 속 설정은 당대 법제와 충돌하지는 않으나, 다만 상피제의 한계 때문에 실제 남원으로 파견되는 일은 없었으리라고도 덧붙입니다.

2013년 11월 15일에 쓰인 글이지만 서두에는 ".... 최근 드라마 <대군>등의 방영으로 ...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말씀으로 보아 이 부분은 적어도 올해(2018) 상반기에 개필된 듯합니다. 수양의 리더십과 체제 재건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지만 "쿠데타로 임금이 된 정통성의 결여"는 두고두고 꼬리표처럼 그의 행적을 발목잡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른바 "황표 정사" 등으로 왕의 위상과 권위를 추락시킨 김종서와 황보린 등의 과오가 쿠데타를 결과적으로 유발한 패착을 지적하는 것도 저자는 잊지 않습니다.

역사상 조선의 정유년에는 큰 고비가 나라를 휩쓸고 지나간 점에 저자는 주목합니다. 우선 왜(倭)가 재침(再侵)한 정유재란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효종의 북벌 추진으로 인한 전화 조짐의 긴장기, 이로부터 한참 후의 대한제국 건국 등을 꼽습니다. 이 글은 2017년 정유년 초에 쓰였는데, 저자의 특별한 느낌과 감회가 곳곳에서 묻어납니다. 바로 뒤 p148에는 아관파천을 두고 1896년 병신년이라고 하는데, 이미 을미개혁 당시 정부에서는 양력을 채택한 후이므로 이 부분이 보다 정확한 듯합니다. 다만 육십갑자는 태음력에 의한 전통 역법으로 해가 바뀌는 시점 이후에 적용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입니다.


이 책을 읽은 분들, 혹은 앞으로 읽으실 분들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대목이 바로 "세종 연간의 국민투표"입니다. 물론 명칭이 직접적으로 "국민 투표"로 정해지지야 않았습니다만, 이른바 공법(貢法), 즉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전분6등법, 연분9등법의 실시에 대해 세종은 무려 국민의 뜻을 직접 물은 거죠. "... 각 도의 감사, 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 아뢰게 하라." 총 참가자는 17만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는 여성과 노비를 제외하면 거의 전 국민의 참여가 이뤄진 결과라고 저자는 해석합니다.

책 말미에는 이른바 화산 이씨의 시조가 멀리 베트남에서 정착한 일(이 자체는 고려 연간입니다)부터 해서, 조선 시대에 이뤄진 다양한 외부인의 귀화 사례를 언급합니다. 이른바 다문화 이슈에 대해 조선도 대단히 선제적, 진취적으로 대응했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조선 시대의 통치자들이 이처럼 실용과 공영의 이념으로 열린 마인드를 지녔던 사실에 비추어, 글로벌 시대를 사는 우리 후손들이 어떤 방향으로 미래를 설계해야 할지는 자못 뚜렷하다고나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