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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의 조선 산책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8년 4월
평점 :
"조선
산책". 말만 들어도 그윽한 느낌이 바로 전해져 옵니다. 수려한 산천의 풍경에, 흐르는 물을 국자로 그냥 떠 마셔도 병든 닭의
비뚤어진 신진대사와 썩은 영혼을 그대로 씻어 줄 것만 같은 천혜의 아름다운 강산. 하늘이 내렸다 할 이토록 아름다운 국토 한복판에
도읍한 신(新) 조선의 제제는, 첫째 이민위천(以民爲天)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본격 민본의 행정을 지향했고, 둘째 청렴하고
유능한 신진 관료 사대부를 대거 등용하여 통치의 효율을 기했습니다. 그래서, 비단 아름다운 풍수와 역사의 순리에 기대어 신 왕조가
개창한 게 아니라, 문물 제도의 세밀한 실제 곳곳에서 과연 볼 만한 것 평가할 만한 것이 많아 그 위에서 넉넉히 상념의
"산책"이 가능했다 하겠습니다.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조선"의 이미지를 물으면, 첫째 약하다(약했다), 둘째 시대의 흐름에 뒤처졌다 등 부정적인 게 많습니다. 그러나
저자 신병주 교수님의 이 책은, 대륙에서 이삼백년짜리 왕조가 흥성과 쇠망을 번잡스레 반복할 때 그 위신과 체제를 오백여 년이나
이어 온 이 왕국의 제도와 사정에, 다시 새길 만한 미덕과 장점이 많았다는 쪽입니다. "와, 이런 게 다 있었어?" 무릇
산책이란, 마음을 명경지수의 단계에 가만히 둔 후, 격물치지하고 위민찰물하여 나와 내 주변에 감춰져 있던 그 무엇을 재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어진(御眞)은 한
강역을 다스리는 지존의 금상을 비단 등에 붓으로 옮긴, 사진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로는 통치자의 모습을 격지와 후세에 두루
전할 참으로 중요한 예술품이자 소통의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아슬아슬하게나마 전하는 몇몇 어진들은, 국립 고궁 박물관이 특별
전시회라도 열어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을 만큼 일반에 노출되는 예가 매우 적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전 와중에서 이 소중한 문화
유산 중 상당수가 멸실하여, 현재 일부라도 남아 전하는 건 다섯 분의 임금 몫뿐입니다.
저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용모와 기풍을 평하면서, 예컨대 연잉군(이후 영조)의 경우 젊었을 때나 노년(이는 물론 한참 후대에 그려진
것입니다만)에나 깐깐한 성품, 혹은 체형이 그대로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가 장수한 데에는 이처럼 철저한 자기 관리가 큰 기여를
했으리라고 현대적 해석을 덧붙입니다. 하나 상기하고 싶은 건, 이처럼 특별한 전시회라도 열려 평소에 접하기 힘든 소중한 유산을
만날 기회에 대한 정보는, 우리들이 스스로 알아서 챙겨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꼭지는 2015년 12월 19일에 작성되었다고 책에
나옵니다. 이 무렵이면 모 전직 대통령이 느닷 사거(死去)할 시점이기도 한데, 그에 따른 저자의 소회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앵두"가
현재는 표준어이지만 어원은 앵도(櫻桃)라고 합니다. 책에는 꾀꼬리가 잘 먹고 복숭아를 닮아서 이름이 그리 붙었다고 합니다. 혹
그렇다면 앵(櫻)은 앵(鶯)으로 바뀌어야 할 듯합니다. 여튼 효성이 지극했던 문종은 왕세자 시절 부왕의 질환을 돌보기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고, 후원에 따로 이 나무를 길러 그 열매를 따 바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봉건주의의 잔재라든가 하여 왕실의
이런 훈훈한 미담을 체제의 프로파간다로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대뜸 이런 생각부터 드는 사람은 제 부모에 불효하고 스스로의
삶도 불성실하게 영위하는 실패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천한 밑바닥은 정작 사람 같은 사람의 행적에 선뜻 공감을 못하게
마련이니 말입니다.
당시 궁중에서 최고
실권을 휘두르던 문정왕후에 대해 일개 과부로 폄하하고, 명종(조선 13대 임금)은 고사(孤嗣)로 칭해 큰 논란을 야기했던 북인의
영수 남명 조식의 일화도 책에 전합니다. 남명 조식은 조선 유가 사색당파 중 한 무리의 개조로 일컬어질 만큼 학덕이 높은
대유(大儒)였는데, 저기서 "고사(孤嗣)"라 함은 고아나 마찬가지인 외로운 처지로서 대(代)를 이은 장손이라는 뜻이니, 새기기에
따라서 나이 들고 깨달음이 큰 선비가 젊은 군주에 보내는 지극한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 말하듯 "그냥 임금이 된
사람" 정도로 비아냥대는 뜻이 결코 아니죠. 이 일화는 명유의 "상소"가 조야에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했는지, 언로(言路)의
트임이 정치의 청탁(淸濁)에 얼마나 결정적 기여를 베풀었는지 엿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한 영조도 집권 후 탕평책을 시도했는데, 사실 당쟁의 폐단은 그보다 훨씬 앞선 선조, 광해군 연간부터 심각한 정정 불안을 낳던
수준이었습니다. 오리 정승으로 유명한 이원익은 남인 출신이었는데도, 광해군 시절에 정권을 전단(專斷)했던 북인들조차 그의 덕망을
높이 사 중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가에 따라 간신으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오래 전 당나라의 역사를 봐도 여튼 이림보
같은 노회한 정치인이 재임할 때엔 정치적 균형이 달성되어 군사 변란 등이 일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고려 말 이인임이 그렇게 욕을
먹어도 여튼 그의 수완으로 조정이 붕괴되는 지경은 면했던 것입니다. 광해군과 북인이 이 오리 정승을 조금만 후대했어도, 서인의
쿠데타로 끔찍한 비극이 벌어지는 사태는 미연에 방지되었을 겁니다.
저자는
특히 숙종 연간에 종종 파견되었던 "암행어사" 직책에 대해 언급하며,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어사는
"당하시종신"이었으므로, 예컨대 소설(혹은 판소리 대본) <춘향전>에서처럼 갓 과거에 급제한 신참이 어사로 임용되는
예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어사는 종 6품이상의 품계여야 했으며, 당하관은 정3품 하계부터 종 9품을 두루 일컫는 말입니다.
장원급제자의 경우 종6품으로 바로 시작할 수 있었으니 소설 속 설정은 당대 법제와 충돌하지는 않으나, 다만 상피제의 한계 때문에
실제 남원으로 파견되는 일은 없었으리라고도 덧붙입니다.
2013년
11월 15일에 쓰인 글이지만 서두에는 ".... 최근 드라마 <대군>등의 방영으로 ...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말씀으로 보아 이 부분은 적어도 올해(2018) 상반기에 개필된 듯합니다. 수양의 리더십과 체제 재건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지만
"쿠데타로 임금이 된 정통성의 결여"는 두고두고 꼬리표처럼 그의 행적을 발목잡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른바 "황표 정사" 등으로
왕의 위상과 권위를 추락시킨 김종서와 황보린 등의 과오가 쿠데타를 결과적으로 유발한 패착을 지적하는 것도 저자는 잊지 않습니다.
역사상 조선의 정유년에는 큰 고비가 나라를 휩쓸고 지나간 점에 저자는 주목합니다. 우선 왜(倭)가 재침(再侵)한 정유재란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효종의 북벌 추진으로 인한 전화 조짐의 긴장기, 이로부터
한참 후의 대한제국 건국 등을 꼽습니다. 이 글은 2017년 정유년 초에 쓰였는데, 저자의 특별한 느낌과 감회가 곳곳에서
묻어납니다. 바로 뒤 p148에는 아관파천을 두고 1896년 병신년이라고 하는데, 이미 을미개혁 당시 정부에서는 양력을 채택한
후이므로 이 부분이 보다 정확한 듯합니다. 다만 육십갑자는 태음력에 의한 전통 역법으로 해가 바뀌는 시점 이후에 적용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입니다.

이
책을 읽은 분들, 혹은 앞으로 읽으실 분들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대목이 바로 "세종 연간의 국민투표"입니다. 물론 명칭이
직접적으로 "국민 투표"로 정해지지야 않았습니다만, 이른바 공법(貢法), 즉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전분6등법, 연분9등법의
실시에 대해 세종은 무려 국민의 뜻을 직접 물은 거죠. "... 각 도의 감사, 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 아뢰게 하라." 총 참가자는 17만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는 여성과 노비를
제외하면 거의 전 국민의 참여가 이뤄진 결과라고 저자는 해석합니다.
책
말미에는 이른바 화산 이씨의 시조가 멀리 베트남에서 정착한 일(이 자체는 고려 연간입니다)부터 해서, 조선 시대에 이뤄진 다양한
외부인의 귀화 사례를 언급합니다. 이른바 다문화 이슈에 대해 조선도 대단히 선제적, 진취적으로 대응했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조선 시대의 통치자들이 이처럼 실용과 공영의 이념으로 열린 마인드를 지녔던 사실에 비추어, 글로벌 시대를 사는 우리
후손들이 어떤 방향으로 미래를 설계해야 할지는 자못 뚜렷하다고나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