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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진단과 처방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송인창 외 지음 / 원더박스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시대가 바뀌면 제도를 운용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과거의 영화와 안락에만 젖어 낡은 해법만을 고집하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합니다. 한국 경제에 중병이 든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어떤 이들은 "병이 있으면 고칠 약도 반드시 있기 마련"이란 말도 하죠. 의학적으로야 반드시 타당한 언명은 아니라
해도, 사람 사는 세상에 난관이나 장애가 닥쳐도 적극적으로 궁리를 계속하면 반드시 돌파구가 찾아진다는 뜻으로 새길 일입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이 말의 정확한 뜻은, "그때(에)는 맞았으나, 그때의 방식을 지금 적용하면 그런 태도는 잘못이다."
정도겠습니다. 혹 잘못 해석하면, 그때의 방식은 옳고 지금 하는 건 잘못되었다." 정도로 정반대의 오해를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이 어구는 어느 유명 영화 감독(이 시끄러운 시국의 와중, 소리소문없이 또한번 충격적인 발표를 하신...)의 화제작 제목
문구를 재치있게 비튼 데서 유래했다는 것 정도는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죠(p325 이하 에필로그에도 저자들이 스스로 밝힙니다).
학교에서
코스(코즈 혹은 코어즈. R H Coase. 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 정리 정도는 경제학에 깊은 소양이 없는 분들도 이름
정도는 접했을 것입니다. "외부 효과" 이슈는 당시만 해도 경제학에서 풀리지 않는 난제 중 하나로 여겨졌는데, 이를 로널드
코스가 간명한 방식으로 증명해 낸 것입니다. 이분의 업적에 대해, 대개는 정부의 개입을 금기시하며 자유 방임주의의 타당성을
간접으로 뒷받침했다고도 여겨지만, 저자(필진 중 한 분. 참고로 이 책은 전현직 고위 경제관료들이 의기투합해 저술했습니다)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코스 정리가 규격화하여 널리 유명해지게 된 배경에는 코스 본인이 아니라 스티글러의 해석, 변형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도 하는데, 이에 대해 코스 본인도 불만이 많았다고 하네요.
여튼
1장에서, 저자는 "코스의 눈"으로 재벌 문제를 바라보자며, 발표 후 근 30년 동안이나 학계의 주목을 끌지 못했으나 뒤늦게
발견되어 "사회적 비용(개별 경제 주체 차원의 비용이 아닌)"에 대한 논의와 함께 논쟁의 핵심에 서게 되었음을 지목합니다. 코스는
여기서 물론 불필요한 정부 개입이 매우 해로울 수 있다며 피구(A C Pigou)의 주장에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언제나
정부의 개입을 반대한 건 또 아니며, 때로는 정부가 적절히 시장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견해네요. 저자의 시각은,
"이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과 정책 선택의 문제"라는 겁니다. 하긴 경제 정책에 도그마가 어디 있겠습니까. 타이밍과 여건을
봐서 유연하게 태도를 바꿔가며 액션을 취하는 게 정답이고 능력이죠.
재벌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이미 기업의 이해와 오너의 득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국면이라는 건 공지의 사실입니다.
삼성의 총수가 구속된 후 경영 투명성 제고에 대한 기대 때문에 오히려 주가가 상승한 건 이런 사회적 합의를 방증합니다. 코스의
이론은 오히려 "기업을 기업답게 재편성하여 기업도 살고 사회도 동반성장을 도모해야 하며, 일부 극소수 지분권자의 탐욕 추구에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에 가깝습니다. 물론 저자의 주장이지만, 어떤 특정 정치권에 친분을 둔 폴리페서가 아니라 정부에 몸담은 경제
관료의 선명한 입장이므로 그 설득력이 더하다고 하겠습니다.
아직도
고도성장이 필요하고, 또 가능한가? 여기에 대해 저자는 "생산성은 노동이나 자본보다,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에 더 큰 영향을
준다."라고 말합니다. 생산성이 경제성장에 영향을 준다니 얼핏 잘못 보면 동어반복 같은 느낌을 줍니다만, 여기서는 보다 장기적
관점의 생상성을 가리키며, 귀속 주체는 "사회 전반"이고, 노동 생산성이나 자본 생산성 같은 개별 요소 한정이 아니라고 새겨야 할
듯합니다. 그 다음 줄 쿠즈네츠(물론 쿠즈네츠 파동 할 때 그분입니다)는, "경제 성장의 원천은 기술 발전"이라고 했는데, 이
맥락을 보면 여기서의 생산성은 슘페터적 의미의 "혁신"에 가까움도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2장 말미에서 이른바 "낙수효과"의 의의를 전면 부정합니다. 이미 특정 계층의 소득 증대가 다른 계층의 영역으로 확산하지 않고
각각이 고립된 strip처럼 폐쇄 경로에서만 순환하는 현상이 도처에서 목도되기 때문입니다. (지표로서의) GDP 무용론이 대두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이런 까닭에 저자는 소득 등 양적 통계 외 다양한 인덱스를 개발해야 국민의 복리를 정확히 계측, 반영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당연한 소리 같아도 정책 결정 섹터에서 종전의 양적 지표가 업무 조정, 판단 과정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살핀다면, 경제 관료 출신의 이런 제언은 울림이 상당합니다.
과소비가
문제인가, 저소비가 문제인가. 한때 故 정운영 선생 같은 분은 "소비가 미덕이라 주장하는 얼빠진 작자들이 있다"고 일갈하시기도
했으나, 조순 전 서울시장의 말처럼 "경제 이론은 돌고도는 것"이라 어느 한 입장이 무조건 맞다고 간주하기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그때는 맞았으나 지금엔 틀리다"인 겁니다. 결론은 과소비 저소비 둘 다 문제라는 건데(1990년대 초반에는 계층 불문하고
과소비를 해대어 자제하자는 캠페인이 일기도 했죠), 저자는 일단 소득이 고르게 증대되어야 적정 수준, 골디 락스의 소비가 보장될 수
있다고 논의를 정리합니다.
조세와
부채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는 이런 이분법, 택일의 문제가 대단히 낯설게 들립니다. 아니 선택이 어디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이뤄질 범주인가? 그러나 경제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마치 일반 회사원의 사훈이나 부장님 잔소리보다 더 피부에
밀접히 와 닿는 이슈이죠. 정부가 국민들에게 공공 서비스를 하려면 재원을 마련해야 합니다. 어느 정치인은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이다"란 말을 하기도 했는데 물론 상식과 현실에서 고루 타당한 지적이긴 하나 이론적으로 정부 재정 충당의 다른 옵션은 국채
발행이나 기타 차입 방식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거시 경제 총공급 총수요 균형 방정식에서 T 항목과 G 항목이 별개인
거죠. T=G 이면 뭐하러 변수를 두 개 따로 두겠습니까.
앞에서
코스의 이론을 스티글러가 명제로 뽑아 대중화(?)시킨 것처럼, "리카도 등가 정리" 역시 현대의 로버트 배로가 "재발견"하여
공식으로 정립했습니다. 원래 고전기 경제학자들의 저서에는 워낙 많은 내용이 담겨 있기에, 후대 학자들이 끊임없이 탐구 분석하여
현재의 실정에 맞는 내용을 따로 추출도 하는 겁니다. 그래셔 20여 년 전 대중서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가 큰
히트를 치기도 했죠. 여담입니다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저 책에 버금갈 만한 히트 대중 경제서가 안 나오는 건 참 아이러니입니다.
정부는 일을 벌이기 위해, 조세를
얼마만큼, 또 국채발행분을 얼마만큼 획정(劃定)해서 재원을 조달할지 선택을 해야 하고(경제학이라는 게 본디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선택"을 추구하는 학문입니다. 돈 버는 방법 궁리가 아니라), 그 선택에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로버트 배로가 드디어
"리카도를 넘어서는" 이론적 지점에 도달했다고 평가합니다.
적자
재정 편성의 득과 실은 분명합니다. 빚이 늘어나면 분명 재정은 부실해지고, 장기적으로 (얼마 전 미국 연방 정부 의 사례나
수없이 잦은 주정부의 곤란상에서 보듯) 셧다운 사태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허나 그렇다고 세율을 무작정 높이면 경제활동인구의
의욕을 떨어뜨립니다. 배로가 제시한 기준은 첫째 세출 사유가 항구적이지 않고 일시적일 때(예: 전시채권. 당연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으나 예를 들어 남북전쟁 당시 링컨은 화폐 증발로 대응하기도 했습니다. 현대 국가의 정부가 결코 모방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둘째 국민소득 감소와 경기 후퇴가 명백히 맞물리는 국면일 때, 이런 경우는 국채 발행의 비중을 늘려야만 합니다.
이를
두고 조세평탄화 이론이라고도 부르는데, 저자는 이의 소개, 정리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 경제단위별로 그 타당성이 입증되는지
현실에서 변별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호주는 선진국, 인도는 개도국이지만 이들 두 국가에서는 공통적으로 조세 평탄화 이론이 잘
적용되지 않는다(경기가 좋으면 오히려 부채가 늘고, 불경기에 부채가 주어듦)는 실증분석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이 이유를 두고
저자는 여러 원인을 소개하는데, 경기대응식 세율 변동 정책이라든가, 가능하면 적자를 줄이려는 정책적 관성 내지 터부 심리 등을
거론합니다.
세상이 바뀌면 그에
대응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하나 아직도 각주구검식의 고리타분한 관점과 체제를 우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책은 그간 의심의 여지
없는 도그마로 여겨져 왔던 상식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고, 발상의 전환과 인습의 타파만이 번영과 행복을 달성하는 길임을 치밀한
논조로 독자에게 설득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전현직 베테랑 경제 관료들의 차분하고도 학문적 논변을 장착한 저술이므로, 마치 경제학
부교재를 일독하는 듯 간만에 공부 좀 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