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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살아남았지 -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선집 ㅣ 에프 클래식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옥용 옮김 / F(에프) / 2018년 1월
평점 :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우리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잘
알려진, 모든 희망과 인간애가 말살되었던 나치 독일 치하에서 홀로 꿋꿋이 양심을 지킨 위대한 극작가이고 시인입니다. 특히 80년대
학번 어르신들은, 학생 운동의 와중에서 고문을 받고 녹화 사업 등 잔인무도한 권력의 폭압으로 목숨까지 잃은 친구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특히 이 이 시를 자주 인용합니다. 자, 그 유명한 시가 바로 이 시선집에 실려 있습니다. 설레지 않으시는지요. 혹은,
마침내 마주하는 그 심오하고 처절한 고백의 원전 앞에 새삼 죄의식과 숙연함이 밀려오지는 않으시는지요.
사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다분히 의역에 가깝습니다. 화자의 감회가 철저히 절제된 중 극한의 슬픔과 좌절을 담았다는 점에서 의도를 정확히 짚은 제목임은 분명합니다.
브레히트의 독일어 원문은 이렇습니다.
ICH, DER ÜBERLEBENDE (나, 살아 남은 자)
Ich, weiß natürlich : einzig durch Glück.
Habe ich so viele Freunde überlebt.
Aber heute nacht im Traum.
Hörte ich diese Freunde von mir sagen :
"Die Stärkeren überleben."
Und ich haßte mich.
이 짧은 시를, 역자 이옥용 선생은 이 예쁜 책에서 이렇게 한국어로 옮깁니다.
물론 난 잘 안다.
순전히 운이 좋아 (여기까지 웜문과 달리 역자께서는 행가름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친구들과 달리 살아남았다는 걸 (역시 조금은 의역이며, 다른 친구들은 일찍 죽었으나 같이 죽었을 수도 있었을 나는 그보다 더 길게 지금을 산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지난밤 꿈속에서 친구들이
내 얘길 하는 걸 들었다 (여기서는 반대로, 한 행을 둘로 나누는 게 역자의 태도입니다)
"보다 강한 녀석들이 살아남는 게야."
난 내가 싫었다.
(이상, 이 책 p54에서 인용)
이 시는 80년대 학번 어르신들 사이에서도 유명하지만,
대중적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박일문 소설가의 동명 장편(1992) 덕도 있겠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김광규 선생의
오래된 번역은, 마지막 행이 약간 의역되어 "그러자 나는 갑자기 내가 싫어졌다." 정도로 옮겨졌던 듯합니다(제 개인 기억이라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또, 그 앞 행은 다소 건조하게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였어요.
또,
책 제목이자 이 시의 제목에서도 눈치챌 수 있듯, 원문에 "슬픔" 같은 단어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간혹 보면 이 시의 영역을
두고 Survivor's sorrow라고 소개하기도 하는데, 영역자에 따라 그런 태도를 취하기도 할지 모르나 대개는 "I, The
Survivor" 정도로 처리하는 게 주류입니다.
아무튼
이 책에서 이옥용 선생의 변역은, 브레히트의 원 어조를 그대로 가급적 살리면서, 적절히 역자만의 감각을 발휘하여 비장하면서도
참담한 분위기를 잘 살리는 듯합니다. 마치 윤동주의 시가, 그 자체로는 과도한 감상에 빠진다거나 철철 비감이 흐른다거나 하지 않는
미덕을 유지하는 것처럼요.
이 책은 이
명편 말고도, 브레히트의 다양한 작품집 중에서 오늘날의 한국 독자들에게 특히 어필할 만한 여러 시들을 예쁘게 간추려 놓은
시선집입니다. 브레히트가 동시도 썼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의외로 다가올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 3부 "어린이 십자군"에
11편이 수록되었습니다. 역자 후기에 보면 p109의 각주에서, "브레히트의 동시는 당시 시민 계급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해 은근히 강제했던 형식과 주제,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는 해설이 나옵니다.
챕터의 제목이자 개별 작품의 타이틀이기도 한 그 "어린이 십자군"을 잠시 인용하겠습니다(p66 중).
여동생을 오빠를, 아내는 남편을
군대에 빼앗기고
아이는 포화와 폐허 사이에서
끝내 아빠를 발견하지 못했어 (제2연)
독일어 원문을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In Polen, im Jahr Neunundreißig
War eine blutige Schlacht
Die hatte viele Städte und Dörfer
Zu einer Wildnis gemacht.
Die Schwester verlor den Bruder
Die Frau den Mann im Heer;
Zwischen Feuer und Trümmerstätte
Fand das Kind die Eltern nicht mehr.
Aus Polen ist nichts mehr gekommen
Nicht Brief noch Zeitungsbericht.
Doch in den östlichen Ländern
Läuft eine seltsame Geschicht.
Schnee fiel, als man sich's erzählte
In einer östlichen Stadt
Von einem Kinderkreuzzug
Der in Polen begonnen hat.
Da trippelten Kinder hungernd
In Trüpplein hinab die Chausseen
Und nahmen mit sich andere, die
In zerschossenen Dörfern stehn.
Sie wollten entrinnen den Schlachten
Dem ganzen Nachtmahr
Und eines Tages kommen
In ein Land, wo Frieden war.
Da war ein kleiner Führer
Das hat sie aufgericht'.
Er hatte eine große Sorge:
Den Weg, den wußte er nicht.
Eine Elfjährige schleppte
Ein Kind von vier Jahr
Hatte alles für eine Mutter
Nur nicht ein Land, wo Frieden war.
Ein kleiner Jude marschierte im Trupp
Mit einem samtenen Kragen
Der war das weißeste Brot gewohnt
Und hat sich gut geschlagen.
Und ging ein dünner Grauer mit
Hielt sich abseits in der Landschaft.
Er trug an einer schrecklichen Schuld:
Er kam aus einer Nazigesandtschaft.
Und da war ein Hund
Gefangen zum Schlachten
Mitgenommen als Esser
Weils sie's nicht übers Herz brachten.
(이상, 이 책 기준 p68 중간까지 해당 분량입니다. 물론 이 책에는 전문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꽤 긴 시이니까요)
사실 어린이 십자군은 중세 때 사회의 광기가 빚은 참극 선동 중
하나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 어른들의 꾐에 빠져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의 미친 곡조에 맞추듯 죽음의 행군을 하던 끝에
상당수가 기아, 질병, 부상 등으로 죽었지요. 브레히트는 1939년 폴란드에서 빚어진 참상을 두고 중세 한때의 비극을 떠올린
겁니다. 음... 이 책 p73에도 저자의 각주로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제
생각을 잠깐 덧붙인다면, 여기서 브레히트는, 나치의 강점(强占)이 자리잡고 나서 곧바로 부역자들에 의해 벌어진 "세뇌 교육과
역사 왜곡" 등에 비판의 초점을 둡니다. 이게 바로 중세 노예 상인들과 정확히 매칭되는 심상이며, 유대계나 폴란드 소년 소녀들은
바로 노예로 끌려가는 그 희생양들과 패럴렐 관계를 이루죠.
나치 독일의 "최종 해결"은, 본래야 그런 뜻이 아니었으나 나치에 의해 극악한 행태로 악용된 후에는 희한한 환기를 부르는 어구가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p78에 "해결책"이 실려 있는데 역시 브레히트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6월 17일 봉기가 일어난 후,
작가 동맹의 비서는 키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스탈린 거리에 전단을 배포하게 했다
(이상에서도 같은 3행이지만 시어의 배치는 원문과 다소 다릅니다. 물론 우리말 통사 구조가 독일어와 다르므로 어쩔 수 없죠)
Nach dem Aufstand des 17. Juni
Ließ der Sekretär des Schriftstellerverbands
In der Stalinallee Flugblätter verteilen
Auf denen zu lesen war, daß das Volk
Das Vertrauen der Regierung verscherzt habe
Und es nur durch verdoppelte Arbeit
zurückerobern könne. Wäre es da
Nicht doch einfacher, die Regierung
Löste das Volk auf und
Wählte ein anderes
네, 시의 결론(?)은 그것입니다. "아니, 정부가 인민을 아예
해산시키고 다른 인민을 선택하는 게 더 간단하지 않은가?" 겉으로는 번드르르한 구호를 내세우며, 속으로는 근로 대중과 농민을
잔혹하게 탄압하며 노예처럼 통제한 스탈린 체제의 위선을 비꼰 내용이죠. 체제의 취지는 좋았으나 방법이 폭력적이라서 잘못이었다는
어설프고 사아하며 무지한 궤변이 어디 있습니까. 음주는 했으나 음주운전은 안 했다는 파렴치한 변명과 무엇이 다릅니까? 시인의
양심과 혜안은 이처럼 간악한 영혼의 독 가득 스민 언어의 허실을 모두 꿰뚫어 보는 겁니다.
"나,
살아남았지." 슬픈 마음이 가득 묻어나는, 순결하고 솔직한 짧은 독백입니다. 같이 죽었어야 마음에 떳떳하고 친구들 보기 부끄럽지
않고 세상에 바른 고개를 들 텐데, 그렇지 못하고 비루하게 살아남아 진리와 질서와 정의와 나 자신에게 오늘도 죄를 지으며
참담하고 참람된 생을 이어나간다는 고해(告解)입니다. 허나 시인의 진짜 고민은, "앞으로 이 생존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바른 삶
부끄럽지 않은 삶인지" 그 답이 안 보인다는 데에 더 큰 부분이 놓인 듯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말을 하죠. "가신 분들 몫까지 남은 자들이 열심히 살아야 한다." 또 이런 말도 합니다. "Life goes
on." 헌데, 브레히트는 이런 이치를 몰라서 "살아남은 내가 밉다"며 힘 없는 자포자기성 고백만 했겠습니까? 어떤 시인은
"아우슈비츠 이후 시(詩)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고까지 언명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비극과 불의를 겪고도,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며, 아니 애써 잊으려 들며 여전히 불의와 비겁함을 일상으로 물들이는 "살아남은" 우리 모두야멀로, 시인의 비전을
암운으로 가리는 부조리의 극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현재 무엇을 위해 생물학적 연명을 지속하는지, 인간다움과 이상과 순결은
어디에 내팽개쳤는지 진지하게 반성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