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도시 - 스마트 시티는 어떻게 건설되는가? 한림 SA: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17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편집부 지음, 김일선 옮김 / 한림출판사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도시는 괜한 허영이나 탐욕의 공간적 산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 너른 대지나 목초지, 농경지에 멀찌감치 간격을 사이에 놓고 자연에 파묻혀 지내는 삶을 원칙과 이상인 줄로만 알지만, 도회지에 모여 문명, 편의 시설, 지혜, 연대의식과 위기에의 대처를 공동으로 이루는 노력 역시 인간적 삶의 본연, 본원적 행태의 하나입니다. 오히려 역사의 진수랄까 참된 국면은 도시의 역사에서 그 대부분을 집약해서 관측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래서 도시의 영광은 인류사 전체의 영광이며, 도시의 위기는 현생 인류 전체가 절감해야 공통의 과제이며, 도시의 미래는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미래의 도시"를 예측하고 상상하며 개관하는 작업은 역사의 조망이나 과학 기술의 압축적 향방을 점치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큽니다.

도시의 환경, 구조가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면, 그 거주민들의 삶 역시 해당 지역에서는 종막으로 치닫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모든 도시가 공통적인 문제를 안았다면, 인류는 자신의 장래에 대해 비관적 전망 속에 조심스럽게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시점입니다. 이 책은 그래서 "도시의 지속 가능성 높이기"를 주요 화제, 이슈로 대뜸 부각합니다. 이에는,

1) 도시 인프라의 활용 효율을 높이는 다세대 주택 수를 늘리기
2) 자원의 재활용, 재가공, 재사용을 위한 시설과 정책 수립, 연구/숙련 인력(전문가)의 확충
3) 자가용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는 이동수단 확대(자전거 포함)
4) 쓰레기 소각열로 전력 생산을 이룸으로써 인당 에너지 소비량 줄이기 (이상 p17)

등이 포함되는데, 사실 이 대목은 책 전체의 방향성을 독자로 하여금 미리 파악하게 하는, 기능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도시의 성패(盛敗)는, 한정된 공간과 자원을 어떻게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아이디어, 이의 현실화를 위한 정책의 고안 집행에 거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 4)의 경우 책 저 뒤편 p130 이하에서 세계 여러 도시의 사례를 소개하며 자세히 해명됩니다. 이 이슈 뿐 아니라 책의 모든 논제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1장의 마지막에는 이 SA 시리즈의 평소 태도나 성격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의견"이라는 제목 아래 시안적 성격의 단편적 제안이 여럿 나와 있습니다. 이 중에는 전문가의 묵직한 예측이나 아이디어도 있고, 어느 대학생(중국인)의 과감한 발상, 요구도 있으며, SF 작가의 좀 터무니없다 싶은 과격한 "구호"도 있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파트가 이례적으로 삽입된 건,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이 대부분 도시 거주인들이리라는 상정 하에, "당신 역시 얼마든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으며, 기탄 없이 정직한 느낌이나 발상을 표현하는 건 오히려 의무이기까지 하다."는 메시지를 우리 모두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 아닐까 짐작합니다.

실제로 1)~4)는 인구의 상당수가 농촌 혹은 저인구밀도 지역에 거주하는, 국토가 매우 넓은 미국에서는 어떤 경각심이 생길 만한 이슈일지 모르나,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새삼스럽고 당연한 문제 제기일 뿐입니다. 인구의 절대 다수는 아파트 등 다세대 주택에 삽니다(다세대 주택이라고 하면 저가형 빌라나 원룸만을 대뜸 떠올리지만 본디 용어례의 원칙으로는 단독 주택을 제외한 모든 형태가 다 포함되죠). 3)도 어느 수도권 도시에서나 이것 관련 인프라를 만날 수 있고, 이미 시민 생활 패턴의 일부로서 자리한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특히 이 책은 한국 독자에게는 이미 선 이해의 대상으로 머리 속에 자리했거나, 피부로 느끼는 친밀감 덕분에 (시리즈 다른 권에 비해) 이해가 더 빠른 속도로 와 닿을지 모르겠습니다.

미래의 도시상이라 하면 대뜸 누구나 떠올릴 만한 게 "스마트 도시"입니다. 그런데 필자(해당 아티클)는, 이 주제를 설명하며 대뜸 리비아나 이집트에서의 민주화 운동 이야기를 초두에 꺼냅니다. 일단 이들 나라에서 당시 그 사건이 스마트 기기를 이용한 젊은 층의 소통과 공분의 확산을 통해 이뤄진 건 맞습니다만, 그것과 "스마트 도시"가 서로 무슨 상관일까요? 해당 필자가 떠올리는 미래상의 "스마트함'은, 도시 거주인 전체가 유기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긴밀히 소통하고 친밀감에 기반한 유대를 이루는, 밀도 높은 민주주의가 지배적 원리로 작용한다는 의미에서 "똑똑한 도시"입니다.

민주주의는 대개 명분상, 도덕적으로 정당하기는 해도 의사 결정 속도가 느린 것이 취약점이었는데, 이제 모바일 혁명으로 인해 그런 기술적, 구조적 한계까지도 극복하게 된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구성원 모두의 합의를 바탕으로 삼기에, 느려도(과거였다면) 일단 한번 체제가 가동만 하기 시작하면 무서운 힘을 냅니다.  잘 뭉쳐진 게 강하고 똑똑해지리라는 기대는 근거가 분명히 있습니다. 또 이로부터 밀도 높고 지속적인 혁신이 출현 가능합니다.

"대도시가 효율적이다." 맞습니다. 상식을 갖춘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도시는 경제적으로 생산성을 높일 뿐 아니라 거주자들의 건강도 개선한다." 건강 이슈에 대해서는 여기(p63)뿐 아니라, 특히 책의 제일 마지막(p222 이하) 같은 대목을 동시에 교차 참조할 만합니다. 아니 도시에서 매일 매연에 찌든 공기만 마시는데 무슨,... 이라고 하실 분이 있다면, 사실 시골의 대기도 (예를 들자면) 중국발 미세먼지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뿐 아니라, 비위생적 요소(천연이라고 다 깨끗한 건 아니죠?)로부터의 위협에도 노출된 게 사실이며, 전염병(人 혹은 獸 어느 편이건 간에) 같은 게 돌 때 전문 인력으로부터의 체계적 지원을 못 받는다면, 결코 "건강 친화적"인 거주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은 어떻습니까? "높은 인구밀도가 오히려 환경 친화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좁은 환경에 모여 사니 기본적으로 대사작용 끝에 나오는 부산물이나 생활 쓰레기만 해도 얼마인데....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일단 1인당 제공되는 인프라의 건설 유지 비용이 낮아지므로, 한정된 재원(물론 세수가 늘어나므로 재원 자체도 크기가 커지죠)을 훨씬 다용도, 고효율, 광범위로 쓸 수 있고, 거주자들이라는 게 남 안 볼 때 환경을 망치려 드는 양심불량만 있는 게 아니죠.

우리는 자신들에 대해선 환경(뿐 아니라 모든 걸) 걱정하는 의식 있는 시민으로 평가하면서, 다른 시민들은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면 새로운 발상을 해야 하는 동기도 늘어나며, 아이디어나 고안, 발명의 질도 더 높아진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해당 필자의 "건설적이면서도 낙관적인 비전과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농경지가 확대되며 사막화 속도도 늘어나고, 남벌 밀렵 등으로 환경이 더 빨리 파괴된다는 사실은 이제 놀랍지도 않은 뉴스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시화가 덜 전진되거나 (역으로) 쇠퇴하면, 사람들은 농촌으로 회귀하여 과거처럼 보편적 빈곤상이 늘어날 것이다." 참으로 맞는 말 아니겠습니까? 물론 "농촌=빈곤"의 등식은 현대에서도 그저 기계적으로 성립하는 법칙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도시/농촌 간의 거주 비율이 (요즘처럼) 합리적으로 조정되었을 때의 이야기며, 중근세 전근대처럼 절대 다수 인구가 농촌에 거주하는 상황이라면 토지의 효율적 이용이 어려워지고, 이는 보편적 빈곤을 초래하는 게 필연입니다.

그 바로 앞대목(p68)을 보면, 해당 필자는 인구가 늘어날수록 도시의 "사회경제적 효율이 높아지는" 현상을 두고 (전문가들이) "초선형확장"이라 부른다는 언급을 합니다. 이에 반대되게, 소규모 도시일수록 인프라 건설 비중도 적고 단위당 비용도 높아지는 걸 두고 "부선형 확장"이라고 한다는데, 원어는 각각 superlinear, sublinear입니다. 만약 linear라고만 하면, 1이 늘어날 때 덜도 더도 아니고 딱 1만 늘어나거나, 2배면 2배, 3배면 3배, 이렇게 정해진 배수로 밖에 안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superlinear면, 3배, 4배, 혹은 제곱 비율 등으로, 초기보다 더 높은 효율이 추가로 달성된다는 거죠. sublinear는 처음 나오던 효율에도 갈수록 못 미치는 비경제적 패턴이 고착화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해당 필자는, 한번 똑똑해진 도시가 그 시민들에게 보장하는 삶의 질이 이처럼이나 "지.속.적.으.로." 상승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도시의 장래에 대해 (깨어 있는 시민들의 참여를 전제로 하여) 이만큼이나 낙관적인 미래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지나친 기술 의존형 사고라는 비판도 가능합니다.

조시 보크 기자가 쓴 <환경 도시로 변모하려는 시카고>는 아마 이 책에서 가장 유머러스하게 쓰여졌으면서도, 환경 보존과 경제적 번영을 동시 달성하려는 동시대 (타)도시 거주자의 관심을 한몸에 모을 만한, 유익하고 재미있는 내용이 가장 많이 담긴 아티클이겠습니다. 시카고 하면 "아웃핏"으로 유명한 알 카포네 같은 무법자 깡패, 월드시리즈 승부 조작 사건, 업톤 싱클레어의 사회 고발 소설 등이 대번에 연상되는데, 이 도시 주민들도 그 점은 다 의식하는 듯합니다(그래서 더 잘하려 든다는 거죠).

리처드 데일리 시장, 그리고 아직 새파랗게 젊은 환경 담당 총괄 집행역 사두 존스턴은, 과도하게 탄소 에너지를 소비하게 설계된 노후 빌딩들을 모조리 때려 부수고, 이 잔해를 저렴한 에너지를 뽑아 내는 시설로 재활용할 야심찬 계획까지 마련한 후 이를 실천에 옮기는 중인 "무서운 공무원"들입니다. 타산적이고 얌체 같은 시카고 시민들을 동참시키려면, "이 프로젝트는 돈이 됨"을 충분히 납득시켜야 하는데, 유능한 데일리 시장은 현재까지 성공하고 있습니다. 사실 시카고가 어디입니까. 카포네만 나온 게 아니라, 힐러리 클린턴, 오바마 같은 스타 진보 정치인들도 대거 배출한 지역 아닙니까.

환경 보존이 중요한 만큼, 지능형 전력망을 치밀하고도 기발하게 설계하여, 같은 비용으로 종래의 몇 배에 이르는 산출을 이뤄내는, 생산 구조 자체의 혁신도 무척 중요합니다. 결코 혁신이란, 약탈적 자본의 탐욕만을 만족시키려는 사악한 구호나 독촉 기제가 아닙니다.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는 LEED인증이라 하여, (앞서 언급한 대로) 건물 구조나 기능 자체를 친환경 포맷으로 바꾸려 듭니다. 초고층 건물 자체가 필요악이라든가 환경의 적이 아니라, 처음부터 환경의 친구로 설계한다는 생각을 예전에는 왜 못했을까요. p148에서는 폐수로부터 얻는 청정 에너지를 설명합니다. 폐수라 하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지는데, 이로부터 에너지를, 그것도 청정 프로세스로 뽑아낸다니 실로 놀라운 발상과 기술이 아닙니까.

터무니없는 발상인 듯만 해도, 세상은 결국 이런 "미친 도전자, 그러나 착한 시민"들이 모이고 모여 더 나은 곳으로 바뀌늰 겁니다. 저는 책을 마치고서 다시 p35로 돌아가서, 일견 바보스럽고 터무니없어도 보이는 "의견들"을 다시 읽습니다. "불특정 선의의 참여"야말로, 우리 인류가 현재의 번영과 행복을 도시 속에서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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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바뀐 비트코인 쉽게 배우기 - 세상에서 가장 쉬운 비트코인 이더리움 가상화폐 입문서
이운희.이진희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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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비트코인 열풍 때문에, 평소 이런 쪽(가상화폐 관련 한정이 아니라 전체 재테크 일반)에 전혀 관심 없던 분들도 괜히 뒤숭숭해지는 요즘일 겁니다. 어떤 가능성 낮은 돌발 변수의 발생(각국이 갑자기 유통을 금지한다거나, 강력한 대체제의 등장)만 없다면, 비트코인은 결국(이라고 하면 아주 먼 미래엔) 수익을 볼 수밖에 없는 투자 자산의 매력, 자격이 충분합니다. 선입견과는 달리 보안도 든든하고(비트코인 해킹 사건은 거래소 해킹이지 비트코인 구조가 털렸다는 게 아닙니다[특히 이 책 pp. 114~119를 참조하십시오]. 보안의 안정성은 평판 문제가 아니라 수학적으로 증명이 끝났습니다), 기존의 거래 패턴이 만족 못 시키는 부문에서 대단히 요긴하게 기능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남의 돈을 빌려 투자하는 분들은, 만기에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만 하기 때문에, 그 기한 안에 수익을 못 내면 큰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결국엔 오르지만 단기적으론 등락을 반복할 수 있는데, 대출을 받아 감행한 투자가 하필 저점 근방에서 감행되었다면, 해당 투자자는 자산 자체의 유망함과는 무관하게, 이건 뭐 답이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 수 있죠.

법정 화폐나 신용카드에 대해 그 깊은 동작원리를 모르더라도 아무 부담 없이 일상에서 자유로 사용하듯, 비트코인이 일상에 깊이 침투하는 미래에는 아무 위화감 없이 우리는 또 그의 편의를 누리고 있을 겁니다. 화폐나 주식이 본래 용도가 따로 있을 뿐 어떤 투기 이익을 노리고 보유하는 물건(돈도 자기 집 금고에 유독 빡빡 쟁여 두는 분은 그 역시 "무이자 but 안전" 투자 자산으로 인식하고 그러는 겁니다)이 아닌 것처럼, 비트코인도 거기다 투자하라고 만든 게 아닙니다.

다만 먼 미래에 이게 생활 필수 제도로 자리잡으리라는 기대 하에, "그냥 돈"이라든가 다른 재화들과 언젠가는 교환 비율이 정해질 거고, 그때 비트코인 자체에 높은 가치가 매겨질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미리 챙겨 두겠다는 게 작금의 현상을 낳은 겁니다. 미래 후손들은 비트코인이 뭔지 알 필요가 없을지 모르지만, 지금 투자 쪽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그 원리를 알아야 투자를 할지 말지를 놓고 확신이 서겠고, 혹 실패를 해고 남따라, 묻지마가 아니기 때문에 후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들어가든 관심 끄든 뭘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긴 있습니다.

원리는 제대로 공부하고 들려면 꽤 어려운데, 고수들에게 실전 팁 위주로 배우면 일단 당장의 의사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은 됩니다. 팁 위주로 쌓은 지식은 결국 체계를 못 갖추고 단편 상식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는데, 사람에 따라 팁을 모으고 모아 자기 쳬계로 만들어버리는 뛰어난 학습 종합 능력을 갖춘 사람도 있고, 자기가 절실하고 적성 맞고 하면 어느새 다 알아버린 자신을 느닷 발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확실히 아는 고수가 여러 번 나눠 들려 준 팁들은 문외한에게도 실질적이고 체계적인 도움(즉 "물고기 자체가 아닌 물고기 잡는 방법")이 될 수 있는데, 제 생각에는 이 책이 바로 그런 책 아닐까 싶습니다. "A인 경우에 B를 하라"고 한 마디만 하면, A 아닌 경우에는 도움이 안 되지만, 그 한 마디를 하며 영양가 있는 다른 여담이나 원리를 구수히 곁들이면, 듣는 사람도 아주 바보가 아닌 이상 하나를 듣고 셋 넷 정도는 덩달아 감이 오거든요. 어떤 의미에선 거창한 교과서보다 이런 실용서가, 바쁜 일상인들에게는 더 유익하고 고마운 책 같기도 합니다.

책에 나온 대로, 개인간 직거래 아니라(이런 건 비트코인 아니라고 해도 위험해요) 거래소에서 매매하려면 "금융 기관에 준하는" 개인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이런 걸 보면, 비트코인은 제한적 의미에서 이미 제도권 안에 들어왔다고 봐도 무방하며,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거래에 참여 혹은 관심을 갖는 사실만으로도 벌써 "엄연한 현실"입니다. "가상"이란 접두어도 조만간 떼어야 할 듯합니다. 엄밀히 말해, "법정 화폐"도 신뢰와 국가의 보증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가상의 가치 표상"이지 실체가 아니죠. "오만원"이란 종이는 오만원만큼의 가치가 투여된 재화가 아닙니다.

비트코인의 창창한 장래에 대해 저자의 가장 강력한 설득력 있는 주장은 pp.12~13에 잘 나옵니다. 신용카드의 경우 카드사로부터 매출업자가 대금을 결제 받으려면 (수수료는 수수료대로 떼이고도) 며칠이 걸려야 하죠. 허나 비트코인은(그것의 통용력, 가치가 충분히 확보되었을 때), 손님에게 결제받은 즉시 내것이 됩니다. 수수료는 당연히 없습니다. 벤더와 상점들이 당연히 반기지 않겠습니까? 단, 이렇게 되려면 사회 전체에 비트코인에 대한 확신이 생겨야 합니다. 예전 남북전쟁 당시 링컨이 발행한 그린백은 legal tender였는데도 다들 꺼려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찍은 당백전은 집정자 당사자가 누린 정치인으로서의 인기와 무관하게, 시장에서 지독한 푸대접을 받았지요. 이 이야기는 조금 뒤로 넘어가서 pp.58~61에 잘 나옵니다.

p52에는 역시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이 나옵니다. "... 그 거래에서, 다른 모든 외부의 결제 체계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듭니다..." 저자가 드는 예는, G마켓에서 뭘 사면 그게 그 판매자와 우리가 직거래를 하는 게 아니죠. G마켓이 중간에 끼어 일종의 보증인 노릇을 하고, 셀러로부터 일정 수수료를 떼어가는 방식입니다. 카카오페이나 삼성페이도 마찬가지인데, 쓰는 우리는 잘 의식을 못해도(왜냐하면 이런 회사에서 지불자에게는 부담을 안 지우기 때문입니다), 판매자로서 나중에 대금을 받아야 할 처지에서는 굉장히 신경 쓰입니다. 야식 하나를 시켜도 카드 결제라고 하면 벌써 목소리에 힘이 빠지는 게 다 들리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죠.

비트코인은 화폐이기도 하지만, 그걸 주고 받는 자체가 벌써 결제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머니가 아니라 그 이상의, '페이니(pay+money)'다"라고 규정합니다. 이런 편의가 있으며, 보안 이슈도 그 자체가 이미 해결책을 마련했다면, 사람들이 쓰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법정 화폐라는 것도, 그 정부가 신뢰를 잃거나 레짐 체인지 같은 위기를 겪는다면, 어차피 종이 자체에 무슨 위력이 화체된 건 아닙니다.

허나 비트코인은 어떤 정부, 공적 기관이나 단체의 endorsement 도 없고, 그 자체가 똑똑해서 쓸모를 확보하는 거라, 이제 대중의 인식만 확산되면 모든 거래 수단을 다 대신할 수 있습니다. 이게 돈이기도 하고 결제절차이자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이 장부이기도 하고, 정본 복사본이 동시에 수도 없이 뿌려지는 구조라서 누가 위조를 못 합니다. (이 책에서는 언급이 pp.89~90에 있습니다. 대중서이기 때문에 그 보안 원리까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텐데 정말 최대한으로 쉽게 풀어 주셨네요. 정확하게 알아야 남한테 쉽게 이해시켜 주는 것도 가능합니다. 물론 잘 알아도 성격이 나쁜 사람은 자기만 알고 싶어서 쉬운 설명에 신경 안 씁니다만)

이 책의 깊이와 신뢰도는 챕터3에서 잘 증명되네요. 전자지갑을 만드는 방법이 아주 쉽고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어, 컴퓨터 켜고 해당 설치 파일을 실행하기만 하면 됩니다(.exe류는 언제나 믿을 만한 사이트에서 받으시길요). 모든 PC 프로그램이 다 그렇습니다만 깔고 환경 설정 들어가서 몇 번 조작해 보면 다 익숙해집니다. 단 이 비트코어 코인의 경우, 바로 거래에 쓸 작정이라면 기본 사항이나 설정, 작동법 등은 한번에 함께 배워야 치명적인 실수를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럴 때는 (이 책 저자분들의 설명처럼) 단일 세션에서 전체를 조감할 필요가 분명 있습니다.

MS윈도10의 이상한 정책 때문에 강제 업데이트 실행으로 비트코인 관련 작업(혹은 다른 뭐라도)에까지 지장이 생기곤 하죠. 저자들이 참 세심하신 게 이런 상황까지 예상하여 유저 모르는 새 자동으로 껐다 켜지는 일이 없게 배려합니다. p177을 보면, 요즘 또 이런 쪽을 노리는 자들이 있어서, 우리가 코어 코인 전송할 때 (악성 코드나 바이러스를 통해) 가짜 주소가 대신 기입되기도 하기 때문에 이미지 코드를 (입으로 잠시) 외운 후 눈으로 보고 (가능하면 내 키보드로 직접 써 넣어야겠죠) 주의해서 입력하라고 하십니다. p181애 보면 개인키는 절대 파일로 저장하지 말고 프린트를 따로 해 두라고 합니다. p214에 보면 여러 컷의 사진과 함께 하드웨어 지갑 설정 방법도 나옵니다.

이게 다 고수들이 자신들이 실전에서 애착을 담아 하는 방식 그대로를 실감나게 전수하는 느낌이 전해져서 좋았습니다. 이 책 한 권 갖고 수시로 따라 하며 몸에 익히다 보면 일반인들이야 현 시점에서는 뭐가 막힌다거나 별로 불편할 게 없을 듯합니다. 4부에서는 이더리움이라든가 기타 가상 화폐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져 있어, 저자분들의 꼼꼼하고 한 발 앞서 모든 걸 체크하는 성격이 그대로 표현되는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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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미래 사람이 답이다
선태유 지음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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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4차 산업혁명 트렌드를 이끌어나가리라는 판단은 기업인, 학자, 저널리스트,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지지를 받는 형편입니다. "인공지능"이 의미하는 바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아직 폭 넓은 합의가 이뤄지지는 못했습니다만, 대체로는 사람의 불완전하고 속도가 느린 연산능력, 못 믿을 감성, 변덕스럽고 편차가 심한 의지 등을 대신해, 오차 없고 빠르며 일관된 기계의 능력이 그를 대신하리라는 예측 쪽으로 수렴하는 듯합니다. 이런 미래라면, 가뜩이나 지금도 자동화 추세에 밀려 일자리를 잃어간다는 불안이 모두를 엄습하는 판에, 더군다나 암울하고 비관적인 연상만이 우리들의 마음을 잔뜩 채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비관적인 시선을 두지는 않는 분들이라 해도, 인공지능 주도의 산업상, 사회상이 그리 "인간적"이지는 않으리라는 예상에는 거의 이견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흔한 선입견과는 상당히 다른 결론을 내시네요. "미래에도 여전히 사람이 먼저이며, 오히려 지금보다도 사람은 더 중추적이고 중심적인 기능을 수행하겠으며, 사람의 가치가 우선에 놓이는 사회가 더 질적으로 우수한 번영과 발전을 누린다." 독자인 제 생각대로 책의 결론을 요약해 본다면 이 정도입니다. 우리들 독자들도, "그렇게만 된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같은 희망은 품어 왔고, 다만 현황이 그리 밝은 전망을 제공은 못 할 듯하기에 쉽사리 동참을 못 했던 것입니다. 책은 선명하고 풍부한 근거를 들어가며 "우리의 건전한 믿음과 진보에 대한 소망은 반드시 실현될 것"임을 독자에게 납득 시킵니다. 책을 다 끝내고 나면, 과연 그러리라는, 혹은 그런 당위를 위해 우리가 한층 각성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다짐을 품기에 충분할 만큼 소통이 이뤄져 있습니다. 우리 독자와, 저자 사이에서 말이죠.

"뭔가 다르다, 뭔가가 더 있다." 무슨 뜻일까요? 저자는 얼마 전 <히든 싱어>라는 오락 프로그램에서, 고 김광석의 라이브 무대와 음반(그때쯤이면 이미 CD가 대중화할 무렵입니다)에서의 목소리가 꽤 달랐다는 청중의 반응을 소개합니다. CD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 선명하고 정확한 디지털 음질의 재현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흔한 표현으로 "신세계가 열리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이미 그때도 일부 고급 팬들은 "이게 이상하게도 LP를 못 따라간다"며 전통적인 매체를 고집했습니다만, 그런 고급 귀를 못 가진 다수 대중들은 "레코드의 지직거리는 친숙하고 서투른 잡음의 향수" 정도로 (자기 한계 안에서 자기 편할 대로) 정리하고 말았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뭔가가 더 있다는 겁니다. 폰 노이만이 초석을 놓은 패턴에서 아직은 "질적인 발전"을 못 이루고 있는 컴퓨터가, 일방향 연산 능력의 쾌속 질주만으로 달성 못 하고 현저히 간과하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겁니다. CD가 나온지 근 삼십 년이 다 되어가는데, 왜 라이브 무대에서 인간이 발성하는 "그 무엇"을 재현하지는 못하는 걸까요?

저자는 아주 단언하다시피 합니다. "알파고가 분명 세상을 놀라게 했으나, 그 기기의 능력은 지능이라고 볼 수도 없고, 그가 수행하는 활활동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차원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아직 학습도 아니다." 저자분뿐 아니라 이미 관련 분야의 학자들은 "강한 의미의 인공지능/ 약한 의미의...." 같은 편의적 구분을 만들어내어, 소모적인 "어의를 둘러싼 논쟁"을 비껴가려 합니다만, 업계에서 그토록 자신 있게 마케팅을 펼쳐 나갈 때의 톤, 어조에 비하면 뭔가 앞뒤가 단단히 맞지 않다는 느낌이네요.

인간의 지능과 학습 활동을 아주 단순한 차원에서 이해하는 이들은 이런 거품 잔뜩 낀 마케팅이 마냥 신기할지 모르겠으나, 사람만이 행해 온 창의와 도약, 혁신, 고유의 소중한 감성을 중시해온 이들이라면 대뜸 이런 과장된 선전에 회의를 느끼기 마련이죠. 또, 기계가 (거의 반사회적이라 할) 단차원 효율로 사회 곳곳을 침투해 들어온다면, 가뜩이나 신자유주의 흐름에 침식 받고 상처 입은 연대와 공감의 가치가 더욱 훼손되지 않겠습니까? 아날로그 고유의 영역을 지키려는 이들은 이런 진보의 이념에도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또, 예컨대, 현 문재인 정부가 이미 5년 전부터 내세운 "사람이 먼저다" 같은 슬로건도 염두에 둔다면 이런 현상적 의의를 새길 때에 더욱 깊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저자는 러다이트 운동을 거론하며, 이런 문명의 기술적 발전상에는 언제나 그 부작용을 우려하거나 현상의 변경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있어 왔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반발이 그저 역사의 필연에 저항하는 이러석은 반동일 수도 있고, 반대로 무분별한 기술적 팽창이 "인간다움, 존엄"의 이념을 훼손하지 않게 하려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견제적 성찰일 수도 있습니다. 전자와 후자의 구별은, 사고의 주체가 얼마나 사려 깊고 이성적인 근거를 토대로 반응, 해석, 통찰한 후 행동에 나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인공지능 맹신, 만능론은, 사이비 신앙이나 무작정 저항의 몸부림만큼이나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감정"이란 것의 실체를 모르는데, 딥 러닝의 효율과 성과를 낙관하는 측에서는 이 역시 빅데이터의 개선된(개선되어 가는) 처리와 (그 결과로 실체를 잡아가는) 알고리즘의 작동이, 이 과제 역시 해결하리라는 쪽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폰 노이만 시스템이 아직 극복 못한 "즉흥성"의 결여라는 요소를 근거로 들어 이런 예측에 반대합니다. 저자는 구체적으로 가수 신승훈이 2집 타이틀 곡 작업 과정에서 체험한 "놀라운 영감"이라든가, 전인권과 이적의 "걱정 말아요 그대" 해석이 판이하게 다른 점 등을 떠올리며, 폰 노이만 시스템은 이런 문제 해결(인식)에 그저 척도적 정확성이라는 양적 접근만 고집할 뿐이며, 그 결과가 극히 비효율적 비경제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실제 허사비스 CEO도 "전력 소모 경감"을 계속 미디어에 어필함으로써 이런 "삽질론"을 어지간히 신경은 쓰는 듯한 불안감을 노출하기는 합니다.

저자는 전산을 전공한 정통파 프로그래머이신데도, 인간이 자기 앞에 가로놓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동원하는 "철학"이라는 도구를 꽤 높이 평가합니다. 저자는 이어 어렸을 적 할머니의 시골집에서 경험한 "온돌"이라는 전통 방식의 대안에 대해 깊은 경의를 표하면서, 오로지 사람만이 지닌 소통과 반성, 상호 갈등과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어느 순간 떠오르거나 감지되는(사실은 그 배후에 무수한 노력과 자원 투입이 행해졌지만) 창의적 출구의 발견에 대해, 기계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인간적인, 인간만의" 성취라며, 인공지능이 사람을 능가하려면 이런 자질을 (그 최소 맹아만이라도) 구비하기 전에는 결코 불가능하다고 단언합니다.

인간의 문제는 지난 인문의 족적을 보면 대개, 우화적 형태이건 명시적인 매뉴얼 포맷(드물지만)로건, 읽는 이의 역량에 따라 답을 얻어낼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가하게도 인간은 이런 열린 텍스트의 형태로 후손들에게 비법을 전수했고, 따라서 우리는 같은 텍스트를 놓고서도 상황과 기분(?), 맥락에 따라 각각 다른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반면 인공지능은 어떨 것 같습니까? 답이 일관되면 그 융통성 없음을 놓고 우리는 경멸감을 표시하며, 답이 왔다갔다이면 우리는 그 신뢰성에 의문을 품습니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이긴 하나, 아직 우리는 알고리즘화할 수 없는 그 유동성에서 오히려 고차원 해답을 찾기도 하는데, 이 역시 빼어난 지성만이 누릴 수 있는 체험입니다. 폰 노이만 시스템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폐인이나 외상 후유증을 앓는 이가 계산 등에 한정하여 놀라운 성과를 내는 걸 보고 전혀 경외감을 품지 않으며, 오히려 저건 정신적 육체적 질환이 낳은 병적 우연에 불과하다며 경멸, 폄하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 이제 폰 노이만 시스템의 놀라운 작업 능력을 봅시다. 이게 그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현재 인공지능이랍시고 과장되이 추켜지는 게 그 실상이 고작 이와 같습니다. 디지털 효율을 무작정 숭배하는 이들의 어리석음이 이와 같습니다. 디지털은, 그를 요긴히 쓸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을 갖춘 이에게 유용한 도구로 봉사할 뿐이지, 결코 사람과 주종의 위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저자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 한 대목을 인용하며, 사람이 위대해지는 건 자기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타인의 아픔을 함께 나눔으로써 개체의 한계, 협량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한 데 있다고 지적합니다. 참으로 타당한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기계도 클라우딩 방식으로 손에 손을(코드에 코드를) 맞잡으면 훨씬 역량이 강해지긴 하죠.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수억 서버를 모두 자원병합한들, 타인의 고통에 눈물 짓는 단 한 사람의 착한 마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력, 기적을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간다움"을 잊을 때, 우리는 우리보다 하등한 기계(혹은 그 무엇이든)의 노예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우리 자신의 (사라져 가는) 존엄이지, 기계의 굉음과 차가워서 경멸스러운 연산 효율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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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 편이야 - 세상을 바꾸는 이들과 함께해온 심상정 이야기
심상정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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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는 언제나 진보정치의 아이콘으로 우리 대중에게 인식되어 온 분입니다. 특히 대표님은 소탈하고 가식 없고 진정성 있는 인품과 매너로 우리에게 깊은 공감을 끌어내었으며, (아마도 이념과 지향과 인격이 일체가 된 기반에서 가능했을) 시원한 언변(언변을 위한 언변이 아니라)과 토론 솜씨로도 많은 이들의 경탄을 자아냈습니다. 능력도 있고 인간적 매력도 같이 갖춘 정치인, 그러면서도 언제나 내 간절한 아픔도 함께 나눠 줄 것 같은 정치인은 극히 보기 어려운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 심 전 대표가 지난 대선에서 소수 정책정당 후보 초유의 높은 득표율을 올린 게 아닐까 다들 분석하기도 합니다.

가난한 시골 동네에서 자라나 타고난 총명함 하나만 믿고 서울로 올라와서 명지여고를 다니던 그녀는, 작은 키에 수줍은 성격을 지닌 평범한 여학생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그녀였지만, 상식과 통념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담임 선생님이 훈육, 지도할 때에는 단호히 일어나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참으로 당찬 학생이었습니다.

"제가 잘못했으니 제게만 벌을 주셔야죠, 왜 반 전체를 볼모로 잡으십니까?"

물론 일개 여고생일 뿐이고 당시에는 아직 전교조 조직도, 사회과학 서적의 너른 보급도 안 이뤄졌을 시절이니 어떤 분명한 의식이 있어서 한 행동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건 그저 그녀가 타고난 기질, 정의감의 발로였을 뿐이죠. 또 이런 꾸밈 없고 무슨 남보란 듯한 쇼맨십이 아닌 스타일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 하는 진짜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저항도 가식화, 상품화된 세상이 아닙니까.

소녀 심상정은 대학에 진학하여 처음으로 전태일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그녀는 전태일과 세대 자체가 다르며, 그 사건이 일어졌을 당시 겨우 초등학생 청도였겠으므로 in person으로 조우할 수는 없죠. 대학에 들어간 후 엄청나게 많은 사회과학 고전을 섭렵한 그녀는, 토론과 심포지엄에서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실력을 갖추게 됩니다. "전태일을 만났다" 함은, (나중에 저자 진짜 명의가 밝혀진) <전태일 평전>을 읽고, 한국에도 이런 노동 운동의 선구자가 있었음을 알게 된 후, (과연 그녀답게) 봉제 공장에 직접 취업하여 진짜 노동자로서의 삶을 시작한 계기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전태일은 그렇게 외치면서 죽어갔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그가 요구했던 건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모두가 결핍과 가난에서 해방된 지상 천국"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법이라고 정해 놓은 최소한의 약속이나 지켜지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 정도였던 거죠. 잠시 앞으로 돌아가, 고교 시절 담임 선생님께 정당한 항변을 하며 비합리적인 처사에 맞선 것도, 어쩌면 "전태일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그에게 태생적으로 공감했던 그녀였기에 가능한 에피소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튼 이런 현장에의 투신이 있기 전까지는, 심상정은 모교에서 가장 멋을 부린 패션을 걸치며, 그 나름으로는 가장 뽀얀 얼굴빛을 자랑하며 캠퍼스를 누빈 여학생이었다고 스스로를 회고합니다. "괜찮고 똑똑해 보이고 멋있는 남학생들을 쫓아가면 대부분 운동권이었어요." 이때 그는 "대학문화연구회"에 가입하는데, 이 중에는 이후 진경준 전 검사장에게 유죄를 선고한 (학생 시절의) 김문석 판사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서울대 법대 교수를 지낸 한인섭 박사님도 그 멤버였다고 하는군요.

그녀의 롤모델이 된 이는 칠레의 바첼레트 같은 정치인입니다. 2016년 대선에서 그녀는 "여성 대통령 후보"라는 타이틀에 대해 꽤 부담도 느꼈는데, 어떤 정치인이 진정 유권자 총체를 대변할 자격이 있으려면, 그 정치인이 다수 민중의 고통을 해소하는 데 앞장선다는 확신이 모두에게 공유되어야 하고, 이 결과로 "노인들도, 남성들도(아마 바첼레트나 심 전 대푠에게나 지지율 취약 계층일)" 그녀를 지지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1984~85년에는 구로공단은 물론, 대구 시내에서도 택시 기사들의 파업이 있었다는군요. 이걸 두고 심 전 대표(뿐 아니라 대부분의 학자, 전문가)는 1946년 미군정 당시 철도 총파업으로 개시된 노동 항쟁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데, 그 엄혹하던 시절 이런 기층 노동차층에서 과감한 움직임이 태동할 수 있었던 건 그 상당 부분이 심 전 대표 같은, 젊은 시절부터 현장의 노동자들과 공감하며 헌신했던 이들의 노력 덕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 무렵 그는 이승배 변호사, 즉 현재의 배우자분을 만나게 됩니다. 처음 데이트를 한 곳은 압구정동 아파트 근처였는데, 여느 청춘 남녀와 다를 바 없이, 그들의 만남과 연애도 참 달콤한 시간이었다는 회고군요. 이 무렵 노동계나 정보기관에선 "단문심"이 유명했는데, 단병호 - 문성현- 심상정 등의 요주의인물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심 전 대표가 워낙 유명한 거물이었기에, 정보기관에서도 심-이 커플의 밀회 장소마다 일일이 추적하여 사진을 찍고 동태를 파악하는 등 오늘날의 시선으로는 참 어이없는 일이 많이 있었나 봅니다.

p113에는 젊은 시절 아들 이우균씨를 낳고 모자가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렸습니다. 이 책은 심 전 대표의 인생 주요 국면을 담은 컬러 사진이 여럿 나와서, 개인사는 물론 한국 현대사의 중요 자료집으로도 의의가 클 듯합니다. p151에는 1996년 당시 국제 행사를 준비하던 심 전 대표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때만 해도 참 젊은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군요. 이해 하반기에는 국회에서 노동법 관련 날치기 통과가 이뤄지고, 이 사건을 계기로 김영삼 정부의 기반이 크게 흔들립니다. 바로 1년 뒤에는 외환위기가 터져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갔죠.

크레인 농성으로 유명한 김진숙씨, 고발 보도로 유명한 MBC 이용마 기자 등과의 인연도 소개되고, 우리가 잘 아는 노회찬 씨 같은 이(pp. 222~237에는 같이 진행했던 단식 투쟁 관련 회고가, 관련 사진과 함께 실렸습니다), 혹은 동갑인 유시민씨 같은 이들과의 인연도 소개됩니다. 이 외에도 민노당 안에서 벌어졌던 자주파 - 평등파 간의 내부 알력에 대해 심 전 대표의 소회를 털어놓는 대목도 읽을 만합니다.

심 전 대표의 오늘을 만든 건 이런 걸출한 인물들과의 깊은 유대와 소통도 큰 몫을 했던 것 같습니다. 책에는 자신의 투쟁 과정을 소개할 뿐 아니라, 특히 젊은 독자들에게 당부하는 정책적 제언도 큰 비중을 두어 개진합니다.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메갈리아 관련 곤란한 입장 표명도 한 말씀 있으니 관심 있는 독자들이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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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이야기 2 - 민주주의의 빛과 그림자 그리스인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경덕 옮김 / 살림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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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일에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만, 서양 고전 문화의 원형을 만들었고 (놀랍게도)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의 초석을 놓았던 그리스 역시, 그 역사와 문화에는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 모두가 선명히 존재했습니다. 이 2권 역시 시오노 나나미 여사 특유의 열정적이고 치밀한 분석과 추적이 돋보이더군요. 아름답고 우아하며 현대인의 눈에조차 세련되고 현명한 족적을 남긴 고대 그리스인의 성취가 뚜렷이 부각되는 반면, "그 어려운 일들"을 남보란 듯 해내고 나서도 버젓이 저지르는 "인간적인 오류"가 안타깝게 역사의 바른 궤도를 뒤집어 놓습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 역시, 초인적인 업적을 달성하고 난 후, "너무도 인간적인" 바보짓의 연발로 비참한 몰락의 내리막 운명을 타는데, 이들 위대한 문명인들 역시 그 운명의 경로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오노 여사는 이 시기 지중해 3대 강국으로 아테네, 스파르타, 페르시아를 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1권에서 잘 보아 알듯,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둘을 합친다 해도) 인구 수, 강역, 국부(國富) 면에서 대제국 페르시아와 상대가 안 되는 처지였으며, 1권에서 저자의 감동적이고 세밀한 묘사를 통해 잘 배웠듯, 골리앗을 꺾은 다윗처럼 믿을 수 없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여 절멸과 병합의 위기를 면하고 오히려 상대를 제압하는 쾌거, 기적을 이뤄냈던 것입니다. 오리엔트 저편의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3대 강국은커녕 그 밑에서 노예살이나 할 뻔했던 그리스인들은, 절묘한 타협과 전략적 사고, 자존에 대한 확고한 결의로 생존, 번영, 자존 모두를 지켜 냈습니다. 1권을 꼭 먼저 읽지 않아도 내용 이해에는 지장이 없으나(저자 특유의 스타일로, 책과 주장의 맥락을 독자가 따라오게 하려고 몇 번의 신나는 강조와 되풀이가 이어지기 때문이죠), 1권에 이어지는 독서라야 감동이 몇 배는 더 늘어납니다.

(결과를 뻔히 다 아는 이야기지만) 강력한 페르시아 제국의 진군이 실패로 이미 귀결되었기에 이 2권은 독자 입장에서 "어휴 우리 잘생기고 착한 그리스가 저 덩치 큰 악당에게 혹시 맞기라도 하면 어쩌나" 같은 조바심은 일찍 접고 편안히 이야기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저자는 언제나 우리 독자들에게 확실한 감정 이입 대상을 정해 주고 자신만의 신나는 이야기를 따라오게 만들죠. 1권에서도 그랬지만 주인공도 아니고 빌런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이긴 한데, 그래도 미련할망정 정을 완전히 끊을 수 없고 아테네인들 못지 않게 무슨 후속담이 자꾸 궁금해지는 (다른 이유에서 위대한) 스파르타인들 역시, 1권에서처럼 마냥 강력하고 강경하고 무식한 게 아니라, 자기 개성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많이 약한, 또 더 유연해진 모습을 이 2권 전반부에서 드러냅니다. 용기와 지혜의 결과, 포상으로 최상의 번영을 누리는 주인공 아테네, 좀 기가 죽고 유해진, 주인공에 대한 질투 때문에 발목잡기를 일삼던(일단 이렇게 쉽고 유치한 프레임으로 봐야 재미가 나죠) 스파르타, 기가 팍 죽은 악당 페르시아, 이 3자간의 편안한 역할 배분이 이뤄진 덕에 2권 전반부는 확실히 편안하게 읽어갈 수 있습니다.

1권에서 비교적 다양한 얼굴들이 등장해 이야기 뼈대를 잡기가 조금은 귀찮았던 독자(그런데 정말 이렇게 느꼈다면 그런 독자들은 정말 많이 게으른 분들입니다. 줄기가 정말 복잡히 뻗은 고대 그리스사를 그 정도로나마 요령껏 간추려 놓기도 힘들거든요. 로마사와는 또 차원이 다른 분석상의 난해함이 엄존하는 그리스 역사 다루는 솜씨를 보고, 이제서야 시오노 여사의 진가를 확인하게 되네요)라 해도, 이 2권은 진짜 "이야기"만 쭉쭉 진행되는 구조라서 훨씬 재미있게 읽힙니다. 1권은 또한 진지한 제도사 분석이 부분적으로 이뤄져서(굉장히 유익하긴 해도) 흐름이 끊기는 면이 있었다면(그렇지도 않았습니다만 정말 "이야기" 하나만 추구하는 독자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었을 겁니다), 2권은 그나마 그런 애로(아니지만)도 없이 시원한 관람과 질주가 가능합니다.

왜 그리스, 로마 역사가 재미있는가 하면, 구도상 승패가 빤히 정해져 있을 것 같은 싸움도, 영리한(혹은 위대한) 주인공의 기지와 자질 때문에 의외의 방향으로 확 뒤집히는 결과가 빈번히 일어나거든요. 키논 역시 상식대로라면 그 위업과 공적 때문에 영원한 정치적 승자로 위상이 굳어야 할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라는 놀라운 정치적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대 정치가(키논에게는 후배이자 라이벌 진영의 경쟁자)가 등장하여, 아테네와 전체 그리스의 역사가 지극히 아테네적인(후대인들의 규정대로) 방향으로 흘러가게 키를 틀어 버리는 역할을 맡습니다. 시오노 여사의 평가에 의하면 "모든 것을 다른 관점에서도 바라보게 만들어 버리는, '유도하는' 천재적 능력" 때문이었죠.

이 능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일단 자측이 수세에 몰렸을 때, 생각지도 않은 지점에서 돌파구를 찾게 도와 줍니다. 혹 싸움에서 져서 침체되었을 때, 재기와 대안과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건 이른바 아Q식의 정신 승리와 달라서, 발상이 그에 도달한 순간 바로 의욕을 갖고 극복을 위한 실천에 나설 수 있다는 게 큰 차이입니다. 억지로 기뻐 날뛰거나 합리화, 자기 위안, 현실 도피를 하는 게 아니라, "왜 그걸 몰랐지?"하며 진지한 각성효과가 나타난다는 게 특징이죠. 책에는 "키논이 연설하면 청중들은 감동하고 울컥하고 격동되었지만, 페리클레스가 연설하면 사람들은 자기들 생각을 멈추고 골똘히 경청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날카로운 지적이자 충분한 근거 있는 상상이며, 정치가나 지도자가 전자 같은 자질을 갖기도 힘들지만 후자는 정말로 드물며 위대한 자질입니다.

마치 카이사르나 중근세 체사레 보르자에 대해서처럼, 이제 미남 페리클레스를 붙잡고 이 시오노 할머니가 또 덕질 동인질 시작이구나 하는 분들도 있겠는데, 그 정도로 감정적 폭주를 하시지는 않습니다(저도 왕년에 여사의 그런 경향을 엄청 개탄했던 독자로서, 이 점은 제가 보증합니다. 진짜 원숙해지셨어요). 아 물론, p119를 보면 "고대 3대 미남"'이라면서 아휴! 이분 또 시작이네 싶은 대목도 없지는 않은데, 게다가 간지럽게도 그 구체적 규정은 페리클레스=편안한, 알키비아데스=위험한, 옥타비아누스= 냉철한 아름다움 이라니 독자의 오래된 닭살이 또 돋을 밖에요. 근데 좀 다분히 의식을 하셨는지, 페리클레스에 대한 기술은 꽤 차분합니다. 이거 후반부나 3권 위해 뭘 아껴 놓는 것 아냐? 이렇게 드라이하게 진행할 리가 있나? 모르긴 해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분명 의식을 하시는 겁니다.ㅋ

키논에 대해 저자는 "친 스파르타"로 분명히 포지셔닝을 합니다. 위업은 위업대로 이루고도 제 본향에서 흔쾌히 인정 못 받는 거물들이 꼭 있는데, 그 이유는 인물 개인의 정체성과 지향이 소속, 출신 집단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파르타에 태어나 불세출의 패권 정치가가 되어야 했을 사람이 이 시끄러운 아테네에 태어나 할 말도 채 못 하고 저 마음고생을 하고 있으니(물론 스파르타도 전통과 시스템에 의한 독재지 개인의 의지가 체제를 바꿀 수는 없는, 희한한 보수 구조였죠)... 그렇다고 그 위대한 인물이 개인 감정이나 에고 때문에 배신자의 길을 걸을 수는 없고, 동시대인들을 안타까이 여기면서("에휴.. 니들도 참. 답은 저건데 말이야....") 최대한 키를 그쪽에 가깝게 몰고는 갑니다. 그는 분명 스파르타식의 엘리트 과두정치를 꿈꾼 인물 아니었겠습니까? 그의 현명한 선택은, 자신의 시선과 조국의 열망 그 방향이 어긋나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절제를 유지하면서 최대한의 타협과 조화를 도모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도 마찬가지로 현명했습니다. 싫은 사람 무작정 배척하지 않고, 그의 위대한 자질(특히 군사 방면)이 최대한 (자신을 위해, 그리고 조국과 사회를 위해) 발휘되도록 최소한의 리스펙트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스파르타는 이 시기 특히 하층민들의 반발로 큰 고생을 하는데, 종래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던 대목이 드라마처럼 재생되는 느낌이 신기하더군요. 이런 거 하나만 봐도 확실히 시오노 여사 특유의 맥락화, 팩트의 재정돈 버전으로 읽으니 뭔가 재미랄까 역사 읽는 동기 부여가 확실히 되는 느낌입니다. 다 아는 소린데도 재미있고, 이거 내가 알던 지식을 이렇게 강제(?) 재해석 당해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도 금세 진정될 만큼, 이 2권은 밀도 있게 잘 쓰여졌습니다. (거칠게 요약해서) 전반부가 페리클레스, 후반부가 알키비아데스(의 모에화?)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좋은데, 다 읽고 나니 이런 위대한 남성들의 행적은 열정적인 여성 찬미자의 시선과 해석으로 읽을 때에만 비로소 눈에 띄는 뭔가가 있지 않은가 하고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얼씨구!). 알키비아데스 같은 인물은 고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도 꽤 인상깊게 다뤄지곤 하는데요(페리클레스도 마찬가지지만 그 사람이야 또 위상 자체가 다르니), 이처럼 재미있게 낭독되면서도 사료 조사가 치밀히 이뤄진 웰메이드 대중서 덕분에 그 고전의 수요가 좀 줄어드는 건 아닌지, 아주 쓸데없는 걱정도 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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