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핵심 강의 - 최소한의 중국 인문학
안계환 지음 / 나무발전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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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참으로 광대 무변한 국가입니다. 영토가 넓다 보니 각각의 지역이 지닌 사연도 무궁무진하고, 기후나 풍토도 다양합니다. 이렇다 보니 한 말로 "중국, 중국인들"을 상대한다고는 하나, 어느 지역에서 어떤 처지에 놓인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전략과 태도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사고는 글로벌하게 하되 행동은 로컬하게 하라는 말이 있죠. 개별 상황에서 타겟의 취향과 의도를 정확히 짚지 못하면 아무리 거창한 목표를 잡았어도 원안대로 성취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어느 중국인을 만나도, 또 어느 중국 회사와 상대해도, 무조건 통하고 보는 화제가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자랑하는 오천 년 역사가 이들 후손들에게 남겨준 "역사, 인문"이라는 유산입니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잘 구사해도 정작 컨텐츠, 토픽이 빈약하면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역사와 사상, 철학, 인물, 문학, 예술에 대한 화제가 풍성하면, 저쪽에서 사람을 보는 눈길과 태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우리야 우리 조상들의 역사, 견훤, 왕건, 김춘추, 계백, 이성계, 정몽주 등에 대해, 외국 비즈니스 파트너가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가졌어도 그저 좀 신기하다는 정도의 반응에 그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들 중국인들은 실로 과거의 자취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릅니다(그러니 우리 기준대로 지레짐작하는 건 금물이고요).


동시에, 중화권의 문화 유산에는 우리 조상들이 이바지한 비중도 적지 않은데다, 고려, 조선을 거치며 중국 문화의 정수는 선현들이 대대로 인격 도야, 교양과 학식의 필수 학습 목표로 삼아 왔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중국 문화, 역사, 인문에 대한 핵심 사항"의 이해는 1) 중국인들을 사무 관계로 상대해야 하는 직장인들에게 필수 정보이자 최소한의 에티켓이며, 2) 바로 우리들의 조상들께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소양의 축적 노력입니다.

시간과 정력을 아껴 다양한 목표에 배분해야 하는 우리 현대인들은,  한도 끝도 없는 중국 고전 전거를 모조리 찾아 읽어 내고 내면화할 수는 없습니다(가능하다면 그게 바람직하겠지만요). 고맙게도 단 한 권으로 다이제스트된, 내용의 신뢰성과 가독성을 고루 갖춘 안내서, 입문서, 대중 교양서가 있다면 좋을 텐데, 한 권으로 필수, 핵심 사항을 다 배우려면 오히려 그런 놀라운 책을 찾기가 더 힘듭니다. 고명하신 학자, 교수님들은 많아도 신통한 입시 족집게 선생은 오히려 찾기 드문 것과 같은 이유이겠습니다. 후자가 전자보다 더 가치 높은 존재란 뜻이 결코 아닙니다. 상황이 급하면 지나치게 원칙을 따지기보다 나한테 최적화한 답을 찾는 지혜, 요령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중국 고전의 심오한 뜻을 정석대로 낱낱이 배우다가는, (행여, 생의 종언 전에 끝낼 수 있기나 하다면) 이미 사회 활동 적령기를 한참 지난 노년에 달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죠.


이 책은 일단 박력 있게 잘 읽힙니다. 이런 박력 있고 내용 알찬 책을 읽으면서 저는 예전 생각이 좀 나더군요. 대략 십여 년 전(중국이 본격 세계 무대에서 경제적 굴기를 이루면서)부터, 중국의 고전이나 역사를 요약해서 독자에게 소개하는 책은 매우 많은 종류가 출판되었더랬습니다. 그 상당수는 내용이 너무나 빈약하고, 어떤 것은 부정확한 정보를 담거나, 편벽된 가치관에 휩쓸리거나 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녔던 기억입니다. 어떤 건 (분량의 한계를 고려할 때) 깊이도 있고 관점도 표준적이며 확장성도 갖췄지만, 엉뚱하게도 가독성이 떨어지는 게 있었습니다. 배경 지식을 상당히 갖추고 독서 훈련이 탄탄히 되어 있는 독자라면 눈빛을 반짝이며 환영하겠지만, 그런 책이 주로 초심자를 타겟으로 삼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안타깝고도 역설적인 면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공력 좀 되는 분들에겐 "아, 이 책은 (초심자가 아니라) 뭘 좀 알고 나서, 일정 경지에 오르고 나서 읽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같은 느낌이 안 들 수가 없었죠.

간만에 그런 아쉬움, 종래의 미진한 수요를 모두 긁어 주는 책이 나와서 저는 참 반가웠습니다. 즉, 1) 초심자가 읽어도 재미있고, 그 초심자가 더 심화 학습이 필요할 때 좋은 발판이 되어 줄 수 있으며, 2) 중급, 고급 독자가 읽어도 저자와 치열한 소통을 하며 뭔가 배우고 생각할 거리가 마련되는, 그래서 (이미 그런 사람은 잘 하고 있겠지만) 중국 측 비즈니스 파트너와 대화를 나눠도, 종래 자기 관점과 다르거나, 보다 발전된 경지의 화제 전개가 새로 길을 여는 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꼭 저자의 관점을 따라해서가 아니라(물론 따라해도 되겠더라구요 ㅎ), 건강하고 박식하며 탄탄한 논리를 갖춘 저자의 책을 읽으면, 마치 벡터의 합성처럼 새 방향으로의 개안이 은근 자극됩니다. 제게는 이 책이 딱 그런 책이었습니다. 대화가 더 다채로워지고 상대의 진지한 몰입과 동의를 끌어낼 수 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책은 모두 10강으로 이뤄졌습니다. 역사와 문학과 인문을 한 권에 담는 책들이 흔히 시대별 편제를 취하는데, 대개 그렇게 하면 독자가 좀 지루해집니다. 그런 편제 자체에야 문제가 없다해도, 두어 번 실패한 초심자가 (설령 관점이 내용이 전혀 다르다 해도) 다시 같은 형식을 꾸린 책을 만나면 구미가 덜 당기거나 지레 의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의 형식은 참신하고, "중국 핵심 교양"을 전달하려는 목적에 매우 잘 부합하는 구조입니다. 제 개인적 생각에 그칠지 모르겠으나, 한 권으로 핵심을 전달하려면 애초에 다들 이런 목차, 배열, 편제라야 하지 않는가 하는 각성에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앞에서 책이 박력 있게 잘 읽힌다고 했습니다. 이는 저자께서, 주제에 대해 확실히 파악하고 깊은 이해를 갖춘(또한, 오랜 세월을 두고 생각을 숙성시킨) 분이라 이런 시원시원한 서술의 흐름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보를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마련하고 줄거리를 잇다 보면, 정확성에 대한 신경이 쓰이기 때문에 말이 유창해지지가 않습니다. 그렇다고 유창한 말솜씨와 흡인력이 전부는 아닐텐데, 이 책은 (저자의 관점은 일단 차치하고) 전달하는 내용의 정확성 면에서 거의 오류가 없습니다. 내용 오류나 오식(誤植)을 책에서 찾아내는 게 독자로서 오랜 습관 중 하나인데, 이 책은 아주 사소한 몇 군데가 발견되었을 뿐 거의 완벽한 형식 정합성을 보입니다. 초심자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공부도 힘든 판에, 텍스트까지 울퉁불퉁 좌충우돌이라면 마음이 얼마나 불안해지겠습니까.

팩트만 건조하게 전달하면 역시 읽는 맛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마치 유식한 고을 훈장님이 맛깔나게 풀어주는 옛날 이야기 같이 흥겹게 읽힙니다. 본문은 합쇼체, 심화 내용을 담은 박스 아티클은 격식 갖춘 예사평서형 어미를 써서 단조로움을 피합니다. 초심자에게 어려울 수 있는 용어 설명은 책 후주로 돌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중국행 비행기, 이동하는 차량 안 등에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형식으로 여겨집니다.

1강은 중국 신화에 대한 설명입니다. 중국 인문 대중 요약서는 이 신화 파트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는데, 애초에 중국인들부터가 객관적 관념론 체계로 사상, 도덕, 종교, 관습을 통일하면서 이 분야에 대한 관심과 존중을 상대적으로는 소홀히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화 모티브들도 유교 경전 맥락 안에서 인용되면 사뭇 비중이 달라지는데, 책은 그런 전통을 충실히 따랐을 뿐 아니라, 근래 정권에서 열심히 정성을 기울이는 하은주 공정 이슈가 또 있기에, 각별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신화는 나이 불문 학식 불문 누구에게나 재미있지 않습니까?

중국인과 대화하는데 한국인이 마냥 자기 관점만 내세울 수는 없겠으므로, 이 책은 대개 그들의 표준적인 인식을 반영하지만, 제가 읽어 보니 역시 한국인으로서 피할 수 없는 주체적 인식이 충만함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미언대의(微言大義)라고나 할까요?ㅎㅎ 물론 문언, 워딩으로만 봐서는 잘 안 드러나므로 마음 놓고 독해 후 (중국인들 앞에서) 인용하셔도 됩니다. (단, 저자 서문만은 한국인으로서의 비분강개한 의식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2강은 춘추전국기에 대한 설명인데, 역사의 큰 줄기(보통 다른 책들은 이 얘기만 하고 말죠)도 짚어 주지만,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제도사 분석의 성격이 더 짙었습니다. 이야기만 따라가면 왜 이런 사건이 벌어져야 하는지 납득을 못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이 책은 제후와 경-대부 등의 신분 위계 구조를 친절히 먼저 풀어 줍니다. 이로써 "중국형 봉건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인식 틀을 먼저 마련해 주는 겁니다. 박스 안에 따로 편집된 "중국사 줌인(다른 서적 인용으로 대신하기도 합니다)"이 어느 장에서건 유익함은 다언을 불요합니다. 역사를 쉽게 들려 주며, 어느 상화에서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사자성어도 맥락과 함께 제시되니, 초심자들이 머리 속에 오래 남을 수 있겠습니다.

3강은 중국 고전 문화의 토대가 놓인 중요한 시기, 한 제국의 성립 과정을 다룹니다.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높은 화제가 삼국시대, 초한 쟁패기이기도 하고, 이 사정은 중국인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자가 새기고 정리한 한 고제 유방의 처세 핵심, 승리의 비결이 꽤 설득력이 높으므로, 처세와 실용의 관점에서도 한 번은 읽고 곱씹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 앞에는 진시황의 업적과 좌절에 대한 강설이 있고, 챕터 말미에는 "한중일 장기의 차이"라는 무지 흥미로운 토픽이 독자를 반가이 맞습니다.

4강과 5강은 중국 고전 인문의 발원과 심화로 각각 규정되는 "춘추", "전국" 시대에 대한 설명입니다. 보통 양 시대를 뭉뚱그려 설명하거나, 판에 박힌 정치사 관련 서술로만 채워지곤 했는데, 이 책은 두 시대의 차별되는 의의를 다방면에서 해명한다는 게 좋습니다. 유가의 초기 형태, 제자백가의 고전적, 혹은 실천적 의의를 일관된 시야에서 정연히 소명하는 대목이 일품입니다.

6강과 7강은 중국 역사를 과연 어떤 프레임에서 봐야할지, 보다 근원적인 사관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첫째 그들 중국인들이 조금 위험 수위를 넘는다 싶은, 과도한 중화 사관의 극복(우리 입장에서)과도 관계 있고, 둘째로는 그들의 오천 년 역사에서 실제 전개된 양상으로, 중근세로 넘어올수록 정통 농경 세력이 아닌 유목민족의 정복 왕조 통치 기간이 더 길어지는데다, 세계적으로 국위를 떨치고 내부 시스템 면에서도 세련된 기법을 자랑한 업적이 오히려 정복 왕조의 솜싸라는 엄연한 팩트를 어떻게 처리할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결론은 "오랑캐는 없다!"인데, 사실 이 점을 부인하면(즉 화이사관을 마냥 고집하면) 중국인들 입장에서도 자측 역사가 대단히 옹색해진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왜 그토록 포용과 관용, 융합을 (양식 있는 진영에서) 강조하는 걸까요? 함께할 때 더 강해지고, 다양한 배경을 지닌 문화적 장점을 최대한 포섭할 때 더 풍요로워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이 대목 강설은 읽기에 참 통쾌했습니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중국의 고전 문화에도 대대적 수정이 가해집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학문에서 종교로"라 요약합니다. 불교 문화 하면 대뜸 한자를 우리가 떠올리는 것도, 우리가 숭앙하는 불교는 현장 등 중국의 거두들에 의해 변용되고 수정된 동북아시아형 대승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헤겔 식의 변증법이 꼭 아니라도, 상반되는 개성의 문화 여럿이 만나면 제3의 발전 양상이 대두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9강에서는 "도교'라는 지극히 중국적인 종교 체계에 대해 자세한 사항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대단원인 10강은 문학입니다. 다시, 초한쟁패의 매력적인 패자(覇가 아닌 敗) 항우 이야기도 나오고(당대뿐 아니라 이후 천 수백년에 걸쳐 얼마나 많은 문인, 가객들에 의해 소재로 떠올랐는지 모르죠), 당송 시문학의 찬란한 정수가 다뤄지는가 하면,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명청기를 대표하는 서민 장르 고전 기서인 <삼국연의>도 나오고, 마법천자문, 드래곤볼, 슈퍼보드 등 한일의 미디어믹스도 언급됩니다.


이 책에도 자세히 나오듯,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 불태입니다(손자병법과 손빈 병법의 차이와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습니다). 중국인과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진행하건, 보다 먼 미래에 그들과 본격 문화 투쟁을 벌이건, 자신의 좁은 틀에 갇혀 뻔한 상식만 견강부회로 우기는 식으로는 아무것도 달성 못 합니다. 한 권으로 정말 필요한 교양을 얻으면서도, 동시에 우리 자신을 쉽게 타협하지 않는 건전한 비전을 재확인하게 돕는, 매우 알찬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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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시공간과 물질
김항배 지음 / 컬처룩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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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종래의 무지와 몽매를 넘어 이성과 계몽의 시대로 발돋움하는 데에는, 그 시선을 우주로 향해 돌린 놀라운 회심과 각성이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광막한 우주를 바라보기 전까지, 인간은 자신이 속한 좁은 지구 위의 물리계에 대해서조차 그 정확한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물리계는 고사하고, 사람은 자그마한 "자기 자신의 바른 실체"에 대해서조차 온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우주의 바른  모습을 파악한 후에야 비로소 (수천 년 전 소크라테스의 가르침마따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게 되었다는 건, 천문학과 물리학에 대한 정확한 소양, 인륜과 도덕에 대한 바람직한 천착, 이 둘이 결코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심도 있게 시사 받는 듯만 합니다.

"교양의 완성은 (자연)과학"이라고도 하죠. 불과 지지난 세기에만 해도 칸트(이 책에도 여러 번 인용됩니다)나 마흐 등 일류 철학자들은 철학자이기만 한 게 아니라 당대 최고 수준의 자연과학 연구를 선도한 두뇌들을 겸했습니다. 인문과 자연과학은 본디 둘이 아니라 하나였고, 이제 통섭의 시대를 맞이하여 다시 하나가 될 운명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인들도, 뉴턴 식 해석의 고전 물리, 천문, 나아가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와 내면화가 이제는 거의 필수라고 하겠습니다.

물고기는 자신이 속한 물 안에서 하늘을 바라봅니다. 수면 위에는 자신을 노리는 성정이 난폭한 맹금류들, 평화로이 공중을 유영하는 여타의 생명체들, 여유로운 구름, 작렬하는 태양, 혹 환하게 빛날 때라면 보름달 등이 그 눈(말 그대로 "어안"이죠)에도 비치겠습니다만, 수면 안에서 바라보는 형상들이기에 바깥 세상이 얼마나 아찔한 다층 구조를 지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층(높이)는 고사하고, 물고기의 소박한 눈에는 그 모든 게 수면 위에 반짝이처럼 고정된 2차원 형상으로만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왜곡, 단순화가 어디 어류의 지적 회로 안에서만 벌어지겠습니까? 어리석은 잡초, 거름 같은 벽지의 무지렁이가 갇혀 있는 초라한 우물 안 세계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유사 이래 수천 년 동안, 인간 역시 "천구"라는 단조로운 프레임으로, 감히 계측과 연산의 시도조차 못 할 광대한 우주를 힘들여, (그나마) 부정확하게 간추려 왔습니다. 별들이 천구라는 표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아니라, 그 각각이 먼 거리, 상상도 못 할 먼 거리를 두고 광채를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 지구의 주위를 태양이 도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진리에까지 비로소 착상이 미친 후에야, 인간은 그때까지 설명 안 되던 모든 수수께끼와 모순에까지 과감히 이성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해명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미신, 기만, 환각, 광신의 굴레에서 벗어나, 노예가 아닌 스스로의 주인으로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주 물리학(과 그 인접 과학)은 그저 물리계에 대한 기술적 정보, 지식의 집합에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 존재의 해방자 구실을 해 준 프로메테우스였던 셈이죠.

별에는 등급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편의에 따라 정한 것입니다만, 오래 전부터 "겉보기"에 따라 정해 둔 서열(물론 숫자로 표시됩니다)이 있고, 그 별이 품은 에너지에 따라 실제로 발하는 "밝기"가 따로 있습니다(후자는 "절대 등급"이라고 부르죠). 별이 실제로 얼마나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느냐와는 무관하게, 인간은 자신의 터전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만 하면 제 주관에 따라 그 별을 희미하다며 낮은 등급을 매기고, 그 반대로 제 눈에 밝으면 덩달아 등급도 높였으니 우습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죠. 허나 인간은 또한 위대하기도 한 게, 제 눈에 비치는 현상이 그 실체를 온전히 대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기특하게 어느 순간부터 떠올리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천문학적 수치"라는 말을 흔히 씁니다. "별과 우리 지구가 떨어진 거리"를 염두에 두고부터, 그 아찔한 수치를 (계산을 해 내기는커녕) 그저 응시하는 단계부터도 머리가 아찔해졌기에, 네이피어라는 천재적인 이가 logarithm이란 유용한 개념체계를 고안해 냈습니다. 모든 수를 10의 거듭제곱으로 표현한 후, 밑에 있는 10은 잠시 잊고 그 거듭제곱 수치만 따 와 대신 활용하기 시작한 거죠. 예를 들어 10,000처럼 길게 쓸 게 아니라 이에 로그를 취해 4(즉, 10,000이 가진 0의 개수)로 간단히 표기하자는 겁니다. 23,145 같은 숫자도, 소수점 아래를 주욱 늘어놓으면 4와 5 사이의 자기 고유의 값으로 대신 쓸 수 있고, 다른 숫자와 겹치지도 않으니(함수 중에서 이런 걸 일대일대응이라 부르죠) 아주 유용한 방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천체의 겉보기 등급과 절대 등급의 관계식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이성 그 위대한 진보를 확인하는 뜻깊은 공식이라 저도 다시  손수 워드로 써 보았습니다. (참고로, 위의 식에서 로그의 밑이 10인데 0으로 잘못 인쇄되었습니다. 다른 곳은 다 맞는데 거기 하나만 틀렸더군요. 로그는 밑에 0이 올 수 없죠. 분모가 0이 못 되는 것처럼)

천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어딘가(물론 태양이지만)를 중심으로 부단히 도는 중이라면, 다른 별을 관찰할 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의 위치가 바뀌므로, 이른바 연주 시차라는 게 생깁니다. 그런데 케플러가 "신처럼 믿고 의지했던" 티코 브라헤는, 가뜩이나 태양 중심 모델이 마뜩지 않았던 차에, 연주 시차마저 제대로 측정되지 않으니 이런 발상의 전환에 대해 내내 내키지 않아하는 태도를 견지했죠(이뿐 아니라 그는 행성의 원궤도 공전설도 데이터와 어긋난다는 이유로 기각했는데, 케플러가 타원궤도로 수정하여 바른 이론을 완성했습니다).

무지렁이들만 모여 사는 폐쇄적인 공동체였다면, 권위자 티코 브라헤(사실 관측과 자료를 다루는 능력에 있어 불세출의 인물이었으니요)의 벼락 같은 호통에 다들 다른 생각이나 이견을 접고 말았을 겁니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딴 목소리를 내면 이단자, 공감 무능력자로밖에 몰리기밖에 더했겠습니까? 연주 시차가 제대로 측정 못 되었던 이유는 다른 게 없었고, 별이 너무도 멀리 떨어져있다는 사정뿐이었습니다. 여건이 열악하니 현상이 바르게 계측되지 않았고, 인지가 부실하니 지혜에의 바른 인식도 계속 미뤄질 수밖에 없었죠. 이 책에는 이 외에도, 광행차, 연속 스펙트럼 등을 정확히 캐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집요하고 성실한 노력이 있었는지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우주론을 바르게 이해하고 접근하다 보면, 현재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등이 도달한 첨단 지점까지도 천착하게 된다고 합니다. 우주물리학에는 그만큼, 물리학과 그 인접 분야의 최신 성과가 모조리 동원되다시피한 최고 두뇌와 지성의 향연이 벌어지는 셈입니다. 아니, 양자역학은 극미(極微)의 세계이고, 우주는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지는 덩치 큰 수치와 차원이 지배하는 공간(약간 어폐가 있습니다만 일단 편의상 이 말을 쓰기로 하죠) 아닌가? 이런 상식적인 의문에 대해 저자는 "... 초기 우주는 고에너지, 고온의 물질들로 가득 차 있었고... (p225)", 팽창 이전의 구조는 우리가 지금 양자역학을 통해 해석하고 예측하는 극히 좁은 공간에서의 사정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는 가정으로부터 접근해야 한다는 조언을 베풉니다.

p267 이하에서부터는 그 유명한 파동/입자의 딜레마를 다루며, 도대체 왜 "측정 행위" 자체가 물질(혹은 운동)의 상태를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 저자 고유의 친절하고 정확한 설명이 시도됩니다. 이어 힐베르트 공간과 이의 상태를 표현하는 방정식(적분식)이 제시되는데, 특이한 건 이 벡터식에서는 "크기"가 무의미하고, "방향"이 같으면 다 같은 "상태"로 취급된다는 거죠. "상태'라는 말은 이 맥락에서 특유한 의미를 갖습니다. 보통 우리 상식으로는 방향은 무시되어도 크기(절댓값)가 같으면 동류로 취급되는데(그 이전에, 벡터에서 방향과 크기는 개체를 분별하는 핵심 요소들입니다), 여기서는 정반대이니 흥미를 돋웁니다.

우리가 학부 때 선형 대수학의 용도가 그리 넓은 줄 모르고 심드렁하게 배웠습니다만, 벌써 이런 과정에서도 기저(베이시스)를 잡아 모든 상태를 선형 결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 보십시오. 결국 진리는 아무리 저 아득한 경지에 놓였다 해도, 기초 도구와 프레임으로 (아주 번거롭겠지만) 환원하거나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이처럼 수학적 도구를 충분히 활용하되, 교양인의 직관과 선이해의 틀을 충분히 존중하며 "상식"에 부합하는 친절한 안내를 시도한다는 점이 매우 빼어나고 유익합니다.

pp. 308~309에는 궤도 에너지의 반지름과 양자화를 나타내는 공식, 또 쿨롱 포텐셜과 해밀토니언 방정식을 써서 그 유명한 슈뢰딩거 명제를 수학적으로 풀어 보이는 대목이 나와 있습니다. 사실 어느 정도 기초만 배우면 그리 어렵지 않게 따라해 볼 수 있는 레벨이고, 물리학은 (저자가 누누이 강조하는 대로) 말로만 풀어 쓰면 반드시 놓치는 대목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물론 파인만 같은 천재(어학과 수학 모든 도구를 능란히 쓴)는 이는 물리학을 수학 없이 그저 말로만 해명하려는 시도를 했고, 듣는(읽는) 사람들이 자신의 반의 반의 반만 따라가는 수준이었다면 이 시도는 대성공이었을 터였지만, 수학보다 더 어려울 수 있는 게 인간의 언어라는 사실만 확인되고 말았죠.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어차피 피해 다닐 수 없는 수학이라는 (정말 유익한) 도구를 텍스트 안에 최대한 정합성, 적실성 있게 편입하여, 현대 우주 물리학 그 성과를 왜곡 없이 가장 근사하게(아무래도 대중서에는 한계가 있고, 정확한 건 교과서로 배워야 하니까요) 우리 일반 독자들에게 안내해 준다는 점이겠습니다.

p555에 보면 초기 우주가 복사 지배 시대라는 점을 착안(혹은 가정)하여, 이를 프리드만 방정식에 대입한 후, 시간- 온도 관계를 구하는 과정이 나와 있습니다. 이 역시 인간의 범상한 물리계 체험(그나마 머무는 시간이 길지도 못한)이 그 기반 한계를 이루는 상상력으로는, 엄청난 고압 고온이 배태한 에너지를 짐작도 못 하는 것이고, 인간이 짐작 못하는 경지를 이처럼 수학적 도구를 이용해서 그 어림이나마 더듬는다는 자체가 이성의 위대함을 간접 증명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각박한 한계의 벽을 매번 넘음으로써(비록 앞에 더 높은 허들이 즐비하게 남았다고는 하나), 미약하고 하찮은 존재가 점점 더 궁극에 수렴해 가는 도상에서 의의를 찾는 것입니다. 바른 인식과 지성의 도야는, 자연 과학의 정수를 공부할(혹은, 그저 엿보기만 할) 때에 비로소 그 실낱 같은 계기를 잡아챌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교양의 완성은 바로 과학"입니다.



#사이언스올 #과학 #우수과학도서 #리더스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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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자기 여행 : 교토의 향기 일본 도자기 여행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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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입가경이란 말이 있죠. 아무리 천하의 진미라도 한두 술 뜨다 보면 맛이 물리는 게 보통인데, 어찌 된 연유인지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을 거스르는 현상과 체험을, 살다 보면 드물게나마 접하게 마련입니다. 잘된 미술품, 고아한 고전 음악의 감상이 그러하며, 반듯하고 정직한 환경에서 자란 혀만이 느끼고 평가할 수 있는 명품 요리의 "맛"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음식 그 자체도 아닌, 이를 담는 도구, 그릇류의 풍미(風味)를 심미(審美)할 수 있는 게, 우리들 교양 있는 인간만의 특권이자 천품이 또한 아닐 수 없습니다.

나아가,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도자기는 이미 어떤 실용을 초월하여, 그 자체가 완상(玩賞)의 대상(對象)이 되기도 하며, 나아가 숭배와 신앙의 초점으로 자리하기까지 하니 보기에 따라서는 그런 각성과 경지에까지 발을 들이는 사람들이 기이하기도 하며, 유한한 존재가 까마득한 무한을 응시하며 작은 한계를 벗어나고 궁극에 포함되려는 몸부림이 애처롭게도, 위대하게도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어떤 곡절로건, 도자기는 이미 도구나 식기의 위상을 오래 전에 넘어서서, 인류의 간절한 희구를 대변하는 장인들의 예술혼, 그런 장인들을 빚어낸 대지의 그윽한 깨우침까지를 모두 체화한, 아름다움의 근원이자 도(道)의 종착점, 상징이라고나 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조용준 선생님의 이번 책은, 여전히 일본에 머물며 그 고장 그 강역에서 명맥을 이어가는 심원한 도자기의 역사와 성취를 천착하되, 특히 열도 동쪽으로 성큼 발걸음을 옮겨 그들이 "황도"로 성역시하는 교토에 뜻 깊은 시선을 주고 있습니다. 뜻이 깊다 함은 두 가지 의미에서입니다. 하나는 교토 인들이 오랜 세월 가꿔 와, 자국 안에서는 물론 세계인들로부터 극찬의 대상이 되는 고유의 도자기 예술품과 그 내력, 문화를 집중 조명함이요, 다른 하나는 이처럼이나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문화의 아득한 원류가 바로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 집단의 전폭적이고도 결정적인 기여가 있었음을 명쾌히 근거를 들어가며 지적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때 "도래인"들이 속한 시대라고 하면 물론 일본 역사의 고대를 가리키며, 직전 권 <규슈의 7대 조선 가마>가 추적한, 주로 임란(1592~98) 이후 끌려 온 도공들의 위대한 족적과는 또 크게 구별되는 시대의 맥락 속에서의 의미입니다.

조용준 선생의 이번 저서는 특히 저자 고유의 연구 결과와 수 차례에 걸친 현지 답사, 구미의 관련 학계 성과를 최대한 반영했다는 점에서 그의 저서들을 빼놓지 않고 탐독해 온 오랜 독자들을 더욱 큰 흐뭇함과 감동을 안깁니다. 저자 스스로도 서문에서, 그간 각별한 도자기 사랑과 열정, 학문적 이해와 미학적 천착을 가뜩이나 보여 왔던 자신이, 이번 교토 편을 다루면서는 가진 역량과 정열을 모두 쏟아 부으며 집필과 출간에 임했는지 소상히, 감개 무량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책을 읽어 보면 다들 아시겠지만 페이지 곳곳마다 혼신의 힘을 기울이지 않은 구석이 없다는 게 피부로 와 닿을 정도입니다. 전작들도 페이지 곳곳을 꽉꽉 채운 정보와 공력과 정성과 통찰에 독자가 압도당할 정도였는데, 이 책은 그보다도 더합니다. 하루 정도면 독파할 수 있겠지 여겼던 일정이, 일주일을 꼬박 읽고도 부족하게 느껴질 만큼 밀도가 높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드디어 만나는 교토야말로, 일인들이 신성히 여기는 모든 가치와 질서, 관념이 응축되어 찬란한 유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고도 중 고도입니다. 저자는 "京都"라는 명칭부터가 고대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도읍을 일컫던 단어임을 지적하며, 현대 한국어 "바다"의 먼 어원이 된 "파다", 또 이의 변용인 "하타" 등의 성씨를 가진 도래인들이 이 고장에 오래 전부터 정착하여, 일인들의 덴노와 공경귀족이 화려한 고대 문화를 꽃피우며 후손들에게 많은 유적과 유물을 물려줄 수 있었던 기반을 제공했음을 지적합니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 정치 스캔들로 자민당이 대 분열을 맞았을 때, 야당과 연립하여 총리직에 잠시 오른 하타 쓰토무 씨, 오랜 정치 명문가 출신 호소카와 모리히로 씨 등이 있었는데, 이들 성씨들이 또 이 책에 고스란히 등장하기도 해서 개인적으로 묘한 느낌도 들더군요.

교토에 남아 있는 화엄종 본산인 고류지(저자는 이 고찰이, 특히 신라의 불국사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었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의 국보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등의 제작, 탄생에 모두 도래인들의 공헌이 핵심적이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자부심, 한편으로는 (어쩐지 사실 자체가 애써 가려지고 있다는 이유에서) 씁쓸한 느낌이 교차하는 대목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은 세계 학계의 주목되는 성과도 여럿 반영하여 정성스럽고도 치밀하게 저술되었는데, 그 중 한 예가 (우리 한국 독자들도 잘 아는) 故 조언 카터 코벨 박사의 파격적인 주장들입니다. 그녀는 잘 알려진 대로, 일본 문화에 고대 이후 줄곧 한반도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하게 작용했음을 여러 실증적 연구와 치밀한 논리로 입증해 보였는데, 물론 그녀의 업적은 친한 성향(?)의 연구 집적에 있는 게 물론 아니고, 여전히 미지의 안개에 싸여 있던 고대사 비밀의 자락을 거두어 낸 순수 학문적 의의가 더 큽니다. 이 책에는 2차 대전 당시 미국 수뇌부가 (비밀리에 군수 생산 역량도 떠맡았던) 교토 일대에 원폭을 투하할 작정도 했었으나, 코벨 박사의 은사인 랭던 워너 교수, 또 당시 군부에 몸 담았던 박사의 남편 등의 노력으로 이 계획이 저지되는 데 일정한 영향이 있었다는 흥미로운 증언도 실렸네요. 

다도의 역사가 다소 극성이다 싶을 만큼, 특히 아시카가 막부 집정기와 전국시대, 이후 직전신장과 풍신수길의 통치 기간을 거치며 거의 종교로까지 격상되던 사연에 대해서, 이 책은 단조로운 통시적 서술을 피하고, 각 장의 주제가 된 도기, 자기들의 항목 곳곳에서 유격전 기법처럼 적실하게 요령껏 독자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끼워넣듯 들려 주고 있습니다. 직전 권에서도 그랬습니다만, 도자기 산업과 유통, 이 중에서도 극히 드문 명기의 소장과 양도, 확보는, 본디 정치적 권력과 엄청난 부(富)가 동원된, 보이지 않는 전쟁터의 책략까지가 동반된 활동이자 극상류층들만의 문화적 고급 향락이었기에, 이 토픽을 꺼내면 역사 전반의 줄기가 따라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반부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이름은 다성(茶聖) 센노 리큐, 이와 희한한 애증의 연을 유지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두 사람의 기막힌 사연은, 가장 대중적으로는 산강장팔의 대하소설 <덕천가강> 같은 걸 읽어 봐도 비교적 소상히 짐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줄거리는 작가의 상상이 다분히 가미된 것이고, 심지어 이 책에도 일본의 다른 현대 소설가의 해석을 잠시 인용하고도 있습니다. 산강장팔의 해석은 둘 사이의 정치적 알력과 감정적 오해, 대국을 보는 시선의 차이 때문에 리큐가 장렬한 순교를 택했다고 (그 작가답게 다소 어거지로) 정리하는 쪽이나, 저자는 리큐가 자신의 정신적 지향을 오롯이 담았다 할 다기, 다완, 도자기의 본고장에다가, 자국 최고 실권자가 전쟁의 참화를 입히는 결과를 막기 위해 단호한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는 쪽으로 새깁니다. 또한 하시바 히데나가가 그 배다른(혹은 씨다른) 형에게, 국제 평화를 어지럽히지 않게 충언과 극간을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는 사연도 같이 전하는군요.

전작에서도 우리 독자들은 같은 결론과 해석에 접하고 (아마도) 거의 전폭적이라 할 지지와 공감을 보냈겠습니다만(한국인이니까요), 이 책에서도 저자는 독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 왜 우리가 놓치거나 예사로이 간과한 미의식과 정신 세계, 특유의 아름다움(모두, 우리 조상들이 발견하고 가꾸어 이 강산에서 그 시대까지 전해 온 덕목과 성취입니다)을, 일본인들만이 유독 절묘하고도 포괄적으로 파악, 수용, 예찬하며 별세계의 재창조하는 경지에까지 도달했는가?

조선에서 일개 막사발로 "구르던" 이도다완의 원형이 열도에 건너와 명품 중의 신품으로 칭송받게 되었다는 주장은, 일제 때 활동한 저명한 학자, 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처음 꺼내들다시피한 것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의 전통 다기, 혹은 그 어떤 방향성을 지닌 문화재에 대해 일체의 폄하 의도가 없어 보인다"고 하시지만, 그가 설파하고 감동적인 언사로 표현한 이도다완에 대한 찬미와 열렬한 미학적 규정은, 고려인(조선인)의 후손인 우리들이 듣기에도 부담스러울 만큼 열렬하며, 가히 종교적이라고까지 여길 만합니다. "양손으로 맞잡을 만한 크기이지만 그 안에 우주를 품을 만하고, 그러면서도 권위, 위압이 느껴지지 않아 마치 모성의 포용과 자비를 연상케 한다." 같은 평자의 코멘트는 또 어떻습니까?

책 중에서 누누이 강조되듯, 일단 명품 도자기는 재료인 흙이 탁월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조선의 다완은 출생 성분부터의 어드밴티지를 지녔다고 평가될 수도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저들 일인들이건 혹은 어느 국적의 전문가로부터건 간에 의견이 일치하는 대목으로, 장인의 집중력과 예술혼이 오롯이 투영된, 그리고 오묘한 우연과 신통한 행운이 접목하여 빚어지는 요변(窯變)의 효과가 동시에 개입하여, 불가사의한 색채와 재질(명품은 보기에 무겁고 들기에 놀랄 만큼 가벼워야 한다는군요)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 조상들의 놀라운 혜안, 손놀림, 성실성, 미의식, 바른 마음가짐이 도공들을 통해 면면히 전수된 결과이겠으며, 그 외에는 "해당 도자기를 누구누구가 소장해 왔는지" 같은, (미술품이나 문화재 일반 유통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provenance의 이슈가 있겠습니다. 이에는, 해당 다완을 오랜 기간 사용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남는 변화, 흔적도 포함되는데, 사용한 이의 다도 숙련도나 품격, 습관에 따라 다완 역시 고상하게 "늙은" 흔적이 추가된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타고나기도 정성과 예술혼의 놀라운 결합이 있어야 하지만, 진정한 명품은 그를 사용한 이의 품격에서 비롯된다고 하니, 예술품을 빛나게 하는 본질은 결국 사람의 정신과 도덕, 몸가짐, 우주와 통하는 바른 혼임이 여기에서도 드러나는 거죠.


서평 서두에서 "점입가경"이란 말을 썼습니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쓰면 쓸수록 맛이 웅숭깊어지는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며, 도래인들이 지울 수 없는 항구적인 기여를 남긴 교토의 문화(도자기 관련 포함 일체)에 저자가 각별히 끌리는 것도 그러한 이유겠지요. 또한 우리 독자들에게는, 조용준 저자님의 이 시리즈 역시 "점입가경의 감흥과 유익함"을 선사하는, 읽어가면 갈수록 새로운 눈이 트이고 정신의 각성이 깊어지는, 명품 독서의 시간, 보람, 체험을 제공했다고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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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 - 우리 미래를 가치 있게 만드는 83가지 질문, 2018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도서
피터 싱어 지음, 박세연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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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바른 삶을 살며,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더 나은 누리가 될지는 누구도 그 답을 자신있게 내어 놓기 어렵습니다. <다윈주의 좌파>, <메타 윤리>, <세계화의 윤리>, <무신 예찬>,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등의 명저로 한국에도 폭 넓은 지지층과 독자들을 지닌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도덕철학자 피터 싱어의 이 저작은, 종전의 책들보다는 한 걸음 더 독자와 대중에 친화적으로 다가간 문장, 화법, 편제를 취했다는 게 특기할 점입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편안한 말투와 진솔한 문제 제기로 이 척박한 세상에 새삼 "정의"에 대한 관심과 각성을 촉구했다면, 이 책은 그보다 더 구체적인 이슈 제기를 통해, "윤리, 도덕"이라는 거창한 논점이 사실은 우리의 흔한 일상에 매우 밀착한 주제였음을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그간 피터 싱어의 책들을 읽어 온 독자들은, 이 책에서 그가 새로 시도하는 "파격적인 눈높이 낮춤", "쉽고 간단히 끊어지는 문장", "편안한 문제 제기와 상식적으로 수긍이 가는 타당한 논리" 때문에 과연 그의 책이 맞는지 잠시 표지 앞으로 돌아가 확인을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반면 그런 편안한 형식 속에 담긴 내용은, 여전히 깊이 있고 심오하며, 보편 타당한 결론은 일상인의 상식으로도 흔쾌히 수긍되는 법임을 다시 확인하게 돕습니다.

모두 11장의 구성 속에 83가지 질문을 담았습니다. 이 83가지 질문은 어느 국가, 사회, 공동체에서건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바로 우리 한국에서도 무엇이 맞고 그른지 갑론을박이 치열히 일어나기도 했던 흥미로운 주제들입니다. 83가지 질문이 하나같이 절실한 관심, 혹은 일상사의 절박한 문제와 연관 있는 문제들인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며(뛰어난 사상가는 본디 적실하고 유효한 질문부터를 잘 뽑는 법입니다. 질문이 좋으면 절로 빼어난 대답이 나오기 마련이죠), 그 질문들을 11개의 적합한 카테고리 속에 훌륭히 배치했다는 느낌도 누구에게나 바로 들 것입니다. 우리 독자들은, 단숨에 책을 읽어나가며 윤리적, 도덕적 갈증을 채울 수도 있고, 어쩌면 한 달에 한 장(章. chapter)씩 읽어나가며 중대한 윤리 논점(전통적인 논쟁점도 있고, 현대에 들어와 비로소 대두된 것들도 있습니다)에 대해 차분히 학습, 반추하며 생각을 성숙시켜 나갈 수도 있겠습니다.

비건인이라고 해서 근래 채식주의를 선호하는 분들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육식을 끊으면 건강에도 이롭고 여러 성인병을 막으며, 불필요한 흥분, 욕구의 비등, 집착을 막을 수 있는 기질상의 평형,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게 그들의 논리인데, 개인 차도 있고 하나하나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까지는 않았으나, 자연 친화적 삶을 영위한다거나 동물 애호(어느 정도는 보편적 가치 아니겠습니까) 등의 결과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누구나 참여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이 피터 싱어 교수 같은 분은 예전부터 이 주제로 큰 관심을 모은 여러 저작을 쓰고 발표해 왔으므로, 포괄적 실천적 윤리를 주제로 삼은 이 책에서도 그 얘기를 안 꺼낼 수 없었겠습니다(단, 다른 질문 꼭지에 비해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지는 않았고요[의외?], 이런 구성상의 절제, 균형 역시 이 책에 대한 신뢰를 더 높인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결론과 근거들, 예컨대 기업형으로 사육되는 고기소들이 메탄 가스를 대거 방출하고(지구 온난화 주범), 어떤 동물성 음식재가 윤리적/비윤리적 방식으로 생산되었는지 확인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예 채식주의자로 전향하는 게 "윤리적으로" 안전한 선택일 수 있다는 겁니다. 싱어 교수뿐 아니라 많은 논자들(非비건인 포함)이 일찍부터 해 온 얘기고, 다만 그의 화법이라서 설득력과 친근감(반대로 권위)가 더하긴 합니다.

"인문의 위기"는 한국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효율지상주의를 추구하고 세계화를 앞세워 반사회적인 분업화를 밀어붙이는 추세가 대세를 타는 지금, 한가하게 인문 따위를 떠받들 수 있냐며, 심지어는 진보를 추구한다는 일부에서도 인문, 철학 "따위"를 하찮게 여기는 천박한 풍조가 일기도 합니다(과학이나 공학도 모르고, 인문/철학에 대해서도 아무 이해가 없는 개탄스러운 무지의 산물이죠). 이에 대해서도 싱어 교수는 실천적 인문과 철학의 소양이 얼마나 당사자들의 삶을 질적으로 풍요롭게 가꿔 주냐면서 통렬한 개탄, 비판과 열정적인 동참 호소를 펼칩니다. 역시 우리 독자들의 상식(상당량은 싱어 교수 자신이 전작들을 통해 가꿔 주었습니다만)에 지극히 부합하는 내용들입니다. 

벤담 등 전통적 공리주의자들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는, 오히려 이 싱어 교수의 저작들을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정확히 이해하게 되는 재미있는 역설적 체험을 겪는 독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본격 전공 필드라고 할 수 있는 이 분야를 다분히 상징적으로 표현한 "범죄자들에게 어느 정도까지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그 논의에서, 그는 자신의 체험담과 역사적 사례 몇을 들며 "자비의 본질"에 대한 치밀한 논증과 사색을 전개합니다. 다분히 이 이슈에 대한 결론은 독자를 향해 "열려" 있는 느낌입니다.

이 책에 실린 두번째 질문(순번이 앞이라는 건 그만큼 무게, 가중치가 더하다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은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는가"입니다. 이게 진리 일반을 뜻한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의 분량을 합친 볼륨과 영겁의 시간을 동원해도 답은 안 나오겠지만, 싱어 교수는 "윤리적 객관주의"에 대한 논의로 범위를 한정하고 있습니다. 윤리적 객관주의는 어쩌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며, 동시에 싱어 교수의 여러 저작이 끈기 있게 탐구해 온 도전이기도 하고, 나아가 우리 독자들이 "과연 인문, 철학, 윤리에 대한 책을 우리가 읽어 나갈 이유가 있는가?' 같은 질문을, 보다 마음 편하게 해결하게 돕는 실용적 처방이기도 합니다. 생각이 성숙하고 깊이를 확보할수록, 짧은 말 속에 더 많은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데, 모두 네 페이지 분량이지만 읽고 나서 울림이 깊고 오래 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른번째 질문은 "담뱃갑 표면에, 강력한 주의를 촉구하는 이미지(상당히 혐오스러울 수 있는)를 강제로 삽입할 수 있느냐"입니다. 이 문제는 애연가들의 반대와 (그에 못지 않게 강력한) 혐연 진영의 열렬한 지지가 한국에서도 맞부딪는 지점이기도 하죠. 싱어 교수는 최근 미국과 호주에서 내려진 두 상반된 판결을 소개하며, 표현과 영업의 자유와 공공의 보건권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이 두 권리 중 한쪽이 전적으로 부정되고 다른 쪽이 전적인 승리를 거둬야만 하는지, 아니면 어느 중간지대에서 점진적인 타협점이 모색되어야 하는지를 놓고 역시 그만의 치밀하고 자상한 의견을 전개합니다. 온화하지만 열정이 담겼고, 그만의 방향성도 분명히 드러난다는 게 특이합니다. 그의 책을 읽어 온 독자들은 다 알지만 이 저자의 개성은 "주례사 톤"을 매우 거부하는 편입니다.

"사회적 지위를 돈으로 살 수 있는가", "동성애는 비도덕적인가", "인류의 종말은 (과연) 비극인가" 등의 질문은, 보는 이에 따라 "아 이건 어차피 답이 안 나오는 문젠데 본인이 해답을 내겠다니 무슨 과대망상인가" 같은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한번 읽어 보십시오.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사람은, 문제 자체의 스케일과 난점에 매몰되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이 되어야만 한다"는 실용적 욕구에 더 충실합니다. 어떤 질문은, 제목이 부르는 기대와는 달리 화제를 급격히 좁혀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이게 그거하고 뭔 상관?" 읽다 보면, 결국 선명한 지엽적 사례가 의외로 확장성을 넓혀, 난제로만 여겨졌던 질문에 대해 의외의 착안에서 시사점을 마련해 주기도 하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질문 중에는 "투표를 잘못하면 어떻게 되는가"도 있습니다. 이런 건 한국의 교수님들과 비교해서, 투정 부리는 듯한 태도와 관점이 그리 다르지도 않구나 같은 생각도 들게 하더군요.

에이미 추아는 여러 도전적인 주장을 담은 책으로 미국 사회는 물론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킨 저자입니다(하긴 한국에서는 추아 이전에도 극성스러운 타이거 맘들이 많기는 했지만요). 우리가 예상할 수 있듯, 저자는 타이거 맘보다는 코끼리 엄마, 즉 타인과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고 공유와 연대의 가치를 자식들에게 함양하는 사려 깊은 맘들이 더 늘어나길 기대합니다. 결국 윤리 도덕의 문제도, 종교라는 가면을 쓴 독선(이 주제에 대해서는 책의 다섯번째 질문에 상세한 논의가 담겼는데, 진화생물학자 마크 하우저와 함께 쓴 아티클임이 밝혀져 있습니다)이나 이기심을 멀리하고, 화합과 연대를 기반으로 한 "인간 본성(p36)"에 눈을 떠야만 해결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던집니다. 책이 쉽고 재미있게 쓰여진 건, 이런 자신의 신념 그 실천의 일환으로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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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 종교개혁 - 루터의 고요한 개혁은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가 지성인의 거울 슈피겔 시리즈
디트마르 피이퍼 외 지음, 박지희 옮김, 박흥식 감수 / 21세기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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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감연히 저항하고 핍박 받는 이들을 위해 신명을 바쳐 투쟁한 인물의 생애는, 세월이 흘러도 그 위대함이 퇴색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올해, 그 선구자적 행적이 더욱 빛을 발하는 마르틴 루터의 한평생은, 반추를 하면 할수록 그 원대한 시야와 단호한 결단력, 진리를 향한 일관된 몸짓에 더욱 큰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이 책은 논문집입니다. 논문집이라고 하면 대뜸, 어렵다거나 고답적인 논의, 혹은 다양한 필자들 간의 상충되는 의견 개진으로 책의 맥락을 못 잡겠다거나 하는 당혹감 등이 떠오를 수 있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미있습니다. 또, 역자 서문에도 그런 말씀이 있지만 "워낙 구성이 충실하게 기획된 덕분에", 필자들의 주장이 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듯한 느낌이 확실히 옵니다. 단일 필자의 선명한 주장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재미있다"고 한 건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 독자의 선입견과는 다른 참신한 사실 규명도 있고, 유머러스한 질문에 재치 있는 답변이 조화를 이루는 대담도 있고, 루터와는 직접 관계가 없을 듯한(그러나 알고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시대 상황에 대한 흥미진진한 설명과 논증도 실려 있습니다. 읽어 보시면 알지만 결코 따분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하면 개혁을 시도하고 추진해 나간 입장에서는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만, "개혁을 당한(?)", 혹은 개혁 대상으로 지목된 쪽에서는 찜찜하거나 불쾌할 수도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책은 그런 입장까지도 (어느 정도는) 배려하며 쓰여졌습니다. 이상할 건 없습니다. 다른 건 분명히 다르다고 짚어야 하며, 분명한 갈등을 억지 춘향 격으로 서둘러 미봉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러나 신교든 구교든 본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를 향한 신앙을 고백하는 한 형제들입니다. 따라서 언젠가는 화해하고 한 지붕 아래에서 오순도순 살아야 하겠으며, 이 책에도 나오지만 "칭의 교리"의 일정 사항에 대해 앞으로는 반목하거나 대립하지 않는다는 공동선언이, 1990년대 후반 로마 가톨릭과 루터 교단 사이에서 이뤄졌습니다. 이런 화해와 포용은 지난시절 양 진영이 얼마나 치열히 싸우고 증오했는지를 돌아보면 실로 역사적이라 할 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너무 성대히 기념하면, 구교 측에서 불편히 여길만도 하겠으며 화해 분위기 조성은 더욱 멀어지는 것 아닌가요?" 슈피겔(한국에도 잘 알려진 권위 있는 시사주간지이자 출판 기업이기도 하죠) 측의 다분히 짖궂은 이 질문에 대해,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의연하고 성숙한 태도로 답변합니다. 구교 측 역시 지난 과거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있어야 마땅하며, 1517년의 그 사건 역시 구교에서 겸허한 태도로 현장의 문제 제기를 수용했다면 그처럼이나 큰 파장으로 번지지 않았으리라는 의견도 이 책에 나옵니다. 이전에도 구교는 큰 도전과 분열에 직면했으나, 고비를 수 차례 (현명하게) 넘긴 적이 있었고, 이때에는 그렇지를 못했다는 뜻입니다.

신교 신학자들은 구교에 대해 감탄하는 의견도 간간히 개진합니다. 종교 개혁으로부터 무려 500년이 지났지만, 그래서 신교 측으로부터 맹렬한 공격도 받고 위신도 크게 추락했지만, 아직도 단일 교단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놀랍냐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그런 점도 있습니다. 문제가 있으니까 "개혁"이 일어났던 거고, 그로부터 50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단일 실체를 유지한다면 오히려 승자는 구교 측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뭐 전혀 근거 없다고는 못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견이 신교 측에서 나온다면, 그건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참으로 관대하고 열린 시각과 마음을 가져서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서도 누누이 강조되지만, 신앙이라는 게 특정, 소수, 지도층 인사(사제 계급)의 의견에 철저히 구애되기보다, 각 개인의 사정과 생각과 입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신에게 접근하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신구교 중 누가 옳으냐를 가리기보다 외연을 확장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게, 훨씬 더 절대자의 의도와 의지에 부합하는 선택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며, 이런 의미에서도 종교개혁은 획일과 맹신을 거부하며 보다 계몽된 방법으로, 이성(이 역시 신의 선물이자 도구라는 언급이 이 책에 여러 번 나옵니다)에 부합하는 신앙의 가능성을 열어 준 뜻깊은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1517 종교개혁의 챔피언은 물론 마르틴 루터입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영웅일 뿐 아니라, 로마에 자리한 교황청의 과도한 수탈과 독선, 부패, 착취로부터 독일 민중을 옹호한 게르만의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이것 관련 이 책에서는 참으로 재미있는 지적이 나오는데요. 스페인이나 다른 기독교 국가로부터 교황청이 거둬 들였던 재물의 양이, 독일의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라에서 저항이나 개혁 움직임이 일지 않고, 독일에서 들불처럼 이 거대한 행진이 벌어진 건 무슨 이유겠냐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제 생각에는 책이 어느 정도 완결된 해답을 마련해 주는 듯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논문집이긴 하나 구성이 워낙 치밀하여..." 가 바로 그 비결입니다. 잘된 구성과 기획은, 예상 가능한 질문에 대해 어떤 큰 그림의 퍼즐 맞추기를 이미 예비하는 것입니다.

"독일이 가장 가혹한 수탈의 장이었기에 종교개혁의 진원이 되었다"가 일종의 "신화"이듯, 대문에 못을 꽝꽝꽝 망치로 박으며 그 유명한 95개조를 공개한 루터의 제스처도 사실은 가공되었다는 게 많은 학자들의 지적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런 선언문을 게시할 때는 아교로 붙이는 게 당시의 더 일반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이죠. 아교로 붙이는 장면이라니 상상해 보면 왠지 드라마틱한 맛이 떨어지기도 하고, 더중요한 건 루터 개인의 회고로는 그때 상황의 기억이 구체적이지도 않다는 겁니다. 그런 문제 제기는 독일의 대학에서 드물게 벌어지지도 않았으며, 루터는 흔히 목격되던 "대자보 붙이기"가 (자신이 주도한 행위라고 해서) 그리 뚜렷이 기억에 남지도 않았으리라는 거죠(본인이 직접 했을지도 의문이고). 이 점에서도, 어리석은 당시 교황청의 대응이 공연히 위기를 자초한 면이 크다는 겁니다.

이 외에도 학자들은 흥미로운 역사상의 if 놀이를 여럿 펼칩니다. 예를 들어, 만약 클레멘스 교황이 황제로 다른 후보(예컨대 루터를 일생 동안 보호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밀었으면 과연 종교 개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하는 논의도 있습니다. 이 시기는 카를 황제와 프랑수아 국왕, 오스만의 술탄 슐레이만 등이 각기 빼어난 수완으로 유럽과 지중해 정세를 좌우할 시절인데, 이들 사이에서 형성된 묘한 파워게임의 균형이 종교개혁의 경로를 좌우한 면도 크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 저들 영명한 군주들의 정치 놀음은 다 잊혀지고, 기개 높은 전직 수도사의 영웅적인 투쟁만 역사에 뚜렷이 각인되었지만 말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던 도중 사탄과 결전을 벌이다 잉크병을 던져 그를 일시 퇴치한 이야기도, 그를 존경하고 숭모하는 이들 사이에서 전해 오는 아주 유명한 "전설"이죠. 이에 대해 그 방의 벽에 남은 자국은 잉크 성분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어서 흥미를 돋웁니다. 물론 루터 자신은 "사탄과의 결전"을 직접 언급한 적 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그런 위대한 영혼은 삶의 매 순간이 악마와의 투쟁이겠으며, 그런 순수한 정신이어야만 "구원은 선행이 아니라 오로지 믿음에서 연원한다" 같은 선포, 고백, 확신을 행하고 지닐 수 있는 거죠.

마르틴 루터에 대해 필자들이 내리는 결론 중 가장 뜻깊은 것은, "그는 언제나 같은 시대 같은 공동체에 사는 이들이 타협하고 화해하며 공동선을 모색해 나가게 하려는 쪽이었지, 과격한 변혁과 독선으로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기조가 전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신중한 스탠스였으며, 일부 급진적인 농민세력이나 (영주 때문에 기득권을 억눌린) 기사 계급의 봉기를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재미있는 건, 언제나 암살 등 신변에의 위협을 느껴 오던 그가, 융커라는 가명을 고르고 (성직자나 학자가 아닌) 기사인 양 위장 신분과 외양으로 지낼 때, "기사답지 않은 행동과 처신"으로 여러 번 정체가 들통날 뻔도 했으며, 이때마다 영주가 지정해 준 관리인이 조언과 무마책을 코칭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개혁의 본뜻은 "원형으로의 복원, 회귀"라고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정신으로 복귀하여, 더렵혀지거나 왜곡된 것, 진리 아닌 것을 모두 걷어내려는 움직임이죠. Rückformung이라고도 독일어로 표현하는데, Reformation 역시 정관사 die가 붙은 독일어입니다. 500주년을 맞아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얼마나 초기 기독교의 정신을 회복했으며 얼마나 루터의 위대한 초심을 잃지 않았는지 깊이 성찰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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