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앙 평전 - 삼균사상가
김삼웅 지음 / 채륜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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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조소앙 선생은 책 첫머리에 나오듯 본명이 "용은"입니다. 김삼웅 저자께서는 "아호가 본명보다 더 유명한 경우"라고 규정하는데, 이런 경우가 한국에서 아주 흔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대체로는 독립 운동가들의 경우, 한 번의 의거로서 이름을 떨친 분들을 제외하면 "아호와 본명이 함께 유명한"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안창호 선생, 김구 주석 등에 대해 그 호를 함께 기억합니다. 오히려 "도산 안창호" 등으로 자주 부르지 이름만 거론하는 적이 더 드뭅니다. 심지어 독립 운동과는 매우 거리가 먼 어느 작가에 대해서도 "춘원 이광수"로 호칭하는 게 더 잦을 정도죠.

"조소앙"을 본명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도, 그 함자 앞에다 "삼균주의"를 마치 대명사나 수식어처럼 붙일 만큼, 그의 독창적인 이념은 유명합니다. 만약 "삼균주의"를 모르는 이가 있다면, 아마 "조소앙"에 대해서도 모를 가능성이 더 큽니다. 대개 김삼웅 작가님의 전작 평전들은 이처럼 인물 이름 앞에 아호를 붙인 제목으로들 나왔는데, 이 책만큼은 "소앙 조용은 평전"이란 문구가 어색했는지 보다시피 이런 제목입니다.

조소앙 선생의 일생과 그 의의를 새기자면 필수적인 전 단계라 할 것이, 대체 삼균주의가 무엇이며 그의 현대적 해석과 자리매김은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삼균주의가 오늘날에 와서 다시 재조명 받는 이유는, 남북이 서로 비생산적이고 파멸적인 대치를 이루는 지금, 양쪽 모두에서 큰 거부감 없이 수용하고, 상당한 공감을 형성할 만한 이념적 중간지대를 모색할 만한 사상이랄까 이데올로기가, 이 이른 시기에 조 선생이 마련해 놓은 것만큼 성숙하고 큰 체계를 지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소앙 선생은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바와 달리, 38선 이남, 오늘날의 경기 파주(당시 지명 교하라고 책에 나옵니다. 물론 이 지명은 오늘날에도 행정 구획만 달리해서 살아 있습니다)에서 탄생했습니다. 김구와 이승만보다는 십여 년 아래 세대이며, 몽양 여운형 등과 비슷한 또래입니다. 독립 운동가들이 대개 출신 성분이 다양한데 경기 일대에서 부농 출신으로 생계에 큰 곤란이 없었으며 조부모로부터 정통 한학을 교육받았다는 내용 말고는 그의 가계에 대해 자세한 바가 밝혀지지 않은 듯합니다. 그가 중요 인물로 부상하게 된 건 대한 제국 체제 하에서 영재 소년들을 선발하는 과정에 그가 두각을 나타내어 어린 나이에 황실(고종 칭제 이후) 후원을 받아 엘리트 교육을 이수했으며, 이후 일본 명치 대학에 입학하여 서양식 현대 문명에 눈을 뜨게 되고부터입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전통 한학과 근대 문물에 대한 이해"에 고루 밝은, 균형 잡힌 지성을 갖춘 보기 드문 인재로서 그를 높이 평가합니다. 제가 파악하기로는 김삼웅 저자가 특히 소앙의 행적과 사상에 후한 점수를 주는 까닭이, 1) 중상층 부농 출신으로서 자신의 영달과 출세에 집착하기보다,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민족의 앞날이 밝게 창달될 길이 무엇인지에 천착하고, 이를 실천할 방안을 연구한 점 2) 사상적으로는 오늘날의 시선으로도 급진 좌파에 가까운 혁신 노선이었다는 점 3) 방략가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 막연한 주의주장이 아닌 구체적 수치를 거론하며 방법론을 구상한 경세가였다는 점(대원칙뿐 아닌 디테일을 제시한 정책 전문가였다는 점) 등입니다.

2)와 관련해서는 특히 독자로서 제가 재미있게 본 게,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을 두고 소앙은 "광주 혁명"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광주 혁명"이라고 해서 "웬 5.18 예언?"이란 생각도 잠시 스쳐갔는데, 그건 물론 아니고 당시 민중들이 일제의 폭압적 처사에 들고 일어난 의의를 그 정도로 높이 평가한 소이겠죠. "학생"을 굳이 뺀 이유는 소앙 본인부터가 학생 시절부터 열혈 혁명 분자로 활동해 온 동질감이 있기에, 어린 학생들이 구태여 "학생"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물론 "그 학생"들보다야 자신이 3. 40년 가까이 선배지만, 영원한 학생으로서의 정체감이 그의 내면에 자리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책을 좀 넘겨 가며 김이 약간 빠지는 게, 이분은 심지어 이하응의 집권마저 "혁명"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입니다. 이하응의 혁신 조치가, 종래의 구체제(심지어 자기 기득권마저 못 지킬 만큼 낙후하고 부패했던) 폐단을 일소한 면이 있긴 하나 오늘날의 어느 학자도 그의 집정을 "혁명"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 용어가 그리 엄정한 기준에 따라 쓰이지는 않았구나 하는 다소의 실망이랄지. 이후 김옥균 등의 갑신정변도 그는 "귀족, 벌열 출신에 의한 혁명"으로 주저없이 명명합니다. 오히려 3. 1운동은 그의 시각에서 "실패"로 보였는지 혁명 범주에서 제외됩니다.

3. 1운동 실패의 원인을 그는 "평화적 수단"에서 찾을 만큼, 그의 성향이나 사상이 온건하다거나 절충, 유화적이라곤 도저히 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는 이런 말도 합니다. "젊은이들이여, 오늘날 가장 유망하고 장래가 안정적일 직업은 바로 혁명가로서의 삶이다." 어느 혁명 노선에 가담하든, 혁명 자체를 어떤 관점에서 보든, 혁명가만큼 극도로 불안정한 삶이 없음은 자명할 텐데 정말 역설적인 표현이며, 이 한 마디가 그의 성품과 지향성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그는 상당한 반대 의사 표명,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하긴 확고한 반공 노선을 걸었던 백범 밑에서(국무령 시절) 외무부장을 지낸 분이기도 하니요.

책은 장덕수 암살 등 해방공간에서 그의 활동은 아주 자세히는 다루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야당 성향으로 유명한 성북구에서 소앙은 전국 최다 득표를 기록하며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그 이전 한독당과 결별하면서도 백범과는 연계를 유지하며, 백범과는 차별되는 노선으로 단정을 지지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한독당 분당이 어느 정도는 백범의 묵인 하에 이뤄졌으리라는 추측을 내어놓습니다. 하긴 이후 백범의 방북 행렬에 그도 김규식 등과 함께 수행했으니 말입니다. 단 책에서는 이 부분(남북 협상)에 대해 역시 그리 소상히는 저술하지 않습니다.

보통 백범의 사망 당시 "서거"라든가 심지어 "시역'이라는 말을 쓰는 이들도 있었는데, 소앙은 진술에서 담담히 "김구의 피살"이란 표현에 그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성명서와 저술 속에서 "...향후로는 명망가 중심의 결사체가 아니라, 이념과 노선 중심으로 정당이 만들어지고 활동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같은, 시대를 근 반 세기는 앞서간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적은 대로 그는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2대(代)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는데, 저자의 분석에 의하면 새로 원 구성이 될 때 국회의장 피선이 유력했다고 합니다. 이러던 게 느닷 6. 25가 터지고, 그는 납북 인사 대열에 끼고 만 불운을 맞이했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죠. 책에서는 최신 연구 결과로 러시아측 보고서를 인용하며 "김일성의 노선에 협조 않던 그가 자살을 선택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계획 경제를 통해 머리와 꼬리가 함께 번영해야 국가가 일어설 수 있음"을 일관되게 주장한 그의 노력 덕에, 사실 우리 현행 헌법도 제헌 당시부터 사회적 시장경제 이념을 지향한다 봐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그의 지조와 소신 때문에 김일성이도 끝내 그를 포섭, 회유하는 데 실패했던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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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결혼했을까 - 결혼을 인생의 무덤으로 만들지 않기 위한 애착의 심리학
오카다 다카시 지음, 유미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세상에 쉬운 건 하나도 없습니다. 학생 시절 공부할 때는 공부가 가장 어렵습니다("공부가 가장 쉽다"고 하는 분은 특별한 분이겠고요). 사회로 나와 조직에 몸 담고 일할 때는 일하는 게 가장 어렵습니다. 공부를 수월하게 한 사람도 반드시 직장 생활 성공적으로 해 나간다는 보장 없습니다. 공부하는 머리와 일하는 머리가 다르기 때문이죠. 여기 대해서는 학창 시절 공부깨나 한 사람이건 아니건, 직장에서만 유독 고전하는 사람이건 반대로 비로소 늦게 제 물 만난 사람이건, 다 동의합니다. 여태 개인적으로 만난 이들 모두가 다 그러더군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제3의 과제랄까, 만만치 않은 영역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가정 생활, 부부 생활"이라고나 해야겠는데요. 참고로 저는 아직 미혼입니다만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안정을 찾는 데 도움을 주며, 밖에서 모질게 시달린 마음을 달래고 치유하는 곳은 가정이 아닐까?" 물론 이 질문에 대해선 여전히, 쾌히 긍정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다행스럽게도요). 저도 그런 줄로만 알았고, 나 역시 그런 장래를 갖겠거니 낙관했더랬습니다. 헌데 이 책을 읽어 보니(이런 책은 특히나 대강 볼 수가 없더군요), 저자분이 그간 상담하고 겪은 21가지 사례(아마도 몇몇은 둘 이상의 사례가 융합되기도 했을 겁니다)들은, 뭐랄까 TV 드라마 <사랑과 전쟁>에서나 볼 법한, 각각 희한한 방식으로 불행한 부부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드라마와 차이가 있다면, 저자께서는 "왜 그들이 불행할 수밖에 없는지, 대체 성장 과정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를, 심리학 이론을 동원하여 쉽고도 적실한 분석을 행한다는 데에 있습니다(드라마는 남의 불행을 보고 즐기고 안도하는 거지 교훈, 발전을 못 챙기죠).



대체로 집안이 가난하다거나 하면 화목을 못 찾고 내내 표류하기가 쉽습니다(아, 물론 안 그런 훌륭한 분들도 많으시죠. 혹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부부의 직업도 번듯하고 외견상 아무 문제 없는 환경에서 자란 분들이, 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탄지경인 결혼 생활을 마지못해 이어가는 딱한 경우가, 이 책에 소개된 대로 이처럼이나 많다는 게 현대인들에게는 충격입니다. 이건 남들의 사례를 봐도 충격인데, 이렇게 말하면 "너의 일이 아니고 남 일인데 니가 충격 받을 게 뭐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 답은 책을 읽은 이들이라면 주저없이 나올 겁니다. "나도 혹시 결혼하면 이렇게 되는 것 아닐까?" 혹은, "문제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 우리 부부도 저런 결과로 치닫는 중 아닐까?" 좋지 못한 남 일이 얼마든지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각성이 올 때, 누구라도 충격을 받는 게 당연하죠.

저자는 이런 위기의 부부들을 분석하며, 우선 애착 유형을 두 가지로 분류하며 논의를 시작합니다. 아마 이 용어(좀 뒤에 나올 개념들도 그렇고)는 요즘 자계서(꼭 부부 관계 주제가 아니라도)에 많이들 나오기 때문에 귀에들 익을 겁니다. 가장 바람직한 게 성장과정에서 무난하게 애저을 받고, 받은 만큼 남에게 베풀 줄도 아는 "안정형 애착 유형"입니다. 옥시토신이 생애 전 구간에 걸쳐 내내 고르게 분비되는 게 그 본체적 특성이죠.



문제는 바로 불안정형 애착 유형입니다. 여기서 용어를 좀 유의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요. 이 유형이 둘로 갈립니다. ①회피형, ②불안형. 후자는 그 상위개념인 "불안정형"과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물을 수 있는데요. 다릅니다. 확실히요. ②는 말 그대로 자신의 감정과 위상과 미래와 관계에 대해 불안해서 못 견디는 유형입니다. 그래서 쉴새없이 남들에게 들이대고 안기도 애정과 인정을 받아내려 몸부림칩니다. 반면 ①은 겉보기에 쿨해서 절대 남에게 폐 안끼칩니다. 그럼 ①은 무슨 문제인가? 자신이 진짜 책임을 지고 진득하니 보살펴야 하는 관계에까지 무책임하고 소홀하다는 겁니다. ②와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결국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파탄에 이른다는 거죠. 그래서 ①과 ②는 서로 반대, 모순처럼 보여도 그 상위개념인 "불안정형 애착 유형"에 다 포함되는 겁니다. 결귀결점이 같으니까요.



이 책의 사례들 중 대체로는 고생하는 쪽이 아내들입니다. 남편들은 분명 자신이 문제가 있는데도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왜 내 아내는 저렇게 반응, 행동하냐며 책임을 다 씌우려 드는 게 보통이더군요. 한국 같으면 어떨까요? 뭐 아직도 전근대적이고 무책임하며 강압적인 남편, 아버지들이 많긴 합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이 책에 나온 사례들처럼 여성들이 일방적으로 고생하는 구조는 아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이 책도, 성장과정에서 문제가 있거나 해서 여성들이 남편들을 지옥으로 몰고가는 경우도 보입니다. 다만 그런 경우, 여성들은 일단 자신을 한번 반성하는 기제를 갖긴 합니다. "내가 뭘 잘못해서가 아닐까?"

저자는 위의 분석틀, 즉 애착유형에 따른 분류와 그 하위 범주 회피형/불안형의 기준을 사례 하나하나에 철저히 적용합니다. 저자는 이런 저술 태도라야 독자가 신뢰를 할 수 있는데, 서투른 이들은 앞에서 잔뜩 늘어놓은 총론이나 전제가, 뒤의 각론에서 전혀 안 먹히거나 흐지부지, 혹은 전혀 다른 소리를 늘어놓기도 합니다. 그런 책은 그냥 잡담에 지나지 않죠. 반면 이 책은 저자가 최초에 내세운 대전제와 이론에 끝까지 충실합니다. 이러니 책을 다 읽고 나도 내용이 오래 기억에 남고, 동시에 저자의 논지에 설득이 되는 겁니다.

요즘은 정기적으로 건강 진단을 대부분 받습니다. 혹 초기 단계의 종양이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무작정 무시하고 지금껏 살던 패턴을 계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저 비탄에 빠져 의욕을 상실한 채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할까요? 제 생각엔 이 역시 ①회피형, ②불안형 두 범주에 넣어 분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저 두 반응 중 어떤 것도 옳지 않으며 말할 수 없이 어리석은 대처임을 잘 압니다. 헌데 정작 자신의 부부생활(혹은 연인관계라든가)에는 이를 적용시키지 않으려 합니다.



이 책을 읽고 속으로 엄청 뜨끔해하는 독자들이 많을 겁니다. ②에서 자신과 공통점을 많이 발견한 분들은, 이거 큰일났다며 종전보다 더 배우자나 연인을 들볶고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 문제없는(사실은 그저 "안정적 애착 유형"인) 분들도, 해당되는 부분이 많다며 지레 걱정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허나 사람인 이상, 이런 극단적인 사례자와 조금이라도 겹치는 부분이 없을 수는 없죠. 너무 걱정하지 말고, 경계심을 갖고, 자신이 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한 후, 약점을 고쳐 나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나는 전혀 해당 사항 없어!" 이렇게 장담하는 분들은 오히려 ①에 된통으로 적용되는지도 모릅니다(아니라면 그건 이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입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고 고쳐나가는 게 인간이고, 또 바람직한 남편이고 아내입니다. 방심하다가 이 책 21유형 중 하나에 빠질 수 있음을 명심하고, 배우자에게 속을 트고 약점을 인정하며 아껴 주고 사는 게 우리들 유한한 인생의 가장 소중하고 빛나는 보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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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 하루 일과로 보는 100만 년 시간 여행
그레그 제너 지음, 서정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알렉산더 대왕, 칭기즈칸, 나폴레옹 등이 언제 어디서 대단한 위업을 쌓고 유방백세의 이름을 남겼는지는 우리들 모두가 학교에서 사회, 역사 시간에 열심히 배워 왔더랬습니다. 위대한 선인들이 남긴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그 후손들인 우리가 풍족하고 편리한 생활을 누리는 데 큰 기여를 하는 중이니, 학창 시절 골머리를 싸매며 배운 노고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헌데 위인들의 거창한 위업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들 평범한 소시민들이 매번 일상에서 접하는 지극히 평범한 하루 24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사업상의 약속을 정확히 지키거나 연인과 함께 달콤한 추억을 만드는 일, 혹은 지친 몸의 활력을 목욕, 샤워를 통해 회복하는 일, 배고플 때 단돈 얼마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편익 등이, 정확히 언제부터 가능했고 "일상"이 되다시피했는지 역시 중요한 의의를 갖습니다. 하지만 이 소소하고도 고마운 혜택이 누구 덕분에 처음 가능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사회 제도의 일부로 자리잡았는지는 교과서에서 배운 바도 없고, 어디 가서 알아봐야 하는지조차 우리가 모릅니다. 위인들의 업적에 기대는 건 우리 인생의 지극히 중요한 몇몇 순간뿐이지만, 의식주의 편리를 누리고 용변의 생리를 해결하는 건 매일매일 우리가 입은 혜택인데도 말입니다. 양쪽을 놓고 무게를 가늠하면 과연 저울 추가 어디로 기울지, 아무도 장담 못 합니다. 일상의 소소한 편의를 모조리 거부하고 살기란, 당장, 지금부터,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죠.



소소한 일상의 자그마한 편리함이 언제부터 가능했는지를 아는 건, 그저 호기심 해소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게 결코 당연하지 않았으며, 이처럼이나 많은 이들(그 중 상당수는 우리가 이름도 모릅니다)의 지혜와 공헌이 쌓이고 쌓여 비로소 가능했음을 아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마음이 숙연해지고 일상의 고마움에 대해 절감하게 됩니다. 소소한 일상의 고마움과 (알고보니) 매우 깊은 저 먼 연원을 깨닫게 되면, 위생과 기초 생존 욕구의 원활한 해결(남는 에너지로 다른 고차원적인 작업과 상념에 몰두할 수 있습니다)이 우리 생을 몇 배로 행복하게 해 줌을 알고, 나 자신의 마음부터를 평안히 다스릴 수 있습니다. 불과 몇십 년 전, 혹은 한 세기 전만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사람 사는 게 짐승이나 다름없었을 생각하면 아찔해지죠.

책은 여태 몸을 숨긴 채 눈에 띄지 않았던 정말로 소소한 일상의 역사를 자세히 다룹니다, 위인의 행적과 굵직굵직한 정치사는 권위 있는 문헌이 공인 과정을 거쳐 출간되었기에(역사가 최초 기록된 시점부터 이미), 정확한 분석과 탐구가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허나 소소한 생활사는 파편적으로 흩어진 기록을 일일이 조사, 취합해야 하고, 기록자들이 농담, 여담처럼 남긴 흔적에서도 단서를 얻어야 하므로 너무도 어려운 과제일 수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과업을 수행하면서도, 그 결과물은 재미있는 농담처럼 들려 주는 저자의 내공과 박학다식함에 독자로서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오늘날처럼 12시간 60분 12개월 단위법으로 정착하여 널리 쓰이게 된 건 어떤 절대적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특히 재미있는 건 프랑스 혁명 이후 지도층이 그저 정치적 세력 교체만을 이룬 게 아니라, 전근대성을 몰아내고 근대성, 합리주의 사상을 국가 지도 이념으로 정착시키려 든 노력이 자세히 소개되었다는 점입니다. 앙시엥 레짐의 진정한 붕괴는 비합리적인 제도의 전복과 대체에서 비롯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미터법 등 표준단위의 계산, 측정이 10진법에 기인하기에, 12월 체제인 역법도 10개월 단위로 바꾸는 등의 개혁을 시도한 건, 사회와 민중의 호응을 전혀 얻지 못했기에 실패했음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이 정보를 전하는 톤과 분위기가 대단히 유머러스하기에, 인간의 관습과 제도가 절대적인 듯 보여도 실제로는 사소한 우연들이 겹치듯 끼어든 결과인 점, 우리는 허탈하게 절감합니다. 저자는 그저 우리에게 쉽게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이런 캐주얼한 화법을 쓰는 게 아니라, 세상의 거대한 이치 배후에 어떤 필연성이 도도히 흐르는 것만은 아님을 소탈한 말투 속에서도 전달하는 거죠.



독자들은 특히, 일광절약 시간제라 부르는 서머타임 제도가 어떤 과정을 거쳐 미국과 서유럽에 정착했는지, 저자의 너무나도 재미난 설명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책 전체를 통틀어 저는 이 대목이 가장 신나게 읽힌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국도 1988 서울 올림픽 전후로 이 시스템이 도입되었다가 현재는 거의 언급도 안 되는데, NBC사와의 방송 중계권 협상 과정에서 그리 되었다는 재미있는(좀 창피한) 일화가 있죠. 저자 그레그 제너 님께 이 사실을 알려주면 아마 귀를 쫑긋 세우고 들을 것 같습니다.

인류는 체내에서 동화 이화 작용을 반복하며 생명을 유지하는 개체이기에, 이 부분 한정해서 여타의 하등 동물과 운명이 다를 바 없습니다. 문제는 정착하여 군집 시스템을 일구고 사는 처지이기에, 적 아닌 동료 거주자들의 "배설물"을 어떻게 처리할 지의 문제가 실로 난감하다는 거죠(아니, 자기 자신의 것이라도요). 감정적인 불쾌감도 불쾌감이지만, 위생상의 문제가 더욱 절실합니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부친 스트라보 장군도 이 문제 때문에 전황을 크게 그르칠 뻔했다는 역사가 전할 정도이니 배설 이슈는 더 이상 "소소"하지도 않은 셈입니다. 여기 대해서는 많은 대중서들이 이미 재미있는 정보로 독자들과 만난 바 있지만, 제가 여태 읽은 중에서는 이 그레그 제너의 책이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포괄적이었습니다. 조선에서도 시비법이 고안된 후 수확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지만, 유럽 역시 강물을 더럽히는 수세식이 아닌 저장식으로 농사에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때 더 우세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6.25 당시 파병되고 이후에도 주둔한 미군들이, 논밭에 배설물을 비료로 주는 우리 농촌의 관행을 보고 몸서리를 쳤다는데, 이 책을 읽으면 그들 역시 소위 "문명"의 관점, 기준이 바뀐 지 그리 오래지 않다는 점을 알고 부끄러워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속옷 파트 역시 독자가 한번 펼쳐들면 끝까지 읽어내야 직성이 풀릴 만큼 재미있습니다. 원더브라가 이미 고대에도 그 원형이 존재했다는데, 속옷(특히 기능성)의 착용이야말로 우아한 현대인의 표징이라 알아 온 우리들로서는 맥이 빠지기까지 합니다. 한편으로,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문자 기호의 아득한 원형이 존재했으며, 표음 문자가 진일보한 수단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오히려 현대에 들어 픽토그램이 다시 널리 쓰인다거나, 메신저 등에서 애용하는 이모티콘, 스티커 등의 인기는 우리에게 사물과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음을 깨우칩니다. 한자(漢字)만 해도 전산화 시대에 대체 어떻게 활용하겠냐며 중국을 두고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본 게 몇십 년 전인데, 지금은 다양한 입력 방식을 지원하는 앱의 개발로 중국인들도 무리 없이 의사소통을 합니다. 당연한 상식이 반드시 절대적 타당성을 갖고 받아들여져야 할 이유는 없음을 저자는 여러 고찰을 통해 깨우칩니다.

미국 대중 문화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저자의 상큼하고 기발한 비유가 매우 재밌게 와 닿을 것입니다(정작 저자는 영국 분인데). 표준 시간제 도입을 설명하며 저자는 "돌리 파튼의 나인 투 파이브가 혹여 '밤9시부터 새벽 5시'로 이해될 뻔했다"며, 대중들의 생활 습관에 맞지 않는 무리한 기준의 도입이 얼마나 우스운 결과를 낳을 뻔했는지 실감시켜 줍니다. 그런가 하면 만약 에디슨이 "헬로"라는 통화상의 표준 인삿말을 "어호이(ahoy)" 등으로 고안했다면, 라이오넬 리치의 대 히트곡 "헬로"도 "어호이"가 그 제목, 가사 후크가 되었겠다며 독자의 웃음을 유도합니다. 이뿐 아니라 브래지어(혹은 비키니 탑)의 유래를 설명하는 중, <공룡 백만년>의 여우주연 라켈 웰치(이 포스터가 너무 유명해서 사회학 서적에도 도판으로 실릴 정도죠)가 "원시인 브라"를 입는 모습은 결코 영화 속에서의 과장이 아니었음을 증명하여 독자를 놀라게 합니다(아마 반 세기 전 영화 제작자들도 몰랐을 듯요).



번역도 참 깔끔한데요. 마치 한국 저자가 처음부터 한국어로 책을 쓴 것처럼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역주(본문 중 삽입)도 많이 달려 있어서 저자가 어떤 대목에서 위트, 말장난(pun)을 시도했는지 우리는 놓치지 않고 웃으며 감탄할 수 있는데, 이런 대중서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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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레퀴엠 버티고 시리즈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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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만큼, 생전 자기 직분에 성실했던 이의 장례식. 애도하는 조문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동료들의 죄책감은 한결 덜어집니다. 운집하여 고인의 넋을 기리는 이들이 도열한 모습을 두고 어떤 이는 "보기 좋았다"고까지 말하네요. 물론 그 짧은 코멘트 속엔 무수히 많은 감회와 상념과 결의가 교차할 것입니다.

이 소설 속엔 장례식 장면이 두어 번 나옵니다. 하나는 연쇄 살인범의 소행인지, 아니면 암살자의 짓인지 모를, 여튼 무고한 희생자임에는 틀림없는 어느 이혼녀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죽은 여성은 이 소설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조 파이크의 전 여자친구이자, LA 시정 전체를 좌우하는 거물 사업가(틴에이저 시절 갱단 멤버였다가 또띠야 체인점으로 떼돈을 벌고 시의원 몇을 수중에 넣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린 시절 같은 갱단 소속이었던 민완 변호사를 친구로 둔, 라틴 아메리카 혈통의 미국 시민권자) 프랭크 가르시아의 딸이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매우 유능하고 정의감 넘치는 어떤 수사관의 죽음 때문이었는데 위 첫 문단의 서술은 사실 그녀의 안타까운 최후에 더 초점을 둔 것이었습니다.

소설은 안타까운 죽음 여럿, 수수께끼에 싸인 죽음 몇, 그리고 최후의 결전에서 죽을 줄 알았던 어떤 이의 기사회생(이분은 꼬마 시절부터 해서 진짜 죽을 고비를 여러 번도 맞이하더군요), 개인적 증오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인 자의 죽을 뻔한 소동 등 "죽음" 근방에서 맴도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인간쓰레기이건 정신이상자건 거짓말쟁이이건 관심 중독자건 모두에게는 그 나름의 레퀴엠이 필요할 것입니다. 로렌스 블록의 장편 <800만 가지 죽는 법>이 대서양에 면한 뉴욕을 배경으로 삼은, 스릴러의 외관을 쓴 대서사시였다면 이 작품은 그 정반대방향 태평양에 면한 (제목 그대로) LA를 무대로 한 살육과 증오와 설육과 사랑을 테마로 삼은 폭풍 같은 에픽입니다.

이 소설은 기묘한 방향으로 엇나간 몇 편의 사랑을 숨겨 놓듯 깔아 놓은 작가의 선택 때문에 읽고 난 감상이 더 아련해지는 듯합니다. 우선 피도 눈물도 없는 목석 같은 사내이며, 언제 어디서 연쇄살인마로 돌변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조 파이크는, 이런 사람이 과연 어느 여성에게 연정을 품을 수 있을지(혹은, 어떤 여자가 저런 사내를 사랑할 수 있을지) 누가 봐도 고개가 갸웃해질 겁니다. 그런데 심성이 진국이고 약자를 돌볼 줄 알며 제 신상에 위해가 갈망정 인간된 도의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진짜 남자"는, 정말 괜찮은 여성들이 먼저 알아보나 봅니다. 그 증거로 카렌 가르시아 같은, 진짜 심성도 외모도 멋진 여성이 그를 선택했습니다. 최악의 환경에서 성장했을망정 자신의 인격을 보석 같이 가꿀 줄 안 파이크 역시, 카렌 같은 멋진 여성에게 마음을 안 줄 리 없고 세상사 쓴맛 단맛 다 본 대 사업가 프랭크 역시 "이 친구 괜찮네" 하며 자기 딸을 주려 합니다. 딸과 잘 안 된 후에도 조 파이크를 곁에 두며 "친구"로 연을 이어가려는 게 조금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진짜 안타까운 건, 조와 카렌 두 사람이 서로 순도 높은 사랑을 하며, 조의 선배인 (역시 조처럼 정의감에 불타고 진실된 성격이지만 안타깝게도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워즈니악 역시 그 부인 폴렛과 금슬이 좋지만, 못된 운명의 장난은 조와 폴렛 두 사람을 서로 엮어 버립니다. 어쩌겠습니까. 조는 폴렛을 보는 순간 (그 차디찬 강철 같은 심성의 사내가) 태어난 이래 처음 겪는 감정의 격동을 체험했고, 폴렛 역시 주변의 지구가 정지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소설 후반부에 다 드러나지만, "플라토닉 러브"란 이들의 관계를 두고 이르는 말이라 할 만큼, 조 파이크는 "모텔에서의 그 사고" 이후 철저한 거리를 폴렛으로부터 유지해 왔습니다. "십 년도 지났는데, 그새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아요." 이 한 마디 속에 천 가닥의 사연과 번뇌와 위대한 절제가 들어 있습니다. 조 파이크란 인간 병기의 개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절제"입니다. 마지막의 "그놈"도 그의 절제를 깨뜨리려 이 모든 추악한 살인극을 벌였고, "그놈"보다 더 추하고 한심한, 비열한 낙오자 역시 그의 평정심을 깨뜨리기 위해 자해에 가까운 미친 소동을 벌입니다.

소설은 물론, 거의 십 년 넘게 이어진 수수께끼의 연쇄 살인극이 과연 누구의 손에 의해 저질러졌는지, 범인이 "암살자"인지 "연쇄살인마"인지 가려내는 본격 미스테리 장르물입니다(작중 화자의 분류에 따르면 "암살자"는 일관된 계획과 특정인에 대한 구체적 살의를 갖고 사람들을 죽여나가는 자이며, "연쇄살인마"는 무작위로 희생자를 고르는 유형이라고 하네요). 일단 독자는 범인이 "누구"인지보다, 무슨 동기로 이런 짓을 저지르는지 범인의 유형(위 분류에 따른)을 주인공들과 함께 알아내는 재미에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만, 앞서 적은 대로, 이 소설은 (외견상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등장인물들 사이의 끈끈한 우정, 위대한 사랑, 극악무도한 적의와 복수심 등이 놀랍도록 생기 넘치게, 때로는 오싹하면서도 감동적이기까지 한 필치에 실려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게 놀랍습니다. 처음에는 엄청 하드보일드 풍으로 달리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예상 외로 감정선을 묵직히, 섬세히 건드리는 진행이더군요.

조 파이크, 악마 같은 냉혹함과 (그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듯한) 거의 신적인 정의감의 소유자인 그를 주인공으로 봐야겠지만, 그와 동업 관계(개인 탐정업)인 엘비스 콜 역시 이야기를 떠받드는 양축의 하나인 매혹적인 남성입니다. 성장 배경은 잘 알 수 없지만, 이름값 하느라고 여자들이 엄청 따르나 봅니다. 결국 준 주인공 레벨로 올라서던 변호사 겸 방송인인 루시, LAPD의 여걸 돌런, 어느 사장님 여비서였던 홀리("저기, 여친 업그레이드할 생각 있으면 꼭 연락해요!"라던 멘트가 안 잊혀질 듯합니다. 다만 이걸 실제 써먹기란 뭐), 베트남 음식점 사장님 딸까지 해서 진정 여복을 타고난 사람인데, 완력이나 두뇌 회전, 생존 능력 같은 건 파이크에 현저히 못 미치지만 역시 변치 않는 의리와 균형 잡힌 윤리의식 등이, 이 장편 속에서 그를 파이크 못지 않게 신뢰의 무게중심에 배치하는 듯합니다.

범인은 글쎄 뜻밖의 사람이라 볼 수도 있고, 의외의 반칙성 출현으로 여길 수도 있는데 과연 동기가 충분히 설명되었는지는 좀 의문으로 남습니다. 매우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긴 하나 그리 경제적으로 배치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칼날 같은 구성의 묘미에 지적으로 압도되기보다는, 끈적하고 깊이 있는 인간 영혼, 정신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 혹은 비관과 희망이 교차하는 그윽하면서도 강렬한 문학적 풍미에 더 강점을 가진 장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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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경영 4.0 - 4차 산업혁명 시대, 데이터 경영 전쟁이 시작됐다
방병권 지음 / 라온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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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말로만 무성할 뿐 아무도 분명한 아젠다나 실천적 과제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들도 일선에서 선명한 비전을 갖고 있지는 못한 듯합니다. 실정이 이런 판에 일반 시민이나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장래를 놓고, "4차 산업 혁명"을 키워드 삼아 어떤 건설적 투영을 해 내기란 거의 가망이 없다고나 해야겠죠. 그 실체가 파악되지 않은 채 말만 무성하니 사람들이 더 버거워하고 심지어 두려워하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보다는 훨씬 부담 없는 이슈이겠을 "빅데이터"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5, 6년 전부터 많은 전문가나 저술가들이 지적해 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미 키워드가 대중화한지 한참 지난 이 문제를 놓고서도, 일선의 경영자들이 자신의 업무에 거의 활용할 줄을 모른다는 겁니다. 심지어 빅데이터의 개념부터가 안 잡힌 분들도 많습니다. 막연히 "통계를 잘 활용하라는 소리지"라든가(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빅데이터 어디 가서 얼마 주면 구할 수 있나?"라고 되묻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사고 방식이란, 세상을 통째 바꿔 놓을 이 도도한 흐름에 대해 그저 "기존의 데이터가 덩치가 커진 것" 정도로밖에 인식 못 하는 데 머무는 거죠.

이 책에서 일단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고 들어가는 저자님의 진단, 시각이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하고도 한두 달 전입니다만)에 세계, 적어도 동아시아 3국을 충격 속에 몰아넣었던, 인공지능(소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을 화제로 삼아, 대중들은 인간이 드디어 기계의 "지능"에 패배한 대사건이라며 입방아를 찧었죠. 헌데 저자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고 하시네요. "자동차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그와 100m 달리기 경주를 벌여 진 인간을 보고 우리는 집단 패배감, 좌절감을 느껴야 하겠는가?" 오히려 또하나의 강력한 도구를 발견한 데서 무한한 희망과 가능성을 엿보았다고 평가해야 온당하다고 저자는 말씀합니다. 이 관점이 책 본문 전체를 관통하며, 또한 우리가 미래에 대한 구체적 비전을 갖추는 데 이 책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잘 요약합니다.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 인공지능이니 4차 산업 혁명이니 하는, 아직은 그 실체가 분명하다거나 논자에 따라 뜻이 구구하게 갈리는 용어, 화두를 자주 쓰지 않습니다. 책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듯, (어쩌면 오래 전에 한물 간 듯 잘못된 느낌을 갖기도 하는) "빅데이터" 하나로 모든 설명을 시도하는 내용입니다. 인공지능을 운위하는 시대에 왜 옹색하게 빅데이터인가? 저자는 정반대로, 심지어 저 알파고- 이세돌 대국이 불러온 파장마저도 "종래의 방식에 대한 빅데이터 활용의 승리"라고까지 "치환"해서 설명합니다. 하긴 더 간명하고 상식에 부합하는 설명이 가능하다면, 구태여 번거로운 개념을 동원하거나 논증 과정이 불분명한 논의를 끌어올 필요가 없긴 합니다. "인공지능의 승리"라고 설령 인정해도, 그 실체와 핵심은 결국 "인간이 이용하지 못했던 방대한 데이터의 분석에 기인한 승리"라고 바꿔 말해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 "지능" 자체가 어떤 구조, 속성인지 모르는 형편에, 더 이해하기 쉽고 내용도 분명히 규명된 "빅데이터의 위력"으로 초점을 잡으면, 더 유익한 결과가 나올 것 같기도 합니다. 현장에서 적용해 보기도 더 쉽고 말입니다.

(물론 인공지능이 정말 성공, 실용 단계에 확실히 진입한다면 그건 빅데이터를 훨씬 뛰어넘는, 넥스트 레벨의 성취임에 틀림 없습니다. 자동차가 "엔진과 강철과 휘발유와 플라스틱과 쿠션의 합"이 아닌 거나 마찬가지로요. 하지만 그건 업계의 성취가 일정 수준을 확실히 넘어선 후에 의미 부여를 해도 충분합니다)



저자께서는, 여전히 빅데이터라고만 해도 뭔가 어렵게 다가올, 현장의 그저 평범한 사장님들을 위해, 자신이 직접 겪은(본인이 CEO이시기도 하니까요) 사례를 중심으로 무엇이 "빅데이터 경영"인지 재미있게 설명해 줍니다. 이 책은 이처럼 저자 스스로가 겪은 사례를 바탕으로, 실무에서 쉽게 실천해 볼 수 있는 지침이 많이 담겼다는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예컨대 요즘 우리는 기업들이 "잉여 서비스"를 많이 줄여가고 있다는 점 실감하게 됩니다. 과거에 노트북 한 대를 사면 딸려오는 매뉴얼만 해도 웬만한 자계서 한 권 분량의 책이었습니다. 요즘은 가전제품을 사도 지류에 적힌 설명서를 구경하기 힘듭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서운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허투루 새어나가는 무익한(?) 비용을 줄이자는 절박한 현실인식에의 발로이니, 우리도 다들 기업에 몸담은 입장에서 이해해 줄 여지는 있습니다.

저자는 잔반 줄이기로 비용 절감(나아가 환경 보호 기여ㅋ)에 성공한 직접 사례를 들어 주십니다. 회사 카페테리아 같은 데서 저렴하게 공급하는 식단에, 먹지 않고 버리는 반찬이 연간 수십 톤에 달한다면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그 역시 의미없는 원가(직원 복리 후생) 출혈입니다. 우선 먹고 버린 잔반통을 다 뒤져(여기서 웃음이 나기도 했고 과연 CEO  체면에 이렇게까지 해야하는지 회의도 느껴졌지만 - 물론 직접 하신 건 아니겠지만요 - 비용 절감과 경영 효율화는 이런 자질구레한 문제의 위급한 인식에서 비롯한다는 점은 확실히 배웠습니다) 어떤 반찬을 가장 많이 남기는지 조사했다고 합니다. 답은 부침개인데, 이 음식은 갓 요리하고 바로 배식해야 하는, 온도가 생명인 품목이죠. 그런데 싸늘히 식어 있으니 입맛이 당길 리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현장(확장하면 결국 시장이 됩니다)의 진짜 니즈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게 경영 효율화, 나아가서는 혁신의 단초가 된다는 거죠.

거기에 그치면 작은, 소소한 개량에 불과합니다. 저자는 반찬의 다양한 품목을 코드화하여, 막연한 직관이나 불분명한 "문과 언어" 사용이 아닌, 잔반 줄이기 프로젝트에서 계량화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언어"로 이 문제를 접근했습니다. 순간 독자인 제 머리도 아찔해지던데 해당 대목 바로 그 다음에 숱한 애로사항이 진술되더군요. 전산시스템은 글자 하나만 틀려도 전혀 다른 품목으로 분류하니 이른바 정성적 분석이 원활히 안 이뤄지더라는 거죠(오죽하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땀이 나네요). 저자는 이 귀찮은 단계에서 포기하지 말고, 아예 당신 주변의 모든 환경을 "데이터"로 다 바꿔 놓으라고 합니다. 왜 혁신기업의 CEO들이 "데이터는 미래의 석유"라고 했겠는지 그 의미를 새기면서 말입니다(사실 이 한 줄이 책 전체의 요약, 주제 대변이라고 새겨도 됩니다).



인간의 뇌는 사물과 환경을 실체, 혹은 아날로그 포맷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결국은 의식, 무의식상으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모두 데이터로 변환한 후 일정 프레임에 끼워 넣고 정리할 뿐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사실 여기서 인간 사이의 소통 부재, 오해, 갈등이 비롯하기도 하죠. 나는 나를 이러이러한 존재로 스스로 자리매김하는데 상대는 상대 나름대로 그의 시각에서 나를 판단(데이터화)하고, 객관적 실체(논란이 있겠습니다만)는 또 전혀 별개 지점에 있고... 여튼 문제를 선명히 인식하고 실천을 쉽게 이루려면, 아날로그적 감상이나 밑도끝도없는 이미지에 매달릴 게 아니라, 각종 장애와 이슈와 목표를 모조리 데이터로 바꾼 후 판단하고 고민하고 결정하라는 겁니다. 진짜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되더군요.

재미있는 사례가 많이 소개되고, 또 여러 혁신가들의 명언이 곳곳에 소개되어 결론 정리에 유익했습니다. 시장 조사를 통한 체계적 예측 끝에, 독신자 가구가 증가하는 대세에 호응하고자 작은 벽걸이형 세탁기를 야심차게 출시한 회사가 있었습니다. 벽걸이까지는 모르겠는데 소형 세탁기라면 대략 십 년 전에 여러 작은 기업에서 생산, 판촉을 벌이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큰 실패로 끝나고 만 게, 1) 원룸 거주자나 소형 아파트 입주민 중엔 이미 빌트인 형태로 중형 세탁기를 제공받은 경우가 많으며, 2) 이런 사람들은 대개 빨래를 그때그때 하지 않고 일주일치를 몰아서 하는 습관이 있더라는 거죠. 이처럼 데이터의 해석은 그저 큰 줄기에만 주목하거나 현장의 구체적 상황을 무시하는 게 되어서는 안 됨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또하나 재미있는 게, 결국 빅데이터의 성공적 활용은 처음에 질문을 바르게 확정해야 가능하다는 겁니다. 세탁력이 우수한 세제를 출시하려던 회사는 데이터의 분석 후, 소비자들이 세탁 완료 후 빨래를 꺼내어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이 "냄새를 맡는 것"이란 점에 착안하여, 전략 자체를 수정했습니다. 성공의 관건은 "얼마나 깨끗하게 빨리느냐"가 아니라, "소비자들에게 얼마나 깨끗하게 빨렸다는 느낌을 확실히 주느냐"에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2차 대전 당시 미 공군에서는 출격하는 폭격기가 적의 대공포에 희생되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 비행기 곳곳에 추가 장갑을 설치하려 했는데 자원이 무제한이면 문제가 없겠으나 한정된 자원, 물자를 놓고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분하느냐가 난점이었겠습니다. 귀환한 전투기를 보니 특정 부위에 집중적으로 탄환을 맞은 흔적이 있어, 전문가들은 여기에만 장갑을 입히면 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최고 책임자는 정반대로, 그곳만 빼고 다른 데다 장갑을 장착하라고 했다는군요. 그 이유란,

"그나마 이곳을 맞은 폭격기는 타격이 크지 않아 귀환할 수 있어서 우리가 지금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허나, 다른 곳을 맞은 폭격기는 적진에서 다 격추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아예 확인도 못 하는 것이다."

같은 데이터를 놓고도 통찰력 있는 리더는 이처럼 정확하고 본질을 해결하는 해법을 내어 놓습니다.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든, 인간의 창의와 상상력은 결코 기계의 효율에 압사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으로서 그 위에 군림하며 더 많은 효용과 복리를 창출합니다. 그 기반은 현재도 무한히, 한계비용 0에 가깝게 생산되는 데이터, 빅 데이터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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