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보기가 역겹다 - 그러기에 아직 늦지 않았어, 마야 로드 에세이
마야 (Maya) 지음 / 뮤토뮤지크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책에 담은 인물만큼이나 책이 예쁜, 뭐 그런 책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가수 마야 씨는 지금부터 13년 전 새로 취임한 어느 대통령이 첫번째 맞이한 광복절 기념식에서 초청가수로 나와 열창하여 더 많은 국민들에게 알려졌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녀는 그 몇 년 전부터 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진달래꽃"이라든가, "쿨하게" 같은 드라마 주제곡이 인기를 끌어 유명해졌고, 대학 축제 등 라이브 무대에 오르면서 젊은 층으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이미 얻어낸 가수였습니다. 이런 그녀가 정부 공식 행사에까지 초청된 이유는, 그녀의 고향이 아마도 당시 대통령의 근거지에 멀지 않았던 점도 있었겠지만, 마치 예전 1960년대 미국의 조언 바예즈처럼 빼어난 가창력을 자랑하는 그녀의 스타일 속에 모종의 "저항 정신"이 밴 것을 이심전심으로 알아본 이유도 없지 않았으리라 짐작합니다.

이후에도 마야 씨는 SBS 일요일 아침 프로그램인 <도전 1000곡> 같은 데 단골로 출연해서,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인지도가 높습니다. 지금도 저희 어머니마저 마야 하면 누군지 바로 알아보실 정도입니다(그녀가 출연한 방송회분은 재방송도 자주 되더군요 신기하게). 이후 그녀는 방송 출연은 뜸했지만 이런저런 행사에서 자주 라이브 연주를 가졌고, 그녀의 진가는 현장에서 그 생동감 넘치는 무대매너라든가 숨도 안 차하며 미친 고음을 정확하게 뿜어내는 경이로운 솜씨를 체험, 목격해야 제대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분이 외모까지 빼어나니 참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다고밖에 못하겠네요.

여튼 그녀는 최근에 음반도 뜸하게 내고 무대에도 자주 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팬은 물론 일반 대중도, 그렇게 아까운 재능과 여건을 지닌 분이 지금 뭐하는지 궁금해할 정도죠. 못내 아쉬웠던 분은 이제 이 책으로 그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책의 제목 "나보기가 역겹다", 그 부제 "그러기에 아직 늦지 않았어"는 모두 그녀의 발표곡 가사 일부를 따온 것입니다(전자의 경우 소월 시의 한 구절이기도 하죠). 저는 제목의 문구가, 단호하게 "종결 어미 -다"를 취한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왠지 지나가듯 명곡의 한 소절을 인용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쿨하게 툭 내던지듯 "정말 내가 봐도 역겹구나" 같은 방황과 자기 회의, 총체적 회고를 표현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역겨워" 혹은 "역겨워서" 등으로 말꼬리를 흐렸다면 모르겠는데, "-다"는 우리말에서 (누구의 입에서 나왔건, 맥락이 무엇이건) 단호한 언술일 뿐이며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물며 발화자가 마야 씨라면요.

책을 받아든 팬들은 일단 그녀의 "책"이기에 안 펼쳐들 수 없겠지만, 페이지를 넘기기 전 뭔가 걱정부터 됩니다.

"이렇게 예쁜 얼굴이 대체 어디가 역겹다는 건가요? 아무리 자신의 얼굴에 대고 하는 말이지만요."

심미적 평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뭔가 중대한 정신적 고비를 맞이한 건 아닌지, 그래서 앞으로 그녀를 무대에서 못 볼 수도 있다는 폭탄 선언이나 담긴 건 아닌지, 예쁘고 반가운 책을 받아들고서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과연 책을 열어 넘겨 봐야할지.

책은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할까. 마야의 담담한 자기 표백이 반, 그녀가 직접 찍은 사진이 반. 여튼 편집도 곰살맞게 일일이 자신이 정규 앨범 꾸미듯 손수 했을 것 같은 정성어린 외관입니다. 텍스트 부분만 보면 큰 줄기는 여행기입니다. 여행을 하며 자신이 만난 풍광과 사람들과 자신을 사진에 담았고, 여행이 으레 그렇듯 참다운 자신과 다시 만나며,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어언 마흔이시라는군요. 누가 믿겠습니까)을 담담히 들려 주는 내용입니다.

들려 주시는 사연은 물론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일 건 아니고, 산문시의 주인공이 모호한 구름 속에 화자로서 반은 환상, 반은 현실에 몸 담근 채 한 올 한 올 풀어내는 심상과 대화하라는 것이겠습니다만, 어떤 건 "이분이 실제로 이런 생을 사셨던 건가" 싶어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일단 그녀는 예상과 달리(?) 지방 출신이었고, 타고난 가인으로 예술가로 혜성처럼 데뷔한 게 아니라 연습생 시절을 오래 거쳤다고 하는군요. 훈련을 거쳐 데뷔한 분들도 물론 실력이 빼어나지만, 마야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놀라운 생동감과 카리스마를 보면, "배우지 않고 타고난 대로 그냥 통하는 사람"이 뭔지 바로 깨달음이 올 정도죠. 그런 줄 알았던 그녀가 그런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니, 다른 사람들은 그럼 어떻게 데뷔가 가능했다는 건지 아찔해지기만 합니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바를 냉혹한 진실은 인생에서 무참히 배반하기도 합니다. 안정되고 튼튼한 줄 알았던 길은 어느 순간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함정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어느 순간 기로에 섭니다. 자신의 지난 생, 화려함과 불안과 실망과 환희가 교차하는(이런 분은 그저 꽃길만 걸어왔을 것 같은데) 그 모든 모멘텀을 여행과 함께 회고하는 마야 "작가"는, 남들 눈에 더 띄고 덜 띄고의 차이만 있을 뿐 유한한 생을 사는 모든 영혼이 통과하는 희로애락의 지점 그 행로는 거의 같음을 우리 독자들에게 깨우칩니다.

그녀를 무대에서 더 자주 만났으면 좋겠지만, 이제 그녀는 이런 예쁜 책을 내는 작가라든가, 공연 기획자 같은 올라운드 크리에이터로 변신, 제2의 인생을 꾸려 나갈 생각 같습니다. 우리는 보다 성숙한 그녀가 더 다양한 컨텐츠로 우리와 소통해 준다기에 서운해할 이유가 없겠고요. 다시 이 책의 부제를 보죠.

그러기에, 아직 늦지 않았어.

"그러기에"의 내용은 사람마다 살아온 과정이 다 다르겠죠. 하지만 열정과 사랑을 잃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 "아직 늦지 않았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격려이자 치유입니다. 작가, 크리에이터로 우리의 인생을 영원히 곁에서 응원해 주겠다는 "저자 김영숙씨"의, 다소 개구쟁이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도사님 같은 모습을 보며, 우리 독자들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습니다.

"그럼요, 늦긴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티투스는 베레니스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탈리 아줄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고전에 대한 오마주랄까 현대판 재해석이 요즘 자주 나와서, 현대에는 이미 문학이 죽었거나 예전의 황금기보다 훨씬 못하다며 실망하는 분들의 눈을 크게 띄우는 실정입니다. 예전 학교 다닐 때 "라신, 몰리에르, 코르네유"라고 하면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사조를 이끈 3대가로 배우곤 했었죠("~곤 했었죠"라고 하면 프랑스어에서 반과거 시제입니다ㅎ). 마치 그보다 수천년 전 그리스에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3대가가 있었듯이 말입니다.

비극과 희극이라는 전문(?) 분야의 차이가 있을망정 어쩌면 프랑스의 저 문호들도 시대와 공간을 건너뛰어 아득한 선배들에 대한 경의와 헌정의 마음가짐으로 그들의 재능을 더욱 갈고닦았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책 저자인 나탈리 아줄레도 앞으로 그만큼 대성하실 작가가 될 지도 모르고요. 참고로 제가 몇 달 전에 읽은 <뫼르소, 살인 사건>의 저자 카멜 다우드도 북아프리카 출신으로서 알베르 카뮈의 대작에 대한 멋진 화답작을 발표해서 유명해졌는데, 이분 역시 (프랑스령 바르바리아 출신은 아니지만) 이집트 태생으로 프랑스어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탐구심으로 작가가 되었다는 점에서 닮아 있습니다.

티투스는 다른 누가 아닌, 우리가 고대사에서 예루살렘을 파괴한 로마 황제로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군사 원정을 떠나기 오래 전, 아직 비교적 평온한 위성 국가로 남아 있던 유대 지방의 왕녀 베레니케(베레니스)를 사랑해서 한때 결혼을 시도했었음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다만 백성들의 반대가 심하여 결국 혼인을 단념했는데, 이걸 두고 이 책에서는 "그의 합법적인 아내이자 자식들의 어머니인 로마를 떠나지 않기 위해..."라고 표현합니다. "나를 다시 받아 주오." 로마가 여기서 여성으로 의인화된 건 유럽 문학의 오랜 전통 그 일환이죠.

이런 근사한 표현들은 장 라신의 원전 <베레니스>에도 나옵니다. 라신은 셰익스피어보다 조금 후대에 활동했는데, 아무래도 당시 유럽을 휩쓸던 "고대의 재조명" 트렌드에 합류하여 이처럼 소재를 로마 시대에서 취했으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보다 장중하고 인간 보편 정신의 탐구, 회복을 지향했다면 라신의 그것은 이처럼 섬세하고 달달한 사랑, 감정에의 천착이 지배적이라 하겠습니다. 이 책에도 "이폴리트를 사랑한 페드라" 이야기가 잠시 언급되는데 역시 그의 희곡 <페드라>를 염두에 두었겠죠.

이 작품의 곳곳을 관통하는 심상은 "불"입니다. 코르넬리우스 얀센(신학자이며, 이후 프랑스 낭만주의 장편 소설에 배경으로 곧잘 나오는 "장세니스트(얀센주의자)"의 시조격입니다). 이 사람의 공모자(협력자, 동반자가 맞겠지만)인 생시랑의 말이 인용되는데, "...아담은... 다이아몬드였으나... 원죄 이후에는 석탄이 되고 말았다...."에서 금강석의 탄소분자 배열 구조를 바꾼 건 세월과 압력 외에도 "불"이 개재하는 게 자연의 이치이겠지요. 얀센주의자 중 한 명으로 알려진 파스칼도 이 소설 중 잠시 인용되는데, 장이 학교에서 "후작"과 즐거운 유희 끝에 그 흥분감으로 밤에 잠을 못 이루는(이상하게도 그 나이 때에는 다 이렇지요. 저도 이 대목을 읽으면서 그 비슷한 기억이 새로워졌습니다) 대목에서 "... 파스칼 역시 갈랑트리에 빠졌다..."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밤에 잠을 못 이루는 건, 낮에 피운 불잉걸이 마음 속에서 채 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이 들어서 그런 체험이 뜸해지고 무덤덤해진다면 그게 바로 늙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지금 책 속에서 우리는 한창 팔팔한 나이때의 장과 만나고 있습니다.

이국의 영웅, 군주와 비련의 사랑에 빠지다 버림 받는 아득한 원형은 또 저 북아프리카의 여왕 디도(영어로는 "다이도"라 읽고, 1990년대 후반에 이 이름을 한 미국 가수가 낸 히트곡이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죠)가 있습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를 인용하며(당연히 원문은 라틴어) 장은 그 정확한 번역, 이해에 골몰합니다.

Caeco carpitur igni

문장은 짧아도 이게 엄청 어렵습니다. 우선 책 중에서 장은 형용사 caeco를, "숨겨진"으로 번역할 것인가, 아니면 "눈먼"으로 옮길 것인가를 놓고 고민합니다. 한 단어에 어떻게 이런 이질적인 뜻이 함께 들어있나 의아할 수 있는데, 만약 "주체"가 눈이 멀었으면 그건 "객체" 입장에서는 "숨겨진" 것입니다. 반대로, "객체" 역시 무정물이라면, 생각과 감정이 없으므로 (인간이 그걸 보기로는) 역시 눈이 먼 것이죠. 장은 지금 그녀(디도 여왕)가 눈이 멀었는지, 아니면 그녀를 집어삼킬 불이 눈먼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는 겁니다. 저 라틴어 문장은 주어가 생략되어 있는데, caeco igni가 (영어로 치면) by the blind fire입니다. carpitur는 한 단어여도 수동태꼴 동사인데, 영어로 옮기면 is seized입니다. carpi- 어근은 "오늘 하루를 놓치지 말라"는 경구 "카르페 디엠"이라고 할 때 그 "카르페"와 완전히 같은 겁니다.

장은 셰익스피어처럼 언어의 조율에 민감하고 까다롭습니다. 잠시 아르튀르 랭보도 언급이 되지만, 여기서 캐릭터 장은 실존하거나 픽션 속에서 등장한 모든 천재들의 개성을 다 조금씩 합친 듯합니다. 혹은 나이가 어려서인지 아직 서투른 모습도 보이는데, 아몽과의 관계에선 "데미안을 대하는 싱클레어"가 생각나기도 하고 말이죠.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모든 명사에 관사를 붙여야 해." 마치 우리가 영어 시간에 "apple이란 없다. the apple이나 an apple이 있을뿐"이라고 배운 것과 같습니다. 이런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느냐면, 라틴어는 개체(특정/불특정)를 가리키건 보편을 지시하건 관사 일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 오랜 고전어인 헬라어도 까다롭게 변화하는 관사류를 달고 있는 언어인데도 말이죠.

당신의 <베레니스>에 나오는 인물들이, 내 눈에는 한낱 잿더미로 보였어요.

생생한 감각에 대고 칼을 가는 장에게 어느 여성이 다가와 하는 말입니다(p199), 이런 말에 장은 무덤덤하니 동의합니다. 여성의 진의가 무엇이었건 어떤 의미에서는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아담 역시 하와에게 그 나름 신의의 표시로 금기에의 도전에 동참했다 그꼴이 되었고, 아이네이아스를 떠나보내는 디도 여왕은 자신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 태우고는 순정을 증명합니다. 모든 사랑은 불장난이며, 사랑이 징벌처럼 휩쓸고 간 마음에는 새하얀 재만 남습니다. 과연 티투스가 베레니케 왕녀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 그녀를 버린 건지, 아니면 그 유명한 시쳇말대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 건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죠. 다만 베레니케(베레니스)는 미련 없이 쿨하게 티투스를 떠남으로 해서, 사랑하는 티투스의 자존과 위신을 완전하게 지켜 주었습니다. 속으로만 삭이고 상대의 발이 내 위를 사뿐히 즈려밟게 가도록 전송하는 사랑이란 역시 아무에게서나 빚어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들불이 어디로 번질지 알 수 없듯, 사랑의 갈 길도 이처럼이나 종잡을 수 없으면서 동시에 다양한 방식으로 아름답고 숭고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어떻게 너를 잃었는가 미드나잇 스릴러
제니 블랙허스트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사람은 그 무엇에 대해 당위적 확신을 지닌 후에는, 그 실재의 가능성조차 부인해 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극악무도한 악(惡)이 비난 받아 마땅해다 해도, 그 찌그러진 채 당당하며 기세등등한 행적과 살덩이가 남긴 작태는 세상 곳곳에서 역력히 발견되는 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은 그게 아무리 도덕적 당위를 바탕에 깔아도 우선 우리 자신의 생존, 혹은 정의의 구현을 위해서 하등 이로울 바가 없습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 자신의 생존을 위한 노력과 진실의 규명에 다가서려는 몸부림이 그 방향이 같다면, 당사자는 Sein과 Sollen 사이에서 갈등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행운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혹시 미스테리 스릴러 장르 소설인지 모르고 시작한 분이라면, 세상에, 갓난아기인 자기 아들(이름은 딜런이라고 하네요)을 실수로 죽인 엄마라니, 앞으로 남은 생을 죄책감과 자기 혐오 때문에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아찔한 느낌이 전신을 휩쌀 겁니다. 그런 동정심 가득한 독자라도, 혹 같은 아파트 단지에 "이름과 신분을 통째 바꾼 바로 그 여인"이 이사라도 온다면, 과연 마음으로 그녀를 환영할 수 있겠습니까? 환영은 고사하고, 이웃들끼리 작당하여 무슨 핑계와 소동을 꾸며서건 내 사는 공간에 그런 범죄자를 못 들여 놓게 하러 골몰하는 게 보통이겠습니다. "자기 자식에게 그런 짓을 한 엄마가, 남의 자식들에게는 뭔 흉악한 시도를 못 하겠어?" 이게 정당치 못한 반응인 줄 잘 알면서, 먼발치에서 보는 우리들이라 해도 이런 (가상의) 집단이기주의에 대고 또 마냥 비난을 못 합니다. "나라도 별 수 없었을 듯." 그녀의 집에서는 가죽을 벗긴 고양이(그것도 이름이 붙고 정이 생겼던) 시신이 나오는가 하면 집안이 온통 페인트칠로 난장판이 된 사고가 잇달아 터집니다. 누구나 그 인근 주민들이 벌이는 테러, 간접 린치라고 짐작하며 경찰 측에서도 대응이 미온적입니다("누가 이런 동네로 이사 오라고 했어요?"). 그러나....

여튼, 책을 절반쯤 읽다보면, 사연의 또다른 트랙(시간과 퍼스펙티브와 공간이 다릅니다)에서 웬 이상한 녀석이 펼치는 불량한 작태를 보고(독자만의 특권), 아 이거 혹시 진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 아닐까, 어지간히 둔한 독자 아니면 다 눈치 챌 겁니다. 가뜩이나 수전 웹스터(어린 아들을 죽였다고 선고 받은 엄마. 1인칭 주인공이자 화자)의 운명에 불편함을 느끼던 차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뭔가 후련한 일말의 가능성은 곧 그게 아무리 희박하게 계산되어도 내가 가진 패의 전부를 걸고 싶게 만듭니다. 여전히 수전은 범죄자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말입니다. 법정에서 그렇게 많은 전문가들이 나와 "산후 우울증 때문에 순간적 착란 상태에 빠지는 엄마들이 많음"을 증언했고,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숱한 증거물들이 한 방향을 가리키기도 했다니 말입니다. 제목이 중의적이기도 한데, 영어에서 lose 뒤에 사람이 오면 보통은 죽어서 이별했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이하 생략)

"저렇게 듬직한 팔뚝에 내가 안겨 본 게 언제였던가?" 수전은 4년이라고 이내 자문자답합니다(그 세월 동안 수인 생활을 했다는 뜻이죠). 소설 7/8 정도가 지나간 후반부에 수전 스스로의 입으로 털어 놓는 대목이 있는데, ".. 마크와는 달리 나는 언제나 별 존재감 없는 인생이었다. 마크는 그저 잘생긴 게 아니라, 그 온몸에서 풍기는 자신감이 주변 모두를 끌어당기곤 하는 그런 존재였다. ... 마크는 왜 나를 골랐을까? 그가 여태 사귀어 온 모든 매력적인 여성과는 단 하나의 공통점도 없는 나를 말이다. 혹시 과거와는 정반대 좌표를 지닌 나를 선택하여 애써 잊어야 할 그 무엇이라도 있었을까?" 같은 말로 보아, 그리 외모에 큰 자신을 품지 못할 여건인 듯 보입니다. 대신 그녀는 어느 정도 출신 성분과 성장 환경에는 긍지를 갖는지(얼마나 객관적 근거를 갖췄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예컨대 "예전의 나와 내 이웃들(그 사건 이후로 완전히 그녀를 아웃시켰을)이라면 캐시 같은 애를 과연 가까이 두기나 했을까?" 같은 심중의 생각도 비춰지곤 하네요.

여튼 외모에 자신 없는 이런 여성이 유독 남자한테는 그간의 열등감을 보상 받기 위해 많은 걸 기대하나 모양입니다. 그래서 수전은 "전 남편" 마크에 대해 전혀 의심을 품지 않고, 합리적으로 의심해 볼 구석이 있다며 그렇게 충동하는 "새로운 친구, 클라크 켄트(기자 직업인데다 잘생겼고, 외로운 자신에게 슈퍼맨처럼 의지가 되기도 하기에)"인 닉에 대해서도 곧바로 의심 없이 친분을 쌓습니다. 캐시와 그가 은근 친해지는 기색을 보이자 바로 불 같은 질투(를 넘어 증오)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주인공 수전은 어리석고, 아름답지도 못하며, 그 하는 말에 큰 신뢰를 줄 수 있는 타입도 아닌 듯 보입니다(그래서 그런 누명을 써도 싸다는 뜻은 아니고요).

책을 읽으면서 음 범인은 이놈이군, 하고 결론을 다 맞혔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게 바로 착각이며 작가가 노린 함정에 빠진 겁니다. 다 밝혀져 가는 진상에 오직 수전만 까맣게 눈먼 채로 남은 듯 보였으나, 결국 엉뚱한 오해를 했던 건 우리 모두가 다 마찬가지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소설은 수전의 1인칭 시점에서 그녀의 온갖 시시콜콜한 변덕과 불안정한 감정과 불안과 의심과 절망과 간절한 기대 따위가 낱낱이 다 공개되는 점도 독특한데,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누구와 누구를 향해선 그 화사한 외모에 여성으로서 주눅이 들다가, 한참 뒤 누구를 찾아가서는 "이런 여자도 있기에 내가 마음이 놓인다(정확한 표현은 이게 아니지만 결국 그런 뜻입니다)" 같은 감정을 일일이 (마음 속에) 떠올리는 등 희한하게 외모에 집착하는 타입입니다. 심지어 어느 건물에서 누군가를 만나고선, 태어나서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본다며 아무 생각이 없어집니다. (이 문단은 전체가 은근 스포일러인지도 모르겠네요)

안정감과 신뢰를 결여한 인물이라고 해서, 부조리한 운명의 장난(운명도 아니고 그냥 못된 놈들)에 희생되어 마땅하다는 건 물론 아닙니다. 이 소설의 매력은, 왠지 신뢰가 안 가는 어느 여성의 입을 통해 진술되는 세계를 관찰하고, 독자로서(혹은 일종의 배심원으로서) 그에 마냥 휩쓸려 가지 않은 채 이성과 추론을 통해 진실에 접근해 가는 그런 재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구요." 아니,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근거 없는 집착과 현혹, 눈먼 사랑, 자기 기만, 터무니없는 요행심, 혹은 못난 에고의 투사, 투영이 있을 뿐이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빠 냄새 -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작 책고래아이들 6
추경숙 지음, 김은혜 그림 / 책고래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겹고 귀여운 스타일의 삽화를 그리시는 김은혜 작가님, 솔직담백하면서도 사물의 이면에 가려진 진실을 따스이 응시하는 사연을 즐겨 쓰시는 추경숙 작가님 두 분의 첫 콜라보입니다. 책고래에서 내는 동화들을 즐겨 읽는 편인데 이번 책도 역시 만족하며 읽었습니다.



작가의 말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그대로 옮기겠습니다).

"엄마, 나는 엄마가 내 친구 엄마처럼 의사였으면 좋겠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을 돕느라 하루종일 황태에 묻혀 있던 제 모습이 딸아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싶었지요.

(중략)

".. 왜, 지금 엄마 직업은 마음에 들지 않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엄마가 의사면 내가 아플 때 치료해 주면서 항상 함께 있을 수 있잖아."

저는 이 부분을 읽을 때, 분명 또렷하게 기억하지만 혹시 작품 내용(본문)의 일부를 두고 머릿말로 착각했나 싶어 다시 앞 페이지로 돌아가 보았습니다. 이 대목은 분명, 추경숙 작가님 본인 이야기였고, 따라서 글 중에 등장하는 귀여운 소망을 말하는 아이도 작가님의 딸이 맞죠.

여기에 대해 작가님이 정리한 결론은 이렇습니다.
".... 또한 부모님의 직업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이, 어쩌면 어른들의 생각과는 사뭇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도 스쳤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도전과 위협 따위에 대해 성숙한 소화와 이해 능력을 갖춰 간다는 뜻도 됩니다. 아이들(우리 자신들을 포함하여)은 대개는 활력에 넘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능력" 면에서 어른을 압도하지만, 대신 상처에 매우 민감합니다.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가 없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자체 해결을 못 하고 엉뚱한 도피구를 찾는 어른을 두고 우리가 비판하기도 하는데, 이는 성인이 되어 마땅히 제 힘으로 해 냈어야 할 숙제를 방치한 데 대한 책망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때로는 정반대로, 상처를 받지 않기도 합니다. 어른들이 마땅히 그러려니 짐작하는 상황 속에서도 의연히 넘깁니다. 그 이유는 마음에 때가 묻지 않아서겠지요. 질투와 증오와 타락한 승부욕에 물들지 않은 터라, 어른들이 찌든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을 전혀 몰라서입니다. "그게 뭔 소리에요?" 전혀 아니니까, 그들은 맑은 눈으로 또렷이 세상과 상대를 응시합니다. 왜곡은 언제나 "덜 된 어른들"의 몫입니다.



작품 속에는 세 아이가 나옵니다. 애들은 축구에 흠뻑 빠져 사는데, 이제 막 전학 온(아마 지방에서 왔나 봅니다) 도담이, 그 동네에 오래 살던 태영이, 그리고 의사 아버지를 둔 상민이, 이렇게 셋입니다. 이 중에선 전학생 도담이가 축구를 가장 잘 하나 봅니다. 상민이는 축구 잘 하는 태영이가 부러워서 언제나 친하게 지내려 애썼는데, 태영이보다 한 수 위로 보이는 도담이 때문에 친구 뺏길까 하는 걱정이 마음을 덮는군요. 한편으로 도담이의 놀라운 실력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도담이 아빠는 생선 가게를 합니다. 담이는 가게에서 풍기는 생선 비린내가 언제나 마음에 안 들고 창피합니다. 그런데 아빠의 "냄새"에 대해 불만인 건 상민이도 마찬가지라고 하네요. 물론 소독약 냄새, 환기가 잘 안 된 특수 공간의 냄새는, 그 근원이 해롭거나 더럽지 않아도 계속 맡고 있으면 머리가 아프죠. 하지만 상민이가 유독 "아빠 냄새"가 싫은 건, 냄새가 문제가 아니라 아빠와의 소통이 안 되어서입니다. 같이 안 놀아 주는 아빠가 싫고 원망스러운 걸 냄새 탓으로 돌려 표현하는 거죠.

부족할 것 없는 여건 속에서 자랐는데 인성이 비뚤어진 애들을 흔히 봅니다. 예를 들면 미국 출장 자주 다니느라 애하고 놀아 줄 시간이 없던 부모 밑에서, 성장한 그 자녀가 진심 뜬금 없이 반미주의자가 되거나 하는 경우입니다. 성향상 그런 주견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는데, 잘 뜯어 보면 이론적 기초가 있거나 소신으로 굳어서가 아니라, 그냥 부모에 대한 반항 심리가 이상한 핑계, 탈출구를 찾은 겁니다. 거창한 이슈를 입에 올리니,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미숙한 자신이 왠지 훌쩍 커보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사실은 아주 기초적인 숙제도 끝내지 못한 어린이에 불과한데도요(그래서 "어린이" 같은 지적이 나오면 비난조가 아니라도 엄청 싫어합니다).

이런 상처 입은 자존은, 엉터리, 뻥튀기된 가짜 자아를 앞에 내세우기 일쑤입니다. 물론 불행의 대가는 결국 본인이 치릅니다. 과소비나 엽색 행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물건에 대한 페티시적 집착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처방은 하나인데, 그저 그 친부모가 마음의 문을 열고 자녀와 자주 소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이 동화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이는 상민이 아빠였는지도 모릅니다.



동화는 세 아이의 아빠들이 모두 모여, 서투르면 서투른 대로 잘하면 잘하는 대로, 가식 없이 넘어지고 헛발질하고 웃으면서 축구 경기를 벌이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성인이 되면 참 불편한 게, 지위와 체면이 있다 보니 정직한 감정을 확 드러내면서 스트레스를 못 푼다는 겁니다. 드러낼 걸 못 드러내다 보니 속병이 생기겠죠. 축구로 친구가 된 아이들 덕분에, 이제 그 아버지들도 힐링을 합니다. 비결은 남의 애도 아니고, 바로 자기 아이와 잘 놀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작가님의 말 인용으로 서평 마무리하겠습니다.

"서로의 냄새를 너무 그리워하지 않을 만큼 가까운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냄새를 너무도 사랑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래서 나는 조선을 버렸다 - 정답이 없는 시대 홍종우와 김옥균이 꿈꾼 다른 나라
정명섭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책 아니라 모든 인문서적, 혹은 책 일체의 소명이, 당대의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궁금해할 만한 질문에 대고, 그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는 해답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근현대사를 배우며 항상 당혹스럽게 다가왔던 대목이, 1) 대체 갑신정변은 왜 시도되었으며 또 무참히 실패하였는가 2) 갑신정변의 주모자 중 아이콘처럼 후세에 전하는 김옥균은 왜 "그 사람"에 의해 암살되었으며, 배후가 혹 있었다면 누구인가 등이었습니다. 2)와 관련해서는 해방공간에서 안두희에 의한 백범의 암살이라든가,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의 죽음, 나아가 (앞의 두 사건 사이에 시기적으로 우연히 낀 먼 바다 저편의) 케네디의 비극 등이 함께 연상되는 면도 있습니다.

20세기 전반을 인접국에 의한 치욕스러운 병탄으로 채웠기에 우리는 보통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주요 사건과 그 속의 인물들에 대해 아주 부정확하고 부적절한 선/악 이분법으로 색깔 칠하기를 시도하는 어리석은 버릇이 있습니다. 이하응에 대해서는 대개 개방과 개혁을 반대하고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은 "쇄국정책"의 화체처럼 인식한다거나, (이 책의 주제 중 하나인) 갑신정변과 그 주동자들을 놓고는 "친일파, 준비부족, 단견, 성급함" 등의 특성을 들어 역시 부정적인 범주에 마구 편입한다거나 같은 태도가 있죠. 헌데 1880년대의 친일 행적과, 이후 삼십 여 년이 지나 동족과 고유문화를 말살하며 철저한 사익 추구에 몰두한 행위는 같은 기준으로 판단할 것만은 아닙니다. 흔한 결과론을 가지고서야 무슨 말을 못하겠으며, 오히려 갑신정변이 당시 행여 성공(거의 가능성 없지만)이라도 했다면 향후 조선의 행로가 또 어찌 바뀌었을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우리는확정된 팩트 위주로 지난 역사를 반추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옥균의 경우 저자의 평가는 후한 편입니다. 책 전체에 걸쳐 자주 등장하는 표현대로, 명문가 출신인데다 일찌감치 관직에 오르는 등 성공적인 커리어 첫걸음을 밟았고, 그냥 자연스러운 경로만 밟았어도 어느 정도는 성공과 부귀영화가 보장된 인생이 구태여 모험을 한 데에는 뭔가 남다르고 비상한 각성과 각오가 내면화한 면이 있지 않았겠냐는 겁니다. 실제로 그는 귀공자다운 풍모에 영민한 지성을 지녔으며, 무슨 소외된 하층민 분자들이 막판에 몰려 무모한 도박을 시도하듯 무리수를 밟을 필요가 전혀 없는, 차라리 기득권 금수저에 속한 편인 처지였지요. 변혁은 수세에 몰리거나 불리한 진영, 계급에서 더 목청을 높여 옹호하는 법이니 말입니다.

반면 홍종우의 경우, 몰락 양반이라는 아슬아슬한 신분치레라 해 봐야 사실상 상민에 가까운 빈한한 처지였으며, 강점기 초반 독립투사들 사이에서 백범이 내내 하시(배운 바 없고 학식이 일천하며 신분이 낮다는 등)되었던 분위기를 연상시키듯, 그 부류 안에서는 2급으로 치던 보잘것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과거 급제 등을 통해 변변한 관직에도 오른 바 없고, 다만 체구가 크고 억센 기질에 비범한 기상을 지녀 타인에게 위압감을 주는 풍모이긴 했나 봅니다. 가까운 촌수는 아니었으나 같은 문중 출신인 홍영식 등이 갑신정변의 핵심 지도층이었듯, 그 역시 김옥균 등과 망명지에서 일정 부분 고락을 함께하던 개화파였습니다. 이런 그가 왜 김옥균을 암살하였는가? 책에서는 여러 시나리오를 제시하며, 청 제국, 고종(과 민자영) 측, 일본 등 여러 경우의 수를 놓고 배후를 짐작합니다. 배후 세력 중 하나로 조선 개화파의 적극 후원 세력을 자처했던 일본이 끼어 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겠죠. 하긴 일본은 이미 갑신정변 당일에도 뒤통수를 친 바 있으니 놀랄 일도 아니긴 하지만.



홍종우에 대해선 우리 독자들이 잘 몰랐던 면모를, 저자는 한 챕터를 할애해 자세히 소개해 줍니다. 우선 그는 혈혈단신이나 마찬가지로 프랑스에 건너가(책에도 나오듯 여러 현지인들의 후원이 있긴 했습니다) 선진 문물을 배워 조국의 개화에 도움이 되려 했으며(그의 역량과 영향력의 현실적 한계가 어느 정도건 무관하게, 본인 딴에는 매우 진지한 의도로 시작한 듯합니다), 이 와중 해외에는 최초로 "춘향전", "심청전" 등의 번역 소개에 큰 공로를 남기기도 했다는 점이 (저자께서 누누이 강조하듯) 매우 인상적입니다. 책에는 그 번역서들의 내용이 비교적 상세히 요약되었는데, 우리가 아는 표준적 스토리와는 천양지차로 차이가 나 오히려 더 흥미롭습니다. 홍종우가 설령 엉터리로 저런 고전(당시에는 고전 취급도 안 했겠으나)을 알았다 쳐도, 오늘날같이 구비/기록 문학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뤄지고 그를 대중 교육을 통해 보급하던 시절이 전혀 아닌지라, 그리 이상할 건 없습니다. 양반은 눈길도 주지 않던 비루한 학문(점성술 등)의 번역(여기에 오히려 프랑스인들은 큰 관심을 주었죠)에 치를 떨며 지겨워하던 그였다면, 고전 문학에 대해선 어떤 태도였겠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죠. 그가 만약 저승에서 현대의 한국을 주시한다면, 자신의 이런 행적(춘향전 등의 불어 번역에 기여)가 후손들의 관심을 끄는 사실에 오히려 놀라워했을 겁니다.

김옥균이, 강점기 동안에는 총독부 당국을 통해 과장되이 미화되었다면, 해방 이후에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어설픈 혁명가 흉내를 내다 망한 친일파 정도로 흉한 이미지가 씌워진 면이 있습니다. 정/부정, 흑/백의 이분법 범주로는 전혀 유리한 평가를 못 받을 그이지만, 이 사람을 암살한(친분과 의리로 교유하다 느닷 배신했다는 점에서 반인륜 요소까지 있는) 홍종우는 그럼 이미지가 긍정적이냐, 그건 또 전혀 아닙니다(그 전에, 아예 이이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듯). 만약 정부 당국의 매수와 감언이설에 넘어가 "거사"를 결행한 소인배라면, 그의 이후 긴 행적에는 그런 "나쁜 인격"과는 잘 매치가 안 되는 기이한 발걸음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첫째 옥균을 갓 처치하고 돌아온 후 과거 급제(요식행위), 당상관 부임 등 평생의 한풀이 소원성취를 다해 본 그로서는, 이상하게도 정해진 코스라 할 여흥 민씨 척족의 하부로 냉큼 편입되지 않고, 오히려 소신 발언을 일삼아 주위를 무안하게 하거나, 엇박자 행보를 보이기 일쑤였습니다. 이는 물론 마냥 긍정적으로 볼 건 아니고, 그로선 보다 먼 정치적 장래를 내다보고 내디딘 신중한 정치 술수일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저자께서 정리, 제시한 여러 팩트들은, 혹시 그가 (참으로 보기 드문 유형의) 괴짜 소신파(어느 세력으로 분류하기 힘든), 그 나름 마음에 순정과 대의를 간직한 진짜 의기지사였을 가능성을 높여 줍니다. 이는 제주 목사로 부임하고 난 후 여느 탐관오리처럼 가렴주구에 몰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뚜렷이 부각되긴 하네요.

홍종우의 생과 각종 사건의 중심에 섰던 그 진짜 의도가 완전한 암흑에 싸여 있다면, 김옥균은 그보다는 덜 심해도 여전히 많은 행적이 의문을 남기는 게 사실입니다(저자의 표현을 다소 변형하자면). 비(非)학자 출신 인기 대중서 저술가인 저자는 내내 이런 주제를 골라잡아 우리 독자들과 소통해 왔으며, 그의 독자들이 호응을 보내 온 이유도 이런 주제의식에 아마 크게 기댈 겁니다. 옥균은 (저자가 누누이 강조하듯) 보장된 출세를 멀리하고 구태여 목숨을 건 가시밭길을 택했다가 진짜 목숨도 날리고 역적의 오명을 뒤집어쓴 채 자신뿐 아닌 가문과 친우들의 안위마저 위협한 꼴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진정성, 사상적 깊이"에 대해 더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견해는 물론 타당합니다만, 지난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이른바 궁정 쿠데타류의 정변이란 대부분 "시스템의 중추적 일부, 권귀 중의 권귀"들에 의해 벌어졌다는 점에서 아주 특이할 건 없다고 봅니다. 옥균뿐 아니라, 철종의 부마였던 박영효 등 정변 주체세력 대부분이, 곱상하고 뽀얀 얼굴을 한 귀공자풍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홍종우 역시 특별한 선견지명이 있었다기보다, 어느 정도의 선의를 품은, 힘깨나 쓰던 협객형 인물이었을 뿐 탁월한 경세가 반열에 끼기란 어렵다고 봅니다.

책은 대체로 재미있게 쓰여져 페이지가 잘 넘어갑니다만, 1) 묄렌도르프 (목참판)의 이름이 내내 "뮐"렌도르프로 쓰여져 그 점이 의아했습니다. 철자가 Möllendorff이므로, ü가 아닌 이상 "묄"이 맞겠습니다(현지인 발음이나 현행 외래어 표기법 규칙 등 어떤 기준에 의해서도) 2) 예컨대 다음 사진처럼, 일일이 원어(여기선 러시아어 키릴문자)를 병기해 주시는 성의는 감사하지만, 띄어쓰기가 안 된 부분이 있어서 좀 불편했다고나 할까요?

파벨(이름). 표도로비치(부칭). 운테르베르게르(성)


거사 직후 왜 개화파들이, "쇄국 정책의 대명사인" 흥선대원군을 자측에 끌여들였는지는 참 의문인데, 저자께서는 "텐진에 억류된 노인이 이후 현실적으로 정치에 영향을 끼치긴 어렵다"는 판단 하에, 대중의 호응과 관심을 끌기 위해 이름을 넣었다고 합니다. 이에 동의하지만(이하응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포퓰리스트스러운 면이 많았죠. 유능하긴 했으나), 사실 대원군이 골수에 박힌 수구파도 아니었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한때 큰 원성을 샀던) 유림의 지지를 얻으려 일종의 아젠다 선점으로 그런 정책을 취했을 뿐으로, 너무 도식화한 노선에 고정시킬 필요가 애초에 없다고 봅니다. 임오군란 때에는 왜 그런 스탠스였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개화-수구의 노선 분류보다는, 민씨 척족에 대해 이에 영합하느냐 아니면 모조리 축출하고 새 질서를 마련하느냐 쪽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개화파들이 공연히 이하응을 끌어들이는 인상을 주어 결과적으로 민자영의 반감을 불렀다"는, 인과 관계가 뒤바뀐 주장 아닌가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