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뺏는 사랑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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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심각한 범죄, 가증스러운 악행은 그게 악행인지 뭔지도 모를 태연한 외관 안에 싸여 있는 부류일 것입니다. 가장 간악한 범죄자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홀리면서, 자신이 피해자인지 뭔지도 모를 상황으로 몰고가 이익만 취한 후 버리는 유형입니다. 소설을 끝까지 다 읽어도, 누구를 비난하고 단죄해야 할지는 타깃이 정해집니다만, 과연 그 사람이 범인인지 아닌지는 100% 확신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범인 걔 아냐? 다 나왔던데 뭐." 같은 반응을 보이는 독자가 있다면, 작가의 섬세한 의도를 거의 다 놓친 불운한, 좀 둔한 이라고 하겠습니다.

한번 남에게 호구로 엮인 인물은, 20년이 지나도 똑같은 패턴의 사기 행각에 놀아날 만한 어리석은 그 뭔가가 체질로 자리하기라도 한 걸까요? 이건 소설을 읽을 독자가 직접 판단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이 소설은 인생의 두 단계, 즉 대학 신입생 시절과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중년 초입(모든 게 싫증나기 시작한다는) 두 국면이 한 챕터씩 교차하며 서술되는 형식입니다. 물론 결말은 현재로 복귀하여, 화자가 이해한(혹은 주장하는) 버전으로 통합되는 리얼리티이고요.

1인칭 화자 조지 포스는 대학 신입생 시절 한 동급생과 불같은 사랑에 빠지고, 1년 가까이를 연인으로 지냈습니다. 소설 후반부에 어떤 놈의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미인을 잘 다루는 특별한 뭔가"가 그에게는 있는가 봅니다. 신입생 시절에는 A와 B(라고만 적겠습니다. 소설 초반까지만 읽은 독자는 조지를 두고 1년 사이에 두 명의 연인을 갈아치운 바람둥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텐데, 그렇지는 않고 뭔가 심각한,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은 복잡한 사연이 뒤에 슬슬 설명됩니다)와 사귀었는가 하면, 4학년때는 레이첼과 진한 연정을 나눴고(중요 인물 아니지만 여튼 여자 사귀는 재주가 좋다는 걸 알리기 위해 작가가 배치한 듯요), 보스턴 최고의 잡지사에 근무할 땐 또 유능한 데다 빼어난 미모까지 갖춘 아이린과 거의 결혼 직전까지 갑니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순진한 듯 보이면서 명문대도 졸업하고 품격 있는 집안 출신인 데다(누구와는 큰 차이가 나죠), 사회인으로서 능력도 좋은(공인회계사 자격을 땄으며, 가장 위태로운 재정 상태의 회사에서도 마지막에 가서나 짤릴 전망일 만큼이죠) 조지가, 이런저런 여자들과 엮이면서 겪는 파란만장 연애담인가 지레짐작하는 독자들도 많을 겁니다. 성격들이 재미있게 꾸려진데다 정말 이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도 저는 책장 신나게 넘겨 가며 읽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 죽을 법한 사람이 죽기도 하며, 거액의 재산 행방이 오리무중이 되고, 남의 이름 훔쳐다 쓰는 게 버릇이자 근성이고 쾌락인 듯한 악당(들)이 나와 독자의  혼을 빼 놓는 이 소설은, 아주 치밀하면서도 신선한 구성을 장착한 미스테리물이(기까지 하)네요. 물론 못된 것들한테 걸려 휘청거리는 건 픽션 속의 1인칭 화자 조지지만, 그에게 그림의 소실점을 맞추고 행보를 따라가는 우리 독자들도 덩달아 현기증이 느껴질 밖에요.

(문제의) 두 남녀가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 캠퍼스를 누비며 다녔고, 그 중 한 사람은 졸업까지 한, 작품 절반의 배경이 되는 "마더 대학"은 어디일까요? 그런 이름을 가진 대학은, 적어도 코네티컷이나 미국 동부(뉴잉글랜드)에는 없습니다. 아마도 매더(철자가 Mather에요 -_-;:) 홀을 품에 낀 트리니티 컬리지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저도 그 근처에 다녀 온 적 있고, 중간 쯤에 로케이션으로 어사일럼 힐까지 언급되니 거의 틀림없습니다. 작가 피터 스왠슨도 학부를 그곳에서 졸업한 분이고 말이죠.

(약간의 내용 누설이 있으니 이하 대목은 조심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있지만 어떤 격언이라도 적용의 여지가 없는 예외, 적용되어서는 안될 금단의 선이 있는 법입니다. 하물며 저런, 상식의 범주에도 못 들 우스개 시쳇말의 경우야 두말할 나위도 없죠. 이 미스테리, 스릴러의 주인공인 "어떤 여자"의 경우, 본능으로 타고난 변신 그 자체가 유죄겠으며, capital punishment을 받아 마땅할 못된 범죄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다고나 하겠습니다. 남자라면 무릇 이런 질 나쁜 여성하고 엮여 행여 몹쓸 일이나 당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할 일입니다.

....만, 과연 우리는 조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도 될까요? 일단, 머리가 꽤 좋은 듯 보이는(대학교 1학년 때 전과목 A를 맞았다고 합니다) 누구누구가, 범죄와 사기와 기막힌 연기 재능을 타고나기까지 해서 그 모든 (인물들 말대로 너무 복잡한) 계획을 다 세워서 성공했다고 가정한다면, 글쎄요 그 누구누구처럼 머리가 좋지 못한 우리들로서는 차라리 부인을 하고 들어야 덜 자괴감이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지는 태연하게 로베르타 형사(이분도 꽤 미인인데, 수사 도중 조지한테 은근 호감을 보입니다. 이분까지 포함 모두 네 명이 조지에게 넘어왔군요)에게 설명하기를 "플랜 A가 설계의 본체이며, 플랜 B는 사실 되어도 그만 안 되어도 그만인, 실패시 어떻게도 둘러대거나 다른 계획으로 곧바로 넘어갈 수 있는 부수 장치이다"라고 합니다. 거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범죄자의 수법 진화를 예고하는 다차원 퍼지(fuzzy) 패러다임인 것 같기도 합니다.

조지처럼 순진해서 매번 범죄자들에게 이용당하거나 협박이나 당하는 위인이, 어쩌면 그렇게 간악하고 복잡한 흉계를 잘 이해하는 걸까요? 사실 여기서 우리는 제3의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와 누구는 근 이십 년 동안을 함께 호흡해 온 필생의 파트너였다든가... 너무 비약이 아니냐고 누가 지적한다면, 사실 극중에서 조지의 버전으로 설명되는 "누군가"의 설계 역시, 너무도 많은 우연의 개입과 행운의 보조가 있어야 가능한 finesse를 지향했죠. 이런 번거로운 설명을 시도하는 바로 그 사람이 더 의심스러운 겁니다. 여튼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는 건, 여자가 한번 마음먹고 메서드 연기를 펼치며 재주를 피우면 당해낼 재간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평균적으로 멍청하기에 그만한 연기력을 발휘하거나 대응할 능력이 없는 남자들은 조심하고 또 조심할 일입니다. 아 물론, 극중의 누구를 봐도 알 수 있지만, 이런 질나쁜 여자하고 엮이는 남자 역시 영혼이 깨끗한 쪽과는 또 아주 거리가 먼, 유유상종이라고 할 수 있는 화상이긴 하죠. 똑같은 것들끼리 사기치고 속고 하는 뭐 그런 저질 인맥. 뭐 언제나 보던 모습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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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철도 분실물센터 펭귄철도 분실물센터
나토리 사와코 지음, 이윤희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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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게 잔잔한 웃음을 머금게 할 줄 아는 작가가 진정 재주꾼입니다. 우리도 모든 역사...는 아니고 특정 역의 사무실에 가면 "유실물 센터"가 꼭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예컨대 당고개 같은 종착역에서 내릴 때면 선반 위에 (아마도 어떤 학생이 놓고 내렸을) 노트나 학용품 등이 봉투에 싸인 채 놓인 걸 보고 역무실에 갖다 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교통 카드를 놓고 내린 경우도 보는데, 그런 분은 나갈 때 어떻게 개찰을 했을지 모르죠. 아마도 친구들과 수다 떨며 긴 여정을 보내다 잠시 깜빡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오래된 피처폰을, (노인분들에게 흔한 습성대로) 테이프 등으로 둘둘 감아 둔 게(표면에 상처 안 생기라고 노인들이 자주 이러시죠) 어쩌다 주머니에서 떨어졌는지 좌석에 덜렁 떨어진 것도 간혹 봅니다. 역사 내 질서유지 요원으로 간혹 노인분들이 봉사하시는데 이런 걸 신고하면 남 일 같지 않은지 그렇게 반겨하시더라구요.

펭귄이 그리 귀여운지는 때에 따라 확신이 안 서고, 심지어 무섭기까지 느껴질 때도 있는데 이건 그야말로 일체유심조라고, 보는 이의 마음 상태에 따라 바뀌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은 꼭 뭐가 우스워서 웃는다기보다, 뭐가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지 않거나 정상 질서에서 약간 어긋난 바만 있어도 웃음이 터지곤 하는데, 생존을 위한 경쟁과 투쟁이 워낙 치열한 가운데 조금이라도 여유를 찾아 희열의 에너지를 축적, 보완하고자 하는 진화 과정의 몸부림 그 소산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아무튼 뭐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필요한 게 없거나, 반대로 엉뚱한 곳에 무엇이 버젓이, 보란 듯이 놓여 있으면 "이게 뭐래니?"하는 헛웃음이 누구에게서건, 어지간히 마음이 각박한 이가 아니라면, 터져 나오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분실물 센터에 펭귄이 놓여 있다면 더욱 그렇겠죠.

다치바나를 언제나 마음에 품고 있던 교코는 정이 많고 마음이 여린, 그래서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언제나 조연에 머물 수밖에 없던", 우리 주변에서 알고 보면 흔히 보는(어쩌면 우리들 자신인) 그런 여성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라 해도 꼭 고양이 집사 구실을 자처하는 건 아니고(남의 반려 동물에는 관심을 보여도 자신이 키우는 건 싫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아끼던 고양이가 죽었다고 유골함까지 항상 끼고 다니는 이들은 더욱 드물게 보는데, 놀랍게도 이 유골함이 든 백을 전철에서 잃어버리고, 똑 같은 겉모습을 한 다른 유실물 당사자가 그녀의 물건을 (잘못) 먼저 찾아가기까지 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란 확률적으로 0에 가깝죠.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의 사건, 그 빛깔도 비록 다른 이의 것과 서로 닮았을망정, 100% 같은 건 극히 드뭅니다. 우리가 사는 소소한 순간이 알고 보면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한 번 벌어지기 힘든 기적에 가까움을, 이 짧은 에피소드는 잘 전하고 있습니다.

키가 큰 소헤이는 (바로 앞 에피소드에서 교코와 잠시 엮이는 걸 우리 독자들이 보았듯) 이 분실물 관리실의 책임자(?)입니다. 이번에는 은둔형 외톨이인 후쿠모리 겐과 마주치게 되는데, 하루종일 게임 캐릭터만 붙들고 사는 한심한 은둔형 외톨이 아니라 멀쩡한 사람이라고 해도, 느닷 얼척없는 곳에 펭귄이 떡 자리하고 있으면 "이거 무슨 서커스단이에요?"하고 놀라는 게 당연합니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에만 침잠하여 정상적인 인간들과의 소통 감각을 상실하면, 사실 놀라야 할 것에 놀라지 않고 당연한 데서 충격을 받는 식으로 감성이 왜곡될 수 있는데,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겐은 아직 가망이 남아 있긴 한가 봅니다. 보통 사람 이름자를 적을 땐 한자나 가타가나로 적는데, 버젓이 그 일부가 히라가나로 적힌 것까지 겐은 정상이 아닙니다. 헌데 게임만 하다가 정말 정신에 착란이라도 온 건지, 꿈이 아닌 현실에 "미소녀" 하나가 떡 나타나 이 낙오자에게 온갖 호의를 베푸...려는 듯 보이네요. 이는 펭귄의 마력이 발휘되기라도 한 건지, 아님 그 역시 냉혹한 현실의 알레고리이기라도 한 건지, 독자가 읽고 각자 판단할 일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유형은, 남에게 잘 보이려고 혹은 이용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남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도 괴로우면서 연극을 하는 유형입니다. 이런 사람들 중 일부는 "여튼 내가 남을 위해 손해를 본 건 사실 아냐?"라고 어느 순간 분노와 회한을 느끼고, 그 다음부터는 진짜 사기를 치려고 나쁜 마음을 먹기도 합니다. 무슨 부조리극에 나오는 괴인 캐릭터가 아니라, 주위에서 의외로 간혹 목격되는 불쌍한 인간형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다이라 지에는 그 정도로 가망 없는 사람은 아니고, 오히려 너무 착해서 매번 누구에게나 손해를 보는 사람이라고 파악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남편 미치로는 제가 보기에 참 답답한 사람인 게, 아내 지에가 이처럼 대책 없이 착한 사람이면 자기도 그에 맞는 세팅을 하고 살아야지, 그냥 여성 누구의 "추상적인 남편" 역할, 아니 연기에만 충실해서 결국 아내에게 큰 부담을 준다는 겁니다. 여튼 여기서도 우리의 펭귄과 키 큰 소헤이가 등장해 꼬인 일을 "해결"하는 데 한 몫 거듭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여태 무슨 <환상특급>이나 보듯 기묘한 사연의 굴곡, 미스테리를 다 해결해 주는 사연입니다. <환상특급>은 사실 현실의 모순을 고발할망정 그간 벌어진 초현실의 배후를 시원히 해명하지는 않는데, 이 마지막 이야기는 (아주 속시원하지는 않아도) "왜 뜬금없는 펭귄이 그 자리에 있어야 했는지"는 밝혀 주고 마무리짓습니다. 앞의 세 사연만 해도 우리 독자들의 마음이 훈훈해지기엔 충분했으나, 이 마무리로 인해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지는 듯하죠. 하긴 잔잔한 일상을 성실히 살며 다른 사람에게 상처 안 주고 밥벌이를 하려 애 쓰는 우리들 모습이 어쩌면 다 기적이고 경이입니다. 최소한 이 흐뭇한 소설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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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패턴 베트남어로 쉽게 말하기 (초급과정) - 베트남어 나도 말하길 원해 나말해
윤선애 지음 / PUB.365(삼육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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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십여년 전부터 베트남에 진출하는 한국인들이 부쩍 늘어났는데 현지 공장 건립을 통해 저렴한 원가의 이점을 가진 생산 기지 확보를 노리는 분들도 있고, 부동산 개발 쪽에 관심을 갖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책에도 나옵니다만 베트남은 남북으로 굉장히 길게 뻗은 나라고, 통일보다는 분열 상쟁의 시기가 더 길어 아직도 지역 간 화합이 완전히 이뤄지지 않은 등 여러 복잡한 내부 사정이 있습니다. 어떤 외국에 진출하는 분들이 공장 부지 확보(겸 저렴한 현지 노동력)에도 관심을 갖고, 다른 이들은 부동산 개발 쪽에도 관심을 쏟는다면 땅이 엄청 크기라도 한가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이상하게도 베트남을 작은 나라로 인식하지만 면적은 말레이시아(이상하게도 대국이란 이미지가 강하죠)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안 납니다.

인구는 9천만을 훌쩍 뛰어넘으니 사업가들이 이 나라의 장래에 눈독을 들이는 게 너무도 당연하며, 우리처럼 벌써부터 인구 증가세가 조로 현상을 보이지도 않고 이제 갓 중산층이 커나가는 단계이니 미래성장 동력을 여기서 찾는 게 당연합니다. 아직 믿음직스러운 번역기가 제대로 출시되지 않았으며, 현지인들로부터 신뢰를 쌓으려면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감정을 듬뿍 담은 채 개성적인 표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이 엄청 중요합니다. 김일성이도 중국어를 유창하게 잘 해서 중국인들의 환심을 샀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 주위에도, 현지를 자주 드나들다 보니 베트남어 몇 마디쯤은 아예 습관이 된 분들이 많은데요. 이처럼 언어는 습관이며, 언어학적으로 너무 심각하게 바탕을 깔고 시작하기보다는 그냥 운동하듯이 시간 날 때마다 몇 가지 패턴에 부착된 문장, 대화를 일상적으로 입에 달고 꾸준히 반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사람의 두뇌는 한 가지를 익히면 변형하여 응용하고 싶어하는 게 거의 본능입니다. 패턴이 머리와 입(이게 중요합니다), 습관 속에 자리잡으면 언어의 정복까지 먼 길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베트남인들의 역사는 중국과의 항쟁사라고 요약하는 입장이 있을 만큼, 그들의 민족적 자부심은 엄청 강한 걸로 유명합니다. 이런 베트남인들이건만, 그들에겐 유감스럽게도 고유의 문자가 없습니다. 바로 옆 태국 같은 경우 아랍어나 힌디어 처럼 자신들만 쓰는 문자 체계가 있는데, 베트남인들은 마치 중국인들이 주음부호를 병용하듯 알파벳을 일부 변형한 시스템을 씁니다. 자국의 주체적 노력 없이 외세에 떠밀려 근대화가 이뤄진 아픈 과거의 역사를 지닌 민족들이 흔히 이런 모습을 보이는데 터키도 베트남과 이 점에서 사정이 비슷합니다. 외국인 학습자인 우리로서는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습니다.

베트남어는 중국처럼 성조가 있는데(태국어도 그렇고요), 이 점도 한국인들의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지요. 헌데 요즘은 중국어 잘하시는 분들이 워낙 늘어나서, 이제는 장벽이 아니라 "그 어려운 성조를 배운 겸에 다른 외국어 하나 더 익혀 놓자!"며 오히려 의욕적으로 접근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물론 표준 북경어와 베트남어의 성조 체계는 매우 다르지만, 언어는 입에 올리고 사는 습관이기에 자꾸 입으로 발음하고 소리내어 버릇하면, 아 이처럼 소리의 높낮이로 의미를 구별하는 문화권, 언어 체계도 있구나 하며 결국은 자연스레 받아들여집니다. 성형 수술이 발달하면 길거리에 다 미인들만 남아날 것 같지만 오히려 용한 의사들의 공통된 시술 개성이 훤히 얼굴에서 읽혀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타고난 아름다움을 가진 이들이 더 빛나듯, 번역기 없이 자유자재로 말하는 이들의 진정성은 현지인들이 더 알아줍니다. 한류 열풍에 빗대어 말하자면, 인공적인 세련미가 없어도, 자연스러운 그루브와 무대 매너, 가창력으로 각광받는 걸그룹 마마무의 성공사례와도 비슷하죠.

"회사"는 비즈니스 회화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용어이므로 성조와 함께 정확히 익혀둬야겠습니다. 왜, cong이라고 쓰면서 "꽁"이 아닌 "꼼"인가? 이런 걸 불편해하며 자꾸 부정적 생각을 갖는 분들이 있는데, 협소한 자신만의 상식에 갇혀 뭘 자꾸 재단하려 드는 습성은, 조직에의 부적응, 학습 능력 장애를 가져옵니다. 언어는 다 그 나라만의 고유한 관습이 따로 있는 법이며, ng과 n과 m이 서로 통하면서 미묘히 구별되는 양상은 프랑스어, 스페인어, 심지어 일본어에서도 관찰됩니다. 본인이 몰라서, 무지해서 근거 없이 "틀렸다"고 여기는 건 그저 그 자신의 부적응성을 노출할 뿐입니다. 현지인들과 친해지며 경제적 실리를 얻으려면 그들에게 뭘 가르치려 들지도 말고 그들의 습관에 익숙해지며 어울려 뒹구는 게 최상의 방법입니다. 어설프게 뭘 지적하려 드는 사람이 현지에 잘 적응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꼼 띠"는 한자로 쓰면 "公司"입니다. 벌써 중국인들과 자주 접촉하는 이들은 확 익숙한 느낌이 오죠? 중국도 회사를 공사라고 쓰니까요. 심지어 성조까지, "솔"에 가까운 음이라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중국어 公司도 두 음절 다 제1성으로 내기 때문이죠.

다 비슷한 건 아니고 당연히 차이도 있습니다. 우리나 중국이나 베트남이나 "사악한 정령"에다 魔를 쓰는 건 같은데, 중국어의 魔는 서서히 올려가는 제2성이며, 베트남어의 "마"는 계속 평평한 솔(이 책의 설명을 따릅니다)음이라서 매우 다릅니다.

또이 쾌: 저는 잘 지냅니다.
아잉 쾌 콤: 당신은 잘 지내십니까?

이처럼 베트남어는 조사나 연계사 없이 단어만으로 뜻이 통하기도 하는데? "콤(khong)"은 여기서 "~가 아니다"라는 부정이 아니라, 별 뜻이 없이 의문문을 만드는 기능입니다. 같은 단어로 기능만을 다르게 써서 의미를 구별하는 셈인데, 이 책에 나온 대로 문장을 통째 외워 "패턴"으로 학습하면(자꾸 반복하고 따라해봐야 합니다) 어느새 "본래 그런 것 아니었어?"하고 몸이 익숙해합니다.

제가 예전에 프랑스어 공부할 때도 절감했지만, 외국어는 종이책 가지고 백날 파 봐야 다 소용 없습니다. 오디오 자료가 학습에 언제나 따라와야 하는데, 책에 나오는 패턴별 문장을 모두 현지인의 음성으로 읽고 담은 MP3 파일을 출판사 홈페이지(여기에요 http://www.pub365.co.kr/thought/book/view.asp?bidx=486&page=1&stype=&skey=)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저자 윤선애 선생님 목소리가 아니라 어떤 남자분인데, 또이 헙(나는 공부한다) 이러면서 약간 어눌한 듯 한 문장 한 문장이 다 녹음되어 있으므로, 책에 나온 한글 표기가 아니라 이 음성 자료를 통해 따라해 봐야 합니다. 다 합쳐서 150Mb도 안 되는 부담 없는 용량이며, 책도 중요하지만 이 오디오 교재가 더 중요하다 생각하시고 시간 날 때마다 반드시 입으로 따라해야 합니다. 홈페이지에 가면 저거 말고 워드노트, 패턴 정리 pdf도 함께 받을 수 있는데, 책도 예쁘게 편집되었고 다 좋지만 저는 무엇보다 이런 음성 파일 부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게시된 책 표지(jpg 파일)가 달라서 이건 다른 책 아닌가 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 그 책 맞으므로 갈등하지 마시고 그냥 다운받아서 들으세요.

베트남에 대한 간단한 상식을 알 수 있는 자료도 있고, 학습자들이 언제나 헷갈려하는 호칭 문제도 깔끔히 정리되었습니다. 영어도 그렇고 사실 외국어의 학습은 단어 하나하나를 파고든다거나(교양으로 좋지만) 문법을 깊이 연구하기(고급 사용자나 라이팅 하는 이들에게는 필수)도 좋지만, 당장 현지인들과 부대끼며 써 먹기에는 이런 패턴 학습, 통째 외우기처럼 가성비 좋은 게 또 없습니다. 이 출판사에서 비슷한 구조로 영어 참고서도 나와 있는 것 같은데 당장 의사소통이 급하신 분들은 학교 다닐 때 배운 문법은 잠시 잊고 이런 패턴 학습으로 한번 시도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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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왜 실패하는가
일레인 카마르크 지음, 안세민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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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국민을 걱정해 주는 사회가 아닌, 거꾸로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하고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사회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세계 각지에서 문제 있는 대통령들이 자국민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시민들로부터의 관심까지를 모으는 형편인데, 현재 독재 체제로의 개헌을 시도하며 정당치 못한 권력 기반을 굳혀 가는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같은 이가 그 대표적 예입니다. 트럼프 역시 하필이면 역사상 가장 원성 높고 큰 실패를 저지른 예로 꼽히는 닉슨의 전례를 따라하다(따라한다는 의식도 없었겠지만) 지금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한국은 광복 당시 유진오 박사의 초안에 따라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헌법을 마련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변형된 대통령제를 끌어들여 이후 많은 부작용을 겪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또 내각제 개헌을 하자는 분위기에 대해서는 많은 국민들이 거부감을 갖습니다.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금지옥엽 보듬듯 안고가지도 못하는 이 대통령제의 딜레마, 우리뿐 아니라 전세계가 고민인 듯합니다.

저자는 그렇게 말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제왕적 대통령이나 수사적 대통령이 아닌, 관리자형 대통령이다!" 느낌표까지 붙여 강조한 이 한 문장에는, 여튼 지양(止揚)되어야 할 두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유형까지 제시했다는 의의도 있습니다.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할 지는 모두에게 분명한 건 아니지만, 무엇을 극력 회피해야 할 지는 어쩌면 더 많은 구성원들에게서 합의를 끌어내는 지도 모르기에, 이 의의는 생각보다 큰 것입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국민의 복지와 행복을 무시하는 폭군형 지도자이거나, 반대로 실천에 옮기는 바는 하나도 없으면서 듣기 좋은 말로 국민을 현혹하는 선동가이거나, 이 두 유형이 대표한다는 뜻도 되죠. 문제는, 이 두 유형이 지난 세계 역사 곳곳에 출현했고 지금도 횡행하면서도,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거나 운명처럼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필리핀의 두테르테 같은 이가 또다시 권좌에 오른 걸 보면, 과연 역사에는 발전이나 진보의 희망이 남아 있는지 의심까지 생깁니다.

저자는 일단 "모든 대통령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건지"의 의문부터 제기하며, 시스템 자체가 가진 필연의 재앙인지, 그렇지 않고 결함 많은 지도자 개인의 문제였는지부터 짚고 넘어갑니다. 만약 후자에 더 큰 책임이 있었다면, 이는 우리 국민이 시스템 개선을 통해 충분히 극복이 가능하다는 어떤 희망이 생기기에 좋습니다. 사실 대통령제는 몇몇 후진국에서 국민 기만의 수단으로 마련한 독재의 장막으로 시작한 게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장 아득한 시초, 원형 중 하나인 미국 독립 전쟁의 산물로서 그 당시 북미의 현명하고 사려 깊은 지도자들이 지혜를 애써 짜내 안출한 제도의 산물이기에, 대통령(제)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라는 점에서, 여튼 우리 현대인들이 이 희망의 씨앗을 질식시키지 않고 끝까지 갖고 가야 할 중대하고 소중한 유산입니다.

저자는, 성공하는, 적어도 실패는 하지 않는 대통령의 덕목으로 세 가지를 꼽습니다. 1) 정책 2) 소통 3) 실천력. 이 셋은 사실 대통령 뿐 아니라 어느 회사, 조직, 소집단의 리더에게도 공통적으로 꼽히고 요구되는 덕목인데요. 작든 크든 일국의 대통령에게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1) 정책은 다른 말로 바꾸면 일국의 국민들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그저 듣기 좋고 마음만 놓이는 미사여구 정책집, 곧 공약(空約)이 되어 버릴 말의 성찬만 내어 놓느냐, 아니면 소박한 약속이라도 작은 것들이 서로 엮이고 모여 화학적 시너지를 발생시킬 총체적이도 단단한 실체를 구비했는가, 뭐 이런 차이가 있겠습니다. 정책이 없는 대통령은,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닌, 그저 자신의 자의(恣意)로 대중 위에 군림하려는 원초적 욕구만 가득한 폭군에 다를 바 없습니다.

2) 소통은 특히 이 책에서도 여러 차례 사례가 언급되는 로널드 레이건이 종래 바람직한 모범으로 거론되기도 한 덕목이죠. 다만 이 책에서는 레이건 역시 신랄한 비판 대상으로 삼는데, 시대 환경이 크게 바뀐 현재에서는 당연한 태도라 하겠습니다. 이라크 전쟁은 조지 W 부시 뿐 아니라 영국의 당시 총리 토니 블레어까지도 실패의 구렁 속으로 몰아넣은 사태로 꼽힙니다. 이 책은 물론 미국 저자에 의해 쓰여진 책이고, 명실공히 대통령제를 채택, 운영하는 미국의 사례에 집중하기에 토니 블레어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만, 제가 해당 챕터를 읽고 느낀 건 결국 이 사태로부터 추출된 교훈은 영국의 이후 역사 진로에도 고스란히 적용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 책은 특히, 대통령제는 대통령 개인의 판단이 제왕적으로 마구 실현, 적용되는 게 아니라, 엄연히 헌법적 정당성을 갖고 마련된 관료제, 자문기관, 기타 견제와 균형을 실천할 국가 기관에 의해 유기적으로 협력을 받아 가며 실천되어야 함을 지적합니다. 왜 부시는 이라크전에서 총체적 실패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가? 답은 기관 사이의 협조가 부족했고, 그 방대한 조직이 생산하는 알토란 같은 정보가 윗선에 보고되어 정책 결정에 도움을 줄 경로가 심각한 장애를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유능한 관리자형 대통령"의 필요성을 다시 강조합니다. 관리자는 그저 시시콜콜하고 쫀쫀한 디테일에 집착하는 편집증 환자가 아니라, 존재하는 시스템의 미덕과 기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영리한 운영자라야 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현대 국가는, 과거의 미비한 시스템에 어설프게 의존해서 아슬아슬하게 굴러가는 양상이 아니며, 얼마든지 든든하고 내실 갖춘 시스템으로부터 "최종 의사 결정권자"가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왜 잘 하지도 못하면서, 남의 도움도 한사코 마다하다 재앙을 자초하는가? 이 통렬한 질문이야말로, "관리자형 대통령"이 차라리 제왕적 대통령보다 더 되기 힘든, 그러나 국민들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유형임을 잘 설명해 줍니다.

독재는 차라리 무능하고, 성과도 없으며, 독재자 자신까지 실패로 몰아넣는 환각적, 자폐적 몸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효한 충고를 잘 듣고, 다가오는 위험의 신호를 제때 파악하며, 혹 미처 방지하지 못한 재앙은 어디까지나 시스템이 마련한, 혹은 충분히 제공 가능한 도움에 의존해서 해결할 것, 이것이 바로 1) 정책적 준비가 잘 되어 있고, 2) 관료들과 국민과 잘 소통하며 3) 필요하고 적절한 집행 수단만 딱 골라 경제적으로 발휘하는 집행력, 실천력을 갖춘, 성공하는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자 간절한 희망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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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라이언스 -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재 관리법
리드 호프먼 외 지음, 이주만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예전에 저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어느 교수님의 저서, 그리고 토론집에서 그런 주장을 발견한 적 있습니다. "임금에는 생활 보장의 요소와 근로 대가의 요소 모두가 포함된다." 지금은 글쎄요 이게 당연한 상식이 된 세상일지 모르겠으나 과거에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의 정당성이 어디까지, 또 어디에서 근거를 마련할지 한창 논쟁이 진행 중이었기에 이게 핫한 이슈였습니다.

현재 근로관계(고용관계)의 유연성 이슈를 놓고서는 여전히 사회 각 계층의 이해를 놓고 대립이 진행 중입니다. 사용자와 노동자는 기본적으로 대등한 관계에 서야 한다며 "함부로 남용하는 해고권"은 철저히 법 밖으로 퇴출되어야 한다는 이들도 있고, 반대로 생산성의 극대화와 보다 많은 이들의 노동 기회 마련을 위해 "자유로운 해고"가 차라리 불황 타개의 돌파구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일부 어르신들이 향수를 갖고 있는 "평생직장"의 신화는 이미 깨어져 지구상 어디에서도 구현되지 못하는 실정이며, 어차피 이 신화도 노동자측에 마냥 유리한 이념이라기보단 사용자 측의 시혜적 스탠스라든가 자본 측의 철저한 주도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들어가는 패러다임이므로, (부담스러워할) 사용자나 (인식이 바뀌고 현실을 직시해야 할) 노동자나 모두 만족 못 할, 언제 깨어져도 깨어져야 할 환각이었음은 분명합니다.

"동맹(alliance)"은 여러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나치 독일을 격멸하기 위해, 기존에 완전히 다른 이해관계를 지녔던 여러 국가들이 맺은 군사 협력 관계도 이 단어로 표현했으며(Allied Forces), 우리 역사에서는 드물게도 자리 보전이 위태로웠던 공양왕이 느닷 권신 이성계에게 제의했던 게 군신(君臣) 간의 "동맹"입니다. 물론 공양왕의 측근들은 "천지가 개벽한 이래 군신의 동맹 같은 해괴망측한 일은 없었다"며 격렬히 반발했고, 이성계 측에서는 이 동맹이 장차 새 왕조의 개창에 큰 걸림돌이 될까 우려한 끝에, 이 제안은 얼마 안 가 무마되고 우리가 아는 바 새 체제의 시작이 진행되었지요.

거창하게 고사(古事)를 거론한 건, 전통적인 노사관계가 현재 전세계에 걸쳐 패러다임적 도전을 맞는 요즘, 어쩌면 기존 시스템의 모순과 비능률 요소를 일거에 걷어낼 혁신이 이 "얼라이언스"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 책을 읽고 난 후 들어서입니다. 사실 이런 식의 고용 형태는 (전통 노사관계가 위기를 맞았다는) 요즘에서야 대두한 게 "전혀" 아닙니다. 이를테면 로펌은 일찍부터 주종 관계가 불분명한 파트너십 형태이며, 소위 "생협" 조직에 몸 담는 분들은 애초에 누가 누구에게 월급을 주는지도 관계 파악이 애매한 편입니다. 이런 평등한 생산 조직 참여 패턴이 마냥 바람직하다는 건 아니고, 이런 조직이 절도(節度)와 기강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성원 개개인의 자질과 모럴이 일정 수준을 넘어야만 합니다.

애플이나 구글의 경우 직원 개개인이 대등한 입장에서 아이디어를 안출하고, 충분한 자율이 부여되어도 업무의 질이 떨어지지 않기에 그런 형태의 운용이 가능한 거죠. 이 책은 주로 실리콘 밸리의 예를 들고 있는데, 이런 형태의 느슨한 듯하면서도 고도의 업무 효율, 유연성을 유지할 수 있는 조직이 되려면, 역시 균질한 인쟁 pool 사이에 자율적이면서도 꽤 유기적인 네트웍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부정과 정실이 개입해서도 안 되며, 투명성과 업무창의성이 자발적으로 유지되어야 "얼라이언스"가 존립 가능하다는 자각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출신 대학을 놓고 어떤 카스트 구조니 뭐니 하면서 이의 강제적, 전면적 해체를 주장하기도 하는데 일단 사적인 조직에 대고 국가적 강제를 들이대는 자체가 자율과 민주주의 원리의 중대한 위반입니다. 뿐만 아니라 학창 시절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인맥과 평판이야말로 고과의 기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효한 조직의 건설과 점검, 지속적인 작동을 위해 생각외로 중추적 기능을 행사한다는 결론, 이 책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었습니다. 비공식적으로 아이비리그 출신들이 미국 주요 정부 기관을 이끌어 나가는 현실에 비추어 보아 이는 이미 유효함이 검증된 모델이기도 합니다. 조직의 틀을 비공식과 공식 두 가지 프레임으로 묶어, 상황에 따라 A 혹은 B를 유연히 끌어댈 수 있다는 논리가, 여태 경색되고 침체된 국면이었던 경영 이론 중 조직론에 아주 신선한 활기와 충격을 줄 듯합니다. 이론을 떠나 우리처럼 동문회 네트워크가 촘촘히 구성된 사회에서 적용해 보기에 대환영인 그런 시론이기도 합니다. 현실을 외면하고 비뚤어지고 종래의 틀에 고착된 사고 방식으로는 좀처럼 수용하기 힘들, 멋진 아이디어로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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