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의 감각, 초연결지능 - 네트워크 시대의 권력, 부 , 생존
조슈아 쿠퍼 라모 지음, 정주연 옮김 / 미래의창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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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감"이란 말은 예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다만 그 정확한 뜻에 대해서는 논자마다 입장이 제각각이며, 과연 모든 이에게 고르게 그 "여섯번째(라는) 감각"이 발달해 있는지(다섯 개의 기본 감각은 개체에 따른 편차가 크지는 않고, 작동 기제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규명되어 있죠), 아니면 아예 그 존재 자체가 과연 믿음직한 기반을 마련하기나 했는지에 대해서도 다 의견이 갈립니다. 한편으로, 어떤 불가해한 보충적 감각의 총체가 없다면, 고지식하게 다섯 개의 센스(센서)만으로 인간이 살아남기란 매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문명과 집단 생활, 시스템의 발전이 일종의 FOOLPROOF를 마련함에 따라, 우리 인간은 점점 "육감"이 퇴화하는 중인지도 모르겠고요. 그렇다고, 육감이 혹 야생의 하등동물에게나 발달된 속성이라고 해서 이의 자가장착을 마다할 인간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남의 기분을 잘 읽는 능력, 상황에 맞게 머리를 잘 다듬고 옷을 근사하게 차려 입고 나가는 능력은 우리가 다 "센스"라고 부르는 것들인데, 이게 다 생존을 원활히 꾸려 나가기 위한 소중한 자산이죠. 어쩌면, 머리가 좋다, 돈이 많다, 잘생겼다, 이런 칭찬보다 더 듣기 좋은 게 "센스 좋다"란 말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건 누구한테 배운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라, 왠지 타고난(혹은 좋은 환경에서만 체득된) 장점인 것 같아서이지요.

그런데 이 책은 "제7의 감각"으로서, 이른바 "초연결지능"을 거론합니다. 육감이란 말도 분명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거니와 그 자체로 포괄적(보충적)인 개념인데, 그것과는 또 별개로, 전혀 관계 없어 보이는 다른 지점(영역, 지식, 경험, 인간망)을 "연결"시키는 감각을 따로 이렇게 불러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어떤 능력이나 자질, 특성이 따로 이름을 가져야 한다면, 그 이유는 대개 분명합니다. 그게 목표를 이루거나 개체의 생존을 도모함에 있어, 최우선순위를 둘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4차 산업 혁명"이라는 키워드로 대변되는 현재의 트렌드(많은 이들이 그 정체를 몰라 불안해하기만 하는) 속에서, 변화의 바른 방향을 예견하고 성공적인 적응, 나아가 승자로서의 레이스를 이어가기 위해, 개인이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게 이 "연결지능", 아니 그를 넘어선 "초"연결지능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말은 사실 우리에게 전혀 낯선 개념도 아니고, 이미 그 중요성이 (워딩만 달리하여) 큰 인기를 끌어가며 강조된 바 있습니다. 잡스가 타계한지 근 6년이 되어갑니다만, 혁신의 아이콘으로 널리 숭앙되었던 그가 혁신을 정의한 말이 있는데 그게 바로 "연결"입니다. 애플의 아이폰에 적용된 기술 중 잡스가 실험실에서 직접 머리를 짜 내어 안출(마치 토머스 에디슨처럼)한 건 거의 없습니다. 그는 타 여러 섹터에서 자생적으로 속출하던 여러 기술을, 디바이스 한 대에 집약 연결하여 모든 이의 손에 한 대씩 쥐어 주겠다는 생각을 최초로 했을 뿐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이 최적의 효용과 경제성으로 투입, 조립, 화학적 결합을 이룰지에 대해 남들보다 탁월한 안목을 지녔던 셈인데, 그게 바로 초연결지능이라고 볼 수 있죠. 다른 말로 하면 "혁신의 본체, 본질"이겠고 말입니다.

저자는 우리 인류의 지난 역사에 주목합니다. 큰 사이즈의 함포, 폭발력 좋은 화기, 적은 기름만 먹고도 쌩쌩 달리는, 그러면서도 잘 부서지지 않는 탱크, 이런 걸 가진 집단과 조직이 패권을 차지하는 게 정석이었던 과거. 그러나 현재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한 곳에 엮이기(꼭 물리적 동일 공간을 뜻하는 게 아님은 당연)만 하면, 그 연결만으로도 전에 없던 권력이 생성되는 게 현대의 마력이라는 겁니다. 더 놀라운 건, 우리들 개개인이 특정 배후 권력의 수단으로 쓰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그래선 안 되죠), 우리 자신이 누군가의 사이에서 연결 지점으로 작용하여, 새로운 권력의 창출과 변혁의 주체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강조한다는 겁니다.

줄리언 어산지라든가 스노든 같은, 아무 배경이나 자산도 없던 "일개인"이 세계 역사를 바꿔놓을 만한 파장을 일으킨 걸 보십시오. 그들이 그런 사고를 칠 수 있었던 궁극의 동력은, 바로 네트워크의 힘입니다. 거대 권력 집단이 통치와 지배의 편의를 위해 깔아 둔 네트워크가, 이들 영민한 개인에 의해 허점이 발견된 후에는 오히려 권력 균열의 단초를 제공하고 만 것이죠. 이 때문에 네트워크의 마력이 개인과 세계를 빼곡히 감싸고 도는 지금 같은 세상에선, "민주화"의 의미가 전혀 새롭게 다가오기도 하는 겁니다.

사실 돌이켜 보면, 이른바 "엠파이어 오브 건파우더"의 시대에도, 그저 물량만 가뜩 쟁여 놓는다고 패권이나 번영이 절로 찾아드는 건 아니었습니다. 자원이나 무기의 소재를 정확히 알고, 이의 유효한, 경제적인 활용을 도모할 줄 아는 어떤 "지혜"야말로 최후의 승자를 결정하는 요인이었다는 겁니다. 어쩌면 우리는 오랜 역사를 통해 참된 생존의 비결을 이미 감지해 왔고, 이를 다만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말로 표현하는지도 모릅니다. 무관해 보이는 두 개(혹은 그 이상)의 적절한 접합, 화학적 결합을 절묘히 이룰 때 폭발적인 시너지를 내게 하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지혜이며, 한 고제 유방 같은 이도 결국 이 능력 하나로 천하를 손에 거머쥐었는지도 모릅니다. 혁신의 시대에 이 결합, 연결의 지혜야말로 우리가 가장 크게 염두에 두어야 할 계발 대상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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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의 충격 - 비트코인, 핀테크에서 loT까지 사회구조를 바꾸는 파괴적인 기술
<블록체인의 충격> 편집위원회 외 지음, 김응수 외 옮김, 마부치 구니요시 감수 / 북스타(Bookstar)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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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레이 커즈와일이 혁신의 "특이점"을 예견한 이래 우리는 놀라운 기술 진보와 급변하는 환경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커즈와일이 예견한 각론은 상당 부분이 틀렸거나 전망의 투명도가 개선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변화의 양과 질 면에서 이전 인류가 겪은 체험과는 비교 자체를 거부하는 격변의 세월을 우리가 살아내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상상의 타겟은 현실에서 목표를 비껴갈 수 있을망정, 상상의 볼륨만큼은 어느 저자나 예언가, 혹은 소설가의 거창한 담론이라도 현실의 그것이 이에 버금가지 않을 만큼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각각의 관점에서 아무 소리나 떠드는 듯해도, 지나 놓고 보면 경로에서 차이가 날망정 어느새 (살짝 바뀐 모습으로라도) 현실화하여 있습니다.

본디 자본주의는 신용을 바탕으로 성립합니다. 중화 제국 오천년사(史)에서 그토록 통일 지배체제의 수요가 강했던 게, 마음 놓고 거래를 수행할 수 있게 상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어떤 권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돈을 떼어먹으면 끝까지 추적해서 채무를 상환받을 수 있는 공권력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행을 보장받을 수 없다면 시중에 돈이 돌 수가 없습니다. 서유럽이 독자적인 논리와 구조로 세련된 경제 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건(예:환어음), 열악한 여건(예:통일된 중앙 정부나 권위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신뢰, 신용"이라는 그들 고유의 거래 문화가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진화를 거듭하며 장점을 잘 보전해 왔기 때문입니다. 사회 제도의 핵심은 종교나 문화, 정치 이전에(아니, 기저에) "경제"가 차지하며, 부(富)와 계약의 연속성은 곧 문명 지속의 담보를 뜻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비트코인이란 거래 수단을 언제, 누가, 어디서 최초로 발명, 고안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몇 년 전 큰 부도(不渡) 사태가 도쿄에서 벌어지기도 했고, 근원적으로 그 실체를 담보해 줄 어떤 권위 있는 조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지금껏 존재해 왔던 모든 교환 시스템을 능가하고도 남을 효율성을 갖춘 이 비트코인의 장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습니다. 투기성 심한 자산(자산성이 있기나 한지도 의문이었고)을 부둥켜안고 있어 봐야 사기꾼들의 선동에 속아 돈만 날리기 쉽다는 경각 풍조가 정설로 자리잡기도 했습니다. 사실 비트코인이 제아무리 태생적으로 장점을 갖췄다 해도, 경제는 이론이 아니라 현실인 이상 경제 주체들의 믿음을 얻지못하면 기껏해야 장난감(더 나쁘게는 범죄에의 악용)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블록체인이란, 경제 "외적(外的)" 섹터에서 느닷 이 비트코인(뿐 아니라 여하의 전자 결제 수단)의 취약성을 보완하고 나선 흑기사입니다. 이 자체는 네트워크 테크놀로지의 독자적 진화 결과 등장한 기술이지만, 진척이 이뤄지다 보니 비트코인과 결합하여 익명성, 보안성 면에서의 약점을 메워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속도, 단순 편의"라면 순정 비트코인 시스템만으로도 이미 확보된 장점이었습니다만, 이제 그간 이용자들 사이에 못내 미심쩍었던 취약 부분이 어느 정도 해결의 돌파구를 찾은 셈입니다.

과거에는 특정 분야의 연구가 동력을 얻어 빠른 진전을 보이다가도, 어떤... 근본적이다 싶은 장애 요소가 등장이라도 하면 전망이 어두워지거나 아예 폐기되기도 했죠.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문명의 전 분야가 워낙 파괴적 혁신을 거듭하다 보니,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원군을 얻어 제2의 도약기를 맞기도 합니다. 이 블록체인의 경우가 딱 그렇습니다. 현재 시점에서 "비트코인의 암울한 장래"를 논한 십 몇 년 전 글을 읽어 보면 무슨 석기시대의 넋두리 같습니다. 물론 물리학이나 인문, 어학 등 본성상 단계 도약이 힘든 학문에서는 사정이 다르고, 오히려 거장의 고전을 읽고 나서야 영감이 얻어지기도 하죠. 하지만 전산학이나 로봇학습("인공지능"은 마케팅 용어고 요즘 공과대학에서 확립된 term은 "로봇학습이론"이죠), 또는 금융공학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릅니다. 물론 기초가 탄탄히 학습되지 않은 엉터리에게는 최신 사항의 학습 자체가 (뜻도 모르는) 구호 복창에 불과할 뿐이겠고 말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아니, 구체적으로 그래서 우리 거래 현실이 어떻게 달라진다는 건데?"라며 의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헌데, 책 한 권이 독자의 모든 의문을 풀어 준다면 그건 이미 책이 아니라 독자의 운명을 바꿔 줄 위대한 스승입니다. 이렇게 변화가 빠른 분야에서 어떻게 정답이 (특정 국면에서의 임시 정리 형태일망정)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 책을 읽고 뭔가 "내 미래는 이런 방향으로 개척해야 하겠구나." 같은 작은 영감이라도 떠오르고, 그를 바탕으로 개인에 알맞은 미래 설계를 꾸려야 할 것 같습니다. 책 한 권 읽고 자격증 시험을 통과해서 평생 그걸로 생계를 이어가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는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기술 발전 분야에 대해 스스로가 맞춤형 연구를 하고 대책을 준비해야 살아남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블록체인을 화두로 삼은(아직 아주 구체적인 그림이 안 잡혔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화두 수준입니다) 책은 여러 권이 나와 있지만, 이 책은 "한국"의 현황과 전망에 보다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창업이나 연관 섹터의 트렌드를 파악하려는 독자에게 최적화한 내용입니다.

"충격"은 미래를 대비하고 변화의 파고에 올라타려는 준비된 이에게는 충격이 아니라 기회입니다. 금융 섹터와는 무관한 인생이다 싶어 쉽사리 넘길 주제가 절대 아니고, 먼저 가능성을 캐치하고 과감한 첫발을 디디는 이에게 블록체인 기술은 금맥 발견의 설렘과도 같은 흥분을 안깁니다. 제가 다 읽고 나서 느낀 포인트는 1) 현대 사회에서 어떤 혁신이건 타 분야와 무관한 건 없고, 먼저 연결지점을 찾는 사람이 대박친다는 것, 2) 4차 산업혁명이 너무 광범위해서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이라면 이 블록체인 기술을 먼저 공부하고 다시 큰 그림을 볼 것, 이 정도입니다. 4차 산업 혁명의 상당 부분이 특정 기업(들) 소속 성원에게만 의미를 갖는 주제라면, 세상에 돈 안 쓰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이 블록체인 화두는 열외, 무관한 개인이 있을 수 없다는 걸 강조하고 싶네요. (그렇다고 섣부른 투자 권유에는 혹하지 말기. 주체적으로 공부하고 맞춤형으로 미래에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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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야욕 아베신조를 말하다 - 제2 메이지유신 꿈꾸는 아베 신조 책략 심층 분석
이춘규 지음 / 서교출판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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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야욕은 그 사람 본인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소속 집단과 개인을 질적으로 비약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보통 "야욕"이라고 하면 후자를 가리켜 쓰는 결과론적 용어이긴 한데, 전자의 경우에도 냉정한 현실주의 입장에서 무언가 교훈을 추출할 때 우리는 이런 "야욕"으로부터도 어떤 역사의 유익한 공식 비슷한 걸 끌어내려 애쓰기도 합니다.

아베 신조는 이미 젊은 시절 한 차례 총리직을 지내고 물러난 경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능력과 경륜을 겸비하여 무난히 중책을 수행하고, 국가를 이끈 실적이 있었다면 대개 연임에 연임을 거듭하여 자신의 치세로 상당 기간을 장식하는 게 보통이죠. 길지도 않은 임기가 한 번 끊어지고 정치 인생을 이어갔다면 (여튼 한 번 거치기도 힘든 총리대신직에 올랐다는 자체가 영광이긴 하겠어도) 첫 수행이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다는 뜻도 됩니다. 보통은 일본 역사(혹은 내각제를 채택한 여느 다른 나라에서도)에서 이런 정치인이 아주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는 못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 번 실각한 후에 다시 총리직에 올라, 두번째의 집권기를 꽤나 길게도 이어가는 매우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작년 말에 한국도 그랬지만 일본 역시 각종 정치 추문이 터지는 통에 드디어 이 장기집권자가 권력 기반을 잃는 줄 알았던 관측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반 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이 사람은 여전히 권좌에 머물러 있습니다. 삼십 년 전 테플론 대통령이라 불렸던 로널드 레이건의 경우와도 비슷한데, 레이건 역시 국민들에게 워낙 인기가 좋아 웬만한 스캔들로는 기반이 흔들리지 않던 매우 특이한 케이스였죠.

이 책은 경위야 어찌되었든 간에, 두 번에 걸쳐 총리대신직이라는 중책을 맡아 이른바 "스트롱맨"의 한 사람으로 불리며 국제정치 무대에 주역으로 그 생명을 오래도 이어가는 정치인의 비결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누가 뭐래도 현실이기 때문에, 일본 정치판의 어떤 후진적 특성 같은 것을 아무리 감안하더라도, 자신보다 훨씬 노회하고 다양한 수완을 가친 고참 정치인들이 즐비한 일본(자민당 내부뿐 아니라, 야당에도 선배들이 많습니다)에서, 어떻게 이 사람이 갖가지 고비를 넘기고 생존했는지 그 숨은 사연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흔히 명문가의 자제, 세습 정치인의 일원이라는 이유를 들지만, 그런 사람은 일본 정가에 너무도 많아 딱히 장점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극우성향을 내세운 대중 영합이라면 이 사람보다 몇 술 더 뜨는 정치꾼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이 사람만이 장기로 보유한 어떤 노하우가 있기에 지금 우리 눈 앞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거죠.

요시다 쇼인 등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굵직굵직한 생애를 산, 여튼 그들 입장에서는 거인이라 불려 마땅한 이름들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께서는 다소 뜻밖에도, 거의 백 오십 년도 넘은 역사의 먼 뿌리까지 더듬어 간 후, 이 현실정치인의 정신적 연원을 캐려 들더군요. 우리도 다양한 소스를 통해 지식을 갖춰 알듯, 동군에 패배한 후 근 삼백 년에 가까운 세월을 절치부심, 와신상담해 온 조슈, 사쓰마 등지의 오랜 정치 전통과 고유한 정서가 있었고, 그들이 일종의 캠페인과 정변을 통해 명치유신을 이끌었긴 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단기간에 제도의 혁신과 교체가 이뤄진 성공사례라서, 그 이름의 근원이 된 주 문왕의 개혁이나 선정(삼경에 나오는 대로라면)보다 이 명치유신의 존재가 더 유명할 정도입니다.

저자는 저 명치유신이라는 지나간 역사의 토대 위에서 이 "야심"찬 정치인의 행태와 철학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관점에 동의할 수도, 반대로 거부감을 드러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일본 근현대사에 대해 흥미로운 지식 여러 줄기를 배울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정도의 단단한 개인적 기반을 여튼 갖춘 정치를 해 나가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웬만해선 그 전도가 쉽사리 방해 받기 어렵겠다는 점은 확실히 캐치할 수 있더군요. 관점이나 가치지향보다는, 객관적 분석과 냉철한 현실 파악의 방법론이 돋보이는 독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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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의 비밀 - 숨겨진 숫자의 비밀을 찾아서
마리안 프라이베르거.레이첼 토머스 지음, 이경희 외 옮김 / 한솔아카데미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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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놓고도 그 실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이런 고안과 발명이 가능했는지 궁금하거나 의아한 분야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숫자, 수학" 같은 건데요. 외계의 우월한 관찰자나 더 나은 문명의 담지자가 아닌, 바로 우리 인류의 조상들이 생존을 위한 노력 끝에 얻어낸 기술과 지혜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신비와 경이의 눈으로 이를 지켜 봅니다. 저자들은 이를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놀라운 업적 정도로까지 격상하는데, 물론 순수한 창조의 레벨이 아닌 줄이야 모두가 알고 있지만, 나날의 생존에 급급한 다른 피조물들과 인간의 지위를 결정적으로 차별짓는, 놀라운 징표와 기호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숫자라는 기호는 그 속에 특별한 비의가 숨어 있는 게 아니지만(그렇다고 믿은 학파가 아주 먼 과거 이를 가장 잘 다뤘던 이들 중심으로 실제 형성되었었고, 아직도 일부 종족은 자신들의 기호체계 전체에 이를 확산시켜 밀교 비슷한 신앙을 유지합니다), 중등교육이 세계적으로 보편화한 현대에 들어서도 이 기호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손쉬운 접근을 거부합니다. 물론 기호의 초급 단계에서야 그 이해가 어렵지 않지만, 기호가 모이고 모여 고차원의 지식을 표현하고부터는 더 이상 지사(指事)의 기능에 그치지 않기 때문에, 세계(추상적일망정)에 대한 정밀한 이해를 깨치지 못한 두뇌로서는 기호 자체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숫자나 수학은 일상의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제5과 "타일 붙이기"를 보면, 똑같은 형태로 평면을 덮어 나가기를 원하는(실용적 욕구일수도 있고 미적 동기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여러 차례 시도 끝에, 왜 어떤 도형(정다면체)로는 이것이 가능하고, 어떤 도형으로는 불가능한지 분명히 알 수 없는 일이 잦았죠. 본인이 못 하면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건지, 더 똑똑한(혹은 경험이 많은) 이들의 손에 의해 해결이 가능한 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해결가능성"과 "증명"의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나라의 수리 논술 평가에서, 이처럼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상황을 두고(대략의 답도 대개 가르쳐 주면서) 학생들에게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 자신의 의견을 써 보라는 문제를 내곤 합니다. 이 책은 그런 문제만 받아들면 막막해지는 이들에게, 문제의 해결을 어디서부터 잡고 시작해야 할지 중요한 시사점을 가르쳐 줍니다. 즉, "내 집에 내가 타일을 붙인다고 생각하고, 내 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최대한 지혜를 짜 내어 보라"는 거죠. 그것이 어떻게 보면 수학적 사고의 첫걸음입니다. 숫자나 수학은 거칠고 마구잡이인 세상에 최소한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인간들의 필사적인 노력인지도 모릅니다. 질서가 혹 없다면, 질서를 만들어 내어야 직성이 풀리는, 선하고 지혜로운 인간 본성의 일부가 작동하는 증거이지요. 이 덕분에 우리는 인류 문명의 밝은 장래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e는 2.7182... 로 전개되는, 분수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실숫값입니다. 이 책에도 잘 나와 있듯, 이 수는 베르누이의 표현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닮아 가는" 아름다운 나선을 그리며 회전하는 도형의 기본 구조를 알려주기까지 하죠. 하지만 e의 근원을 알고 보면, 적당한 이율로 기간을 무한히 잡아 빌려 준 돈이, 나중(무한이니까 나중이란 말이 꽤 모호해집니다만)에 얼마가 되어 돌아올지 계산하는 과정에서 나온 숫자에 불과합니다. "자신을 무한히 닮는" 다른 모든 도형이나 구조의 원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이 e의 신비함에 대해, 사실 우리 모두는 충분히 매혹될 만합니다. 우리는 매혹될 자유가 있고, e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 매혹은 유익하기까지 한 게, 전혀 숫자나 수학에 대해 흥미와 관심을 못 갖던 이들(특히 학생들)에게 여튼 최초 접근 단계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안에는 아무 신비도 없다. 다만 쓸모가 많고 오류가 없을 뿐이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는 아무도 수학에 달려 들지 않고, 뛰어난 지성이 모여들어 불후의 업적을 남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수학은 그저 그 모습 그대로인데 괜히 어리석은, 감정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과대 의미를 부여하는지, 아니면 정말 기술적 지식 외에 모든 번민과 고뇌를 한 큐에 해결해 줄 궁극의 진리가 숨어 있는지, 아직은 그 여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서 괴로운 게 아니라, 그런 게 과연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게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거죠.

이 책 저자들도, 숫자(혹은 수학)에 숫자 이상의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아니면 그저 정밀한 체계의 일환으로 파악해야 하는지는 딱부러진 답을 내어 놓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인 이상 저자들도 몰라서 말 못한다는 점은 우리 독자들도 다 알지만, "그래도 독자 여러분이 작은 지혜라도 보태어, 이 오래된 탐구의 과정에 마침내 끝을 보려는 노력에 동참하면 어떨지?" 라며 은근히 유혹하는 중임은 눈치챌 수 있습니다. 이런 건전한 의문과 동기가 사람의 마음 속에 자연히 생겨, 나도 행복하고 이웃도 풍요로이 만드는 쪽으로 작용했으면 참으로 바람직하겠습니다. 공학과 실용과는 아무 관계 없어 보이는 "아름다움"이, 알고 보면 모든 발전의 근본 이유가 되었다는 사실은 역설이자 경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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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켈하임 로마사 - 한 권으로 읽는 디테일 로마사
프리츠 하이켈하임 지음, 김덕수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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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주제라면 사실 멀게는 수백 년 전의 저술부터 해서 권위 있게 의존할 만한 것들이 많고, 최근까지도 통사로서 유익하게 읽을 만한 업적이 여러 권 나왔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고전이 너무 까다롭고 엄격한 모범을 세워 놓았기에, 이 시대를 다룬 역사로서의 서술은 내용의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그 문장력 수준이 기번처럼 신이(神異)의 경지에 올라야 그게 로마사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양 통할 정도라고나 할까요. 물론 역사학은 다른 사회과학과 달라서, 성립 당시부터 문학과 철학 부문과 거의 일체를 이뤄 왔고, 이 때문에 내용을 떠받들 문장(이라는 형식)도 그 모양새부터가 아름다워야 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문학은 물론 심지어 철학도, 완성도 있는 내용을 서술하는 그 문장까지가 아름다워야 자격을 갖췄다고 인정). 이 때문에 여간한 내공과 재능과 수련 기간을 갖추지 않고서는, 후대의 학자(라기보다 거의 문필가 수준의 인력)들이 도전할 엄두를 못 내어 왔죠.

이 책이 출간된 지, 그리고 심지어 저자께서 사거한 지도 어언 반 세기가 훌쩍 넘어가니, 책은 더 이상 야심찬 신저가 아니라 거진 고전의 반열에 들어야 할 판입니다만, 여튼 이 책은 기번의 고전과 대조하며 읽을 때 특히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물론 기번의 고전은 일단 양적인 조건에서 이 번역본과 나란히 놓일 볼륨이 아닙니다만, 서술의 압축성(전체가 몇 권으로 되어 있든, 로마사는 어떻게 쓰여도 압축과 절제의 미를 갖춰야 합니다)과 체계성 면에서 이 두 고전은 나란히 놓였을 때 각각의 자격과 만만찮은 존재 이유를 더 부각한다고 평할 수 있습니다.

기번의 고전은 물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두 밀레니엄에 다리를 걸친 비잔티움 제국사까지 커버하는, 사실 말도 안 될 만큼 담대한 의도와 엄청난 집념의 산물이죠. 반면 이 책은 (의외로?) 제목이 내용을 일정 부분 암시한다고 할까(기번의 고전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지만), 기번의 무지막지한 성과와 의욕에 질려 버린 후대의 반성이 다분히 깃든, 비교적 절제되고 아담한(?) 범위만을 집중 조명하는 서술입니다. 헌데 이처럼 저자의 기획 스케일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공화정 이전(심지어) 어렴풋한 안개에 휩싸인 시기마저 다루기 때문에(또, 기번의 책이 제목 그대로 "제국"의 기초가 놓여 가던 시기부터 시작을 잡기 때문에), 앞으로 당겨지고 뒤로 밀리는 효과가 서로 상쇄되어 두 책이 얼추 커버하는 시대 길이가 1200년 가량으로 비슷합니다. 자료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과업은 기번의 것이 난이도가 높았겠고, 부족한 자료를 취합하여 온전한 체계를 구축하는(비록 후대에 축적된 성과의 도움을 받았다쳐도) 수고는 이 하이켈하임의 땀방울이 더 농도 짙게 맺혔을 만합니다.

사실 우리가 비잔티움 제국사는 "로마사"와는 별개로 고찰, 파악해야, 대상의 정확한 이해나 대접이건, 우리 현대인 자신의 요긴한 활용에건 더 적절한 결과이겠기에,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로마사"를 개관하기엔 기번의 고전보다 이 책이 더 유용한 도구입니다(그것도 한 권으로). 김덕수 박사님의 이 번역본은 이미 십여 년 전에 하드커버판으로 출간된 바 있습니다만, 읽기 깔끔하게, 또 휴대하기 편하게 나온 이 신간도 참 마음에 듭니다. 도정제 실시 전에 그 구간은 큰 폭의 할인(아니었나? 기억이 확실치 않군요) 행사가 있었기에 제가 당시 냉큼 구입해서 책장에 꽂아 두었는데, 이제 이 책도 옆에 나란히 소장하니 정말 훈훈해집니다. 지금 막 귀가한 터라 사진은 나중에 업로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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