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 - 13년간 주식으로 단 한 해도 손실을 본 적이 없는 피터린치 투자, 2017 최신개정판
피터 린치.존 로스차일드 지음, 이건 옮김 / 국일증권경제연구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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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성장주 중심의 가치 투자"란 모든 투자자가 유념해야 할 교과서 같은 원칙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 증시에서 이 원칙을 금과옥조처럼 준수하며 실행에 옮기는 분들은 극히 찾아보기 힘든데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아마도 시장이 원칙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든가(혹은 그렇다고 믿는 분들이 많다든가), 혹은 많은 이들이 그렇게 느긋한 분석을 한 후 투자하는 게 특히 한국의 실정에 잘 안 맞는 부분이 많다든가(급한 민족성), 정작 가치 투자를 하려니 해당 주식이 너무 고가로 형성되었다든가, "흙 속에 숨은 진주" 같은 가치주를 알아 보기가 너무 힘들다든가, 여러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한국의 현실이 이런 데에는 애널리스트, 투자 전문가들의 잘못도 적지 않습니다. 분석과 예측 능력이 떨어진다든가, 정확한 정보를 알면서도 어떤 세력의 의도대로 움직이다든가, 시장을 면밀히 성실히 분석해서 유용한 틈새 정보를 생산, 제공하는 본분에 충실 못하고 남들(일반 투자자들) 다 하는 이야기만 내놓는다든가 말이죠. 반면 외국의 전문 방송을 보면 원칙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꽤 정확히 시황을 내다보는 진단이 많습니다. 물론 아무리 정밀하고 건전한 예측이라 해도 일단 발설이 된 후엔 시황 형성의 작은 요인으로라도 작용하기 때문에 역시 엇나갈 수 있습니다만, 여튼 이런 작은 노력이 모이고 모여 시장이 원칙대로 나아가는 데 기여를 합니다. 반면 한국의 경우 불건전한 정보에 따라 개미들이 움직이고, 또 매번 "상투를 잡"다 보니 점점 더 불신 풍조가 확산되고, 잘못된 원칙에의 의존도가 높아지는 거죠.

이런 의미에서 이런 고전이 갖는 의의는 큽니다. 그새 런던 증시의 룰이 근원적으로 바뀌었다든가, 저축은행과 투자은행의 장벽이 사라지고 (그 부작용인지) 큰 파동의 시장 폭락이 발생했다든가, 중국 증시가 시장의 덩치 큰 멤버로 자리를 잡아 간다든가 하는, 상전벽해격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만, 이상하게도(이상한 거죠) 투자의 근본 원칙, 룰은 변함이 없는 듯합니다. "크게 바뀐 바는 없다"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정석에 더욱 충실할 필요가 있다든지, 정석을 고지식하게 지킨 이들이 더 큰 재미를 보았다든지 하는 말들이 더 설득력을 가집니다. "단타 해서 그래도 꽤 재미를 봤어요!" 도박과도 같습니다. 도박도 그럴 때가 있어서, 초짜들에게 야 나는 알고 봤더니 재능과 감이 있었어! 같은 쾌감을 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이들이 그나마 푼돈만 따서 더 이상의 모험을 못 한 채(기분 내느라 다 써 버림) 판에서 물러났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게 아니라서 결국은 탈탈 털린 후에야 하우스를 떠나게 됩니다.

잘나가던 펀드 매니저가 하루아침에 가진 돈을 다 날리고 고객들에게 쫓겨다니는 예는 픽션보다 차라리 현실에서 더 비일비재합니다. 말 안 듣는(혹은 더 이상 줄 대어 봐야 가망이 안 보이는) 고객을 현실에서 (고의로) 혼 내 준 후, 다시 이용 가치가 생기면 재미를 보게 해 주는 자유자재의 수완을 가진 천재 매니저는 말하자면 더글라스 케네디의 싸구려 펄프 픽션에나 나오는 존재입니다. 현실에서는 그런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고, (워런 버핏의 책을 읽은 분들은 알겠지만) 회사를 현장에서 꼼꼼히 실사하고 자신이 세워 둔 원칙에만 곧이곧대로 충실한, 고지식한(통념과는 정반대인) 투자가가 결국 승리자입니다. 물론 시황의 급변에 따라 주도면밀하게 움직일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큰 변수도 한국 같은불건전한 시장에서나 자주 발생하는 거고, 미국처럼 (그나마) 건전한 십장에선 뜨내기들이 마구 설레어할 만한 난리통이 잘 벌어지지 않습니다.

피터 린치는 "상위 3~10% 정도의 투자자들이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본인 자신(무려, 인류 역사상 최고의 투자자로 평가받는 인물)도, 그리 지능이 남달리 빼어나다든가 하는 유형은 아님을 스스로 말하는 셈입니다. 마치 낚시와도 비슷한 면이 있어서, 예측(똑똑한 이들의 확신에 한해서)대로 안 된다고 혼자 급해져서 마구 지르는 식으로 나서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린치의 말을 책에서 인용하면, "너무 똑똑한 이들은, 자신이 세워 놓은 완성도 높은 모형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실물 시장의 뜬금없는 흐름에 대해 무시하고 넘어가기 쉽다."라는 겁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진짜 똑똑한 이들은 자신의 실수도 "소름끼치는 냉혹함"으로 냉정히 분석하고, 같은 실수를 두 번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이거는 제 생각에 타고난 머리보다는 성격 요인이라든가, 그리 급하게 나대어야 할 조급함이 없는 품성(여유 있게 자라난 이들이 이렇습니다)이고, IQ 인자와는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머리가 빼어난 이들이 자기 도취에 빠지기 쉽고(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철석같이 믿었던 tool이 무너지면 (어차피 가진 게 없이 남의 말에 부화뇌동하는 이들과 달리) 회복하기가 더 힘듭니다. 똑똑하고 잘나가는 사람들이 (잃을 게 많기 때문에) 회복 탄력성이 더 떨어집니다.

한창 핫한 종목에 몰려드는 행태야말로 (저자 린치의 표현을 빌리면) 쪽박 차기 딱 좋은 바보짓입니다. 이거는 "남들 말에 솔깃하면 무조건 망한다" 같은, 어차피 투자에 들일 돈도 없는 처지라서 "모든 포도가 신포도"라고 우기는 빈털털이의 태도와는 틀립니다. 저자의 말은, 가치에 집중하여 남들이 채 못 보고 넘어간 가치주에 투자하라는 소리지, 이미 한물 간 종목이고 단지 요란한 입소문만 남은 곳에 아깝게 돈을 쏟아붓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바꿔 말하면, 소문은 안 났어도 (예컨대 이런 책에서 가르치는) 원칙에 딱 들어맞는, 교과서적인 종목이 눈에 띄면 주저없이 "사라"는 뜻입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고, 이런 챈스가 나타나도 생전 뭘 해 본 구력이 없으면 손이 안 나갑니다. 남들이 우우 거려야 비로소 따라 나서는 사람은, 예컨대 이 책에서 말하는 "싸구려 카펫" 생산 업체에다 몰빵하다 망하게 마련입니다.

사실 너무 투자 자체에만 몰입(주식가격의 등락)하는 분들은, 정작 이 회사가 얼마나 알찬 배당을, 신의 있게 행하는지에 대해 눈을 감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주가 주식을 갖는 이유는, 회사의 주인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투자의 대가를 받아내는 데에 있습니다. 주주는, 객(客)에 불과한 채권자가 아니니만치, 당연히 회사의 수익을 정당히 챙길 권리가 있습니다(물론 채권자는 여러 경우에 우선변제권을 가집니다). 이 책의 한 챕터에도 잘 진술되었듯, 심지어 록펠러(라키펠러) 같은 이도 "가장 행복한 순간은 배당 받는 순간"이라고 고백했던 적 있습니다. 배당은 대개는 고액이고, 채권자가 아무리 고리로 돈을 빌려줬어도 못 받아낼 짭짤한 수익입니다. 문제는 이 책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가치주, 성장주의 경우, 주주들이 너무 잦은 배당을 요구하면 회사가 크지를 못한다는 거죠. 이 문제는 투자자의 성향에 따라 다 달리 볼 일입니다. 린치 본인도, "어떤 상황에서도 배당을 충직히 실시할 회사를 따로 찾아 둘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단타 매매에만 몰두하는 뜨내기들에게는 이게 다 꿈같은 주문입니다.

비록 개정판이지만 이 책이 오래된 고전이다 보니 "파생상품, 공매도" 등 비교적 현대적 패턴과 추세에 대해서는 깊이 다루지 않습니다. 그런데, derivative에 몰입해서 그저 최신현황만 좇아대는 투자자들 중, 아무리 팁과 요령에 빠삭해도 꼭 망하는 분들에게 부족한 게, 바로 이런 (고리타분해 보이는) 책에서 가르치는 원칙의 숙지, 납득, 내면화입니다. 그런 이들도 스킬은 남 못지 않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그들에게 부족한 바 2%가 바로, 이런 "기본에의 충실"입니다. 투자는 머리가 아니라, 어찌 보면 모럴과 끈기가 비결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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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이펙트
페터 회 지음, 김진아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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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스릴러는 알고보면 한가지 컬러로 묶이기도 힘든, 자신들만의 개성이 물씬 풍기는 개별작품들인데도, 전체로서 스칸디나비아 누아르라는 한 범주에 자연스럽게 응집되어 별 어색하지도 않다는 게 신기합니다. 사실 저는 페터 회의 작품 세계가 어느 장르, 영역, 트렌드에 협소하게 편입, 분류된다면 꽤 부당하다고 여기는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그림으로 보면 "북유럽 스릴러의 매력적인 한 섹터"라는 데에는 또 반대하고 싶지가 않더군요. 이건 누가 봐도 특이하다 싶은 소재, 소재에서 예상되었던 전개가 매번 독자의 짐작을 비껴가는 활기 넘치는 구성, 그리고 매 장면에서 톡톡 튀는 인물들의 선명한 컬러, 이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읽는 이들을 한껏 매혹하는, 실로 남다른 성취가 그의 작품에는 녹아 있습니다. 살짝 심령물스러운 이 스릴러도 그저 소재나 분위기가 지닌 마력에 안이하게 묻어가지 않고, 여전한 장르(어폐가 없진 않습니다만 일단)의 박력과 그만의 스타일이 이끄는 힘이 역연합니다. 그의 이름을 보고 고른 팬들은 이번에도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제목이 "수잔 이펙트"인데, 이런 말이 물론 학술 용어로 정립된 건 전혀 아닙니다(다만 일부 호기심 많고 별난 스타일의 물리학자들이, 한 범주로 포섭하기는 어딘가 난감해지는 그런 현상, 초자연적 신드롬에 그전부터 주목해 오기는 했고 그 역사가 그리 짧지도 않습니다). 만약 어떤 개인이 특별한 자질, 개성을 가졌다면 그게 순수 개체의 돌연변이 결과이기란 확률적으로 기대하기 힘듭니다. 아마도 그(그녀)를 둘러싼 가족 전체, 혹은 상하 직계 존비속이 그런 모종의 특질을 공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남의 감정을 기묘하게 잘 알아채는 능력도 있고, 남으로 하여금 제 본심을 술술 털어놓게 하는, 그저 우연으로 돌리거나 다른 외부 팩터에 귀인하기 힘든 이상한 현상도 종종 목도됩니다. 철저히 몸을 숨겨 온 그 인과관계가 명확히 포착되어 일반화가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르는데, 소설 속에서 물리학세계(확립된 법칙들과 거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의 이름들)의 언급이 이처럼 자주 이뤄지는 건 다분히 작가가 그를 노려서입니다. 만약 그런 놀라운 업적이 진짜 현실화라도 한다면, 발견자 본인의 이름이 아닌 이 소설의 "영감"을 기리는 의미에서 진짜 "수잔 이펙트"라는 명명이 이뤄질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소설 속 주인공들, 즉, 정말로 이상하고 별나고 평범한 이들의 눈에 이해 불가인, 너무도 튀는 개성의 "수잔 네 가족들"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심지어 가족들 서로간에도 화합과 포용이 잘 안 이뤄지는 판입니다. 차라리 생판 모르는 남과 남 사이에서도 이처럼 갈등이 빚어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헌데, 개체의 변이란 어쩌면 내면의 개성부터가 이처럼 단절적인 환경에서 그 발생이 용이할 지도 모릅니다(반대로, 환경이 이렇기에 내면의 개성이 그리 형성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절망적인 무지를 위장하기 위해 어설픈 과학 타령을 늘어놓는 모습이 아니라, 이 가족은 정말로 지적이고 예리한 품성을 타고난 이들입니다(인성에는 문제가 적지 않지만ㅋ). 개인의 재능을 DNA의 무작위 장난으로 호도한다고 없던 식견과 재능과 경력이 생기는 게 아니듯, 이 별난 사람들이 그래도 뭔가 남다르고 유익한 면모가 있기에, "정체불명의 정부 기관"에서 특별 대우를 약속하며 모종의 미션을 맡기는 결정이 (극중 설정에서뿐 아니라) 읽어가는 독자들 사이에서도 폭 넓은 정당화 근거를 마련하는 듯합니다.

다만 제가 독자로서 한 마디 하자면, 현실에서 덴마크란 나라는 그리 큰 힘을 갖지 못한 정치 단위임에도 불구하고, 덴마크 작가[나아가 북유럽 전체]들의 픽션 속에서는 지나치게 신비화하여 무슨 미국쯤이나 되는 듯한 무게를 싣는 게 좀 어색하긴 합니다. 페터 회 뿐 아니라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사실 움직일 수 없다시피한 신분제 사회(다만 복지가 잘 갖춰졌을 뿐)인 그들 체제의 개성을, 작가들(더군다나 장르 작가들)이 메타적으로 직시하지 못하는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인 미수로 고소당했어요(법적으로 정확한 표현이 아닌 듯하지만 일단 원문 그대로)."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지 후회되는구나." 여기까지는 정상이죠. 근데 그 다음 말이 이겁니다. "그런 놈은 (미수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어야지." 아 물론, 화자가 여성이고 소설을 읽어 보면 (전적으로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 상황입니다(성폭력 상황까지 간 판에서 정당방위. 과잉방위에 가깝긴 하나). 이 가족이 어떤 가족인지는 이 대화(뿐 아니라, 정말 골때린다 싶은 정신없는 대화가 홍수처럼 쏟아집니다)만 봐도 알 수 있고, 이 정도로 튀는 개성을 가진 이들이 과연 어느 체제, 어느 무지한 대중으로부터 수용, 포용될 수 있을지 독자는 난감한 게 당연합니다.

뭐 성격 특이하다고 단죄, 파문되는 건 현대 문명 사회의 온당한 태도가 아니지만, 이들은 현재 법적으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정부 당국으로부터 "추적"되는 처지입니다. 레니게이드들에 대해 특별 사면을 대가로, 권위 있는 당국에서 그에 걸맞은 특별한 미션을 위임하는 건, 사실 일찍부터 서유럽 장르에서 채용해 오던 관행이고 우리도 외국 드라마나 상업 영화에서 너무도 자주 봐 온 설정인데, 페터 회는 천연덕스럽게, 그러나 매우 자연스럽게, 이 장치를 자신의 이 개성 넘치는 작품에서 재연, 채용합니다.

이상한 가족은 이제 이 가망 없어 보이는 미션을 수행함으로써 "위대한 가족"이 되어가는데, 최근 제가 본 영국 드라마 <셜록> 시즌4에서 레스트라데 경감님 대사처럼, 알고 보면 "그레이트 투 굿", 즉 특출하긴 하나 정이 안 가는 개성 강한 이들이, 이제 무엇보다 가족 서로를 이해하고, 나아가 평범한 이들의 고단한 현실에도 서서히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이 꽤 감동적입니다. 물론 그들이 행하는 미션은 "고작 한 가족"이 떠맡기에는 너무도 규모와 비중이 크며, 사실 이런 중차대한 임무를 고작 덴마크 정부가 누구한테 베풀고 평가하고 거둬들일 위상이 되는지도 의문이지만, 소설은 독자를 시원시원 자신의 세계에 포섭시켜 가며 전적인 판타지를 마치 엄정한 현실이라도 되는 양, 초청장에 적힌 문구가 무색하거나 민망하지 않게 근사한 파티, 규모 큰 기쁨과 희열을 선사합니다. 장르물에서 익히 보던 여러 전통과 기법인데, 유독 그의 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빛깔과 효과로 조합된다는 게 작가 페터 회만의 기량이고 매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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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들의 수집가
루스 호건 지음, 김지원 옮김 / 레드박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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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잃었을 때, 그 누군가를 대신할 수 있는, 혹은 그렇다고 여기는 어떤 물건을 내 곁에 두면 그 상실감을 달랠 수 있을까요? 대체로 이런 분들의 경우, "내가 그(그녀)를 잃은 건 내 잘못이 있어서다." 같은 죄책감을 달래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내가 그(그녀)를 잃은 건 반대로 뒤집어보면 그(그녀)가 나를 잃은 것이기도 하고(한쪽의 죽음으로 인한 사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나 역시 그 상실감을 힐링받아야 할 피해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이런 관계의 "상실"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을 가해자 위치에 놓습니다. 물건을 고이 간직하는 건, 어찌 보면 일종의 속죄 의식(儀式)과도 같습니다. 조상에 대해 올리는 제사를 끊이지 않고 후손에게 대신 재산처럼 상속하게 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의식(意識)의 연장일지도 모릅니다.

소설 처음에 대뜸 등장하며 이 모든 상실감(과 죄의식)을 우리 독자들에게 아련히, 잔잔하게 공유시키는 앤서니 퍼듀는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문인입니다. 이분은 자신의 약혼녀가 남긴 물건들 뿐 아니라, 어느 때부터는 다른 이들이 "잃어버린" 물건까지 서재에 보관하며 누군가(그 물건을 잃은, 알지 못할 어떤 이)의 상처를 힐링해 줄 태세를 잔뜩 갖춥니다. 독특하게 보이지만, 자신의 채 아물지 못한 상처를 스스로 다스리는 방법이,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는 남들의 상처를 달래 주는 데에서 찾은, 아주 이타적이고 건설적인 방법을 찾아낸 셈입니다. 퍼듀는 다만 자신의 생명이 이 과업을 감당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육 년 전 고용한 비서 로라에게 이 일이 이어지도록 뜻 깊은 부탁을 합니다.

소설의 1/5쯤 지난 지점에서 퍼듀 씨는 자는 듯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앞에서도 그랬지만 이제부터는 비서 로라가 벌여 나가는, 흘러버려 어느덧 자신의 존재 의의와 기억까지 저류에 쓸려버릴 것 같은, "모든, 잃어버려지기 직전의 안타까운 것들"을 붙들어 두려 안간힘을 쓰는, 다소는 우습기도 하고 다소는 좀 분하기도 한(특히 여성 독자들이 그리 여길 만한) 인생의 여러 국면을 조명합니다. 물론 로라 같은 여성에게 그 인생의 대부분을 채우는 "국면"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관계입니다. 로라처럼 정 많고 미련 많고 약점 많고 정의감도 좀 괜히 많다 싶은 여성에게, 관계가 남긴 상처와 은근한 추억과 맹렬히 솟는 생에의 활력은, 다루기 어려우면서도 그녀를 언제나 살아 숨쉬는 존재로 만드는 동력이고 늪입니다.

LOST AND FOUND. 죽은 노 소설가 퍼듀가 자신의 "시설"에 붙인 간판입니다. 소설 제목도 그렇고 내용을 봐도, 어떤 집착이나 강박 관념 같은 게 느껴지는 "수집가"보다는, "키퍼" 즉 지킴이 정도가 사실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인데(퍼듀와 로라 모두에게), 로라는 이후 뜻하지 않게(그녀로서는 기대 못했을 일종의 행운이겠기에) "지키게 된" 이 커다란 집에서 망자의 뜻도 충실히 수행하고, 동시에 그 뜻을 지켜 주려면 먼저 자신의 인생에서 꼬이고 상처 받은 관계들부터 돌보고 해결해 나가야 함도 알게 됩니다. 그녀는 이를 위해, 그녀의 직접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선샤인"과의 밀도 높은 관계(그 실상은 "돌봄")를 가꿔 나갑니다. 뭔가 형편이 피었나 싶어 빈대처럼 먼 곳에서 냄새를 맡고 찾아온 못된 빈스에 대해서는 살충제를 뿌리듯 단호한 몸짓으로 멀리 퇴치하기도 합니다. 꼭 이런 망할 자식이 어디나 하나씩은 있어 남자 망신을 다 시키죠.

이웃집 정원사에서 멋진 동반자가 된 "연하남" 프레디, 성깔 있고 실력도 좋은 법정변호사(배리스터겠는데, 배경이 영국이라 이런 설정이 끼어듭니다. 하긴 이 소설은 이거 아니라도 여러 부분에서 물씬 영국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더군요) 사라, 또 유니스, 포샤, 캐럿 등이 번갈아가며 등장하여, 로라의 관계와 삶 그 안과 밖을 촘촘히 채웁니다. 이 소설은 이처럼 로라와 반대되는 듯 비슷한 듯 여러 주변 인물들이, 확장된 로라의 여러 성격을 대변하며 코믹하게, 때로는 살짝 슬퍼지게 그녀가 누구인지 독자에게 전달하는 점이 좋았습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들을 살피라고, 어쩌면 우리 독자들도 자신의 확대 버전으로 주변에 친구, 지인 관계를 구축하고 사는 지도 모릅니다. 책을 덮고 난 후에도 캐릭터 중 특히 선샤인이 자꾸 눈 앞에 남아 아른거리는데, 저 역시 퍼듀 씨로부터 뭔가 애틋한 유산이나 미션을 넘겨 받은 것 같아 살짝 슬프면서도 흐뭇한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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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가토 노리히로 지음, 김난주 옮김 / 책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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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어느 교수님께서 강의 도중 책(경제학)의 몇몇 대목을 짚으며 그러시던 게 기억 납니다. "이 설명은 잘못된 것이고, 심지어 용어 번역조차 바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기초를 가르칠 때, 다소의 왜곡을 감수하고 뭔가를 전달하는 편이 그나마 나을지, 아니면 아주 원칙대로 꼬장꼬장하게 학습자의 힘들고도 힘든 각성을 유도하는 정석을 걷게 할지는, 선택이 쉽지 않다." 만약 전자의 선택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쪽이라면, 어려운 내용도 무조건 쉽게(왜곡되든 말든) 풀어 주는 게 최고의 미덕으로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것도 쉽게 설명해 줘야 할 판에, "가뜩이나 쉽고 재미있는 것"을 오히려 어렵게 꼬고 든다면, 그런 작업이 과연 환영받을 수 있을지는 물어보나마나입니다. 책 제목이 더군다나 <...는 어렵다>라면 더욱 그렇죠.

그런데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1) 하루키의 작품 중 알쏭달쏭했던(그런 게 뭐가 있었을까 싶어도 이 책을 읽고보니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싶더군요) 대목들에 대한 작가론적, 역사적 해석을 시도한다든가, 2) 독자들은 엄청 환영해도 동료 작가(물론 까마득한 선배들을 포함)나 평론가로부터는 "버터 바른 상업적 치장"이라며 홀대, 폄하되었던 하루키의 작품 세계를, "그들이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끔" "심각하고 본격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내용이더군요.

어려운 걸 쉽게 풀어내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지만, 그저 감성적으로 상쾌해질(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감을 해 주고 지나칠) 내용에다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만만치 않게 어려울 텐데, 하루키의 작품에다 하루키스럽지 않은 심각한 비평 용어로 옷을 입힌 걸 보니(사실은 벗기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당혹스럽다가도 재미있어집니다. 당혹스럽다는 건 "내가 예전에 끌렸던 하루키가 정말 그런 모습 그런 의도였을까" 하는 생경함이 아마도 그 이유일 텐데, 하긴 끌리는 걸 언제까지나 미지의 영역에 남겨 두는 것보다 한번쯤은 정색하고 "분석"해 보는 작업도, 차라리 독자(우리 자신)의 성숙을 위해 의미 있을 수 있습니다.

아예 이런 번거로운 생각도 (하루키의 독자답게?) 떨쳐 내고 나면, 저자(비평가) 가토 노리히로 선생이 하루키의 개인사를 짚어 가며 그 숨은 의도를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대목이 그저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비평 용어를 몰라도, 정말 하루키의 팬이라면 그 느낌이 딱딱한 외피를 깨고 바로 접수되는 "텔레파시"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독자 하기 달렸습니다. 읽고 나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저자께서 꽤 열린 마음의 소유자이고, 하루키 말고도 여러 당대의 일본 작가들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는 분이지만, 하루키에 대한 든든하고도 순도 높은 애정을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애정의 방향을 공유하고 밀도까지 비슷하다면, 한 마디를 던져도 그 말이 품은 의미 열 개가 얼마든지 접수 가능합니다.

저자는 하루키의 활동 시기를 크게 세 단계로 나눕니다. 1979~ 87, 1987~99, 1999~2010이며, 하루키의 팬이라면 저 연도의 구획이 대강 무엇을 기준으로 이뤄졌는지 책을 펴 읽기 전부터 눈치챌 수 있을 겁니다. 각 시기는 "부정성의 행방", "자석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어둠 속으로" 등의 제목이 붙었습니다. 제 느낌으로는 저 거창한 세 개의 어구보다, 각론(저자는 각 시기를 다시 2, 3개의 구간으로 나눕니다)에서 등장하는 "디태치먼트", "내폐성", "맥심(칸트식 개념입니다)", "폴리티컬" 같은 개념어들이, 하루키 문학의 핵심 개성과 은밀한 무의식 등을 속속 잘 짚어낸다 싶었습니다.

제가 특히 공감한 건 제1기, 2기(이 책 저자의 기준)를 향한 분석입니다. 이념의 대립이 청춘기 지성을 족쇄처럼 억압할 때 이미 역사의 향방이 다른 쪽으로 고비를 틀었음을 알고 초연한 듯 쿨한 듯 개인의 내면으로 시선을 집중하면서도 감각의 쾌락("청춘이 자신의 특권을 누리는 건 죄가 아님")에 몰입하는 듯, 그러면서도 스스로 정한 원칙은 지키는 내향성(책에서는 "내폐성"이란, 보다 강도 높은 용어를 씁니다) 따위가, 특히 그런 조류가 자신의 청춘기를 휩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많은 어필을 했을 거란 분석이죠. 여기서 저자는,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은근 그의 작품에 깔린 "역사성"에 대해 주목합니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널리 공감을 얻는 비결이 있다면, 일본인으로서의 죄의식이나 초국적성의 청춘적 방황 같은 게 도처에 향수처럼 뿌려져 있다는 건데, 저자가 서문에서 특히 최근 고조되는 동아시아의 긴장된 정세를 언급하는 것도 깊은 사려가 깔려 있습니다.

사실 하루키의 문학은 엔터테인먼트 장르로도 분류하기 어려운 게, 모든 작품이 읽기에 말쑥하고 똑떨어지는 경쾌한 내러티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일부 건방진 독자들이, 그의 작품세계라면 아주 익숙하고, 마땅히 이러겠거니 여기는) 어떤 경로로부터 크게 이탈합니다. 한국에서는 당시 알 수 없었으나, 이 점 관련 "대체 뭐냐", "쓰다 만 것 아니냐" 같은 항의를 적잖게 듣고, 편집진도 (벌써 거물이 된 그에게) 문의를 하기도 했다는군요. 이때 하루키는 "(그런 점들을 혹은 의도를) 이해하려면 (나의 시대에는) 오래 걸릴 것" 같은, 어찌 보면 정말 그답지 않은 고답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물론 아닙니다만). 저자는 "왜 우리 독자들과 비평가들이 별도의 이해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이 책을 통해 몇 가지 시론(프레임)을 제시하는 거죠. 이 시도들이 정말 작가 하루키의 내심과 일치한다면, 이제 (책 제목대로) "하루키는 (알고보니 정말로) 어려웠다"가 되는 겁니다. 물론 모르고 지나친 게 알고 보니 어려웠음을 깨달았다면, 깨달은 그 순간부터는 더 이상 어려운 게 아니죠.

저자는 평단과 작가들이 모두 하루키를 폄하할 때 거의 혼자서 그를 옹호하던 스탠스를 보이기도 했고(이 때문에, 그의 표현을 빌리면, "역시 버터바른 치장형 평론가군" 같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반면 (이제는 하루키의 작가적 위상을 거의 누구도 의심하지 않게 된 후인) 최근 몇 년 동안엔 오히려 하루키에 대한 과격한 비판을 시도하다 매체 편집자에게 주의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남들이 모두 예스라고 할 때 노를 외치기는 어느 조직, 직역에 속한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데, 그만큼 확고한 신뢰와 분명한 공감에 이르렀기에, 소신 있으면서도 분명한 개성이 깃든 보편타당한 패러다임(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까지 제시할 수 있는 것 아닐지요. 이 책, 한 번만 더 읽고 나서, 지금까지 읽었던 하루키의 작품이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 책장에 꽂힌 모든 그의 책을 다시 만나는 여행을 떠나봐야겠습니다. 위대한 정신은, 즐겁고 예사로운 말투 속에 진짜 진리를 심어 주는 게 그의 진짜 성취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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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세상의 모든 꿈을 팝니다
빌 캐포더글리.린 잭슨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꿈꾸어라, 믿어라, 도전하라, 실행하라."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사실 자본주의가 고도의 성숙 국면을 보여야 탄생하고 성황을 누릴 수 있는 분야입니다. 매뉴얼과 설계 도면에 맞춰 공장을 짓고 컨베이어 벨트를 돌려 판에 박힌 제품을 찍어내는 제조업과는 달리, 혹은 사람의 일차원적 욕구만을 만족시키는 도구, 소모품성 제품을 생산하는 섹터와는 달리, 사람의 깊은 마음 속에 숨겨진 욕망과 꿈과 아름다운 이상을 대리 만족시키는 생산활동이란, 차원이 다른 창의성과 공감 능력이 바탕이 되어야만 지속,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실사 영화를 통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진귀한 풍경을 보여 주는 패턴은 20세기 초반부터 등장하여 이미 산업의 중요 양상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제작으로, 어린이 뿐 아니라 성인 관객까지 끌어들여 90분 가까운 시간 동안, 고급 연극을 보듯 강렬한 희열과 감동을 유발하는 일이 가능하리라고 믿은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월트 디즈니 말고는.

이 책은 두 분 저자에 의해, 창업자 월트 디즈니의 생애 중요 국면과, 창업자 사후에도 끊이지 않고 면면히 전개된 해당 회사의 왕성한 활동, 그리고 월트 디즈니라는 한 인간의 개성과 기업가 정신뿐 아니라 그의 창업혼을 그대로 계승한 후임자들의 성취로부터도 강력한 영감을 받은 다른 회사들의 성취에 대해, 경영학 각론(혁신, 의사결정 구조, 인사관리 등)과 자기계발적 요점을 잘 뽑아내어 독자에게 재미있게 가르치는 내용을 담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성공적인 개인, 혹은 조직이 활발히 그 성공을 이어나가며, 언제나 변함 없는 듯 그 자리를 지키는 걸 두고 감탄하기보다는 그저 당연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이 쉴 새 없이 생산해 내는 상품과 서비스를 일상에서 (충성스럽게) 소비를 하면서도 말입니다. 소비자들 역시 직장에서는 생산 활동에 가담하는 노동자, 혹은 관리직이기에, 비록 내가 예사롭게 접하고 소비하는 제품이지만 내가 만약 저들 입장이라면 과연 이 정도 완성도, 만족도를 이뤄낼 수 있을지, 한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게 정상입니다.

헌데, 실사영화도 아니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창의적인) 개발자들에 대해서는, "뭐 정해진 룰과 루틴이 있겠지" 하는 정도로 그냥 봐 넘깁니다. "픽사" 같은 놀라운 혁신의 사례로 꼽히는 팀, 조직에 대한 강의, 연수를 받고서도, 극장에 가선 무심히 애니메이션을 관람하고 적당히 감동 받으며 기분 업 되어서 나오는 우리들을 보면, 당연히 바쳐야 할 찬사와 존중이 너무 소홀했다는 느낌도 듭니다. 특히 이런, "디즈니社의 진정한 도전 정신과 혁신의 모범" 같은 책을 읽고 나서는 더욱요.

디즈니가 운영하는 곳은, 어린이뿐 아니라 성인들의 감정과 정신까지 한껏 정화해 주고 고양시켜 주는 애니메이션 제작섹터뿐 아니라, 어린이들(우리들 대부분도 누리면서 성장기를 보낸)이 좋아하는 테마파크가 또 있습니다. 이 역시 전세계의 어린이들이, 한 번쯤은 방문하여 마음껏 환상에 빠져들고 꿈을 키우는 체험을 하고 싶어하는 곳입니다. 월트 디즈니의 위대한 면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인간 누구나 겪고 치르고 거쳐가고 싶은, 한없이 즐거우면서도 때묻지 않고 맑은 심성으로 누릴 수 있는 "꿈의 향연"을 자신의 의도와 공간 속에 유감 없이 풀어낼 수 있었던 그 저력과 야망입니다. 사람들이 누구나 품을 만한 순수한 욕망을 먼저 한 발 앞서 알아내고, "당신 자신도 몰랐으면서 언제나 꿈꾸던 게 바로 이것 아니었습니까?"라며 완성된 형태로 척 제시하는, 이런 내밀하면서도 건전한 감동을 자극하고 끌어내는 사업가야말로 궁극의 레벨입니다.

디즈니의 정신은 첫째도, 둘째도 철저한 고객 우선주의입니다. 저자도 말하지만, 이런 표어를 회사에 안 걸어 두는 이는 없습니다. 실천으로 옮길 생각이 있건 없건 누구나 하는 말입니다. 월트 디즈니의 행적에 차이가 있다면, 그는 이를 철저한 실천으로 옮기고, 자신의 직원들에게 하나하나 공유하게 하고, 직원들마저 조직의 이념과 지향성을 내면화하여, 고객들에게 서비스했다는 사실입니다. 감동 받은 고객 하나가, 자신도 자기 회사에서 관리직이다 보니 이런 놀라운 서비스를 실천한 직원의 사례가 이후 디즈니에서 어떻게 다뤄지는지 살펴 봤다고 합니다. 요란스럽게 포장되거나 홍보할 것도 없이, 디즈니에서는 그런 고객 감동의 서비스가 일상이었다고 하는군요.

이 책은 디즈니의 사업 섹터뿐 아니라, 그런 디즈니의 사업 정신을 실제로 이어받은 다른 회사의 CEO들, 혹은 (놀랍게도) 비영리단체(데이케어 센터라든가)의 관리자들까지 인터뷰하고 실사 결과를 잘 정리하여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저자들의 관점에서 "이 사례는 디즈니 정신에 포섭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실제로 그 현장의 책임자들이 "나는 월트 디즈니의 고객 우선주의, 혁신의 정신에서 크게 배우고 각성했으며 이를 실천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들 털어 놓는 모습이 놀라웠습니다. 꿈꾸는 사람도 그 꿈을 믿지는 않을 수 있고, 꿈을 믿는 이도 감히 도전할 마음을 못 품으며, 실행에 옮기기란 더더욱 어렵습니다. 월트 디즈니의 위대한 점은, 이 네 단계를 모두 자신의 내면에 소중히 가꾸고 결실을 맺어, 그의 사후에조차 면면히 이어지는 경영 이념으로 수천 수만 직원들에게 함양하여 널리 퍼뜨렸다는 점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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