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재벌과 권력 - 재력과 권력은 누구로부터, 언제, 어떻게 오는가
효제 지음 / 지식공방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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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상의 묘를 어디에 써야 후손들이 잘 살고 복된 삶을 누릴까 하는 고민은, 첫째는 유독 풍광이 아름답고 햇볕이 고루 드는 지형을 많이 갖춘 이 한반도의 탁월한 조건에서 비롯했고(삼국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풍류도, 낭가 사상 등), 다음으로는 아마도 원초적인 효도의 마음가짐이 그 원천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소중한 국토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 경건히 여기는 그 자세와 관계 있으며, 둘째는 생전에 양친을 극진히 섬기던 공경의 정신을, 사후까지 이어간다는 극진한 효심의 발로로 못 볼 바 없습니다. 이렇다면 구태여 미신이나 세속적 구복에의 집착으로 폄하할 이유도 없습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인륜에 정성을 쏟는 이가 현세에서도 복락을 누리는 윤택한 생을 누린다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사회 질서 유지 차원에서도 건전합니다.

이 책은 조상의 묫자리를 명당으로 쓴 이가 과연 당대, 혹은 가까운 후세에 그 음덕을 누리게 되는지를 놓고, 유머러스한 대화, 혹은 우화 형식으로 그 인과적 이치를 논합니다. 저자 효재(본명은 이문호 박사. 영남대 신소재공학부, 응용전자학과 교수. 서울대 공대, 카이스트에서 학부와 석박사를 각각 마침) 선생은 물론 본인이 현대 첨단 공학의 최정수를 맛보고 현재까지 그 연구를 이어가는 대표적인 지성인이기 때문에, 소위 풍수지리의 엄격한 인과율에 대해 맹신하는 식으로 논의를 이어가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직접 화법이 아닌, (좀 의외지만) 조조, 유비, 손권(관우와 장비는 안 나옵니다) 등 가상 인물을 등장시켜, 풍수지리를 바라보는 대략 세 가지 정도의 시각을 대변하게 합니다. 세 인물 중 어느 누구도, 풍수학에서 말하는 인과율이 절대적이라며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저자의 숨은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조조는 사실상 이 우스꽝스러운 담론을 주도하는 위치인데, 시대를 추측한다면 아직 삼국이 정립하기 전, 중원에서 황제를 보필하며 제국의 명분을 형식상으로 대변하던 시절 같습니다. 유비와 손권은 직급상 물론 아랫사람의 예의를 다해 조조를 대하지만, 마치 신하가 군주를 대하듯 삼가는 태도가 역력하더군요. 물론 속에는 또한 원대한 포부를 한 자락 감추고 표현하는 정치적 제스처이겠지만 말입니다. 마음에는 다른 생각을 유보하면서, 일단 상대를 향해서는 열심히 주제에 몰입하는 품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건, 우리 현대인들이 풍수지리에 대해 품는 태도를 어느 정도는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뭔가 미심쩍고 아니다 싶지만, 한편으로는 조상 대대로 이어진 그 나름 비의를 갖춘 믿음에 뭔가 숨겨진 그윽한 진리, 혹은 "통계적, 과학적 인과율"이라도 결국 존재하는 게 아닌지 하는 삼가는(더 솔직하게는 뭔가를 기대하는) 자세가 슬쩍슬쩍 엿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가상의 3인, 혹은 저자 자신(?)뿐 아니라, 무심한 듯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 여지를 남기는 우리 모두의 심리와 닮거나, 그를 대변하는 면이 있습니다.

실제로 풍수지리학을 둘러싸고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엄격한 실증주의가 그 학풍이던 모 명문대 지리학과에서, 가장 유대 깊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큰 분란과 다툼이 벌어져 학계를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좀 과장하자면 프로이트와 융 사이의 대립에나 비길 수도 있을, 방법론과 연구의 지향에 과연 전통의 풍수론이 포함될 수 있냐를 놓고 벌어진 알력이었죠. 현재는 이 책에서도 널리 인용되는 것처럼, 명당의 실체와 이론적 구조를 놓고 "박사학위 논문"만도 수십 편이 발표된 상황입니다. 이제는 최소한 이를 놓고 진지한 학문적 논의를 삼을지 말지에 대한 대립상은 어느 정도 정리된 형편이죠. 배척하는 쪽은 여전히 배척하되, 연구하는 인력은 스탠스와 지향을 분명히하고서 밀도 있는 연구를 이어가는 상황입니다. 이 책 저자께서는 공학도, 과학도이며 젊은 나이에 매우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분이지만, 이질적인 분야에 이만큼 천착하신 건 일단 소속 대학교에 이쪽(풍수학) 연구인력이 집중 포진한 사정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저는 추측합니다.

총 9장으로 이뤄진 구성인데요, 6장까지가 풍수지리학 일반 이론, 혹은 공식의 정립을 다룹니다. 저자께서는 구태여 가상의 인물들을 동원하여 이들 사이에 주거니받거니 하는 수다, 혹은 말벗 사이에 오가는 언어언의 교감 형식을 취하는데, 이는 그만큼 풍수지리론의 본체가 (어떤 이유에서건) 접근이 쉽지 않다는 점을 잘 드러냅니다. 저 역시 이 책 한 권만으로는 대체 그 논의체계가 어떤 구조인지에 대해 명확한 그림이 잡히지 않았고, 어쩌면 여태 근대적인 합리주의,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사고 방식이랄까 지적 소양이 이의 납득을 거부하고 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혹은 말입니다, 너무 깊이 파고들 생각은 말고 대략 이 정도라는 것만 알아두라는 저자의 [차라리] 배려일지도 모릅니다). 일개 독자가 이 정도인데, 공학의 특정 섹터에서 한국 최고 권위자들 중 한 분이라면 오죽하겠습니까. "좀 현대적 시각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개념으로 변환해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소만?" 같은 해학적인 멘트가 등장인물들 사이에 자주 오가는 것도 이 같은, 어느 정도는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진지함의 강도를 조절하려는 저자의 의도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의 7, 8, 9장은, 속된 호기심(?)을 가지고 이 책에 접근한 독자들을 위한 본론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아니, 거의 확실하죠). 책에서 명당을 잘 쓴 보람은 첫째 기준이 그 수가 얼마나 번성했느냐입니다. 한국은 지금의 어르신 세대가 소위 베이비 붐 제너레이션이라서, 또 그 성장기가 하필 세계적으로도 유례 없는 국가 차원의 고도발전기와 겹칠 때라, 자손 수가 늘어나는 게 무슨 큰 복이나 될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특별히 복 안 받아도 형제자매는 부담스러울 만큼 많음). 하지만 예전에는 출생 직후 질병, 부족한 영양 섭취 등으로 일찍 사망하는 비율이 높았고, 아이들을 성년이 될 때까지 양육하는 자체가 집안의 여력 없이는 불가능했겠으며, 그저 대를 잇는 사실로만으로도 부모님과 조상 볼 면목이 선다고 여겼기에 이 팩터는 비중이 크게 다뤄졌지 싶습니다. 앞의 1~6장에서 이런 이유로, 자손의 수효는 발복을 판단하는 중요 기준입니다.

다음으로, 저자께서도 그런 집안 출신이시겠습니만,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벼슬자리(이분 세대라면 문과는 고시 합격, 이과는 이름난 의사나 저자처럼 대학 교수직 취임 등)를 일찍부터 거치는 게 또한 "명당을 쓰는 보람" 중 하나가 아닐 수 없죠. 여기서 저자는 "어떤 기준을 충족해야 명당"인지, 묫자리가 명당/흉당의 이분법이 아닌(예전에는 그런 오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명당/비명당으로 가를 수 있는지, 기존의 풍수론이 혼란스럽게 논하는 바를 "논리적으로 정리"합니다. 여기서 "논리적"이란 말은, 풍수론 자체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란 뜻이 아니라, 종래 혼란스럽고 알쏭달쏭하게 전개된 풍수론의 패러다임을, 그나마 현대인들이 알아들을 수는 있게 공식화, 체계화했다는 의미입니다.

자 그래서 결국 우리 속된 독자들이 궁금한 건, 어디다가 묘를 써야 현재 잘나가시는 재벌들처럼 후손들이 떵떵거리고 사느냐, 혹은 (저자께서 아주 심혈을 기울여 분석하시는 것처럼) 대통령 같은 지극히 존엄한 자리에 오를 수 있느냐, 나아가 이제 두 주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어느 분이 묫자리를 기막히게 쓰셨기에 당선이 되실 전망인가, 뭐 이런 문제겠습니다. 명확한 답은 없고, 다만 한국의 재벌가나 정치사의 소소한 구석에 밝은 지식을 갖춘 독자라면, 풍수론 그 자체의 결론이라기보다 최소한 저자께서 누굴 염두에 두었는지는, 두고 이런 말씀을 하는지는 아마 감이 올 겁니다.

왜 어떤 사람은 잘나가다가 말년에 운이 크게 어그러지는가, 명당이 사후적 요인으로 명당의 조건을 잃기도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기존의 이론이 명확히 구명한 바가 미진한지, 혹은 저자께서 확신이 아직 없으신지 여러 의문으로만 의견을 표명합니다. 이 중에는 "한때 총기가 넘치던 인생이 갑자기 그 총기를 잃기도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있는데, 혹시 저자 자신의 사정을 은근 반영하신 문장은 아닌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묫자리를 어느 지관에다 물어봐도 명당이라는 품평을 듣는데, 왜 자손이 복을 못 받는는가를 놓고 통박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저자가 "명당은 충분조건이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 그저 필요조건일 뿐"으로 정리하고 넘어갑니다. 즉 "묘만 잘 쓴다고 저절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정도죠. 이것도(이 말이 절대진리라고 아주 기냥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뒤집어 해석하면, "묫자리를 비명당으로 쓴 이는 복을 못 받는다."란 결론이 (논리적으로!) 나오니 그리 허술한 규정도 아닙니다. 뭐 제 생각을 곁들이자면, 조상의 묘를 명당으로 쓰고 안 쓰고를, 여러 전문가(?)들에게 묻고 다니는 분들 같으면, 이미 경제적으로 성공하여 그 나름 여유있게 사는 이들이 많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꼭 인과관계라기보다는, 상관관계(나아가 역 인과관계, 즉 돈이 있으니 묫자리도 잘 쓰게 된다ㅋ) 정도를 보여 주는 자료, 사례가 아닐까 , 뭐 그런 느낌을 가져 봤습니다. 책 속지는 최고급 용지를 써서 읽고 넘기기에 상쾌하며, 재미로 읽어 넘기건 진지하게 운명(?)을 해석하는 도구로 쓰건 이야깃거리는 충분히 제공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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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본다 미드나잇 스릴러
클레어 맥킨토시 지음, 공민희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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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 등에 얼마나 많이 우리 자신에 대해 자발적으로 무신경한 노출, 공개를 일삼을까요? 소설 중에도 그런 대목이 나오지만, 자신은 일기장에다 적듯 무심히 솔직한 느낌, 일상의 여러 순간,신상 정보 따위를 게시했는데, 전혀 기대 안 한 남이라든가, 때로는 지인이라도 뜻밖의 순간이나 장소에서 그 정보를 읽고 있다면, 당황하는 게 당연합니다. 물론 똑똑한 사람은 그런 당황, 후회의 순간을 만들지 않게 평소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만.

"어떻게 내 계정에 접속할 수 있었죠?"
"이건 누구나 볼 수 있게, 당신이 게시해 놓은 것들이에요. 전체 공개로 해 두셨나 보죠."

상당히 분량이 두꺼운 이 스릴러는, 어떤 못된 X(들)이, 무작위(?)로 수집한 남(주로 여성)들의 정보를, 불법으로 개설한 사이트에 게시한 후 유료 회원들에게 팔아넘긴다는 끔찍한 음모, 사건을 주된 소재로 삼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부수적으로, 이혼과 별거, 재결합을 둘러싼 가족들 간의 아픔, 갈등, 오해, 포용이라든가, 번잡한 만큼 위험하기도 한 런던 도심 생활의 여러 선명한 단면, 혹은 생계를 위해 치열한 경제 현장에 뛰어들어 여러 고충을 겪어야 하는 여성들의 노력을 생생하게 담아내고도 있습니다. 긴 만큼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정보도 다양하고 그로부터 받을 수 있는 여러 연상, 감동, 혹은 그저 지식도 풍부하다는 게 매력입니다. 물론 이 소설의 최고 장점은, 제법 충격적인 반전,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도사리고 있는 충격적인 진상이겠습니다.

이 소설은 여러 장면에서 스토킹, 미행, 성폭력(혐오스럽거나 구체적인 묘사는 전혀 없고 과거 회상 속에 사건 요약 형식으로 간단히 언급될 뿐이라서 안심하셔도 됩니다), 요즘 한국에서도 큰 문제가 된 묻지마 폭행 등, 주로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또는 범죄 미수)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아마도 여성 독자들이 읽으면서 오싹오싹해진다거나 마음을 쓸어내릴 대목이 많을 것 같습니다. 여성 작가가 다분히 의도한 바겠고요. 특히 (위에도 언급한) 마지막의 진짜 반전은, 아마도 주인공 "나(조 워커)" 또래의 중년 여성들이 읽으면 소름이 안 끼칠 수가 없을 것 같더군요. 물론 중년 여성이 아닌 독자 입장에서도 충분히 충격적입니다.

주인공 조 워커는 글쎄 평범하다면 평범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평범보다는 좀 더 여러 혜택을 누리고 사는 편에 속하는(이렇게까지만 써도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요) 이혼 후 새 애인을 만나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둔 두 아이(아들, 딸)을 키우고 사는 여성입니다. 전문직까지는 아니지만 먼데인 워크는 아닌 수준의, 부동산 중개인(한국과는 달리 영미에선, 잘나가는 분들은 꽤 고소득을 올리는 직종입니다. 한국도 서서히 그렇게 되어 가는 듯)의 사무 보조역을 맡았으며, 다만 고용주 헤일로(책에서는 "할로"로 표기)와는 관계가 좋지 못합니다. 여러 스트레스를 받아서, 특히 이 소설이 다루는 구간에서는 특히 현저한 위험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정서가 불안해져서 그러려니 이해는 하지만, 제 생각에는 할로 사장은 충분히 합리적이고 공정한 사람 같은데 "나(조 워커)"가 너무 민감하게, 근거 없는 자기 감정에 따라 멋대로 판단하는 것 같았습니다. 주인공 조도 나중엔 지레 체념하듯 "해고되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까지 가는데, 여튼 우리 독자들이 봐서 알듯 그는 결국 조를 배려하지 않습니까? 관대하게 휴가도 주고 말입니다.

제가 좀 불만이었던 부분은, 재미있긴 했으나 구태여 주인공을 1인칭으로 설정했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조금 스포일러가 될지 모르겠지만, 주인공이 일방적으로(혹은 근거가 있든 간에) 의심하고 못미더워하는 인물은 진짜 범인으로 드러나는 게 드물죠. 여튼 불안해하고 흔들리는 주인공의 동요하는 시선과 화법 때문에, 독자들도 괜히 혼선을 빚으며(때로 멀미까지 느끼며) 힘들게 사건을 뒤쫓게 됩니다.

이 소설을 쓴 클레어 매킨토시는 전직 경찰로서 집필의 길에 투신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1인칭 주인공 조 워커 말고도, 켈리라는 진짜 경찰(여순경)도 한 명 등장하여 진행을 양분하면서 극을 주도하는데 글쎄요, 왜 켈리를 "나"로 세팅하지 않았는지는 여러 추측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다. 독자가 극중의 여성 경찰관을 (과거의) 자신과 행여 지나치게 동일시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일 수도 있고, 여튼 의도는 평범한 직장 여성, 엄마, 주부 들이 느끼거나 노출될 수 있는 가상 혹은 진짜 위험을 부각하는 쪽이기에 초점의 분산을 피하려는 것일 수도 있겠고요.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 1인칭 화자가 공연히 여러 남성에게 불안한, 혹은 스테릭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갈팡질팡하기에, 독자는 읽으면서 살짝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불만은 결말을 다 보고서야 그 휘청거리는 진행에 납득하고서 어느 정도 잦아 듭니다.

중반 넘어가면 경찰들의 근무 패턴이나 구조, 내부 소통 등이 매우 상세히 묘사됩니다(그 훨씬 전에 주요 캐릭터로서 켈리가 선명한 인상을 남기지만). 아줌마들의 착각, 히스테리, 수다가 혹시 진상의 전부가 아닐까 하는 걱정(설마 그럴리가)은 여기서부터 확실히 해소됩니다. 작가가 중년 여성들의 실체 없는 수다와 패러노이아로 소설을 다 메꾸지는 않을지 하는 불안은, 아 이런 디테일이 나오는 거 보니 진지하고 본격적인 스릴러 맞구나 하는, 좋은 전조와 느낌과 함께 해소되는 게 보통이니 말입니다.

서평 맨 위에, 인터넷에 무방비로 노출된 개인 신상 등에 언급했지만, 그렇다고 이 소설이 온라인 프라이버시의 취약성 등에만 경각을 촉구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끔찍한 범죄의 발단은 오프라인에서의 변화 없고 빤한 반복적 행태가 예비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 기계 부품처럼 일정 경로를 오가는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이 자초하기 쉬운(물론 나쁜 X들의 범죄적 행각이 더 결정적이지만) 비극을, 이 스릴러는 잘 꼬집고 듭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는 언급 못 하지만, 일상에서 매번 만나고 교감하고 사소한 불만이나 고민, 행복감 등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 소중한 관계가, 나의 부주의 혹은 상대의 악의나 우연한 불운의 개입으로 한순간에 망쳐질 수도 있음을, 섬뜩하게 소설은 지적합니다. 그리고 악(자기 입장에서는 이게 악이다, 범죄다 하는 인식이 없습니다. 언제나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일삼는, 범죄 DNA가 존재의 본체를 이루는 비천한 자들의 공통점이죠)은 제 악행의 대가를 신랄하게 치르고 파멸합니다.

남의 정보를 불법으로 사 가며 비천한 변태적 성욕을 채우는 자들의 섬뜩한 행태는 현대 정보화 사회의 신뢰 근간을 근본에서부터 흔드는 원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마지막에 범인이 제깐엔 변명이라며 지껄이는 헛소리를 한번 들어 보십시오. 이런 데 공감하며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인생도 똑같이 비천하고 한심한 겁니다). 한국에서라면 글쎄요 이런 사이트 영업이 과연 가능할지, 경찰들이 상당히 부지런히 움직이고, 입소문이 빨라 어느 순간부터는 건전한 네티즌의 시민 정신 발휘로 한순간에 적발될 것 같아, 비즈니스 모델(이 표현이 직접 나옵니다)로는 좀 곤란할 것 같군요(실정법 위반은 둘째치고). 서버에 청소부가 아무 생각 없이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고 USB를 꽂아 한순간에 해킹 툴이 깔리고 지구대와 전철 CCTV 화면을 모두 가로챌 수 있었다는 대목은 좀 무리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그 정도 사고면 서장이 갈려야 합니다. 켈리의 재소자 폭행은 유가 아니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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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재 삼국지 1 - 형제의 의를 맺다 이희재 삼국지 1
이희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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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자랑할 만한 거장 만화작가이신 이희재 선생님과 <삼국지(삼국연의)>의 만남.

여태 내로라할 만한 소설가들이 한 번쯤은 자기 버전대로 풀어 세상에 내놓아 필력과 역량을 겨룬 소재가 "삼국지"일 텐데요. 만화 버전으로는 오래 전에 나온 고우영 화백님의 고전이 유명하고, 일본에서는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작품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텍스트에 충실하면서도 독자적인 관점과 스타일을 멋지게 표방, 구사한 정전격 작품이 그 정도이며 그 외 패러디라든가 변칙풍 시도는 셀 수 없이 많이 이뤄져 왔습니다. 모범적이면서도 편안히 접근할 수 있는 결정판에 대해선 항상 우리들 독자 모두가 수요랄까 목마른 갈망이 멈춰지지 않았던 게 이 고전인데, 이번에 거장 이희재 선생님 버전으로 전 10권이 완간되어, 화백님의 팬과 삼국지 열혈 독자 모두를 설레게 만드네요.

선생님의 화풍, 작풍은 누구나 공감하듯, 불편한 현실의 모순이나 비위를 있는그대로 지면에 묘사하고 독자의 경각을 유도하면서도, 동글동글한 선과 조형의 미에서 잘 드러나듯 세계에 대한 따스한 애정과 희망, 낙관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휴머니즘이 그 기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삼국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중국 4대 기서가 다 그렇듯, 누구나 한 번쯤은 아동용 윤색버전과 성인판, 완역본을 다 접하고 성장하지만, 애들한테 읽히려고 하면 "이처럼 잔인하거나 난감한 장면이 많은데..." 하며 머뭇거려지는 게 또 보통입니다. 그렇다고 원작의 감흥과 품격이, 애들 눈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훼손되면 그건 고전을 읽히는 보람이 또 줄어듭니다.



이희재 선생님의 이번 "해석"은, 그런 상충하는 독자들의 바람과 욕구를 절묘하게 절충하여, 고전의 원의가 잘 전달되면서도 재미는 재미대로 있는, 한 멋진 정통파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흐뭇한 "사건"입니다. 이희재와 삼국지의 만남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임이 뭐 분명하죠. 아이들에게 읽혀도 멋진 입문용 삼국지 구실을 하겠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예전 고우영 화백 버전 못지 않게, 현대적 감각과 사관이 잘 스며든 품격 있는 정전(正典)으로서 레퍼런스로서, 책장을 뿌듯이 채울 마음의 양식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십상시가 발호하고 정치가 문란해지니 민중의 삶은 도탄에 빠지고,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황건적이라는 불순한 무리들이 질서를 어지럽히며 막대한 민폐를 끼치고 다닙니다. 선생님의 화풍은 언제나 그래 왔듯,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 편안하면서도 캐릭터들의 개성, 혹은 일시적 기분이나 내면의 변화까지 세밀하게 표현하죠. 단호하면서도 생각 깊은 노식, 꼬장꼬장한 주준 등의 표정을 보십시오. 주견 없는 황제의 곁에서 대국(大局)의 진로를 염려하기는커녕 한 톨의 비루한 사익만 행여 다칠세라 노심초사하는 간신배의 심리도 동작과 대사 속에 잘 드러납니다.



혹세무민하며 나라의 근간을 훼손하려는 흉악한 의도를 지닌 장각이지만 그저 과장되게 일그러진 악당의 전형적인 풍모라기보다, 그 나름 배포와 엉뚱한 속셈을 몇 겹 감춘 무게가 느껴지게 무대에 등장하네요. 역사적 팩트만 짚으면 너무도 살벌하고 비관적인 기간과 고비를 짚었지만, 역시 최후의 희망만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작가 특유의 낙관주의가 반영되어, 인물들의 모습은 마냥 위협적으로 표현되었다기보다 뭔가 전체적으로 친근감이 풍기는 듯합니다.



위-촉-오 삼국의 정립을 다루기 전, 중국은 여러 소국이 난립하여 약육강식, 부국강병의 노선을 두고 치열하게 다툰 역사가 있습니다. 오른쪽 위 컷은 춘추전국, 그 아래는 다시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 하와 상(은) 시대를 언급합니다. 어린 독자에게라면 자연스럽게 "공자, 맹자" 등의 출현, 활약이 이 시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지 소양을 심어 줄 계기로도 삼습니다. 고대사의 타임라인이 대략이라도 머리 속에 정리되어야, 단대사건 문화사건 다양한 사항이 머리 속에 제 자리를 빠르게, 또 바르게 잡습니다.



이희재 선생님 특유의, 편안하면서도 꽉 찬 듯, 여유 있으면서도 행간이 밀도 있는 멋진 컷들입니다. 황제, 귀인, 고관들이 즐겨 쓰던 차일, 혹은 일산을 닮은 아름드리 뽕나무를 두 번 부각하며, 주인공 유비의 고귀한 태생과 그 운명을 암시해 줍니다. 영웅은 이처럼 출발부터가 범상치 않고, 시련이 있어도 그 앞길을 재능과 덕성으로 헤쳐나가기 마련이지만, 앞으로 어떤 고비에서 실수와 과책을 범해 그 뜻이 꺾이는지, 혹은 비장한 몰락을 맞는지도 함께 지켜볼 일입니다. 문학 본연의 감동과 정서의 정화라는 기능은 이런 장대한 서사시적 요소를 통해 어린 시절부터 맛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동탁이라는 천하에 몹쓸 악당, 역적이 등장하는데요. 온갖 악행을 저지른 자의 운명은 반드시 하늘이 정한 인과율, 응보의 법칙에 의해 처참한 파국으로 향함을 작가는 건전한 세계관을 통해 직설적으로 독자에게 깨우칩니다. 그렇다고 너무도 사악한 얼굴선, 표정이 특정 캐릭터에게 구현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이희재 선생님 같은 거장의 원만하고도 신랄한 화풍 속이니 우리 독자들은 마음을 놓고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동탁이라는 절대악, 그리고 도원결의 삼형제 중 한 명인 주인공 장비의 모습이 어떤 점에서 차이날 지 대조해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어려운 한자성어를 쓰지 않으면서도, 일을 야무지게 매조지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생겨 애쓴 수고를 무위로 만든다는 교훈을 잘 전달합니다. 악독한 간신이 정치적 생존의 중대한 고비를 넘겨 안도의 한숨을 쉬고 이후 반전의 틈을 엿보는 가증스러운 표정 등이 생생히 표현되었네요. 어려서 사리 분간이 안 서는 황제, 단견과 무지의 한계를 극복 못 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태후, 이들을 돌이킬 수 없는 함정으로 몰아넣는 못된 환관 들이 국가를 존망의 기로로 끌고 가는 과정이 잘 나타납니다.



전국 시대의 난맥상을 정리한 시황제가 패권을 장악했으나 폭압 통치의 후유증으로 황조는 이후 자체 붕괴하고, 중국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농민 출신 군주 유방이 세운 한 제국이 새로 등장하여 질서가 잡혀가다, 역적 왕망의 찬탈로 황통이 단절되는 비극을 맞습니다. 광무제라는 중흥 군주가 나타나 난국을 수습하던 지난 내력을 보여 줌으로써, 삼국 시대가 열리기 전 어렵사리 이어온 국가(한 제국)의 정통성이, 왜 그토록 뛰어난 영걸들에 의해 옹호될 필요가 있었는지 미리 독자들에게 납득을 시켜 줍니다.

1권은 진궁과 함께 도망치다 여백사의 집에 들러 유숙하던 중, 오해로 집주인을 죽이고서도, 반성은커녕 "내가 천하를 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버리게는 하지 않을 것"이라며 음습하면서도 집요한 생존욕구를 표현하는 조조의 행보까지 다룹니다. 무튼 일세를 호령한 효웅의 풍모란 결코 만만한 게 아님을 작품은 독자들에게 잘 일깨우는 서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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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일반판)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참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이야기네요. 슬프지만 마냥 슬프기만 한 건 아니고(그래도 꽤 슬픕니다), 아주 슬픈 결말을 미리 알려 주고 시작하는 이야기지만, 둘 사이의 이상한 "관계"가 재미있게 발전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해서, 결말을 알게 된(원하지 않았지만) 독자로서도 약간 미안할 만큼 재미있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원치 않게 "결말"을 알게 된 건 우리 독자들뿐 아니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1인칭 남자 주인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야마우치 사쿠라, 아직 여고생에 지나지 않는 한창 나이인데다 예쁘고 매력 있어서 모든 "클래스메이트"들에게 인기 최고인 그녀가, 실은 췌장의 질환 때문에 시한부 생을 사는 중인지는, 그녀의 가족들만 빼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소설은 처음에 대뜸 야마우치 사쿠라의 죽음부터 알려 주고 시작하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1) "공병일기"의 노출부터가 주인공 남자애의 관심을 끌기 위한 야마우치의 의도적인 작전이었다, 라거나, 2) 얘는 아프지도 않은데 지금 연극을 하는 것이다, 같은, 근거 없지만 그래도 품고 싶은 어떤 기대를 가질 여지가 없습니다. 하긴 그런 식으로 얘기를 끌고 가면 독자의 마음은 상쾌해지겠지만 너무 통속적일 것도 같고요, 아마 작가가 "그럴 생각은 전혀 없으니 미리 기대를 접길" 독자들에게 귀띔(내지 선긋기)을 시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인칭 남자주인공은 소설이 다 끝나가도록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맨 나중에, 아주 김빠지고 우스운 본명이 나오긴 하는데, 아마 이 이름 때문에 놀림깨나 당했겠네요). 이름이란 본디 타인이 나를 불러주는 용도일 뿐 내가 나에게 쓸모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자기완결적"인 이 이상한 남학생한테는 필요가 없음을 알리려는 작가의 의도겠습니다. 여주인공 야마우치는 (나중에 잘 드러나듯) 이 남학생을 좋아하지만, 그녀 역시 한 번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나의 비밀을 아는 클래스메이트", "사이좋은 클래스메이트" 등으로 부르다가(웃기는 건 그를 좋아하는 야마우치뿐 아니라, 그를 지독히 싫어하는 다른 급우들도 저마다의 감정을 담은 수식어 뒤에 "클래스메이트"를 붙여 그를 부른다는 점이죠), 나중에는 "나의 클래스메이트"까지 승급하게 됩니다. 우리 독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아닌 척해도 야마우치가 "...한 클래스메이트"를 너무도 좋아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관계 맺음에 서투른 이 바보녀석은 그런 감정이 뭔지 전혀 모르는지, 아니면 그런 게 자신한테는 필요 없으니까 매번 무시하는 건지 야마우치와 도통 발전할 기미가 안 보입니다.

이딴 녀석을 뭐가 좋다고, 저렇게 괜찮은 퀸카가 한번 잘해보려고 그 주위에서 뱅뱅 도는 건지 불만이 가득한 건 소설 속의 급우들뿐 아니라(특히 다카히로는 그를 한 대 쳐서 넘어뜨리기까지 합니다), 우리 독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생각에 우리 반에서 가장 예쁜 여자애는 누구야?" "그렇구나, 그럼 난 몇번째일까?" "내가 예쁘다면 어떤어떤 점이 예쁜 건지 말해 줄래?" 신칸센을 타고 먼 여행까지 하며 최고급 호텔에서 일박을 하고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우리 독자들 역시 "이런 애가 저딴 놈한테 반할 리가 없잖아!"라며 야마우치의 진의에 대해 감을 못 잡습니다만, 사실 여기까지 읽으면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겠구나" 같은 체념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독자들은 두 가지 점에서 낙담하게 되는데, 하나는 참말로 괜찮은 야마우치가 가망 없는 이런 녀석에게 정말로 빠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령 녀석이 각성하고 진짜 매력남으로 거듭난다 친들 둘 사이의 로맨스가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입니다. 야마우치는 작품 속에서 두 번 나오는 것처럼, "어른이 되기 전에" 지상을 떠날 운명이기 때문이죠.

야마우치 사쿠라는 스스로도 그렇게 말하듯, 남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매력을 마음껏 뽐내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는 급우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그런 방식 말고도, 신칸센을 이용한 먼 여행 중 몰상식한 아줌마 패거리들에게 부당한 봉변을 당하는 어느 할머니를 구해 준 정의파 같은 행동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녀의 판단이 옳고 정확했을 뿐 아니라, 그녀에게는 알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주의의 동조를 얻어내는 뭔가 모를 힘이 있기에, 낯선 주위의 어른들도 즉각 그녀에게 호응을 보냈던 거죠. 반면 주인공은 이런 사쿠라의 개성과 정반대 성격일 뿐 아니라, 그가 걷는 길이랄까 방향성(이 말은 작품 중에 직접 나옵니다) 같은 게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주인공 같은 이가 사쿠라를 숨어서 짝사랑하는 게, 우리 독자나 극중 급우들이나 상식에 맞을 텐데, 현실은 정반대가 되고 있으니 그게 기가 찬 거죠. 나중에 사쿠라의 입을 통해 드러나듯,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도 자기 매력이 형성된" 그를 진심으로, 생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그 귀한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야 했을 만큼, 좋아했던 겁니다. 이해가 안 되지만 본디 사랑이란 감정부터가 그리 불가해한 속성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너의 췌장이 먹고 싶어."는 소설 첫머리에 주인공이 야마우치 사쿠라한테 보낸 문자 메시지입니다. 야마우치가 죽었을 뿐 아니라, 아프기까지 했다는 게 처음부터 다 드러나기 때문에, 이런 섬뜩한 메시지를 보낸 동기가 뭔지, 혹시 지병이 아니라 이 말이 씨가 되어(충격을 받았다거나) 그녀가 죽은 건 아닌지, 독자로서는 뜬금없이 던져진 정보 때문에 더 당혹스러워집니다. 이 소설은 이런, 불쾌하거나 혼란스러운 독자의 감정을 두고, "사실은 그게 아니라 말이죠, 당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이라며 조곤조곤 아름다운(그러나 여전히 슬픈!) 사연을 들려 주며 다독이는 내러티브가 일품입니다. "그래서 췌장이 먹고 싶었다는 거였구나..." 뭐, 글쎄, 좋아하면, 동경하면, "그가 되고 싶다면", 그런 절절한 감정을 "먹고 싶다"는 말로 표현하는 그 정도의 의도가 아니라(그런 건 책을 안 읽어도 알 수 있죠), 그 이상의 아스라하고 안타깝고 뭉클한 느낌이 이 기묘한 문장에는 배어 있습니다(라는 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고 동감해 가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교코(야마우치의 절친인 여학생)의 마음을 갖고 또 그렇게 갖고 놀 거니?" 이 말을 읽을 때만 해도, "햐 참 눈에 콩깍지가 씐다는 게 이런 거구나. 니가 죽고 나면 이런 남자애를 누가 거들떠나 보겠니?" 같은 생각이 드는 우리 독자들이지만, 결말에 나오듯(이거 스포일러지만 이 말을 서평에서 안 할 수는 없겠네요 죄송) 교코는 결국 주인공과 또 잘 엮이고 꽤 친해집니다(다만 주제도 모르는 이 녀석은 교코의 매력을 끝내 몰라 봤는지 연인 사이로는 못 발전할 듯한 기미). 이 가망 없는 놈을 이만큼이라도 사람으로 만든 건 결국 야마우치의 "은혜"입니다. 감정이 천성적으로 무딘 녀석은 장례식장에도 "겁이 많아서" 찾아가지 못했고(야마우치의 표현), 며칠 뒤에야 상갓집에 와선 "공병문고"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네가, 네가 걔였구나 그러니까..." 사쿠라의 어머니도 울고,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이었겠으나 주인공도 자신이 보낸 문자를 사쿠라가 결국 읽었다는 걸 알고, "자신을 이해해 준 데 "대해 감사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소설 전체가 너무도 마음에 들었지만 특히 여기가 저로선 최고였습니다.

서문에서 한국 독자들을 향해 수줍게, 겸손하게 인사를 건네는 작가 스미노 요루 님의 다소곳한 말도 좋았고, 일문학 번역의 최고봉인 양윤옥 선생님의, 원문인 듯 자연스러운 옮김도 너무도 좋았습니다("안알랴줌" 같은 건, 일어에도 그 상당어구가 있었던 게 아닐까 착각이 들 만큼 잘 어울리더군요 - 물론 그럴 리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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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라이어티 - 오쿠다 히데오 스페셜 작품집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버라이어티"는 이 작품집의 제목일 뿐이고 수록 작품 중에 실제로 그런 이름을 가진 글은 없습니다만 그의 "버라이어티한(정확하게는 various한)"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멋진 소우주 같은 책입니다. 애써 "버라이어티하게" 이야기를 꾸리지 않아도 그의 작품은 억지스럽지 않게 넓은 세계를 자연스레 커버하더라는 게 우리 독자들이 또 다 읽어 와서 아는 사실입니다. 서로 색깔이 많이 다른 단편과 엽편이 묶여 있고, 중간에는 (일본 잡지 구독이 그리 여의치 않은 환경인) 국내 독자들에게는 큰 선물이 될, 배우 잇세 오가타 씨, 드라마작가 야마다 다이치 씨와의 대담까지 실려 있습니다. 서로 죽이 잘 맞는 이들끼리의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고 솔직한 대화가 독자 보기에도 즐겁고, 저 예인들의 내면을 슬쩍 엿볼 수 있는 가외의 보람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오쿠다 히데오는 가뜩이나 솔직한 분이긴 하지만).

첫 단편 <나는 사장이다!>와 <매번 고맙습니다>는 38세의 가장 나카이 가즈히로가 대기업 광고기획사를 나와 독립 창업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웃지 못할 사연, 새로 배워 가는 사회의 쓰디쓴 교훈 등을,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능수능란 흥미진진 화법으로 잘 담아내는 이야기들입니다. 단편이라지만 하나하나가 좀 긴 편인데다 둘이 같은 주인공 같은 상황으로 엮여 있으니 긴 중편 하나를 감상한 느낌이고, 앞으로도 시리즈로 계속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습니다. 묘한 게, 이런 쪽 이야기를 찰지게 엮어 내는 게 오쿠다 히데오의 가장 큰 매력이고 저력이지만 너무 이런 쪽으로만 내달리면 또 드라마작가와는 구별되어야 할 그의 영역이 좀 침해, 퇴색하는 느낌일 텐데, 그는 용케(의식을 하는 것 같지는 않으나) 그런 선택은 피하고 있죠.

나카이 가즈히로는 광고회사에서 꽤 능력 있는, 앞길이 창창한 인재일 뿐 아니라 상사, 동료, 부하들과의 관계도 꽤 좋습니다. 엘리트답게 성격도 무난할 뿐 아니라 세계관도 건전하고, 이 두 단편에서 아직 신출내기나 다름없게 세상을 새로 배워나가는 모습에서 보듯 영혼에도 때가 덜 묻은 풋풋한 인성입니다. 그가 늦은 나이에도 능력은 능력대로, 성품은 성품대로 이처럼 장래성을 간직한 채 꾸려나갈 수 있는 건 본디 인간됨됨이가 바르고 태도까지 건전해서이며, 이와는 반대로 조직에의 적응이나 업무 능력 모든 면에서 미진한 채 퇴출되는 인생은, 나카이 사장과는 모든 점에서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는 부실덩어리이기에 그런 경로를 밟는 거죠. 실제로 가네코 사장(닳고닳아 온갖 구질구질한 잔재주로 세파를 헤쳐나가는) 같은 이가, 답답해하면서도 나카이를 이모저모로 배려하고(물론 이용도 해 먹습니다만) 상황을 이끌고 나가는 건, 이 사람의 책임감 있고 유능하면서도 뭔가 때가 덜 묻은(서서히 자신처럼 때를 태워 나가야 할ㅋ)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입니다.

그 밑의 부하직원들도 다 마찬가지죠. 다이코도에서 같이 데려나온 오카자키, 배신 때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오지즈키, 너무 키가 커서 사무직 여직원으로 도통 채용이 안 되는 유카(알고보니 눈치가 빠른 데다 본래 미인이기까지 한, 나카이 표현대로라면 "복권 당첨" 같은 존재) 등도, 어딘가 어설프지만 이 신출내기 사장을 믿고 따르는 게 다 그런 인간적인 매력 때문입니다. 우리 독자들이 욕깨나 할 것 같은 하라다 과장하고도 결국 좋게, 엘리트로서의 자존심 다 버려 가며 관계를 회복하는 장면을 보면, 이 작가분은 어떻게 자신이 경험도 하지 않은 상황, 풍속도, 현실을 이처럼 그럴싸하게 묘사하는지 절로 감탄이 나오더군요. 다분히 정형화, 통속화한 채이지만 여튼 캐릭터들도 지면에서 빠꼼히 얼굴을 내밀고 금방 나오기라도 할 듯 실감이 넘칩니다.

사실 오쿠다 히데오 씨도 여태 여러 매체에 간헐적으로 내비춰 온 모습이 그런 쪽이었지만, 또 작품집 뒤의 <세븐틴>에 나오는 (시바 견을 닮았다는) 아이 짱도 그런 개성이지만, 남 웃기길 좋아하고 낙천적인 성품을 지닌 게 잇세 오가타 씨와 매우 잘 통할 것 같았고, 대담 내용을 보니 실제로 그런 게 확인되더군요. 감독의 눈치를 보다 어느새 자신의 해석을 과감히 곁들인다는 잇세 씨, (나란히 비교할 구조는 아니지만) 편집자의 눈치를 (그 정도 거물인데도) 여전히 안 볼 수 없는(괜히 약한 척하는 건지도) 오쿠다 씨, 이 둘이 죽이 척척 맞아 돌아가는 대담도 독자로서는 놓칠 수 없을 멋진 선물이겠습니다.

<드라이브 인 섬머>는 당사자로서는 죽을 맛인데 보는 구경꾼 입장에서는 웃지 않을 수 없는, 어느 나라 문화권에서나 장르가 형성되어 있는 코믹 소극 대본으로 제격인 이야기지만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너무 우습고 흥미롭습니다. 벤츠를 타고 기분 좀 내려는 가장한테는 참으로 달갑지 않게, 찌는 듯 더운 날씨에 일본 전체에서 가장 최악으로 길이 막히는 코스를 달리면서, 웬 달갑지 않은(뻔뻔스럽기까지 한) 군식구를 잔뜩 태우고 운행하다 나중에 끔찍한 봉변까지 당하는 노리오 씨의 기막힌 사연입니다. 쓰레기 같은 프리터 족에게 성희롱성 추근댐(나중에는 가벼운 신체 접촉)까지 겪고도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아내 히로코의 속내가 뭔지(처음에는 이것 때문에 독자들이 불안해할 수 있죠 - 아니면 기대?ㅋ)는 나중에 가서 슬슬 드러납니다. 그녀로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남편한테 반기를 들고 싶었던 거죠.

<더부살이 가능>은 식당에서 알바를 하는 여러 딱한 과거를 지닌(그렇다고 짐작되는) 여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교코는 순박하고 순종적인 여성이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데(못된 주방 책임자 도시코에게 맡아 놓고 구박을 받는), 동료들은 그녀를 좋아하여 집에 한번 놀러가고 싶어하지만 극구 마다하는군요. 불쑥 찾아가보니 초라한 살림이지만 딱히 무슨 사연은 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다만 눈썰미 좋은 에이코는 (교코가 채 감추지 못한)남자 속옷, 담배 냄새, 매번 퇴근 때마다 사 가던 도시락 등의 단서로부터, "저 벽장 안에 누가 급히 숨었겠음"을 넉넉히 추론해 냅니다. 스포일러라서 이 서평에 적을 수는 없지만 결말은 (그런 교코에게는 꽤나 안 어울리는, 아니, 반대로 잘 어울릴지도 모르는) 충격적인 진상이 하나 기다리고 있더군요. 평범한 여인들이 어떻게 사회와 가정의 구조적인 폭력에 시달리다 사회의 막장에서 원치 않는 고생을 하며 고단한 일상의 질곡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한숨 돌리는지, 어떤 과정으로 결국은 사회의 모든 비의와 모순의 희생양은 결국 그들이 되는지, 절묘한 컷으로 담아낸 단편이었습니다. "한류 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설정이 나오는데, 피곤한 밑바닥 삶을 사는 여성들에게 그런 용도로 힐링을 해 주는 컨텐츠로 쓰이는구나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습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특히 소외받는 여성들이라든가 타민족(무엇보다, 저들 일본인 밑에서 노예 같은 처지에 놓였었던 우리 한국인들)에게 선입견 없는 따스한 시선을 보내는 게 경향처럼 많이 드러나죠. 또 여성들에 대해 언제나 동조적인 공감을 짙게 표현하는(하긴, 안 그러면 드라마 작가로서 생존이 가능할지) 야마다 다이치 씨와도 이 노련한(그러면서도 본성이 그런 건지 여전히 순진한 이미지의) 작가는 지음의 관계처럼 대화의 줄기를 서로 요철의 모듈을 채우듯 흥겹게 펼쳐 나가네요. 둘 다 "희극을 동경하고" 그 희극의 재현과 창조에 천부적인 재주를 가진 이들인데, 두 분 다 "어둠과 마주하지 못하는 현대"에 우려를 표한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이분들이 "현대의 어둠과 마주하는" 방식이 바로 여태 독자, 시청자들에게 펼쳐 보인 그 특유의 스타일들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여름의 앨범>은 이종사촌 사이인 아이들이, 어른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고통에 대해 좀 더 알게 되고, 자신의 현실을 바로 보는 성숙함을 체득해 간다거나 상대의 아픔을 배려하는 어른스러움을 배워 나간다는 좀 슬픈 줄거리입니다. <크로아티아 VS 일본>은 두 페이지밖에 안 되는 엽편인데, 이게 지금 크로아티아 시청자 입장에서 하는 말이라는 점을 알고 봐야 작가의 의도, 혹은 작품의 완성도가 강렬히 와 닿겠습니다. 크로아티아는 실제로 1998년 피파월드컵에서 3위까지 했고, 지금도 빅 리그에 일류 선수를 다수 뛰게 하는 축구 강국이죠. 근데 이게, 최소한의 분량으로 큰 볼륨의 메시지를 담은 그 성취는 놀라우나(그게 바로 엽편의 본질입니다), 기껏해야 한국, 중국(번역이 된다면) 독자들에게 감흥을 줄 뿐, 철저히 타자인 유럽 독자들이나, 심지어 완전한 객체인 크로아티아인들이 읽으면 영 별로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뭐야, 왜 당연한 얘기를?"). 이는 언제나 일본인 입장에서만 모든 사리를 판단하는(한국인들의 딱한 자기중심적 습성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스탠스라야 이 의외의 1인칭 내러티브가 충격으로 다가올 테고, 그런 점에서 보편적 휴머니티를 통해 (뜻하지 않게) 세계 독자에 두루 호소하는 매력을 지닌 오쿠다 히데오의 진면목이 잘 드러나는 작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븐틴>은 딱히 최루성 장면 구성이나 인위적인 감동 유발형 대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사실 오쿠다 히데오는 그런 기법 구사를 극히 꺼리는 작가죠), 절로 눈물이 핑 도는 반응을 독자에게 자아내는, 거 참 단편은 이래야 단편이다 싶었던 명작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마도 자신을 매우 닮은, 꽤 예쁘지만 이기적이고 무엇보다 철없이 자기 감정에만 충실한 딸이, 이제 남자친구를 하나 사귀어 드디어 크리스마스 이브날 "처녀"를 떼어버릴 작정임을 알게 됩니다. 하긴 요즘은 "남자가 조르고 여자가 승낙하는" 구태의연한 과거가 아님도 잘 아는 엄마지만, 엄마인데 여자애의 외박이 어떻게 걱정 안 될 수 있겠습니까. 애 자존심도 세워줘야 하고, 부모라고 무작정 사생활(사생활이죠!ㅠ)에 간섭하고 들 수도 없지만, 걱정은 걱정대로 되니 그녀로선 선을 넘어 딸의 서랍을 조심스럽게 들춰 보게 됩니다.

"이렇게 생긴 아이였구나, 순박하고 착하며 주위를 즐겁게 해 주길 즐기는 듯 생긴 게, 이기적인 내 딸과는 잘 어울리겠는걸." 아닐 수도 있지만 이렇게 생각을 해야 그나마 마음이 편하고, 자기 마음이 편한 것보다 딸을 이해하고 믿고 싶은 엄마 마음이 그런 법이겠죠. 자신이 먼저 남자 아이 집에다 전화를 걸어 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 역시 자기 딸, 그리고 누군지 모르지만 그 남자애한테도 결국은 어른으로서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아니다 싶어서 그만두던 차에, 뜻밖에 모르는 목소리에게서 전화가 오는데, 받아 보니 남자애의 어머니군요. 아들이 여자친구네 집에서 자고 온다기에, 폐를 끼치는 셈도 되고 아들 어머니는 그 나름대로 신경이 쓰이기에 전화를 걸었답니다. 그러니 이 아이들은 둘 다 자기 집에다 대고 거짓말을 한 셈인데, 속 깊은 어머니는 저쪽 모친(이 역시 얼마나 사려깊은 분입니까!)이 마음 편히 휴일을 보내게, 선의의 거짓말로 잘 안심시키고 맙니다. 이야기도 감동적이지만, 작가가 평소 얼마나 인간 본성에 대한 훈훈하고 낙관적인 마음을 품고 있기에 이런 간단한 사연으로도 사람 마음을 감동시킬까 하는 감탄이 절로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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