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 에드윈 드루드의 미스터리
찰스 디킨스 지음, 정의솔 옮김 / B612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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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가 미스테리 소설을 썼다는 점도 놀랍지만 이 작품은 디킨스가 그 창작 도중 급작스럽게 뇌출혈을 일으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망한 사실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로체스터 지방에서 벌어진, 숙부가 조카를 살해한 사건이 당시에 큰 화제와 충격을 불렀고, 디킨스 본인도 이에 관심을 가진 만큼 이 소설의 멋진 완성에 대해 가진 집념이 상당했으므로,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문호의 죽음에 대해 애석해하는 이들은 그 안타까운 마음을 이 작품에다 내쳐 쏟아붓다시피했으며, 이 열기와 관심은 오늘날까지도(말 그대로입니다) 이어집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당신의 결말이 기다린다"는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질 만큼, 디킨스의 열혈 독자들은 이 미완성작에 자신만의 엔딩을 채워 넣으며 컬트적인 헌신과 쾌감을 드러내기도 했고, 어떤 작가들은 실제로 헌정 겸 패러디 겸 해서 속편격 스토리를 (디킨스의 독특한 문체와 분위기까지 흉내 내어) 발표했습니다. "로스트"는 이 번역본에서만 붙인 제목이고(실제로 등장인물 에드윈 드루드가 실종되었으니), 원제목은 "에드윈 드루드의 미스테리"입니다.

마치 그 즈음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장르물처럼 "~의 미스테리"라고 제목은 붙었지만, 만약 완성되었다면 과연 디킨스가 이 작품을 추리 장르물처럼 끌고 나갔을지는 좀 의문입니다. 작품은 초반부에는 각종 희한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 허위 의식과 과시욕으로 똘똘 뭉친 경매업자, 엄격한 교육자와 사교계에서 주목을 끌어 보려는 속물로서 두 얼굴을 지닌 부인(교사), 스스로를 3인칭으로 부르는 코믹한 석공, 지능이 떨어지고 성격이 괴팍한 야생 소년(의 동생?), 후견인에 의해 사립학교에 보내진 고아들(이들이 사실상 주인공입니다), 조카이자 제자를 살해하고 그 약혼녀를 가로채려는 무시무시한 음악 선생, 이렇게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디킨스의 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우스울 때는 끝도 없이 우습고, 인간 내면의 섬뜩한 잔인성, 비열한 이중성을 묘사할 때는 소름을 돋게 하며, 얄팍한 속물 근성이나 한심할 만큼 표리부동한 행태를 묘사할 때는 절로 경멸감을 부르는 그 탁월한 묘사가, 이 유작, 미완성작에서도 일품입니다. 이름을 못 본 채 우연히 이 책을 집어 들고 읽은 독자라도 "디킨스의 작품!"임을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눈치챌 만큼입니다. 마치, "사자가 앞발만 들이밀어도 그게 사자인 줄 누구나 알 수 있듯" 말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작품은 미완성이며, 말미에 마치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의 스타일(이후 많은 후배들에 의해 모방, 발전된)처럼 관련 인물 여럿이 모여 "드디어 최후의 진상이 밝혀질 듯한" 미완성의 한 챕터가 더 실려 있긴 하지만, 여튼 6부로 본문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왜 이 소설이 (진귀하게도) 디킨스 유일의 미스테리물이란 건지는 4부 13장까지 읽어 가야 알 수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 특유의 현학적이고 섬세한 감정과 의사의 표현 그 정신없는 향연이 펼쳐지는 통에, 웬만해선 지금 "살인, 혹은 실종"이라는 끔찍한 범죄의 발생으로 점차 긴장이 고조되는 줄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과연 디킨스의 의도가 "근사한 미스테리의 창작"에 국한되었는지는 평자, 연구자마다 의견이 갈리고요, 우리는 그의 유작이다, 장르물로의 외도다 하는 괜한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고 "여태 읽어 온 디킨스풍 이야기"가 주는 본격(문학) 재미에 충분히 빠져들 수 있습니다.

"로체스터 지방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 모티브"라는 선입견이 없다면, 청년(소년에 가까운) 에드윈 드루드의 실종, 혹은 죽음은 우선 그와 큰 다툼을 벌인 네빌 랜들랜스에게 그 혐의, 책임이 쏠리지 않았을까요? 작품 중에서뿐 아니라 프레임 밖에서 읽어나가는 우리 독자들 눈으로 봐도 말입니다. 네빌의 품성, 기질에 대해 소설은 매우 섬세한 기초와 성격을 마련합니다. 그는 이제 좋은 시설에서 교육받고, 훌륭한, 혹은 모범으로 삼을 만한 관계의 네트워크를 마련받습니다만, 유년기에 혹심한 고생을 한 탓에, 스스로도 자백(?)하듯 야만인, 하층민의 기질을 정신에서 완전히 지우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그는 외견상 검은 빛의 피부인데, 인종에 따라 그 가치와 품격이 결정되던 시절 이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만했습니다. 결국 그는, 친한 친구로 잘 지낼 것이 기대되었던 주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큰 사고를 칠 뻔합니다. 이런 일이 전에 있었으니, 느닷 일어난 에드윈의 실종 후 그에게 의혹의 시선이 쏠리는 게 너무도 당연합니다.

영국과 법계가 다른 한국에서도, "시신 없는 살인사건"은 일단 당국이 기소조차 하기 힘들며, 에드윈은 말 그대로 아직은 실종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주위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네빌(그래도 자신이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볼 줄 아는 인물이며, 진짜 구제불능은 내가 왜 이런 지경에 놓이냐면서 끝도 없는 합리화를 일삼게 마련이죠)은 유폐 아닌 유폐 생활을 하게 되며, 이런 네빌과 우연히 대화를 주고받게 된 인물이, (알고보니) 셉티머스 크리스파클의 후배(이자 생명의 은인)인, 잘생긴 타르타르입니다. 전반부에서 다소 우습게, 선대가 정혼해 준 상대와 약혼을 해제(해소)한 로사와 혹시 잘 엮이지나 않을까 독자가 절로 기대하게 되는, 아마도 와완성을 봤다면 후반부를 주도하고 나갈 듯한 힘 있는 남성 캐릭터이죠. 거듭 강조하지만 디킨스 작품의 힘은 이런 캐릭터들의 선명하고 유쾌하며 때로는 섬뜩한 행진에 있습니다.

로사를 "예쁜이(역주에도 나오지만 pussy입니다)"로 부르던 에드윈(의젓하게도 합의 하에 약혼 관계를 해소하는 모습을 보며 독자들은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은, 어느날 아편 중독자로부터 달갑지 않은 예언을 듣고 실종됩니다. 한편, 이 여성 중독자는 소설 맨처음에 재스퍼(조카한테 엄청 친한 척하는 그  이중인격[보다는 정신분열이 의심되는]그 숙부)와 아편굴에서 함께 만나는 장면에서도 등장하는데, 사실 이런 설정을 보면 범인을 재스퍼로 모는 듯한 디킨스의 의도를 부인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이후 다른 작가들이 채워 넣은 여러 후속담 속에선, 에드윈이 죽지 않고 다시 등장한다든가, 버저드와 대처리가 알고 보니 같은 사람이었고 탐정이었다든가(이러면 진짜 미스테리 장르물이 되는 거죠) 하는 식으로 독자들을 신나게 하는 기발한 결말이 이뤄지곤 했습니다. 사실 재스퍼를 과연 어떤 성격으로 볼지에 따라 주제, 감동의 방향이 확 달라지는데, 이 인물의 이해를 어느 쪽으로 잡느냐를 놓고 그 해석자(독자)의 인성도 그 가늠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뒤에 디킨스의 창작 노트 원본을, 한국어 번역이 이뤄진 채 재구성한 대목이 있습니다. 디킨스의 의식을 엿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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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양 세계기독교고전 33
성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김종흡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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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아버지, 즉 교부(敎父) 중에서도 으뜸가는 존경을 받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신교에서는 "어거스틴"이란 명칭이 더 익숙합니다만)는 유복한 환경에서 출생, 젊어서 아주 방탕한 삶을 살다 어떤 계기를 맞아 극적으로 회심한 후, 이후 기독교 신학 천 년을 좌우할 중요한 가르침과 저서를 남긴, 인생과 업적과 영성 모든 면에서 경이로운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분뿐 아니라 명망 높은 집안에서 나고 자라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청춘기를 보내던 중 돌연 경건한 마음으로 독실한 신앙에 빠져든 이들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등) 꽤 많은데요. 저는 한때 교회 측에서 어떤 신앙과 삶의 모범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형화, 정형화한 프로젝트의 일종이 아닐까 아주 삐딱하게 의심도 해 보았습니다만 이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당대 기록이 많이 남아 있으니 그럴 수도 없는 일입니다.

여튼 한 개인이, 신앙이나 종교 문제를 떠나 당시 유럽 세계에 알려진 거의 모든 기술적 지식, 학문의 방법론, 경건한 도덕과 윤리까지 이처럼 방대한 체계 안에 넣어 심도 있는 논변, 정리, 비판, 종합을 가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기독교 교양"입니다만, 라틴어 원제가 DE DOCTRINA CHRISTIANA이므로, "기독교의 교의" 나아가 "교리"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단, 교의, 교리라 옮기면, 대체 왜 "현대 교회에서 잘 다루지 않는 이슈에 대해 저자가 이처럼이나 방대하고 세심히 논술하는지, 요즘 독자들은 다소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교양"이란 말 속에는 좁은 의미의 교리 외에 다양한 통찰, 의견, 프레임 등이 포함될 수 있으므로, 이 번역서의 의도에는 그런 점에서 공감 찬동이 가능합니다.

"이런 주제들이 기독교와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 유럽, 또 소아시아 일대라면 지식을 다루는 집단, 신분, 조직이 교회가 유일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뭇 백성들의 영혼을 달래고 도덕성을 회복하는 데에도 있었겠으나, 글자를 알고 책을 보관하며 필사를 통해 지식을 전파하는 기능 대부분까지 떠맡았기에, 성직자 상당수는 교사이자 학자이기까지 했죠. 하물며 존경 받는 "교부"의 위상이라면 그 학식과 통찰 면에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을 겁니다. 이런 구구한 평가도 필요 없는 게, 이 책을 읽어 보면 저자가 얼마나 다방면의 지식과 학문에 대해 확고한 이해를 갖췄는지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제목이 "기독교의 독트린"이기에, 물론 바른 심성, 바른 지혜에까지 이르려면 어떻게 마음을 닦고 경건한 생활 태도를 유지해야 할 지에 대해서도 저자는 자상한 언급을 합니다. 예전에 제가 같은 저자의 <고백록> 리뷰 속에서 "놀아본 형" 같은 표현을 썼습니다만, 유흥과 쾌락(快樂)과 타락(墮落)의 극한까지 가 본 분이, "이제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정도를 가려면 어떻게 해야 흐트러짐 없는 정진이 가능할지" 그 세세한 방법론까지 마련하여 잘 타이르시는 품이란, 인생사의 온갖 풍상과 신산, 우여곡절(영어로는 이걸 vicissitude라고 하죠)을 거친 마스터의 풍모와 경지를, 우리 독자들이 감히 그 일부나마 엿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책은 총 4부로 이뤄졌습니다만 저는 특히 2부 중 번역과 해석에 대한 그의 박식하고 미려한 분석과 논평에 주목했습니다. 무려 천 육백 년 전의 학자가 도도히 서술한 내용치곤, 그 기본적 이치와 방법론이 현대 성경 본문 비평(뿐 아니라 널리 비교문학, 언어학, 기호학 전반)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타당성을 지녔기에 또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점만 말하자면, 소위 "역동적 동등성" 원칙이 주장하는 바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언에 기계적으로 구애받지 말고, 전후 문맥을 잘 살펴 당대인의 건전한 교양이 납득,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죠.

특히 p83을 보십시오. "(전략)...inter homines라고 하든지, 아니면 inter hominibus라고 하든지 중요한 게 아니다....(후략)" 같은 말이 있는데,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인 중 고전 라틴어의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inter라는 대격(목적격. 4격) 지배 전치사 뒤에 homines가 와야 문법적으로 정확하다는 점을 모를 리가 없으나, 이미 고전어에 대한 바른 지식이 대중 사이에서 잊혀진 현실을 감안해, "바른 뜻만 통하면 무슨 상관이겠는가" 같은 통 큰 소통을 시도하는 거죠. 저는 이 대목에서 나무아미타불만 잘 외워도 극락 왕생할 수 있다고 가르친 원효 대사(아우구스티누스보다 대략 이백 년 뒤의 분입니다만 전혀 그 존재도 몰랐겠죠)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 바로 밑에 보면 "... 소위 야비한 말투는 발음이 우리의 선인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문장이 있는데, 이 책 역자께서 저본으로 삼은 J F Shaw의 영역본을 저도 갖고 있어 찾아봤습니다. 해당어는 barbarism이었고, 라틴어 원본에는 barbarismus라고 되어 있더군요. barbarism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저서에서 그만의 독특한 맥락으로 쓴 것도 아니고, 지금도 언어학에서 두루 쓰이는 개념 중 하나이며(이 점에서도 그의 놀라운 통찰과 학문적 기여, 혜안이 드러납니다) 대략 "비표준적 어법"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Shaw의 원문이 what is a barbarism but the pronouncing of a word in a different way from that in which those who spoke Latin before us pronounced it? 이므로, "우리 선인들이 발음하던 방식과 다르다는 것 외에, barbarism이라 구태여 깎아내릴 게 무엇이냐?"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 뒤 페이지에 보면,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헬라어 원문에서처럼 속격을 쓰지 말고, 라틴어에 자연스러운 여격을 쓰라고 권하는 겁니다. 사실 헬라어에도 라틴어나 마찬가지로 "소유의 여격(possessive dative)" 용법이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도 바울의 헬라어 원문에서는 속격을 썼기에, 라틴역에서도 이를 곧이곧대로 따르려 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입니다. 실제로 성 히에로니무스의 불가 라틴 역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p84 밑에서 두번째 줄, quam과 homines 사이에 있는 "보다"는, 아예 빠지거나, 아니면 괄호로 묶어야 뜻이 잘 통할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불가 라틴 번역도 뜻이 매끄럽지 않음을 들어, quam 같은 비교 전치사를 넣어 뜻을 분명히하기를 권하는 거죠.


우상의 숭배와 관련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방인들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는 데에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한 대목이 있습니다. 또한 그는 "수학"이라든지, 혹은 "논리학상의 엄정한 규칙"이라든지 하는 게, 인간이 비로소 고안한 게 아니라, 다만 인간이 준수해야 할 법도에 가깝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그의 시대로부터 거진 천 년이 지나, 예컨대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 등이 말한 "네 개의 우상"이라든가, 대륙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통렬히 지적한 "이성의 권위"와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그 존엄의 연원을 "신"에 두었느냐, 아니면 "인간 정신의 영원한 발전과 각성, 계몽"이라는 독립적인 목표에 두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개인이 자의로 초점을 흐리지 않고, 누구나 준수해야 할 엄정한 규칙이 있음을 강조하는 점에서 오늘날의 독자들도 능히 수긍할 수 있는 이지적인 풍모가 엿보이는 서술입니다.

"이교도들이 하는 바른 말은 언제나 우리가 이용해야 한다" 여기서 "이용"이라 함은 성경 본문의 해석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뿐 아니라 모든 현자, 학자(그 시대의)들은, 성경의 해석 안에 그때까지 알려진 모든 진리, 통찰을 다 담아내려 했으며, 기왕이면 한 권의 책으로 모든 비의와 질서와 진리가 설명되는 게 바람직하겠으므로(물론 인류는 이 무모한 과제를 오래 전에 포기했지만) 해석론에 총력을 집중한 건 그 시대의 기준으로는 너무도 당연했을 터입니다. "이교도들이 하는 바른 말"에 방점이 놓일 뿐이며, 이교도들이 하는 얼토당토 않은 말을 주저없이 배척함 역시 앞서의 요구와 같은 정도로 요구되는 결단입니다.

말은 그런 말을 할 자격과 소양이 있는 자의 입에서 나와야 설득력을 가질 뿐입니다. 관계(가장 기초적인 가족과의 관계 설정)에 실패한 자가 어떻게 관계의 참뜻과 비결을 말할 수 있으며, 마음 속에는 시기, 질투, 원한, 왜곡 등 부정적인 정서와 감정만 가득한 이가 무슨 자격으로 남에게 "이 길이 맞다"며 천박한 싸구려 사탕발림으로 가득찬 권유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에 솔깃해하는 자 역시, 선택받고 건전하고 도덕적인 길을 애써 외면하고, 더러운 거름밭에서 뒹구려는 충동이 천성적으로 더 강하기에 구태여 그 말에 귀가 기울여지는 겁니다. 이성과 바른 마음가짐, 명철한 논리는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파사현정, 사불범정" 같은 말 속에 이미 강조했던 덕목들입니다. 묘하게도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이 책에서 "달을 볼 것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연연하지 말라"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을 향한 것이든, 진리를 겨냥한 것이든, 인간이 참된 마음을 품고 영혼의 행복에 도달하는 데에 결국 길은 여럿이면서도 또한 하나임을, 이 고전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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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의 도구들 - 1만 시간의 법칙을 깬 거인들의 61가지 전략
팀 페리스 지음, 박선령 외 옮김 / 토네이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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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내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주어진 시간을 낭비 없이 사용하며, 정신의 활력, 감정의 쾌감을 최고도로 유지할 수 있을까? 이는 반드시 주어진 과업의 완성도만 높이기 위해 염두에 둬야 할 과제가 아니라, 어찌 보면 내 자신이 그저 매 순간 행복해지기 위해서도 달성해야 할 목표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내 자신이 지금까지 겪어 온 주관적 경험에서만 참고 자료, 벤치 마킹 대상을 추출해서는 곤란하겠으며, 가능한 한 시야를 폭 넓게 잡은 후 배울 수 있는 모든 사례로부터 교훈을 삼아야 하겠습니다.

영어권에서는 뚜렷한 업적을 남긴 이들이라든가, 타인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꼭 좋은 의미에서만은 아닌) 굵직한 존재감을 남기는 "거인"들을 두고 "타이탄"이라고 흔히 부릅니다. 유럽권 신화에 흔히 등장하는 "우리보다 앞선 시대의 거인들" 운운할 때 대표로 불리는 종족들이 "티탄"들이죠. "거인들이 지상을 활보하던 때에 비하면 우리들의 체격이나 기량, 족적은 많이도 위축되었다" 같은 표현은 여러 고전 저자들이 흔히 쓰기도 합니다. 이럴 때의 "타이탄"은 분명 긍정적인 맥락이며, 우리 도양권에서 "성현, 군자"라고 할 때와도 비슷합니다. 이 책 역시, "왜 그들은 큰 업적을 남기고 뭇 대중에게 존경을 받지만, 우리들은 그렇지 못한가?" 같은 반성 혹은 모범의 지표로 삼기 위해, 많은 거물들을 인터뷰하고 저자만의 강렬한 영감, 분석의 결과를 잘 정리해 놓은 성격입니다. 목적은 뭐겠습니까? "좀 보고, 배우고, 따라해 보다가, 나만의 개성 있는 길도 함께 탐색해 보자." 정도겠지요.

영미권 책에서 항상 눈에 띄는 건, 일류 저자일수록 인터뷰 대상을 직접 만나고, 저자 자신이 궁금했던 바를 집요하게 물어 본 후, 비록 말은 인터뷰의 입에서 나오는 워딩이지만, 교훈만큼은 저자(인터뷰어)의 관점에서 철저히 뽑아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자들의 기색을 살피면, 내가 이 정도의 거물들을 만나, 이만큼 생생한 증언을, 이 정도 분량으로 많이 거둬내 정리했다 같은 자부심이 가득합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기획도 드물고 시도 자체가 잘 없죠. 야심 있는 저자도 없고, 자기 책에서야 자기 말을 하려 들지 남의 말을 싣거나 옮기면 뭔가 없어 보인다는 풍조가 지배적이며, 기본적으로는 남의 말 자체를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충고를 들려 주겠다며 열을 내는 어처구니없는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타이탄의 도구들"은, 일단 "타이탄"들의 생생한 체험과 열정이 배어 있는 "대답, 증언들"이며, 그 대답들은 정말 인터뷰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성공에의 비결에 가까운 습관, 원칙"에 대한 것들입니다. 여기에, 저자의 객관적인 분석, 비평이 담겼으니 독자 입장에선 검증 장치랄까 메타적 프레임까지 안전 장치 삼아 주어진 셈입니다. 사실 이런 책에선(또, 특히 이 책에선) 저자가 치는 소스와 양념, 드레싱이 더 재미있습니다. 물론 요리의 본체인 육질은 "그 타이탄들이 제공하는 생생함, 선도, 개성"이겠고 말입니다. 모든 인터뷰나 증언이, 팀 페리스 본인이 직접 청취, 기록, 정리한 건 아니고, 제3의 소스를 거쳐 취합한 것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근육 못지 않게 뇌마저 섹시하다는 평가를 여성들로부터 듣곤 합니다. 조시 웨이츠킨(이 책에서 여러 군데에 등장합니다)는 이름난 체스 챔피언이었지만, 나중에는 태극권까지 섭렵하여 일인자에 오른 특이한 경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가장 독창적인 생각을 가장 독창적인 시간대에 떠올린다(p110)"는 습관은,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만이 발휘할 수 있는 선도 높은 창의성을, 우연히 찾아왔다 구름처럼 떠나 보내지 않고 영원히 자기 역량으로 간직할 수 있게 돕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저자가 아무래도 작가다 보니 세계인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야기꾼의 비결이, 아마도 본인부터가 궁금했을 만합니다. 이 책에 처음 나오는 말은 아니지만, 코엘료는 이런 명언으로도 유명하죠. "서점에 나온 모든 책은 단 네 가지 얘기만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 권력 투쟁, 그리고 여행." 인간사가 이처럼 네 마디 키워드로 요약될 뿐이라면 참 허탈하지만, "타이탄"은 그런 뻔한 인간사의 요체를 꿰뚫어 보고 상업적으로 활용할 뿐 아니라(?), 그런 비결을 결국은 다른 이에게 들려 주고 그 허망하고 빤한 실체를 함께 직시하자고 권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그가 거인이라는 거죠. 반면, 우리처럼 작은 일상인들은 이처럼 거인의 충고까지 들었음에도 불구, 결국은 빈약한 키워드의 새장에서 못 벗어나고 "일상, 정상"의 틀에 자신을 길들일 뿐 아니라, 속보이는 자기기만까지 즐깁니다. 이런 책을 읽는 보람이랄까 이유는, 타이탄의 "성공" 도구로 나 자신의 틀을 깨 부순 후 새로운 트랙, 필드를 마련하는 데에 있겠건만 말이죠. (그 외에도 소설가 알랭 드 보통[미국 저자로서는 떠올리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말콤 글래드웰[자계서의 거장이니]) 등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은 황당한 B급 저예산 상상의 대명사인 로버트 로드리게스에 대한 여러 분석과 말, 말, 말이 재미있을 법합니다. 영화 <아이언맨>에 보면 악당이 연구진을 다그치면서 "토니 스타크는 아무 자원도 없이(from scratch) 수트를 만들었어!"라고 하자, "저는 토니 스타크가 아닌걸요."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죠. 이 책에도 로드리게스 감독(저자는 이미 잘 안다는 친근감의 표현, 혹은 독자 당신들도 이 타이탄들을 지인처럼 참고하고 가까이하라는 뜻으로 퍼스트네임으로 내내 부릅니다)은, 예산도 없고 가용 자원도 없어서 그냥 키우던 가축, 애완동물을 잔뜩 자기 영화에 등장시킨(대신, 할 일은 창의적으로 마련한) 게 의외의 대히트를 친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말 그대로, from scratch에서 업적을 이룬 창의적인 타이탄의 좋은 예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가 내가 사는 세상의 한계를 규정한다." 아무리 천재였다지만 그런 그라고 해서 없는 말을 마구 만들어내거나 억지를 부리는 식으로 "자기 세상의 한계"를 넓히지는 않았을 겁니다. 남들은 그저 무심히 갖고 놀거나(그냥 노는 데 그침), 혹은 아깝게 낭비할 뿐인 도구를 두고서도, "타이탄"들은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혹은 전 우주(다름 아닌 자신의 정신세계인데, 이는 누구에게나 공평히 주어져 있죠)를 그 안에 밀도 있게 채워 넣습니다. 이래서 그저 평범한 일상의 도구일 뿐인 게, 타이탄의 손에 들어가면 "타이탄의 도구"가 되는 겁니다. 책에 재인용된, <스타 워즈> 캐릭터 요다의 말엔 이런 게 있죠.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꼭 두려움에 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상의 범속함과 질식할 듯한 지겨움을 이겨내려면, 그 흔한 일상의 풍경에 이름을 붙이고 이를 "타이탄의 도구"로 재활용, 격상시키는 겁니다. 아마도 모든 창조, 시작, 혁신의 단초가 이러했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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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터[606]번째 책이야기

아빠 냄새 / 추경숙

내가 몰랐던 책 책이야기 텍스터(www.texter.co.kr)
아빠 냄새 / 추경숙
아빠가 못마땅한 도담, 김태영, 오상민
아빠들과 신나게 한바탕 축구 경기를 뛰다!

‘아빠’ 하면 아이들은 어떤 모습을 떠올릴까요? 저녁에 집에 와서 놀아 주는 아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빠, 주말이면 함께 놀이공원에 가는 아빠……. 어쩌면 아빠들도 똑같이 떠올리는 모습일 거예요. 여건이 따라 준다면 말이죠. 그러나 현실적으로 얼마나 많은 가정이 이런 모습일 수 있을까요? 마음과 달리 퇴근해서 돌아온 아빠는 늘 지쳐 있거나 피곤에 찌든 모습, 집에서도 정신없이 바쁘고 분주한 모습을 많이 보여 주게 되지요. 그만큼 한국 아빠들은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최근에는 맞벌이 부부가 늘면서 엄마의 빈자리도 커지고 있어요. 덕분에 본의 아니게 일찍 철든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기특하면서도 마음이 아픕니다. 언제쯤이면 우리 사회도 아무 조건 없이 아이들에게 넉넉하게 부모 곁을 내어 줄 수 있을까요?
책고래아이들 시리즈 여섯 번째 책 《아빠 냄새》는 아빠의 품이 그리운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빠가 수산시장에서 횟집을 하는 아이 도담, 목욕탕집 아들 김태영, 소아과 의사가 아빠인 오상민이 주인공이지요. 세 아이는 저마다 아빠가 못마땅합니다. 특히 아빠에게서 나는 냄새를 싫어하지요. 수산시장에서 나는 비린내, 목욕탕 때비누 냄새, 병원의 소독약 냄새를 말이에요.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은 우연히 아빠들과 함께 축구 경기를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아빠들의 모습, 그리고 신났던 경기. 아이들은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딱 하루 한바탕 어우러진 경험이었지만, 심통 부리며 쳐 놓았던 빗장이 술술 풀리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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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 여자
가쓰라 노조미 지음, 김효진 옮김 / 북펌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참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여성 사기꾼을 소재로 삼은 장편이라면 한국에서도 큰 히트를 친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가 다들 생각나실 것 같은데, 이 장편은 평생을 사기치고 다닌 어떤 여성을 냉연히 관조, 추적, 서술하는 내용이면서 미유키의 그 대표작과는 결이 다릅니다. <화차>가 솔직히 장르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 작은 은근 본격문학의 향취를 풍길 만큼 여운이 짙게 남습니다. 가독성은 가독성대로 좋고 흥미 만점이면서도 말입니다.

읽으면서 저는 사기꾼 낫짱(나쓰코)의 뒷모습만 부지런히 따라가는, 뒷모습의 그림자만 밟아가는 게 아니라 "그녀가 저지른 사고의 뒷마무리까지 부지런히 수행하는" 변호사 데쓰코가, 우리 독자를 놀라게할 만한 진짜 사연을 감추고나 있지 않을지, 지극히 장르적이고 통속적인 기대를 품었더랬습니다. 그런 범속한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지만, 대신 잔잔하고 은은한 감동 비슷한 걸 얻었지요. 어떤 독자들은, 반듯하고 올곧은 1인칭 화자 데쓰코가, 저런 사악한 뜨내기 같은 인생 나쓰코를 교화라도 하지 않을까, 그래서 회개와 개전의 눈물을 흘리며 두 (먼 친척이기도 한) 여성이 결말에서 감격어린 포옹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역시 장르문학 팬 다운) "창작형 독서"를 하는 것도 봤습니다. 작가 가쓰라 노조미 씨는 성숙한 솜씨로 그런 흔한 바람 역시 뿌리칩니다. 마치 극중의 나쓰코가 "사기꾼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이기적이긴 마찬가지면서도 어리석기까지한" 여러 뜨내기들을 등쳐 먹으면서, 쓰디쓴 교훈을 통해 "주제파악"을 시켜 주듯 말입니다(최근에 인기를 끈 드라마 <38사기동대>에도 그런 대사가 나오죠).

나쓰코는 분명히 사기꾼이고, 사연의 끝(동시에 자기 인생의 황혼)에 이르기까지 전혀 뉘우치는 기색이 없는 악질입니다. 처음엔 그저 타고난 미모를 이용한 임기응변식 사기를 치고 살았지만, 더 이상 그런 매력을 유지할 수 없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진화라도 한 듯" 머리를 쓰고 치밀한 전략을 꾸리는 법도 배웁니다. 그러니 교정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작중에 그런 말은 한 번도 안 나오지만) 싸이코패스라 불려도 지나치지 않은, 악질 중의 악질인 셈입니다. 나쓰코는 인생 초기 단계에, 큰 봉변을 당하고(자업자득) 전과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운 좋게 먼 친척인 데쓰코(이 소설의 1인칭 화자)의 도움을 얻어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런 걸 보면 치밀한 머리씀으로 인생의 국면을 대비하는 타입 같지도 않은데, 저는 바로 이 점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중요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즉, 나쓰코는 보통 장르소설에서 흔히 간판(미끼)으로 내세워지는 악마형 안타고니스트가 아니며, 오히려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주인공 프랭크 애빅네일 2세처럼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이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구석"이 있으며, 무엇보다 나쓰코는 그녀가 사기를 치고 다닌 피해자들, 나아가 우리 독자들과 공유하는 바가 무척 많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반듯한 데쓰코가 그녀를 단죄하거나 버리지 못하고 내내 뒷수습을 하고 다니며, 그녀의 파멸이라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조바심을 치는 것입니다.

데쓰코는 그녀와 친척 간이며, 그런 인연 이전에 여러 건 뒷수습을 하고 다니다 붙은 정 비슷한 게 있었다고나 하지만, 신참 수습 변호사(소설 처음엔 그렇게 나옵니다)인 그녀를 고용한 오기와라 변호사는 전혀 "낫짱"과 안면이 없으면서도 나중엔 데쓰코 만큼이나 그녀를 역성들고 나섭니다. 이 오기와라 씨는 매사에 데면데면하고, 좋게 말하면 쿨한, 나쁘게 말하면 "성실하지만 열정이 없는", 현명하긴 해도 지극히 사무적인 개성입니다. 남한테 내세우는 정의나 원칙 같은 건 없어도 자기 나름대로 지키는 매우 보수적인 준칙 때문에, 이 "낫짱" 같은 타락한 뜨내기 인생은 사람 축에 넣지도 않고 볼 법도 한데 말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정말 낫짱에게는 모든 남자에게, 죄를 짓고도 태연히 용서를 구하며 그런 용서가 먹혀들 법한 어떤 치명적인 마력이라도 있는 여성이라서일까요?

사연이 처음 시작될 때 데쓰코는 물론 그녀를 고용한 오기와라 변호사, 혹은 (사무직원에 불과하지만 이 법률 사무소의 정신적 지주처럼 자리잡아 버린 착실한) 미유키 씨조차, 적성과 자질이 있을망정 모두 어딘가는 (사회인으로서) 어설픈 모습들이었습니다. 근 5년마다 한 번씩 사고를 치며 그들 앞에 나타나는 낫짱이 어떤 계기나 마련해 준 듯(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들은 매 국면마다 더 성숙해지고 더 치밀해지며, 사건과 사태의 겉모습보다는 숨겨진 진실을 더 잘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갖게 됩니다. 오기와라 변호사처럼 (허탈할 만큼) 성실하고 곧은 인물은, 낫짱이 사기를 치고 다닌 많은 "피해자들" 중, 제 직분에 충실하거나 정직한 사람, 최소한 낫짱을 만날 때 남부끄럽지 않은 태도로 살던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낫짱 같은 썩은 인생에게 일말의 동정도 품지 않을 만한 오기와라 씨는, 어떤 의뢰인에게는 "다시는 나쓰코 씨 앞에 나타나지 마시오. 경찰에 바로 연락해 버릴 테니." 같은 으름장을 놓기도 합니다. 전혀 안 그럴 법한 이가 저처럼 정색을 하고 나서니, 독자들은 오기와라의 내면에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 천박한 낫짱의 사기 행각 그 실시간의 국면에서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시 생각을 곱씹게 됩니다.

서평 앞에서 "혹시 데쓰코 변호사야말로 뭔가.." 같은 점잖지 못한 기대를 품었다고 말씀 드렸지만, 이분도 사실 아주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는 좀 튀는 인생입니다. 소설 초반에 "...아무리 능력 있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얄팍한 구직조차 쉽지 않은..." 같은 대목이 있는데, 물론 이게 현재이 일본 실정은 당연히 아니며, 대략 결말(현재)에서 데쓰코 씨의 나이를 70대로 잡았을 때 근 오십 년은 거슬러올라가야 하니 시대상이 얼핏은 감이 올 것입니다. 데쓰코는 자신의 친오빠조차 "낫짱은 꽤 미인이지. 남자들이 쳐다도 못 볼 '진'까지는 못 되어도 그에 버금가는 '선'은 충분하고, 바로 그런 타입이 남자들이 정녕 사족을 못 쓰는 거라구."처럼 맞는 말(?)을 해 줘도 안 받아들입니다. 표정이 풍부해서 매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게나 호들갑을 떨어 줄 만큼 미인도 아니다, 차라리 내 언니가 외모로는 더 낫다. 어떠신가요? 대체로 가까운 지인에 질투를 느끼는 여성들이 이런 식으로 "불편한 마음"을 정리, 아니 기만하고 넘어가는 것 같지는 않을지. 그런데 소설을 끝까지 읽어 보면, 데쓰코 변호사는 매우 솔직하고, 그런 솔직함은 자신의 감정이나 내면을 향할 때에도 별반 순도가 흐트러지는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화자"는 사실 "광인, 범인"으로 이어지는 장르 공식이 있긴 한데, 앞서 말했듯 저는 이 소설을 장르물로 보지 않기로 했으므로 이 공식은 폐기해야 할 듯합니다.

여담입니다만 낫짱 같은 타입은, 일본은 모르겠으되 한국에선 의외로 드물지 않게 보는 유형입니다. 일상에서도 이런 과대망상형, 타인 착취형 사기꾼들은 종종 목격되고, 한국 현대사에서 큰 물의를 일으킨 몇몇 여성들이 그 대표격이죠. 그나마 외모가 낫짱처럼 빼어나기라도 하면 (아무리 굴곡지고 비루한 인생일망정) 제 활개는 펴고 다니는데, 그렇지도 못한 인생은 고작 인터넷에서만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하곤 합니다. 입만 벌렸다 하면 거짓말이고, 주관적 망상이 객관적 현실인 양 사기를 치곤 하죠. 실물로 보면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여건이라는 게 다행이긴 합니다만.

나중에 입사한, 앞으로는 오기와라 법률사무소를 이끌고 가야 할 이소 변호사를 두고, 선배들(사무직 미유키씨도 포함해서)은 "그가 장래성이 있어 보입니까?" 같은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저는 이 대화가 짠하게 느껴진 게, 사실 이 이야기는 "낫짱을 간판으로 내 걸고 펼치진, 속을 까 보니 뎃짱의 일생을 다룬 성장 소설"로 정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모든 게 서툴고 고객의 기분도 하나 못 맞춰 주는 데쓰코는, 과연 한참 뒤의 이소 변호사처럼 가능성이 엿보이기나 한 인재였을까요? 데쓰코는 물론 성격이 차분하고, 정직하고, 친절함보단 진정성으로 의뢰인과 소통하며, 무엇보다 머리가 좋습니다(마지막 장에서 단 한 큐에 소란꾼을 말로 제압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물론 그녀가 장년을 넘긴 후의 일이긴 하지만, 노련함만으로는 쉽게 정리가 안 되는 쟁점을 날카롭게 짚어낸 겁니다). 하지만 특유의 깐깐함과 직설적 성격, 그녀 같은 인재를 아직은 품을 준비가 안 된 미숙한 사회로부터 그녀가 입을 수 있었던 상처 때문에,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로 언제든 주저앉을 수 있는 취약함이 있었던 겁니다. 그랬다면 사카구치 씨와 이혼할 일도 없었겠고, (결말에서 암시되듯) 꽤 성공적인 커리어는 완성되지도 못했을 겁니다.

저기... 보험 사기꾼과 대화를 나누는 중간 부분에서, 그네에 앉은 쓸쓸한 낫짱과 자신이 겹쳐 보였다는 대목 기억나실 지 모르겠습니다. 대략 그 시점부터 데쓰코는 낫짱으로부터 뭔가 배우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자신이 겪을 시련과 좌절을 몇 발짝 앞서 미리 부딪히고 대신 헤쳐주는(물론 본인이야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겠으나) 낫짱에게, 무형의 혜택까지 입었던 겁니다. 낫짱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의 수호자라고 제 입으로도 말한) 데쓰코에게까지, 몇 번이나 수임료를 떼어먹고, 대체로 인생 내내 민폐나 끼치는 약탈형 이기적 인물처럼 보이지만, 데쓰코는 왠지 그녀의 타인들을 상대로 한 사기행각(데쓰코 자신은 결코 감행 못 할)에서 왠지 대리만족까지 느꼈던 거죠. "세상에 전적으로 순진하고 선량한 피해자란 없다. 그들 역시 남을 이용하고 갈취하려 들지만, 낫짱 같은 이가 더 순발력이 좋고 영리했기에 승자와 패자가 갈렸을 뿐이다. 정말 선량한 이 같았으면 애초에 낫짱과 엮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은 캐릭터들의 성격이 소설 내내 일관되게 구축되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단역의 경우 한참만에 나타나면 "이게 누구였지?"하며 잠시라도 갸웃거리게 되는데, 가쓰라 노조미는 어느 장면에서도 인물의 개성을 분명히 드러내므로 그런 헷갈리는 수고가 독자로서 최소화됩니다(나왔다 하면 아 누구 하고 바로 생각이 난다는 거죠). 직설적인 설명 없이 주인공 데쓰코의 성격이 (이소의 표현처럼 "무사") 독자 앞에 완전히 그림이 그려지는 것도 좋았는데, 에피소드나 타인의 표현뿐 아니라 심지어 소설의 플롯을 통해서도 그렇습니다. 여자한테 "결혼"이란 사건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집니까. 헌데 데쓰코의 결혼과 이혼은, 낫짱과의 조우와 헤어짐이란 "메인 이벤트" 사이에서, 마치 "처삼촌 묘 벌초나 하듯" 심드렁하게 회고될 뿐입니다(심지어 우리 독자에게도, "아 그 사카구치 상과 한때 맺어졌었구나! 근데 뭐, 전 남편이라고?" 같은 반가움과 충격을 던질 만큼). 쿨한 주인공의 성격이 쿨한 "플롯"을 통해서도 부각된다는 건 또 흔치 않은 체험입니다.

데쓰코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입니다. "커리어 우먼"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흠 잡을 데 없는 인생인데, 이건 그녀가 초심을 유지한 직업인이었을 뿐 아니라, 그 쿨하고 정직한 감정상의 개성을 인생의 황혼까지 지켜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반면 낫짱은 사기꾼으로서 딱히 파멸을 맞지도 않았고, 끝까지 큰 액수의 합의금을 뜯어내며 윤택한 노년을 보내는 것 같기는 하나 왠지 인생의 승자(아무리 너그러이 봐 주려 해도) 같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법률사무소에선 "진화"라고 평가했지만(물론 이건 냉소입니다), 나쓰코 자신이 자신을 돌아봐도 "이게 과연 누구일까?" 싶을, 변신과 타협과 굴복을 거듭했던 졸렬한 수성이 아니었을지요. 하지만 처음의 자신을 지켜낸 데쓰코도 마냥 떳떳하지만은 않습니다. 자신이 직접 떠맡았을 수도 있는 죄업이라든가, 감수했어야 할 굴욕을 어찌 보면 공인된 사기꾼인 낫짱이, 각각의 인생 먼 무대에서 대신 떠맡았던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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