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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역사가 바뀌다 - 세계사에 새겨진 인류의 결정적 변곡점
주경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2월
평점 :
품절
그해(들)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세계 역사가 바뀌었을까? 사람의 인생에건 종족의 역사에건 분명 몇번의 전기(轉機)나 전환점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이때 그 진로가 근본적으로 방향을 틀지, 그렇지 않고 여태 익숙한 가던 길을 계속 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특히
한 개인의 생과는 달리 그 거대한 방향성이나 가치에 대해 어떤 일의적 규정도 할 수 없는 역사에 대해서는, 그 시점에서의 액션,
리액션이 과연 "전환적 의의"였었는지 아니었는지조차 후대의 리뷰를 거쳐야만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후대인들조차 자신의 미망,
고집 때문에 눈이 흐려져 진실을 바로 못 볼지도 모르는 일이겠고요.
콜럼버스는
당대인들보다 더 명철하고 이성적이었기에 "그처럼이나 어려운 큰 업적"을 낼 수 있었겠다는 관점은 그야말로 신화에 불과하다는 점,
책의 첫째 파트(이 책은 크게 네 파트인데, 다시 각 장이 여러 단계의 절로 나뉘더군요)에서 저자 주경철 교수님께서 강의투(실제
강의에 바탕을 둔 기록이므로)로 잘 지적해 주십니다. 심지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조차 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처음 알아
내었다고까지 착각하는 이들도 있죠. 이 콜럼버스에 대한 저자의 시각(혹은, 일반인들도 함께 동참해 주길 원하는 바른 진실)은,
다음의 재인용에 은연중 잘 드러납니다.
"콜럼버스는 신(new)대륙을 발견했고, 스페인 왕은 유대인(Jew)을 발견했다."
이
말은 "발견"이란 말이 얼마나 타락해서 쓰이는 중인지, 누구에게는 발견이었던 경사가 누구에게는 파멸적인 재앙이었는지, 잘 꼬집고
있습니다. 발견 주체의 의지에 무관하게, 멀쩡히 예전부터 그 자리에 터잡고 있던 이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죠. (후자는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소위 스패니시 익스펄전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콜럼버스가
아이들용 위인전기에서 터무니없이 미화되는 현실은 물론 바람직하진 않습니다. 주 교수님이 잘 지적하신 대로, 그는 남달리 계몽적인
성향(사조로서의 계몽주의가 등장하려면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하죠)도 아니었고, 오히려 미신적, 광신적 성향에다 전형적인 중세인의
믿음, 기질 등을 그대로 대변하는 편이었습니다. 유독 그에 대해서만은 국적, 출생, 성장 과정이 베일에 싸여 있다는 점도
이상합니다(제가 어려서 읽은 전기에도 이 점은 창작, 윤색을 통해 가리지 않고 그대로 적고 있더군요). 하지만 항해인으로서
사업가로서, 그가 특별히 "유능"했고 집념이 강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먼 곳에 부실한 장비(뒤 파트에
나오지만 동시대 중국의 형편과 대조할 때)로 온갖 변수를 다 극복하고 원 목표를 달성한 건 "그저 서쪽으로 무작정 가기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에베레스트도 "무작정 안 미끄러지고 옷 든든히 입고(요즘은 얼마나 기능성 아웃도어가
많이 나옵니까) 올라가기만 하면" 다 등정 가능하죠.
책을
읽어도 소위 편향 확증이란 말이 있듯,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사항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죠. 하지만 콜럼버스의 시대에
과연 올바로 된 서적, 바른 정보를 담은 레퍼런스가 얼마나 있었을지도 의문이고, 여튼 취사선택을 영리하게 해 냈기에 미지의
항로에서 역경을 극복하고 귀환에까지 성공하지 않았겠습니까. 쓸데없는 텍스트를 다 걸러내고 자신의 과업에 요긴한 부분만 잡아내어 그
지난한 과업을 이뤄낸 건 칭찬의 대상이 되었으면 되었지 그 반대가 아니겠죠. 세계관이나 철학은 누구나 다, 아무리 하잘것없는
인간, 자기 집도 못 찾아갈 한심한 위인이라도 자기 것을 고집하겠고 말입니다. 그런 걸 탓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지도나
항해술에서 기존의 지식, 성과를 베낀 걸 두고 실무에 종사하는 뱃사람을 비난하고 든다면, 현대의 스티브 잡스는 죽기 전 아마
감옥에 가야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특히
영미의 선원 문화에서 "항해 일지(log) 조작, 허위 진술"은 아주 수치스럽고 비난 받아 마땅할 작태입니다. 그런데 아직
미국은커녕 영국조차 통일 국민 국가로 자리매김하지도 못할 시절이고, 남유럽의 뱃사람들이 공유하던 윤리는 달랐는지도 모르지만,
콜럼버스가 항해 일지에다 대고 "눈이 하나 달린 괴물, 못생긴 인어"를 그토록 자세히 적어 두었다는 건 이해가 안 됩니다(이 책
내용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주 교수님은 당연히 정확한 인용을 했겠죠], 그냥 독자로서 이해가 안 된다는 소립니다). 이런 걸
일일이 기록해서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가톨릭 부부 군주", 혹은 알렉산데르 6세(물론 로드리고 보르자 그 사람)한테 의심 받지
않겠다는 계산이었을까요? 신앙이 투철한 것과 거짓말을 꾸며내는 건 명백히 다른 문제인데 이런 부분은 더 연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런 건 취향이나 스타일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물론 콜럼버스)의 인성, 나아가 정신의 건전성(sanity) 이슈인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런 기괴한 "기록"이 당시로서는 흔했기에, 고 움베르토 에코도 21세기 초에 지은 소설
<바우돌리노>에서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전 당시 <반지의 제왕> 영화판이 세계적으로 흥행할 무렵이라
이 노교수가 시류에 편승해 이상한 일탈 창작을 하나 의심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의도는 다른 데 있더군요.
콜럼버스의
발견, 나아가 디포의 <로빈슨..>이나,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을 놓고 주 교수님께서 "서구인들의
에덴 동산 콤플렉스"라는 한 가지 맥락에 꿴 것은 정말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가(大家. 마스터)는 상큼하고 신선한 비유와
규정으로 복잡한 현상을 잘 정리한다고 이 책 뒤에서 제프리 파커를 놓고 평가하시는데, 현재 우리 한국 독서 대중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으시는 주 교수님 본인도 그런 레벨에 드시는 것 같습니다.
2장은
1820년을 다루는데, 이 해에 정치적으로 뚜렷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게 아니라(정치사 중심의 역사 서술은 벌써 오래 전부터
지양되어야 할 경향으로 지적되어 왔죠. 1장의 1492도 꼭 "신대륙 발견"만을 염두에 둔 선정은 아니겠습니다), 부제에 나와
있듯 이 해를 대략 기점으로 동과 서의 생산력 우열이 뒤집혔다는 뜻입니다. 이 역시 우리 대중들에게도 이제는 널리 알려진 상식이
되어 있는 편입니다.
인류 역사의 거의
절대 다수 시기가 중국이 세계의 무게 중심으로 군림하던 기간이며, 따라서 잠시의 일탈을 거쳤을 뿐 앞으로는 다시 "정상'으로
복귀할 것이란 견해는 중국 학계의 입장이기만 한 건 아니고 서양에도 이를 지지하는 이들이 꽤 많죠.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도 대략
십 년 전에 갑자기 세를 얻어 널리 퍼지기도 하다가 최근에는 주춤한 모습입니다. 이런 관점은 <대국굴기> 같은 다큐를
보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로서 제 생각은, 1820이란 연도(혹은 대략 그 부근의 시점)는 역전 혹은 추세의 반전이라기보다, 그 전까지 비단길, 바닷길
등 제한적 교류만 이어가던 세계가 비로소 항행 교통 수단의 발달로 전면적 접촉이 이뤄진 의의를 더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이전에 중국이 생산력, 부, 혹은 군사력까지 다 우위를 점한 건 물론 사실이나, 그게 서구 세계에 어떤 위협이나 영향을 끼친 건
미미합니다(몽골의 서진을 제외하곤. 투르크의 서방 진출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이뤄진 사태라서). 중국이 다른 세계에 패권을
행사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기득권이나 되찾듯 도로 패권을 장악한다는 건지, 그게 정상으로의 복귀가 되는 건지 모를 일입니다.
앞으로 중국이 세를 얻어 패권국으로 (새로) 올라설 지 가능성은 차치하고라도, 노멀로의 재수렴 운운은 지나치게 중국식 민족주의에
치우친 주장입니다.
다음으로 정화의
해외 원정 이슈인데, 이때부터 인도양 어귀를 틀어먹고 있었다면 감히 서구인들이 동양을 넘보지 못했으리라는 주장. 참 난감한데요.
우선 아무리 선박 스펙이 좋고 병참이 든든해도 멀리 떨어진 해외 영토, 식민지(예멘, 오만, 인도양, 동남 아프리카 일대에 정화가
모조리 식민지를 마련했다고 가정해도), 군사 기지를 유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단견으로 명 황실이 지레
바다를 포기한 게 아니라, 유지할 능력이 안 되어서 정책을 바꿨다고 봐야죠. 당연한 소리지만 당시의 중국(혹은 어느 나라라도)은
국민국가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봉건적 신분제를 유지해야 하는 체제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당송 이래 제국 질서의 수호란 지방의
주둔군 사령관에 대한 문치주의적 견제, 이것이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국방력 약화, 이 둘 사이의 딜레마에서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던 형편이었습니다. 해외에 대규모 해군을 유지하는 건 동로마 제국, 오스만 등 어느 패권 세력도 결국은 실패하고 만
과제였죠(체제 모순이건 생산력 감퇴건 간에). 민주주의 체제라는 미국조차 주한미군 포함 이제는 해외 병력을 감당할 형편이 안
되어서 지금 저러는 것 아닙니까.
더군다나
인도양 장악은 고사하고, 이 명 황실은 고작 자국의 남부 영토의 해안선도 방어 못 해서 이후 무수한 왜구의 침입에 시달립니다.
뿐만 아니라 북방은 오이라트, 타타르가 한때 수도를 포위하고 체제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은 적까지 있습니다. 이런 판에 한가하게
인도양 방어에 국력의 상당 부분을 투자한다? 정화의 원정과 샤르후 전투가 대략 두 세기 간격을 둡니다만, 아마 현실 판단이 좀 더
늦었다면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여진족 아니라 다른 몽골계 정복자에게 중원의 패권을 넘겨 줬을 겁니다. 하물며 장장 400년
뒤의 일을 누가 어떻게 미리 대비할 수가 있습니까. 서세동점의 치욕 그 책임을 구태여 묻는다면 영락제의 후임자가 아니라,
강건성세의 현실에 안주했던, 특히 건륭제 정도에다 대고 따져도 따져야 이치에 맞겠습니다. 정화의 원정이 놀랄 만한 사건, 쾌거인 건
맞으나 이를 두고 세계 패권 장악에 대한 아쉬운 실기(失機) 운운하는 건 지나친 중화민족주의에의 경도입니다. 주 교수님도 본문
중에 "제국 질서의 항상성" 같은 언급을 하시는 대목이 있는데,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주변을 대하는 태도가 사실상 제국주의로의
회귀라는 지적이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화 띄우기도 한 십 년 전에 크게 유행했는데 지금은 논쟁 끝에 그 허실이 다 드러나서인지
잠잠하더군요.
하야미 아키라(速水融.
이거 이름 읽기가 좀 어렵죠. "아키라"라는 훈독이...)의 인더스트리어스 레볼루션 개념이 이 장에서도 다시 소개됩니다. 보통
우리가 아는 건 "인더스트리얼 레볼루션"인데, 좀 엉뚱하지만 저는 이 명명 센스가 동아시아식 입시 교육 패턴과 무방하지 않다고
봅니다. 네이티브들은 (못 배운 사람들 빼고) 이 둘을 결코 안 헷갈려하는데, 유독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앞의 것이 산업적, 뒤의
것이 부지런한, 아니 그 반대였나?"하며 구별에 어려움을 겪곤 하죠. 하야미 박사(아직도 살아 계십니다)가 기발한 착안을
했다기보다, 그 오랜 암기사항에 골머리를 썩던 "추억"을 개념정립에 활용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여튼
이 착안은 꽤 기발합니다. 주 교수님도 잘 정리하고 계시듯, "인더스트리얼..."이 공급 측면 강조라면, "인더스트리어스.."는
수요 측면 혁신을 지목하는 결과거든요. 이처럼 현대 역사학의 기법은, 경제학과 통계학의 도움 없이는 그 의미가 거의 퇴색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820 생산력 역전에도 주 교수님은 회귀분석(리그레션)을 원용하시는데, 제가 학부 시절에도 동양사학과
학생(주 교수님은 서양사학과 소속이지만)들이 대거 경제원론 수업을 전공선택(인정) 과목으로 이수하곤 했습니다. 경제사 한정이
아니라, 경제를 모르면 바른 역사 인식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1914는
보통 1차대전 개전 연도로 다들 알고 있지만, 저자께서는 독자의 허를 찌르며 "나그네비둘기의 멸종"이란 생태적 의의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역사는 인간이란 종의 전방위 활동을 다 포섭하는 게 정도(正道)입니다. 정치사 위주의 기술(記述)은
결국 승자 위주의 사관을 용인하고 독자의 의식을 타락시키며 현상을 왜곡한다는 의미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며, 이처럼 인식의 지평을
모든 영역으로 넓혀 통합적으로 파악해야 하죠. 교수님의 이런 태도는 일반 독자들에게 그래서 매우 유익합니다.
저도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를 보면서, 일부 사회적 진화론자들(과거 일각의 편협하고 퇴행적인 입장이며, 현재 이를 지지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찰스 다윈은 구태여 언급하자면 역설적이게도 이들과는 정반대의 정치적 스탠스죠)이 운위하듯 "적자 생존,
survival of the fittest"만이 유일타당한 명제라면 그 숱한 초식동물이 초원에서 맹수에 사로잡혀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살점을 뜯기는 모습은, 반대로 오래 전에 우리 눈에서 사라졌어야만 했습니다. 왜냐, "생존 부적절자 조기 멸종"이 저
도그마로부터의 필연적 도출 명제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근데 사슴이니 토끼니 하는 게 어디 어제오늘 출현한 동물도 아니고 말입니다.
"피마다지윈"은 본디 생물과 인간 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지칭한다기보다, 제 생각에는 저런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를
관조한 후 깨달아진 아메리카 원주민들 고유의 철학이 아닐까 합니다. 초식동물은 생존을 위한 노력에 비참하게 패배하는 게 아니라,
몸도 무겁고 생식 능력도 떨어지며 개체 유지에도 훨씬 노력을 더 들여야 하는 사자, 치타, 하이에나 등이 불쌍해서, 사냥 당해
주는 거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맨날 다큐에서 얘들이 잡혀 먹는 모습만 봐서 그렇지, 사실 맹수들은 사냥에 실패하여 배를 굶는 일이
더 많습니다. 얼마나 불쌍한가요? 초식동물들은 풀만 뜯어도 팔팔하게 잘 살고 새끼들도 더 많이 두는데 말이죠. 우리가 교통 사고
당할까 무서워 큰길에 안 나가는 게 아니듯, 얘들도 전체 표본으로 보면 맹수에게 희생당할 확률이 적습니다. 배부르고 등따시게
살려면 초식 동물로 태어나는 게 더 낫죠. 이런 생각을 연장하면, 인간으로 태어난 것도 못할 짓입니다. "피마다지윈"의 참뜻은
저는 여기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앨프리드 크로스비의 "생태 제국주의"에 대해 (이미 한국에도 독서 대중 사이에 널리 알려진 분이고 주장이지만) 주 교수님 버전으로 알기 쉽고 친근하게 전달, 정리해 주신 점이 특히 좋았습니다.
세계는
평화를 향해 가는가, 아니면 야만과 폭력으로 치닫는가? 핵무기 등 대량살상수단이나 환경 파괴, 도시 강력 범죄의 증가를 보면
확실히 후자쪽이고 그게 대부분의 상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세의 평화적이고 목가적인 생활에 대한 근거 없는 동경 때문에, 과거에는
누가 누굴 해치는 일 없이 오순도순 잘만 살고 다들 착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 책 4장에서, 주 교수님은 과거의 인류가
얼마나 예의 없고 더럽고 폭력적이며 이기적이기까지 했는지, 자신의 연구와 스티븐 핑커의 실증 연구를 통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물론
저자는 대놓고 전자를 옹호하진 않고, 여전히 판단은 독자(청중)에게 맡기는 쪽입니다. 우리나라 한정으로 핑커에 대해서는
"심리학자가 뭘 안다고 역사 얘길?"이라든가, 아예 "자계서 저자"만으로 알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이 책의 4장을
읽고 인식을 고칠 필요가 있겠네요.
이 4장에도 소위 나가시노 전투의 "일제 사격" 전술(직전신장이 고안한) 그
가공할 만한 위력에 대해 평가가 이뤄집니다. 그럼에도 불구, 풍신수길의 패권기가 종료된 후 등장한 에도의 덕천 막부는 총이라는
위력적인 신무기를 모두 거둬 들이고 칼로 세상을 지배하는(물론, 이후 칼쓰기란 기술보다는 그저 세습 신분화에 그쳤지만) 무사계급의
이익을 지키려 듭니다. 아니 저 앞의, 정화의 해상원정 그 기세를 계속 이어가지 않고 포기한 것도 어떤 전략상의 착오가
아닙니다. 체제 유지를 위해 필연적인 선택이었고, 두 전략 목표를 다 달성할 역량이 안 되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죠. 윤관의
9성 포기도 어리석은 근시안적 정책이 아니라 국가 역량 한계 때문에 경영할 여력이 없어 포기한 겁니다. 9성을 지켰으면 이후
완안부의 아골타를 대신해서 우리가 북부 중국의 주인이 되었겠습니까? 역사에서 if 놀이는 무지의 소치일 뿐이죠. 물론 어이없는
돌발사태로 향방이 바뀌어 엉뚱한 결과가 초래된 예도 세계사 속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만, 정화의 해외 원정과 그 향후 경과는 그런
미련을 남길 만한 가벼운 변덕에 의해 결정된 게 아니라는 걸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 증조할아버지가 평소에 운동만 잘 해서 획득
형질을 DNA 속에 물려 줬다면, 저 증손자가 폐암으로 죽는 일은 없었을 거 아니겠어?" 이런 말이 얼토당토 않음이나 마찬가지죠.
우리 독자들은 이 책에 드러난 많은 긍정적이고 합리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세계관, 나아가 인간과 자연이 합일되는
건전한 패러다임을 배울 필요가 있겠습니다. 특정 국가의 편협한 이익을 옹호하는 비이성적인 가정과 가설의 점철에 끌리는 게 아니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