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역사가 바뀌다 - 세계사에 새겨진 인류의 결정적 변곡점
주경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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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들)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세계 역사가 바뀌었을까? 사람의 인생에건 종족의 역사에건 분명 몇번의 전기(轉機)나 전환점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이때 그 진로가 근본적으로 방향을 틀지, 그렇지 않고 여태 익숙한 가던 길을 계속 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특히 한 개인의 생과는 달리 그 거대한 방향성이나 가치에 대해 어떤 일의적 규정도 할 수 없는 역사에 대해서는, 그 시점에서의 액션, 리액션이 과연 "전환적 의의"였었는지 아니었는지조차 후대의 리뷰를 거쳐야만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후대인들조차 자신의 미망, 고집 때문에 눈이 흐려져 진실을 바로 못 볼지도 모르는 일이겠고요.

콜럼버스는 당대인들보다 더 명철하고 이성적이었기에 "그처럼이나 어려운 큰 업적"을 낼 수 있었겠다는 관점은 그야말로 신화에 불과하다는 점, 책의 첫째 파트(이 책은 크게 네 파트인데, 다시 각 장이 여러 단계의 절로 나뉘더군요)에서 저자 주경철 교수님께서 강의투(실제 강의에 바탕을 둔 기록이므로)로 잘 지적해 주십니다. 심지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조차 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처음 알아 내었다고까지 착각하는 이들도 있죠. 이 콜럼버스에 대한 저자의 시각(혹은, 일반인들도 함께 동참해 주길 원하는 바른 진실)은, 다음의 재인용에 은연중 잘 드러납니다.


"콜럼버스는 신(new)대륙을 발견했고, 스페인 왕은 유대인(Jew)을 발견했다."

이 말은 "발견"이란 말이 얼마나 타락해서 쓰이는 중인지, 누구에게는 발견이었던 경사가 누구에게는 파멸적인 재앙이었는지, 잘 꼬집고 있습니다. 발견 주체의 의지에 무관하게, 멀쩡히 예전부터 그 자리에 터잡고 있던 이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죠. (후자는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소위 스패니시 익스펄전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콜럼버스가 아이들용 위인전기에서 터무니없이 미화되는 현실은 물론 바람직하진 않습니다. 주 교수님이 잘 지적하신 대로, 그는 남달리 계몽적인 성향(사조로서의 계몽주의가 등장하려면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하죠)도 아니었고, 오히려 미신적, 광신적 성향에다 전형적인 중세인의 믿음, 기질 등을 그대로 대변하는 편이었습니다. 유독 그에 대해서만은 국적, 출생, 성장 과정이 베일에 싸여 있다는 점도 이상합니다(제가 어려서 읽은 전기에도 이 점은 창작, 윤색을 통해 가리지 않고 그대로 적고 있더군요). 하지만 항해인으로서 사업가로서, 그가 특별히 "유능"했고 집념이 강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먼 곳에 부실한 장비(뒤 파트에 나오지만 동시대 중국의 형편과 대조할 때)로 온갖 변수를 다 극복하고 원 목표를 달성한 건 "그저 서쪽으로 무작정 가기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에베레스트도 "무작정 안 미끄러지고 옷 든든히 입고(요즘은 얼마나 기능성 아웃도어가 많이 나옵니까) 올라가기만 하면" 다 등정 가능하죠.

책을 읽어도 소위 편향 확증이란 말이 있듯,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사항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죠. 하지만 콜럼버스의 시대에 과연 올바로 된 서적, 바른 정보를 담은 레퍼런스가 얼마나 있었을지도 의문이고, 여튼 취사선택을 영리하게 해 냈기에 미지의 항로에서 역경을 극복하고 귀환에까지 성공하지 않았겠습니까. 쓸데없는 텍스트를 다 걸러내고 자신의 과업에 요긴한 부분만 잡아내어 그 지난한 과업을 이뤄낸 건 칭찬의 대상이 되었으면 되었지 그 반대가 아니겠죠. 세계관이나 철학은 누구나 다, 아무리 하잘것없는 인간, 자기 집도 못 찾아갈 한심한 위인이라도 자기 것을 고집하겠고 말입니다. 그런 걸 탓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지도나 항해술에서 기존의 지식, 성과를 베낀 걸 두고 실무에 종사하는 뱃사람을 비난하고 든다면, 현대의 스티브 잡스는 죽기 전 아마 감옥에 가야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특히 영미의 선원 문화에서 "항해 일지(log) 조작, 허위 진술"은 아주 수치스럽고 비난 받아 마땅할 작태입니다. 그런데 아직 미국은커녕 영국조차 통일 국민 국가로 자리매김하지도 못할 시절이고, 남유럽의 뱃사람들이 공유하던 윤리는 달랐는지도 모르지만, 콜럼버스가 항해 일지에다 대고 "눈이 하나 달린 괴물, 못생긴 인어"를 그토록 자세히 적어 두었다는 건 이해가 안 됩니다(이 책 내용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주 교수님은 당연히 정확한 인용을 했겠죠], 그냥 독자로서 이해가 안 된다는 소립니다). 이런 걸 일일이 기록해서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가톨릭 부부 군주", 혹은 알렉산데르 6세(물론 로드리고 보르자 그 사람)한테 의심 받지 않겠다는 계산이었을까요? 신앙이 투철한 것과 거짓말을 꾸며내는 건 명백히 다른 문제인데 이런 부분은 더 연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런 건 취향이나 스타일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물론 콜럼버스)의 인성, 나아가 정신의 건전성(sanity) 이슈인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런 기괴한 "기록"이 당시로서는 흔했기에, 고 움베르토 에코도 21세기 초에 지은 소설 <바우돌리노>에서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전 당시 <반지의 제왕> 영화판이 세계적으로 흥행할 무렵이라 이 노교수가 시류에 편승해 이상한 일탈 창작을 하나 의심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의도는 다른 데 있더군요.

콜럼버스의 발견, 나아가 디포의 <로빈슨..>이나,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을 놓고 주 교수님께서 "서구인들의 에덴 동산 콤플렉스"라는 한 가지 맥락에 꿴 것은 정말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가(大家. 마스터)는 상큼하고 신선한 비유와 규정으로 복잡한 현상을 잘 정리한다고 이 책 뒤에서 제프리 파커를 놓고 평가하시는데, 현재 우리 한국 독서 대중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으시는 주 교수님 본인도 그런 레벨에 드시는 것 같습니다.

2장은 1820년을 다루는데, 이 해에 정치적으로 뚜렷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게 아니라(정치사 중심의 역사 서술은 벌써 오래 전부터 지양되어야 할 경향으로 지적되어 왔죠. 1장의 1492도 꼭 "신대륙 발견"만을 염두에 둔 선정은 아니겠습니다), 부제에 나와 있듯 이 해를 대략 기점으로 동과 서의 생산력 우열이 뒤집혔다는 뜻입니다. 이 역시 우리 대중들에게도 이제는 널리 알려진 상식이 되어 있는 편입니다.

인류 역사의 거의 절대 다수 시기가 중국이 세계의 무게 중심으로 군림하던 기간이며, 따라서 잠시의 일탈을 거쳤을 뿐 앞으로는 다시 "정상'으로 복귀할 것이란 견해는 중국 학계의 입장이기만 한 건 아니고 서양에도 이를 지지하는 이들이 꽤 많죠.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도 대략 십 년 전에 갑자기 세를 얻어 널리 퍼지기도 하다가 최근에는 주춤한 모습입니다. 이런 관점은 <대국굴기> 같은 다큐를 보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로서 제 생각은, 1820이란 연도(혹은 대략 그 부근의 시점)는 역전 혹은 추세의 반전이라기보다, 그 전까지 비단길, 바닷길 등 제한적 교류만 이어가던 세계가 비로소 항행 교통 수단의 발달로 전면적 접촉이 이뤄진 의의를 더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이전에 중국이 생산력, 부, 혹은 군사력까지 다 우위를 점한 건 물론 사실이나, 그게 서구 세계에 어떤 위협이나 영향을 끼친 건 미미합니다(몽골의 서진을 제외하곤. 투르크의 서방 진출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이뤄진 사태라서). 중국이 다른 세계에 패권을 행사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기득권이나 되찾듯 도로 패권을 장악한다는 건지, 그게 정상으로의 복귀가 되는 건지 모를 일입니다. 앞으로 중국이 세를 얻어 패권국으로 (새로) 올라설 지 가능성은 차치하고라도, 노멀로의 재수렴 운운은 지나치게 중국식 민족주의에 치우친 주장입니다.

다음으로 정화의 해외 원정 이슈인데, 이때부터 인도양 어귀를 틀어먹고 있었다면 감히 서구인들이 동양을 넘보지 못했으리라는 주장. 참 난감한데요. 우선 아무리 선박 스펙이 좋고 병참이 든든해도 멀리 떨어진 해외 영토, 식민지(예멘, 오만, 인도양, 동남 아프리카 일대에 정화가 모조리 식민지를 마련했다고 가정해도), 군사 기지를 유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단견으로 명 황실이 지레 바다를 포기한 게 아니라, 유지할 능력이 안 되어서 정책을 바꿨다고 봐야죠. 당연한 소리지만 당시의 중국(혹은 어느 나라라도)은 국민국가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봉건적 신분제를 유지해야 하는 체제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당송 이래 제국 질서의 수호란 지방의 주둔군 사령관에 대한 문치주의적 견제, 이것이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국방력 약화, 이 둘 사이의 딜레마에서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던 형편이었습니다. 해외에 대규모 해군을 유지하는 건 동로마 제국, 오스만 등 어느 패권 세력도 결국은 실패하고 만 과제였죠(체제 모순이건 생산력 감퇴건 간에). 민주주의 체제라는 미국조차 주한미군 포함 이제는 해외 병력을 감당할 형편이 안 되어서 지금 저러는 것 아닙니까.

더군다나 인도양 장악은 고사하고, 이 명 황실은 고작 자국의 남부 영토의 해안선도 방어 못 해서 이후 무수한 왜구의 침입에 시달립니다. 뿐만 아니라 북방은 오이라트, 타타르가 한때 수도를 포위하고 체제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은 적까지 있습니다. 이런 판에 한가하게 인도양 방어에 국력의 상당 부분을 투자한다? 정화의 원정과 샤르후 전투가 대략 두 세기 간격을 둡니다만, 아마 현실 판단이 좀 더 늦었다면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여진족 아니라 다른 몽골계 정복자에게 중원의 패권을 넘겨 줬을 겁니다. 하물며 장장 400년 뒤의 일을 누가 어떻게 미리 대비할 수가 있습니까. 서세동점의 치욕 그 책임을 구태여 묻는다면 영락제의 후임자가 아니라, 강건성세의 현실에 안주했던, 특히 건륭제 정도에다 대고 따져도 따져야 이치에 맞겠습니다. 정화의 원정이 놀랄 만한 사건, 쾌거인 건 맞으나 이를 두고 세계 패권 장악에 대한 아쉬운 실기(失機) 운운하는 건 지나친 중화민족주의에의 경도입니다. 주 교수님도 본문 중에 "제국 질서의 항상성" 같은 언급을 하시는 대목이 있는데,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주변을 대하는 태도가 사실상 제국주의로의 회귀라는 지적이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화 띄우기도 한 십 년 전에 크게 유행했는데 지금은 논쟁 끝에 그 허실이 다 드러나서인지 잠잠하더군요.

하야미 아키라(速水融. 이거 이름 읽기가 좀 어렵죠. "아키라"라는 훈독이...)의 인더스트리어스 레볼루션 개념이 이 장에서도 다시 소개됩니다. 보통 우리가 아는 건 "인더스트리얼 레볼루션"인데, 좀 엉뚱하지만 저는 이 명명 센스가 동아시아식 입시 교육 패턴과 무방하지 않다고 봅니다. 네이티브들은 (못 배운 사람들 빼고) 이 둘을 결코 안 헷갈려하는데, 유독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앞의 것이 산업적, 뒤의 것이 부지런한, 아니 그 반대였나?"하며 구별에 어려움을 겪곤 하죠. 하야미 박사(아직도 살아 계십니다)가 기발한 착안을 했다기보다, 그 오랜 암기사항에 골머리를 썩던 "추억"을 개념정립에 활용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여튼 이 착안은 꽤 기발합니다. 주 교수님도 잘 정리하고 계시듯, "인더스트리얼..."이 공급 측면 강조라면, "인더스트리어스.."는 수요 측면 혁신을 지목하는 결과거든요. 이처럼 현대 역사학의 기법은, 경제학과 통계학의 도움 없이는 그 의미가 거의 퇴색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820 생산력 역전에도 주 교수님은 회귀분석(리그레션)을 원용하시는데, 제가 학부 시절에도 동양사학과 학생(주 교수님은 서양사학과 소속이지만)들이 대거 경제원론 수업을 전공선택(인정) 과목으로 이수하곤 했습니다. 경제사 한정이 아니라, 경제를 모르면 바른 역사 인식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1914는 보통 1차대전 개전 연도로 다들 알고 있지만, 저자께서는 독자의 허를 찌르며 "나그네비둘기의 멸종"이란 생태적 의의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역사는 인간이란 종의 전방위 활동을 다 포섭하는 게 정도(正道)입니다. 정치사 위주의 기술(記述)은 결국 승자 위주의 사관을 용인하고 독자의 의식을 타락시키며 현상을 왜곡한다는 의미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며, 이처럼 인식의 지평을 모든 영역으로 넓혀 통합적으로 파악해야 하죠. 교수님의 이런 태도는 일반 독자들에게 그래서 매우 유익합니다.


저도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를 보면서, 일부 사회적 진화론자들(과거 일각의 편협하고 퇴행적인 입장이며, 현재 이를 지지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찰스 다윈은 구태여 언급하자면 역설적이게도 이들과는 정반대의 정치적 스탠스죠)이 운위하듯 "적자 생존, survival of the fittest"만이 유일타당한 명제라면 그 숱한 초식동물이 초원에서 맹수에 사로잡혀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살점을 뜯기는 모습은, 반대로 오래 전에 우리 눈에서 사라졌어야만 했습니다. 왜냐, "생존 부적절자 조기 멸종"이 저 도그마로부터의 필연적 도출 명제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근데 사슴이니 토끼니 하는 게 어디 어제오늘 출현한 동물도 아니고 말입니다.

"피마다지윈"은 본디 생물과 인간 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지칭한다기보다, 제 생각에는 저런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를 관조한 후 깨달아진 아메리카 원주민들 고유의 철학이 아닐까 합니다. 초식동물은 생존을 위한 노력에 비참하게 패배하는 게 아니라, 몸도 무겁고 생식 능력도 떨어지며 개체 유지에도 훨씬 노력을 더 들여야 하는 사자, 치타, 하이에나 등이 불쌍해서, 사냥 당해 주는 거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맨날 다큐에서 얘들이 잡혀 먹는 모습만 봐서 그렇지, 사실 맹수들은 사냥에 실패하여 배를 굶는 일이 더 많습니다. 얼마나 불쌍한가요? 초식동물들은 풀만 뜯어도 팔팔하게 잘 살고 새끼들도 더 많이 두는데 말이죠. 우리가 교통 사고 당할까 무서워 큰길에 안 나가는 게 아니듯, 얘들도 전체 표본으로 보면 맹수에게 희생당할 확률이 적습니다. 배부르고 등따시게 살려면 초식 동물로 태어나는 게 더 낫죠. 이런 생각을 연장하면, 인간으로 태어난 것도 못할 짓입니다. "피마다지윈"의 참뜻은 저는 여기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앨프리드 크로스비의 "생태 제국주의"에 대해 (이미 한국에도 독서 대중 사이에 널리 알려진 분이고 주장이지만) 주 교수님 버전으로 알기 쉽고 친근하게 전달, 정리해 주신 점이 특히 좋았습니다.

세계는 평화를 향해 가는가, 아니면 야만과 폭력으로 치닫는가? 핵무기 등 대량살상수단이나 환경 파괴, 도시 강력 범죄의 증가를 보면 확실히 후자쪽이고 그게 대부분의 상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세의 평화적이고 목가적인 생활에 대한 근거 없는 동경 때문에, 과거에는 누가 누굴 해치는 일 없이 오순도순 잘만 살고 다들 착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 책 4장에서, 주 교수님은 과거의 인류가 얼마나 예의 없고 더럽고 폭력적이며 이기적이기까지 했는지, 자신의 연구와 스티븐 핑커의 실증 연구를 통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물론 저자는 대놓고 전자를 옹호하진 않고, 여전히 판단은 독자(청중)에게 맡기는 쪽입니다. 우리나라 한정으로 핑커에 대해서는 "심리학자가 뭘 안다고 역사 얘길?"이라든가, 아예 "자계서 저자"만으로 알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이 책의 4장을 읽고 인식을 고칠 필요가 있겠네요.

이 4장에도 소위 나가시노 전투의 "일제 사격" 전술(직전신장이 고안한) 그 가공할 만한 위력에 대해 평가가 이뤄집니다. 그럼에도 불구, 풍신수길의 패권기가 종료된 후 등장한 에도의 덕천 막부는 총이라는 위력적인 신무기를 모두 거둬 들이고 칼로 세상을 지배하는(물론, 이후 칼쓰기란 기술보다는 그저 세습 신분화에 그쳤지만) 무사계급의 이익을 지키려 듭니다. 아니 저 앞의, 정화의 해상원정 그 기세를 계속 이어가지 않고 포기한 것도 어떤 전략상의 착오가 아닙니다. 체제 유지를 위해 필연적인 선택이었고, 두 전략 목표를 다 달성할 역량이 안 되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죠. 윤관의 9성 포기도 어리석은 근시안적 정책이 아니라 국가 역량 한계 때문에 경영할 여력이 없어 포기한 겁니다. 9성을 지켰으면 이후 완안부의 아골타를 대신해서 우리가 북부 중국의 주인이 되었겠습니까? 역사에서 if 놀이는 무지의 소치일 뿐이죠. 물론 어이없는 돌발사태로 향방이 바뀌어 엉뚱한 결과가 초래된 예도 세계사 속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만, 정화의 해외 원정과 그 향후 경과는 그런 미련을 남길 만한 가벼운 변덕에 의해 결정된 게 아니라는 걸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 증조할아버지가 평소에 운동만 잘 해서 획득 형질을 DNA 속에 물려 줬다면, 저 증손자가 폐암으로 죽는 일은 없었을 거 아니겠어?" 이런 말이 얼토당토 않음이나 마찬가지죠.

우리 독자들은 이 책에 드러난 많은 긍정적이고 합리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세계관, 나아가 인간과 자연이 합일되는 건전한 패러다임을 배울 필요가 있겠습니다. 특정 국가의 편협한 이익을 옹호하는 비이성적인 가정과 가설의 점철에 끌리는 게 아니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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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호기심을 위한 미스터리 컬렉션 - 당신이 믿는 역사와 과학에 대한 흥미로운 가설들
맹성렬 지음 / 김영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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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앞에 겸손할 필요가 있다는 말은 언제나 사람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위대한 학자나 사상가들의 업적, 노력, 유산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만, 과연 그 가치를 합당히 평가할 자격이 있어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요? 그보다는, 내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 세상이 그런 이들의 기여와 성취에 대고 공인된 권위를 바치기에, 나 역시 그런 대세에서 이탈하지 않겠다는 제스처라든가, 아니면 이 정도씩이나 학문에 대한 존경, 신뢰를 보내는 자신을 두고 "그 역시 많이 배운 사람"이라며 타인들이 인정해 주길 바라는 아주 속물적인 동기가 작용하지는 않을지요.

어떤 학문적 진리나 법칙의 참된 가치를 알아보려면, 그 사람이 뭘 평가할 만한 충분한 소양과 지혜를 갖추는 게 우선입니다. 그러려면 많은 공부와 수양이 요구될 테고, 이 단계를 안 거친 채 무엇인가를 찬양하거나 혹은 맹렬히 반대한다면, 그 사람은 그저 사이비 종교를 열심히 믿는 신도나 다를 바 없습니다. 어떤 주장의 진위를 평가하려면 기존의 지식과 논란에 대한 충분한 이해, 그리고 흔들림 없이 공정한 논리적 기준이 필요합니다.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정돈된 인식의 틀에 의해 판단이 가해져야 하고, 이에 자신이 없으면 섣불리 뭐가 옳다 그르다를 남 보란 듯 목청 높일 게 아니라 겸손하게 "의견 유보, 잘 모르겠음" 정도에서 그쳐야 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과격한 판단을 즐기는 사람은 뭔가 불순한 의도가 따로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가 현재 과학적 진리, 통념, 상식으로 간주하는 많은 사항들은, 훗날 혹은 가까운 장래에 청천벽력 같은 새로운 증거나 치밀한 이론의 출현으로 한순간에 기반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믿어야 할 건 증거와 논리일 뿐이며, 그럴싸한 설명이나 아름다운 비유란, 언젠가는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할 가설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 "생각"이란 "합리적 의심"에 가까운 의도였습니다. 이 책에서 우리 독자가 만나는, 발칙하고 대담한 의문 제기, 혹은 대안에 가까운 "썰들"의 전개는, 물론 대수롭지 않은 농담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천재적인 직관(비록 지금은 치밀한 근거를 못 갖췄더라도)이었다며 열렬한 지지, 재평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 독자들은 독자만의 특권으로, 정교한 논리와 튼튼한 근거에 의지하여 얼마든지 저자의 주장에 재반박을 가할 수도 있겠고 말입니다. "Nothing lasts forever."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는 법이며, 영원한 진리가 있다면 오직 이 말 하나뿐입니다.



"신대륙의 발견"이란 사건은 저들 서유럽인들이 자신들 중심으로 구성한 세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갖습니다. 감자, 담배, 코카나무를 비롯해 특정 작물, 그리고 여러 종의 동물들은 1492년 콜럼버스의 탐험 이전에는 구대륙이 전혀 모르던 존재였으며, 그 이전에 모종의 교역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고히 굳은 상식과 믿음에 반하는 터라, 이는 뭔가 사실과 소재를 다루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다는 식으로 무시되곤 했죠. 하지만 스베틀라나 발라바노바, 로잘리 데이비드, 미셸 레스코 등(공교롭게도 모두 여성들이군요)의 문제 제기에 의해 이집트(구대륙) 미이라에서 (신대륙에서나 자생하던) 식물의 니코틴, 코카인 성분이 발견되었죠. 이를 계기로 혹시 고대부터 대륙 사이의 물자 교역에 열심히 나선 종족이 따로 있지는 않았는지, 현재 통념으로 받아들이는 세계사의 줄기에 중대한 구멍 하나가 뚫렸던 건 아닌지 의문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대륙 논의 이래, "잃어버린 고대사"에 대한 탐구와 상상은 (그토록 많은 비웃음과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태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추종자들을 유지해 왔죠.

저자께서는 이 오래된 의문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논의 성과와 저자 본인의 독창적 가설을 섞어 꽤 치밀한 줄거리, 혹은 대안을 제시합니다. 이 토픽과 직접 관련은 없습니다만, 그레이엄 핸콕이 쓴, 어떤 일련의 책들이 이끈 열풍 덕분에 "뭔가 설명이 필요한, 그러면서도 열정적인 탐구자들이 내어 놓는 설명은 왠지 사이비 같은" 난감한 이 주제에 대해 다시 근래 들어 주목이 이뤄졌다가 지금은 다시 주춤해진 느낌입니다. 개인적으로 1) 빈약한 근거만으로 무작정 환상을 우기는 태도도 문제겠고 2) 여튼 기존의 학설로 설명이 안 이뤄지는 현상에 대해 그저 언급만 해도 무작정 사이비라며 매도하는 태도 역시 큰 문제입니다. 후자의 경우 막상 (그들이 지지한다는) 주류학설에 대해 물어보면 꿀먹은 벙어리인데(암기한 몇 마디 구호만 빼고), 그저 목소리만 높이고 과격한 태세만 취하면 뭔가 신분상승이라도 하는 양 한심한 착각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죠. 가설이나 제안에 대해 찬성을 하든 반박을 하든, 인적권위에의 의존이 아닌 구체적인 논거를 들며 담론에 참여해야 합니다.



독자로서 제 생각에는, 일단 모든 교역과 활동이 콜럼버스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진다는 고정 관념만 버리면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나 봅니다. 기록에 없다고 증거가 안 남았다고 실체까지 없었으리라는 단정은 무리입니다. 마치 잃어버린 고리 몇 때문에 진화론이 통째 부정되는 게 아니듯 말입니다. 아마도 이 문제는 남아있는 유적도 없고 믿을만한 기록도 없으니, 한반도의 고대사 디테일마냥 영원히 해결되지 못할 미스테리로 남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대인들이나 그 직근 후대인들에게 어떤 크레딧을 못 받았다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교역에 종사한 종족 혹은 집단(저자께서는 구태여 "종족"으로 한정하십니다만)"이 아예 부정될 이유는 없죠. 증거가 없으니 논증을 컨스트럭트하기도 힘들고,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또 안 되고, 이런 딜레마는 인문역사학의 영역에 한두 개가 남아 있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고고학에 기여할 수 있는 인접 분야의 기술 발전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고, 그 전까지는 모두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존중하며 신중한 논의에 머무는 게 필요합니다. 누가 이런 문제에 대해 손쉬운 단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UFO 이슈는, 이 책에도 나오듯 다소 뜬금없는 전향적 태도를 보인 힐러리 클린턴 전 장관의 말처럼, "unexplained aerial phenomena", 즉 "설명이 어려운 공중 관측 현상들"로 바꿔 설명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미확인은 둘째치고 그게 과연 비행 물체이기나 한지도 확인이 어렵고, 보도되거나 (당국에 의해 감춰졌다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모든 사건이 같은 성격을 가졌다고도 못하기 때문이죠. 그냥 "설명이 힘들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지도 모릅니다.

레이건은 사실 엘리트 코스를 제대로 밟은 다른 정치인과 성장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어리석은 이들이 현혹되기 쉬운(이 자체가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만) UFO 따위나 믿는다며 폄하되기도 했고, 혹은 반대로 그분이야말로 우리들의 믿음을 공유한다고 일각으로부터 기대를 받은 면이 있습니다. 책에도 나오듯이 본인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이를 언급한 적이 없는데, UFO를 심각히 여긴다면 누가 그런 후보에게 신뢰를 갖겠냐는 우려 때문에 자신의 신조(확실치 않습니다)를 숨겼는지도 모르죠. 레이건이 재임 중에 "감당 못 할 진실(책 후주에 나오듯 원 표현은 handle입니다. 꽤 모호하죠)" 운운한 것도, 워딩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해석이 갈립니다. 전 사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좀 걱정도 되었는데, 저자께서는 뒤의 후주를 보면 가장 보수적(즉 레이건은 그딴 문제에 관심 없다)인 입장의 해석을 오히려 타당하다고 여기시더군요(그래서 안심했습니다). 음모론이건 반 음모론이건 어느 선을 넘지 않고 "상식선의 의문"을 제기해야(혹은, 무작정 떼를 쓰는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반박해야) 그게 "지적 호기심"으로 옹호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대통령도 모르는, 군부 수뇌부끼리만 대물림하여 공유하는 외계인에 대한 비밀(외계인과 UFO는 엄밀히 말해 별개 이슈입니다)이 있는가?"란 질문에 대해서도, 무슨 군부 파워 엘리트들이 대통령도 따 시키는 실세다, 이런 결론까지 비약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국가기밀로 분류된 사항은 현직 대통령도 오픈 못 하는 게 당연하고요(법으로 강제되니까). 고위 장성들이 군 통수권자의 명령과 위계까지 무시하는 건 아니죠(그랬다간 바로 파면). 위의 코카인 고대 무역(?)처럼 뭔가 미스테리한 사건이 있었던 건 맞겠지만, 파일 까 봐야 특별한 건 안 나온다고 봅니다(로스웰 외계인 같은 것). 이런 건 오히려 시원하게 공개해야 쓸데없는 억측이 잦아들겠죠. 행정의 다른 모든 분야처럼, 투명성이 공정성과 정의를 담보하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B급 오락물이지만 <스피시즈 2> 같은 영화에서도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건방진 놈, 내가 대통령한테 당장 전화해서 조치하도록 하겠어.""마음대로 하십시오 의원님. 그런데 이 문제는 대통령도 전혀, 전혀 감당 못할(This is way beyond the President. Way beyond) 중대 문제거든요?" 이것도 무슨 미국의 권력 구조에 미묘한 뭣인가가 있다는 증거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영화의 각본가도 그런 믿음을 가졌기에 대본에 이런 장면을 집어 넣었겠죠. 원인과 결과를 반대로 혼동해서는 곤란합니다.

길버트 머레이 교수의 실험에 대해선, 물론 그 실험에 허위나 조작이 끼어들지 않았겠음은 믿어야겠지만, 한 개인의 특수한 예로 전체로까지 일반화하는 태도는 무리라고 봅니다. 프로이트와 융 사이의 갈등은 책에서 설명하시는 그런 이유(초상현상에 대한 견해차) 말고도, 다른 학문적 입장의 차이라든가 하는 요인이 끼어든 줄로 압니다. 다만 이 두 거물 학자들이 "이론을 실천으로 옮기기라도 하듯" 입양과 결별 과정에서 권위 상실 운운하는 설명은 흥미롭긴 했습니다. 파울리 박사의 활동 반경 주변에서 일어난 독특한 현상 역시 다른 설명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바그다드 유적에서 발견된 전지는 이른바 Out-Of-Place Artifacts, 줄여서 우파츠(ooparts)라고 부르는, 역시 설명이 쉽지 않은 경이로운(그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기술 중 하나죠(이건 전 몰랐는데 이런 흥미로운 사례가 이것 말고도 꽤 많다고 합니다. 다만 미스테리해진 이유는 각각이 다 다를 수 있으므로 이런 사례를 "우파츠"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묶어 둬야만 하는지는 의문이네요). 역시 이런 문제는 고고학, 역사학, 공학과 자연과학적 통찰이 두루, 균형감 있게 개입해야 하므로 해결이 까다로운 게 당연합니다.

단지 생존에의 목적에 적합하다는 이유로 그처럼 경이로운 형태 변이를 이룰 수 있는가? 이 이슈도 그간 너무 소모적인 논쟁이 별 성과도 못 내고 감정싸움, 목소리 크기 경쟁으로만 이뤄져 좀 질리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는 첫째 수십 억년의 시간 단위란 어차피 인간이란 종의 인식 범위를 벗어납니다. 시간만 오래 지난다고 그런 마법이 이뤄지는가? 그러나 "오랜 시간"의 스케일이, 미미한 필멸의 존재인 인간의 어림으로 가늠되는 수준이 아니므로, "이상하다"는 이유만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건 근거가 빈약하죠. 이 점에서는 차라리 도킨스의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으며, 다만 저자도 지적하듯 그런 극단적인 결정론을 곧바로 "과학적 태도"로 여기는 건 역시 극단적인 어리석음의 표출에 불과합니다. "기계론=유물론=과학"의 등식은 절대 성립하지 않습니다.

양자통계학의 성과가 저자의 말씀처럼, 생명체 메커니즘 안에만 존재하는 모종의 "옴살"적 구조의 존재를 증명, 혹은 암시하는지는 더 연구가필요하다고 봅니다. 아울러, 저자는 왜 물리학은 반드시 정확하고 경성이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시지만, 이는 반대로 타 학문의 연구와 성숙이 거듭되어 물리학의 정합성에 수렴해야 할 문제지, 그 반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입장과는 정반대인) 최재천 교수님의 "선언"도 역시 너무 시기상조라는 느낌이구요. 저자께서는 "폐차장의 회오리바람이 부속품을 끼워맞춤"의 예를 드시는데, 역시 수십억년 단위의 세월을 감안하면 확률 계산을 다시 할 필요도 있고, 하필 저 예가 특정 진영에서 즐겨 쓰는 비유라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 조금 불편했습니다.

첨성대의 미스테리는 제가 고등학생 때도 국사 선생님이 언급하신 이슈라서 다시 복습하는 감회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왜 결론을 안 내시지?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 라고 불편해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모든 문제가 그리 관변적으로 편하게 오 엑스가 다 척척 결론나는 게 아님"을 가르쳐 주신 고마운 의도였다고 여겨지네요. 이 책에 나온 여러 주장도 그런 좋은 의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절충설은 항상 옳은 법이지만(?), 저자의 주장은 현재까지 나온 모든 주장의 장점만 잘 모은 설득력 있는 가설인 것 같습니다(주변의 광선을 차단하고 누워서 관측해야 오히려 잘 보임& 인도산 불교 문명과 점성술의 세트 유입).



7장이 참 흥미로웠습니다. 저자의 결론에 동의하고 안 하고를 떠나, 존 바딘과 브라이언 조지프슨의 양립할 수 없는 이론상의 충돌에서, 어떻게 후자의 양자 관통 이론이 승리를 거뒀는지에 대한 설명은, 이전 바딘의 통설적 입장에 대한 이해까지 가장 쉬운 언어로 독자에게 이해시켜 주는 멋진 시도였습니다. 그 전에 학부 교과서를 슬쩍 엿볼 때는 참 어려웠는데 역시 대가의 솜씨로 접하니까 머리에 쏙쏙 잘 들어오더군요. 양자 현상(두 군데에 확률 분포로 동시 존재 등)이 거시계에서도 가능하다는 암시는 바딘 같은 확고한 전통주의자로서 도저히 수용 못할 결론이었을 겁니다. 이 파트를 잘 읽어 보면 바딘이 꼭 최종적으로 패배했다는 게 아니라, 조지프슨이 결국 노벨상까지 받아낸 그 이론적 성과를 좀 극단적으로 밀고 가는 바람에 결국 그의 이단아적 행보를 예측하고 그토록 배척했다는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론의 디테일은 틀렸어도 학자 개인의 성향에 대한 거부감과 경계는 (주류 입장에서) 타당했다는 거죠.

물론 우리 독자들은 저자의 선호와 시점 덕분에,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한 지지를 보내듯 조지프슨의 행보를 응원하게 됩니다(ㅎㅎ). 유리 겔라(이분은 현재 좀 심각할 만큼 평가의 저하가 이뤄졌습니다. 거의 사기꾼 취급)를 지지하기까지 했다는 그의 이후 행적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최고의 두뇌, 최상의 경력을 가꿀 수 있었던 이가 안정된 미래를 과감히 포기하고 구태여 가시밭길로 접어든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냐는 시각, 또 나이 들면서 총기가 흐려지고 뭔가 정신적 문제를 겪었다는 시각(저자는 공평하게도 이런 시각까지 다 언급합니다. 무조건 그가 맞다는 게 아니라)이 다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양자컴퓨터다." 양자현상의 정의가 지나치게 확대 적용되는 것도 경계해야겠지만, 확실히 최근의 이론적 성과는 뭔가 전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함을 누구에게나 납득시키는 듯합니다. 중요한 건 어느 한 극단으로 치달을 때 과학의 붕괴, 미신화를 낳거나, 반대로 명백한 증거를 애써 무시하는 또하나의 사이비로 타락(설명이 안 되는데도 설명된다고 우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난제를 하나하나 해결할 수있는 유일한 희망은, 오직 논리와 근거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순수한 지적 호기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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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 세계적 물리학자 파인만이 들려주는 학문과 인생, 행복의 본질에 대하여
레너드 믈로디노프 지음, 정영목 옮김 / 더숲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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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레너드 믈로디노프 박사는 학부생 시절(아니, 그 이전 청소년기)부터 은사(성함, 실명은 생략되어 있습니다)의 각별한 기대를 안고 이후 석박사를 마친 후 칼텍에 교수직을 얻어낸 기대주였고, 지금도 칼텍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중견 학자입니다. 이런 분도 칼텍에 갓 자리를 잡았을 때는 "과연 이 길이 내 길인지."하는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었나 봅니다.

이 책은 아직 서른이 채 되지 않은 젊은 시절, 칼텍이라는 전당에서 리처드 파인만, 그리고 머리(이 책에선 "머레이"로 표기하며, 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르겠습니다) 겔만 두 천재 석학과의 짧은 만남을 소재로 삼아, 인생의 지표를 흔들림 없이 설정하고 목표에 매진하려면(혹은 반대로 과감히 방향전환을 이룬 후 좋아하는 일에만 푹 빠져들려면) 어떻게 해야 현명히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들려 주는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유머러스하게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라며 누가 묻지도 않은 답을 먼저 내어놓는데, 이는 독자의 오해를 피하고자 하는 진지한 의도가 아니라 작가로서 픽션 창작에 전념하며 살고 싶었던 자신의 한때 희망(이는 부분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에 대한 약간의 풍자적 회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말 제목은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이며, 원제는 "파인만의 무지개"입니다.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에서처럼,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보거나 머리 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설레고 부풀어오르는 대상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입니다. 파인만뿐 아니라, 광학(이 저자분도 처음 전공이 이 분야였습니다)을 연구한 그 앞 시대의 선구자들은, 처음 물리현상에 관심을 두고 평생을 헌신할 때 "무지개(혹은 다른 무엇이든)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 분야를 파기 시작했고, 혹 뜻이 흔들리거나 회의가 느껴질 때마다 "그 아름답고 설레는 것"을 다시 상기하며 자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는 거죠. 적성과 욕구 사이에서 저자(포닥 시절의 젊은이)가 갈등할 때, 파인만은 이런 충고를 던져 줍니다. "가서 원자의 전자현미경 사진을, 아주 세심히 들여다 보게. 그냥 보지 말고 아주 세심히 말야."

파인만이나 겔만 같은 한 세기에 한두 명 날까말까한 천재는 아니라도, 저자 정도의 영재 코스를 밟은(우리 관점에서는 그냥 천재입니다) 이라면 남보다 확실히 우월한 자신의 열정을 매 순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진로에 대한 회의와 갈등은 우리 같은 평범한 이들이나 겪는 거겠고요. 그런데도 이제 창창한 경력을 막 시작하려는 이 청년은 왠지 자신이 없습니다. 몇 년 용 좀 쓰다, 간신히 낸 학문적 실적과 성과에 시큰둥해하는 대학 당국으로부터 쌀쌀맞게 해임 통보를 받거나, 아예 이 거대한 학교에 발령 받은 자체가 행정착오일 수 있다며 좀 과한 침체 상태에 빠집니다. 작가가 되고 싶은 소망은 (독자로서 제 생각엔) 그저 현실도피의 핑계인 것 같고, 속마음은 "이런 천재들 사이에서 내가 어떻게 버틸까?" 같은 중압감이 지배한 것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여태 탄탄대로를 걸어 온 그로서는 이런 느낌을 생전 처음 겪는 바이겠습니다.



이 책은 물론 파인만과의 짧은 접촉과 그로부터 받은 가르침(파인만 본인으로서는 그런 의식이 없었겠으나)을 주로 돌아보지만, 파인만 못지 않게 강렬한 개성과 비중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파인만보다 십여 년 아래인) 머레이 겔만입니다. 파인만도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 안 되는 괴벽과 까탈스러움의 소유자지만, 겔만은 전형적인 만능 천재이자 부르주아적 취향까지 함께 가진 유형이므로, 길 잃은 젊은이에게 자상한 멘토링을 해 줄 마음 따윈 전혀 갖지 않았을 겁니다(이 책에는 "나를 바라보거나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시간이 아깝다는 듯한 태도였다" 같은 말도 있습니다). 여튼 저자는 그런 겔만도 혼자 "사숙"하며(가끔 방문해서 대화도 나누는데, 이는 연구실이 가까이 위치해서인 이유가 큽니다. 나중에 "더 친분 있는 이를 곁에 두고 싶다"며 방이 바뀌게 되죠 쩝), 그런 겔만의 개성이나 철학으로부터도 교훈을 이끌어 내며, 겔만이 선배 파인만을 보는 시각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스승" 파인만(물론 저자와 파인만은 사제관계까지는 아니었으나)에 대한 탐구를 행하기도 합니다.

재미있게도 그나마 친분을 텄던 파인만을 두고는 내내 "파인만"으로 호칭하는데(딕이나 리처드가 아닌), 더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겔만은 계속 "머레이"로 부른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는 책에서 저자만 유지하는 태도는 아니고, 칼텍에서 구성원들의 분위기나 태도를 반영한 거겠습니다만. 저자와 파인만 자신의 규정대로, 세상에는 두 종류의 학자가 있습니다. 겔만(뿐 아니라 학계의 주류를 형성하는 모든 이들) 같은 그리스인 타입, 그리고 파인만 같은 바빌로니아인 타입(둘 다 비유적 의미입니다). 전자는 조화로운 전체 체계를 세워 두고 모든 각론이나 현상이 이 체계에 잘 맞아야 이론을 진리로 인정합니다. 후자는 그렇지 않고, 우리가 상식과 감각으로 겪는 개별 현상이 우선이며, 이로부터 도출되는 원리나 법칙이야말로 진리의 초석으로 여깁니다. 전자는 완결된 증명을 중시하고, 후자는 효용성을 강조합니다. 사실 이런 태도라면 "양자역학"은 바빌로니아인들의 전유물이라야 하지만, 겔만 같은 천재는 놀랍게도 자신이 아예 표준 모형의 기초를 놓아 "말이 안 되는 현상을 설명할 체계"를 하나 새로 세워 버립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인들"도 양자역학에 대해 괜한 패러다임의 갈등이나 거부감에 시달리지 않고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었다고 해도 되죠.



그러나 파인만은 이런 태도에 대해 다 불필요한 허식이거나 심지어 환상, 기만으로까지 평가합니다. 개별 현상이 잘 설명되는 이론이 최고이지 기존의 체계에 뭘 맞출 필요가 뭐 있냐는 겁니다. 같은 천재라도 이런 타입은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세부 분야에 푹 빠지는 반면, 겔만 같은 이는 (그 특유의 부르주아 취향까지 작용해서) 자연과학뿐 아니라 모든 분야, 역사, 문학, 고고학까지 다 섭렵하고 하나의 체계를 이뤄야 직성이 풀리는 거죠. "쿼크"도 겔만이 제임스 조이스의 고전 <피네간의 경야>에서 따온 이름이며, 그는 한자나 산스크리트에도 해박하여(이 책에서는 마야 문자 천착에 대한 언급이 두 번 나옵니다. 두 번 다 다분히 그의 현학을 비꼬는 맥락에서) "사성제, 팔정도" 같은 이름도 붙인 게 그입니다.

파인만 스타일은 영국식 경험철학(귀납법 위주)과 통하고, 반면 겔만 스타일은 대륙의 합리론(연역법 위주)과 닮아 있습니다. 파인만이 그처럼 "끈이론"을 싫어한 것도, "근거도 없이 이론을 위한 이론을 만드는 허세"라는 판단을 그로서는 내려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어지간히 자신의 장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지, 저자는 존 슈워츠를 두고 "모두가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는 저런 연구를 몇 년째 이어가는 걸 보니 누가 뒤를 봐주는 게 틀림없다"는 주변 분위기에 합류하죠. 물론 이건 다분히 농담조로 한 말이지만, 충격적이게도 정말 실력자 스폰서가 있었음이 책 후반부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바로 겔만이었는데, 끈이론을 전폭 지지하지는 않아도 "저 친구들 길에 뭔가 놓여 있음"을 직감하기도 했고, 보편 이론을 완성한 후 개별 사례를 접근, 포섭시키는 그들의 방법론에 "그리스인"인 그가 공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파인만의 불후의 업적 중 하나는 책에도 나오듯 "경로 적분론의 완성"입니다. 경우의 수를 다 더하면(적분하면) 확률이 나온다는 건데, 이 기법이 "발견"되기 전에는 엄청 복잡한 계산이 필요했죠. 너무 간편해서 사람들은 그 타당성을 의심했는데, 그래도 실제 써 보니 너무도 실용적이라 쉽게 배척도 못하는 게 반대진영이었습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파인만 식이 아닌" 보편적 언어를 통해 메타 증명을 하고 나서야 이 업적은 업적으로 평가되었습니다(이건 수학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이걸 생략하면 골드바흐의 추측도 측이 아니라 법칙이 되어야 합니다. 다만 파인만은 물리학자지 수학자가아니므로...). 파인만은 근데 이런 게 너무 싫었던 거죠. 그는 엄격한 이론보다 자기 직관(천재니까)을 더 믿었고 이런 상상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싶어했습니다. 그의 상상은 그저 상상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는 이런 스타일 덕분에, 예를 들어 왜 1980년대 중반 챌린저 호가 폭발했는지 명쾌히 기술적 원인을 짚어내어(그의 전공은 이런 공학 계통과 거리가 꽤 먼데도, 해당 분야 엔지니어들이 못 찾은 걸 이론물리학자가 규명했다는 게 진정 경악할 일입니다. 그 실무자들은 다 뭐가 되는 건가요ㅠ)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파인만과 겔만 두 분이 이처럼 개성이 다르지만, 이 책에 잘 나오듯 두 분 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또 지극하다는 게 공통점입니다. 책은, 지성의 첨단을 걷는 이런 학자들도, 우리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감정에 지배되고, 그 와중에서도 인간의 길과 가치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피와 육신을 지닌 존재"임을 잘 가르쳐 줍니다. 진로 모색 때문에 고민이 많을 학생들이 읽으면 참 좋을 책 같습니다(입자물리학에 대한 이해는 덤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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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구조 교과서 - 에어버스.보잉 탑승자를 위한 항공기 구조와 작동 원리의 비밀 지적생활자를 위한 교과서 시리즈 10
나카무라 간지 지음, 전종훈 옮김, 김영남 감수 / 보누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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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누구에게건 "하늘을 나는 것"은 가장 소박하고 아름다운 꿈 중의 하나였습니다. 용감하고 잘생긴 조종사들이 주인공들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라도 방영되면 커서 파일럿이 되겠다는 아이들이 학급에서 절반이 넘곤 했죠. 실제로 초고도, 초음속 비행이라는 격무를 수행하고, 언제 돌발할 지 모르는 비상사태에 기민히, 단호히 대응해야 하는 조종사라는 직업은 결코 낭만적으로 볼 일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일상을 사는 축복받는 인류에 속합니다. 하지만 수천 km 떨어진 다른 대륙에 몇 시간 만 들여 날아가는 "비행 교통"이 어떤 원리로 가능한지 설명해 보라고 하면 아무도 쉽게 입을 못 뗄 것 같습니다. 대형 여객기의 경우 동체가 얼마나 큰 기기입니까. 그런 무거운 물체가 빠른 속도로 창공을 날아 목적기까지 수많은 승객을 실어다 주고, 운항 시간 동안 기내에서는 영화 감상이나 맛있는 식사 등 쾌적한 문화체험까지 즐깁니다. 이런 기적 같은 혜택을 우리는 중력만큼이나 당연한 세상의 원리처럼 아무 의문 없이 누립니다. 비행기의 활강이야말로 중력의 가혹한 섭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가장 놀라운 인간의 성취인데도 말입니다.



많은 현대 문명의 이기들은, 대개 뚜렷한 과학(기초과학, 자연과학)상의 원리 몇(하나 혹은 두엇)의 발견, 확립만으로 성큼 우리 곁에 다가온 것들이 많습니다. 핵분열의 관측과 상대성이론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초기 핵무기만 해도 그저 자연과학상의 성과에만 바로 기댄 부분이 그처럼 컸지만, 비행기의 구조와 운행 원리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이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 먼 과거에 상당 부분 이론적 탐구를 해 냈습니다만 실용화에까지는 터무니없이 못 미치는 수준이었죠. 라이트 형제가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가동 가능한 기기의 실물 설계와 비행에 성공했을 뿐, 어떤 방정식이나 실험실 속의 간명한 법칙과 도그마 몇으로 "짠!"하고 실체를 갖춘 게 아니었습니다. 엔지니어들이 자연과학자들에 대해 "당신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우리들만의 직역"이라며 자랑스러운 예증으로 써 먹는 게 이 비행기 발명, 개발의 역사이기도 하죠.



이런 분야는 그만큼, 교과서에서 잘 다듬어진, 직관적 설명 몇 마디로 "이래서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거야."라며 손쉽게 가르치기, 혹은 독자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비행기의 구조와 운항은 그만큼, 현장의 엔지니어들이 "비행"이라는 구체적 목표에만 전력을 기울여, 어느 정도는 행운의 덕도 따랐기에 발견, 정립할 수 있었던 매우 복잡한 원리에 바탕을 둡니다. 이런 비행기의 구조를,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대중서 몇 권 읽고 머리에 쏙 정리해 넣어두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 기술자들도 방대한 구조를 조감하기보다 자기 전공만 파악하는 게 보통이죠. 그래서, 나무는 물론이고 숲도 볼 줄 아는 이런 도사님이, 알기 쉽게 그림과 다양한 예까지 결들여 지은 책을 접한 우리 같은 독자는 운이 좋다고 하겠습니다.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를 재미까지 붙여 가며 "아 그런 거였어?" 같은 깨달음의 쾌감까지 느끼게 돕는 멋진 책입니다.

물체는 웬만해서 허공에 뜰 수 없습니다. 중력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죠. 중력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그건 이미 물리계에 속한 존재가 아닌 어떤 신령스러운 초월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 무거운 비행기, 웬만한 집채보다 무거울 그 기기가 하늘에 떠서, 그것도 자기 의사와 목적대로 운신을 자유로이 하며, 목적지에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는가. 사실 웬만한 교양서나 인터넷 정보(권위 있는 기관에서 운영하는)를 봐도, 그리 명쾌히 이해가 안 되는 게 보통입니다. 이 책은 일단 서두에서 "어떻게 날 수 있나?'에 대한 물리학적 원리(들)를 가르친 후, 이후 전개되는 다른 구조 설명(이나 토막상식, 재미있는 이야깃거리 등)을 통해 응용 복습을 시켜 줍니다. 저는 이 책에서 특히 이 점이 좋았습니다.



학생들을 위한 참고서라고 해도, 앞에서 배운 원리나 정석이 뒤로 가면 다른 토픽에 묻혀 흐지부지되는 수가 많죠. 이 책은 앞에서 언급한 원리, 설명이 뒤로 가도 거듭 적용, 심화, 환기된다는 점이 가장 돋보입니다. 독자는 앞에서 공부한 내용을 쉽게 잊지 않게 되고, 한 가지 원리가 스토리처럼 여러 상황에 녹아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비행기 같은 복잡한 기기의 구조를 친근히 기억,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가 얼마나 복잡한 자연과학, 공학적 원리의 얽힘과 응용과 융합에 기대는 구조인지를 생각하면 이처럼 책이 잘 읽힌다는 게 거의 놀라울 정도지요.

설명도 교과서적으로 단조롭거나 기술적으로 복잡하지 않고, "이건 한마디로 뭐다!"처럼 명쾌합니다. 예를 들어 부력은 그냥 떠오르는(나를 환경이 떠오르게 하는) 힘이고, 양력은 내가 애를 써서 내가 떠오르는 힘이라는 식입니다. 유체 속에서 둘 다 물체를 떠올리는 이유라는 점에서 헷갈리기 쉬운데(다 물리학 고교 1학년 수준에서 배웁니다만, 둘이 뭐가 다르냐고 애들이 물으면 과연 명쾌하게 구별해 줄 자신 있으신가요?), 저자는 "당신들이 헷갈려할 만하고, 그래서 처음부터 분명히 구별시켜 줄 테니 개념부터 잡고 시작하라"는 듯 전략적 티칭을 시도합니다. 가려운 걸 긁어주는 코칭이란 바로 이런 걸 두고 이름이죠.



우리가 중고교 교과서에서 배운 불변의 원리도 상기시켜 주며 "학창 시절에 배운 당신의 소양과 지식은 결코 헛되이 쓰이지 않는다. 이처럼이나 절실한 현실과 요긴하게 직결된다"라고나 하듯, 그저 쉽고 캐주얼하게 풀지만은 않고, 이처럼 정석과 기본에 충실한 게 또 장점이고 신뢰를 부릅니다. 가장 근본 핵심은 (우리가 로켓의 원리라며 배우기도 한) 작용반작용의 법칙이죠. 이 토픽에서 자연스럽게 항력 계수 이야기가 나오고, 양항비 토픽으로도 무난하게 넘어갑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항공대 출신 친구하고 대화하다 그가 공부하던 교과서를 흘깃 볼 일이 있었는데, 전공서적에서 구경한 항력 계수 설명은 굉장히 쌀쌀맞고 드라이합니다. 쉬운 내용도 지레 정나미가 떨어져서 멀리할 지경이죠.

이 책은 같은 내용을 설명해도 뭔가 직관적으로 턱 감이 오게 풀어 주는 게 제일 맘에 듭니다. 예컨대 "양력은 비행기의 무게와 같고(정확히 말하면 "비례하고"), 추력은 항력과 같으므로, 결국 양항비는 무게와 추력의 비율이다." 란 서술이 있는데요. 이렇게만 떼어서 인용하면 뭐 무슨 소린지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책 앞에서부터 레고 조립하듯 하나하나 기초부터 설명을 해 주기 때문에, 책의 호흡에만 충실하면 "아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겠다" 같은 안심이 확실히 따라오는 공부고 독서입니다(추력, 항력은 알기 쉽게 다 설명이 베풀어지고요).

교과서 전공 서적 읽으면서 제일 짜증나는 게, 책 뒤의 내용(용어, 개념)이 뜬금없이 나온다든가(그래서 읽지도 않은 뒤를 또 참고해야 함), 항목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안 되고 단어사전처럼 동떨어진 설명 방식이 보통이어서 읽어도 머리에 잘 남지를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이 책은 저자가 선행 원리를 뒷부분까지 밀접히 한 꿰미에 연결을 시켜 나가는 내러티브라서, 최소한 책만 성실히 따라간 독자라면 이해를 못 할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비행기 구조란 게 무슨 장난도 아니고 당장 정비업무나 조종사 역할에 투입될 만큼 심화된 내용은 아닙니다. 요즘 "교양의 궁극은 과학"이란 말이 유행하듯, 이 책은 "비행기가 어떻게 뜨고 날며, 그 속이 어떻게 생겨먹었나?" 같은 상식선의 의문을 해결하기에 딱 알맞은 난이도와 구성입니다. 그 이상의 지식은 생업이 그쪽이 아닌 이상 알 필요는 없겠으며, 중등 교육 과정에서 자연과학 이수단위만 충실히 마친 분이라면 (드라마의 후편처럼) 더 알아야 할 결말을 좇는 기분으로 즐겁게 이해할 만한 내용이 담겼습니다.



엔진이 내는 힘은 과연 얼마 정도인가, 또 이 문제를 설명하면서 "순 추력"과 "총 추력"의 개념 차이까지 자세히 알려 줍니다. 물론 추력이라는 비행체(정확하게는 유체) 고유의 개념이 핵심이므로, 이 지식을 자동차 엔진에까지 유추 확장하는 건 좀 무리지만, 여튼 사이드로 자동차 엔진의 속성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상식이 는다고 할까요). 우리가 또 아주 소박하게, 헬기(프로펠러 동력 비행체)와 비행기의 장단점과 고유 영역은 어디서 극명히 갈리는지도, 그냥 남자들끼리 아는척하면서 단편 상식으로 떠드는 범위를 넘어, 체계적이고 원리적인(또 망라적인) 설명이 나와서 좋았습니다. 이로써, 어느 속도 이하/초과부터 헬기와 비행기가 선호되어야 하는지 결론도 명쾌해지고 말이죠.

예전에 어느 혁신가가 세그웨이라는 "탈것"을 개발하여, 자동차나 스쿠터의 장점만 가진 채 출퇴근 수단의 대안으로 만들겠다고 한 적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다 알듯 실패로 끝났지만, 그 핵심을 이루는 자이로스코프 원리는 여전히 많은 매니아들의 관심사이며 또한 엔지니어들의 영원한 화두죠. 이 책은 특히 비행기 계기판 구조 설명에서 이 자이로스코프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가르쳐 주는데, 자이로스코프 원리 일반에 대해 아주 생생한 응용사례라서 기존의 지식을 늘리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올바른 책은 개별 제품 설명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처럼 다른 영역의 이해와 학습에까지 많은 도움을 준다는 점, 나아가 삶의 지혜, 세상을 보는 눈 자체를 확장시킨다는 점도 다시 깨닫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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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미래의 자동차를 지배할 것인가 - 세계 최고 자동차 전문가가 말하는 새로운 모빌리티의 세계
페르디난트 두덴회퍼 지음, 김세나 옮김 / 미래의창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20여년 전만 해도 내 차를 소유한다는 것, 이른바 "마이 카, 혹은 오너드라이버" 상태로 진입한다는 게 일종의 신분 상승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까지 있었습니다(지금은 왠지 이런 말 자체가 촌스럽기도 하고 잘 쓰이지를 않습니다). 이제 자동차 소유는 너무나 당연한 옵션이 되어 버린 단계이기도 하고, (이 책에서도 자주 언급되거니와) 한국 같은 중견 국가에서 어느 정도는 자동차 소유가 포화단계, 혹은 임계 수위에 다다른 느낌이기도 합니다.

한편 젊은 세대, 경제활동 신규편입 그룹의 기대 소득 전망이 비관적으로 바뀐 데다, 공유경제를 지향하는 우버 등의 혁신 업체 진출, 자율주행 기제의 얼마 남지 않은 도래 등이 함께 작용하여, 과연 가까운 장래라면 자기 소유 자동차를 얼마나 유지할지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예측이 지배적입니다. 우리 느낌으로는 주거공간의 연장, "내 집, 내 사적 공간의 확장으로서의 애마"가 그리 쉽게 사라지게 방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SNS에서의 프라이버시 포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듯 새로운 세대는 "뭐하러 돈 들여 내 차를 갖지? 출근길은 그냥 여러 사람이 어울려 잠시 고생하면 그만이겠고." 정도로 가볍게 생각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솔직히 근래 나오는 책들 읽어 보면 대부분이 트렌드 예측을 이런 식으로 몰고 가는 게 사실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책들은 일반론이거나 거대 트렌드 관측에만 전념해 온 저자들의 솜씨지 자동차 전문가가 쓴 건 없다시피했거든요.


사정이 정말 이렇다면 자동차 산업의 미래는 매우 어두울 수밖에 없겠는데, 과연 그럴까요? 제법 두꺼운 이 책 전체 맥락을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와는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첫째 "인간이라는 종에게, 더 개선된, 더 쾌적한 모빌리티의 추구는 숙명이다." 둘째 따라서 자동차란 지금이나 미래에나 언제나 그 곁에 있어 줘야 하는 친구이다. 셋째 자동차 산업은 지금이나 미래에나 만족스러운 혁신에 성공할 것이며, 성장 가능성은 오히려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이 정도입니다. 극히 일부의 추세징표나 막연한 느낌만으로 절대 미래를 속단하지 말라는, 저자(독일인입니다)의 치밀한 분석과 단호한 충고를 담은 게 이 책입니다.

과거 고도성장기에도 물류 운반을(이는 이 책의 주제가 염두에 두듯 개인적, 여가 활용적 이동이 아닌, 주로 산업 물자의 이동이 목적이었죠) 주로 어떤 수단에 의존할 것인지 정책 설정을 두고, 고속도로 건설과 (기존) 철도 시설의 확충(복선화 등) 둘 사이에서 심한 갈등, 대립이 있었습니다. 정형화, 중앙집중화, 대규모화를 지향하는 철도 수단은 그러나 벌써 그 시점부터 시대에 뒤떨어졌었음을 우리는 지금 절실히 확인합니다. 이 책 역시, 혁신에 둔감하고, 라이프 스타일 트렌드에 반하고, 융통성이 부족한 철도 교통의 미래는 암울하게 잡습니다. 육상 교통의 유일한 경쟁자인 철도 산업의 전망이 이처럼 좋지 못하다면, 그 반사효과로도 자동차 산업은 더욱 활기를 얻는 게 당연합니다. (독자로서 개인적 생각이이라면 두 산업은 대체재보다는 보완재적 성격인데, 그렇다 해도 자동차 수요의 근원적 부분을 철도가 대신하지 못하리라는 점은 오히려 또 당연해지죠)

자동차 산업의 무한 질주에 대해 기존에 비관적이었던 또하나의 유력한 요소를 들라면, 환경 오염을 향한 심각한 공적 여론, 비판입니다. 이미 KTX 등 고속 전동차 운용이 주류가 된 한국에서도, 기차 하면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증기기관, 디젤기관형이 아직도 대뜸 떠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책에서는 "자동차를 제외한 모든 운송 수단은 이미 전기동력형으로 모두 바뀌었다"고 잘라 지적합니다. 희한하게도 구시대적(?) 디젤 엔진(환경 오염의 주범)에 여전히 의존하는 건 자동차뿐이라는 겁니다. 이런 점만 보면 친환경 트렌드에 역행하거나 혁신에 둔감한 건 오히려 자동차 섹터이며, 기업의 탐욕과 타성, 사악한 로비를 통한 현상 유지 음모 때문에 이 반환경적인 스탠스가 근본적으로 고쳐지질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앞으로 모든 분위기가 바뀔 것이고,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업계의 경직된 태도가 이미 심대한 전환점을 맞았다고 지적합니다. 이 책이 쓰여지기 몇 달 전 터진 폭스바겐 등의 소위 "디젤게이트"가 큰 계기를 마련했고, 그보다 몇 년 전 도요타의 대량 리콜 사태도 산업의 지평이 바뀌는 데 일정 모멘텀으로 작용했다는 거죠. 다시 환기하자면 저자는 (여태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의 본거지로 여겨진) 독일의 전문가인데, 특히 미국 진보 여론의 온상인 캘리포니아 같은 곳에서 운전자의 안전, 친환경 가치, 탄소 연료에 대한 반감 등을 선도적으로 끌어 온 업적을 높게 평가합니다. 이런 여론이 안착시킨 법제적 제약은 오히려 엔지니어들의 반성적 혁신을 폭발적으로 이끈 면마저 있다는 겁니다.

저자는 경력상 자신이 개인적으로 직접 겪은 사례를 놓고 흥미로운 실화를 하나 들려 줍니다. 대중들은 업무와 여가 선용에 기능상의 실질적인 필요, 혹은 주관적 만족과 달콤한 환상, 이 둘 중 어느 동기를 통해 자동차를 구매하는 편일까요? 밀착적 경험을 통해 만난 결론이니 더 단호할 수밖에 없지만, 저자의 견해는 주저없이 후자입니다. 포르셰 터보 911 모델의 마케팅과 장기 전략 파트에서 근무하며, 저자(가 속한 팀)는 종전 지나치게 운전자의 숙련 기술과 "힘"에만 의지해야 했던(다른 말로, 안전사고가 날 위험이 컸던. 명시적 설명은 책에 없으나 아마 모델이 안은 근원적 위험 때문에 제조사에선 소송 리스크를 인식했을 겁니다) 이 모델의 엔진파워를 희생하는 대신 보다 쉬워진 조작이 가능한 쪽으로 전략 수정을 해야할지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시실제로 그런 험한 조작을 도로 환경에서 쓸 데가 없어도, 운전자들은 잠재적, 혹은 환상의 기회만으로도 만족하며, 이는 대부분이 브랜드가 부여하는 주관적 착시라는 점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소비자들의 성향은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 영향을 줄까요? 여기에 대해서 저자는 다소 모호한, 혹은 엇갈리는 태도인 듯합니다. 우선 왜 자동차 산업이 미래에도 창창한 전망이냐 하면, 이런 모빌리티의 환상, 나만의 애마가 나를 다른 세계로 인도해 주리라는 벅찬 감동은 미래라고 해서 쉬이 개개인의 내면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저는 제발 이 예측이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반면, 도심 한복판의 근사하게 잘 빠진 자동차 전시장의 쇼윈도를 보고 몰려드는, 또 딜러의 현란한 말솜씨에 넘어가 감성적, 충동적으로 구매 결정을 내리는 시대는 (이 책 다른 파트에서 상술되듯) 또 이미 저물어간다는 거죠. 새로운 시대에는 소비자들이 인터넷에 명시된 성능과 디자인의 세부 사양을 보고 결정을 내리며, 알리바바나 아마존 등 새로이 등장한 플랫폼이 이런 식으로 대체 불가의 "구매 플랫폼"을 선점하고 확고히 장악하면, 자동차 메이커는 "되놈에게 돈 벌어다 주는 곰"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지적입니다. 마치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제조업 관계, 혹은 기민한 앱 개발자와 통신사 사이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프레임이지만, 솔직히 그 지경까지 갈 수도 있다는 예측에 대해선 개인적으로 반대합니다. 벤츠나 아우디 같은 브랜드 파워보다, 모바일 기기에서 홈으로 설정한 알리바바 등 리테일 벤더 환경의 익숙함과 신뢰도에 끌려 구매를 결정한다? 글쎄요.

"자동차 업계의 교황"이란 어마무시한 평가를 받는 저자답게, 특히 엔진과 마력의 상관관계, 이를 둘러싼 자동차산업 외적 요인의 추세적 영향 분석이 매우 쉬운 말로 잘 풀어져 있어 도움이 크게 되었습니다. 특히 근래의 추세는 친환경 지향의 규제와 맞물린 "연비 중시" 그리고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뜻밖의 행운으로 여겨졌을) 유가의 지속 하락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흐름이 맞물려 여러 흥미로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세에 적응해 가는 양상, 전략도 유럽이나 미국, 일본 업계가 다 제각각이라는 점을 저자는 흥미롭게 짚습니다.

우리 한국 소비자들도 다 동의하는 것처럼, (저자의 모국인) 독일 메이커들의 가장 큰 메리트는 단연 파워풀한 엔진에 있을 뿐 아니라, 컨셉이 분명히 잡혀 있어 소비자에게 구매욕을 부르는 디자인에 있습니다. 이러던 게 최근 연비 중시, 친환경 규제가 업계의 과제로 부각된 가운데, 적응을 서두르다 여태 없던 엄청난 실패로 드러난 게 "디젤게이트"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사태를 구조적 모순과 한계 탓에 필연적으로 불거진 것으로 파악합니다. 곧, 실무진과 현장 최전선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직근 상급자, 최상위 관리자에게 정직히 보고하는 조직 문화에 어떤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겼다고 보는 거죠. 구체적으로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대신 질소산화물(이른바 NOx, 즉 NO, NO2, .... 등) 분량이 늘어났는데 이 결과를 조작한 게 게이트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는 독일뿐 아니라, 그보다 몇 년 앞서 터져 세상을 시끄럽게 한 도요타 리콜(소위 리콜의 리콜) 사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상명하복 정서가 강한 일본 기업이 더 심각한 내연문제를 안고 있겠죠. 한때 안돈 시스템, 즉 하급자에게도 즉시 전 공정을 중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어 품질 향상을 꾀한 놀라운 경영 혁신으로 전 세계에 감동을 준 그들이지만, 공개된 장점은 후발 주자들이 또한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법이니 말입니다. 이처럼 조직의 투명성, 또 사회적 책임의 엄중한 추궁은 미국이 법제 마련에서 가장 잘 되어 있다고 저자는 칭찬합니다. "우리(이 책에서 "우리"는 모두 독일을 가리키지만, 우리 한국 독자들도 같은 시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죠)는 저들 미국이 시행하는, 가장 엄격한 징벌적 배상제 같은 걸 받아들여 기업의 체질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바람직한 규제는 오히려 혁신을 부른다" 이게 일관된 저자의 기조 중 하나입니다.

미국인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에 대해서도 저자는 마찬가지로 쓴소리를 내놓습니다. 한참 후에야 진상이 밝혀진 오토파일럿 시험 조치를 두고 이름입니다. 우리도 한때 네티즌들 사이에서 유행한 말처럼 "소비자가 무슨 베타테스터인 줄 아냐?"같은 따끔한 비판을, 테슬라의 경솔한 태도에 대해서 던집니다. 한편 전기차의 혁신에 따른 여러 부대 상황도 저자는 예측하는데, 정비소라든가 기존 디젤 엔진 구동 자동차가 무대에서 퇴장함에 따라 함께 없어질 여러 직업을 놓고 하는 말입니다(전기차나 자율주행차는 잔고장이 적다는 점 감안). 한편 스마트카(엔진 구동 방식과는 무관하게 또 대세가 될) 운행에 따르는 위험은 아무래도 소프트웨어 해킹 리스크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pc나 모바일 기기 펌웨어 업데이트를 그냥 집에서 하듯, 코드를 연결시키고 파일을 내려받아 적용한 후 재부팅하는 장면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기발한 표현을 많이 합니다. "지역이라는 코르셋을 입고 있는"이라든가(글로벌 코드에 빠르게 적응 못하는 기업 문화 비판) "사공은 많고 배는 적다"(중구난방식으로 충돌하는 미래전략 구상) 등 주로 자국 기업을 향한 비판이지만, 한국 역시 현기차 그룹의 실적과 성패에 수많은 이들이 생계를 의존하는 나라입니다. 이런 저자의 신랄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비판은, 독일 기업보다 기술력도 자본도 마케팅 노하우도, 확보한 자원도, 심지어 든든한 내수시장이나 능률적이고 청렴한 정부 시슼템까지, 모든 면에서 부족한 한국의 담당자들도 뼈를 깎는 마음으로 자성하며 경청해야 할 충고입니다. 자동차가 과연 미래에도 중추 산업일까? 저자는 주저없이 긍정의 답을 내놓습니다. 그렇다면 담대하고 지혜로운 인력들 역시, 아직도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이 지상(地上)의 모빌리티 비어클 산업에 자신의 미래를 헌신할 가치가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죠. 특히 정부 차원의 지원과 원대한 비전의 수립도 절실한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그저 답답한 마음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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