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좌전 - 상 - 전면개정판 춘추좌전
좌구명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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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전>은 본디 <춘추>와는 별개의 텍스트입니다. 이 책에도 저자 서문에서 잘 밝혀져 있듯, 5경(五經) 중 하나인 <춘추>는 공자의 저술 명의로 알려졌고, 그 <춘추>에 좌구명이란 사관이 주석을 단(정확하게는, "전[傳]을 썼다고 해야겠습니다만) 것이 바로 <춘추좌전>입니다. <춘추>가 너무도 소략한 기술이기 때문에, 학식 높고 사정에 정통한 전문가의 설명이 없이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신동준 선생님의 표현에 따르면, 거의 "메모"와도 같습니다). 꼭 <춘추>뿐 아니라, 모든 경전은 대개 간명한 기술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경"에 "전"이 따라붙는 건 거의 필수이기도 하므로, 이를 함께 일러 "경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경"과 "전"은 본디 별개의 존재 단위입니다.

역자 학오 신동준 선생께서는, 중국 유학의 역사를 놓고, 이 <춘추>에 "전(傳)"을 따로 부가하여 저술한 책들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좌전, 곡량전, 공양전 세 권 중, 어느 책이 당대 지식인, 관료, 지배층의 너른 지지를 입어 으뜸가는 위상을 확보했는지에 따라, 시대 정신을 규정할 수 있다고까지 규정하십니다. 한대에는 동중서의 영향 때문에 공양전과 곡량전이 널리 존숭되고 애독되었으나, 삼국시대와 남북조를 거치고, 이후 송대를 지나면서 성리학(도학)의 태두인 주희가 좌전의 우월성을 고고히 선언함에 따라, 좌전이 거의 독보적인 권위를 획득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춘추 하면 바로 좌전(만)을 떠올리고, "춘추"와 "좌전"을 아예 단일개념어로 인식하는 건 바로 이 영향이 근 1,800년 동안 면면히 이어진 까닭입니다.

이후 청나라가 말기적 부패 무능상을 노정하자 개신 유학자들이 "변법 자강"을 들고 나왔는데, 이들의 대표격인 캉유웨이 등이 특히 "공양전"에 표현된 자유로운 금문 기반의 개혁주의를 표방했습니다. 확실히 중국다운 것이, 그저 구체제를 개혁한다고 내세워도 될 것을, 구태여 고전에서 전거를 찾아 "공양전식 혁신"을 표방하는 그 태도입니다. 시원시원하고 역동적인 공양전, 곡량전에 비해, 좌전은 꼬장꼬장하고 보수적입니다. 이런 좌전인 만큼, 고전의 해독에 통달하고 심지어 현대 중국의 추세와 사정에까지 밝은 역자분이 나서서, 이 복잡다단한 격변기, G2의 분립 웅거기를 사는 우리 현대인에게 그 참뜻을 밝혀 줄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한길그레이트북스에서 상중하 3권 체제로 초판을 내었을 때 처음 신동준 박사님의 <좌전> 번역을 접했습니다. 그때는 G2라는 용어도 고안되거나 유행하지 않았고, 아시아의 허브 국가라든가 "퍼스트 무버"라는 개념도 낯설 무렵이었습니다. 그간 역자께서도 다양한 저술 활동을 통해 독자들과의 소통 폭을 넓히셨고, 동아시아의 정세를 보시는 시야도 훨씬 원대해진 면이 있습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이 다 이 10년만의 전면 개정판에 반영되었고, 저자의 견문도 폭 넓게 투영되어, 이를테면, 祭라는 글자가 일상으로 발음될 때에는 제사라는 "제"이지만, 인명 지명으로 쓰일 때는 반드시 "채"라는 발음이라는 점도, 극최근의 현지 답사를 통해 성조까지 분석하며 정확한 분별을 전개하십니다. 과연 전면개정판이란 명목에 값하는 알찬 장족의 진보입니다.


책의 편제나 편집, 장정도 이전판에 비해 더 마음에 듭니다. 일단 판형이 크고, 성격이 전혀 다른 시리즈와 한묶음으로 같은 디자인이었던 구판과 달리, "중국 3대 사서"라는 <국어>와 <전국책>, 이 두 권과 같은 장정을 취합니다. 세 권(이 <좌전>이 두 권이므로 총 네 권입니다)을 나란히 꽂으면 서재의 품격부터가 달라 보입니다. 여태 <좌전>만 타 출판사 간행이었는데, <국어>의 완역 출간 후 불과 몇 달만에 이렇게 <좌전>의 개역으로 시리즈가 완결을 보니 너무 좋습니다.

p84에 보면 역주(각주 35)를 통해, "조근(朝謹)은 알현을 뜻한다"고 명확히 서술합니다. 알현은 신하가 군주를 뵙는 것도 알현이지만, 역자는 "'조(朝)'는 봄에 제후가 천자를 찾음이요, '근(謹)'은 가을의 행사"라며 이 명사가 융합 관계의 합성어임도 친절히 가르쳐 주십니다. 책 서문에 자세히 나오듯, 고전이란 어떤 편자, 역자가 주를 달고 해설을 베푸느냐에 따라 그 이해도와 깊이가 독자에게 천차만별로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고전에서, 상세한 역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차량에 장착한 내비게이션과도 같습니다.

이 시기 다른 나라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겠으나, 노 왕실(상대가 된 제 왕실 역시)과 공경 가문에서 백성의 모범이 되어 질서와 예를 지키기는커녕, 입에 차마 담지도 못할 패륜을 자주 자행했습니다. 여튼 이 과정을 기술하며 여러 인명이 나오는데, "강(姜)"이 두 음절 후반부(전반부가 아닌)에 돌림자처럼 붙은 여러 사례를 두고 "여성에게 그 출신 성을 표시한다" 같은 친절한 설명을 해 주시네요.

<동주열국지> 같은 연의류를 읽은 독자들이라면 이 사서에 실린 여러 이야기들이 그리 낯설지 않겠습니다. 연의류는 많은 각색과 상상이 첨가되었고, 문체가 나긋나긋 이해가 쉽습니다. 반면 <춘추> 같은 고전은 문장이 엄격하고, 숨은 뜻이 깊죠. 역자 서문에도 잘 나와 있듯, "숨기는 듯 분명히 드러내며, 소상하되 비루하지 않고, 감싸는 듯하면서 추상같이 비평하니, 성인(공자를 가리킵니다)이 아니고서야 이런 책을 쓸 수 없다"는 평가가, 어떤 반론을 불허할 만큼 설득력을 지니는 게 이런 정사서, 혹은 경전입니다.

<춘추>는 경전인가 역사서인가? 청대 장학성은 놀랄 만한 사고의 변증법적 도약으로, 이른바 "육경개사(六經皆史)"설을 통해, 경과 사의 구분이 무의미함을 논증했습니다. 춘추 같은 양성적 성격의 텍스트뿐 아니라, 아예 시경, 서경, 주역 등의 시원적 경서도 모두 "역사"로 볼 수 있다는 탁견이지요. 학오께서도 이런 너른 시야와 통합적 관점에서 경전을 새기는 스탠스이기에, 어쩌면 이 책은 우리 현대 독자들에게, 유교 경전 수용과 학습에 있어 가장 표준적인 지침으로 기능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이 책은, 무엇보다 "한국적인 춘추좌전"을 표방합니다. 저본은 북경대 1999년판, 양백준(역시 북경대 교수였고, 대륙에서 고전 주석의 대가였지만 문혁 때 크게 고생한 분이죠)의 1983년판 주석서 등이지만, 조선 정조 때 출간된 <춘추좌씨전>을 수시로 참조하여, 불명확한 대목의 해석이나 한국적 관점을 반영하는 데에 크게 활용했다고 밝힙니다. 하권을 마저 읽고 나서, 그 정조시대판의 특장인 성씨 세계(世系)의 도표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이 책에서 잘 구현되었는지 리뷰에 그 소감을 표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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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 메이커스 - 세상을 사로잡은 히트작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데릭 톰슨 지음, 이은주 옮김, 송원섭 감수 / 21세기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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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원 어떻게 된 게 모든 밥벌이가, 결국 "히트작"을 내냐 못 내냐로 그 성공 여부가 결정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실 자신이 히트작을 내는 것과, 시대를 앞서갔든 혹은 다른 우연한 사정이 끼어들어 그 본연의 가치가 잘 알려지지 않았든 해서 당대에는 성공 못 했지만, 크리에이터 본인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엄청난 인정을 받는 것은, 창작 단계에 있어 그 비결이랄까 과정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한번 시드니 셸던이 누군지, 한국은 고사하고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모른다는 층이 대다수일 겁니다. 존 그리샴도 현재는 그 이름이 잊혀져 가는 중이라고 저는 봅니다. 이 작가들은 각각의 전성기에야, 시쳇말로 삼척동자들도 그 이름을 다 알 만큼 유명한 이들이었습니다. 후대에까지 그 작품의 완성도, 높은 평가가 길이길이 이어지기란, 어쩌면 동시대와의 짙은 교감을 희생해야 얻어지는 고달픈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 ㅎㅎ 우리는 그런 건 생각지도 않죠. 생전 히트작(어느 분야의 무엇이든) 하나만 내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고 목숨도 걸고 양심도 다 팔아넘길 판입니다.

목숨 내놓고 양심까지 팔아치우는 요란까지는 떨지 않고도, 히트작 하나를 어찌 근사하고도 우아하게 내놓을 방법은 없을까요? 그것도 생전에 수십 수백만의 불특정 다수 대중에게 환영과 사랑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책 한 권 읽고 그 답을 찾을 수야 없고, 그런 사행심 가득 섞인 기대를 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복권은 본디 벽촌의 무지렁이들이나 긁는 거죠). 그런데 이 책은 제법 구체적인 비결을 담고 있더군요. 혹시 마케팅 경영서 아니냐고 오인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 서평을 통해 그런 오해라도 좀 불식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생길 정도입니다.

이 책은 현명한 독자라면 정말 마케팅서로도 잘 소화할 수 있습니다. 기업의 컨셉 크리에이터라면 간담이 서늘해질만큼("아니, 아직 내가 이걸 모르고 있었다니") 날카로운 지적이 있는가 하면, 무엇보다 이 책을 가장 열심히 읽어야 할 층이 대중예술 분야 종사자들 아닐까 싶을 만큼, 기본적으로는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심도 있는 분석서입니다. 물론, 대중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다며 고독한 예술혼을 불태우는 이라면 이런 책에 관심 없겠지요.(그런 분들은 결국 혼자서 승부를 내어야 합니다)

이 책은 차라리, 고달프게 상사한테 오늘도 내일도 깨지는 샐러리맨들이 머리 쥐어뜯어가며 읽어야 하는 내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방송작가 (스크립터), 방송관련직업 종사자들이라면, 혹은 장차 지상파나 케이블 방송사 PD가 되고 싶어하는 어린 학생들이라면, 이 책이 아예 직접 타깃 그룹으로 삼았으므로, 이런 좋은 지침서를 놓쳐서야 또 너무도 아깝겠죠(지망자들이 그리 많지는 않겠습니다만). 책이 참 쉽게 쓰여졌으면서도 사례가 풍부하고 챕터 말미에는 묵직한 결론과 충고까지 담아, 저로서는 너무나 좋은 내용이 줄을 이어 눈에 들어오는 통에, 아 이거 드디어 인생 책 하나 만나는 건가 잠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습니다.

경매에서 수십억을 호가하는 명화는, 과연 세상 사람, 지구촌 70억 인구가 그 가치를 알아봐서 그 정도 가격이 매겨지는 걸까요? 전 단언컨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심미안은 나면서부터 정해지는 거고, 이 분야는 특히 교육 과정을 통해서도 별반 개선이 안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대개 저거 명화라며 떠드는 행태는, 마치 예술의 전당에서 어느 대목에서 박수를 쳐야 할지 몰라 주위 눈치만 살피다가 허둥지둥 남 따라 손을 놀리는 것처럼, 뭔지도 모르면서 남의 말을 주워섬기는 심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자는 까막눈이면서도 무슨 그림이나 볼 줄 아는 양 남의 말을 베껴 늘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단호히 말하는군요. "노출, 노출, 어디까지나 다중 앞에 잦은 노출을 이루는 작품이야말로, 명작이고 히트작이라며 높은 평가를 받을 가망이 커지는 녀석이다." 범속한 대중이 느끼는 건 고작 "익숙하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걸 본인은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스스로 정제된 미학적 판단이나 내리는 양, 그저 익숙하게 느끼는 걸 두고 "좋다"라며 자체 뻥튀기를 하는 거죠. 이런 반응이 모이고 모여 보십시오. "많은 이들이 인정한 명작"이 되는 겁니다. 많은 이들이 좋다고 하는 건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어? 그게 아닙니다. 대개는 노출의 힘이죠.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잦은 노출은 오히려 거부반응, 역겨움을 유발하기도 하죠. TV 모 행락 업계 사이트 광고라든가, 거대 포털에 매번 최상단에 게재되는 배너는 너무도 잦은 노출 때문에 오히려 시청자나 방문자들에게 항의를 받는 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잦은 노출만으로는 성공적인 전략이 아니며, "유창성"이란 중간다리를 반드시 거쳐야 하고, 이것이 바로 (다분히 기만적이지만) "친숙함과 공감"으로 이어지는 비결이라는 겁니다.

"만약 제품의 절대적 가치를 알 수 있다면 사람들은 아무도 브랜드에 의존하지 않는다." 제 생각에는 이 멋진 말이, 소비자 대중이 아니라, 그들에게 뭘 팔려고 드는 마케팅 책임자들이 명심해야 할 사항인 것 같습니다. 내공이 떨어지는 날품팔이 같은 셀러들이나, 얄팍한 속임수로 대중을 혹하게 만들려 들기 마련입니다. 진짜 크리에이터는 이처럼 대중의 얕은 심리를 꿰면서도, 컨텐츠 창조의 정도를 걷기 위해 애 쓰는 거죠. 저 말에 숨은 또 하나의 의미는, 대중 역시 브랜드의 휘광에 속고 마는 자신을 창피하게 여긴다는 겁니다. 모르니까 그거라도 의존해서 결정하겠다는 건데, 아예 이 사실조차 자각 못 하고 "남들 따라 사는 게 절대 진리"라고 우기는 무지렁이도 있습니다.

책에는 심지어 칸트도 인용됩니다. 허 참 나, 제가 읽으면서 저자님께 완전 넉아웃된 게, 아니 그 고전의 그 구절을 그런 뜻으로 이해하여 마케팅에다 적용할 수도 있었나 하는, 기발한 센스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었습니다. 어디서 이 철학 고전이 모듈화하냐 하면, 그의 저작 <판단력 비판>에서 저자는 여러 대목과 논지를 인용하네요. 사람은 본성적으로 무엇을 판단하고, 지각과 그 상위의 판단 기제를 분화하려 든다는 겁니다(그 판단이 옳고 그르고는 별개 문제). 이 과정에서, 사람은 단조로운 걸 싫어합니다. 또, 자신의 판단이 단조로워지는 것도 같이 싫어하며, 변화무쌍한 판단을 내리는 자신의 모습을 더 즐긴다는 거죠(실제로는 조삼모사처럼 어떤 패턴에 속아 이곳저곳을 왕복하는 것에 불과한데도). 하긴 이 주장도 메타적으로 한번 적용해 봅시다. 우리 중에 이런 결론을 누가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난 단순한 게 좋아. 어제도 오늘도 똑같은 것만 마시고 읽고 소비하지." 아무도 이런 무지렁이가 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무려 이걸 칸트가 주장했다고 하면 "거 과연 맞는 말씀일세!"라며 경탄하는 겁니다. 사실은 칸트의 입을 빌려 나온 자기 자신의 생각(ㅋㅋ)에 박수를 보내는 것뿐인데도요.

이 책을 보면 저기 조셉 캠벨의 원형, 원질신화 이론도 거명되는데, 이 저자님 평가가 뭐냐면 "탁월한 분석으로 이미 캠벨 자신이 한 원형이 되었다"입니다. 캠벨 이야기가 왜 나오냐면, (이 정도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가 왜 그토록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는지에 대해, 구조론적 분석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그 "히트 비결"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처럼 이 책은 아득한 지성의 원전, 원천과,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우리 시시한 독자들의) 당대 히트작들의 즐비한 성공 사례를 종횡무진 오가면서, 지적인 욕구와 생업에의 절실한 니즈를 동시에 만족시킵니다. 이미 독자로서 제 개인에게는 이 책이야말로 원형 중의 하나로 자리잡았네요.

우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이 다 알고 있는 결론을, 정제되고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저자에 더 열광하는지도 모릅니다. 너무나 낯선 컨셉은 그것이 옳건 그르건 무관하게, 대중 사이에서 배척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이런 책처럼, 다 알고 있는 내용을 핀셋으로 집어내듯 지적해 주되, 그 배후에 숨은 불편한 진실, 뭔가 감은 스치고 지나갔는데 확 잡아채질 못하고 느낌으로만 남은 것들, 요런 걸 이처럼 콕콕 짚어서 알려 주기란, 그저 후크송을 찍어내듯하는 얄팍한 속셈이나 재주만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결과물입니다. 히트 메이킹의 비결은 히트 메이커한테 들어야겠으니, 히트메이커스(란 제목을 단 도서)가 진짜 히트메이커(이 책을 읽고 각성한 독자 겸 타 분야 크리에이터)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낯선 걸 익숙하게 만들고, 익숙한 걸 낯설게도 만들어라."

"앞서나가되 딱 반 보만 앞서나가라." 결국은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감동도 너무 재미있을 때 감동이 밀려오는 거고, 마치 다른 감정인 양 우리가, 메타적으로 포장하기 좋아하는 우리가, 그리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남을 쉴 새 없이 재미있게 만드는 우리가 되기 위해, 이 책도 그런 소임을 충실히 다하겠다는 양 쉴새없이 재미있게 쓰여졌습니다. 애덤 그랜트도 격찬했고 미국에서 높은 판매부수를 기록했다는 이 책인데(그 사람 어느 책하고 표지도 닮은 것 같아요. 영어 원서까지), 거 그럴 만합니다. 하긴 히트 메이커를 만들어 주겠다며 자신은 히트작이 아니라면 그것도 곤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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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표지 : 2종 중 랜덤) - 작고도 빛나는 삶을 위한 111가지 일상탐구서
체로키 지음 / 웨일북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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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찮은 미물이라 해도 먹을것을 찾아 생리 요구를 채우고, 대사 작용을 이루며, 새끼를 번식시킨 다음 수명을 마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일종의 "추구, 탐험, 모색"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존재가 그 필멸의 아픔, 숙명을 극복하는 몸짓은,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는" 데서 가장 아름다운 결정(結晶)을 빚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나, 무정물이라고 해도, 실재 속에 지금 그 모습으로 어엿한 자신만의 공간을 차지하거나 특유의 향취를 뿜음은, 역시, 무엇인가를 갈구하고 분주히 노력하며, 마침내 뜻한 바를 찾은, 그 나름의 소중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퀘스트는 일종의 열쇠입니다." 저자 서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부분에 실린 대로, 우리는 우리 앞에 버티고 선 문을 두드리고, 마침내 그 문이 열리기를 갈구하는 과정으로 삶 전체를 다 채우다시피합니다. ".... 어떤 문은 좀처럼 열리지가 않아서, 우리를 주저앉게 만듭니다...(p004)" 지금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이들에게, 이 말은 "나 말고 다른 누구도 그 앞의 문이 야속하게 굳게 닫혔나 보구나." 같은 위안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타고난 각자의 처지가 다르고 삶의 편의가 차이날지언정, 한 과제가 해결되고 나면 또다른 고난도의 짐이 여전히 우리 어깨를 짓누르게 마련이죠. 퀘스트는 그래서, 열쇠를 찾아다니는 긴 여정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가 열쇠이기도 합니다. 결실과 소득의 농도, 볼륨에 못지 않게, 이를 좇고 찾아나서는 그 과정 자체가 이미 보배인 법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생이라는 게임 속에 들어왔습니다.(p005)" 누구라도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이는 없습니다. 무지렁이는 무지렁이대로, 귀한 몸은 귀한 몸대로, 임의대로 던져진 주사위에 따라 말이 되어 움직여지고, 때로는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 제 의지대로 꿈틀대기도 하는 법입니다. 이를 두고 실존주의자들은 "피투(披投)적 존재" 같은 어려운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냥 돌멩이처럼 굴러다니지만은 않고, 한번쯤은 내 뜻대로 날아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또 얼마나 갸륵합니까. 혹 절대의 섭리 같은 게 위에서 지켜보기라도 한다면 그 역시 다 기특히 여길 만한 분투입니다.

이 책 <Quest>는 다섯 개의 "퀘스트"로 이뤄졌습니다. 각각의 퀘스트는 "일상", "나", "타인", "일", "세계"인데, 어떻습니까? 저는 책을 넘겨 읽다가 이런 분류가 너무도 공감되고 좋아 보여서 잠시 그 느낌을 스틸사진처럼 간직하려고 눈을 감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일단 생리가 완전히 작동하는 순간(어디가 아프다거나 신체 일부가 장애가 아닌 이상), 어리면 어린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일상을 영위합니다. 그러다 그 일상에 다소라도의 여유가 생기면, 비로소 "나"를 자각하죠. "나"에 대한 감정, 인식이 어느 정도 자리를 찾으면, 그때부터는 "타인"에 대해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관계의 형성을 모색하는데, 이 단계가 성공적이면 "일"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려 듭니다. 나이도 지긋하게 먹고 제 일에서 소정의 성과, 인정을 얻고 받아 낸 다음에는, 비로소 "세계"에 대한 의미를 찾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또, 이게 "퀘스트"입니다. 그러니, 전체가 곧 부분이며, 건강하게 살아온(동작한) 부분이 다시 오롯한 전체를 이루는 셈 아니겠습니까? 정말 고대 체로키 족의 대현자가 행여나 있기라도 해서(ㅎㅎ), 어리석은 우리 후대인들을 깨우치러 정성들여 세공한 보석과도 같은 가르침이 아닐지요.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p005)" 우리의 추억과 기억은 단 것과 쓴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이 모두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불쾌하고 화나고 더러운 기억이 유독 오래가는 것일까요? 이 역시 가슴이 절절히 느끼고 기억의 중추에 넣은 요소이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이란 주어진 현재에 감사할 줄을 모르고, 분수에 넘는 걸 마구 바라기는 또 즐기는 동물인지라, 긍정보다는 부정의 기억이 존재를 괴롭히기가 일쑤인 법입니다. 그래서 현인들은 하나같이 "가능하면 긍정의 시선으로 세상과 자신을 보라"며 우리들을 도닥입니다. 그 긍정이 이성과 인식에 머무르지 않고, 진정 마음으로 느끼며 정직한 희열을 맞이한다면, 그 사람이 꼭 현명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최소한 "행복한 사람"임은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가슴으로 느끼는 인생은 그래서 무엇보다도 값지고 고귀한 것입니다.

일상이란, 소소하기에 그 가치를 모르고, 공기처럼 흔하고 당연하기에 감사를 받지 못합니다. <행복의 기원>에는 이런 말이 실려 있다고 하는군요.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이 책 p014)" 사실 행복, 아니면 그보다는 낮은 차원의 피상적 쾌락이라고 해도, 한번 강한 세기의 체험이 주어지면 그와 비슷한 만족이 재현되기만을 또 원하는 게 우리네 간사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감각의 쾌감에 아부하며(쾌감이 주인인 내게 아부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 에스컬레이트시켜 가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약물 중독자들이 파멸을 맞는 게 다 이런 경위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 존재를 참된 내용으로 채워나가는 건, "쎈 행복"이 아니라 "흔하고 잦으며 우리 곁에 소소하게 머무는 행복"인 것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 책 매 절의 끝마다, "가장 좁은 의미의 Quest"가 또 실려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p015에서는 우리 독자에게 미션을 주며, "추억 꺼내어 나누기", "함께 TV 보기" 등을 권한 후, 체크박스 안에 표시해 보라고 합니다. 이런 책에서 부여하는 미션은 대개 좀 부담스러운 것들이 많았다는 생각인데, 가족, 혹은 친구와 함께 TV 예능을 보며 낄낄거리거나, 과거의 재미진 사연 나누기라면 누구나 어디서건 실천에 옮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퀘스트라면 자다 덜 깬 눈과아직 둔하게 굳은 근육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죠. 어찌보면 모든 "퀘스트"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깨 힘 빼고 놀듯이 하나하나 채워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앞에 우뚝 완성되어 있는 겁니다. 안 열리는 문 애써 붙들고 씨름할 땐 죽을 지경이었겠지만 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하네요(이 책에서는 p036).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시간이지만, 우리 몸은 회복과 재생 과정에 몰두하며, 동시에 기억력과 창의력, 자신감을 키우는 작용을 한다." 이는 지혜의 금언이라기보다, 어떤 실천의 팁이라든가, 혹은 자계서식 실천 요령처럼 다가옵니다. 실제로 저는 예전에 러시아어 초급 강좌를 들을 때, 전날 힘들여 외운 단어, 숙어들이, 자고 일어나니 당연한 사항처럼 머리 속에 이미 정리된 걸 깨닫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회복과 재생도 그저 수면과 휴식에 덩달아 따라오는 기능은 아니며, 깨어 있는 동안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인드셋으로 과제에 힘껏 달려들었던 후에나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p278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낙관주의가 심장병의 예방과 치료에 핵심적 영향을 미친다." ㅎㅎ

"꽃들이 죽지 않도록 나는 그림을 그린다." 프리다 칼로의 말인데(이 책 p050), 파스칼은 이런 말을 한 게 기억납니다. "우주는 하찮은 인간이 상상도 못할 만큼 거대한 크기지만, 인간은 자신이 작다는 것도, 우주가 크다는 것도 알고 있으나, 우주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꽃이 아름다운 줄 평가하고, 아름다움을 알아 보는 인간이야말로 꽃보다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예술가는 그런 자연의 아름다움에 또다른 창조 행위로써 최상의 찬사를 바칩니다. 꽃도 그런 아름다움을 알아 봐 주는 인간이 없다면 한낱 무심한 진화의 우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고교 졸업 후, 물감과 파레트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정말 간단한 스케치라도 해 본 적 있습니까? 없다면 당신이나 저나 인생 참 삭막하게 산 겁니다. 전 고교 시절 다른 어떤 추억 못지 않게, 미술 선생님이 제게 다가와서, 벽에 간 균열을 애써 모사하는 걸 보고 "아! 재미있는 것!"하고 칭찬해 주신 말씀이 이상하게도 안 잊힙니다. 월요 전교조회에서 연단에 올라가 천여명이 올려다 보는 가운데 상 받은 체험보다도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생각이 데려다놓은 거리에 존재한다.
우리는 내일, 우리의 생각이 데려다놓은 거리에 존재할 것이다.
 - 제임스 앨런 (이 책 p092)

그러니 생각이 부실한 인간은, 생각이 멈춘 만큼 인생을 퇴보해서 사는 겁니다. 더 나아가,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정말 보드게임에서 주사위굴림 한 번마다 이리 기우뚱, 저리 휘청대는 일개 졸(卒)만도 못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은 폴 부르제의 것이었군요. 여튼, 매번 생각하는 대로 살 수야 없겠으나, 적어도 내가 지금 "생각하는 대로 사는지, 아니면 사는 대로 생각하는 중인지는" 분간이 가능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혹 후자의 굴레에 묶여 끌려가면서도, 과감히 질곡을 떨치고 사람으로서 정상 궤도에 복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장 심각한 건, 전자이면서도 후자인 양 무지렁이처럼 우습게 착각하는 꼴입니다. 하긴, 그걸 알면 이미 무지렁이가 아니죠.

네오, 너도 나처럼 곧 알게 될거야.
갈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를. (p118)

요거는 모르페우스가 한 말이죠.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Neo, sooner or later you're going to realize just as I did that there's a difference between knowing the path and walking the path.

길을 걷는 중이면 그 길이 뭔지 알게 될까요? 꼭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겉멋만 들어 아무 구절이나 이름표를 따서 쓰는 엉터리처럼, 길을 막상 걸으면서도 이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인지도 모른 채, 뇌가 할 일을 다리에 맡기고는 기계처럼 궤도를 도는 인간도 부지기수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길을 알기만 하고 정작 운동화를 신은 채 신나게 달려볼 생각은 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시 저 위 편저자의 말씀으로 돌아가봅시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인생이라는 퀘스트에서 진정 어떤 작은 의미라도 찾으려면, 우리는 머리와 가슴, 실존과 이상이 하나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때, "어둠은 불멸의 영혼, 그 전진을 가로막지 못하게(p212. 헬렌 켈러)"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삶은 초콜릿보다 더 달콤하다는 겁니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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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보혈의 능력 세계기독교고전 29
앤드류 머레이 지음, 원광연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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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있어 어떤 영성의 문제는, 말하는 사람의 문맥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텍스트를 읽을 때 정보의 이해와 취합에 중점을 둘 때도 있고, 줄글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박력, 영감, 호소력 등을 느껴 가며 읽을 때도 있습니다. 후자는 독서라기보다 모종의 감동적인 연설을 들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죠. 종교적 감화와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예컨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1963년 링컨 메모리얼에서 행한 "I have a dream." 같은 연설을 들어 보면 (그 유명한) Free at last 대목에서 연사의 고음이 파르르 떨리는 느낌이 듣는이에게 그대로 전해지며 전율이 느껴지는 체험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영감, 영성"이 가득 채워진 채 쓰여진 글을 읽을 때도 이와 같습니다.

신구교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 서적은 읽고 이해하기에 꽤 어려운 편입니다. 그나마 한국어로 옮겨진 책은 역자들의 노력, 즉 의역, 개념의 세분화와 재정립을 거치기 때문에 낫고, 영어로 쓰여졌거나 한 텍스트는 각각의 단어가 통상의 의미와는 너무도 다른 용례(usage)를 지니기 때문에 독자는 마치 바다에 빠져 표류하는 듯합니다. 하긴 신학뿐 아니라 법학, 영문학, 정치외교학 등 모든 분야의 jargon이 다 마찬가지이긴 합니다만.

그런데 정말 영감, 영성에 가득 휩싸인 저자가 쓴 책은, 설령 개별 어휘가 난해하거나 낯설망정 전체 맥락이 부분을 이끌고 가는 힘이 있기에, 독자의 교육 수준을 불문하고 결론적으로 얻는 감동의 레벨이 같아진다는 효과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 책 본문 중에도 그런 말이 나오지만, "... 어리석고 미개한 토인들에게 신앙을 전파한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라든가, 그런 시도를 한 선교사들에게 "파송받지 아니한 자" 등으로 매도하는 태도는, 회개와 구원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어찌 보면 반(反) 그리스도적 성향인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마치 이런 편견에 가득찬 이들을 깨우치고 교화하려는 모범을 보이려는 듯, 글 전체의 고유의 생동감과 경건함, 참된 각성의 교훈이 넘치는 이런 멋진 저작으로, 구원과 감화와 거듭남에 유-무식의 조건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킵니다. 마치 신라의 원효 대사가, 무지한 중생에게 "나무아미타불만 읊어도 극락 왕생할 수 있음"을 강론한 사실과도 흡사하죠. 연단에 서서(혹은 명저를 저술하여) 무리를 깨우치는 지도자의 덕성과 인품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말이나 글이 멋져서가 아니라, 그 사람됨됨이의 힘이 이만큼이나 강력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모든 감동의 원천이, 예수의 희생과 대속을 은총으로 깨닫는 그 순간에 있다고 하며, 그 상징이자 실천적 징표가 바로 "보혈"입니다.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설교자였던 앤드류 머레이(Murray. 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의 이 감동적인 강좌는, 본디 네덜란드인이었고, 당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가장 뚜렷한 지도자격 인물이었습니다. 본디 네덜란드어로 쓰였던 원본을 그의 동료 윌리엄 더글라스 목사가 영어로 옮겼고, 이 책은 그 영어 번역본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 텍스트이기에 1권, 2권 모두에 그 사정을 반영하는 서문이 실려 있는 것입니다. 영성과 감동에 충만한 텍스트는, 여러 차례 번역을 거친 후에도 여전히 그 박력이 남아 있음이 신묘할 뿐입니다.

"보혈"은 보배 보(寶), 피 혈(血) 자를 써서 보혈이라고 합니다. 보배로운 피라는 뜻인데, 구교 신앙 가진 분들은 "성혈"이란 말을 더 자주 접했겠는데, 깊이 들어가면 좀 다른 의미로 분화됩니다. Sanguis Pretiosissimus(가장 값비싼 피. 뒤에서부터 해석합니다)라고 라틴어로 개념화한 걸 각국어로 옮기면서, 영어로는 Precious Blood라고 부르게 됩니다. "성스럽다고 하면 될 것을 왜 물질적, 세속적 뉘앙스의 보배롭다는 말을 쓰는가?" 그에는 이유가 있고, 이 책이 간접적으로 그 의문을 상세히, 후련하게 풀어 주기도 합니다.

저자의 논지는 일단,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하는, 사탄의 권세가 만연한 곳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도 그런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언제나 어둠이 지상을 감싸 왔지만,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은 없었다." 이기지는 못해도 무력하고 죄 많은 인간들을 짓눌러 온 건 악이고 사탄입니다. 신은 그런 불쌍한 우리들에게, 자유의지와 회개를 통해 죄를 씻고 스스로의 힘으로 악을 이긴 다음 천국에 들 것을 말하는 것이겠고 말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영(靈)과 육(肉)으로 이뤄졌습니다. 이 중 본체는 영적인 부분이며, 육은 우리를 타락과 죄악으로 이끄는 악의 근원입니다.맨날 교회 가고 성당 다니면서 열심인 척 해도, 주일 예배나 미사를 마치고 나와서는 문란하고 추접스러운 색(色)의 행각에 빠진다거나, 그나마 목적도 달성 못 한 채 마음만 더럽히는 한심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성당 다니는 목적은 그저 돈 많이 벌게 해 주십시오, 대학 붙게 해 주십시오 같은 푸닥거리, 더러운 기복 신앙 욕구를 채우는 게 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마치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내려와 대중에게 불벼락을 내리고 갈라진 대지의 틈 사이에서 영원한 고통에 빠지게 했듯, 복은 고사하고 천벌이나 떨어져야 맞습니다. 신앙을 가졌다면서 이런 육적인 욕구에 끌려 입으로 몸으로 더 큰 죄를 짓는 자들에게, 앤드류 머레이는 "왜 예수가 지상까지 내려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처참한 고통과 굴욕을 겪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준열한 설교를 베풉니다. 이어 그는 교회가 영을 멀리하고 육의 방향으로 타락한 샛길을 걸음으로써 대대적인 개혁이 벌어졌던 지난 역사를 거론합니다.

"보혈"의 원어에서 Pretiosissimus가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저자 앤드류 머레이는 먼저 "사다"란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라고 합니다. 사는 건 값진 물건을 "대가를 치른 후" 내 것으로 만드는 행위를 말합니다. "치르다"는 말도, 꼭 물건값을 치른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라, 죗값을 치르다, 응보를 겪는다는 용례도 있습니다. 죄를 씻으려면 감옥에 가고, 매를 맞는 등의 고통만 겪는다고 끝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통회의 시간도 거쳐야 합니다.

로마인들이 무력을 앞세워 세상 곳곳을 정복하며 저지른 악행만 악행이 아닙니다. 유대인들 역시, 입으로 행위로 무수히 많은 죄를 짓고, 동족을 못살게 굴고, 율법이라는 미명을 앞세워 사실상 신성 모독을 범했습니다. 지상을 가득 채운 인간의 무리가 저지른 악행이 그 수위를 넘게 되자, 신은 드디어 자신의 "아들"을 보내되, 죄의 대가는 그 죄를 저지른 인간들이 아닌, 아들이 대신 치르게 함으로써 못난 인간들을 전율케 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전 훌륭한 스승들이 제자에게 회초리를 쥐어 주며, "내가 너희를 잘못 가르친 탓이니 나를 쳐라"고 했던 미담과도 맥이 닿는 것입니다. 예수의 육신이 그토록 큰 고통을 겪은 건, 자신이 모범을 보임으로써 "이처럼이나 육신이 아무 의미도 없는 짐덩어리에 지나지 않음"을 깨우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대속과 구원의 효과를 "피"로 압축한 것입니다. 이 "보혈"은, 뭇 인간의 죄를 씻되 뭇 인간(=죄인들)의 피가 아닌, 오히려 가장 죄없고 가장 귀한 아드님의 피로 죗값을 대신 치렀다는 뜻에서, "가장 값비싼 피"가 되는 것입니다. 이 뜻을 모르고 백날천날 교회, 성당에 가서 복을 빈들,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고 소금을 뿌리고 침을 뱉는 더 큰 죄를 지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책은 두 저서의 합본 1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제1권 "예수의 보혈의 능력"이요, 후반부는 제2권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1권의 서문은 앤드류 머레이의 아들 M E 머레이가 서문을 썼으며, 2권은 이 책 전체의 번역자인 더글라스 목사의 서문이 내용을 이끕니다. 예수의 피로 씻김을 받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통렬히 뉘우치는 영혼이라야, 선택받은 자로서 천국에 비로소 들 수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죄의식이 없고 모고해를 버릇처럼 일삼는 자는 지옥의 가장 깊은 불구덩이에 빠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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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 자기 성찰의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범립본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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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은 범립본의 편역서이며, 저자명의에 대해서도 여러 논란이 있기에 한마디로 정리하기가 아직은 어려운 상황입니다. 요즘 나오는 책들은 대개가 고려인 추적(秋適)의 명의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문헌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오히려 명나라 사람 범립본을 주(主) 저자로 내세우는데 여튼 이 입장이 현재 학계의 다수설입니다. 김원중 교수님이 옮긴 이 책도 같은 입장에 서 있습니다.

쉽게 요약하면 1) 범립본의 원저가 있고, 2) 조선에 수입된 후 이름 모를 어느 편집자가 그 원저 1)을 초략한 판본이 있으며 3) 2)에 내용을 좀 더 보강하고, 한국의 고사까지 첨부한 판본이 또 있습니다. 2)와 3)은 원본과는 많이 달라진 한국식 변형으로 볼 수 있는데, 여튼 우리 조상들 사이에 널리 읽히고 고전의 권위가 부여된 책은 3)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이 책도 3)을 저본으로 삼고 번역한 것입니다. 추적의 명의를 주장하는 분들은 1) 이전에 다른 어떤 책이 있었다는 전제에서 펴는 주장입니다. 추적의 저술이 사실이든 아니든, <명심보감>은 중국보다는 한국에서 특별한 의의와 의미를 더 갖게 된 텍스트가 된 셈이죠. 어느 게 진실이건, <명심보감>은 그보다 더 (훨씬) 앞선 시기에 출현한 여러 원전들의 편집본입니다. 비록 범립본이 저자 명의라고 해도, 이후 많은 변형을 거친 (이름만 같을 뿐인 -역자 김원중 교수님도 이런 표현을 쓰십니다) "명심보감"은 이미 우리 한국인의 고전이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습니다. 김 교수님의 이 책은 올해 9월에 나온 개정판이며, 그간 강단에서 가르치던 내용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간행되었다는 취지를 역자께서 서문에서 직접 밝히고 있습니다.

전체를 개관하면 유교 윤리가 완전히 사회 일반의 도그마로 자리한 후에 저술되고, 큰 지지를 얻은 교본이므로 당연히 공맹의 사상이 주종을 이룹니다. 그러나 직접 이 책을 펼쳐 보시면 알 수 있듯, 노장 사상의 여러 고전도 출전으로 다양히 쓰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명언의 서두에 "장자", "노자" 등으로 언명자를 분명히 밝히는 게 또 보통이니 더욱 의외죠. 노장 사상등 제자백가에 대해 마냥 백안시했으리라는 우리의 선입견을 깨고, 조상들은 "좋은 말씀이면 나의 윤리 준칙으로 삼기에 주저함이 없던" 열린 자세를 이미 지녔던 증거입니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본문의 엄정성에 대해서도 비교문헌적 교차검증을 통해, 분명한 오류라면 지적을 하는 태도입니다. 김원중 교수님은 각주를 통해, 예컨대 해당 문장의 출전으로 명시된 <장자> 등에는 정작 해당 구절이 안 보이고, 오히려 <논어>에 그 비슷한 취지를 담은 문장이 보인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하십니다. 서양의 경우, 자신의 주장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권위자의 명의를 거짓으로 갖다 쓰는 관행이 고대, 중세에 널리 돌기는 했으나, 그 반대로, 사회에서 이미 중추적 훈육의 원리로 위상을 굳힌 유가의 출전을 굳이 바꾼 후, 오히려 이단시되던 비주류의 명의를 내세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뿐더러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안 됩니다. 아마도 도가의 입장 중 일부를 유가식으로 교차 변용하던 태도의 흔적(이 역시, 고대부터 두 유파는 치열한 대립 못지 않게 상호 인정과 교류를 이뤘다는 점을 상기해야겠죠)이 아닐까 생각도 해 봤습니다.

<명심보감>은 워낙 고전이다 보니 저희 때에는 국어 교과서에 그 언해본이 일부 실리기도 했습니다. 다만 <명심보감>은 어디까지나 편집서적이다 보니, 그 출전은 반드시 가장 상위의 출전을 대는 게 보통이었죠. 수신서의 핵심이라 불러 마땅한 "효행"에 대해, 이 책은 <논어>에서 공자님의 여러 말씀을 인용합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멀리 놀러가지 않고, 반드시 가는 방향이 (정해져) 있어야만 한다.

"유(遊)필유방"이란 말로도 요약되는 이 가르침은 각주에 나온 대로 <논어> 이인편이 그 출전입니다. 역자께서는 이 가르침이 전제하는 상황에 대해, "자식이 돌아오지 않아 문지방에 기대어 기다리는 부모님"을 들고 있습니다. 본문만 보면 알쏭달쏭해도, 이렇게 권위자의 해설을 곁들여 들으면 바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믿을 수 있는 번역본은 이처럼 든든한 스승과 같습니다.

옛 사람들의 훈육에 있어 또 하나 좋은 점은, 글공부를 하면서 동시에 인격 수양이 되는 텍스트 구조를 갖췄다는 것입니다. 글공부를 하는 교재에 "학문"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 않으면 또 이상합니다. 송나라 황제들은 문치주의를 극구 강조했기에, 입만 떼었다 하면 "공부해서 출세하라"는 다짐입니다. 4차 산업혁명을 맞는 작금에도, 사람이 공부는 하지 않은 채 하늘에서 떨어진 창의력에만 기대어 일을 해 나갈 수는 없습니다. 텍스트의 성격과 범위가 달라졌을 뿐, 공부하고 수신해야 한다는 근본의 이치가 바뀔 리는 없죠.

"배운 사람은 벼와 같고, 배우지 않은 사람은 잡초와 같다.
벼와 같은 사람이여, 나라의 큰 양식이며 세상의 보배이도다.
잡초 같은 사람이여, 밭 가는 사람이 싫어하고 김매는 사람이 귀찮아하는구나.
뒷날에 담을 마주하듯 뉘우쳐도 이미 늦은 몸이로다."

못 배운 자가 제 열등감을 해소하려 남의 말을 끊임없이 베끼고 목청 높여 읊어 대어도, 어제 한 말이 다르고 오늘 하는 말이 표변하니 까마귀가 경우에 맞지 않게 울어대는 양 사람의 실소를 자아낼 뿐입니다. 사람이 열등감이 사무치면 정신병으로 바뀝니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떠드는지도 모른 채 구호를 떠드니, 날이 거듭할수록 정신이 혼미해지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때를 놓친 자의 설움과 한계는 이처럼 뿌리깊은 것입니다. 그를 넘어, 얼굴과 용모도 썩은 잡초처럼 변하니 무지렁이처럼 처박힌 벽지 밖에서는 아무도 반기지 않는 촌구석 흉물의 처량함이 이와 같습니다.

편집본이라고는 하나 모든 문장이 재인용된 것은 아니며, 아마도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을 뿐 저술 당시에는 원저가 분명 있었겠으나 여튼 현대인에겐 출전이 미상인 대목도 꽤 됩니다. 에컨대 다음과 같은 <省心>편의 한 구절입니다.

自信者人亦信之 吳越皆兄弟
自疑者人亦疑之 身外皆適國

이 구절은 대체 어느 책이 가장 앞선 시기에 실었는지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역자 김원중 교수님은 <열자>의 "의심암귀"를 유사한 문맥으로 거론하시긴 합니다. 도끼가 사라졌을 때는 이웃이 도둑처럼 보이더니, 막상 찾고나자 그저 잘 알던 얼굴 이상이 아니었다는 교훈이죠. 도끼가 만약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땠겠습니까? 재물이 행방을 감추고 아니고는 그저 우연한 사정에 지나지 않지만, 제 마음 속에 확신이 없어 모든 사정에 대해 근거 없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게 체질이 된 인간은, 이미 정신병 직전까지 갔다고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도끼가 돌아와도 아마 "내가 전에 쓰던 진본이 아닌, 손잡이에 독극물이 묻은 가짜"라며 제 속을 끓일 것입니다.

윗 줄에서 "인"은 물론 타인을 뜻합니다. 저걸 간단한 문장으로 고치면 自信者, 亦信人 으로 바꿀 수 있죠. 말의 맛을 살리기 위해, 목적어를 앞으로 빼고 뒤에는 일종의 가목적어를 형식상 보충해 넣은 것입니다. 이처럼 한문 고전 공부는 그 깊은 속뜻을 새김과 아울러, 모든 문장의 격조 높은 공통 구조를 분석하는 재미가 쏠쏠하죠. 이래서 권위 있는 역자의 책은 항상 원문을 같이 싣는 게 원칙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한자 원문은 작은 폰트로 처리했는데, 일단 뜻만 익히고 제일독을 마치려는 독자의 편의를 위한 센스라서 좋았습니다. 이 텍스트가 이미 익숙한 분들은 대뜸 원문부터 읽어나가셔도 되겠고 말이죠.

"어진 사람이 재물이 많으면 지조를 더럽히게 되고,
어리석은 자가 재물이 많으면 허물을 더하게 된다."

이는 한나라 때 사람 疎廣의 말입니다. 결국 재물은 누구 손에도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뜻인데,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말 "부자가 천국... 낙타가 바늘구멍... "을 연상케도 합니다. 천품이 어리석은 자는 그 가진 재물을 전부 자신의 허물을 덮는 데 낭비하고, 돈이 잘못 가르친 나쁜 버릇을 반성할 계기조차 마련하지 않아 구제불능으로 어리석어진다는 뜻도 됩니다. 가장 나쁜 건 돈도 없고 얼굴에 잡초만 무성히 늘려가며 어리석음을 폭력적으로 가중시키는 벽촌의 무지렁이 인생입니다. 돈이나 있으면 그나마 구제의 희미한 가능성이나 마련할 텐데 그조차도 여건이 안 되니, 졸부의 선심에나 애타는 기대를 걸 뿐인 가련한 신세이죠.

성심 하권에 보면 염계 선생, 즉 주돈이의 말이 나옵니다. "교언영색"이란 주지하듯 공자의 말씀인데, 주돈이는 이를 다소 변형한 언명으로 후학들을 깨우칩니다.

"소박한 자는 말이 없으며 편안하다."

재능과 수련은 부족하고 남 앞에 그 못난 꼴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가득한 늙은 자는, 남이 듣고 싶어하지도 않는 비천한 신상의 넋두리를 일삼는 법입니다. 김원중 교수님께선 원문의 "拙者"를 옮김에 있어, 대체로 "拙"이 나쁜 뜻으로만 쓰이는 관행을 감안하여 "소박한 자"로 번역했다고 역주에서 밝힙니다. 이처럼 고전 한문의 용례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번역 과정에 베푸신 마음씀이 돋보입니다.

책의 후반부에는 우리나라의 고전 <삼국유사> 등에서 간추려 넣은 "손순매아"라든가, 바보 온달의 고사 등이 실려 있습니다. 대단원은 그 유명한 주희의 권학문입니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가 어렵다.

이는 마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던 히포크라테스의 명언을 연상케도 합니다. 여기서 예술은 기예를 가리키는 말로서, 그 숨은 뜻을 살피자면 저 주희의 언명과 다를 바가 별로 없습니다. 어쩌면, 추적이 되었든 범립본이 되었든 인생 궁극의 가르침을 담은 명저 고전은 이처럼이나 천 년을 헤아리며 후대인에게 전하고, 이를 지은 분이든 애독하는 후학이든 백 년도 되지 못할 짧은 인생을, 미혹됨과 미망, 터무니없는 욕심 때문에 더럽히고 마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깊어가는 가을, 고대의 현인들께서 다정히 일러 주는 그윽한 가르침과 함께 알찬 시간을 보내게 도와 준 고마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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