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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평점 :
사랑이
사람도 아니고, 무슨 생각이나 의지나 생리 작용이나 번식 욕구 같은 게 있어서, 그 생멸 주기에 대고 "생애"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가? 누가 이렇게 여긴다면 그거 (좋게 말해 줘서) 아주 소박한 생각일 뿐 아니라, 프랑스 등 서유럽에서
얼마나 많은 추상적 개념들이 "의인화"하여 치열한 인문 담론의 핵심을 이루는지 캄캄히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기까지 합니다. 작가나
저자들이 그런 표현을 쓰는 건 독자로서 익숙해져야 할 분위기일 뿐 아니라 자기(독자) 사유의 내실을 다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누구라도)아주 순진해진 채로 이렇게 되물어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 정말 유령처럼 허공을
떠돌다가, 뭔가 엮일 듯 말듯 관계의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 맴도는 두 남녀(혹은 셋 이상)의 마음과 몸 속으로 쏙 들어오기라도
하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사랑이 한번 끼어든 사람과 관계가 어쩜 그리도 전과 쌩판 다르게 바뀔 수 있을까?"

이승우
선생님의 문학적 개성을 두고 어떤 평론가는 "요설의 미학"으로 지적한 적 있습니다. 대개 요설이란 독설이나 궤변과도 통해서,
사람이 말을 갖고 부리는 게 아니라 말이 사람의 혀를 조종하는, 악의, 기만, 조롱, 정복 등 불순한 목적과 통하기도 합니다. 꼭
그 정도까진 아니라도,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사르트르 등 천재적 지능과 사유의 근성 때문에 실제 인생에서 고통 받은 이들의
상흔과도 연결되는 게 이 요설입니다. 헌데 이승우 선생의 요설은 이런 예들과는 대척점을 이룬다 할 만큼 반대의 빛깔입니다. 본래
한국 산문에서 이런 요설을 즐겨 구사하는 분이 잘 없기도 하거니와, 이승우식 요설은 오만한 셰프가 투박한 서민의 혀를 길들이기라도
하려는 듯 "이데아의 미각"을 가혹하게 상기시키려는 과시적 조련의 수단이 아니고, 그와는 정반대로 "이 구수한 된장국도 알고
보면 분자 단위로 쪼개 볼 여지가 있다니께?" 같은 훈훈한 휴머니즘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구실을 합니다. 마치, 왕릉 근처에서
선희한테 "믿음이 안 가게 생겼어도 내 말을 진즉 들었어야제!"를 말하는듯한 노인(이 작품 속의 단역 캐릭터 중 한 명)의
미소처럼 말입니다. 요설 끝에 따뜻한 공감과 격려가 기다리고 있다니 그 자체가 역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이승우
선생의 작품 속에서 만나는 건 또 언제나 그런 풍경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추상명사와 모호한 개념을 앞세워 말을 위한 말을 그저 지적 우월함의 과시 방편으로 삼아 공해처럼 지어낼 때, 이승우
작가님은 정말로 궁금해서 독자의 손을 잡고 "저 멀리 뭐가 있는지 끝까지 가서 확인해 보자는 듯" 된장국 같은 요설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따라가는 독자도 (잠시 헤맬망정) 그의 권유와 지도가 어렵게 느껴지질 않습니다. 이런 분, 이래 왔던 분이 이번엔
"사랑"을 주어로, 주제로 삼아 장편을 내놓으셨으니 이거 안 펼쳐 볼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처럼 요설도 많고 철학도 끼어들지만, 또
언제나처럼 "캬 맞어."하는 공감과 뿌듯한 각성으로 끝납니다.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자면 결국 화해와 포용, 제 갈 길에로의
복귀가 이뤄지는 익숙하고 푸근한 결말입니다. 삼각관계라고 해도 칙칙하거나 저속한(다른 작품에서 이런 설정으로 시작하는 건
있습니다만) 느낌이 전혀 안 듭니다. 결국은 누구나 나름 뭔가를 얻고 무대에서 퇴장합니다(심지어 우리 독자들까지).
등장
인물은 몇 안 되고, 그의 전작들에서 주로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나이는 다들 먹은 축들이고, 어쩜 근간 중에는 좀 젊은 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장님" 영석 씨는 사십을 좀 넘긴 듯하고,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이 보이는 선희 씨는 그보다 십 년 가까이
연하이며, 항상 작가님의 작품에 한 자락 걸치는, 뭔가 페르소나 같은 주인공이 또 있어 줘야 하는데 이 장편에서는 그게 형배
씨입니다. 나이는 선희보다 두 살 위라고 하네요. 그리고 이들과는 좀 다른 세상에 사는 연애도사, 연애지상주의자 준호, 역시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또 특히나 다른 세상에 사는 민영 정도가 주요 캐릭터들이며, 그 외 완전 단역 같지만 의미심장한 기능을
맡은, 한복집 사장님인 형배의 모친, 그리고 형배의 생부 등이 전부겠습니다. (아니, 그 생부와 눈이 맞아 가정을 파탄 낸, 사진
속에서만 등장하는 묘령의 여인이 또 있네요)
사람이
사랑에 빠진다는 게 과연 맞는 말인가? 사랑이 무슨 구덩이라도 되어서 거기 빠지기나 한단 소린가? 오히려, 사랑이 사람에
빠져들어온다고 해야 맞지 않은가? 저도 아주 예전 학교에서 fall in love (with)란 숙어를 배울 때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요. 묘하게도 이 표현은 뒤에 "함께"란 뜻의 전치사 with가 같이 딸려 옵니다. 이 책 중에 인용되는 유명한 카프카의
말처럼, "그녀와 함께도 살 수 없지만 그녀 없이도 살 수 없다" 같은 모순당착을 가능하게 만드는 게 사랑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이 작품의 핵심 토픽 중 하나는 "자가당착, 역설, 모순"이기도 한데요. 예를 들어 감옥에서 나가고 싶지만 동시에 감옥 안에
안착하고 싶은 게 죄수의 심리라는 말도 있고, 사랑을 갈구하지만 동시에 "사랑에 대한 배신(자신이 시원찮게 사랑을 하면 그건
사랑에 대한 모독이란 의미에서)"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멀리하게 된다는 갈등, 나아가 사랑하는
이(상대방)의 배신을 믿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그간 불안불안 여겨온 고뇌에 대한 보상, 과연 내 의심이 근거가 있었군 같은 분노에
대한 정당화 때문에 맹렬히 질투, 격분으로 자신을 빠져 들게 하는 결의, 이 모두가 모순이고 아이러니인데,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이런 양가적 감정의 함정 속에서 허덕입니다(일단은).
다만
저는 마지막 것, 즉 믿고 싶지 않은 배신을 보상심리 때문에 믿어버린다는 심리는, 특히 영석처럼 결핍의 생을 살아온 이들에게만
고유한 일종의 병리가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간 혼자 속 썩은 내 자신이 부끄러웠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게 됐네!"라며 분노를 과연 폭발시킬까요? 어설픈 한 마디 해명이라도 상대가 해 주면 그 실낱 같은 가능성을 믿어버리고 마는
게, 사랑에 빠진, 아니 사랑이 빠진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선택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화자는 이른바 언어의 태(態. voice. 수동태/능동태 하는 것), 상(相. aspect. 주체와 객체의 관계) 같은 그래머
이슈를 (어려운 말 쓰지 않고) 여러 번 다룹니다. 앞에서 "사랑에 빠지냐, 아니면 사람이 빠지냐?"도 그렇고, 꿈은 꾸는(능동)
게 아니라 꾸어진다는 말씀도 그렇고(예리하지 않습니까?), 이런 학설 대로라면 우리말 뿐 아니라 영어 문법도 그 기초부터 다시
재점검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한 마디 거들자면 결코 능동이 아닌 걸 능동처럼 표현하는 인간의 언어적 기만에는 그를 만회할
만한 강렬한 무의식이 근본 동인이었다고 둘러대는 게 또 가능하죠!
태와
상의 이슈를 끌어대며 화자가 들려 주는 사색, 요설 중 가장 근사한 건, "사랑은 강요지만 주체도 목적도 없고(원 나!) 객체만
존재하는 그런 강요이다."였습니다. 사실 주체가 있긴 한데 운명, 숙명(사랑이 세팅한)에 끌려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속에 쏙 들어온 "사랑"이고, 이 역시 화자가 처음에 깔아 둔(가르쳐 준) 전제 중 하나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구걸은
목적이 있어 그 목적이 달성되면 끝나지만, 구걸 그 자체가 목적일 땐 중단될 수가 없다." 마치 갈릴레오의 사고 실험에서처럼,
방해물이나 다른 힘의 작용이 없다면 영구히 지속되는 관성의 마력을 보는 것 같군요.
끝없는
역설, 역설을 가능하게(비록 비가시적 세계 속이지만) 만드는 건, 역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그
반물질(antimatter)로서 악(惡)도 간혹 (먼 거리에서나마) 동반하는데, 이 악 역시 인간의 (어설픈) 의지의 수단으로
쓰는 게 아니라, 주객이 전도되어 오히려 인간의 의지를 수단으로 부립니다. 화자는 <오셀로>의 이아고를 들며, 상관
오셀로가 자신의 아내를 건드리지 않았음을 그 교활한 이아고가 모를 리 없었음에도, 의심을 억지로 지어내면서까지 그 장대한(...)
모함의 서사시를 꾸려 가는 과정을 두고, 모든 것을 수단으로 부리는 "악의 능동성"을 지적합니다.
안티테제로서
악이 이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그만큼 테제로서의 사랑이 온갖 기적(앞서 말한 모든 역설 역시 부분적으로는 다
기적입니다)을 낳을 만큼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게 마련이니요. 이런 사랑은 그럼 보편적 원형이 따로
존재하는 건가, 아니면 역시 개개인에 따라 다른 개성의 사랑, 사랑, 사랑이 자기만의 색깔을 뽐내며 인력과 척력의 장난 속에
연분을 맺기도 하고 흐트리기도 하는 건가. 형배 씨는 보편을 믿고, 도사님인 준호 씨는 자신의 실전 경험에 비춰 그런 게 있을 리
없다며, 어설픈 스토이즘으로 자신의 비겁을 위장하지 말라며, "주면 그저 먹으면 될 뿐"이라며 자신의 도를 설파합니다. 모든
여자는 그녀만의 장점이 다 있는 거라고, 내가 사랑과 연애의 달인인 건 그런 저마다의 매력을 기막히게 알아 봐 주는 그 각별한
미각 덕분이라고, 아주 흡인력 있게 형배(와 독자)를 향해 썰을 풀어댑니다. 이런 건 제가 아는 어느 바람둥이의 지론과도 통해서
동의를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좋아?" "모든 여자. 이 여자는 이래서 이쁘고 저 여자는 저래서 이뻐." 연애와
사랑에 서툰 자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뭐 하나 고정된 이상형을 머리와 가슴에 박아 둔다는 겁니다. "삶(생명, 곧 사랑)"이 가장
싫어하는 게, 죽은 듯 고정된 융통성 없음입니다.
준호
씨의 지론에 따르더라도, 사랑이 보편자인지 개별태인지에 대한 해답은 사실 안 나오는 셈입니다. 보편자가 개체에 침투하면, 그
개체의 개성에 맞게 다른 방식(매력)으로 작용하는지 또 알게 뭐겠습니까? 여튼 이런 준호 씨도, 민영을 만나고부턴 사람이 달라지고
확고한 신념, 라이프스타일부터가 변합니다. 진짜 사랑에 한 방 맞은 후로는, 인생의 무덤이라 여겨 온 "결혼"을 더 이상
마다하지 않습니다. 민영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녀와 키(라고 쓰지만 읽기는 섹)스를 하기 위해서, 이제 그는 지론과 자신까지를
배반하며 결혼을 서두릅니다. 쿠피도 신, 벗고 다니며 화살을 날려 대는 꼬마가 이처럼이나 짖궂습니다.

이
소설에서 정말 긴 생애를 마치는 모습이 드러나는 인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형배 씨의 생부입니다. 누구 눈에도 무책임하게 보이며
"언젠가는 너도 나를 이해하게 될.."같은 더 무책임하고 철없는 한 마디 때문에 더 큰 짜증을 유발하는, 인생 한번 거하게 헛산
표본으로 보이는 이분의 장례식에, 여태 다른 공간 먼 무대에서 각자의 사랑으로 앓아 대던 모든 이들이 마침내 모입니다.
끓어오르던 감정도 한때고 이제는 무덤덤하게, 우정 비슷한("증명이 필요 없다"는!) 느낌으로 그 눈을 바로 볼 수 있는, "형배면
다야? 선배면 다냐고!(전 이 대사가 참 우스웠던 게, "형배"란 존재가 선희에게 얼마나 큰 존경과 애정으로 자리했[그녀에게
'다'일 수도 있었다는 뜻]는지, 말장난 말고도 여실히 보여 주는 한 마디였기 때문이죠)"의 두 커플은 다시 담담히, 그러나
건전하게 조우합니다. 가장 격렬한 반대 증거(아무렇게나 하고 만남)를 보고도 배신의 확증이라며 익숙한 버림 받음의 슬픈
세레모니(이거 다 자기 말대로 구걸이고 고백입니다. 우리 독자들은 다 알아챘죠)를 (추접하게) 펼치던 징징이 영석도 다정하게
넥타이를 매어 주는 그녀 곁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치 망자의 일생 동안 그 몸에 들려 사련(邪戀)을 부추기던 이
사랑이란 녀석이, 이제 다시 엉뚱하게도 준호로 숙주를 옮겨, 반짝이는 눈빛을 선희로 향하게 하는군요.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죠?" 낯섦과 설렘이야말로 사랑의 뚜렷한 징후라고 이미 화자는 복선을 저 앞에서 깔았습니다(아는 사람도 다시 낯설어져야 사랑이
싹튼다며). 생애를 마친 듯 다시 한 생애를 바로 시작하는, 이 녀석의 난잡한 수작이 또 시작되었군요. 위력이 상당히 강하니 모두
조심들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