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 부국강병, 변법, 혁명의 파노라마
신동준 지음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전 중국 근대사의 거인 증국번의 생을 다룬 도서를 읽었습니다만 이 격동기를 산 여러 뛰어난 인물들을 한 권에 묶어 소개한 책이 혹시 없을까 해서 찾아보니 마침 신동준 박사님이 쓴 대중서가 한 권 보이더군요. 책에는 여덟 명의 인물이 다뤄졌는데, 활동 시기가 비슷하기도 하고 서로 얽혀들거나 치열하게 대립한 국면도 선명하기 때문에 책 한 권에 과연 다 커버될 만하다 싶었습니다. 새삼 책 표지로 돌아가 보니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가 제목입니다. 이 시기는 과연 "인물들의 삶"이 역사 전체로 그대로 수놓아지고 전사, 마이그레이션된 시기가 아닐까, 인물로 읽어야 제대로 읽혀지는 시기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임칙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편전쟁 당시 영국상인들의 파렴치한 물품을 모아 소각한, 강직한 청백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대세를 생각 않고 무모한 결단,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닫아 소탐대실하는 "그릇 작은 원칙주의자"를 비판도 하는데, 임칙서는 오히려 저 사건 때문에 그 원대한 비전과 현명한 통찰력, 박학다식하고 유연한 지성, 인품이 과소평가된 경우입니다. 책은 해당 사건에 대해, 그가 다른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한 후, 피치 못해 내린 정치적 결단이며, 참으로 매력적인 그의 자질과 개성에 대해 논급합니다. 만주족이 퇴조하고 한족 정통 지식인이 부상한 건 그의 현명한 처신이 유발한 결과였습니다. 구한말 이 땅에도 큰 반향을 부른 <해국도지>의 저자 위원도 그의 후배이며, 공양학의 태두 캉유웨이의 제자입니다.

증국번은 며칠 전 리뷰(와 책)에서도 자세히 언급된 주제 인물이고요. 신동준 저자께서는 오늘날 공사("회사"의 중국어)의 형태가, 이 증국번의 관독상판과 매우 흡사하다고 주장합니다. 증국번의, 시대를 앞서간 혜안에 대해서는 감탄하나, 물경 백 오십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이런 반관반민 형태가 지배적인 중국의 신뢰 부재, 자율성 결여의 풍토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이 교차하네요.

증국번이 엄청난 지주 가문에서 나고 성장한 것과 달리, 좌종당은 아주 어려운 유년기를 보낸 인생이었습니다. 이 어려운 시절 서세동점에 대항해 유일하게 국위 선양에 성공한 게 이 좌종당의 군사 원정이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죠. 야쿱 벡의 위구르 배후에는 특히 러시아가 도사렸는데, 여튼 이런 간접 대결에서 청이 국가 해체 움직임에 쐐기를 박았기에 오늘날과 같은 영토의 판도가 유지되었던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약, 이때 좌종당과 일합을 겨룬 야쿱 벡이 보다 유연한 자세로 동족 피지배층(동 투르키스탄 인들)을 대했다면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적 단합을 이뤄, 오늘날처럼 핍박 받는 소수 민족의 설움을 겪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과분의 위기라는 건 마치 오이가 나눠지듯 땅이 쪼개져 나라가 망하는 걸 뜻하기도 합니다. 유명한 풍자 카툰이 있는데 아래 이미지를 참조하십시오.


이홍장은 오늘날 우리 관점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세계관을 가졌고, 위안스카이 등을 부리며 조선의 내정에도 깊숙이 간섭한 자입니다만, 여튼 중국의 위인은 일단 그의 고국인 중국의 이해를 먼저 염두에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죠. 저자께서는 "99년 조차" 조항을 두고 언젠가는 후손들이 땅을 찾으리라는 원대한 숙고의 산물이라고 평가하십니다만, 결과론적 해석이라고 봅니다. 영국이 한심한 국위 쇠퇴를 겪지 않았다면, 또 야무진 등소평이 일처리를 그리 해내지 않았다면, 99년은 그저 현상으로 굳어 영원히 외국에 귀속되었을 겁니다. 또, 이홍장이 설령 영구 할양을 싸인해 줬다 해도, 힘을 갖춘 중국이 그걸 묵과하고 있었겠습니까? 다른 조약에 대해서도, 중국은 "이건 제국주의 시절에나 효력을 지니는 불평등조약"이라며 깡그리 무시합니다. 이홍장이 뭘 생각했건 그 은덕을 입어서 오늘의 재귀속이 이뤄진 건 전혀 아닙니다.

캉유웨이는 공양학파의 태두이며, <춘추공양전>에의 깊은 천착을 통해 중국형 부강론을 제기한 석학입니다. 논자에 따라선 출세지향적 언동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광서제는 그와 연합하여 서태후와 맞서려 했으나, 황제나 재상 모두 이 노회한 여걸에 대항하기는 역부족의 기량들이었죠. 캉유웨이는 조선에서도 그의 문명이 크게 알려진 정치-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당대의 명사였으나, 역시 한계도 뚜렷한 인물이었습니다.

양계초는 캉유웨이의 제자(대략 17년 정도 나이 차가 나죠)지만 어떻게 보면 그 스승의 업그레이드 버전입니다. 학문도 깊었지만 현실 참여나 경세의 수단도 더 노련했고요. 요즘 한국의 특정 정당 몇 군데에서 "자강론"이 자주 나오는데, 자강불식의 도그마를 당대에 크게 퍼뜨린 이가 바로 양계초입니다. 캉유웨이와 달리 민족주의 성향도 두드러졌죠. 그가 말하는 "다변"은 말 많다는 多辯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처신할 것을 강조한 취지입니다.

손문은 위안 스카이보다 몇 살 아래인데, 어린 시절부터 연줄을 잘 잡아 마른자리만 골라 앉은 그와 평생의 숙적으로 대립했죠.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가 무너졌지만 어디까지나 미완의 혁명이었는데, 군벌 실력자 위안 스카이의 무력에 기대었기 때문입니다. 허울뿐인 공화정은 끝내 무너지고 위안 스카이는 분별도 없이 황제정을 다시 부활하는데(이른바 복벽), 마치 후한말에 스스로 천자를 칭한 원술이가 생각나기도 합니다(성씨도 같고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결국은 생전에 뭔가 성취를 못 보고 다 실패로 끝난 도전들이었습니다. 엉뚱하게도, 학문적 각성이나 집안 배경도 부족하며 뭔가 인성도 덜 갖춰진 듯한 마오가 결국 천하통일- 외세 배격을 이뤄냈는데, 이는 세계 정세가 그리 돌아가다 우연히 귀착된 지점이 아닐까 봅니다. 인물로 역사를 보는 프레임을 만들지, 아니면 구조적 팩터 분석을 통해 인물을 재규정해야할지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볼티모어의 서
조엘 디케르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소설, 아주 길고 긴 만큼 사연이 풍성하기도 하지만 두 줄로 요약하면 이럴 것 같습니다.

"인생만사 새옹지마"
"결국 주인공은 나야 나"

요즘 소설은 작위적으로 불행한 주인공을 만들어 내어, 삶이 순탄치 않은 일반 독자들에게 진통제나 투여하듯 불건전한 처방을 내리는 수가 많습니다. 반면, 우리가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에서 그 발랄한 재주의 일면을 이미 맛 본 것처럼, 스위스인 조엘 디케르는 소설의 본령, 본연의 사명에 매우 충실한 작가입니다. 전하는 말들이 밝고 따스하며, 그렇다고 억지로 밝아지려고 발버둥치지 않는, 유쾌하면서도 현실감 있는 사연을 직조해 냅니다. 사연에 사연이 꼬리를 무는 것도 어쩌면 전통적인 이야기꾼들이 청중을 앞에 두고, 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며 그 예전부터 의존하던 방식에 가깝지요. 주인공들 역시, 세상을 향해 막무가내로 안기려 들거나, 반대로 투쟁의 시선으로 일관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정은 인정대로 받고 싶되(솔직히 좀 속물이 아닐까 싶게), 아니다 싶을 때는 무모한 싸움을 서슴없이 걸죠. 다만 그 과정에 균형감각과 현실적인 지혜가 필요 합니다. 재능이 뛰어나되 이 순간적인 절제, 센스가 결여된 이들은, 바로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그런가 하면, 내내 신중하고 관계 속에서의 현명함을 발휘하며 살아 온 이가, 단 한 번 한순간의 실수(절대, 그럴 것 같지 않았는데)로 모든 것을 잃고 말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부모가 반 팔자"라고도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법칙의 예외를 만드는 생이 너무도 많죠. 반면 성장기를 어떻게 보냈는지는 거의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고 들어가지 않나 싶습니다. 성장기를 불행하게 보냈거나, 불건전한 영향만 가득 받고 자란 사람은 커서도 결국 실패자가 되거나, 망상만 가득한 채 허언과 허세로 가득한 연극(그 연극이 즐겁기나 하면 좋을 텐데) 같은 삶을 살게 되죠. 이런 사람은 감정의 기복이 극과 극입니다. 한순간 악몽("난 모든 관계로부터 버림 받았구나!")을 맞았다가, 자기 의지가 아닌 우연한 요행으로 "가짜 목표"가 손에 들어왔으니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얼마 안 가 자기 생의 실체가 눈 앞에 들어 오면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겁니다. 현실 도피가 답이 될 수는 없는데, 여튼 당장 감정의 지옥을 면했으니 억지로 기분을 띄우고 돌아다닙니다. 과거로부터 뭔가 배우는 바가 있으면 그 인생이 이처럼 단순반복의 땜질로 점철되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주인공 마커스("마키") 골드먼은 현재 베스트셀러 한 편을 성공적으로 시장에 띄워 놓아, 아직 젊은 나이에 모두의 선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비극적인 사건은 7년 전에(11년 후에) 벌어졌(진)다."란 문장이 하도 반복되기에, 이 사람 저 <미저리> 같은 데 나오는 중노년 은거 작가라도 되나 싶었지만 아직 꽤나 젊기에, 옆집에 사는 진짜 은퇴 노인(법학 교수)가 가끔 놀러 와서 체스도 두고 시비도 거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죠(거의 아들뻘이라서 무람없이 대하는 듯한....). 자기 입으로 이야기를 안 해도 젊다는 게 눈치채어지는 대목은, 여자 마음을 너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이웃 노인 레오 교수가 혀를 찰 정도죠. 우리 독자가 잊지 말아야 할 건, 이 마커스는 이미 셀럽의 위상이라는 겁니다. 누구하고 썸을 타도 그 상대까지 다 셀럽이며, 웃기는 건 세상이 좁다고 어렸을 적 아주 진한 감정을 공유하기까지 했다네요. (나중에 나오지만 아는 누나 겸 과외선생 겸 동아리 겸 이웃 겸 좀 복잡합니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인생이지만 우리는 1부(총 4부로 나뉘어졌습니다)가 다 끝나갈 때까지, 이 마키를 그저 루저인 줄 압니다. 과거를 회고하며 내내 징징거리고, 심지어 현재에도, 사춘기 시절부터 가장 아끼던 여인을 "막강한 위너"에게 선점당했으며, 대놓고 퇴짜 맞고 푸대접 받는 등 아주 깝깝한 인생이나 된 듯 우는 소리를 합니다. 그러니 독자들은 나중에 뒤통수 맞지 마시고(근데 이런 말이 스포일러일까요? 좀 우려되는군요), 마키의 신분과 처지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좀 해 두시는 편이 좋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어떻다고, 과민성 대장증상이 갑자기 당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 눈높이를 잔뜩 낮춘 채, 1) 나보다 나은 사람을 시샘하지 말고, 그렇다고 2) 터무니없는 헛물을 켜지도 말고, 3) 저처럼 나아져야지 하는 자극만 받고 자신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을까요? 1)과 2)가 압도적으로 흔할망정, 3)의 예는 좀처럼 보기 드물 겁니다. 1부 내내 어린 소년, 영 애덜트 시기를 보내는 마키가 3)의 자세를 유지하는지는 우리 독자로서 알 수 없습니다. 1)과 2) 사이에서 끊임없이 위태한 줄타기를 하는 듯만 보이는데, 사실 우리는 1인칭 관찰자로 머무는 마키한테 시선도 안 줍니다. 무대를 압도하는 주인공은 힐렐과 우디이기 때문입니다.

힐렐은 그 부친(마키의 백부) 사울 골드만(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천재소년입니다. 우디는 그 힐렐과 서로 긴요한 도움을 주고받는, 골드만 씨의 "또다른 아들"이며, 운동신경이 빼어나고 모든 여성이 선망할 만한 건장한 체구를 지닌 위너입니다. 이런 멋진 아들(들)을 둔 골드만 씨 곁에는, 최고 평판을 얻은 의사인 아니타 여사가 그 아내로 머물며, 서로 순도 높은 교감과 사랑(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을 나눕니다. 골드만 씨는 의료기기 판매업으로 큰 돈을 번 부친 밑에서 순탄한 성장기를 보냈으며, 현재는 백전백승의 민완 변호사입니다. 이건 뭐 말도 안되는 사기 인생이죠. 적어도 우리에게 이 얘기를 들려 주는 마키는 그렇게 표현합니다. 마키는 이 가족을 그저 부러운 눈으로만 바라보는, 별 재능도 매력도 없고(적어도 스스로의 확신이 매우 부족한) 그저그런 집안에서 자라난 평범한 아이겠고 말이죠.

비범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은 성장기 내내 화려한 경력으로 자신의 십대를 장식하거나, 반대로 그 빼어난 재능이 타인(어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며 자초한 큰 시련에 부딪힙니다. 힣렐은 여튼 머리가 좋고 복잡한 사태를 간명히 파악하는 능력이 있으며, 언변이 무척 뛰어납니다. 반면, 체구가 매우 왜소하고 운동신경이 둔합니다. 이 힐렐을 미러링하듯 비슷한 약점을 가진 아이가 이웃 패트릭 씨의 아들 스콧인데, 다만 스콧은 힐렐처럼 빼어난 두뇌의 소유자도 아니면서 난치병까지 앓고 있습니다. 패트릭 씨는 사울 골드먼 씨보다 더 부유하면서, 외모까지 빼어난 상류층 신사입니다. 아버지의 좋은 점만 유전적으로 물려받았는지, 스콧의 누나인 알렉산드라는 어려서부터 빼어난 미인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위에서 다섯번째 문단 끝, 마키가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누나, 여친이며, 나중에 유명 가수가 되어 다시 사랑에 빠지는 셀럽이 바로 이 알렉산드라입니다)

우디는 머리가 단순하긴 하지만, 못하는 운동이 없습니다. 흔히 미국에서 십대시절에는 이런 애가 모두의 스타로 군림하지만, 우디는 주위에서 띄운다고 본분을 잊는 허황된 성품이 전혀 아닙니다. 아주 착하고 의리로 뭉쳤지만, 감정에 이끌려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만다는 게 흠입니다. 하긴 우리 중 누구라도 이 함정에서 자유롭겠습니다까만.... 아, 우디에게는 또 하나 약점이,.. 큰 상처가 있습니다. 순탄치 않은 과거 때문이었는데, 그건 책을 읽으면서 알아보시길 바랍니다.

머리가 아주 좋거나, 혹은 만능 스포츠맨이거나, 이 모두가 자라나는 청소년에겐 나도 저처럼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하는 유형들입니다. 이런 압도적인 재능의 자력, 자장 속에서, (우리가 까맣게 잊은) 주인공 마키가 영 엇나가거나 의기소침한 아이로 자라나지나 않아야 할 텐데요. 마키는 소설 속에서 줄곧 이들을 우상화합니다. 우리 독자가 살짝은 피곤해질 만큼요. 마키는 물론 동등한 신분의 "골드만 갱단" 멤버입니다만, 간혹은 멤버십을 잃었는지 다른 멤버(예를 들면 알렉산드라나 스콧)에 그 자리를 내어 주고 겉돌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 없는 마키를, 코어 멤버(우디와 힐렐)은 결코 잊을 수 없는(혈연 이전에) 뭔가의 매력 때문에 붙들어 두고 싶었는지, 떨어질 만하다가도 결국은 도로 결합을 이룹니다. 마키 버전의 설명만 듣는 우리들은 이 점이 사실 좀 납득 안 되기도 합니다.

[이하 내용 누설이 있으니 주의해서 읽으십시오]

마키의 시선으로 힐렐은 내내 천재처럼 묘사되지만, 사실 그의 말에 현혹되지 않고 객관적 팩트를 날카롭게 체크한 독자들은 좀 아리송한 대목을 여럿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입 전형에 대해 "... 과거의 지식을 열심히 토해 놓기만 하는 정신을,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정신 앞에 둔다는 건 너무도 어리석지." 이런 말은, 한번 듣고 보기만 하면 모든 걸 이해한다는 천재의 입에서 나오기에 다분히 자기합리화성 발언(일 뿐 아니라 열등생들의 말버릇)입니다. 어차피 우수한 두뇌는 사회에서 뭘 규칙으로 놓아도 승자가 되기에(창의력이든 지식이든), 저런 불평을 할 필요가 없죠. 창의력이고 지식이고 모든 게 빵점이면서 남의 생각과 말만 베끼는 실직자도 아니고 말이죠. 힐렐은 또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면 어떤 불편한 결과가 닥친다는 걸 예상 할 만큼 머리가 좋지는 못한가 봅니다. 그 중학교 교장 선생 헤닝스 씨(이 사람은 냉혹하고 무정한 게 아니라, 매사에 터무니없이 판에 박힌 관료적 대응 방식이라 오히려 코믹하기까지 하더군요. 인공지능? ㅋ)가 하는 말대로, 정신은 육신에 앞서는 위상이니 니가 그렇게 머리가 좋다면 니 머리를 써서 그 곤경을 탈출할 것이지 왜 맞고 있냐고 비꼬는데, 이게 딱히 틀린 말도 아닙니다.

나중에 뭐 옷도 잘 입고 사교계에서 세련된 말빨로 여자들의 시선도 모은다고는 하나, 제 생각에는 마키가 열광해대는 것처럼 탁월한 지성은 아닌 듯합니다. 고교 풋볼 팀에서 힐렐은 자신의 허약한 체력, 체격 때문에 선수로 뛰지 못하는 한풀이를, 뛰어난 전술 수립 능력과 선수 개개인의 장단점 파악으로 커버하는 코치 노릇을 하며 푼다는 말도 나옵니다.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아무리 고교 리그라고 해도 현대 풋볼에서 뭐 새로운 전술이 개발될 여지가 남았을까 싶어서 좀 고개가 갸웃해지더군요. 마키, 혹은 작가 디케르 씨가 좀 더 연구를 해야 할 부분 같습니다. 화자가 아직 젊으니까 독자들이 봐 주고 넘어가는 거죠.

[이 부분은 절대 읽지 마십시오]
마키는 내내 힐렐과 우디를 부러운 눈으로 보지만, 끝에 가서 위너가 되는 건 별 장점도 없이 무난한(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잘생긴) 자신이었습니다! 결국 ㅎㅎ 이 장편 소설은, 내가 그들 모두를 이기고 승자가 되었다는 자기 자랑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결국 그 얘길 할 걸 내내 "난 장점이 없어, 난 평범하고 불행해. 남들은 근데 왜 저렇게 다들 뛰어나지?"로 내내 징징거리던 화자가 꺼내드는 결론이니 독자는 순간 "어, 루저가 위너 되는 이야기네? 감동!"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쩜 이 소설은 내내 서술 트릭을 채용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알렉산드라가 왜 그 잘나신 우디와 힐렐을 다 제쳐 두고 마키를 찍은 후 무려 월도프 아스토리아에 가서 뜨거운 밤을 보내겠습니까. 그저 만만해서? 아니죠. 아니 작중에서 알렉산드라 대사로 "내가 널 택한 게 벌써 니가 승자라는 소리야."라고 하는 말도 있는데, 이건 워낙 마키가 징징거리니까 독자들이 그저 흘려 듣고 넘어가죠.

그 백부 사울도 마냥 부러운 인생은 아닙니다. 3, 4부에 집중 폭로되지만, 학생 시절에는 운동권이었고, 그 앞선 시기에는 인생 진로의 갈피를 못 잡고 내내 부친과 충돌한, 눈 밖에 난 아들이었죠. 반면 마키의 부친이야말로 똑똑하고 말 잘 듣는 엄친아였습니다. 이랬던 게 가업인 의료기기 판매 회사가 도산하고 집안 전체가 핀치에 몰렸을 때, 말썽쟁이 아들 사울이 유망기업 하나를 눈여겨 봐 뒀다 주식이 대박을 치는 바람에 그때까지의 우열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죠. 마키는 태어나면서부터 내내 이렇게 굳은 모습만 봐 왔기에, 자기 부친은 태생의 루저고 백부는 인생의 승자라고 잘못 여긴 겁니다. 백부가 부친에게 그리 냉랭히 대한 것도, 워낙 동생에게 성장기 내내 쌓인 열등감을 풀기 위해서였고, 조부모가 백부한테 편애하는 듯 보인 것도 일종의 미안풀이라고 봐야죠.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도 있고)

이 소설의 올바른 진상을 파악하려면, 우리는 겉보기에 완전한 인생의 승자였던 사울 골드먼 씨의 내면을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는 자기 동생에게 열등감을 품었고, 성공하고 나서도 이웃인 패트릭 씨를 내내 질시했으며(이게 큽니다. 제 생각에는 이걸 계기로 이분 인생이 망조로 접어든 겁니다), 자기 아들들을 패트릭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무리수를 두었고, 끝내는 아내까지 잃게 됩니다. 아내를 잃은 것도 자신이 먼저 바람을 피워서인데, 외모도 더 월등한 아내는 정작(끝에 가서야 드러나지만) 아무 외도를 안 했음에도 이 남편이 자격지심에 일을 저지른 거죠. 그 역시 "여전히 자기 분야에서 잘 나가고, 십대 아이들에게까지 성적인 영감을 주는" 아내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습니다. 보육원 고아인 우디를 구태여 양자로 들인 것도, 유일한 직계비속인 힐렐에 대해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사울 골드먼 씨가 질시의 눈으로 바라봤던 패트릭은 그럼 어땠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는 오히려 골드먼 씨가 선망의 대상이었죠. 아름답고 유능하며 지혜로운 아내를 두었으며, 그 친아들은 매우 명석하고, 어디서 데려왔는지 떡대 좋은 스포츠 유망주까지 양아들로 들인 잘나가는 변호사, 반면 자신은 돈만 많았지 인생에 정열을 쏟을 만한 낙이 없고, 마누라는 바가지를 긁어 대며,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녀석은 난치병 환자니 신세가 깝깝하게 느껴질 밖에요. 제 생각에 패트릭 씨의 가장 큰 잘못은, 보물 같은 딸인 알렉산드라에게 정성을 안(덜) 쏟은 겁니다. 생에 끼어든 모든 사소한(?) 불운을, 이 딸의 성장이 상쇄해 주고도 남았을 텐데 말입니다. 여튼 패트릭 씨가 하나 잘 한 건, 설령 기분이 울적해져도 덜컥 무슨 일을 저지르는 경솔함은 피했던 겁니다. 반면 골드먼 형제들(사울과 네이튼)은, 99를 잘 하다가 마지막 1에서 덜컥 감정으로 치닫습니다. 그리고 모든 걸 망치는데 이건 집안 내력인 듯합니다.

힐렐은 왜, 고마운 우디의 인생을 망쳤을까요? 우디의 단순한 머리로는 죽을 때까지 생각해 봐야 답을 못 찾았을 겁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적었습니다. 부친 사울이 아들의 대용품으로 우디를 곁에 두고 모든 정성을 쏟는 그 속내를 영리한 두뇌로 알아채곤, 이를 일생의 상처로 키웠던 겁니다. 사실 이는 우디도 마찬가지인데, 중학생 때 농구로 전향하려 했던 게 순전히 아버지 핀 씨의 인정을 얻기 위해서였지 않습니까. 결국 아이에게 영구적인 상처를 안기거나, 반대로 발전의 동력을 선사하는 건 다 부모입니다. 재능도 없는 아이한테 과도한 부담을 줘 가며 키운 부모는 그 자녀를 망상과 허세와 자존감 부족에서 헤어날 수 없는 실패자로 만드는 거고, 반대로 (이 소설에서 티 안 나지만) 은근 알토란처럼 좋은 영향만 주며 정서를 균형잡히게 가꾼 부모는 마키처럼 진짜 엄친아를 두는 거죠. 행복 속에 엄청난 비극과 운명의 급전직하가 롤러코스터처럼 재주를 피우는, 그 와중에도 인생을 향한 여전히 긍정적인 시선이 거두어지지 않는, 재미있으면서도 슬프고, 안타까우면서도 유쾌한 장편이었습니다. 처음에 별 네 개만 주려고 했는데, 뒷맛이 계속 흐뭇하고 좋아서 한 개를 더 늘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성자들의 지혜 - 현대문명의 한계를 극복할
허해구.진실연구회 지음 / 지식공감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대문명은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장족의 진보와 발전이 안겨다 준 "빛" 못지 않게, 뒤따라 드리워진 그림자 역시 짙고 깁니다. 故 마이클 크라이튼은 자신의 어느 장편 속에서 캐릭터 이언 말콤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 식기 세척기, 세탁기 등 가전 제품은 물론 주부의 노동과 수고를 덜어 주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 인간의 삶이 질적으로 나아진 바가 무엇인가?" 2500년 전 노자, 장자 등이 만약 되살아나기라도 해서, 현대인들이 어머니 대지에 자행하는 작태를 보면 과연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저자는 말합니다. "(전략)... 인류도 하나이고 지구도 하나이고 우주도 하나이기 때문에, 진리도 사후세계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 (중략) 그러므로 기독교와 불교도, 동양철학과 서양철학도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법과 도덕, 진리와 인간의 길도 결국 하나로 통한다.(후략)" 옳으신 말씀이긴 합니다. 다만 그 길이 아직 우리 인류에게 명확히 제시가 안 되어서 아쉬울 뿐이지만요.

"현대문명의 한계를 극복할"이란 보조 제목이 함께 붙은 이 책 <성자들의 지혜>는 일단 장정이 참 예쁩니다^^ 저는 책 덕후라서 일단 외관이 기품 있고 멋진 책들, 두꺼운 책을 참 좋아라 하는데, 이 책은 일생긴 모습이 그 조건들을 모두 갖춰서 너무 좋았습니다^^ 지금도 혹시 가운데가 벌어지지 않게, 조심조심해 가며 한 장 한 장 넘기고 특유의 책 향기도 맡는 중이죠.

이 책 제목에 표기된 "성자"는,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 소크라테스 등 인류 역사와 문명에 지대한 기여를 남긴, 말 그대로 만인의 모범이 될 만한 분들입니다. 책 표지에 적힌 대로, 결국 하나의 진리를 말했으나 어리석은 후대인들이 여러 갈래로 오해, 왜곡하고, 심지어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싸우기까지 하는 우(愚)를 범했을 뿐이죠. 저자는 이런 소중한 가르침을 다양한 불경 등 권위 있는 텍스트에서 인용하여, 저자의 심원한 식견으로 한 줄기로 섞은 후 우리 독자에게 준엄히 가르칩니다. 읽어 보면 다 지당한 가르침들입니다^^

p94에 보면 마이클 샐던의 책으로부터 그 유명한 예화를 인용하십니다. 선로 위에 놓인 1명의 목숨과 5명의 목숨 중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이야기인데, 사실 이는 샐던이 처음 고안한 것도 아니고 독일어로 Pflichtenkonflikt라고 하는, 대학 강단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논쟁적 이슈로 다뤄지던 과제였습니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주제로 자세한 논증을 한 적이 있죠. 저자께서는 어차피 답이 안 나오는 문제를 협소한 상대론적 관점에서 인위적으로 비틀어 유사 딜레마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지적하시는데, 바로 그 앞 대목의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었으나 이런 이슈들이 다분히 말을 위한 말로 상술처럼 가공된다는 진단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이 책 전체를 꿰는 저자의 주장은 "자기 입장에서 이거다 저거다 현상과 과제를 왜곡하지 말고, 만물의 진리는 오로지 하나일 뿐이라는 관점에 동의한 후, 모두가 마음을 열고 화합하여 궁극의 진리에 순응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씀이나, 인류의 지난 역사라는 것도 지성이 뛰어난 개인이 돌출하듯 이색적인 주장을 방대한 체계로 펴 나가면, 기존의 체계와 충돌을 빚게 되고, 입장들이 치열한 논쟁을 주고받으며 어느새 집단 지성에 의해 발전적으로 융화하는 과정을 거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모두가 순응, 승복해야 할 단일 체계의 진리란 게 어느 시대에나 강조되었으나, 역시 인간의 제한된 지혜에서 빚어졌을 뿐이니 그 효용이란 제한될 범위에서 발휘될 수밖에 없었죠. 발전과 모색을 위한 불협화음이란, 그래서 혹여 그 과정에 교란, 불화가 빚어지더라도,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도 등한히한 채 시간을 낭비"하는 작태 역시, 그 사람 입장에서야 보람 있고 좋은 일에 열심을 바치는 중이겠으나, 객관적으로 보면 자신도 망치고 자신 주변의 사회관계망 모두에 폐를 끼치는 헛수고일 뿐이라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제가 흥미롭게 본 건, 공동체 도처에서 빚어지는 갈등, 이익 충돌, 밥그릇 싸움 역시 대승적 관점에서 하나의 정의를 직시하면 결코 빚어지지 않으리라는 저자의 관점이, 이 사이비 종교 현상을 비판할 때에도 적용된다는 겁니다. 결론은 차이가 없는데, 그 논거 구성 면에서 저자만의 고유성이 드러납니다. 사이비 종교 믿는 사람들이 꼭 되묻는 게 이렇죠. "우리 OO교가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남한테 피해 안 끼치고 도덕적으로 살려고 애씁니다." 이런 질문에 대개는 아무 대답도 안 하고 무시하지만(시간과 정력의 낭비), 엄밀히 말해 우리한테 그럴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단죄하고 무시하려면 그럴 만한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하죠. 제가 주목한 건, 저자가 구태여 그런 이슈에 대해서까지 논거를 마련하려 애쓴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사실 서양철학(중에서도 대륙의 합리론)의 본질적 방법론과도 통합니다. 이 책에도 여러 번 원용되는 칸트의 저서를 읽으면서도, 평범한 이들 생각에는 "대체 그런 문제를 왜 해명해야 하며, 이처럼이나 번거로운 과제를 파고들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같은 회의가 떠날 새가 없습니다. 허나 이런 문제를 짐짓 경시하는 듯 젠체하는 소양 없는 무자격자들도, 어디서 본격 인문 주제가 논쟁의 핵심으로 대두하면 그제서야 인식론, 해석학의 기초 개념을 (벼락치기로 베껴 온 후) 뜻도 모르면서 급조한 수다 속에 허세를 떠느라 정신 없습니다.

저자께서 주장하시는 만물일통의 세계관에서는, 저 사이비 종교에 미혹되어 인생을 망치는 어리석은 무리들이나, 진리의 일면만 보고서는 망령되이 편린적 진실을 전부인 양 우기는 무자격자들이나 결국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뜻입니다. 똑 같은 사이비 신도가 다른 사이비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니 이보다 더한 촌극이 없죠.

저자의 탁견은 특히 Part3에서, 어떻게 하여 담백하고 질박한 예수와 석가의 가르침이, 번잡한 말과 말 속에서 본지가 타락하고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현학 공론의 장으로 변했는지 설명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특히, 사도 바울 이후 기독교는 선행의 실천을 강조한 예수의 순정한 초기 지침을 잊은 채 유대교처럼 인격신을 전면에 내세우며 형식적 교리가 득세함으로써, 정작 예수의 가르침과 멀어졌다는 통박은, 현재 기독교 교단의 정통파 신앙과는 까마득한 거리를 두겠으나 중립적 독자 입장에서는 경청할 가치가 충분했습니다.

또한, 석가모니 이래 여러 제자나 권위자들의 입장을 거치며, 부처님의 "원음"이 무수한 왜곡과 가필을 거친 채 이제는 무엇이 본지였는지도 혼란에 휩싸일 뿐이라는 저자의 지적 역시 강력한 설득력을 지닙니다. 이 저자의 논지와는 별개로, 아소카 왕 이래 확립된 엘리트 불교에서 어떻게 대승과 유식론이 갈라져 나왔는지, 또 이후 이 입장들이 어떻게 힌두교 측과 발전적 논쟁을 거치며 영향을 주고받았는지의 서술이 참으로 명쾌합니다.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든 않든, 이 대목은 보편적 교양 습득을 위해서도 한번 읽어 볼 만합니다.

부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 모두, 사회가 폭력과 범죄에 물들어 극한 타락의 길을 걸었을 때 출현한 성자들(저자의 관점)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일러 "오탁악세"라고 하는데, 이런 성인들이 나타나 인류가 자멸과 종말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지 않게 심오한 가르침을 베풀었듯,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테러와 증오의 악순환이 뭇 백성의 작은 안위도 차마 담보하지 못할 판이며, 이 판에 일부 불순분자들은 폭력을 부추기고 엉뚱한 반사회적 사고를 공유하며 한심한 제 처지를 합리화하기에 바쁩니다. 이런 난세를 두고 오히려 저자는 "그나마 이 세상이 아직 법계의 자격을 유지한다는 증거이다. 도덕의 문란과 위법의 수위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응보인 혼란상이 빚어지지 않는다면 그게 더 문제 아니겠는가?" 같은 주장을 합니다. 명시적인 언급은 없으나, 이런 오탁악세에 다시 한 번 성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어 위대한 가르침으로 누리를 씻어낼 기대도 어느 정도 함축하는 논리입니다.

저자는 모 추기경이 선도한 "내탓이오" 운동 역시, 악행을 저지르고 온갖 탐욕과 비리를 앞장서 부추긴 세력에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나 결과면에서 다를 바 없다고도 합니다. 말하자면 권선징악, 신상필벌을 내세움이신데, 역시 해당 문단을 읽는 독자 개인이 알아서 잘 새길 일이겠습니다. 같은 대목에서 정치인들이 한데 모여 구국기도나 법회를 열었던 행태도 신랄히 비판하시는데, 행실은 따르지 않으면서 입으로 무슨 기도나 염불을 읊은들, 원인 없이 결과가 하늘에서 떨어지길 비는 꼴이라며, 연못에 던진 돌멩이가 느닷 수면 위로 떠오르길 바람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시네요.

저자는 후반부에서 플라톤의 철인 정치론을 소개하며, 작금의 한국은 계층과 직역 불문하고 각자의 분수를 알며 현실의 의무에 충실하자는 자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으로 결국 쇠망하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 반대로 각자가 생업에 충실하며 헛된 망언으로 정신을 더립히지 않고 정직과 진실에 힘쓴다면, 팔천만 인구로도 세계를 이끌 으뜸 민족이 될 수 있다고도 하시네요. 정부가 개입해서 불완전한 시장의 작동 원리를 가다듬어야 한다는 케인지언 스탠스와, 그 대척에 서서 완전한 자유방임만이 일체의 비효율을 제거한다는 시카고 학파의 주장까지 소개하는 등, 저자의 시야가 참으로 넓고 보편의 상식에 부합하는 청론(淸論)이라서 쉽게 잘 읽혔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샤오미 스타일 - 미친 듯이 최고에 집착하라!
쑨젠화 지음, 조홍매 옮김 / 스타리치북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샤오미의 성취와 전망에 대해 여전히 의견은 엇갈립니다. 어떤 사람은 한마디로 후려치며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화웨이는 인정하지만 샤오미는 아니다"라며 "디바이드 앤 룰(ㅋ)"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당신도 그 회사 제품 보조 배터리 하나는 갖고 있을 것 아닌가?" 왜 현실과 대외용 주견이 다르냐며 소비자의 이중성을 비판하는 이도 있습니다.

하나 확실한 게 있습니다. 중국 기업들은 그저 국가에서 적절히 밀어 주겠거니, 민간 기업의 탈을 쓴 공적 에이전시겠거니 막연히 싸잡아 비난하기도 하며, 실제로 그런 경향도 없지는 않으나, 이 정도 위상의 기업으로 "일단 중국 국내에서라도" 떠오르려면, 이전투구 사생결단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겁니다. 샤오미가 여튼 십이억 인구를 pool로 삼은 살인적 경연에서 승자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합니다.

확실한 건 하나 더 있습니다. 샤오미는 여태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여러 책에서 주장하던 대로, 또 일부 국내 소비자들도 확인하거나 참여까지 해 온 대로, 고객과의 소통을 매우 중시하는 경영 전략을 세우고 지금까지 이를 철저히 실천해 왔다는 겁니다. 요즘은 뜸해졌으나 2011년 당시 카카오도 이런 전략으로, 유저의 사소한 불편 하나하나에까지 정성어린 답을 달아주는 철저한 일체화 공감 전략으로, 오늘날의 국민 메신저를 만들었습니다. 위상이 아직 불안해서인지는 모르나, 샤오미는 이 점에서만큼은 초지일관입니다. <전국책>에 보면 "죽은 말에 대고도 천금을 주며 구입한다는데 하물며 산 말이겠는가?"라는 선시어외의 고사가 나옵니다. 우리 독자들은, 무(無)에서 시작하여 이만큼이나 세계 시장을 개척한 그들의 노력과 혁신 의지에 대해서만큼은 뭔가 챙겨가며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성공의 길가에는 항상 여러 명의 실패자가 쓰러져 있다." 쓰러져 있는 개별 실패자 입장에선 자신의 모습도, 다른 실패자의 비슷한 처지도 안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 말을 할 수 있는 건, 레이스를 완주한 위너뿐이겠습니다. 여유 있는 승자인(현재까지는요) 샤오미, 그 CEO인 레이쥔은 처음부터 시장 대세의 방향을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소프트웨어 회사는 어차피 인터넷 회사와 게임이 안 된다." 이십 년 동안 소프트웨어만 개발해 왔다는 바로 레이쥔 본인이 했다는 발언입니다. 여기서 "인터넷 회사"란, 웹상에서 엔드 유저와 효율적으로 소통하는(직접 무엇을 파는) 리테일러나 복합 몰을 뜻합니다. 

샤오미가 (레이쥔 표현대로라면) "인터넷 회사"에 속하는가? 이 점은 샤오미가 초창기 어떻게 성장했는지 과정을 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회사가 기존 방식대로 전통적 판로에의 호소와 마케팅에만 의존한 반면, 샤오미는 엉뚱한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하던 반대로만 해 볼 것이다." 심사가 비틀려서가 아니라, 만약 후발업체가 기존 방식을 따르면, 애는 애대로 쓰고 (경쟁 선발사들의 채널에 밀려)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뿐더러, 출혈만 많을 뿐 홍보의 유실률이 높아 이중삼중의 고생일 뿐입니다. 당장 매상이 안 오르는 것만 고생이 아니라, 이로 인해 경영진과 직원의 사기가 날로 떨어져 결국 회생과 도약의 기미가 0으로 수렴하겠죠.

레이쥔은 다른 창업자들과는 또 입장이 차별되었던 경영자입니다. 물론 현재 IT 섹터의 거인으로 자리한 이들이, 열악한 출발을 밀고 나가지는 않았습니다. 교육도 받을 만큼 받았고, 대개는 넉넉한 중산층 집안의 자제들이었죠. 레이쥔은 한술 더 떴습니다. 이미 대학생 시절부터 벤처기업을 일궈 또래에 비해 많은 돈을 손에 쥐었고(비록 MS에 밀려 2인자였다고는 하나 꽤 선전했죠), 이후에는 벤처 사업가가 아니라 그 반대, 즉 유망한 스타트업을 살펴 보고 돈을 대어 주는 엔젤 투자자였습니다. 그 젊은 나이에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샤오미를 세워 일을 벌여 보겠다고 했을 때, 당연히 이런 말이 나올 만했습니다.

"모든 걸 이미 다 가진 분이, 뭐하러 모험을 한단 말입니까?"

이는 마치 한국의 효성그룹 창업자인 고 조홍제 씨를 연상케도 합니다. 물론 조홍제씨는 저 레이쥔과는 달리 꽤 늦은 나이에 자기 회사를 만들었지만, 아무 아쉬울 것 없는 재력가가 창업의 모험을 구태여 시도했고, 주위의 예상을 뒤엎고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1인자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 버릇처럼 입에 담는 말이 있습니다.

"라이벌이요? 글쎄요. 제겐 제 자신만이 라이벌이었습니다."

이 말은 듣기에 따라 오만함의 표출로도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적어도, 레이쥔(雷軍. 뇌군) 회장의 경우는 좀 다르게 새겨야겠네요. 많은 이들의 이미 검증된 판로(그러나 달리 말하면 레드오션)만을 의존할 때, 그는 (앞서 말했듯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이 책 저자(쑨젠화 작가)는 이에 대해,

"남들 안 가는 길을 걷는다고 편한 게 아니다. 오히려, 단 한 번의 실수로도 완전히 매장되어 재기 불능이 될 수 있다.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환경 변화에 유의하며, 더불어 자신의 긴장과 집중을 유지하지 못하면, 이런 선택은 안 하느니만도 못하다."
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상대가 정해진 싸움이란,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이렇다고 합니다.

"싸움에 이기면 득의양양해지는데, 이는 초심을 잃기 쉽다. 싸움에 지면 뷸쾌해져 정작 초기 목표가 무엇인지 잊기 쉽다."

그러므로 목표를 정해 두고 이의 성취를 위해 애쓰는 이는, 무릇 스스로와의 싸움이 노력의 본질이 되게 하라는 겁니다. 남을 염두에 두는 자는 그 남만큼만 잘하려고 듭니다. 그 상대가 극복된 후에는 목표 설정에 어려움을 겪거나 성취 동기가 사라지니, 자신의 잠재력조차 온전히 발휘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강해지면, 부담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고마워합니다. 내 자신의 동력을 더 깊은 곳에서 이끌어낼 수 있으니 말이죠. "환득환실(이기면 이기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근심이 생김)"의 딜레마를 이렇게도 피해갈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도대체 휴대전화란 걸 만들어 본 적도 없는(아무리 자본이야 넉넉했다고는 하나) 회사가 어떻게 그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했을까요? 첫째 결국 내 상품을 사 줄 고객만 보고 뛰었다는 점, 둘째 설령 경쟁사라 한들, 내가 그 장점을 보고 배우며, 서로 경쟁을 통해 발전의 자극제로 삼을 수 있는 동료로 여기는 발상의 전환, 공존공생의 파트너로 통 크게 인식했다는 게 비결입니다.

"나를 따라서 배우는 자는 살아남지만, 나를 흉내내는 자는 도태될 것이다."
흉내와 창의적 변용은 이처럼이나 다릅니다. 누군가를 흉내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배우는 건, 먼저 내가 열린 마음을 갖고 내 자신을 송두리째 바꿀 각오가 되어야 합니다. 혁신이 곧 인격도야와도 통함을 우리는 샤오미의 사례에서 깨닫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모바일 트렌드 2018
커넥팅랩 외 지음 / 미래의창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모바일 온리"라는 거대한 시대 지표가 이끄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모바일의 운용 원리나 구체적인 기술 배경에까지 일일이 신경은 못 쓰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그래도 주요 키워드 몇은 잊지 않고, 아 세상이 이쪽으로 간대더라 정도는 애써 되뇌지만, 짤막한 단어만 읊조린다고 자동으로 추가설명이나 이해가 줄줄 따라나오지는 않습니다. 특히 최신 트렌드를 짚어주는 책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한 번 정도는 숙독하고 한 해를 정리하는 게 좋은 습관이겠는데요. "모바일 트렌드"는 그래서 특히 직장인들이라면 종사 업무 분야에 상관없이 매년 챙겨야 하는 필독서가 되어가는 듯합니다.

저자 커넥팅랩이 선정한 올해판의 주제어는 "무(無)"입니다. 작년까지 이어졌던 화두(정말 불교 선문의 화두 같죠)들과는 사뭇 범주와 느낌이 달라 뭔 뜻일까 궁금해하며 책장을 신중히 넘기며 열독했습니다. 사실 저는 작년판은 건너뛰었기 때문에 2년 만에 다시 이 시리즈를 만나는 건데,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뭔가 그 사이에 세상도 엄청 변한 것 같고, 작년판에서 지적한 사항이 제 머리에 정리 안 되어서인지 내용들도 절박하게 실감나게 막 꽂히는 것 같았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기저효과 때문에 설명이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겠고("간만에 보니 확 좋음"ㅋ), 뭔가 그 이전판들과는 달리 서술과 전망과 현황 점검이 더 구체화? 선명하게 바뀐 듯하기도 합니다. 이는 집필진도 컨셉과 표현에 더 고민을 쏟았다는 뜻도 되고, 저자들의 예상대로 모바일의 여러 국면이 그만큼 우리들 생활에 깊숙이 침투하다 보니, 살면서 많은 부분에 대해 이미 선(先) 이해가 이뤄져서일 수도 있으며, 혹은, 우리 독자들이 지난 5년 동안 출간된 이 시리즈 전편들에 의해 그간 레슨을 받은 결과 실력과 안목이 향상된 덕분도 있을 겁니다. 사람이란 참, 뭐가 잘되면 다 그건 내가 열심히 해서고, 안 되면 남이 시원찮아서로 돌리곤 합니다.

"무(無)"는 다음의 여섯 가지 축, 기준 들을 가리킵니다. 무감각 무한 무선 무인 무소유 무정부. 이 중 "무선"은 "모바일"의 물리적 본체를 이루는 개념요소이며, 무소유는 아무래도 공유경제 트렌드를 가리키겠거니 짐작이 가능합니다. 무정부는 어쩌면, 왜 모바일이 개인과 사회 전반에 걸쳐 근본을 바꾸고 헤집는 동인이 될지 시원하게 지적하는 단 한 마디의 지표일 수도 있습니다. 무인과 무감각은 서로 어떤 관계인지, 무한은 어떤 현상을 특히 염두에 두고 요약된 범주인지는 책을 꼼꼼히 읽고서야 아웃라인이 잡히더군요.

세부 토픽은 이전판들과 크게 달리 잡히지는 않았습니다만, 일 년 사이라 해도 이 분야 발전이 워낙 빠르다 보니 그간 우리 독자들도 미디어를 통해 개인적으로 업데이트해 온 사항들이 속속 언급되기에, 속도감과 시사성을 쭉쭉 빨아들이며 신 나게 읽을 수 있었네요. 7개의 대주제마다, 저 여섯 개의 기준들로 기둥을 박은 "레이더 차트(폴리곤 다이어그램)"를 통해, 기술적으로 어떤 "무"가 넉넉히 구현되었고 어떤 다른 "무"는 아직 발전 도상에 놓였는지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돕습니다. 근데 이렇게 좋은 항구적 프레임을 이번년도판에 이미 적용했으니, 내년에는 "무(無)" 아닌 다른 키워드 아래에서 어떻게 내용을 구성하실지 괜한 걱정도 되는군요.

요즘 TV 광고 등을 통해 평창올림픽 관련 이미지나 컨셉을 많이 접합니다. 어떤 통신사 광고는, 5G와 평창과 자사 지향 가치를 하나로 묶으려고 시도도 하더군요. LTE가 7. 8년 전 처음 구현될 때 국민들 교육(?)을 시킨 으뜸 매체가 광고였듯, 5G라고 하면 그만큼 빨라진다는 건 알겠는데, 4G 때와 달리 다른 별칭도 안 붙었고 "지금도 충분히 빠른데 뭘" 같은 무덤덤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전(대략 20년 전)에 3G와 IMT-2000이 나란히 거론되던 것 다들 기억하실 텐데요. 이 5G는 IMT-2020이란 표준과 같이간다고 합니다. 지금도 넉넉히 빠른데 대강 하지... 사실 이런 생각은 요즘처럼 파괴적 혁신을 요구하는 판에선 그냥 퇴보를 뜻합니다. 현재 자리도 못 챙긴다는 뜻이죠. 이런 분들도 막상 남들이 안 끊기고 대용량 파일 네 개 다섯 개를 1, 2초에 다 받을 때, 자기만 버퍼링 장애에 시달리며 10분 지나서야 모니터를 확인하는 수고를 치른다고 생각하면 짜증을 낼 겁니다.

시간은 곧 돈인데, 책에서는 이런 경쟁에서 앞서가기 위해 발벗고 노력하는 중국의 움직임도 지적합니다. 기본료 인하 방침 때문에 글로벌 경쟁에서 피가 마를 통신사 걱정을 제가 할 이유야 없겠습니다만, 15000원(무료 통화 제공분은 제외) 그 이상의 효과를 장기 투자하여 얻어낸다고 생각하면 좀 참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봅니다. 독일 한 번 가보십시오. 딱 쓴 만큼만 요금 내기 때문에 깔끔하기는 한데, 그 선진국인 나라에서 망이 지독하게도 느립니다. 우리가 지금 2만원 낼 것 6만원 낸다고 4만원 어치의 혜택만 더 받는 것도 아니고, 인프라가 열악하다면 필요할 때 가서 4만원 더 낸다고 4만원어치 효용을 언제나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시설과 시스템이 첨단이면 소비자는 내는 돈보다 더 큰 잉여 효용을 반드시 챙깁니다. 어디 전화와 인터넷과 게임만 하고 맙니까? 폰으로 생계를 위한 정보를 주고받는 이들도 부지기수이며, 상당수는 고소득자이기도 하고, 이들이 창출한 부가가치가 돌고돌아 내 지갑도 불려 주는 겁니다. 고속망이 안 깔려 있으면 정작 필요할 때 십만 원 아니라 백만원을 부랴부랴 꺼내들어도 원하는 서비스를 못 누립니다. 그 금액 인하해 봐야 치킨 한 마리 값도 안 되는데, 우리가 어디 한 달에 한 번만 시켜 먹겠습니까?

예전 3G 시절부터 속도 테스트할 때(느리면 고객센터에 전화 걸어서 따져야죠. 정당한 권리는 또 찾아먹어야 합니다) latency라는 항목 보셨을 겁니다. 업로드 다운로드 속도가 빠른 건 좋은데, latency 역시 비례하여 커질 때가 있습니다. 요즘 유저들의 실질적 만족도를 정하는 건 이 "지연율"이죠. 어떤 분들은 LTE 얼리 어댑터였는데도 당시 불만을 토로한 게 거의 이 이슈 때문이었습니다. 5G는 그저 양적인 팽창에 그치는 게 아니라, 원리적으로 이 지연율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도 병행합니다.

"5G의 핵심은 실시간이다." 픽, 5G는 고사하고 인텔 486 PC 시절에도 실시간 소리가 나왔는데 무슨? 그런데 앞선 시대가 성급하게 마케팅 컨셉을 소진한 건 현재의 엔지니어들이 책임질 문제는 아니고요. 이때 실시간은 "진짜" 실시간을 말합니다. 이 이슈는 특히 자율주행 관련해서 부각되는데, 전방에 사람이나 동물 등 장애가 나타났다, 이때센서가 반응하는 속도는 말 그대로 빛의 속도라야 하며, 이 정도의 만족감이나 실제적 능률이 아니고서는 인간이 자기 손으로 운전대를 잡는 의지를 꺾으려 들지 않을 겁니다. 이러니 5G의 혜택이 어디 폰에서 동영상 빨리 받고 TV 안 끊기고 시청하는 데서 끝나겠습니까?

올해판에서도 역시 독자들이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을 대목은 블록체인 이슈일 것 같습니다. p77의 레이더 차트는 무소유와 무정부를 끝까지 쭉 늘리고, 무선과 무감각은 쑥 들어간 모양새입니다만, 사실 이 이슈에서 무선 무감각은 부차적 기술 사항에 불과하고, 직접 자체 연관은 없어도 타 분야의 도움을 얼마든지 끌어올 수 있죠. 비트코인에 대해 얼마 전 크게 우려하는 메이저 언론 측의 기사도 나왔는데, 블록체인은 비트코인에 한정된 기술, 원리, 발상이 전혀 아닐 뿐더러, 비트코인은 가상 화폐의 한 종류(대표주자이긴 해도)에 불과하며, 블록체인은 가상화폐 운용 기술의 핵심이지만 응용 분야가 이것 말고도 무궁무진합니다.

말 그대로, 블록체인은 개개인의 거래, 소통으로 블록 하나가 생기고, 이 블록이 모이고 모여 체인을 이루는데,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기록이 (진정성이 확인되는) 체인으로 남아, 역추적이나 유효성 확인을 매우 편리하게, 또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우리는 예컨대 제1금융권이라는 은행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주고 경제활동을 영위하지만, 이는 이론상으로, 또 실제로, 완벽한 신뢰가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은행원의 횡령, 임원진의 배임 등). 블록체인은 거래에 참여한, 혹은 밖에서 거래를 관찰하는 개인이 그 전 과정을 투명하게 검증할 수 있으므로, 오히려 거래의 안전을 더 본질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근본 원리의 발견입니다. 이른바 비잔티움 장군의 딜레마가 수학적으로 해명되면서 더불어 세상에 출현한, 출생 족보도 화려한 시대의 총아이죠.

책에서는 우리 독자들이 실생활에서 가장 절감하며 그 혜택을 맛볼 경우를 설명합니다. 올해 여름 계란 파동이 있었습니다만, 우리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생산지 이력 검증 체계에 구멍이 뚫려 비슷한 소동과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면, 소비자는 집에 앉아서(아니, 혹은 외출하여 모바일 기기를 통해서도), 내가 믿고 소비하고 싶은 식품이 어떤 생산지에서 중간 유통을 거쳐 지금 어느 리테일러가 팔고 있는지 실. 시. 간. 으로 확인이 가능합니다. L이나 E 같은 대형 매장은 또 몰라도, 동네 마트에서 파는 마늘이나 감자 등이 과연 겉봉에 쓰인 대로 국내산이라고 안심할 수 있습니까? 원산지 표시가 의무화되었습니다만 과연 이를 누가 감시하고 보증할지는 답이 안 나오는 문제고 정부가 발로 뛰어다닌다고 그 많은 속임수를 현장에서 일일이 잡아내지도 못합니다. 블록체인은 그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를 일거에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이거는 참여자 50%가 승인을 해야 체인 편입이 이뤄지고, 그 와중에도 새로운 참여자, 증인이 계속 늘어나기에, 누가 조작을 못 하는 겁니다. 정부가 나설 필요도 거의 없고, 여태 존재했던 어떤 단속이나 감시보다도 효율적입니다. 이뿐이 아니죠. 내가 가는 단골 식당이 과연 재활용(웩) 반찬을 쓰는지, 어디서 불량 중국산 식재를 마구 퍼 넣는지 훤히 들여다보일 것 아닙니까. 이야말로 일상의 부정과 비리가 근절될 획기적인 계기가 아닐 수 없죠.

이 기술은 부동산 거래에서도 등기 위조, 원인무효 여부 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한국에선 미국 등에 비해 그나마 지적 조사나 등기부 완결성이 높은 편이므로 어떤 획기적인 발전은 아닙니다. 블록체인 하나로 자격증, 신분증, 의료보험, 자동차운전면허 등 모든 정보를 편하게 제시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멋진 기술입니다만 그 편의는 이미 충분히 누리는 터라 그리 가슴으로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책에서는 에스토니아가 이른바 e- 정부를 구현하고 나서 국민소득이 네 배로 커졌다는 예를 드는데, 경제 규모의 성장은 그 이유 하나로 다 설명되는 건 아니겠죠. 단, 한국에서 빈발하는 부동산 사기는 대개 권리자 아닌 자가 권리자 행세를 하며 인적 사기를 치는 패턴이므로(등기부 조작은 법원에서 관리하고 이중 삼중 백업으로 모두 전산화가 이뤄졌으므로 불가능합니다), 이 두 가지 기술(토지 이력 추적+개인 신분 확인)이 결합하면 TV 재연드라마에서 나오곤 하는 기막힌 사연들은 방지할 수도 있겠습니다.


ICT 관련 p169에 보면 하만 등 전장업체가 바이두 주도의 "아폴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서술이 있죠. 단 모두들 아시는 것처럼 하만은 작년에 삼성에 흡수되었으므로 이제는 "삼성하만"입니다. 그래서 이 합작은 삼성과 바이두의 연합도 되는 겁니다.

SF에서 언제나 보곤 하던, 심지어 무려 1982년작인 <블레이드 러너>에서도 당연하다는 듯 비춰지는 플라잉 카는 언제쯤 우리가 즐겨 보겠습니까? 사실 이 문제는 당장이라도, 쓸모 있으면서도 저렴한 차량의 출시가 가능합니다. 문제는, 도시의 공중 공간이 그 차량이 돌아다니게끔 예비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파트 발코니 앞을 누군가의 자가용이 쌩 하고 지나간다거나, 도로의 상공이라 해도 쾌속으로 달리는 차량 간의 충돌 방지나 원활한 운행을 무엇으로 조율, 규율할 것이냐는 겁니다. 이게 "하늘을 나는 차의 마련"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신기한 기계의 발명이 어려운 게 아니라, 사람 사이에 충돌과 갈등이 최소한으로 줄어들게 하는 룰과 체제의 정비가 진짜 까다로운 숙제인 겁니다. 자율주행 관련 법규도 그러하며, 이 책 후반부에서 다루는 네트워크 거버넌스, 망 중립성 문제, 나아가 단말기 자급제 이슈도 그렇습니다. 특히 마지막 주제는 이 논쟁이 왜 이 책에 나왔지 하며 순간 눈을 의심했는데, 생각해 보면 사람(개인이든 사회 단체든 정부든)이 순수 기술 문제만 건조하게 딱 떼어놓고 다루지는 않습니다. 올해 판은 특히 사회 정책, 혹은 정치적 이슈도 과감히 논제로 포함하여, 민감한 이해 관계를 일단 유보하고 순전히 기술 차원에서 먼저 해소할 수 있는 이견, 불합리 비효율 팩터는 무엇이 있는지 진지한 접근을 시도했다는 게 돋보입니다.

어렵다고 지레 선입견 갖지 마시고, 직장 동료들과 대화할 때에도 뭔가 체계적인 베이스가 갖춰져야 대화가 주도됩니다. 뿐 아니라 백세 인생 길게 내다보고 설계하려면, 두어 발짝 앞선 트렌드를 하부 구조까지 들여다 봐야 정확한 그림이 잡히죠. 여전히 유익하고 도움이 많이 된 대중적 분석서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