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 -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최인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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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때로는 무엇을 바라보느냐 보다,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준거틀, 혹은 간단히 "frame(of reference)"의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대상은 분명 본성과 외관이 변치 않은 채 그 자리에 머무릅니다만, 이를 바라보는 우리 눈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결과가 초래됩니다. 때로는 (고정된) 대상을 바라보는 이 시각 차 때문에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빚어집니다. 이렇게나 프레임이 차이 나는 사람들이 물체가 아니라 아예 서로를 바라볼 때 얼마나 극심한 싸움이 벌어질지도, 프레임의 중요성을 알게 된 뒤라면 충분히 짐작 가능합니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최인철 교수님의 유명한 심리학 대중서를 십 년 만에 개정하여 다시 독자들 앞에 내어 놓은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프레임"이란 말 자체가 낯설었고, "프레임이란 프레임"을 써서 우리 자신의 행태라든가 주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을 고찰한다는 게 무척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제목이 그저 "프레임"으로 붙어, 아 무척 어려운 내용을 서울대 교수님이 설명하시겠구나 하고 지레 겁먹고 간신히 책을 열었다가, 의외로 쉬운 내용, 그러면서도 신변의 여러 골칫거리에 두루적용할 수 있는 가르침이 들어 있는 걸 알고 엄청 고마워하는 독자들도 많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10주년 개정판 프레임"의 발간 소식을 무척 반겨할 이들도 많을 줄 압니다.

심리학뿐 아니라 모든 순수학문이, 어떤 실제상의 효용이 바로 생겨서, 대학에 학과가 설치된다거나 정부, 기업 측으로부터의 상당 규모 지원이 유치된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길게 보아 응용학문이 산출할 수 있는 효과의 몇 배를 이들 섹터에서 기대할 수 있음을 알고 시설과 인력에 대한 투자가 감행되며, 넉넉히 지적으로 계몽된 사회 전반도 이미 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순수 학문 분야의 성과를, 다름 아닌 우리 일상의 복잡한 문제에 다소나마 응용, 해결할 수 있기까지 하다면, 학자의 그런 대중을 향한 수고에 이 또한 각별히 고마워해야 할 일 아닐까요. 심리학자가 쓴 이 책은 마치 본격 자계서마냥, 수양이 덜 된 탓인지 사회 구조가 모순에 가득찬 탓인지 우리의 속을 썩게 하는 여러 문제에 대해 제법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해 주기도 합니다. 많은 독자들이 호응을 보낸 대중서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번 10주년 기념판은 변화한 그간의 사정을 반영하여, 구체적인 예시도 그 10년 사이에 벌어졌을 법한 사례들이 담겨, 책이 업데이트판임을 실감케 합니다. 서양의 석학들이 자기 책에서 즐겨 쓰는 "셀프디스성 위트"도 곁들여져 저자의 여유 있는 심성과 현황에 대한 짐작도 가능하고요.  캠퍼스의 주자난을 겪고 있는 저자의 재직 학교를 소재로 삼아, "그 나름 창의성(좀 과하지 않나 싶습니다만)을 발휘한 주차"가 "웬 몹쓸 무개념 얌체짓"으로 돌변한 예는, "맥락"을 제거하고(쉽게 말해, "앞뒤 자르고") 그것만 부각했을 때 사람들의 평가와 시선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잘 보여 줍니다.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를 두고 외과의사가 "이 아이는 내 아들이니 수술할 수 없습니다!"라고 외친 에피소드는 예컨대 IQ 테스트(실전용 말고요)라든가 유머를 담은 책에 자주 등장하죠. 이 이야기는 성별(젠더)가 명확히 갈리는 언어 중 하나인 영어로 읽어야, 왜 독자(청자)들이 그리 쉽게 낚이는 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좀처럼 잘 안 속는 편인데, 어쨌든 이 소재는 10년 전(정확히는 9년 전) 초판에도 실려서, 한 단편적 사실을 이해하는 데 맥락의 활용과 선 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프레임은 정의(definition)이고 질문이기도 하지만(그 외에도 프레임이 대체 어떤어떤 기능을 하는지 저자는 다양한 해답을 내놓습니다. 모두 각각에 어울리는 쉬운 예화가 곁들여진 설명이죠), 은유이자 순서이기도 하다시는군요. 무슨 뜻일까요. 일단 가족들과 저녁 식사 약속을 정하는 어느 군 출신 인사의 표현을 그 예로 듭니다. "집합!"을 태연히 문자 메시지 속 대화에 끼어넣는 그에게, 가장 단란하고 평화로워야 할 가족사마저도 신속, 정확이 미덕인 군대 업무 프로세스의 "비유"로 대응되어야 할 대상일지도 모릅니다. 저자와 같은 소속 학교의 김난도 교수는 인생을 시간대에 비유하며, 아직 청춘(오전 6시대)의 시기를 지나는 젊은이들이 왜 지레 절망하고 비관적으로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지적한 바 있다고 저자는 간접 인용합니다. 어떤 회사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강조하는데, 이 역시 프레임의 마법으로 비합리적 관행과 원칙의 무시를 합리화하는 술책일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일상에서 잘못된 은유, 언어 관행을 걷어내는 노력은, 바로 "숨어들어 구조의 모순을 은폐하는 프레임의 제거 작업"이기도 함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자기 준거 프레임이란 말이 있죠. 사람은 현상이든 물건이든 공부해야 할 내용이든 자신과 연관 지을 때 더 오래 기억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책에는 polite라는 단어에 관한 설문 조사에서, "오바마"라든가 "그  반대말"이라든가 하는 질문을 받은 이들보다, "당신(자신)"과 엮인 질문을 받은 이가 더 오랜 기억을 가졌음을 거론합니다. 내 일이 아닌 남 일은 관여하고 싶은 욕구도 적고 우선순위도 떨어지기 마련이죠(저자는 이 책의 다른 대목에서 "프레임은 곧 순서"라고도 규정합니다). 책에 그런 말은 없지만 공부도 이와 비슷해서, 예컨대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다양한 사건을 암기할 때 일일이 자신의 과거사나 일상과 연계시켜 본다면 기억이 오래갈 것이 당연합니다.

심리학교과서뿐 아니라 법학 교과서에서도 소위 "의무의 충돌(Pflichtkonflikt)"과 관련하여 이 트롤리의 사례가 자주 끌어대어지죠. 두 갈래로 나뉜 궤도를 당신이 조종 가능할 때, 한 명이 일하는 궤도와 다섯 명이 일하는 곳 중 어디로 차량을 틀게 할 것(차량이 지나는 궤도상의 노동자들은 다 죽게 됩니다)이냐를 놓고, 많은 이들은 보다 적은 인명의 희생을 위해 마치 숭고한 결단("나라고 마음이 편하겠어?")이라도 행하는 양 전자를 선택합니다. 이번에는 차량이 지나는 철교 위에 당신 말고 건장한 남성(이게 중요하죠)를 확 밀어 떨어뜨릴 때, 다섯 명의 노동자를 구할 수 있다고 했을 경우, 당신은 이 남자를 희생시키겠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아무도 흔쾌히 "예"를 답하지 않겠죠. 사실 이는 전혀 다른 상황 둘을 그저 "5냐 1이냐"의 문제로 단순화시켜 동일한 문제로 치환한,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프레임의 마력 중 하나를 증명하는 예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최인철 교수님은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한다는 명분은 어느 경우에도 이처럼 무리가 따르는 것임"을 보이려는 의도입니다.


저자께서 장난스럽게 "후견지명"으로 부르는, 이른바 benefit of hindsight란, 지난 시점에서 결과를 다 알고 사태를 판단하는 누구라도 현자가 될 수 있음을 비꼬는 표현입니다. 이 책 초판에도 나왔지만, 2002 피파월드컵 어느 경기에서 이을용이 실축하자, "이 긴박한 순간에 대담한 이천수를 넣었어야지!"라며 감독의 결단에 손쉬운 비난을 하는 관중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는 예화를 읽고 다시 한 번 웃음이 나더군요. 만약 성공했더라면 "노련한 왼발잡이를 넣어 상대의 의표를 찌른 감독"을 두고 감탄이 이어졌거나, 혹은 이천수를 넣어 실패했더라면 "왜 경험도 없는 선수를 그저 간만 크다고 기용했는지"를 놓고 질타를 일삼는 모습이 훤히 그려진다는 저자의 지적은 매우 타당합니다. 스포츠 팬이 가장 자괴하는 대목은 바로 이런 "결과론의 성찬"입니다.

undocumented worker란 직역하면 (법적)서류에 등록되지 않은 노동자라는 뜻이겠는데, 이는 쉽게 말해 불법 이주 노동자죠. 불법 체류자(불체자)라고 하면 당장 적발해서 제재를 가해야 할 대상 같고, "~노동자"라고 하면 정당한 노동과 기여를 사회에 베풂에도 불구하고 제도의 모순으로 핍박받는 희생양처럼 여겨집니다. 이런 말을 쓴다는 자체가 정치적 프레임이란 뜻인데, 사실 이는 우리가 조선족 범죄자들을 다룬 뉴스에서도 흔히 접합니다. "조선족 아무개씨가..."라고 시작하는 뉴스는 시청자들에게, "아니 조선족이 또!"라며 분노와 짜증을 유발하지만, "중국 동포 아무개씨..."라고 시작하는 기사는 "어쩌다가 이 먼 곳까지 와서..." 같은 동정심을 부르기에 충분합니다. 현재는 이게 프레임인 줄 알고 많은 이들이 시정을 원하는 눈치더군요. 프레임이란 이처럼 일상 도처에서 우리를 "인식의 함정"에 빠뜨리는 녀석입니다.

저자의 결론은 온정적입니다. 어떤 사태를 바라볼 때 "사람 프레임"에 얽매이지 말고 "상황 프레임"으로 보면 그 일(대개 불미스러운)을 저지른 당사자에 대해 더 온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놈은 원래가 나쁜 녀석이야."에서 "상황이 그렇게 되면 나라고 별 수 있었겠어?"로 시점이 전환된다는 거죠. 반면 저자께서 지적하시는 대로 무책임한 상황 논리, 혹은 숙명론으로 쉽게 타락할 수도 있고, 이런 "상황 프레임"의 편한 장막에 숨는 이들이, 정작 자신 아닌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잣대를 교활하게(아니, 자신이 그러는 줄 모르니까 대단히 어리석게)들이댄다는 점도 우리 독자 입장에서 지적 가능합니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일상에서 누구나 쉽게 접할 예화를 통해, 왜 비생산적인 갈등이 성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며, 개인들은 속을 끓이고 스트레스를 받는지를 간단히 풀어준다는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어려운 심리학 용어(한번 공부해 보신 분들은 잘 알지만 예사 두뇌로는 본격 구조에 접근 못할 만큼 어려운 게 이 심리학입니다)를 전혀 쓰지 않는데다, 보통 독자들은 말은 못 외워도 이야기는 다들 기억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개념의 정수라든가, "당신이 당신 일상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가르치는 게 바로 이 책입니다. 읽고 나서 확실히, 어떤 레벨의 독자라도 뭔가 머리와 가슴에 남는 게 있습니다. 하드커버판이고 디자인이 세련되어 소장 욕구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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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여인실록 - 시대가 만들어낸 빛과 어둠의 여인들
배성수 외 지음 / 온어롤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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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과 편견이 끼어들지 않은 채, 우리 후손들이 마음껏 우리 시대의 시각으로 해석과 평가를 내릴 수 있는 1차 사료가 조금 더 풍성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누구나 가질 만합니다. 이런 아쉬움이 있기에, 역사에 대해 애정과 상상력을 듬뿍 지닌 재기 넘치는 저자들이, 오히려 자신만의 관점으로 풀어낸 역사의 자락을 놓고 우리 독자들과 즐거이 소통도 할 수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석이나 추완의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는 치밀한 과거에의 기록이 어쩌면 후세 사람들을 더 숨막히게 할지도 모를 일이며, 현실이 이렇지 못하기에 우리는 조상들의 다소 희미한 흔적과 더 진지한 대화를 시도하려 애쓰는지도 모르죠. 더군다나 그 대상이 현실의 엄청난 제약 속에 힘겹게 자아의 실현, 혹은 욕망이나 포부의 발휘를 꾀한 여성들이었다면 말입니다.

모두 여섯 분의 실존 인물, 그 중에서도 여성들만 짚고 있는, 저자들의 주관을 강력히 투사한 에세이 모음입입니다. 편마다 집필자가 다르므로 아주 세심히 읽은 독자라면 뭔가 관점이 일관되지는 않다는 느낌이 올 수도 있는데요. 어차피 네 분 저자들이 쓰신 내용이니만치 다른 저자들의 시선에 따라 재미있게 읽고 독자 나름으로 생각에 잠길 계기를 가지면 충분합니다. 성리학적 도그마에 (자신도 모르게) 갇힌 채 그간 독자 자신이 (특정 인물, 특히 여성들을) 너무 편향되게 바라보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 보는 것만으로도 책을 읽은 보람은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보희씨 주연의 <어우동>이란 영화가 당시 서울에서 큰 흥행을 기록하면서, 범죄자, 음녀로 단죄받고 죽은 성종 연간의 한 여인이 대한민국 국민 상당수의 뇌리에 그 이름이 새겨질 만큼 인지도가 높아졌습니다(그 전에 故 신봉승 선생의 통속물도 있었지만). 이상한 건, 왜 버젓한 가문에서 출생하여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한 미모(...)의 여인이 그토록 무모한 애정 행각을 일삼았고(사회적 폐습의 제재를 받으리라는 결과가 뻔한 데도), 또 간통과 음행에 통상 의율되는 형벌을 훨씬 넘어선, 극형까지 선고, 집행받아야 했냐는 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태 많은 역사학자, 저술가 들이 그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며 숨은 진정한 곡절을 추측해 왔습니다. 저자 역시 다분히 어우동(이 책에서는 어을우동이라는 표기를 따릅니다)에 대해 우호적, 동정적인 논조로 그간의 시각을 요약하거나, 자신만의 견해를 풀어 놓습니다.

다만, 확고한 유교적 도그마에 기반한, 제도 정비와 백성의 이념적 순치에 주력한 군주답게, 이 사건을 일벌백계로 다스려 어떤 본보기를 보이려 들었다는 해석에 대해서는 저자가 가볍게 "헛소리"라며 일소에 부치는군요. 그보다는 뭔가 절박한 현실정치상의 필요라든가 이 건과 연계된 다른 스캔들을 덮으려 든 게 직접 동기가 아닐까 하는 쪽으로 논의의 방향을 트는 저자입니다. 이능화의 저술 한 대목을 인용하며 "성종 본인이 행여 '기생으로 전업하다시피한' 어을우동과 모종의 관계를 맺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도 소개합니다. 이런 입장은 여태 많은 대중서에서 친숙히 접해 온, 또 그만큼 많은 공방과 검증을 거친 내용들이지만, 여튼 저자가 많은 문헌을 검토한 후 재치 있는 사견을 첨언했다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p42:5에 나온 "無乃選上新妓?'처럼 1차 사료에서 직접 뽑은 문장들도 신뢰를 더하는 저술 태도입니다. "無乃~?"는 "~가 아니겠는가?"하는 확인형 의문투입니다.

어을우동의 경우 아무리 전적으로 마음을 주고 진한 사랑을 나눈 상대(들)이라고 하지만, (그 과정이 간단치만은 않았을) 몸에 먹물을 새겨가면서까지 그 정인(情人)들의 이름, 추억을 간직해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이분이 남자를 한번 상대하면, 어느 정도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그 나름으로는 순도 높은 사랑을 나눈, 말 그대로 순정의 여인이었음을 오히려 알 수 있는 대목일까요. 저자는 "요즘 젊은이들의 세태"를 유비하며, 연인의 이름을 타투로 새기는 풍조와 다를 바 없으니 현대형 사랑을 몸소 (수백 년 앞서) 실천한, 꽉 막히고 정직하지 못한 시대에 온몸으로 반항한 여권운동가로까지 평가할 수 있다는 입장 같습니다. 그렇게까지는 몰라도 좀 짠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지거비라는 천인에게 성폭행을 당한 내막에 대해서도 저자의 추론이 서술되었으니 읽어 볼 만합니다. 성종의 인품과 치적에 대해 일반의 인식이 과대평가된 면이 없지 않다는 저자의 지적은 날카롭습니다.

이 1장은 이렇게 마무리되는군요.

"사람이 누군들 정욕이 없겠는가? 다만 내 딸이 남자에게 혹하는 게 너무 심할 뿐이다."

人頗疑於乙宇同之母鄭氏 亦有淫行 嘗曰

人誰無情欲 吳女之惑男 特已甚耳

앞부분은 "사람들이 자못 그 어미 되는 정씨도 음탕하지 않은가 의심했는데, 일찍이 말하기를.."이란 뜻입니다. 마지막 구절 중 "오녀(吳女)"는 문맥상 "吾女"의 잘못 같습니다.

신사임당의 경우 제가 아주 어려서 읽은 아동물(故 조풍연 선생 저)에서도 이분의 정확한 함자에 대해 알 수 없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어서 좀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이런 위인에 대해 기초적인 인적사항도 규명이 안 되었을까?" 이 책에도 대뜸 "인선이라고 전하지만 확실한 출처가 없다"는 서술로 글의 단초를 엽니다. 여성들이 아무리 재능이 빼어나고, 체제에 의해 칭송받는 위상까지 올라서도 여인에 대한 시각이 "누구의 아내, 여식, 어머니" 이상의 어떤 평가도 허락지 않는, 당대의 편협한 분위기를 짐작하고도 남죠. 대신 "임", "사"라는 당호를 구성하는 글자의 연원에 대해선 또 아주 흔히 설명을 접할 수 있습니다. 이분의 생애가 다분히 체제의 이념을 위해 선전되고 미화된 느낌이 없지 않기에, 5만원권 지폐 도안 선정 당시 적지 않은 반대가 여성계로부터 일었지만, 뭐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필치와 화풍에 그 단아하고 안정된 품성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저자의 평가에 동의합니다(비단 사임당의 경우에 한하지 않고 말입니다).

허난설헌의 경우 속 좁고 못난 남편 때문에 불행한 생을 살고, 이후 복권되었다고는 하나 대역죄인으로 몰려 금기시된 허균의 누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평가를 받은 게 사실입니다. 아마도 당대 남성 문인들은, 일개 여인이 뛰어난 글재주로 중국 본토(...)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큰 인기를 끈 게 시샘이 나 표절이라느니 허균의 편집 가필의 흔적이라느니 하는 폄하를 일삼았을 것입니다. 허나 문인의 작품마다 드러나는 독특한 개성과 풍취란, 눈 높은 감별가에게만 캐치되는 고유의 시그니처와도 같아서 이런 걸 삼류 가필가가 사후 조작할 수는 없죠. 물론 반대로 재능이 전무한 엉터리가 그 지경에 머무는 걸 무슨 여성이라서 불리한 평가를 받았다느니 가당치도 않은 핑계를 들이대는 행태가 합리화될 수는 또 전혀 없습니다.

조선시대 풍운의 삶을 산 여인을 거론하며 또 김개시가 빠질 수는 없습니다. 이 역은 신봉승 선생 각본의 MBC 드라마에서 원미경씨가 맡아 열연하기도 했다는데, 여태 여러 차례에 걸쳐 극화된 인물이지만 대중에게 뭔가 선명한 이미지로는 다가오지 않습니다. 국정을 망친 요녀로 지탄받다가, 아니다, 재조명 재평가가 필요하다며 옹호론이 반대편에서 강력하게 결집하기도 하는 인물들(장녹수, 장옥정이라든가)도 많은데 말입니다. 저자는 소위 국정농단, 비선실세 파동과 관련하여 이 인물의 부정적 측면을 강하게 부각합니다.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여튼 국가의 정식 계선,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사적 채널을 의존해 국정을 운영함은 군주로서 큰 과오가 아닐 수 없죠. 중립노선이다 실용주의 외교다 하며 폭군으로서의 오명을 거두려는(서인 세력에 대한 비판까지 겹쳐) 움직인 속에서도 끝내 광해군의 발목을 잡는 게 바로 이 인물의 행적입니다. 웬만해선 무슨 실드를 치는 게 불가능해서죠.

풍류를 알고 빼어난 문재를 과시하면서도 체제를 정면으로 비웃은 포지티브 캐릭터 중에 (실존인물) 황진이가 있습니다. 정식 기록보다는 야사나 문학 속에서, 통쾌하게 위선자들을 비웃고 다닌 어떤 문예적 상징으로 더 부각된 느낌인데, 여튼 우리 전통 문화의 지난 내역에서 이 뚜렷한 개성의 일류 문인이 빠지면 얼마나 내용이 빈약해지겠습니까. 황진이가 양반가 출신이었으나 자신 때문에 상사병에 걸려 죽은 어느 남성의 사연을 듣고는 (또, 무슨 움직이지 않던 관이 뭘 덮어쓰고 나서야 상여가  지날 수 있었다는 둥) 기문에 입적했다는 설에 대해 저자는 아주 강경한 어조로 반박합니다. 이 설화 요소는 꽤나 인기 있어 이미 월탄 박종화 시절부터 소설 속에 편입되기도 했죠.

마지막 김만덕의 일화야말로 현대 여성들의 귀감이 될 만한, 실천과 행동으로 여성 고유의 능력과 가치를 입증한 모범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본디 기적에 이름이 올라 있었으나 본인의 강력한 항의로 명예를 되찾고, 해당 지역이 기근에 시달릴 때 통 크게 손을 씀으로써 많은 백성들을 도탄지경에서 구해 내는 등의 업적은, 그녀의 활동 시기가 정조 연간이라는, 아직 근세의 질곡이 시대를 공고히 감싸거나 개혁에의 열망이 전면적으로 부상하지 못하던 국면이라는 점에서 더 놀랍습니다. 이 책에는 제주 지역에서 일어난 소요 사태와 그의 진정 국면까지 부수적으로 짚고 있어서 독자에게 도움이 되더군요.

세상의 절반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인 여성이 무시, 천대받는 사회와 체제란 어떤 경우에도 합당한 발전과 번영을 이룰 수 없고, 그런 공동체가 요즘처럼 개명된 세상에서 올바른 대접을 국제사회로부터 받을 수도 없습니다. 여러 우호적인 여건이 형성된 후에야 자신의 자질을 발휘하는 것과, 이처럼 악조건과 억압 속에서도 타고난 재능과 이상을 떨쳐 보이는 경우는, 사실 평가가 같을 수는 없죠. 무릇 타인의 모범이 된 인생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그 모친의 다음과 같은 절규와 함께 그 전 생애와 행적이 이상한 페이소스를 부르며 오버랩되는 어을우동에 대해서도 다시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는 그런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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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령군 - 조선을 홀린 무당
배상열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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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을 통틀어 (대개 남성이었던) 요승(妖僧)이 국정에 참섭하며 국기를 문란케 한 적은 있어도 샤먼, 무당이 실권을 잡고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은 드문데요. 이 책의 주인공이나 다름 없는 진령군(眞靈君)은, 이른바 칠천(七賤)의 신분 중 하나인 여성 무속인 출신으로 조선 고종 연간에 명성황후를 뒷배로 두고 온갖 전횡을 일삼은 실존 인물입니다. 역사에 기록이 남긴 했는데, 그 정확한 생몰 연도나 본명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매우 적습니다. 이 책 역시, 과거의 가슴아픈, 또 개탄할 만한 역사에 대해 우리 독자들에게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진령군의 생애에 대해선 상당부분을 작가님의 상상을 동원하여 채우는 편입니다.

책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정치적 부상(浮上)부터, 경술국치로 나라가 완전히 망하기까지의 시대상을 다룹니다. 평면적으로 질곡과 시련의 역사를 짚기보다는, 지도자의 무능과 부패가 어떤 식으로 백성의 삶을 피폐케 하고, 나아가 공동체의 존속 기반을 무너뜨리는지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역사 에세이에 가까운 형식입니다. 그러면서도 등장인물에 대한 구체적 묘사, 사건에 대한 실감나는 재현이 결들여진 덕에, 독자들은 한 편의 소설을 읽는 양 속도감 있게 한 권의  독서를 마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구구한 묘사나 몰입감 떨어지는 대화 등의 삽입이 없는 이런 포맷이라야, 읽는 독자한테 부담을 최대한 덜어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전반부의 주인공은 이하응이고, 저자는 그의 정치적 식견과 안목, 수완, 실행력, 지능 등의 자질을 놓고 꽤 후한 평가를 내립니다. 이런 평가는 마치 역사 소설처럼 그의 굵직한 행적을 요령 있게 시간순으로 서술한 후 적절한 근거를 들며 내려지는 의견이라서 독자는 (기존에 가지던 입장이 무엇이든 무관하게) 대체로는 동의해 가며 책을 읽게 되더군요. 그에 대해 "쇄국 정책으로 근대화를 늦춘 장본인"이란 비판이 우세하지만, 집정 당시에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 프랑스 등 서구와 접촉을 시도한 일을 보면 식견이 모자라고 시야가 좁아서 대국을 그르친 협량의 소유자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자는 특히 철종 사후에 조대비(신정왕후. 효유대비)와 담판을 짓고 정치적 동맹군으로 끌어들인 후 차자 명복에게 대보를 넘겨 주게 한 그 긴박한 과정에 대해 적확히 서술하는데, 차 필력이 좋으시구나 하는 느낌이 절로 들더군요. 사람(독자)마다 의견이 갈리게 마련이지만 저자의 필력이 좋으면 논제에 무관하게 일단 설득력이 생긴다고나 할까요.

호포 징수는 양반 세력의 약화와 조세 수입원의 확충 두 가지 목표를 노린 양수겸장격 조치였고, 이 과정에서 일반 서인들도 대거 양반신분으로 편입되어 결과적으로 신분제 해소까지 이르는 한 발을 내딛는 결과였음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뿐만 아니라 서원 철폐를 통해 백성의 부담을 경감한 후, 이 여력을 경복궁 중건 쪽으로 돌려 왕실의 위신을 세운 그의 노련한 정책 집행 스킬도 조명합니다. 다만 저자의 옹호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이르러 일본 측의 황후 시해 음모에 꼭두각시처럼 동원되어 위신에 큰 손상을 입고 끔찍한 수모를 당한 그의 행적에 대해서까지 후한 평가를 내릴 수는 없습니다.

집정 십 년을 넘길 무렵 최익현 등의 상소로, 하응의 차자 이형은 드디어 친정을 펼치기에 이르지만, 실권자가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의 처 민자영이었음은 무지몽매한 백성들도 다 아는 판이었습니다. 실각한 지 6년 만에 구식 군대(양영)의 반란에 힘 입어 재집권을 시도했던 흥선 대원군은 청의 즉각 개입으로 오히려 비참한 수인 신세가 되어 텐진에 억류됩니다. 이 책에서 중요한 건 이런 대원군의 부침이 아니라, 한때 신변의 큰 위험을 겪고 충청도로 도망한 민자영이,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 어려운 시절 어느 이름없는 촌구석의 무당을 만나 "반드시 지엄의 위에 다시 오르실 테니 결코 낙담하지 마옵소서!" 같은 격려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물론 저자의 실감 나는 픽션화이지만). 이 무당은 본인도 확신이 없었으나, 벽촌의 천한 무속인으로 일생을 썩기보다 한 번의 도박으로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자는 속셈이 작용하지 않았겠냐는 거죠.

역시 픽션의 일환으로, 이 무당이 자신의 입장에서는 진객인 민자영을 방문하기 앞서, 어떤 수완으로 향리의 "고객들"을 구워삶았는지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아이를 못 낳는 며느리에 대해선 그저 복채 지불하는 사람 마음 편하라고 후처를 저주하라든가 하는 얕고 흔한 처방을 제시하지 않고(들킬 경우 자신 역시 관헌에 의해 중벌을 받으므로), 무난한 방법으로 "이혼"을 거친 후 적당한 홀아비를 찾아 재취하라는 식으로 충고합니다. 보통 천인들은 한번 살판을 찾았다 하면 앞뒤를 돌보지 않고 폭주하다가 소탐대실하는 모습이 흔한데, 이 무당은 대단히 신중하고 앞을 잘 재는 타입이었음이 드러나죠. 그런가 하면 아들의 관운을 물으러 온 여인에게는, "내년에는 운수가 좋으니 기다리라"는 괘 풀이를 해 줍니다. "다른 무당은 북으로 가서 귀인을 찾으라던데요?"라는 여인의 대꾸에 그녀는 고개를 젓는데, 설령 여흥 민씨(다른 무당이 말한 "북쪽의 귀인")가 급작스레 세도가 지위에 올라섰다 한들 같은 종문이라는 이유만으로 과연 앞길을 챙겨 주겠으며, 섣불리 찾아갔다 박대를 당하느니 1년 정도 재물을 모은 후 본격 청탁을 하는 편이 낫다는 자신의 깊은 뜻을 그리도 모르겠냐며 혀를 찹니다. 물론 이는 허구의 산물이지만, 저자의 인물 형상화 내공에 독자로서 경의를 표하게 되는 대목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비록 신통력도 없고(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출신도 비천했다고는 하나, 세상 물정을 영악하게 살핀 후 모시는 분에게 유효적절한 충고는 할 줄 알았던 게 이 무당의 자질이라면 자질이었습니다. 게다가 모시는 분이 가장 힘들 시기에 그 앞에 생각지도 않게 척 나타나서 생을 거의 포기할 단계에 전폭적인 힘을 불어넣어 주었으니, 마치 로렌츠 박사를 엄마인 줄 알고 따르는 오리떼들마냥 민자영이 그녀에 정신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도 했겠습니다 (점점 누가 생각나죠?). 이 무당에게는 지극히 이례적으로 군호까지 내려졌으니, 진실로[眞] 영험하다[靈]는 이유에서 "진령군"입니다. 이 책에도 상세히 나온 대로, 군호는 공신이나 종실 인사들에게만 선별적으로 붙은 명예인지라, 이 조치가 얼마나 파격인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겠습니다.

임오군란이 터진 지 14년 후, 거침 없이 권세를 휘두르던 민씨 일문은 자영의 죽음과 더불어 권세를 잃고 위기에 몰렸습니다. 저자는 날카롭게도 "권세가를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원군은 바로 상인들"임을 지적하는데, 상인도 상인 나름인지라 권귀들의 측근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큰 그릇은 신의를 철석같이 지킴을 특히 강조합니다. 무당 진령군에 큰 신세를 입었을 만한 어느 상인은, 을미사변 후 처절한 몰락이 임박한 그녀에게 지난 은혜를 톡톡히 갚습니다. "재산을 일단 다른 이 명의로 돌리시고 은닉한 후, 움막에 숨어 살다 세인의 눈총이 다른 곳을 향할 즈음 죽음을 가장하고 다른 신분을 얻어 사십시오. 그 동안 재물은 제가 굴리고 불려 드리겠습니다." 민자영과 그의 일족은 몰락했지만 천한 무당 진령군은 이후에도 몸을 숨기고 살며, 빼돌린 재산으로 여유로운 여생을 보냅니다. "나라가 망하는 데는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나라를 망친 원흉도 처신만 잘 하면 일신의 평안과 부귀는 여튼 보장되었다는 게 독자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대목입니다.

을미사변 이후의 역사도 저자는 (진령군을 퇴장시킨 채) 자신의 평론을 곁들여 가며 박력 있게 서술합니다. 청일전쟁, 아관파천, 러일전쟁, 열강의 이권 침탈, 한일의정서, 을사조약 등이 차례로 다뤄지는데, 앞서 말한 대로 필력이 좋으셔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네요. 소위 고종 독살 미수 사건은 꽤 유명해서 몇 년 전 이를 소재로 한 영화도 만들어졌습니다만, 저자는 김홍륙에게 억울한 누명이 씌워졌다고 파악하여 새로운 가설을 내어 놓습니다(이 대목에서는 운만 띄우고, 진상은 맨 뒤로 가서야 밝혀지네요. 물론 작가의 상상이지만). 마지막 장에선 매천야록의 저자로 우리가 잘 아는 애국열사 황현이 주인공 시점을 자주 차지하는데, 국권 상실이 가까워질 무렵 그를 웬 노부인, 매우 윤택한 삶을 누린 듯하면서도 영민하고 날카로운 용모를 한 이[아, 여기선 좀 많이 아니군요]가 찾아옵니다. "책 쓰시는 데 자금이나 자료가 부족하진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다만.... 그때 커피(가비)에 독을 탄 자가 과연 누구였는지요?" 노부인은 화들짝 놀랍니다.

종두법을 보급한 공로자로 유명한 지석영이, 한창 권세를 휘두를 무렵의 진령군과 알력 관계였다는 사실은 사료에도 나옵니다. 역관 출신 김홍륙이 왕의 주변에서 권세를 농단한 건 그보다는 한참 후의 일인데, 여튼 저자께선 이 대목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독자에게 여운이 깊은 암시를 남깁니다. 책에는 고종이 따로 총애한 무속인 성강호도 잠시 언급되며, 피의 일요일 사건 당시 라스푸틴의 말을 좇아 니콜라이 2세가 무고한 민중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풍문도 나옵니다. 우리가 광해군 연간 샤르후 전투에서 요령껏 중립을 지킨 강홍립의 군호는 晉寧君으로 쓰며, 이 천한 무당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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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 그림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 1
우지더 외 지음, 자오시웨이 외 그림, 한국학술정보 출판번역팀 옮김 / 이담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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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2015) 중국에서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그리고 우리 한국의 국가원수들을 초청하여 전승절 기념식을 열었습니다. 이 중에는 이른바 "열병식"도 포함되었는데, 사실 이보다 세인의 눈길을 더 끈 건 시 주석 부부가 정원 가운데에 서서 각국 수반을 맞으며 기념촬영을 하는 행사였습니다. 시 주석 내외와 사진을 찍기 위해 긴 lane을 걸어(올라)간 후 합류하여 사진을 찍고, 펑 여사의 정중한 손짓 안내를 받아 퇴장하는 방식이었는데, 글쎄 여러 복잡한 느낌이 들게 하더군요. 무튼 2차 대전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르고 추축국을 격퇴한 쪽은 소련, 그리고 중국입니다. 이들 두 나라가 입은 인명 피해, 물적 손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독일과 일본의 악독한 초기 침략 공세(어느 누구라도 바로 항복할 수밖에 없을 만큼 기습적이고 파괴적이었던)를 강인한 항전 의지로 막아낸 공이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2차대전사를 소련 측 시각, 중국 측 시각으로 고찰하는 작업은, 비록 이들 국가의 학계(관변)가 적잖은 왜곡, 과장, 선전을 끼워넣는 습성이 있다 해도, 일단은 존중하고 의미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큰 몫을 해낸 건 바로 그들이었으니 말입니다.



이 책은 2015년 중국에서 출간된, <제2차 세계대전 연환화고(連環畵庫)> 시리즈의 첫째 권 한국어 번역판입니다. "연환화"의 기원은 남북조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데, 표의문자를 쓰는 중국독서문화의 특성상 대중들에게 널리 지식과 컨텐츠를 보급하기 위해, 신해 혁명 이후 특히 발전을 본 포맷입니다. 한자를 많이 써야 하는 일본 출판 풍토에서 "망가"가 널리 보급된 사실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페이지마다 큰 규격의 삽화가 두 컷 배치되고, 삽화마다 작은 폰트로 사항 설명(역사 서술)이 세 줄 정도 병기된 형식입니다. 모두 140페이지 정도의 분량인데다 그림이 대부분이니 금방 읽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쉽게 이해된다는 장점은 별개로 하더라도 이게 겉보기와 달리 빨리, 간단히 소화되는 내용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1/5쯤 읽고선 바로 다가왔습니다. 도판이 많다고, 쪽수가 적다고 가벼이 볼 게 아니라는 점 처음 실감케 하는 독서였다고나 할까요.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니, 첫째 2차대전을 그동안 서유럽 승전국 위주의 관점으로 공부한 독자의 한계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주제에 대해 쌓아 두었던 기존의 지식, 그리고 이처럼 새로이 접한 시야를 서로 조화, 통합시키는 작업을 다소 방해한 듯했습니다. 두번째로, 같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에 큰 시련을 겪은 중국측 지난 사정을 개관하는 마음이 결코 편할 수가 없는, 한국인으로서의 공통된 심회가 또 작용했겠지요.



책은 "관점" 위주로 서술되어 있지는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상세한 팩트를 중심으로 중일전쟁 초기를 조망합니다. 1권 후반부가 중일전쟁 포커스고, 전반부는 유럽에서 히틀러가 주데텐이나 체코 본토를 건드려 가며 망동을 부릴 시절을 짚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황의 디테일을 육하원칙에 맞춰 서술하기 때문에, 도판 비율이 높긴 해도 역사책 읽는 기분이 분명히 납니다(그러니 다시 강조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대충 넘기지 마시길요). 일러스트는 작가의 상상, 창작도 있고, 유명한 기록 사진 푸티지를 그대로 모사한 것도 있습니다(특히 히틀러나 마오를 담을 때). 어느 컷이건 앞의 것과 긴밀한, 혹은 함축적인 내용 연계를 맺기 때문에, 그림의 완성도와는 또 별개로 묵직한 품격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팩트의 서술, 벌써 취사선택부터가 "관점"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죠. 대부분의 서술, 요약은 누구나 동의할 만한 무난한 관점을 띱니다만, 예컨대 영국이 일본과 협정을 맺어 양쯔강을 경계로 세력권 인정을 해 줬다는가 하는 사실을 두고, "유화정책의 확장"으로 단정한 부분은 확실히 중국측만의 해석을 내세웠구나 싶었습니다("유화정책의 확장"이란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유화정책은 힘이 없어서 더 강한 상대를 달래는 건데, 상황에 떠밀려 가는 걸 어떻게 "확장"이라고 표현하겠습니까. 지들[영국]은 그걸 하고 싶어서 했겠냐는 거죠). 또, 미국이 노구교(루거우차오) 사건 전후로도 계속 일본에 광물, 자원을 수출하여 중국측의 피해를 가중시켰다는 점도 강조하는데, 이들 양국은 여튼 정식 외교를 맺은 사이라, 특별한 법적 조치 없이 대뜸 금수 조치를 내릴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의 소위 ABCD 포위망 형성이, 일제가 무모한 태평양 전쟁 감행의 직접 동기가 되었음은 엄연한 팩트입니다. 중국측의 피해의식이 과장되이 드러난 대목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여튼 우리 독자들은, 우리 경제와 정치, 군사 현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중국 측이 역사를 이런 관점으로 본다는 점만은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겠네요.


장개석 측의 남경 국민정부가 가장 아파해야 할 대목은, 일제가 1931년 만주(둥베이)를 병탄하고도 모자라 이처럼 중국 본토를 넘볼 단계에서도 소위 "공농홍군"의 토벌에만 주력하여 정권의 안위에만 신경을 기울였다는 사실이죠. 이 점은 같은 중국인 누구에게도 어떤 항변을 할 근거가 없습니다. 책은, 파죽지세로 밀고내려와 화북 거점의 상당수(누구나 강조하듯, 중국처럼 광대한 영토를 선이 아닌 면으로 장악하는 건 지극히 어렵죠)를 점령하고는, 상하이에서 중국측과 일전을 벌입니다. 책의 3장은 상하이 전투를 바로 다루는데, 독자들은 책에서 상세히 기술한 내용을 주의깊게 공부할 필요가 있겠네요. 확실히 이런 내용이 텍스트 위주라면 지루할 수 있는데 그림이 함께하니까 잘 읽히긴 합니다. 그림 위주라고 가벼이 보고 덤빈 사람이라면 부담스러울 수 있어도, 반대로 빼곡한 글자 위주의 전쟁사만 보던 독자라면 엄청 고마워질 겁니다.


80년대 학번 어르신들에게 아주 친숙할, 이른바 (협의의) 사회과학서적(두레, 일월서각 등등)에서 자주 봤던 이름 장즈중(장자충), 펑위샹(풍옥상) 장군 등의 활약이 이 상하이 전투에서 아주 두드러집니다. 흔히 "파시스트 강도"라는 표현을 쓰지만, 이 무렵의 일본 만군 측은 정말 뻔뻔스러울 만큼 억지를 지어내어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중국 측의 정당한 이해를 침해했죠. 우리는 중국측이 당시 변변한 항전도 한번 못해보고 일패도지한 줄 알지만, 특히 이 책은 9집단군, 21집단군, 항공 제4대대 등의 영웅적인 항전과 전과를 집중 소개합니다. 일본 측은 엄청 고전하다가 증원병력이 본격 파견된 후에야 승세를 굳히는데요. 이 과정에서 특유의 교활한 술수를 부려 화전 양면 전술을 구사하고 쿵샹시 등을 만나 위장평화공세를 펴기도 합니다. 참으로 가증스럽고 간악한 행태지요. 마오는 이 국면에서 따로 세운 공은 없으나 휘하의 세력에게 이러이러하게 대응하라며 먼 데서 지침을 내려준다고 하네요.

책은 연환화라는 그래픽의 역할에 크게 의존할 뿐 아니라, 책 앞에 인물들의 간략한 소개, 전황의 연대기식 정리 등을 곁들여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지도가 좀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 1권에는 권두에 실린 소략한 세 컷뿐이라 그게 아쉬웠습니다. 중일 전쟁, 나아가 2차 대전 전사에 대해 그간 보이던 면만 주목한 우리 독자들에게 균형 잡힌 시야를 갖게 도와 주는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연환화 중 삽입된 텍스트는 당연히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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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세계 중산층의 몰락 - 신경제가 약속한 일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폴 크레이그 로버츠 지음, 남호정 옮김 / 초록비책공방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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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공급측면(중시) 경제학이라고 하면, 자유방임이라든가 시장의 자동 조절 기능에 대한 신뢰(맹신) 같은 조류에 대뜸 연결시키기 쉽습니다. 쉽게 말해 보수우파 경제학의 든든한 한 분파 중 하나죠. 이 책의 저자 폴 크레이그 로버츠 교수는 실제로 저 학파가 세계 초강대국의 정책 기조를 장악했던 레이건 시절 핵심 경제 핵심 브레인 중 한 명으로 활약했고, 그 공으로 각종 영전을 수훈받은 인물입니다. 아무리 파격적인 발상을 일삼으며 기존 해석의 전복을 꾀하는 논자라 해도, 세상에 레이거노믹스를 두고 좌파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 책은 우파보다는 진보좌파 독자들이 쌍수를 들어 반길 만한 주장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슈퍼리치들만 배를 불리고 나머지는 모두 가난해지는 세상이다, 자본주의는 이미 자체 정화 기능을 상실했다, 약탈적인 금융자본가(뱅크스터라는 신조어를 씁니다) 말고 모두가 패자가 되는 게임이다, 생태를 총체적으로 파괴시키는 몰염치한 기업 활동 때문에 "세계화"된(되어가는) 지구는 오염되고, 가난해지고, 끝내 모두가 제3세계로 전락할 것이다(이건 저의 요약이 아니라, 저자의 책 곳곳 주장을 합쳐 보면 논리적으로 자동 도출되는 명제입니다), 어떻습니까? 시민사회단체나 진보정당의 교육 홍보 자료에서나 볼 법한 주장들이라구요? 다시 저자의 약력사항에 눈을 돌이켜 봅시다. "1981년 레이건 행정부 시절 미 연방 정부 재무부 차관보를 지냈으며.. "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독자 눈에 지금 헛 것이 보이는 중인지 원.

사실 돌이켜보면 서플라이 사이드 진영은 국민경제라는 거시경제 단위의 총체적 활력, 건강성에 보다 주안을 두었다는 점에서, 행여 자국의 거시경제에 위해가 될 상황의 변동, 정책의 전환 따위가 눈에 보이면 당연히 공격적 태세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격한 근본주의 우파 같으면 아예 거시의 미시환원을 주창하지, "낡은" 국민경제, 국가 같은 관념을 아예 도외시하기도 합니다. 그런 공급측면학파의 전성기 시절 중진 중 한 분이, 탈규제 글로벌 트렌드 속에 자기반성 기제가 거의 해체되다시피한 신자유주의(이 책에서 그런 표현이 자주 쓰이지는 않는데, 다만 "신경제"가 거의 호환되는 개념이기도 하고, 이 책의 원제가 레세 푀르, 즉 자유방임의 총체적 실패를 지적하는 문구이므로 그냥 써도 무방할 것 같아요)를 맹렬히(좌파보다 더합니다ㅋ) 공격하는 게 어떤 변절(ㅎㅎ), 회심, 혹은 리캔테이션 같은 범주로 볼 필요는 없겠습니다. 즉, 그로서는 "기존에 밀던 입장"을 그대로 고수하는 겁니다. "지금 미국의 국민 경제가 다 죽어간다." 이런 위기의식이 든다면, 그 치유를 위한 처방에 (효과만 있다면) 어떤 내용도 담길 수 있죠. 아 "공급 측면을 강화"하는 게 해당 학파의 사명 아니었습니까.

시민운동가는 뜨거운 가슴으로 어떤 말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학자라면 자신의 입장, 혹은 기존 도그마에 대해 반박을 개진할 때 명확한 근거를 들어야 합니다. 직관이 아무리 뛰어난 학자(예를 들면 케인즈)라도 치밀한 논증과 실례로 뒷받침하지 못하면 그건 자격이 없다고 봐야겠죠. 석학의 저서답게 그는 첫 장에서 "왜 자유방임주의(특히 자유무역 만능주의)의 신화가 (이제는) 깨졌는가(혹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가)?"를 차분히, 치밀하게 설득, 입증합니다.

경제학 중 특히 국제무역론을 전개할 때, 경제학의 개조 중 한 명인 리카도의 "비교우위설", 그리고 헥셔-오린 모형의 언급은 기초 중의 기초입니다. 이는 마치 애덤 스미스의 분업론이라든가, 알프레드 마셜의 수요-공급 동일가치설이나 마찬가지로 경제학의 무류(無謬)적 절대 도그마에 가까운 대접을 받아 왔습니다. 1980년대 칼라 힐스 미 무역대표부 대표라든가, 우루과이라운드라든가, WTO 설립 당시 선진국들이 개도국을 그토록 몰아댈 수 있었던 원동력도, "아니 학문적으로 당위가 확립된 사항에 대해 왜 정치적 핑계를 대며 회피, 부인하려 드는가? 당신은 대학에서 대체 뭘 배웠나?" 이 한 마디에 반박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이제 사정이 바뀌고 있다는 소리니 귀를 쫑긋 세우지 않을 수 없죠. 본래 삼라만상에는 근본 질서라는 게 있어, 일시적으로 교란, 요동을 겪어도 결국은 정상(normal)로 회귀할 수밖에 없고, "시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도 그 근본 질서의 핵심을 이루는 걸로 여겨져 왔습니다. 작금의 교란은 그저 일시의 일탈이 아니라는 게 이 책의 시사, 아니 강력한 주장입니다.

저자(뿐 아니라 다양한 학파의 많은 학자들이, 이 책에도 여러 군데에서 인용되듯 이미 제법 오래 전부터 입을 모아 가던 결론이긴 합니다)는 먼저 리카도의 비교우위설이 대전제로 깔고 있던 두 가지 사실을 들춰 냅니다. 첫째(이건 뭐 이론적으로 빼도박도 못할 명쾌한 논증이라 좀 충격적이기까지 한데요) 각국의 상대가격 비율이 달라야 한다, 포르투갈이 (다른 건 다 접고) 와인만 생산하려면, 그 와인이 다른 나라의 사정에 비해 포르투갈 안에서 훨씬 저렴해야 한다. 영국에서 옷:와인=1:2(단위는 일단 무시합시다)이라면, 포르투갈에서 1:1 정도는 되어야 분업화의 이익이 있다(이 경우 영국도 와인은 접고 옷만 생산하는 게 이익인데, 옷이 상대적으로 싼 편이기 때문이죠). 이익이 있다는 건 두 나라 모두, 같은 노력(자본, 노동)을 투입해서 더 많은 양을 생산하고 이를 나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도 종전보다 손해를 보지 않는 포지티브 썸 게임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세계는 어떤가? 물론 편차가 여전히 존재하나, 세계화가 상당히 진척된 지금 어느 나라건 상대가격 구조에 별 차이가 안 나는 게 현실에 가깝다는 겁니다. 옷과 와인의 가격은 어느 나라를 가 봐도 대체로 1:2의 비율이라는 거죠. 저자는 상당히 날카롭게 일반의 착각을 지적하는데, 일본의 자동차 회사가 미국보다 싼 값에 자동차를 생산하는 건 리카도의 이론에서 말하는 그 비교 우위가 아니라는 겁니다. 일본에서 상대적으로 자동차가 흔하게 만들어져야 그게 리카도적 의미에서의 비교우위라는 뜻이죠.

두번째로 진짜 충격은 이 부분인데, 리카도는 특히 생산 요소 중 자본의 국제 이동을 거의 상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자본이 다른 마음을 먹고 생산 기지를 (인건비가 싼, 혹은 토지 임대료가 저렴한) 타국으로 옮긴다면, 리카도의 세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지금 자본은 아무 한계 없이 국경을 넘나들지 않습니까?(한국 증시에서 외국인 세력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죠) 또 그래서 토빈稅 같은 게 몽상이 아닌 현실 제도 도입이 운위되는 거고요.

이 논증이 매우 명쾌할 뿐 아니라 리카도 원전의 텍스트, 취지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간 곡해되고 과장된 자유무역론을 주장해 온 이들의 입지가 당연히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속한 학파는 달라도 이런 자유무역론의 허상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의견을 같이하는데, 대표적인 분으로는 제임스 K 갤브레이스(한국의 80년대 학번 어르신들이 모를 수가 없는 故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교수의 아들입니다), 론 바이먼 같은 이들이 있고, 이중 특히 후자는 리카도의 이론을 "수학적으로 과잉 결정된 것"으로까지 비판합니다. "과잉결정"이란 말은 쉽게 풀자면, 너무나도 많은 제약조건 아래에서나 나오는, 대단히 특수한 상황에서나 타당한 결론이라는 뜻입니다. 이 역시 수학적으로 이미 증명이 끝난 줄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수학이 동원되어야 학문적 진리가 되는 곳이 경제학입니다.

저자 본연의 학파적 개성이 드러나는 대목은 "오프쇼어, 아웃소싱"에 대한 사정없는 맹공입니다. 첫째로 아웃소싱을 통해 원가가 내려간 상품이 국내에 소비되는, 이른바 물가하락을 통한 이점이란, 이미 직장을 잃거나 대폭 내려간 실질소득이 안기는 피해 앞에 별 의미가 없다는 지적입니다. 이 책이 쓰여진 게 2013년인데, 지금 미국 정부가 취하는 경제정책 기조를 보면 그저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현실적 설명력이 있음이 다시 확인됩니다. 외국에 진출한 기업이 그로 인해 더 획득하는 수익의 추가분은, 그 대부분이 그 현지국 경제를 배불리는 데 쓰일 뿐(일단 이렇게 가정하죠. 나중에 반전이 있습니다), 자국의 소비자들에게는 큰 혜택을 못 주며, 이렇게 해서 한 국가 안의 빈부 격차가 더 커진다는 결론입니다.

다음으로 그럼 기업을 받은 그 다른 나라의 국민 후생은 늘어나지 않겠는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야 책 한 권의 논리일관성, 체계성이 유지되겠지만) 일단 타국에 진출한 기업은 주로 개도국이나 후진국 정부를 상대로 유리한 교섭을 시도하는데, 저렴한 인건비나 임대료 메리트도 있겠지만, 환경 관련 규제나 시민들의 따가운 여론 등 방해 요소가 없다는 게 그들로서는 가장 큰 인센티브이며, 이 때문에 마음껏 환경 파괴적, 생태 적대적 경영 행태를 드러낸다는 겁니다. 1차 산업에 종사하던 해당 주민들로서 일단은 손에 쥐는 명목소득이 늘어나 좋겠지만, 이후 파괴된 환경을 안고 살아야 하는 등 "외부 비용(정확하게는 부정적 외부 효과)"을 막대히 치른 후라, 결국은 종전보다 나을 것 없는 형편에 놓인다는 거죠.

미국, 서유럽 등 선진국에선 중산층이 실직하여 차차 "제3세계화(이 책의 표현입니다)"되고, 기존의 제3세계는 환경 지옥으로 인해 애써 번 소득이 상쇄되고, 그럼 이익을 보는 건 누구일까요? 약탈적 금융자본가들과 이들의 조종 하에 놓인 기업 최상층부 극소수 경영자, 그리고 주주들입니다. 이들 빼고는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공급측면 학파가 처음부터 얼마나(그나마) "국민 경제"를 염두에 둔 입장이었는지 이 책을 통해 짐작이 가능해지는 대목이죠. 사실 이렇게 이론의 본분에만 충실하면 좌도 우도 없어지기 마련이며, 지금 세상이 종래의 낡은 보-혁 프레임으로 보기에 너무 복잡해진 까닭도 있습니다(이 점은 나중에 다시 다른 맥락에서 언급됩니다).

사소하지만 저자가 다소 착오를 일으킨 부분이 있는데요. 일단 일본이 미국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마련한 걸 두고 "인소싱"의 예로 파악하시는데, "인소싱"의 개념이 학자마다 다르긴 해도 이런 걸 인소싱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이건 일본 입장에서 엄연히 아웃소싱이죠. 낮은 생산비를 찾아 외국(미국)으로 왔으니 말입니다. 저자께서는 또한 "이는 국내(일본 내)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는 분량이 아니라, 미국에 그대로 수출하기 위한 목적이다"라고 하시는데, 맞긴 하나 그건 저자의 주장과 맥락에서 무관한(irrelevant) 지적입니다. 이 생산공장이 올리는 수익이 어디로 어떻게 분배되는가가 포인트이지 않습니까? (같은 이유에서, 미국 수입 쿼터 규제[지금은 아님]를 피하기 위해 이 공장이 설립되었다는 역사적 배경 설명도, 유익한 정보이긴 하나[저자께서 당시 그 행정부 정책 입안자 중 한 분이니] 논의의 설득력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반대 진영의 논거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미국 기업도 아웃소싱을 하지만 이처럼 일본 기업도 아웃소싱을 하니(그렇다고 미국 입장에서 이게 인소싱이 되는 건 아니죠), 부작용이 서로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주장은, 책 조금 뒤에서 논파됩니다. 우선 저질 일자리만 결국 남게 되며, 기업 입장에선 노동자 풀을 바꿔 가며 협상력을 약화시킨다거나, 노동자의 지위만 취약하게 만들 뿐이란 거죠(책에 이런 표현이 있지는 않고, 독자로서 정리해 보면 그렇다는 것). 다음으로 해외에서 전문인력을 수입해 온다는 기업들의 명분(핑계)에 대해서는, 실제로 취업 비자를 받아 연수(고급 인력이라면 이런 영역에서 연수를 받을 필요가 없죠 일단)를 받는 근로자들이, 실제로는 대부분 단순 반복 노동에나 적합한 저급 인력이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비자에 그런 걸 일일이 명기하지는 않으므로 얼마든지 전용 가능).

기존의 중저급 국내 인력은 직장을 잃고, 저급 노동자들만 해외에서 잔뜩 수입해 오거나 아예 해외로 공장을 옮겨 (그곳에서도) 저급 노동자만 고용한다.... 그러면 고급 인력은 다 어디로 간 걸까요? 어디서 기업은 공급을 충당합니까? 그에 대해 이 책은 논의가 없고, 독자는 치밀하게 읽다 보면 이게 자연히 궁금해질 겁니다. 그에 대한 답은, 기업이 업무 자동화라든가 시스템의 힘에 점점 크게 의존하고, 또 부가가치 기여도도 그런 비(非)인력 섹터가 더 크므로, 이 책의 주제와는 무관하게 그런 수요가 점점 사라져 가는 게 대세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삼성이 신입 사원 공채를 올해 사실상 취소한 것도, 심지어 고급 인력에조차 기대할 바가 거의 없어서 아닐까 추측할 수 있죠(니네 없어도 회사 잘 돌아감). 4대 기업 공채는 이미지 제고를 위한 일종의 서비스 같습니다.

이 책 본문보다 서문, 그리고 독일어판 서문에선 특히 충격적인 제언을 저자는 꺼냅니다. 이 책이 쓰일 무렵에는 그리스발 경제위기가 한창 고조되다 서서히 미봉될 때겠는데, EU의 효용은 이제 다했으니 각국은 과감히 허울을 걷어내고 자국의 현실에 맞는 주권적 재정경제정책을 운용하라는 겁니다. 특히 독일을 향해선, "그렇게 그리스의 빚을 대신 떠안아가며 과연 당신들이 얻는 게 무엇인가?"라며 현실을 바로보라고 쓴소리를 하네요. 대안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방대한 자원, 독일의 자본과 투명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이 결합하면 또다른 기적이 탄생하며, 동유럽의 불안한 정치 경제도 이 바람에 다 묻혀 번영하는 지역 공동체가 새로 탄생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왜 러시아를 경계하는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외국군(미군)을 주둔시킬 필요가 무엇인가? 비효율을 제거하려면 현지 사정을 잘 알고 더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 주권 정부가 제 할 일에 나서는 길밖에 없다. 이거 왠지 트럼프나 보리스 존슨, 테레사 메이 등의 주장 같지만 어쨌든 그 나라에서 다수 민중의 지지를 받은 정책 아니겠습니까.

이 책은 미국의 국민 경제를 무엇보다 걱정하지만, 해외에서 벌인 미국의 군사적 삽질, 환경 파괴, 제국주의적 행태를 누구보다 날카롭게, 신랄하게 비판하는 논조이므로 결코 치우친, 이기적인 국수주의가 아닙니다. 시스템의 지속을 담보하는 선의의 규제를 강조하고, 계층 상하가 고루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국가 단위의) 거시경제 건전성을 우선시하는 입장이죠. 세계체제, 글로벌라이제이션의 허상을 통박하는 이런 관점에 대해 좌우를 떠나서 모두가 지혜를 짜내야 할 시점입니다. 공교롭게도 제레미 코빈 같은 정치인도 오랜 지론으로 EU를 반대하며 비주류로 소외되다 노동당 당수로 화려하게 컴백하지 않았습니까. 생존을 위한 노력에는 어쩌면 결론이 하나뿐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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