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르소, 살인 사건 - 카뮈의 <이방인>,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카멜 다우드 지음, 조현실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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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예컨대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같은 작품이 트리컨티넨탈리즘의 관점에서, 그간 그저 타자화되기만 했던 "현지인"의 감성과 의식과 의지를 제자리로 어떻게 복권시켰는지는 우리 한국의 독자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부당하게 일방적이고 무책임하게 우상화되었던 "백인 주인님" 로빈슨 크루소의 시점이 아닌, 본의 아니게 충직한 노예로만 철저히 자리매김되었던 방드르디(프라이데이)의 이야기도 한번 들어는 볼 필요가 있고, 식민자가 아닌 피정복민으로서의 아픈 역사를 공유한 문화권의 독자라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정직한 맞대면을 위해서라도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을 이유없이 죽여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규범과 당위에 철저히 무관심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뫼르소의 사연이 그만큼 충격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공감을 주었다면, "그저 뜨거운 태양 때문에" 값없는 죽음을 당한 "그 아랍인"의 시점에선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개 범법자, 일탈자에 불과한 뫼르소가 열광의 대상이 되어 온 데 비해 그야말로 억울한 피해자일 뿐인 "그 아랍인"의 죽음은 과연 뫼르소가 그날 그렇게나 무신경하게 취급한 만큼이나 제3자들로부터 계속 외면당해 마땅한 무가치한 사건인지도 어쩌면 당연히 의문이 제기되었어야 했습니다. 뫼르소는 무자비한, 또 아무 명분 없는 살인 한 번으로, 이방인은커녕 뿌리 없이 떠도는 현대인들 사이에선 아예 우상이 되어버린 판에, 난데없이 (그에게는 진짜 이방인이었을 살인자에게) 목숨을 앗긴 "그 아랍인"은 시대과 공간을 초월하여, 심지어는 그가 속한 동족으로부터까지, 잊혀지고 무시된 "이방인"으로 떨어지고 말았죠. 그런 이유에서 이 소설은 "누가 진짜 이방인인가?"를 우리에게 다시 묻는, 왜 이런 질문을 여태 누구도 하지 않았던지 새삼 각성케 하는 매우 진지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1인칭 화자 하룬의 입으로 여러 번 강조되듯, "해변에서 그때 죽은 그 아랍인"은, 뫼르소의 자랑스러운 무용담에서 이름도 한 번 언급되지 않고, 심지어 용모에 대한 묘사조차 거의 없습니다. 하룬 노인은 "이름을 아는 자는 쉽게 죽일 수 없다"는 말로 뫼르소의 동기, (그의 표현에 따르면) "현란하게 꾸며낸 알리바이"를 설명합니다. 사람 하나를 죽여 놓고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그토록 화려하고 멋있게, 책 한 권을 써 가면서까지(그냥 자랑만 하고 말 것을) 합리화할 수 있을까, 찬탄과 복수심이 그의 어투에 공존하는 이유는, 바로 하룬 노인 그가 죽은 "그 아랍인"의 친동생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신원을 밝히면서 우리는 근 70년만에 피해자의 이름이 "무싸"인 줄 알게 됩니다.

과장과 왜곡이 끼어들었겠지만(이 이유도 중요한데 나중에 논해 보겠습니다) 어렸을 적 하룬이 바라본 "형 무싸"는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키도 크고 강건하고 남자답고, 지금은 노인이 된 하룬이 일생 동안 한 번도 거쳐 본 단계가 아닌, 의젓한 남성, 어른으로서 그 젊은 시절부터 정체성을 확립한, 어머니를 포함 가족 모두의 기둥과도 같은 인물이었죠.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가정에서 자라난 것도 이 형에 대한 의존을 강화하는 한 계기가 되었겠는데요.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그 어머니 되는 여인의 모든 기대를 한몸에 받은 아들, 또 그럴 자격이 있는 아들이 그처럼 비명에 죽었으니, 남은 가족, 특히나 그녀의 속으로 그를 낳은 어머니가 얼마나 피폐해졌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허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1인칭 화자인 하룬이었는데요. 어머니가 죽은 장남의 역할, 그에 품었던 기대를 모조리 이 어린 소년에게 투사하는 바람에, 그는 자기 자신으로 올바로 성장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온전한 성인 남성으로도 정신이 자립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생부의 정체를 알 수도 없었지만, "현실에 발을 디디지도 인간들의 고통을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를 증오"한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이 부친이란 "신" 그 중에서도 이슬람의 신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비유이자 동시에 직서[直敍]). 이렇게 보면 "신과 같았던 형 무싸"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더 넓은 이해가 가능하죠. 하잘것없는 백인 식민자가 그저 짜증난다는 이유로 죽여 버린 형의 죽음은, 가족(종족) 전체에게 (맞는지 그른지 검증의 여지 없이) 주입된 어떤 당위(이슬람적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모욕, 신성 모독으로 이제 의미가 확장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뫼르소가 무싸를 죽인 사건은 그저 정신병자에 의해 저질러진 하찮은 사고가 아니라 이제 역사적 의미까지를 띠게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 중엔 심지어 하룬과 무싸의 어머니가, 뫼르쏘의 할머니로 추정되는 어느 노파에게 가서 화풀이하는(복수라고 생각) 장면도 나오는데, "그녀가 과연 친할머니인지 뭔진 모르지만 여튼 같은 roumia 아니겠어?"라는 종족적 구실까지 만드는군요. "루미아"는 프랑스어이긴 하나 마치 Gringo처럼 현지인의 어휘에서 역수입해온 경우죠. 비잔티움 제국을 일러 아랍인들은 "룸"이라 불렀고, 아나톨리아를 셀주크가 뺏어 온 후에도 현지에 세운 정치 단위를 "룸 술탄국"이라 가리킨 역사를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무싸는 뫼르소에게 아무 이름(=의미) 없는 존재였는데, 마치 로빈슨 크루소가 흑인의 입장은 고려하지도 않고 멋대로 "금요일"이란 이름을 붙여 줬듯, 살인자에게 그 희생자의 이름이 무싸이면 어떻고 "오후 2시(살인 사건이 일어난 시각)"면 어떻냐며 하룬 노인은 죽은 형을 일러 "주드"라고도 부릅니다. 물론 이 주드는 존 레넌의 아들 줄리언도 아니고 토마스 하디의 "주드 디 옵스큐어"도 아닙니다. 프랑스어 원 텍스트에선 이를 Zoudj라 표기했는데, 아랍어로 쓰면 زواج입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나가는 철자를 로마자로 그대로 전사했을 뿐인데요, 사실 저 단어 زواج는 아랍어 사전에 등재된 것도 있고 안 나오는 사전도 있습니다. 표준 아랍어가 아니라 마그레브 일대에서만 쓰이는 방언에 가까워서입니다(북아프리카는 표준 아랍어와 방언이 모두 쓰이는 대표적인 이중언어 지대이죠). زواج, 이 말의 뜻은 토박이 알제리인인 작가 카멜 다우드가 너무나 잘 알듯, "숫자 2, 쌍둥이, 결혼" 등 다양한 의미를 품습니다만 의미가 차이 날 때마다 발음이 (주쥐, 좌쥐 등으로) 달라지기도 합니다(아랍어 표기에는 모음이 없습니다).

이 زواج는 작품 속에서 아주 다양한 함의로 변조, 응용되는데요. 후반부에 드러나는 충격적인 사실처럼, 하룬은 형이 죽은 후 거의 정확히 20년이 되는 알제리 독립 투쟁 과정에서, 현지인 해방 부대에 소속되었다거나 그의 지침을 따르지 않고 프랑스인 식민자 한 명을 "새벽 두 시"에 죽여 버립니다. 어머니에 의해 강요된 "죽은 형의 삶"을 살며 자신과 주변 모두로부터 소외되었던 하룬은, 이런 영웅적 행위로 "오해"될 만한 사건을 저지르고도 끝내 동족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질타를 받습니다. "왜 하필 '(휴전 협정)이후'였냐? '이전'이었다면 아무 문제 없을 것 아니냐?" "새벽 두 시라는 (경계성) 시간대인 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요?" 형의 삶을 외투처럼 뒤집어써야 했던, 평생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하룬에게, زواج는 사실 그의 형이 아니라(쌍둥이가 될 수 없는 게, 성격이나 외모 등 모든 면에서 너무도 다른 형제였기 때문이죠), 오히려 형의 살인범 뫼르소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랍권에서 가장 흔한 이름 "하룬"은, 알고 보면 아랍인도 그렇다고 식민 지배자인 프랑스인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진정한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하룬은 (저 위에 쓴 것처럼) 신을 두려워하고 미워합니다. 무슬림들은 꾸란을 거의 암송해야 할 만큼 텍스트와 친숙하지만, 하룬은 오히려 그의 형이 비참하게 살해당한 기록인 소설 <이방인>을 달달 암기하는 수준입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형이 죽은 살인사건의 "수사 도구"가 바로 프랑스어였고, 프랑스어는 그에게 세계를 해석하고 탐구하며, 불쌍한 어머니에게 그 세계를 "번역(여기서도 작가의 트리컨티넨탈리즘적 세계관이 드러나죠)"하는 통로였습니다. 원제 "Meursault, contre-enquete"에서 뒷부분은 "재조사"란 뜻인데(작품 중에도 "재수사"란 말이 나옵니다. 추리 장르에서 자주 등장하는 "케이스 클로즈드"의 반대, "케이스 리 오픈"이죠), 1인칭 화자 하룬은 아무도, 심지어 알제리인 동족들도 망각하고 무시해 버린 억울한 살인에 대해, 혼자 힘으로 가망 없는 "진상 규명"에 일생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나 이게 민족의 울분을 대변한다거나, 심지어 형의 원한을 풀기 위한 동기도 아니었으며, 그보다는 어머니에 의해, 동족들에 의해, 프랑스 식민자들에 의해, 마침내 자기 자신에 의해 참된 정체성이 묻혀 버린, 스스로를 찾아 나서는 고독한 여정이라고 보는 게 맞지 싶습니다. 이 점에서도 그는 "실체도 모호한" 무싸(혹은 주드, زواج)라는 형의 쌍둥이가 아니라, 바로 사형수 뫼르쏘의 쌍둥이입니다. "처형당한 자가 어떻게 풀려날 수 있는가?" 하룬은 이렇게 묻지만 그 근거는 바로 방황하고 뿌리 없는 자신의 행적이죠.

어머니의 영향 때문에 남자로서 자립 못 하고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아야 했던 하룬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 미리엄은 과연 실존 인물이었을까요? 저는 그에게 세상의 창을 열어 준 "프랑스어"의 은유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살인범의 자랑스런 회고담이 얼마나 우아하고 멋들어진 외관을 하고 있는지에 경악한 그는, 이 프랑스어를 두고 자신의 존재 구원, 혹은 영구 미제를 해결할 매개자(혹은 다른 의미에서 쓰였던 "전령")로 인식합니다. 삶도 자존도 형의 죽음과 어머니의 개입에 의해 빼앗긴 그에게, "투르망(영어의 torment하고는 좀 색깔이 다르죠)"을 상쇄할 유일한 길이 바로 텍스트에의 몰입이었겠습니다. 미리암이 허상이나 비유였다면(사실 여기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단단한 실체가 있다고 보기 어렵고 일체의 비유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1인칭 하룬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대학원생"은 그럼 누구일까요? 여기서 그 젊은이와의 대화 중 ton peuple이라고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역자 조현실 교수님이 적절히 지적하듯 이는 프랑스 식민자에 대척되는 알제리의 일반 민중일 뿐입니다. 이 학생은 그럼 타자의 위치에서 모든 상황을 객관화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학생"이긴 하되, 그 출신은 작가 다우드와도 같은 알제리 토착인인지도 모릅니다. 흔한 이름 "하룬"이 알고보면 경계인, 주변인을 대변하듯(실제로 작가 다우드는 이슬람 율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은 적까지 있다고 하니!), 이 학생 역시 다우드의 자아 한 부분을 대변할 뿐 아닐지. 욕구에 가득찬 실존과, 허깨비 같은 종족의 우상 사이에서 고뇌(투르망)하는 개인은 뫼르소나 카뮈 뿐이 아니라는 작가의 처절한, 그러면서도 쿨한 독백이라고 파악할 수 있겠네요.

책 디자인이 참 예쁜데 리뷰에 사진은 나중에 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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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 만화, 가능성을 사유하다
닉 수재니스 지음, 배충효 옮김, 송요한 감수 / 책세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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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flatten이란 말은 영어 정식 어휘 속에 완전히 자리잡던 항목은 아닙니다. 모든 단어에 반대를 뜻하는 접두사 un-만을 붙였다고 일일이 새 의미가 생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이 말은 (영미권 화자들의) 일상에서 점점 쓰임새가 넓어져가며 여태 없던 지지를 획득해가는 중인 듯 보입니다. 그리고... 혹시 이 멋진 책을 통해, "기존의 통념을 깨부수고 나태한 습관에서 벗어나며 창의적 도약을 이루다" 같은 뜻으로 새롭게 코인되는 계기를 마련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말은 "플랫랜드"라는 가상의 세계, 그 안에 사는 가상의 종족 이야기를 책의 서두에서 꺼냄으로써 발상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프랑스어권 철학자, 인문학자들이 자신의 저작에서 종종 시도하듯, 단어나 개념 하나를 주인공 삼아 끝도 없는 담론을 펼치는 모습은 우리가 매우 자주 봐 왔는데 그것과 비슷하다고 여기면 되겠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 책이 만화 형식을 빌리고 있다는 건데요, 이처럼 친근한 포맷 속에서 주제가 펼쳐지기 때문에 이질감, 거부감이 덜할 뿐 아니라, (난해하지는 않아도) 추상적인 주제가 독자와 더 생동감 있는 소통을 시도한다는 게 확실한 장점입니다.



"플랫랜드"는 환경이 2차원 평면으로 구성되어, 그 속에 사는 이들까지 모두 납작납작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 나머지는 우리들과 우리들이 사는 세계와 같습니다...만 우리들은 몸서리치며 그 사실을 부인하려 들 것입니다. 우린 엄연히 입체적이고 자랑스러운 3차원의 사람들 아니냐, 저런 불쌍한 한계에 갇혀 있는, 편협하고 어리석으며 불우한 이들과 어떻게 나란히 놓일 수 있느냐, 등등의 반응이 예상되죠. 하지만 만약 4, 5, ..n차원 세상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이런 말조차 차원의 질곡에 묶인 불쌍한 정신의 습관이자 어법입니다. 아마 +1[혹은 그 이상]차원의 거주자들은, 다른 어휘[이 역시 우리의 상상이 못 미치는]를 써서 연민과 경멸을 표현하겠죠)면? 그들 역시 우리의 느낌과 비슷한(차원이 다를 테니ㅋ 이런 추측밖에 할 수 없습니다) 반응을 보이며, 저차원의 감옥에서 탈출하던 그때의 쾌감을 회고하고, 현재의 자신에 크게 안도할 것입니다...



인간은 돌이켜보면, 지옥 같은 과거로부터 탈출해 온 도약의 체험을, 언제나까지는 아니라도 손으로 꼽을 만큼 겪어 왔습니다. 그 당사자, 개척자, 선구자들은 그 숨이 멎을 듯한 감격을 (자신만 못한) 동료들과 공유하며 존재의 무한 영속 불가능을 다만 한탄했을 터입니다. 문제는 그런 감격적인, 존재의 엘리베이션을 세대는 물론 개체조차도 지속화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그게 가능했으면 그 후손들인 우리는 모두 붓다가 되었을 겁니다). 앞 문단에서 그 고차원의 거주자들이, 우리(저주받은 3차원쟁이들)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연민이나 안도(특히 이 후자가 나쁜데요) 같은 반응에 머문다면, 결국 무사안일, 퇴행이란 나쁜 트랙에 떠밀린다는 이유에서 우리보다 나을 것도 별반 없을 테니 말입니다. (궁극적으론 타락, 소멸)

플랫랜드의 거주자들은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위"와 "북쪽"을 구분 못 합니다(하긴 플랫랜드 전체가 저자의 상상이니 특정 표현 하나를 빌리고 어쩌구 할 것도 없습니다만). 그들의 제약 가득한 처지에선 효용도 상상도 필요 없는 경지이지만(아마 거기 이런 걸 꿈꾸는 녀석이 있다면 원로들에게 혼쭐깨나 나겠죠?), 혹 눈을 뜨고 여태 못 보던 그 시야를 넓혀 동족들에게까지 그 심원한 비의를 전달해 주는 개체가 출현한다면, 그들의 삶은 (아무리 최소한으로 잡아도) 몇 배는 행복해질 것입니다. 신석기 농경 혁명의 성과를 갓 맛본 세대의 어린 자식들이 "농사 안 지을 때는 어떻게 먹고 살아서 여기까지 왔어?"를 몇 번이고 제 부모들에게 물어 보듯 말입니다. 인터넷이 뭔지 모르던 세대와 나면서부터 웹 서핑이 네이티브의 습성이 된 세대가 공존하는 지금은 그만큼이나 희귀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플랫랜드의 장래 전망은 느닷 3차원의 가능성을 지목하고 나온 이단적 개체에게, 나머지 집단 성원들이 이를 어떤 태도로 맞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H G 웰즈의 단편 <눈먼 자들의 나라>(몇 달 전에 나온 <마술가게>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를 보면, 눈이 먼 이들이 오히려 눈을 뜨고 세상의 참모습(에 그나마 가까운)을 보는 외부인을, 기를 쓰고 자신들의 협소한 질서에 순치시키려 드는 설정이 나옵니다. 뭐 어쩌면 기존의 질서가 급격히 붕괴하는 결과보다는 그 편이 (단기적으론) 바람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문제는 "안 보이는 눈이 정상이고 도덕적이며, 눈이 보인다는 건 개인에게도 질병이며 불행이다!"를 필사적으로 세뇌하는 끔찍한 몸부림입니다. 눈이 안 보인다는 끔찍한 한계도 이처럼이나 합리화할 수 있는데, 하물며 "여태 큰 문제도 없던 루틴과 습성"에 대해선 우리가 얼마나 끼고살며 과잉보호하려 들겠습니까? 플랫랜드니 남미의 오지(웰스의 설정)니 하는 게, 결국은 우리가 그토록 헛된 자긍을 느끼며 사는 바로 이 세계입니다. 2차원도 2차원의 눈으로 보면 그게 2차원이 아니며 우주의 전부일 뿐이죠.



저자는 특이하게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우리가 현재의 저차원성을 절감하고 다른 단계로의 도약 가능성이 열리는 건 (유감스럽게도) 어떤 강렬한 충격(대체로는 불쾌한)을 받았을 때이다." 지금 이 세상은 특이점(커즈와일이 쓴 맥락에서의)이 열렸다고도 하고, 4차 산업혁명 덕분에 종전의 사고방식으로는 모두 큰 곤경을 맞을 시점이라고도 합니다. 어딜 가나 창의력, 창의력 하는 게 그만큼 존재 혁신의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뜻도 됩니다. 이런 말을 하면 무슨 자계서의 교훈을 낭독하는 착각도 들겠습니다만, 이 책은 아직 젊은 저자가 컬럼비아 대학교 박사 과정을 통과한 학위 논문 거의 원본 그대로를 단행본으로 펴낸 내용입니다. 최초로 만화 형식의 디서테이션이 된 영예를 간직한 이 책은, 역설적이게도 포맷이 만화이기에 그 자체로 "플랫랜드"이기도 한, 자기지시적(형식과 내용이 일치) 존재태로 독자와 외계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특이한 운명, 혹은 사명을 띠기도 하네요.



우리는 누구나 만화를 읽으면서 자신의 상상력과 독해 능력을 똑같이 2차원에 머물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현실에서보다도 더 열심히 차원의 한계에 도전하며, 그 밋밋하고 평평한 세계를 우리의 차원에 맞춰 주려 작가만큼이나 재생과 재해석에 애정을 쏟습니다(딴 걸 그렇게 열심히 하지). 김화백(ㅋ)의 온갖 삽질과 과오에다 과대의미부여를 해 가며 성실하게도 놀고 있는 모습이 다 뭐겠습니까? 김화백이 우리에게 알려 준 중요한 메시지가 있죠. "(워딩과는 달리) 병원은 결코 만능이 아니며, 마이신만큼이나 한계가 뚜렷하다." 헌데도 현실의 성과(그게 적지 않다 해도)에 안주하는 이들은, 정말로 병원이 모든 상처와 위기를 간편히 넘겨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그리고 죽습니다). 상황에 떠밀려서 다른 차원을 절박한 마음으로 엿보기보다, 만화를 읽는 자발적 쾌감으로 우리의 상상력과 포텐을 즐거이 끌어내는 편이, 그 객관적 성과나 주관적 희열 양면에서 훨씬 바람직한 결과이지 않을까요. 저자 닉 수재니스는 김화백보다는 좀 더 진지한 모드로 이 자명했으나 낯선 교훈을 우리에게 일깨웁니다. 플랫은 곧 추함, 어리석음, 그리고 노예 상태와 죽음이며, "언플랫"은 그와 반대되는 모든 가능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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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 - 미래는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
편석준 외 지음 / 미래의창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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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깁슨은 "미래는 벌써 우리 곁에 와 있으나 다만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라는 명언으로, 기술 혁신의 일상성과 그에 따른 세계관의 절박한 변화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1990년에 제작, 개봉되어 큰 인기를 모은 오락영화 <토털 리콜>은 미래상의 가장 두드러진 요소 중 하나를 "사실이 아니면서 사실처럼 느끼게 하는 오락"으로 꼽아 극의 중추 소재로 활용했습니다. 이때 일반에 처음으로 그 가능성이 널리 인식된 이른바 "가상 현실"은, 이의 보편적 상업적 활용을 위한 여러 지엽적 기술이 간헐적으로, 혹은 제법 화제를 모아가며 개발되었지만, 이상하게도 근 이십 년이 지나도록 저 고전 SF에서 제시한 비전에 영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에도 그런 진단이 자주 나오지만, 심지어 한때 "가상 현실"은 잊혀진 영역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역시 이 책 중에서 시원하게 지적하듯) 페이스북이 뜻밖에도 오너의 강력한 의지에 바탕하여 이 분야 선도적 사업자로 나섬에 따라 다시 부각되는 요즘입니다.

가상현실은 물론 산업적, 혹은 국가 정책적으로 무궁무진한 응용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 많은 기업들이나 우리 같은 일반 소비자들이 관심을 두기로는 엔터테인먼트, 여가 선용, 오락 방면에서의 역할 쪽입니다. 사람은 못 먹어 본 것, 못 구경한 것, 못 느껴 본 것을 감각적으로 접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면서부터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종족입니다. 체험을 직접 해 보고 싶지만 여러 사정,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거나, 다른 절실한 과제나 업무 때문에 감행하기 꺼려진다거나(이 역시 기회비용의 문제입니다만) 할 때는 계획을 접는 게 보통이죠. 가상현실은 한마디로 말해, 비용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거의 진짜나 마찬가지인 체험"을 겪게 돕는 도구, 환경, 시스템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비용과 가격입니다. 가짜를 즐기는 데 진짜 체험이나 별 차이도 안 나는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면 아무도 그 상품을 사려 들지 않을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 혹 판매자 입장에서 가격을 타협할(낮출) 수 없다면, 그 서비스는 구매자에게 "진짜를 차라리 능가하는" 멋진 쾌감을 선사할 수라도 있을 만큼 효과가 좋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면에서 생산자들은 고객의 니즈를 충족 못 시켰기에, 여태 업황이 지지부진했던 거죠. "가상 현실"이 인터넷의 보편적 이용이라든가, 모바일 소통보다 더 가능성이 일찍 주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 이 정도에 머문 건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왜 다시 가상현실인가? 저커버그 같은 이들도 마냥 개인적 선호를 동기 삼아 모험성 투자를 결단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우리 동양인들보다는 서양인들이 특히, 머리로는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감각, 특히 시각적 속임수에 자발적으로 넘어가며 "속는 쾌감"을 즐기는 습성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세계화가 진전되고 보편적 대중 문화의 향유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일상의 기쁨이 된 지금, 놀이동산 방문이나 기존의 3인칭(이 말의 뜻은 책을 읽어 보면 명확히 다가옵니다) 게임 몰입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분명한 욕구가, 여러 채널을 통해 소비자들을 길들이고 나의 원 체질이나 기호인 양 침투를 압박해 옵니다. "이거 안 해 봤으면 말을 말지 그래?" 게임과 담을 쌓고 사는 이들에게조차 뉴스를 통해 "포켓몬 고"가 뭔지는 싫어도 개념 파악이 절로 되는 현실입니다.

virtual이란 말은 참 묘한 어감을 가집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사실상의" 같은 뜻이 맨 먼저 제시됩니다. 그럼 이건 사실이라는 걸까요, 그 반대라는 걸까요? 우리말 번역 "가상(현실)"을 보면, 아예 가짜라고 단정하는 명명입니다. 빤히 가짜인 줄 알지만 진짜 같고, 진짜보다 더 실감나며 (이게 중요한데) 신나는 효과, 이게 바로 virtual의 본질입니다. p20에는 폴 밀그람 예일대 교수의 규정을 빌려, 현실- 증강현실 - 증강가상(이는 아직 우리, 그리고 산업계, 학계에 낯선 phase입니다)- 가상 처럼, 네 단계가 전 구간을 채우는 개념스펙트럼을 제시합니다. 이 네 단계를 모두 합쳐 "혼합현실"이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띠의 양 끝에 위치한 두 단계도 100% 순도는 아닌 셈이죠. 이 스펙트럼이 우리에게 요긴히 가르쳐 주는 한 가지 포인트는,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이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대해 기술적(descriptive) 설명이 아닌, 어렴풋하나마 전체 구조의 그림이 그려진다는 겁니다. 기술적 설명은 바로 그다음 페이지에 도식화하여 자세히 나오는데, 이 역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핵심만 잠시 발췌하자면, 증강현실은 1) 유저의 시야를 완전히는 가리지 않고(=상당 부분을 그대로 드러내고), 2) 이동하면서 사용하는 게 보통이고 3) (생산기업 입장에서)위치 처리, 데이터 처리, 카메라 인식 같은 기술 개발에 주력한다는 점입니다. 가상현실은 정확히 그 반대이며, 3) 관련해서는 인체의 시각, 청각 등 기초 연구에 보다 집중하는 게 큰 차이입니다. 제 생각에는 개발자들이 주안을 두는 방향인 3)이, 이 책을 읽어나간다거나 혹은 벤처 투자에 관심 있는 분들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할 사항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의 감각이란 그 조작의 주체가 철석같이 믿는, 생존과 존재의 바탕이 될 기제이자 생리 작용이지만, 그 현실은 불완전함과 착오 투성이인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상현실이든 증강현실이든 이 인지 메커니즘의 틈을 파고들어 "(객관과 무관한) 주관의 쾌감을 극대화"하자는 상품이자 서비스의 승리를 목적으로 삼는 사업영역이므로, 어떻게든 나약한 인간을 최대한 즐겁게 속여 줄 방법을 찾아내는 게 최종 목표입니다. 책에 여러 언급이 나오지만, 이른바 지연속도(그 이하로 화면을 연결하면 단절을 연속으로 착각) 같은 이치의 발견은 벌써 지지난 세기부터 연구를 통해 주목되곤 했습니다. 특히 가상의 세계 하나를 머리속에 자발적으로 생성해 내는 게 VR의 과제이므로, 120도 이상의 시야각을 확보한다거나, 초당 90장 이상의 화면을 처리할 능력을 기기가 보유하게 만드는 게 "시각 기만" 방면에서 업계의 화두였습니다. 나머지 몰입감은 청각 기만이 처리하는데, 이 분야에서도 소위 3D 오디오의 개발 등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체험의 형성은 이제 상용화의 이름값에도 거의 부끄럽지 않은 수준에 다다른 듯 보입니다. 책 뒤 각론에도 나오지만, 화면 중 유저의 시각이 머무르는 그 부분만 해상도를 높인다거나 하는(시선이 머무르는 부분의 해상도로 전체의 선명도를 판단하는 인간 시각의 한계) 선택과 집중의 간단한 아이디어로 큰 호평을 얻은 한국 기업의 예도 나오는데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개별 단말기의 성능이 아직 아주 만족스런 정도가 아닌 만큼, 정해진(시장 가격을 맞출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최대 효용을 낼 수 있는 창의력이 요구되는 형편입니다. 아직은요. (아니라면 벌써 우리는 VR 기기의 즐거운 홍수 속에 파묻혔을 겁니다)

장기간 육상 대중 교통 수단에 탑승하거나 항해 중엔 왜 멀미가 날까요? 실제 동작과 뇌가 인지하는 내용이 불일치하는 데 그 원인이 있음은 우리가 다 알죠. VR도 마찬가지라서 소위 VR멀미(적절한 번역 같고요. 우원어는 simulation-sickness라고 이 책에 나옵니다. sea-sick[배멀미] 같은 기존 어휘를 잘 비튼 신조어죠) 문제가 오랜 동안 해결이 안 된 게 이 분야의 발전을 가로막은 큰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이 외에도 포컬큐의 혼란(실제 거리와 뇌의 인식 사이의 격차 설정 교란) 때문에 눈의 피로가 가중되는 게 여전한 난제 중 하나라고 하는군요.

전세계에서 3D 영화 <아바타>가 가장 큰 호응을 부른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었는데요. 이때 사실 3D TV도 일부 얼리 어댑터에 의해 호응을 얻고 붐이 일기도 했던 걸 저도 기억합니다. 책에서는 안경 착용의 불편함 등 여러 이유로 이 기막힌 호기를 업계가 살리지 못하고 결국 무위로 돌린 아쉬움을 지적합니다.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같은 게 몇 년 전에 업계 개발자뿐 아니라 유저 섹터에서도 논쟁의 불이 붙는 등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만 또 지금은 지지부진하고, 폴더블 스마트폰 등에 자리를 내 준 형편이죠. 이런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 혁신적 기술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시장에서 현실적 수요를 창출할 수 있게 얼마나 단가를 낮추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는 가상현실뿐 아니라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등 모든 분야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번역 서비스(일단 질적 측면은 차치하고)를 패킷당 비상식적 요금을 내야만 이용할 수 있다면 과연 누가 쓰려 들겠습니까. 부자들은 그냥 책임도 쉽게 따질 수 있고 융통성도 높은 사람을 쓰면 그만입니다. 책 후반부에서는 패기 있는 한국 기업들의 여러 사례를 소개하는데, 읽으면서 이런 현실, 즉 보유한 첨단 기술의 즉각 상용화가 어려운 한계에 대해 절감할 수 있더군요. 카카오는 어느새 법제상으로나 현실의 영향력에서나 "대기업군"에 속하게 되어, 이런 젊은 도전자들의 요긴한 기술을 사들여 벤처 생태계의 바람직한 양상을 구축해 가는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이뿐 아니라 재벌기업 롯데도 자신의 테마파크가 제공하는 오락의 방향성을 다변화하는 데 이 VR 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데서 엔터테인먼트 미래상의 분명한 비전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VR은 꼭 오락에만 쓸모가 궁리되지도 않습니다. 현재 한국 TV 정보 방송에도 자주 등장하는 내시경 치료술 홍보 영상을 보면, 어느 정도는 VR의 핵심인 그래픽을 최대한 채용한 것들입니다. 책에는 미국 어느 대학에서 VR을 활용한 수술, 동시에 이를 이용한 의대생 교육 현황에 대해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합니다. 다소 궁색한(?) 응용 같기도 하지만 고소공포증 환자 등을 치료할 때 이 가상의 "환경 구축"은 무엇보다 치료진에 큰 도움을 주는 기술이겠죠. 진통제의 오남용은 결국 환자에게 다른 질환을 초래하기도 하는데, "감각에의 기만"은 이 진통제 처방을 줄이는 데도 크게 도움을 준다는 대목이 특히 공감되었습니다.

VR은 사실 우리 일상에서 이미 바싹 다가온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스크린 골프 연습장"이 VR의 가장 생생한 응용이 아니고 뭘까 싶은데요. 이 외에도 저자는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사업화하려다 뜻이 꺾인 섹터가 바로 "플스방" 같은 예라고 지적합니다. 이는 저작권자인 소니가 강력한 제동을 걸었기 때문인데, 권리자로서 당연한 권리 행사이긴 하나 보편적 소비를 위해 어찌 보면 알아서 채널 하나가 구축된 셈인데 업자 모두가 상생하는 쪽으로 판로 생성, 정규화가 법제를 통해 이뤄지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운 점입니다. 뛰어난 기술이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현실에의 안착으로 해피 엔딩이 이뤄지기까지 이처럼 까다로운 고비가 많다는 점 다시 확인되었구요. 책에 소개된 구체적 정보 덕분에 당장 간편히 사용,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에 대해서도 더 구체적으로 아는 기쁨이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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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전쟁 - 과학이 바꾸는 전쟁의 풍경 한림 SA: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9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편집부 지음, 이동훈 옮김 / 한림출판사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Scientific American>에 실린 멋진 기사들을 주제별로 묶은 단행본 시리즈 중 아홉번째 권입니다. 현재 열 권까지 번역 소개되었는데, 일반 대중 상대의 알찬 과학 잡지가 논의의 주제를 얼마나까지 넓게 잡고 독자들에게 지적 쾌감을 안겨줄 수 있는지 저 목록만 봐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독자 입장에선 자신의 관심 주제에 따라 한 권만 골라 정독해도 해당 분야의 첨단 상황(state of the art)을 설명한 멋진 아티클의 향연에 정신없이 빨려들어갈 수 있으며, 시리즈의 다른 권을 읽고 전 맥락을 먼저 파악해야 하는 성격은 전혀 아닙니다(한 권 한 권이 독립적). 그러나 이 열 권을 모두 읽어낸다면 교양 있는 독자로서 확실히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질 것임은 분명합니다(이 말을 하는 이유는 실제로 제가 그런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 뿐만 아니라, 세상을 파악하는 눈이란 도대체 과학 지식에 발판을 두지 않고서는 그 실체와 효용이 얼마나 부실할 뿐이지 새삼 통감할 수 있죠. 과학에서 시작하여 삼라만상을 이해할 수 있고, 세계가 돌아가는 근본 원리를 탐구할 때 과학의 지평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더 이상의 진전이 불가능하다는 게 이 총서들을 통해서도 증명되는 셈입니다.

신사, 유한 계급의 지적인 취미로서 자연과학이 눈부신 발전을 보이던 시기도 과거에 있었습니다만 요즘은 개인(설령 그가 천재라고 해도) 단위의 연구와 작업이 쉽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는 격언처럼 절실한 니즈에 의해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분야라야 의미 있는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게 자연과학이라고 해서 예외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정말, 딱 뿌린 만큼만 거둘 수 있는 냉혹한 계산의 야속함이 제대로 느껴지는 게 이 분야의 실태이기도 합니다. 역사상 첨단 과학의 발전은 전쟁이라는 야만적 이벤트에 의해 가장 강한 추동력이 마련되기도 했고, 전쟁의 수행 과정을 통해 그간 모르던 여러 원리가 새삼 발견되며 이론상의 두드러진 진전이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과학과 전쟁은 그 기법의 발전에 있어 서로 밀접한 함수관계를 형성했음은 누구 눈에도 자명하기까지 합니다.

종래 군사 교육 코스에서는 현대전을 CBR(발음이 좋지 않다고 해서 이후 ABC로 배열 순서와 개념어를 교체하기도 했습니다만 대체로 뜻은 같죠)이란 두문자로 요약하기도 했습니다. 화학전, 생물학전, 방사능전, 이 셋이 현대 들어서 "크게 변화한 전쟁의 국면"인데(이 책 원서의 제목이기도 하죠, pace가 아니라 face이긴 하지만), 이 책은 그 전통적(어느 새 retronym이 되어 버린)인 전쟁기법 외에, 1) 무인기(세칭 "드론"), 2) 로봇, 수트(이 책 중의 정식 용어로는 "외골격" 즉 엑소스켈레톤[더 정확하게는 "동력"이 앞에 붙어야죠]이라고 합니다) 등 육상 전투에서 활용될 다양한 무인-유인 장비의 발전 3) 사이버전 4) 우주궤도상에서의 공격- 방어 시스템 등이 더 추가된, 현대적으로 정립된 신 개념 전쟁의 종합적 국면을 설명합니다.

단, 군사학 교의서처럼 엄격하고 기술적인 문장, 구성이 아니라, 설명의 깊이는 전문적이되 관점이나 바탕에 깔린 세계관은 마치 시민사회단체의 패널 입에서 들려 주는 듯, 민간인, 일반시민의 눈높이에 맞춘 정서가 그대로 풍깁니다. 첨단 전쟁 기술을 옹호하며 적을 섬멸하자는 기조가 아니라 그 반대로, 우리 인류가 이처럼이나 치명적인 무기, 살상 방식을 고안하고도 과연 평탄한 미래를 향유할 수 있을지, 거의 모든 아티클에서 그 걱정이 묻어날 정도입니다.

첨단 전쟁 기법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주제이고 서술의 목적이지만, 특히 3장 "사이버전" 같은 대목은 현대인이 고도의 편익을 누리는 전력 기반 시설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에 놓여 있으며, 악의적인 세력에 의해 뿌리부터 흔들릴 위협에 노출되었는지 실감나게 가르쳐 줍니다. 또한 전통적인 국가 대 국가(혹은 대규모 무장 집단) 사이의 전쟁과는 달리, 소규모 테러 단체나 반사회성향 짙은 개인에 의한 질서 교란(이게 이른바 "테러 행위"이죠)에 대해서는 과연 정부(중에서도 군사 당국)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마지막 챕터를 할애하여 상론합니다.

드론은 사실 전적으로 무인(unmanned)인 상태에서 운용되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양성, 훈련된 인력이라고는 하나 역시 "조종사"에 의해 조종되는 기기입니다. 책의 1장은 생각 밖으로 개발 역사가 오래된 무인기를 활용한 전투 기법에 대해 지난 연혁을 간단히 짚은 후, 특히 미 군사 당국이 주된 활동을 펼쳐 온 파키스탄 전역(戰域)에서의 활동 결과를 분석합니다. 드론의 개발, 운용은 "값비싼 인력의 손실을 막고(제가 2차 대전을 다룬 역사서 등을 읽어 보면, 그 총명하고 고난도 교육 투자가 이뤄진 젊은 조종사들의 희생에 대해 그저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는 무덤덤한 분위기로부터 충격을 받을 때가 있었네요)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단을 택한다는 점에서 필수"라는 옹호를 받기도 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 한국 대중의 대체적 정서는 큰 반감을 가질 법한데요. 이 책(의 해당 부분 서술) 역시 그런 "시민사회적 우려"를 명시적으로, 그리고 행간에 짙게 반영합니다. 파키스탄인들(중 파슈툰 인들)은 "싸우겠다면서 정작 전쟁터에 당사자가 얼굴도 안 비추는 비겁한 행태"라며 비난하기도 한다는군요. 무인기는 현재 장기 체공이 어려운 형태지만, 벌처, ISIS(그 말썽꾸러기들과는 무관합니다. 미국에서는 우리처럼 IS로 약칭하지 않고 ISIS로 더 늘려 부르기 때문에 혼란이 더할 듯) 등 보다 긴 시간의 활강이 가능한 혁신이 현재 이뤄지는 중이라고 하네요.

인간의 허약한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더 강한 동력, 더 광범위한 범위의 작업이 가능한 로봇의 개발은 이미 반 세기 전부터 강대국들, 대기업들이 초미의 관심을 가져 온 과제입니다. 이 책의 2장에서 이 오랜 꿈(혹은 위험한 야욕)이 어디까지 진척되었는지, (1장 드론보다 더 많은 분량으로) 진지한 분석이 펼쳐집니다. 크게 1) 사람의 노동(때로는 판단까지)을 완전히 대신하는 장비 2) 사람의 능력을 강화(인핸스)하는, 탈착이 가능한 보조 도구로서의 각종 첨단 장치들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 교과서 혹은 부교재에서 익히 배워 온 대로, "로봇"은 어느 체코 소설가의 상상이 집약된 작품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조어입니다. 이 조어의 함축성, 적절성은 (이 책에도 나오듯) 사실 체코어의 뉘앙스, 혹은 해당 지방의 역사를 돌이켜본 후에야 더 공감하게 되는데요. 의미심장하게도 "도구, 소모품으로 여겨진 존재가 이후 주인, 기성 지배체제에 정면 반항"하는 심상찮은 사연까지 이 개념에는 담겨 있습니다. 책은 현황의 무서운 발달상만을 기계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전개되는 끔찍한 디스토피아상까지 염두에 두며 과연 고도로 자율화한 로봇 장비가 언제까지 인간의 통제 아래 머무를 수 있겠냐는 우려까지 함께 표현합니다. 물론 폭발물 제거 등 인간을 투입하기 곤란한 각종 필수 작업에 요긴하게 활용되는 등 로봇의 건설적이고 평화적인 활용 가능성 역시 무궁무진합니다.

사이버전은 재래식 전쟁이 전혀 예상치 못하던 중요 섹터이자 전술 필드임이 분명한 데다, 선전 포고나 정부 당국의 공식 개시, 간여(engagement) 없이 바로 지금도, 또 외관상 평온해 보이는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펼쳐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군 당국뿐 아니라, 언제든지 불순 세력의 타깃이나 도구로 떨어질 수 있는 개인 유저들까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이유에서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총성 없는 전쟁은 바로 이를 두고 이름이며, 책에는 특히 미국(그저 추정)에서 개발하여 높은 성과를 거두기까지 한 "스턱스넷 바이러스"의 예를 듭니다. 이 장치는 감시자들의 눈에 바로 띄는 치명적 고장을 하드웨어에 일으키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원격 조종자의 사후 추가 조종 없이 알아서(이게 무섭죠) 핵심 장치의 구동부에 접근하여, (이게 중요한데) 관리자한테 고장 난다는 시그널도 거의 주지 않고 정상 작동 범위 안에서의 노후화처럼 위장된다는 게 핵심입니다. 치명적 장애를 일으켜도 이게 사이버전의 일환인 줄 알면 상대에서도 바로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저는 1) 이란에서의 이런 사례가 대중 과학 저널에까지 보도되어 우리 같은 독자가 다 접할 정도면 이란 당국도 벌써 이런 새로운(..) 형태의 진화한 공격 패턴을 알고 심각한 반성과 대응책을 고려해 뒀다는 뜻도 되며, 2) 이 책은 글쎄요, 불필요한 반중(反中) 감정 유발을 우려해서인지 아니면 창피해서(필자의 성향으로 볼 때 그건 아닌 듯)인지는 모르지만 몇 년 전 황금방패(중국의 사이버 부대)에게 미국이 된통당한 사건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그 부분이 좀 의아했습니다. 이 사건만큼 현대 사이버전의 위력을 잘 설명해 주는 예가 드물 텐데 말이죠. 또한, 비록 바이러스 개발자의 추가 조작 없이(웹에서 격리된 서버니까 당연히 불가능) 작동되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재래식 방법인 (내부 배신자의) USB 연결을 통해 이 작전이 성공했다는 점에서(그렇게 배신자와 내통하는 데 들이는 노력이 큰 비중입니다) 좀 과장된 면이 있다고 봅니다. 하긴 진짜 놀라운 사건 사고(암암리의 전쟁)라면 우리가 알 수도 없죠.

화학전의 양상은 비교적 짧게만 언급되고 넘어가는데, 이는 바로 앞 장 생물학전 파트에서 이미 심각한 주제가 다 다뤄진 이유도 있습니다. 사실 전통적인 구분법이 이 두 분야를 구태여 나눠 놓은 편제를 바로 무시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을 것 같은데, 생화학전으로 통합 고찰하는 방식도 (이제는) 더 실용적이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봤습니다. 이 SA의 유익한 기사들이 특히 독자들에게 교육적인 이유는, 우리 인체의 폐가 기체 중의 각종 화학 성분(이롭건 유해하건 간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흡수하게 그 수용체가 진화했는지에 대한, 교과서에서 배워 온 기초 원리의 설명에까지 매우 친절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냥 이러이러한 메커니즘을 거치는 거야" 같은 설명이면, 일반 독자가 기반 없이 지식을 소화하기에 거부감이 컸을 겁니다. "사린 가스의 살인 원리" 같은 말은 이 한국어번역판에서만 위트를 발휘할 수 있는 우연의 일치이기도 하겠네요.

이 책에도 나와 있지만 지난 냉전 시대 내내 기어이 대규모 "열전"이 터지지 않은 이유는 그 "상호 확증 파괴(책에는 없지만 이걸 원어로는 MAD라고 합니다. 뮤츄얼 어슈어드 디스트럭션)"의 위하력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상대가 자국의 영토 주요 부분을 초토화해도, 피해국 역시 상대방에 대해 잔존 핵무기로 얼마든지 심각한 응징을 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래전의 이른바 "선빵"의 효과가 거의 기대될 수 없다는 데 이 핵전쟁의 특징이 있고, 이런 새로운 경지가 인류사에 전개됨에 따라 오히려 본격 세계 대전의 억제 효과(반면 국지전은 더 빈발)를 가져 오는 역설을 우리는 목격하게 되었지요.

이 책에서 염려하는 건 소규모 핵무기의 통제 불능 유출 확산, (앞 장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기도 한) 사제 폭탄(꼭 "폭탄"에 한정되는 건 아니고, IED라는 원어가 말해주듯 모든 개인 단위의 즉석 제조 무기가 다 포함됩니다)화 같은 경향인데, 이는 마지막 8장 "테러리즘"에서도 다시 논의됩니다. 또한 많은 독자들이 신기하게 받아들일 법한 "친환경 핵탄두"라든가, 기타 산업적, 평화적으로 얼마든지 선용될 여지가 많은 다른 방면으로의 핵 원천기술 논의가 자세히 소개되네요. 반면 전통적 ICBM 같은 대륙간 공방 수단이 아닌, 우주 궤도상에서 폭발시켜 상대국의 시스템에 직간접으로 타격을 주는 방식인 HANE도 소개됩니다. 이때 앞 글자 HA는 현재 논란의 대상인 THAAD와 그 구성부분이 공통입니다. 즉 "고고도(高高度)"에서의 운용이 주 목적이라는 뜻이죠.

이 HANE의 논의에 바로 이어지다시피한 게 제7장 "우주궤도상의 전쟁"입니다. 이 역시 아주 새로운 개념은 아니며, 레이건 대통령 시절 이른바 전략방위구상이라고 해서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주제입니다. SDI가 정식 명칭이며, (이 책에서는 조롱 섞인 표현이라고 하지만) "스타 워즈"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죠. 조지 루카스 감독이 그 말을 쓰지 말라고 당국과 언론에 항의를 하기도 했구요. 여튼 이 무기증강 경쟁을 감당 못한 소련이 몇 년 안 되어 체제가 붕괴한 가장 직접적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주상에서의 치명적, 소모적 군사 경쟁 추세란 사실 지금이라고 완화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치열해지기도 한 인상이 강해요. 어찌 보면, 이 책 7장의 의의는 미-소 간의 군비 경쟁을 회고하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과 미국 사이에 더 본격적으로 불이 붙은 현재의 상황을 더 강력히 경고하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각 장의 필자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기조가 반드시 일관되라는 법은 없고, 솔직히 6장에서 "아무리 비관적으로 봐도 파키스탄, 중국, 러시아, 인도(핵보유국 중 일부)는 미국의 우방 미만이 아니다(원문 그대로에요)."라는 기술은 엄혹한 현실을 애써 비껴가려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네요.

8장은 우리 시민들이 일상에서 바로 마주칠 수도 있는 위험을 다뤘다는 이유에서 3장의 사이버전과 함께 흥미있게, 그러나 진지하고 심각하게 읽어 둬야 할 필요가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전쟁이란 결코 예전처럼 전방에서만 일어나는 일부 무장 인력 사이의 피튀기는 분쟁이 아니라, "후방"과 "민간"에서도 그 잔혹한 살상의 피해를 절감할 수 있는, 매우 가까이에 와 닿은 위험, 소위 "clear and present danger"입니다. 이 유명한 어구(법학 용어지요. 특히 헌법학)가 책 중에서 직접 쓰이지는 않지만,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는 일류 저널에 실린 기사답게 이를 의식한 표현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요즘 한국도 노후한 원자로의 퇴역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 책에서도 시의적절하게 원자로의 교체, 개량 논의가 테러리즘으로부터의 위협과 어떻게 연계될 수 있는지 치밀한 분석과 대안이 제시되더군요.

대체로 이 책에 실린 아티클들은 영미의 평판 높은 잡지들이 쓰는, 여유 있게 현황을 돌아보는 듯 딴청을 피우다 갑자기 본격 토픽으로 진입하는 식의, 해외 잡지 많이 구독한 분들에게 익숙할 그런 구성과 문체를 쓰는 모습입니다. 이게 이런 분위기가 잘 맞는 독자들에게는 친숙함을 부르고, 그렇지 않고 정보 습득 위주의 독서가 목적인 (특히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약간의 생경함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대중 지향의 저널과 전문가 전용의 특수 매체 사이에 현격히 자리하는 구별점은, 건조한 정보 전달 위주냐 아니면 일반인, 국외자의 관점에서 투사한 비판적 성찰이 가미되어 있느냐의 차이죠. 책의 품격은 그런 인문과의 접합이 어느 지점에서 이뤄져 독자의 각성을 간접으로 끌어내는지, 그 방법과 스타일의 세련됨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모두 230쪽밖에 안 되는 분량 속에서 어떻게 이 모든 목적이 다 달성되었는지도 놀랍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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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과 세계시민 - 세계시민 되기 시민교육 연구총서 4
이동수 외 지음 / 인간사랑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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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입니다. 집안이나 출신 지역, 지나치게 엄격한 종교 단체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나를 바르게 파악하고 이웃과 타인에 대해 공정하고 열린 시각을 갖는 마음 자세는, 특히 요즘처럼 "관용과 화합, 다문화, 소수자 존중"의 가치가 강조되는 세상에서 특히 필요합니다. 이런 올바른 세계관, 혹은 정치관은 이르면 이른 단계에서 함양될수록 바람직하겠습니다만, 앞에서 말한 대로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며, 올바른 초심도 인생에서 다양한 고비를 맞아감에 따라 흔들리고 퇴색하기가 또한 일쑤입니다. 그래서, 권위 있는 석학들이 정연하고 진중한 언어로 가르쳐 주시는, "세계 시민으로서 흔들림 없는 도덕성과 참여, 비판 정신"에 대한 바른 시야를 수시로 익히고 이를 실천에 옮김이란 더욱 보람 있고 의미 깊다 하겠습니다. 

이 책은 시민단체에서 주최하는 대중 상대 교양 강연이나, 혹은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들을 위한 코스에 교재로 권하기 안성맞춤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숙독해 보니, 세계 시민으로서 부끄럼없이 판단하고 행동하기 위해 함양되어야 할 내용이라는 게, 어쩌면 또 이처럼이나 깊이 있고 보편타당한 지식과 관점을 담고 있나 싶어 절로 희열과 감탄이 나오더군요. 이 책 한 권에 법률, 정치, 경제, 세계사, 종교 등 인간사 문명의 천양만태를 압축적으로 요약, 진단, 규정하는 도도한 담론이 모두 담겨 있는 듯, 지식과 소양에 목마른 독자에게 적시적소의 일깨움을 던져 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세계 시민"이 되려면 이처럼이나 포괄적이고 섬세한 교양을 체득해야 하며, 또 올바른 관점에서 잘 정제된 지식이야말로 바른 판단과 행동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는 점도 재삼 확인이 가능했습니다.

정치학자, 사회학자들의 주옥 같은 논문을 높은 안목으로 잘 편집하여 대중에게 전달해 주시는, 경희대 이동수 교수님께서 역시 이 책에도 책임 편집의 소임을 맡으셨더군요. 교수님 본인의 논문은 책머리에 놓인 <환경위기와 생태>입니다. 첫 글이 환경 관련 주제라(또 책의 컨셉이 시민 교육 쪽이라) 혹시 이어지는 다른 논문도 모두 비슷한 주제 아닐까 짐작하신다면 그건 틀렸습니다. 앞서 말했듯 환경, 생태 토픽을 넘어서, 정치 경제 문화 등 21세기 현대인의 모든 삶의 양상을 주제로 다 아우르고 있으니, 혹 어린 자녀(배움에의 의욕이 왕성한)에게 멋진 교양서 한 권을 딱 원 볼륨으로 선물하고 싶다면 주저없이 이 책을 고르셔도 됩니다.

환경과 생태 주제가 권두에 배치된 건, 인간이 육신과 건강을 초월하여 정신적 깨달음만으로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절박한 현실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석가, 예수, 공자라 한들 오염되고 황폐화한 세상에서 호흡과 영양 섭취라는 기초 생존 활동이 위협받는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19세기 산업 혁명이 본격화한 이래 인류는 지속적으로 환경 오염과 자원 고갈의 공포에 시달려 왔지만, 아직도 근본적인 해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결합이라는 우려스러운 추세는 문제의 해결을 더욱 방해하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새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는 기후 협약을 무효화하겠다며, 건전한 의식을 지닌 "세계 시민"들을 더욱 걱정스럽고 불안하게 만들기까지 하는 형편이죠.

그렇다고 "성장"의 과제, 목표를 전면 도외시할 수도 없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탐욕을 줄이고 환경 친화적인 심성을 회복하는 게 옳습니다만, 한번 흥청망청한 소비 행태에 길이 든 인간의 습성이 금세 청빈과 절제로 회귀하기란 힘들죠. 교수님께서는 이런 맥락에서, 현재 한국 환경담론의 진보적 시각을 대변한다 할 "녹색성장론"의 의의와 연혁을 되짚습니다. 저는 길고 긴 발자취에의 회고를 기대했으나 의외로 최근(1999년) 시점에 그 유명한 폴 에킨스의 저술이 이 입장의 시발점을 이뤘다는 걸 책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공감과 합의를 이룬 "녹색성장론"의 내용과 방침, 비전에 대해 정확하고 알기 쉬운 소개가 이뤄져 있으므로, 실천적으로나 교양의 목적으로나 꼭 일독이 필요한 논문입니다.

논문에는 이 외에도 생태근대화론(주로 공적 섹터나 보수 진영의 지지를 받는), 그에 대한 네오맑시스트의 반응, 또 이른바 "지속 가능 발전론" 등 다양한 시각과 담론들이 설명되었으므로, 환경과 생태의 과제가 오늘날 어느 지점에서 논의되는지 총체척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익한 읽을거리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참여하는 시민, 깨인 의식의 유권자로서 이 환경 이슈에 대해 분명한 인식이 미비하다면 어디 가서 무슨 말을 꺼낼 초보적 자격조차 못 갖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경제" 주제는 김윤철 교수님의 <글로벌 경제와 불평등> 한 편뿐입니다만 이 논문이 현재 세계 경제가 맞닥뜨린 "상시화한 경제 위기", 이른바 신자유주의 물결에 내재한 근본 모순, 그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국제 NGO 주도의 신 거버넌스 등 굵직하고 확장성 높은 논의가 펼쳐지기 때문에, 말 그대로 한 권(한 편)을 읽고 만 가지 아이디어와 각성을 부를 만한 명문입니다. 확실히, 한국에서도 박세일 교수(지난 2017 .1월에 타계)가 YS 정부에서 야심차게 내 건 "세계화" 바람이 온 나라를 휩쓸 때만 해도,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세계인 모두의 욕망과 복리를 만족, 증진시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게 근 이십여 년이 지나, 실물 경제 규모의 몇 배를 웃도는 금융 경제의 투기 바람이 각국의 생산- 소비 기제 펀더멘털을 위협하고(논문의 기조는, 결국 세계화 때문에 경제 위기의 공포로부터 세계가 안전할 날이 없게 되었다는 쪽입니다), 일반 대중들도 막연하게나마 세계화의 허상을 깨닫고는 엉뚱하게도 제노포비아 같은 국수주의, 폐쇄주의로 퇴행했다는 진단을 내어 놓으십니다. 이 과정에서 김 교수님은, 1990년대에 큰 인기를 모았으나(한국에서도 대단한 주목을 받았죠. 특히 계간잡지 창비에는 거의 매호 그의 글이 번역되어 실렸습니다) 현재는 거의 잊혀진 편인 이매뉴얼 월러스틴 교수의 "세계체제론"이 다시 원용됩니다. 과거 사회과학 독서 열풍에 향수를 지닌 특정 세대분들이 특히 눈길이 끌릴 만한 대목입니다.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글은 이현휘 교수님의 <주권과 국가이성>이었습니다. 교수님은 박승관 서울대 교수의 발언을 제사(題辭)로 삼아, 전쟁과 갈등과 증오와 알력이 그칠 날이 없는 국제 정치 현실에서, 오랜 이념적 기반이자 모든 외교활동의 기초가 될 주권론의 허실이 무엇인지 다시 분석, 회고, 통찰하고 계십니다. 공교롭게도 C V 웨지우드의 명저 <30년 전쟁>을 한국어로 완역한 남경태 씨가 3년 전 타계하기도 했는데요("공교롭다"는 말을 쓴 건, 대체 1648 베스트팔렌 체제의 본질과 실상, 한계가 무엇인지 새삼 주목하게 되는 요즘의 국제 정세를 감안해서입니다. 저런 묵직한 저서가 시장성을 고려할 때 번역, 출판이 잘 안 되는 게 한국의 실정이기도 한데 말이죠). 이 논문에서도 웨지우드의 그 책(외에, 30년 전쟁을 분석한 다른 고전들까지)이 수시로 인용되며, 대체 주권이 무엇인지, 주권 담론에 기반한 근대형 외교 시스템은 과연 어디까지 제 기능을 유지할지에 대해 살벌하고 심각하기까지 한 실증 분석의 틀을 적용합니다.

작년 하반기, 중국이 남중국해 일원의 "영해성"을 강변하며, "이는 우리의 '주권 사항이니 미국이나 '자칭 국제 단체(국제사법재판소를 가리킵니다)'는 개입하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제 정치, 특히 미-중간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희한하게도 친중 성향의 포퓰리스트 두테르테가 필리핀(영해 분쟁 당사국)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유야무야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쪽이건, 그에 대항하려는 쪽이건 이 "주권"이라는 (무형의)이념에 이처럼이나 의존한다는 사실부터가, 본의의 탐구이건 발전적 해체적 재정립이건 간에 이론적 천착이 시급함을 잘 알려 준다 하겠습니다.

이 논문은 특히 "국가이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그 연혁과 논의상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는데, 그 실질적 기원은 30년 전쟁의 결정적 국면에서, 신앙의 동지가 아닌 자국 이익의 더 확실한 담보자가 누구인지를 계산하여, 신교 연합국의 손을 들어준 프랑스 왕국의 실력자 리슐리외 추기경(이자 재상)의 원대한 정치적 국량에 대해 특히 상술합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도대체 "종교"나 명분. 혹은 특정 사안(왕실 가문 영토의 상속, 병합 등)을 놓고 벌어지는 즉흥적 이합집산이 유럽 국제 정치의 한계였는데, 리슐리외의 이 기회주의적 처신(이자 정책)이야말로 "국가"를 독립된 이해관계의 주체로 정립하고, 아울러 냉혹한 국제관계에서 염치도 양심도 돌볼 것 없이 철저히 실리와 계산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외교의 생리를 최초 규정했다는 의의를 아주 선명하게 밝힙니다. 이성의 반대라면 "감정"이겠는데, 이 감정적 동기에는 "같은 구교국이니 구교국 편을 들어주자"라든가, "특정 왕실의 전쟁 동기가 더 비인도적이므로 그를 징치하자" 같은 게 포함되겠습니다. "국가이성"은 이런 추상적이고 일시적인  인적 요소를, 의사 결정과정에서 철저히 배제하고 오로지 "국가의 실익"만을 기준으로 삼는 기제이죠.

"프랑스는 저 리슐리외(와 그 후계자들)의 현명한 처신으로, 향후 250년에 걸쳐 유럽의 패권을 유지했다."는 서술이 (헨리 키신저의 논문으로부터의 재인용을 통해) 나오지만, 독자로서 여기에는 반대하는 편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 국권이 유린될 뻔한 상황도 겪었고, 나폴레옹 전쟁의 처리 과정에서도 프랑스는 일시 존립의 위기를 맞기도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왕실의 몰락 후에도 공화정으로서 국체와 정통성을 이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대체적으로는 보불 전쟁의 패배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은 프랑스의 고갯짓 없이 어떤 중대한 정책도 전개할 수 없었음은 분명합니다. "왕실의 이익"이 아닌 "국가이성"에의 개안(開眼)이 있었기에 이런 연속적 번영과 위신의 행사가 가능했음은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교수님은 특히 한국인의 정치 행태에서, 이단과 정통의 판별에 집착하여 나의 생각과 다른 모든 입장을 절멸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일종의 주술적 심성(이성, 대화, 타협이 배제된)을 특히 지목합니다. 읽으면서 백 번 타당하다고 여겼지만, 헌데 소위 확증편향이란 게 또 모든 이들의 마음에 나쁜 버릇으로 자리잡아, 이런 말도 좌파 쪽에선 우파를 비판하는 적실한 통박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우파 역시 반대진영의 체질을 어쩌면 그리 잘 짚어냈냐며 아전인수로 해석할 게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악성 자기파괴의 수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해답은 협소한 에고가 아닌, 이웃과 약자와 환경 전체를 마음과 머리 속에 품고 새길 수 있는 "세계 시민 정신"입니다. "당신은 어디 시민입니까?" "나는 아테네도 에페수스도 다마스쿠스도 아닌, 세계의 시민입니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어느 고대의 철학자가 지중해 세계를 주유하며 발언했다는 이 감동적인 언술은,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평화와 항구적인 번영을 위해 우리가 최우선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준엄히 깨우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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