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미 스타일 - 미친 듯이 최고에 집착하라!
쑨젠화 지음, 조홍매 옮김 / 스타리치북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샤오미의 성취와 전망에 대해 여전히 의견은 엇갈립니다. 어떤 사람은 한마디로 후려치며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화웨이는 인정하지만 샤오미는 아니다"라며 "디바이드 앤 룰(ㅋ)"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당신도 그 회사 제품 보조 배터리 하나는 갖고 있을 것 아닌가?" 왜 현실과 대외용 주견이 다르냐며 소비자의 이중성을 비판하는 이도 있습니다.

하나 확실한 게 있습니다. 중국 기업들은 그저 국가에서 적절히 밀어 주겠거니, 민간 기업의 탈을 쓴 공적 에이전시겠거니 막연히 싸잡아 비난하기도 하며, 실제로 그런 경향도 없지는 않으나, 이 정도 위상의 기업으로 "일단 중국 국내에서라도" 떠오르려면, 이전투구 사생결단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겁니다. 샤오미가 여튼 십이억 인구를 pool로 삼은 살인적 경연에서 승자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합니다.

확실한 건 하나 더 있습니다. 샤오미는 여태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여러 책에서 주장하던 대로, 또 일부 국내 소비자들도 확인하거나 참여까지 해 온 대로, 고객과의 소통을 매우 중시하는 경영 전략을 세우고 지금까지 이를 철저히 실천해 왔다는 겁니다. 요즘은 뜸해졌으나 2011년 당시 카카오도 이런 전략으로, 유저의 사소한 불편 하나하나에까지 정성어린 답을 달아주는 철저한 일체화 공감 전략으로, 오늘날의 국민 메신저를 만들었습니다. 위상이 아직 불안해서인지는 모르나, 샤오미는 이 점에서만큼은 초지일관입니다. <전국책>에 보면 "죽은 말에 대고도 천금을 주며 구입한다는데 하물며 산 말이겠는가?"라는 선시어외의 고사가 나옵니다. 우리 독자들은, 무(無)에서 시작하여 이만큼이나 세계 시장을 개척한 그들의 노력과 혁신 의지에 대해서만큼은 뭔가 챙겨가며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성공의 길가에는 항상 여러 명의 실패자가 쓰러져 있다." 쓰러져 있는 개별 실패자 입장에선 자신의 모습도, 다른 실패자의 비슷한 처지도 안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 말을 할 수 있는 건, 레이스를 완주한 위너뿐이겠습니다. 여유 있는 승자인(현재까지는요) 샤오미, 그 CEO인 레이쥔은 처음부터 시장 대세의 방향을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소프트웨어 회사는 어차피 인터넷 회사와 게임이 안 된다." 이십 년 동안 소프트웨어만 개발해 왔다는 바로 레이쥔 본인이 했다는 발언입니다. 여기서 "인터넷 회사"란, 웹상에서 엔드 유저와 효율적으로 소통하는(직접 무엇을 파는) 리테일러나 복합 몰을 뜻합니다. 

샤오미가 (레이쥔 표현대로라면) "인터넷 회사"에 속하는가? 이 점은 샤오미가 초창기 어떻게 성장했는지 과정을 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회사가 기존 방식대로 전통적 판로에의 호소와 마케팅에만 의존한 반면, 샤오미는 엉뚱한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하던 반대로만 해 볼 것이다." 심사가 비틀려서가 아니라, 만약 후발업체가 기존 방식을 따르면, 애는 애대로 쓰고 (경쟁 선발사들의 채널에 밀려)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뿐더러, 출혈만 많을 뿐 홍보의 유실률이 높아 이중삼중의 고생일 뿐입니다. 당장 매상이 안 오르는 것만 고생이 아니라, 이로 인해 경영진과 직원의 사기가 날로 떨어져 결국 회생과 도약의 기미가 0으로 수렴하겠죠.

레이쥔은 다른 창업자들과는 또 입장이 차별되었던 경영자입니다. 물론 현재 IT 섹터의 거인으로 자리한 이들이, 열악한 출발을 밀고 나가지는 않았습니다. 교육도 받을 만큼 받았고, 대개는 넉넉한 중산층 집안의 자제들이었죠. 레이쥔은 한술 더 떴습니다. 이미 대학생 시절부터 벤처기업을 일궈 또래에 비해 많은 돈을 손에 쥐었고(비록 MS에 밀려 2인자였다고는 하나 꽤 선전했죠), 이후에는 벤처 사업가가 아니라 그 반대, 즉 유망한 스타트업을 살펴 보고 돈을 대어 주는 엔젤 투자자였습니다. 그 젊은 나이에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샤오미를 세워 일을 벌여 보겠다고 했을 때, 당연히 이런 말이 나올 만했습니다.

"모든 걸 이미 다 가진 분이, 뭐하러 모험을 한단 말입니까?"

이는 마치 한국의 효성그룹 창업자인 고 조홍제 씨를 연상케도 합니다. 물론 조홍제씨는 저 레이쥔과는 달리 꽤 늦은 나이에 자기 회사를 만들었지만, 아무 아쉬울 것 없는 재력가가 창업의 모험을 구태여 시도했고, 주위의 예상을 뒤엎고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1인자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 버릇처럼 입에 담는 말이 있습니다.

"라이벌이요? 글쎄요. 제겐 제 자신만이 라이벌이었습니다."

이 말은 듣기에 따라 오만함의 표출로도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적어도, 레이쥔(雷軍. 뇌군) 회장의 경우는 좀 다르게 새겨야겠네요. 많은 이들의 이미 검증된 판로(그러나 달리 말하면 레드오션)만을 의존할 때, 그는 (앞서 말했듯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이 책 저자(쑨젠화 작가)는 이에 대해,

"남들 안 가는 길을 걷는다고 편한 게 아니다. 오히려, 단 한 번의 실수로도 완전히 매장되어 재기 불능이 될 수 있다.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환경 변화에 유의하며, 더불어 자신의 긴장과 집중을 유지하지 못하면, 이런 선택은 안 하느니만도 못하다."
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상대가 정해진 싸움이란,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이렇다고 합니다.

"싸움에 이기면 득의양양해지는데, 이는 초심을 잃기 쉽다. 싸움에 지면 뷸쾌해져 정작 초기 목표가 무엇인지 잊기 쉽다."

그러므로 목표를 정해 두고 이의 성취를 위해 애쓰는 이는, 무릇 스스로와의 싸움이 노력의 본질이 되게 하라는 겁니다. 남을 염두에 두는 자는 그 남만큼만 잘하려고 듭니다. 그 상대가 극복된 후에는 목표 설정에 어려움을 겪거나 성취 동기가 사라지니, 자신의 잠재력조차 온전히 발휘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강해지면, 부담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고마워합니다. 내 자신의 동력을 더 깊은 곳에서 이끌어낼 수 있으니 말이죠. "환득환실(이기면 이기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근심이 생김)"의 딜레마를 이렇게도 피해갈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도대체 휴대전화란 걸 만들어 본 적도 없는(아무리 자본이야 넉넉했다고는 하나) 회사가 어떻게 그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했을까요? 첫째 결국 내 상품을 사 줄 고객만 보고 뛰었다는 점, 둘째 설령 경쟁사라 한들, 내가 그 장점을 보고 배우며, 서로 경쟁을 통해 발전의 자극제로 삼을 수 있는 동료로 여기는 발상의 전환, 공존공생의 파트너로 통 크게 인식했다는 게 비결입니다.

"나를 따라서 배우는 자는 살아남지만, 나를 흉내내는 자는 도태될 것이다."
흉내와 창의적 변용은 이처럼이나 다릅니다. 누군가를 흉내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배우는 건, 먼저 내가 열린 마음을 갖고 내 자신을 송두리째 바꿀 각오가 되어야 합니다. 혁신이 곧 인격도야와도 통함을 우리는 샤오미의 사례에서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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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트렌드 2018
커넥팅랩 외 지음 / 미래의창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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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바일 온리"라는 거대한 시대 지표가 이끄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모바일의 운용 원리나 구체적인 기술 배경에까지 일일이 신경은 못 쓰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그래도 주요 키워드 몇은 잊지 않고, 아 세상이 이쪽으로 간대더라 정도는 애써 되뇌지만, 짤막한 단어만 읊조린다고 자동으로 추가설명이나 이해가 줄줄 따라나오지는 않습니다. 특히 최신 트렌드를 짚어주는 책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한 번 정도는 숙독하고 한 해를 정리하는 게 좋은 습관이겠는데요. "모바일 트렌드"는 그래서 특히 직장인들이라면 종사 업무 분야에 상관없이 매년 챙겨야 하는 필독서가 되어가는 듯합니다.

저자 커넥팅랩이 선정한 올해판의 주제어는 "무(無)"입니다. 작년까지 이어졌던 화두(정말 불교 선문의 화두 같죠)들과는 사뭇 범주와 느낌이 달라 뭔 뜻일까 궁금해하며 책장을 신중히 넘기며 열독했습니다. 사실 저는 작년판은 건너뛰었기 때문에 2년 만에 다시 이 시리즈를 만나는 건데,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뭔가 그 사이에 세상도 엄청 변한 것 같고, 작년판에서 지적한 사항이 제 머리에 정리 안 되어서인지 내용들도 절박하게 실감나게 막 꽂히는 것 같았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기저효과 때문에 설명이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겠고("간만에 보니 확 좋음"ㅋ), 뭔가 그 이전판들과는 달리 서술과 전망과 현황 점검이 더 구체화? 선명하게 바뀐 듯하기도 합니다. 이는 집필진도 컨셉과 표현에 더 고민을 쏟았다는 뜻도 되고, 저자들의 예상대로 모바일의 여러 국면이 그만큼 우리들 생활에 깊숙이 침투하다 보니, 살면서 많은 부분에 대해 이미 선(先) 이해가 이뤄져서일 수도 있으며, 혹은, 우리 독자들이 지난 5년 동안 출간된 이 시리즈 전편들에 의해 그간 레슨을 받은 결과 실력과 안목이 향상된 덕분도 있을 겁니다. 사람이란 참, 뭐가 잘되면 다 그건 내가 열심히 해서고, 안 되면 남이 시원찮아서로 돌리곤 합니다.

"무(無)"는 다음의 여섯 가지 축, 기준 들을 가리킵니다. 무감각 무한 무선 무인 무소유 무정부. 이 중 "무선"은 "모바일"의 물리적 본체를 이루는 개념요소이며, 무소유는 아무래도 공유경제 트렌드를 가리키겠거니 짐작이 가능합니다. 무정부는 어쩌면, 왜 모바일이 개인과 사회 전반에 걸쳐 근본을 바꾸고 헤집는 동인이 될지 시원하게 지적하는 단 한 마디의 지표일 수도 있습니다. 무인과 무감각은 서로 어떤 관계인지, 무한은 어떤 현상을 특히 염두에 두고 요약된 범주인지는 책을 꼼꼼히 읽고서야 아웃라인이 잡히더군요.

세부 토픽은 이전판들과 크게 달리 잡히지는 않았습니다만, 일 년 사이라 해도 이 분야 발전이 워낙 빠르다 보니 그간 우리 독자들도 미디어를 통해 개인적으로 업데이트해 온 사항들이 속속 언급되기에, 속도감과 시사성을 쭉쭉 빨아들이며 신 나게 읽을 수 있었네요. 7개의 대주제마다, 저 여섯 개의 기준들로 기둥을 박은 "레이더 차트(폴리곤 다이어그램)"를 통해, 기술적으로 어떤 "무"가 넉넉히 구현되었고 어떤 다른 "무"는 아직 발전 도상에 놓였는지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돕습니다. 근데 이렇게 좋은 항구적 프레임을 이번년도판에 이미 적용했으니, 내년에는 "무(無)" 아닌 다른 키워드 아래에서 어떻게 내용을 구성하실지 괜한 걱정도 되는군요.

요즘 TV 광고 등을 통해 평창올림픽 관련 이미지나 컨셉을 많이 접합니다. 어떤 통신사 광고는, 5G와 평창과 자사 지향 가치를 하나로 묶으려고 시도도 하더군요. LTE가 7. 8년 전 처음 구현될 때 국민들 교육(?)을 시킨 으뜸 매체가 광고였듯, 5G라고 하면 그만큼 빨라진다는 건 알겠는데, 4G 때와 달리 다른 별칭도 안 붙었고 "지금도 충분히 빠른데 뭘" 같은 무덤덤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전(대략 20년 전)에 3G와 IMT-2000이 나란히 거론되던 것 다들 기억하실 텐데요. 이 5G는 IMT-2020이란 표준과 같이간다고 합니다. 지금도 넉넉히 빠른데 대강 하지... 사실 이런 생각은 요즘처럼 파괴적 혁신을 요구하는 판에선 그냥 퇴보를 뜻합니다. 현재 자리도 못 챙긴다는 뜻이죠. 이런 분들도 막상 남들이 안 끊기고 대용량 파일 네 개 다섯 개를 1, 2초에 다 받을 때, 자기만 버퍼링 장애에 시달리며 10분 지나서야 모니터를 확인하는 수고를 치른다고 생각하면 짜증을 낼 겁니다.

시간은 곧 돈인데, 책에서는 이런 경쟁에서 앞서가기 위해 발벗고 노력하는 중국의 움직임도 지적합니다. 기본료 인하 방침 때문에 글로벌 경쟁에서 피가 마를 통신사 걱정을 제가 할 이유야 없겠습니다만, 15000원(무료 통화 제공분은 제외) 그 이상의 효과를 장기 투자하여 얻어낸다고 생각하면 좀 참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봅니다. 독일 한 번 가보십시오. 딱 쓴 만큼만 요금 내기 때문에 깔끔하기는 한데, 그 선진국인 나라에서 망이 지독하게도 느립니다. 우리가 지금 2만원 낼 것 6만원 낸다고 4만원 어치의 혜택만 더 받는 것도 아니고, 인프라가 열악하다면 필요할 때 가서 4만원 더 낸다고 4만원어치 효용을 언제나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시설과 시스템이 첨단이면 소비자는 내는 돈보다 더 큰 잉여 효용을 반드시 챙깁니다. 어디 전화와 인터넷과 게임만 하고 맙니까? 폰으로 생계를 위한 정보를 주고받는 이들도 부지기수이며, 상당수는 고소득자이기도 하고, 이들이 창출한 부가가치가 돌고돌아 내 지갑도 불려 주는 겁니다. 고속망이 안 깔려 있으면 정작 필요할 때 십만 원 아니라 백만원을 부랴부랴 꺼내들어도 원하는 서비스를 못 누립니다. 그 금액 인하해 봐야 치킨 한 마리 값도 안 되는데, 우리가 어디 한 달에 한 번만 시켜 먹겠습니까?

예전 3G 시절부터 속도 테스트할 때(느리면 고객센터에 전화 걸어서 따져야죠. 정당한 권리는 또 찾아먹어야 합니다) latency라는 항목 보셨을 겁니다. 업로드 다운로드 속도가 빠른 건 좋은데, latency 역시 비례하여 커질 때가 있습니다. 요즘 유저들의 실질적 만족도를 정하는 건 이 "지연율"이죠. 어떤 분들은 LTE 얼리 어댑터였는데도 당시 불만을 토로한 게 거의 이 이슈 때문이었습니다. 5G는 그저 양적인 팽창에 그치는 게 아니라, 원리적으로 이 지연율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도 병행합니다.

"5G의 핵심은 실시간이다." 픽, 5G는 고사하고 인텔 486 PC 시절에도 실시간 소리가 나왔는데 무슨? 그런데 앞선 시대가 성급하게 마케팅 컨셉을 소진한 건 현재의 엔지니어들이 책임질 문제는 아니고요. 이때 실시간은 "진짜" 실시간을 말합니다. 이 이슈는 특히 자율주행 관련해서 부각되는데, 전방에 사람이나 동물 등 장애가 나타났다, 이때센서가 반응하는 속도는 말 그대로 빛의 속도라야 하며, 이 정도의 만족감이나 실제적 능률이 아니고서는 인간이 자기 손으로 운전대를 잡는 의지를 꺾으려 들지 않을 겁니다. 이러니 5G의 혜택이 어디 폰에서 동영상 빨리 받고 TV 안 끊기고 시청하는 데서 끝나겠습니까?

올해판에서도 역시 독자들이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을 대목은 블록체인 이슈일 것 같습니다. p77의 레이더 차트는 무소유와 무정부를 끝까지 쭉 늘리고, 무선과 무감각은 쑥 들어간 모양새입니다만, 사실 이 이슈에서 무선 무감각은 부차적 기술 사항에 불과하고, 직접 자체 연관은 없어도 타 분야의 도움을 얼마든지 끌어올 수 있죠. 비트코인에 대해 얼마 전 크게 우려하는 메이저 언론 측의 기사도 나왔는데, 블록체인은 비트코인에 한정된 기술, 원리, 발상이 전혀 아닐 뿐더러, 비트코인은 가상 화폐의 한 종류(대표주자이긴 해도)에 불과하며, 블록체인은 가상화폐 운용 기술의 핵심이지만 응용 분야가 이것 말고도 무궁무진합니다.

말 그대로, 블록체인은 개개인의 거래, 소통으로 블록 하나가 생기고, 이 블록이 모이고 모여 체인을 이루는데,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기록이 (진정성이 확인되는) 체인으로 남아, 역추적이나 유효성 확인을 매우 편리하게, 또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우리는 예컨대 제1금융권이라는 은행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주고 경제활동을 영위하지만, 이는 이론상으로, 또 실제로, 완벽한 신뢰가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은행원의 횡령, 임원진의 배임 등). 블록체인은 거래에 참여한, 혹은 밖에서 거래를 관찰하는 개인이 그 전 과정을 투명하게 검증할 수 있으므로, 오히려 거래의 안전을 더 본질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근본 원리의 발견입니다. 이른바 비잔티움 장군의 딜레마가 수학적으로 해명되면서 더불어 세상에 출현한, 출생 족보도 화려한 시대의 총아이죠.

책에서는 우리 독자들이 실생활에서 가장 절감하며 그 혜택을 맛볼 경우를 설명합니다. 올해 여름 계란 파동이 있었습니다만, 우리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생산지 이력 검증 체계에 구멍이 뚫려 비슷한 소동과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면, 소비자는 집에 앉아서(아니, 혹은 외출하여 모바일 기기를 통해서도), 내가 믿고 소비하고 싶은 식품이 어떤 생산지에서 중간 유통을 거쳐 지금 어느 리테일러가 팔고 있는지 실. 시. 간. 으로 확인이 가능합니다. L이나 E 같은 대형 매장은 또 몰라도, 동네 마트에서 파는 마늘이나 감자 등이 과연 겉봉에 쓰인 대로 국내산이라고 안심할 수 있습니까? 원산지 표시가 의무화되었습니다만 과연 이를 누가 감시하고 보증할지는 답이 안 나오는 문제고 정부가 발로 뛰어다닌다고 그 많은 속임수를 현장에서 일일이 잡아내지도 못합니다. 블록체인은 그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를 일거에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이거는 참여자 50%가 승인을 해야 체인 편입이 이뤄지고, 그 와중에도 새로운 참여자, 증인이 계속 늘어나기에, 누가 조작을 못 하는 겁니다. 정부가 나설 필요도 거의 없고, 여태 존재했던 어떤 단속이나 감시보다도 효율적입니다. 이뿐이 아니죠. 내가 가는 단골 식당이 과연 재활용(웩) 반찬을 쓰는지, 어디서 불량 중국산 식재를 마구 퍼 넣는지 훤히 들여다보일 것 아닙니까. 이야말로 일상의 부정과 비리가 근절될 획기적인 계기가 아닐 수 없죠.

이 기술은 부동산 거래에서도 등기 위조, 원인무효 여부 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한국에선 미국 등에 비해 그나마 지적 조사나 등기부 완결성이 높은 편이므로 어떤 획기적인 발전은 아닙니다. 블록체인 하나로 자격증, 신분증, 의료보험, 자동차운전면허 등 모든 정보를 편하게 제시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멋진 기술입니다만 그 편의는 이미 충분히 누리는 터라 그리 가슴으로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책에서는 에스토니아가 이른바 e- 정부를 구현하고 나서 국민소득이 네 배로 커졌다는 예를 드는데, 경제 규모의 성장은 그 이유 하나로 다 설명되는 건 아니겠죠. 단, 한국에서 빈발하는 부동산 사기는 대개 권리자 아닌 자가 권리자 행세를 하며 인적 사기를 치는 패턴이므로(등기부 조작은 법원에서 관리하고 이중 삼중 백업으로 모두 전산화가 이뤄졌으므로 불가능합니다), 이 두 가지 기술(토지 이력 추적+개인 신분 확인)이 결합하면 TV 재연드라마에서 나오곤 하는 기막힌 사연들은 방지할 수도 있겠습니다.


ICT 관련 p169에 보면 하만 등 전장업체가 바이두 주도의 "아폴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서술이 있죠. 단 모두들 아시는 것처럼 하만은 작년에 삼성에 흡수되었으므로 이제는 "삼성하만"입니다. 그래서 이 합작은 삼성과 바이두의 연합도 되는 겁니다.

SF에서 언제나 보곤 하던, 심지어 무려 1982년작인 <블레이드 러너>에서도 당연하다는 듯 비춰지는 플라잉 카는 언제쯤 우리가 즐겨 보겠습니까? 사실 이 문제는 당장이라도, 쓸모 있으면서도 저렴한 차량의 출시가 가능합니다. 문제는, 도시의 공중 공간이 그 차량이 돌아다니게끔 예비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파트 발코니 앞을 누군가의 자가용이 쌩 하고 지나간다거나, 도로의 상공이라 해도 쾌속으로 달리는 차량 간의 충돌 방지나 원활한 운행을 무엇으로 조율, 규율할 것이냐는 겁니다. 이게 "하늘을 나는 차의 마련"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신기한 기계의 발명이 어려운 게 아니라, 사람 사이에 충돌과 갈등이 최소한으로 줄어들게 하는 룰과 체제의 정비가 진짜 까다로운 숙제인 겁니다. 자율주행 관련 법규도 그러하며, 이 책 후반부에서 다루는 네트워크 거버넌스, 망 중립성 문제, 나아가 단말기 자급제 이슈도 그렇습니다. 특히 마지막 주제는 이 논쟁이 왜 이 책에 나왔지 하며 순간 눈을 의심했는데, 생각해 보면 사람(개인이든 사회 단체든 정부든)이 순수 기술 문제만 건조하게 딱 떼어놓고 다루지는 않습니다. 올해 판은 특히 사회 정책, 혹은 정치적 이슈도 과감히 논제로 포함하여, 민감한 이해 관계를 일단 유보하고 순전히 기술 차원에서 먼저 해소할 수 있는 이견, 불합리 비효율 팩터는 무엇이 있는지 진지한 접근을 시도했다는 게 돋보입니다.

어렵다고 지레 선입견 갖지 마시고, 직장 동료들과 대화할 때에도 뭔가 체계적인 베이스가 갖춰져야 대화가 주도됩니다. 뿐 아니라 백세 인생 길게 내다보고 설계하려면, 두어 발짝 앞선 트렌드를 하부 구조까지 들여다 봐야 정확한 그림이 잡히죠. 여전히 유익하고 도움이 많이 된 대중적 분석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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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전 - 상 - 전면개정판 춘추좌전
좌구명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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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전>은 본디 <춘추>와는 별개의 텍스트입니다. 이 책에도 저자 서문에서 잘 밝혀져 있듯, 5경(五經) 중 하나인 <춘추>는 공자의 저술 명의로 알려졌고, 그 <춘추>에 좌구명이란 사관이 주석을 단(정확하게는, "전[傳]을 썼다고 해야겠습니다만) 것이 바로 <춘추좌전>입니다. <춘추>가 너무도 소략한 기술이기 때문에, 학식 높고 사정에 정통한 전문가의 설명이 없이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신동준 선생님의 표현에 따르면, 거의 "메모"와도 같습니다). 꼭 <춘추>뿐 아니라, 모든 경전은 대개 간명한 기술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경"에 "전"이 따라붙는 건 거의 필수이기도 하므로, 이를 함께 일러 "경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경"과 "전"은 본디 별개의 존재 단위입니다.

역자 학오 신동준 선생께서는, 중국 유학의 역사를 놓고, 이 <춘추>에 "전(傳)"을 따로 부가하여 저술한 책들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좌전, 곡량전, 공양전 세 권 중, 어느 책이 당대 지식인, 관료, 지배층의 너른 지지를 입어 으뜸가는 위상을 확보했는지에 따라, 시대 정신을 규정할 수 있다고까지 규정하십니다. 한대에는 동중서의 영향 때문에 공양전과 곡량전이 널리 존숭되고 애독되었으나, 삼국시대와 남북조를 거치고, 이후 송대를 지나면서 성리학(도학)의 태두인 주희가 좌전의 우월성을 고고히 선언함에 따라, 좌전이 거의 독보적인 권위를 획득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춘추 하면 바로 좌전(만)을 떠올리고, "춘추"와 "좌전"을 아예 단일개념어로 인식하는 건 바로 이 영향이 근 1,800년 동안 면면히 이어진 까닭입니다.

이후 청나라가 말기적 부패 무능상을 노정하자 개신 유학자들이 "변법 자강"을 들고 나왔는데, 이들의 대표격인 캉유웨이 등이 특히 "공양전"에 표현된 자유로운 금문 기반의 개혁주의를 표방했습니다. 확실히 중국다운 것이, 그저 구체제를 개혁한다고 내세워도 될 것을, 구태여 고전에서 전거를 찾아 "공양전식 혁신"을 표방하는 그 태도입니다. 시원시원하고 역동적인 공양전, 곡량전에 비해, 좌전은 꼬장꼬장하고 보수적입니다. 이런 좌전인 만큼, 고전의 해독에 통달하고 심지어 현대 중국의 추세와 사정에까지 밝은 역자분이 나서서, 이 복잡다단한 격변기, G2의 분립 웅거기를 사는 우리 현대인에게 그 참뜻을 밝혀 줄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한길그레이트북스에서 상중하 3권 체제로 초판을 내었을 때 처음 신동준 박사님의 <좌전> 번역을 접했습니다. 그때는 G2라는 용어도 고안되거나 유행하지 않았고, 아시아의 허브 국가라든가 "퍼스트 무버"라는 개념도 낯설 무렵이었습니다. 그간 역자께서도 다양한 저술 활동을 통해 독자들과의 소통 폭을 넓히셨고, 동아시아의 정세를 보시는 시야도 훨씬 원대해진 면이 있습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이 다 이 10년만의 전면 개정판에 반영되었고, 저자의 견문도 폭 넓게 투영되어, 이를테면, 祭라는 글자가 일상으로 발음될 때에는 제사라는 "제"이지만, 인명 지명으로 쓰일 때는 반드시 "채"라는 발음이라는 점도, 극최근의 현지 답사를 통해 성조까지 분석하며 정확한 분별을 전개하십니다. 과연 전면개정판이란 명목에 값하는 알찬 장족의 진보입니다.


책의 편제나 편집, 장정도 이전판에 비해 더 마음에 듭니다. 일단 판형이 크고, 성격이 전혀 다른 시리즈와 한묶음으로 같은 디자인이었던 구판과 달리, "중국 3대 사서"라는 <국어>와 <전국책>, 이 두 권과 같은 장정을 취합니다. 세 권(이 <좌전>이 두 권이므로 총 네 권입니다)을 나란히 꽂으면 서재의 품격부터가 달라 보입니다. 여태 <좌전>만 타 출판사 간행이었는데, <국어>의 완역 출간 후 불과 몇 달만에 이렇게 <좌전>의 개역으로 시리즈가 완결을 보니 너무 좋습니다.

p84에 보면 역주(각주 35)를 통해, "조근(朝謹)은 알현을 뜻한다"고 명확히 서술합니다. 알현은 신하가 군주를 뵙는 것도 알현이지만, 역자는 "'조(朝)'는 봄에 제후가 천자를 찾음이요, '근(謹)'은 가을의 행사"라며 이 명사가 융합 관계의 합성어임도 친절히 가르쳐 주십니다. 책 서문에 자세히 나오듯, 고전이란 어떤 편자, 역자가 주를 달고 해설을 베푸느냐에 따라 그 이해도와 깊이가 독자에게 천차만별로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고전에서, 상세한 역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차량에 장착한 내비게이션과도 같습니다.

이 시기 다른 나라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겠으나, 노 왕실(상대가 된 제 왕실 역시)과 공경 가문에서 백성의 모범이 되어 질서와 예를 지키기는커녕, 입에 차마 담지도 못할 패륜을 자주 자행했습니다. 여튼 이 과정을 기술하며 여러 인명이 나오는데, "강(姜)"이 두 음절 후반부(전반부가 아닌)에 돌림자처럼 붙은 여러 사례를 두고 "여성에게 그 출신 성을 표시한다" 같은 친절한 설명을 해 주시네요.

<동주열국지> 같은 연의류를 읽은 독자들이라면 이 사서에 실린 여러 이야기들이 그리 낯설지 않겠습니다. 연의류는 많은 각색과 상상이 첨가되었고, 문체가 나긋나긋 이해가 쉽습니다. 반면 <춘추> 같은 고전은 문장이 엄격하고, 숨은 뜻이 깊죠. 역자 서문에도 잘 나와 있듯, "숨기는 듯 분명히 드러내며, 소상하되 비루하지 않고, 감싸는 듯하면서 추상같이 비평하니, 성인(공자를 가리킵니다)이 아니고서야 이런 책을 쓸 수 없다"는 평가가, 어떤 반론을 불허할 만큼 설득력을 지니는 게 이런 정사서, 혹은 경전입니다.

<춘추>는 경전인가 역사서인가? 청대 장학성은 놀랄 만한 사고의 변증법적 도약으로, 이른바 "육경개사(六經皆史)"설을 통해, 경과 사의 구분이 무의미함을 논증했습니다. 춘추 같은 양성적 성격의 텍스트뿐 아니라, 아예 시경, 서경, 주역 등의 시원적 경서도 모두 "역사"로 볼 수 있다는 탁견이지요. 학오께서도 이런 너른 시야와 통합적 관점에서 경전을 새기는 스탠스이기에, 어쩌면 이 책은 우리 현대 독자들에게, 유교 경전 수용과 학습에 있어 가장 표준적인 지침으로 기능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이 책은, 무엇보다 "한국적인 춘추좌전"을 표방합니다. 저본은 북경대 1999년판, 양백준(역시 북경대 교수였고, 대륙에서 고전 주석의 대가였지만 문혁 때 크게 고생한 분이죠)의 1983년판 주석서 등이지만, 조선 정조 때 출간된 <춘추좌씨전>을 수시로 참조하여, 불명확한 대목의 해석이나 한국적 관점을 반영하는 데에 크게 활용했다고 밝힙니다. 하권을 마저 읽고 나서, 그 정조시대판의 특장인 성씨 세계(世系)의 도표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이 책에서 잘 구현되었는지 리뷰에 그 소감을 표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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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 메이커스 - 세상을 사로잡은 히트작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데릭 톰슨 지음, 이은주 옮김, 송원섭 감수 / 21세기북스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원 어떻게 된 게 모든 밥벌이가, 결국 "히트작"을 내냐 못 내냐로 그 성공 여부가 결정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실 자신이 히트작을 내는 것과, 시대를 앞서갔든 혹은 다른 우연한 사정이 끼어들어 그 본연의 가치가 잘 알려지지 않았든 해서 당대에는 성공 못 했지만, 크리에이터 본인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엄청난 인정을 받는 것은, 창작 단계에 있어 그 비결이랄까 과정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한번 시드니 셸던이 누군지, 한국은 고사하고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모른다는 층이 대다수일 겁니다. 존 그리샴도 현재는 그 이름이 잊혀져 가는 중이라고 저는 봅니다. 이 작가들은 각각의 전성기에야, 시쳇말로 삼척동자들도 그 이름을 다 알 만큼 유명한 이들이었습니다. 후대에까지 그 작품의 완성도, 높은 평가가 길이길이 이어지기란, 어쩌면 동시대와의 짙은 교감을 희생해야 얻어지는 고달픈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 ㅎㅎ 우리는 그런 건 생각지도 않죠. 생전 히트작(어느 분야의 무엇이든) 하나만 내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고 목숨도 걸고 양심도 다 팔아넘길 판입니다.

목숨 내놓고 양심까지 팔아치우는 요란까지는 떨지 않고도, 히트작 하나를 어찌 근사하고도 우아하게 내놓을 방법은 없을까요? 그것도 생전에 수십 수백만의 불특정 다수 대중에게 환영과 사랑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책 한 권 읽고 그 답을 찾을 수야 없고, 그런 사행심 가득 섞인 기대를 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복권은 본디 벽촌의 무지렁이들이나 긁는 거죠). 그런데 이 책은 제법 구체적인 비결을 담고 있더군요. 혹시 마케팅 경영서 아니냐고 오인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 서평을 통해 그런 오해라도 좀 불식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생길 정도입니다.

이 책은 현명한 독자라면 정말 마케팅서로도 잘 소화할 수 있습니다. 기업의 컨셉 크리에이터라면 간담이 서늘해질만큼("아니, 아직 내가 이걸 모르고 있었다니") 날카로운 지적이 있는가 하면, 무엇보다 이 책을 가장 열심히 읽어야 할 층이 대중예술 분야 종사자들 아닐까 싶을 만큼, 기본적으로는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심도 있는 분석서입니다. 물론, 대중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다며 고독한 예술혼을 불태우는 이라면 이런 책에 관심 없겠지요.(그런 분들은 결국 혼자서 승부를 내어야 합니다)

이 책은 차라리, 고달프게 상사한테 오늘도 내일도 깨지는 샐러리맨들이 머리 쥐어뜯어가며 읽어야 하는 내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방송작가 (스크립터), 방송관련직업 종사자들이라면, 혹은 장차 지상파나 케이블 방송사 PD가 되고 싶어하는 어린 학생들이라면, 이 책이 아예 직접 타깃 그룹으로 삼았으므로, 이런 좋은 지침서를 놓쳐서야 또 너무도 아깝겠죠(지망자들이 그리 많지는 않겠습니다만). 책이 참 쉽게 쓰여졌으면서도 사례가 풍부하고 챕터 말미에는 묵직한 결론과 충고까지 담아, 저로서는 너무나 좋은 내용이 줄을 이어 눈에 들어오는 통에, 아 이거 드디어 인생 책 하나 만나는 건가 잠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습니다.

경매에서 수십억을 호가하는 명화는, 과연 세상 사람, 지구촌 70억 인구가 그 가치를 알아봐서 그 정도 가격이 매겨지는 걸까요? 전 단언컨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심미안은 나면서부터 정해지는 거고, 이 분야는 특히 교육 과정을 통해서도 별반 개선이 안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대개 저거 명화라며 떠드는 행태는, 마치 예술의 전당에서 어느 대목에서 박수를 쳐야 할지 몰라 주위 눈치만 살피다가 허둥지둥 남 따라 손을 놀리는 것처럼, 뭔지도 모르면서 남의 말을 주워섬기는 심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자는 까막눈이면서도 무슨 그림이나 볼 줄 아는 양 남의 말을 베껴 늘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단호히 말하는군요. "노출, 노출, 어디까지나 다중 앞에 잦은 노출을 이루는 작품이야말로, 명작이고 히트작이라며 높은 평가를 받을 가망이 커지는 녀석이다." 범속한 대중이 느끼는 건 고작 "익숙하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걸 본인은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스스로 정제된 미학적 판단이나 내리는 양, 그저 익숙하게 느끼는 걸 두고 "좋다"라며 자체 뻥튀기를 하는 거죠. 이런 반응이 모이고 모여 보십시오. "많은 이들이 인정한 명작"이 되는 겁니다. 많은 이들이 좋다고 하는 건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어? 그게 아닙니다. 대개는 노출의 힘이죠.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잦은 노출은 오히려 거부반응, 역겨움을 유발하기도 하죠. TV 모 행락 업계 사이트 광고라든가, 거대 포털에 매번 최상단에 게재되는 배너는 너무도 잦은 노출 때문에 오히려 시청자나 방문자들에게 항의를 받는 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잦은 노출만으로는 성공적인 전략이 아니며, "유창성"이란 중간다리를 반드시 거쳐야 하고, 이것이 바로 (다분히 기만적이지만) "친숙함과 공감"으로 이어지는 비결이라는 겁니다.

"만약 제품의 절대적 가치를 알 수 있다면 사람들은 아무도 브랜드에 의존하지 않는다." 제 생각에는 이 멋진 말이, 소비자 대중이 아니라, 그들에게 뭘 팔려고 드는 마케팅 책임자들이 명심해야 할 사항인 것 같습니다. 내공이 떨어지는 날품팔이 같은 셀러들이나, 얄팍한 속임수로 대중을 혹하게 만들려 들기 마련입니다. 진짜 크리에이터는 이처럼 대중의 얕은 심리를 꿰면서도, 컨텐츠 창조의 정도를 걷기 위해 애 쓰는 거죠. 저 말에 숨은 또 하나의 의미는, 대중 역시 브랜드의 휘광에 속고 마는 자신을 창피하게 여긴다는 겁니다. 모르니까 그거라도 의존해서 결정하겠다는 건데, 아예 이 사실조차 자각 못 하고 "남들 따라 사는 게 절대 진리"라고 우기는 무지렁이도 있습니다.

책에는 심지어 칸트도 인용됩니다. 허 참 나, 제가 읽으면서 저자님께 완전 넉아웃된 게, 아니 그 고전의 그 구절을 그런 뜻으로 이해하여 마케팅에다 적용할 수도 있었나 하는, 기발한 센스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었습니다. 어디서 이 철학 고전이 모듈화하냐 하면, 그의 저작 <판단력 비판>에서 저자는 여러 대목과 논지를 인용하네요. 사람은 본성적으로 무엇을 판단하고, 지각과 그 상위의 판단 기제를 분화하려 든다는 겁니다(그 판단이 옳고 그르고는 별개 문제). 이 과정에서, 사람은 단조로운 걸 싫어합니다. 또, 자신의 판단이 단조로워지는 것도 같이 싫어하며, 변화무쌍한 판단을 내리는 자신의 모습을 더 즐긴다는 거죠(실제로는 조삼모사처럼 어떤 패턴에 속아 이곳저곳을 왕복하는 것에 불과한데도). 하긴 이 주장도 메타적으로 한번 적용해 봅시다. 우리 중에 이런 결론을 누가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난 단순한 게 좋아. 어제도 오늘도 똑같은 것만 마시고 읽고 소비하지." 아무도 이런 무지렁이가 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무려 이걸 칸트가 주장했다고 하면 "거 과연 맞는 말씀일세!"라며 경탄하는 겁니다. 사실은 칸트의 입을 빌려 나온 자기 자신의 생각(ㅋㅋ)에 박수를 보내는 것뿐인데도요.

이 책을 보면 저기 조셉 캠벨의 원형, 원질신화 이론도 거명되는데, 이 저자님 평가가 뭐냐면 "탁월한 분석으로 이미 캠벨 자신이 한 원형이 되었다"입니다. 캠벨 이야기가 왜 나오냐면, (이 정도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가 왜 그토록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는지에 대해, 구조론적 분석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그 "히트 비결"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처럼 이 책은 아득한 지성의 원전, 원천과,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우리 시시한 독자들의) 당대 히트작들의 즐비한 성공 사례를 종횡무진 오가면서, 지적인 욕구와 생업에의 절실한 니즈를 동시에 만족시킵니다. 이미 독자로서 제 개인에게는 이 책이야말로 원형 중의 하나로 자리잡았네요.

우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이 다 알고 있는 결론을, 정제되고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저자에 더 열광하는지도 모릅니다. 너무나 낯선 컨셉은 그것이 옳건 그르건 무관하게, 대중 사이에서 배척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이런 책처럼, 다 알고 있는 내용을 핀셋으로 집어내듯 지적해 주되, 그 배후에 숨은 불편한 진실, 뭔가 감은 스치고 지나갔는데 확 잡아채질 못하고 느낌으로만 남은 것들, 요런 걸 이처럼 콕콕 짚어서 알려 주기란, 그저 후크송을 찍어내듯하는 얄팍한 속셈이나 재주만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결과물입니다. 히트 메이킹의 비결은 히트 메이커한테 들어야겠으니, 히트메이커스(란 제목을 단 도서)가 진짜 히트메이커(이 책을 읽고 각성한 독자 겸 타 분야 크리에이터)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낯선 걸 익숙하게 만들고, 익숙한 걸 낯설게도 만들어라."

"앞서나가되 딱 반 보만 앞서나가라." 결국은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감동도 너무 재미있을 때 감동이 밀려오는 거고, 마치 다른 감정인 양 우리가, 메타적으로 포장하기 좋아하는 우리가, 그리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남을 쉴 새 없이 재미있게 만드는 우리가 되기 위해, 이 책도 그런 소임을 충실히 다하겠다는 양 쉴새없이 재미있게 쓰여졌습니다. 애덤 그랜트도 격찬했고 미국에서 높은 판매부수를 기록했다는 이 책인데(그 사람 어느 책하고 표지도 닮은 것 같아요. 영어 원서까지), 거 그럴 만합니다. 하긴 히트 메이커를 만들어 주겠다며 자신은 히트작이 아니라면 그것도 곤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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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표지 : 2종 중 랜덤) - 작고도 빛나는 삶을 위한 111가지 일상탐구서
체로키 지음 / 웨일북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하찮은 미물이라 해도 먹을것을 찾아 생리 요구를 채우고, 대사 작용을 이루며, 새끼를 번식시킨 다음 수명을 마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일종의 "추구, 탐험, 모색"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존재가 그 필멸의 아픔, 숙명을 극복하는 몸짓은,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는" 데서 가장 아름다운 결정(結晶)을 빚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나, 무정물이라고 해도, 실재 속에 지금 그 모습으로 어엿한 자신만의 공간을 차지하거나 특유의 향취를 뿜음은, 역시, 무엇인가를 갈구하고 분주히 노력하며, 마침내 뜻한 바를 찾은, 그 나름의 소중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퀘스트는 일종의 열쇠입니다." 저자 서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부분에 실린 대로, 우리는 우리 앞에 버티고 선 문을 두드리고, 마침내 그 문이 열리기를 갈구하는 과정으로 삶 전체를 다 채우다시피합니다. ".... 어떤 문은 좀처럼 열리지가 않아서, 우리를 주저앉게 만듭니다...(p004)" 지금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이들에게, 이 말은 "나 말고 다른 누구도 그 앞의 문이 야속하게 굳게 닫혔나 보구나." 같은 위안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타고난 각자의 처지가 다르고 삶의 편의가 차이날지언정, 한 과제가 해결되고 나면 또다른 고난도의 짐이 여전히 우리 어깨를 짓누르게 마련이죠. 퀘스트는 그래서, 열쇠를 찾아다니는 긴 여정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가 열쇠이기도 합니다. 결실과 소득의 농도, 볼륨에 못지 않게, 이를 좇고 찾아나서는 그 과정 자체가 이미 보배인 법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생이라는 게임 속에 들어왔습니다.(p005)" 누구라도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이는 없습니다. 무지렁이는 무지렁이대로, 귀한 몸은 귀한 몸대로, 임의대로 던져진 주사위에 따라 말이 되어 움직여지고, 때로는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 제 의지대로 꿈틀대기도 하는 법입니다. 이를 두고 실존주의자들은 "피투(披投)적 존재" 같은 어려운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냥 돌멩이처럼 굴러다니지만은 않고, 한번쯤은 내 뜻대로 날아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또 얼마나 갸륵합니까. 혹 절대의 섭리 같은 게 위에서 지켜보기라도 한다면 그 역시 다 기특히 여길 만한 분투입니다.

이 책 <Quest>는 다섯 개의 "퀘스트"로 이뤄졌습니다. 각각의 퀘스트는 "일상", "나", "타인", "일", "세계"인데, 어떻습니까? 저는 책을 넘겨 읽다가 이런 분류가 너무도 공감되고 좋아 보여서 잠시 그 느낌을 스틸사진처럼 간직하려고 눈을 감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일단 생리가 완전히 작동하는 순간(어디가 아프다거나 신체 일부가 장애가 아닌 이상), 어리면 어린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일상을 영위합니다. 그러다 그 일상에 다소라도의 여유가 생기면, 비로소 "나"를 자각하죠. "나"에 대한 감정, 인식이 어느 정도 자리를 찾으면, 그때부터는 "타인"에 대해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관계의 형성을 모색하는데, 이 단계가 성공적이면 "일"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려 듭니다. 나이도 지긋하게 먹고 제 일에서 소정의 성과, 인정을 얻고 받아 낸 다음에는, 비로소 "세계"에 대한 의미를 찾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또, 이게 "퀘스트"입니다. 그러니, 전체가 곧 부분이며, 건강하게 살아온(동작한) 부분이 다시 오롯한 전체를 이루는 셈 아니겠습니까? 정말 고대 체로키 족의 대현자가 행여나 있기라도 해서(ㅎㅎ), 어리석은 우리 후대인들을 깨우치러 정성들여 세공한 보석과도 같은 가르침이 아닐지요.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p005)" 우리의 추억과 기억은 단 것과 쓴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이 모두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불쾌하고 화나고 더러운 기억이 유독 오래가는 것일까요? 이 역시 가슴이 절절히 느끼고 기억의 중추에 넣은 요소이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이란 주어진 현재에 감사할 줄을 모르고, 분수에 넘는 걸 마구 바라기는 또 즐기는 동물인지라, 긍정보다는 부정의 기억이 존재를 괴롭히기가 일쑤인 법입니다. 그래서 현인들은 하나같이 "가능하면 긍정의 시선으로 세상과 자신을 보라"며 우리들을 도닥입니다. 그 긍정이 이성과 인식에 머무르지 않고, 진정 마음으로 느끼며 정직한 희열을 맞이한다면, 그 사람이 꼭 현명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최소한 "행복한 사람"임은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가슴으로 느끼는 인생은 그래서 무엇보다도 값지고 고귀한 것입니다.

일상이란, 소소하기에 그 가치를 모르고, 공기처럼 흔하고 당연하기에 감사를 받지 못합니다. <행복의 기원>에는 이런 말이 실려 있다고 하는군요.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이 책 p014)" 사실 행복, 아니면 그보다는 낮은 차원의 피상적 쾌락이라고 해도, 한번 강한 세기의 체험이 주어지면 그와 비슷한 만족이 재현되기만을 또 원하는 게 우리네 간사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감각의 쾌감에 아부하며(쾌감이 주인인 내게 아부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 에스컬레이트시켜 가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약물 중독자들이 파멸을 맞는 게 다 이런 경위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 존재를 참된 내용으로 채워나가는 건, "쎈 행복"이 아니라 "흔하고 잦으며 우리 곁에 소소하게 머무는 행복"인 것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 책 매 절의 끝마다, "가장 좁은 의미의 Quest"가 또 실려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p015에서는 우리 독자에게 미션을 주며, "추억 꺼내어 나누기", "함께 TV 보기" 등을 권한 후, 체크박스 안에 표시해 보라고 합니다. 이런 책에서 부여하는 미션은 대개 좀 부담스러운 것들이 많았다는 생각인데, 가족, 혹은 친구와 함께 TV 예능을 보며 낄낄거리거나, 과거의 재미진 사연 나누기라면 누구나 어디서건 실천에 옮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퀘스트라면 자다 덜 깬 눈과아직 둔하게 굳은 근육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죠. 어찌보면 모든 "퀘스트"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깨 힘 빼고 놀듯이 하나하나 채워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앞에 우뚝 완성되어 있는 겁니다. 안 열리는 문 애써 붙들고 씨름할 땐 죽을 지경이었겠지만 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하네요(이 책에서는 p036).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시간이지만, 우리 몸은 회복과 재생 과정에 몰두하며, 동시에 기억력과 창의력, 자신감을 키우는 작용을 한다." 이는 지혜의 금언이라기보다, 어떤 실천의 팁이라든가, 혹은 자계서식 실천 요령처럼 다가옵니다. 실제로 저는 예전에 러시아어 초급 강좌를 들을 때, 전날 힘들여 외운 단어, 숙어들이, 자고 일어나니 당연한 사항처럼 머리 속에 이미 정리된 걸 깨닫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회복과 재생도 그저 수면과 휴식에 덩달아 따라오는 기능은 아니며, 깨어 있는 동안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인드셋으로 과제에 힘껏 달려들었던 후에나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p278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낙관주의가 심장병의 예방과 치료에 핵심적 영향을 미친다." ㅎㅎ

"꽃들이 죽지 않도록 나는 그림을 그린다." 프리다 칼로의 말인데(이 책 p050), 파스칼은 이런 말을 한 게 기억납니다. "우주는 하찮은 인간이 상상도 못할 만큼 거대한 크기지만, 인간은 자신이 작다는 것도, 우주가 크다는 것도 알고 있으나, 우주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꽃이 아름다운 줄 평가하고, 아름다움을 알아 보는 인간이야말로 꽃보다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예술가는 그런 자연의 아름다움에 또다른 창조 행위로써 최상의 찬사를 바칩니다. 꽃도 그런 아름다움을 알아 봐 주는 인간이 없다면 한낱 무심한 진화의 우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고교 졸업 후, 물감과 파레트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정말 간단한 스케치라도 해 본 적 있습니까? 없다면 당신이나 저나 인생 참 삭막하게 산 겁니다. 전 고교 시절 다른 어떤 추억 못지 않게, 미술 선생님이 제게 다가와서, 벽에 간 균열을 애써 모사하는 걸 보고 "아! 재미있는 것!"하고 칭찬해 주신 말씀이 이상하게도 안 잊힙니다. 월요 전교조회에서 연단에 올라가 천여명이 올려다 보는 가운데 상 받은 체험보다도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생각이 데려다놓은 거리에 존재한다.
우리는 내일, 우리의 생각이 데려다놓은 거리에 존재할 것이다.
 - 제임스 앨런 (이 책 p092)

그러니 생각이 부실한 인간은, 생각이 멈춘 만큼 인생을 퇴보해서 사는 겁니다. 더 나아가,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정말 보드게임에서 주사위굴림 한 번마다 이리 기우뚱, 저리 휘청대는 일개 졸(卒)만도 못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은 폴 부르제의 것이었군요. 여튼, 매번 생각하는 대로 살 수야 없겠으나, 적어도 내가 지금 "생각하는 대로 사는지, 아니면 사는 대로 생각하는 중인지는" 분간이 가능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혹 후자의 굴레에 묶여 끌려가면서도, 과감히 질곡을 떨치고 사람으로서 정상 궤도에 복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장 심각한 건, 전자이면서도 후자인 양 무지렁이처럼 우습게 착각하는 꼴입니다. 하긴, 그걸 알면 이미 무지렁이가 아니죠.

네오, 너도 나처럼 곧 알게 될거야.
갈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를. (p118)

요거는 모르페우스가 한 말이죠.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Neo, sooner or later you're going to realize just as I did that there's a difference between knowing the path and walking the path.

길을 걷는 중이면 그 길이 뭔지 알게 될까요? 꼭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겉멋만 들어 아무 구절이나 이름표를 따서 쓰는 엉터리처럼, 길을 막상 걸으면서도 이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인지도 모른 채, 뇌가 할 일을 다리에 맡기고는 기계처럼 궤도를 도는 인간도 부지기수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길을 알기만 하고 정작 운동화를 신은 채 신나게 달려볼 생각은 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시 저 위 편저자의 말씀으로 돌아가봅시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인생이라는 퀘스트에서 진정 어떤 작은 의미라도 찾으려면, 우리는 머리와 가슴, 실존과 이상이 하나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때, "어둠은 불멸의 영혼, 그 전진을 가로막지 못하게(p212. 헬렌 켈러)"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삶은 초콜릿보다 더 달콤하다는 겁니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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