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보혈의 능력 세계기독교고전 29
앤드류 머레이 지음, 원광연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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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있어 어떤 영성의 문제는, 말하는 사람의 문맥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텍스트를 읽을 때 정보의 이해와 취합에 중점을 둘 때도 있고, 줄글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박력, 영감, 호소력 등을 느껴 가며 읽을 때도 있습니다. 후자는 독서라기보다 모종의 감동적인 연설을 들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죠. 종교적 감화와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예컨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1963년 링컨 메모리얼에서 행한 "I have a dream." 같은 연설을 들어 보면 (그 유명한) Free at last 대목에서 연사의 고음이 파르르 떨리는 느낌이 듣는이에게 그대로 전해지며 전율이 느껴지는 체험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영감, 영성"이 가득 채워진 채 쓰여진 글을 읽을 때도 이와 같습니다.

신구교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 서적은 읽고 이해하기에 꽤 어려운 편입니다. 그나마 한국어로 옮겨진 책은 역자들의 노력, 즉 의역, 개념의 세분화와 재정립을 거치기 때문에 낫고, 영어로 쓰여졌거나 한 텍스트는 각각의 단어가 통상의 의미와는 너무도 다른 용례(usage)를 지니기 때문에 독자는 마치 바다에 빠져 표류하는 듯합니다. 하긴 신학뿐 아니라 법학, 영문학, 정치외교학 등 모든 분야의 jargon이 다 마찬가지이긴 합니다만.

그런데 정말 영감, 영성에 가득 휩싸인 저자가 쓴 책은, 설령 개별 어휘가 난해하거나 낯설망정 전체 맥락이 부분을 이끌고 가는 힘이 있기에, 독자의 교육 수준을 불문하고 결론적으로 얻는 감동의 레벨이 같아진다는 효과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 책 본문 중에도 그런 말이 나오지만, "... 어리석고 미개한 토인들에게 신앙을 전파한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라든가, 그런 시도를 한 선교사들에게 "파송받지 아니한 자" 등으로 매도하는 태도는, 회개와 구원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어찌 보면 반(反) 그리스도적 성향인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마치 이런 편견에 가득찬 이들을 깨우치고 교화하려는 모범을 보이려는 듯, 글 전체의 고유의 생동감과 경건함, 참된 각성의 교훈이 넘치는 이런 멋진 저작으로, 구원과 감화와 거듭남에 유-무식의 조건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킵니다. 마치 신라의 원효 대사가, 무지한 중생에게 "나무아미타불만 읊어도 극락 왕생할 수 있음"을 강론한 사실과도 흡사하죠. 연단에 서서(혹은 명저를 저술하여) 무리를 깨우치는 지도자의 덕성과 인품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말이나 글이 멋져서가 아니라, 그 사람됨됨이의 힘이 이만큼이나 강력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모든 감동의 원천이, 예수의 희생과 대속을 은총으로 깨닫는 그 순간에 있다고 하며, 그 상징이자 실천적 징표가 바로 "보혈"입니다.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설교자였던 앤드류 머레이(Murray. 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의 이 감동적인 강좌는, 본디 네덜란드인이었고, 당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가장 뚜렷한 지도자격 인물이었습니다. 본디 네덜란드어로 쓰였던 원본을 그의 동료 윌리엄 더글라스 목사가 영어로 옮겼고, 이 책은 그 영어 번역본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 텍스트이기에 1권, 2권 모두에 그 사정을 반영하는 서문이 실려 있는 것입니다. 영성과 감동에 충만한 텍스트는, 여러 차례 번역을 거친 후에도 여전히 그 박력이 남아 있음이 신묘할 뿐입니다.

"보혈"은 보배 보(寶), 피 혈(血) 자를 써서 보혈이라고 합니다. 보배로운 피라는 뜻인데, 구교 신앙 가진 분들은 "성혈"이란 말을 더 자주 접했겠는데, 깊이 들어가면 좀 다른 의미로 분화됩니다. Sanguis Pretiosissimus(가장 값비싼 피. 뒤에서부터 해석합니다)라고 라틴어로 개념화한 걸 각국어로 옮기면서, 영어로는 Precious Blood라고 부르게 됩니다. "성스럽다고 하면 될 것을 왜 물질적, 세속적 뉘앙스의 보배롭다는 말을 쓰는가?" 그에는 이유가 있고, 이 책이 간접적으로 그 의문을 상세히, 후련하게 풀어 주기도 합니다.

저자의 논지는 일단,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하는, 사탄의 권세가 만연한 곳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도 그런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언제나 어둠이 지상을 감싸 왔지만,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은 없었다." 이기지는 못해도 무력하고 죄 많은 인간들을 짓눌러 온 건 악이고 사탄입니다. 신은 그런 불쌍한 우리들에게, 자유의지와 회개를 통해 죄를 씻고 스스로의 힘으로 악을 이긴 다음 천국에 들 것을 말하는 것이겠고 말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영(靈)과 육(肉)으로 이뤄졌습니다. 이 중 본체는 영적인 부분이며, 육은 우리를 타락과 죄악으로 이끄는 악의 근원입니다.맨날 교회 가고 성당 다니면서 열심인 척 해도, 주일 예배나 미사를 마치고 나와서는 문란하고 추접스러운 색(色)의 행각에 빠진다거나, 그나마 목적도 달성 못 한 채 마음만 더럽히는 한심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성당 다니는 목적은 그저 돈 많이 벌게 해 주십시오, 대학 붙게 해 주십시오 같은 푸닥거리, 더러운 기복 신앙 욕구를 채우는 게 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마치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내려와 대중에게 불벼락을 내리고 갈라진 대지의 틈 사이에서 영원한 고통에 빠지게 했듯, 복은 고사하고 천벌이나 떨어져야 맞습니다. 신앙을 가졌다면서 이런 육적인 욕구에 끌려 입으로 몸으로 더 큰 죄를 짓는 자들에게, 앤드류 머레이는 "왜 예수가 지상까지 내려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처참한 고통과 굴욕을 겪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준열한 설교를 베풉니다. 이어 그는 교회가 영을 멀리하고 육의 방향으로 타락한 샛길을 걸음으로써 대대적인 개혁이 벌어졌던 지난 역사를 거론합니다.

"보혈"의 원어에서 Pretiosissimus가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저자 앤드류 머레이는 먼저 "사다"란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라고 합니다. 사는 건 값진 물건을 "대가를 치른 후" 내 것으로 만드는 행위를 말합니다. "치르다"는 말도, 꼭 물건값을 치른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라, 죗값을 치르다, 응보를 겪는다는 용례도 있습니다. 죄를 씻으려면 감옥에 가고, 매를 맞는 등의 고통만 겪는다고 끝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통회의 시간도 거쳐야 합니다.

로마인들이 무력을 앞세워 세상 곳곳을 정복하며 저지른 악행만 악행이 아닙니다. 유대인들 역시, 입으로 행위로 무수히 많은 죄를 짓고, 동족을 못살게 굴고, 율법이라는 미명을 앞세워 사실상 신성 모독을 범했습니다. 지상을 가득 채운 인간의 무리가 저지른 악행이 그 수위를 넘게 되자, 신은 드디어 자신의 "아들"을 보내되, 죄의 대가는 그 죄를 저지른 인간들이 아닌, 아들이 대신 치르게 함으로써 못난 인간들을 전율케 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전 훌륭한 스승들이 제자에게 회초리를 쥐어 주며, "내가 너희를 잘못 가르친 탓이니 나를 쳐라"고 했던 미담과도 맥이 닿는 것입니다. 예수의 육신이 그토록 큰 고통을 겪은 건, 자신이 모범을 보임으로써 "이처럼이나 육신이 아무 의미도 없는 짐덩어리에 지나지 않음"을 깨우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대속과 구원의 효과를 "피"로 압축한 것입니다. 이 "보혈"은, 뭇 인간의 죄를 씻되 뭇 인간(=죄인들)의 피가 아닌, 오히려 가장 죄없고 가장 귀한 아드님의 피로 죗값을 대신 치렀다는 뜻에서, "가장 값비싼 피"가 되는 것입니다. 이 뜻을 모르고 백날천날 교회, 성당에 가서 복을 빈들,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고 소금을 뿌리고 침을 뱉는 더 큰 죄를 지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책은 두 저서의 합본 1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제1권 "예수의 보혈의 능력"이요, 후반부는 제2권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1권의 서문은 앤드류 머레이의 아들 M E 머레이가 서문을 썼으며, 2권은 이 책 전체의 번역자인 더글라스 목사의 서문이 내용을 이끕니다. 예수의 피로 씻김을 받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통렬히 뉘우치는 영혼이라야, 선택받은 자로서 천국에 비로소 들 수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죄의식이 없고 모고해를 버릇처럼 일삼는 자는 지옥의 가장 깊은 불구덩이에 빠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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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 자기 성찰의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범립본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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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은 범립본의 편역서이며, 저자명의에 대해서도 여러 논란이 있기에 한마디로 정리하기가 아직은 어려운 상황입니다. 요즘 나오는 책들은 대개가 고려인 추적(秋適)의 명의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문헌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오히려 명나라 사람 범립본을 주(主) 저자로 내세우는데 여튼 이 입장이 현재 학계의 다수설입니다. 김원중 교수님이 옮긴 이 책도 같은 입장에 서 있습니다.

쉽게 요약하면 1) 범립본의 원저가 있고, 2) 조선에 수입된 후 이름 모를 어느 편집자가 그 원저 1)을 초략한 판본이 있으며 3) 2)에 내용을 좀 더 보강하고, 한국의 고사까지 첨부한 판본이 또 있습니다. 2)와 3)은 원본과는 많이 달라진 한국식 변형으로 볼 수 있는데, 여튼 우리 조상들 사이에 널리 읽히고 고전의 권위가 부여된 책은 3)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이 책도 3)을 저본으로 삼고 번역한 것입니다. 추적의 명의를 주장하는 분들은 1) 이전에 다른 어떤 책이 있었다는 전제에서 펴는 주장입니다. 추적의 저술이 사실이든 아니든, <명심보감>은 중국보다는 한국에서 특별한 의의와 의미를 더 갖게 된 텍스트가 된 셈이죠. 어느 게 진실이건, <명심보감>은 그보다 더 (훨씬) 앞선 시기에 출현한 여러 원전들의 편집본입니다. 비록 범립본이 저자 명의라고 해도, 이후 많은 변형을 거친 (이름만 같을 뿐인 -역자 김원중 교수님도 이런 표현을 쓰십니다) "명심보감"은 이미 우리 한국인의 고전이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습니다. 김 교수님의 이 책은 올해 9월에 나온 개정판이며, 그간 강단에서 가르치던 내용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간행되었다는 취지를 역자께서 서문에서 직접 밝히고 있습니다.

전체를 개관하면 유교 윤리가 완전히 사회 일반의 도그마로 자리한 후에 저술되고, 큰 지지를 얻은 교본이므로 당연히 공맹의 사상이 주종을 이룹니다. 그러나 직접 이 책을 펼쳐 보시면 알 수 있듯, 노장 사상의 여러 고전도 출전으로 다양히 쓰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명언의 서두에 "장자", "노자" 등으로 언명자를 분명히 밝히는 게 또 보통이니 더욱 의외죠. 노장 사상등 제자백가에 대해 마냥 백안시했으리라는 우리의 선입견을 깨고, 조상들은 "좋은 말씀이면 나의 윤리 준칙으로 삼기에 주저함이 없던" 열린 자세를 이미 지녔던 증거입니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본문의 엄정성에 대해서도 비교문헌적 교차검증을 통해, 분명한 오류라면 지적을 하는 태도입니다. 김원중 교수님은 각주를 통해, 예컨대 해당 문장의 출전으로 명시된 <장자> 등에는 정작 해당 구절이 안 보이고, 오히려 <논어>에 그 비슷한 취지를 담은 문장이 보인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하십니다. 서양의 경우, 자신의 주장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권위자의 명의를 거짓으로 갖다 쓰는 관행이 고대, 중세에 널리 돌기는 했으나, 그 반대로, 사회에서 이미 중추적 훈육의 원리로 위상을 굳힌 유가의 출전을 굳이 바꾼 후, 오히려 이단시되던 비주류의 명의를 내세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뿐더러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안 됩니다. 아마도 도가의 입장 중 일부를 유가식으로 교차 변용하던 태도의 흔적(이 역시, 고대부터 두 유파는 치열한 대립 못지 않게 상호 인정과 교류를 이뤘다는 점을 상기해야겠죠)이 아닐까 생각도 해 봤습니다.

<명심보감>은 워낙 고전이다 보니 저희 때에는 국어 교과서에 그 언해본이 일부 실리기도 했습니다. 다만 <명심보감>은 어디까지나 편집서적이다 보니, 그 출전은 반드시 가장 상위의 출전을 대는 게 보통이었죠. 수신서의 핵심이라 불러 마땅한 "효행"에 대해, 이 책은 <논어>에서 공자님의 여러 말씀을 인용합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멀리 놀러가지 않고, 반드시 가는 방향이 (정해져) 있어야만 한다.

"유(遊)필유방"이란 말로도 요약되는 이 가르침은 각주에 나온 대로 <논어> 이인편이 그 출전입니다. 역자께서는 이 가르침이 전제하는 상황에 대해, "자식이 돌아오지 않아 문지방에 기대어 기다리는 부모님"을 들고 있습니다. 본문만 보면 알쏭달쏭해도, 이렇게 권위자의 해설을 곁들여 들으면 바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믿을 수 있는 번역본은 이처럼 든든한 스승과 같습니다.

옛 사람들의 훈육에 있어 또 하나 좋은 점은, 글공부를 하면서 동시에 인격 수양이 되는 텍스트 구조를 갖췄다는 것입니다. 글공부를 하는 교재에 "학문"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 않으면 또 이상합니다. 송나라 황제들은 문치주의를 극구 강조했기에, 입만 떼었다 하면 "공부해서 출세하라"는 다짐입니다. 4차 산업혁명을 맞는 작금에도, 사람이 공부는 하지 않은 채 하늘에서 떨어진 창의력에만 기대어 일을 해 나갈 수는 없습니다. 텍스트의 성격과 범위가 달라졌을 뿐, 공부하고 수신해야 한다는 근본의 이치가 바뀔 리는 없죠.

"배운 사람은 벼와 같고, 배우지 않은 사람은 잡초와 같다.
벼와 같은 사람이여, 나라의 큰 양식이며 세상의 보배이도다.
잡초 같은 사람이여, 밭 가는 사람이 싫어하고 김매는 사람이 귀찮아하는구나.
뒷날에 담을 마주하듯 뉘우쳐도 이미 늦은 몸이로다."

못 배운 자가 제 열등감을 해소하려 남의 말을 끊임없이 베끼고 목청 높여 읊어 대어도, 어제 한 말이 다르고 오늘 하는 말이 표변하니 까마귀가 경우에 맞지 않게 울어대는 양 사람의 실소를 자아낼 뿐입니다. 사람이 열등감이 사무치면 정신병으로 바뀝니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떠드는지도 모른 채 구호를 떠드니, 날이 거듭할수록 정신이 혼미해지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때를 놓친 자의 설움과 한계는 이처럼 뿌리깊은 것입니다. 그를 넘어, 얼굴과 용모도 썩은 잡초처럼 변하니 무지렁이처럼 처박힌 벽지 밖에서는 아무도 반기지 않는 촌구석 흉물의 처량함이 이와 같습니다.

편집본이라고는 하나 모든 문장이 재인용된 것은 아니며, 아마도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을 뿐 저술 당시에는 원저가 분명 있었겠으나 여튼 현대인에겐 출전이 미상인 대목도 꽤 됩니다. 에컨대 다음과 같은 <省心>편의 한 구절입니다.

自信者人亦信之 吳越皆兄弟
自疑者人亦疑之 身外皆適國

이 구절은 대체 어느 책이 가장 앞선 시기에 실었는지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역자 김원중 교수님은 <열자>의 "의심암귀"를 유사한 문맥으로 거론하시긴 합니다. 도끼가 사라졌을 때는 이웃이 도둑처럼 보이더니, 막상 찾고나자 그저 잘 알던 얼굴 이상이 아니었다는 교훈이죠. 도끼가 만약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땠겠습니까? 재물이 행방을 감추고 아니고는 그저 우연한 사정에 지나지 않지만, 제 마음 속에 확신이 없어 모든 사정에 대해 근거 없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게 체질이 된 인간은, 이미 정신병 직전까지 갔다고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도끼가 돌아와도 아마 "내가 전에 쓰던 진본이 아닌, 손잡이에 독극물이 묻은 가짜"라며 제 속을 끓일 것입니다.

윗 줄에서 "인"은 물론 타인을 뜻합니다. 저걸 간단한 문장으로 고치면 自信者, 亦信人 으로 바꿀 수 있죠. 말의 맛을 살리기 위해, 목적어를 앞으로 빼고 뒤에는 일종의 가목적어를 형식상 보충해 넣은 것입니다. 이처럼 한문 고전 공부는 그 깊은 속뜻을 새김과 아울러, 모든 문장의 격조 높은 공통 구조를 분석하는 재미가 쏠쏠하죠. 이래서 권위 있는 역자의 책은 항상 원문을 같이 싣는 게 원칙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한자 원문은 작은 폰트로 처리했는데, 일단 뜻만 익히고 제일독을 마치려는 독자의 편의를 위한 센스라서 좋았습니다. 이 텍스트가 이미 익숙한 분들은 대뜸 원문부터 읽어나가셔도 되겠고 말이죠.

"어진 사람이 재물이 많으면 지조를 더럽히게 되고,
어리석은 자가 재물이 많으면 허물을 더하게 된다."

이는 한나라 때 사람 疎廣의 말입니다. 결국 재물은 누구 손에도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뜻인데,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말 "부자가 천국... 낙타가 바늘구멍... "을 연상케도 합니다. 천품이 어리석은 자는 그 가진 재물을 전부 자신의 허물을 덮는 데 낭비하고, 돈이 잘못 가르친 나쁜 버릇을 반성할 계기조차 마련하지 않아 구제불능으로 어리석어진다는 뜻도 됩니다. 가장 나쁜 건 돈도 없고 얼굴에 잡초만 무성히 늘려가며 어리석음을 폭력적으로 가중시키는 벽촌의 무지렁이 인생입니다. 돈이나 있으면 그나마 구제의 희미한 가능성이나 마련할 텐데 그조차도 여건이 안 되니, 졸부의 선심에나 애타는 기대를 걸 뿐인 가련한 신세이죠.

성심 하권에 보면 염계 선생, 즉 주돈이의 말이 나옵니다. "교언영색"이란 주지하듯 공자의 말씀인데, 주돈이는 이를 다소 변형한 언명으로 후학들을 깨우칩니다.

"소박한 자는 말이 없으며 편안하다."

재능과 수련은 부족하고 남 앞에 그 못난 꼴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가득한 늙은 자는, 남이 듣고 싶어하지도 않는 비천한 신상의 넋두리를 일삼는 법입니다. 김원중 교수님께선 원문의 "拙者"를 옮김에 있어, 대체로 "拙"이 나쁜 뜻으로만 쓰이는 관행을 감안하여 "소박한 자"로 번역했다고 역주에서 밝힙니다. 이처럼 고전 한문의 용례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번역 과정에 베푸신 마음씀이 돋보입니다.

책의 후반부에는 우리나라의 고전 <삼국유사> 등에서 간추려 넣은 "손순매아"라든가, 바보 온달의 고사 등이 실려 있습니다. 대단원은 그 유명한 주희의 권학문입니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가 어렵다.

이는 마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던 히포크라테스의 명언을 연상케도 합니다. 여기서 예술은 기예를 가리키는 말로서, 그 숨은 뜻을 살피자면 저 주희의 언명과 다를 바가 별로 없습니다. 어쩌면, 추적이 되었든 범립본이 되었든 인생 궁극의 가르침을 담은 명저 고전은 이처럼이나 천 년을 헤아리며 후대인에게 전하고, 이를 지은 분이든 애독하는 후학이든 백 년도 되지 못할 짧은 인생을, 미혹됨과 미망, 터무니없는 욕심 때문에 더럽히고 마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깊어가는 가을, 고대의 현인들께서 다정히 일러 주는 그윽한 가르침과 함께 알찬 시간을 보내게 도와 준 고마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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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산업혁명, 어떤 기업에 투자할 것인가 -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하는 맞춤형 투자전략 가이드
곽재혁.유나무 지음 / 길위의책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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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시대가 몰고 올 파장이란 주식 투자 분야에도 예외 없이 고스란히 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기존에 재미를 못 보던 투자자들은, 이렇게 판이 한 번 크게 흔들릴 때 유리한 자리를 잡을 기회가 온다고 생각해야겠습니다. 물론 볼썽사납게 아무데나 비집고 들어온다거나, 남들 패턴을 따라만 한다거나, 욕심만 앞서 허둥대다 넘어진다거나 하는 일이 없으려면, 무엇이 핵심인지 냉철하게 판단한 후 과감한 실행에 나서야겠습니다.

이 책 중반부에도 나오듯이, 1980년대 후반에 월급을 쪼개어 틈 날 때마다 삼성전자 주식을 구입했던 이(대략 그 무렵부터 일간지에 주가정보가 실리기 시작했고, 뜻있는 가정에선 아이들에게 시세판 보는 법도 가르치곤 했습니다)가, 현재는 100억원대 자산가가 되었다는 말도 나옵니다. 40여년이란 시간은, 샐러리맨으로 뛰던 분을 백발 노인으로 바꾸었을 법도 할 만한 긴 여정이지만, 40년 지났다고 누구나 중산층에서 100억대 자산가가 되는 건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며칠 전 리뷰를 올린 <밀레니얼머니>에도 그런 말이 나오는데, 투자 기간을 좀 길게 잡고 인내심을 갖는다면 남들이 결코 기대 못 할 큰 혜택과 행운이 따라온다는 말, 어디까지나 주식 투자는 가치 투자라는 점을 다시금 곱씹게 합니다.

4차 산업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1980년대말 이병철 회장(그 무렵에 타계했죠)이나 그 후계자 되는 분이 반도체에 올인할 때, 무모한 시도라며 혀를 차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때도 물론 삼성은 굴지의 재벌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국(이런 나라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란 작은 범위 안에서였죠. 부정적인 면만 보면 "현재 살림도 빠듯해 죽겠는데 그런 데 투자할 여력이 어디 있나?" 라며 망설여지는 게 인지상정이었을 겁니다. 한참 지나 결론만 보면 전부 필연처럼 보이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나 있어서 다시 그 시점에서 선택을 해 보라고 하면 그리 과감한 행동에 못 나설 겁니다. 지금 막 싹을 틔우는 유망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 책에도 역시 나오듯) 제임스 콜린스가 꼽았던 여러 유망 기업 중 현재까지 살아남은 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중 몇은 반드시 생존에 성공하여,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준 투자자에게 은혜를 보답하죠. 그 보답의 스케일이 매우 크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Part 1에서는 여덟 가지 투자 원칙을 먼저 제시합니다. 이 여덟 가지의 원칙은 물론 타당하고 모두가 새겨야 하겠으나, 독자 멋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본문을 좀 꼼꼼히 읽고 숙고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즉흥적으로 금세 수용하고 왜곡하고 빠뜨리는 이들이 언제나 그 선택의 결과가 안 좋지만, 자기 탓으로 진지하게 반성하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은 또 극히 드물죠. 머리 쓰기 싫어하는 이들이 좋은 성과를 낼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Part 2에서는 유망 업종, 분야를 점검합니다. 모두 열 개 분야가 나오는데, 분야야 서로 독립적이라 해도 개별 기업은 어느 한 분야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서로 겹치는 수도 있습니다. 열 개의 분야 설명 끝에는 실제 눈여겨 봐야 할 회사 여럿을 간략하게 소개하는데, 이 부분도 꼼꼼히 읽어 놓아야 Part 3에서 본격 전개될 테마주에 대한 내용이 더 잘 이해될 것입니다.

테마주라고 하니까 대뜸 거부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테마주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니라, 엉터리 테마주를 개념으로 묶은 이들이 잘못한 거죠. 진짜 맥락을 이해하고, 인과 관계가 명확해진 기업들에 내내 주목하여 투자 결정을 했다면 큰 실패를 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메가트렌드가 엮어 주는 테마주는, 상승폭도 엄청날 뿐 아니라 그 효과가 길게도 갈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테마주라면 이런 것뿐이라고 해야겠죠.

네이버의 인공지능 플랫폼 "클로바"라든가, 아마존에서 내놓은 알렉사 같은 것에도 저자는 주목하라고 하며, 단기적인 스폿라이트를 받는 아이템에 혹하기보다 장기 추세를 보는 안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중국 업체 중에서 주시할 만한 곳으로는 역시 바이두를 꼽습니다.

통신, 네트워크 업체 중에 눈길이 가는 곳은 PER 14.0이 추정되는(2017기준) 대한광통신, 다산네트웍스 같은 회사입니다. 5G의 상용화가 곧 임박했다고들 하는데요, 4G가 막 실용화될 무렵 앞으로는 카카오 같은 곳이 알짜, 승자이며 통신사는 빨대만 꽂히는 형국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만 어디 그렇겠습니까. 여전히 이들 회사는 높은 성장 전망을 보이며, 다른 분야 (제조업)의 거인들에게 직간접으로 끼치는 영향도 지대합니다.

반도체 역시 여전히, 정보화, 혹은 그 이후 세대 산업구조에서 "쌀"과 같은 존재입니다. 최근에는 애플도 하드웨어 직접 제조에 다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소식만 봐도, 이 생생한 실물 핵심 부품을 만들어내는 회사들의 장래성이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습니다. 맨날 중국 업체에 다 추월당한다, 빈껍데기만 남았다며 과장된 위기론이 돌던 SK 하이닉스도 아직은 여전히 비전이 양호합니다. 최근 MS가 실용화에 큰 진전을 보였다는 DNA 스토리지에 대해서도 주목해야겠습니다.

사물인터넷 관련 웨어러블 기기는 여전히 매혹적인 아이템입니다만 그간 전망이 과장된 면이 없지 않았음이 서서히 드러나기도 합니다. 몇 년 전 구글이 내놓으려던 스마트글래스, 나이키가 야심차게 추진하던 여러 신상품은 현재 열기가 시들해진 상태죠. 구글이 자꾸 AI를 강조하며 마케팅에 매진하는 것(하나가 실망감을 주고 나서 기업 장래에 대한 전반적인 회의적 분위기가 확산되는 걸 막으려는 듯)도 이미지 관리를 통한 주가 돌보기에 가깝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여튼 IoT는 우리의 미래상 중 가장 친밀하게 와 닿을 분야임은 분명합니다.

가상현실, 증강현실 하면 포켓몬고 같은 게임만 떠올리는 이들도 있겠으나, 이 분야 기술의 응용은 무궁무진하죠. 일례로 집에 관심이 있으면 모델하우스를 일일이 둘러보는 게 관행이었으나, 이 기술들을 이용하면 굳이 발품을 팔 필요가 없습니다. (고객보다는 업체에 더 요긴한 기술일 듯) 가구를 사려면 먼저 내 집에 얼마나 규격과 분위기가 잘 맞을지, 조화를 이룰지도 따져 봐야 하는데 여기에도 AR 등이 신세계를 열어 줄 수 있죠(단 이 책에 열거된 기업 중 보루네오는 몇 달 전 상폐되었으므로 안타깝지만 투자 고려 대상에서 일단 제외해야 할 듯). 이것 관련으로는 저 뒤 Part 3에도 나오지만 엔비디아가 무섭게 치고나가는 추세입니다.

3D 프린팅은 한때 최첨단의 신분야로, 앞으로 연관 산업 구조를 모조리 바꿔 놓을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현재는 좀 잠잠해진 상태입니다. 저자는 그런 말을 합니다. "... 위험에는 체계적 위험과 비체계적 위험이 있으므로, 후자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 쓰는 건 불필요한 염려이다... 그러나 현재 이 업종은 변동성이 너무도 큰 게 사실이다...." 특히 독자들이 유념해야 할 대목입니다.

월풀과 LG는 가전의 라이벌이고(며칠 전 ITC가 내린 충격적 결정은, 역설적이지만 LG 등이 미국 시장에서 얼마나 선전해 왔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이 두 업체에 모두 AI 플랫폼 알렉사를 탑재한 게 아마존닷컴입니다. 이 책 두 파트에서 일관되게 강조하지만, 이 회사의 클라우딩 서비스가 꽤 유망하게 발전하므로 그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겠네요. 클라우드 서비스 관련으로는, 오래 전부터 인공지능을 개발해 온(마케팅은 상대적으로 미미하지만) IBM이 자사 왓슨과 함께 연동시켜 밀고나가는 분야에도 눈길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빅데이터 연관 때문이죠).

퀄컴은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우리 국내 소비자들도 이름을 훤히 알게 된 회사입니다. 이 회사의 원천기술이 모든 이동전화 단말기에 쓰였기 때문이죠. 최근 NXP 인수와 관련하여 다소의 우려가 일기도 했으나 이 책 저자의 전망대로, "좋게 마무리될 가능성이 커"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기업은 영원한 강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해외기업에 투자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혹은, 아직 주식을 안 해 본 분이라면 국내 기업에라도) 이 책은 친절히 안내해 줍니다. 뿐 아니라 책 말미에는 직접 주식, 채권을 사는 게 부담스러운 이들을 위해, 간접 투자(펀드 등)에 대한 정보도 여럿 실려 있습니다. 아무튼 과감함과 신중함 사이의 황금 비율을 정하는 지혜는, 그저 배우고 공부하는 것 외에 답이 없음을 잘 알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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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편지 - 붙잡고 싶었던 당신과의 그 모든 순간들
이인석 지음 / 라온북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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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문명의 발달은 확실히 인간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같은 마을에 산다 한들 두어 리만 떨어져 있어도 물리적으로는 이야기를 나눌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게 옛 사람들 사는 모양새였습니다. 하물며 다른 시, 도, 심지어 외국에 나가 머무는 친지, 연인, 자녀와라면, 아무리 화급한 사정이 생겨도 무슨 수로 의사를 전달했겠습니까. 시외, 혹은 타국의 가입자와 대화할 수 있는 유선전화의 발명은 그래서 획기적인 쾌거였습니다. 실내에 머물면서 회선의 제약을 받는 일 없이, 이동 중에도 상대와 대화할 수 있는 무선통신은 더욱 놀랍습니다.

헌데, 우리는 이런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너무 많은 것을 잃지 않았을까요? 이 책을 펴낸 이인석 님은 "편지 수집가"입니다. 모으신 편지 중에는 한국 안에서 객지 생활을 하며 부모님과 가족의 안부를 묻는 내용도 있고, 외국에서 힘들여 일하며 노동의 대가를 가족에게 송금하는 분의 절절한 사연도 있고, 주한미군으로 보이는 청년이 고국의 애인에게 보내는 영문 편지도 있습니다(영문의 경우 편저자께서 번역도 한 후 이 책에 실으셨네요. 책에 실린 원문의 사진은 달필의 로마자 필기체입니다).

어떤 이들은 편지 쓰기가 그리 내키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마음에 없는 위로, 격려, 고백을 억지로 줄글로 쓴다는 건 누구에게나 고역이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애써 펜을 들어 편지를 쓰는 일은 벌써 자신의 마음가짐을 청신(淸新)히 먹어야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편지를 써야겠다 싶어 단정한 자세로 펜을 쥘 때, 벌써 한 번은 명경지수 같은 자세를 되찾습니다. 행여 수신인이 나의 글을 읽고 마음 상할 수 있으니, 지우고 고치고 말을 가다듬는 중에 나의 인격이 바로잡히기도 합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과정 그 자체가, 착한 마음의 회복으로 이르는 의미 깊은 수련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편지는 물론 당사자 사이의 내밀한 소통입니다. 이 책에 실린 편지들이 설마 반 세기 뒤 어느 수집가분의 정성에 의해 책으로 펴내질 줄을 미리 알고 문장을 새삼 가다듬어 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 사적(私的)인 공간의 말들이라 해도, 편지를 쓰는 이들은 막말을 함부로 내뱉지는 않습니다. 자제하고, 반성하고, 온유해지려 노력하고, 혹 격정을 채 잠재우지 못해도 글로 쓰는 과정이니만치, 종이에 적힌 어휘들은 점잖고 삼가는 태가 배어납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벌써 화가 줄어들기도 합니다. 반면, 상대의 배신, 게으름, 표리부동을 알아채고 "내 이 녀석을 가만 두나 봐라!" 하며 이동전화를 꺼내 드는 이들 입에서는 무슨 말이 나올까요? 우리는 몸이 편해진 만큼 그 남은 여유를 선용하는 게 아니라, 원색적 감정을 격발시키는 데에 낭비하며, 마음은 그만큼 더 거칠어집니다. 내 인격에 상처를 내는 자는 바로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내 자신입니다.

이 책에 실린 편지들은 그저 애모하는 정, 보고싶어 사무친 마음만 담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50여년 전 월남에 파견된 장교로 보이는 남편은, 고국의 아내가 왜 자신의 마음을 바로 헤아리지 못하는 지에 대해 야속해하고 분개합니다. 서신을 주고받아도 오해가 풀리지 않자 예정된 송금을 중단하기도 합니다. 요즘처럼 통신수단이 발달하고, 이동전화로 로밍하여 바로 통화가 가능한 세상이었다면 대판 싸우고 바로 이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부부들이 우리 주변에도 얼마나 많습니까. 반면 저 시절엔 통신의 불편이 "숙려 기간"을 베풀었고, 편지가 자상한 중재 알선자 노릇을 대행했던 셈입니다.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명언이 생각나는군요. 편지에 담긴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그 이전에 편지 자체가 사람 사이의 정을 이어주는 심부름꾼입니다. (이 와중에도 어디어디 땅을 미리 사 둘 것이며, 누구에게 논밭을 사 주라며 처세와 재테크[당시에는 그런 말이 없었겠습니다만]에 열중이신 발신자[남편분]의 마음씀이 엿보여 너무도 흥미로웠습니다)

"내 앞으로 다시는, 편지에다 기쁜 나쁜 말을 적지 않으리다."

글쎄 보십시오. 이렇다니까요. 편지는 그 자체로 우리 마음을 순화시켜 주는 진정제입니다. 상대의 나빠지는 기분도 기분이지만, 편지에다 대고 몹쓸짓을 한 듯 내 자신이 못나보인다는 겁니다. 예전 분들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편지는 또한 요즘의 문자메시지, 통신체 따위와도 달라, 하오체 등 고아한 문투를 써야 제격 제맛이었습니다. 요즘 흥행인 영화 <킹스맨>에도 그런 말 나오지 않습니까? "Manners Maketh Man."

"겉봉투를 보니 초면이시군요."

물론 편지 안에 사진을 동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대가 초면인지 아닌지는 눈으로 봐야 아는 법인데, 어찌 겉봉투로 판단하겠습니까? 이는 앞면에 적힌 이름자가 낯서니, 익히 교류하던 지인은 아니라는 뜻(그래서 더 반갑다는 정)을 저렇게 재미나고 멋스럽게 표현한 거죠. 편지를 주고받는 이들은 이처럼 일상의 대화에서도 여유와 품격을 남달리 쌓는 혜택도 누린 겁니다.

"여태까지 성장하면서
이런 서신을 수견하기는 처음입니다."

오래전 분들의 소통이다 보니 오늘날 우리에게는 생경한 어휘도 많이 등장합니다(예를 들면 "아빠"의 낯선 용법, "쏘제" 같은 시대상을 반영한 말). 우리가 주관적으로 낯설게 느껴도 국어 사전에 등재되어 있으면 엄연히 자격을 갖춘 우리말입니다. 그러나 "수견"은 사전에도 없습니다. 제 추측으로는 받을 수(受), 볼 견(見)을 써서, 보다 정중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임의로 고안된 어휘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에는 순우리말 접미사 "~님"도, 점잖은 서신 중에서는 한자로 써야 격이 맞다고 여겼거든요(이두?ㅋ). 저 말은 그저 "받아보다"의 뜻이겠습니다. 문법, 어법 오용을 지적한다기보다, 예전 분들의 삼가고 조심스러워하는 그 태도가 흐뭇해져서 하는 말입니다.

"당신의 뺨에 베에제를!"

이는 대학생들이 당시 낭만을 풍기려 현학을 즐기던 풍을 반영하는 어투의 좋은 예겠습니다. 어원은 프랑스어이겠지만, 아마 일본 대중 문학에서 남발되던 투를 따라한 흔적이겠죠. 우리가 쓰는 일빠체(이런 말부터가 정제된 어휘가 못 되지만요), 오타쿠체에 비하면 그나마 성숙함, 조신함이 느껴져 좋습니다.

중동의 열사와 싸워 가며 일하던 근로자들의 애환, 그보다 훨씬 전 한국전 당시 고향의 농촌에서 아들을 기다리던 부모님께 띄우는 서신, 월남전에서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 "나는 짐승이 아니다"를 절규하는 청년, 신문사 편집위원실에 서신을 보내 펜팔 친구 하나를 알선해 달라는 다소 해학적인 사연,... 편지들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온갖 생동하는 감정과 욕구, 이해, 공감, 애련 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고, 때론 시대를 대표하는 목소리, 몸짓도 투영됩니다.

오늘,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문자메시지, 페이스북, 트위터 멘션이 아닌, 편지를 한번 써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손으로 정성 들여 수를 놓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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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와 강적들 - 나도 너만큼 알아
톰 니콜스 지음, 정혜윤 옮김 / 오르마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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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평등주의라는 착각"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저렇습니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평등하며, 혹 평등하지 않거나 못한 구조적 모순이 있다면 직접 피해자가 아니라 해도 모두가 나서서 개선해야 합니다. 그게 문명 사회의 마땅한 도리이자 의무지요. 그러나, 남들만큼 노력도 않고, 준비도 덜 된 이들이, 대접만큼은 남들과 똑같이 받고자 한다면 그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회가 당면한 이슈에 대해 발언권을 배분할 때에도, 시민, 국민인 이상은 누구나 한 마디씩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역시 모럴 해저드의 일종이겠지만), 해당 이슈에 대해 전혀 소양이 없는 사람이, 역시 존중이나 자기만족감은 남들만큼 채우고 싶기에, 책임감이나 진지한 고려도 없이 마구 목소리를 높여, 모두의 생존과 번영이 달린 중요한 정책 결정이 결국 잘못된 방향으로 흐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금언은 여기서도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훈련이 덜 된 이, 충분한 사려와 지혜를 갖추지 못한 이가 전문가처럼 행세한다면, 그 사람의 주관적 만족을 위해 많은 타인들의 권익이 희생되는 결과밖에 생기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런 오도되고 값싼 평등은 이미 평등이 아니며, 오히려, 반평등, 역평등이라고나 불러야 마땅합니다. 권위 있고 유익한 의견을 내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노력한 사람과, 아무 생각 없이 경솔하게 자기 말을 내뱉고만 싶은 사람이 같은 대접을 받는다면 어떻게 그게 정의에 부합하겠습니까?

저자는 물론 소위 전문가 집단에 대해서도 쓰디쓴 충고를 던집니다. 그들의 자질 부족, 낡은 지식에 대한 집착, 과도한 권위주의 등이 누적적으로 대중의 불신을 초래했고, 이것이 웹에 퍼진 일부 무책임한 선동 트렌드와 맞물려 현재의 혼란을 자초한 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1장에서 저자는 흥미롭게도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이 공동으로 각본을 쓴(주연은 맷 데이먼이죠) 영화 <굿 윌 헌팅>를 예로 들며, 대중 앞에서 콧대를 세우고 현학적인 언사로 위신을 가장하는 전문가, 엘리트들을 마구 비웃는 캐릭터 하나를 창조한 이 걸작이, 한편으로는 누구든 독학으로, 혹은 남다른 열정 하나만으로 사회의 정규 기관이 빚은 전문 특수 인력을 능가할 수 있다는 잘못된 환상을 심어 주었다는 지적을 합니다.

사실 이 예 말고도, 난치병에 걸린 아이를 낫게 하려는 부모의 간절한 바람이 결국 특효약을 찾고야 말았다는 사연을 담은 <로렌조 오일> 같은 것도 있죠(어느 정도 실화에 기반했습니다만). 이런 영화들은 모두 그 나름의 진실과 감동을 담았지만, 일반화할 수 없는 예를 놓고 마치 보편적 진리인 양 오도했다는 비난도 피해가기 힘듭니다. 이런 영화의 주인공들은 극히 예외적인 조건을 갖춘 이들일 뿐이며, 차라리 전문가 그룹보다도 더 희귀한 사례이기에 일반 대중, 문외한이 감정이입을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가상의, 혹은 과장된 캐릭터들을 보고 대리만족을 하며, 급기야는 현실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되죠.

"아무리 잘 못 고치는 동네 치과의사라고 해도 당신보다는 낫다." 혹은 "1년짜리 경험을 20회 해 봐야, 그것이 20년짜리 경험과 맞먹을 수는 없다." 같은 지적(일부는 동양의 격언을 저자가 재인용한 것입니다)에서 특히 저자의 답답해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는 듯합니다. 실제 이 책은 작금의 지적 타락, 중우정치 경향, 건설적이지 못한 말싸움에 대해 개탄을 참지 못한 저자의 격정이, 집필의 주된 동기이기도 합니다.

2장에서는 몇 년 전부터 대중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진 개념어 "확증편향" 같은 심리학 용어라든가, 음모론에 대한 비판이 이어집니다. 사실 이 확증편향도 그렇고, 인식상의 오류를 지적하는 대부분의 용어들 역시 현실에서 무력하게 쓰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주장과 논변은 확증편향이고, 내가 빠져 있는 편견과 선입견은 소신"이니, 내 가 지닌 확증편향에 대해선 전혀 인정 않으려는 꽉 막힌 위인에게 이런 논지를 펴 봐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확증편향을 입에 담는 사람이 알고보면 가장 악성의 확증편향 성향을 지녔으니 말입니다. 대개 이런 이들은 그게 자기 개인의 소신이 아니라, 어떤 절대 진리를 자신이 대변한다고만 여깁니다. 그러니 자기 딴에는 공공 봉사 같은 것을 엄숙히, 정의롭게 수행한다고 착각하는 거죠.

이런 사람들이 인지부조화를 그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기댄 장치 중 하나가 음모론입니다. 물론 모든 음모론이 음모론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어떤 날카로운 직감과 의심이 결국 사실로 판명나기도 합니다(드물긴 해도). 또, 힘없는 소시민들이 뚜렷한 근거를 찾아내진 못해도, 뭔가 의심스럽고 부조리한 움직임이 저 상층부에서 포착된다 싶을 때, 이를 한목소리로 항의할 권리는 당연히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당한 발언권을 행사하려면, 그에는 합당한 근거와 정의감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측정이 주관적이라고 해서 아무나 근거 없는 비방을 일삼으면, 사회의 질서는 물론 그 당사자의 안위마저도 결국엔 위협받기 마련이죠.

3장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고등교육기관(즉 대학)의 문제들은, 이제는 다소 놀라울 정도로 한국과 미국 두 국가가 닮아가는 양상이라 과연 이 책이 미국 저자에 의해 쓰여진 게 맞는지 다시 표지를 들춰보게도 되었습니다. "... 문제는 대학생들이 너무 많고, 그들 중 상당수가 대학에 갈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 며칠 전 읽고 리뷰를 올린 책 <대량살상 수학무기>에도 그런 지적이 나옵니다만, 미국 역시 순전히 학생들로부터 수익을 올리기 위해 날림, 속성으로 모집단위를 채우고, 교육은 부실하게 행한 후, 준비도 채 안 된 졸업생만 사회에 무책임하게 배출하는 행태가 큰 사회문제로 대두된 바 있습니다.

이런 학교를 졸업한 이들도 여튼 인가받은 정식 학사학위가 있으니 대우는 평등하게 받고자 합니다. 기업이나 기타 사회의 수요는, 일단 이들을 써 보면 그 수행하는 업무의 완성도가 불만족스러우니 평판을 형성하고 기피하게 됩니다. 버니 샌더스의 말도 인용되네요. "오늘날의 대학 졸업장은 50년 전의 고등학교 졸업장이나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이런 개탄스러운 풍토를 두고 "학문을 이용한 비리 행위나 마찬가지이다."라고도 합니다. 이 3장의 내용은 특히, 주어와 배경과 발언자의 이름만 한국식으로 바꾸어 놓는다면 아마 큰 논쟁, 소동이 벌어질 만큼 인화성이 가득합니다.

"모든 글의 90%는 쓰레기이다." 이 말은 인터넷이란 게 채 세상에 나오기도 전, 작가 시어도어 스터전이 남긴 명언이며 그의 법칙이라고도 불립니다. 저는 예전에 PC 잡지를 구독할 때, 어느 잡지에서건 자주 기고문을 볼 수 있었던 곽동수 교수님(목소리도 참 차분하시고 마치 직업 성우처럼 격조가 느껴졌던)의 어느 "예언"이 생각납니다. "정보가 넘쳐 흘러서 너무도 행복하겠지만, 대신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걸러내야 하는 다른 고초가 뒤따를 것이다." 그때만 해도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불순한 세력이 정치에까지 끼어들어 대중을 호도하는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지금에서야 그 혜안에 감탄하게 됩니다.

책에서도 지적하는 바처럼, 한 사람의 지혜보다는 열 사람의 숙고의 결과가 나을 수도 있고, 사람들의 마음가짐만 바르다면 오히려 당연한 진리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는 부시의 군복무 허위 경력을 "증명"하는 서류가 오히려 가짜임을 지적한, 많은 선량한 시민들의 노력을 그 사례로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온라인 상에서, 조지 W 부시(이 사람이 아무리 한심하고, 지성이 떨어지고,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해도)는 "비판해야 제맛"이라며 무작정 매도하는 경향이 얼마나 큰 인기를 누리기도 합니까. 한번 잘못 형성된 "여론"은, 심각한 날조와 중상모략까지도 모두 합리화시키는 어리석음, 범죄에까지 이르기도 하죠.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심각한 사회, 국가적 위기입니다. 근거도 없는 편협한 당파성도 눈살 찌푸려지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이 그 기본 의무까지 모조리 방기한다면 체제의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고, 정의로운 선구자들이 피땀 흘려 쟁취한 숭고한 과실을 모두 "무(無)"로 화하게 하는 역사의 퇴보입니다. 1990년대 이뤄졌다는 PEW 리서치의 한 조사(p247)은 이렇게 의견을 정리합니다. "... 한때는 젊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현명함과 비판 정신이 절로 담보되던 때도 있었으나,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그들의 선배들보다 똑똑하질 못하다..." 물론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나이 든 세대는 지금의 현실이 요구하는 많은 생존 능력, 업무 자질, 센스를 못 갖추고 있습니다. 지나간 시대의 덕목, 가치를 그 정신에서 아직 비워 내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걸 배울 여력이 없습니다.

허나 정보의 과잉에 시달리고, 가짜인지 진짜인지도 분간 못 할 상품성 컨텐츠가 너무도 많이 생산되며, 치열하게 고민하기보다 진열장에 잔뜩 널린 아이템 중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자는 듯, 내키는 대로 감각에만 충실한 이들이 너무도 많이 눈에 띄는 게 사실입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런 생각 없는 삶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인 줄 착각하는데, 앞서 말한 대로 이를 둘러싼 논의 역시 서로가 상대를 놓고 "확증편향"이라 비난하는 무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방도가 없습니다.

예전(1979)에는 버글스란 밴드의 "비디오 킬 더 레디오 스타"라는 노래가, 오디오의 깊은 참맛을 모르고 무작정 시각적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쪽으로 단색화하는 대중문화의 변질을 개탄하기도 했으나, 이 책 5장은 신(新) 저널리즘을 다루며, 극좌 극우 구분않고 극단적인 의견으로 만사를 재단하는 사이비 방송이 판을 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이제(21세기의 두번째 십년기)는 거꾸로,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당장 얼굴 안 나온다고 무책임하게 막말을 일삼는) 일부 라디오가 비디오 스타를 죽이는 꼴"이라고도 (재치 있는) 풍자를 하는군요. 사실 이는 말초적 선정주의로 일찌감치 치달은 주류 미디어의 잘못도 큽니다. 책에서는 아니타 힐과 클레어런스 토머스 대법관 지명자 사이의 격한 분쟁을 그 예로 다룹니다. 책은 이어, "과연 언론인은 전문가가 맞는가?" 같은 의문도 제기합니다. 이 역시, 우리 나라에서도 일부 미디어 종사자가 "기레기" 같은 비판을 듣는 것과 맥락이 같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국내에서 예견한 경제학자가 아무도 없었듯, 전문가 신화를 무작정 맹신하는 건 오히려 파국을 초래할 뿐입니다. 1980년대 말 그처럼 급작스럽게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을 때도 이를 내다본 국제정세 전문가가 아무도 없었고(이 대목은 이 책 저자가 국제관계학 전공이므로 더 사무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1962년 핵실험에 참여한 그 똑똑한 과학자 누구도 그저 폭탄의 파괴력만 점쳤을 뿐 EMP 등의 교란 부작용의 정확한 규모를 정확히 못 내다보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의 공정한 시각은, 다음 주제를 "학자(전문가)들의 타락"으로 옮겨가며, 각종 연구 성과의 날조, 조작이 대학가에 만연하는데도 시스템적으로 이를 방지할 어떤 묘안도 없다면서 정직히 무기력을 고백하는 대목에서도 잘 드러나는군요. 비판도 이처럼, 자신을 향해 정직한 반성이 가능한 사람이라야 할 자격이 생기는 법입니다.

결론은, 그래도 "전문가 살리기"입니다. 모두가 제 기분대로 아무 이슈에나 코를 들이밀고 중구난방으로 떠들어서는, 결국 공동체 전체의 자멸로 귀결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전문가의 양성과정에 보다 공신력과 엄정한 평가를 거치고, 시민은 발언을 하기에 앞서 충분한 숙려를 거치며, 인터넷상의 무분별한 명예훼손이나 허위 사실 유포에 대해서는 강력한 법적 제제가 도입되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시민 각자의 자정의식입니다. 나의 방자한 행동이 돌이킬 수 없는 윤리와 질서의 타락을 가져올 수 있음을 항상 명심하고, 개인 차원에서도 깨끗하고 공정한 시야를 유지하게 애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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