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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센트 마화텅 - 앞서가는 사람의 한 걸음
렁후 지음, 송은진.유주안 옮김 / 큰나무 / 2016년 6월
평점 :
성공한 IT 기업의 수장들은 대개, 빼어난 엔지니어와 능숙한 사업가로서의 자질 둘 다를 겸비한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시절 중화학 공업이라든가 철도 산업,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타이쿤들의 경우 반드시 해당 분야에 대해 정통한 전문가(공학자, 과학자) 출신은 아니었으며, 그보다는 세상 물정에 밝고 저돌적 추진력을 지닌 전형적인 비즈니스맨 유형이 훨씬 많았죠. 2000년 인터넷 혁명이 본격 시작한 이후 이 분야 거물로 일어선 이들을 보면 물론 순수 사업가로서의 자질도 탁월한 이들이지만, 이 영역에 대해 남다른 세부 통찰과 각론적 파악을 갖추지 못한 문외한들이 큰 성공을 거두긴 힘들다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종래, 전자나 석유화학, 섬유 분야는 꼭 엔지니어 출신이라야 CEO로 올라설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개인 창업형 성공신화가 더 지배적인 양상인 이 분야에선 각론(기술적 디테일)과 총론(판 전체를 보는 안목)을 두루 갖춘 인재가 될 필요가 더 절실해집니다.
텐센트 마화텅 회장은 21세기 초 날고기는 인재들이 IT 창업에 나서며 향후 수십년을 먹고살게 해 줄 새로운 영토의 개척에 여념이 없던 시절, 선두 주자군에 속하는 위상은 아니었습니다. 이 책에도 상세히 나오지만 "텐센트는 다음에 또 뭘 따라할 것인가?" 같은 비아냥이나 받기 일쑤였고, 심지어 이 분야 굴지의 거인으로 자리매김한 지금도 이런 "남의 기술 베끼기, 복제"의 대가라는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또한 텐센트는 이 책 후반부에도 나오듯, 다른 기업의 특허와 지적 자산을 소홀히만 점검한 채 활동을 펴다 치명적인 소송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마냥 깨끗하다거나 존경만 받는 평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치열한 업계의 대전(大戰)에서 살아남은 건 마화텅의 텐센트입니다.
이 책은 텐센트의 한계와 단점, 자잘한 실패의 요소를 정직히 조명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의나 혁신 일변도가 아닌, 적의 장점을 영리하게 모방한다거나, 특정 장점만을 극단으로 추구하지 않고 두루두루 소비자에 어필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상품(과 서비스)을 언제나 지향해 온 그의 성공 비결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실 순수 자연과학이라든가 엔지니어로서의 역량을 선도적으로 과시, 경쟁하는 분야에선 자신만의 아이템을 못 내어 놓고 남의 생각이나 기법을 따라하는 행태가 경멸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IT 산업에서의 각축은, 학술 경진 대회가 아니라 소비자의 사랑을 놓고 겨루는, 여타의 자본주의적 시장 경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창의적 혁신을 세부 분야에서 이루지 못해도, 전체로서 소비자들에게 가장 선호되는 산물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면 그가 승자로서의 찬사를 받는 건 지극히 당연한 보상일 뿐입니다.
마화텅(馬化騰. 마화등)은 광둥 성 사람이며, 이 책에도 잠시 언급됩니다만 덩샤오핑의 소위 남순 강화 후 개발이 본격화한 선전(심천) 경제 특구의 번영상을 보고, 그 혜택을 입으며 자라난 중산층 집안 출신입니다. 부친은 당시 한창 발돋움 중이던 이 지역 관청에서 주로 회계 업무를 맡던 공무원이었으며, 마화텅 같은 현대 중국형 창업주의 전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로대로 이후 민간 기업 여럿에 몸담으며 커리어도 쌓고 안정적 부(富)도 모은 성실한 직업인이었습니다. 마화텅의 사진을 보면 (이 책에도 그 비슷한 평가가 나옵니다만) 무난한 환경에서 무난한 과정을 밟아 성공한, 이 시대 평균적인 중국 청장년층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그런 이미지를 두루 품고 있습니다.
마화텅은 일찌감치 전공을 컴퓨터공학으로 정하고, 학부 시절 성적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실제 상황(전산 장애 등)에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수 있었던 영리한 학생이었습니다. 이 책의 재미있는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실제로 여러 계기를 통해 두각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뛰어난 학생 그룹에는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러 증언을 통해 있는 그대로 소개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조용한 학생". 이런 평가는 마치 인생의 비교적 늦은 단계에 정계에 입문하여 지금은 일국의 대통령 물망에 오르기까지 하는 이재명 성남시장의 퍼스낼리티와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성품과 외모는 많이 다르지만).
이 책을 읽으며 분명히 인식되는 교훈 중 하나는, 마화텅은 인생의 어떤 단계에서도 금전이든 작은 명성이든 인맥이든 뼈저린 교훈이든 반드시 무엇 하나를 챙기고 마무리를 짓는 타입이었다는 겁니다. 대학 시절 가장 뛰어난 학생도 아니고 장래도 그리 밝지 않았으나, 주식 투자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좋은 평가도 받고 바로 실용화하려는 의도를 가진 회사에 판매하기까지 하여, 향후 자립할 수 있는 종잣돈을 젊은 나이에 이미 거머쥐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여러 젊은 공대생들이 고학년 시절부터 반은 학생, 반은 창업자 역할을 겸하며 기업과 실무에 깊숙한 발을 들여 놓고 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매우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를 건 형편에 지나지 않죠. 마화텅은 저런 컴페티션에서도 실속이랄까 뭔가 유형적인 과실을 거두고 한 코스를 마감하는 게 어떤 확실한 버릇이 든 것 같습니다. 이런 작은 습관이 모이고 모여 인생의 승자로 진입하는 길이 개척되는 거겠고 말입니다.
<삼국연의>의 유관장 세 의형제라든가 오호대장군 같은 영걸들, <수호전>의 백팔 호걸 같은 이가 거대한 사연을 만들고 역사를 바꿔 놓았듯, 세계 굴지의 기업 텐센트도 다섯 명의 선구자들이 의기투합하여 오늘의 거인을 우뚝 세워 놓았습니다. 주인공이자 오너인 마화텅, 장즈둥(장지동), 쩡리칭(증리청), 쉬천예(허진엽), 천이단(진일단) 등의 5인이 그들입니다. 연의류의 주인공들이 각각 대체할 수 없는 개성과 특장을 지녔듯 5인 역시 동시대인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재능을 보유했기에 이런 거대한 창업신화의 주역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장은 마 회장처럼 기술적 지식에 정통한 엘리트, 쩡은 (물론 그 역시 엔지니어지만) 과감한 추진력으로 애로를 개척하는 타입, 쉬는 전체의 의견을 조정하는 완충형 인격자, 천은 (특이하게도 화학 전공에 변호사 자격을 갖춘) 결정적 국면에서 의사 결정에 모멘텀을 제공하는 자문역, 뭐 이런 식입니다.
이 텐센트의 발전상을 보면 현재 우리나라 굴지의 IT 기업의 사연과 성취를 닮은 점이 많아 눈이 저절로 갑니다. 가령 텐센트의 통신앱 "위챗"이 중국 사용자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 때, 수익의 파이프라인만 제공하고 실속은 이 기민한 기업에 다 뺏길 판이라고 위기의식을 느낀 통신사들은, 텐센트로부터 "정당한 요금"을 책정해 물릴 것을 엄포 놓기도 했고, 중국 정부는 이를 지지할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중국 네티즌들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혀 결국 백지화했다는 건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닙니까? 우리도 이 사태가 터지기 대략 1년 전(후가 아니라 전이에요. 우리가 더 빨리 겪었습니다)쯤, (주)카카오와 3대 통신사가 큰 알력을 빚고 정부도 당시 통신사 편을 드는 듯한(중국과 달리 확정적인 제스처는 아니었고) 모습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당시 카카오 측이 내세운 가장 강력한 논리가, "망 중립성의 원칙"이었습니다. 사용자가 계약에 따라 통신사에 가입하고 망을 이용하면, 계약 조건에 따라 뭘 전송, 수신하든 새로운 제약이나 별개 요금이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역시 이 문제는 "통신망의 혁신(LTE 채택, 개발)"로 돌파구를 찾아, 통신사는 데이터 중심 요금제로 사용자들로부터 수익을 챙김으로써(따라서 다양한 컨텐츠의 개발로 소비 패킷량이 늘어날수록 자기들도 이익) 소위 무임승차의 문제는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LTE 같은 건 카카오 등을 좋은 일 시키려고 연구 개발하는 게 아니라 통신사의 진화, 자체 생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맞부딪혀야 하는 과제였으며, 남아돌아가는 여유 대역을 통해 돈까지 버니 서로 win-win하는 결과가 아닐 수 없죠. 아무튼 텐센트가 각종 난관을 헤치고 오늘날의 입지를 굳히기까지 밟아 온 경로가, 주인공 이름만 바뀌었을 뿐 한국에서 친숙히 접하는 "성공 드라마"의 사연과 너무도 닮아 흥미로울 뿐입니다.
텐센트는 다양한 플랫폼과 서비스를 개발해서 적어도 4억 정도의 중국 소비자들에게 어필하지만, 이 책에서 중점을 두고 소개하는 건 메신저(인스턴트 메신저. IM으로 약칭하는 것)인 QQ와 스마트 기기 통신 앱인 위챗입니다.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전개되는 건 AOL(2000년대 전반기)이나 MSN(후반기)와의 피터지는 경쟁, 그리고 2010년대 들어 위챗의 승승장구하는 사연들입니다. 저자는 왜 AOL이 중국 시장에서 패퇴했는지를 두고 몇 가지 이유를 분석하는데, 그 중 하나가 현지(중국) 언어 지원이 부족했다는 걸 듭니다. 사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외산 매신저가 2000년대 전체를 들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버디버디 등 몇 가지 브랜드가 국지적으로 충성스런 소비자를 장악한 게 고작이죠. MSN은 제 기억으로 2006~2009년 사이에 직장인, 학생 층을 가리지 않고 널리 쓰였는데 이 책에 나오는 MS의 중국 공략 시기와 비슷합니다. 공격적 마케팅을 편 데다 무엇보다 윈도에 끼워팔리는 강력한 이점을 지녔기에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널리 쓰였습니다.
어떻게 QQ는 MSN을 누를 수 있었는가? 첫째 어린 층을 사로잡기 위해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인터페이스를 삽입하여 "소통의 즐거움"을 추구한 전략입니다. 다음으로 QQ는 (제 생각에 이게 중요한데) 모르는 이들과의 관계 맺기에 보다 주력한 반면, MSN은 이메일 통합으로 계정을 관리하는 정책으로 "기존에 알던 이들 중심의 네트워크 강화"를 지향했습니다. 당시 중국 인터넷의 대세가 후자보다는 전자에 놓였던 만치 이 점이 필승 포인트였다는 건데, 사실 이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 심지어 미국도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큰 설득력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또 첫째 논점과 관련, 결국 어린 층이 대학생이 되고 그들이 사회로 진출하며 직장에서도 이 메신저를 쓰게 될 테니, 현재보다는 미래를 내다본 전략이 주효했다는 설명인데 그렇다면 한국의 버디버디는 왜 망했는지 시원한 설명이 또 안 되죠. 책에는 이 외에도, QQ가 초창기 잘 나갈 때의 한국 싸이월드에서 아바타 키우는 플러그인을 보고 이거다 싶어 따라했다는 말도 나옵니다. 한때 그토록 전 한국인을 사로잡으며 인터넷상의 거대한 관계 구축 거점이자 아이덴티티 단장의 아성 노릇을 했던 싸이가 왜 지금 이꼴이 되었는지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고, 어떤 특정 성과를 미래로까지 지속적으로 못 살려 내는 게 한국 산업계의 고질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QQ의 전략적 기로 중 또 하나 중요한 게, MSN이 야후와 손잡고 메신저 연동을 추구한 승부수에의 대응이었습니다. 이때 많은 이들, 심지어 텐센트 내부에서도 "개방이 아닌 폐쇄를 택한 우리들만의 고립"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마 회장은 과감히 "애써 파악한 우리 고객들의 특성, 취향을 타사의 자산으로 넘겨 줄 수 없다"며 기존의 태세를 고수했죠. 책에서는 "야후의 기존 점유율이 낮아 별 시너지 효과가 없었고, 얼마 후 웜 확산이라는 치명적 실수를 MSN이 저지른 후 QQ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고 정리합니다. 사실 호환성, 개방성 여부는 지금까지도 뭐가 낫다 못하다 결판이 난 문제가 아닙니다. QQ가 한창 성장하던 시절 애플은 그 폐쇄적인 맥 운영체제 때문에 유저들에게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저러니까 회사가 망해가는 거다." 혁신의 아이콘이자 컨슈머들에게 가장 확고한 로열의 대상이 되는 지금도, 애플의 OS(컴퓨터든 스마트 기기든)는 여전히 대외적으로 닫혀 있지만, 이를 비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지의 소치일 것입니다. 마 회장의 사업 태도에서 확실히 교훈으로 삼을 또 하나는, 상황에 따라 기존 정책을 고수하거나 표변하거나에 어떤 제한을 둬선 안 된다는 겁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동업자 관계였던 이병철 - 조홍제(효성 창업주) 두 분이 삼성 덩치가 커짐에 따라 끝내 결별하고 말았듯, 텐센트 창업의 다섯 기둥 중 세 사람은 대세를 따라 회사를 떠난 후 독자 행보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씁쓸하기도 하고, 주-종(최대 지분권자와 2인자들)의 초기 차이가 이처럼이나 극복 안 되는 근원적 팩터인지 깊이 곱씹게도 만듭니다. 뭐 거물은 남의 둥지에 언제까지나 머물 수 없으니, 능력껏 새 입지를 개척해서 자신만의 성을 세우는 것 역시 일류 사업가의 로망이겠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이처럼 뜻대로 한 번 휘젓고 이정표를 세우는 게 진짜 인생이지 싶더군요. 이 책은 IT 기업사의 한 단면을 참 상세히, 그리고 재미있게 조명하는데, 2006년 기업 순위를 인용할 때 "알렉사 닷컴(지금은 사람들이 이게 뭔지도 모를 겁니다)"의 자료를 근거로 삼는 등 지난 시절 그때 그런 게 있었지 하는 향수를 진하게 부르는 점도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