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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와 강적들 - 나도 너만큼 알아
톰 니콜스 지음, 정혜윤 옮김 / 오르마 / 2017년 9월
평점 :
품절
"지적 평등주의라는 착각"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저렇습니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평등하며, 혹 평등하지 않거나 못한 구조적 모순이
있다면 직접 피해자가 아니라 해도 모두가 나서서 개선해야 합니다. 그게 문명 사회의 마땅한 도리이자 의무지요. 그러나, 남들만큼
노력도 않고, 준비도 덜 된 이들이, 대접만큼은 남들과 똑같이 받고자 한다면 그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회가
당면한 이슈에 대해 발언권을 배분할 때에도, 시민, 국민인 이상은 누구나 한 마디씩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역시
모럴 해저드의 일종이겠지만), 해당 이슈에 대해 전혀 소양이 없는 사람이, 역시 존중이나 자기만족감은 남들만큼 채우고 싶기에,
책임감이나 진지한 고려도 없이 마구 목소리를 높여, 모두의 생존과 번영이 달린 중요한 정책 결정이 결국 잘못된 방향으로 흐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금언은 여기서도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훈련이
덜 된 이, 충분한 사려와 지혜를 갖추지 못한 이가 전문가처럼 행세한다면, 그 사람의 주관적 만족을 위해 많은 타인들의 권익이
희생되는 결과밖에 생기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런 오도되고 값싼 평등은 이미 평등이 아니며, 오히려, 반평등, 역평등이라고나 불러야
마땅합니다. 권위 있고 유익한 의견을 내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노력한 사람과, 아무 생각 없이 경솔하게 자기 말을 내뱉고만
싶은 사람이 같은 대접을 받는다면 어떻게 그게 정의에 부합하겠습니까?
저자는
물론 소위 전문가 집단에 대해서도 쓰디쓴 충고를 던집니다. 그들의 자질 부족, 낡은 지식에 대한 집착, 과도한 권위주의 등이
누적적으로 대중의 불신을 초래했고, 이것이 웹에 퍼진 일부 무책임한 선동 트렌드와 맞물려 현재의 혼란을 자초한 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1장에서 저자는 흥미롭게도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이 공동으로 각본을 쓴(주연은 맷 데이먼이죠) 영화 <굿 윌 헌팅>를 예로 들며, 대중 앞에서
콧대를 세우고 현학적인 언사로 위신을 가장하는 전문가, 엘리트들을 마구 비웃는 캐릭터 하나를 창조한 이 걸작이, 한편으로는 누구든
독학으로, 혹은 남다른 열정 하나만으로 사회의 정규 기관이 빚은 전문 특수 인력을 능가할 수 있다는 잘못된 환상을 심어 주었다는
지적을 합니다.
사실 이 예
말고도, 난치병에 걸린 아이를 낫게 하려는 부모의 간절한 바람이 결국 특효약을 찾고야 말았다는 사연을 담은 <로렌조
오일> 같은 것도 있죠(어느 정도 실화에 기반했습니다만). 이런 영화들은 모두 그 나름의 진실과 감동을 담았지만, 일반화할 수
없는 예를 놓고 마치 보편적 진리인 양 오도했다는 비난도 피해가기 힘듭니다. 이런 영화의 주인공들은 극히 예외적인 조건을 갖춘
이들일 뿐이며, 차라리 전문가 그룹보다도 더 희귀한 사례이기에 일반 대중, 문외한이 감정이입을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가상의, 혹은 과장된 캐릭터들을 보고 대리만족을 하며, 급기야는 현실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되죠.
"아무리
잘 못 고치는 동네 치과의사라고 해도 당신보다는 낫다." 혹은 "1년짜리 경험을 20회 해 봐야, 그것이 20년짜리 경험과
맞먹을 수는 없다." 같은 지적(일부는 동양의 격언을 저자가 재인용한 것입니다)에서 특히 저자의 답답해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는
듯합니다. 실제 이 책은 작금의 지적 타락, 중우정치 경향, 건설적이지 못한 말싸움에 대해 개탄을 참지 못한 저자의 격정이,
집필의 주된 동기이기도 합니다.
2장에서는
몇 년 전부터 대중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진 개념어 "확증편향" 같은 심리학 용어라든가, 음모론에 대한 비판이 이어집니다. 사실 이
확증편향도 그렇고, 인식상의 오류를 지적하는 대부분의 용어들 역시 현실에서 무력하게 쓰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주장과
논변은 확증편향이고, 내가 빠져 있는 편견과 선입견은 소신"이니, 내 가 지닌 확증편향에 대해선 전혀 인정 않으려는 꽉 막힌
위인에게 이런 논지를 펴 봐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확증편향을 입에 담는 사람이 알고보면 가장 악성의 확증편향 성향을 지녔으니
말입니다. 대개 이런 이들은 그게 자기 개인의 소신이 아니라, 어떤 절대 진리를 자신이 대변한다고만 여깁니다. 그러니 자기 딴에는
공공 봉사 같은 것을 엄숙히, 정의롭게 수행한다고 착각하는 거죠.
이런
사람들이 인지부조화를 그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기댄 장치 중 하나가 음모론입니다. 물론 모든 음모론이 음모론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어떤 날카로운 직감과 의심이 결국 사실로 판명나기도 합니다(드물긴 해도). 또, 힘없는 소시민들이 뚜렷한 근거를 찾아내진
못해도, 뭔가 의심스럽고 부조리한 움직임이 저 상층부에서 포착된다 싶을 때, 이를 한목소리로 항의할 권리는 당연히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당한 발언권을 행사하려면, 그에는 합당한 근거와 정의감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측정이 주관적이라고 해서 아무나 근거 없는 비방을 일삼으면, 사회의 질서는 물론 그 당사자의 안위마저도 결국엔 위협받기 마련이죠.
3장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고등교육기관(즉 대학)의 문제들은, 이제는 다소 놀라울 정도로 한국과 미국 두 국가가 닮아가는 양상이라 과연 이
책이 미국 저자에 의해 쓰여진 게 맞는지 다시 표지를 들춰보게도 되었습니다. "... 문제는 대학생들이 너무 많고, 그들 중
상당수가 대학에 갈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 며칠 전 읽고 리뷰를 올린 책 <대량살상 수학무기>에도
그런 지적이 나옵니다만, 미국 역시 순전히 학생들로부터 수익을 올리기 위해 날림, 속성으로 모집단위를 채우고, 교육은 부실하게
행한 후, 준비도 채 안 된 졸업생만 사회에 무책임하게 배출하는 행태가 큰 사회문제로 대두된 바 있습니다.
이런
학교를 졸업한 이들도 여튼 인가받은 정식 학사학위가 있으니 대우는 평등하게 받고자 합니다. 기업이나 기타 사회의 수요는, 일단
이들을 써 보면 그 수행하는 업무의 완성도가 불만족스러우니 평판을 형성하고 기피하게 됩니다. 버니 샌더스의 말도 인용되네요.
"오늘날의 대학 졸업장은 50년 전의 고등학교 졸업장이나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이런 개탄스러운 풍토를 두고 "학문을 이용한 비리
행위나 마찬가지이다."라고도 합니다. 이 3장의 내용은 특히, 주어와 배경과 발언자의 이름만 한국식으로 바꾸어 놓는다면 아마 큰
논쟁, 소동이 벌어질 만큼 인화성이 가득합니다.
"모든
글의 90%는 쓰레기이다." 이 말은 인터넷이란 게 채 세상에 나오기도 전, 작가 시어도어 스터전이 남긴 명언이며 그의
법칙이라고도 불립니다. 저는 예전에 PC 잡지를 구독할 때, 어느 잡지에서건 자주 기고문을 볼 수 있었던 곽동수 교수님(목소리도 참
차분하시고 마치 직업 성우처럼 격조가 느껴졌던)의 어느 "예언"이 생각납니다. "정보가 넘쳐 흘러서 너무도 행복하겠지만, 대신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걸러내야 하는 다른 고초가 뒤따를 것이다." 그때만 해도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불순한 세력이 정치에까지 끼어들어 대중을 호도하는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지금에서야 그 혜안에 감탄하게 됩니다.
책에서도
지적하는 바처럼, 한 사람의 지혜보다는 열 사람의 숙고의 결과가 나을 수도 있고, 사람들의 마음가짐만 바르다면 오히려 당연한
진리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는 부시의 군복무 허위 경력을 "증명"하는 서류가 오히려 가짜임을 지적한, 많은 선량한 시민들의
노력을 그 사례로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온라인 상에서, 조지 W 부시(이 사람이 아무리 한심하고, 지성이 떨어지고,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해도)는 "비판해야 제맛"이라며 무작정 매도하는 경향이 얼마나 큰 인기를 누리기도 합니까. 한번 잘못 형성된
"여론"은, 심각한 날조와 중상모략까지도 모두 합리화시키는 어리석음, 범죄에까지 이르기도 하죠.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심각한 사회, 국가적 위기입니다. 근거도 없는 편협한 당파성도 눈살 찌푸려지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이 그 기본 의무까지 모조리 방기한다면 체제의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고, 정의로운 선구자들이 피땀 흘려
쟁취한 숭고한 과실을 모두 "무(無)"로 화하게 하는 역사의 퇴보입니다. 1990년대 이뤄졌다는 PEW 리서치의 한
조사(p247)은 이렇게 의견을 정리합니다. "... 한때는 젊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현명함과 비판 정신이 절로 담보되던 때도
있었으나,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그들의 선배들보다 똑똑하질 못하다..." 물론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나이 든 세대는
지금의 현실이 요구하는 많은 생존 능력, 업무 자질, 센스를 못 갖추고 있습니다. 지나간 시대의 덕목, 가치를 그 정신에서 아직
비워 내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걸 배울 여력이 없습니다.
허나
정보의 과잉에 시달리고, 가짜인지 진짜인지도 분간 못 할 상품성 컨텐츠가 너무도 많이 생산되며, 치열하게 고민하기보다 진열장에
잔뜩 널린 아이템 중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자는 듯, 내키는 대로 감각에만 충실한 이들이 너무도 많이 눈에 띄는 게
사실입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런 생각 없는 삶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인 줄 착각하는데, 앞서 말한 대로 이를 둘러싼 논의 역시
서로가 상대를 놓고 "확증편향"이라 비난하는 무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방도가 없습니다.
예전(1979)에는
버글스란 밴드의 "비디오 킬 더 레디오 스타"라는 노래가, 오디오의 깊은 참맛을 모르고 무작정 시각적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쪽으로
단색화하는 대중문화의 변질을 개탄하기도 했으나, 이 책 5장은 신(新) 저널리즘을 다루며, 극좌 극우 구분않고 극단적인 의견으로
만사를 재단하는 사이비 방송이 판을 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이제(21세기의 두번째 십년기)는 거꾸로,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당장 얼굴 안 나온다고 무책임하게 막말을 일삼는) 일부 라디오가 비디오 스타를 죽이는 꼴"이라고도 (재치 있는)
풍자를 하는군요. 사실 이는 말초적 선정주의로 일찌감치 치달은 주류 미디어의 잘못도 큽니다. 책에서는 아니타 힐과 클레어런스
토머스 대법관 지명자 사이의 격한 분쟁을 그 예로 다룹니다. 책은 이어, "과연 언론인은 전문가가 맞는가?" 같은 의문도
제기합니다. 이 역시, 우리 나라에서도 일부 미디어 종사자가 "기레기" 같은 비판을 듣는 것과 맥락이 같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국내에서 예견한 경제학자가 아무도 없었듯, 전문가 신화를 무작정 맹신하는 건 오히려 파국을 초래할 뿐입니다.
1980년대 말 그처럼 급작스럽게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을 때도 이를 내다본 국제정세 전문가가 아무도 없었고(이 대목은 이 책
저자가 국제관계학 전공이므로 더 사무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1962년 핵실험에 참여한 그 똑똑한 과학자 누구도 그저 폭탄의
파괴력만 점쳤을 뿐 EMP 등의 교란 부작용의 정확한 규모를 정확히 못 내다보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의 공정한 시각은, 다음
주제를 "학자(전문가)들의 타락"으로 옮겨가며, 각종 연구 성과의 날조, 조작이 대학가에 만연하는데도 시스템적으로 이를 방지할
어떤 묘안도 없다면서 정직히 무기력을 고백하는 대목에서도 잘 드러나는군요. 비판도 이처럼, 자신을 향해 정직한 반성이 가능한
사람이라야 할 자격이 생기는 법입니다.
결론은,
그래도 "전문가 살리기"입니다. 모두가 제 기분대로 아무 이슈에나 코를 들이밀고 중구난방으로 떠들어서는, 결국 공동체 전체의
자멸로 귀결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전문가의 양성과정에 보다 공신력과 엄정한 평가를 거치고, 시민은 발언을 하기에 앞서 충분한
숙려를 거치며, 인터넷상의 무분별한 명예훼손이나 허위 사실 유포에 대해서는 강력한 법적 제제가 도입되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시민 각자의 자정의식입니다. 나의 방자한 행동이 돌이킬 수 없는 윤리와 질서의 타락을 가져올 수 있음을 항상 명심하고, 개인
차원에서도 깨끗하고 공정한 시야를 유지하게 애써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