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형, 체 게바라
후안 마르틴 게바라 & 아르멜 뱅상 지음, 민혜련 옮김 / 홍익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한국에서는 80년대 학번 세대 어르신들 중심으로 이른바 "(좁은 의미의)사회과학 서적"에서 자주 등장하던 걸로 이 위인이 처음 유명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그 앞세대는 잘 모른다는 뜻). 저는 고 정운영 교수님의 여러 수상록을 읽고 이런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혁명가에 대해 처음 알았고(그 짧은 글이 워낙 잘 쓰여진 명문이라 책 몇 권 분량보다도 머리에 남는 게 더 많았네요), 이보다 뒤엔 모 출판사에서 나온 <체 게바라 평전>이 몇 달 몇 년에 걸쳐 애독되는 통에 이제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겠죠.

이 책은 (페이퍼백이지만) 양장본인 그 책과 사이즈가 비슷해서, 서가에 나란히 꽂아 놓으면 좋은 자매편(형제편? 그런 말은 없지만)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동생이자 체 게바라를 가장 외모상으로, 성격 면에서 빼닮았다고 평가 받는, 아직도 생존해 있는 막내 남동생 후안 마르틴 게바라 씨에 의해 구술되고, 저널리스트 아르멜 뱅상에 의해 기록된, 동생의 눈으로 본 "형 체 게바라"에 대한 회고담입니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생에 대해 혈육으로서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지만, 그의 일생을 연대기처럼 추적한 내용은 아니고, 동생으로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맏형에 대한 여러 기억들을 술회한 형식이더군요. 아무래도 가족 입장에서 바라본 혁명가의 초상이니만치, 그 부모(당연히 저자의 부모이기도 한 분들)나 친척들, 다른 동기(형과 누나 등)에 대한 추억과 행적, 그리고 형처럼 혁명가까지는 아니라도 치열한 민주화운동가로서 (대체로) 살아 온 자신(즉 저자 후안 마르틴 게바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위대한 혁명가는 심지어 지지자 뿐 아니라 만인의 존경을 받는 단계에서도, 인간로서의 가감 없는 본 모습이 아닌 "박제화, 우상화한 왜곡된 표상"으로 오해받곤 하는데 어쩌면 이건 어느 정도 그들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지자들의 열광과 연호 속에서도 이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현상이겠는데요. 제가 읽어 보니 저자 후안 마르틴 게바라 씨는 특히 이 점을 매우 거북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떠올리는 체 게바라는 다정하고, 착하고, 정직하고, 열정에 넘치면서도, 사람을 그저 연대와 우정과 공감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 어떤 경우에도 수단으로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정통 스탠스의 맑시스트나 공산주의자와도 거리가 멀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공산주의자"로 비난할 때면 특히 그의 고모가 마음아파했다고 합니다. (서구어에서 공산주의자나 무신론자 등의 어휘에는, 특정 정치적 입장을 기계적으로 지시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감정적, 윤리적 비난의 뉘앙스가 때로 개입합니다. 따라서 상당 경우 그 자체로 욕이 될 수 있는데, 후자의 경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죠) 이런 멋진 남자들이 종종 보이는 장난스러운 태도지만, 그는 그의 고모에게 편지를 쓸 때 일부러 맺음말에 "공산주의자" 등을 자칭하는 유머로 상황에 초탈한 모습도 보였다고 하는군요.

이 책에는 장폴 사르트르가 쿠바에서 체 등의 혁명가 무리와 직접 만난 사건에 대해 저자(동생 후안 마르틴 게바라)의 육성으로 회고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이후 사르트르는 어느 글에서 "내가 만난 가장 완벽한 사람"으로 체에 대해 평가하곤 하는데, 저는 이 표현을 처음 접한 게 (위에 언급한) 정운영 교수의 에세이에서였습니다. 당시에는 좀 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혁명가로서의 불 같은 열정이나 민중과 세계에 대한 한없는 신뢰, 사랑 외에도, (이 책에서 지적하는 바대로) 엄청난 학식과 지성, 그리고 잘생긴 외모 등의 매력에 함께 압도된 느낌을 그렇게 드러낸 것 아닐까 짐작합니다(사실 사르트르는 추남이었죠). 이건 마치 소설가 공지영이 조국 교수를 두고 "가장 완벽한 남자"라고 표현한 맥락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취소하겠습니다)

몽상가, 방랑자 기질이 강하고 남자로서 매력이 철철 넘치는 그의 개성은 아마 그의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형질 같습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의 모친은 아르헨티나에서 손 꼽는 명문가였는데, 비천한 출신의 청년과 결혼한다는 게 어르신들의 승인을 얻을 리가 없었지만 열정에 따른 확신으로 조신한 숙녀 셀리아는 이 청년을 배필로 맞아들입니다. 여튼 장남인 에르네스토는 의사로, 차남인 로베르토는 변호사라는 번듯한 직업을 갖게 했으니 자식 농사는 성공적으로 지은 셈인데요. 문제는 그 장남, 가장 잘나고 똑똑하고 (이 점이 중요합니다) 어느 무리 속에 세워 놓아도 자연스럽게 리더로 부각되는 타고난 인물이었던 에르네스토는, 의사로서 안정된 직업을 갖고 부모가 기대하는 중상류층의 유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 험난한 가시밭길을 자청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차남 로베르토는 그의 형과 달리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성향이었지만 주위에서 하도 "체"의 동생이라며 핍박하는 통에 자연스럽게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답니다. 책에는 언제나 "최고로 잘난" 형의 그늘에 가려 열등의식과 질투를 품을 수밖에 없었던 로베르토의 고뇌에 대해서도 언급이 나옵니다.

앞에서 체 게바라가 정통파 맑시스트나 공산주의자와도 거리가 멀다고 했지만, 특히 주목할 건 1917년 10월 혁명 즈음에 그가 레닌 일파를 향해서도 호된 비판을 내뱉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들은 양키 제국주의와 정확히 대칭을 이루는, 인민을 착취 대상으로 보는 괴물들이다." 물론 이런 태도가 몽상가, 방랑자, 대책없는 이상주의자로서 오히려 그의 한계를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볼셰비키가 혁명의 기술적 달성에 집착한 나머지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을 동일시했다거나, 기계적 유물론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 이념 속에서 인간성을 고사시켰다거나 하는 점은 마땅히 비판 받아야 하겠고, 게바라의 저런 태도는 "대체 무엇이 본질인지" 혁명가로서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면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 피델 카스트로 역시 그저 정의감 넘치는 대학생, 청년이었을 뿐 공산주의자와는 처음에 무관했다는 유력한 시각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겠네요.

체 게바라는 이상에만 사로잡혀 현실을 도외시하는 몽상가이기만 했는가? 저는 이 점을 평가할 때 그가 실무적 측면, 즉 능수능란한 정치적 처세술이라든가, 전시라면 야전에서 그가 얼마나 유효하고 영리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책에는 저자가 투옥되었을 때 갈티에리 장군 체제의 어느 대령이 다가와서 "네가 체의 동생이냐?"를 물은 후, (분명히 철천지 원수 진영인데도) 그가 전략적 천재였음을 입에 침에 마르게 감탄한 후, 볼리비아에서 그가 맞이한 최후에 앞서 벌어진 전투에서 "실수로 진지를 잘못 택한 점"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겼어야 할 전투를 지고 말았다는 데 대해, "같은 야전사령관"으로서 애통해했다는 건데, 이처럼 적으로부터도 존경의 대상이 되는 그의 자질이야말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유시민씨의 책이라든가 여러 다른 자료에는 쿠바 혁명 완수 직후 피델 측과 사이가 벌어져, 위대한 혁명을 아름다운 종적으로 길이 간직하기 위해 체 게바라가 알아서 험지로 떠났다는 말이 종종 나옵니다. 그래서 진짜 혁명가는 체 게바라요, 피델은 결국 탐욕스러운 현실 정치인이자 독재자에 불과했다는 시선도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런 관점에 대해 정면 반박하며, 피델과 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는 동지이자 친구였다고 강조하는군요. 물론 동생(더군다나 형을 그토록이나 닮고 또 존경했던 동생)이었다고 해도 모든 문제에 대해 "유권해석"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니며, 이는 체 게바라 사망 당시 카스트로가 보였던 반응 등을 객관적으로 분석해셔 따져야 하겠습니다. "카스트로"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드물지 않은 이름인데, 체 게바라의 증조할머니 가문 성씨가 "카스트로"이기도 합니다. 체 게바라가 어렸을 때 폐렴에 걸려 이후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힌 천식 발작이 비롯했다는 말도 동생 입으로 들으니 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더군요.

체 게바라의 최후가 안드레아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와 닮았다는 증언은, 특히 그 화가의 해당 작품이나 십자가 처형을 담은 다른 작품을 보면 많이 공감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나 체 게바라나 대의와 박애와 평화를 위해 한 몸 돌보지 않고 사심 없이 투쟁한 이들이며, 본성이 참으로 선한 이들이었다는 점은 매우 비슷합니다. 이념과 사상은 다를 수 있어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터전에서 남에게 착취당하지 않고 자신만의 행복을 가꿀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대의에는 누구나 찬성할 것이며, 체 게바라는 이런 이유에서 모든 명분과 이상의 최소공배수 혹은 최대공약수가 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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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저널 - 제38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수상작
혼조 마사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극사실주의"라고 작품 성격이 규정되긴 했지만 섬뜩한 묘사가 난무한다거나 해당 직업군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든가 하는 식의 소설은 아닙니다. 소설은 크게 두 가지 포인트에 주목하여 재미있게 읽어갈 수 있는데요. 1) 신문사(간혹 끼어드는 잡지사까지) 기자들과 경찰관들 일부의 고달프면서도 보람 가득한 직업 실정이 어떤지 제대로 엿볼 수 있는 스토리, 2) 7년 전에 벌어져 전 일본을 들썩이게 했던(물론 픽션상으로)아동 납치, 성폭행 사건의 진범과 진상을 추적하는 미스테리물로서의 재미, 어떤 독자라도 이 두 가지 매력 포인트를 치밀하게 부각시킨 작가의 솜씨에 끌려 두터운 볼륨을 끝까지, 단시간에 읽어 내려갈 수 있겠습니다. 특히 나중에 기자가 되고 싶어하는 청소년(별 잔인하거나 말초적인 부분 없습니다)이나 대학생 들이 읽으면 직업관 설정에 많은 도움이 될 만큼 해당 직역에 대한 실감나는 구현이 이뤄지며, 어느 정도는 다분히 이상화, 모델화한 설정이니만치 현직 언론인들이 읽어도 많은 공감을 부를 것 같습니다(아니면 초심의 각성이라든가).

일본 장편 소설들이 흔히 그렇지만 긴 성명을 어떤 때는 성씨, 어떤 때는 이름, 어떤 때는 별명으로 부르기 때문에 독자들은 한참 읽어가다 누가 누군지 헷갈려할 때가 많습니다. 이 책은 그래서 책의 맨앞에 인물 관계도를 정리해 두었는데, 특히 비중이 높은 다섯 명 이름 앞에다 별표를 쳐 둔 센스도 돋보였습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과연 소설(국적이 무엇이든)에 몰입을 했다면 기억력이 좋든 나쁘든 사람 이름을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의문이었는데, 책을 한달음에 마치지 못할 사정이 있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특히 이 소설은 몇 사람(기자나 형사)들의 이름이 작품 분위기의 이해나 향후 전개에 주요 단서 구실을 할 때가 종종 있기에, 성명을 정확히 기억해 가며 읽을 필요가 더 대두되는 성격입니다.

제목이 잘 말해주듯 이 책은 특히 신문기자, 그 중에서도 지방에 주재하며 수시로 중앙총국과 소통하여 특종을 뽑아내야만 하는 본분을 지닌 기자들의 온갖 애환을 극적으로 잘 버무려낸 수작입니다. 기자라는 직종이 그저 낭만이나 명예만 있는 게 아니라, 진실을 밝히길 꺼리는 각종 인간 군상을 일일이 상대하고 사귀어 두고 비위를 맞춰 가며 말문을 틔워야 하는 온갖 수고를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이 소설에도 나오듯 멋모르고 달려들었다가 몇 개월만에 그만두며 좌절하는 젊은 인력들이 많은 형편이죠. 뿐만아니라 하급직은 많이 뽑는 반면 (어느 조직이나 그렇듯) 간부나 관리직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실적이 좋고 과오가 적은 소수 능력자만이 해당 신문사에 계속 봉직할 수 있기에 사내에서도 협력 못지 않게 경쟁이 치열합니다(경쟁이 타사 기자들과만 이뤄지는 게 아니죠). 또한, 본인이 능력이 있어도 사내 정치에 능하지 못하거나 가망 없는 라인에 몸담았다가는 억울하게 좌천, 퇴사하는 경우도 흔합니다(이 작품에도 그런 대표적인 캐릭터가 하나 나오고, 다만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별 쓰임새 없이 퇴장해서 조금 의아하긴 했습니다). 하긴 이 세 가지 사항은 비단 신문기자뿐 아니라, 어느 회사나 조직, 직장에서건 공통된 사정이요 애환이기도 하죠.

한국 사회는 특히 일본과 여러 정서라든가 사회적 위계 구조, 작동 원리를 공유하기 때문에, 잘 쓰여진 기업 소설은 한국의 사정에 그대로 대입하고 읽어도 큰 공감과 시사점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비록 신문사를 소재로 삼았지만 직장 내 경쟁과 암투, 그리고 동료애, 직업 윤리와 명예욕, 출세와 도덕률 사이에서 고뇌하는 여러 캐릭터들의 분투와 갈등상을 이 작품 속에서 따라가다 보면 어느 직장인이라도 피부에 와 닿는 깨우침이 있을 겁니다. 현 국회의원이자 전 대통령후보였던 정동영 MBC 앵커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부에 갓 배치되어 온갖 험한 숙식 환경을 거치며 일을 처음 배워나가던 고생담을 전에 털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이걸 은어로 사츠마와리라고 하는데(정 앵커 본인이 직접 이 말을 썼습니다), 이 소설은 신참 사츠마와리들과 그들을 이끌고 보살피며 때로는 호된 훈육도 가하는 고참 기자들 사이의 미도 높은 소통이 또한 볼거리입니다. 소설에 저 말이 한 번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원문을 매우 정성들여 꼼꼼히 옮긴 역자분의 스타일로 보아 아마 원작에도 등장 안 하지 싶습니다.

제 생각에 이 소설의 중심 축을 잡는 인물은 세기구치 고타로라고 봅니다. 이 사람은 진실 보도 하나만을 직업관 겸 인생의 모토로 삼고, 남들보다 앞선 특종을 낚기 위해 상관들에 대한 거침없는 반항, 후배들에 대한 냉혹한 다그침과 질책 등으로 유명하며, 이 때문에 (배울 건 많아도) 주변에 인맥이 안 쌓이는 이단아, 아웃사이더로 아예 직장에서 찍힌 인물입니다. 게다가 치명적인 건, 의욕이 앞서 사실 확인을 제대로 않고 기사를 냈다가 오보를 내어, 신문사의 명예(가뜩이나 경쟁사에 비해 사세가 위축된 판에)를 실추시키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안긴 "전과"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일단 능력 하나는 인정하기에 아주 짜르지는 않고 지방을 전전시키며 붙여는 주는 편이지만, 먹은 나이와 경력, 능력에 걸맞은 승진은 꿈도 못 꿀 판이며, 심지어 그와 가깝다고 판단되는 다른 기자들도 왕따나 멸시를 당할 지경입니다. 하지만 그의 집요한 근성과 확고한 소명의식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는 후배들, 특히 마쓰모토 히로후미("마쓰히로"로 약칭, 별칭되며 사내에 마쓰모토라는 다른 성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 이름은 특히 잘 알아두어야 하는 게, 중간 쯤에 히로후미라는 이름을 가진 경찰 한 사람이 비중 있게 또 등장하기 때문이죠)와 후지세 유리(여성입니다)는 남들 눈을 피해가며 선배이자 상관인 그와 밀접한 교유를 이루고, (소설 결말에 가서)드디어 주목받을 만한 성과를 거둡니다.

집요한 근성과 굵직한 관록으로 세기구치와 반대편에서 대칭을 이룰 만한 또 한 명의 기자가 니카이도 미노루입니다(이 사람은 성씨만 기억하면 될 것 같습니다. "미노루"라는 이름은 작중 기능도 별로 없고 표기도 거의 안 됩니다). 소설 중간쯤에, 이 사람과, 기자들을 매우 싫어하는 과묵한 관리관(한국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일본 특유의 경찰 계급이죠) 야마가미 미쓰야키(이 사람도 성씨만 기억하면 됩니다)와의 대작(對酌) 장면이 특히 볼만합니다. 저는 이분 집에, 그 아들이 쓴다는 글러브가 혹시 사건 해결의 단초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렇게 풀리지는 않더군요. 그럼 괜히 낭비된 설정 아닌가, 그보다는 세부적인 장면 묘사에도 이처럼 공을 들여 실감을 높인 작가 혼조 마사토의 정성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더 규모와 영향력이 큰 경쟁지에서 근무하다 승진 가망이 낮아지자 차라리 현장에서 더 뛸 여지나 생길 현재의 <주오신문>으로 전직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 전 직장의 후배(자기가 키워 줬던)와 분위기 더럽게 충돌을 빚는 장면이 후반에 나오므로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도 사정이 비슷합니다만 기자들은 사소한 범법(어폐가 있긴 합니다만)이나 과오를 놓고 경찰들로부터 적잖은 배려를 받는 편입니다. 한 30년 전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신입기자로 채용 절차가 완료되자마자 경찰서에서 자동으로 운전면허가 발급되어 주어지기도 했는데 뭐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일본이나 한국이나 기자-경찰은 긴장 관계에 놓이면서도 또 묘한 공생의 처지를 이어가는 게 사실이죠. 이 책에서도 니카이도가 주자 위반 딱지를 떼인 후 윗선을 만나 잘 해결(?)한다거나 하는 장면이 나오고, 다만 두번째로 딱지를 떼인 후에는 "더 이상 경찰측에 빚을 지지 않기 위해(오프 더 레코드 조건으로 들은 정보를 바로 기사화할 작정)" 말없이 한국 돈으로 십만 원이 넘는 범칙극을 무는 장면이 흥미롭습니다.

기자들이 취재원으로부터 얻은 소중한 정보라고 해도, 그걸 그자리에서 수첩에 받아적는다든가 하지 못할 사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세기구치는 간신히 손바닥에 적은 후 행여 지워질까 염려하여 후배에게 운전을 대신 맡기는 장면도 나오고, 니카이도 같은 이는 가뜩이나 술이 약한 판에 몇 잔 들어간 상태에서 결정적인 정보를 듣고 이를 필사적으로 외우려고 발버둥치는 장면 같은 게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관리관의 전번을 외워야 하는데 6453이 잘 안 외워져 "양끝의 두 숫자와 가운데 두 숫자의 합이 각각 9"라는 힌트로 기어이 기억을 살리고 마는 대목이 웃겼는데요. 만약 저같으면 앞의 64만 외우고, 뒤의 숫자는 11을 뺀다(1씩이 부족하다)처럼 해서 더 쉽게 떠올렸을 것 같았습니다.

독자들의 눈길을 끄는 또 한명의 중요 인물이 후지세 유리입니다. 마지막에 "전 그저 신문기자라는 직업과 결혼한 셈치겠어요."라는 다소 느끼한 대사를 치기도 하지만, 그녀야말로 의리 있고 직업 윤리관도 강하며 대인관계도 원만하면서 근성도 가득한, 모범적인 직장 여성의 대표처럼 묘사됩니다. 조금 이상한 게 마마보이 같은 광고맨(고소득자에 직장 내 전망도 좋은 고스펙 신랑감으로 세팅)의 애프터를 거절하면서, 이 거절이 자기 인생에 있어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아닐지 고민하는 대목이 처음에 나오는데, 이후에 이 부분 관련 사연이 전혀 안 나와서입니다(결국 신문기자로 한 껀 올리고 승진도 해서 잘풀린다는 결말인데). 키도 보통이고 피부 상태도 좋지 않은 걸로 나오지만 스타일이 좋아서 화려한 도심에 거주할 만한 자격이 있는(!) 외모인 듯합니다. 경비 절감 때문에 전철 등을 타고다니는 모습이, 예전에 제가 알던 머니투데이 어느 여기자와도 닮아서 특히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네요.

일본문학 번역의 달인의 솜씨라 술술 잘 읽히지만, 예를 들어 "속보" 같은 말은 이 소설 전체에 두어 번 등장하는데, 우리가 아는 速報가 아니라 "후속 보도"라는 뜻의 續報입니다. 이 말도 국어사전에 있긴 한데 이건 한자로 따로 써 주지 않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겠습니다. "타지"라는 말도 여러 번 나오는데 익숙한 "他地"가 아니라 경쟁지라는 뜻의 "他紙"입니다. 他誌라고 쓰면 또 경쟁 잡지라는 뜻이 되는데, 이런 게 한국어로만 쓰면 뜻이 분간이 잘 안 됩니다. 서평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물 관계도를 예쁘게 정리해 준 것도 이 책 편집의 큰 매력이며, 그 앞 페이지에는 일본 전도(개략)와 도쿄 도 인근의 약도가 나와 있어서 지명 파악에도 도움이 되었고, 소설 읽으면서 새삼 일본 지리 공부하는 셈 치고 열심히 앞뒤를 번갈아 펼친 것도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본문 중 일본 문화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한 어휘에 일일이 역주를 달아 준 것도 독자를 위한 배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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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센트 마화텅 - 앞서가는 사람의 한 걸음
렁후 지음, 송은진.유주안 옮김 / 큰나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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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IT 기업의 수장들은 대개, 빼어난 엔지니어와 능숙한 사업가로서의 자질 둘 다를 겸비한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시절 중화학 공업이라든가 철도 산업,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타이쿤들의 경우 반드시 해당 분야에 대해 정통한 전문가(공학자, 과학자) 출신은 아니었으며, 그보다는 세상 물정에 밝고 저돌적 추진력을 지닌 전형적인 비즈니스맨 유형이 훨씬 많았죠. 2000년 인터넷 혁명이 본격 시작한 이후 이 분야 거물로 일어선 이들을 보면 물론 순수 사업가로서의 자질도 탁월한 이들이지만, 이 영역에 대해 남다른 세부 통찰과 각론적 파악을 갖추지 못한 문외한들이 큰 성공을 거두긴 힘들다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종래, 전자나 석유화학, 섬유 분야는 꼭 엔지니어 출신이라야 CEO로 올라설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개인 창업형 성공신화가 더 지배적인 양상인 이 분야에선 각론(기술적 디테일)과 총론(판 전체를 보는 안목)을 두루 갖춘 인재가 될 필요가 더 절실해집니다.

텐센트 마화텅 회장은 21세기 초 날고기는 인재들이 IT 창업에 나서며 향후 수십년을 먹고살게 해 줄 새로운 영토의 개척에 여념이 없던 시절, 선두 주자군에 속하는 위상은 아니었습니다. 이 책에도 상세히 나오지만 "텐센트는 다음에 또 뭘 따라할 것인가?" 같은 비아냥이나 받기 일쑤였고, 심지어 이 분야 굴지의 거인으로 자리매김한 지금도 이런 "남의 기술 베끼기, 복제"의 대가라는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또한 텐센트는 이 책 후반부에도 나오듯, 다른 기업의 특허와 지적 자산을 소홀히만 점검한 채 활동을 펴다 치명적인 소송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마냥 깨끗하다거나 존경만 받는 평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치열한 업계의 대전(大戰)에서 살아남은 건 마화텅의 텐센트입니다.

이 책은 텐센트의 한계와 단점, 자잘한 실패의 요소를 정직히 조명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의나 혁신 일변도가 아닌, 적의 장점을 영리하게 모방한다거나, 특정 장점만을 극단으로 추구하지 않고 두루두루 소비자에 어필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상품(과 서비스)을 언제나 지향해 온 그의 성공 비결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실 순수 자연과학이라든가 엔지니어로서의 역량을 선도적으로 과시, 경쟁하는 분야에선 자신만의 아이템을 못 내어 놓고 남의 생각이나 기법을 따라하는 행태가 경멸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IT 산업에서의 각축은, 학술 경진 대회가 아니라 소비자의 사랑을 놓고 겨루는, 여타의 자본주의적 시장 경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창의적 혁신을 세부 분야에서 이루지 못해도, 전체로서 소비자들에게 가장 선호되는 산물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면 그가 승자로서의 찬사를 받는 건 지극히 당연한 보상일 뿐입니다.

마화텅(馬化騰. 마화등)은 광둥 성 사람이며, 이 책에도 잠시 언급됩니다만 덩샤오핑의 소위 남순 강화 후 개발이 본격화한 선전(심천) 경제 특구의 번영상을 보고, 그 혜택을 입으며 자라난 중산층 집안 출신입니다. 부친은 당시 한창 발돋움 중이던 이 지역 관청에서 주로 회계 업무를 맡던 공무원이었으며, 마화텅 같은 현대 중국형 창업주의 전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로대로 이후 민간 기업 여럿에 몸담으며 커리어도 쌓고 안정적 부(富)도 모은 성실한 직업인이었습니다. 마화텅의 사진을 보면 (이 책에도 그 비슷한 평가가 나옵니다만) 무난한 환경에서 무난한 과정을 밟아 성공한, 이 시대 평균적인 중국 청장년층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그런 이미지를 두루 품고 있습니다.

마화텅은 일찌감치 전공을 컴퓨터공학으로 정하고, 학부 시절 성적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실제 상황(전산 장애 등)에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수 있었던 영리한 학생이었습니다. 이 책의 재미있는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실제로 여러 계기를 통해 두각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뛰어난 학생 그룹에는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러 증언을 통해 있는 그대로 소개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조용한 학생". 이런 평가는 마치 인생의 비교적 늦은 단계에 정계에 입문하여 지금은 일국의 대통령 물망에 오르기까지 하는 이재명 성남시장의 퍼스낼리티와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성품과 외모는 많이 다르지만).

이 책을 읽으며 분명히 인식되는 교훈 중 하나는, 마화텅은 인생의 어떤 단계에서도 금전이든 작은 명성이든 인맥이든 뼈저린 교훈이든 반드시 무엇 하나를 챙기고 마무리를 짓는 타입이었다는 겁니다. 대학 시절 가장 뛰어난 학생도 아니고 장래도 그리 밝지 않았으나, 주식 투자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좋은 평가도 받고 바로 실용화하려는 의도를 가진 회사에 판매하기까지 하여, 향후 자립할 수 있는 종잣돈을 젊은 나이에 이미 거머쥐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여러 젊은 공대생들이 고학년 시절부터 반은 학생, 반은 창업자 역할을 겸하며 기업과 실무에 깊숙한 발을 들여 놓고 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매우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를 건 형편에 지나지 않죠. 마화텅은 저런 컴페티션에서도 실속이랄까 뭔가 유형적인 과실을 거두고 한 코스를 마감하는 게 어떤 확실한 버릇이 든 것 같습니다. 이런 작은 습관이 모이고 모여 인생의 승자로 진입하는 길이 개척되는 거겠고 말입니다.

<삼국연의>의 유관장 세 의형제라든가 오호대장군 같은 영걸들, <수호전>의 백팔 호걸 같은 이가 거대한 사연을 만들고 역사를 바꿔 놓았듯, 세계 굴지의 기업 텐센트도 다섯 명의 선구자들이 의기투합하여 오늘의 거인을 우뚝 세워 놓았습니다. 주인공이자 오너인 마화텅, 장즈둥(장지동), 쩡리칭(증리청), 쉬천예(허진엽), 천이단(진일단) 등의 5인이 그들입니다. 연의류의 주인공들이 각각 대체할 수 없는 개성과 특장을 지녔듯 5인 역시 동시대인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재능을 보유했기에 이런 거대한 창업신화의 주역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장은 마 회장처럼 기술적 지식에 정통한 엘리트, 쩡은 (물론 그 역시 엔지니어지만) 과감한 추진력으로 애로를 개척하는 타입, 쉬는 전체의 의견을 조정하는 완충형 인격자, 천은 (특이하게도 화학 전공에 변호사 자격을 갖춘) 결정적 국면에서 의사 결정에 모멘텀을 제공하는 자문역, 뭐 이런 식입니다.

이 텐센트의 발전상을 보면 현재 우리나라 굴지의 IT 기업의 사연과 성취를 닮은 점이 많아 눈이 저절로 갑니다. 가령 텐센트의 통신앱 "위챗"이 중국 사용자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 때, 수익의 파이프라인만 제공하고 실속은 이 기민한 기업에 다 뺏길 판이라고 위기의식을 느낀 통신사들은, 텐센트로부터 "정당한 요금"을 책정해 물릴 것을 엄포 놓기도 했고, 중국 정부는 이를 지지할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중국 네티즌들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혀 결국 백지화했다는 건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닙니까? 우리도 이 사태가 터지기 대략 1년 전(후가 아니라 전이에요. 우리가 더 빨리 겪었습니다)쯤, (주)카카오와 3대 통신사가 큰 알력을 빚고 정부도 당시 통신사 편을 드는 듯한(중국과 달리 확정적인 제스처는 아니었고) 모습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당시 카카오 측이 내세운 가장 강력한 논리가, "망 중립성의 원칙"이었습니다. 사용자가 계약에 따라 통신사에 가입하고 망을 이용하면, 계약 조건에 따라 뭘 전송, 수신하든 새로운 제약이나 별개 요금이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역시 이 문제는 "통신망의 혁신(LTE 채택, 개발)"로 돌파구를 찾아, 통신사는 데이터 중심 요금제로 사용자들로부터 수익을 챙김으로써(따라서 다양한 컨텐츠의 개발로 소비 패킷량이 늘어날수록 자기들도 이익) 소위 무임승차의 문제는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LTE 같은 건 카카오 등을 좋은 일 시키려고 연구 개발하는 게 아니라 통신사의 진화, 자체 생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맞부딪혀야 하는 과제였으며, 남아돌아가는 여유 대역을 통해 돈까지 버니 서로 win-win하는 결과가 아닐 수 없죠. 아무튼 텐센트가 각종 난관을 헤치고 오늘날의 입지를 굳히기까지 밟아 온 경로가, 주인공 이름만 바뀌었을 뿐 한국에서 친숙히 접하는 "성공 드라마"의 사연과 너무도 닮아 흥미로울 뿐입니다.

텐센트는 다양한 플랫폼과 서비스를 개발해서 적어도 4억 정도의 중국 소비자들에게 어필하지만, 이 책에서 중점을 두고 소개하는 건 메신저(인스턴트 메신저. IM으로 약칭하는 것)인 QQ와 스마트 기기 통신 앱인 위챗입니다.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전개되는 건 AOL(2000년대 전반기)이나 MSN(후반기)와의 피터지는 경쟁, 그리고 2010년대 들어 위챗의 승승장구하는 사연들입니다. 저자는 왜 AOL이 중국 시장에서 패퇴했는지를 두고 몇 가지 이유를 분석하는데, 그 중 하나가 현지(중국) 언어 지원이 부족했다는 걸 듭니다. 사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외산 매신저가 2000년대 전체를 들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버디버디 등 몇 가지 브랜드가 국지적으로 충성스런 소비자를 장악한 게 고작이죠. MSN은 제 기억으로 2006~2009년 사이에 직장인, 학생 층을 가리지 않고 널리 쓰였는데 이 책에 나오는 MS의 중국 공략 시기와 비슷합니다. 공격적 마케팅을 편 데다 무엇보다 윈도에 끼워팔리는 강력한 이점을 지녔기에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널리 쓰였습니다.

어떻게 QQ는 MSN을 누를 수 있었는가? 첫째 어린 층을 사로잡기 위해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인터페이스를 삽입하여 "소통의 즐거움"을 추구한 전략입니다. 다음으로 QQ는 (제 생각에 이게 중요한데) 모르는 이들과의 관계 맺기에 보다 주력한 반면, MSN은 이메일 통합으로 계정을 관리하는 정책으로 "기존에 알던 이들 중심의 네트워크 강화"를 지향했습니다. 당시 중국 인터넷의 대세가 후자보다는 전자에 놓였던 만치 이 점이 필승 포인트였다는 건데, 사실 이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 심지어 미국도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큰 설득력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또 첫째 논점과 관련, 결국 어린 층이 대학생이 되고 그들이 사회로 진출하며 직장에서도 이 메신저를 쓰게 될 테니, 현재보다는 미래를 내다본 전략이 주효했다는 설명인데 그렇다면 한국의 버디버디는 왜 망했는지 시원한 설명이 또 안 되죠. 책에는 이 외에도, QQ가 초창기 잘 나갈 때의 한국 싸이월드에서 아바타 키우는 플러그인을 보고 이거다 싶어 따라했다는 말도 나옵니다. 한때 그토록 전 한국인을 사로잡으며 인터넷상의 거대한 관계 구축 거점이자 아이덴티티 단장의 아성 노릇을 했던 싸이가 왜 지금 이꼴이 되었는지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고, 어떤 특정 성과를 미래로까지 지속적으로 못 살려 내는 게 한국 산업계의 고질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QQ의 전략적 기로 중 또 하나 중요한 게, MSN이 야후와 손잡고 메신저 연동을 추구한 승부수에의 대응이었습니다. 이때 많은 이들, 심지어 텐센트 내부에서도 "개방이 아닌 폐쇄를 택한 우리들만의 고립"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마 회장은 과감히 "애써 파악한 우리 고객들의 특성, 취향을 타사의 자산으로 넘겨 줄 수 없다"며 기존의 태세를 고수했죠. 책에서는 "야후의 기존 점유율이 낮아 별 시너지 효과가 없었고, 얼마 후 웜 확산이라는 치명적 실수를 MSN이 저지른 후 QQ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고 정리합니다. 사실 호환성, 개방성 여부는 지금까지도 뭐가 낫다 못하다 결판이 난 문제가 아닙니다. QQ가 한창 성장하던 시절 애플은 그 폐쇄적인 맥 운영체제 때문에 유저들에게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저러니까 회사가 망해가는 거다." 혁신의 아이콘이자 컨슈머들에게 가장 확고한 로열의 대상이 되는 지금도, 애플의 OS(컴퓨터든 스마트 기기든)는 여전히 대외적으로 닫혀 있지만, 이를 비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지의 소치일 것입니다. 마 회장의 사업 태도에서 확실히 교훈으로 삼을 또 하나는, 상황에 따라 기존 정책을 고수하거나 표변하거나에 어떤 제한을 둬선 안 된다는 겁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동업자 관계였던 이병철 - 조홍제(효성 창업주) 두 분이 삼성 덩치가 커짐에 따라 끝내 결별하고 말았듯, 텐센트 창업의 다섯 기둥 중 세 사람은 대세를 따라 회사를 떠난 후 독자 행보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씁쓸하기도 하고, 주-종(최대 지분권자와 2인자들)의 초기 차이가 이처럼이나 극복 안 되는 근원적 팩터인지 깊이 곱씹게도 만듭니다. 뭐 거물은 남의 둥지에 언제까지나 머물 수 없으니, 능력껏 새 입지를 개척해서 자신만의 성을 세우는 것 역시 일류 사업가의 로망이겠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이처럼 뜻대로 한 번 휘젓고 이정표를 세우는 게 진짜 인생이지 싶더군요. 이 책은 IT 기업사의 한 단면을 참 상세히, 그리고 재미있게 조명하는데, 2006년 기업 순위를 인용할 때 "알렉사 닷컴(지금은 사람들이 이게 뭔지도 모를 겁니다)"의 자료를 근거로 삼는 등 지난 시절 그때 그런 게 있었지 하는 향수를 진하게 부르는 점도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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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당의 표정
정민 엮고 지음 / 열림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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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 막집, 신석기 시대 움집을 짓고 살던 인류가 비천한 동물이나 다름없던 단계에서 벗어나 문명인으로서 품격을 누리고 살게 된 징표는 이론 없이 의, 식, 주의 양식 진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세련된 정서의 다듬어진 표현이나 심오한 종교적, 도덕적 각성 등은 정신의 산물, 개성, 성취일 뿐이라서 그게 감각적으로 캐치되질 않습니다. 사람의 생이 사람다운 각성을 이뤘느냐는 누구의 눈에도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의, 식, 주 문화가 어느 정도 안정된 꼴을 갗췄느냐에 달려 있고, 정주 문명이 유목 문명에 비해 높은 평가(부분적으로 부당하거나 과장된 면이 있어도)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 혹은 나아가 동아시아의 선진 문명을 일구고 살던 옛사람들이 얼마나 이른 시기부터 문명인으로서 감성과 물질 양면에서 여유를 누리고 살았는지 대번에 찾을 수 있는 징표가 있습니다. 특수 계층만이 향유하던 고급 문화의 결정체는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거나 아예 현전(現傳)하지 않지만, 기와의 끝막음을 한 작고 귀여운 장식인 "와당"은 전통 기와 지붕을 올린 가옥이 있는 곳에 찾아가 흔히 접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한옥마을 혹은 인위적으로 조성한 민속촌이 아니라도, 서울 강북 일대만 해도 재개발이 더디 이뤄진 골목길 어귀에서 어렵지 않게 본는 게 와당입니다.

사람 사는 집이란 게, 관리상의 중대 고비를 맞지 않는 이상 사람이 거기 올라가 볼 일은 드물었겠는데(도둑놈이 아니고서야), 다만 지상의 사람들과 지붕이 아슬아슬한 맞대면을 이룰 기회라면 비 오는 날 처마 밑에서 비를 그을 때, 혹은 머슴놈더러 "이리 오너라"를 외친 후 대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 올려다 보는 지붕의 끝자락입니다. 아주 정교한 예술 작품까지는 아니라도, 보는 이들의 눈을 의식해 (혹은 거주자 본인의 만족을 위해서) 이런 곳까지 뭔가 문양을 그려(새겨) 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먼 후손들의 마음을 뿌듯하게 합니다. 하긴 사람이란 본디 구석기 시절 토굴에 살면서도 희미하나마 예술의 맹아를 남기려 애를 쓰던 별난 동물이며, 이런 마음의 여유(혹은 종교적 동기에서라도)를 갖는다는 점 자체가 오늘날 스스로를 향해 "인간다움"으로 지칭할 수 있는 그 모든 특성, 오로지 인간만이 갖는 존엄한 특징들 중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와당에 새겨진 다양한 문양들로부터 우리는 그 시절 사람들의 애틋한 정서 한 줄기, 자연과 동식물을 향해 문명 속에서도 품는 애정의 단초, 무병장수와 사후 세계, 혹은 종잡을 수 없는 이상향에 대한 노스탤지어 따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수키와에다 막음처리를 하고 문양을 새기는(물론 일의 순서로야 문양의 양각, 음각이 먼저겠습니다만) 이 와당은 물론 이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예처럼 수키와에 부착하는 게 보통입니다만 암키와에도 못할 바는 없습니다. 다만 이 책의 도판들은 수키와의 와당을 주로 다루네요.

<좌전>에 보면 이른바 사흉이란 게 나옵니다. 혼돈, 궁기, 도올(김용옥이 이 이름을 따 아호로 씁니다), 그리고 도철인데, 이 도철은 인간의 비루함과 탐욕을 상징하는 신화상의 동물이죠. 한자로는 饕(탐할 도), 탐할 철(餮) 자를 쓰는데, 이 두 글자 모두 이 용례 외에는 다른 곳에서 잘 찾아볼 수 없는 희귀자들입니다. 저자 정민 교수님(물론 우리가 아는 그분입니다)은 이 문양을 두고 "고릴라"라든가, 주름살 많은 할아버지라든가, 놀라서 뜬 눈이라든가, "술취한 사내의 빙글빙글 돌아가는 눈" 같다고 즉흥 감상의 일단을 피력합니다. 은나라때부터 즐겨 사용된(물론 수막새에) 문양인데, 이 책에는 그보다 훨씬 후대인 전국 시대에도 애용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들이 소개되었네요. 선악의 평가는 후대에 내려진 것이고, 고대인 특유의 물질적 풍요와 미래의 안녕을 기원하는 심리가 투영되었다고 보는 게 정설입니다.

남북조 시대에만 해도 수키와에 새겨진 여러 짐승들의 형상은 벽사(辟邪)의 뜻을 담았다고 이 책에도 나와 있습니다(p141 등). 猴(원숭이 후) 역시 한국에서는 잔나비가 재수없다고 여기는 게 보통이었던 터라 우리 눈에는 신기하게 비춰지는 게 사실입니다. 당나라 때 것으로 여겨지는 와당을 보면 벌써 민중의 삶 깊숙이 유입된 불교 문화를 반영해서인지 금강역사라든가 연주문이 보이는 등 시대상의 변화가 물씬 느껴지죠.

수레바퀴라든가 해바라기 문양은 출토된 후 연구자들이 그런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만 마치 현대의 추상화처럼 보는 눈에 따라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감이 있습니다. 중국에서야 너른 영역에 해바라기가 자생했으므로 해당 와당에 이름이 붙은 대로 葵(해바라기 규) 자가 일찍부터 고안되었고, 역시 문양을 짓는 이들도 좌우사방대칭의 그래픽을 선호하는 게 인지상정이었기에 이 해바라기나 수레바퀴 말고도 사엽(四葉. 네 잎사귀)의 도형이 즐겨 쓰였음이 이 책을 통해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책의 후반부로 들어서면 한대(漢代)를 거쳐 표음문자의 표준화가 완결되어 가던 사정이 엿보이는데요. "만세"라느니 "만물함성"이라느니 하는 기원형 구호가 새겨지기도 하고, 저자께서 지적하시듯 뜬금없이 "무(無)" 한 글자만 덜렁 보이는 와당도 있습니다. 한자가 본디 그 대종이 그림의 본뜸에서 비롯했지만(이 외에 지사, 형성, 회의, 전주, 가차가 있지만), 이런 역사적 진척이랄까 변천 과정을 보면 인류가 어떻게 자신의 내심을 타인에게 전달해 가는지 그 정격화한 원리를 보여 주는 것도 같아, 심미적 호기심과 만족 못지 않게 언어학적 영감도 떠올리게 돕는 소중한 자료라고 생각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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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와 수잔 버티고 시리즈
오스틴 라이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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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제목 "토니와 수잔"에서, "수잔"은 두 레이어에서 각각 다른 정체성을 가진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우선 우리 독자들이 마주대하는 3인칭 주인공이 수잔이고, 소설 속의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 잠시 현지인으로 얼굴을 비추는 클럽 가수 이름이 수잔입니다. 둘은 이름이 같지만 직업과 신분과 처한 처지가 당연히 다르며, 제 생각에는 성격과 내면도 꽤 다른 빛깔인 것 같습니다. 소설 속 소설을 창작한, 한때는 가망 없는 작가 지망생으로 여겨졌던, 수잔의 전 남편 에드워드는 분명 어떤 의도를 갖고 단역에다 그 이름(자신의 전 부인)을 붙였을 테고, 에드워드가 수잔(실물. 동시에 우리 독자에게는 캐릭터)에게 풀어보라며 던진 퍼즐을 해결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열쇠이겠으니 말입니다.

문제의 인물은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인 "토니"입니다. 중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자신의 신분과 걸맞은 여인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던 중년 남성인 그는, 어느날 외딴 지방 주간고속도로에서 아내, 딸과 함께 차를 몰다 불량배 셋을 마주친 후 인생이 완전히 바뀌고 맙니다. 비열하게 시비를 건 불량배들에 의해(셋 중 한 놈이 특히 질이 나쁘며 모든 범죄를 주동하는 위치네요) 차를 뺏긴 토니 교수(수학과)는, 아내와 딸이 엄청난 위험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위력에 의해 굴복한 채 결과적으로 사태를 방치하고 맙니다. 소설 속 소설을 읽는 주인공 수잔이나, 그 액자 밖에 있는 우리 독자들은 이 두 불쌍한 여인들이 어떤 운명에 처할지 뻔히 짐작하면서도, 불의가 세상 한 구석을 잔인하게 점령하지 않기를, 죄 없는 이들이 끔찍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질 않기를 (헛되이) 기원합니다. 헌데, 두 여성을 지켜야 할 보호자의 의무를 진 데다, 수잔이나 우리 독자와는 달리 그들과 같은 세계 같은 장소에 놓였던 토니 헤이스팅스 교수는, 우리나 수잔처럼 그저 무력한 희망만 되뇌어서는 안 되었다는 데 문제의 본질이 있습니다.

수잔은 전 남편이 보내온 소설(토니와 그 가족 이야기) 끝자락을 읽어가며, 이 흡인력 있는(비록 내용은 절망적일망정) 소설을 쓸 만큼 "실력이 는" 남편의 과거에 대한 복잡한 심경의 회고에 빠지고, 아울러 현재의 남편인 아놀드(외과 의사)라면 이 소설(속 소설)의 토니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했을지 상상해 봅니다(결코 나와 내 딸을 불량배들의 손에 호락호락 넘겨 주지 않고, 놈들의 이빨과 눈알을 씹고 빼먹을 각오로 끝까지 저항했으리라 믿는데, 이 믿음은 사실 현재의 자신이 누리는 행복에 대한 어설픈 합리화에 지나지 않음을 그녀는 곧 깨닫습니다). 수잔은 소설을 읽으며 명백히, 토니와 전 남편 에드워드를 동일시하기 시작했고(우리 독자들도 마찬가지죠. 비록 수잔이 처음에 충분히 암시하지는 않았더라도), 에드워드 역시 이런 소설을 쓰면 수잔(헤어진 전 남편에 대한 의식적인 왜곡에 빠지기 쉬울 심리의)이 기꺼이 토니와 자신을 나란히 대어 보리라고 짐작하면서 이 "작품"을 도전 삼아 그녀에게 보내 온 것입니다("당신은 과연 공정한 사람이었어?").

작품이 잘 쓰여졌다고 느낀다면 그 독자는 곧 주인공 토니의 행동과 성격에 대해 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아니라면 소설 자체가 실패라는 뜻입니다). 수잔은 분명 주인공들이 처한 운명에 개탄, 격분하면서도 이 작품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소설에 빠져든 독자(우리+수잔)의 반응이란, 우유부단하고 비겁한 토니에 대해 경멸감을 폭발시키며 단죄할 것인지, 아니면 한심하기는 해도 나 역시 저 상황에서 크게 다른 행동을 보여주긴 힘들었겠다며 체념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사실 토니 헤이스팅스 교수는 (수학과 교수라면서) 눈 앞의 폭력과 맞대면하기 괴로운 나머지 놈들의 말도 안 되는 핑계와 수작을 말 그대로 믿는 철저한 비논리성과 어리석음을 노출하는데, 우리 독자들이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는 대목이 바로 여기일 것입니다. 놈들의 말에 속는 건 사실 비겁한 자신을 용서하려는 자기기만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수잔이 새로운 갈등에 빠지는 건, 그저 토니의 무력한 행보에 자기 반성을 투영한 소극적 공감을 결국 자인해서라기보다, 특히 토니가 보여 준 (소설 속의) 자기기만의 과정이 그 무엇과 소름끼치게 닮아서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거은, 현재 자신이 유지하는 위태한 결혼생활에 내재한 온갖 거짓과 위험 요소를 애써 모른척해 온 비겁한 타협지향적 태도가 아니었을지요. 조금 스포일러입니다만 결국 토니는 소설 속에서 놈들의 두목격인 레이와 단둘이 대면한 후 그 나름의 응보를 가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고로 눈이 멀게 됩니다. 토니 헤이스팅스는 가장된 안온한 현실 속에서 숱한 모순과 비위를 보고도 "눈이 멀어 있었으며" 이제 극한의 진실과 마주친 후 영적 개안을 육적인 시각과 맞바꾸게 되는 의도라고 해석했습니다. 소설을 덮은 후 수잔이 보이는 몸부림의 방향은 단 하나입니다. "일상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디까지 눈을 뜨고, 또 어디서부터 눈을 감을 것인가. 그것이 나 자신의 감정이든 타인의 거동에 대한 평가이든 무관하게."

끔찍한 성폭행 범죄가 주된 모티브인 것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이런 게 배경으로 깔리면 독자들부터가 [정상적 범주의] 성에 대해서까지 싸잡아 거부감을 갖죠. 일시적일망정), 이 작품에는 액자밖 인물들의 불륜, 애욕이 섬세하게(말초적이진 않고 그 미묘한 심리 부분이) 묘사되어 있고, 한심하게도 그런 끔찍한 일을 겪고서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토니가 (제자 대학원생에 대해) 품는 떳떳지 못한 애욕도 끈적한 심리의 부분이 매우 정직하게 펼쳐집니다. 우리들의 의무감, 양심, 생존 욕구, 현실 도피 충동의 모든 기저에는 결국 "충족된, 혹은 좌절되거나 결코 만족될 수 없었던 섹스"가 깔려 있다는 점도 작가가 암시하려 든 포인트 중 하나이겠습니다.

우리가 놓쳐선 안 되는 핵심 인물 중 하나가, 정의감과 승부욕에 불타는 형사 안데스인데(이 이름을 "앤디스"라고 불러야, 후반에 악당 레이가 짐짓 잘못 부르는 "갠지스"와 라임이 맞을 것 같네요), 그는 진지하게 절차를 밟는 수고를 번거롭게 다 치르면서도(피살자 두 여인의 시신을 보고 남편보다 더 격분하는 게 그입니다), 한편으로 무작정 토니의 말을 믿지는 않는 신중함을 보입니다. 물론 공판 절차에서 사건이 배척당하지 않으려면 치밀하게 케이스를 완성해야 하고, 그 편이 자신의 경력 관리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정도 있겠지만 여튼 그의 주된 동기는 순수한 정의감, 나쁜 놈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믿음 쪽입니다. 이 안데스 경사의 정열적인 행보가 이처럼 강조된 것 역시 토니의 미적지근한 삶의 태도와 대비시키기 위함이었겠으며(사실은 다른 동기가 하나 더 있지만 스포일러라 생략하겠습니다), 그의 동선은 또한 믿을 수 없을 만큼 불합리한 현실이 안겨 준 충격의 몽환으로부터 안개를 걷어내는 유일한 동력으로 기능하기도 합니다. 사실 막판에 레이가 자백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독자들 역시 100퍼센트 그의 유죄를 확신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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