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업계지도 - 한발 앞서 시장을 내다보는 눈
한국비즈니스정보 지음 / 어바웃어북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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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에 천안에서 V리그(한국 프로 배구 리그) 올스타전이 열렸습니다. 올스타전은 프로리그를 갖춘 종목, 국가에서는 팬들에 대한 서비스, 혹은 스포츠인들의 친목 도모를 위해서도 반드시 치러지는 행사인데요. 소속 팀에 무관하게 감독, 선수, 심판 간에 우의를 다지고 평소 못 보던 모습을 구경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흐뭇한 광경 말고도 제가 개인적으로 눈여겨 본 건,  리그에 직접 참여하여 해당 기업의 홍보 효과를 보려는 당사자 외에, 다른 어떤 기업들이 협찬하여 그들의 로고를 대중에게 노출하려 애썼나 하는 거였습니다. 이런 스포츠 행사에 직간접으로 관여하거나 관심 갖는 기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향후 경기에 대한 전망을 좋게 본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죠. 제 생각에는 총체적 호황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밝지 못해도, 국지적으로는 여전히 맹렬한 현금 흐름이 이뤄지는 듯했습니다. 쉽게 말해 (잘 안 풀리는 곳이 압도적으로 많아도) 잘나가는 기업은 여전히 잘나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뜻입니다.

김성근 감독은 컴백 2년차가 되던 작년 어느 인터뷰에서 "(없던)제약이 많아져서 불편하다"라고도 털어놓았습니다. 자세한 언급은 없었으나 아마도 협찬사들의 로고를 어깨나 팔, 등에 붙이는 리그 협약을 두고 이른 것이겠습니다. 유니폼 등번호(콩글리시로 하면 백넘버) 하나에 민감해져 컨디션이 극과 극을 오가는 선수들의 예전 행태를 보면 보수적인 축에서는 이런 상업적 행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이해 관계가 직접 부딪히는 구단 운영 기업측도 마찬가지 -배구를 예로 들자면 흥국생명과 농협보험 등). 저는 반대로 적극 옹호 쪽인데, 자본주의가 머리를 짜내서 기존에 없던 마케팅 활로를 개척하는 건 아직 생명력이 왕성하다는 반증도 되며, 리그도 구단 직접 후원 외 미세하나마 다른 채널을 모색하는 게 먼 장래를 위해 결코 나쁠 게 없기 때문이죠.

기업의 로고가 모여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시각적으로 흐뭇한 느낌을 줍니다. 본래 시청자들, 소비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만든 예쁜, 선명한, 유쾌한 디자인일 뿐 아니라, 이 작은 나라에 기업이 이렇게 많았구나, 눈높이가 높아진 일부의 기준을 만족시키지는 못해도 사람들이 이처럼 먹고살려고 건설적인 발버둥을 치는구나, 대강 이런 안도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경제 역동성을 보인 미국도 한번 침체의 불길한 기운이 엄습하자 일단 직장을 잃어버린 많은 이들이 재기의 꿈을 버리고 노숙의 길을 택했습니다. 시스템의 문제도 물론 큽니다만 일단은 경제에 참여하는 이들의 자활 의지가 경기 활성화를 위해선 가장 중요한 팩터입니다. 한국은 모르긴 해도 그 시절의 미국처럼 가지는 절대 않으리라는 게 저의 확신입니다. 근로자도 업주도 돈 좀 벌어보려고 이렇게나 일상에서 연구 영역에서 혹은 투자 섹터에서 안간힘을 쓰기 때문이죠. 독일어 속담에 Not macht erfinderisch 같은 게 있듯이 말입니다.

이 책은 어바웃어북 출판사에서 매년 발간되는 인포그래픽 형식의 업계 전망 분석서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인포그래픽을 잘 다루고, 가장 권위 있는 정보를 정리하여 펴내는 곳에서 연례적으로 내놓는 자료이기에 매년 반드시 검토한 후 한해를 시작하곤 합니다. 중복되는 정보,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대목도 물론 많지만 이 책을 열독해 온 층은 어차피 그런 점을 다 감안하고, 그 와중에서도 변화가 특히 보이는 파트에 정력을 기울여 책과 정보를 소화할 것입니다.

삼전은 작년 갤노트 7 불량사태 때문에 전례없던(업종 전체나 아예 세계 기업사를 놓고 봐도) 시련을 겪었습니다만 다들 알다시피 실적이 매우 양호했습니다(물론 불과 며칠 전엔 정치 추문에 총수가 연루되어 구속 직전까지 가기도 했으나 더 지켜 볼 일이죠). 그런데 이게 통신업계에는 어떤 파장을 끼치겠는가. 많은 전문가들이 내다본 대로 분위기를주도하던 아이템이 단종되었으니 당연히 싸한 바람이 불겠지만 이 악재 말고 업계에 활력을 줄 만한 다른 추동력이 연달아 발견되는 편입니다. 소비자들에게 욕을 먹는 단통법 역시 일단 마케팅비용(흠....)을 줄인다는 점애서 장기적으로, 또 구조적으로 통신사들의 어깨를 가볍게 하겠고 말입니다. SKT의 T맵은 뭐 스마트폰 출시 초기부터 해당 통신사의 소위 킬러 앱으로 엄청난 호응을 얻었지만 (책의 서술대로)요즘도 같은 파급력을 누리는지는 좀 의문입니다. LG 유플의 "비디오 포털"은 저로선 처음 들어보는데 저자들은 호의적 전망을 하고 있습니다. 통신사와 미디어업체 간의 시너지를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도 사실 이 책 출간 초기부터 꾸준히 나오던 말인데 아직도 주장 단계에 머물고 있는 편이며, 대신 통신사가 자체 미디어 채널 역량 강화를 시도하는 추세는 더 뚜렷합니다("옥수수"라든가).

예전에 이익치씨가 전국민이 환란의 고통에 신음하던 시절 전도사처럼 전국을 누비며 "코스피 지수는 이천을 넘어 삼천을 넘나들 것"을 장담하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결국 불미스런 일에 엮에 큰 곤경을 치르고 그 상전의 아들인 정몽준 씨한테 "참 불쌍한 사람" 같은 조롱을 듣기도 했지만 당시 돈 쓸 곳을 못 찾던 아주머니들, 기타 여러 물주들에게는 큰 인기를 누리고 확신을 주던 인물입니다. 이 이익치씨의 활약으로 유명한(물론 그 이전부터 한국 굴지의 증권사였던) 현대증권이 작년 KB로 흡수합병되었습니다. 장남(사실상) 몽구씨의 현대차그룹이 큰 덩치로 남아있긴 하나 현대중공업이 저처럼 고전하는 중이며, 특히 몽헌씨 계열의 "현대그룹"이 거의 풍비박산된 판이니 한때 한국을 주름잡던 정주영 신화는 근 절반 이상이 날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반면 외환위기 즈음 미국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국내에 갓 진입했던 미래에셋은 증권업계 이제 1위로 올라섰습니다. 2위는 NH인데, 어떤 이들은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뭐가 정신없이 변하긴 하지만 결국 제자리" 같은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런 걸 보면 20년 전과는 구조와 구도의 근본 성격이 변했다고 해도 충분합니다. (서평 맨앞에 배구 이야기를 꺼낸 건 이런 소회 때문이었습니다. V리그 주 후원사가 농협이라서)

두산은 투자자들에게 오랜 기간 근심덩어리였습니다(어디 국외자뿐이겠습니까. 가장 걱정이 심한 건 그곳 직원들이었죠). 이러던 두산의 움직임 속에 작년 단연 눈에 띈 건 역시 두산밥캣의 상장이었죠. 자 과연 이 루키가 해당 기업군은 물론 향후 한국경제의 주요 성장 동원으로 효자노릇을 할 것인지 여부가 대단히 주목되는 편인데요. 이 책은 그 전망을 대단히 밝게 보는 편입니다. 이곳이 잘나가는 이유는 북미 (건축)시장이 근년 들어 활황을 보였다는 데에 있는데, 트럼프가 나프타 재협상을 선언한 지금 전망이 계속 장밋빛일지는 더 지켜 봐야 하겠습니다. 뭐 미-멕시코국경에 거대 콘크리트 장벽을 쌓는 것도 분명 일감은 일감이겠으니...(농담입니다)

의외로 사양산업 취급을 다 받았던 정유업계가 작년에 승승장구했습니다. 이는 작년 한해 유가가 다시 상승 기미를 보였기 때문인데, 다들 아는 것처럼 OPEC이 관리 모드에 들어간 게 큰 이유죠. 다만 이게 추세적 상승요인이 될 수 있을지가 의문인데, 뉴스에 막 나오는 것처럼 트럼프는 비축유도 계속 풀고(오바마 정책을 이어가는 몇 안 되는 예) 사우디 등 산유국에 대해 공세를 이어가려는 모습입니다. 이 책은 뭐 독자로서 언제나 만족입니다만 정치 언급이 최소화되어 있고(장점이기도 하죠), 그해 초 시점에서 최신 국제 정치 변수가 덜 고려된 게 좀 아쉽다면 아쉬우며 대체로 낙관적 전망에 기운 게(새해 초에는 기분 좋은 마인드로 시작해야 맞겠지만) 다소 여지를 남깁니다. 여튼 이만큼이나 자료가 잘 정리되고, 말 그대로 한눈에 업황과 개별 기업 건강성을 들여다 보게 해 주는 점은 너무 고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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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에비터블 미래의 정체 - 12가지 법칙으로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것들
케빈 켈리 지음, 이한음 옮김 / 청림출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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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들이 발 디디고 서 있는 현재가 언젠가는 과거의 궤도로 사라지고 만다는 점은 "피할 수 없는" 법칙입니다. 현재 시점에서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미래가 다가온다는 점도 역시 "필연적"이긴 하지만, 그 미래가 어떤 성격인지, 이 미래가 우리를 어떻게 바꿔 놓을지는 반드시 정해져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이나 호킹 등의 과학자(물론 그 훨씬 이전의 다른 분들 포함)가 시간의 차원성을 논의하며 "미래를 볼 수 있다" 비슷한 주장을 펼 때에는 어떤 일련의 사건군이 이미 정해져있음을 가정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볼 수 있는" 사건도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일 뿐이며, 현재에 이를 알 수 있었던 행위자와 상호 작용이 가능하다면 미래가 꼭 고정적이라곤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책에 제시된 탁월한 예견을 미리 알고 장래를 대비하는 독자라면, 급변하는 미래의 파고에 그저 수동적으로 대응할 뿐인 다른 미래의 자신과는 운명(?)을 달리 개척해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2가지 법칙화라고 하면 좀 도식적이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는데, 12법칙은 내용의 전부가 아니라 읽는 이들을 위한 "마크"에 불과합니다. 챕터의 제목이 보기 좋게 붙여져 있고 자계서 같은 형식이라며 착각을 부르기 좋지만, 책의 진짜 가치는 그런 도식화가 아니라 방대하게 인용되는 사례들, 혹은 그 사례들로부터 도출되는 저자의 참신하고 과감한 주장에 있으니 정말 펼쳐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를 넘기게 됩니다. 오히려 너무 친절한 편집이 책에 대한 오해를 부를 수도 겠네요.

"하이퍼텍스트"라는 말은 물론 우리가 잘 알듯 테오도르 넬슨이 최초 고안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일반인들이 알게 된 건 인터넷 혁명이 본격화하고서죠. 텍스트가 존재의 의미를 본격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건 저 인터넷 혁명 몇 년 저술되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네그로폰테의 책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도대체 인터넷이 없었을 땐 사람이 어떻게 살았나요?" 아이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하긴 "당연한 걸 뭘 물어?"라며 모든 혜택이 그저 당연히 주어진 것인줄 로만 알고 게임만 하는 애들보다는 저런 "반대 사정을 가정해 보는 회의적"인 태도가 얼마나 바람직합니까. 어떤 수학자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미지의 암흑에 둘러싸여 있었을 과거엔 천재들이 할 일이 얼마나 많았겠는가?"라며, 이미 이뤄질 게 다 이뤄지고 만(?) 현재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죠.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혁신가들이여 기뻐하라. 진짜 인터넷 혁명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거두는 대로 연구하는 대로 (아직은) 다 당신의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신나고 영감을 솟게 하는 구절이었습니다. 진짜 이 구절 하나를 (신나는 맥락 속에서) 읽은 것 하나만으로도 책 읽은 보람이 있습니다.

제일 궁금했던 게 과연 이 정도 레벨의 저자께서 그 흔한 주제인 인공지능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ㅎㅎ 저자께서는 너무 심오한 말씀을 하셔서, 아 정말 반도체 덩어리가 인간의 지성을 능가할까 같은 협소한 고민을 하지는 않으시더군요. 우주에는 마음, 인간에 깃든 그 마음뿐 아니라 상상도 못할 만큼 다양한 가능성으로 "마음"의 형성이 존재할 수 있으며(어디까지나 가능성) 이제 인간이 그 가능성 중 하나인 인공지능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겁니다. "인공지능 따위가 어찌 사람의 복잡미묘한 능력 그 일부라도 흉내낼까?"가 아니라, 이 인공지능이 (애초에 잠재되었던)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 중 일부(인간이 상상도 못하던)를 구현하리라는 기대에 몸을 떠는 어조가 다 느껴집니다. 이인류가 해결 못한 온갖 과학상의 난제를 이 지능은 풀어 줄 수 있을 테고(이분은 일자리 이런 것보다 이 점이 더 관심사네요 ㅎㅎ), 그 지능 역시 또다른 차원의 문제들을 대면하고는 절망하리라는 겁니다(이 정도면 할 말을 잃게 하네요). 저자의 말 중 딱 한 가지는 누구나 동의할 만한 겁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이 누구인지 알려줄 다른 지능이 필요하다." 독자로서 제가 갖는 생각은 바로 프로그래머이자 창조주인 우리가 이를 모르기에 그 복제품이자 모사품인 "인공지능"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건데, 이분은 이런 식으로 문제를 인식하는군요.

제조환경이란 본래 산업혁명이 본격화하기 전까지는 어디까지나 유형적이고, 제조원가가 노예의 족쇄처럼 해당 상품을 옥죄는 처지였고, 같은 물건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는 녀석이었습니다. 이러던 게 보십시오. 텍스트 온리의 저작물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복잡한 영상물마저 온갖 불법 복제품이 다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쉽사리 해적판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너무나 보수적인 출판업계의 태도) 때문에 e-book이 대단히 느리게, 상대적으로 드물게 나옵니다. 책의 퓨처가 전자책이라는 전망은 우리 생각처럼 그리 폭 넓은 동의를 얻는 견해가 아닙니다. 어떤 전망이든 보기 좋게 뒤집힌 후에야 그게 그렇게 취약했었나 사람들이 비로소 돌아보게 되고, 그런 반성이라도 하는 사람은 그나마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저자는 모든 "제조품"이 근본적으로 복제 가능하고, 완전히 동일한 포멧으로 여러 사람에 의해 공동 소유(점유)된다는 이 본성 자체가 세상을 본격적으로 바꿔 놓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을 이해한 이들도, "어떤 건 그렇고 어떤 건 결코 그렇게 안 될 것"이라며 분절적인 인식을 해 오던 데 지나지 않는데, 저자는 거기에 반기를 드는 겁니다.

제가 초등학생 시절만 해도 애들 앞에서 PT를 하려면 손으로 일일이 2절지에다 색깔을 그려 가며 자료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하나를 망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을 뿐 기존의 성과를 살릴 수가 없었죠. MS 워드(혹은 널리 워드프로세스 소프트웨어)를 쓰게 되며 가장 놀란 건, 이제 발표 자료를 만들 때 혹 실수를 하거나 마음에 안 들면 직전에 save한 단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부분만 달리해서 몇 가지 다른 개성을 부여한 "동일한 본판"을 무수히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제는 그저 당연할 뿐으로 여겨지는 이런 이점이, 미래에서는 일반화한 문명의 장점으로 모두가 누리게 될 수 있다는 저자의 과감한 도약은, 석학이란 이런 스케일과 깊이로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구나 하는 신선한 충격을 다시 안겨 주었습니다. 칸트나 헤겔도 동시대인들에게 이런 경탄을 안기고, 그 독자들에게 내실 있는, 그리고 "불가피한" 미래의 대세를 수용하고 준비하게 돕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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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강한 미국을 꿈꾸다 - 트럼프가 직접 쓴 아메리카 퍼스트를 위한 제언
도널드 트럼프 지음, 이은주 외 옮김 / 미래의창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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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통령이란 확실히, 전세계 시민 누구에게나 크건 작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매우 중차대한 직위임은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이 과연 세계와 미국의 비전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갖는지 우리가 좀 알아 볼 필요는 있습니다. 가능하면 그가 단문성이 아닌 격정도 깃든 좀 긴 어조로 말할 때 더 눈여겨 볼 만한 좋은 단서가 많이 발견된다고 생각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그 나름대로 논리를 갖춘다고 생각하며 길게 말을 할 때, 웬만해서는 거짓말을 꾸며 내기가 좀 힘들겠기 때문입니다. 혹 서두와 결론이 어떤 효과를 노리고 거짓으로 치장한 수사라고 해도, 중간에 끼어든 소소한 논거의 어느 한 구석등에서는 반드시 진심이 드러나게 마련이죠. 아까 고소 건 때문에 낮에도 경찰을 좀 만나고 왔는데 둘이서 약간 즐거운 여담으로 빠질 때 수사관도 이 비슷한 기법을 쓴다고도 하더라고요.

이 책에는 재미있는(?) 호언장담성 진술이 많았습니다. 트럼프를 두고 사업가라고만 알지만(혹은 저질 리얼리티쇼의 코미디언이라든가) 이 책을 읽어 보니 누구보다 "선동"하는 재주가 빼어난 정치인 자질이 다분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런 책은 부분적으로 읽을 때는 다 맞는 말처럼 느껴지지만, 모든 사태는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석유를 확보하라"에서 트럼프는 이란, 그리고 몇 년 전에 망한 가다피 독재 정권에 대해 몇 마디를 꺼냅니다. 이란과 미국은 이 책이 쓰여지고 난 후 케리 국무장관이 최종 담판을 보았는데, 이미 그 세부적인 내용은 이처럼 일찍이 알려지고 있었나 봅니다. 이 책 쓸 당시에는 아흐마디네자드가 아직 권좌에 있을 때라는 게 책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며칠 전에는 라프산자니(실용파, 개혁개방파)가 죽었는데, 양쪽에서 대화가 통할 만한 합리적이고 온건한 세력이 설 땅이 넓어져야지 그 반대로 가면 정말 곤란하죠. 여기서 트럼프는 중동 분쟁에 개입은 하되 반대파를 밀면서 석유 이권 개입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조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속셈 때문에 십여 년 전 조지 W 부시도 비판받았던 거고(그나마 그 사람은 이런 말을 대놓고 하지는 않았는데),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현지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모르는 소치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전략 비축유의 금지 해제 문제는 결국 결론에 있어선 오바마과 의견이 같다는 것도 의아했습니다.

중국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강경한 태도더군요. 이 책은 중국 당국을 칭찬하는 듯 하면서 사실은 앞으로 중국에 대해 보다 "터프(이 책 원제이기도 합니다)"해질 걸 촉구하는 기조입니다. 중국에선 미 대선 전 이 트럼프가 당선될 걸 바라는 성명을 여러 번 냈었는데, 이 6년 전에 나온 책을 읽고도 같은 결론이 나왔을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책은 기본적으로 읽고 상대(적)를 분석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중국 당국의 판단 능력에 좀 의심이 가기도 했고요. 독자로서 제가 내린 결론은, 현 오바마 행정부가 러시아를 주적으로 삼았다면, 이 트럼프는 명백하게 중국을 메인 타겟으로 삼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6년 전에 이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졌고, 책의 다른 부분에 나온 주장들을 거의 지금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사람이 어떤 기조로 외교를 펼 것인지는 그림이 빤히 보이는 듯합니다.

"상속세" 폐지는 이미 조지 W 부시 때부터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권리가 있습니다"란 멋진 말로 정책공약화한 이슈입니다. 당시 한시적으로 시행되다 지금 원위치되었는데, 이걸 트럼프는 다시 부활하겠다는 거죠. 오늘 취임식장에도 부인보다 더 부각된 이가 이반카였는데, 그로서는 이 아끼는 딸에게 자신이 일군 부동산 제국을 반드시 물려주고 싶을 겁니다. 왜 이미 세금은 물린 돈에 또 세금을 물리느냐가 강력한 논거인데, 사실 이건 트럼프가 처음 한 주장도 아니고 조지 W 부시가 원조도 아닙니다. 거의 백 년 전(적게 잡아도)부터 논쟁이 있었고, 이미 어느 정도는 결론이 난 문제죠.

이중 과세가 아니라, (죽은 사람한테 무슨 세금을 물립니까) 재산을 물려받는 상속자(아들, 배우자 등)에게 물리는 세금이니 최초 과세가 맞습니다. 기본 전제부터 잘못된 주장이고요. 우리가 부동산 양도소득세를 낼 때, 직전 보유자가 지불한 부분(취득 원가)은 무슨 면제를 받는다든가 하는 게 아닌 이치와 같습니다. 소득세나 상속세, 증여세는 부가가치세와는 다른 구조 다른 목적일 뿐입니다. 이 사람이 와튼 스쿨을 나왔다고는 하나 과연 실력으로 들어갔는지 의문이고, 이런 주장은 못 배운 사람들한테서나 나오는 소립니다. 상속세가 어제오늘 생긴 것도 아니고 수백 년 동안 게임의 룰이었는데 무슨 헛소린지. 근본 없는 졸부 티를 내는 거죠. 어떤 사람은 자칭 좌파라면서 상속세를 반대한다고도 하던데, 세금으로 낼 돈을 가져 본 적도 없는 주제에 무슨 정신분열 망상인지 기가 찰 노릇입니다.

오바마케어에 반대하는 이유는 기존 의료 관련 (보험업이라든가) 업종의 입지가 좁아지고, 여태 자영업으로 환자로부터 직불 체제를 취해 온 병원 등이 이제 새삼 국가 관리를 받는 식이면 당연히 반발이 클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서 만약 권위주의 정권 시절 억지로 이게 도입이 안 되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반대가 심해 못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무작정 민영화로 방치하기보다, 적절히 손을 봐서 점진적으로 공영성을 확대해 나가는 쪽으로 장기 과제 추진이 합당하리라 봅니다.

마지막 10장에서는 특정 언론사와 진행자들을 일일이 거론하며 자신이 받아온 냉대에 대해 아주 격정어린 태도로 성토하더군요. 특히 오바마 당시 대통령에 대해선 그가 모 파티석상(트럼프도 동석)에서 긴 시간을 들여 트럼프를 비꼰 걸 두고 원한이 크게 남은 것 같았습니다. 당치도 않은 출생문제를 두고 팩트를 날조해서 지가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감옥에 안 간 걸 다행으로 여겨야 맞겠는데도 말입니다.

이 책에서 하나 건질 게 있다면, 이 사람은 무식할망정 어쩄든 자기 주장에 별 변화도 안 주고 뭘 끈덕지게 밀고나가는 면은 있다는 겁니다. 일이 잘 안되면 크게 욕을 먹고 곤경에 빠질 건데, 그 생각은 안 하고 여튼 지 소신을 밀어붙이긴 합니다. 복잡한 수사를 안 붙이니 책임 소재도 아주 빤하게 드러날 텐데 그런 점에서 정직하긴 합니다. 밑바닥 최하층 실업자도 말이 오락가락 사기를 치는 게 흔히 보는 행태인데도 말이죠. 좌건 우건 정치인들은 빠져 나갈 구멍을 교활하게 마련하는 게 참 싫은데, 이 사람이 과연 앞으로 자기 말에 어떻게 책임을 질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겠다는데 그건 또 어떻게 될지, 최소한 연막 전술을 안 피우는 건 어느 나라 정치인이건 좀 배워야 하겠더군요. 지지자에게 떳떳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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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소설가의 글쓰기 - 위대한 대문호의 마음속으로 떠나는 여행
리차드 코헨 지음, 최주언 옮김 / 처음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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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무리 소설을 즐겨읽는다 해도 그런 우리들 독자 모두가 소설가가 되거나 소설가처럼 글을 쓸 필요는 당연히 없겠지만, 멋진 소설 영감어린 작품이 어떤 이유로 그처럼 우리를 신나게 혹은 감동에 빠져 들게 하는지 그 비결을 수다떨듯 되새겨 보는 건 여튼 소설읽기 못지 않게 재미나기도 합니다. 리차드 코헨(이하 이 책의 표기법을 따릅니다)은 셀 수 없이 많은 기념비적 명작에서 숱한 사례와 인용구를 따 온 후, 무엇이 그토록 (때로는)수백 년 넘게 우리를 감동시키고 눈물 핑 돌게 만들었는지 그 비결을 분석합니다.. 보다는, 재미있게 수다를 떨어줍니다.

알파고가 아무리 기존의 놀라운 기보를 학습(논란의 여지가 있지만)하여 프로 기사들을 상대로 백전백승을 이어가도 "그"는 오로지 승부의 법칙에 따라 냉연히 행보를 이어갈 뿐 어떤 질(質)이나 미학이나 철학을 바둑판의 전투에서 발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인공지능이 습작 소설을 써 예심을 통과했다고도 하지만, 그게 그럴싸한 문장을 랜덤으로 늘어놓은, 행위자 자신도 무슨 의미인지 모를 장난에다 대고, 어리석은 인간만이 의미 과대평가를 하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아무리 높은 수준까지 발전해도, 명 에디터(겸 사장님) 리차드 코헨처럼 불후의 명작들을 추려 놓은 후 잘 뽑힌 구석, 신들린(혹은 속어로 "약빨고 쓴 듯한") 구절, 후손 만대에 이르기까지 삶과 영혼과 사랑과 미움의 본질이 뭔지 두고두고 곱씹게 만드는 주제와 표현을 "질적 기준"에 의해 궁시렁궁시렁 주절대지는 못할 것입니다. "신산(神算)"에 의해 불리한 판세를 한번에 뒤집는 천재적 수리 능력보다, "캬 이거 죽이지 않냐, 응?"하며 눈금의 미세단위가 측정 못하는 감정의 자그마한 요동에 깔깔대고 시간을 죽이는 사람들의 실없는 장난질(문학은 본질적으로 유희의 산물입니다)이 훨씬 위대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소설에서 서두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 강조가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만, 이 책은 톨스토이의 그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 외에 다른 무수한, "불후의 서두"들을 첫 장에서 제시합니다. 사실 "가장 유명한 서두"는 제가 제 블로그에서 자주 꺼내는 화제지만(가장 유명한 마무리는 하디의 <테스>라는 것까지), 이 역시 지난 시절 일본인 호사가 그룹 일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당시 기준 자기네들끼리는 매우 운치 있었을) 천박한 순위매김 놀음에 지나지 않습니다(두 작품의 해당 구절들이 그런 불후의 가치를 실제 지닌다는 건 별론으로 하고라도). 이 책은 그런 화제 말곤 "서두"에 대해 할 이야기가 없는 이들에게 그 지적 빈곤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우쳐 주기라도 하듯, 방대한 작품들로부터 코믹, 휴머니티, 에로, 동심, 냉소, 달관 등 실로 다양한 예를 꺼냅니다. 구구단만 아는 사람한테 미적분과 해석학, 프랙털과 위상기하학 문제를 풀어 주는 식이라고나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책의 원제부터가 "톨스토이처럼 글쓰기"이며, 바로 이 1장에도 (딴작품도 아닌)<안나 카레니나>의 상당부분이 인용되지만, "그 서두" 이야기는 없다는 점입니다. 남들 다 하는 이야기는 (맞는 이야기라도)안 하겠다는 코헨의 "취향, 태도"를 엿볼 수 있죠.

가장 재미있게 읽은 파트는 2장입니다(제게 9장의 "섹스"는 매우 유익했지만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수준이 낮건 높건 작가의 세계로 초대된 독자가 일단 눈을 줄 곳은 당연히 등장인물, 캐릭터들입니다. 캐릭터가 1)최초로, 2)재미있게 3)강렬하게 (이상은 서평자의 정리입니다) 제시된 작품은 구조상 문제가 있거나 주제의식이 시대에 뒤떨어져도, 심지어 장르문학이라 해도 오래 살아남습니다. 셜록 홈즈가 이처럼이나 세계적으로, 또 끊임없이 리뉴얼되는 양상으로 사랑받는, 또 뤼팽이 현대에 들어 외면되는(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어렸을 때 만난 최초 각인이 그처럼 중요하겠고, 또 저는 캐릭터를 넘어 르블랑의 스타일까지 좋아하죠) 이유도 아마 여기 있을 겁니다. 이 2장에서 비로소 <리옹 도르의 여인>(국내에도 번역되어 있죠)의 작가 세바스천 폭스(출판사에 따라 표기가 다릅니다)의 대화가 인용되어, "톨스토이처럼 쓰란 소린가?"라는 그 알려진 한 마디가 나옵니다(이 책의 영어 원제가 바로 여기에 근거를 뒀죠). 키플링의 그 작품(<배서스트 부인>)에 나오는 비커리 씨의 별명을 이 책은 "딱딱 비커리"로 옮기는데, 요즘 젊은 층에서 유행하는, 허풍을 즐기는 돼지 같은 늙은이들을 비꼴 때 "틀딱(틀니 딱딱의 준말로 치아, 눈 등 신체 기관이 부실해진 상태를 조롱)"이란 말과 통해서 재미있습니다. 책에 안 나와 있으나 원어는 "Click"입니다.

3장은 뜻밖에도 "표절"이 주제입니다. 코헨은 독자인 제 기대보다는 다소 느슨하게, 이 부도덕한 실정법 위반 행위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동정심까지 표시하면서 문학사상 무수히 빚어진 표절의 사례들을 거론합니다. 영미권에서는 국어(영어) 교과서에, 작문 파트에다가 특별히 plagiarism을 주제로 거론하고서는, 어떤 경우에도 이런 수치스러운 짓을 해서는 안된다며 (국어 교과서에다가) 윤리적 훈령을 이례적으로 내리는 게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바른 가치관을 함양해야 한다는 의도죠. 알만큼 뭘 아는 성인 대상의 이런 책에도, 너무 표절 이슈를 너그럽게 다뤄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혹 재미로 다양한 사례를 거론할 수는 있지만, 장 말미에는 쓰디쓴 한 마디 독설로 파렴치한 돌머리들을 조롱이라도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시점(퍼스펙티브) 이야기를 끄집어 내면서 이만큼이나 해명되는 주제가 많습니다. 인물, 화자가 광인일 때, 모험가일 때, 성인(聖人)일 때, 철없는 유아일 때, 여성일 때에 따라 다 각기, 같은 1인칭 3인칭이라고 해도 이후 작품이 취하는 구조나 노선부터가 달라집니다. <뻐꾸기 둥지..>(잭 니콜슨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유명하지만, 책에 나오듯이 소설 발표 연대는 몇 십 년이나 앞이죠)의 예에서 잘 드러나듯, 사건에 참여하지 않는 관찰자 시점이라 해도 그 화자는 전개되는 이후 사건(이전이라 해도)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 이런 의미에서 "화자에의 거리"와 시점이 얼마나 불가분의, 결정적인 관계를 가지는지 시원한 해명이 돋보였습니다. 표현은 평소에 못했지만 생각해 보니 과연 그렇겠다 싶은 독자의 공감을 이처럼 전폭적으로, 그러면서도 자분자분 끌어내는 저자 코헨의 말솜씨가 탁월한 게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대화"는 가장 사실적인 묘사 같으면서도 전혀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실제의 대화를 충실히 재현한 기록이 사람이 읽기 가장 어려운 류라고 지적해 왔죠(신문 기사에 난 "녹취록" 같은 걸 떠올려 보십시오. 이런 걸 짧은 시간에 정확히 해독하려면 민완 검사쯤이나 되어야 합니다). 책에 나오지는 않지만 (바로 앞 장에서 거론된) 의식의 흐름(내면의 "대화'라는 점에서)이라든가, 혹은 휴버트 셀비 주니어의 <브루클린으로..>만 봐도 이 타당성이 확인됩니다. 저는 이 장에서 <캐치22>의 그 미친 듯한 문장이 인용될 걸 기대했는데 안 나왔고, 대신 앞 앞 장 "캐릭터"에서 저 작품이 이런저런 토픽의 근거로 쓰입니다.

"아이러니"는 천재적 단편 작가로 손꼽히는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왜 명작으로 남게 했는지 그 비결을 가르쳐 주는 단서입니다. 챕터의 제목이 따로 "비밀문"으로 붙은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다. 문학이란 현실의 모사(模寫)가 아니라 재현(리프레젠테이션)인데, 우리가 특이하다 싶은 풍경, 구조, 형상을 구경하는 것도 단지 그 외형을 시각적으로 익히기 위해(범죄 수사관이나 스포츠 경기 판독관이 아니므로 이런 훈련은 필요 없죠) 시간을 쏟는 건 아닐 겁니다. 그런 시각적 이미지들이 부르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과 영감을 통해, 고정된 현존의 제약이 아닌 다른 가능성(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 만약 이게 없다고 판단한다면 그 문학이 비관주의 염세주의 허무주의가 되는 거고)을 모색해 보는 겁니다. 화제 미드 <웨스트월드>에서도, "황홀경(trance)"에 빠져드는 호스트들을 두고 버그라고 진단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처럼 다른 가능성을 꿈꾸는 건 역시 인간만의 특권이죠. 왜 아이러니가 트랩도어(이 책에서 "비밀문"으로 번역)냐면, 전혀 맞닿아 있을 것 같지 않은 두 지점이 문 하나로 연결되어 "결국은 같은 것이었군!"의 경악, 허탈, 구원을 안기는 기능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극단적으로 말해, 소설을 읽는 우리 모두는 이런 아이러니의 미친 불의타를 맞아 보기 위해 빠져든다고 해도 됩니다. ("황홀경" 토픽도 저 2장, "캐릭터" 편에 다른 맥락에서 잠시 언급되더군요)

"픽션" 챕터에서는 사실상 플롯을 다루고 있는데, 소설에서 플롯이 차지하는 의의를 감안하면 분량이 좀 짧습니다. 하긴 플롯 이야기를 앞 장들에서 수다 떨다가 다 해버렸으니 할 말이 안 남기도 했겠죠. "산문의 리듬(왜 산문이냐면 제목부터가 "소설쓰기"이고, 저자분의 주전공이랄까 관심사도 한계가 있어서지 싶습니다)"은 사실 이런 번역책에서는 전달에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원문을 찾아서, 소리 내어 읽어 보는 게 좋겠네요. 사실 아무리 산문이라도 최소한 내적인 리듬이 있는 터라, 낭독이 결여된 책읽기는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한국 문학에서는 (당연히 한국인 독자를 상대로 하면서도) 이런 문학의 기본기를 염두에 두는 예가 많지가 않다는 것도 참 신기합니다.

9장 제목 "조로"는 물론 早老가 아니라, 제가 두 주 전 책프에서 다루기도 했던 의적 캐릭터 Zorro를 뜻합니다. 정작 해당 챕터에는 조로 이야기가 없고, Som en Zorro에서 그대로 따온 것 같네요(이 코헨의 책은 따끈한, 무려 2016년작입니다). (글로 쓰는) 섹스를 조로 스타일로 하라는 말은 해당 쳅터를 다 읽고 나서도 감이 안 올 수 있지만, 그냥 영화 속 조로 이미지를 떠올리는 걸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10장과 11장의 "보고 또 보고"는 재미있는 번역인데(십 몇 년 전 드라마 제목도 연상되고), 퇴고를 가리키는 "리비전"을 어원으로 푼 것이겠습니다. 12장은 당연히 "전설적인 엔딩들"에 대한 수다이며, 당연히 일개 독자인 제가 이런 유명한 출판인과 기량을 겨룰 수는 없겠지만 닉 혼비의 위트 가득한 에세이집(그러니 얼마나 많은, 소설 외의 문학 작품들이 이 책에서 거론되는지 짐작될 겁니다)을 예로 드는 대목에서 참 어지간하시다 하고 감탄이 나왔습니다.

이런 책의 해악(?)이라면, 정말 수천 년의 문학사가 낳은 걸작들을 채 읽지도 않고, 이런 멋진 책의 감상이나 취향만 흉내내면서 다 읽은 양 허풍을 치는 엉터리들이 늘어날 수도 있다는 점이겠습니다. 문학사는 따분할 수 있지만, 이런 안목 높은 편집자가 늘어놓는 책수다는 본격 연구서보다 문학의 무궁무진한 성취에 대해 더 많은 걸 독자에게 가르쳐 줍니다. "지대넓얇"을 정말 "지대로" 함양시켜 주겠지만, 그 무엇도 원작이 주는 감동과 교화, 쾌락에는 비길 수 없고, 심지어 이런 책도 원작들을 읽은 독자에게나 제대로 그 가치를 전달해 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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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실전회계다 - 기초에서 고급까지 한 권으로 끝내는
김수헌.이재홍 지음 / 어바웃어북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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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직장인들은 못하는 것 모르는 것이 없어야 살아남습니다. 아이들에게 코딩을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기사가 나자 IT쪽 사람이 대뜸 한다는 말이 "전문인력을 싸게 먹으려는 획책"이던데, 그 사람 입장에선 위기의식에 그런 말이 나왔을지 몰라도 변화하는 세상에 본인이 적응하는 것말고는 아무 대안 없습니다. 아이들은 물론 현재 회사에 몸 담은 이들도 배울 게 생기면 코딩 아니라 뭐라도 당연히 배워야 합니다. 하물며 문명 사회의 상업 발달사와 궤를 같이하는 회계에 대해서라면, 자신이 운영하거나 몸 담은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나, 하다못해 주식 투자시 정확한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도 이에 눈감을 수가 없습니다. 회계는 이미 교양이며, 그것도 필수 교양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회계지식에 밝아지면 안타깝게도 회계사들 일거리가 줄어들겠지만, 역시 해당 직종 종사자들이 걱정해야 할 문제일 뿐이며(현실이나 대세는 받아들이는 것 말고 답이 없죠), 일반인들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책 뒷면의 이한상 교수님 추천사를 보면 직장인들(혹은 누구라도)이 언제까지 "회알못" 신세에서 못 벗어나겠냐며 자극을 주시는 표현이 있으며, 본문에는 "얼마나 많은 회사가, 단지 회계에 무지하다는 이유로 손해를 보는지"를 개탄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알못"이 아니라 "잘알"이 되면 아직까지는 이익을 볼 수도 있는 국면이란 뜻도 됩니다. 이 국면이 지나면 애써 공부해 봐야 또 그저 현상유지, 남보다 뒤처지는 신세나 간신히 면할 뿐이니 때를 놓치지 말고 당장 지금 공부해야 같은 수고를 들이고도 보람이 크게 남을 것입니다.

시대의 이런 니즈를 다분히 고려해서인지 회계 대중서는 몇 년 전부터 여러 권이 나왔고, 그런 책들의 문제는 "알기 쉽고 타당한 내용들이지만 읽고 나면 남는 게 없고, 남는 게 있다고 해도 (수준이 낮아서)자신의 업무에 적용을 못한다"였습니다. 사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대중서에 대해 너무 큰 기대를 가질 수가 원래 없는 법이며, 어렵더라도 교과서를 사서 공부하거나 성인 대상 강좌를 듣거나 해서 정석대로 공부하는 길만이 답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일시적인 팁이 아닌 항구적으로 써 먹을 수 있는 지적 자산을 갖추려면, 대학생 때 전공자가 공부하듯 정성을 들여 정코스에 가까운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뜻에서입니다.

이 책은 펼치는 순간 "제목값을 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확 오더군요. 말 그대로, 단편적이고 사항 지적, 초보 개념 정리 수준에 머무른 지식이 다루지 못하는 과제(즉 현실에서 벌어지는 케이스 형태의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문제의 시작부터 끝까지 명쾌한 진단을 내려 주고, 그 풀이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제기되는 다른 회계 이슈까지 자상히 짚어 주는, 1) 실무에 도움이 되면서 2) 회계 스킬의 깊이 있는 응용이 가능하게 돕고 3)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경지가 어떠한지를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일반 회사원들도 도움이 되겠지만, 시험을 갓 통과한 초보 회계사들이 아직은 자격증만 갖췄을 뿐 자기 업무가 뭔지 조망할 만큼 감이 안 올 때 읽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현금흐름표가 뭔지 하는 구차한 설명은 다 생략하고, 첫부분부터 "이 회사가 장사를 잘하는지, 비전이 있는지 어떤지를 보려면 재무제표 어느 부분을 봐야 하는지"부터 시원시원하게 찌르고 들어갑니다. 나이 드신 분들 중 예전 기업회계기준으로 배우신 분들은 이후 IFRS, 또 그 후 K-IFRS가 도입된 후 어떤 부분이 바뀌었는지 잘 모르실 겁니다. "포괄손익"이라고 하면 감이 안 올 수 있지만, 이 개념의 대표적 항목이 "자산재평가 이익"이면 그제서야 뭔가 친숙해지겠죠. 이 자산재평가는 특히 외환위기 이후 종래 보수적인 기업 자산 평가 기법을 개선하여, 크게 변화된 경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실무진과 학계에서 중점논의된 바 있습니다. IFRS 도입 논의보다 한참 전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이 항목은 "당기손익"이 아닌, 대차대조표의 "자본" 항목으로 가서 해당 회사의 가치 평가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결론적" 단정을 책에서는 친절히, 그리고 날카롭게 정리해 줍니다. 모르시는 분들도 어차피 재무제표가 다루는 사항이 빤하니 이거 아니면 저거라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이처럼 이 책의 강점은, 맥아리 없는 팩트 나열만 하다 끝나는 게 아니라(대중서, 입문서 중에는 이런 게 너무 많습니다), 특정 원칙이나 개념의 획정이 당신의 실무에서 갖는 의의가 뭔지를 확실히 짚고, 독자로 하여금 "큰 그림을 보고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어쩼단 말이냐?" 같은 독자의 반문을 처음부터 해소시켜 주는 게 가장 돋보입니다.

회사원도 아니고 주식 투자에도 관심 없는 그저 일반 독자라 해도(즉 집에서 살림만 하는 분들이라도) 재미있게 읽을 만한 파트가 있습니다. 바로 백화점 매출 1~3위가 각각 어디인지, 또 꼴찌는 어디인지 같은 지극히 흔한, 그러나 다 알고 떠들어도 여전히 재미있는 화제로 시작하는 장입니다. 물론 "실전회계"를 가르쳐 준다는 책이 시시한 화제로 내용을 채우진 않습니다. 아주 일상적인 수닷거리로 말문을 연 후, 백화점이 각 개별 매장의 매출을 어떤 다른 방식으로 집계하고 자신의 장부에 반영하는지 같은, 매우 현실감 있는, 그러면서도 하드한 토픽으로 바로 넘어갑니다. 백화점의 이런 매출 처리 방식 하나를 두고서, 그만큼이나 많은 "회계 토픽"이 굴비 엮이듯 주루루 나온다는 게, 이 분야에 결코 낯설지 않은 독자 입장에서 읽어도 참신하고 뭔가 새로운 느낌이 오더군요. 진지하게 자신의 "회계 내공"을 쌓아가고 싶은 중급자 이상의 회사원은 물론, 회계사들도 읽어서 유익하겠다 싶은 대목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이한상 교수님의 추천사 일부를 다시 원용하자면, "탁월한 직관의 힘" 같은 게 바로 이런 데서 드러나는 거겠습니다. 달인은 본래 부분을 응시하면서도 전체를 꿰뚫어 보는 게 달인이니 말입니다.

창업을 준비하시는 분들은 (비록 엄두를 못 낸다고는 하나) 지하층 푸드코트부터 해서 그 많은 백화점 내 매장들이 본점과 어떤 식으로 손익을 배분하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거대 업체는 직매입이냐 특정매입이냐로 나뉘고(직매입은 백화점의 직접 매출로 계상[計上]됩니다), 그 외 영세한 매장은 대부분 공간임대 형식인데 이게 갑/을로 나뉩니다. 갑/을은 갑질한다 할때 그 갑이 아님은 물론이고, 직장인들 소득세 뗄 때 갑근세 어쩌구 하듯 편의상의 부호일 뿐입니다. 갑型은 임대료만 받고, 을型은 구체적 수익을 비율에 따라 나누는 식이죠. 예전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도조/타조 구분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게 회계지식의 본체에는 속하지 않지만, 회계라는 단일 영역에 시야가 국한된 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 두루 밝은 저자가 특정 화제로부터 끊김 없이 연관 분야의 실태를 주룩 짚어 주는 점이, 이 책을 소설책처럼 읽히게 하는 큰 원동력 중 하나입니다.

추천사에서도 소개된 부분입니다만, 이 책의 강점은 최신, 정말 최신 시사나 화제 사건으로부터 논의의 실마리를 물고 오는 태도에도 있습니다. 교과서를 파고들 때 가장 지루한 건, 지금 공부하는 이 지식이 배워서 어디에 응용되는지 확신이 안 설 때이며, 이때 공부가 의미없는 부호 암기처럼 지겨워지고 고비를 맞습니다. 이 책은 그렇기는커녕 (좀 정치지향 아닌가 싶게) 거의 매 챕터가 처음부터 화제성 회계, 금융 스캔들부터 짚고 넘어가는 식입니다. 동료들끼리 모여서 얘기를 해도, 남들 따라 "뭐가 잘못됐네 도둑놈들이네 " 목소리만 높이는 건 그저 동네 아줌마들 수다 수준을 못 벗어납니다. 직장인(남녀 불문)들 대화가 그 선을 못 넘으면 어디가서 말도 못 꺼낼 만큼 창피하죠. 대우조선 분식회계가 범죄로 들통났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항목을 어떻게 건드렸는지, 원칙은 어떠해야 하는데 그런 장난질을 쳤다는 건지 핵심은 언급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핵심을 모르고 남들따라 목소리만 높이니 무식하단 소릴 듣는 거죠.

2014년에 크게 화제가 되었던 모뉴엘 사기 사건을 소재로 삼아, 이 책은 해당 파트에서 "매출 채권의 회계 처리 방식이 어땠기에" 그토록 회사 가치가 널뛰기를 하고 난다긴다 하는 금융기관의 담당자들을 감쪽 같이 속여 사기 대출을 받아내었는지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 이걸 읽고 그대로 따라들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기우인 게, 이미 수법이 널리 알려진 건 재탕이 당연히 어렵죠. 반면 누가 유망하다며 주식 투자를 하라고 꼬드기거나, 사장님한테 와서 지네 회사 괜찮다고 파트너십을 권유하거나 할 때 이게 빈껍데기 허당인지 뭔지 알려면 이런 "매출 채권" 처리 방식이 뭔지를 알아야 누구한테 당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도, 최소한 억울한 피해를 못된 놈들에게 입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식으로 무장하고 내공을 다지는 길밖에 없다는 점 다시 확인이 됩니다.

사실 "매출채권"뿐 아니라 모든 거래사건(이런 말을 씁니다)이, 자산, 부채, 자본, 수익, 등 8개 항목 어디에 배치를 하는지가 회계의 핵심 관건이며 회계사의 역량을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이걸 공정타당한 준칙에 의해 처리하면 윤리적 기업이고, 규정의 허점을 이용해서 남 못 보는 구석에서 장난을 치는 게 분식회계입니다.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뭐가 그 회사의 "재산(회계용어는 아닙니다)"인지 그저 "빚"인지 명쾌하게 구별이 잘 되질 않습니다. 회계용어 "자산"은 일상용어 "재산"과는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자산 대변"의 모호한 영역에는 정말 별의별 게 다 들어가고, 이걸 알아볼 능력 없는 이들이 사기꾼에게 당하는 거죠. 또, 별 확실성이나 근거가 없는 항목을, 그저 회계에 무지하다는 이유로 꾸역꾸역 자산으로 계상하는 기업들이, 이후 세무 당국에 의해 형편에 비해 크게 불리한 처분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 알려면 그 중요한 관전포인트 중 하나가 금융사고, 회사 도산 따위가 어떤 경로로 벌어졌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지금은 정치나 군사 정변이 일반인들의 삶을 바꿔 놓는 주된 요소가 아니라, 경제 섹터 중요한 곳에서 무슨 변동이 일어나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세상입니다. 누가 떳떳지 못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면, 그 흔적은 범죄 현장의 DNA처럼 장부에 그대로 남습니다. 회계야말로 경제의 운용상과 실체, 미래의 전망까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청사진이나 타임라인과도 같습니다. "실무"와 "시사"와 "화젯거리"와 학문으로서의 회계를 이처럼 예술적으로 접합시킬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할 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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