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아탈리의 긍정 경제학 -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한다
자크 아탈리 외 지음, 권지현 옮김 / 청림출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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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긍정 경제"가 대체 뭘까요? 자계서에서 흔히 주장들 하는 것처럼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라.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한다" 같은, 너무도 흔하고 뻔한 내용에 질린 독자들은 저 "긍정"이란 단어만 듣고도 지레 손사래를 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가 이 신저에서 대단히 체계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인 의도(무슨 뜻인지는 서평 후반에 설명하겠습니다)로 전개한 맥락에서의 "긍정" 혹은 '긍정 경제'는 그런 것들과는 사뭇 다른 빛깔을 띱니다. 첫째 담론의 초점이 개인을 넘어 최소 개별 국가(대개는 프랑스를 염두에 두었지만, 우리 한국에 직접 적용할 것들이 많습니다)를 염두에 두었으며, 둘째 진보적이고 포용적인 세계관에 바탕한 논의이며, 셋째 그러면서도 개인과 정부, 국제 단체가 곧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프로젝트와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대석학들의 책에서 간혹 당혹스럽거나 때때로 짜증스럽게 다가오는 대목은, 고아하고 심오하지만 추상적인 어휘로 일관하여 결국은 읽는 이가 무엇을 당장 가까운 현실 속에서 행동에 옮길 지 감을 못 잡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 책도 그런 단점이 전혀 없지는 않고, 특히 국제 정세의 향방이라든가 패권의 소재에 대해 막연하면서도 흔한 진술을 장식처럼 남기신 대목이 있긴 합니다. 추상적이라고 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소재와 대상, 글의 형식에 따라 낄 자리 안 낄 자리가 따로 있다는 이유에서지요. 이 책은 여전히 "긍정"의 개념이 이론적으로 명쾌히 제시되지는 못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지만, 대신 저자가 뭘 말하려 들었는지는 어떤 독자라도 납득했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긍정 경제"에 대해 정치한 개념 제시를 했더라도, 논의의 방점이 "실천"에 놓인 이상 또다른 형이상과 추상의 장에 큰 정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긍정 경제"는 현존 개념 중 가장 가까운 것을 끌어대자면 "사회적 책임(사회학을 넘어 경영학 개념이죠)", "연대", "환경적 가치", "지속가능한 발전" 등을 다 포괄하는 것입니다. 그럼 새로운 게 없지 않은가. 제 생각으로는 1) 그 모든 기존의 지표를 더 큰 상위 개념에 묶은 것으로도 일단은 주목의 가치가 있고(앞으로 많은 학자들이나 운동가들의 지지를 얻을지는 두고 봐야 하겠습니다만) 2) 이른바 성장의 한계라든가, "제로 성장"을 전제로 한 모든 논의와 책 속에서 분명히 선을 긋는다는 게 분명한 특징입니다. 즉, 저자 자크 아탈리는 "앞으로도 성장은 계속되어야 하며, 실제로 성장의 동력은 발견 중에 있다"는 주장입니다.

자크 아탈리의 새로운 관점에서 "긍정"은 "낙관"을 포함합니다. 이 책 서두에는 1972년 그 유명한 로마 클럽 보고서를 자주 거론하는데요. 이 책이 의도하지 않게 후세와 당대에 끼친 부정적(평범한 의도로 썼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좀 다르게 다가오네요) 영향이라면, 이제 인류의 번영과 성장은 그 한계에 다다랐으며, 그 미래는 암울하다는 쪽으로 잘못 선입견을 새겨 두었다는 겁니다(저자에 따르자면). 해당 보고서는 지금의 추세로 자원을 소비하면 가까운 미래에 남아날 것이 없다"는 경고였지, 인류가 이대로 아포칼립스를 맞으리라는 불길한 예언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또, 만약 해당 로마 클럽 보고서를 그렇게 새긴다면, 이 책 역시 대단히 역설적이게도 "부정 경제, 부정 미래"를 예고하는 이상이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물론 저자의 의도가 정반대편에 있음도 명백하고 말이죠.

"긍정"은 그런 의미에서 조건부 긍정이고 조건부 낙관입니다. 인류는 번영을 계속해야 하고, 성장 역시 (이 책 후반부에서 구체적으로 제안되는 것처럼) 지속될 수 있고 지속되어야만 한다는 쪽입니다. 다만 저자가 전제로 삼는 바는 "개인적, 소모적 탐욕, 제로섬 게임 전제의 모든 룰을 타파"하고 나서야 이 모든 긍정적 낙관적 전망이 가능하다는 거죠. 저자의 주장이 추상적이고 공허한 도덕 담론으로만 다가오지 않는 건, 이 책에서 인용하거나 근거를 둔 방대한 사례와 통계 자료 덕분입니다.

저자는 "예언, 예측"을 하는 게 아니라, (이게 중요한데요) 이미 세계 경제 각 섹터에서 현저히 그 조짐이 드러나는 중인 "긍정 경제의 씨앗"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합니다. 일방적인 기대가 아니라, 이미 "긍정 경제"는 생존의 바른 길을 찾으려는 종(種)의 필사적인 노력에 의해 실체가 드러나는 중이라는 뜻입니다. 종은 시행 착오를 통해 바른 길을 언제나 발견하며(못하면 멸종이죠), 8년 전 서브프라임 위기 당시 조급한 이익 회수 욕구, 원칙을 벗어난 투기 붐 과열로 뜨거운 맛을 본 인류는, 어느정도 정신을 차리고(최소한 그 일부는요) 이 방법이 안 통하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각성했다는 거죠. 이 역시 어떤 도덕적 각성, 윤리적 성숙이라기보다(물론 그런 면도 당연히 있지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이 그런 각성(각자도생보다는 협력이 살 길이다)을 일깨운 것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처음부터 협업과 팀웍을 통해 진화의 승리자가 된 종이기도 하겠고 말입니다.

저자는 그전부터 과도한 유동성의 폭주가 결국 경제의 탐욕과 불건강성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리버럴 스탠스의 케인지언들과도 일정 선을 그어 온 학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통화주의자들(이 책에도 밀턴 프리드먼의 재미있는 인용구가 나와 보면서 웃었습니다만)과의 세계관과는 (당연히)정면으로 대치한다는 건 또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백 년을 버틴 금융기관이 어떻게 단 몇 년 만에 무너지는가? 사실 책에는 안 나와도 이는 지난번 봇물이 터지기 전에도 이미 1995년 베어링스 도산 사태때 예고되었던 바입니다(그거 한 번 언급하셨으면 좋았을 건데). 규제를 푸니 당장 돈이 몰려들어 좋긴 한데, 분별없는 직원이나 클라이언트들이 재미를 들여 한 발 한 발 선을 넘다 대형사고를 친 거죠. 이제 배울 만큼 쓰디쓴 교훈을 충분히 배운 사람들이, 자신도 파괴하고 남도 못살게 만드는 미친 레이스를 중단하고, 합리적 협업과 연대의식으로 전략의 새판을 짤 때가 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역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처음에서 인용하는) 애덤 스미스의 그 유명한 비유와 도그마가 시공을 넘어 접합점을 다시 찾습니다. 저자의 의도는 "나 역시 스미스와 다른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쪽입니다.

저자의 의도에는 다분히, 종래의 살인적 경쟁이 "긍정과는 거리가 먼 부정적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단정이 깔려 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라 돈 좀 벌겠다는데 나무 좀 자르면 어떻냐, 강물에 폐수를 풀면 어떻냐, 온실 효과 근거 없는 소리 아니냐, 애들이나 부녀자들 공장에서 착취한다 한들 시장 원리가 그런데 어쩌란 말이냐, 이런 마인드가 결국은 기업주 자신의 양심도 침해하며, 기업주 개인의 후손들이 여전히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할 지구를 망친다는 점에서 자해 행위라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많은 자계서와는 달리) 그런 약탈적 자본주의가 긍정이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 책의 압권은 제6장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레닌의 유명한 논문 제목이 아니라도, 저자는 독자들의 갈증을 선제적으로 채워 주기 위해 무려 45가지의 제안을 합니다. 이 중 일부라도 각국 정부와 국제 단체가 실천에 옮겨 보라는 것이며, 자신 역시 선구자들의 실천에서 영감을 받아 정리한다고 합니다. 석학의 책에서는 다소 보기 드문 형식과 편제이며, 우리 독자도 개인 차원에서 중앙 정부나 지자체에 청원하거나, 일상에서 작은 실천에 옮길 만한 것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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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재 이상설 평전 - 독립운동의 선구자
김삼웅 지음 / 채륜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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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재 이상설 선생의 존함은 교과서나 성장기 필독서 위인전 등에 자주 나옵니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를 고종이 파견했을 때, 세 분의 특사 중 한 분이기 때문이죠. 현지에서 순국한 분은 이준 열사이지만, 보재는 회의장에 참석하여 불법적으로 국권을 강탈당하기 직전이던 우리 민족의 입장을 성명으로 표현하려 했던 역할이었습니다.

뿌리 깊은 양반 집안의 후손인 그는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일찌감치 벼슬길에 접어들었습니다만, 하필 시국이 망국으로 치닫던 판이니 젊은 엘리트가 편안히 청운의 꿈을 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방관으로 임용되는 경로보다는 주로 학예의 부문에서 자신의 기량을 펼쳤던 그는 공맹의 법도도 법도지만 거대한 서세동점을 이끄는 제국주의 세력의 배후 실력을 이루는 문명의 힘이 무엇인지에도 관심을 끈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자질이 총명했던 그는 낯선 서양 문물을 소개한 책들을 어렵사리 구해 읽고 무엇이 요체인지 곧 깨달아 이를 후학들에 교습 전파하는 데 역량을 쏟았습니다. 아무래도 그의 적성은 행정이나 실무 보다는 순수 학문의 연구 쪽이었기 때문이겠습니다.

보재의 선구자적인 면, 혹은 지행합일의 인격자적 측면은 여기서 잘 드러나는데요. 시국이 극도의 난맥상에 빠지고 일제의 한반도 우세가 시시각각 현실로 굳어지는 판에, 명분도 실리도 없는 관직을 더 이상 쥐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민족과 대의명분에 헌신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영의정직까지 올랐던 그이지만, 망국의 설움이 현실이 되어가는 정국을 보고 따뜻한 아랫목만 보전할 생각이 그에게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기 전, 이미 그는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한 후, 이의 공개 파기를 황제에게 권했습니다. 성격이 곧고 단호한 그의 일면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부분인데요. 이런 행동은 일제의 눈에 크게 거슬러 일신상의 위험도 당할 수 있는 행동이고, 무엇보다 고종에게 부담을 안기는(그러나 타당한) 신하로서의 충언 충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소신으로 확정된 바를 거리낌없이 행동으로 옮기고 일단 과단성 있는 행동이 이뤄진 후에는 추호의 후회도 품지 않는 그의 면모는, 우리가 동양 고전에서 익히 읽어 오던 지사, 열사, 충신, 의사 들의 행적과 조금의 차이도 없습니다. 그는 공맹 이래 유가의 지식인이 걷곤 했던 노선에서 조금도 이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배우고 익힌 바가 인격의 화체, 실제의 행동으로 이처럼 그대로 옮겨지는 그의 풍모는, 국권 상실 후 자연스럽게 뜻있는 이들이 그의 휘하에 모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선생은 이후 주로 노령에서 그의 주된 기반을 잡고 애국 활동을 전개했는데요. 아무래도 그의 배경이 배경이니만치 "애국 계몽 운동"적 노선이 주된 모습이지만, 임시 정부에 가까운 공권적 단체를 결성하여 "멀지 않는 장래에 국내 진공"을 목표로 삼은 그의 모습에선 종합적 우국 지사의 다양한 면모가 고루 드러납니다.

저자는 그런 평가를 내립니다. "해방공간에서 보재 같은 이가 정치활동의 중심에 섰다면 우리의 정치사는 사뭇 다른 방향을 틀었을 것이다." 이는 연륜으로 보나 거친 관직의 높이로 보나 보재 정도의 배경을 가진 지도자(사실 이승만보다 6,7년 연상이므로 물리적 생존이나 정력적인 활동이 가능했을지는 의문이지만)라면 민족 정기를 보다 중시하는 진영이 큰 동력과 구심점을 가졌으리라는 기대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3. 1운동에 2년 앞서 서거했는데요. 그 최후의 모습도 면암 최익현이나 기타 충의지사가 자발적으로 맞이하던 양상과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빼어난 자질과 단심을 지닌 지도자들이 항일 국면에서 이처럼 빨리 사라진 것도 우리 민족과 국운을 위해서 안타까운 요소였다고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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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를 대비하라 - EU 집행이사회 조명진 박사
조명진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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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죠. 사실 돈은 거짓말도 안 할 뿐 아니라 오판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개인의 돈은 잦은 실수를 범하지만, 간절히 이익을 바라는 마음과 마음들이 합쳐진 대세는 대개 미래를 정확히 맞힐 뿐 아니라, 심지어 미래를 형성하기까지 합니다. 브렉시트가 언론과 학계의 (희망섞인) 바람을 정면으로 배반하고 국민투표에서 가결되었을 때 시장은 처음엔 혼란상을 보였지만, 이후 차차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이는 시장(곧 "돈")이 바라본 미래가 그리 불안정하거나 비관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후 브렉시트 변수는 그보다 큰 폭으로 장을 흔든 다른 사건들과 뒤섞여 무엇이 그 순수한 효과인지 알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는데, 여기서부터는 전문가의 진단이 필요하죠. 그것도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사실 다른 배경색 때문에 혼란이 유발되는 불리한 점 없이 "그것만의 순작용"을 캐치하려면 초기에 정밀한 관측을 반드시 해 내야만 합니다. 조명진 박사님의 이 책은 그런 관측자들, 혹은 이후에라도 대세를 정확히 추적하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좋은 지침을 마련해 줍니다.

작금의 세계적 대세는 globalization이 아닌, (책의 표현대로) 국수주의 유사의 어떤 것입니다. 딱히 국수주의라고 규정하기도 어려운 게, 일단 흐름을 이끄는 지도자가 분명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무엇을 주장하기보단 현재의 대세에 저항하는 "소극적"인 흐름이며, 결정적으로 이런 움직임이 그리 장기적인 추동력을 가질 것 같지 않다는 이유에서입니다(물론 어디까지나 희망섞인 추측이지만). globalization이 불과 20년전만 해도 세계의 미래를 완전히 결정지을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여겨졌는데 이처럼 가까운 시점에서 커다란 장애물을 맞을 줄은 아무도 예상 못 했을 겁니다. 아직도 학부 교과서(분야 불문)는 globalization을 대전제로 삼고 각론을 전개해 나갑니다. 이제 어린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까지 수정이 이뤄져야 할 국면일까요? "브렉시트"는 그 자체로 의미심장한 사건이라기보다, 향후 이를 계기로 전체의 국면이 완전히 바꿔질지 그 상징성을 놓고 붙는 타이틀에 불과합니다. 이 책도 그런 분석과 예측이 내용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럽의 통합은 원래 보수당(영국의 그 정당뿐 아니라 각국의 우파를 대변하는)에서 주도하던 것입니다. 미국이 단일 시장, 거대 영토, 축적된 자본으로 세계의 패권을 쥐어 가자, 자신들도 종래의 각개 약진상을 유지해서는 가까운 미래에 도태되리라는 절박감이, 특정 산업의 효율화(석탄, 철강 기반)라든가 "단일 시장의 형성"을 일단 목표로 만들기 시작했었죠. 노동과 자본을 싼 값에 이용하려면 이런 자본가측의 단일 대오 형성이 시급한 과제였고, 분명한 전망을 할 수 없었던 노동자측은 이에 저항하는 게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현 영국 노동당 당수 코빈 같은 사람). 그러던 게 주로 수정주의자, 혹은 지식인 좌파를 중심으로 "차별 없고 국경 없는 연대와 평화"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었고, 일정한 정책적 양보 끝에 우파가 노선 일부를 수정함으로써 양측이 합의에 도달, 항구적인 동력을 얻기에 이르렀죠.

좌우 양쪽이 공감하는 정책이 왜 이런 저항을 맞고 있는가? 저자는 명쾌하게 두 가지 논점을 듭니다. 하나는 이민자 감소, 다른 하나는 알지도 못하는 먼 곳에 사무실을 두고 결정을 내리는 관료제에 대한 반발입니다. "이민자 감소"같은 이슈가 이 소동의 중심에 선 걸로 보아 현재의 움직임이 어떤 이념적 기반까지를 지닌 건 아닌 게 확실하며, 이 때문에 "포퓰리즘" 같은 일시적 변덕이나 집단 감정 표출 정도로 격하하는 쪽도 있는 것입니다. EU 출범의 목표 중 하나가 단일 노동 시장 형성을 통해 인건비를 절감하자는 쪽에 분명히 있었던 만큼, 이제 국경 철폐가 명백한 현실로 다가온 지금 특히 노동자층이 가부간에 분명히 무슨 의사표시를 할지가 표면화되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노"를 투표로 표명했고, 아직까지는 개별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해야 할 체제의 룰에 비추어 이는 존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 명백한 "임기응변"식 대응을 현재까지는 보이는 트럼프도, 자신을 찍은 자국의 개별 노동자들의 "긴급하고 당면한" 요구에 부응하는 모습이 분명해 보입니다. 미국 역시 이주 노동자 문제 때문에 심각하게 골치를 앓는데, 이는 멕시코와의 엄존하는 국경이 아직 철폐되지 않았는데도(nafta는 장기적으로 이를 추구합니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라틴인들 때문에 촉발되었고, 하루이틀 지속된 문제가 아닌 만큼 단칼에 해결되기는 매우 어려우며 무엇보다 미국의 자본가들이 이를 암암리에 반기고 있습니다. 빌 클린턴 행정부 당시 재닛 리노가 불법이민자 여성을 베이비시터로 고용한 데서 크게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듯, 이미 뚜렷한 현실을 형성한 "불법"을 마냥 방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거 추방이나 방벽 건설(그것도 상대국 부담)으로 밀어붙이기도 매우 어려운 현실입니다. "브렉시트"와 직접 관계가 없는 미국의 사정도 현재 이런 판입니다.

미국은 불법이민자를 국외로 추방하고, 영국은 "국민의 뜻에 따른 이혼"을 감행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요? "브렉시트"로 촉발된 국수주의가 지속성을 못 가지는 이유는, 이런 일시적 과거회귀 움직임이 더 많은 사회 문제, 경제난을 낳을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영국은 거대 시장에서 고립된 후 과연 누구와 경제 파트너십을 새로 쌓아야 할까요? 해가 지지 않던 식민 영토도 다 잃은 판에 말입니다. 영국산 물품에만 관세가 높이 붙으면 어느 나라에서 이들 상품을 사 주겠으며, 보복으로 관세 장벽을 높인들 고충을 겪는 건 자국 노동자층입니다. 결정적으로 심각한 건 기업들이 아예 EU로 본거지를 옮기려 드는 경우입니다. 트럼프처럼 일일이 정치인들이 나서서 딴지를 걸거나 협박을 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저자께서는 달러의 장래가 불투명하므로, 향후 강세를 보일 전망이 있는 타국의 통화로 품목을 분산한 투자 전략을 짜는 게 중요하다고 합니다.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때 금값이 등귀하고 시장이 혼란스런 움직임을 보였을 때 전문가들이 내놓은 조언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게다가 저자는 EU의 약화가 곧 NATO의 약화로 이어져,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 전체에서 중국의 패권국 역할이 커질 것으로 전망합니다. 이렇다면 외환 품목 다변화의 요구가 무엇을 암시하는지는 비교적 명확히 드러나죠. 중요한 건 한 가지 노선에 고지식하게 얽매일 게 아니라, 수시로 급변하는 세계 정세를 잘 살펴 현명하고도 정확히, 빠르게 대응하는 융통성이라는 게 저자의 충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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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
도재기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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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는 겨레가 지난 역사 동안 일궈낸 소중한 문화적 성취를 집약하여 담아낸, 선조와 후손이 물건으로 만나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존재(그것이 미물이든 고등 생명체이든)라 해도 근원, 뿌리가 없이 무(無)에서 솟아난 실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가깝게는 몇 대의 직계 존속, 멀리는 내 주변의 거의 모든 이웃을 한 씨앗과 밭에서 틔워 낸 아득한 조상님들까지, 나보다 시간적으로 앞서는 어떤 고마운 분들의 앞선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들이 힘찬 활력으로 현재를 채우며 사는 것이지요. 그런 고마우신 조상님들의 은공을 매 순간 되새기며 개체의 책임을 느끼고 성실한 발돋움을 이어가려면, 영광 혹은 간난에 가득찬 지난 역사를 숙연한 마음으로 돌아보는 것보다 더 좋은 자극이 없을 것 같습니다.

반만 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배달 겨레라고는 하지만, 그 장구하고 내실 있는 내력에 걸맞을 만큼 많은 유물, 문화재가 현재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전해내려온 것들만으로도 이미 세계 어디에 내놓기 충분하게 자랑스럽지만, 외침과 환란이 많았던 시련의 시기가 짧지 않았던 탓에 멸실, 훼손된 예가 많아서입니다. 이런 아픔 많은 시련을 딛고 현재까지 전해진 소중한 국보들에 대해서마저, 후손된 우리들이 과연 합당한 경건함과 자발적 관심으로 유형, 무형의 대접을 베푸는지는 의문입니다. 문화재청에 의해 "국보"로 지정된 품목들 중, 과연 몇에 대해서나 정확한 이름과 내역, 소재지 등을 댈 수 있을까요? 이는 주입식 암기형 지식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애정과 경외감, 적절한 존경심을 품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기본 소양입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조상님들의 은덕과 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국보들의 실제 모습, 소략하나마 그 내역에 대한 이해가 절로 마음 깊은 곳에 이뤄져 있을 법합니다.

국보는 그 정확한 명칭, 소재지, 연혁에 대한 파악이 이뤄진 후에야 합당한 경외감이 품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건전하고 보편 타당히 받아들여지는 역사관, 오류 없는 역사 지식, 종으로 횡으로 면밀히 구축된 입체적 이해 등이 선행되어야 하겠습니다. 저자 도재기 선생님이 방대한 자료 수집과 현지 답사 끝에 오로지 "국보" 하나에 초점을 주고 저술하신 이 책은, 정말 잘 쓰여진 책 한 권으로 문화재에 대한 입체적 이해의 기초를 놓는 게 가능하다는 벅찬 느낌을 독자에게 안기는 명저입니다. 역사를 알면 국보를 모를 수 없고, 또한 국보를 정확히 이해하면 바른 역사의 주축을 파악할 수 있다는 선명한 교훈을 다시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혹 지나치게 유물 중심, 문화재 소개 중심으로 이뤄진 편제라면 "자료집" 이상이 못될 수도 있겠는데, 이 책은 진취적이면서도 실증적인 사관으로 조망한 한국사의 본줄기까지 심도 있게 다루어서 넉넉히 "역사책"을 읽는, 그것도 묵직한 전문서를 읽는 만족감까지 진지한 독자에게 선사합니다.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과연 미술사학자, 고고학자와 도굴꾼의 유의미한 차이점이 무엇인가?" 같은 대사를 듣곤 합니다. 어떻게 순수한 열정, 학문적 관심사를 갖고 민족이나 인류의 공영을 위해 일하는 이와 범죄자를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을까 하고 당연히 반발감이 들 수 있습니다. 헌데 다른 분야도 아니고 문화재 도굴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은, 순수 학자나 전문가들 못지 않게 대단한 지식과 정보를 갖춘 경우가 많습니다. 책 처음이 "끈질기고도 아픈 도굴의 역사"에 약간의 비중을 두고 시작되는 이유도, 언제나 문화재 당국이나 뜻있는 학자들보다 한 발 없어 보물들에 손을 쓰는 이들의 집요한 술수와 책략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저자께서 이 화제를 구태여 꺼내신 뜻은, 그만큼이나 국보를 체계적으로 관리, 보존하려는 우리 후손들의 노력에 아쉬운 점이 많고, 지금 이순간에도 어느 떳떳지 못한 검은 손에 의해 소중한 문화재가 훼손될 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함이겠습니다. 알아서 잘 되고 있겠거니, 나와 상관 없는 일이거니 모두가 안이한 마음을 품는 풍토 속에서 의롭지 않은 일부의 잇속만 채워질 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할 것 같네요.

이 책의 뛰어난 점은 단연 1) 망라적인 사항 소개(누락된 항목이 하나도 없습니다) 2) 단편적인 정보 정리가 아닌 체계적인 역사 맥락 속에서의 서술 3) 금전가치로의 환산이나 속물적 왜곡이 아닌, 올바른 민족 정기가 함양된 관점으로서의 고미술사 이해 4) 최고급 인쇄에 바탕을 둔 유효적절한 도판 첨부 등이겠습니다. 관리의 편의를 위한 번호순에 따른 설명이 아님은 물론이며, 통설적 견해에 따라 이뤄진 시대 구분에 근거하여 통시적 맥락 속에서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학문적 편집이 돋보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인들이 그토록 왜곡, 은폐하려 애썼던 청동기 시대(그 이전도 마찬가지입니다만)의 유물 중 대표적인 "정문경"에 대해서, 이것이 실제 소지자의 얼굴을 살피는 용도로 쓰였을까 하는 매우 소박한(그러나 상식적인) 의문을 독자의 눈높이에서 일일이 떠올려 주며, 그에 대해 통설적 입장에서 유익하고 권위 있는 답을 내려 주는 식입니다. 문장이 쉬우면서도 장별 체계와 구조에 부합하는 해설이라서, 해당 장을 읽고 나면 아 정문경이 우리가 아는 무슨 시대 무슨 범주에 속하는 국보다, 소재지는 숭실대 박물관이다 같은 사항이 독서 후 자연스럽게 기억에 남습니다. 학창 시절 문화재 소재와 대략의 생긴 모양을 익혀 두고 이를 지도 등과 연결시키는 국사 문제 출제 경향에 골치깨나 썩인 이들이라면, 이 책 한 권으로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겠네요.

임신서기석은 유명하긴 해도 국보가 아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국보/보물 등이 어떤 기준에 의해 구분 지정되는지는 이 책 처음에 저자께서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임신서기석이 어떤 연혁을 갖는지 정확히 알려면 법흥왕~진흥왕 연간에 한창 제도가 정비되던 화랑제도에 대해 살피지 않을 수 없고, 문화재(선명한 사진과 함께 설명되는)가 역사 속에서 갖는 살아 숨쉬는 맥락을 독자는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거죠. 저자가 아쉬움을 표시하는 건, 삼국 간의 항쟁에서 최후의 승자로 남았던 신라의 유물만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전한다는 현실입니다. 미륵사지 석탑 같은 건 극히 드물게 현전하는 백제의 유물이며, 이의 해체 보수 과정에서 놀라운 유물들이 추가로 발견된 건 학계뿐 아니라 민족 전체의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또한 풍납토성 유적지 발굴 관련, 주민들과 정부 당국, 학계의 입장이 일일이 대립하며 큰 갈등을 빚는 데 대해 우려를 표명합니다. 우리 독자들이 이 점에 주목해야 할 이유라면, 결국 민족 공동의 유산인 문화재 관리와 보존 정책에 대해 최상의 중지(衆智)를 모을 필요가 절실하다는 점이겠습니다.

연가칠년명 금동 여래 입상은 역시 학창 시절 그 긴 이름을 외우는 수고가 컸기에 많은 이들이 귀에 익을 만한 문화재겠는데요. 저는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만 "연가(7년)"라는 연호가 현전 사서 어디에도 교차검증이 안 되는 사항이라는군요. 역시 문서상으로 전하는 1차 사료가 대단히 희귀한 한국사의 안타까운 현실을 잘 드러내 보이는 대목이겠습니다. 저자가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역사 연구와 문화재 관리야말로 남북 당국이 반드시 지혜와 물적 자원을 한데 모아야 할 공동 과제라는 것입니다. 광개토대왕비문 화제를 두고서는, 강점기에만 해도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연구 대상에 접근 자체가 어려웠던 참혹한 현실을 상기하며, 현재에도 중국측으로부터의 동북 공정 시도 등 잠재적 위험 요인을 감안하면 하루라도 빨리 남북간 협력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두가 공감, 동의하면서도 실천에 옮기기가 어려운 안타까운 대목입니다.

청자, 백자 등 자기의 생산은 대륙과 대양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진 세계에까지 "고려"의 이름을 알린 중요한 문화사적, 경제적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역시 의무교육 과정에서 지루한 암기 사항으로만 다뤄질 뿐, 우리의 정서와 공통된 상식, 민족 감정에 공명을 줄 만한 지식으로 다가오질 못했지요. 국보, 보물 중 상당수가 이 도자기 유물이며, 세계 어디서도 그 독창적인 개성과 매력을 흉내내기 어려웠던 우리만의 제조 비법이 무엇이었는지, 저자는 일반 독서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쉽게 풀어 줍니다. 혹 재테크(..) 수단으로 도자기류의 유통과 투자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 책을 읽고 그 기초 소양을 쌓을 수도 있겠습니다.

미술품 역시 국내 애호가들 사이에서 형성된 시장의 볼륨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수준이며, 도대체 현대 화법과는 기본 전제부터가 다른 과거의 작품들이 어떤 이유에서 고평가, 혹은 도외시되는지 납득하려면 일단 그 창작 배경이 된 역사를 천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국보뿐 아니라 보물로 지정된 각종 중요 초상화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는데요. 강민첨 장군(귀주 대첩의 또다른 주인공), 회헌 안향 등의 초상을 담은 숱한 묵화들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그 뒤에 숨은 내력을 소상히 들려 줍니다. 역사를 알고 읽으면 더욱 재미 있으며, 이 책을 읽고 처음 배우는 역사 사항이 아마도 다른 책들로 더 깊이 있는 연구를 이어갈 때 든든한 발판이 되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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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나폴리 4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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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맨부커상을 받는 쾌거를 통해, 한국인이면서 좀 게으르거나 불성실한 독자들에게(물론, 전세계의 뜻있는 독자들에게도) 확실히 자신의 이름과 작품 세계를 각인시킨 한강 작가님(아는 분들은 이미 십여년 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통해 다 알았지만), 그리고 이 두꺼운, 연작의 두번째 마디로 우리 한국 독자들과도 치열하고 행복한 소통을 이룬 엘레나 페란테, 이 두 분은 제 생각에 참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대하소설에 가까운 "나폴리 4부작" 중 두번째 권입니다. 첫째 권도 워낙 좋다고 권하는 지인(주로 여성들이었지만)들이 많아서, 이제 이런 쪽에선 나올 이야기가 다 나오지 않았냐며(사실 가당치도 않은 소리죠) 시들했던 저 같은 독자도 (또, 출판사의 휘광도 있고 해서) 이미 몇 달 전에 찾아서 읽어 봤습니다. 질곡 많고 민중의 상당수에게 큰 아픔을 안긴 현대사의 가까운 지점들을, 소설 형식을 통해 가상의 주인공(그러나 꼭 가상만은 아닐)들을 등장시켜 쓰라리고 고통스럽고 죄책감과 절망의 수렁에 빠져들고 마침내 건강한 각성과 카타르시스를 안기는 시도는 여러 역량 있는 작가들에 의해 이뤄져 왔습니다. 과거에는 윤정모 작가님 같은, 거의 자전적인(그래서 더욱 독자가 고통스러운) 소설 등이 대표적이었겠고, 이런 여성 작가들은 대개 시대의 모순을 이중삼중으로 자신의 내면에 아프게 새기게 될 여성 주인공들을 앞에 내세워 세계의 거울과 평행우주를 구축합니다.

1권도 그랬지만 이 2권에서도 반드시 무슨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이 배경을 이루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선량한 개인들, 이웃과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고 아름다운 인간 본성을 끝까지 지키며 생을 일궈 가려 드는 개인들에게 반드시 대적(大敵)으로 등장하는 게 "폭력"입니다. 이 폭력은 이 소설 속에서처럼 "마피아(시칠리아에만 마피아가 있는 게 당연히 아니죠)"라는, 그 존재 이유와 격렬한 양상을 반드시 "폭력"으로 표현하는 익숙한 실존의 집단으로만 등장하는 게 아닙니다(깡패가 폭력을 휘두르는 건 끔찍할망정 놀랍지는 않죠).

사회의 기저에서 폭력의 행사, 공포의 유발을 통해 정의롭지 못한 권력과 경제적 이익를 챙기려 드는 이들은, 반드시 폭력의 확대 재생산을 통해 개인의 일상과 가장 사적인 평온이 지배해야 할 공간인 가정까지 침투하려 듭니다. 폭력은 정당한 이익의 대가의 귀속을 방해하려 체계 속속들이 꽂힌 빨대와도 같으며, 이 기제에 세뇌된 어리석은 남성들은 가부장의 허울 아래 가장 약한 구성원들에게 체제의 폭력을 대리 행사하는 부품으로 악용됩니다.

여성의 저항은 물리적 조건으로는 이들 수컷의 강력한 폭력에 맞대응하기 어렵기에, 릴라나 레누, 우리의 주인공들은 인간의 내면과 정직한 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의 습득에 매달립니다. 책을 읽고, 정직한 느낌을 교환하고, 나만의 감상과 상념을 글로 써 보고, 남이 아닌 나 자신의 발전과 각성과 절절한 느낌을 명징한 언어로 표현함으로써(물론 이런 활동 중에는 학교 공부도 포함됩니다. 세계의 문명화한 부분과 미미한 개인들의 존재가 합일을 이루려면 그 길은 공부가 가장 유력하다는 게 이런 [좀 아픈]성장 소설에 등장하는 깨인 여성들의 공통된 선택이죠), 그들은 야만적 폭력과 동전의 양면 같은 구조를 이루는 "무지 몽매"에 정면으로 반기를 듭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쪽이나 당하는 쪽이나, 자신이 지금 어떤 거대한 기제 속에서 무슨 노릇을 하는지를 모르기에 자신과 타인(조금도 적이 아닌)을 동시에 파괴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거죠. 이탈리아를 수백 년 전 다녀간 괴테의 말처럼, 폭력에 짓밟히거나 스스로를 폭력 행사 속에 모독하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더 많은 빛이 그 어두운 내면에 비추이는 것"입니다. 이들은 누가 더 주먹을 잘 쓰고, 누가 더 야만 속으로 타락할 수 있느냐로 경쟁하지 않고, 누가 더 지혜롭고 온유하며 타인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느냐로 우열을 다툽니다. 두 소녀가 영혼의 동반자이며 동시에 경쟁자이기도 한 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아내를 죽어라 하고 두들겨 팬 후에야 그 남자가 비로소 남자로 주위로부터 대접받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쪽은 그 남자를 키운 늙은 여인(더 이상 여자라고 볼 수도 없는 음울하고 찌든 폭력배 같은 눈빛을 한)의 입에서, 그녀 역시 과거 한때 가장 적나라한 폭력의 희생자였을, 이제는 왜곡되고 타락한 채 폭력 행사의 말단 대리인 노릇을 하며 자신의 현재와 과거로부터 스스로 유리된, 축출된 영혼이, 대를 물려 제단에 서서 소중한 자아를 더럽히고 강간당하는 희생자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뱉는 저주의 전승입니다. "경계의 허물어짐"은 사실 그리 낯선 동기는 아니겠지만, 멀쑥하고 다정해 보이는 얼굴선이 느닷 무너지고 야수 같은 그 부친의 모습과 표정이 느닷 튀어나오는 스테파노(아들/아버지의 경계 부정)의 행동 묘사 같은 건, 페란테 여사만이 이 연작에서 섬뜩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때의 경계 부정은 변증법적 지양이 아님은 물론이고, 진화와 문명의 성과를 무위로 돌리는 무한 회귀적 퇴행에 지나지 않죠.

이탈리아 남부는 경제적 빈곤, 부의 편재, 전근대적 인습의 횡행, 낙후한 정치 시스템 등 여러 근본 모순을 예나 지금이나 간직한 고장입니다. 그리 먼 과거도 아닌 시점에서 그저 평범하고 행복하게 자라야 할, 이후 숱한 남자, 여자 아기들을 생산하며 세상을 더욱 풍요로운 공간으로 채워야 할 모성(母性)에, 이만큼이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며 사회를 끌고 가는 체제란 정말 못나고 무력하며,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 환경, 어머니 대지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흉물들이란 생각이 들었네요. 여사는 그러나 아픔과 좌절, 눈물과 비통함만으로 주인공의 앞길을 채우지 않습니다. 완성도 높은 성장 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연약한 주인공이 체제와 인습이라는 사납고 야수적인 발톱을 재치있고도 유쾌하게 피해가며 자기만의 발전을 일구고 승리하는 모습은 성별을 떠나 독자에게 성취감마저 안깁니다. 이 역시 어둠을 빛으로 극복하는, 위대한 인간 정신이 위기마다 보여 준 치열하고도 통쾌한 행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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