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머니 -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투자전략, 젊음이 엣지다
패트릭 오쇼너시 지음, 한지영 옮김 / 새로운제안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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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밀레니얼 머니"라고 해서 무슨 뜻인가 궁금해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일단 책을 보면 저자의 의도는 바로 알아챌 수 있습니다. 책 여러 군데에 걸쳐 "우리 밀레니얼 세대는... ~해야 한다, ~가 어울린다." 같은 문장을 거듭 쓰니까요. 한마디로, 밀레니얼 세대에 어울리는 투자 방법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투자 원칙에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 없는, 혹은 변함 없어야만 할 사항들이 있고, 반대로 시대가 바뀌었으니 이제는 지양, 극복되어야 할 폐습도 있기 마련이죠. 이 책은 대체로, 가치 투자라든가, 멀고 길게 보는 건전한 투자의 대원칙을 누누이 강조하는 데에서는 대단히 보수적이고 전통적입니다. 그러나 예컨대 수수료가 싼 인덱스 펀드에의 기계적 투자는 가급적이면 재고해 보자는 식의, 공격적이고 기존의 틀을 깨어 보려는 패기 담긴 충고도 여럿 담겼다는 점에서는, "밀레니얼 투자"가 확실히 다르긴 한가보다 같은 자극도 독자들에게 적잖이 남기지 싶습니다.

"밀레니얼 세대에게 알맞은 재테크라니, 나는 그 세대가 아니라서 관심 없겠는걸?"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밀레니얼 세대라고 해도 이제 적은 나이들이 아니며, 또 모든 밀레니얼 세대가 정말, 같은 밀레니얼 세대인 저자의 조언을 충실히 따르기라도 해서, 어느새 이 책이 쓰인 투자법이 완전한 대세라도 타는, 그저 상식이 되어 버리는 날에는, 역시 혼자 소외되어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세대별로 다른 투자법이 존재한다"로까지 확장 해석할 건 아니라고 봅니다. 다들 이렇게들 해왔으나 비이성적인 관행, 타성에 따랐을 뿐 현명한 투자법이 아니었다고 어느 정도 판명이 된 건, 과감히 떨쳐 버리는 게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는 방법입니다. 살아남겠다는 데 세대별로 무슨 다른 비결이 처방될 수는 없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흔히 "시장에 대항하지 말라"는 금언이 모두를 묵직하게 구속하곤 합니다. 동양에도 "역천자는 망하고 순천자는 흥한다"는 격언이 있긴 합니다만, 체제가 시장의 지배에 따라 돌아가는 작금이라면 하늘이 곧 시장입니다. 적어도 돈을 벌어보겠다고 마음 먹은 이가, 혼자만의 가치를 실현하는 게 아니라 시장에서 승자가 되겠다는 요량이라면, 시장을 거스른대서야 말이 안 되죠.

그런데 저자는 "시장을 이기려면... 시장을 이기려면...." 을 책 여러 군데에서 거듭합니다. 사실 저자의 이 말과, 앞선 금언인 "시장을 이기려 들지 말라"는, 서로 표현이 반대로 되어 있을망정 결국 같은 이치를 깨우치는 말들입니다. 시장 원리와 분위기를 충실히 파악하되, 결국은 남들 버는 만큼보다야 수익률이 높아야 그게 승자이지, 남들 하는 만큼만 하고 레밍스처럼 꼬리물기만 하려면 뭐하러 공부하고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정력과 시간을 쏟겠느냐는 전제에서 나온 말이죠. 그래서 이 책은, 아직은 많은 이들이 낡은 고정관념에 파묻혀 있을 때, 나부터 과감히 합리적인 투자 습관을 몸에 배게 하여, 남들 백만 원 벌 때 일억 원 벌어보자는 투지를 배양하려는 의도라고 봐야겠습니다. 그 뜻이 "시장을 이기려면...."에 함축되어 있는 겁니다.

실제로 이 책은 "나만의 포트폴리오", "차별화한 투자안"을 무척 강조합니다. 개성과 자율, 주체성을 중시하는 신세대의 가치에도 부응하는 컨셉이기도 하죠. 시장에서 승자가 되는 게 중요하지 내가 속한 세대의 기치에 충실하고 않고는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만, 공교롭게도 저자가 겨냥한 컨셉과, 그 권하는 투자의 정석이, 서로 같은 방향이기도 하니 역시 센스에 고개가 끄덕여지긴 합니다.

저자는 책의 제목이 드러내는 것처럼 "밀레니얼 세대"이며, 보통 투자 교리서들이 나이 지긋한 저자들 손에서 쓰여지는 관행에 비추면 확실히 젊은 편이긴 합니다. 밀레니얼 세대 답게, 감추고 싶은 실패도 과감히 책에서 털어 놓는 등, 솔직한 면도 돋보입니다. 책을 펴내며 이렇게 하라는 식으로 충고를 베푸는 이들이 독자에게 거부감을 먼저 덜어내려는 전략일 수도 있으나, 여튼 "허, 한때 이런 실수도 범한 분이 여튼 확실히 각성하셨기에 이 단계까지 올 수 있었겠네?" 같은 느낌은 확실히 들게 하더군요.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대개 서툴고 확신이 없는 축이기에, "나도 할 수 있겠어!' 같은 자신감을 북돋우는 데에도 좋은, 진솔한 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학교를 마치고 바로 투자 전문 기관에 취업했다고 합니다. 사실 한국이라면, 증권맨이나 이 업종 종사자들이 거의 떨치기 어려운 태도가, "혼자 튀지 말고 남 하는 만큼만 하자" 같은 보신주의입니다. 부끄러운 모습이기도 한데, 저자는 그 초년생 시절부터 "당장 단기에는 좀 손해를 보더라도, 길게 보면 이게 맞습니다." 같은 그 나름의 소신으로 열심히 고객에게 권했다고 합니다. 확신이 서 있으니 취할 수 있는 태도이고, 참 부럽긴 합니다만 한국의 현실에서는 매우, 너무나도 힘든 처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망해도 대세 따라 망하면 욕을 안 먹거든요. 남들 다 망할 때 혼자 잘나가면 미래를 내다본 혜안이 아니라 욕을 혼자 먹습니다. 이런 비합리적인 풍조가 지배적이면 결국 같이 파멸하는 수밖에 없겠으니, "밀레니얼"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넘어 무엇이 합리적이고 현명한 방안인지 개인 차원에서 각성이 정말 필요합니다.

얼마 전에 <인플레이션의 시대>라는 책을 읽고 리뷰도 남겼습니다만, 노인층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08년 당시 혼쭐이 나고 나선 안전자산의 가치를 새삼 되새기게 되었죠. 뭐 그런 재앙이 아니라도, 학부 교과서에서조차 투자의 ABC로 가르치는 대원칙이, "위험과 수익률 사이의 상충관계"입니다. 하나를 고르면 다른 하나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단호히 반대합니다. 이 대목이 재미있습니다.

"위험하다는 게 무엇인가? 남들 올릴 만한 수익률에서 한치도 못 벗어나고 매번 제자리만 지키는 그게 바로 위험이다. 쥐꼬리만한 이자만 주고 마는 국채만큼 당신의 미래를 위협하는 게 없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당신은 앉아서 재산을 까먹는 셈이니, 이보다 큰 위험이 있겠는가?"

저자 스스로도 위험을 재정의한다고 밝힙니다. 어떠십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물론 찬반 양론이 극명하게 엇갈릴 겁니다. 저자는 이런 공격적이고 진취적인 투자태도를 두고 "밀레니얼 세대"에 어울린다는 컨셉을 정해 두고 책 한 권을 다 채우는 거죠. 물론 차별화한 포트폴리오를 마냥 예찬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대목에선 ".. 이 역시 차별화한 구성이긴 하나, 그 결과는 참담할 것이다..."처럼 무작정 시장의 발걸음과 반대로 가는 선택은 역시 경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차별화한다는 그 발상만 놓고 보면" 평가할 구석이 있다며 여운도 남깁니다. 저자의 성향이 어떤 쪽인지 확실히  알 수 있죠.

그 외, 기업의 수익이란 얼마든지 "윤색"이 가능하므로, 회계담당자의 "의견"을 볼 게 아니라, "팩트"인 현금흐름에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며 공시사항의 허와 실을 분명히 가려 살필 것을 주문합니다. 당연하고 또 타당한 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당신은 몇 달 단위, 혹은 1년 단위로만 당신의 성과를 평가할 것인가? 단기 TERM에서 전투의 승자가 된 후, 정작 긴 전쟁에서 실속 없는 패자가 되어도 좋단 말인가?" 같은 반문을 제기하며, 2, 30년 단위로 길게 보고 투자의 성패를 평가하라는 주장은 물론 백번 옳습니다. 하지만 많은 밀레니얼 세대의 경우, 아직 그런 여유를 가질 만한 자산 축적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기에, 너무 다그치듯 권한다면 설득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여튼 저자의 개인적 체험담(정글에서 맹수를 잡은 사냥꾼 슈퍼의 이야기부터 해서)이 재미있게 곁들여졌고, 대체로 자신의 확신을 담은 진솔한 충고이기에 참고할 바는 많다고 봅니다. "위험"에 대해서는 그러나 독자 개인이 자신의 처지와 성향을 잘 고려한 후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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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를 읽다 - 빈센트 반 고흐 편지 선집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기고 엮음 / 레드박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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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나 수필이 불특정 다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과 달리, 편지나 서간 문학은 일단(원칙적으로) 분명한 청자를 염두에 두고, 비공개로 쓰여진 글입니다. 서간 문학 중에는 가상의 수신인을 설정하고 쓰여진 것도 있으나, 여튼 상대를 향한 절절한 마음이나 진정어린 정서는 물씬 배어나게 마련입니다. 이런 편지에서는 글쓴이의 성향이나 개성뿐 아니라, 이 편지를 받는(받았던) 사람은 누구였기에 이토록 유려하고 아름다운 고백, 소통의 대상이 되었을까, 혹은 준열한 분노와 항의가 향해졌을까 같은, 추측과 상상과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예술가들은 대개 작품으로 말을 하기에, 비(非)언어 예술 창작에 종사했던 이들이 남긴 글을 엿보는 건 특히나 흥미롭습니다. 그 중에서도, 반 고흐(판 호흐)처럼 기행(奇行)과 극단적 선택으로 일관한 천재의 삶은, 과연 그가 "발병"하지 않은 차분한 일상과 평정한 정신을 유지할 때는 어떤 상태였는지에 대해 유력한 단서를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 고흐처럼 치열한 내면의 갈등을 겪었고, 피곤할 만큼 사색에 몰두한 정신적 편력가였으며, 지나칠 만큼 영혼의 순결을 추구한 인물이 능숙한 문장가이기까지 했다면, 또 서신을 받은 상대방들이 대개 그가 각별한 애정을 품은 인물들이었다면, 그가 남긴 이런 기록들이 더욱 궁금해질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우 오히려 일기보다 바른 말을 하는 게 편지들입니다.

고흐는 생전에 워낙 방대한 양의 편지를 썼고 그 중 상당수가 운 좋게도 오늘날까지 전해지기에, 우리는 그의 작품에 매혹됨과 동시에 그 작가적 배경까지를 마음 놓고 캐어 보는 멋진(한편으론 가슴 아픈)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화여대를 졸업하신 미학자 신성림 선생이 선별하여 번역한(선별, 엄선이라고는 하나 여전히 내용이 방대한) 이 책은, 그의 작품과 인생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전문가의 접근, 옮김이라는 이유에서 우리 됵자들에게 신뢰를 줍니다.

고흐는 작품의 완결성, 완벽을 추구할 때에도 다소 광적인 집착을 보였지만, 이 편지를 통해 훔쳐 볼 수 있는 그의 내면은 "도덕, 신적인 영성,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동참, 친지와 이웃에 대한 관계의 유지, 회복, 발전" 등 모든 면에서, 역시 사소한 흠결도 용납하지 않으려 드는 그의 (미친 듯한) 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예술가들 중 상당수가 속세의 인연, 관계, 사회적 접촉은 등한히하고, 더 나아가 더러운 무엇을 보는 듯한 초연함을 유지하는 태도와는 매우 차별된다고 하겠습니다. 흔히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일체의 속됨, 참여 등을 가차없이 경멸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그는 삶과 도덕과 예술과 인간이 혼연일체가 된 경지를 추구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전성기와 평판과 인정을 다 손에 넣었던 장프랑수아 밀레에 대해, 그는 이 사실주의 화가의 작품(속 피사체)에서 오히려 "고결한 영혼, 내면의 아름다움"에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pp. 52~53). 밀레 역시 가난한 농민들의 삶에서 신과 종교와 내면의 궁극적 완성태를 포착하려 애썼으며, 고흐가 이런 대선배로부터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겠습니다. 아름다운 외모 뒤에 숨은 추악함, 이기심, 탐욕이야말로 인간을 신에게서 가장 멀어지게 만드는 주범이라는 인식(혹은 강박)은, 거의 일생을 두고 연인을 곁에 두었을망정 여색은 멀리한 그의 기묘한 행적을 잘 설명해 줍니다.

"많은 슬픔을 겪었으나, 그런 경험을 통해 영혼을 얻게 된 여인이 내 곁에 있다면 그게 행복이겠습니다."

이런 말은 그 역시도 고난과 갈등으로 가득한 생을 살았기에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말이겠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가당치도 않은 이기심, 미숙함, 턱도 없는 자기중심성으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소외되고 마음에 바람 잘 날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번뇌를 겪으면 겪을수록 외모가 망가지고, 진정한 평화의 해안선으로부터 몇 걸음씩 더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케이 보스 스트리커는 고흐보다 몇 살이 많았습니다. 그는 이 케이를 마음 깊이 연모하여 청혼하기에 이르지만, 그녀의 대답은 "절대 안 돼요."였죠. 이는 꼭 불안정한 고흐의 처지 외에도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해서 나온 태도, 답변이었겠으나(뭔지는 책을 직접 읽어 보시면 알 것입니다), 여튼 고흐는 역시 그답게 "절대란 말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그 반대라면 무슨 마음이었겠는가?" 같은 말에서 드러나듯, 속되고 평범한 인간의 피상적인 잇속을 직시하기보다, 자기 식대로 고결한 의미를 찾으려 애씁니다. 우리는 물론 코넬리어가 어떤 사람됨이었는지 충분히 알지도 못하며, 혹여 그녀 역시 목사의 딸이었기에, 우리가 지레짐작하듯 속물 근성의 반응 외에 다른, 더 속 깊은 동기가 있었는지야 또 모를 일입니다. 허나 당사자 입장을 떠나, 객관적 3자 눈에 빤히 보이는 상황을 유독 고흐만 다른 맥락에서 애써 의미를 부여하려 드니 그게 안타깝다는 거죠. 예술혼이란 이처럼 현실 감각과는 숙명적으로 거리를 둘 수밖에 없음인지.

자신을 한사코 거절하는 여인에 대해, 단념하고 다른 가능성을 알아보라고 강권하는 권고가 쏟아지는 건 너무도 당연하죠. 그러나 고흐는 이런 표현으로 자신의 변함 없는 해바라기에 근거를 부여합니다. "모든 얼음은 녹게 마련이다. 대체 누가 그들에게, 여인의 차가운 얼음장이 결코 녹지 않는다는 괴이한 자연과학 원리를 가르쳤다는 말인가?" 고흐 본인이야 비통하고 절망적인 마음에서 이런 표현을 썼겠으나, 후대의 우리들이 보기엔 그 표현의 기발함(사실은 그렇지 않고, 당대 문어투의 양식 중 하나였을 겁니다. 아마도)에 놀라고, 그 중에서 일종의 위트까지 느끼는 게 보통이지 않을까요.

동생에게 이처럼 거의 매년 생일마다 다정한 편지를 보내 축하하고, 동생이 번잡한 세상사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순수함과 초심을 잃지 않기를 기원하는 모습은, 예술가이기 전 형으로서 따뜻한 우애를 간직한 그의 인간미를 증명합니다. 형으로서 그는, 그들 형제가 공유한 과거의 추억을 언제나 잊지 말자고 거듭 동생에게 상기하는데, 존재의 가치는 그가 거쳐 온 시간 속에서 확인이 됩니다. 일관성, 혹은 성실성(integrity)란, 결국 기억의 구속이 아니라면 의의를 잃습니다.

p268에 나오는 "가장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을 그릴 것이다"에서, 소박, 평범은 고흐 본인식으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말들입니다. 이는 책 저 앞 p82 마지막 줄에서도 다시 확인됩니다.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자신이 특별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야 그 같은 천재라 해서 다를 게 없죠. 그럼에도 그는, ".... 나 자신이 앞으로 비범하게 될 것이라며 그녀의 마음을 사려 하지 않는다.... 내가 추구하는 건 어디까지나 고결한 평범이다.... " 같은 말에서, 일시적 만족과 애욕의 추구를 위해 내면의 미덕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분명히 표현합니다. 이런 태도가. 예술에서건 실제 생활에서건, 혹은 그 나름의 사회 참여 속에서건, 그를 검소하고 겸손하며 도덕적으로 이끈 빛나는 철학과 각성임에도 틀림 없습니다.

돈 맥린(매클린으로 어르신들이 알고 있는)이 부른 그 유명한 노래 속에서도 알 수 있듯, 빈센트 반 고흐가 추구한 건 언제나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었습니다. 별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빛나고, 닿을 수 없을 만큼 아득하나 신비하게도 그 먼 거리에서 우리 눈에 보일 만큼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우리가 두 발을 디딘 땅은, 크지도 못하고 남의 광선을 되받아 간신히 존재를 알릴 뿐이지만, 그 척박한 땅은 우리가 간신히 살아갈 만큼 아름답게 가꿔졌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언제나 별을 꿈꾸고 바랄 수 있을 만큼의 존재 기반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고흐에게 시공을 초월한 무한 공감을 보낼 수 있는 건, 우리 존재의 안타까운 열망을 그만큼 잘 표현하고 깊이 아파한 예술가가 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책의 앞부분에는 고흐가 남긴 대표작 여럿이 컬러도판으로 실려 있습니다. 아주 낡고 초라한 구두 한 켤레를 담은 유명한 그의 작품이 눈길을 끕니다.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중고품인데도 너무 광이 난다는 이유로, 일부러 때를 태우고 먼지로 더럽힐 만큼 신고 다닌 후에야 작품에 담았다는 그. 한 켤레는 자신을, 다른 한 켤레는 동생 테오를 상징하게 할 만큼 깊은 우애를 나눈 동생에게 보낸 편지, 혹은 그와 일생을 두고 갈등 관계에 놓였던 부친에게 보낸 서간문은, 그림이 아니라 "글로 읽고", 만나며 소통하는 고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 독자에게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갖게 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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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에서 배우는 딥러닝
닛케이 빅데이터 지음, 서재원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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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처럼 생각하고 스스로 학습하며 사람보다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줄 아는 실체가 등장한다면, 사람이 기존에 하던 일을 모두 대신할 것이 분명합니다. 같은 일을 맡겨도 더 바람직한 성과를 낸다면, 당연히 "그것"이 사람을 밀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인간의 미래가 그런 방향으로 진행한다면, 우리는 미래를 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변화를 그저 겸허히 수용하는 마음 자세를 다지거나, 혹 남는 힘이 있다면 관계 당국에 "기본 소득제를 빨리 시행하라!" 같은 청원을 넣는 데 쓰면 충분합니다. 자기 힘으로 번 돈이 아닌데 과연 "소득"이란 말을 쓸 수 있을지는 극히 의문이긴 하죠.

먼 미래에는 어떤 모습이 될지 모릅니다만, 현재까지의 발전상을 보면 이른바 AI라는 것이, 현재 기업들에서 무분별하게 광고해 대는 단계에는 아직 현저히 미치지 못하는 게 분명합니다. 대신, "그 앞에 굴복해야 할 것"이 아니라, "가지고 놀면 아주 재미있고 유용한 것"이라는 건 아주 확실합니다. 이는 완제품 형태의 소비재로서도 그렇고(NUGU, 에코, 이 책에도 나오는 구글홈 같은 것들), 개발자나 사업가 입장에서도 그렇습니다. 훨씬 의미가 큰 건 후자인데, 제3의 물결 당시 기회를 한 번 놓쳤던 분들은, 이번 기회는 반드시 잡아채어야 거대한 부의 끝자락이라도 향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AI 개발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딥 러닝" 기법에 대해 개략적인 컨셉이라도 잡을 필요가 있겠고, 전혀 개념이 안 잡힌 독자, 그러면서도 당장 어느 지점에서 첫발을 떼야 하긴 하는 분들에게 이 책이 아주 유용한 길라잡이 구실을 할 수 있겠습니다. 영진닷컴에서 출판되었다고 혹시 수험서 아닌가 착각하시는 분들도 있겠는데, 아닙니다. 전혀 모르는 독자들 읽으라고 낸 책입니다. 머신 러닝 관련해선 아직 자격증 제도가 마련된 바 없고, 제 생각에는 다른 프로그래밍 분야에 비해 "자격증"이 가장 덜 필요해질 섹터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제3의 물결로 대변되는 정보화 사회에서는, 프로그래머, 시스템 분석가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EDPS는 아직 용량과 효율이 미흡하여, 밀도 높게 설계된 프로그램의 도움 없이는 유의미한 작업을 전혀 해 낼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소프트웨어"의 역할이 그처럼 중요했던 것입니다. 현재까지도 예컨대 "삼성은 하드웨어에 집착하는 이상 미래가 없다. 구글처럼 소프트웨어 중심 기업으로 가야 한다" 같은 (딱히 뚜렷한 근거도 없는) 예언 같은 진단이 인기를 끄는 건 이 영향이남아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딥러닝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사람이 짠 프로그램의 도움, 명령을 일일이 의존하지 않아도, 방대한 데이터셋으로부터 자신이 스스로 모델을 만들고, 어떤 경로로 그러는지 자신도 모른 채(이게 중요하죠) 정확한 답을 도출합니다. 이 컨셉 자체는 아주 예전부터 생각되었으나, 1) EDPS는 성능이 떨어지고, 2) 얘한테 학습을 시킬 방대한 데이터가 부족했죠. 프로그램을 대신할 정도로 유의미한 "학습"을 시키려면, 데이터라도 엄청 많아야 했는데 그럴 모을 방법이 없었던 예전입니다. 현재는 이 두 가지 장애가 모두 극복(AI 개발 때문에 인위적으로 추진된 건 아니고[그런 건 절대 불가능], 다른 분야에서의 성과가 우연히 이 쪽에 유입된 거죠)되었기에 가능합니다. 즉, 그닥 창의적인 혁신은 아닌 셈입니다.

작년 상반기 구글의 허사비스 CEO가 야심차게 선보인 "알파고" 때문에 특히 자극 받은 건 일본인가 봅니다. 현재 한국은 이 분야 투자나 발전이 아주 더디며, 온갖 걸 다 과잉투자하는 중국은 예상 밖으로 인공지능에 대해서만은 큰 관심이 부족하다는군요. 일본인들답게, 전문 지식을 최대한 문외한들이 알기 쉬운 수준으로 변환시켜, 자신들의 상식에 맞는 체계로 하나하나 더듬어 올라가는 모습이 훤히 보이는 책 구성입니다. 그런데 이 이유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독자들이 읽기엔 참 편합니다. 제목은 "구글에서 배우는 딥러닝"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는 기법을 현저히 발전시킨 주체가 구글이라서일 뿐이고, 그 내용은 구글의 성과를 차근차근 독자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함과 동시에, 현재 일본의 여러 기업들이 어느 수준에까지 다다랐는지까지도 풀어 헤치는 방향입니다.

책에서는 일단 "딥러닝은 머신 러닝의 많은 기법 중 하나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설명을 시작합니다. 사실 제 생각에 사업상, 혹은 기타 실용의 필요로 이 분야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체계 제시가 필요없다고 봅니다만, 일본 책 답게 "프로그램은 그저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거여!" 같은 부실, 날림 사고와는 매우 거리가 먼, 돌다리도 두들겨 가며 건너는 소심함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머신 러닝의 다른 기법 준 하나로 "귀납 추론"이 간략하게 설명도 되어 있습니다만, 사실 일반적인 프로그래밍과는 정반대로, 대전제→ 소전제→ 결론(이게 연역입니다)의 단계를 거치지 않는, 방대한 사례로부터 합당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귀납적 사고는 모든 머신 러닝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pp. 17~20에 제시된 뉴럴 네트워크에 대한 설명이, 독자로서는 기존의 전산 처리 시스템과 이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가장 역점을 두어 이해해야 할 대목입니다. 중간계층이 여러 층으로 구성되어야, 복잡한 특성을 지닌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고, 이것이 위로 올라갈수록 고차원의 판단으로 수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지 구조를 모방한 것인데, 사실 딥러닝 자체가 천재적인 발상으로 고안된 건 아니고, 책에도 나와 있듯 그저 "실용적이고 쉬운 방법으로 인공지능을 구축할 수 있어서"일 뿐입니다. 그러니 일반인들은 "아니 전산학 개론도 어려워 죽겠는데 머신러닝을 어떻게 배우라고?" 처럼 겁을 먹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도스보다 뒤에 나왔다고 윈도가 더 어려운 게 아니듯 말입니다. 딥러닝은, 이치만 잘 알면 그저 갖고 노는 장난감에 불과하며, 책 후반부에도 나오지만 무슨 레고 메뉴얼 부록으로 주듯 구글에서는 API를 무료로, 일반인들도 갖고 놀아 보라고 자신들 사이트에 게시해 놓기까지 했습니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필터링을 통해 G메일은 스팸메일을 크게 줄였다고는 합니다만, 제 개인적으로는, 처음 메일을 제게 보낸 거래 상대방이 이미지 파일을 첨부해서 보냈다는 그 이유 때문만이었는지, 이 중요한 메일을 스팸함에 넣어 큰 곤란을 겪을 뻔했습니다. 이게 빅데이터의 함정입니다. 대세, 주류는 양적으로 판단할지 모르나, 질적인 소수의 중요성을 전혀 분간 못 합니다(그리고, 별로 개선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외국어 통역 등도 결정적인 팩터는 "남들이 잘 쓰지 않는 미묘하고 고급진 표현"을 다루는 데에 있는데, 그걸 천한 빅데이터로 과연 귀납해 낼 수 있겠습니까? 아직까지는 단순 반복, 비창의적 영역에 이 AI라는 게 용도가 제한되었음도 우리는 알 수 있겠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딥러닝을 통한 여러 성과물은 우리 일반인들도 (마치 컴맹도 윈도 쓰듯) 갖고 놀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입니다. 현재까지 구글이 얼마나 이 장난감을 개발시켰는지 확인하려면, 책에도 나와 있지만 아래 사이트로 들어가보시면 될 듯합니다. (역자분께서 현재는 API가 여섯 개로 늘었다는 사실까지 친절히 알려 주시네요. 이미지를 클릭하면 해당[구글] 사이트로 이동합니다)



일본과 중국 여러 기업에서 이 AI를 채택한 여러 사례를 책에서 소개합니다. 흥미롭기도 하고, 이 결정이 기존 채용 인력을 감축하는 데까지 이어지지는 않지만(그러나, 기업마다 사정이 다를 것입니다), 장래 채용 인원을 줄이는 데에는 영향을 끼치리라는 전망도 합니다. "아직은 복잡한 응대에 사람이 필요합니다."라는 관계자의 말. 인공 지능 시대에 하나 확실한 건, 자기 일 어설프게 하는 사람은 모조리 도태된다는 결과입니다. 똑부러지게, 창의적으로, 핵심을 이해하고 알고리즘의 먼 단계까지 내다보는 능력이라야지, 남의 말이나 외우고 따라하며 부족한 부분을 감추느라 목소리만 높이는 사람에겐 전혀 장래가 없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어렸을 때 배운 암상자와도 같아서, 무슨 메커니즘이 작동하는지는 컴퓨터도 모르고 우리도 모르지만, 여튼 적합한 결과가 튀어나온다"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나 일본이나 특정 시기 교육 커리큘럼이 비슷해서, 저 역시 "어둠 상자" 그림이 교과서에 나왔던 게 기억 나네요. 예전에도 그랬고 가까운 미래에도 역시, "맥락"을 이해하는 건 아직은 사람의 지성과 감성밖에 없습니다. AI는 도구일 뿐이며, 마법처럼 도출한 결과를 두고 "어떻게 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까지 알아내는 사람만이, 미래의 경쟁에서 한 발 앞서 나갈 것입니다. 단순 반복 노가다는 사람이 할 게 아니라 기계한테 시켜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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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나라가 낯설다 국가를 바라보는 젊은 중국 지식인의 인문여행기 1
쉬즈위안 지음, 김태성 옮김 / 이봄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중국 여행기인데 꽤 재미있고, 혹 여행기에 관심 없는 독자라 해도 특정 고전에 큰 의의를 두고 감동을 받은 이라면 꼭 챙겨 읽어 봐야 할 책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기대를 갖고 읽었으며, 읽고 나서도 역시 기대대로였다면서 뿌듯함을 안고 책을 덮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시사주간 <TIME>에서 "인플루엔셜 100" 선정 기획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그런 평가를 처음 읽었습니다.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에 대해, 한국의 특정 세대(특히 80년대 학번 어르신들)가 그토록 큰 경외감을 가진 사실과는 반대로, 미국에서는 naive(특히 저 잡지의 평가가 그러했죠)한 판타지로 보는 게 중론이라는 걸 알았죠. 물론 한번 특정 이념에서 제공한 프레임에 사로잡히면, 다른 어떤 유력한 반대증거나 움직일 수 없는 팩트가 출현해도, 이제 "불순세력의 책동, 음모, 혹은 미(未)각성의 산물" 정도로밖에 안 보입니다. 이데올로기의 힘이란 그렇게나 무서운데, 다만 본인은 본인의 순수한 양심, 각성의 사고라 여기지 결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혔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오히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가 이데올로기의 포로라며 역(逆) 거울 뉴런을 발동합니다. 이런저런 영역에 다 몸을 담가도 보고 객관적인 각성, 휴머니티에 입각한 결론을 내리는 사람과, 그저 위에서 지령 내려오는 대로 똑같은 주문만 반복하는 사람은, 결론이 같아도 그 순도와 가치 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가 날 뿐입니다.

이 책 저자 쉬즈위안은 중국계 미국 교포 출신도 아니고, 나이도 아직은 장년에 가까운 세대입니다. 이데올로기에 물들지도 않았을 세대(그 부모들처럼)이며, 또 욱일승천하는 신흥 경제 대국으로서의 조국을 마음에 거리낌 없이 자긍심을 갖고 받아들였을 만한 나이이기에, 더군다나 "중국"을 객관화해서 받아들이기 마냥 쉬운 처지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책은 마치 미국인이 방문자처럼 중국 각처를 돌아보고 코스모폴리탄(미국인 중 상당수는, 특히 우리가 그 책을 읽기도 하는 저자라면, 이런 입장, 시선에서 말하는 이가  꽤 많죠.)처럼 사고하며 기록하는 품입니다. "나는 내 나라가 낯설다"는 그래서 매우 적절한 제목이죠.

중국인들과 대화를 해 보면 그야말로 획일성이 지배하는 사고이고 영혼입니다. 어쩜 저렇게 남의 입장에 한 번도 서 보지 않은 이들이, 자기 생각만에 갇혀 앵무새처럼 뻔한 내용을 녹음기처럼 반복할까 싶을 정도죠. 하긴 한국도 유체이탈 매너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나라 전체가 미세먼지 때문에 폐암, 호흡기 질환으로 인구 사망률이 유의미하게 높아질 판에 엉뚱한 소리만 들먹거리면서 사드가 어쩌구를 떠들다니 말이죠(중국 공산당에게 지령이라도 받았는지). 마스크 아니라 방독면 쓰도 산다 해도 건강에 끼치는 영향이 전과 같을 수가 있으며, 누런 하늘을 보는 절망감이 그저 "참고 견뎌야 할 일" 정도로 무시될 수가 있습니까?

이 책 저자는, "중국을 타자화하여 본, 담담하고 객관적인 여행기"에 가까운 태도로 이야기합니다. 일단 위의 스노 책을 두고도, ".. 중국 공산당의 선전에 그대로 휘말릴 만큼 인식이 확고하지 못하여... " 같은 평가가 나옵니다. 물론 그는 종전에 그 정도로 생각을 정리하고 말았다는 것이며, 이번 여행을 앞두고는 다시 그 책을 읽은 후,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운 문장, 생생한 인물과 풍경의 묘사가 그 책에 고스란히, 고맙게 녹아 있음을 깨닫고, 전의 평가를 수정합니다. "평소에도 나는 이런 느낌을 갖고 싶었다." 무슨 소린고 하니, 추상화, 이념화, 명제화한 건조하고 딱딱한 틀이 아니라, 내 느낌과 감상이 정직히 반영된 그런 느낌으로 사물과 세상과 타인을 받아들이고 싶었다는 거죠. 스노의 고전에는 생생히 살아 숨쉬는 군웅들(아직 역사의 승자가 될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던 상황 아니었습니까. 그 반대에 가까웠으면 가까웠지), 정의감과 자존에 처음으로 눈 떠, 결연히 행동하던 농민들이 여기저기서 힘찬 거동과 눈빛에 가득차 있었지요. 저우언라이(周恩來)에 대해 "처녀처럼 날씬한" 몸매였다며 좋은 기억 속에 그를 간직한 대목도 있고, 마오가 수척한 링컨처럼 보였다는 서술도 있습니다(이건 맞습니다. 나중에 장제스와 회동할 때 찍은 사진에도 여전히 그랬고, 다만 통일 직후부터 얼굴과 몸이 불었을 뿐입니다). 어떤 고정관념과 개인적인 못난 원한에 얽매인 인간은, 이런 개별 체험의 인풋이 모두 왜곡된 채 볼품없는 정신에 축적됩니다. 정직할 때는 오로지 "더러운 욕구"의 부추김을 받을 때뿐이죠.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욕구가 꼭 사라지는 건 아니고, 욕망이라는 게 참 비천해서 혹 몸이 욕구를 뒷받침 못한다 해도 마치 유령감각처럼 그 충동만큼은 집요하게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올라올혀 애 씁니다. 뭐 노인들 비웃을 일만은 아니고 우리도 언젠가는 다 겪어야 할 일이므로, 인생 자체가 이렇게 슬픈 과정인가 보다 하고 정리할 필요는 있겠죠. 이번주에는 빌 헤이스가 쓴 올리버 색스의 회상록과 이 책,  두 권이 특히 기억에 남는 독서인데, 두 분 저자 다 나이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여전히 당사자들을 괴롭히긴 하나 봅니다. 한 분은 그러나 여전히 자기를 기만하고 살고(누군지는 말 안 하겠습니다. ㅋ 본인도 알더군요), 다른 한 분은 이 책에 잘 나오듯 대단히 초연하며(나이도 십 년 가까이 더 젊은데), 부도덕한 영역에는 알아서 발을 빼는 성숙함을 지녔습니다. 여행기에 꼭 "그 이야기"가 들어갈 필요는 없으나, 요즘은 어딜 가도 "그것"의 유혹이 빠지질 않기에, 어떤 책이든 간접적인 언급은 있는 듯합니다.

사회주의 국가라곤 하나 개인의 생활을 국가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쑨톄춘의 경우, 채벌(採伐)로 한때 크게 번창하던 지역 경기가 갑자기 죽어버림에 따라, 그 역시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좋은 일거리를 찾아 여러 지방을 전전해야 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건 퇴직급여의 불공정한 지급이었습니다.

"30년을 일한 나와, 십여 년 일한 이들과의 처우가 같다면, 내가 산 20년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국가가 평가, 선언한 셈이 아닌가?'

이분의 생이 중국 인민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겠으나, 어떨까요. 한국에도 이런 부조리가 횡행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하소연을 늘어놓거나, 여차직하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드 보복을 당하는 건 중국 납품 업체와 거래하는 한국의 중소기업도 마찬가지인데, 이 거래처 하는 말이 "억울하면 법원에 소를 제기하라"입니다. 이런 뻔뻔스러운 작태가 또 어디 있을까요. 소송을 해 보야 중국 법원이 니네 편을 들어주겠냐는 배짱으로 하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쑨톄춘이 정신과 건강이 날로 병들어 가는 건, 육체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에 대한 절망과 분노 때문이죠. 그리고 그 큰 책임은 원칙 없고 탐욕스러운 중국 공산당에 있습니다.

p195에는 마오 주석 실물의 얼굴을 어렸을 때 육안으로 볼 수 있었던 그의 "영광"에 대한 기술이 있습니다. 그의 생전 모습을 보기 위해 차량의 뒤를 따라 달린 군중이 수십만이었고, 이때 길에서 잃어버린 신발만 몇 켤레가 될지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는군요. 신발의 품질이 워낙 낮아 누가 훔쳐갈 생각도 안 먹었던 듯도 하구요. 그때로부터 다시 십오륙 전, 대약진운동에서 목숨을 잃은 인구만 억 단위로 헤아리는데, 일본 침략군이 죽인 인명의 몇 백배에 달하는 숫자입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을까요?

영토 극북의 하얼빈에서, 아직도 군사적 대치가 이어지는 먼 남방의 대만에 이르기까지, "인민들의 삶과 그 베경"을 눈으로 밟고 다닌 저자 쉬즈위안의 기록은 진솔하며, 마치 뉴요커의 담담한 시선처럼 모던한 색채로 독자를 맞이합니다. 요즘 뉴요커라면 오히려 political correctness 때문에 괜히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잔뜩 우회(그런데, 최근에는 또 그렇지도 않더군요. 워낙 중국인들이 세계 각지에서 진상을 떨어대니)했을지도 모를 텐데, 그의 "내 나라"는 아직도 부족하고, 고통 받고, 갈 길에 멀고, 그러면서도 문제의 실상을 정면으로 마주하지도 않은 채 무엇인가 다른, 오도된 목표를 놓고 열정을 쏟는 모습들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 작은 반도에 태어나지 않고, 저런 광대한 나라에 속해 여전히 가난한 일상을 영위했다면, 과연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나 자신을 마주했을까요?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면, 이미 쉬즈위안과 마음이 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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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섬니악 시티 - 뉴욕, 올리버 색스 그리고 나
빌 헤이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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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서는 나와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던 누군가가 곁에서 죽었을 때도 "We lost him(her)."라고 말할 때가 잦습니다. 오래 내 주변에 간직해 오던 무엇인가를 잃었을 때도 우리는 좀처럼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방황하곤 합니다. 하물며, 가족, 친구의 죽음이라면, 그 아픔과 충격은 짧은 시간 안에 극복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 누구든 한 번은 겪어 봤을 텝니다. 감정적으로 깊은 교감을 나눠 왔고, 대부분의 경우 육체적 결합 관계까지 이뤘던 동반자(배우자는 말할 것도 없고요)를 혹 잃었다면, 그것도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처럼 아픈 순간을 통한 상실이었다면, 이를 전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라 해도 그 존재 차원의 충격에 대해 상상이 될 만합니다.

내용만 봤을 때 소설이 아닐까 착각할 수도 있을 서정적 문체의 이 책은 작가 빌 헤이즈의 개인 회상록입니다. 책 전체를 통틀어도 풀 네임이 한 번도 나오지 않고 그저 "스티브"라고만 불리었던, 17년 동안의 동반자를 잃고 그는 오랜 근거지인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뉴욕으로 이주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런던에 한 번 들러 스티브의 유해를 강에 뿌린 후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갖습니다. 한 달 가까이 머문 이곳에서, 그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사이 일종의 가교로 여길 택하고 활용한 듯합니다. (세 도시의 지리상 위치는 거꾸로지만)

"뉴욕에 잘 오셨습니다. 제가 한 잔 사죠."

로렌스 H 스테인, 변호사라는 이의 대접으로 입맛을 다시게 된 '파트론 테킬라'는 그런 서브장르가 따로 있는 술이 아니라 멕시코의 한 회사에서 개발, 판매하는 테킬라의 한 상표입니다. 스테인 변호사나 빌 헤이스 본인에게도 잘 어울리지는 않을 법한 묘한 선택입니다. 전 읽다가 처음에 나초 이야기하는 줄 착각했는데(묘하게도 이 역시 멕시칸 메뉴에 듭니다만), 그게 아니라 특히 이 작가님한테는 잘 받지도 않을 듯한 독한 술이어서 약간 의아했습니다.

"마이클 잭슨이 뭡니까?"
물론 나이 지긋한 분이라면 꼭 생전의 올리버 색스와 같이 세속과 절연된 생을 살지 않았다 해도 그가 누구인줄 모를 수도 있습니다. 누군지 모르는 이상 "누구"가 아니라 "무엇"이라는 의문사를 썼다 해도 그  실수의 이상함은 독립된 게 아니라 이미 직전 번의 효과에 포함될 뿐입니다. 사실 진짜 이상한 건, 아무리 전세계적인 화제를 뿌린 대스타라 해도, 왜 지구상의 모든 이들이 그의 이름을 꼭 알아야 하느냐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어쩌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이들이 마이클 잭슨의 이름을 안다"는 사실 자체에 더 열광하여 그를 실물보다 더 큰 크기로 만드는, 일종의 자기 강화 작업에 빠졌는지도 모르죠.

저자가 푹 빠지게 된 올리버 색스는 예컨대 <아내를 모자로...> 같은 화제작의 author라든가, 내내 세상과 철저히 스스로를 차단한 채 살았다는 사실이라든가, 실제로 만나 보니 너무도 티 안 묻고 심오한 사념으로 세상(당위)을 재구축할 줄 알았다든가, 무엇보다 아름답고 능숙하며 진정성 깃든 문장으로 작품을 아름답게 빚을 줄 알았다든가 하는 능력으로 타인을 매혹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빌 헤이스는, "내가 지금 올리버 색스를 보고, 이야기하고, 생각을 공유한다"는 사실 자체에 매혹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올리버 색스라는 이가 대체 누구인데? 성공한 작품을 여럿 쓴 셀럽이 아니었다면 함께한 시간이 과연 그토록 황홀할 수 있었을까?" 이런 속물적 동기에 대한 지적을 누가 혹 한다면, 그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부인할 수 있게 된 게, 올리버 색스라는 매혹적인 거인과 그가 함께 지낸 보람 중 가장 큰 것이겠습니다. "아니다. 올리버 색스는 그저 함께 있기만 해도, 당신에게서 다른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돕는 인물이다."

우리 독자들에게는 고마운 선물(올리버 색스 이야기 + 뉴욕의 사연)입니다만, 작가 빌 헤이스는 뉴욕으로 새로 이주함으로써 작가 올리버 색스를 만나고, 대화하고, 깊은 정도까지 교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빌의 한껏 고양된 감정과 각성이, 어디까지가 색스로부터의 영향이며, 어디서부터가 도시 뉴욕의 촉촉한 샤워 덕분이었는지는 본인도 알 방도가 없습니다. 마치 파트론 테킬라의 화끈한 감촉이 목을 넘기고 지나갈 때, 이런 느낌이 예컨대 스톡홀름에서도 같은 상표의 술(물론 엄청 비싸지겠습니다만)을 마시고 재현할 수 있는 건지 전혀 확신이 안 서듯 말입니다.

"행복과 즐거움 중 어느것이 더 서열이 높을까요?"
"행복은 보다 복잡한 녀석이야."

운이 좋았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사건"은, 올리버 색스가 살던 건물 다세대 주택 중 한 채가 마침 비게 되었고, 그 사실을 경비원이 알려 주었다는 겁니다. 이날 오전에 벌어진 어떤 다른 "사건"에 대해서도 빌 헤이스는 따로 기록하는데, 아마 기억에 의존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성격과 스타일상 어떤 꼼꼼한(혹은 간격이 좀 뜨는) 메모를 이어가는 중이었지 싶습니다. 그는 거인과 인접해 살게 된 행운을 굳이 부각하기보다, "그(이) 11층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이 좋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즐거움은 여러 층위에서 발생하지만, 행복은 보다 복잡한 녀석이라서일까요?

"몸의 어느 부위가 당신 것이 아니라고 느낀 적 있어?"
"내가 이래서 당신을 사랑한다니까요."

이는 뭐 특별히, 그(들)만의 개성적인 느낌은 아닙니다. 우리들 일반인(중에서 남성이라면 더욱)들도 마찬가지고, 가장 순도 높은 원초적 본능만을 대변하는 부위와, 나머지 정신적인 영역이 치열한 다툼(대개는 타협과 평화 중에 시간을 지냅니다만)을 벌임은 아무리 둔한 이라도 자각하면서 삽니다. 게다가 문학 작품 중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기도 했죠. 뭐 거기까지는 좋은데... 읽다 보면 좀 불편해지는 여러 서술이 특히 이 장(章)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사실 책 첫 장도, 사정을 모르는 독자라면 좀 놀랐을 법한 사연이 당연한 전제마냥 제시되기는 했습니다만.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고, 대체로 그가 책을 통해 전하는 뉴욕의 풍경은 무척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이 책에는 여러 컷의 사진이 실렸는데, 그 중 상당수는 실제 인물(중요한 사람들이라기보다, 그가 뉴욕에서 마주친, 지나가던 이들, 그가 "이웃"으로서 공감하던 그 아주 짧은 순간의 "친구들"이었습니다)을 담은 것입니다.

이미 노년에 접어들기까지 단 한 번도 타인과 성행위를 해 보지 않은 사람, 영혼, 그에게라면 "샴페인의 코르크 따는 장면, 그 폭발하는 기포의 향연"도 생애 처음 겪는 신기한 목도일 수 있습니다. 물론 꼭 그러라는 법은 없죠. 혹 누가 앞의 사정(virginity)을 알고, "당신 샴페인은 따서 마셔 본 적 있어?"라고 묻는다면(대체로 이는 조롱이거나 경멸감의 표현입니다. 상대가 노인이라면 더욱 그렇고, 저는 우리 한국에서라면 거의 예외가 없을 듯하지 싶네요), 상대방은 크게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작가 올리버 색스는, A를 모르기에 B 역시 모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 빌 헤이스는 너무도 잘 알 수 있었기에,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어느 하나의 정체성, 개성으로 요약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 뭐랄까, 그가 가진 모두가 그를 표현하는 하나의 전체라고나 해야겠지. force of nature일까?" 이것은 올리버 색스가 그의 "친구"인 고 칼턴 가이듀섹(노벨 의학상 수상자)에 대해 내린 평가입니다. 이런 사항이라면 영어(라틴어지만)에는 sui generis라는 좋은, 합당한 어구가 있는데 구태여 그 말을 쓰지 않으시네요. 1부 맨처음에도 잠시 언급되었지만, 작가 빌 헤이스는 그 늙은 나이에도 여러 사람, "상대"를 만나고 다닙니다. 그쪽 기준이라면 아주 난잡한 정도까지는 안 가겠지만. 여튼 그가 올리버 색스를 좋아하는 한 이유는, "대체 저 사람은 어떻게 이런 충동을 참을까?" 같은 경이로움이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그가 일생을 두고 불능이 아니면서 아무 갈등을 겪지도 않았다는 점은, 빌 헤이스가 확신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죠.

빌 헤이스가 술을 좋아하는 건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벌써 성씨부터가 Hayes 아닙니까. 일로나와의 대화에서 그는 자기 부친이 아일랜드인임을 (그녀와 독자에게 모두) 밝히고, (이번에는) 자리에 어울리게 보드카를 마십니다. 이 앞 2부에서 그는 뉴욕의 여러 인물들을 만납니다. 대부분은 택시 운전수, 길거리의 사환, 가게 주인 등 평범한 이웃들이죠. 크리스, 압델 처럼 흔하고도 자기 색깔(적어도 종족의 색깔)을 드러내는 이름들은, 때로 불측한 욕망과 함께 각인될망정 모두 뉴욕의 정체성을 모자이크처럼 구현하는 필수 요소들입니다. 일로나와의 만남 이야기로 시작된 이 3부는, 어느 상점에 든 강도 사건을 O, 즉 올리버 색스 노인("자기")과 함께 나누는 등 제목에 맞게 약간은 씁쓸하고 불편하며 슬픈 사연들이 채워집니다. 대단원은, 우리가 잘 알듯 작가 O의 죽음을 다룹니다. 그러니 죽음으로 시작해서 이별로 끝나는 책이 되는 셈이네요.

책 서두에는 시인 김현의 헌시가 한 편 실려 있습니다. 책보다는 O, 올리버 색스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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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jtmzl 2017-10-02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은 인섬니악인데, 리뷰 내용은 내 나라가 낯설다네요
리뷰 잘 보고 갑니다.

빙혈 2017-10-02 09:50   좋아요 0 | URL
네, 지적 감사합니다.
비슷한 시간대에 서평 두 개를 올리다가 내용이 서로 바뀌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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