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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
도재기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국보는 겨레가 지난 역사 동안 일궈낸 소중한 문화적 성취를 집약하여 담아낸, 선조와 후손이 물건으로 만나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존재(그것이 미물이든 고등 생명체이든)라 해도 근원, 뿌리가 없이 무(無)에서 솟아난 실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가깝게는 몇 대의 직계 존속, 멀리는 내 주변의 거의 모든 이웃을 한 씨앗과 밭에서 틔워 낸 아득한 조상님들까지, 나보다 시간적으로 앞서는 어떤 고마운 분들의 앞선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들이 힘찬 활력으로 현재를 채우며 사는 것이지요. 그런 고마우신 조상님들의 은공을 매 순간 되새기며 개체의 책임을 느끼고 성실한 발돋움을 이어가려면, 영광 혹은 간난에 가득찬 지난 역사를 숙연한 마음으로 돌아보는 것보다 더 좋은 자극이 없을 것 같습니다.
반만 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배달 겨레라고는 하지만, 그 장구하고 내실 있는 내력에 걸맞을 만큼 많은 유물, 문화재가 현재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전해내려온 것들만으로도 이미 세계 어디에 내놓기 충분하게 자랑스럽지만, 외침과 환란이 많았던 시련의 시기가 짧지 않았던 탓에 멸실, 훼손된 예가 많아서입니다. 이런 아픔 많은 시련을 딛고 현재까지 전해진 소중한 국보들에 대해서마저, 후손된 우리들이 과연 합당한 경건함과 자발적 관심으로 유형, 무형의 대접을 베푸는지는 의문입니다. 문화재청에 의해 "국보"로 지정된 품목들 중, 과연 몇에 대해서나 정확한 이름과 내역, 소재지 등을 댈 수 있을까요? 이는 주입식 암기형 지식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애정과 경외감, 적절한 존경심을 품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기본 소양입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조상님들의 은덕과 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국보들의 실제 모습, 소략하나마 그 내역에 대한 이해가 절로 마음 깊은 곳에 이뤄져 있을 법합니다.
국보는 그 정확한 명칭, 소재지, 연혁에 대한 파악이 이뤄진 후에야 합당한 경외감이 품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건전하고 보편 타당히 받아들여지는 역사관, 오류 없는 역사 지식, 종으로 횡으로 면밀히 구축된 입체적 이해 등이 선행되어야 하겠습니다. 저자 도재기 선생님이 방대한 자료 수집과 현지 답사 끝에 오로지 "국보" 하나에 초점을 주고 저술하신 이 책은, 정말 잘 쓰여진 책 한 권으로 문화재에 대한 입체적 이해의 기초를 놓는 게 가능하다는 벅찬 느낌을 독자에게 안기는 명저입니다. 역사를 알면 국보를 모를 수 없고, 또한 국보를 정확히 이해하면 바른 역사의 주축을 파악할 수 있다는 선명한 교훈을 다시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혹 지나치게 유물 중심, 문화재 소개 중심으로 이뤄진 편제라면 "자료집" 이상이 못될 수도 있겠는데, 이 책은 진취적이면서도 실증적인 사관으로 조망한 한국사의 본줄기까지 심도 있게 다루어서 넉넉히 "역사책"을 읽는, 그것도 묵직한 전문서를 읽는 만족감까지 진지한 독자에게 선사합니다.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과연 미술사학자, 고고학자와 도굴꾼의 유의미한 차이점이 무엇인가?" 같은 대사를 듣곤 합니다. 어떻게 순수한 열정, 학문적 관심사를 갖고 민족이나 인류의 공영을 위해 일하는 이와 범죄자를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을까 하고 당연히 반발감이 들 수 있습니다. 헌데 다른 분야도 아니고 문화재 도굴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은, 순수 학자나 전문가들 못지 않게 대단한 지식과 정보를 갖춘 경우가 많습니다. 책 처음이 "끈질기고도 아픈 도굴의 역사"에 약간의 비중을 두고 시작되는 이유도, 언제나 문화재 당국이나 뜻있는 학자들보다 한 발 없어 보물들에 손을 쓰는 이들의 집요한 술수와 책략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저자께서 이 화제를 구태여 꺼내신 뜻은, 그만큼이나 국보를 체계적으로 관리, 보존하려는 우리 후손들의 노력에 아쉬운 점이 많고, 지금 이순간에도 어느 떳떳지 못한 검은 손에 의해 소중한 문화재가 훼손될 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함이겠습니다. 알아서 잘 되고 있겠거니, 나와 상관 없는 일이거니 모두가 안이한 마음을 품는 풍토 속에서 의롭지 않은 일부의 잇속만 채워질 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할 것 같네요.
이 책의 뛰어난 점은 단연 1) 망라적인 사항 소개(누락된 항목이 하나도 없습니다) 2) 단편적인 정보 정리가 아닌 체계적인 역사 맥락 속에서의 서술 3) 금전가치로의 환산이나 속물적 왜곡이 아닌, 올바른 민족 정기가 함양된 관점으로서의 고미술사 이해 4) 최고급 인쇄에 바탕을 둔 유효적절한 도판 첨부 등이겠습니다. 관리의 편의를 위한 번호순에 따른 설명이 아님은 물론이며, 통설적 견해에 따라 이뤄진 시대 구분에 근거하여 통시적 맥락 속에서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학문적 편집이 돋보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인들이 그토록 왜곡, 은폐하려 애썼던 청동기 시대(그 이전도 마찬가지입니다만)의 유물 중 대표적인 "정문경"에 대해서, 이것이 실제 소지자의 얼굴을 살피는 용도로 쓰였을까 하는 매우 소박한(그러나 상식적인) 의문을 독자의 눈높이에서 일일이 떠올려 주며, 그에 대해 통설적 입장에서 유익하고 권위 있는 답을 내려 주는 식입니다. 문장이 쉬우면서도 장별 체계와 구조에 부합하는 해설이라서, 해당 장을 읽고 나면 아 정문경이 우리가 아는 무슨 시대 무슨 범주에 속하는 국보다, 소재지는 숭실대 박물관이다 같은 사항이 독서 후 자연스럽게 기억에 남습니다. 학창 시절 문화재 소재와 대략의 생긴 모양을 익혀 두고 이를 지도 등과 연결시키는 국사 문제 출제 경향에 골치깨나 썩인 이들이라면, 이 책 한 권으로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겠네요.
임신서기석은 유명하긴 해도 국보가 아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국보/보물 등이 어떤 기준에 의해 구분 지정되는지는 이 책 처음에 저자께서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임신서기석이 어떤 연혁을 갖는지 정확히 알려면 법흥왕~진흥왕 연간에 한창 제도가 정비되던 화랑제도에 대해 살피지 않을 수 없고, 문화재(선명한 사진과 함께 설명되는)가 역사 속에서 갖는 살아 숨쉬는 맥락을 독자는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거죠. 저자가 아쉬움을 표시하는 건, 삼국 간의 항쟁에서 최후의 승자로 남았던 신라의 유물만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전한다는 현실입니다. 미륵사지 석탑 같은 건 극히 드물게 현전하는 백제의 유물이며, 이의 해체 보수 과정에서 놀라운 유물들이 추가로 발견된 건 학계뿐 아니라 민족 전체의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또한 풍납토성 유적지 발굴 관련, 주민들과 정부 당국, 학계의 입장이 일일이 대립하며 큰 갈등을 빚는 데 대해 우려를 표명합니다. 우리 독자들이 이 점에 주목해야 할 이유라면, 결국 민족 공동의 유산인 문화재 관리와 보존 정책에 대해 최상의 중지(衆智)를 모을 필요가 절실하다는 점이겠습니다.
연가칠년명 금동 여래 입상은 역시 학창 시절 그 긴 이름을 외우는 수고가 컸기에 많은 이들이 귀에 익을 만한 문화재겠는데요. 저는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만 "연가(7년)"라는 연호가 현전 사서 어디에도 교차검증이 안 되는 사항이라는군요. 역시 문서상으로 전하는 1차 사료가 대단히 희귀한 한국사의 안타까운 현실을 잘 드러내 보이는 대목이겠습니다. 저자가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역사 연구와 문화재 관리야말로 남북 당국이 반드시 지혜와 물적 자원을 한데 모아야 할 공동 과제라는 것입니다. 광개토대왕비문 화제를 두고서는, 강점기에만 해도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연구 대상에 접근 자체가 어려웠던 참혹한 현실을 상기하며, 현재에도 중국측으로부터의 동북 공정 시도 등 잠재적 위험 요인을 감안하면 하루라도 빨리 남북간 협력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두가 공감, 동의하면서도 실천에 옮기기가 어려운 안타까운 대목입니다.
청자, 백자 등 자기의 생산은 대륙과 대양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진 세계에까지 "고려"의 이름을 알린 중요한 문화사적, 경제적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역시 의무교육 과정에서 지루한 암기 사항으로만 다뤄질 뿐, 우리의 정서와 공통된 상식, 민족 감정에 공명을 줄 만한 지식으로 다가오질 못했지요. 국보, 보물 중 상당수가 이 도자기 유물이며, 세계 어디서도 그 독창적인 개성과 매력을 흉내내기 어려웠던 우리만의 제조 비법이 무엇이었는지, 저자는 일반 독서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쉽게 풀어 줍니다. 혹 재테크(..) 수단으로 도자기류의 유통과 투자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 책을 읽고 그 기초 소양을 쌓을 수도 있겠습니다.
미술품 역시 국내 애호가들 사이에서 형성된 시장의 볼륨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수준이며, 도대체 현대 화법과는 기본 전제부터가 다른 과거의 작품들이 어떤 이유에서 고평가, 혹은 도외시되는지 납득하려면 일단 그 창작 배경이 된 역사를 천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국보뿐 아니라 보물로 지정된 각종 중요 초상화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는데요. 강민첨 장군(귀주 대첩의 또다른 주인공), 회헌 안향 등의 초상을 담은 숱한 묵화들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그 뒤에 숨은 내력을 소상히 들려 줍니다. 역사를 알고 읽으면 더욱 재미 있으며, 이 책을 읽고 처음 배우는 역사 사항이 아마도 다른 책들로 더 깊이 있는 연구를 이어갈 때 든든한 발판이 되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