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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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전반에 만들어진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데몰리션 맨>이란 SF 영화를 보면, 가상의 한 미래에 사람들(스스로를 예전보다 훨씬 문명화했다며 자긍심이 대단하죠)이 어떤 방식으로 성욕을 충족하는지에 대한 묘사가 잠시 나옵니다. 상대가 있긴 하고, 실물의 이성이긴 합니다. 다만 헤드셋을 쓰고 뇌파를 교환하다 한순간 만족을 느끼고 종료하는 방식인데, 과거에서 온 주인공 스파르탄은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을 (동시에 이를 지켜 보는 우리가 지닌 관념대로) 설명을 해 줍니다. 상대인 젊은 여성은 "불결한 체액 교환 방식의 예전식 성교"에 대해 기겁하며, 그저 역사적 지식으로만 전해 들어 알고 있다고 답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몸으로 저지르고 동물적 쾌감을 느끼냐며 핀잔도 주죠.

<편의점 인간>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으며, 한국에서도 많은 호응을 얻어낸 무라타 사야카 씨의 이 신작은, 가족관계와 전통적 성 역할이 완전히 전복된, 우리의 상식으로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을 것 같은 한 평행우주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평행우주에서도, 예컨대 "혹시 평행우주라는 게 있다면, 그 중 어느 한 곳에서는 여전히 남녀가 동물처럼 옷을 벗고 뒹굴다 일정 시점에서 체액을 사출하고 행위가 종료되는 방식으로 성을 즐기지 않을까?" 같은 말을 주고받습니다(그러므로, 작가는 이 세팅이 미래가 아닌 우리 시점의 어느 한 패럴렐임을 분명히 밝히는 태도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부부는 어디까지나 가족의 일원으로서 애정을 나누고 속 깊은 이해를 공유하는 관계일 뿐입니다. 혹 성욕이 생기면 전혀 모르는 다른 이성을 찾아 해결하는데, 이 역시 "짐승과도 같은 교미" 자체가 불온시, 금기시되는 세상에서 아주 정상은 아닙니다. 여기서 정상인 방식은 "캐릭터와의 사랑"인데, 소설 속에서도 언급되지만 이는 성행위라기보다 일종의 마스터베이션에 가깝죠(우리의 관념대로라면 말입니다).

소설은 "근친상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사람들 사이에 확고히 자리잡은 세태를 보여 주며 독자에게 놀라움을 안깁니다. 아마네는 엄마, 아빠 사이의 육적 사랑의 결실(우리들 중 누가 그렇지 않겠습니까만)로 태어난 게 결정적 흉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성행위가 이뤄질 수 있으며, 그 와중에 애까지 낳았대니?"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고전에 보면, 가정에 대한 정의를 "독점적으로 성을 향유하는 공동체(그리고 사회 성원의 재생산)"란 정의가 분명히 내려져 있습니다. 사실 저 역시 그 고전을 사회학 시간에 처음 접했을 때, "가정이란 꼭 그런 기능만 행하는 단위가 아니지 않나?"하며 뭔가 좀 징그럽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마네는 가뜩이나 자신의 이름이 성의 없이 지어졌다며 불만이 많은데, 자신의 출생부터가 심상찮은 절차를 거쳤다는 사실에 더 상처를 받습니다(물론 그녀의 이름이 꽤 운치 있다며 [한자로 쓰면 雨音. 즉 "빗소리"지요. 두 자 다 훈독인 셈] 좋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작품 속 이 세계에서 부부란 어디까지나 동년배 이성 간의 정신적 결합으로서, 짐승 같은 욕구를 발동시키지 않고 서로를 다독이며 보살필 것을 순결한 의무로 삼는 관계입니다. 그런 명시적, 암묵적 서약을 깨고 어느날 남편이 성관계를 요구하며 아내에게 달려들기라도 한다? 사회적으로 맹렬한 지탄의 대상일 뿐 아니라, 아내는 엄청난 배신감과 분농를 정당히 표현하며 이혼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아마네에게 그 모친은 자근자근 타이릅니다. "지금 남편이란 사람보다, 난 예전에 너한테 달려들었던 그 남자가 사윗감으로 더 마음에 들었다. 남편이 아내가 좋다며 안아 보자는 게 뭐 어때서 그러니? 예전에는 외간의 남정네, 혹은 여인과 정을 나누는 짓이 더 큰 비난과 흉을 입곤 했어."

서평 저 앞에서, 작가는 아마 의도적으로, 근미래 등을 배경으로 삼지 않고 구태여 평행세계 하나를 골라 우리 앞에 제시했으리란 제 개인적 추측을 적었더랬습니다. 명백히 "피곤하고 암울하며 내키지 않는 현재"를 주제이자 배경으로 다룬 <편의점 인간>에서도 작가는 그런 경향을 뚜렷이 드러냈지만, 이 장편에서도 일견 독자에게 큰 놀라움과 위화감을 던지는 가치관과 시스템의 전면 전복상이 드러나죠.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 독자가 불편해지는 진짜 이유라면, 소설 속의 각종 설정들이 사실은 우리가 실제로 머무는 "현재, 지금 여기"의 미묘한 풍자라는 점 때문이 아닐까요?

일본 사회에서 남성들은 "초식남"으로 변해 간다는 미디어의 "보도"가 오래 전부터 있었고, 이를 우려하거나 풍자하는 여러 문예도 발표되어 대중의 호응을 얻곤 했습니다. 여성은 그것이 타고난 본성이건, 사회적으로 학습 혹은 강요된 행위 산물이건, 대개는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바로 다가가선 호감을 표현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뭐 요즘은 그런 분들도 간혹 만나곤 합니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긴 하겠지만). 즉 대개는 초식녀들이란 뜻이죠. 반면 남성은 호르몬 분비 양태의 차이 때문에라도 일단은 적극적인 양상을 보이는 게 보통입니다. 이러던 게 남녀 역할이 점차 같은 지점으로 수렴하니, 이례적이고 걱정스럽다는 반응을 일각에서 자아낸 게 또한 당연하기도 합니다(뭐 잘됐다며 그 반대로 안심하는 태도 역시 얼마든지 발견되죠).

이 작중 세계에서는 그저 정적인 캐릭터와의 사랑(현재에는 낙오자, 부적응자들만의 행태로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정신병의 일종으로 진단되기까지 합니다만)이 누구에게나 권장될 뿐입니다. 다만 작중 등장인물들은, 여성에게도 남자와 같은 정도로 적극적인 구애 표현, 실천의 권리가 당연히 인정되었다는 태도입니다. 즉, 이 허구의 세계에서 야만, 폐습으로 지양되어야 할 풍습, 본능(으로조차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중에, "남녀 차별"은 비교적 색채가 옅은 편인 듯합니다. 순전히 제 생각인데, 일본에서는 정말로 전근대 사회에서조차 여성에게만 차별적으로 억압 발동된 시스템의 폐해가 (우리 한국이나 중국보다) 상대적으로 덜 심해서가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여성이 평등한 대접을 받았다는 게 아니라, 최소한 성적 측면에서 욕구의 발현이 남성의 그것에 비해 훨씬 엄혹한 감시의 대상은, 반도나 대륙의 형편에 비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아마네는 이런 사회의 규정과 제재 중, 일부는 그 규범의 정당성에 동의하면서도(예컨대 남편이 아내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 등),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로서 정직히 느끼는 본능의 충족과 추구에 대해 왜 죄책감을 느껴가며 억눌러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의 그녀가 또래 친구(남성)와 함께 책을 찾아가며, 성기의 결합을 어떤 식으로 이뤄야 최상의 기쁨이 찾아진다는 건지, 학문 연구나 이어가는품으로 열심히 "발견"하는 과정은 그래서 우습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그처럼 당연하게 여겨왔던 모든 관행과 개념이, 언제나, 어느 환경에서나 그리 당연하게만 여길 건 아니었다는 새삼스러운 반성도 갖게 돕더군요.

특히 광고업계 종사자들이나 증권맨들이 룸이나 단란 갈 때 농담(아주 저속하지만)으로 하곤 하는 소리가, "야, 어떻게 가족하고 성관계를 하니?(저는 이런 농담을 아주 혐오하곤 했는데, 지금 읽은 이 책 내용과 직통으로 관련성을 띤 코드라서 도저히 인용 안 할 수 없는...)"라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그래서 여성들과 바람 피운단 소립니다). 근데 그런 저속한 농담을,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과 동기를 지닌 타국 작가의 작품 속에서, 다른 함의의 같은 워딩으로 만나게 될 줄은 전혀몰랐네요. 사실 우리 주변엔 이미 "관계 없는 부부"도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노년의 불화 때문에 "졸혼 상태"에 빠진 이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성관계 자체에 혐오감을 느껴 플라토닉한 상태로 가고 싶은 이들(젊은 커플들)의 현상을 주로 가리키는 거죠. 또, 그 원인이 사회적 부적응이든 뭐든 간에, 자신만의 세상에서 "캐릭터 성애"에만 빠져드는 고립형 인간도, 최소한 일본에서는 무시 못 할 표본집단을 이뤄가는 게 현실입니다.

성과 육욕이 사라져가는 세상, 또한 이를 자발적으로 불결하다며 멀리하는 대중의 동의를 얻어 관습과 본능이 바뀐 세상은, 아마 전작 <편의점 인간>과는 달리 우리 한국 독자들 사이에 큰 공감을 얻지는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제가 느끼기로, 우리 주변의 일부(솔직히 대다수)는, 여전히, 자신 개인의 여건이 허락하건 말건, 열렬히 바라고 추구하고 틈만 노리다 범죄적 실행에까지 옮기는 한심한 행진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까짓것 깨끗이 포기하고 나니, 뭐하러 그 한심한 원시적 충동에 그리 끌려다녔는지 모르겠다"며 쿨하게 말들을 쏟아내는 이 픽션 중의 풍속도가, 아주 생경하게 들리지만은 또 않습니다. 그 역시 가능한 경우의 수 중 하나로, 인간 진화의 경로가 택할 수 있는 방식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저는, 전통적 방식(그러나 우리에게는 존재의 불가결 양상이자 모두스 비벤디)을 두고 "비위생적"이라며 경멸하는 그들의 태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체액 교환은 어느 관점에서 봐도 비위생적인 게 맞으며, 생존에 미세하게나마 불리하다는 이유에서 진화와 친하지 않은 행태입니다.

성욕과 성행위라는 큰 쾌락을 포기한 후, 인류는 그럼 어디서 그 대체품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인간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쾌감의 강도가, 생산되는 정자의 경쟁력과 품질에 모종의 영향을 준다고는 생각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인공 수정은 새 성원 충원을 위한 능률적인 방식이긴 하나, 어쩌면 그런 식으로 인간이란 종은 생존을 위한 활력을 잃어가고, 품위 있고 고상한 도태 과정을 완수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작품 중에 언급되는 "최후의 아담과 이브"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최종적으로 상실하는 비극을 암시한다고 봅니다. 가장 인간다워지는 순간에 사멸해버리는 인간 고유의 개성. 이는 결말에 이르러 현실화하는 "남성 임신(똑같이 10개월을 채웁니다)"의 등장으로, 전복을 통해 맹렬히 희구되는 동물적 본능과 번식욕을 우리 독자 앞에 내세움으로써, 과연 본능이 무엇이고 그에 대한 우리의 합의나 확신은 얼마나 단단한지 근본의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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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박스 - 컨테이너는 어떻게 세계 경제를 바꾸었는가
마크 레빈슨 지음, 이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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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당연한 듯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두꺼운 책 <더 박스>는 재미있고 생생한 묘사와 설명, 그리고 경제와 경제학 상의 중요 이슈와 의문을 규명한 재치와 통찰로, 세계적 화제를 모은 경영 논픽션입니다. 개정완역본의 한국어판에만 실린 저자 서문에는, 어느 외국 기자의 아티클로부터 인용하여, "폐소공포증에 걸릴 것만 같은 부산의 어느 도로에서 해안을 내다보아도 도대체 바다가 보이질 않는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블록처럼 몇 층으로 쌓인 컨테이너들이 시야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재미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폐소공포증" 운운은 그리 달가운 표현은 아니지만, 실제 부산의 끔찍하게 열악한 도로망 사정을 감안할 때 실감나는 지적이긴 합니다. 그리고 겹겹이 진을 친 컨테이너 야적 환경이 해안선 감상을 방해한다는 말도 마치 사진처럼 정확합니다.

이 책의 저자 마크(Marc) 레빈슨 교수(전직 이코노미스트 금융 담당 편집자)는 "컨테니어 운송이 그리 당연하거나 자연스럽지만은 않았던 시대"를 실제로 살아 봤을 만큼 나이 지긋하신 분입니다. 광안리나 해운대 등 주거지구 쪽에선 그리 자주 눈에 띄는 광경은 아니지만, 어쩌다 집 근처를 벗어나 서쪽으로 이동하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게 거대한 컨테이너들의 야적 상태였습니다. 어린 눈에는 그게 흉물 이상으로 비춰지질 않았는데,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부산이 뉴욕이나 함부르크 등 유수의 무역항을 제치고 세계의 으뜸 항만 중 하나로 우뚝 서고, 나아가 한국이 굴지의 무역 대국으로 올라서게 된 건,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 이 컨테이너의 발명 덕분이었다"는 거죠. 그저 당연할 뿐 아니라, "시시하고 흉하게까지 보였던" 것이, 사실은 "무역대국, 혹은 일류 항만으로 성장하기에 근본적 한계(거대 시장인 북미와 서유럽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입지 조건 때문)를 지녔던 도시와 국가"를 부강하게 키워 준 은인이었던 셈입니다.

컨테이너 운송 시스템의 고마움을 알려면, "컨테이너 이전에는 과연 무엇으로 해상 운송을 했을까"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책은 챕터 하나를 할애해서, 이른바 "브레이크 벌크 방식"으로 통칭되는(제 생각에는 이 역시 retronym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즉, 컨테이너 방식이 출현하고 나서야 종전 시스템을 그리 부르게 된 거죠. 마치 스마트폰- 피처폰의 관계처럼요), 불과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각국 무역항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매우 비싸고 더럽고 혐오스러우며 범죄적이기까지 했던" 시스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 1장을 보면, 불과 반 세기 전만 해도 세상이 이처럼이나 불편하고, 안심할 수 없는 곳이었음을 알고 경악하게 됩니다.

어떤 나라도 자급자족으로 모든 경제적 수요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부족한 물자는 외국에서 들여 와야 생활이 곤란해지지 않습니다. 한편, 같은 나라 안이라고 해도 특정 지역에 모든 물자가 고루 공급되거나 산출될 수는 없고, 다른 멀리 떨어진 고장에서 물산을 사 와야 하는 게 일반적이죠. 그러자면 항구를 통해, 원격지에서 누군가가 보낸(판매자일 수도 있고, 친족이나 지인이 선의로 부쳐 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품을 들여 오는 게 필수입니다. 헌데, 그 운송비가 막대하여 물건 값보다 더 비싸게 치이거나, 운송 과정이 엉망으로 관리되어 분실, 도난이 일상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세상에서는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어려울 뿐 아니라, 평온한 개인의 일상마저 위협 받을 수 있습니다.

부두 노동자들이 운송품을 험하게 다루거나, 아예 포장을 뜯고 물건을 훔치거나 (음식, 주류의 경우) 마구 소비하는 건 (앞서 말했듯) 불과 반 세기 전만 해도 매우 흔한 행태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 건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나빠서 그를 보상, 보전"한다는 게 명분이었다고 하니 기가 차죠. 운송비가 치솟는 건 이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불법 파업 등 실력행사로 인한 임금 인상 뿐 아니라, 업종의 현실에 걸맞지 않은 2교대 근무가 만연하는 등(비번일 때는 휴식을 취하는 게 아니라 근처 술집에 가서 고주망태가 됨) 임금이 노동생산성을 지나치게 초과했기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애써 생산된 부가가치의 상당부분이, 세금도 안 내는 매춘부, 혹은 뚜쟁이나 포주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뿐이라면 전체 경제 성장에 이로운 영향을 줄 리가 없죠.

또한 기껏 생산된 혁신적 상품이, 단지 운송(비)의 제약 때문에 소비자에게 적절한 가격으로 공급되질 못한다면, 전체 경제가 활력을 얻고 살아나는 효과가 지속될 리 만무합니다. 저자는 정통파 경제학자답게, 수백 년 전 고전파 경제학자 리카도의 말을 인용하며, "운송비 0의 세계가 본디 이상적인 자유무역 모델의 큰 전제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운송비가 전체 원가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구조에선 시장 경제의 혜택을 모든 경제 주체가 누리기 어렵다는 점을 일찍부터 간파한 소치라는 거죠. 이처럼 이 책은 정통 경제학자의 시선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저널리스트나 일반 논픽션 작가의 책과는 달리 "학문적 바탕"이 탄탄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학부생 경제학도가 시선을 넓히기 위해 부교재로 읽기 알맞은 책인 이유입니다.

무역 일 처음 하시는 분들(신입사원)이 어려워하는 게, 대체 "브레이크 벌크" 같은 용어의 뜻이 헷갈린다는 겁니다. 무역용어(혹은 영어)라는 게 말만 책에서 배워 알 수가 없고, 시스템 전체를 파악하는 눈이 길러져야 애매모호한 개념들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브레이크 벌크"에서 포인트는 "벌크"가 아니라, "브레이크"입니다. 화물이 통할하여 한 단위로 관리되는 게 아니라, 화물 하나하나마다 포장이 따로이며 운송자가 적재와 관리에 "개별" 노력을 기울여야 하죠. 뿐만 아니라 육상 운송, 항만 적재, 선적, 이송, 하역 등이 다 개별(수동) 과정을 거친 후에야 제 임자 손에 들어갑니다. 한마디로, "자동화", "연속성", "표준화"가 결여된 성질이 저 "브레이크"라는 말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 재래식 브레이크 벌크 시스템으로는 국제 무역에서 수지를 도저히 맞출 수 없다는 게 이미 1950년대부터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지적하는 바였다고 책에는 나옵니다. 이 오래된 장애, 그러나 누구도 타개할 생각을 못 했던 애로사항을 두고, 말콤 맥닐이라는 어느 트럭 운송업자가 처음으로 "까짓것 어디 다 갈아엎어보자"는 야심을 품었다고 합니다. 책에서도 지적하듯 본디 이 사람은 해운 운송에 대해 문외한, 국외자나 다름없었는데도 이런 "엄청난" 업적을 이뤄낸 거죠.

이 책은 "컨테이너 박스 시스템"의 "생애"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운송업의 거인, 원가 절감의 혁신가" 말콤 맥닐의 평전도 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본디 영세한 트럭 회사 사장에 불과했고, 어차피 제살깎아먹기가 고작인 육상 운송(도로 운송이나 철도 운송 분야 모두)에서 경쟁 자제, 담합 같은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당시에, 천재적인 아이디어와 수완으로 업황을 재편했습니다. 신규 노선 면허가 나지 않으면? 기존 업자한테 사들이면 됩니다. 트럭이 부족하면? 유휴 자원을 가진 이들에게 임차(책에는 임대라고 되어 있습니다만...)하면 되죠. 비싼 값을 주고 차를 지입해 봐야 남는 게 없다면? 이 당시 미국 정부는 제대군인 지원책의 일환으로, 저리 융자(혹은 보조금 지급)를 통해 트럭을 한 대씩 구입하게 해서 생계를 잇게 권했다고 합니다. 맥닐은 바로 이거다 싶어, 싼 값으로 트럭을 들인 제대군인들을 대거 채용, 시설 투자 문제를 해결했다는 거죠.

뿐만 아니라 그는 연료 소모를 최소로 줄이는 트럭 개조에도 관심을 쏟았고, 한 번 노선을 달리고 빈 차로 돌아오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 각종 운송 패턴의 실사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같은 노선을 달려도 원가를 최소로 줄이는 방식을 개별 운전자에게 교육시켰고, 이들을 모범 운전자로 만든 후 후배들에게 그 방식 그대로를 전수시키는 인센티브를 마련했죠. 그의 경영 방식을 보면 경영학 각론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교의의 가장 모범적인 실전 응용이나 다름 없습니다.

육상 운송을 제패한 그가 다음에 눈독을 들인 건, 매번 느려 터지고 의욕과 활기가 없고 비리와 비효율은 몽땅 다 갖춘 듯한 항만 운송 방식이었습니다. 이 영역에서 엄청난 원가가 발생하는 이상, 어떤 매력적인 상품도 한번 물을 건너면(잘 건너기나 하면 그나마 다행이죠) 다른 시장(외국)에서 도대체 팔릴 가망이 없습니다. 맥닐이 꿈꾼 방식은, 육상에서 표준화한 "상자, 박스"에 실린 상품들이, 항만에서도 그대로 기계가 번쩍 들었다가 배 안에 차곡차곡 사뿐히 올려 놓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손을 번잡하게 거칠 것도 없고, 무한대에 가까운 노동과 정성도 발휘될 필요 없으며, 혐오스러운 절도범의 손길이 장난을 칠 가능성도 최소로 줄어드는데다, 포장과 운송이 튼튼하기까지 한 방식, 상상력이 풍부하고 도전 정신이 강한 그의 머리 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광경이었습니다.

파는 사람, 사는 사람, 항만 당국, 운송 회사 모두가 만족할 만한 시스템이었으나, 발전을 거부하고 기존 방식을 맹목적으로 고집하는 세력은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전문가라는 이들도 "컨테이너 방식이 기존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대체하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을 장담하는 풍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어떤 항구 도시는 많은 돈을 들여, 재래식 운송에 필요한 인프라를 새로 대대적으로 건설하기까지 했으니, 판이하게 바뀐 미래가 코 앞에 닥쳤는데도 애써 현실에 눈을 감는 인간의 둔감함이란 이 지경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맥닐이 대세를 타고 대박을 친 데에는, 당시 막 기하급수적 성장을 일궈 나가던 일본에서 대세를 바르게 내다보고, 신식 컨테이너 항만을 대거 건설했던 기막힌 운수도 작용했습니다.

맥닐의 방식이 마냥 옳았던 건 아닙니다. 앞서 "없으면 빌리면 된다"는 게 그의 수완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는 차입 경영의 대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엄격한 기준으로는 아찔할 만큼, 뭔가 전망이 보이면 바로 가진 전부를 다 쏟아붓는, 소위 "분산 투자의 원칙" 따위는 정면으로 무시하는 과감한 행보와 결단이 그의 특징이었습니다. 이것만큼은 경제/경영 교과서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거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고 털어 놓기도 했으며, 우리의 예를 보면 실제 이병철씨 같은 인물이 말년에 그처럼 반도체에 올인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삼성은 없었을 겁니다. 그럼 우리도 이런 방식을 따라해야 하느냐? 그건 또 아니죠. 맥닐도 위험할 때에는 과감히, 그간 애써 가꿔 온 사업을 팔아치웠으며, 차입도 자제했습니다. 무작정 차입 곡예만 벌이다 결국 파멸을 맛본 예로는 김우중 회장 같은 분이 있죠. 그래서 언제 "고"를 외치며, 언제 "스테이"를 할지가 어려운 겁니다. 이걸 일일이 촉으로 맞히는 사람은 진짜 하늘이 낸 거고요.

컨테이너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산업 번영과 무역 활황은 없었을 것이다? 대체 그 투박한 직육면체 상자가 뭔데 말입니다. 이 컨테이너가 지금 이런 표준화한 모양이 되기까지는, 역시 맥닐 등 많은 선구자들의 시행 착오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맷슨 내비게이션(현 Matson, Inc.)은 맥닐의 회사와 함께 유력한 경쟁자였던 굴지의 업체였는데, 책에서는 두 업체의 상반된 경영 스타일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습니다. 맷슨은 OR(작전 연구. 혹은 경영수학이라고 번역되는)의 창시자 격인 분이 경영에 합류하는 등 이지적이고 우아한 방식을 추구했는가 하면, 맥닐 쪽은 창업자의 개성처럼 밑바닥부터 일단 부딪혀가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일이란 거죠. 저자는 도요타의 그 유명한 JIT 방식도 이 컨테이너의 발명이 없었더라면, 선적까지 무한정 기다리며 재고비용을 소진하는 등의 한계 때문에 출현하지 못했을 거라고 합니다. 싱가포르 역시 국제 무역항으로서 오늘날처럼 번영하는 위상이 아니었다고도 하고요.

요 몇 달 전 한진해운의 파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해운 산업의 엄청난 리스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책에도 잘 나오듯, 컨테이너 운송 방식이 정착하고 나서도 마냥 해운회사들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 건 아닙니다. 일단, 기존의 방식은 해운 경기가 불황이다 싶으면 노동자를 정리해고한 후 고정비 지출을 줄이면 됩니다. 그러나 이 현대식 자동화 시스템을 유지하려면, 거액의 시설 임차료나 유지관리비는 일감이 있든 없든 지불해야 하며 전혀 융통성이 없습니다. 신문기사에서 왜 "해운업은 주기적으로 엄청난 위기가 찾아오며, 이 위기를 잘 넘긴 곳만 다음에 기회를 맞이한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분들이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 답이 그대로 나옵니다. 바로 컨테이너 시스템이 몰고 온 빛과 그림자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무역과 해운으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우리들이, 대체 무엇이 오늘의 편익을 가져다 주었는지 곰곰 진지하게 생각하게 도와 줄, 흥미로운 "역사책이자 전기"입니다. 결코, 당연한 게 당연하지만은 않았다는 진리, 박스가 인간에게 깨우치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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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애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소년 브라이스의 할아버지(외조부입니다)가, 브라이스의 깊고 푸른 눈, 환한 미소에 빠져 정신 못 차리는 중인, 같은 학교 친구 소녀 줄리(애나) 베이커에게 들려 주는 말입니다. 이 할아버지는 평소에 말씀도 잘 하고, 유쾌하며, 여러 면으로 매력이 넘치는 분인데, 이상하게도 브라이스(와 그의 가족) 앞에서는 그저 엄격하고 과묵한 모습만 드러내 왔습니다. 그 이유가 뭐였을까요? 할아버지는 이런 말도 합니다.

"걔가 제 아버지도 많이 닮았지."

할아버지에게는 릭 로스키(자신의 사위이자 소년 브라이스의 아버지)가 영 눈에 차지 않나 봅니다. 이런 던컨 노인이, 줄리애나 베이커가 자신이 아끼던 플라타너스의 벌목(땅 주인이 소유권에 기해 적법히 행사하는 조치)을 막으려고 나무 위에 올라갔다는 신문(지역 저널이겠죠) 기사를 읽고, 이 소녀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브라이스는 이 외할아버지를 잘 모릅니다. 브라이스가 다소 서운한 게 있다면, 외할아버지 역시 자신을 알려 들지 않아 보인다는 거죠. 그러던 분이 고작 "그 줄리라는 애가 누구래니?"를 묻기 위해 처음으로 자신과 친해지려 들었다는 게 더 서운합니다. 허나 크게 개의치는 않았습니다. 브라이스는 나이가 아직 어린 탓도 있지만, 매사를 피상적으로 대하고 현재의 풍족한 상황에 만족할 뿐인, 다소 어리석은 남자애라서이죠. 반면 브라이스의 친누나 리네타는, 생각 없는 이 남동생이 싫고 아빠와 엄마(아빠만큼은 아니지만)와도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소설 후반부에서야 잘 드러납니다만 이 리네타는 가난한 베이커 씨네 쌍둥이(나중에 뮤지션이 되고 싶은)를 좋아하나 봅니다.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없는 열정, 정직함, 재능, 생의 바른 방향을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능력 등을 부러워해서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사실상 줄리라고 봐야겠습니다만, 소설은 무슨 까닭인지(아니, 이유는 우리가 다 알고 있죠) 소년 브라이스와 소녀 줄리의 시점이 매 챕터마다 교차되며 전개됩니다. 같은 사건인데 먼저 브라이스(이 점도 우리 독자들이 눈여겨 봐야겠습니다. 왜 브라이스가 먼저인지)의 시점으로 사건이 묘사되고, 그 다음은 같은 일을 두고 줄리 버전으로 설명하는 식입니다. 처음 브라이스가 본 줄리는, 잘생긴 자신에게 쓸데없이 스토커처럼 들러붙어 말을 거는 "수다스러운" 여자애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멍청한 브라이스의 속은 신경도 안 쓰고, 줄리는 자신에게 발표 대회 그랑프리를 안겨다 준 "닭 사육"에 온갖 정성을 다 쏟은 후, 시가 100불 상당의(ㅎㅎ) 계란을 매번 브라이스에게 갖다 줍니다. 베이커씨네 뒤뜰이 아주 지저분하다는 걸 알게 된 브라이스는 가뜩이나 성가시고 못생긴 줄리의 계란을 쓰레기통에 족족 버리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줄리는 (야무지고 당찬 성격인데도) 너무나 마음이 아파 브라이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 후 자리를 뜹니다.

처음에 저는 줄리가 플라타너스 위에 올라가는 걸 보고, 공부는 못 하고 반사회성만 강한 애인가보다 짐작했는데, 그렇지 않고 (저 대회에서 다양한 미디어를 손수 제작하여 빼어난 PT를 성공시킨 거만 봐도 알 수있듯) 머리가 좋고 영리한 아이더군요. 소설 후반부에, 로스키 씨 집에서 열린 정찬 모임에서도, 어른들과 "영구 기관"에 대한 토론을 거침없이 이어갈 정도인 그 지식 수준만 봐도 알 수 있죠(물론 아직 "극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질문[매우 적절하긴 했으나]을 던저야 하는 단계이긴 합니다만). 브라이스는 머리가 나쁘고 이해 수준이 떨어져 이런 대화에 단 한 마디도 거들지 못합니다. 그가 보기에는, 할아버지 던컨이나 줄리나 다 "수다스러운 인간"의 범주에 들어갈 뿐입니다. 어떤 바보도 다 자기 수준에 맞춰 판단하기 마련이죠.

이런 브라이스가 바뀌기 시작한 건, 뭔가 듬직하고 "완성되어 보이는" 던컨 씨(즉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신문을 가리키며 "겉모습 밑에 가려진 내면을 보라"고 말한 후부터입니다. 그 후 계란 사건이 터지고, 베이커 씨(줄리의 아빠)에 나란히 선 자신의 부친(릭 로스키)의 초라한(분명 손꼽히는 미남자인데도) 모습을 보고, 자신에게 뭔가 근본적으로 부족한 면이 있음을 자각하고 나선, 이제 줄리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반면 줄리는 계란 사건 후, 이 브라이스가 생긴 것만 멀쩡할 뿐 많이 모자란 애라는 걸 깨닫게 되죠(이후에, 개럿 등 질 나쁜 애들과 브라이스가 함께 모여 자신의 장애인 삼촌을 험담하는 것도 엿듣게 됩니다). 던컨 씨도 그런 쪽으로 말했고, 엄마한테서 "20년 만에 남편의 참모습을 엿보고 매번 싸운다"는 팻시 로스키 여사(즉 브라이스의 엄마)의 말을 전해 들은 후로는 더욱 그렇습니다.

"난 로스키 아줌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은 곧, 브라이스 같이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애와 사랑에 빠져 이후 불행해지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팻시 로스키 여사는 한편, 남편이 느닷 비열하고 찌질한 추측성 험담을 마구잡이로 내뱉는 태도에 충격을 받습니다.

"걔들이 돈이 어디서 나서 데모음반까지 만들었겠어? 분명 마약 같은 걸 팔았겠지."

사실 릭 로스키 씨가 충격을 받은 건, 자기 상식이나 기대에 맞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과거의 좌절된 자신의 꿈, 즉 음악가가 되려 했으나 실패했던 기억이 되살아나서죠. 당시 그는 여건이 허락지 않아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적당히 자위하며 넘겼으나, 이번에 베이커 씨네 쌍둥이의 모습을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자신은 첫째 재능이 전혀 없고, 둘째 꿈을 이어가기 위한 진지한 열정도 없었으며, 셋째 인생의 각종 어려움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항상 적당한 도피와 외면, 왜곡으로 때웠다는 자책과 자괴가 밀려왔기 때문이죠. 이제 그는 고통스럽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게 된 꼴입니다. 그러니 애먼 아이들한테 "마약상"이란 정신 나간 누명을 씌워야 직성이 풀렸겠고, 그 부인 팻시는 이 순간 남편의 비열한 인격을 눈치채게 된 겁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 어리석음을 남 탓으로 언제나 치환하고 보는 열등 분자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마지막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소년 브라이스가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같은 전철(즉 아빠 릭)을 밟지 않기 위한 발버둥에 나섰다는 겁니다. 그 방법이 바로, "알고 보니 매력덩어리"였던 추녀 줄리와 사랑에 빠지는 거죠(여기서, 진정 성장이 필요한 브라이스 입장에서 "성장담"이 본격 펼쳐질 걸로, 소설에서 생략되고 만 후일담[언제 나오려나요?]을 우리는 기대할 수 있습니다). 허나 줄리가, 이제 만정이 떨어지다시피한 브라이스를 다시 받아줄지는 의문입니다. 여튼 브라이스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줄리 같은 당찬 애를 매혹시킬 수 있었던 잘생긴 용모를 갖추긴 했으니 말입니다. 이도저도 아무것도 안되는, 그저 속물이기만 한 다른 인생은 어떻게 해야 답이 나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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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브레인 - 삶에서 뇌는 얼마나 중요한가?
데이비드 이글먼 지음, 전대호 옮김 / 해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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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잘 알고 있어야 할 대상이 여전히 미지의 장막에 싸였다는 그 사실이, 어쩌면 우리의 관심을 더 집중시키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저는 어떤 어휘를 고르고, 책의 어떤 내용을 보다 부각하며, 그 전에 책에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먼저 기억을 해야 서평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건 타자를 치는 손가락에도 의존해야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이지만, 그보다는 우선 뇌, 머리에 기대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히포크라테스 이래 수없이 반복되어 온 외-내과 수술, 혹은 시신에의 부검을 통해 신체의 다른 부위에 대한 지식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내장 기관이나 혈관, 골격의 구조, 힘줄의 작동 등에 대해서는 웬만큼 알고 이식과 교정에도 능숙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해가 충분하지 못하며, 근래 늘어난 약간의 지식에 기댄 것만으로 어느 응용공학 분야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둔 신체 부위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의 뇌입니다. 머리를 써서 만물의 영장이 된 인간이건만 아직 그 머리의 동작 원리를 충분히 모른다는 역설이 수 많은 천재들의 도전을 유발하며, 연구를 거듭할수록 더 큰 신비,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비로소 처음 일깨우는 미지가 도사렸다는 점이 더욱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이 책 역시, 우리들의 의문을 시원하게 풀어준다기보다는, 열심히 애 써서 지금 여기까지에나마 올 수 있었다는 현황의 정리, 보고에 가깝습니다. 다만 최고의 전문가가 최고의 필력을 구사하여 쓴 책이기에, 어느 책보다 쉽고 유익하게 읽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손이나 발, 심장, 간 등의 구조, 혹은 각종 호르몬의 생성과 기능에 대해 배우는 건 문외한이나 그 지식을 생업으로 활용할 일 없을 이들에게도 매우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심오한 철학이나 생의 근본 원리로까지 이어질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뇌"에 대한 연구, 천착은, "나는 누구일까", "실재란 무엇일까?" 처럼, 먼 예전의 현인들이 "머리"를 싸매고 연구한 과제에 대해서까지 어떤 해답, 적어도 의미 있는 시사를 줄 수 있습니다. 저자는 "머리만 (다른) 신체에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 신체 역시 머리와 긴밀한 상호 작용을 주고 받는다"고 하시며, 마치 인간의 뇌가 생각만큼 절대적인 비중은 아님을 슬쩍 흘리는 듯 무심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바로 저자께서 이 책 중에 잘 설명하고 있듯 사실이 어디 그렇겠습니까. "존재의 해명"은 인문, 철학, 문학의 전 역사가 그 존재 이유를 걸어 온 의문입니다.

책의 상당 부분은 결국 "자유의지"에 대한 집요한 탐구로 연결됩니다. 뉴턴이 외계(물리계)에 대한 거의 완전한 해명을 이뤄 낸 이래(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고, 여튼 위대한 업적임에는 틀림 없죠), 유럽의 지성계는 오히려 내면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져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지로 의사를 결정하는지, 아니면 모든 것이 에고와는 무관하게 이미 결정되었는지를 놓고 끝없는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양자역학은 사물 질서에 있어 "무작위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규명하여, 다시 이 논쟁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 책은 근래 발전한 뇌과학의 성과를 소개하며, 우리가 어느 순간 우리의 의사를 "결정"한다고 믿는 건 큰 착각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여러 뉴런은 (아직도 그 과정이 명쾌히 밝혀지지 않은 모종의 메커니즘을 통해) 무엇인가(무엇이 되었든 간에)를 타협적, 절충적으로 결정하며(그의 경험, 취향, 생존 가능성에 대한 전망, 냉정한 계산 등 개인차가 있을 여러 요소에 의해), 다만 이를 자유의지에 의한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기제의 힘까지 덧입어, 그 의사결정 주체(허구입니다만)를 안심하게 한다는 거죠. 그러니 내가 내리는 결정은 내가 내리는 게 아니며, 더 나아가 "내"가 과연 있기나 한 건지에도 근본 의문이 생깁니다.

보는 건, 듣는 건 과연 우리의 경험일까요? 저자는 "마이크"라는 한 장애인의 임상례를 소개하며, 우리가 보거나 듣거나 맛본다고 믿는 지각과 체험의 실체가 무엇일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는 아주 어린 나이에 각막이 손상되어 아무것도 못 보는 상태였는데, 의학이 발전되다 보니 이런 경우, 즉 그저 각막"만" 다친 경우는 그 부위만 잘 다스려 정상의 시각을 되찾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의료진은 주목했습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그는 당연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이게 웬걸, 그는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웅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답니다. 혼란스럽게 여러 신호(빛)이 감지되긴 하는데, 그게 뭔지도 모르겠고, 이를 자신의 행동에 어떻게 연결시켜 해석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고 했다는군요. 눈이 먼 시절부터 그는 스키를 자주 탔으며 그럭저럭 능숙하게 동작했는데, "시력"을 되찾고 나서는 스키 실력이 오히려 떨어졌다고 합니다. 도움도 안 되고 익숙하지 않은 정보가 자꾸 들어오니 집중을 전보다 더 못하게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우리는 알고 보면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머리로 보고 있었던" 셈입니다. 본다는 건 외계의 객관을 눈을 통해 정확히 접수, 재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단편적이고 불명료한 정보들을 뇌가 재구성, 시뮬레이션하는 작업에 불과했죠. 다만 우리는 앞서의 그 기제에 의해 "우리가 직접 본다고 착각"했을 뿐입니다. 만약 헬렌 켈러가 갑자기 시각을 되찾게 되었다면, 그는 앞서 마이크가 겪은 시행 착오나 곤란을 덜 겪었을까요? (물론 그는 다발 기관이 손상된 중증 장애인이라 저렇게 간단한 한 차례의 수술만으로는 시력을 찾기 어렸웠겠습니다만)

순전히 상상이지만 제 생각으로는 아마 그랬을 것 같습니다, 헬렌 켈러의 경우 적성이나 성격이 유별나서이건 조력자의 능숙한 도움과 지도 덕분이었건 간에, 센서의 도움을 상당 부분 대체할 만큼 순수하게 뇌의 지력과 기능이 발달한, 매우 드문 예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평소부터 "보고, 듣는" 훈련을 열심히 해 온 그는, 더군다나 여성 특유의 섬세한 심성까지 곁들여져, 가상의 체험과 진짜(이 책에 의하면 심지어 그마저도 진짜가 아니라고 합니다만) 감각의 초기 불일치를 단시간에 극복하고, 정상인처럼 볼 수 있는 단계로 금세 진입했을 것 같습니다. 저 마이크의 사례에서 "소리가 났다"고 하는 진술도, 그는 여태 모든 자극을 청각으로 소화했기에 그런 느낌을 받았을 뿐, 실제 빛의 진행에 어떤 소리가 날 리가 없습니다.

재미있는 뇌의 가소성, 혹은 융통성에 대한 평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일관된 취향과 지향성을 가진 존재라고 자부하지만, 사실 뇌는 개체가 무난한 생존이 가능하게끔 끝없이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수정하며 (이게 가장 중요한데) 최적화합니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뭔가 달라져 있지만, 우리는 그를 쉽게 인지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인정하기도 거부하려 드는 성향입니다. 이런 마음대로의 착각을, 뇌는 오히려 따스이 편안히 허용하거나 돕고, 우리는 그런 착각 속에서 자아의 (가상적) 연속성이 유지되는 양 안심하며 살아갑니다. 뇌는 자신이 속한 개채를 오히려 아기 돌보듯이 보살피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뇌는 특히 다른 이들의 감정을 파악하며, 언어 외적 신호를 민감히 살피는 쪽으로도 진화했습니다. 이 부분이 태어나면서부터 손상된 이는 타인과 원활히 소통할 수 없고. 몇 번의 쓰라린 실패를 거치거나 아예 시도조차 안 한 채 자신만의 고립된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간혹 특이한 경우도 있어서, 전혀 근거 없는 자아 하나를 지어낸 후 남에게 무작정 인정하라며 강요하는 기이한 패턴을 보이는 인간도 있습니다. 이런 변형된 자폐증 환자의 경우 어떤 식으로 뇌가 손상되어서 그런 행태를 보이는 건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체험과 지각과 성취와 감정은 각각 독특한 "패턴"으로 개인의 뇌 뉴런에 각인되고, 이 독특한 패턴이 각 개인의 인지 능력과 속도, 개성의 차이를 낳습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나이, 비슷한 체험 과정에도 불구하고 다른 개체보다 훨씬 뛰어난 학습 능력을 보이거나,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하며, 나아가 행복한 일상을 영위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행동 양식이 미숙하기 짝이 없고, 그저 내가 맞다며 우기는 것 외에는 어떤 현실 대처 방식도 발전시킨 게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설령 뉴런 패턴의 장난으로 의사 결정을 대행할 뿐이지만(그러고도 스스로 했다며 착각하는 이중의 함정에 빠지지만) 이처럼 개인별로 주체적인 패턴을 이룰 수 있기에 위대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하긴, 그 역시 뉴런 컴포지션이 교묘히 유도하는 또하나의 착각 기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차피 낱낱이 해명되기에는 아직 길이 너무나 먼 과제 아니겠습니까? 그때까지는 최대한 착각의 행복에 빠지는 것도 인간만의 특권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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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아시아 - 세계경제를 뒤흔드는 아시아의 힘
KBS <슈퍼아시아> 제작팀 지음 / 가나출판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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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출판사가 KBS 다큐멘터리와 연계하여 펴 내는, 몇 년씩마다 나오는 이 기획(단, 직전 편 "미국" 권이 나온지는 몇 달 되지 않았습니다)에서, 이번 주제는 "슈퍼아시아"입니다. 동남아시아권에서 여전히 인기 높은 SM의 아이돌그룹 슈퍼쥬니어...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요. 세계의 경제 성장 동력으로서 지난 십년기 동안 신나게 가동되던 중국의 움직임과 활기가 최근 눈에 띄게 죽은 듯한 지금, 어디를 주목해야 우리 사업체의 미래가 보이겠으며, 세계의 경제 새 심장 정확한 부위를 자극해야 효과적인 제세동(除細動)이 가능할지, 다들 고민에 잠길만한 시점입니다.

이 책 제목을 다시 보십시오. "슈퍼 아시아"입니다. 대체 어디를 가리키는 걸까요? 우리의 미심쩍인 짐작은, 결론만 놓고 보면 그리 틀리지 않았습니다. 유럽의 자원과 토지(본디부터 빈약하고 협소합니다), 상상력과 활기와 창의력은 고갈된 지 오래입니다. 끝도 없을 것 같던 미국의 부존자원과 광활한 토양도 어느새 인종과 계급, 신념과 지향성의 갈등 끝에 슬슬 그 한계가 보입니다. 반면 아시아는 아프리카처럼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갈등이 극심하지도 않고, 특히 동남아시아는 최근 지도층이 실리 위주의 약아빠진 정책을 본격 구상하면서 사회 제 세력 간 타협이 이뤄지거나, 혹은 (지난 수백년 간 그야말로 죽어라 싸워 왔던) 인접국 간의 대립이 서서히 완화되는 추세입니다. 여기에, 노련한 중국 공산당(여튼, 이 책을 보면 그런 느낌을 부인할 수 없군요. 산전수전 다 겪은 장사꾼 트럼프도 그들의 수완에 혀를 내두르지 않았습니까)이 이 지역 정세에 개입하여, SOC 건설 비용을 대면서 무역 편의를 추구하거나 장기적 관점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추세입니다. 무엇보다, 살벌한 국경 분쟁과 자연 지형의 장애물들이 해소되고 나니, 라오스, 캄보디아 사람이 태국 회사에 다니며 월급을 받는가 하면, 미얀마와 태국의 국경에서 "관세 없이(이게 얼마나 중요한 팩터인지요)" 농민들이 장터를 열어 물품을 거래하기도 합니다. 동기가 무엇이 되었건,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도 넘은 이전부터 서양 기업과 정치인들이 꿈꾸던 "자유 무역"의 이상이 지금 전혀 뜻밖의 환경과 원인으로부터 현실화되는 중입니다. 이러니 "슈퍼 아시아" 소리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상하게도 우리는 중국을 제외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 현재 한창 개발이 진행 중이며 이제서야 부존 자원 등 자신의 장점에 주목하기 시작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일반 대중이 그렇다는 거고, 눈 밝은 이들은 이미 십여 년 전부터 현지에 진출하여 최대한 선점과 친숙해짐의 이익을 누리려 애써 왔습니다. 예컨대 라오스에 일찍 관심을 지닌 이들은 "적은 인구와 광대한 영토..." 같은 말을 합니다. 인구가 적은 건 그러려니 하는데, 그 좁은 동남아시아 구석에 박힌 나라가 클 데가 어디 있어서 영토가 광대하다고 하나? 뭐 이런 의문을 가볍게 제기할 만큼 우리는 무신경하고 그들에 대해 무지합니다. 객관적으로 라오스는 한반도 전체와 맞먹을 만한 영역이고, 그 중엔 개발과 번영을 기다리는 자격 갖춘 토지가 상당수인데도 말이죠.

오늘도 신문에 그런 기사가 났습니다만, 인공지능 분야에서 한국은 내내 제자리걸음인데 중국은 그간 의미있는 발전을 거듭한다고 합니다. 여태 짝퉁 수출로 종잣돈을 모았을 비천한 과거를 지닌 그들이지만,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고 그들은 그간 전망 있어 보이는 온갖 분야에 투자하여 여튼 외관상으론 의미 있는 결실을 낸 듯 보입니다(얼마나 내실까지 갖췄을지는 또 다른 평가가 이뤄져야겠습니다만). 이런 최첨단 분야의 혁신은 별개로 하고도, 최근 중국은 그저 노동집약적 구조의 이점에 얹혀 편한 길을 간다는 외부의 선입견을 보기 좋게 비웃기라도 하듯, 생산 자동화와 공정 개선을 통해 전에 없던 세련되고 효율적이며 지속 가능 발전 양상을 갖춘 모습입니다. 중국은 이제 우리가 알고 비웃던 예전의 중국이 아닌 셈이며, 책에 나온 대로 "쫓아가는 중국이 아닌 앞서 나가는" 퍼스트 무버가 슬슬 되어가는 셈입니다. 우리로서는 참 조바심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죠.

인도는 어제도 뉴스에 난 것처럼, 히말라야 인근의 지정학적 구도를 놓고 중국과 영원한 앙숙일 수밖에 없는 사이입니다. 이런 인도도 십여년 전 유능한 경제학자 출신 총리가 이끌던 고도 성장 추세가 한풀 꺾이고 그간 주춤한 기세 같았으나, 우리가 모르는 새 내실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인도 하면 무작정 실리콘 밸리로 그 나라의 최우수 인재들이 떠나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세 얼간이>에서 보듯 무작정 주입식으로 공학 지식을 머리에 쑤셔 넣고는 원치도 않는 장래에 투입되어 신분 상승이나 바라는 이미지가 대부분이었습니다만, 어디 그런 불안정한 도약기에 내내 머물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이제는 내수가 뒷받침되고, 미국에서 충분히 수련받은 IT 인력이 다시 돌아와 지식 산업을 이끄는 반면, 제조업은 그것대로 다시 도약의 기회를 맞았습니다. 미국처럼 제조업 전반이 침체하고 너무 서비스업(아무리 첨단 고부가가치라도)만 발달해도 문제이고, 산업 전반이 이처럼 균형 있게 발전해야 비전이 생깁니다. 이제 중국처럼 "우주 개발"이라든가, 여타 선진국처럼 바이오 섹터에도 광범위한 투자가 이뤄진다고 하니 앞으로 이 거인의 웅비 행보가 기대되는 형국입니다.

인도차이나는 일단 프랑스가 그렇게 쥐고 놓지 않으려 했던 게 다 이유가 있을 만큼 풍족한 자원, 광대한 영토가 기다리는 기회의 땅입니다. 이런 나라들도 이제 자신들의 조건이 얼마나 유리했는지를 늦게서야 깨닫고, 부족 간 국가 간 상쟁(얼마나 치열하고 잔혹했는지는 역사를 공부해야 알 수 있습니다)을 멈춘 채 상생의 길을 도모합니다. 특히 주목되는 건 미얀마인데, 이 나라야말로 영국이 인도 못지 않게 공을 들여 식민지 경영에 나섰던 역사가 있죠. 그간 군부가 무능하게도 기득권만 유지하려고 철저히 쇄국 정책을 폈습니다만, 아웅산 수지 여사와 타협이 이뤄진 것도 "우리 잠재력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데 이대로 가면 망할 뿐이다"라는 위기의식이 이제서야 공유되었기 때문이죠. 하나 우려스러운 건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 탄압인데, 묘하게도 이 부분은 중국의 비호를 받아 국제 사회에서 유야무야 되는 느낌입니다. 사회간접자본 역시 중국의 대거 투자가 이뤄지는 양상인데, 이를 이용해 지역적 영향력을 지나치게 확대하려는 야욕을 현 지도층이 얼마나 잘 통제할 수 있을지 우려됩니다.

아세안은 또다른 정치단위입니다. 과거부터 이 국가간 협의체는 동작해 왔습니다만 그간 각국의 의견차가 커서 제 구실을 못하다가, 최근 이 지역이 새로운 경제 동력으로 부상하고, 이제서야 대화와 타협, 협력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지 각성한 모습이죠. 여기에도 최근 거두어진 중국의 성공에 자극 받은 바가 크다는 생각입니다. 일단 이곳은 일본, 인도, 유럽을 잇는 항로가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지이고, 최근 문제가 된 남중국해와도 인접해 있으므로 물류의 허브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많은 인구, 갓 성장하기 시작한 중산층이 두텁다는 구조 덕분에 세계 최대의 단일시장으로 꼽히기도 하죠. 이 책(나아가 방송 프로그램)이 한마디로 규정한 성격은 "넥스트 차이나"입니다.

이런 최근의 놀라운 발전상이 가능했던 건, 역시 중국 자본이 지원해 주는 SOC의 확충입니다. 인프라 하나가 깔리고 나서 얼마나 경제 활동이 수월해졌는지 지역 주민들이 그 효과를 알아 보는 거죠. 허나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옛 속담이 재현되는 꼴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기회를 잡으려면 일단 현지화에 성공하고 참된 믿음을 얻어야 하는데, 중국인들이 과연 그 과제를 잘 해나가는지, 아니면 또다른 제국주의적 모순을 키워 나갈 뿐인지는 의문입니다. 우리는 어설픈 우월감을 가질 게 아니라, 제국주의적 침탈의 아픈 역사를 그들과 공유한다는 일종의 연대의식을 키우며, 함께 공영 공존의 마인드를 성숙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없는 자원과 토지의 이점을 나누며, 우리의 경험과 자본을 그들에게 베풀며 이웃으로서의 위상 매김을 이루는 길이, 이들이 품은 방대한 이점을 최대한 우리 것으로 흡수하는 방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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