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한석희 외 지음 / 페이퍼로드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무슨 유행어라도 되듯 "4차 산업 혁명"을 어디서나 거론하고 화제로 삼습니다. 정작 물어 보면 시원하게 답을 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 권의 책을 읽어 보면 "아 확실히 경제와 산업의 기본 틀이 뭔가 근본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구나"하는 반응들이 고작이죠. 그저 기업 제품을 일상에서 소비나 할 처지에서도, "한 4, 5년 뒤면 구매해서 쓰는 아이템의 성격과 기능이 확 바뀌겠구나" 정도쯤이야 다들 감이 올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보라면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자율주행, 3D 프린팅(요 화두는 2, 3년 전에 비해 좀 뜸해졌네요) 등을 주입식 교육에 길든 수험생처럼 척척 대답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주입식 단답형 지식이 그 자체로 우리 삶의 구체적 개선, 질적 향상을 이루는 데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비록 틀린 대답은 아니라고 하나) 4차 산업 혁명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 혹은 현상 나열식 이해, 대외용 모범 답안 작성에 그치는 것도, 우리 자신(남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일임을 다시 강조합니다)의 미래에 대한 절박한 대처에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절박한"이란 형용사를 쓸 것까지 있냐고 되묻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4차 산업 혁명의 본질에 대해 아직도 서투르고 안이한 인식에 그친 겁니다. 종래의 1, 2, 3차 산업 혁명이 선도자, 챌린저, 혁신가에 대해 거대한 부의 선점 가능성을 열어 주는 정도였다면, 작금의 4차 메가 트렌드는 "뒤처지는 사람은 모두 도태"라는 슬로건을 대문짝만하게 걸었다는 점에서 앞의 흐름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이유에서죠. 1, 2, 3차 산업 혁명의 본질이 무엇이었든 남보다 성큼 앞서가려는 의욕이나 야심이 없는 이들에겐 별 큰 관심사가 될 수 없었으나, 이제 막 벌어지려는 산업판, 경제 필드의 대혁신은 거대 기업이든 미미한 소비자든 전방위적으로, 모세 혈관 수준의 파급력이 판을 휩쓸리라는 점에서 상황이 크게 다르다는 뜻입니다.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자율주행, 3D 프린팅 따위가 4차 산업 혁명의 "외연"이고, 그동안 나온 책들이 구체적인 업황과 사례를 통해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하려는 데 주력했다면, 이 책은 그 "내포"를 심층적으로 짚는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차별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현상과 사건에서 사실 진지하게 주목해야 할 대목은 "내부의 공통되는 본성"이며, 언제든 바뀔 수 있는, 혹은 후순위로 밀려날 수 있는 겉모습(물론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만)에 치중한다면 이후 혼란이나 착오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손가락보다는 달에 시선을 줘야 하고, 일단 달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면, 수시로 바뀌는 외양보다는 그림자에 감춰진 모습 포함 전체의 구조와 운동 원리를 파고 드는 게, 무엇보다 우리의 생존(과거 조수 간만의 차를 염두에 항상 두어야 했을 어민, 선원이라든가, 농사에 역월을 활용해야 할 경작민이라든가를 떠올려 보십시오)에 유리한 선택입니다. 4차 산업 혁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지식, 정보라야 관심과 정력의 우선순위를 둘 자격이 있습니다. 내 직장 생활, 비전 설계와 무관한 지식을 머리 속에 잔뜩 쌓아 봐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필진에 참여한 전문가분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 "한국인더스트리4.0협회" 소속이라는 게 공통점입니다. 이 책에서 이들은 먼저 인더스트리4.0과 4차 산업 혁명 간의 연관성을 설명합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대목들 중 하나였는데, 대뜸 "지금 상황이 이렇다면서" 상세한 디테일을 풀어 주는 것도 좋지만, 대체 이런 상황이 어떤 기원을 가지며 무슨 맥락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배경 설명도 좀 해 주는 게 뭔가 책임 있고 학문적 근거를 갖춘 접근 태도입니다. 또한 이런 설명은 비록 해당 분야에 대해 일천한 지식만을 갖춘 독자라 해도, 그를 보다 쉽게 납득시킬 수 있다는 게 장점입니다. 인더스트리4.0과 4차 산업 혁명은, 그저 둘이 동의어 비슷한 거 아니냐며 되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크게 틀렸다고는 못 하나, 이런 피상적인 이해만으로는 그 개인의 구체적 장래 설계에 큰 도움이 못 될 것 같습니다.

인더스트리4.0은 독일에서 비롯된, 4차 산업 혁명(이라 정리되는 트렌드) 속의 여러 혁신을, 각국 혹은 개개 기업들이 산발적, 무질서한 양상으로 전개하지 말고, 경쟁의 룰을 마련한 채 윈-윈의 틀 안에서 효율적으로 밀고 나가 보자는 "플랫폼"입니다. 여태 1, 2, 3차 산업 혁명은 앞을 내다보는 혜안의 혁신가들이 자발적으로 각개약진한 게 거대한 물결을 이뤘을 뿐이었습니다. 사실 미국식 자본주의는 자유 방임 속에 자연스럽게 도달되는 합의와 균형점을 추구하지, 정부나 (설사 업계 결사라고 해도) 공공단체의 개입 같은 걸 매우 기피하는 편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더스트리4.0은 지극히 독일적 특성이 드러나는 플랜이자 프레임이며 시스템으로 보입니다.

물론 4차 산업 혁명의 개별 혁신들이 먼저이지, 인더스트리4.0가 생기고 나서 4차 산업 혁명의 기운이 일기 시작한 건 아닙니다(인간의 작위적 계획으로 이런 걸 만들어내기란 불가능하죠). 다만 독일의 현명한 산업가들과 정부의 정책 결정 담당자들이, 지금 되어가는 양상을 보니 이에 어울리는 어떤 질서 있는 단일 플랫폼을 만들어 경쟁의 소모적 부작용을 방지하고, 아울러 (이게 진짜 중요한데)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다른 나라에 팔아 먹어 항구적인 개런티 수입도 확보하자는 속셈이 생긴 겁니다. 그러니 4차 산업 혁명이 인더스트리4.0의 틀을 만들었고, 반대로 인더스트리4.0은 4차 산업 혁명의 질서 있고 뚜렷한 흐름을 정리해 나가게 된 거죠.

무엇을 플랫폼으로 삼자 어쩌자가 특정 국가(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의 제안, 강요로 관철되는 게 물론 아닙니다. 참여자, 당사자들의 자발적 동의가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의 채산과 이해 관계를 합당히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책 여러 군데에서 강조하고 있듯, 오바마 역시 당초에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이 제의에 응했을 뿐입니다. 구체적인 개별 산업 경쟁력도 앞서고, 혁신도 먼저 시작했는데, 다른 나라의 아젠다 선점을 용인하는 게 마음에 내킬 리가 없죠. 주판알을 튕겨 보고 이에 참여하는 편이 우리한테도 이익이겠다는 계산이 다들 선 후에야, 이 인더스트리4.0이 플랫폼 대세로 부상된 겁니다.

이 책이 인더스트리4.0을 각론보다 더 강조하는 건(물론 다른 책들에서 설파, 증명되었듯 각론도 당연히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어떤 원리, 원칙과, 실질적으로는 물론 "비유적으로도"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대략 25년 전쯤부터, 미래는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가 지배할 것이며, 디지털 혁명의 본체가 여기에 있음을 니콜라스 네그로폰테가 그의 탁월한 고전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는 현재 전혀 새로운 주장이 못 되고, 다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공감대가 되었습니다만, 이 책의 저자들은 4차 산업 혁명 이슈와 관련하여 이 논리를 소전제로 하부 상황에 다시 적용하는 겁니다. 제아무리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자율주행, 3D 프린팅 등의 개별 섹터에서 경쟁력을 갖췄다 한들, 이런 하드웨어는 그를 상위 단계에서 조정, 통제하는 소프트웨어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최종적 수익 흐름은 소프트웨어 섹터로 빠져나가는 게 필연이라는 거죠.

어떤 이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자율주행, 3D 프린팅 등도 어차피 소프트웨어로 승부를 보는 분야들이다. 하드웨어는 당연히 하청업체가 생산을 맡지 않겠는가?" 물론 맞습니다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을 보지 못한 소치입니다. 사물인터넷이나 자율주행에도 각각의 플랫폼 표준이 마련되겠으며, 이를 선점하는 업체가 패권과 수익의 본류를 거머쥘 것은 당연합니다. 구글이 안드로이드 보급에 그처럼 집착하는 이유도 이와 같겠고 말입니다. 그런데, 인더스트리4.0은 그런 개별 플랫폼을 모두 포괄하는 위상의, 총괄적 보편적 소프트웨어이자 플랫폼 구실을 할 수 있고, 다분히 그런 의도로 독일이 지금 이것을 밀고 있는 거죠. 말하자면 "플랫폼의 플랫폼, 소프트웨어를 제어하는 최상위 소프트웨어"와 같은 시스템, 패러다임입니다. 각론을 보조하고 보기 좋게 정리하는 틀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최종 보스처럼 기능하기도 하는 개별 산업, 알짜 캐시 카우인 거죠.

기존의 틀을 바꾸는 충격적인 혁신이 이로부터 분명히 하나 파생됩니다. 21세기가 갓 시작된 후 첫 십년기는, 알다시피 중국이 세계 경제의 성장동력 구실을 해 왔습니다. 그 동력이 때이르게 꺼진 후에는 동남아가 바톤을 이어받으리라 기대했지만 실적은 시원찮은 편이고요. 2008년에는 미국발 서프프라임 부실사태가 글로벌 경제의 종막을 고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이처럼 전망이 불투명하던 상황에다, 인더스트리4.0이 교통정리해 준 "4차 산업 혁명"이 새로운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는 겁니다. 확실히, 개별 국가의 미친 급성장에 기대는 건 지속적인 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경제 구조의 건강성에 악영향까지 미칩니다(대표적으로 우리 나라를 들 수 있죠).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원가 경쟁력을 갖춘 타국으로 기업이 우수수 빠져 나가는 게 자국의 GDP 관리에도 불리하며, 그 어드밴티지가 사라진 후에는 다시 어디를 찾아 유랑할지도 대책이 안 서겠죠. 이는 무엇보다 표피적 호황을 좇아 동분서주하는 행태에 지나지 않으므로, 어떤 기업에게건 장기 전략으로 기능할 수 없습니다.

인더스트리4.0은 이른바 "스마트 공장"의 운용을 가능하게 합니다. 주지하는 대로 인건비 면에서 한국, 일본, 미국이 중국과 경쟁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은 그럼 언제나 저임금의 무제한 인력 pool을 세계의 게스트들에 제공할 수 있을까요? 그들도 의식이 각성하면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찾으려 들 테고, 중산층이 널리 형성되어 생활 수준의 상향에 따른 물가 상승이 본격화하면 이런 입지적 호조건은 금세 휘발되기 마련입니다. 인더스트리4.0은 이런 암울한 전망에다 대고 생각도 못하던 돌파구 하나는 제시합니다. 제조원가와 직간접 경비, 노무비 사이의 구조는 경영대 학부 1학년생들도 다 배우는, 관리회계 과목의 기초 중 기초죠. 이 중 인더스트리4.0는 간접 제조비, 간접 경비에서의 혁신적 원가 절감을 이루자는 겁니다.

노무비 경쟁 우위는 결국 사라지게 마련이지만, 인더스트리4.0이 탁월한 혁신으로 마련한 원가 절감 팩터는 구조적, 소프트웨어적 측면을 치고들어가는 거라, 기업 원가 구조의 건전하고 항구적인 설계에 도움이 됩니다. 이는 또한, 지난 십년기에 피할 수 없는 대세로 여겨진 오프쇼어링을 뒤집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탁월합니다. 국내에 스마트 공장을 마련한 사장님은, 이제 힘들여 불안정한 타국 현지 진출을 시도하지 않고도, 익숙한 자국의 문화 풍토 속에서 말이 통하는 자국 근로자를 고용하여, 안심하고 국내에서의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 거죠. 대개 노동자(숙련/비숙련, 정규/비정규 막론하고)들은 기업 생산 기반의 해외 이전을 달가워하지 않는 게 당연한데, 이런 시사점은 노-사 간 계급 이해 충돌도 해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건강한 미래를 예고하는 면이 있습니다.

좀 뜬금없는 개인적 사족인데, 왜 트럼프가 지금 캐리어 같은 기업의 이해관계자, CEO 등을 만나 해외 이전하지 말라고 협박도 하면서 주저앉힌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개별적, 임기응변 대증요법이 산업계의 체질을 얼마나 악화시키는지는 따로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인데, 만약, 혹시라도, 트럼프가 이런 시대적 대세(아직 분명히 표면화하지 않은)를 알고 한 행동이라면, 좀 달리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취향의 탄생 - 마음을 사로잡는 것들의 비밀
톰 밴더빌트 지음, 박준형 옮김 / 토네이도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어렸을 때 정평 있는 영어 참고서 류에서 "There is no accounting for taste."라는 격언을 배운 기억이 나실 겁니다. 그 당시만 해도 머리로 수긍은 했지만 피부로 공감까지 했던 기억은 없는데, 지금은 우리 식으로 적절히 변형되어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 ", "개취" 같은 유행어 표현 속에 너른 지지를 얻는 중인 사리, 이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설명이 안 되는 취향이 있다면 이는 배척되고 비난 받을 가능성이 있겠으나, 어차피 취향이란 설명이 불가능한 법이니 남의 영역을 건드리지 말고 넘어가 주거나, 아예 적극적인 존중을 보내자는 취지이겠습니다. 그런데 영어권에서 저 말이 코인될 무렵만 해도 취향(어느 분야든 간에)이 아주 넓은 스펙트럼을 지니는 형편은 아니었겠습니다.

오늘날은 "결정 장애"란 말이 널리 입에 오르내릴 만큼, 시장과 개인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컨텐츠와 상품, 서비스의 홍수 속에 대체 뭘 골라야 할지 현기증이 생기는 다양성의 시대입니다. 케이블 채널(혹은 IPTV) 번호를 일일이 외우며 무슨 기획에 특화된 방송인지를 의식, 리모콘을 눌러대는 시청자는 (기억력이 특별히 좋지 않고서야) 드물 것입니다. 개별 시청자가 자기 집 TV에 채널이 몇 개나 수신되는지도 모르는 이런 와중에, 모 방송사는 "1인 제작에 특화된 채널"을 내년 초에 개국한다고 합니다. 이미 공급되는 컨텐츠를 소화하기도 힘든 판에, 어떤 사람들은 아예 자신이 직접 방송을 만들겠다고 나선 지 오래이며, 이게 모바일 플랫폼이나 1인 방송 전용 인터넷 사이트(XX리X 등) 외에, 이제 방송국을 통해서도 송출된다는 뜻입니다.

사물인터넷, 빅데이터의 시대에 기업들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양식을 일찌감치 포기했습니다. 세부화한 개인, 개인, 개인들의 취향을 얼마나 정확히 잡아 트렌드화하느냐의 능력이 기업의 사활을 결정하고, 이에 따라 "그들은 왜 그걸 좋아하며, 앞으로는 무엇을 좋아하게 될 것인가?"의 "취향 설명(accounting for taste)"이, 그저 장난이나 몽상이나 소프트 SF의 소재 아닌, 초미의 현실 과제로 다가왔습니다. 최소한 몇 개 집단의 도드라진 취향 부각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을 해 낼 수 있어야, 기획 담당자가 자기 회사 안에서 살아남는 시대가 된 겁니다. "그 어려운 걸..."이 아니라, 그 정도는 해 내야 밥값은 한다고 평가 받는 판이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의 저자는 실로 어려운 과제에 너무도 담대한 도전을 시도한 것 같습니다. "대체 왜 저 사람을 저런 걸 좋아하며, 어떤 선호는 끝까지 유지되며, 어떤 건 오래 못 버티고 다른 걸로 대체될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혹은 남을 대상으로 제기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 해도 여러 두뇌가 중지를 모으면 현자 한 사람의 지혜보다 나을 때가 많은데요, 이 난제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누구나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골몰해 보지 않은 이가 없을 만큼 잘 알려진 토픽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물론 내로라할 똑똑한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뛰어난 직관으로 정확한 결과를 도출("누가 무엇을 좋아할 것이다" 혹은 "많은 이들에게 이게 대세로 통할 것이다")해서 떼돈을 번 사람(들)이 있었을망정, 취향의 경로와 알고리즘을 이론적으로 설명(accounting for)해 낸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만약 있다면 인공 지능 혁명의 완성과 더불어 진정한 매트릭스의 시대가 도래할 겁니다). 당대 아무리 인류를 괴롭혀 온 난제라 해도 먼 미래 언젠가는 해명이 이뤄질 수 있겠지만, 이 문제만큼은 지금껏 그토록 많은 시도, 전방위적인 접근이 이뤄졌음에도 여전히 난공불락이기에, 많은 이들로부터 회의적인 전망만 얻고 있습니다. 여튼,  "이 어려운 걸", 재치있고 통통 튀는 감각의 저널리스트 톰 벤더빌트가 책 한 권으로 해명해 보겠다고 나선 거죠.

해결이 어려울 뿐 문제의 구조(최소한 겉으로 드러나기로는)가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예컨대 "몬티 홀 프라블럼"처럼 누구나 한 번쯤은 풀어보겠다고 나설 수 있는 게 "취향"이라는 이슈입니다(그까짓것 나도 한 번 해 보지 뭐). 그래서, 비록 풀기가 어려울지언정, 이 문제 풀기를 시도하는 다양한 접근법들에 대해 시시콜콜히도 수다, 때로는 진지한 이론적 접근 들을 정리해 둔 이 책은, 정말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저자처럼)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게 타당할까?"라며 진지한 의문을 제기하는(그래서 매 장 매 문단에 피력된 주장에 대한 동의를 유보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는데, 그렇다 쳐도 최소한 이 책이 어려워서 못 읽겠다는 독자는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정말 누구나, 한 번쯤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봤을 문제와 (미완의) 풀이, 설명 등이 다양한 사례(잘 알려진 사례를 망라하여 제시한 후,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어 가며 그저 "취향이 무엇이란 말인가 과연?"이란 질문 하나에 집요하게도 귀납해 가는 게 가장 큰 매력입니다)와 함께 제시되었기 때문에, 막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이, 자기 취향 남 취향에 대해 어리둥절해한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누구(이걸 안 해 본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치밀한 논리보다는 발랄한 감성으로, 무수한 사례를 들어 가며 "그런 적 있으시죠?"를 연발합니다. 이들 중 어떤 것은 서로 모순됩니다. 사례에 대한 저자의 설명 역시 앞에서는 이랬다가, 뒤에서는 다른 설명을 하며 모순을 빚는 대목이 한둘이 아닙니다. 간격이 서로 멀리나 떨어져 있다면 그새 잊어버렸나 보다 하고 이해를 하겠는데, 한 문단(패러그래프) 안에서 앞뒤가 안 맞는 구석조차 자주 눈에 띕니다. 일반적인 이론서가 이런 태도였다면 불만이 생겼겠지만, 도대체 다루는 주제가 "취향"이다 보니 오히려 진실된 설명처럼 느껴집니다(어차피 일관된 해명이 아직은 불가능한 대상에 대해 너무 정연한 해명이 이뤄져도, 뭔가 오류가 있었거나 실용성이 떨어지는 결과였을 겁니다). 당신은 대체 왜 쓰디쓴 맥주, 담배, 펑크 밴드의 미친 음악의 첫맛에 경악했으면서도 이후 서서히 중독되어 가는가? 반대로, 날카로운 첫 키스의 달콤함, 황홀함에 그처럼 정복되어 놓고서도, 왜 시간이 지난 후 그녀를 버리게 되었는가? 이처럼 취향이란 과연 단일한 주제, 대상이기나 한지가 의문스러울 만큼 갈피가 안 잡히는 녀석입니다. 저자 역시 해명을 완성했다며 오만한 쾌재를 부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저자가 별스럽고 유난스럽다 싶을 만큼 다각도로 파헤쳐 놓은 취향의 숨겨진 모습들을 감상하며, 최소한 내 자신의 취향이 무슨 빛깔인지에 대해서는 종전보다 선명한 감각으로 바라볼 수 있겠습니다. 먼 훗날 혹 이 난제에 대해 이론적 규명이라도 이뤄진다면, 아마 이 센스 있는 책 한 권에 대해 신세진 바가 클 것 같기도 하고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트럼프 승자의 생각법 - 무엇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는가
도널드 트럼프 지음, 안진환 옮김 / 시리우스 / 201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의 의사라는 게 많은 경우, 그저 드러난 분명한 문언(워딩)만으로 전달되지 않고, 오히려 표정 등 비언어적 매체라든가, 말 속에 숨겨진 다른 뉘앙스로 더 심각한 메시지를 상대에게 알리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건 우리 동아시아인들의 장기이며, 일본이든 중국이든 우리 나라든 "은근한 중에 본심을 알리는 기술, 그를 잘 받아들이는 기술"이 빼어나야 그게 커뮤니케이션의 대가라며, 소통과 관계의 달인이라며 때로는 대인의 풍모로 칭송받습니다. 야마오카 쇼하치의 <대망>에 보면 이 점이 특히 잘 드러나죠.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2년여 동안, 각종 기행과 터무니없는 언사로써 전세계인들을 놓고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는 그저 언더독이라든가 미미한 후보 정도가 아니라, 공당(公黨)의 경선에 참여할 자격도 없는 미친 광대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죠(그는 자신만의 일인 정당을 만들어 이미 대선에 참여했던 적이 있습니다). 다만 그가 공화당 후보로 확정되어 가는 대략 7월경부터, 전현직 유력 인사들이 그의 진영에 합류하는 모습이 뭔가 심상치 않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는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CIA 국장으로 재직한 제임스 울시도 끼어 있었지요(참고로 이 사람은 국장 시절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한 모습이 당시 한겨레신문 기자에게 사진 찍혀 세계적인 특종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사건이었죠). 거물들이 그를 돕는다는 건 첫째 일단 그의 승산이 의외로 높다는 점, 둘째 미친 광대처럼 보이는 그의 언행 이면에 뭔가 영리하고 일관된 전략이 숨어 있다는 점, 셋째 거물들의 자신의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여 유리한 제휴 관계를 맺게 하는 데 그가 탁월한 능력이 있기는 하다는 점, 이 세 가지를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강하게 시사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의사를 밝히기 전에 쓰여졌습니다(한국어로 번역된 것 중에는 당선 이후 기준으로는 처음 출판 허락을 맡은 책이죠. 그는 이미 성공한 청년 사업가 자격으로 1980년대 후반에도 자신의 저서 한국어판을 발간한 적 있습니다). 그리 학식이 깊지 못해서인지, 불필요한 미사여구나 번거로운 수식 없이 필요한 말만 간단하게 전달하는 특유의 어법과 스타일이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모든 서술에서 그런 (이 사람 나름의) 장점이 관철되는 건 아니라서, 어떤 대목은 너무 간명하게만 서술된 탓에 몇 번을 읽고 나서야 의미가 정확히 파악되기도 했습니다. 하긴 정확하고 명료한 문장을 구사하는 건 아랫사람들의 의무이자 덕목이지, 사장님이 번거롭게 차려내야 할 사항은 아니죠. 독자는 물론 그의 서비스(저술한 책 읽어주기)를 돈 주고 구매하는 "고객"의 입장이지만, 트럼프야 "까짓것 못 읽겠으면 그냥 관둬"라며 오히려 갑질을 할 만한 위치이니.

이 책을 읽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원서나 이 번역서의 편집 태도처럼, 저자(혹은 편집자)가 크고 굵은 글씨로 강조해 둔 결론에만 초점을 두어, 자계서처럼 읽어내는 것입니다. 둘째,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트럼프가 그런 결론을 도출한 "자신의 진짜 사업 경험담 회고"를 꼼꼼히 읽고, 어떻게 해서 세계의 경제 수도 한복판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이름 없는 땅을 관광이나 리조트 명소 등으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는지 꼼꼼히 분석해 가면서 읽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늘어놓는 말은 거의 80% 정도를 걸러들어야 현명한 태도이겠습니다만, 트럼프는 못된 소리를 지껄일망정 사업 관련 거짓말은 하지 않는 스타일 같습니다. 그가 새빨간 거짓말쟁이였다면 신뢰를 잃어 사업계에서 벌써 매장당했을 것입니다. 광대짓을 한 건 리얼리티 쇼 출연이나 정계에 데뷔한 후의 일이죠. 무엇보다, 그가 사업 관련 정직한 성공을 거둔 건 그의 이름이 새겨진 미국과 세계 각지의 명소, 랜드마크 건축물 등의 빛나는 성공에서 증명이 됩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그렇게 많은 성공을 그저 요행수나 투기꾼의 촉만으로 이뤄낼 수는 없죠.

트럼프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돈으로 투기꾼 짓을 해서 성공한 케이스가 아닙니다. 목 좋은 곳, 노른자위 땅을 알아보는 감각이 탁월하되, 일단 목표로 삼은 땅이나 낡은 건물이 있으면 이를 두고 최대한의 경제적 가치를 뽑아내는 방법(재건축 혹은 리모델링 방법, 혹은 용도 자체의 근본적 변화)를 상상하고(이 단계에서부터 비상한 크리에이티브가 요구되죠), 그 구상을 현실로 옮기는 실천과 집행의 대가, 마스터더군요. 말은 쉬워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당면의 현실, 현상에만 집착하지 그 이면에 숨은 가능성을 보지 못합니다. 망해가는 건물이나 부지를 보고 "여긴 뉴욕의 새로운 도심으로 확 뜨겠는걸?" 같은 확신을 갖고, 부지마다에 가장 어울리는 역할을 (시대의 트렌드에 따라) 정해 주는 능력과 센스("여긴 레스토랑, 여기는 호텔, 여기는 쇼핑몰이 가장 잘 어울리겠군")는 아무나 갖는 자질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도 신격호 롯데 창업주가 이런 스타일이지만, 그런 그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정도까지는 아니었죠. 신격호 씨는 전후 폐허가 된 일본, 한국에서 일어선 사업가지만, 트럼프는 이미 판이 다 짜여진, 난다긴다 하는 사업의 고수들이 대거 포진한 뉴욕 한복판에서 창업을 해 내 일인자로 올라섰다는 게 중요합니다.

설령 부동산 감식, 구상, 설계 감각이 탁월하다 해도, 그 다음이 진짜 문제입니다. 뉴욕 같은 곳에 부동산의 소유권, 혹은 용익 물권. 담보권 같은 게 어디 보통 치밀하게 짜여져 있겠습니까? 소유권은 (현재 소재도 파악 안 되는) 누군가가 갖고 있고, 애써 그 사람과 타협을 이뤄 놓으면 이번에는 그의 채권자나 동업자를 찾아 다른 이해관계를 해소하고 금전으로 마무리지어야 땅이 내 것이 됩니다. 사람들을 찾아내어 일일이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보통 사람 같으면 땅 한 필지에 무슨 이렇게나 복잡한 재산권들이 얽혀 있는지 아예 이해가 안 됩니다. 사람을 설득하는 것도 예사 기술이 아닐 뿐 아니라, 그렇게 설득하려면 법률 관계와 경제적 전망 등에 대해 정확한 파악과 사업 구상이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 노른자에 재산권을 보유한 이가 어디 바보라서 아무 말에나 넘어가겠습니까?

이렇게 어렵사리 내 땅으로 확보한 후라 해도, 이번에는 관청을 찾아가 어떤 규제가 내려져 있는지, 이를 완화하거나 최대한 유리하게 적용할 방법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건축 행정 법규에 달통한 수준이라야 하겠죠. 모든 여건이 마련되어 내 구상대로 일을 벌일 수 있다 해도, 가능하면 최소로(부실 아닌 범위에서. 트럼프는 싸구려로 원가를 후려치는 방식을 엄청 싫어하더군요. 이 책을 읽어 보면. 하긴 그런 편법으로만 일관하면 적당히 돈을 벌 수는 있어도 이 정도로는 성공하기 힘들죠) 비용을 들이고, 최대한 미관을 아름답게(트럼프가 아주 집착하는 면 중 하나입니다) 만들려면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걸 또 고민해야 합니다. 이걸 뜻대로 해내려면, 골조 시설, 자재의 특성, 토목 방식 등 건축 전반에 걸쳐 전문가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류 건축가(트럼프는 일류 아니면 고용을 안 하더군요)가 안을 들고 와도 이게 자기 구상에 맞는지 더 개선을 요구하든지 판단할 수가 있죠. 대충 일을 해서 그만큼 어디 돈을 벌 수 있었겠습니까. 집요하고 매사에 끝장을 보는 성품이 오늘날의 그를 만든 비결입니다.

트럼프는 리얼리티 쇼 출연 제의를 받고 엄청 망설였다고 합니다. 이 점도 우리가 선입견으로 가진 바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라 흥미롭더군요. 이런 멍청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왔다가 내 위신과 명성에 먹칠만 하는 건 아닌가? 이럴 때 그가 믿는 건 (일단 한 번의 의심과 회의를 거쳤다가) 정직하게 떠오르는 그의 감각이라고 합니다. "그거 괜찮을 것 같은데?"라고 열정, 의욕이 확 솟구치면 그때부터는 좌고우면 하지 않고 밀어붙인다는군요. 이런 건 사람이 타고난 자질이라서 누가 따라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남겨진 그의 명언 중 하나는, "열정과 의욕이 생기는 일은 누가 아무도 격려 해 주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추진할 수 있다."였습니다.

트럼프는 이 책에서, 그가 만나고 겪어 온 많은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실명까지 거론해 가며 회고합니다. 어떤 이는 교섭 상대자로서 깐깐하게 굴었지만, 일단 약속한 바는 반드시 지키는 인격자라면서, 이런 사람이 협상 과정에서는 힘들게 해도 결국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게 하는 조력자나 마찬가지라는 취지(트럼프는 좋다 싫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등 직설적인 표현만 하는 사람이라, 제가 이 서평에 쓰는 어휘처럼 추상적인 말은 책에 없습니다)로, "휼륭한 인격자"라 평하며, 자주는 아니라도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런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며 의외의 극찬을 합니다.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며, 리스펙트를 보내야 할 대목에서 정확하게 멈추며 겸손해할 줄도 아는 게 그의 장점이라 하겠습니다. 이게 가식이 아니라 그 나름으론 다 진심이라는 게 특이합니다. 반면, 제때 대출을 안 해 주며 앞에서 하는 말과 뒤의 행동이 다른 어느 은행장(여성이며, 이분도 꽤 유명한 인물입니다)에 대해선, "내가 아는 가장 무능하고 어리석은 뱅커"라며 가차없는 독설을 퍼붓습니다.

자계서를 읽으면서도 그 속에 담긴 팩트를 어렵사리 추출, 본격 경영서나 실무서처럼 읽을 수도 있고, 반대로 경영학 교과서를 읽으면서도 "인생의 지혜가 이 중에 담겨 있음"을 깨달으며 (고차원의) 자계서 독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트럼프는 세련되고 학식 높은 대화를 할 줄 모르는 인간이지만, 그의 말은 일단 허투루 들을 것이 없고, 좋든 싫든 반드시 말 중에 뼈를 심거나 유익한 제안을 담거나 하는 식입니다. 동양인들이 예로부터 즐겨하던 고맥락 소통(전혀 아닌 것 같은데)에 능한 유형이며, 이 사람의 개성을 잘 알아야 한국의 앞길도 순탄할 뿐 아니라, 일단 사업가로서 그가 눈부신 성공을 거둔 과정은 누구 눈에도 흥미롭고 유익하게 다가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차 산업혁명 시대, 전문직의 미래 - 빅데이터, 인공지능, 기술혁신이 가져올 새로운 전문직 지형도
리처드 서스킨드.대니얼 서스킨드 지음, 위대선 옮김 / 와이즈베리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예전에 어느 포털에 게시된 언론사의 기사(조만간 외국어 간의 완전한 통역이 가능한 AI 소프트웨어가 등장한다는 내용) 밑에 이런 덧글이 달린 걸 본 적 있습니다. "통역사가 직업을 잃을 정도 같으면 다른 직업은 뭐..."

이 책의 역자께서는 서문의 말미에, '"원제 중 profession의 뜻은 '직업'이란 뜻이므로, '전문직의 미래'보다는 '직업의 미래'라는 게 차라리 적절하다."라는 언급을 하고 계십니다. 제가 위에 인용한 어느 네티즌의 덧글처럼, 도대체 통역사처럼 고도의 지식과 감각과 순발력을 요하는(물론 국제행사의 TV 생중계에 출연 가능할 정도의 일류를 두고 하는 말이겠죠?) 직종마저 "인공 지능이 떨어대는 유세"에 밀릴 정도라면, 사람이 고유의 정신과 육체적 기능으로 AI에 밀리지 않고 지켜낼 수 있는 직업은 하나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자의 지적은 (설령 그런 의도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해도) 백 번 타당합니다. 4차 산업 혁명의 핵심 동력, 트렌드, 지향점 중 하나인 AI가 몰고 올 미래는, "전문직을 필두로 한 직업 전반의 소멸과 퇴조상"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직업 일반, 전반의 위기를 짚어내기 위해선 가장 대체되기 힘든 직업군일 "전문직"의 현 시점(4차 산업혁명이 노도와 같이 밀어닥치는 작금)에서 갖는 위상, 전망, 변화상이 무엇인지 짚어내는 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경제적"입니다.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 전문직은 과연 AI의 효율성(엄청난 저장 용량과 정보 처리 속도를 앞세운)과 원가 우위(사람보다 싸니까 AI를 쓰는 거죠. 아니라면 사람을 고용하는 게 나을 거고요)에 밀려 사멸하고 말 것인지, 전문직이란 막연한 말로 포섭한다 해도 직종이 천차만별인데, 어떤 건 선방하고 어떤 건 근근히 버티며 어떤 건 벌써부터 단순노무직으로 전락하고 마는 중인지, 각론별로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좋은 대학을 나와서 "사"자 붙은 직업만 가지면 열쇠 몇 개가 딸려온다느니 하는, 지극히 전근대적인 낭만과 환상이 뒤섞인 주문이 유행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AI가 선도하는 4차 산업 혁명의 물결은, 이미 "그런 사 자 붙은 직업부터 차근차근 정리해 주겠다는 듯" 공포의 저승사자처럼 다가오는 양 일반에 인식되어 있습니다. 저자 서문에 적힌 한 문장을 읽으며 슬쩍 웃음이 지어졌는데요, 말인즉슨 "... 벌써 이런 논의를 꺼내는 것만으로 이 책을 슬쩍 한켠으로 밀어 놓는 독자들이 많을 줄 안다."입니다.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서점에서 이 책을 펼쳐 든 이들이라면, 아마 이런 "매우 솔직한" 저자들의 언명과 너스레 때문이라도 책 읽기를 도중에 멈출 수 없을 줄 압니다. 5년 전쯤 안철수씨가 재인용한 유명한 말(윌리엄 깁슨) "미래는 벌써 우리 옆에 다가와 있지만, 다만 고르게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처럼, 현장의 전문직들이 전혀 피부로 와 닿지 않는 예언이라면 일말의 불안감도 느낄 필요가 없죠.

다른 한편으로, 전문직은 정말 기술 발전의 도도한 추세 앞에 소멸하고 말 운명일까요? 책 1장의 제사(題辭)에는, J S 밀(공교롭게도 부친의 천재 교육으로 위인이 된 인물이네요. 혹 몇 백 년 후인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인공지능을 가장 싫어했을 법한)과 케인즈(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천재형 두뇌였죠)의 말이 인용되어, 인공 지능 혹은 기계가 주도하는 문명 일반의 암울한 미래를 경고합니다. 사실, 이미 1차 산업 혁명 당시에도 지적되었고 많은 이들에게 곤경과 아픔을 안긴 바 있던 흐름입니다만, 기술의 발전은 결국 사람의 직업을 빼앗고 입지를 축소시키는 쪽으로 대세를 일찍부터 잡은 바 있습니다. 맑스의 공산주의 이념 역시 이런 위기 의식(프롤레탈리아 계급뿐이 아닌, 인류 일반의)에서 싹을 틔운 거겠고요. 이런 관점에서라면 현재의 전문직 잠식, 사멸 징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시간의 문제일 뿐 조만간 전면적으로 대두할 사회 문제임에 분명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리 문제를 단순화하여 짚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책이 취하는 가장 바람직하면서도 믿음직한 태도인데요. 다시 역자 서문에서 일부를 인용하자면 "... 저자들은 논점의 단순화와 아젠다의 센세이셔널한 선점을 위해, 근거 없이 미래상을 왜곡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위기의 징후가 느껴지만, "이건 모두 현실이 아니야!"라며 무작정 부정한다거나, 정반대로 "우린 이제 죽었어!"라며 지레 절망에 빠지는 식으로는 문제의 해결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위험 중 어떤 건 사뭇 가능성 높은 현실이고, 어떤 건 터무니없이 과장되었으며, 어떤 건 확률이 반반이라 당사자의 현명한 대처에 따라 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근거 없는 낙천주의나 비생산적인 패배주의가 아니라, 정확한 현실 인식과 합리적인 대처 방안의 강구입니다.

역자께서는 본인이 명문대 상경계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이라서인지, 한편으로 "전문직의 점차 어두워져가는 전망"에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며 이 책을 펼쳐든 가상의 독자들에게 독려의 말을 건네며, 혹은 (아마도) 한창 장래 모색에 대한 걱정에 여념이 없을 자녀를 키우는 학부형으로서 "과연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설계하게 도와야 할까?" 같은 고민의 일단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참으로 방대하게, 그러면서도 세심하고 치밀한 근거를 들어가며, "과연 지금의 어떤 직업이 살아남고, 어떤 직업은 파괴적 혁신(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의 개념을 그대로 원용하더군요) 없이는 사라지고 말지, 선입견이나 논리의 도약 없이 차분히 짚어 나갑니다.

의료 서비스의 경우, 몇몇 문예나 영상물에서 풍자의 대상이 되듯, 컴퓨터의 거친 알고리즘에만 의존하는 돌팔이들이 스스로의 무능을 폭로하며 전문직에서 퇴출되어 나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분명 지금보다 더 기계에 의존하고, 방대한 데이타베이스에 종속될 것이며, 사물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유효하고 세밀한 정보의 도움을 받아, 치료보다는 예방의 기능에 더 힘을 쓸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의료 서비스의 퇴조를 부른다기보다, 오히려 본연의 인술적 기능으로 복귀하는 것이며, 종합적이고 최종적인 판단은 인간에 더욱 의지하는 결과를 부르겠습니다. 전산처리장치의 장점은 빠르고 정확한 정보의 처리입니다만, 이의 메타적 의미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게 한계입니다.

책 앞에 나온 케인즈의 명언에도 드러나지만, 새로운 생각을 해내는 것보다 낡은 다수의 고정관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하는 게 몇 배는 더 어렵습니다. 바꿔 말하면, 인간은 자기 반성, 때로는 전면적인 자기 부정을 통해 거듭 태어날 수 있어서 위대한 것입니다. 기계는 치밀하고 실수가 없지만, 기계의 지능에 발전이란 없으며 "창조주"인 인간이 재 세팅을 해줘야 새로운 분야 작업을 개시할 수 있습니다. 구글이 알파고를 통해 "자체 학습"이 가능한 지능을 구현하겠다고 했지만 마케팅 표어와 학문적 성과를 혼동해서는 곤란하죠.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 기계의 건조하고 융통성 없는 결론이 냅다 내려지는 걸 과연 환자 중 몇이나 이의 없이 수긍할 수 있을까요?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도 인간이고 기적을 일궈내는 것도 인간의 영역입니다.

세무나 회계 서비스는 이미 많은 부분이, AI까지 갈 것도 없이 오래 전부터 소프트웨어를 통해 해결되는 중입니다. 하지만 빈도가 줄지 않는 각종 경제 사범의 현황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의 놀라운 창의성과 교활함(?)은 치밀한 법망을 빠져 나가며, 이를 적발해 내는 것도 인간의 육감이 하는 일입니다. 법률 서비스는 법정에 출석하여 펼치는 변론이라든가, 언어 속에 스며든 모호한 의미차이로 인해 쟁송의 승패가 180도로 바뀌곤 하는 현상들이, 그저 기계적인 처리만으로는 대체가 요원한 형편이죠. 20여년 전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을 때, 일부에선 사이버 가수, 사이버 배우들이 모든 엔터테이너를 실직시킬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사람의 귀를 가장 잘 만족시킬 수 있는 음색과 선율, 사람을 가장 흐뭇하게 만들어 줄 신체 비율과 이목구비의 배치... 이런 것들은 현재 하나도 실현되지 않은 채, 단 한 명의 슈퍼스타 캐릭터도 사이버상으로 개발되지 못한 채 여전히 개성 넘치고 매혹적인, 디지털 파라미터로 도무지 함수변환되지 못한 연예인들이 은막과 모니터를 누비는 모습이죠.

책의 결론은 그렇습니다. 전문직들이 뼈를 깎는 혁신과 선제적 대응을 하지 않으면 현재의 모든 특권적 위치와 고소득은 (과거 육체 노동자들이 그러했듯)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AI가 진화하고 4차 산업 혁명이 전에 없던 상품- 용역의 생산- 소비 구조를 창출해도, 시스템의 문제를 발견해 교정하고 업그레이드하는 임무는 여전히 인간의 창의성에 맡겨져 있는 겁니다. 농경 혁명 이래 언제나 인류가 걸어 온 족적처럼, 낡은 건 쓸려나가고 새로운 건 대접받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기술의 진보는 (압제적인 스카이넷이나 매트릭스의 도래가 아닌)인류의 공영에 이바지하는 거겠고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 유언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인간만큼 같은 종의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개성을 지니고 태어나며 성장하다 사멸하는 동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애써 발전시킨 나만의 특성과 물질적인 풍요와 정성들여 가꾼 관계를 뒤로 하고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점도 슬프지만, 생의 근원적 아픔은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 혹 내가 누구인지 어렵사리 알아낸 후에도 이를 주위의 요구와 상황에 힘들게 맞추거나 타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그의 정체성 자체가 그를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이들은, 교활한 의도와 서투른 표현으로 자신의 출신과 현재의 신분을 어리석게 거짓으로 꾸며 대기도 하지만, 세상이 그런 수작에 넘어갈 만큼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죠. 물론, 아주 드물게는, 시대가 빚은 비극 속에 자신의 여러 정신적 코드가 절묘히 조율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아픔과 역사의 상처를 함께 추스르고 살아가야 합니다. 과연 연약한(대체로는) 일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과제일까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아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마지막 수업을 이끌면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모어를 잊지 않는다면 감옥에 갇혀서도 그 감옥의 열쇠를 갖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남깁니다. 언어는 그저 일상의 욕구나 파편적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그 개인의 지난 삶, 추억, 존엄한 개성, 소중한 깨달음, 심지어 그의 조상과 겨레가 속한 집단 무의식과 문화 유산까지 오롯이 담아내고 있는 거대한 도서관과도 같습니다. 러시아 남성과 결혼하여 먼 이국까지 옮겨와 살아가다 뜻밖에 역사의 격류에 휘말려 온갖 몹쓸 일을 다 당한 샤를롯이란 프랑스 여인에게, "프랑스어"는 그저 처음으로 배운 언어라는 의의 외에 엄청난 무게와 집착과 존재의 근원으로 작용했습니다.

한 여성이 어떤 남성에게 끌려 백년해로의 연을 맺음은 그저 생물학적 충동이 빚은 우연의 산물로 치부할 수 없습니다. 가시버시로 공동의 삶을 일구고 살아가다 후손을 같이 만들고, 그들에게 소중한 추억과 애정을 공유하거나 물려주며 온전한 개체를 성숙시켜 가는 과정은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구태여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의 작업만큼이나 숭고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낳은 아이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배워 입과 몸에 익은 모국어(러시아어) 말고도, 자신의 정체성과 교양과 아련한 기억을 형성하는 질료인 프랑스어를 가르쳤습니다. 프랑스어로 된 옛날 이야기, 프랑스어 가사가 붙은 노래, 프랑스어로 쓰여진 절정기, 원숙기의 문화 정수가 고스란히 담긴 문학,... 어머니에게 이국의 문화, 그 중에서도 세계인의 동경 대상이 될 만한 선진 문화의 핵심을 배울 수 있는 아이들이란 얼마나 행복한 존재들이겠습니까.

볼셰비키 혁명은 분명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상당수의 노동자들에게 해방이라는 환희를 안겨다 준 세계사적 사건이었겠습니다. 스탈린의 리더십 역시 저개발의 수렁에 허덕이던 상당수 러시아인들에게 산업화의 혜택을 가져다 주었으며,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야수적이고 능률적인 이민족의 침공이었던 나치의 미친 시도를 퇴치한 공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시 많은 수의 인민들, 특히 이 책의 저자이자 사실상 이 소설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안드레이 마킨의 가족들에게는, 공산당의 붉은 혁명이 소중한 인생과 영혼의 연속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긴 끔찍한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린 소년은 파리에 방문했던 니콜라이 2세에 대한 기억을 급우들 앞에서 자세히, 진실되게 말해 주다 공산당 당국의 지목을 받아 가족 전체가 큰 고초를 치르게 됩니다. 그러잖아도 부르주아 출신에다 배우자가 외국인(자본주의 국가인 프랑스인)이란 사실 때문에 새로운 국가 체제에서 안정적 삶을 누릴 수 없던 처지였으니, 이들에게 닥친 끔찍한 운명은 책의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도 상상이 되고 남습니다.

망명자 신분으로 프랑스에 체제하는 시간 역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도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나 조선족, 혹은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느낄 만한, 그리고 겪을 만한 소외감이나 직접적인 고통, 불편과 비슷하겠죠. 아이는 그의 신분, 출신이 학교 급우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내내 국외자로 겉도는 신세입니다. 그는 분명 프랑스 문화에 익숙하고, 대화에 끼기 위해 열심히 화제를 익히며, 서툴지만 열심히 프랑스어를 말하고 씁니다. 외할머니가 가르쳐 준 지식, 그녀와 함께한 추억 위에 기반한 소중한 발성, 문법, 기능이지만 텃세 강한 원어민들이 보기엔 여전히 낯선 이방인의 발버둥에 지나지 않습니다. 러시아에서는 혈통 속의 프랑스성이 문제가 되어 축출된 아픈 과거가, 이제 외할머니의 모국인 프랑스에서는 자신과 부모, 가족들의 러시아 연고가 차별의 표징으로 작용합니다. 마치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는 자이니치로 지문 등록 대상이 되며 경원시되고, 한국에 건너와서는 반쪽발이라며 멸시받던 슬픈 운명과 비슷하다고나 하겠습니다. 중간에 낀 자의 영원한 주변인 지위가 부르는 비극은 세계 어디서나 공통입니다.

역자 이재형 교수께서 적절히 지적한 바처럼, "의식과 시선, 자아의 이중 분열"이야말로 이 자전적 소설의 핵심을 관통하는 몸부림입니다. 마음의 평온을 얻은 이는 무엇을 보건 어떤 감정을 느끼건 그 일관성과 전일성(wholeness)을 유지합니다. 한 번은 이렇게 느껴지다, 다른 한 번은 전혀 이질적이고 생경한 감성에 압도당하곤 하는 혼란이 그를 비껴갑니다. 반면, 주인공처럼 색과 결이 판이하게 다른 동과 서의 두 문화적 유산이 핏줄 속에 뇌리에 자리잡은 자아는, 매 순간 두 번의 필터와 프레임과 수용체가 정신을 교차하는 기묘한 체험을 겪어야 합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무엇을 수용해야 참다운 자신을 안심할 수 있을까요.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몽상가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정신적 특질이 이중적으로 형성된 탓이 컸겠죠. 그는 제정 러시아가 멸망하기 20년 전 프랑스를 방문한 "로마노프 가의 마지막 황제 부처(夫妻)"의 장엄한 행렬, 가극 <르 시드>를 관람하는 장면(외할머니의 기억) 들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20년 후 그들과 그의 일족이 혁명군에 의해 비참하게 처형당하는 장면(부모와 자신이 들은 간접 전언) 등을 교차시킵니다. 소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시제(tense)입니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력처럼 행위자를 붙들어매고 자유를 빼앗는 접착물"이 바로 시간입니다. 이 품위 있고 고귀한 혈통을 지닌 황제는, 서로 적대적인 과거와 미래 속에 붙들려 사지가 찢길 게 아니라, 주인공의 몽상 속에서 화해하는 과거와 대과거 속에서 다시 예전의 평온과 위엄을 찾습니다. 물론 마땅히 있어야 할 조화와 온유함 속에서 가장 큰 안정을 찾는 건 주인공자신이겠습니다. 3대에 걸친 그의 가족들이, 비정상적인 역사의 격동 속에서 입은 상처가 너무도 컸고, 그런 모진 운명을 겪을 만한 죄야 저지른 적 없었으니 어떤 식으로건 사면과 치유가 필요했겠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19세기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펠리스 포르, 예의 그 차르 니콜라이 2세(이 책에서는 프랑스식으로 "니콜라스"로 표기됩니다), 늘어지는 특유의 저음으로 전쟁 독려 방송을 했던 스탈린(사실 그도 프랑스어가 서투른 마킨만큼이나 러시아어가 서투른 그루지야인이었죠), 소름끼치는 독재자의 주구 베리아(그가 모스크바 전체를 자신의 하렘으로 삼고 차를 타고 다니며 여인들을 헌팅했다는 일화도 목격자의 생생함으로 낭독됩니다)까지, 역사의 부조리와 질곡 탓에 모진 운명을 겪었던 주인공의 육성에 담김직한 여러 실존 거물들이 거명됩니다. 역사란, 사회란, 평온하고 선량하게 자신의 공간에서 조용한 생을 마칠 수 있었던 개인들의 삶에까지 이처럼 짙은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 것인지요. 혹은, 참된 소속감과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고뇌하고 방황하는 게 어디 망명자들만 겪는 아픔과 상실의 산물일지요. 이 소설은 특수 상황에 놓인 개인의 회고담을 가장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근원적 고뇌의 몸부림을 정직하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목의 "프랑스 유언"은 프랑스식 유언이란 뜻도 되고, 물질 아닌 무형의 언어를 통해 묵직한 유산을 물려 주려 했던, 죽은 외할머니의 소중한 말들 정도로 새길 수 있습니다. 아틀란티스가 결국 존재하지 않은 이상향에 대한 고대인들의 간절한 희구가 빚은 상상이었듯, 주인공에게 프랑스 땅이 갖는 의미도 환멸과 원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잦아들지 않는 동경과 희망 등을 고스란히 담은 것이겠습니다. "선(善)에도 끝이 없고, 악에도 한계가 없는(정말 절묘한 표현이죠. 도스토예프스키도 그 숱한 명작 중에서 자신의 조국에 대해 결국 저 말을 하고 싶었던 건데요)" 말 그대로 애증이 교차하는 러시아 역시, 과거의 상처를 거대한 암흑과 죽음의 눈밭에 덮어둘 저주 받은 헛간이 결코 아님도 명백합니다. 하나도 버거운 조국을 둘씩이나 둔 저자의 육성을 많은 분들이 귀기울여 들어 보셨으면 좋겠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