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 빈센트 반 고흐 전기, 혹은 그를 찾는 여행의 기록
프레데릭 파작 지음, 김병욱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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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반 고흐라고 하면 자신의 귀를 잘라냈다거나, 회화의 역사를 자신의 이전과 이후로 갈라놓았다(이 책 중에 나오는 표현입니다)거나 하는, 기행(奇行)과 업적, 천재성(매우 불행한) 등으로만 기억하기 쉽습니다. 그런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천재에 대해 잘못된 오해를 하는 게 그 천재(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일 뿐)에 대한 부당한 대접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오해를 하면 할수록 그런 오해를 하는 자신의 인생을 빈약하고 비루하게 방치할 뿐인 결과이니 말입니다. 이 풍성한 내용을 남은 책을 다 읽고 나서 더욱 실감하게 된 점입니다.

이 책은 참으로 풍성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1) 우선 반 고흐(판 호흐)의 일생에 대해, 책의 분량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핵심 정보를 거의 다 다뤄 넣은 듯 보입니다. 고흐에 대해 관심 있던 이들도 아마 처음 접하는 팩트를 많이 만날 것입니다. 2) 저자는 소설가이자 화가이기도 한 분이라, 일러스트판 고흐의 전기를 쓰는 데 이 이상 최적임자가 없다 할 만큼의 자격입니다.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고흐의 삶 그 절절한 국면을 묘사한 자신의 작품을 싣거나, 고흐의 작품을 자기 식으로 해석한 오마주 작을 같이 배치했습니다. 이 그림은 저자 자신의 관점과 평론을 비주얼 포맷으로 압축한, 그 자체로 명작일 뿐 아니라, 이성 아닌 감성으로 텍스트의 주제인 고흐를 우리 독자들이 수용하게(적어도, 저자의 해석에 따른 고흐가 어떤 모습인지 이해하게) 돕습니다. 텍스트가 너무도 감성적이면서도 정보는 정보대로 다 담은 매력적인 진행과 구조라서 안 읽을 수가 없지만, 혹시 다른 사정이 있어 텍스트에 몰입할 여건이 안 되는 독자라면, 그냥 책의 그림들만 봐도 될 편제입니다.

고흐의 출생 성분과 배경에 대해 어느 정도나 알고 있습니까? 그는, 주류 기독교단으로부터 당시 이단으로 몰리던(현재는 그렇지 않겠지요) 어느 종파 소속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먼 조상 대(代)로 거슬러올라가면 위트레히트 주교의 후손으로 잡힐 만큼 혈통이 좋은 분이었군요. 빈센트 반 고흐는 노동자나 농민의 삶을 일생 동안 관찰하고 그림으로 남겼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삶에 기꺼이 동화되려고 애쓴 인물이었지만, 출생은 이처럼 프롤레탈리아 계급과는 거리가 먼 신분이었습니다. 아무리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그의 친동생 테오로부터 일생 동안 후원을 받은 사실은 워낙 유명해서 다들 기억하실 텐데, 여튼 그 테오만이라도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생을 영위한 건 이런 출생 배경을 염두에 둬야 앞뒤가 맞는 설명이 됩니다.

고흐는 좋은 학교에 진학하여 적어도 전도사, 목회자로서 안정된 생은 보장 받을 수 있던 처지였으나, 라틴어, 헬라어 등 성직자가 반드시 이수해야 할 어려운 고전(古典)어 과목에서 고전(苦戰)했으며, 예술에 대한 열정은 그런 고초에 비례해서 커졌다고 합니다. 우리 독자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예술에 대한 몰입 못지 않게, 그는 기독교적 열정에 근거하여 당대 어려운 처지에 빠진 빈민들에게 큰 동정을 품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너희들과 다르게 태어났다는 어설픈 우월감이나 비뚤어진 자만심도 아니고, 자선 행위를 통해 느끼는 불건전한 지배의식도 아닌, 정말로 그들 속으로 완전히 동화되어야 "별 이유도 없이 저들보다 풍족하게 태어난" 내가 구원 받으리라는 지극히 선량한 마음이었던 거죠. 천재 특유의 괴퍅한 자기 중심 성품, 사람은 도외시하고 오로지 예술만이 지고지순의 가치(김동인의 광화사 등에 나오는 왜곡된 이미지)로 여긴 미친 화가와, 실물의 이 반 고흐 만큼 서로 멀리 떨어진 관계도 아마 없을 겁니다. 그에게 있어 예술의 성취는 곧 인류애와 연대의식과 선한 마음과 아름다움을 하나로 만드는, 신이 부여한 기회였던 거죠.

마음 속에 품은 이데아, 신과의 교유가, 현실에서 접하는 인간(너희들 중에 가장 미천한 자가 바로 나 예수 그리스도일지니라 같은 성경 구절도 있죠)들과의 소통과 전혀 구별되지 않았던 그는(뜻을 고상하게 품었으면 바로 실천에 옮기지 않고는 직성이 안 풀렸으며, 아니 그 이전에 내면과 행동이 그대로 일치했던, 애초에 선후 관계이 설정이 안 되었던 인간), 현실에서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던 매춘부 신(Sien이라고 씁니다)과 이내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참 세속적인 우리 눈으로 보면 기가 막히는 과정인데, 아무리 독실한 신앙을 지니고 이를 모범적으로 실천에 옮긴 분이라 해도, 그 아버지가 봤을 때 이런 아들이 어떻게 여겨졌겠습니까? 그러나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 예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이 질문에, 다른 사람도 아닌 목회자로서 무슨 반론이 가능했겠냐는 거죠.

자신의 장래를 파멸시킴과 동시에 기독교 목회자 가문의 위신까지 무너뜨리는 이런 아들이, 이제는 프랑스 대혁명의 불순한(전통주의자,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던 아버지로서는 그리 여겼을 법합니다) 영향까지 받아 온갖 위험한 사상을 입에 올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듭니다. 그토록 기대를 모았던 아들이, 어쩌면 이렇게 하는 짓마다 말마다 내 생각과 반대되는 불효자로 자랐는지, 몸 속의 암세포 하나하나를 돋우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는 아들을 신이 자신에게 내린 "욥 식의" 시련과 고행으로 간주했을 겁니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 지인과 친지들은 하나같이 빈센트를 비난합니다.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건 바로 너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했던 착한 아들인 그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지듯 괴로웠겠습니까.

빈센트 반 고흐는 페미니스트이기도 했습니다. 매춘부 연인 신의 출산 과정을 보고(유독 난산이었다고 하네요), "이 세상 어느 남자도 출산하는 여인만큼, 생에 단 한 번이라도 고난을 겪은 적이 과연 있을까? 모든 남자는 여성에게 경의를 표해야 마땅하다." 이처럼, 그의 공감과 연민과 애정은 그저 타자로서 우월감(얼마나 비천한 감정인가요. 때로는 전혀 우월감을 느낄 주제가 못 되는 인간이, 거짓된 상황을 지어내고 조작하면서까지 이런 걸 느낀다며 대외적으로 광고하는 경우도 다 있습니다. 정작 그런 걸 느낄 만한 사람은 그런 감정을 부끄러워하는데도)을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그 타인과 동화가 되어버린다는 게 그의 특징입니다. 불쌍한 사람만 봤다 하면, 그를 불쌍히 여기는 타인인 자신마저 부끄러워하면서, 아예 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게 반 고흐입니다.

그의 이런 정신적 특질을 증명하는 다른 예로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그는 꽤 글을 잘 쓴 문필가이기도 해서, 서신 등의 주옥 같은 문장과 정신적 깨우침이 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죠). "..... 광부들은 지하세계를 사랑한다. 그들은 인생 막장에 몰려 지하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확인할 탄광 속에서 땀흘려 노동하며, 그 순간에 (지상에는 잘 보이던) 신을 만나며, 동시에 참된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부, 뱃사람이, 거센 풍랑을 헤치고 기어이 목표를 달성하며 바다 위에서 무한한 희열을 느끼는 것과 같다...." 어느 타자, 타인이 이런 공감과 동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피사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휴머니스트였기에, 그의 그림에는 기교를 뛰어넘은 위대한 혼이 살아 숨쉬게 된 거죠.

뱃사람 하니까 생각납니다만 그는 고국 네덜란드에만 터전이 한정된 고립형 인물이 아니라, 영국에도 다녀 오며 현지인들과 폭 넓은 교류를 한, 견문이 넓은 위인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그렇지만 비(非) 네덜란드인들에게 꽤나 발음하기가 어렵습니다(그의 이름뿐 아니라 모든 네덜란드어 어휘들이 그렇죠, 하다못해 거스 히딩크도 그 짧은 이름이 사실은 우리가 부르는 그대로가 아니라, 더 미묘하고 생경한 음가입니다). 이 책에도 그의 이름을 잘못 부르며 깔깔대는 현지인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반 고흐는 이런 난처한 풍경, 생의 모든 국면을 다 사랑했고, 그를 일일이 작품 속에 표현까지 했습니다.

그는 미친 사람이었는가? 저자는 이에 대해 책 속에서 "...당대인 말고는 그리 동의를 보내기 힘든, 변덕스러운 장식적 기교를 일절 배제하고, 오로지 예술의 본체만 남긴 그의 그림을 볼 때, 광인은커녕 합리주의자도 그런 합리주의자가 없었겠다." 고흐뿐 아니라 고흐 동시대의 다른 화가(그 시대에만 과대평가 받고, 현재는 그 빤한 한계와 장삿속이 드러나 완전히 잊혀진)까지 연구한 안목이라야 이런 평가가 가능하죠. 전 이런 말을 그토록 단호하게, 그리고 명쾌하게 내뱉을 수 있는 저자의 필력과 확신에도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예술이 하나가 된, 예술가로서의 높은 성취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덕성, 깨달음의 레벨조차 성인에 가까웠던 그의 면모를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마냥 고흐 편만 들고 예찬하는 책이 아니라, 예컨대 고갱과의 긴장 관계도 고갱 측 입장에서 그럴 만도 했다는 식으로, 매우 중립적으로 서술하는 믿을 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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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천동설과 지동설, 두 체계에 관하여 사이언스 클래식 26
갈릴레오 갈릴레이 지음, 이무현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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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타당하고 논리적으로 정합성을 갖춘 과학적 이론이라도, 그것이 당대 대중의 어리석은 감정과 (근거 없는) 신조에 위배된다면, 그것이 가진 올바른 정도와 무관하게 엄청난 반대에 부딪히게 마련입니다. 그저 논제를 놓고 서로 다른 입장에 섰을(의견을 달리할) 뿐인데, 때로는 도덕적 단죄, 법적 의율에까지 이르기도 한다니, 상대주의적 열린 지식관에 기반하여 운용되는 현대 사회의 관점으로는 황당할 수밖에 없는데요. 이런 무지몽매한 자들의 손에 의해, 한두 세기에 한 번 날까말까한 천재의 목숨과 이론적 성과가 그대로 매장될 뻔한 위기가 있었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하긴, 무지한 자들의 그악스러운 선동과 모함에 의해 진실이 가려지는 건 지금도 다를 바 없는 사정입니다. 무자격자는 언제나 자신의 자리(랄 것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가 위태하기에, 그저 목소리만 높이고 엉터리로 우기는 행동으로 무능을 보충하려 들게 되어 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행태에 대해 정면대응하지 않고, 대신 이런 명저를 남겨 우매한 이들을 교화하려고 했습니다.


역자 이무현 박사님의 서문에 보면, 다비트 힐베르트의 평언에 근거하며 이런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 그가 재판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고, 철회를 통해 목숨을 구걸(1633)한 건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종교는 그 전파와 확증을 위해 순교자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과학적 진리는 시간이 지나면 인간 이성에 의해 자연히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기왕이면 무지몽매한 체제에 의해 진리가 억눌리고 탄압 받는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바람직하겠으며, 그런 역할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정도나 되는 석학, 지성인이 몸소 나서지 않으면 누가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압력에 굴하여 양심을 팔고 본심과는 반대되는 증언을 했던 그의 태도가 그리 당당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위신과 정의감을 희생하기까지하며 그가 얻어낸 건, 또 세상에 선사하려 했던 건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다름 아닌 이 책, <대화(1632)>와 그의 후속편격 저서들입니다. 그가 그 유명한, 법정에 서서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게 만든 계기가 된 게 바로 이 책의 출간, 이 책이 부른 종교적 논란이었습니다.

진리의 판정을 어리석고 사악한 소수가 독점하는 체제에서, 그는 아무리 논리정연한 주장을 (편파적인 법정에서) 설파해 봐야 헛수고일 뿐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과정을 두고 역자 이무현 박사님은 "... 그가 분별력을 잃지 않은 결과"라고 평가합니다. 무모한 싸움을 벌이느라 괜한 정력과 재능을 낭비할 게 아니라, 많은 독서인, 글을 읽을 줄 아는 지식인들을 자기 편(아니, 진리의 편)으로 만들어, 개인과 체제의 싸움이 아닌 진리와 억압 기제의 싸움으로 판을 바꾸려 든 게, 그의 현명한 처세술이었다는 뜻이지요. 역자의 평가에 따르면 "최초의 대중 과학 교양서"의 자리를 점하는 이 책은, 과학 기술 분야에 한정되지 않고 학문과 지식 전방위에 걸쳐 통달에 가까운 이해를 지녔던 그가, 유쾌하고 발랄한 문체와 이야기 솜씨를 통해 어리석은 이들을 설복, 교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구태여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면, 이 책의 후속편 격인 그 모든 명저들이 출간되지 못했겠으며, 아마도 세계는 그의 재치 넘치는 가르침과 빛나는 영감을 전수받거나 공유받지 못했을 겁니다.

이 책 제목은 "대화"입니다. "대화"라고 하면 갈릴레오보다 거의 이천 년 전에 살았던 대 철학자 플라톤의 어느 저서 제목이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서양 지성과 사유 방식, 그리고 이를 표현하는 고전적 기초를 놓은 이래, "대화"는 어디까지나 논리와 이성과 상식에 의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는 기본 포맷이 되었습니다. 일방적으로 떠드는 건 진리의 소통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상대가 반박을 하면, 왜 그 논리가 그릇될 수밖에 없는지, 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대화법, 산파법"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쳤고, 플라톤 역시 "진리의 자발적 각성, 수용, 설복"을 위해서는 대화 이상의 좋은 방법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다만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 책에서 쓰고 있는 대화법은 조금 성격이 다릅니다. 그는 자신이 픽션처럼 구성한 이 책에서 마치 몇 세기 전의 보카치오가 구사한 테크닉처럼, 세 명의 등장인물을 무대에 올려 그들의 입을 통해 "서서히 밝혀지는 진리, 합의에 도달해 가는 법칙"을 독자 앞에 제시합니다. 이 등장인물은 물론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이들도 아니고, 같은 시대에 살지 않았으니 같은 공간에 등장해 담론을 나눌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생전의 그들이 과연 이 책에서 갈릴레오가 꾸며낸 대로 저런 제각각의 철학적(당시에는 과학과 철학이 거의 동의어였죠. 아니, 그 후 수백 년 동안에도요) 입장을 견지했는지도 의문입니다. 허나 당대인들, 그리고 후대의 분석가, 연구가들에게 격찬을 받는 건, 갈릴레오가 대단한 독서가였고 박식한 학자였기에(이렇게 되려면 남의 책들을 두루 읽고, 선학의 성과를 폭 넓게 흡수해야 합니다), 자신보다 한참 앞선 인물들의 성향이나 (암시된) 견해를 거의 정확히 이해했고, 그랬기에 이처럼 실감 나는 재현이 가능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픽션으로 읽어도 (배경 사정을 아는 이들에게) 대단히 재미있게 다가옵니다(단, 여기에 대해 비판적 견해로는 역시 이 책 역자 서문 p14 중간쯤을 참조하십시오. 그 역시 건설적 비판 속에 약간의 아쉬움을 표시하는 취지입니다).


이런 기법은 예를 들어 1990년대 초에 출간된 리언 레더먼의 <신의 입자>에서도 차용됩니다. 그처럼 오래 전 시기의 한 일류 과학자가, 말솜씨도 이만큼이나 재미날 수 있다는 게 한참 후대의 연구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준 것이죠. 갈릴레오는 이 재미난 책에서 일종의 신랄한 풍자도 시도합니다. 역자 서문(p19:6)에 보면 당대의 피사 대학 교수 스키피오네(책에는 "시피오"라고 표기됩니다) 키아라몬티의 그 유명한 말이 인용됩니다. "동물이나 유기체는 관절과 근육과 팔다리가 달린 덕분에 움직일 수 있으나, 지구는 그렇지 않기에 움직일 수 없다." 역자께서는 이 발언을 두고 이 책, 즉 갈릴레오의 <대화>에 대한 반박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그가 전개했던 지론입니다. 그 증거로, p389~p428에 걸쳐 펄쳐지는 "둘째 날" 파트의 하반부 모든 내용이, 바로 관절론 망언에 대한 우습고도 통쾌한 풍자와 반박이기 때문이죠.

혹시 종교를 가진 분들은, 이 책의 역사적 의의와 파장에 대한 연상으로 불필요한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의 주류는 이미 오래 전 현대 과학의 성과를 남김 없이 수용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같은 이는 골수 반공주의자(이런 점을 이해 못하는 바보는 그저 이 교황을 좌파라고 오인합니다)였으면서도 이런 과학의 업적이라든가 교회의 과오에 대해서는 남김없이 인정하며 겸허한 사죄를 표명했습니다. 당장 갈릴레오의 당대 교황이었던 우르반 8세만 해도, 갈릴레오의 천재적 재능에 경의를 표하며 그를 일생 동안 비호했습니다. 세상은 본디 다채롭고 각양각색의 입장이 존재하기에 아름다운 것이며, 그걸 아는 우르반 8세나 갈릴레오 모두 융통성 있는 지성들이었기에, 흑백 논리의 대립으로 치닫지 않고 이처럼 적정선에서 타협을 봤던 것입니다. 특정 결론만이 절대로 옳다며 흑백 논리로 치닫는 어리석은 자들은, 입으로 과학을 거론할망정 속으로는 사이비에 가까운 망집에 사로잡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두뇌로는, 진리의 밝은 빛을 알아볼 수 없음을, 이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고전은 우리에게 담담히 일깨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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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놀란 한국의 과학기술
그레고리 포코니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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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발전상에 대해 외국인들이 놀라 감탄하는 평가를 들을 때 우리의 반응은 대개 둘로 갈립니다. 하나는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뿌듯함, 긍지" 비슷한 느낌이 드러나는 미소이겠고, 다른 하나는 "언제는 그렇지 않기라도 했는지?' 같은, 예의만 간신히 갖춘 어색한 긍정입니다.

이런 놀라운 발전을 이룬 건 물론 우리 국민 모두 애써 노력한 결실이겠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남다른 재능과 열정으로 훨씬 큰 기여를 한 분들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성과와 업적이 당사자 개인의 여유와 명성에 그치지 않고, 한국인, 나아가 전 인류의 복리와 번영에 이바지하는 과학, 기술, 의학 섹터에서 이뤄졌다면, 이는 각별한 경의와 찬사, 존경, 기림이 바쳐져야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의 부강한 조국이 이 정도까지 오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저 놀라운 애국자들, 혹은 천재적 지식인들에 대해 과연 얼마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을까요? 혹은, 그 정확한 이름 석 자와 업적을 채 인식이라도 하고 있을지요?


이 책은 모두 네 챕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천문학, 정보통신기술, 의학, 그리고 지식정보입니다.

첫째 파트 "천문학"에서는 우리의 예상대로 세종 대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 이순지, 혹은 훨씬 이전 신라시대로까지 거슬러올라간 "세계 최고 수준의 천문측량기술" 등이 언급됩니다. 당대의 우리 조상들이 향유하고 구사하며 발전시킨 모든 테크놀로지가 다 순수하게 우리겨레의 기여는 아니었겠지만, 여튼 우수한 두뇌와 집요한 탐구정신을 지닌(이런 규정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라고 하겠습니다) 조상들은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고 의미 있게 가꾸는 수단으로 아낌없이 이 기술과 인식틀을 활용했습니다.

이런 우리 조상들의 업적에 대해 서양에 최초로 알린 분은 윌 C 루퍼스라는 학자였는데요(어떤 목적으로 한국에 왔건, 미국인들 중 이런 호감과 선의로 무장한 이들이 꽤 많습니다. 일부의 예만 보고 괜한 피해의식을 갖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이분이 길러낸 빼어난 석학 중 한 분이 바로 이원철 박사입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맥동설"의 주요 이론적 지지 기반을 마련했으며, 일본인들의 조선문화 훼손, 자료 밀반출에 항의하며 군정 총책 하지 중장을 면담한 게 계기가 되어 이후 타계시까지 한국 천문 행정의 큰 어르신으로 뚜렷한 공직 봉사를 하신 분입니다.


이런 분의 업적을 발판으로, 한국의 우수 천문학 연구진들은 "두 개 이상의 항성을 공전하는 행성"의 존재가능성에 대해 종래의 통설과는 반대로 긍정적인 논변을 개진했으며, 세계 최초라는 영예는 미국 NASA 측에 뺏겼지만(좀 치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파트의 집필자인 토비아스 힌제(책에는 "힌세"라고 표기되었습니다) 같은 독일 등 유럽 학자들에게는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일제 시대 간악한 식민 통치자들의 횡포 때문에, 학자들이 가진 망원경까지 빼앗겨야 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 마젤란 프로젝트에 참여한 우리 과학자들의 현황은 실로 자랑스럽습니다.

의학 분야에서는 일단 생체 장기 이식 수술 분야에 큰 업적을 남긴 장기려 박사의 일화가 나옵니다. 성인과도 같았던 장기려 박사님의 일생에 대해서는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도 자세히 배웠는데, 상대적으로 잘 몰랐던 이호왕 박사님의 이야기가 제게는 더 인상깊게 다가왔습니다. 소개를 보면 과연 명문의 혈통에서 이런 우수한 인재가 나옴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넉넉한 지주 집안의 후손이었지만 해방 후 무모한 김일성의 공산화 조치 때문에 한순간에 모든 걸 잃고 빈한한 환경에서 학업을 이어가게 되었지요.

한국전 당시 UN군이나 중공 측 모두, 상대가 생체 무기를 쓰지 않았나 하며 비난을 할 만큼(이 책 중의 표현입니다. p104), 이상한 출혈열의 유행으로 장기가 훼손되어 죽는 병사들이 늘어나 세계적인 미스테리가 되었지요. 세계 의학계가 모두 매달려 원인을 밝히려 애썼으나 무위에 그친 걸, 1976년 이호왕 박사님이 드디어 들쥐의 "폐"에서 바이러스를 발견, 세계가 놀라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제가 유감인 건, 쓸데없이 정치인 등에 대해서는 불건강한 맹종 태도를 보이면서 이런 위대한 업적을 이룬 자랑스러운 한국인은 그 존재조차 모르는 몰지각한 시민들입니다. 이 정도 업적이면 당시 미디어에서 엄청 큰 뉴스로 취급했을 텐데, 현재 이호왕 박사님의 이름을 아는 국민이 몇이나 될까요? 당장, 변변치 못한 자신의 건강이 그만큼이나 유지되는 것도 이런 분들의 업적에 크게 기대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일상의 은혜를 모르는 자가 도덕, 윤리를 입에 올리며 정치 현실을 개탄하는 모습도 참 우습게 보입니다. 참고로, "한타박스"의 효능에 대해서는 일각에서 여전히 회의를 표시하기도 하지만, 이런 독보적 업적에 대해선 비판 못지 않게 응원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IT 분야는 최근 다시 글로벌 수준에 크게 뒤떨어진 현황이지만 여튼 정보통신 혁명 초반기에 한국이 이뤄나간 광폭 행보는 대단했습니다. 이 책은 그레고리 포코니 박사의 책임집필을 통해, 특히 대단지 아파트가 좁은 도심, 부심에 밀집해 있는 한국적 현실이 IT 투자 조기 회수에 크게 이바지한 점을 독자에게 부각합니다. 1982년 체신부 차관으로 봉직하며 이후 십년기 한국의 눈부신 발전을 이끈 오명 씨를 특히 언급하는데요. 이분은 YS 정부에서 커리어의 절정을 맞이했죠(진대제 씨가 노무현 정부에서 전성기였던 것과 비슷하게). CDMA 기술은 흔히 우리가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고 잘못 알고 있는 이들도 있는데, 정확하게는 세계 최초의 상용화입니다. 이 기술의 직접 적용 분야가 PCS 폰입니다. 그래서 당시 그토록 저렴한 비용(10초에 18원~19원대)로 대중 사이에 널리, 급속도로 퍼질 수 있었지요. 그전 냉장고 셀룰러폰은 요금 폭탄 때문에 누가 함부로 쓰지도 못했습니다. 이게 아니었으면 1990년대의 초호황, 그것이 이끈 신세대 문화 트렌드 같은 건 발생하지도 못했겠으며, 외환위기 당시 재기의 여지도 없이 최후진국으로 침몰하고 말았을 겁니다.

"한국 사람들은 빨리 변한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에요." 이런 융통성 강한 민족성이 한때 IT 강국 도약을 이끌었던 동력이란 점, 우리뿐 아니라 세계가 공감하는 대목입니다. 린 일란 서울대 교수(미국인이라고 하는군요)는, 이런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기질이, 세계적 대세이자 4차 산업혁명의 동력인 "지식기반 산업으로의 대거 이행"을 이끌 것으로 전망합니다. 자라나는 세대가 이런 지식 기반 산업의 역군으로 배출되려면, 먼저 우리 한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누가 가장 큰 기여를 했는지, 그 롤 모델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자리잡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누굴 본받고 따라하려 노력합니까? 우수한 인재는 과연 어느 섹터로 과잉(혹은 과소) 진출하고 있습니까? 나라의 미래는 첫째도 둘째도, 지식 기반 인프라, 그 중에서도 과학기술의 창달 분야가 어느 정도 지원을 받는지를 보고 점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혹은 당신의 자녀는, 한국이 만들어내고 세계가 놀란 과학기술의 선구자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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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문화의 무지개다리 - 한.일 영원한 우호를 위하여
이케다 다이사쿠.조문부 지음, 화광신문사 옮김 / 연합뉴스동북아센터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두 문화권, 혹은 두 국가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서로를 증오하는 비극이 좀처럼 잦아들질 않을 때, 이의 화해와 타개에 나서야 할 이들은 첫째가 과거의 원한에 물들지 않은, 순수하고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볼 수 있는 청년들이겠고, 둘째가 이성과 냉철한 판단에 근거해 사태를 파악할 수 있는 지성인들입니다. 이 두 집단마저 구원(舊怨)에 사로잡혀 눈이 멀어 있다면,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관계 설정은 거의 가망이 없다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과연 한-일 양국의 현황은 어떤 편이겠습니까?

이 책은 일본의 영향력 있는 명사인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 제주대학교 전 총장을 지낸 조문부 교수 두 분의 대담집입니다. 지식인들이 만나 대담을 나눌 때도 마냥 우호적이고 이지적인 톤과 분위기에서 말이 오가는 게 아니라, 때로는 시정 잡배보다 더 험악한 대립상이 빚어지기도 합니다. 허나 이 책은 두 연로하신 명사 사이에 시종일관 훈훈한 덕담과 서로를 이해하는 온화한 배려와 전망이 주고받아집니다.

이유는 첫째 이케다 회장이 (넓은 의미의) 지한파인 까닭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스스로 밝히길 부친(당연히 일본인)이 징병 조치에 의해 서울(제 추측에는 국권 상실 훨씬 이전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 이미 임오군란 전후로만 해도 일본 병력이 한양에 주둔한 적이 많았으니)에서 병역에 복무한 경험(부친에게서 전해 들었을)을 술회하는데,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등 한국 속담을 자연스럽게 입에 올릴 정도로 친근감을 느낀 분이었다고 하네요. 1차 대전 당시 전선 주변에 마련된 참호 속에서 죽음에 이르는 대치를 벌인 독- 불 양 군이었지만, 합의 휴전 시기에는 서로 담배도 교환하고 농담도 하던 게 양국 젊은이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투옥된 안중근 의사의 높은 의기와 됨됨이를 사모하여 각종 배려를 베푼 게 어느 일본인 교도관이었으며, 강점기 시절 인권을 침해 받던 조선인의 처지를 동정하여 현해탄을 건너 무료 변론에 나선 일본인 변호사분도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비록 소속 집단이 적대할망정 국지적으로는 개인 간에 은근한 정도 싹트는 게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런 걸 일절 부정하고 증오와 대립만 부추기는 자는 민족 구성원의 자격을 따지기에 앞서 벌써 사람이 되지 못한 말종입니다.

그래서인지, 책은 분위기가 훈훈합니다. 물론 훈훈한 덕담만 오가는 게 아니라, 두 노장 지성인(이라고는 하지만, 이케다 회장의 연세가 조 총장님보다 열 살 가까이 많습니다)들은 그간 인생의 관록을 통해 한국과 일본 고유의 민족성, 역사, 사회 구조적 특성에 대해 깊은 성찰을 거친 분들이라, 서로 처한 입장이 다를지언정 "심심상인격으로 말이 잘 통하는" 관계입니다. 책에는 이케다 회장과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이 27년 전 어느 공식 석상에서 조우하여 악수를 나누는 사진도 실려 있습니다. 사진을 보면 이어령 선생이 보다 젊어 보이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어령 선생은 지금 이 책의 조문부 총장님과 비슷한 또래이기 때문이죠. 남자 나이 이 즈음만 해도 누가 연상이고 연하인지는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구별이 되는데, 안타깝지만 일흔만 다들 넘기셔도 특별한 경우 아닌 이상 젊은이들 눈에는 그저 친구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이어령 선생이 괜히 언급되는 게 아니라, 젊은 시절 날카로운 탁견으로 일본인 고유의 행동 특질과 정신적 개성을 분석하여 문명(文名)을, 그것도 일본 현지에서 얻은 분이었기에, 지금 한 일 양국의 정치사회적 실태, 그 저변에 깔린 역사적 연원을 분석함에 있어 그분의 담론, 혹은 존재 자체가 빠질 수 없습니다. 조문부 총장은 대체로 당신 본인의 지론을 독자에게 담담히 들려 주지만(형식은, 물론 이케다 회장과의 대화입니다만) 여러 대목에서 이어령 선생의 견해를 인용, 원용합니다.

이 중에는, 국경이 곧 천하의 경계선이었기에 소속 집단의 대의와 명분을 바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자아가 아닌 자신을 절단해야만 했던(요 대목만큼은 이케다 회장의 표현입니다)" 융통성 없는 민족성을 왜 일본인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지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전후 시바 료타로 같은 작가도 "융통성 없이 외골수로 자기만의 이상에 매몰되어, 2차 대전 같은 무모한 도발을 감행한 군국주의 세력"에 대해, 사실 반성이라기보다는 미국인들 보기에 창피하다는 쪽의 각성을 여러 번 토로하는 걸 봤는데, 그냥 제 개인 생각이지만 역시 일본인은 도덕적 참회보다는 "수치심"을 더 중시하는 정신 구조인 듯합니다. 그게 과연 "융통성"의 문제이겠냐 하는 점에서요.

한국인의 특성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분석을 두 분은 주고받습니다. 일단 한국에선 가업을 일으켜도 그게 가족 사이의 관계입니다. 사업도 우리 집안의 화목과 번창을 위해 벌이는 것이므로, 일과 가족 둘 사이에 우선관계가 당연히 혈연의 끈끈한 재확인 쪽에 놓입니다. 사업이라는 게 당연히 가족과 집안 안에서만 범위가 끝나는 게 아니고 사회에 경계와 교차 부분을 확장하는 것인데, 사고 방식이 이러니 기업 내 정실, 부정, 비리가 그칠 날이 없습니다. 세금은 으레 정직하게 내지 않고 빼돌리는 게 원칙(?)입니다. 반면 일본은 일, 가업이 우선이고 그를 중심으로 자녀를 훈육한 후 계승시킵니다. 서양의 비즈니스 제도와 문화를 이어받을 때 이 점이 특히 유리하게 작용했으리라는 게 조 총장님의 견해인데, 아니나다를까 내내 "코리아 디스카운트"되던 한국 기업, 특히 삼성 등의 주가가 "사주가 투옥되고 나서" 내내 상승 행진인 것도 외국인이 이제서야 뭘 믿기 시작했다는, 그래서 기업의 진짜 가치를 평가해 주기 시작했다는, 대단히 씁쓸한 해석도 부각되는 게 사실입니다.

남북한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정립될 것 같습니까? 라는 질문에, 십여 년 전 조 총장님은 "그건 중국의 장래에 달려 있다"고 답하셨다는데, 이 부분에 대한 더 심화된 논의랄까 고견이 전개되지 않아 저 개인적으로는 그게 좀 아쉬웠습니다. (책의 주제와 의도가 그렇다보니 어쩔 수 없죠) 이케다 회장이 남북한에 대해 고루 보이는 관심, 한국(남북 모두)이 평온하고 번영해야 일본도 안정된 장래가 보장될 수 있다는 평화주의적 세계관이 특히 돋보였습니다. 한일 양국이 서로의 좋은 점을 보고 우의를 다져야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는 절박한 인식을 공유하며, 무엇보다 젊은 독자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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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스 버티고 시리즈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애 둘이 딸려 있는 당신, 그 부인은 사랑스럽긴 하나 별다른 생활 능력이 없는 평범한 가정 주부일 뿐인데, 어느날 갑자기 정리해고를 당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면, 당신은 아마 꽤나 절박한 심정일 겁니다. 처음부터 직업에 대한 강한 애착도 능력도 갖지 못하고 반쯤은 허공을 떠다니는 현실 도피자 마인드(이런 사람이라면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없습니다)라면 모르겠으나, 이 소설 속의 주인공 버크 데보레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일을 잘하던 사람인데, 회사의 사정으로 이 꼴이 된 겁니다.

배경은 1990년대 후반 한창 미국 업계를 덮치던 사무자동화 트렌드(당시 경영학과에서도 열을 내며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토픽이죠)가 초래한 대량 해직 사태를 메인으로 삼습니다. 이 소설을 읽던 독자 중 혹시 서두(주인공 버크의 1인칭 독백)를 꼼꼼히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 이거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양산되던 그 실업자 그룹에 속한, 중산층에서 상류층으로의 상승에 대한 꿈이 갓 좌절된 세대 이야기구나 하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게 아니고 혹 1920년대 대공황기를 배경으로 창작된 각양각색의 실업자 소재 미스테리인 줄 오인하는 독자들도 있겠죠. 허나 이 장편(조금 분량이 짧습니다만)은 그 중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낀 1990년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어쩌면 그 두 메가트렌드 스타일과 이처럼이나 닮아 있을까. 점점 드물어지는 자본주의의 호황기, 만성화된 경기 침체와 저성장, 이런 현실을 어느덧 필연으로 수용해 가는 대중에게, 어느덧 분노한 실업자, 중산층에서 하류층으로 떨어지는 중 가정을 지키려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1인칭 화자의 사연이 더 이상 예외가 아닌 보편상에 가까움을, 어쩌면 이 작품은 성공적으로 납득시키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판단과 선택은 독자의 몫입니다.

실업자가 궁지에 몰려 범죄의 나락에 한 발을 담그는 진행은 (앞에서도 말했듯) 일찍부터 (다시는 그런 시절을 겪고 싶지 않다는 듯 진저리치는 대중에 의해) 미스테리 장르물의 인기 높은 소재로 이미 부상했던 적 있습니다. 근데 이 작품은 그런 익숙한 경로를 밟는 게 아니라(즉 누가 마련해 준 범죄 음모에 소소한 도구로 쓰인다는 식이 아니라), 이 주인공이 적극적으로 자신이 세운 플랜에 의거하여 사람들을 해친다는 게 특이합니다. 무슨 동기로, 누굴 해친다는 걸까요? 다름 아닌, 자신이 이력서를 제출할 회사에, 같이 지원하여 경쟁자가 될 만한 이들입니다. 혹은, 자신보다 하등 나은 자격을 못 갖췄으면서 그 자리만 차지하고 앉은(주인공 버크 본인의 독특한 해석, 혹은 인지입니다. 누구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죠), 따라서 자신에게 그 자리를 내줘야 마땅한 기 취업자들을 죽이려 다닙니다.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여튼 이 작품의 메인 플롯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취업난에 신음하는 한국의 젊은이들도, 옆에 면접 보러 온 경쟁자들에게 "너(희들)만 좀 어디가서 죽어줬으면 내가 당장 합격이 될 텐데." 같은 생각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텐데, 여튼 젊지도 않고 먹여 살려야 할 입만 잔뜩 딸린 주인공 버크는 이처럼이나 놀라운(어찌보면 기발하기까지 한) 망념에 사로잡힙니다. 헛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지금 버크 데보레 씨는 매우 진지하고, 이 길만이 사회에 폐를 최소한으로 끼치면서 동시에 자신이 자신의 긍지를 지키면서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작가도 그런 의도로 이런 집필 방향을 잡았겠습니다만, 주인공은, 더 이상 사회 시스템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핑계를 잡아, 부당한 방식으로 남의 부를 가로챈다며 재산가들로부터 직접 돈을 탈취하고 다니는 소위 "의적"으로의 비화보다는 이 방식이 훨씬 온건하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 체제 전체를 부정하기보다는 몇몇 개인에게 흠을 잡는 편이 훨씬 부담이 덜하기도 하겠고요. 제가 짐작하기로 더 합당한 이유는, 시스템 전체를 적으로 삼기보다, 자신의 앞길에 장애가 되는 몇몇 개인을 응징하거나 제거하는 편이, 응보와 추적의 손길(공권력)에서 도피하기에 훨씬 편하다는 이유도 있었겠습니다. 실제로 그는 처음에 저지른 몇 건의 살인을 성공적으로 은폐했고, 아 이거 해 보니 할 만한 노릇이구나, 내가 감당 가능한 영역이구나 같은 어이없는 확신도 체득했을 법합니다.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나는 이처럼이나 체제에 순응하고, 그를 긍정하는 성실한 사회인이다. 부적격자를 제거하여 회사의 비능률요소를 함께 없애 주고, 더 유능한 나를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서로가 윈-윈하는 결과를, 다소 비상식적이며 긴급한 방식으로 이루려 했음이니, 어느 누가 나를 범죄자라며 비난하겠는가?" 신랄한 반어법으로 모두가 모두를 적대하고 갉아먹는 신자유주의 트렌드를 비판하려 했음은 어느 독자라도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웨스트레이크는 스타일리시한 문체와 개성 있는 구성으로 오래전부터 독자를 매혹해 온 전업 장르물 작가입니다. 그런 그가 어쩌면 시대를 앞서간 안목으로, "궁지에 몰려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은 실업자의 킬러 변신기"의 기괴한 행각을, 의외다 싶은 뚜렷한 주제의식까지 겸해서 이렇게 한 편의 소설로 빚어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은 예전 80년대 학번 어르신들이 익숙해할, 사회 비판 성향의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Z>, <계엄령> 등이 유명하죠)가 십 년 전쯤 영화화하기도 했는데(그 다운 선택이죠?) 설정들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제지회사의 중견 관리직으로서 소설 곳곳에 배어 있는 업계의 디테일도 제 눈길을 끌었는데요. 당시 한국의 한솔제지도 삼성그룹에서 갓 독립해 나와(예전 상호:전주제지) 공격적인 경영으로 주목을 받았었거든요. 신기술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가, 당시 글로벌 규모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던 해당 업계의 상황을 잘 반영합니다(이런 거 보면 진정 작가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죠). 여담입니다만 한솔은 이 기세와 성과를 발판 삼아 PCS 이동통신업에도 진출했으나, 그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였습니다. 만약 잘 되었다면 그 사세가 지금의 CJ를 능가했을지도 모릅니다.

웨스트레이크의 평소 스타일대로, 어쩜 이런 순간에 이런 기괴한 상황과 공교롭게 맞닥뜨릴 수 있을까? 싶은 희한한 장면들이 대거 삽입됩니다. 예를 들면 버크는 잠복 중 뜻하지 않게, 자기 어린 딸(질이 안 좋은 여대생)을 스토킹하는 어느 교수로 오인받아 그 어머니에게 항의를 받는데,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황당하기로는 지금 자신이 저질렀거나 저지르려는 범죄의 동기가 훨씬 더하죠) 여튼 이런 결정적인 목격자를 남겨 둬서는 안 되겠으므로 그 부부를 모두 죽여 버립니다. 부잣집에서 잘못된 성장 과정을 거쳐 "내 부모가 모두 죽고 유산으로 편히 살았으면" 같은 미친 생각을 품는 여성은 소설 속에(간혹 현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요. 여기서 버크가 우연히 마주진 케이스도 그러합니다. 그 딸은 귀찮은 늙은이와 성가신 부모가 몽땅 죽어나갔으니 이런 대박이 또 없다 여기며 쾌재를 부릅니다. 버크 역시 딱 의심 받기 좋은 용의자가 알맞게 자살까지 해 줘서 살인 혐의를 말끔히 벗습니다(이 건에 한해). 여기서 그의 심리 묘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여인이었던가. 이 역시 죽어서 아까울 게 없는 인생이었으니..."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합리화에의 한계가 없는 듯한 정신입니다. 루신이나 니콜라이 고골 등이 일찌감치 정착시킨 "광인 일기"류를 엿보는 느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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