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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한석희 외 지음 / 페이퍼로드 / 2016년 11월
평점 :
요즘 무슨 유행어라도 되듯 "4차 산업 혁명"을 어디서나 거론하고 화제로 삼습니다. 정작 물어 보면 시원하게 답을 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 권의 책을 읽어 보면 "아 확실히 경제와 산업의 기본 틀이 뭔가 근본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구나"하는 반응들이 고작이죠. 그저 기업 제품을 일상에서 소비나 할 처지에서도, "한 4, 5년 뒤면 구매해서 쓰는 아이템의 성격과 기능이 확 바뀌겠구나" 정도쯤이야 다들 감이 올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보라면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자율주행, 3D 프린팅(요 화두는 2, 3년 전에 비해 좀 뜸해졌네요) 등을 주입식 교육에 길든 수험생처럼 척척 대답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주입식 단답형 지식이 그 자체로 우리 삶의 구체적 개선, 질적 향상을 이루는 데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비록 틀린 대답은 아니라고 하나) 4차 산업 혁명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 혹은 현상 나열식 이해, 대외용 모범 답안 작성에 그치는 것도, 우리 자신(남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일임을 다시 강조합니다)의 미래에 대한 절박한 대처에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절박한"이란 형용사를 쓸 것까지 있냐고 되묻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4차 산업 혁명의 본질에 대해 아직도 서투르고 안이한 인식에 그친 겁니다. 종래의 1, 2, 3차 산업 혁명이 선도자, 챌린저, 혁신가에 대해 거대한 부의 선점 가능성을 열어 주는 정도였다면, 작금의 4차 메가 트렌드는 "뒤처지는 사람은 모두 도태"라는 슬로건을 대문짝만하게 걸었다는 점에서 앞의 흐름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이유에서죠. 1, 2, 3차 산업 혁명의 본질이 무엇이었든 남보다 성큼 앞서가려는 의욕이나 야심이 없는 이들에겐 별 큰 관심사가 될 수 없었으나, 이제 막 벌어지려는 산업판, 경제 필드의 대혁신은 거대 기업이든 미미한 소비자든 전방위적으로, 모세 혈관 수준의 파급력이 판을 휩쓸리라는 점에서 상황이 크게 다르다는 뜻입니다.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자율주행, 3D 프린팅 따위가 4차 산업 혁명의 "외연"이고, 그동안 나온 책들이 구체적인 업황과 사례를 통해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하려는 데 주력했다면, 이 책은 그 "내포"를 심층적으로 짚는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차별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현상과 사건에서 사실 진지하게 주목해야 할 대목은 "내부의 공통되는 본성"이며, 언제든 바뀔 수 있는, 혹은 후순위로 밀려날 수 있는 겉모습(물론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만)에 치중한다면 이후 혼란이나 착오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손가락보다는 달에 시선을 줘야 하고, 일단 달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면, 수시로 바뀌는 외양보다는 그림자에 감춰진 모습 포함 전체의 구조와 운동 원리를 파고 드는 게, 무엇보다 우리의 생존(과거 조수 간만의 차를 염두에 항상 두어야 했을 어민, 선원이라든가, 농사에 역월을 활용해야 할 경작민이라든가를 떠올려 보십시오)에 유리한 선택입니다. 4차 산업 혁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지식, 정보라야 관심과 정력의 우선순위를 둘 자격이 있습니다. 내 직장 생활, 비전 설계와 무관한 지식을 머리 속에 잔뜩 쌓아 봐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필진에 참여한 전문가분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 "한국인더스트리4.0협회" 소속이라는 게 공통점입니다. 이 책에서 이들은 먼저 인더스트리4.0과 4차 산업 혁명 간의 연관성을 설명합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대목들 중 하나였는데, 대뜸 "지금 상황이 이렇다면서" 상세한 디테일을 풀어 주는 것도 좋지만, 대체 이런 상황이 어떤 기원을 가지며 무슨 맥락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배경 설명도 좀 해 주는 게 뭔가 책임 있고 학문적 근거를 갖춘 접근 태도입니다. 또한 이런 설명은 비록 해당 분야에 대해 일천한 지식만을 갖춘 독자라 해도, 그를 보다 쉽게 납득시킬 수 있다는 게 장점입니다. 인더스트리4.0과 4차 산업 혁명은, 그저 둘이 동의어 비슷한 거 아니냐며 되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크게 틀렸다고는 못 하나, 이런 피상적인 이해만으로는 그 개인의 구체적 장래 설계에 큰 도움이 못 될 것 같습니다.
인더스트리4.0은 독일에서 비롯된, 4차 산업 혁명(이라 정리되는 트렌드) 속의 여러 혁신을, 각국 혹은 개개 기업들이 산발적, 무질서한 양상으로 전개하지 말고, 경쟁의 룰을 마련한 채 윈-윈의 틀 안에서 효율적으로 밀고 나가 보자는 "플랫폼"입니다. 여태 1, 2, 3차 산업 혁명은 앞을 내다보는 혜안의 혁신가들이 자발적으로 각개약진한 게 거대한 물결을 이뤘을 뿐이었습니다. 사실 미국식 자본주의는 자유 방임 속에 자연스럽게 도달되는 합의와 균형점을 추구하지, 정부나 (설사 업계 결사라고 해도) 공공단체의 개입 같은 걸 매우 기피하는 편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더스트리4.0은 지극히 독일적 특성이 드러나는 플랜이자 프레임이며 시스템으로 보입니다.
물론 4차 산업 혁명의 개별 혁신들이 먼저이지, 인더스트리4.0가 생기고 나서 4차 산업 혁명의 기운이 일기 시작한 건 아닙니다(인간의 작위적 계획으로 이런 걸 만들어내기란 불가능하죠). 다만 독일의 현명한 산업가들과 정부의 정책 결정 담당자들이, 지금 되어가는 양상을 보니 이에 어울리는 어떤 질서 있는 단일 플랫폼을 만들어 경쟁의 소모적 부작용을 방지하고, 아울러 (이게 진짜 중요한데)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다른 나라에 팔아 먹어 항구적인 개런티 수입도 확보하자는 속셈이 생긴 겁니다. 그러니 4차 산업 혁명이 인더스트리4.0의 틀을 만들었고, 반대로 인더스트리4.0은 4차 산업 혁명의 질서 있고 뚜렷한 흐름을 정리해 나가게 된 거죠.
무엇을 플랫폼으로 삼자 어쩌자가 특정 국가(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의 제안, 강요로 관철되는 게 물론 아닙니다. 참여자, 당사자들의 자발적 동의가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의 채산과 이해 관계를 합당히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책 여러 군데에서 강조하고 있듯, 오바마 역시 당초에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이 제의에 응했을 뿐입니다. 구체적인 개별 산업 경쟁력도 앞서고, 혁신도 먼저 시작했는데, 다른 나라의 아젠다 선점을 용인하는 게 마음에 내킬 리가 없죠. 주판알을 튕겨 보고 이에 참여하는 편이 우리한테도 이익이겠다는 계산이 다들 선 후에야, 이 인더스트리4.0이 플랫폼 대세로 부상된 겁니다.
이 책이 인더스트리4.0을 각론보다 더 강조하는 건(물론 다른 책들에서 설파, 증명되었듯 각론도 당연히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어떤 원리, 원칙과, 실질적으로는 물론 "비유적으로도"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대략 25년 전쯤부터, 미래는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가 지배할 것이며, 디지털 혁명의 본체가 여기에 있음을 니콜라스 네그로폰테가 그의 탁월한 고전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는 현재 전혀 새로운 주장이 못 되고, 다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공감대가 되었습니다만, 이 책의 저자들은 4차 산업 혁명 이슈와 관련하여 이 논리를 소전제로 하부 상황에 다시 적용하는 겁니다. 제아무리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자율주행, 3D 프린팅 등의 개별 섹터에서 경쟁력을 갖췄다 한들, 이런 하드웨어는 그를 상위 단계에서 조정, 통제하는 소프트웨어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최종적 수익 흐름은 소프트웨어 섹터로 빠져나가는 게 필연이라는 거죠.
어떤 이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자율주행, 3D 프린팅 등도 어차피 소프트웨어로 승부를 보는 분야들이다. 하드웨어는 당연히 하청업체가 생산을 맡지 않겠는가?" 물론 맞습니다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을 보지 못한 소치입니다. 사물인터넷이나 자율주행에도 각각의 플랫폼 표준이 마련되겠으며, 이를 선점하는 업체가 패권과 수익의 본류를 거머쥘 것은 당연합니다. 구글이 안드로이드 보급에 그처럼 집착하는 이유도 이와 같겠고 말입니다. 그런데, 인더스트리4.0은 그런 개별 플랫폼을 모두 포괄하는 위상의, 총괄적 보편적 소프트웨어이자 플랫폼 구실을 할 수 있고, 다분히 그런 의도로 독일이 지금 이것을 밀고 있는 거죠. 말하자면 "플랫폼의 플랫폼, 소프트웨어를 제어하는 최상위 소프트웨어"와 같은 시스템, 패러다임입니다. 각론을 보조하고 보기 좋게 정리하는 틀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최종 보스처럼 기능하기도 하는 개별 산업, 알짜 캐시 카우인 거죠.
기존의 틀을 바꾸는 충격적인 혁신이 이로부터 분명히 하나 파생됩니다. 21세기가 갓 시작된 후 첫 십년기는, 알다시피 중국이 세계 경제의 성장동력 구실을 해 왔습니다. 그 동력이 때이르게 꺼진 후에는 동남아가 바톤을 이어받으리라 기대했지만 실적은 시원찮은 편이고요. 2008년에는 미국발 서프프라임 부실사태가 글로벌 경제의 종막을 고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이처럼 전망이 불투명하던 상황에다, 인더스트리4.0이 교통정리해 준 "4차 산업 혁명"이 새로운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는 겁니다. 확실히, 개별 국가의 미친 급성장에 기대는 건 지속적인 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경제 구조의 건강성에 악영향까지 미칩니다(대표적으로 우리 나라를 들 수 있죠).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원가 경쟁력을 갖춘 타국으로 기업이 우수수 빠져 나가는 게 자국의 GDP 관리에도 불리하며, 그 어드밴티지가 사라진 후에는 다시 어디를 찾아 유랑할지도 대책이 안 서겠죠. 이는 무엇보다 표피적 호황을 좇아 동분서주하는 행태에 지나지 않으므로, 어떤 기업에게건 장기 전략으로 기능할 수 없습니다.
인더스트리4.0은 이른바 "스마트 공장"의 운용을 가능하게 합니다. 주지하는 대로 인건비 면에서 한국, 일본, 미국이 중국과 경쟁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은 그럼 언제나 저임금의 무제한 인력 pool을 세계의 게스트들에 제공할 수 있을까요? 그들도 의식이 각성하면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찾으려 들 테고, 중산층이 널리 형성되어 생활 수준의 상향에 따른 물가 상승이 본격화하면 이런 입지적 호조건은 금세 휘발되기 마련입니다. 인더스트리4.0은 이런 암울한 전망에다 대고 생각도 못하던 돌파구 하나는 제시합니다. 제조원가와 직간접 경비, 노무비 사이의 구조는 경영대 학부 1학년생들도 다 배우는, 관리회계 과목의 기초 중 기초죠. 이 중 인더스트리4.0는 간접 제조비, 간접 경비에서의 혁신적 원가 절감을 이루자는 겁니다.
노무비 경쟁 우위는 결국 사라지게 마련이지만, 인더스트리4.0이 탁월한 혁신으로 마련한 원가 절감 팩터는 구조적, 소프트웨어적 측면을 치고들어가는 거라, 기업 원가 구조의 건전하고 항구적인 설계에 도움이 됩니다. 이는 또한, 지난 십년기에 피할 수 없는 대세로 여겨진 오프쇼어링을 뒤집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탁월합니다. 국내에 스마트 공장을 마련한 사장님은, 이제 힘들여 불안정한 타국 현지 진출을 시도하지 않고도, 익숙한 자국의 문화 풍토 속에서 말이 통하는 자국 근로자를 고용하여, 안심하고 국내에서의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 거죠. 대개 노동자(숙련/비숙련, 정규/비정규 막론하고)들은 기업 생산 기반의 해외 이전을 달가워하지 않는 게 당연한데, 이런 시사점은 노-사 간 계급 이해 충돌도 해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건강한 미래를 예고하는 면이 있습니다.
좀 뜬금없는 개인적 사족인데, 왜 트럼프가 지금 캐리어 같은 기업의 이해관계자, CEO 등을 만나 해외 이전하지 말라고 협박도 하면서 주저앉힌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개별적, 임기응변 대증요법이 산업계의 체질을 얼마나 악화시키는지는 따로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인데, 만약, 혹시라도, 트럼프가 이런 시대적 대세(아직 분명히 표면화하지 않은)를 알고 한 행동이라면, 좀 달리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