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의 시대 - 풀린 돈이 몰고 올 부의 재편
김동환.김일구.김한진 지음 / 다산3.0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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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저는 정주영 현대 창업자의 자서전을 읽을 때, 소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그를 두고 주위(선발 사업가들 그룹이나 고위 관료 그룹)에서 "그 사람이 인플레가 뭔지나 알겠어?"라고 비웃었다는 대목을 읽은 적 있습니다.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사람이 남들 하는 대로 사업이라고 벌여 동분서주하지만, 거시 경제의 큰 흐름이나 자본주의 구조의 기저를 손톱만큼이나 이해하고 설치겠냐는 조소였죠.

이에 대해서는 대강 이렇게 대응을 할 수 있겠습니다. 1) 미시(개인 사업은 아무리 규모가 커도 어디까지나 미시입니다)와 거시는 작동 원리가 꽤나 다르며, 2)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목숨 거는 열의로 사업을 하는 이라면 아주 바보로 태어난 게 아닌 이상 뭔가 통찰력 같은 게 생깁니다. 그게 탁상공론식 겉치레(소화 안 된 겉도는 지식)보다 훨씬 효용이 높을 때가 많죠. 물론 가장 골치 아픈 유형이라면, 배움도 없고 그렇다고 실물의 흐름도 모르면서 머리까지 나쁜, 몇 마디 주워들은 구호로 거친 현실을 마구 재단하려 드는 용감한 이들입니다.

아무큰 요즘은 일본식 줄임말인 "인플레"를 잘 쓰지 않고 원어 그대로를 더 널리 사용하는 듯합니다. 제가 서평 앞에 저 일화를 꺼낸 이유는, 이 인플레이션이라는 게 자본주의 경제가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할 영원한 숙제, 업보 같은 것이라는 뜻에서였습니다. 불가사의하게도 자본주의를 채택한 어느 나라의 거시경제건, 경기의 사이클이라는 게 반드시 있습니다. 잘나갈 때는 어느 목에서 점포를 잡고 장사를 하는 이들이건 높은 매상고를 올리고, 이들이 다시 다른 섹터에서 통 크게 소비를 하면 그 돈이 또 돌고돌아 다른 이들의 가계를 살찌우고..... 이게 세칭 "경기가 좋다, 활황이다"라고들 부르는 전형적인 풍경입니다.

그러다가, 경제 전체에서 새로이 생산된 물자, 서비스의 가치는 그럭저럭인데, 이를 적절히만 대표해야 할 종이돈만 엄청 불어나서 많은 이들의 눈을 속였다는 인식("내가 알고 보니 그리 부자가 아니었어!")이 확산하면, 소위 "거품"이란 게 뻥 터집니다. 거품도 아주 없을 수는 없어서 그저 필요약 정도로만 기능하면, 관리 가능한 수준에서만 커졌다 줄었다 하면, 그건 정상적인 생리 작용의 일부라서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진즉에 부피가 줄었어야 할 것이 맘대로 덩치를 키우고 돌아다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돌연사하면, 걔만 죽은 게 아니라 그 위에 올라탔던(돈도 없으면서 펑펑 써대었던) 상당수의 경제 주체, 대중들이 함께 죽습니다. 이런 게 공황입니다. 따라서 버블과 공황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분수도 모르고 즐긴 대가를 나중에서야 혹독히 치르는 거죠.

이 책의 제목과 주제는 "인플레이션"입니다. 인플레 때문에 물가가 살인적으로 올라서 국민들이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이런 걸 지적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장바구니 물가 수준에 비해 소득의 오름세가 너무 더뎌 못살겠다는 아우성은 곳곳에서 들리고, 이 책에서도 김동환 소장님 같은 분이 (심지어 작년 촛불집회는 정치적 성격보다 민생고의 절규라고 봐야 한다면서)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도 세 분 전문가가 거의 의견이 일치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지금 한국 대중의 불만과 좌절은 물가고 때문이 아니라, 벌이가 시원찮은 데서 연유한 부분이 더 큽니다.

그게 그게 아니냐는 반론은 경제를 모르는 소치인 게, 각각의 경우 처방이 다르기 때문이죠. 다른 정도가 아니라 180도 반대 방향입니다. 물가가 쓸데없이 높기만 하다면 지금 시중에 풀린 돈을 거둬들여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물가는 적정 수준인데, 다만 지갑이 텅텅 비어서 문제라면, (의미심장하게도) 정부는 금리를 더 낮춰 시중에 돈을 더 돌게 해야 합니다. 전자는 허리띠를 졸라 긴축을 하자는 거고, 후자는 여력이 있으니 당장 빚을 좀 내서 실탄을 보충한 후, 신나게 번 뒤(그럴 전망이 있다는 뜻) 나중에 갚자는 거죠. 후자를 무작정 죄악시하는 시각은 역시 경제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김동환 소장님은 "생일 하루 잘 먹자고 사흘 굶을 생각이냐"고도 하시는데, 그냥 당장의 지출만 줄이고 궁상 떨다가는 평생 가난하게 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취지입니다.

이 책은, 지금 우리가 어느 수준, 어느 정도 역량을 가졌는지 냉철하게 진단하여, 주제파악 후 긴축, 긴축 모드로 회귀할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세계적 경기 팽창 모드에 편승해서 돈 좀 벌어 볼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란 전제 하에 모든 논의를 시작합니다. 제목은 소박하게 "인플레이션"이지만, 내용은 차라리 "한국과 세계의 경제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거시경제 이슈 전반을 모두 망라한다 할 만큼 광범위합니다.

주제가 광범위하면 "거, 말은 듣긴 좋지만 하나마나한 덕담만 주고받다 끝나는 거 아냐?" 하고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시중에 그런 책도 많죠(아니면 정반대로, 특정 정파의 정강 정책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선전물, 경제 서적의 탈을 쓴 정치 서적도 있습니다). 이 책은, 적어도 그런 류는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과감한 것 아닌가, 본래 경제 현상이라는 게 이처럼 직설적이고 직관적인 말로도 표현 가능한 주제였나, 새삼 놀랄 만큼, 세 분 전문가 모두 시원시원하게 막 지르십니다. 막 지르는 식으로 논의를 끌고 가면 재미도 나고 논지가 바로바로 이해 되는 장점은 있는데, 깊이가 없거나 편향된 결론만 잔뜩 얻고 끝날 위험도 있습니다.

이 책은 (고수들답게) 상당수 이슈나 현황에 대해 합의를 공유하는 세 전문가들의 토론이지만, 반대로 의견이 갈릴 때는 대립 지점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아주 솔직한 책"입니다. 대개가 토론, 대담 형식이라, 독자는 어느 한 가지 결론에만 오도, 고착될 염려가 적습니다. 곰곰히 숙고하면 세 분 중 어느 전문가의 결론이 옳을지, 논점에 따라 개별적으로 알찬 깨달음이 자리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하나만 놓고 보면, 무작정 긍정하거나 반대로 거부하게도 되고, 아예 뭐가 뭔지 몰라 판단을 못하기가 십상이죠. 그러나 서로 미묘하게, 혹은 판이하게 다른 세 아이템을 같이 대조하면, 각각의 장단점이 잘 파악되어 무엇을 취사선택할지 판단이 빨리 섭니다.

의견이 일치하는 대목에서도, 세 분 고수는 같은 현상, 결론, 논리를 두고 서로 다른 표현으로 독자에게 풀어 줍니다. 그래서, 설령 한 분의 입장이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다른 분의 다른 버전으로 다시 듣고 나면 앞 분의 논의까지 덩달아 납득됩니다. 앞으로, 난해한 주제를 다루는 경제 서적은 모두 이런 포맷을 취한다면, 독자들에게 꽤 유익한 공부가 될 것도 같네요. (헛된 기대이겠습니다만)

1장은 자산시장에 대한 전망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작년 하반기부터 주가가 고공행진이고, 아파트값도 (전체는 아니고 일부 지역에서 - 라곤 하나, 그래도 꽤 추세적입니다. 전엔 다들 이게 일시적이라고 봤는데 너무 오래갑니다. 지난시절과는 패턴이 다르긴 하나, 여튼 호황은 호황입니다. 많은 전문가분들 위신이 크게 상할 만큼) 투기과열지구 지정이 이어질만큼 심상치 않습니다. 그럼 고수들 이야기를 들어 봐야죠. 이거 큰 재앙으로 이어질 거품으로 치닫는 거냐. 아님 미래를 낙관해도 된다는 어떤 시그널이냐. 물론 후자 쪽으로 치달을 나이브한 이는 일반인 중에도 없을 겁니다. 문제는 신중하게 처신하되, 어느 수준까지 신중할지를 판단 잘 해야 한단 거죠. 아파트 버블 터질 거라고, 박 정부가 정권 유지를 위해 인위적으로 부양하는 거라고 그렇게들 지적이 나올 때, 현장에서는 다들 코웃음을 쳤습니다. 이론에만 매달릴 뿐 시장의 형편을 너무도 모르는 소리라고요. 이게 작년 이맘때 분위기였어요.

김한진 박사는 (좀 많이) 신중하자는 입장에 기웁니다. 이 1장에서뿐 아니라 책 전체를 통틀어 이 입장이 꽤 일관되어 있습니다. "경제에는 공짜가 없다. 2008년 위기는 양적 완화를 위해 미봉되었을 뿐, 누군가가 무분별하게 소비하고 타인에게 전가한 부담, 해악은 아직 덜 해소되었다. 이런 판에 다시 통화를 팽창하거나 방만하게 시스템을 관리하면 다시 부실이 폭발할 수 있다." (책의 표현은 아니고 독자인 저 나름대로 요약, 리프레이즈한 겁니다) 반면 김일구 한화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이미 부채와 위험 요소는, 놀라울 만큼 효과가 컸던 연준의 핸들링으로 다 녹았다(녹았다는 건 영어식 표현이지만, 우리말로 저리 직역해도 그 뜻이 잘 전달됩니다. 본래 경제 정책은 경로 곳곳에 포진한 폭탄을 해체하고, 독성 물질을 옅은 농도로 잘 녹여 내는 수완이 그 본질이죠)"는 전제 하에, 이제 성장을 위해, 경제 주제의 지갑을 두둑이 채우기 위해 과감한 행보를 디디야 할 때라는 쪽입니다. 세 분 중 김일구 센터장이 가장 알기 쉽게, 또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타입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사회자 격인[실제로 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맡고도 있습니다] 김동환 소장이 책 중 좌담에서 개입도 하더군요)

"이러다 일본 된다." 이 진단은 보수 언론, 심지어 대중 사이에서도 폭 넓은 지지를 얻고 있는 편이죠. 그런데 이 책 대담자 세 분 중, 적어도 두 분은 이 말에 정면으로 반대합니다. 특히 김일구 센터장 같은 분은 여러 근거를 들어가며, 결코 한국은 일본처럼 장기침체에 빠지지 않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잃어버린 30년을 겪은 일본이 특수할 뿐이지" 다른 각국의 경제, 특히 조건이 여러 모로 다른 한국은 다른 길을 걸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거죠. 제가 가장 속이 후련했던 건, 이 일본의 사례를 일반화할 게 아니라, 기존 경제학 교과서에서 써 오던 "저축의 역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될 것 아니냐는 주장이었습니다. 기존의 개념틀로 설명이 가능한 내용이면 그로 환원하면 충분하다는 건 어느 학문에서나 공통된 상식입니다. 번거롭게 매번 새 말을 만들어낼 게 아니라 말이죠. 또, "일본화"의 프레임은 결국 거기서 빠져 나올 답이 없다는 점에서 건설적이지 못한 논의입니다. 허나 "저축의 역설"은 경제학자들이 고안해 둔 이론적 해법과 관료들이 실제 운용 과정에서 터득한 경험적 처방이 이미 있습니다.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김동환 소장 같은 분은 이 대목에서, "작년 촛불집회를 보라. 우리 국민들이 이처럼 역동적인데 과연 침체가 있을 수 있겠는가?" 같은 말까지 합니다. 이는 예전 학장 시절 정운찬 전 국무총리도 수업 시간에 비슷한 말을 한 적 있죠.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요(생각해 보니 맥락도 큰 찬이가 안 나네요).

"소득과 성장이 일치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기업은 높은 실적을 거두어도 그 과실은 개별 경제주체, 가계의 소득으로 적정하게 분배, 파급되질 않는다." 근데 이 논의는, 근래 다분히 정치적 논쟁으로 타락한 소위 낙수효과(트리틀다운 이펙트) 이슈와는 관점이 좀 다릅니다. 어떤 분은 이 책 세 분 대담자 중 한 분인 김일구 센터장님이 우파 쪽에 치우치지 않았냐고도 하던데, 지금 바로 위에 인용한 이 말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드는지 물어봐야겠어요. 다만 김 센터장께선 "국가대표를 키운다는 생각으로 대기업을 밀어줘야 한다"는 논지는 자주 강조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또 김 소장님(김동환)과 김 박사님(김한진. 세 분이 모두 김씨라서 책 읽으면서 처음엔 구분이 좀 어렵더군요)이 동맹을 이뤄 반대하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이런 개인 성향을 파악하면서 읽어야 책이 더 재미납니다.

김 센터장께선 그러나 성장과 소득의 (거의 필연적인) 분리까지 논지를 확장시키시는데,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이런 대목은 좀 의아스럽더군요. 교과서 이야기도 하시지만 거시경제학의 가장 뼈대를 이루는 도그마 중 하나가 "국민 소득 삼면 등가의 원칙"입니다. 경제 구조의 개별 특성에 따라 경로가 길고 짧고, 시간이 덜 걸리고 더 걸리는 차이는 있어도, 결국은 생산국민소득이 분배, 소비 국면에서까지 일치, 균형을 찾아간다는 게 교과서의 가르침이죠. 물론 현실의 사정이 그새 변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원 설마!), 언제나 모범생처럼 근본 명제의 적용과 원용을 강조, 선호하시는 센터장께서 유독 이 대목에서만은 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시지 않나 해서입니다. 다른 이슈를 설명하실 때 너무 사이다처럼 후련한(그러면서도 엄정하고 명쾌하게 교과서적인) 해명을 해 주셨기에 제가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 나라는 자영업자가 너무 많다." 그러면서도 이 많은 자영업자들이 생산에서 기여하는 비중은 또 적습니다. 그 말은 자영업자들이 대개 현장에서 돈 많이 못 벌고 고전한다는 뜻도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자기 책임 하에 개별적으로 뛸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기량을 효율적으로 쏟을 직장을 마련해 주는 게 더 중요하다"는 제언도 합니다. 상당히 과격하지만, 자영업이 점차 특정 프랜차이즈들로 통합되어 가는 양상이, 어느 정도는 이런 진단을 반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점주들은 본사와의 갑을 관계 대립상을 그리 부각하지 않고, 정부 쪽에 불만을 토로하는 쪽으로 바뀌더군요. 이 논의는 과거 영세농이 너무 많아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엄청난 폭발성을 지닌 이슈와도 유비 관계가 성립합니다. 잘못 다뤘다가는 큰일나죠.

김한진 박사님은 그럼 (정치적으로) 개혁 성향(소위)이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김 박사님은 자유주의 진영을 대변하는 편이더군요. 정부는 최소한으로 개입을 억제하고, 경제의 작은 지류에까지 속속 파고들어 전체적으로 놀랄 만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시장(market)"에 더 많은 권한을 넘기라는 입장입니다. 책에는 심지어 공기업을 대폭 민영화하고, 정부는 새로운 공기업을 만들어서 유능한 젊은 인력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주라는 제언까지 나옵니다. 듣기엔 큰 기대를 부풀게 하는 면도 있습니다만(국지적으로 타당하기도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너무도 많은 난관이 기다릴 것 같습니다. 공기업 노조측에서 과연 가만있겠습니까? 또, 어떤 기준으로 무슨 인재들을 선발하여 그런 "특혜"를 줄 것인지를 놓고, 끝도 없는 분란이 일겠지요. 안 봐도 눈에 선합니다.

지금 세계는, 2008년 대재앙이 남긴 몹쓸 폐단을 과연 말끔히 쓸어내고 나서 새출발을 다짐하는 중인가? 이에 대해서는 제가 지난 3월경에 서평도 쓴 <트럼프 시대 호황....>에서 이미 한 입장을 광폭으로 전개하고도 있었습니다. 오바마를 지지하거나 높이 평가하든, 그렇지 않든, 최소한 그가 위기 수습을 멀끔하게 해 놓았다는 데 대해선 의견이 일치합니다. 그의 가장 극렬한 반대자인 트럼프가, 이제 확장 정책, 과감한 인플레이션 자극을 통해 호황기를 한번 열어보자고 나서는 건, 전임 오바마가 일군 성과를 그도 긍정한다는 실토밖에 안 됩니다(역설적이죠). 소규모 개방 경제로서 대외 요인에 너무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엮일 수밖에 없는 우리(이 책에도 나오듯 소위 베타가 큰)로서는, 이 국면에서 과감한 결단을 내려 영리한 실속을 챙길 건지, 아니면 이른바 "재정 건전화, 충실"이란 매력 없는 옛 숙제에 계속 매달릴 건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고 해야겠습니다. 세 분 전문가가 호방하게, 솔직하게, 기탄 없이 심중을 털어 놓는 토론을 구경하며, 독자도 함께 각성하고 공부하는 바가 많았네요. 말미에 실린 "트럼프라는 현실"은, 정치적 선호나 프레임이 깔리지 않은, 냉정하면서도 현실에 밀착한 쾌도난마식 설명이 너무도 재미있었습니다. 이 책, 한마디로, 소설보다 더 재미있으면서, 보약보다 영양가 높은, 교과서보다 더 공부가 되는,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읽을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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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와의 결혼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23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김석환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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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어떤 남녀라도 서로에게 가장 알맞은 짝이 있게 마련입니다. 단, 세상이 너무 넓다 보니 불운하게도 평생토록 서로 못 마주치는 경우가 대부분, 대부분이라는 게 문제입니다(그래서, 처음부터 없었던 것과 결과에 있어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게...). 그래서 우리는 차선, 차차선, 차차선인 이성에게 만족하거나, 아님 차악, 어쩌면 최악의 상대에게 자기 편할대로 허울을 씌워 최면을 걸고 사는 수도 있습니다. 본능과 호감이라는 게 있는데 보통도 아니고 어떻게 최악을 골라 착각할 수가 있는가? 인간 내면이라는 게 그래서 간단치 않다는 겁니다.

언제나 후회 않을 선택만 하는 사람은 대개 재미없는 유형이거나, 아니면 아예 본인 자신이 최악의 말종이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평범한 우리들은 "내 느낌이 맞겠지. 설마 무슨 일이야 생기겠어?"하고 기분 좋게 순간의 이끌림에 충실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나서는.... 음.... 그런데, (어리석었을지언정)그나마 덜 이기적이고 성격 좋은 타입은, 나중에서야 그 선택이 그릇되었음을 인정할망정, 후회하거나 미련을 갖거나 남탓을 하지 않습니다. "그 선택도 어차피 내가 내린 결정이었어." 이런 못난 자신도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 게 진짜 인간이라며 한번 씩 웃고 어제보다는 내일에 시선을 돌리는 게, 설령 멍청하단 소리를 들어도 멋진 사람 아니겠습니까?

남자 같으면 또 모르겠는데, 여성이 행여 인간 못된 배우자(혹은 그에 준하는 상대)를 만나 고생을 하는 게 참 딱한 경우입니다. 꼭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같은 고전을 들추지 않아도, 우리는 숱한 본격 문학이나 장르물에서 이런 유형을 접하며, 같이 슬퍼하고, 흔한 공감과 개탄을 취미 삼습니다. 언제나 인간사의 진한 우수가 배어 있어 독자를 센치하게 만드는 데 도사님이신 코널 울리치(즉, 윌리엄 아이리시)의 작품을 읽노라면, 곧잘 비운의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변변치 못한 가정에 태어나 좋은 교육도 받지 못하고(좋은 교육을 받았다 한들, 이 시대라면....), 웬 몹쓸 불한당한테 잘못 걸려 애까지 가지고 돈 한 푼 없이 버림 받은 불쌍한 여성, 수중에 단돈 17센트만 들고 편도 차표 한 장으로 북새통인 열차에 탑승했으나, 도착해 본들 그녀에게는 아무 기약이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혼잡한 장거리 여행을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치러야 할 판인데... 마음은 고달픈 현실을 감내하고 죽은 듯 시간을 보내야 할 줄 알지만, 애까지 밴 여성의 몸은 다른 생각을 품고 그 생각을 실천에 옮깁니다. 편안히 자리를 잡은 어느 남성의 발을, 자신이 아닌 자신의 발이 "불수의적으로" 툭툭 건드리고 있네요. 이 신사, 같은 또래처럼 보이는 이 남자는 꽤 친절합니다. 이 남자와 신혼인 듯한 그 옆자리의 여성은, 당신이란 남자는 왜 이렇게 둔하냐고, 어여 자리를 양보하지 못하겠냐고, 저 부른 배가 안 보이냐고 마구 핀잔을 줍니다. 큰 죄나 저지른 양 아내에게 절절 매는 이 호인은 금세 여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죠.

신혼인 여성은 본인도 임산부입니다. 겉으로 보아 비슷한 처지(속사정은 전혀 딴판입니다. 어쩜 같은 하늘 아래 이처럼 행복과 운수의 배분이 불공평할 수도 있는지, 섭리를 탓하고 싶어질 만큼이죠)인 두 여성은, 이내 친구가 되어 온갖 이야기를 다 주고받습니다. 요렇게 아기자기한 상황을 찰지게 묘사하는 게 이 작가분의 장기입니다.

"7개월요."
"전 8개월이에요."
마치 두 귀족 부인이 모여, 백작 부인이 공작 부인의 위계를 알아보고 예를 갖추듯, 서로는 몹시도 상대를 존중하는 모습이었다. 그 위계 차가 한 달짜리라고 해도 말이다.

이 문장은 원문 그대로는 아니고 그냥 제 기억대로 재현해 본 것입니다. 저는 코널 울리치 전집을 원서로 다 갖고 있는데, 책의 번역은 원문에 매우 충실합니다만 왠지 책의 문장은 바로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울리치의 문장은 섬세하고 감정이 듬뿍 담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본인 딴에는 아무리 꼬아도) 독자에게 바로 와 닿는 게 또 특징입니다. 이 대목 역시 번역서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던 분들도, 원서를 보면 바로 납득이 될 겁니다.

두 신혼 부부는 너무도 행복해 보입니다. 그저 유복하게 살았다. 쪼들리지 않고 여유를 누린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다(아까 부인이 남편에게 막 대한 건 이분들 나름 애정의 게임에 불과하죠. 그러고들 노는 겁니다), 그저 이런 말로는 표현이 안 됩니다. 특히 같은 여자가 봤을 때 저 부인, 세상 태어나서 슬픔이라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얼굴이라네요. 이건 주인공의 주관이 투사된 인상에 불과하며, 이야기를 계속 나눠 보니, 바로 "자신"처럼, 한미한 환경에서 그럭저럭 부대끼며 지내다 이처럼 마음에 턱 맞는 남자를 만났을 뿐이랍니다. 남편도 고생을 좀 했는데, 알고보니 "사정"이 좀 많이 다르더라는.... (더 이상은, 내용 누설이라 언급 못 하고요)

당장 내일을 기약 못하는 인생 앞에서 이런 행복한 커플이 제왕도 부럽지 않을 행복을 누리는 모습이란, 참 가혹한 시련입니다만 우리의 주인공은 그들을 시샘하지 않습니다. 이런 타입은 행여 뜻밖의 행운이 찾아와도 자신의 양심에 충실할 뿐, 속물적으로 탈바꿈하여 타인에게 몹쓸 짓을 벌이거나 하지는 않죠. 네. 그래서... 그녀는 "일단" 운명의 물줄기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릴 수 있었습니다. 허나 앞으로도 계속 행운을 지킬 수 있을지....

독자들은 소설 처음, 웬 남녀가 누군가를 죽였다느니, 혹시 당신이 (나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대신 나서서) 그런 짓을 한 것 아니냐느니, 어찌 보면 행복한 불안, 번민에 사로잡혀 있는 걸 보고, 또 바로 다음 장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전혀 앞과 이어지지 않아 보이는 에피소드를 채워 나가는 걸 보고 당황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당황할 게 아니라, 지금 미스테리 소설을 읽는 중이니,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추리를 해 나가며 답을 찾으십시오. 그게 룰입니다. 더불어, 가능하면 이 해문 추리 시리즈가 유지하는 포맷인 "등장 인물 소개"도 읽지 마십시오. 그 자체가 (미세하게나마) 스포일러입니다.

결말이 왜 그리 비관적인가, 기왕 그리된 것, 착한 품성에 아직 젊디젊은 남녀가 힘찬 새출발을 다짐한다고 마무리지었으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정도의 해명이 가능합니다. 첫째 그래도 형식미를 꽤나 중시한 울리치는 수미쌍관의 플롯을 더 잘 다듬고 싶었다. 2) 만약 "새출발. 희망" 쪽으로 분위기(이거 잡는 데에 또 귀신이죠, 이분이요)를 꾸렸다면, 이번에는 싸구려 통속물의 뻔한 행보라고 또 비난이 일 것을 의식했겠다. 뭐 이 정도로요.

통속물은 통속물이되(솔직히, 병원에서 신상이 뒤바뀌었다는 쪽으로 갈 때 아! 하고 탄식이 나왔습니다. 장르물에서 그럼 뭘 기대했냐, 같은 생각), 울리치의 작품은 결코 그 한 마디로 감히 폄하할 수 없는 기품이 있습니다. 첫째 그는 인물 심리 묘사에 너무나도 탁월한 섬세함을 뽑냅니다. 둘째, 대가들만이 선뵐 수 있는, 지나가듯 툭툭 던지는 인생에 대한 단편적 통찰이 또 일품이죠. 이 작 역시 본 줄기보다는, 그런 주변 묘사와 세팅에서 독자를 성찰과 우수에 젖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물론 마지막에 한 번 더 예비해 둔 반전 역시 절대 천박하지 않습니다.

p234: 7 부축이려 → 부축하려

"부축이다"라는 말은 없습니다.
"남의 심사를 들쑤시다"라는 뜻이라면, "부추기다"가 맞고
여기서처럼 "쓰러지려는 걸 받쳐 일으켜 세우다"라는 뜻이라면 "부축하다"가 맞죠.

이런 오타를 내시는 분들은 머리 속에 개념 구분이 선명히 안 이뤄져서, 전혀 무관한 두 영역이 마구 헷갈리는 거죠. 한국어인데도 말입니다. 모르긴 해도 이런 분들은 "받치다"와 "바치다"도 혼동할 가능성이 큽니다.

P235: 밑에서 7째줄 틀키기 → 들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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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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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대만 여성 작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소설 <검은 강>을 읽고 리뷰를 썼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번주에 읽은 이 책 <레티시아> 역시, 2011년에 프랑스, 나아가 유럽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어느 소녀의 실종, 사체 발견, 이후 드러난 연관 범죄 스캔들을 집중 취재, 분석한 논픽션입니다. 두 책은 1) 픽션과 논픽션, 2) 모두의 화제가 된 여성이 범죄의 가해자이냐 피해자냐 하는 점 3) 저자분의 성별 등에서 차이가 있지만, 현대 사회의 후미진 구석에 드리워진 여전한 폭력, 학대, 비뚤어진 윤리관, 계급 간 갈등, 빈곤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이런 구조적 모순의 가장 손쉬운 희생양이 바로 "젊은 여성들"이란 안타까운 깨달음을 독자들에게 환기하는 점이 서로 닮아 있습니다.

故 레티시아 페레는 실종 신고가 접수되고 그 용의자가 검거될 무렵 겨우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가 직접 관심을 보이고, 국민들(프랑스뿐 아니라 인근 서유럽 여러 국가, , 혹은 동료 EU 회원국에 널리)에게 주의를 촉구하며, 나아가 (특히 용의자 토니 멜롱의 검거와 관련하여) 누범(상습범)에의 처벌, 선고, 관리를 태만히 했다며 법관의 "징계"를 언급하기도 해서 이 기간 중 대중 사이에서 큰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편 이때로부터 몇 달 후, 죽은 레티시아 쌍둥이 언니인 제시카 페레가, 그 양육가정의 가장인(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 양부 노릇을 했던) 질 파트롱 노인을 성 추행 혐의로 고소하고, 이듬해 파트롱이 징역형을 선고 받음으로써 큰 후폭풍을 빚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전 국민의 입방아에 오르고, 이른바 Marche Blanche 같은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기도 한 큰 사건이었지만, 저자는 혹 그 이면에 우리가 놓치고 미처 보지 못한 다른 면은 없었는지, 가해자를 타매하고 지탄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반성할 대목은 없었는지, 입체적이고 성숙한 시선으로 사건의 총체적 모습을 분석합니다.

저자는 중후한 연령대의, 근사하게 늙어가는 듯한 은발의 미남 교수님입니다. 책 중에도 언급이 되어 있듯, 그는 넉넉한 중산층 가문 출신이며 유대계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비록 방대한 분량의 엄정한 필치(적어도, 사건의 진상을 추적, 정리하거나, 당사자들의 신상 관련 부분을 요약할 때는)로 희대의 사건 그 의미를 탐구하지만, 그 외의 대목에서는 다분히 개인적인 감상을 투영하기도 하고, 비장한 소회라든가 제도에 대한 비판(사건의 본체와는 거리가 있는), 혹은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이 책은 다분히 저자 개인의 세계관이 뚜렷이 반영된 체계이며, 동시에 프랑스 지성인들의 저작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소재의 인문, 형이상학 환원" 경향을 드러낸다 하겠습니다.

저자가 다분히 친밀감을 느끼는 이들은, 비슷한 또래의 전문가들입니다. 이에는 예심 판사, 검사장, 헌병대 준위(이분만은 좀 젊은 연령대인 듯), 변호사 등이 포함됩니다. 변호사라면 일단 제시카 페레 사건을 맡았던 세실 드 올리베이라가 이 책의 주요 인물인데, 저자는 이 여성을 대단히 능력 있고 자상하며 직업적 소명의식에 불타는 인물로 묘사합니다. 이 책이 저술되는 과정에 큰 기여를 한 분이기도 하죠. 프랑스 사법사상 재심 청구가 인용된 예는 극히 드문데, 그 중 한 건을 이분이 성사시켰다는 점에서, 법률적 소양과 적성도 대단하거니와 법정 밖에서 관계자들을 만나고 진실을 유도하는 인간적 매력이랄까 열정(외모는 그러나...)도 대단한 분 같습니다.

변호사 중 다른 한 사람은 장피에르 피카인데, 이분은 사르코지 대통령 임기 중 측근에서 자문을 맡기도 했던 실세이기도 했습니다. "(전) 대통령에 대해 그 어떤 불리한 증언도 사양하겠다"는 언질을 받고서야 인터뷰에 응한 그를 두고, 저자는 "요즘 같은 세상에 극히 보기 드문 충성심이란 미덕"이라고 평하는데, 사르코지에 대한 그의 감정이라든가 정치적 경향성을 감안하면 다분히 반어적인 코멘트로도 보입니다. 다만 그의 외모에 대해선 대단한 미남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데, 제가 보기엔 저자분이 훨씬 더 잘생긴 것 같습니다(나이는 저자분이 몇 살 더 아래라는 점도 고려는 해야 하지만요).

이분을 만난 이유는, "레티시아 살인 사건"의 한 당사자가 바로 사르코지 당시 대통령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당시 법률자문직이었던 피카 씨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할 필요). 그는 사건 초반부터 레티시아와 가해자에게 국민들이 시선을 주고 공분할 것을 촉구하고, 이 와중에 여러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기도했기에, 어찌 보면 이후의 곤경은 자신이 자초한 면도 있습니다(저자는 이를 두고 "범죄 포퓰리즘"이라고까지 규정합니다).

저자뿐 아니라 상당수의 진보 성향 프랑스 지식인들이 사르코지를 보는 태도는, 한국에서 좌파진영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대하는 스탠스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자는 이 두꺼운 책 중 한 챕터의 제목을 "파트롱과 사르코지의 축"이라고까지 달았는데, "축(l'axe)"이란 말이 이탈리아 파시스트와 독일 나치의 동맹 이래 언제나 심각한 비난성의 정치적 함의만 담았다는 걸 생각하면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물론 이 사건에서 사르코지가 잘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만. p287:1에 보면 <샤를리 엡도>가 사르코지의 이런 행태를 두고 먹잇감을 쫓는 독수리에 비유하여 풍자했다는 기술이 있는데, 물론 우리가 작년의 그 테러 때문에 잘 아는 그 잡지입니다. 그새 대통령이 두 번이나 바뀌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죠. 책 뒤에 보면 "Laetitia, c'est moi(레티시아, 그녀가 바로 나다)."라는 말도 있어요.

죽은 소녀 레티시아는 적어도 매력적이라고는 부를 수 있는 분위기였나 봅니다(꼭, 희생자에 대한 미화 예찬이나 기억 왜곡이 아니라). 그녀는 또래 아이들이 보통 그렇게 자기 인생을 기록하고 채워 나가듯 페이스북 활동에 열심이었는데, 여기뿐 아니라 상당수 다른 흔적에서도 맞춤법을 자주 틀립니다. 이 책 후반부 어느 챕터의 제목이기도 한 "tro kiffan"은, 사실은 "trop kiffant"이라고 써야 정서법에 맞죠. 우리식으로는 "졸라 쩌는" 정도의 표현과 통할까요? 국어 공부는 게을리해서 맞춤법엔 약했을지 모르나, 소녀는 일탈 행동을 삼가고 직업 교육 과정에서 가르치는 기술을 열심히 습득하는 등, 꽤 성실한 마음가짐을 지녔던 듯합니다. 말이 그리 많지 않고, 신상에 대한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과거의 아픈 상처들 때문이죠), 장래에 대한 설계를 야무지게 챙기는 편이었다는 점에서, <검은 강>의 자전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저자는 레티시아가 위탁 가정을 전전해야 했던 이유를 파고드는 과정에서, 그 생부와 생모, 외삼촌, 친삼촌 등을 두루 만납니다. 생부는 대단히 폭력적이었고 그 과정에서 생모의 정신 건강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기도 했지만, 여튼 딸에 대한 사랑은 깊었다(...)는 쪽으로 결론을 저자는 내립니다. 이에는 저자 특유의 사르코지에 대한 악감정도 다분히 개입한 게 아닌지 저는 판단합니다. 사르코지는 죽은 레티시아의 보호자였던 질 파드롱 노인에 대해 꽤 편을 들고 나섰는데, 그가 중후한 외모에다 자신의 정치적 가치를 대변하는 듯한, 그럴싸한 쇼맨십도 언론을 향해 선보였기 때문에, 그의 실체를 간과했던 거죠. 저자는 이를 두고 사르코지가 "소아성애자의 편을 들어 강간범과 맞서 싸운 셈"이라며 그를 신랄히 비꼽니다.

여튼 질 파드롱 노인은, 전적으로 악한 인간이 아니었을지는 모르나(그 부인은 문제가 크게 불거지기 전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듯합니다), 레티시아 쌍둥이 자매 이전에도 위탁 아동에 대해 성추행을 저지른 행적이 드러난 데다, 법정에서도 가증스럽게 "내 본분을 잊었다"며 오열하는 듯 과장된 행동을 보인 점에서, 전혀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유형이겠습니다. 이런 사람을 잠재적 동맹자(?)로 고른 사르코지도 경솔했고 말이죠.

한편 "살인범" 토니 메롱도 희한한 개성을 지닌 자인 건 마찬가지인데, 1) 우선 평소부터 성범죄자에 대한 극심한 증오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최소한 살인의 동기만큼은 성욕 충족이 아니었던 듯하고 2) 체포, 수사 과정이나 구금 기간 동안 내내 대통령 사르코지를 향해 정치적 성격이 가뜩 담긴 비난을 퍼부어 미디어를 대단히 즐겁게 해 줬다는 점도 기가 막힙니다(이 역시 사르코지 자신이 자초한 봉욕이겠습니다). 문제가 많은 최하층민 부모 밑에서 자라나, 올바른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에 방치되었다는 점을 고려는 해 줘야 온당한 평가이겠습니다. 저자는 예컨대 p191, p227 등에서, 여튼 성실한 노력으로 상위 계급에 소속되거나 그들에게 고용된 처지의 청소년을, 저 죽은 레티시아가 대변하고, 이들에 대한 반감으로 공격(여러 패턴이 있겠습니다)을 일삼는, 같은 하층민 청(소)년을 저 토니 메롱이 상징한다면서 일종의 사회학적 분석, 일반화(혹은 인문화?)를 시도합니다. 이 역시 우리가 깊이 곱씹어 봐야 할 대목입니다.

여담인데, 저자는 저들 하층민 부모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출산 직후 영아 유기를 두고 "일종의 사후 피임"이란 표현을 쓰는데, 이는 (그 재치있는 문장력은 별개로 치더라도) 좀 불건전한 인식의 반영이 아닌지 다소 걱정되었습니다. 영아 유기는 어느 나라나 범죄로 규정하여 처벌하는 악한 소행이고, "피임"은 "중절"과도 엄연히 구별되는, "여성의 권리"로 널리 옹호되는 선택일 뿐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사회 정책으로 장려되기까지 하는 수단입니다. 그런 걸 두고 범죄와 같은 위계에 둔 "은유"를 책에서 구사하시는 건, 적어도 신중하지는 못한 처사라고나 해야죠. 극렬 여권주의자들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말입니다. 이메일이라도 보내고 싶어지네요.

저자는 지성인답게 절묘하고 재치있는 표현을 여러 군데에서 뽐내십니다. p174: 8 "기억의 착복" 같은 건 저로서는 참 오래 머리 속에 남을 것 같네요. 저자는 황색 저널리즘에 대해서도 심각한 혐오와 분개감을 표시하는데, 예컨대 pp. 176~177, p127, pp. 119~121 같은 곳이 그러합니다. 레티시아를 두고 당신들(언론계 종사자들)은 정육점에 걸린 고기, "죽음의 구경거리"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그의 통탄은 독자를 숙연하게 합니다(단, p143을 보면 타인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그들만의 고충에 대한 동감도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혹 우리가 이 저자를 그런 저질 언론인의 부류로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저자의 의도를 잘 이해해가면서 신중히 책을 읽을 필요도 있겠습니다. 이런 책 읽으면서 남의 불행에 안도하고 즐기려는 걸 고작 은밀한 쾌감으로 삼는 저질 독자들도 많기에 하는 소립니다.

저자는 레티시아를 두고 "내 딸일 수도 있었던 아이"라고 말한다든가(솔직히 그러기에는 좀 젊으시네요), 안네 프랑크나 넬리 라보브나 프타슈키나(Нелли Львовна Пташкина)처럼 시대의 모순에 청소년식으로 저항(?)한 다른 아이콘들과도 비교하는 등 여러 차례 존재 규정에 애 씁니다(혹은, Laetitia, c'est moi!). 책 부제는 "인간의 종말"이지만, 책 맨 마지막 문장은 (레티시아의 유언과도 같은 여러 기록 중에서 인용하여) "삶은 축제다!"입니다. 삶이 진정한 축제가 되려면, 불순한 세력이 책동하는 더러운 선동이나 과장된 선전에 혹할 게 아니라, 이처럼 진지하게, 현상 뒤에 숨겨진 진실에 주목하는, 성실하고 각성된 시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네요.


p205: 밑에서 네번째 줄, 살인마 "질 드 레"의 철자는 Gilles de Rais이며, 레츠 일대를 다스리는 남작이었으므로 Gilles de Retz라고도 씁니다. "질 드 레츠 성(城)"이 혹시 샤토 드 티포주(티포주 성)를 가리킨다고 착각하는 분이 있다면, 아니라고 가르쳐 드리고 싶네요. 여기는 그곳이 아니라, 샤토 드 포르닉(Château de Pornic)입니다. 이곳 역시 그 악마 같은(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주장도 물론 있습니다) 남작의 소유였죠. 질 드 레가 웅거했던(그리고 아동 살인, 학대 범죄를 저질렀다는) 본진 샤토 드 티포주는 내륙 방데 데파르트망(州)에 소재하므로, 이곳 포르닉 해변(베르느리-앙-레츠 소재)과는 꽤 거리가 멉니다. 제가 예전에 그곳을 들렀을 때 차로 거의 40분을 달렸는데(동- 서 직선 거리로), 그곳이라면 ㅎㅎ 성채의 그림자가 그 먼 곳 해안까지 드리울(이 책에 묘사된 대로)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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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갈등의 역사와 미래 전망
이동수 외 지음 / 인간사랑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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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매우 위태롭습니다. 남북한 양측은 물론 미-일-중-러 등 4대 강국이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지역이 한반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작 일촉즉발의 분쟁에 대한 긴장을 가장 민감히 느껴야 할 당사자들인 한국민들은, "안보 불감증"이라 불려도 될 만큼 이 중차대한 시국을 그리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처럼 위태로운 국면일수록, 과거의 동아시아 국제 정치는 어떤 양상에서 어떤 원리에 의해 움직였는지, 현재의 초강대국들은 과연 어떤 동기와 기제에 의해 외교 방책을 결정하는지, 권위자와 석학 들의 높은 식견과 통찰에 귀 기울여 볼 때입니다. 언제나 우리 독자들에게 듬직한 지침을 제공해 주시는 고견들을 담뿍 담은 명논설 명논문 들이, 이번에도 이동수 교수님, 이현휘 박사님의 편집으로 한 권의 예쁜 책(인간사랑 刊)에 담겨져 출판되었습니다.

1부 1장 이동수 교수님의 <동아시아 공동체의 역사와 미래>는 책의 첫머리에 실리기도 했지만, 이 책에 실린 모든 논문들의 취지를 한 아티클에 함축, 총괄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선명한 구성, 논지와 탁월한 주제의식으로 독자의 의식을 각성시킵니다. 논문의 부제는 "중화주의와 아시아주의를 넘어서"인데, 이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두 종류의 거창한 허상, 위선, 혹은 선전이나 실패한 이념을 가리킵니다.

"중화주의"에 대해서는 지난 역사, 특히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감스럽게도 지속되어 온 종속적 외교 정책이나 사대부들의 수구적 세계관을 지칭하겠습니다. "아시아주의"는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시듯, 그 정체가 모호한, 역사 전개의 특정 국면마다 패권주의, 제국주의 세력이 들고 나온 견강부회식 슬로건을 주로 가리킵니다(혹은, 얼마 전까지 주목을 받았던, 호혜주의에 입각한 동아시아 공동체론 등도 지칭하나, 이런 주장이나 캠페인에는 그를 지속적으로 추동할 만한 물적 기반이 결여되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이에는 20세기 전반 일제의 "대동아 공영권" 같은 어이없는 기만적 선전(상세한 논의는 이 책 1부 4장의 김영수 교수님 논문에서 전개됩니다)이라든가, 최근 동아시아 평화를 심대히 위협하는 중국의 심상찮은 책동까지도 포함됩니다.

이동수 교수님의 결론은 박력 있는 단 두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이론적 정합성에만 현혹되어,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거나 패권주의 세력의 농간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둘째, 부국강병과 국가이념 재확립을 통해서만, 그 어떤 팽창주의 세력이 새로 대두해도 이에 우리 민족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윤영인 교수님과 계승범 교수님의 이어지는 두 편의 발표문은, 독자인 제가 개인적으로 이 책 중에서 가장 유익하고 흥미롭게 읽은 고견들이었습니다. 윤 교수님의 논문은 고려 시대 외교를 다루고, 계 교수님의 논문은 조선 시대 대명 사대의 본질에 대해 깊이 천착합니다. 흔히 고려 시대에는 대단한 자주혼과 주관 있는 외교 행보로 일관했다는 인식이 대중적으로 정착해 있지만, 윤 교수님의 치밀하고 실증적인 논증은 역사의 실정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음을 규명합니다.

"고려는 송과 거란 모두에게 충성스러운 제후국도, 모범적인 조공국도 아니었다." 일단 이 한 문장으로 논문의 전반부를 요약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려 전기에는 이름 높은 유학자인 최승로가 송(북송)을 가리켜, "상국" 등의 존칭을 하지 않고 그저 "서조(西朝)" 정도로만 불렀다는 사실(史實)이 놀랍습니다. 명확지는 않으나, 해석하기에 따라 우리 고려를 그와 대등한 동조(東朝)로 인식했다는 뜻도 되니 말입니다. 거란 사신과 송에서 파견한 사절을 대등한 예로 대했다는 점도 뜻밖이죠. 허나 거란과의 항쟁 과정에서, 특히 귀주대첩 이전 1016년의 충돌에서 우리 측 군사가 수만 명이나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이는 <요사>의 기록으로 우리 쪽에서는 인정 안 하는 것 같은데, 국사학이 아닌 국제정치학 관점에서는 각국의 기록에 고루 사료가치와 신빙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윤 교수님은 이 부분을 비중 있게 거론하신 듯합니다.

이후 고려는 몽골의 간섭을 수용하면서 독립성의 침훼를 겪는데, 교수님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비로소 사대주의의 본격적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판단하십니다. "호혜주의 원칙이 근본적으로 사라진" 조공 외교의 질서와 관행이 시작됨으로써,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의 정세 속에 종속 변수로 추락한 후 좀처럼 다시 자주국의 형세를 회복하지 못합니다.

계 교수님의 논문은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국난에 즈음하여, 철저히 대륙 세력에 종속되었던 고난 가득한 시기를 주목하는데, 이는 세종 연간만 해도 오이라트의 에센이 주도한 "토목보의 변" 당시, 조선이 명의 출병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을 만큼 자주적이었던 사실과 대조됩니다. 부윤, 참판 등이 명장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인환시리에 곤장을 맞기도 하고, 조선의 국왕(선조)가 일일이 명군 측 장성들을 환대하지 않았다며 책망을 받는가 하면, 전략과 전술 안출과 집행 시 우리 측의 의견은 대등한 자격의 상의가 아니라 "청(부탁. 호소)"의 위상에 불과했다는 것도 기가 차죠.

그런데 이런 철저히 종속적이고 굴욕적인 대접은, 임란이라는 비상시의 환경에서 예외적으로 발생했던 관계 재설정이 아니라, 성리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지배 체제를 구축한 양반 사대부의 속성에서 유래한, 거의 상시적인 구조적 행태에 가까웠다는 게 저자의 시각입니다. 주상(조선 국왕)의 명을 거역할망정 천조(명)에 죄를 입을 순 없다는, "배신(培臣)"들의 비굴한 외교 태세가 조선시대 거의 전부를 지배했기에, 천자가 일국 군주의 임(任. 책봉)과 면(免)을 자의로 행할 수 있었죠. 계 교수님은 해방 후 국사학자들에 의해 이런 조공책봉 시스템의 불평등 측면은 의도적으로 축소되고, 대신 대국으로부터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방편이었다거나, 사대라는 형식을 빌린 동아시아 고유의 외교 체제였음을 내세우는 식으로 미화, 윤색된 면이 없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김영수 교수님은 주로 다케우치 요시미 등 일본 학자의 비판을 중점 원용하며, 소위 대동아공영론의 허상과 위선을 통박하십니다. "..물론 오족 협화 같은 것은 거짓이고 기만입니다. 그러나 우리 일본에게는 만주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 대전 당시 미국 대사 조셉 그루 등이 지적한 대로, 일본인들은 분명 악행과 표리부동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한편에선 그 거짓말을 믿고 있는 기괴한 이중성을 지녔다는 게 놀랍습니다.

미-영이 공동 발표한 "대서양 선언"에서 연합국 측은 제국주의, 식민 노선의 포기를 천명했는데, 당시 동남아와 태평양 전역으로 침략세를 확대하던 일제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동아시아 전체의 이익"을 기만적으로 공표하면서 이에 대응했죠. 논문에도 잘 나와 있듯 그러나 이 시점 일본이 점령지에서 저지른 만행이란, 매 지역마다 각각 수십만에서 백만에 달하는 인명의 살육일 뿐이었습니다.

1944년 경에는 문인, 지식인들이 앞다퉈 "근대의 초극(극복)"을 운위, 고백(?)했는데, 그 내용이란 "영국과 미국에 짓눌려 왔던 그간의 저자세를 넘어서서, 이제 대등한 자격으로 귀축 영미의 격멸을 희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근대성과 보편 문명, 가치의 정수조차 채 배우지 못한 그들이, 아예 가증스러운 허울까지 다 벗어던지고 "명치 유신" 이전의 야만으로 회귀하겠다는 자폭이나 마찬가지였죠. 논문에는 아무 죄책감이나 내적 갈등 없이 망국과 패악을 향해 묵묵히 전진하던 숱한 전범들의 행태, 마지막 유죄 선고를 받고서야 운명을 깨닫고 어린아이처럼 울부짖던 약하디약한 모습에서, 김영수 교수님은 한나 아렌트의 "thoughtlessness" 개념이라든가 "악(惡)의 banality" 같은 유명한 규정도 독자에게 환기합니다. 특히 p148에서 저자는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의 유명한 구절을 길게 인용하며, 이데올로기화한 악(惡)의 무성운 파괴력을 언급하시는데, 그 깊은 통찰과 그윽한 문학적 향취에 잠시 몰아지경까지 독자를 인도하는 필력이었습니다.

5장은 로웰 디트머 교수의 논문 번역인데, 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채 시작하기 전부터 벌써 다른 나라의 혁명가 그룹에 큰 영감과 동기를 제공한" 중국 혁명의 의의와 경과에 대해 압축적으로 서술합니다. 여기에는 중국 본토에서의 여러 명망가들의 활약뿐 아니라 호치민, 김일성 등의 행적에 대해서도 자세히 짚습니다. 이 글은, 제7장 주펑 교수의 냉철한 글 <중국의 부흥과 .... 영향>과 함께 읽으면 더 포괄적인 맥락에서의 이해가 가능하겠습니다. 중국에서 국부로 칭송되는 쑨원 같은 이가, 결국은 몽골이나 조선 등을 다시 중화에 귀속되어야 할 영토 정도로밖에 인식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파워 폴리틱스" 관련 매우 심각한 충격을 안깁니다. 이 글들에는 김일성이 중국말에 대단히 능통했을망정 한국어를 거의 못 해 소련 군정 측에서 특별한 여러 배려가 필요했다는 등 재미있는 서술이 많이 발견됩니다.

6장 <동아시아에서의 배상과 화해 문제>은 일본인인 요시다 구니히코 교수의 발표문입니다. 국가 사이에서 민간의 배상청구권이 포기되었다고는 하나, 개인차원에서 민사상 불법행위(tort)를 구제받고자 소송을 벌이는 선택은 이미 많은 나라들에서 겸허히 긍인됩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 측의 아이누 족, 오키나와 인들에 대한 차별과 복속 이슈라든가, 나병 환자 강제 수용, 노역(이 문제는 최근에도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학대 때문에 큰 논란이 다시 일었습니다), 심지어 브라질 등 남미에서 귀환, 귀화한 동포, 혼혈인에 대한 린치 등 심각한 문제들을 집중 조명합니다. 우리에게도 종군 성노예 할머니들이 계시기 때문에 단연 관심이 집중되어야 할 과제죠.

8장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외교 정책, 수사(修辭)와, 실제 군사적으로 감행하는 집행 수단 사이에 왜 커다란 괴리가 생길수밖에 없는지,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지적과 주장을 인용하며 포괄적으로 해명합니다. 2장과 3장이 "국제정치학 관점(특히 파워 폴리틱스)에서 재해석한" 동아시아 통사를 읽은 재미가 있었다면, 이 8장은 냉엄하면서도 치밀한 논리를 앞세워, 왜 강대국들이 특정 국면에서, 외부인이 보기에 이해 할 수 없는 선택을 했는지, 그간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했던 여러 이슈에 대해 속시원하고 분명한 체계를 잡아 주시는 듯해서 너무도 흥미로웠고 깨우친 바가 많았습니다.


미국이 마니교 식 선악 이분법에 사로잡혀, 항상 최악- 차악- 차차악의 우선순위를 두고 경계, 응징한다는 분석은, 일단 지금까지 벌어진 그들의 행태와 동선에 별 이격 없이 부합되는 프레임이란 점에서 매혹적이었습니다. 사람도 어떤 명확한 계획이나 의식보다는, 몸에 밴 타성에 의해 움직이는 비중이 더 크다는 점에서, 이들 국가들이 표면에 내세운 명분이나 이념보다, 어떤 전통(이를 prejudice로 표현하더군요)에 의해 "행동"을 결정할 뿐이라는 결론은, 냉혹한 국제 정세 속에서 그저 정치인들의 공약(空約), 허언, 사탕발림만 미련하게 믿기 쉬운 개인들이 어떤 자세로 현실과 자기 자신을 돌아보야 하는지, 묵직한 경종을 울려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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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화학 사전 - 법칙, 원리, 공식을 쉽게 정리한 그린북 과학 사전 시리즈
와쿠이 사다미 지음, 조민정 옮김, 최원석 감수 / 그린북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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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두면 쓸데없는 공식은 없다!" 이 책 뒤표지에 큰 글자로 인쇄된 외침입니다. ㅎㅎ 어느 특정인에게 설령 쓸모가 없다손 쳐도, 인류 전체에게는 너무도 요긴하고 고마운 공식들이었기에 우리가 네 발로 대지를 딛고 살던 미미한 존재에서 여기까지나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오늘의 자신을 만들어 준 여러 직, 간접의 기여자, 은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윤리적 차원에서도 그렇고, 현재의 자신보다 반 보의 걸음이라도 매일 향상할 수 있는, 자아 실현의 목적 때문에라도 그렇습니다. 하물며, 매일매일이 미래의 자신을 설계하기 위한 소중한 시간이 될 어린 학생들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죠.

책은 크게 여섯 파트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 중 1, 2, 3, 6장은 물리학 관련이며, 4장과 5장은 화학 분야의 공식들입니다. 이 중에서도 1장은 "초, 중학교에서 배운 기본 법칙"이라 제목이 붙었는데, 여기서 다루는 대부분의 사항은 물리학의 명제들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중등 과정(중학교+고등학교)의 커리큘럼에서 다소의 차이가 있는데, 우리도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의 7차 교육 과정 개편 후 여러 차례 큰 폭으로 손질되긴 했으나, 대체로 이 책의 제2~제6장에서 설명하는 내용들은 늦어도 고2 코스까지는 학교에서 다 가르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학생 때 충실하게 공부한 분들이라면 이미 익숙한 내용이겠으나, 문제는 과학 과목을 청소년기에 그리 몰입해서 학습한 이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죠. 제가 아는 어떤 분은 현직 변호사인데 고1때 화학 과목 중간고사 20점(물론 학교 수준에 따라 출제 난이도의 차이가 있겠지요)을 맞은 적도 있습니다. 이 정도로 똑똑한 분이 학창 시절에 그만큼 고전했을 정도면 뭐...

여튼,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물리나 화학 등의 기본 지식이나 원리는 업무 수행에 요긴히 쓰일 데가 많습니다. 이 말은, 기초과학의 소양이 부족하면, (의외로 분야 불문하고 광범위하게) 위에서 시키는 일을 척척 못 해내고 고전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도 됩니다. 이럴 때 새삼 책방에 가서 애들 참고서 사 들고 몰래 공부하기란 모냥새도 빠지고 김도 샐 뿐 아니라, 업무에 관련된 부분만 요령껏 추출해서 살피기도 무척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을 할 때 응용될 과학 지식은 그저 결론만 알면 되는 암기 사항이 아니라, 그 건조한 공식이 일상에서, 실제 공정(프로세스)에서 지니는 의미, 용도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생활 밀착형 서술이라고 할까, 쉽고 재미있게 일상의 예를 들어가며, 각 공식의 활용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책 제목은 "공식 사전"이라고 되어 있으나, 정말로 건조한 사전처럼 "공식"만 잔뜩 나열한 형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책의 가장 빼어난 점은, 해당 공식이나 법칙이 역사적으로 도출된 과정(이 점에서, 과학사를 공부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이 명제가 우리의 아주 가까운 일상에서 어떻게 바로 적용되곤 하는지, 우리의 상식과 감각에 비추어 타당하긴 한지를 직관적이고 쉬운 설명으로 가르쳐 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도, 혹 교과서에 실린 건조하고 형식적인 설명에 질려 버렸다면, 이 책을 통해 "이야기책을 통해 과학을 배우는", 보다 편안한 과정을 통해, 원리와 배경을 이해하는 공부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공부할 때, 같은 내용을 다뤄도, 때로는 시야와 내러티브가 확 바뀐 버전으로 공부하면, 내용 이해가 훨씬 편할 수 있습니다.

p31에서 설명하는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힘의 평형"의 차이점 설명은, 사실 제가 중학생 시절 공부한 참고서에도 나와 있던 내용입니다. 아마도 동아시아의 여러 학습자들이 수십 년 동안 이 파트에서 비슷한 시행 착오를 겪었기에 이런 설명이 되풀이되는 거겠죠.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두 개의 물체에 작용하는 두 개의 힘"이란 포인트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사실 "힘의 평형"은 누구라도 정확히 파악하는 내용이니까요. 이 당연한 지적이 계속 반복되는 이유는, 뉴턴 제3법칙의 정확한 이해가 의외로 힘들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합니다.

p74에 나오는 "강체에 작용하는 힘의 평형 원리"에서 처음으로 "모멘트" 개념이 제시됩니다. 그간 교육과정이 여러 번 개편되었습니다만 이 파트는 주로 물리II에서 다뤄 왔습니다. 모멘트란 기본적으로 물체의 회전운동을 전제로 하여 상정되죠. 또, "강체"는 부피가 있고, 탄성체(같은 고체입니다)나 유체(액체+기체)와는 다른 고체를 말합니다. 이 개념 파악이 중요한 이유는, 이런 강체의 경우 "작용하는 모든 힘의 합력이 0"이어야 할 뿐 아니라, "모멘트까지도 같아야 함"이란 조건이 하나 더 붙기 때문입니다.

p77의 예제를 보시면 모멘트의 직관적 의미가 무엇인지, 문제를 풀면서 잘 이해되게 구성된 멋진 서술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개념이나 공식, 법칙은 그저 주어+술부로 구성된 문장이나 수식을 외운다고 내 것인 되는 게 아닙니다(그런 사람은 천재고요). 문제를 풀어 봐야 자신의 뇌세포에 타투를 새기듯 내면화가 가능한데요(감각으로 배이지 않은 지식은 지식이 아닙니다). 군더더기 없이 딱 개념 이해에만 최적화한 좋은 문제가 많이 실려 있다는 것도 이 책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다섯째 줄 ".... 그런데 원판 O2를 떼어내기 전을 생각하면..."의 뜻을 제가 좀 보충하자면, 떼어내기 전과 후가 여전히 전체 원판이 정지해 있으므로, 전이라면 당연히 모멘트가 0이고, 떼어낸 후에도 여전히 모멘트가 0이라는 거죠. 또, 왜 G에 작용하는 힘은 3W이고 O2에 작용하는 크기는 W인가? 전체 원 넓이가, 떨어져 나간 부분(작은 원)의 세 배라서 그렇습니다(큰 원 반지름 2r, 작은 원 반지름 r이므로 넓이는 네 배). 이 예제는 무게중심과 모멘트의 밀접한 개념관련성을 파악하는 데에도 아주 유익합니다.

혹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배운 지구과학 과목의 난이도에 절망했다 쳐도,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키운 꿈과 설레던 낭만은 영원히 자신의 마음에 남을 것입니다. 그 우주 천체의 운항 원리를 다루는 케플러의 법칙은 이 책에 3개가 다 수록되어 있습니다. 본디 지학에서 다루는 항목이지만, 기본적으로 뉴턴 역학 법칙에서 다 유도가 가능하므로 물리에서 언급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설명은 매우 깔끔합니다만, 데이타를 통한 케플러(와 그의 스승 티코 브라헤)의 귀납적 도출만 언급하는 게 (이 책의 다른 파트에서 구현된 멋진 장점에 비추어) 좀 아쉬웠습니다. 이 제3법칙은 뉴턴 역학의 기본 뼈대를 이루는 원심력, 구심력, 중력, 주기 공식 등 넷을 연립하면 자동으로(연역적으로) 유도가 되기도 하니까요. 케플러 제1법칙에 대해 보다 정확한 이해를 하려면, 이 책의 자매편인 <수학 공식 사전>에서 타원의 (두) 초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먼저 공부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이와 어른이 부딪혔을 때(혹은 체급이 다른 권투선수나 레슬러가 시합을 벌일 때) 왜 덩치 큰 쪽은 꼼짝도 하지 않는가? 사실 작용-반작용의 법칙 덕분에 둘이 받는 타격은 같다고도 설명합니다. 단 현실에서는 외관상 작은 쪽만 나가떨어지는 걸 흔히 보죠. 이걸 설명하는 게 운동량 보존 법칙입니다. 역시 예제를 보면, 충돌 전과 후 운동량이 (두 물체의 속도 변화를 통해) 일정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와 신기하다~" ㅎ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이런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이 법칙이 고안되었으므로 어쩜 이렇게 소숫점 단위까지 맞냐며 너무 놀랄 일은 아니죠.

마찰력에 대해서도 친절히 설명됩니다. "최대 정지 마찰력"은 정지 마찰력이란 게 그 물체에 가하는 힘과 같게 규정되기 때문에(힘의 평형 원리), 그 물체가 참다참다 못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 (내가 가해준) 힘의 크기와 정확히 같죠. 여기서도 알 수 있지만 물리학에서 말하는 힘 중 상당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구축된 가상의 힘입니다(구심력, 원심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때에도 참고서에 마찰력의 실체에 대해 "미세한 분자 구조의 맞물림"이란 해명이 있었습니다. 이게 예전에는 그저 경험적 타당성으로 제시된 설명들이, 분자, 원자 단위까지 측정이 가능해지다 보니(물론, 아주 최근의 것은 아니고 꽤 시간이 지난 성과들입니다) 이론적으로까지 말끔한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죠. "이론"과 실험이 어디서 만나는 지 확인할 좋은 예도 되는데, 이 책 앞 파트에서도 자세히 가르쳐 주는 "갈릴레이의 낙하법칙"도 그렇습니다(달 표면에서 질량이 다른 두 물체의 낙하 시간을 재는 실험).

이 책에서는 일정성분비의 법칙, 배수 비례의 법칙 등을 놓고 "물질의 최소단위(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일단 일반화학에서 다루는 수준의 정의를 염두에 두죠)가 원자, 분자(성질 보존되는 한에서) 등이 이미 규명된 지금의 관점으로는 너무도 당연히 여겨지지만..." 같은 소회를 피력하기도 합니다. 과학 명제의 시대를 초월한 보편타당성과, 그에 내재한 역사성을 동시에 주목한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한편 모든 법칙이 현 시점에서 꼭 당연하게만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예컨대 p185에서는 아인슈타인에 의해 부정된 "질량 보존의 법칙"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이는 보는 관점에 따라 부정일수도 있고, 다른 현상에 대한 각각에 알맞은 다른 해명의 시도로 볼 수도 있으므로, "인문적 모호성에 기인한 말장난"에 너무 구애될 일은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너무 어려워하시는 분들은, p288, p306을 읽기 전에 먼저 p96을 찬찬히 살펴 보십시오. 제가 개인적으로 읽어 본 중에는 "관성계"에 대한 설명이 가장 쉽고 명쾌하게 이뤄져 있습니다.

저자 서문에는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지난시절 과학자들이 애써 일군 업적의 수확기"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기초과학의 응용 성과란 사실 범위가 무한대에 가까우므로, 이 과실은 우리의 먼 후손까지 두고두고 따 먹을 수 있겠으나(그 전에, 전쟁이라는 어리석음을 극복해야 하겠지요), 사실 현재는 그 빛나는 근대과학의 발전이 어느 정도는 한계점에 봉착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이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면, 먼저 지난 세대가 확립한 바탕 위에 확고히 올라설 수 있어야, 더 먼 거리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의 기초 체질이 마련되겠습니다. 불변의 진리를 파악하고 익히는 기쁨은 그래서 인간이라는 種 고유의 특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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