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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소녀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모두가 브루클린의 소녀로 알고 있던 그녀는 사실 "브루클린의 소녀"가 아니었으며, 이 소녀는 십 년 후 또 한 번 끔찍한 일을 겪고 나서야 처음으로 브루클린의 소녀가 되었다! 기욤 뮈소의 이 신작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전작들과는 달리 스케일이 매우 커졌으며, 배경은 파리, 알사스-로렌, 낭시, 대서양 건너 뉴욕을 넘나듭니다. 미국에서 잠시 유럽을 들렀다가 아내(혹은 딸이라든가)를 잃고 사랑하는 이의 행방을 찾아내려 필사적으로 애쓰는 남편, 아버지 들의 모습은 우리가 여러 영화에서 봐 왔는데요. 이 작품은 정반대로, 프랑스에서 갑자기 연인을 잃게 된 주인공이, 그녀를 찾아내려면 그녀의 "숨겨진 과거"를 조사해야만 하겠다는 결의로 미국의 그녀 고향까지 찾아가서는, 세계가 놀랄 만한(말 그대로입니다) 비밀을 파헤친다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은 이미 한 번 이혼의 경험이 있는, 그에게는 몹시나 사랑스러운 어린 아들까지 딸려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매우 유능한 엔지니어인 나탈리란 여인과 맹렬한 사랑에 빠져 결혼했었으며, 아직 말도 채 못 뗀 테오도 그녀가 낳아 준 아들입니다만, 저 나탈리는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몹시도 무책임한 여성이었습니다. 재능도 있고 야심도 충만한 그녀는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이 두 식구가 걸림돌이 될 뿐이라고 아주 당당히 털어놓고서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둘을 떠나고 맙니다. 이 충격적인 체험 때문에 주인공은 여성 일반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시각까지 갖게 되지만, 병에 걸린 어린 아들 때문에 찾은 소아과에서 뜻밖에도, 아름답고 유능하고 마음까지 따스한 젊은 의사(곧 개업의가 될) 안나를 만나게 됩니다. 안나 역시 테오와 주인공에게 끌려, 얼마 있지 않아 결혼식을 올릴 작정입니다. 속 모르는 이들 보기에 참 운이 좋은 남자다 싶겠지만, 본래 사랑도 이를 받을 만한 자격 있는 이에게나 찾아오게 마련이죠.
소설가인 주인공 "나(이름은 '라파엘 바르텔레미'라고 하네요)"의 시점에서 거의 모든 사연이 전달되기 때문에, 혹시 작가 기욤 뮈소 본인의 아이덴티티가 어느 정도나 묻어날까 궁금해하는 분들도 있겠습니다. 대중 소설 창작으로 유명세를 타고 물질적 풍요도 누리는 그이지만, 부도덕한 방법으로 취재(소설가도 현장을 돌아다니며 소재 연구를 해야만 하는 직업이죠)하는 일은 결코 없다며 자부심을 갖고, 전직 NYPD 요원(한국계인 "수연"으로 설정됩니다)에게 "당신 소설이 한국에서 꽤 인기 있다고 해서, 내 올케가 사인을 부탁하더라" 같은 말도 듣는 걸 보면 어느 정도는 연계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 좋은 그에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서는 절대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한국의 팬들을 의식, 혹은 배려한 흔적이라면 이 대목 말고도, 한국의 범죄 소재 장르 영화(과연 뭘까요?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를 즐겨 본다는 짤막한 언급에서도 드러납니다.
어린 테오에게나 이제 갓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자신에게나, 갑작스러운 축복처럼 찾아왔던 안나, 이런 그녀가 느닷, 여러 폭력의 흔적과 함께 실종되었으니 라파엘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신세. 하지만 그는 열정과 애정과 정의감 못지 않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세부 사항은 물론 눈을 큰 범위로 돌려 뜻밖의 돌파구를 찾는 지혜(소설가적 재능이겠습니다), 장애와 위험에 굴하지 않는 실행력 등을 두루 갖춘 사람입니다. 안나 역시 (잠시 트러블은 있었으나)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했던 총명한 여성인지라, CCTV에 촬영된 그 납치의 순간에도 예비 신랑 라파엘의 이름을 또렷이 부르며,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구조, 구원의 순간을 열망합니다. 이런 아내가 자신을 믿고 그 정말적인 순간에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있음을 확신하는 그이기에, 사무치는 애정이 적실한 지혜로까지 승화되어,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난제를 차근차근 해결하는 과정이 독자의 마음을 감동으로 채웁니다.
소설 도입부에는 여러 차례,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시대의 이정표와도 같았던 정치인(위대한 인물이었건 부정적 이미지로 남은 실패자건 간에)들의 이름이 자주 언급됩니다. 지스카르 데스탱,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 그리고 미국의 줄리아니 시장이나 클린턴 대통령까지. 한 시대를 상징하는 여러 정치, 문화적 환기물들은 이들 정치인 말고도 여러 연예인, 예술인들의 이름도 등장하기에, 처음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쳤으나 중반 이후 스케일이 엄청 커지면서 일종의 아득한 복선이었음을 깨닫게도 되었습니다. 부도덕한 정치인의 출세와 영향력 확대가,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에까지 엄청난 개별적 비극을 안길 수 있다는 해석도 그닥 비약은 아닐 것 같고 말이죠.
소설가 라파엘, 그리고 그의 오랜 친구(이 친구라는 게, 참 양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잽니다, 네) 형사 마르크(유독 어린 테오가 잘 따르죠)는 안나의 행방을 찾기 위해 말 그대로 전방위에 걸친 탐색 노력을 펼칩니다. 주변 인물들의 탐방은 물론 그녀가 졸업한 고교, 의대생 시절 묵었던 자취방까지 방문하는가 하면, 그녀와 실낱만큼이라도 연이 닿을 과거의 사건 기록까지 일일이 들춥니다. 이 과정에서 이 두 남자들이 알게 된 건, 안나가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신분이 바뀐, 세탁된, 그 근본을 알 수 없는 여인이라는 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부터 누구라도 주목하게 만든 아름다운 외모를 내내 유지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번이 처음이 아닌, 이미 십 대 시절 비극적인 납치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 이름이 안나가 아닌, 미국식 "클레어"였으며, 혼혈 외모와 뛰어난 프랑스어 발음(신분 세탁 후 이미 오래 이곳에 거주했으므로) 탓에 못 알아봤지만 미국 태생의 미국 국적자였다는 점까지. 본디 그녀는 이스트할렘(이곳은 맨해튼 區 소재입니다) 태생이지만, 언론에서 부르기 좋다고, 혹은 은근한 비하의 목적에서 "브루클린의 소녀"라는 별칭을 붙입니다. 그리고 "브루클린 소녀 실종 사건"은 영구 미제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안나가 십여 년 전의 바로 그 브루클린 걸이었다는 게 비로소 드러난 거죠. 한 사람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가 된다는 게 진정 확률적으로 있을 법하지 않은 비극인데, 작가 기욤 뮈소는 이 점을 소설의 전혀 다른 대목에서 슬쩍 지적함으로써 의미의 복합층을 형성합니다. 여튼 안나가 클레어임이 드러나면서, 이 스릴러는 본격적으로 독자를 롤러코스터의 스릴로 몰아 넣습니다. 진짜 모험은, 진정 충격적인 사건의 진상은 지금부터 펼쳐지거나, 벗겨지는 베일을 놓고 완강히 저항합니다.
기욤 뮈소의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특히 나란히 거론되는 더글라스 케네디의 개성과 대조되는 점인데) 주변 인물들의 사연과 개성이 매우 다채롭게 설정되는 게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닙니다. 스토리 중 치명적인 비밀을 캐치하곤 연인이었던 언론인에게 전화를 건 후 목숨을 잃은 여기자 플로랑스의 경우, 자신과 어머니를 매정히 버리고 젊은 여인의 품에 안긴 아버지를 그리도 원망하며 성장했건만, 어느새 멀쩡한(아니, 멀쩡하다고는 못하겠네요) 가정을 파탄내며 이기적인 사랑을 키우고 있던 그녀이니 말입니다. 이 작품은 특이한 게, 이미 라파엘이란 주인공이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물들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 자기 시선으로 사태를 설명하는 챕터들이 꾸려진다는 점입니다. 그 중에서도 플로랑스의 회고 파트는, 이미 죽은 자신이 살인 사건 직전의 상황을 (혼령의 관점에서) 술회한다는 점에서 유별난 형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나, 아니 클레어의 축복받은 자질(아름다운 외모와 총명한 두뇌)의 유래가 궁금했던 독자에게는, 소설 뒤로 가면서 과연 콩 심은 데 팥 나는 이치가 없음이 확인되곤 합니다(자세한 건 스포일러라 생략). 태드("테드"가 아닙니다) 코플랜드는 이 소설 속에서 2016년(소설이 창작, 발표된 바로 올해입니다) 미국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뽑힌 인물인데, 흥미롭게도 다른 인물들은 모두 실명이 거론되는데도(크리스 크리스티, 칼리 피오리나, 젭 부시 등) 마르코 루비오만 이름이 빠져 있어 혹시 그를 염두에 두었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갈수록 아니더군요. 오히려 당적만 반대일 뿐 여러 모로 빌 클린턴을 연상케 하는 개성들의 부여였습니다. 전형적인 소시오패스의 특징을 지닌 다른 여인이 후반부에 등장, 독자를 전율케 하는 여러 악행을 저지릅니다만 그 묘사가 판에 박힌 투도 아니면서 참신한 실감이 전달되게 몇 줄로 지난 행적을 요약하는 대목에서 과연 기욤 뮈소구나 싶었습니다. 반전이 없으면 섭섭한데 착실히 사건 진행을 따라온 독자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또하나의 진실이 숨어 있었으니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춰선 안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