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경영의 지배자들 -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상품과 시장의 변화를 예측하는 지침서
롤프 옌센 지음, 서정환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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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빈 토플러의 <미래 충격> 등 여러 고전들은 지금도 널리 읽힙니다. 노환으로 작년에 이미 타계한 분의 책이, 요즘의 첨단 추세를 시원히 해명하거나 곧 다가올 미래를 예견해 주리라는 기대 때문이 당연히 아니죠. 그가 말한(말했던) "미래"는 벌써, 지금 우리가 사는 현재이거나, 아니면 이미 과거에 편입된 시간들일 겁니다. 그런데도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그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의 예견이 이처럼이나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놀랄 만큼 많은 대목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의 예견은 과거에 속한 사항이 아닌가? 우리가 다시 그의 책을 읽는 이유는, 이처럼 정확한 예언의 맥락을 찾아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가고 없지만(대신 그의 따님이 있긴 하죠ㅋ), 이 신통한 책의 취지를 다시 탐구하면, 혹시 "후편"에 대한 내용 짐작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입니다. 토플러뿐 아니라 영역을 달리하는 다른 모든 고전도 마찬가지죠. 뻔한 소릴 갖고 혼자만 깨우친 진리인 양 부풀려 떠드는 건 바보들이나 일삼는 짓입니다. 현명한 사람, 혹은 현명해지려 노력하는 사람은 미래의 향방에 주시합니다.

이 책은 앨빈 토플러에 버금간다 할 덴마크의 저명한 미래학자 롤프 옌센이, 믿어지지 않지만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에 저술한, 어떤 의미에서는 "고전"입니다. 21년 전이 먼 예전이라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21년 전이라는 시간의 핸디캡을 딛고 이처럼이나 미래(즉 현재)를 정확히 내다보았다는 그 통찰력이 놀랍다는 뜻에서입니다. 만약 롤프 옌센이 누군지도 모르고, 21년 전의 저술임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있다면, 1) 담론이 시원하다. 다른 이론가의 체계를 엿보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시야에 의해 "이야기(이 책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미래는 이야기의 세상이다, 이 정도로 한 줄 요약이 가능할 정도로)"를 풀어놓고 있다. 2) 많은 대중 경제경영서, 혹은 자계서 등이 요즘 써 대는 주장과 내용이 비슷하지만, 고품격의 철학이 전 내용을 관통한다 3) 디테일에는 다소 동의가 안 되는 부분도 있지만, 미래의 대세가 무엇일지에 대해, 실감나는 정신 무장이랄까 시야 전환을 힘있게 촉구해 준다, 뭐 이 정도 반응들이 나오지 않을지 짐작합니다.

21년 전에 쓰여진 책치고는 놀랄 만큼, "4차 산업 혁명"이란 말만 본문 중에 등장하지 않을 뿐, 이 책은 아날로그식 감성이 사회 전반의 산업적 지향을 "다시" 지배할 미래를 생생히 그려냅니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이른바 "제3의 물결"이라 일컬어지던, 정보화의 도도한 흐름이 세계를 휩쓸 시절이었습니다. 이 당시만 해도 가정마다 PC가 보급 안 된 곳도 있었을 시절이고, 우리가 지금 TV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접촉하는 그래픽 인터페이스(MS 윈도라든가)가 아직 결정판이랄 만한 게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정보화 사회가 채 성인기에 접어들기도 전이었는데, 옌센 박사는 "꿈과 스토리와 낭만이, 산업화 시대가 안긴 기계적 효율과 마음의 상처를 모두 덮어버릴 세상"을 논하고 있는 거죠. 물론 아직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리로 향해 모두가 발버둥친다는 것, 이제 그 지점이 대세가 되었다는 것, 이 포인트를 잘 공략해야 시장에서 살아남는다고 기업들이 혈안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동의합니다.

옌센 박사는 놀랍게도, 인공지능이 등장하여(이 말은 물론 이보다 훨씬 앞선 시점부터 등장했었지만, 옌센 박사님이 거론하는 범주는 훨씬 구체적입니다. 게다가 지금 구글(이 책이 쓰여질 무렵 이 회사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과 애플, IBM 등이 컨셉화한 내용[상용화했든, 아니면 마케팅 구호에 아직 머물든 간에]과 거의 일치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예언까지 합니다. 물론 한 번의 대세 전환기에 대량 실업이 발생한다는 건 지난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운 바입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사람들이 잃은 일자리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에게 "로봇세"를 물려야 한다는 등의 절박한 논의가 나오는 사정을 반영하여, 아직 그런 위기를 꿈도 꾸지 않았을 무렵의 독자들에게 미리 위안을 건네는(ㅎㅎ) 투로 책을 쓰는 분은 당시에는 한 사람도 없었을 겁니다. 이는 저자가, 매우 vivid하게 미래를 내다보고 확신을 가진 채 책을 썼다는 방증이죠.

제3의 물결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정보화의 물결이 일상과 문명 전반에 가져다 줄 편의만 꿈꿨을 뿐, 실직이니 직업의 종언이니 하는 걸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래왔듯 이 대세가 적어도 반 세기는 지속되리라 보았죠). 박사님은 정보화사회가 일찍 종말을 맞고, 본인이 내다본 "드림 소사이어티"가 빠른 속도로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라 장담합니다. 제가 눈여겨 본 건, 산업화 사회건 정보화 사회건 간에, 이런 변혁의 물결은 많은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는 식으로 저자께선 보고 계신 대목이었습니다. 그럴 만도 하죠. 정보화 사회는 그간 사람들이 정을 붙이고 존재의 곁에 가까이 두며 위안을 구했던 많은 추억을, 메마른 부호 덩어리로 대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 노동의 상당수를 자동화 시스템으로 갈아치우기도 했지요(제가 한 달 전쯤에 리뷰를 쓴 <더 박스>라는 논픽션에 그 실상의 상징적 일부가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산업혁명(1차, 2차)의 물결은 수공업 장인들의 설 자리를 대거 빼앗았습니다. 러다이트 운동 같은 것은 그 시대의 아픔을 표현하는 심각한 파문 중 하나였고요.

스토리를 만들고, 팔고, 산다! 이는 2년 전쯤 제가 이미 읽고 리뷰도 여기 남겼던 <르네상스 소사이어티>에도 나옵니다(이 책이 그 책보다 훨씬 앞서서 저술되었습니다만). 요즘은 아이들 수학 커리큘럼(국가에서 기획, 집행하는)에도 이 개념이 반영되었을 정도로, 파편적이고 냉정한 지식 덩어리는 미래(현재) 사회에서 퇴출되어 가는 게 현실입니다. 저자는 잃어버린 꿈과 낭만, 그리고 가슴을 가득 물들이는 "스토리"야말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소비하고 향유하는, 그래서 존재의 일부로 편입하고 그만큼 더 행복해지는 궁극의 상품이자, 모두가 제작자로 나설 수 있는 산업의 장이라고 말합니다. 기업 역시, 고용주가 피용인과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쌓았던 과거와 달리, 생산의 본체를 이루는 만인 경영의 시대가 열려, 종업원의 모임이 곧 기업이 되는, 계급 구조와 산업화 사회의 본격 해체를 선언합니다.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소비하는 세상에, 독점적 대량 생산 설비가 무슨 소용이겠냐는 뜻입니다. 이것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저자는 "마르크시즘은 이 점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도 하는 대목이 있는데, 아마 요즘 독자들은 무슨 소린가 싶을 겁니다. 물론 이 책은 소련 붕괴 한참 후에 저술되긴 했지만요.

학교 다닐 때 저는 어느 미국인 저자가 쓴 책을 부교재로 삼았던 수업 시간에, "예컨대 코카콜라 광고 같은 건 아무런 실용적 정보를 시청자에게 전달하고 있지 않다. 그럼 소비자는 왜 이런 광고를 소비하며, 기업은 무슨 까닭으로 거액을 들여 집행하는 것일까?" 같은 질문(과제)을 접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신입생이었기에, "경제학 논리에만 파묻혔기에 이런 어리석은 의문이 드는가 보다"하고 넘겼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엉뚱하게도 "그래, 이런 건 다 쓸데없는 사회적 비용에 지나지 않아"라며, 교재의 취지에 맞게 세계관까지 새로 세팅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을 영문판으로 대략 십 년 전에 읽고서야, 학부생 시절의 그 당돌한 반발이 오히려 정당했다는 각성이 들더군요. 그 광고는 (방향이 건전하든 그렇지 않든, 꿈이든 환각이든 간에) 시청자에게 "스토리"를 팔고 있었던 게(심지어 지금도 그렇죠) 분명하고, 오히려 시대를 앞서갔던 셈입니다. 나만의 꿈을 정직하게 간직하고, 타인에게 희망과 긍정을 불어넣는 능력으로, 미래에는 서열(!)을 매기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 뜻에서, 저자는 "드림 소사이어티야말로 그 이후의 단계가 없는, 사회 발전의 궁극적 귀착점"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곱씹을 만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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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으로 향하다 - 리암 니슨 주연 영화 [툼스톤]의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97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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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으면 그거라도 타서 마셔야지 싶은 인스턴트 커피라도, 막상 들이켜 보면 꽤 괜찮습니다. 커피뿐 아니라 모든 싸구려 품목들에는, 특유의 쓴맛("내 다시 이딴 거 쓰는가 봐라")을 안기는 게 있고, 생각밖으로 괜찮았네 같은 묘한 안도감(내지, 내 취향이 이 정도밖에 안 되었나 보다 같은 자괴감)을 주는 게 있죠. 어떤 싸구려는 "이거, 진짜 명품 아냐?" 같은 착각을 선사하기도 하는데, 이미 해당 소비자에게는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튼 이 비슷한 감상이, 개인적으론 예전부터 매튜 스커더 시리즈를 읽으며 느껴 오던 점입니다. 아쉬운 대로 로렌스 블록의 명작-명작 맞죠-들은 이처럼 짬짬이(심지어 지금도) 밀클 브랜드로 번역되어 나오는데, 왜 조너선 켈러먼 작품은 소식이 없는지 저로서는 잘 짐작이 안 됩니다.

이 장편은 이미 영화로도 옮겨졌고, 이상하게도 그 영화는 Y2K 운운하며 1999년으로 시간을 세팅하지만 제작연도는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그러니, 주연인 리암 니슨이 스커더 캐릭터로 나오기엔 좀 늙었죠). 반면 지금 이 원작은 1992년에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팩시밀리라는 게 발명되어서 5마일, 10마일,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서까지 바로 자료를 받아볼 수 있다...." 같은 희한한 말이 스커더 입을 통해 나옵니다. 물론 팩스가 쓸모없다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시설이라면 웹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를 대비해서 구비를 해야 하고, 책임 있는 공적 섹터에서도 공공서비스의 일환으로 (수익이 나든 안 나든) 지원, 운영을 해야 합니다. 근데, 제가 좀 의아한 건, 팩스는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도 널리 쓰였거든요.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묘사로는 "...호텔 전화 시스템 방식이 변경되어, 밖에서 걸려 오는 전화는 여전히 프런트를 통해야 하지만, 객실에서 외부로 거는 전화는 교환을 거칠 필요가 없어졌다.." 같은 말도 있습니다. 한국이라면 1992년에 어땠을 것 같습니까? 심지어 그 시절에도, 이런 건 우리가 전혀 시대 트렌드에 뒤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매튜 스커더가 마약상한테 전화를 받고 그의 자택으로 달려갈 때(영화에서는 좀 더 고급 레지던스였습니다. 물론 브루클린에도 고급 주거지구는 여럿 있습니다만) "오로지 죽은 자들만 브루클린을 알고 있으니 (거길 알려면) 나도 죽어야겠군요."라며 너스레를 떨죠. 이건 토마스 울프의 소설 <You Can't Go Home Again>중에서 따 온 인용구지만 여러 꼴로 패러디되어 널리 쓰입니다. 단 영화에서는 이게 대사로 안 나오죠. 넣었으면 멋있었을 텐데(배경도 별도 각색 없이 브루클린이고 실제 로케도 거기서 이뤄졌으면서). 인문 소양이 부족할지는 모르나 여튼 이 원작에서도 코리 형제가 브루클린 토박이라고 분명히 나옵니다(이 농담을 이해 못해도 말이죠).

"내가 택시 타고 오라고 했잖소? 비용도 내가 내겠다는데 왜 그런 푼돈을 아끼는 거요?"
"여기 뭘 타고 오든 그건 내 마음이오. 당신이 내게 그걸 가르쳐 줄 필요는 없소. 내가 당신한테 어떻게 하면 애들을 마약쟁이로 만드는지 가르쳐 줄 필요가 없듯이 말요."

이건 정말 되게 웃기는 소린데, 그 코리 형제의 손윗사람은 지하철 치안이 불안하니까(특히 그 일대라면) 걱정이 되어서 하는 소린데(여기서는 보안 이슈와 무관합니다), 매튜는 저렇게 퉁명스레 받아치는 거죠. 헌데 내 돈을 노리고 적당히 시늉만 하는 인간은, 확실히 아니라는 걸 증명시켜 주는 솔직함이기도 해서, 결국 이 "계약"은 성사가 됩니다. 스커더가 진실한 인물(기분 콱 상하게 하는 말을 하긴 해도)임은 확신이 되니까 말이죠.

둘은 전략을 짜서, 전혀 단서를 남기지 않은 놈들에 대한 실낱 같은 정보라도 건지기 위해, 돌이라도 던져 수면에 파문을 일으켜 보기로 합니다. 우선 이 바닥에 밟이 넓은 대니에게 200달러를 건네주죠.

"이걸로 택시값이나 해요."
"나더러 200달러 받고 지금 택시 불러달라는 것?"

".... 로빈 훗 이야기는 나도 어려서 좋아했지. 헌데 공공의 안녕과 정의를 걱정하는 마약상이라고? 자기 마누라가 안전하다면 됐지 왜 경쟁자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나? 누가 걸려들어 인질금을 뜯기면 라이벌 업체의 자금 사정이 위축될 테니 지한테는 고만큼이라도 더 좋은 것 아님?"
"하 이거... 당신한테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그럴싸한 이야기 같았는데 말야.. 사실은...."

이런 재치 있는, 서로 흉금을 훤히 들여다보면서 주고받는, 은근한 비꼼과 걱정과 양해가 오가는 대화들이야말로 스커더의 세계가 드러내는 짖궂은 매력 중 하나입니다. 저 대목에서 교정을 해야죠. 대니 보이가 알아듣는다면 다른 비슷한 처지의 타인들도 눈치를 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담배나 술 때문에 죽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시오. 약 하는 사람들이 없어지면, 자연 나 같은 놈들도 없어지게 마련 아니오."

이건 가당찮고 흔한 합리화이므로 대꾸할 가치도 없습니다. 허나 마약이 사회의 근간을 좀먹고 파멸로 이끈다는 점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죠. 이런 말을 하는 본인도 크게 꿀리기에 스커더에게 접고 들어가는 겁니다. 술 이야기를 하면 스커더가 사실 할 말이 없어지기도 하고요.

스커더는 이 작품에서 "헌금 하는 버릇이 없어졌다"고 처음 털어놓습니다. 술 끊으면서 같이 없어진 버릇이라는데, 사실 그는 교회나 성당에 어떤 특별한 경의를 가져서가 아니라, (마치 돈을 갖다 버리듯이 - 그래도 안 쓰게 된 표를 꼭 환불해야겠다는 등 그가 돈 개념이 없는 건 아니고요)버릇처럼 헌금을 하는 점 우리 독자 모두가 압니다. 여러 동기가 있었고, 말로 표현은 안 해도 대략 뭔지 정도는 우리가 짐작을 합니다.

잔혹한 묘사까지는 아니라도 설정상 끔찍한 연상을 이끄는 서술이 있으므로 비위 약하신 분들은 주의가 필요합니다(이 시리즈가 대개 다 그렇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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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의 시대 - 풀린 돈이 몰고 올 부의 재편
김동환.김일구.김한진 지음 / 다산3.0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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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저는 정주영 현대 창업자의 자서전을 읽을 때, 소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그를 두고 주위(선발 사업가들 그룹이나 고위 관료 그룹)에서 "그 사람이 인플레가 뭔지나 알겠어?"라고 비웃었다는 대목을 읽은 적 있습니다.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사람이 남들 하는 대로 사업이라고 벌여 동분서주하지만, 거시 경제의 큰 흐름이나 자본주의 구조의 기저를 손톱만큼이나 이해하고 설치겠냐는 조소였죠.

이에 대해서는 대강 이렇게 대응을 할 수 있겠습니다. 1) 미시(개인 사업은 아무리 규모가 커도 어디까지나 미시입니다)와 거시는 작동 원리가 꽤나 다르며, 2)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목숨 거는 열의로 사업을 하는 이라면 아주 바보로 태어난 게 아닌 이상 뭔가 통찰력 같은 게 생깁니다. 그게 탁상공론식 겉치레(소화 안 된 겉도는 지식)보다 훨씬 효용이 높을 때가 많죠. 물론 가장 골치 아픈 유형이라면, 배움도 없고 그렇다고 실물의 흐름도 모르면서 머리까지 나쁜, 몇 마디 주워들은 구호로 거친 현실을 마구 재단하려 드는 용감한 이들입니다.

아무큰 요즘은 일본식 줄임말인 "인플레"를 잘 쓰지 않고 원어 그대로를 더 널리 사용하는 듯합니다. 제가 서평 앞에 저 일화를 꺼낸 이유는, 이 인플레이션이라는 게 자본주의 경제가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할 영원한 숙제, 업보 같은 것이라는 뜻에서였습니다. 불가사의하게도 자본주의를 채택한 어느 나라의 거시경제건, 경기의 사이클이라는 게 반드시 있습니다. 잘나갈 때는 어느 목에서 점포를 잡고 장사를 하는 이들이건 높은 매상고를 올리고, 이들이 다시 다른 섹터에서 통 크게 소비를 하면 그 돈이 또 돌고돌아 다른 이들의 가계를 살찌우고..... 이게 세칭 "경기가 좋다, 활황이다"라고들 부르는 전형적인 풍경입니다.

그러다가, 경제 전체에서 새로이 생산된 물자, 서비스의 가치는 그럭저럭인데, 이를 적절히만 대표해야 할 종이돈만 엄청 불어나서 많은 이들의 눈을 속였다는 인식("내가 알고 보니 그리 부자가 아니었어!")이 확산하면, 소위 "거품"이란 게 뻥 터집니다. 거품도 아주 없을 수는 없어서 그저 필요약 정도로만 기능하면, 관리 가능한 수준에서만 커졌다 줄었다 하면, 그건 정상적인 생리 작용의 일부라서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진즉에 부피가 줄었어야 할 것이 맘대로 덩치를 키우고 돌아다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돌연사하면, 걔만 죽은 게 아니라 그 위에 올라탔던(돈도 없으면서 펑펑 써대었던) 상당수의 경제 주체, 대중들이 함께 죽습니다. 이런 게 공황입니다. 따라서 버블과 공황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분수도 모르고 즐긴 대가를 나중에서야 혹독히 치르는 거죠.

이 책의 제목과 주제는 "인플레이션"입니다. 인플레 때문에 물가가 살인적으로 올라서 국민들이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이런 걸 지적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장바구니 물가 수준에 비해 소득의 오름세가 너무 더뎌 못살겠다는 아우성은 곳곳에서 들리고, 이 책에서도 김동환 소장님 같은 분이 (심지어 작년 촛불집회는 정치적 성격보다 민생고의 절규라고 봐야 한다면서)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도 세 분 전문가가 거의 의견이 일치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지금 한국 대중의 불만과 좌절은 물가고 때문이 아니라, 벌이가 시원찮은 데서 연유한 부분이 더 큽니다.

그게 그게 아니냐는 반론은 경제를 모르는 소치인 게, 각각의 경우 처방이 다르기 때문이죠. 다른 정도가 아니라 180도 반대 방향입니다. 물가가 쓸데없이 높기만 하다면 지금 시중에 풀린 돈을 거둬들여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물가는 적정 수준인데, 다만 지갑이 텅텅 비어서 문제라면, (의미심장하게도) 정부는 금리를 더 낮춰 시중에 돈을 더 돌게 해야 합니다. 전자는 허리띠를 졸라 긴축을 하자는 거고, 후자는 여력이 있으니 당장 빚을 좀 내서 실탄을 보충한 후, 신나게 번 뒤(그럴 전망이 있다는 뜻) 나중에 갚자는 거죠. 후자를 무작정 죄악시하는 시각은 역시 경제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김동환 소장님은 "생일 하루 잘 먹자고 사흘 굶을 생각이냐"고도 하시는데, 그냥 당장의 지출만 줄이고 궁상 떨다가는 평생 가난하게 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취지입니다.

이 책은, 지금 우리가 어느 수준, 어느 정도 역량을 가졌는지 냉철하게 진단하여, 주제파악 후 긴축, 긴축 모드로 회귀할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세계적 경기 팽창 모드에 편승해서 돈 좀 벌어 볼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란 전제 하에 모든 논의를 시작합니다. 제목은 소박하게 "인플레이션"이지만, 내용은 차라리 "한국과 세계의 경제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거시경제 이슈 전반을 모두 망라한다 할 만큼 광범위합니다.

주제가 광범위하면 "거, 말은 듣긴 좋지만 하나마나한 덕담만 주고받다 끝나는 거 아냐?" 하고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시중에 그런 책도 많죠(아니면 정반대로, 특정 정파의 정강 정책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선전물, 경제 서적의 탈을 쓴 정치 서적도 있습니다). 이 책은, 적어도 그런 류는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과감한 것 아닌가, 본래 경제 현상이라는 게 이처럼 직설적이고 직관적인 말로도 표현 가능한 주제였나, 새삼 놀랄 만큼, 세 분 전문가 모두 시원시원하게 막 지르십니다. 막 지르는 식으로 논의를 끌고 가면 재미도 나고 논지가 바로바로 이해 되는 장점은 있는데, 깊이가 없거나 편향된 결론만 잔뜩 얻고 끝날 위험도 있습니다.

이 책은 (고수들답게) 상당수 이슈나 현황에 대해 합의를 공유하는 세 전문가들의 토론이지만, 반대로 의견이 갈릴 때는 대립 지점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아주 솔직한 책"입니다. 대개가 토론, 대담 형식이라, 독자는 어느 한 가지 결론에만 오도, 고착될 염려가 적습니다. 곰곰히 숙고하면 세 분 중 어느 전문가의 결론이 옳을지, 논점에 따라 개별적으로 알찬 깨달음이 자리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하나만 놓고 보면, 무작정 긍정하거나 반대로 거부하게도 되고, 아예 뭐가 뭔지 몰라 판단을 못하기가 십상이죠. 그러나 서로 미묘하게, 혹은 판이하게 다른 세 아이템을 같이 대조하면, 각각의 장단점이 잘 파악되어 무엇을 취사선택할지 판단이 빨리 섭니다.

의견이 일치하는 대목에서도, 세 분 고수는 같은 현상, 결론, 논리를 두고 서로 다른 표현으로 독자에게 풀어 줍니다. 그래서, 설령 한 분의 입장이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다른 분의 다른 버전으로 다시 듣고 나면 앞 분의 논의까지 덩달아 납득됩니다. 앞으로, 난해한 주제를 다루는 경제 서적은 모두 이런 포맷을 취한다면, 독자들에게 꽤 유익한 공부가 될 것도 같네요. (헛된 기대이겠습니다만)

1장은 자산시장에 대한 전망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작년 하반기부터 주가가 고공행진이고, 아파트값도 (전체는 아니고 일부 지역에서 - 라곤 하나, 그래도 꽤 추세적입니다. 전엔 다들 이게 일시적이라고 봤는데 너무 오래갑니다. 지난시절과는 패턴이 다르긴 하나, 여튼 호황은 호황입니다. 많은 전문가분들 위신이 크게 상할 만큼) 투기과열지구 지정이 이어질만큼 심상치 않습니다. 그럼 고수들 이야기를 들어 봐야죠. 이거 큰 재앙으로 이어질 거품으로 치닫는 거냐. 아님 미래를 낙관해도 된다는 어떤 시그널이냐. 물론 후자 쪽으로 치달을 나이브한 이는 일반인 중에도 없을 겁니다. 문제는 신중하게 처신하되, 어느 수준까지 신중할지를 판단 잘 해야 한단 거죠. 아파트 버블 터질 거라고, 박 정부가 정권 유지를 위해 인위적으로 부양하는 거라고 그렇게들 지적이 나올 때, 현장에서는 다들 코웃음을 쳤습니다. 이론에만 매달릴 뿐 시장의 형편을 너무도 모르는 소리라고요. 이게 작년 이맘때 분위기였어요.

김한진 박사는 (좀 많이) 신중하자는 입장에 기웁니다. 이 1장에서뿐 아니라 책 전체를 통틀어 이 입장이 꽤 일관되어 있습니다. "경제에는 공짜가 없다. 2008년 위기는 양적 완화를 위해 미봉되었을 뿐, 누군가가 무분별하게 소비하고 타인에게 전가한 부담, 해악은 아직 덜 해소되었다. 이런 판에 다시 통화를 팽창하거나 방만하게 시스템을 관리하면 다시 부실이 폭발할 수 있다." (책의 표현은 아니고 독자인 저 나름대로 요약, 리프레이즈한 겁니다) 반면 김일구 한화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이미 부채와 위험 요소는, 놀라울 만큼 효과가 컸던 연준의 핸들링으로 다 녹았다(녹았다는 건 영어식 표현이지만, 우리말로 저리 직역해도 그 뜻이 잘 전달됩니다. 본래 경제 정책은 경로 곳곳에 포진한 폭탄을 해체하고, 독성 물질을 옅은 농도로 잘 녹여 내는 수완이 그 본질이죠)"는 전제 하에, 이제 성장을 위해, 경제 주제의 지갑을 두둑이 채우기 위해 과감한 행보를 디디야 할 때라는 쪽입니다. 세 분 중 김일구 센터장이 가장 알기 쉽게, 또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타입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사회자 격인[실제로 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맡고도 있습니다] 김동환 소장이 책 중 좌담에서 개입도 하더군요)

"이러다 일본 된다." 이 진단은 보수 언론, 심지어 대중 사이에서도 폭 넓은 지지를 얻고 있는 편이죠. 그런데 이 책 대담자 세 분 중, 적어도 두 분은 이 말에 정면으로 반대합니다. 특히 김일구 센터장 같은 분은 여러 근거를 들어가며, 결코 한국은 일본처럼 장기침체에 빠지지 않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잃어버린 30년을 겪은 일본이 특수할 뿐이지" 다른 각국의 경제, 특히 조건이 여러 모로 다른 한국은 다른 길을 걸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거죠. 제가 가장 속이 후련했던 건, 이 일본의 사례를 일반화할 게 아니라, 기존 경제학 교과서에서 써 오던 "저축의 역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될 것 아니냐는 주장이었습니다. 기존의 개념틀로 설명이 가능한 내용이면 그로 환원하면 충분하다는 건 어느 학문에서나 공통된 상식입니다. 번거롭게 매번 새 말을 만들어낼 게 아니라 말이죠. 또, "일본화"의 프레임은 결국 거기서 빠져 나올 답이 없다는 점에서 건설적이지 못한 논의입니다. 허나 "저축의 역설"은 경제학자들이 고안해 둔 이론적 해법과 관료들이 실제 운용 과정에서 터득한 경험적 처방이 이미 있습니다.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김동환 소장 같은 분은 이 대목에서, "작년 촛불집회를 보라. 우리 국민들이 이처럼 역동적인데 과연 침체가 있을 수 있겠는가?" 같은 말까지 합니다. 이는 예전 학장 시절 정운찬 전 국무총리도 수업 시간에 비슷한 말을 한 적 있죠.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요(생각해 보니 맥락도 큰 찬이가 안 나네요).

"소득과 성장이 일치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기업은 높은 실적을 거두어도 그 과실은 개별 경제주체, 가계의 소득으로 적정하게 분배, 파급되질 않는다." 근데 이 논의는, 근래 다분히 정치적 논쟁으로 타락한 소위 낙수효과(트리틀다운 이펙트) 이슈와는 관점이 좀 다릅니다. 어떤 분은 이 책 세 분 대담자 중 한 분인 김일구 센터장님이 우파 쪽에 치우치지 않았냐고도 하던데, 지금 바로 위에 인용한 이 말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드는지 물어봐야겠어요. 다만 김 센터장께선 "국가대표를 키운다는 생각으로 대기업을 밀어줘야 한다"는 논지는 자주 강조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또 김 소장님(김동환)과 김 박사님(김한진. 세 분이 모두 김씨라서 책 읽으면서 처음엔 구분이 좀 어렵더군요)이 동맹을 이뤄 반대하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이런 개인 성향을 파악하면서 읽어야 책이 더 재미납니다.

김 센터장께선 그러나 성장과 소득의 (거의 필연적인) 분리까지 논지를 확장시키시는데,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이런 대목은 좀 의아스럽더군요. 교과서 이야기도 하시지만 거시경제학의 가장 뼈대를 이루는 도그마 중 하나가 "국민 소득 삼면 등가의 원칙"입니다. 경제 구조의 개별 특성에 따라 경로가 길고 짧고, 시간이 덜 걸리고 더 걸리는 차이는 있어도, 결국은 생산국민소득이 분배, 소비 국면에서까지 일치, 균형을 찾아간다는 게 교과서의 가르침이죠. 물론 현실의 사정이 그새 변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원 설마!), 언제나 모범생처럼 근본 명제의 적용과 원용을 강조, 선호하시는 센터장께서 유독 이 대목에서만은 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시지 않나 해서입니다. 다른 이슈를 설명하실 때 너무 사이다처럼 후련한(그러면서도 엄정하고 명쾌하게 교과서적인) 해명을 해 주셨기에 제가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 나라는 자영업자가 너무 많다." 그러면서도 이 많은 자영업자들이 생산에서 기여하는 비중은 또 적습니다. 그 말은 자영업자들이 대개 현장에서 돈 많이 못 벌고 고전한다는 뜻도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자기 책임 하에 개별적으로 뛸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기량을 효율적으로 쏟을 직장을 마련해 주는 게 더 중요하다"는 제언도 합니다. 상당히 과격하지만, 자영업이 점차 특정 프랜차이즈들로 통합되어 가는 양상이, 어느 정도는 이런 진단을 반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점주들은 본사와의 갑을 관계 대립상을 그리 부각하지 않고, 정부 쪽에 불만을 토로하는 쪽으로 바뀌더군요. 이 논의는 과거 영세농이 너무 많아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엄청난 폭발성을 지닌 이슈와도 유비 관계가 성립합니다. 잘못 다뤘다가는 큰일나죠.

김한진 박사님은 그럼 (정치적으로) 개혁 성향(소위)이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김 박사님은 자유주의 진영을 대변하는 편이더군요. 정부는 최소한으로 개입을 억제하고, 경제의 작은 지류에까지 속속 파고들어 전체적으로 놀랄 만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시장(market)"에 더 많은 권한을 넘기라는 입장입니다. 책에는 심지어 공기업을 대폭 민영화하고, 정부는 새로운 공기업을 만들어서 유능한 젊은 인력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주라는 제언까지 나옵니다. 듣기엔 큰 기대를 부풀게 하는 면도 있습니다만(국지적으로 타당하기도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너무도 많은 난관이 기다릴 것 같습니다. 공기업 노조측에서 과연 가만있겠습니까? 또, 어떤 기준으로 무슨 인재들을 선발하여 그런 "특혜"를 줄 것인지를 놓고, 끝도 없는 분란이 일겠지요. 안 봐도 눈에 선합니다.

지금 세계는, 2008년 대재앙이 남긴 몹쓸 폐단을 과연 말끔히 쓸어내고 나서 새출발을 다짐하는 중인가? 이에 대해서는 제가 지난 3월경에 서평도 쓴 <트럼프 시대 호황....>에서 이미 한 입장을 광폭으로 전개하고도 있었습니다. 오바마를 지지하거나 높이 평가하든, 그렇지 않든, 최소한 그가 위기 수습을 멀끔하게 해 놓았다는 데 대해선 의견이 일치합니다. 그의 가장 극렬한 반대자인 트럼프가, 이제 확장 정책, 과감한 인플레이션 자극을 통해 호황기를 한번 열어보자고 나서는 건, 전임 오바마가 일군 성과를 그도 긍정한다는 실토밖에 안 됩니다(역설적이죠). 소규모 개방 경제로서 대외 요인에 너무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엮일 수밖에 없는 우리(이 책에도 나오듯 소위 베타가 큰)로서는, 이 국면에서 과감한 결단을 내려 영리한 실속을 챙길 건지, 아니면 이른바 "재정 건전화, 충실"이란 매력 없는 옛 숙제에 계속 매달릴 건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고 해야겠습니다. 세 분 전문가가 호방하게, 솔직하게, 기탄 없이 심중을 털어 놓는 토론을 구경하며, 독자도 함께 각성하고 공부하는 바가 많았네요. 말미에 실린 "트럼프라는 현실"은, 정치적 선호나 프레임이 깔리지 않은, 냉정하면서도 현실에 밀착한 쾌도난마식 설명이 너무도 재미있었습니다. 이 책, 한마디로, 소설보다 더 재미있으면서, 보약보다 영양가 높은, 교과서보다 더 공부가 되는,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읽을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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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와의 결혼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23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김석환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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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어떤 남녀라도 서로에게 가장 알맞은 짝이 있게 마련입니다. 단, 세상이 너무 넓다 보니 불운하게도 평생토록 서로 못 마주치는 경우가 대부분, 대부분이라는 게 문제입니다(그래서, 처음부터 없었던 것과 결과에 있어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게...). 그래서 우리는 차선, 차차선, 차차선인 이성에게 만족하거나, 아님 차악, 어쩌면 최악의 상대에게 자기 편할대로 허울을 씌워 최면을 걸고 사는 수도 있습니다. 본능과 호감이라는 게 있는데 보통도 아니고 어떻게 최악을 골라 착각할 수가 있는가? 인간 내면이라는 게 그래서 간단치 않다는 겁니다.

언제나 후회 않을 선택만 하는 사람은 대개 재미없는 유형이거나, 아니면 아예 본인 자신이 최악의 말종이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평범한 우리들은 "내 느낌이 맞겠지. 설마 무슨 일이야 생기겠어?"하고 기분 좋게 순간의 이끌림에 충실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나서는.... 음.... 그런데, (어리석었을지언정)그나마 덜 이기적이고 성격 좋은 타입은, 나중에서야 그 선택이 그릇되었음을 인정할망정, 후회하거나 미련을 갖거나 남탓을 하지 않습니다. "그 선택도 어차피 내가 내린 결정이었어." 이런 못난 자신도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 게 진짜 인간이라며 한번 씩 웃고 어제보다는 내일에 시선을 돌리는 게, 설령 멍청하단 소리를 들어도 멋진 사람 아니겠습니까?

남자 같으면 또 모르겠는데, 여성이 행여 인간 못된 배우자(혹은 그에 준하는 상대)를 만나 고생을 하는 게 참 딱한 경우입니다. 꼭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같은 고전을 들추지 않아도, 우리는 숱한 본격 문학이나 장르물에서 이런 유형을 접하며, 같이 슬퍼하고, 흔한 공감과 개탄을 취미 삼습니다. 언제나 인간사의 진한 우수가 배어 있어 독자를 센치하게 만드는 데 도사님이신 코널 울리치(즉, 윌리엄 아이리시)의 작품을 읽노라면, 곧잘 비운의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변변치 못한 가정에 태어나 좋은 교육도 받지 못하고(좋은 교육을 받았다 한들, 이 시대라면....), 웬 몹쓸 불한당한테 잘못 걸려 애까지 가지고 돈 한 푼 없이 버림 받은 불쌍한 여성, 수중에 단돈 17센트만 들고 편도 차표 한 장으로 북새통인 열차에 탑승했으나, 도착해 본들 그녀에게는 아무 기약이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혼잡한 장거리 여행을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치러야 할 판인데... 마음은 고달픈 현실을 감내하고 죽은 듯 시간을 보내야 할 줄 알지만, 애까지 밴 여성의 몸은 다른 생각을 품고 그 생각을 실천에 옮깁니다. 편안히 자리를 잡은 어느 남성의 발을, 자신이 아닌 자신의 발이 "불수의적으로" 툭툭 건드리고 있네요. 이 신사, 같은 또래처럼 보이는 이 남자는 꽤 친절합니다. 이 남자와 신혼인 듯한 그 옆자리의 여성은, 당신이란 남자는 왜 이렇게 둔하냐고, 어여 자리를 양보하지 못하겠냐고, 저 부른 배가 안 보이냐고 마구 핀잔을 줍니다. 큰 죄나 저지른 양 아내에게 절절 매는 이 호인은 금세 여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죠.

신혼인 여성은 본인도 임산부입니다. 겉으로 보아 비슷한 처지(속사정은 전혀 딴판입니다. 어쩜 같은 하늘 아래 이처럼 행복과 운수의 배분이 불공평할 수도 있는지, 섭리를 탓하고 싶어질 만큼이죠)인 두 여성은, 이내 친구가 되어 온갖 이야기를 다 주고받습니다. 요렇게 아기자기한 상황을 찰지게 묘사하는 게 이 작가분의 장기입니다.

"7개월요."
"전 8개월이에요."
마치 두 귀족 부인이 모여, 백작 부인이 공작 부인의 위계를 알아보고 예를 갖추듯, 서로는 몹시도 상대를 존중하는 모습이었다. 그 위계 차가 한 달짜리라고 해도 말이다.

이 문장은 원문 그대로는 아니고 그냥 제 기억대로 재현해 본 것입니다. 저는 코널 울리치 전집을 원서로 다 갖고 있는데, 책의 번역은 원문에 매우 충실합니다만 왠지 책의 문장은 바로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울리치의 문장은 섬세하고 감정이 듬뿍 담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본인 딴에는 아무리 꼬아도) 독자에게 바로 와 닿는 게 또 특징입니다. 이 대목 역시 번역서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던 분들도, 원서를 보면 바로 납득이 될 겁니다.

두 신혼 부부는 너무도 행복해 보입니다. 그저 유복하게 살았다. 쪼들리지 않고 여유를 누린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다(아까 부인이 남편에게 막 대한 건 이분들 나름 애정의 게임에 불과하죠. 그러고들 노는 겁니다), 그저 이런 말로는 표현이 안 됩니다. 특히 같은 여자가 봤을 때 저 부인, 세상 태어나서 슬픔이라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얼굴이라네요. 이건 주인공의 주관이 투사된 인상에 불과하며, 이야기를 계속 나눠 보니, 바로 "자신"처럼, 한미한 환경에서 그럭저럭 부대끼며 지내다 이처럼 마음에 턱 맞는 남자를 만났을 뿐이랍니다. 남편도 고생을 좀 했는데, 알고보니 "사정"이 좀 많이 다르더라는.... (더 이상은, 내용 누설이라 언급 못 하고요)

당장 내일을 기약 못하는 인생 앞에서 이런 행복한 커플이 제왕도 부럽지 않을 행복을 누리는 모습이란, 참 가혹한 시련입니다만 우리의 주인공은 그들을 시샘하지 않습니다. 이런 타입은 행여 뜻밖의 행운이 찾아와도 자신의 양심에 충실할 뿐, 속물적으로 탈바꿈하여 타인에게 몹쓸 짓을 벌이거나 하지는 않죠. 네. 그래서... 그녀는 "일단" 운명의 물줄기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릴 수 있었습니다. 허나 앞으로도 계속 행운을 지킬 수 있을지....

독자들은 소설 처음, 웬 남녀가 누군가를 죽였다느니, 혹시 당신이 (나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대신 나서서) 그런 짓을 한 것 아니냐느니, 어찌 보면 행복한 불안, 번민에 사로잡혀 있는 걸 보고, 또 바로 다음 장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전혀 앞과 이어지지 않아 보이는 에피소드를 채워 나가는 걸 보고 당황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당황할 게 아니라, 지금 미스테리 소설을 읽는 중이니,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추리를 해 나가며 답을 찾으십시오. 그게 룰입니다. 더불어, 가능하면 이 해문 추리 시리즈가 유지하는 포맷인 "등장 인물 소개"도 읽지 마십시오. 그 자체가 (미세하게나마) 스포일러입니다.

결말이 왜 그리 비관적인가, 기왕 그리된 것, 착한 품성에 아직 젊디젊은 남녀가 힘찬 새출발을 다짐한다고 마무리지었으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정도의 해명이 가능합니다. 첫째 그래도 형식미를 꽤나 중시한 울리치는 수미쌍관의 플롯을 더 잘 다듬고 싶었다. 2) 만약 "새출발. 희망" 쪽으로 분위기(이거 잡는 데에 또 귀신이죠, 이분이요)를 꾸렸다면, 이번에는 싸구려 통속물의 뻔한 행보라고 또 비난이 일 것을 의식했겠다. 뭐 이 정도로요.

통속물은 통속물이되(솔직히, 병원에서 신상이 뒤바뀌었다는 쪽으로 갈 때 아! 하고 탄식이 나왔습니다. 장르물에서 그럼 뭘 기대했냐, 같은 생각), 울리치의 작품은 결코 그 한 마디로 감히 폄하할 수 없는 기품이 있습니다. 첫째 그는 인물 심리 묘사에 너무나도 탁월한 섬세함을 뽑냅니다. 둘째, 대가들만이 선뵐 수 있는, 지나가듯 툭툭 던지는 인생에 대한 단편적 통찰이 또 일품이죠. 이 작 역시 본 줄기보다는, 그런 주변 묘사와 세팅에서 독자를 성찰과 우수에 젖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물론 마지막에 한 번 더 예비해 둔 반전 역시 절대 천박하지 않습니다.

p234: 7 부축이려 → 부축하려

"부축이다"라는 말은 없습니다.
"남의 심사를 들쑤시다"라는 뜻이라면, "부추기다"가 맞고
여기서처럼 "쓰러지려는 걸 받쳐 일으켜 세우다"라는 뜻이라면 "부축하다"가 맞죠.

이런 오타를 내시는 분들은 머리 속에 개념 구분이 선명히 안 이뤄져서, 전혀 무관한 두 영역이 마구 헷갈리는 거죠. 한국어인데도 말입니다. 모르긴 해도 이런 분들은 "받치다"와 "바치다"도 혼동할 가능성이 큽니다.

P235: 밑에서 7째줄 틀키기 → 들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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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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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대만 여성 작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소설 <검은 강>을 읽고 리뷰를 썼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번주에 읽은 이 책 <레티시아> 역시, 2011년에 프랑스, 나아가 유럽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어느 소녀의 실종, 사체 발견, 이후 드러난 연관 범죄 스캔들을 집중 취재, 분석한 논픽션입니다. 두 책은 1) 픽션과 논픽션, 2) 모두의 화제가 된 여성이 범죄의 가해자이냐 피해자냐 하는 점 3) 저자분의 성별 등에서 차이가 있지만, 현대 사회의 후미진 구석에 드리워진 여전한 폭력, 학대, 비뚤어진 윤리관, 계급 간 갈등, 빈곤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이런 구조적 모순의 가장 손쉬운 희생양이 바로 "젊은 여성들"이란 안타까운 깨달음을 독자들에게 환기하는 점이 서로 닮아 있습니다.

故 레티시아 페레는 실종 신고가 접수되고 그 용의자가 검거될 무렵 겨우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가 직접 관심을 보이고, 국민들(프랑스뿐 아니라 인근 서유럽 여러 국가, , 혹은 동료 EU 회원국에 널리)에게 주의를 촉구하며, 나아가 (특히 용의자 토니 멜롱의 검거와 관련하여) 누범(상습범)에의 처벌, 선고, 관리를 태만히 했다며 법관의 "징계"를 언급하기도 해서 이 기간 중 대중 사이에서 큰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편 이때로부터 몇 달 후, 죽은 레티시아 쌍둥이 언니인 제시카 페레가, 그 양육가정의 가장인(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 양부 노릇을 했던) 질 파트롱 노인을 성 추행 혐의로 고소하고, 이듬해 파트롱이 징역형을 선고 받음으로써 큰 후폭풍을 빚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전 국민의 입방아에 오르고, 이른바 Marche Blanche 같은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기도 한 큰 사건이었지만, 저자는 혹 그 이면에 우리가 놓치고 미처 보지 못한 다른 면은 없었는지, 가해자를 타매하고 지탄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반성할 대목은 없었는지, 입체적이고 성숙한 시선으로 사건의 총체적 모습을 분석합니다.

저자는 중후한 연령대의, 근사하게 늙어가는 듯한 은발의 미남 교수님입니다. 책 중에도 언급이 되어 있듯, 그는 넉넉한 중산층 가문 출신이며 유대계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비록 방대한 분량의 엄정한 필치(적어도, 사건의 진상을 추적, 정리하거나, 당사자들의 신상 관련 부분을 요약할 때는)로 희대의 사건 그 의미를 탐구하지만, 그 외의 대목에서는 다분히 개인적인 감상을 투영하기도 하고, 비장한 소회라든가 제도에 대한 비판(사건의 본체와는 거리가 있는), 혹은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이 책은 다분히 저자 개인의 세계관이 뚜렷이 반영된 체계이며, 동시에 프랑스 지성인들의 저작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소재의 인문, 형이상학 환원" 경향을 드러낸다 하겠습니다.

저자가 다분히 친밀감을 느끼는 이들은, 비슷한 또래의 전문가들입니다. 이에는 예심 판사, 검사장, 헌병대 준위(이분만은 좀 젊은 연령대인 듯), 변호사 등이 포함됩니다. 변호사라면 일단 제시카 페레 사건을 맡았던 세실 드 올리베이라가 이 책의 주요 인물인데, 저자는 이 여성을 대단히 능력 있고 자상하며 직업적 소명의식에 불타는 인물로 묘사합니다. 이 책이 저술되는 과정에 큰 기여를 한 분이기도 하죠. 프랑스 사법사상 재심 청구가 인용된 예는 극히 드문데, 그 중 한 건을 이분이 성사시켰다는 점에서, 법률적 소양과 적성도 대단하거니와 법정 밖에서 관계자들을 만나고 진실을 유도하는 인간적 매력이랄까 열정(외모는 그러나...)도 대단한 분 같습니다.

변호사 중 다른 한 사람은 장피에르 피카인데, 이분은 사르코지 대통령 임기 중 측근에서 자문을 맡기도 했던 실세이기도 했습니다. "(전) 대통령에 대해 그 어떤 불리한 증언도 사양하겠다"는 언질을 받고서야 인터뷰에 응한 그를 두고, 저자는 "요즘 같은 세상에 극히 보기 드문 충성심이란 미덕"이라고 평하는데, 사르코지에 대한 그의 감정이라든가 정치적 경향성을 감안하면 다분히 반어적인 코멘트로도 보입니다. 다만 그의 외모에 대해선 대단한 미남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데, 제가 보기엔 저자분이 훨씬 더 잘생긴 것 같습니다(나이는 저자분이 몇 살 더 아래라는 점도 고려는 해야 하지만요).

이분을 만난 이유는, "레티시아 살인 사건"의 한 당사자가 바로 사르코지 당시 대통령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당시 법률자문직이었던 피카 씨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할 필요). 그는 사건 초반부터 레티시아와 가해자에게 국민들이 시선을 주고 공분할 것을 촉구하고, 이 와중에 여러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기도했기에, 어찌 보면 이후의 곤경은 자신이 자초한 면도 있습니다(저자는 이를 두고 "범죄 포퓰리즘"이라고까지 규정합니다).

저자뿐 아니라 상당수의 진보 성향 프랑스 지식인들이 사르코지를 보는 태도는, 한국에서 좌파진영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대하는 스탠스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자는 이 두꺼운 책 중 한 챕터의 제목을 "파트롱과 사르코지의 축"이라고까지 달았는데, "축(l'axe)"이란 말이 이탈리아 파시스트와 독일 나치의 동맹 이래 언제나 심각한 비난성의 정치적 함의만 담았다는 걸 생각하면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물론 이 사건에서 사르코지가 잘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만. p287:1에 보면 <샤를리 엡도>가 사르코지의 이런 행태를 두고 먹잇감을 쫓는 독수리에 비유하여 풍자했다는 기술이 있는데, 물론 우리가 작년의 그 테러 때문에 잘 아는 그 잡지입니다. 그새 대통령이 두 번이나 바뀌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죠. 책 뒤에 보면 "Laetitia, c'est moi(레티시아, 그녀가 바로 나다)."라는 말도 있어요.

죽은 소녀 레티시아는 적어도 매력적이라고는 부를 수 있는 분위기였나 봅니다(꼭, 희생자에 대한 미화 예찬이나 기억 왜곡이 아니라). 그녀는 또래 아이들이 보통 그렇게 자기 인생을 기록하고 채워 나가듯 페이스북 활동에 열심이었는데, 여기뿐 아니라 상당수 다른 흔적에서도 맞춤법을 자주 틀립니다. 이 책 후반부 어느 챕터의 제목이기도 한 "tro kiffan"은, 사실은 "trop kiffant"이라고 써야 정서법에 맞죠. 우리식으로는 "졸라 쩌는" 정도의 표현과 통할까요? 국어 공부는 게을리해서 맞춤법엔 약했을지 모르나, 소녀는 일탈 행동을 삼가고 직업 교육 과정에서 가르치는 기술을 열심히 습득하는 등, 꽤 성실한 마음가짐을 지녔던 듯합니다. 말이 그리 많지 않고, 신상에 대한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과거의 아픈 상처들 때문이죠), 장래에 대한 설계를 야무지게 챙기는 편이었다는 점에서, <검은 강>의 자전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저자는 레티시아가 위탁 가정을 전전해야 했던 이유를 파고드는 과정에서, 그 생부와 생모, 외삼촌, 친삼촌 등을 두루 만납니다. 생부는 대단히 폭력적이었고 그 과정에서 생모의 정신 건강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기도 했지만, 여튼 딸에 대한 사랑은 깊었다(...)는 쪽으로 결론을 저자는 내립니다. 이에는 저자 특유의 사르코지에 대한 악감정도 다분히 개입한 게 아닌지 저는 판단합니다. 사르코지는 죽은 레티시아의 보호자였던 질 파드롱 노인에 대해 꽤 편을 들고 나섰는데, 그가 중후한 외모에다 자신의 정치적 가치를 대변하는 듯한, 그럴싸한 쇼맨십도 언론을 향해 선보였기 때문에, 그의 실체를 간과했던 거죠. 저자는 이를 두고 사르코지가 "소아성애자의 편을 들어 강간범과 맞서 싸운 셈"이라며 그를 신랄히 비꼽니다.

여튼 질 파드롱 노인은, 전적으로 악한 인간이 아니었을지는 모르나(그 부인은 문제가 크게 불거지기 전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듯합니다), 레티시아 쌍둥이 자매 이전에도 위탁 아동에 대해 성추행을 저지른 행적이 드러난 데다, 법정에서도 가증스럽게 "내 본분을 잊었다"며 오열하는 듯 과장된 행동을 보인 점에서, 전혀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유형이겠습니다. 이런 사람을 잠재적 동맹자(?)로 고른 사르코지도 경솔했고 말이죠.

한편 "살인범" 토니 메롱도 희한한 개성을 지닌 자인 건 마찬가지인데, 1) 우선 평소부터 성범죄자에 대한 극심한 증오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최소한 살인의 동기만큼은 성욕 충족이 아니었던 듯하고 2) 체포, 수사 과정이나 구금 기간 동안 내내 대통령 사르코지를 향해 정치적 성격이 가뜩 담긴 비난을 퍼부어 미디어를 대단히 즐겁게 해 줬다는 점도 기가 막힙니다(이 역시 사르코지 자신이 자초한 봉욕이겠습니다). 문제가 많은 최하층민 부모 밑에서 자라나, 올바른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에 방치되었다는 점을 고려는 해 줘야 온당한 평가이겠습니다. 저자는 예컨대 p191, p227 등에서, 여튼 성실한 노력으로 상위 계급에 소속되거나 그들에게 고용된 처지의 청소년을, 저 죽은 레티시아가 대변하고, 이들에 대한 반감으로 공격(여러 패턴이 있겠습니다)을 일삼는, 같은 하층민 청(소)년을 저 토니 메롱이 상징한다면서 일종의 사회학적 분석, 일반화(혹은 인문화?)를 시도합니다. 이 역시 우리가 깊이 곱씹어 봐야 할 대목입니다.

여담인데, 저자는 저들 하층민 부모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출산 직후 영아 유기를 두고 "일종의 사후 피임"이란 표현을 쓰는데, 이는 (그 재치있는 문장력은 별개로 치더라도) 좀 불건전한 인식의 반영이 아닌지 다소 걱정되었습니다. 영아 유기는 어느 나라나 범죄로 규정하여 처벌하는 악한 소행이고, "피임"은 "중절"과도 엄연히 구별되는, "여성의 권리"로 널리 옹호되는 선택일 뿐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사회 정책으로 장려되기까지 하는 수단입니다. 그런 걸 두고 범죄와 같은 위계에 둔 "은유"를 책에서 구사하시는 건, 적어도 신중하지는 못한 처사라고나 해야죠. 극렬 여권주의자들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말입니다. 이메일이라도 보내고 싶어지네요.

저자는 지성인답게 절묘하고 재치있는 표현을 여러 군데에서 뽐내십니다. p174: 8 "기억의 착복" 같은 건 저로서는 참 오래 머리 속에 남을 것 같네요. 저자는 황색 저널리즘에 대해서도 심각한 혐오와 분개감을 표시하는데, 예컨대 pp. 176~177, p127, pp. 119~121 같은 곳이 그러합니다. 레티시아를 두고 당신들(언론계 종사자들)은 정육점에 걸린 고기, "죽음의 구경거리"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그의 통탄은 독자를 숙연하게 합니다(단, p143을 보면 타인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그들만의 고충에 대한 동감도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혹 우리가 이 저자를 그런 저질 언론인의 부류로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저자의 의도를 잘 이해해가면서 신중히 책을 읽을 필요도 있겠습니다. 이런 책 읽으면서 남의 불행에 안도하고 즐기려는 걸 고작 은밀한 쾌감으로 삼는 저질 독자들도 많기에 하는 소립니다.

저자는 레티시아를 두고 "내 딸일 수도 있었던 아이"라고 말한다든가(솔직히 그러기에는 좀 젊으시네요), 안네 프랑크나 넬리 라보브나 프타슈키나(Нелли Львовна Пташкина)처럼 시대의 모순에 청소년식으로 저항(?)한 다른 아이콘들과도 비교하는 등 여러 차례 존재 규정에 애 씁니다(혹은, Laetitia, c'est moi!). 책 부제는 "인간의 종말"이지만, 책 맨 마지막 문장은 (레티시아의 유언과도 같은 여러 기록 중에서 인용하여) "삶은 축제다!"입니다. 삶이 진정한 축제가 되려면, 불순한 세력이 책동하는 더러운 선동이나 과장된 선전에 혹할 게 아니라, 이처럼 진지하게, 현상 뒤에 숨겨진 진실에 주목하는, 성실하고 각성된 시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네요.


p205: 밑에서 네번째 줄, 살인마 "질 드 레"의 철자는 Gilles de Rais이며, 레츠 일대를 다스리는 남작이었으므로 Gilles de Retz라고도 씁니다. "질 드 레츠 성(城)"이 혹시 샤토 드 티포주(티포주 성)를 가리킨다고 착각하는 분이 있다면, 아니라고 가르쳐 드리고 싶네요. 여기는 그곳이 아니라, 샤토 드 포르닉(Château de Pornic)입니다. 이곳 역시 그 악마 같은(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주장도 물론 있습니다) 남작의 소유였죠. 질 드 레가 웅거했던(그리고 아동 살인, 학대 범죄를 저질렀다는) 본진 샤토 드 티포주는 내륙 방데 데파르트망(州)에 소재하므로, 이곳 포르닉 해변(베르느리-앙-레츠 소재)과는 꽤 거리가 멉니다. 제가 예전에 그곳을 들렀을 때 차로 거의 40분을 달렸는데(동- 서 직선 거리로), 그곳이라면 ㅎㅎ 성채의 그림자가 그 먼 곳 해안까지 드리울(이 책에 묘사된 대로)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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