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레퀴엠 버티고 시리즈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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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만큼, 생전 자기 직분에 성실했던 이의 장례식. 애도하는 조문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동료들의 죄책감은 한결 덜어집니다. 운집하여 고인의 넋을 기리는 이들이 도열한 모습을 두고 어떤 이는 "보기 좋았다"고까지 말하네요. 물론 그 짧은 코멘트 속엔 무수히 많은 감회와 상념과 결의가 교차할 것입니다.

이 소설 속엔 장례식 장면이 두어 번 나옵니다. 하나는 연쇄 살인범의 소행인지, 아니면 암살자의 짓인지 모를, 여튼 무고한 희생자임에는 틀림없는 어느 이혼녀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죽은 여성은 이 소설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조 파이크의 전 여자친구이자, LA 시정 전체를 좌우하는 거물 사업가(틴에이저 시절 갱단 멤버였다가 또띠야 체인점으로 떼돈을 벌고 시의원 몇을 수중에 넣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린 시절 같은 갱단 소속이었던 민완 변호사를 친구로 둔, 라틴 아메리카 혈통의 미국 시민권자) 프랭크 가르시아의 딸이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매우 유능하고 정의감 넘치는 어떤 수사관의 죽음 때문이었는데 위 첫 문단의 서술은 사실 그녀의 안타까운 최후에 더 초점을 둔 것이었습니다.

소설은 안타까운 죽음 여럿, 수수께끼에 싸인 죽음 몇, 그리고 최후의 결전에서 죽을 줄 알았던 어떤 이의 기사회생(이분은 꼬마 시절부터 해서 진짜 죽을 고비를 여러 번도 맞이하더군요), 개인적 증오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인 자의 죽을 뻔한 소동 등 "죽음" 근방에서 맴도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인간쓰레기이건 정신이상자건 거짓말쟁이이건 관심 중독자건 모두에게는 그 나름의 레퀴엠이 필요할 것입니다. 로렌스 블록의 장편 <800만 가지 죽는 법>이 대서양에 면한 뉴욕을 배경으로 삼은, 스릴러의 외관을 쓴 대서사시였다면 이 작품은 그 정반대방향 태평양에 면한 (제목 그대로) LA를 무대로 한 살육과 증오와 설육과 사랑을 테마로 삼은 폭풍 같은 에픽입니다.

이 소설은 기묘한 방향으로 엇나간 몇 편의 사랑을 숨겨 놓듯 깔아 놓은 작가의 선택 때문에 읽고 난 감상이 더 아련해지는 듯합니다. 우선 피도 눈물도 없는 목석 같은 사내이며, 언제 어디서 연쇄살인마로 돌변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조 파이크는, 이런 사람이 과연 어느 여성에게 연정을 품을 수 있을지(혹은, 어떤 여자가 저런 사내를 사랑할 수 있을지) 누가 봐도 고개가 갸웃해질 겁니다. 그런데 심성이 진국이고 약자를 돌볼 줄 알며 제 신상에 위해가 갈망정 인간된 도의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진짜 남자"는, 정말 괜찮은 여성들이 먼저 알아보나 봅니다. 그 증거로 카렌 가르시아 같은, 진짜 심성도 외모도 멋진 여성이 그를 선택했습니다. 최악의 환경에서 성장했을망정 자신의 인격을 보석 같이 가꿀 줄 안 파이크 역시, 카렌 같은 멋진 여성에게 마음을 안 줄 리 없고 세상사 쓴맛 단맛 다 본 대 사업가 프랭크 역시 "이 친구 괜찮네" 하며 자기 딸을 주려 합니다. 딸과 잘 안 된 후에도 조 파이크를 곁에 두며 "친구"로 연을 이어가려는 게 조금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진짜 안타까운 건, 조와 카렌 두 사람이 서로 순도 높은 사랑을 하며, 조의 선배인 (역시 조처럼 정의감에 불타고 진실된 성격이지만 안타깝게도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워즈니악 역시 그 부인 폴렛과 금슬이 좋지만, 못된 운명의 장난은 조와 폴렛 두 사람을 서로 엮어 버립니다. 어쩌겠습니까. 조는 폴렛을 보는 순간 (그 차디찬 강철 같은 심성의 사내가) 태어난 이래 처음 겪는 감정의 격동을 체험했고, 폴렛 역시 주변의 지구가 정지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소설 후반부에 다 드러나지만, "플라토닉 러브"란 이들의 관계를 두고 이르는 말이라 할 만큼, 조 파이크는 "모텔에서의 그 사고" 이후 철저한 거리를 폴렛으로부터 유지해 왔습니다. "십 년도 지났는데, 그새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아요." 이 한 마디 속에 천 가닥의 사연과 번뇌와 위대한 절제가 들어 있습니다. 조 파이크란 인간 병기의 개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절제"입니다. 마지막의 "그놈"도 그의 절제를 깨뜨리려 이 모든 추악한 살인극을 벌였고, "그놈"보다 더 추하고 한심한, 비열한 낙오자 역시 그의 평정심을 깨뜨리기 위해 자해에 가까운 미친 소동을 벌입니다.

소설은 물론, 거의 십 년 넘게 이어진 수수께끼의 연쇄 살인극이 과연 누구의 손에 의해 저질러졌는지, 범인이 "암살자"인지 "연쇄살인마"인지 가려내는 본격 미스테리 장르물입니다(작중 화자의 분류에 따르면 "암살자"는 일관된 계획과 특정인에 대한 구체적 살의를 갖고 사람들을 죽여나가는 자이며, "연쇄살인마"는 무작위로 희생자를 고르는 유형이라고 하네요). 일단 독자는 범인이 "누구"인지보다, 무슨 동기로 이런 짓을 저지르는지 범인의 유형(위 분류에 따른)을 주인공들과 함께 알아내는 재미에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만, 앞서 적은 대로, 이 소설은 (외견상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등장인물들 사이의 끈끈한 우정, 위대한 사랑, 극악무도한 적의와 복수심 등이 놀랍도록 생기 넘치게, 때로는 오싹하면서도 감동적이기까지 한 필치에 실려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게 놀랍습니다. 처음에는 엄청 하드보일드 풍으로 달리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예상 외로 감정선을 묵직히, 섬세히 건드리는 진행이더군요.

조 파이크, 악마 같은 냉혹함과 (그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듯한) 거의 신적인 정의감의 소유자인 그를 주인공으로 봐야겠지만, 그와 동업 관계(개인 탐정업)인 엘비스 콜 역시 이야기를 떠받드는 양축의 하나인 매혹적인 남성입니다. 성장 배경은 잘 알 수 없지만, 이름값 하느라고 여자들이 엄청 따르나 봅니다. 결국 준 주인공 레벨로 올라서던 변호사 겸 방송인인 루시, LAPD의 여걸 돌런, 어느 사장님 여비서였던 홀리("저기, 여친 업그레이드할 생각 있으면 꼭 연락해요!"라던 멘트가 안 잊혀질 듯합니다. 다만 이걸 실제 써먹기란 뭐), 베트남 음식점 사장님 딸까지 해서 진정 여복을 타고난 사람인데, 완력이나 두뇌 회전, 생존 능력 같은 건 파이크에 현저히 못 미치지만 역시 변치 않는 의리와 균형 잡힌 윤리의식 등이, 이 장편 속에서 그를 파이크 못지 않게 신뢰의 무게중심에 배치하는 듯합니다.

범인은 글쎄 뜻밖의 사람이라 볼 수도 있고, 의외의 반칙성 출현으로 여길 수도 있는데 과연 동기가 충분히 설명되었는지는 좀 의문으로 남습니다. 매우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긴 하나 그리 경제적으로 배치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칼날 같은 구성의 묘미에 지적으로 압도되기보다는, 끈적하고 깊이 있는 인간 영혼, 정신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 혹은 비관과 희망이 교차하는 그윽하면서도 강렬한 문학적 풍미에 더 강점을 가진 장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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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경영 4.0 - 4차 산업혁명 시대, 데이터 경영 전쟁이 시작됐다
방병권 지음 / 라온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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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말로만 무성할 뿐 아무도 분명한 아젠다나 실천적 과제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들도 일선에서 선명한 비전을 갖고 있지는 못한 듯합니다. 실정이 이런 판에 일반 시민이나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장래를 놓고, "4차 산업 혁명"을 키워드 삼아 어떤 건설적 투영을 해 내기란 거의 가망이 없다고나 해야겠죠. 그 실체가 파악되지 않은 채 말만 무성하니 사람들이 더 버거워하고 심지어 두려워하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보다는 훨씬 부담 없는 이슈이겠을 "빅데이터"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5, 6년 전부터 많은 전문가나 저술가들이 지적해 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미 키워드가 대중화한지 한참 지난 이 문제를 놓고서도, 일선의 경영자들이 자신의 업무에 거의 활용할 줄을 모른다는 겁니다. 심지어 빅데이터의 개념부터가 안 잡힌 분들도 많습니다. 막연히 "통계를 잘 활용하라는 소리지"라든가(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빅데이터 어디 가서 얼마 주면 구할 수 있나?"라고 되묻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사고 방식이란, 세상을 통째 바꿔 놓을 이 도도한 흐름에 대해 그저 "기존의 데이터가 덩치가 커진 것" 정도로밖에 인식 못 하는 데 머무는 거죠.

이 책에서 일단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고 들어가는 저자님의 진단, 시각이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하고도 한두 달 전입니다만)에 세계, 적어도 동아시아 3국을 충격 속에 몰아넣었던, 인공지능(소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을 화제로 삼아, 대중들은 인간이 드디어 기계의 "지능"에 패배한 대사건이라며 입방아를 찧었죠. 헌데 저자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고 하시네요. "자동차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그와 100m 달리기 경주를 벌여 진 인간을 보고 우리는 집단 패배감, 좌절감을 느껴야 하겠는가?" 오히려 또하나의 강력한 도구를 발견한 데서 무한한 희망과 가능성을 엿보았다고 평가해야 온당하다고 저자는 말씀합니다. 이 관점이 책 본문 전체를 관통하며, 또한 우리가 미래에 대한 구체적 비전을 갖추는 데 이 책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잘 요약합니다.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 인공지능이니 4차 산업 혁명이니 하는, 아직은 그 실체가 분명하다거나 논자에 따라 뜻이 구구하게 갈리는 용어, 화두를 자주 쓰지 않습니다. 책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듯, (어쩌면 오래 전에 한물 간 듯 잘못된 느낌을 갖기도 하는) "빅데이터" 하나로 모든 설명을 시도하는 내용입니다. 인공지능을 운위하는 시대에 왜 옹색하게 빅데이터인가? 저자는 정반대로, 심지어 저 알파고- 이세돌 대국이 불러온 파장마저도 "종래의 방식에 대한 빅데이터 활용의 승리"라고까지 "치환"해서 설명합니다. 하긴 더 간명하고 상식에 부합하는 설명이 가능하다면, 구태여 번거로운 개념을 동원하거나 논증 과정이 불분명한 논의를 끌어올 필요가 없긴 합니다. "인공지능의 승리"라고 설령 인정해도, 그 실체와 핵심은 결국 "인간이 이용하지 못했던 방대한 데이터의 분석에 기인한 승리"라고 바꿔 말해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 "지능" 자체가 어떤 구조, 속성인지 모르는 형편에, 더 이해하기 쉽고 내용도 분명히 규명된 "빅데이터의 위력"으로 초점을 잡으면, 더 유익한 결과가 나올 것 같기도 합니다. 현장에서 적용해 보기도 더 쉽고 말입니다.

(물론 인공지능이 정말 성공, 실용 단계에 확실히 진입한다면 그건 빅데이터를 훨씬 뛰어넘는, 넥스트 레벨의 성취임에 틀림 없습니다. 자동차가 "엔진과 강철과 휘발유와 플라스틱과 쿠션의 합"이 아닌 거나 마찬가지로요. 하지만 그건 업계의 성취가 일정 수준을 확실히 넘어선 후에 의미 부여를 해도 충분합니다)



저자께서는, 여전히 빅데이터라고만 해도 뭔가 어렵게 다가올, 현장의 그저 평범한 사장님들을 위해, 자신이 직접 겪은(본인이 CEO이시기도 하니까요) 사례를 중심으로 무엇이 "빅데이터 경영"인지 재미있게 설명해 줍니다. 이 책은 이처럼 저자 스스로가 겪은 사례를 바탕으로, 실무에서 쉽게 실천해 볼 수 있는 지침이 많이 담겼다는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예컨대 요즘 우리는 기업들이 "잉여 서비스"를 많이 줄여가고 있다는 점 실감하게 됩니다. 과거에 노트북 한 대를 사면 딸려오는 매뉴얼만 해도 웬만한 자계서 한 권 분량의 책이었습니다. 요즘은 가전제품을 사도 지류에 적힌 설명서를 구경하기 힘듭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서운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허투루 새어나가는 무익한(?) 비용을 줄이자는 절박한 현실인식에의 발로이니, 우리도 다들 기업에 몸담은 입장에서 이해해 줄 여지는 있습니다.

저자는 잔반 줄이기로 비용 절감(나아가 환경 보호 기여ㅋ)에 성공한 직접 사례를 들어 주십니다. 회사 카페테리아 같은 데서 저렴하게 공급하는 식단에, 먹지 않고 버리는 반찬이 연간 수십 톤에 달한다면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그 역시 의미없는 원가(직원 복리 후생) 출혈입니다. 우선 먹고 버린 잔반통을 다 뒤져(여기서 웃음이 나기도 했고 과연 CEO  체면에 이렇게까지 해야하는지 회의도 느껴졌지만 - 물론 직접 하신 건 아니겠지만요 - 비용 절감과 경영 효율화는 이런 자질구레한 문제의 위급한 인식에서 비롯한다는 점은 확실히 배웠습니다) 어떤 반찬을 가장 많이 남기는지 조사했다고 합니다. 답은 부침개인데, 이 음식은 갓 요리하고 바로 배식해야 하는, 온도가 생명인 품목이죠. 그런데 싸늘히 식어 있으니 입맛이 당길 리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현장(확장하면 결국 시장이 됩니다)의 진짜 니즈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게 경영 효율화, 나아가서는 혁신의 단초가 된다는 거죠.

거기에 그치면 작은, 소소한 개량에 불과합니다. 저자는 반찬의 다양한 품목을 코드화하여, 막연한 직관이나 불분명한 "문과 언어" 사용이 아닌, 잔반 줄이기 프로젝트에서 계량화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언어"로 이 문제를 접근했습니다. 순간 독자인 제 머리도 아찔해지던데 해당 대목 바로 그 다음에 숱한 애로사항이 진술되더군요. 전산시스템은 글자 하나만 틀려도 전혀 다른 품목으로 분류하니 이른바 정성적 분석이 원활히 안 이뤄지더라는 거죠(오죽하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땀이 나네요). 저자는 이 귀찮은 단계에서 포기하지 말고, 아예 당신 주변의 모든 환경을 "데이터"로 다 바꿔 놓으라고 합니다. 왜 혁신기업의 CEO들이 "데이터는 미래의 석유"라고 했겠는지 그 의미를 새기면서 말입니다(사실 이 한 줄이 책 전체의 요약, 주제 대변이라고 새겨도 됩니다).



인간의 뇌는 사물과 환경을 실체, 혹은 아날로그 포맷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결국은 의식, 무의식상으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모두 데이터로 변환한 후 일정 프레임에 끼워 넣고 정리할 뿐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사실 여기서 인간 사이의 소통 부재, 오해, 갈등이 비롯하기도 하죠. 나는 나를 이러이러한 존재로 스스로 자리매김하는데 상대는 상대 나름대로 그의 시각에서 나를 판단(데이터화)하고, 객관적 실체(논란이 있겠습니다만)는 또 전혀 별개 지점에 있고... 여튼 문제를 선명히 인식하고 실천을 쉽게 이루려면, 아날로그적 감상이나 밑도끝도없는 이미지에 매달릴 게 아니라, 각종 장애와 이슈와 목표를 모조리 데이터로 바꾼 후 판단하고 고민하고 결정하라는 겁니다. 진짜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되더군요.

재미있는 사례가 많이 소개되고, 또 여러 혁신가들의 명언이 곳곳에 소개되어 결론 정리에 유익했습니다. 시장 조사를 통한 체계적 예측 끝에, 독신자 가구가 증가하는 대세에 호응하고자 작은 벽걸이형 세탁기를 야심차게 출시한 회사가 있었습니다. 벽걸이까지는 모르겠는데 소형 세탁기라면 대략 십 년 전에 여러 작은 기업에서 생산, 판촉을 벌이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큰 실패로 끝나고 만 게, 1) 원룸 거주자나 소형 아파트 입주민 중엔 이미 빌트인 형태로 중형 세탁기를 제공받은 경우가 많으며, 2) 이런 사람들은 대개 빨래를 그때그때 하지 않고 일주일치를 몰아서 하는 습관이 있더라는 거죠. 이처럼 데이터의 해석은 그저 큰 줄기에만 주목하거나 현장의 구체적 상황을 무시하는 게 되어서는 안 됨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또하나 재미있는 게, 결국 빅데이터의 성공적 활용은 처음에 질문을 바르게 확정해야 가능하다는 겁니다. 세탁력이 우수한 세제를 출시하려던 회사는 데이터의 분석 후, 소비자들이 세탁 완료 후 빨래를 꺼내어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이 "냄새를 맡는 것"이란 점에 착안하여, 전략 자체를 수정했습니다. 성공의 관건은 "얼마나 깨끗하게 빨리느냐"가 아니라, "소비자들에게 얼마나 깨끗하게 빨렸다는 느낌을 확실히 주느냐"에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2차 대전 당시 미 공군에서는 출격하는 폭격기가 적의 대공포에 희생되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 비행기 곳곳에 추가 장갑을 설치하려 했는데 자원이 무제한이면 문제가 없겠으나 한정된 자원, 물자를 놓고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분하느냐가 난점이었겠습니다. 귀환한 전투기를 보니 특정 부위에 집중적으로 탄환을 맞은 흔적이 있어, 전문가들은 여기에만 장갑을 입히면 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최고 책임자는 정반대로, 그곳만 빼고 다른 데다 장갑을 장착하라고 했다는군요. 그 이유란,

"그나마 이곳을 맞은 폭격기는 타격이 크지 않아 귀환할 수 있어서 우리가 지금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허나, 다른 곳을 맞은 폭격기는 적진에서 다 격추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아예 확인도 못 하는 것이다."

같은 데이터를 놓고도 통찰력 있는 리더는 이처럼 정확하고 본질을 해결하는 해법을 내어 놓습니다.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든, 인간의 창의와 상상력은 결코 기계의 효율에 압사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으로서 그 위에 군림하며 더 많은 효용과 복리를 창출합니다. 그 기반은 현재도 무한히, 한계비용 0에 가깝게 생산되는 데이터, 빅 데이터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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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보기가 역겹다 - 그러기에 아직 늦지 않았어, 마야 로드 에세이
마야 (Maya) 지음 / 뮤토뮤지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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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담은 인물만큼이나 책이 예쁜, 뭐 그런 책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가수 마야 씨는 지금부터 13년 전 새로 취임한 어느 대통령이 첫번째 맞이한 광복절 기념식에서 초청가수로 나와 열창하여 더 많은 국민들에게 알려졌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녀는 그 몇 년 전부터 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진달래꽃"이라든가, "쿨하게" 같은 드라마 주제곡이 인기를 끌어 유명해졌고, 대학 축제 등 라이브 무대에 오르면서 젊은 층으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이미 얻어낸 가수였습니다. 이런 그녀가 정부 공식 행사에까지 초청된 이유는, 그녀의 고향이 아마도 당시 대통령의 근거지에 멀지 않았던 점도 있었겠지만, 마치 예전 1960년대 미국의 조언 바예즈처럼 빼어난 가창력을 자랑하는 그녀의 스타일 속에 모종의 "저항 정신"이 밴 것을 이심전심으로 알아본 이유도 없지 않았으리라 짐작합니다.

이후에도 마야 씨는 SBS 일요일 아침 프로그램인 <도전 1000곡> 같은 데 단골로 출연해서,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인지도가 높습니다. 지금도 저희 어머니마저 마야 하면 누군지 바로 알아보실 정도입니다(그녀가 출연한 방송회분은 재방송도 자주 되더군요 신기하게). 이후 그녀는 방송 출연은 뜸했지만 이런저런 행사에서 자주 라이브 연주를 가졌고, 그녀의 진가는 현장에서 그 생동감 넘치는 무대매너라든가 숨도 안 차하며 미친 고음을 정확하게 뿜어내는 경이로운 솜씨를 체험, 목격해야 제대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분이 외모까지 빼어나니 참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다고밖에 못하겠네요.

여튼 그녀는 최근에 음반도 뜸하게 내고 무대에도 자주 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팬은 물론 일반 대중도, 그렇게 아까운 재능과 여건을 지닌 분이 지금 뭐하는지 궁금해할 정도죠. 못내 아쉬웠던 분은 이제 이 책으로 그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책의 제목 "나보기가 역겹다", 그 부제 "그러기에 아직 늦지 않았어"는 모두 그녀의 발표곡 가사 일부를 따온 것입니다(전자의 경우 소월 시의 한 구절이기도 하죠). 저는 제목의 문구가, 단호하게 "종결 어미 -다"를 취한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왠지 지나가듯 명곡의 한 소절을 인용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쿨하게 툭 내던지듯 "정말 내가 봐도 역겹구나" 같은 방황과 자기 회의, 총체적 회고를 표현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역겨워" 혹은 "역겨워서" 등으로 말꼬리를 흐렸다면 모르겠는데, "-다"는 우리말에서 (누구의 입에서 나왔건, 맥락이 무엇이건) 단호한 언술일 뿐이며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물며 발화자가 마야 씨라면요.

책을 받아든 팬들은 일단 그녀의 "책"이기에 안 펼쳐들 수 없겠지만, 페이지를 넘기기 전 뭔가 걱정부터 됩니다.

"이렇게 예쁜 얼굴이 대체 어디가 역겹다는 건가요? 아무리 자신의 얼굴에 대고 하는 말이지만요."

심미적 평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뭔가 중대한 정신적 고비를 맞이한 건 아닌지, 그래서 앞으로 그녀를 무대에서 못 볼 수도 있다는 폭탄 선언이나 담긴 건 아닌지, 예쁘고 반가운 책을 받아들고서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과연 책을 열어 넘겨 봐야할지.

책은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할까. 마야의 담담한 자기 표백이 반, 그녀가 직접 찍은 사진이 반. 여튼 편집도 곰살맞게 일일이 자신이 정규 앨범 꾸미듯 손수 했을 것 같은 정성어린 외관입니다. 텍스트 부분만 보면 큰 줄기는 여행기입니다. 여행을 하며 자신이 만난 풍광과 사람들과 자신을 사진에 담았고, 여행이 으레 그렇듯 참다운 자신과 다시 만나며,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어언 마흔이시라는군요. 누가 믿겠습니까)을 담담히 들려 주는 내용입니다.

들려 주시는 사연은 물론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일 건 아니고, 산문시의 주인공이 모호한 구름 속에 화자로서 반은 환상, 반은 현실에 몸 담근 채 한 올 한 올 풀어내는 심상과 대화하라는 것이겠습니다만, 어떤 건 "이분이 실제로 이런 생을 사셨던 건가" 싶어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일단 그녀는 예상과 달리(?) 지방 출신이었고, 타고난 가인으로 예술가로 혜성처럼 데뷔한 게 아니라 연습생 시절을 오래 거쳤다고 하는군요. 훈련을 거쳐 데뷔한 분들도 물론 실력이 빼어나지만, 마야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놀라운 생동감과 카리스마를 보면, "배우지 않고 타고난 대로 그냥 통하는 사람"이 뭔지 바로 깨달음이 올 정도죠. 그런 줄 알았던 그녀가 그런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니, 다른 사람들은 그럼 어떻게 데뷔가 가능했다는 건지 아찔해지기만 합니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바를 냉혹한 진실은 인생에서 무참히 배반하기도 합니다. 안정되고 튼튼한 줄 알았던 길은 어느 순간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함정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어느 순간 기로에 섭니다. 자신의 지난 생, 화려함과 불안과 실망과 환희가 교차하는(이런 분은 그저 꽃길만 걸어왔을 것 같은데) 그 모든 모멘텀을 여행과 함께 회고하는 마야 "작가"는, 남들 눈에 더 띄고 덜 띄고의 차이만 있을 뿐 유한한 생을 사는 모든 영혼이 통과하는 희로애락의 지점 그 행로는 거의 같음을 우리 독자들에게 깨우칩니다.

그녀를 무대에서 더 자주 만났으면 좋겠지만, 이제 그녀는 이런 예쁜 책을 내는 작가라든가, 공연 기획자 같은 올라운드 크리에이터로 변신, 제2의 인생을 꾸려 나갈 생각 같습니다. 우리는 보다 성숙한 그녀가 더 다양한 컨텐츠로 우리와 소통해 준다기에 서운해할 이유가 없겠고요. 다시 이 책의 부제를 보죠.

그러기에, 아직 늦지 않았어.

"그러기에"의 내용은 사람마다 살아온 과정이 다 다르겠죠. 하지만 열정과 사랑을 잃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 "아직 늦지 않았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격려이자 치유입니다. 작가, 크리에이터로 우리의 인생을 영원히 곁에서 응원해 주겠다는 "저자 김영숙씨"의, 다소 개구쟁이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도사님 같은 모습을 보며, 우리 독자들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습니다.

"그럼요, 늦긴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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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는 베레니스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탈리 아줄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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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전에 대한 오마주랄까 현대판 재해석이 요즘 자주 나와서, 현대에는 이미 문학이 죽었거나 예전의 황금기보다 훨씬 못하다며 실망하는 분들의 눈을 크게 띄우는 실정입니다. 예전 학교 다닐 때 "라신, 몰리에르, 코르네유"라고 하면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사조를 이끈 3대가로 배우곤 했었죠("~곤 했었죠"라고 하면 프랑스어에서 반과거 시제입니다ㅎ). 마치 그보다 수천년 전 그리스에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3대가가 있었듯이 말입니다.

비극과 희극이라는 전문(?) 분야의 차이가 있을망정 어쩌면 프랑스의 저 문호들도 시대와 공간을 건너뛰어 아득한 선배들에 대한 경의와 헌정의 마음가짐으로 그들의 재능을 더욱 갈고닦았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책 저자인 나탈리 아줄레도 앞으로 그만큼 대성하실 작가가 될 지도 모르고요. 참고로 제가 몇 달 전에 읽은 <뫼르소, 살인 사건>의 저자 카멜 다우드도 북아프리카 출신으로서 알베르 카뮈의 대작에 대한 멋진 화답작을 발표해서 유명해졌는데, 이분 역시 (프랑스령 바르바리아 출신은 아니지만) 이집트 태생으로 프랑스어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탐구심으로 작가가 되었다는 점에서 닮아 있습니다.

티투스는 다른 누가 아닌, 우리가 고대사에서 예루살렘을 파괴한 로마 황제로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군사 원정을 떠나기 오래 전, 아직 비교적 평온한 위성 국가로 남아 있던 유대 지방의 왕녀 베레니케(베레니스)를 사랑해서 한때 결혼을 시도했었음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다만 백성들의 반대가 심하여 결국 혼인을 단념했는데, 이걸 두고 이 책에서는 "그의 합법적인 아내이자 자식들의 어머니인 로마를 떠나지 않기 위해..."라고 표현합니다. "나를 다시 받아 주오." 로마가 여기서 여성으로 의인화된 건 유럽 문학의 오랜 전통 그 일환이죠.

이런 근사한 표현들은 장 라신의 원전 <베레니스>에도 나옵니다. 라신은 셰익스피어보다 조금 후대에 활동했는데, 아무래도 당시 유럽을 휩쓸던 "고대의 재조명" 트렌드에 합류하여 이처럼 소재를 로마 시대에서 취했으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보다 장중하고 인간 보편 정신의 탐구, 회복을 지향했다면 라신의 그것은 이처럼 섬세하고 달달한 사랑, 감정에의 천착이 지배적이라 하겠습니다. 이 책에도 "이폴리트를 사랑한 페드라" 이야기가 잠시 언급되는데 역시 그의 희곡 <페드라>를 염두에 두었겠죠.

이 작품의 곳곳을 관통하는 심상은 "불"입니다. 코르넬리우스 얀센(신학자이며, 이후 프랑스 낭만주의 장편 소설에 배경으로 곧잘 나오는 "장세니스트(얀센주의자)"의 시조격입니다). 이 사람의 공모자(협력자, 동반자가 맞겠지만)인 생시랑의 말이 인용되는데, "...아담은... 다이아몬드였으나... 원죄 이후에는 석탄이 되고 말았다...."에서 금강석의 탄소분자 배열 구조를 바꾼 건 세월과 압력 외에도 "불"이 개재하는 게 자연의 이치이겠지요. 얀센주의자 중 한 명으로 알려진 파스칼도 이 소설 중 잠시 인용되는데, 장이 학교에서 "후작"과 즐거운 유희 끝에 그 흥분감으로 밤에 잠을 못 이루는(이상하게도 그 나이 때에는 다 이렇지요. 저도 이 대목을 읽으면서 그 비슷한 기억이 새로워졌습니다) 대목에서 "... 파스칼 역시 갈랑트리에 빠졌다..."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밤에 잠을 못 이루는 건, 낮에 피운 불잉걸이 마음 속에서 채 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이 들어서 그런 체험이 뜸해지고 무덤덤해진다면 그게 바로 늙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지금 책 속에서 우리는 한창 팔팔한 나이때의 장과 만나고 있습니다.

이국의 영웅, 군주와 비련의 사랑에 빠지다 버림 받는 아득한 원형은 또 저 북아프리카의 여왕 디도(영어로는 "다이도"라 읽고, 1990년대 후반에 이 이름을 한 미국 가수가 낸 히트곡이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죠)가 있습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를 인용하며(당연히 원문은 라틴어) 장은 그 정확한 번역, 이해에 골몰합니다.

Caeco carpitur igni

문장은 짧아도 이게 엄청 어렵습니다. 우선 책 중에서 장은 형용사 caeco를, "숨겨진"으로 번역할 것인가, 아니면 "눈먼"으로 옮길 것인가를 놓고 고민합니다. 한 단어에 어떻게 이런 이질적인 뜻이 함께 들어있나 의아할 수 있는데, 만약 "주체"가 눈이 멀었으면 그건 "객체" 입장에서는 "숨겨진" 것입니다. 반대로, "객체" 역시 무정물이라면, 생각과 감정이 없으므로 (인간이 그걸 보기로는) 역시 눈이 먼 것이죠. 장은 지금 그녀(디도 여왕)가 눈이 멀었는지, 아니면 그녀를 집어삼킬 불이 눈먼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는 겁니다. 저 라틴어 문장은 주어가 생략되어 있는데, caeco igni가 (영어로 치면) by the blind fire입니다. carpitur는 한 단어여도 수동태꼴 동사인데, 영어로 옮기면 is seized입니다. carpi- 어근은 "오늘 하루를 놓치지 말라"는 경구 "카르페 디엠"이라고 할 때 그 "카르페"와 완전히 같은 겁니다.

장은 셰익스피어처럼 언어의 조율에 민감하고 까다롭습니다. 잠시 아르튀르 랭보도 언급이 되지만, 여기서 캐릭터 장은 실존하거나 픽션 속에서 등장한 모든 천재들의 개성을 다 조금씩 합친 듯합니다. 혹은 나이가 어려서인지 아직 서투른 모습도 보이는데, 아몽과의 관계에선 "데미안을 대하는 싱클레어"가 생각나기도 하고 말이죠.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모든 명사에 관사를 붙여야 해." 마치 우리가 영어 시간에 "apple이란 없다. the apple이나 an apple이 있을뿐"이라고 배운 것과 같습니다. 이런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느냐면, 라틴어는 개체(특정/불특정)를 가리키건 보편을 지시하건 관사 일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 오랜 고전어인 헬라어도 까다롭게 변화하는 관사류를 달고 있는 언어인데도 말이죠.

당신의 <베레니스>에 나오는 인물들이, 내 눈에는 한낱 잿더미로 보였어요.

생생한 감각에 대고 칼을 가는 장에게 어느 여성이 다가와 하는 말입니다(p199), 이런 말에 장은 무덤덤하니 동의합니다. 여성의 진의가 무엇이었건 어떤 의미에서는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아담 역시 하와에게 그 나름 신의의 표시로 금기에의 도전에 동참했다 그꼴이 되었고, 아이네이아스를 떠나보내는 디도 여왕은 자신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 태우고는 순정을 증명합니다. 모든 사랑은 불장난이며, 사랑이 징벌처럼 휩쓸고 간 마음에는 새하얀 재만 남습니다. 과연 티투스가 베레니케 왕녀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 그녀를 버린 건지, 아니면 그 유명한 시쳇말대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 건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죠. 다만 베레니케(베레니스)는 미련 없이 쿨하게 티투스를 떠남으로 해서, 사랑하는 티투스의 자존과 위신을 완전하게 지켜 주었습니다. 속으로만 삭이고 상대의 발이 내 위를 사뿐히 즈려밟게 가도록 전송하는 사랑이란 역시 아무에게서나 빚어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들불이 어디로 번질지 알 수 없듯, 사랑의 갈 길도 이처럼이나 종잡을 수 없으면서 동시에 다양한 방식으로 아름답고 숭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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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너를 잃었는가 미드나잇 스릴러
제니 블랙허스트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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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람은 그 무엇에 대해 당위적 확신을 지닌 후에는, 그 실재의 가능성조차 부인해 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극악무도한 악(惡)이 비난 받아 마땅해다 해도, 그 찌그러진 채 당당하며 기세등등한 행적과 살덩이가 남긴 작태는 세상 곳곳에서 역력히 발견되는 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은 그게 아무리 도덕적 당위를 바탕에 깔아도 우선 우리 자신의 생존, 혹은 정의의 구현을 위해서 하등 이로울 바가 없습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 자신의 생존을 위한 노력과 진실의 규명에 다가서려는 몸부림이 그 방향이 같다면, 당사자는 Sein과 Sollen 사이에서 갈등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행운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혹시 미스테리 스릴러 장르 소설인지 모르고 시작한 분이라면, 세상에, 갓난아기인 자기 아들(이름은 딜런이라고 하네요)을 실수로 죽인 엄마라니, 앞으로 남은 생을 죄책감과 자기 혐오 때문에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아찔한 느낌이 전신을 휩쌀 겁니다. 그런 동정심 가득한 독자라도, 혹 같은 아파트 단지에 "이름과 신분을 통째 바꾼 바로 그 여인"이 이사라도 온다면, 과연 마음으로 그녀를 환영할 수 있겠습니까? 환영은 고사하고, 이웃들끼리 작당하여 무슨 핑계와 소동을 꾸며서건 내 사는 공간에 그런 범죄자를 못 들여 놓게 하러 골몰하는 게 보통이겠습니다. "자기 자식에게 그런 짓을 한 엄마가, 남의 자식들에게는 뭔 흉악한 시도를 못 하겠어?" 이게 정당치 못한 반응인 줄 잘 알면서, 먼발치에서 보는 우리들이라 해도 이런 (가상의) 집단이기주의에 대고 또 마냥 비난을 못 합니다. "나라도 별 수 없었을 듯." 그녀의 집에서는 가죽을 벗긴 고양이(그것도 이름이 붙고 정이 생겼던) 시신이 나오는가 하면 집안이 온통 페인트칠로 난장판이 된 사고가 잇달아 터집니다. 누구나 그 인근 주민들이 벌이는 테러, 간접 린치라고 짐작하며 경찰 측에서도 대응이 미온적입니다("누가 이런 동네로 이사 오라고 했어요?"). 그러나....

여튼, 책을 절반쯤 읽다보면, 사연의 또다른 트랙(시간과 퍼스펙티브와 공간이 다릅니다)에서 웬 이상한 녀석이 펼치는 불량한 작태를 보고(독자만의 특권), 아 이거 혹시 진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 아닐까, 어지간히 둔한 독자 아니면 다 눈치 챌 겁니다. 가뜩이나 수전 웹스터(어린 아들을 죽였다고 선고 받은 엄마. 1인칭 주인공이자 화자)의 운명에 불편함을 느끼던 차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뭔가 후련한 일말의 가능성은 곧 그게 아무리 희박하게 계산되어도 내가 가진 패의 전부를 걸고 싶게 만듭니다. 여전히 수전은 범죄자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말입니다. 법정에서 그렇게 많은 전문가들이 나와 "산후 우울증 때문에 순간적 착란 상태에 빠지는 엄마들이 많음"을 증언했고,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숱한 증거물들이 한 방향을 가리키기도 했다니 말입니다. 제목이 중의적이기도 한데, 영어에서 lose 뒤에 사람이 오면 보통은 죽어서 이별했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이하 생략)

"저렇게 듬직한 팔뚝에 내가 안겨 본 게 언제였던가?" 수전은 4년이라고 이내 자문자답합니다(그 세월 동안 수인 생활을 했다는 뜻이죠). 소설 7/8 정도가 지나간 후반부에 수전 스스로의 입으로 털어 놓는 대목이 있는데, ".. 마크와는 달리 나는 언제나 별 존재감 없는 인생이었다. 마크는 그저 잘생긴 게 아니라, 그 온몸에서 풍기는 자신감이 주변 모두를 끌어당기곤 하는 그런 존재였다. ... 마크는 왜 나를 골랐을까? 그가 여태 사귀어 온 모든 매력적인 여성과는 단 하나의 공통점도 없는 나를 말이다. 혹시 과거와는 정반대 좌표를 지닌 나를 선택하여 애써 잊어야 할 그 무엇이라도 있었을까?" 같은 말로 보아, 그리 외모에 큰 자신을 품지 못할 여건인 듯 보입니다. 대신 그녀는 어느 정도 출신 성분과 성장 환경에는 긍지를 갖는지(얼마나 객관적 근거를 갖췄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예컨대 "예전의 나와 내 이웃들(그 사건 이후로 완전히 그녀를 아웃시켰을)이라면 캐시 같은 애를 과연 가까이 두기나 했을까?" 같은 심중의 생각도 비춰지곤 하네요.

여튼 외모에 자신 없는 이런 여성이 유독 남자한테는 그간의 열등감을 보상 받기 위해 많은 걸 기대하나 모양입니다. 그래서 수전은 "전 남편" 마크에 대해 전혀 의심을 품지 않고, 합리적으로 의심해 볼 구석이 있다며 그렇게 충동하는 "새로운 친구, 클라크 켄트(기자 직업인데다 잘생겼고, 외로운 자신에게 슈퍼맨처럼 의지가 되기도 하기에)"인 닉에 대해서도 곧바로 의심 없이 친분을 쌓습니다. 캐시와 그가 은근 친해지는 기색을 보이자 바로 불 같은 질투(를 넘어 증오)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주인공 수전은 어리석고, 아름답지도 못하며, 그 하는 말에 큰 신뢰를 줄 수 있는 타입도 아닌 듯 보입니다(그래서 그런 누명을 써도 싸다는 뜻은 아니고요).

책을 읽으면서 음 범인은 이놈이군, 하고 결론을 다 맞혔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게 바로 착각이며 작가가 노린 함정에 빠진 겁니다. 다 밝혀져 가는 진상에 오직 수전만 까맣게 눈먼 채로 남은 듯 보였으나, 결국 엉뚱한 오해를 했던 건 우리 모두가 다 마찬가지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소설은 수전의 1인칭 시점에서 그녀의 온갖 시시콜콜한 변덕과 불안정한 감정과 불안과 의심과 절망과 간절한 기대 따위가 낱낱이 다 공개되는 점도 독특한데,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누구와 누구를 향해선 그 화사한 외모에 여성으로서 주눅이 들다가, 한참 뒤 누구를 찾아가서는 "이런 여자도 있기에 내가 마음이 놓인다(정확한 표현은 이게 아니지만 결국 그런 뜻입니다)" 같은 감정을 일일이 (마음 속에) 떠올리는 등 희한하게 외모에 집착하는 타입입니다. 심지어 어느 건물에서 누군가를 만나고선, 태어나서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본다며 아무 생각이 없어집니다. (이 문단은 전체가 은근 스포일러인지도 모르겠네요)

안정감과 신뢰를 결여한 인물이라고 해서, 부조리한 운명의 장난(운명도 아니고 그냥 못된 놈들)에 희생되어 마땅하다는 건 물론 아닙니다. 이 소설의 매력은, 왠지 신뢰가 안 가는 어느 여성의 입을 통해 진술되는 세계를 관찰하고, 독자로서(혹은 일종의 배심원으로서) 그에 마냥 휩쓸려 가지 않은 채 이성과 추론을 통해 진실에 접근해 가는 그런 재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구요." 아니,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근거 없는 집착과 현혹, 눈먼 사랑, 자기 기만, 터무니없는 요행심, 혹은 못난 에고의 투사, 투영이 있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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