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시간을 걷다 - 한 권으로 떠나는 인문예술여행
최경철 지음 / 웨일북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유럽처럼 우리와 정서, 문화, 취향, 살아온 지난 내력 등이 판이하게 다른 지역을 여행하려면, 물론 가벼운 마음으로 현지에 떨어진 후 자연스럽게 와 닿는 느낌대로만 즐기다 와도 본인만 뿌듯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래도 미리 공부랄까 마음 자세 같은 걸 다듬고 갔다 오면 아마 남는 게 더 많고 더 충실한 시간이 되는 게 보통입니다. 준비를 해야 주어진 시간도 더 알차지고, 행여 돌발 변수가 나타나도 유연히, 별 손해 없는 대응도 가능하기에, 요즘은 다들 각자 능력 범위에서 (따로 돈 들 것도 없는, 그저 공부니까) 뭔가 챙겨 보고 떠나는 게 보통이죠.

2) 반대로 현지에 다녀올 생각은 없지만 그냥 교양과 지식을 쌓고 싶어서 이런저런 책을 들춰 봐도, 해 본 사람은 알지만 책(혹은 인터넷이나 기타 시청각 매체)만으로 접하는 타지, 타향이란 정말 그 진정한 이해에 한계가 있습니다. 안 갔다와 보고 아무리 열심히 파 봐야, 나 자신에게나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기로나 정말 어느 선을 못 넘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타자, 타지에의 이해는, 책도 읽고(폭 넓은 간접 체험), 현지 답사(집중도 있는 직접 체험)가 동시에 이뤄져야 가능합니다.

3) 아무리 역사책을 파고들어도 이해가 안 되던 내용이, 해당 시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삼은 소설책 한 권 읽고 말끔히 납득되던 체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합니다. 물론 역사(팩트 사항)와 문학(픽션 속에 스며든 일정한 주관적 지향성)은 구별해야 하지만, 어떤 관점을 내 비전의 메인으로 삼을지는 좋은 기회(적절한 문학 작품)를 만나 더 강렬히 내 것으로 새기고 성숙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직간접 체험으로도 충족 안 되는 어떤 목마른 부분은 상상과 영감의 결정체인 문학으로 해갈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위 1) 2) 3)이 모두 한 권에 담긴, 정말 보기 드문 정성과 내공이 담긴 멋진 책입니다. 저는 지금껏 이런 포맷으로 쓰여진 책을 한 번도 못 읽어 봤는데요. 우리 같은 일반 대중 독자가 읽기 좋게 쉽고 친근한 말투로 쓰여 있지만, 우리의 소양을 쌓아 줄 가르침은 적잖이 깊은 수준까지 파고 드는 서술입니다.

보통 텍스트로만 이어지는 서술이라면 그게 아무리 정확성을 기하더라도 전달에 한계가 있는데, 이 책에는 좀 이해가 어렵겠다 싶은 대목에서 반드시 맞춤형 도판이 등장합니다. 4) 만약 건축이면 말 본문 서술을 돕는 범위에서, 다른 사항이 생략된 평면도, 측면도 등이 딱 옆에 제시됩니다. 5) 주제가 되는 건축물의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양식을 저자나 다른 정평 있는 견해를 통해서만 묘사하면, 아무리 빼어난 문필가의 솜씨라도 역시 한계가 있겠는데, 이 책은 구도가 잘 맞는, 찍는 사람의 의도가 선명히 구현된 사진으로 본문을 뒷받침합니다.

4)와 5)는 다른 책에서도, 이 책에서만큼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전혀 못 보던 시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은, 건물과 유적과 미술품에 담긴 본원적 의미를 캐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역사적 배경을 독자 앞에 제시하기 위해, 6) 맞춤형 지도를 수십 컷 본문에 삽입합니다. 제가 지도 마니아라서 지도책도 모으고 웹 여러 곳에 있는 멋진 그래픽도 혹 보일 때마다 PC에 저장해서 컬렉션을 나름 꾸미는데, 이 책에 나온 지도는 (모르긴 해도) 저자님의 직접 편집이라 제가 딴 데서 본 적도 없고, 텍스트와 긴밀히 연결된 정보를 담은 덕에 본문의 방주(傍註)처럼 기능합니다. 정보는 필요한 걸 적절히 집중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 단계에서 불필요한 사항을 과감히 생략하는 요령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이 책에 실린 지도들은 그런 점에서 너무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른 역사책을 읽으면서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백지도를 하나 펼쳐 놓고 책 텍스트의 설명에 맞추어 손으로 그려 (채워) 가면서 스스로의 이해를 돕기도 하는데요. 이 책을 읽으면서 평소에 머리 속에 그림이 잘 안 잡히던 사항까지 말끔히 이해시켜 주는 지도를 여러 컷 만나 너무도 반가웠습니다. 좋은 책은 이처럼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잘 전달할 뿐 아니라, 독자가 평소에 품던 다른 의문까지 풀어주기도 합니다. 이 모든 미덕이 7) 깨끗한 천연색 인쇄로 이뤄져 독자가 보기에 너무도 편합니다. 이런 책은 저자와 편집진의 노고를 감안해서라도 목욕 재계하고 최대한 맑은 정신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만큼요.

책 표지에 나와 있듯 유럽 중에서도 서유럽, 그 중에서도 독, 불, 영, 서(스페인), 이탈리아의 문명에 초점을 맞춥니다. 대체로 a) 건축물과 미술품 b) 고대(초기 희랍 문명과 헬레니즘, 로마 제국까지 두루)에서 중세에 이르는 시기의 정치사, 문명사 c) 소설 형식으로 풀어주는 민중의 생활사 등 세 가지 줄기가 번갈아 서술됩니다. 한 가지 주제를 아무리 재밌게 풀어도 장시간 집중하면 지루해질 수 있는데, 이 책은 a) b) c)를, 페이지 바탕색까지 달리 잡아가며 적정 분량씩 노출시키기에 독자의 시선을 내내 붙들어 둡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거나 다소 의문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책의 편집과 참신한 구성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무조건 저자의 치밀하고 꼼꼼한 설명에 동조하고까지 싶어졌습니다. 책 읽으면서 이런 느낌과 공감을 갖기도 드문 체험이었네요.

모두 여섯 개의 챕터인데, 첫 장은 로마네스크 양식입니다. 이처럼 일단 주된 모티프나 토픽은 건축물이나 미술품 등 현재 우리에게 남아 전해지는 유형적인(tangible) 대상입니다. 건축물과 유적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곁다리를 쳐나가듯 역사 이야기, 심지어 당대를 지배한 사조와 철학의 설명에까지 옮겨가는 식이죠. 앞서도 말했듯 이렇게 이야기를 끌어가도 이해를 돕는 보조 자료가 없으면 서투른 독자는 보조를 못 맞춰 가는데,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독자를 배려하는 품이 압권입니다. 수사(구교의 수도사), 석공, 그리고 제법 긴 분량(함께 모은다면)의 소설에서 중요 인물 중 하나인 클라우스가 등장하여, 건조하고 박제된 꼴이 아닌 피와 살을 갖고 살아 숨쉬는 "인간들"이 받아들이고 꾸려나간 역사, 인문, 미술, 조형 등의 의미가 무엇인지, 시간의 고금을 초월하여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어조와 감정을 불어넣으며 그럴싸한 한 편의 소설이 이어지는데, 이런 다차원의 접근을 통해 독자는 저자의 의도대로, 입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역사와 문화, 사상,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 서유럽인이라는 인간들"에 대한 이해를 넓혀 나갑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저 신학자에 그친 인물이 아니라, 당대 서유럽 문명권이 이해하던 모든 지식을 백과전서적으로 정리한, 중세 전반의 큐레이터적 지식인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를 다루며 종래 우리가 알던 평면적, 파편적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먼저 고딕 양식(성당 등)의 스테인드 글라스로 화제를 꺼내고, 이에 반영된 "빛"의 원리를 중세인이 어디까지 이해했는지를 설명하며, 그 지식 체계의 챔피언이라 할 성 토마스의 견해와 철학까지 논급하고, 이어 중세라는 시대의 성격을 함축적이면서도 풍성하게 정의합니다. 그러니 줄글 한 편을 읽으며 건축, 미술, 종교, 역사 모두에 독자가 접근, 공감, 이해하는 셈입니다. 모든 지식이란 분야별로 따로 놀아서는 죽은 지식이며, 참된 지혜란 가능한 많은 사항이 이처럼 유효한 하이퍼링크로 연결연결되어야 생성 가능하죠. 뿐 아니라 이렇게 영양가와 밀도 있는 공부를 해야, 여행 갈 마음도 부쩍 내키지 않겠습니까? 한 번 갔다 온 곳이라도 말입니다.

르네상스라는 전혀 새로운 시대의 조류가 문화계, 지식인을 중심으로 도도히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기독교(구교)의 몰락이 반드시 그와 수반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역사상의 모든 조류와 사상, 대세는 반드시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배타적으로 몰아내어야만 제 자리가 잡히는 건 아니죠. 그러나 가톨릭의 교세는 유럽 전체에서 전반적, 불가역적으로 퇴조하는 모양새였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 (이런 성격의 책에서 꼭 다룰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상세히 개인적 논증을 펴고 있습니다. 물론 특정 종파를 비하하자는 게 아니라, 앞선 두 챕터에서도 자상하게, 또 주제(건축과 미술)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설명이 나왔듯, 직전 시대의 성과와 미덕(아쉬운 대로라도)을 그대로 이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배려의 산물에 가깝습니다. 동시에, 이 책이 그저 건축 양식이나 명소, 미술품에 대한 단선적 설명이 아닌, 인문과 역사 전반을 조망하자는 보다 깊숙한 저술의도를 잘 실현하는 시도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바로크 시대로 넘어가며 처음 등장하는 내용이, 주인공들 중 하나인 프란치스코가 어느 과부의 화형식을 무기력하고 침통하게 지켜 보는 장면입니다. 언제나 시대의 전환이란 점이적(漸移的)이어서,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풍의 잔재와 인습이 미래의 앞길을 (미미하게, 혹은 지저분하게) 가로막기도 하는 법이죠. 책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처럼 연재 소설처럼 이어지는 내용이, 집중만 하면 꽤 재미가 나기 때문에 결코 놓치시기 말길 바랍니다. 이 소설이 또한 시대와 공간을 압축적인 이미지로 한번에 확 전달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바로크 시대 건축물 하면 알프스 이북만주로 떠올리기 쉬운 게 한국의 독자들인데, 이 책은 로마 인근을 두루 짚고 있어 선입견 때문에 소홀하기 쉬운 곳도 살피게 돕습니다. 그러니 아 다음엔 여길 한번 가 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정말 절로 듭니다.

서서히 대영제국의 시대가 열리며 등장인물도 워렌 같은, 그 시절의 전형을 일부나마 대변할 만한 캐릭터가 새로 등장합니다. 신고전주의가 등장하여 정연한 질서와 체제의 미덕을 변호하는 풍조가 생성되는가 하면 계급 혁명의 전조를 예고하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들이 지성계와 예술계에서 이미 두드러진 사조로 부상합니다. 이처럼 모순되어 보이는 거대한 두 흐름이 맞부딪히며 서유럽은 오히려 전례 없는 발전과 혁신의 동력을 마련하며, 건축과 미술에도 이런 인간 정신의 방향과 역동성이 반영되는 흔적이 뚜렷해지고, 저자는 예리한 눈길로 독자에게 일일이 이를 포착하여 주체적인 시선으로 소화해 볼 것을 권유합니다.

책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지금까지 진지한 소통을 이뤄 온 상대였던 그들의 과거가 어떻게 현재에 안착했는지,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대화와 소통의 의의는 무엇인지, 현대 미술과 건축, 그리고 이 분야 거장들의 자취와 업적을 통해 다시 정리를 시도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특히 좋았는데요. 과거 역사, 인문, 문화에 대한 회고는 여태 많은 저자들이 시도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입체적으로 돌아본 서유럽의 역사와 종적이 당시에는 어떤 비중과 색채였는지를 파노라마(그것도 3D)로 보여줬을 뿐이라, 이런 의의를 현재에까지 유기적으로 접목시켜(4차원이라고 해야겠네요)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기까지한다는 거죠. 책을 읽고 나서, 교양이 늘고 보는 시야가 넓어졌을 뿐 아니라, 아 밖의 넓은 세상이 이처럼 친근하고 현재적 의미로 다가올 수 있구나 하는 각성 때문에 문득 영감과 의욕까지 솟게 하는 게... 별 열 개가 아깝지 않은 멋진 체험이었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1 - 따뜻함이 필요한 날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1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지음, 류시화 옮김 / 푸른숲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게 벌써 20년이 지났던가 하는 생각이 새삼 들 만큼, 신선한 제목과 감동적인 내용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고전이죠. 고전이라는 게 별다른 책이 아니라, 독자가 그 책을 읽고 난 전후가 확 달라진, 그러면서도 그 느낌과 깨달음이 내면에서 옹골차게 익어갈 시간의 깊이가 제법 생긴 책이라면 다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로서는 조금 낯선, "닭고기"와 "수프"가 함께 어울린 말인 데다, 구체적인 메뉴와 "영혼"이 얼핏 우스운 듯 의미심장하게 배합된 어구가 의외로 감동적인 내용을 감싸는 제목이라 더 친근감을 주었던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일단 화제가 되는 도서는 주제 분야 불문하고 주변 모두가 읽어대던 분위기여서 제 친구나 지인 중 과연 이 책을 안 읽은 이가 있을까 싶은 추억의 아이템이기도 하고요.

아무리 첫 만남이 훈훈하고 다정한 책이었다 해도, 2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났다면 "깨끗한 좋은 인상이 계속 간직되라고 그저 책장 속에 묵혀 두는 게" 더 바람직한 선택일 수도 있었습니다. 초판, 원본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책을 내시는 분들도 이렇게 개정판까지 낼 때에는 독자의 그런 삼가는 마음, 주저하는 심정은 다 고려에 넣지 않았을까, 우리가 (새) 책을 펼쳐 읽을 때는 그 정도 믿음은 갖고 "서빙"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고, 이 작고 예쁜 책을 다 마친 후 그런 소박한 바람이 배신당하지는 않았다며 뭔가 꽉 차올라오는 듯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완 또 다른 벅찬 감정이 이렇게 생기기도 쉽지 않겠고요.

다들 기억하시는 것처럼 감동적이고 먹먹한 사연들을 잔뜩 만날 수 있는 그런 꾸림새를 가진 책이죠. 그때만 해도 이런 짤막하면서도 울림 깊은 사연이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던 시절인데, 잡지도 "리더스 다이제스트"처럼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포맷이 인기가 좋았고요(지금으로 치면 <좋은 생각>정도의). 헤밍웨이는 단 아홉 단어(영단어 기준)로도 속 깊은 사연이 전달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 유명한 예가 "개인 광고: 아기 용품 팝니다. 한 번도 안 신어 본 새 신발이에요."죠. 처음 읽었을 때는 무심하다 잠시 후에야 이야기 뒤에 숨은 맥락을 깨닫고 마음이 짠해지는 그런 강력한 힘, 글쓴이의 진정성만이 담고 전달해낼 수 있는 감동이라고 여깁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책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에피소드가, 마치 우공이산이란 동양의 고사에서처럼, 개인적으로 무의미한 노동을 할 뿐이라 본 어떤 노인에게 핀잔을 주는 무심한 나그네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일견 냉정하면서도 합리적인 어투로 변하지 않는 현실을 노인에게 상기시키는 그의 말은, 알고 보면 실용주의와 세상의 철칙을 빙자하여 모든 일에 무감각해지고 타성에 젖게 하며 주어진 여건에 체념적으로 순응케 만드는, 알고 보면 우리 자신 속에 스며든 나쁜 타자적 기제를 상징합니다. 이런 목소리의 지시를 따르고 있으면, 오히려 일상 속에서 무의미하게 진행되는 루틴에 거역하는 모든 작은 발버둥이 다 해롭고 무가치한 것으로 잘못 단죄되기 일쑤이겠습니다. 만약 그런 지시에 따른 행동과 몸가짐만 세상에 만연했다면 도대체 사회의 발전이나 사람 사이의 따끈한 연대가 어찌 가능했을까 하는 반발이 정당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뭉텅이로 던져지듯 주어진 존재 같은 건 없다. 그런 말을 하는 너 자신부터가 객관적 가치와 무관하게 너 자신을 감싸고 돌며 맹목적으로 생존에 집착하듯, 저 숱한 생명들도 너만큼이나 일일이 개별성과 자기애에 몸부림치는 존재들이다." 아무튼 이 에피소드는 언제 읽어도 마음 속에 뜨거운 울림을 남깁니다.

우리가 이 기이하고 애착 많은 생을 부여 받아, 잘 되든 못 되든 각양각생의 도전과 성취, 좌절과 행운 속에 부대껴가면서 분명 실감하는 건, 남에게 사랑을 받기보다 내가 불꽃 같은 열정으로 다른 무엇, 누구를 사랑할 때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거의 동의 안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반대로 누구에게 아낌 없이 사랑을 쏟아주는 데에 존재 이유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부여 받은 생명이 그래서 존귀하구나 하는 본원적 깨달음까지 안겨 줍니다. 또한, 세상에 태어나서 깨달음과 환희, 그리고 실천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선순환을 이루는 예가 이것 말고 또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런 느낌은 못 배우든 많이 배웠든, 마음이 악하든 선하든, 어리석은 집착과 고집에 갇혀 사람이 제 한계를 벗어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차별 없이 온기를 안겨 줄 어떤 영감인 듯도 싶네요.

소년 토미의 이야기는 처음 읽을 당시에도 우리들에게 뭔가 대리만족이라도 주는 듯 대견한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자신만만하고 열정과 매력으로 가득찬 소년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얘야, 난 많은 사업체를 갖고 있고, 나중에 널 고용할 수도 있어." "무슨 말씀이세요? 그때쯤이면 제가 자립해서는 아저씨를 고용할 건데요." 이런 짧은 대화에서도 우리는 미국 사회가 무엇에 의해 서열(그런 게 필요하다면)이 주어지며, 개인의 성취와 존경받는 정도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지를 눈치챌 수 있죠. 이때 이 미담의 배경으로 등장한 고르바초프는 어쨌든 현재까지 생존해 있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어느 개인이 겪는 모든 소통과 인연의 흔적은 결코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고, 드물게 주어진 작은 기회 앞에 머뭇거리지 말고 자긍심으로 첫 발을 대담하게 내딛어야 행운까지 그를 도와 줄 수 있다는 진리도 재확인이 가능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 무엇에 열정을 바칠 수 있는 이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저도 랭스턴 휴즈의 단편들을 지금 읽는 중입니다만, 이 에피소드에 나오는 소년은 파도타기에 미친 아이입니다. 엄마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자신이 소중히 돌보는 "과업"에 헌신하길 바라는 이 소년은, 그대상이 무엇이든 내 모든 걸 헌신하고 오롯이 투입할 수 있어야 내 존재의 충만함, 실감을 확인할 수 있는 우리 모두들과 닮아 있습니다. 이 책이 빼어난 점은 그저 감동적인 미담으로만 채워진 게 아닌, 뭔가 잊고 있었던, 그러면서도 나라는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던 그 뭉클하고 뜨거운 박동과 피의 전파를, 내 살과 내 영혼 속에서 다시 느낄 수 있게 돕는 동기 부여적 사연을 잔뜩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올 때만 해도 치킨 메뉴가 지금처럼 온갖 레시피가 다 개발된 형편은 아니었는데요, 갖가지 변종과 얄팍한 유행이 본연의 내 취향까지 잊게 만드는 요즘, 이 단순하면서도 살가운 사연의 모음은 순정판 고유의 담백함과 높은 영양가(?)로, 원기와 진정성 담긴 응원을 가뜩 불어 넣어 주는 친구처럼 반갑고 은사처럼 감사하게 독자의 등을 토닥여 주고 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멘사 사고력 퍼즐 프리미어 IQ 148을 위한 멘사 퍼즐
필립 카터.켄 러셀.존 브렘너 지음, 멘사코리아 감수 / 보누스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IQ 148을 위한 멘사 테스트 퍼즐" 프리미어 편이 새로 나왔네요. 대략 십 년 전쯤부터 이 시리즈 한국판이 출간되기 시작했고, 당시부터 꾸준히 인기를 모았기에 이처럼 새 책이 계속 우리 독자들 앞에 선보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읽었던 테드 창 작품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는 외계인을 처음 만나고서 패턴 분석을 통해 그들의 "언어"를 재구성하는 학자의 모습이 묘사되는데요. 이처럼 사람 지능의 수월성을 판단하려면, 어떤 일관된 기준이 무슨 패턴으로 현상 속에 나타나는지 그 규칙을 찾는 능력을 보는 게 우선입니다. 인간이 장구한 세월 동안 진화하면서 "아 이런 전조가 나타나면 어떤 재앙(혹은 그 반대로 행운)이 다가오더라"라든가, "자연을 인간의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미약하나마) 길들이는 데 이런 방법을 쓰면 편리하더라" 같은, 법칙과 패턴을 발견하는 능력이 최우선으로 평가되었을 겁니다.

이 책에는 언어 표현이 일절 생략된 채, 그림과 기호, 그리고 숫자(아라비아 숫자 표기는 만국 공통이므로)의 제시만으로, 그 속에 어떤 규칙이 숨어 있을지 찾아내는 퍼즐이 내용의 90% 이상을 차지합니다. "난 머리는 좋은데, 언어 소통의 모호함에만 빠지만 두뇌 기능이 작동을 못 하더라고." 뭐 이런 불만과 좌절에 젖은 분들은 말장난이 끼어들지 않은 순수 퍼즐의 풀이를 통해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런 풀이에 빠져드는 게 다 이런 동기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시리즈가 이처럼 오랜 인기를 누리는 것도, 순수 패턴 분석에만 열의와 재능을 발휘하는 재능 보유자가 그만큼 많아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문과 재능과 센스가 지독히 떨어진다고 그 반대쪽 적성이 저절로 살아나거나 (무슨 신이 공평하기라도 해서) 보상이 주어지는 건 전혀 아니고요. 대체로는 하나가 안 되면 다른 하나도 덩달아 안 되는 케이스가 압도적으로 많은 게 참혹한 현실이죠.

언어 표현 퀴즈도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서양 퍼즐 분야에서 아주 고전이라 할 만한 것 중 하나가, "아버지에 의해 급히 응급실로 실려온 환자에게 의사가 '이 아이는 내 아들이니 수술을 할 수 없어!라고 외치.."는 문제인데, 제가 개인적으로 주위에 물어 보면 이 문제를 틀린 이는 거의 없습니다. 듣고 바로 딱 맞힙니다. 이게 우리말에는 없는, 인도 유럽 어족만의 성(gender) 구분 현상 때문인데, 반대로 이 때문에 저들에게 공평한 문제가 우리들에게는 대체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는, 왜 그게 답이어야 하는지 도통 모를 난제로 바뀌기도 합니다. 과거 보누스 멘사 시리즈 중에는 아예 문장으로만 이뤄진 퍼즐로 책을 다 채운 권도 있었습니다. 이 새 권에는 이런 유형의 문제가 딱 하나만 나오므로, 종래 그런 문제에 경기를 일으키신 분들은 안심해도 되겠습니다. 그래서 공정한 IQ 테스트는 문화적 배경 인자가 끼어들지 않게 배려해서 출제한다고도 하죠.

사실 이 책에 실린 많은 문제들은 답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출제자들은 5개 정도의 제한된 선택지를 내놓고, "이 중에서" 고르게 하는 형식인데, 소위 "객관식" 출제의 암묵적인 규칙은 "그 중에서 가장 답에 가까운,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여" 문제를 풀라는 거죠. 난감하게도, 다른 대안을 선택해도 합당한 설명이 가능한 게 이 책에도 여러 퍼즐들이 보입니다. "내가 파악한 규칙대로라면 이것도 답이 돼!" 그런데 책에는 그 그림(혹은 숫자)이 없으니 이것만 답이라는 식으로 논쟁을 피해가야 하는데요. 이러면 고마운데 어떤 문제는 독자의 논리에 따른 정답(책에서는 오답)이 보기 중에 나와있기까지 하니... 하지만 그게 또 친구들끼리 함께 문제를 푸는 재미이기도 합니다.

요즘 tVN의 <문제적 남자> 때문에 이런 순수 패턴 분석 문제를 푸는 층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런 퍼즐의 매혹은, 특별한 훈련 없이도 (머리만 좋다면) 문제를 보고 바로 답을 구할 수 있게 하는 "개방성"에 있습니다. 육체적 스포츠인 복싱만 해도, 3, 4 개월 정도 몸만들기를 통해 시합에 대비를 하지 않고는, 천하에 없는 장사나 파이터도 상대에게 KO패를 하기 일쑤입니다. 실제로 매니 파키아오와 메이웨더 사이의 세기의 대결도, 어느 한쪽이 몸이 안 만들어졌다고, 이겨 봐야 의미가 없다고 대결이 연기되거나 무산된 게 여러 차례입니다. 상대가 준비 안 되었으니 이때를 기회 삼아 이겨 보겠다고 덤비는 게 아니라는 점이 재미있죠.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공부 안 한 채 수능이나 토익을 칠 수는 없습니다. 반면 이런 책은 어떤 훈련이나 예습이 필요 없죠. 딱 보고 풀리면 풀리는 거고, 안 풀리면 머리가 나쁜가 보다 하고 포기할 수 있지만, 그래도 구태여 도전해 보고 싶다면 연습을 하면 됩니다. 누구에게나 문제 풀이가 오픈되어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최고 매력이죠.

편집상 아쉬운 점은, 일단 정답만 확인할 수 있게 답만 실린 페이지를 따로 가르고, 그 페이지 뒤에 본격 해설을 실었으면 좋았겠다는 겁니다. 답만 확인하고 싶은데 뒤로 찾아가면서 다음 문제의 해설까지 다 읽어 버리는 게 문제입니다. 이걸 피하려면 종이에 문제번호와 답을 따로 적어 두든지 해야 하는데, 풀고 나서 바로 답을 확인하려는 독자는 어떻게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편집상 그리 어려운 점이 아니라고 생각되므로 출판사 쪽에서 고려해 주시면 좋겠네요.

내 아이가 영재가 아닐까 혹 궁금한 부모님들에겐, 요즘은 이런 책이 아니라도 지역 교육 당국이나 지자체에 영재 테스트를 실시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별 걱정이 없긴 하죠. 이 책 끝에는 "영재, 수재 등의 차이점"에 대해 간단히 설명되어 있는데, 일단 영재들은 따로 교육시키지 않으면 그 영재나 주변 친구들에게나 대단히 불행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겁니다. 영재는 학습 속도가 빠르므로, 나는 이미 이걸 이해하는데 쟤네들은 왜 저렇게 뒤쳐지지? 라며 지루해하고, 이 과정에서 본인의 성격 형성이나 주변과의 관계에서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겁니다. 한편,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영재나 수재가 별 차이 없어 보여도, 수재가 보통 아이들을 답답해하는 것만큼이나 영재는 수재를 답답해하며, 천재가 영재를 한심해하는 건 그보다 정도의 차가 더 크다는 점을 지적하는군요! ㅎㅎ 세상이 본래 그렇지요. 참고로 148이면 그저 보통 말하는 수재 수준입니다.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명문대에 합격하려면 상위 2% 정도로는 턱도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슈독 :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 자서전
필 나이트 지음, 안세민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포츠용품, 의류 등이 그저 전문인의 영역이나 전유물에 머물지 않고 평범한 이들의 일상까지 속속 침투해 들어온 모습이, 아마도 나이키 이전이라면 그리 당연하게 여겨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여가 활동의 일환으로 운동을 즐기는 풍속이 생긴 건 현대인이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된 후의 현상이지만, 선을 넘지 않는 사치와 자기 만족적 소비를 위해 특정 스포츠 브랜드에 돈을 쓰는 풍경이 이처럼이나 일반화한 것, "새로 나온 나이키 용품 하나를 사기 위해 조금 더 열심히 일해 보자"라고 마음먹는 이들의 모습이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뚜렷한 트렌드의 일환으로 눈에 띄는 건 차라리 놀랍기까지 한 현상입니다. 이제 나이키는 이른바 사물인터넷(만물인터넷)의 플랫폼 구축에까지 큰 포부를 품고, 전혀 다른 섹터에서 표준 지위를 얻으려는 경쟁 기업들을 바짝 긴장시킨다고 하니, 일개 "신발 제조업체"가 이만큼이나 큰 영향을 가질 줄은 반 세기 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겁니다.

반 세기 전이라고 하면, 이 자서전의 주인공이자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가, 지금 같은 엄청난 글로벌 다국적 기업을 만들리라고는 자신도 채 내다보지 못하면서(이 책을 완독하고 더욱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저 신발에 대한 열정과 사랑 하나로, 자신이 직접 메이커로 나선 것도 아닌, 일본 오니쓰카 社의 미국 판매권(그것도 서부)을 얻어내려 동분서주하던 시절을 가리킵니다. 보통 하는 말로 "그 시작은 미미했어도 끝은 창대하다"고도 하지만, 만약 이 소심하고 확신이 부족했으며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만으로 청춘의 영혼을 채웠던 젊은이가 행여 무슨 변이라도 당하거나 그 부친의 조언을 좇아 다른 길을 걸었다면, 오늘날의 나이키 같은 굴지의 기업은 아예 존재도 하지 않았겠으며, 세계의 모습은 또 얼마나 바뀌었을지 상상만 해도 흥미롭습니다. 이 책에 드러난 창업주의 젊은 시절은, 척박한 시장을 개척하고 라이벌들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를 쟁취해 내는 기업가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너무도 큰 거리를 둔 그림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이미 나이키가 그 존재도 채 알리기 전 아디다스라는 굴지의 메이커가 존재했으나, 모르긴 해도 나이키의 분전이 없었으면 아디다스도 오늘의 아디다스는 아니었으리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혁혁한 창업의 공을 이룬 기업가들도 특히 미국 같은 나라에 기반을 둔 업체라면 완전 무일푼으로 일어서기는 어렵습니다. 필 나이트 같은 경우 말그대로 개천에서 용난 경우는 아니고, 그 부친은 여러 업종을 거치다 지역 신문사의 성공적 영위로 중산층 정도의 생활 기반은 확실히 다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친은 그야말로 빈손에서 출발한 인생이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자식들에게 번듯한 학벌을 갖출 것을 꽤나 요구하는, "건전한 속물 근성"을 갖는 경향이 있죠. 그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필 나이트도 지역 명문인 오레곤 대에 다니고, 이후 몇 군데의 학교를 더 거치며 자격증과 학위도 여럿 갖게 되었습니다.

오레곤이란 지역적 배경에 대해, 그는 "이곳까지 (동부로부터) 도달하려면 엄청 끈기가 있어야 하며, 길이란 길은 처음 개척해야만 했을 것이다. 오레곤은 오솔길이 아름다운 까닭에 그곳에서 나고자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같은 회고를 합니다. 사실 오레곤은 미국 전역에서 그리 뚜렷한 인지도가 있는 곳은 아니며, 동부 출신들에게는 촌구석으로 하대받는 경향마저 있죠. 좀 뒤에 나오듯 그는 막 사업이 잘 풀려 급속도로 확장하던 시절, 단 두 군데밖에 없던(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은행에서 그나마 한 군데 퇴짜를 맞은 후 필사적으로 창구에 매달려 자신의 사업 전망을 설득하던 시절도 털어 놓습니다.

외모만 보면 상상이 안 가지만 그는 육상 선수이기도 했고, 대학 초년생 시절 학교 육상부에서 대표로 뛰기도 했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보다 우월한 기량을 지닌 동료를 한 번도 추월하지 못했고, 이는 그의 자존감 형성에 나쁜 쪽으로 영향을 끼쳤지요. 2인자, 루저 심리란 특히 필 나이트처럼 소심한 청년에게는 지속적으로 그늘을 남길 수 있는데, 본인이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그는 엉뚱하게도 "운동화"에 대한 열정으로 이를 극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은사 빌 바우어만(아버지 다음가는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코치를 든든한 인맥으로 알게 되어, 이후 사업 확장 과정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기반으로 의지합니다.

보통 이 정도 성공을 거둔 이(가 아니라 훨씬 못한 수준이라 쳐도)들은, 자서전 속에서 잔뜩 자기 자랑을 늘어놓거나, 이 단계의 이런 체험이 나에게 이런 영향을 주었다며 스스로 의미 부여에 열심인 예가 많습니다. 그러나 필 나이트는 이 책 내내, 자신의 정직한 느낌과 추억의 재생에만 열중할 뿐 어떤 주관적 평가를 삼가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혹 "교훈"을 얻고자 이 책을 통독하는 이라면(책을 꼭 그렇게 읽어야 할 이유는 성인에게 없지만), 그가 치러낸 여러 소소하거나 큼직한 체험들에 대해 독자 스스로가 의미 부여를 해 가며 읽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부도 그닥 잘하지는 못했고(나중에 회계학 조교수 노릇을 하며 자격증 지도도 한 걸 보면 분명 공부머리로도 평균은 훨씬 넘습니다), 운동에서도 2인자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자신의 아버지에게나 스승에게나 뚜렷한 인정을 받지도 못했던 그는, 이상하게도 "신발"을 다루는 동안만은 무한히 행복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가장 아끼는 신발을 소비자에게 보급하는 일을 해 보기로 합니다.

명시적으로 강조하진 않지만 그는 세상에 부대끼고 다양한 사람들을 접촉하는 그 자체를 즐기는 타입 같아 보입니다. 이런 유형 중에는 두뇌 싸움 중에서 벌어지는 스릴을 즐기고, 상대와의 대결에서 이겨 승자의 쾌감을 맛보며, 타인을 결국 자기 뜻대로 장악하는 맛과 사업의 성취를 함께 누리는 이들이 많죠. 자수성가형 기업인들이 대개 또 그렇기도 합니다만 이분은 그런 타입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런 대결적인 면보다는, 자신의 열정을 남에게 전파하는 그 순간을 남달리 애호한다고나 할지. 이분은 대학생 시절 백과사전부터 해서 여러 물건을 파는 외판원 노릇도 했다는군요. 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이런 고생을 사서 벌이는 아들을 두고, 그 아버지(보수적이고 안정 지향적인)가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겼을 지는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더 놀라운 건, 그런 외판원 생활 중 단 한 번도 성공을 거둔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던 청년이,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화를 취급하게 되자 그 자신도 놀랄 만큼 큰 매상고를 올렸다는 사실이죠.

오니쓰카 운동화의 유통권을 얻어 막 사업을 시작할 때, 어느 청년(나이트가 이 책에서 묘사한 대로라면 "상체는 빈약하나 하체 근육만 이상하게 발달하고선, 뭔가 켕기는 듯한 표정으로 찾아와")이 "벅(필 나이트의 아명)이란 분 여기 계신가요?"하고 집(아버지와 함께 살 때)에 찾아와서까지 신발을 사 가더라는 겁니다. 그 청년은 아마도 필 나이트 자신과 매우 닮은 타입이었을 겁니다. 사람이 그 가진 열정이 뚜렷하면 이처럼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법이겠는데, 오니쓰카의 중역들을 만나 새파란 대학생이 유통권을 따 낼 때도 오직 그 열정 하나가 눈에 띄어 일이 성사가 된 거겠죠. 그는 학생 때도 세계 일주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데, 부친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도 않고(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말로 보아 중산층 이상이 아니었나 봅니다. 더군다나 생활 터전이 오레곤임을 감안하면 뭐) 기어이 여행 자금을 마련, 세계 구석구석(말 그대로더군요)을 돌다 이런 일까지 연이 닿은 거죠.

후지산 등정 과정에서 첫번째 여인을 만났는데, 자신과는 달리 동부에서 엄청 몀문가 출신인데다 인문 교양에 밝은 처녀였다고 하는군요. 부티나는 차림이었으나 왠지 "부활절 달걀" 같은 차림이라 웃음이 나기도 한 "남친 같아 보이는 청년"과 함께 있었는데, 자신을 덜 따분하게, 더 재미있게 해 줄 만한 필에게 갑자기 끌렸는지 둘은 급속히 친해집니다. 이 새러라는 처녀를 집에도 데려가고 부모님께 소개도 했지만, 시간이 흐른 후 서로 안 맞는다는 걸 알고 편지 몇 번 왕래 끝에 헤어졌다고 하네요. 이런 체험을 털어놓는 모습이랄까 문체도 실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 솔직하고 소심해서 어떤 실감이 느껴졌습니다. 이분은 나중에 모 대학 조교수 생활을 하며 두번째 여자(팍스)를 만나는데, 대체 이런 분이 어떻게 사업을 할까 싶을 만큼 숫기 없는 태도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습니다.

이런 그이지만 사업을 확장하고 기존의 인맥을 활용하여 내부 조직을 다지는 과정에선 얄짤없이 냉혹해지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게 드러나서 다소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본래 그런 성격이라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과업을 이루는 대목에선 정(情)보다 일이 우선이라는 거겠죠. 특히 "내가 (부하인) 아무개를 대하는 것처럼 그가 XX를 대하는 게 아닌가에 생각이 미치니 매우 서운해졌다"고 털어놓는 대목에선, 솔직한 건 좋지만 나중에 이 회고록을 읽을 수도 있는 그 당사자(실명이 나옵니다)는 뭐가 되는 건지 좀 난감해지더군요. "모두가 반항아를 자처하던 시절 나처럼 유순한 청년이 있다는 게.."를 회고하는 그이지만, 회사 안에서 자신에 반기를 드는 세력에겐 단호히, 혹은 티 안 나게 진압을 시도하는 걸 보면 기업이나 기업가는 어디서나 다 비슷하다는 점을 확인하게도 되었습니다.

초일류 브랜드의 상징과도 같은 나이키가 2인자, 혹은 그보다 훨씬 못한 브랜드로서 이만큼이나 미미한 출발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요. 딱히 유리한 출발점이 아니었는데도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분야에 쏟는 열정만으로 그 많은 난관을 헤치고 간 과정에서, 어떤 비틀린 욕심이나 거짓이 드러나지 않는, 정직한 기업가의 단면이 엿보인 점도 좋았습니다. 책에 표현된 모습이 전부는 아니겠으나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려는 젊은이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에 접근해야 하는지는 절실한 교훈을 알려 주는 책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패권 쟁탈의 한국사 - 한민족의 역사를 움직인 여섯 가지 쟁점들
김종성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류 역사는 언제나 패권의 소재와 장악을 놓고 혈투를 벌인 종적으로 채워졌습니다. 현재의 패자(覇者)가 영원히 그 강성한 권력을 휘둘러 왔을 것만 같아도 자취를 거슬러 올라가면 미미한 위상에 머물러 있기도 했고, 반대로 패권 투쟁에서 밀려 약자의 처지로 떨어진 민족이라도 먼 과거에는 인접 국가나 부족을 두려움에 떨게 한 위세를 떨친 예도 허다합니다. 이처럼 여러 정치 단위에 흥망성세를 교차하게 한 "패권"의 실체는 무엇인지, 과거의 그 패턴이 이러이러했다면 현재의 우리가 미래를 위해 직시해야 할 대목은 무엇인지, 지난 역사는 많은 시사점과 교훈을 던져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과거의 종적을 어떤 비생산적이고 패배주의적 틀에 갇혀 바라보게만 된다면, 그런 시선을 고집하는 이에게 어떤 발전이 있기가 힘들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먼저 우리 고대사를 돌이켜보며, 동아시아의 패권이 무역로의 이동을 따라 부침과 이동을 거듭했음을 지적합니다. 초원길을 따라 물자와 문명이 교류하고 이전되던 시절에는, 이 초원길을 장악하던 세력이 곧 패권을 쥐는 형국이었습니다. 이 무렵엔 농경 생활에 의존하던 중화 제국이 유목 민족(널리 우리 조상들도 포함합니다)에 비해 그리 나은 처지가 아니었고, (저자의 관점에 의하면) 공자가 동이의 문명에 법도가 있다며 동경한 것도 문화권 간의 실제 역량 차이를 반영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던 게 서역과 동맹을 추구하던 한 무제의 원대한 계략에 따라 장건지가 (본의 아니게) 개척한 새로운 무역로가 트이고, 이 새로운 "비단길"을 따라 동과 서가 새로운 교역 루트를 왕성히 이용하면서부터, 패권의 중심은 (보다 저위도에 놓여 있던) 농경 문명권으로 이동했다는 거죠.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이때까지만 해도 바닷길을 이용하는 세력은 여전히 제3위 서열에 머물러 있었다"고 지적하며,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본격 해상 무역로가 개척되며 "세력 관계는 크게 역전되어, 현재처럼 유목 민족 세력이 가장 열위에 놓이는 식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주장들은 대체로 통설이나 유력설에 따르는 편이며, 다만 저자의 문장력이 좋아 읽는 독자가 그 박력 있는 흐름을 잘 타며 읽게 되는 맛이 있다고나 하겠습니다. 어째서 몽골이나 중앙아시아 등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종족들이 현재처럼 미미한 꼴로 떨어졌는지에 대해, 저자의 단순명쾌한 프레임은 분명한 경로와 일관된 시야를 제공합니다.

우리의 고대사로 보다 주제를 좁히면, 저자는 여기서부터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묘청 세력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전과(戰果)를 살리기 위해, 모화 사관과 왜곡된 반도 중심적 패러다임을 고집하며 여러 사료를 폐기하고 자신의 관점에 맞춰 내용을 축소, 왜곡했다는 태도입니다. 여러 문헌(이 중에는 그 신빙성이 의혹의 눈초리로 보여지는 것도 상당수겠습니다만)을 참조하고, 심지어 일부 드라마(<기황후>라든가)의 내용까지 거론하며, 저자는 광대한 만주 영토를 포기하고 서방(여기서는 중국 본토) 경략까지 단념한 몇몇 군주(장수태왕 등 - 저자는 고구려의 군주 칭호가 "태왕"이었음을 강조하는데, 책봉왕도 아니고 그렇다고 황제도 아닌 외왕내제 시스템에서 이 점의 부각은 의의가 있죠)의 전략적 실패를 거론하며, 우리의 이후 역사가 옹색하게 반도에 한정된 것이 그런 단견에서 비롯했다며 전략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일견 타당하기도 합니다). 저자 특유의 흥미로운 관점으로는 "소서노가 실질적인 백제의 창업자였다"라든가, 송나라 서긍이 지적한 재가승려가 실은 화랑도, 낭가 사상의 추종자였다는 것 등입니다. 이런 관점이라면 임란 당시 큰 전공을 세운 승병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재고가 필요하겠네요.

진한은 동만주, 변한은 (이후)한사군이 설치된 만주 서부 지역 등으로 그 판도를 정하고, 마한은 이들 가운데서 다소 옹색한 처지로 명맥을 이었으나 한 제국의 흥기로 인해 진한, 변한의 이주민들을 한반도 남쪽에 비정함에 따라 오늘날의 인식처럼 (후)삼한이 정립했다는, 일부 독자들에게는 매우 낯익은 설이 제기됩니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만주원류고>의 그 충격적인 기사가 이어지는 맥락으로 언급되지 않을 수 없겠는데요. 아니나다를까 금나라의 기원, 즉 고려 건국에 미온적이었던 안동 일대의 세력이 북상하여, 권력 공백 상태였던 여진족의 세력을 북돋웠다든가 하는 주장들이 그 뒤를 받습니다.

저자 고유의 주장 중 가장 설득력있게, 다른 사료적 근거와 잘 녹아들며 독자에게 어필하는 건 "고대 국가들은 영토의 장악보다 노동력의 확보가 더 큰 과제였다"입니다. 고구려와 백제 패망 후, 당나라가 왜 패잔국의 백성들을 본토로 실어갔는지, 혹은 아예 무대를 달리해서 바빌로니아 등 패권국이 피정복지(유대 지방이라든가)의 신민들을 수고롭게 재배치했는지 하는 게, 그저 세력 약화를 노렸거나 재흥을 예방하는 외에 더 본질적인 목표가 존재했던 거죠. 현재의 관점과 필요가 과거에까지 무분별하게 확장 적용되는 태도가 제법 소양 있는 독자들에게서도 발견되는데, 그런 안이한 관점에 경종을 울려주는 서술이라고나 하겠습니다. "패권의 이동"이라는 거대 패러다임 아래 이런 하위 구조 인식의 틀이 별 위화감이나 비약 없이 스며드는 논의 구조라서, 개별 주장의 타당성에 무관하게 독자를 설득하는 힘이 큰 듯했습니다.

항몽 전쟁사를 저자는 자랑스럽다는 태도로 되짚는데, 무신 출신 집권자들이 정국을 주도했었기에 이런 장기간 항쟁이 가능했으며, 만약 기존의 문신 출신들이 여전히 주도적이었다면 바로 외교적 수단으로 난국을 타개하려 들었을 테며(이자겸의 대금 사대처럼)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리라 단정합니다. 항몽 과정에서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장기간의 방어에 성공했으나, 이후 문신 세력 주도로 강화가 이뤄짐에 따라 유리한 협상력을 유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입니다. 현대 정치와 관련 저자의 의미심장한 주장은, 반도에서는 대륙과의 접촉 루트(외교)를 장악한 세력 사이에서만 왕조 교체가 이뤄졌기에, 중국처럼 내부의 힘이 외부의 힘을 능가하며 카리스마적으로 대두한 "서민 출신" 지도자가 등장할 기회가 없었다는 건데요. 중국은 물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고제 유방이라든가 주원장이라든가 마오 등의 좋은 예가 있죠. 현재 공산당 측에서는 마오를 부농 출신이라며 뭐가 켕기기라도 하는지 미화하는 경향이 다분합니다만.

단군-기자-위만 조선으로 교체되는 국면에서 역성 혁명이 이뤄졌다면 그건 단일 왕조의 연속으로 볼 수 없으며, 이런 관점에서 기자 조선설이 부당하다고 하시나, 기자 책봉설을 반대하건 찬성하건 무관하게 그런 "왕조 시대를 바라보는 상식" 자체가 뚜렷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다 알듯 여러 번 왕실 가문이 교체되었음에도 단일 법통이 이어진 것으로 보며, 고대사에서 이는 한 가지 관점을 고집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무측천때 이미 당나라가 한 번 망했고, 중종 이후의 왕조는 "후당"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지만 이에 대해서는 논의의 실익이 없을 뿐 아니라 일일이 논거를 들기도 힘들 만큼 반대의 여지가 많습니다.

후반부로 올수록 이 책의 주제의식이 어디에 놓였는지가 명확해지고, 이 책의 최고 장점은 1)이처럼 책의 서두와 본론, 종지부가 일관된 관점(물론 저자의 관점)에서 빈틈없이 연결되며, 2) 저자께서 오랜 연구와 사색을 거치신 듯 주장 사이의 논리적 뒷받침이 매우 치밀하다는 점입니다. 이런 미덕이 물론 사관의 정합성, 타당성까지 담보하는 건 물론 아니겠습니다만, 최소한 책을 읽는 재미는 확실히 보장해 줍니다. 그 결론에 동의하건 아니건 간에, 한민족이 그 생존을 위한 중대 기로에 놓인 지금 이런 책 한 권을 읽고 방대한 과거사의 반추를 통해 현명한 생존 전략을 모두가 궁리해 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