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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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학부 시절에 가장 인기 있던 표준적 경제수학 교과서로 통하던 책을 쓴 A C Chiang이란 저자가 있었습니다. 중국계 미국인이던 그분의 성씨는 한자로 쓰면 張씨였는데(가장 흔한 중국 성씨이기도 하죠), 영문 표기가 같은 (그분보다 훨씬 어린) 이 작가님은 姜씨입니다. 姜은 표준 북경어 발음으로 "쟝"에 가깝지만 여튼 이분은 Chiang으로 자신의 성씨를 표기하네요. 중국은 광대한 나라라 한말로 중국계라고만 하면 어디 출신인지 따로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분의 빼어난 작품 몇(본래 과작을 하는 분이라)을 모은, 그리고 탁월한 번역이 함께해 준 이 선집을 몇 번 거듭 읽어 봐도, 과연 그 먼 선조가 중국 어느 지방 출신일지 감 잡을 수 있는 대목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 작가의 실물적 정체성(거기 대해 구태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면)은, 그저 천재적 두뇌를 지닌 미국인 정도로만 정리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물론 작품들 중 하나에 "동양적 인(仁)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았다"는 어렴풋한 한 마디가 들어있긴 했지만 말입니다.

출판사 서평 중에 이런 구절이 보이더군요. "머리를 쓰는데 가슴이 뜨거워진다!" 이 선집의 성격과 개성, 혹은 성취를 요약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문구도 없을 것 같습니다. 소위 하드 SF 작품들(단편이든 장편이든)을 "즐기면서(문학이니까 당연히, 즐기지 못하면 그게 독서라고 할 수 없죠)" 읽어 가려면 사전 지식이 필요하고, 사전 지식이 충분히 갖춰진 독자라도 작가의 의도와 호흡을 맞춰 가려면 머리를 적잖이 써야 하겠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드 SF의 정수를 즐길 만한 능력이 되는 독자라면 테드 창의 단어 구사 하나하나, 구성의 의도마다에 감탄을 보내며 작품의 음미가 가능하겠고, 지식이 설령 부족한 독자라도 이야기의 감동적인 전개에 인문적 전율을 체험하기에 충분합니다. 2년 전에 개봉되었던 SF 영화 <인터스텔라>가 영화치고는 하드한 편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실제로 킵 손 교수가 따로 이에 대한 논의만 모아 대중서 한 권을 내기도 했죠) 특히 한국 관객들은 그 감성적 코드만 따로 뽑아 즐길 줄을 알아서 천만 흥행을 달성시키기도 한 예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아직은 젊은 편이지만 활동 기간을 감안한다 쳐도 꽤 적은 수의 작품만 발표한 그인데, 이 책에는 모두 여덟 편의 단편이 역자분에 의해 추려져 정확한 우리말로 옮겨졌습니다. 저는 읽으면서 테드 창의 원래 세계도 우아하고 탁월하지만, 작품 본연의 의도가 이처럼 분명하게 전달되게 표현할 수 있다는 한국어 독해의 체험도 상쾌하게 이뤄 준 역자께도 감사 드리고 싶어지더군요. 처음부터 테드 창(다시 말하지만 그는 중국인의 인종적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외모만 지녔을 뿐 영혼은 이미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류의 미국인입니다)이 한국어로 작품을 쓴 게 아닐까 착각할 만큼요.

어떤 작품이 심오한 주제와 사색의 결과를 담는다고 해도, 그런 작가의 성취가 독자에게 바로 공감되게 하는 건 또 별개의 과제입니다. 어쩌면 그저 사색가, 사상가이기만 한 인물의 특질과, 작가적 재능이라는 게 이 지점에서 준별되는 게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테드 창은 그저 자연과학도 출신 작가라기보다, 그 어느 정통파(?) 인문 소양을 쌓은 이보다 더 정밀하고 깊이 있게, 인간 보편의 주제를 파고들어간 본격 문학에의 기여자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표제로 선택된 구절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출처인 <네 인생의 이야기>는 어느 어머니가 딸에게 들려 주는 내러티브 형식(에다, 분리된 어느 충격적인 공적 체험의 첨가, 분리, 융합?ㅋ)을 띠고 있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렇게 거칠게 요약하는 자체가 이 작품을 제대로 대접한는 게 아니죠. 주인공 여성은 언어학자인데, 어느날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그녀의 연구실을 찾아와 "기괴한 언어"의 녹음 파일을 들려 주며 자문을 구합니다. "이것이 언어입니까?" 주인공은 확답을 피한 후, 혹시 외계인과의 접촉이 있었는지를 묻습니다. 이게 그녀의 직분상 당연히 도출되는 결론이었는지, 그 밖의 정보를 참고하거나 직감 따위를 함께 동원한 성과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1인칭 주인공은 의도적으로 이런 정보를 상대(우리들 독자, 혹은 그녀의 딸인 "2인칭" 주체)에게 감춥니다. 대신 그녀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지적인 추론" 결과로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헵타포드라는 외계 생명체(혹은 의식 주체)가 "체경(looking glass)"을 통해 정부 고위 당국과 의사소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체경은 화학적으로 활성화되어 있었기에 어떤 분명한 통신의 매개로 쓰임이 입증되는 형편이고요. 이 체경에 등장하는 "거울 저편"의 그들과 필사적인 소통을 이루면서, 언어학자인 그녀는 패턴 분석을 통해 그들의 언어를 우리식 문법으로 정리하려 애씁니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음성언어는 어차피 시간 차원의 지배를 받으므로(누구든 둘 이상의 음절을 동시에 발화할 수 없습니다) 시간 순으로 정돈되어야만 하지만, 문자언어는 2차원(적어도) 평면에 표시되는 게 보통이므로 연대기순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즉 인간은, 말을 할 때와 달리 글을 쓸 때는 여러 심상과 생각, 사건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다는 겁니다(일단 가능성으로는요). 이들 헵타포드의 B형 언어는 이를 현실화하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딸에게 들려주는 "너와 네 아빠, 그리고 엄마인 내가 겪은 인생 이야기"를 위의 외계인 사연과 교차하며 다룹니다. 딸이 2인칭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의 시제(tense)도 독특한데,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다 아는 걸 보면 (우리 눈치로)이게 분명 과거의 일이지만, 시제는 미래, 최소한 미래로 보일 법한 현재입니다. 이미 인식의 지평이 동시간대의 동시 지각으로 넓어진(?) 화자라서 미래의 일을 과거처럼 바라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외계인과의 소통 체험과 언어 연구를 통해 그녀는 주체와 격체의 치환, 과거와 미래의 교차가 적어도 부자연스럽지는 않은 지적 작용임을 받아들이게는 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선 작가의 깊은 언어학적 소양도 잘 배어나는데요(도대체 모르는 게 뭐야?), The rabbit is ready to eat. 이란 문장을 두고 상(相. aspect)의 근원적 모호성에 대해 많은 숙고의 결과들을 토로합니다. 이런 게 다 중국어 발화 상황을 근거리에 둘 수 있었던 작가만의 이점이었을까요?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본래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연속선상의 시간 개념에 대해 무신경한 편입니다. 여기서의 헵타포드 종족은 이방인(alien)으로서의 동양인을 함의하는지도 모릅니다.

<영으로 나누면>은 제가 예전에 영문으로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에서 다시 만났네요. 어떤 천재 수학자(역시 여성이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가 젊은 시절부터 주위의 기대와 촉망을 한 몸에 받고 자라났는데, 연구를 거듭하면 할수록 형식 체계로서의 수학이 너무나 큰 허점을 지니고, 절대적 확실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사실은 다른 (불완전한) 언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편의적 표기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모든 의욕과 신념, 심지어 재능까지도 잃어버린다는 내용입니다. 대학생 시절 그녀는, 남편이 될 칼이란 청년과 교제를 시작하는데, 칼(이 사람은 위의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남편 게리와 비슷한 포지션이죠)의 말을 잠시 옮겨 보면요, "그 얼굴에서 그처럼이나 다른 표정이 나타난다는 점이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저런 깨달음이 담긴 표정을 평소에는 어떻게 감추고 있었는지가 신기했다." 우리가 흔히 "질리지 않은 사람의 매력"이란 게 다 이런 걸 두고 이르는 거죠. 이목구비가 단정하다 아니다를 떠나, 사람의 정신 세계가 단세포성이 아닌, 변화무쌍한 다양한 국면을 두루 포함해야 그 사람하고 함께하는 시간이 지루하질 않죠. 이처럼 테드 창의 작품은, SF의 세계에 인간 보편의 관심사, 일상적 측면까지 깊이 담아낸 작가적 통찰이 단연 돋보입니다. 테드 창이 의도적으로 배열한 작품 표제, 제사(에피그램), 형식 구분 기호가 마지막 9장에서 a=b로 합쳐지는 모습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이처럼 형식과 내용이 혼연일체를 이루는 구조에서, 테드 창은 정말 초지능의 외계인처럼 실험적 소통의 변방을 탐사 중입니다.

이 선집에서 단연 압권을 이루는(제 개인적 생각으로) 단편은 <이해>입니다. 뇌 손상을 입은 평범한 남성이 정부 주도(CIA라고 하네요. 만만하면 불려나오나요?) 실험에 참가하여 약물을 주입받고 초지능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저 추론이나 판단, 연산만 능해진 게 아니라, 감각, 지각 능력까지 극도로 민감해져서, 나노 단위의(ㅋㅋㅋ) 외부 자극만으로도 그 원인과 이후 추이를 정확히 예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약물 주입이 아니라 해도 정상적인 지능 역시 계발을 하면 할수록 향상되는 이치처럼, 자잠재력의 발견에 아주 기냥 탄력이 붙은 그는 신경 세포 단위의 극미 요동만으로도 상대의 생각을 다 읽어내는, 초자연적 존재(물론 과학적으로 설명이 다 되니 초자연적이라곤 못 하지만 ㅋㅋㅋ)가 되고 맙니다. 헌데, 어디 정부가 실험 대상으로 삼은 이가 이 자뿐이겠습니까? 다른 누가 극히 간접적인 메시지를 전해 와 (그와 비슷하다며) 자신의 존재를 알립니다. 같은 초지능의 소유자지만 지능의 우월과 그 확인이 인생에 있어 최고 수위의 가치이자 목표인 그와, 이 새로운 "동류(자신보다 못한 다른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자가 되려 함)"는 서로 매우 성향이 다릅니다. 이들은 서로의 생각을 알기 위해 말을 할 필요가 없고, 그저 신경 세포 단위의 미세한 동요만으로 상대가 뭔 의도인지 정확히 짚어낼 수 있습니다. 둘 사이에 타협이 불가능한 가치관의 차이를 감지한 주인공은, 이제 뇌파의 발사(?) 등 상대 의식에의 (해킹 같은) 침입을 통해 그의 존재를 파멸시키려 듭니다. 하지만 상대 역시 비슷한 수준의 능력을 지녔는데 당하고만 있을까요? 우리 평범한 인간들로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줄 알지도 못하며, 혹 근처에 있었더라도 이상한 아저씨 둘이서 눈싸움 하는 모습 정도로만 보이겠지만) 구원자 성향인 레이놀즈가 주인공을 제압하길 바라야 하겠는데... 결말도 여태 이뤄진 거창한 전개에 걸맞게 극적으로 마무리됩니다. 제가 보기엔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고지로의 대결 못지 않은, 장렬함과 극적 타당성이 있더군요. 이렇게만 소개하면 장난스런 무협인가 오해하실 수도 있겠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신경과학과 생체 구조에 대한 완벽한 지식이 있어야 형상화할 수 있는 세계였습니다. 최민식, 스칼렛 조핸슨 주연 <루시>도 이 소설에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독자는 자연스럽게 깨달을 겁니다.

이상의 세 작품이 특히 하드 SF의 개성을 진하게 구현했다면, <바빌론의 탑>과 <지옥은 신의 부재>는 본격 순문학 작가들이 자주 다루면서도 서투르게만 성과를 내는 "엄청난" 주제에 과감히 접근하면서, 테드 창 외에는 누구도 낼 수 없는 심오하고도 상상을 초월한 경지의 결론으로 과감히 마무리되는 내용입니다. <바빌론..>이 SF 장르에 포함되는 건, "분리된 하늘과 땅"이 실은 원통과 같은 연속체꼴이며, 이 때문에 하늘 끝까지 올라가 그에 구멍을 내려 든 주인공이 목표를 달성하고 도로 땅에 떨어졌다는 수학적 설명이 핵심이라는 이유 뿐이겠습니다. <지옥...>은 그나마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테드 창 스럽게" 드라이하고 논리적인 서술에만 의지한다는 이유뿐 이게 꼭 SF로 여겨질 필요가 없죠. 읽으면서 이런 생각지도 못한 대담한 해석과 제안이 그가 우수한 두뇌를 지닌 덕인지, 아니면 책을 많이 읽고 광폭의 사색에 잠긴 시간이 많아서인지, 한참을 고민하게도 되었습니다. 꼭 답을 한쪽으로만 정할 필요는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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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 이야기 - 역사를 바꾼 은밀한 무역 예문아카이브 역사 사리즈
사이먼 하비 지음, 김후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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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밀수라는 주제가 이렇게 두꺼운 책 한 권을 다 채울 만큼 긴 역사를 가졌을까? 이런 궁금증이 드는 분들이라면,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의 탄탄한 공적(公的) 사회 구조가 얼마나 개개인에 큰 혜택을 제공하는지 잠시 잊었을 수 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무역의 역사는 곧 밀수의 역사와 궤를 같이합니다. 내가 사는 고장에서 나지 않는 산물인데, 어쩌다 운이 좋아 한번 구해 써 보니 그렇게 요긴할 수가 없더라, 뭐 이런 반응이 퍼지면, 그래서 그 물산을 갖고자 하는(수요하는) 이들이 늘어나면, 모험심 강한 이들은 멀리라도 가서 물량을 확보한 후 고향 사람들에게 풀어 놓고 한몫 크게 잡자는 생각을 품을 만합니다. 그 타향에서 이 물자가 발에 채일 만큼 흔하다면 더 이문이 크겠음은 말할 것도 없겠고요.

헌데 국가는 이런 장사치들의 행태에 늘 주목합니다. 농업처럼 수지 구조가 빤한 산업에도 세금을 일일이 물리는 게 나라인데, 하물며 장사치들의 이런 크게 이익이 남는 경제 활동에 눈을 감을 수는 없죠. 한편으로 풍토병 등의 유입 가능성은 관리들의 개입에 좋은 구실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국경을 넘는 건 사람이든 물건이든 일단 나라에서 들춰 봐야 법도에 맞다고 법으로 정해 버립니다. 들춰 보는 김에 세금도 매겨야 정석이라며 서슬이 퍼런데, 거칠 걸 이처럼 다 거쳐서는 남는 게 없겠다고 판단한 장사치들은 밀수를 시도합니다. 태초에 무역과 국경과 세관이 있었고, 밀수는 그 형들과 몇 초 사이를 안 두고 태어난 쌍둥이 동생입니다.

다만 근대형(?) 밀수 중 규모가 크고 우리들 현대인들에게 충격을 줄 만한 역사적 사실들이라야 시간을 내어 책장을 넘기는 보람이 있겠으므로, 저자께서는 특히 근현대사에 제법 굵직한 족적을 남긴 "밀수의 대가, 엄청난 스캔들"에 초점을 두어 이 두꺼운 책을 채워 나갑니다. 밀수라는 위법, 변칙 행위에 주안을 두었을 뿐 내용은 흥미진진한 대중 역사서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우리 독자들에게 꽤 알려진 이들이 대부분인데, 다만 그들이 행한 "밀수"를 중심 축으로 바꿔 이들의 행적을 살피니 새삼 경제구조와 정치적 행위 사이에 그간 눈에 안 띄던 분명한 함수관계가 부각되는 맛이 있더군요. 물론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밀수도 했었어?"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짓"도 하고 남았을 대담성을 갖춘, 사악한, 혹은 과감한(?) 품성을 지녔음을 우리가 익히 알죠. "밀수"에 활동상의 중심이 놓인 채 관찰되는 그들은 일견 찌질하기도 하고, 반면 그들의 "미션"이자 이 책의 사실상 주인공인 밀수는 의외의 밀도와 무게로 독자 앞에 그 존재감을 뽐냅니다.

카리브해는 보통 미국의 뒷마당으로만 알려져 그 먼 과거에 어찌 세계사의 중심으로 등장했을까 하고들 착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죠. 이미 대항해시대에 이곳은 거대 해양 세력의 각축장이자 엄청난 물량의 주된 수송, 교역 루트 중 하나였습니다. 요즘은 절판된 가일스 밀턴 저 번역서가 한때 한국의 독자들에게 큰 인기였는데(도정제 실시 전 7,80% 할인 아이템으로 아주 자주 노출되었죠). 이 책의 1장은 그 책의 전권 내용을 요령껏 압축하다시피(직접 참조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책이 더 재밌게 쓰여졌다는 게 제 개인적 평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이만큼이나 "남는 장사"를 했으니 VOC가 그만큼 행세를 했던 거고(그 이전 시대 포르투갈, 스페인의 성세도 당연 다뤄집니다), 심지어 교회(가톨릭)까지 끼어들어 성사(sacrament)의 미명 아래 이 검은 거래에 끼어 구린 돈을 챙기네요. 드레이크, 존 호킨스 등 요 시절을 누빈, 불세출의 악당 들도 불려나와 재미있게 지면을 채웁니다.

"독점"은 예외적 병리 현상이 아니라, 이윤 추구의 극대화를 노리는 상인, 사업가들이 필연적으로 일구려 애쓰는 궁극의 진화 단계입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비판과 지적을 받아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몸 속에서 자라나는 필연적 독소"를 제거해야 하는 절실함이 깃든 단계입니다. 미국에서 독점 방지법에 대고 "부정경쟁방지" 같은 타이틀, 명분을 꼭 붙이려 애쓰는 게 다 이런 이유죠. 아무튼, 이 이른 시점에서도 벌써 "독점"에의 집요한 노력이 사방에서 작용했는데, 이렇게나 풍성한 이익을 안겨주는 무역의 텃밭을 근본 없는 해적들에게 넘길 게 아니라, 국가(혹은 그를 위원회 삼아 뒤에서 조종하는 사업가들)가 직접 관장하려 든 게 2장의 주제가 된 역사입니다. 여기서는 특히 전세계를 배경으로 삼아 각축전을 벌인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아직 잉글랜드이기만 하던 시절)의 쟁투가 주된 뼈대네요.

3장은 이처럼 국가가 직접 나서 무역을 통제, 지배, 장악, 독점하려던 시도가 (해적 사이가 아닌) 국가들 간의 치열한 분쟁으로 비화했고, 어느 정도 타협과 우열 상황이 가려지면서 안정적으로 (각국의) 공적 시스템에 편입한 후에도 또다시 암암리에 성행했던 밀무역의 실상, "진화된 모습"에 대해 다룹니다. 1장에서 "뛰는 국가에 나는 밀수꾼"이란 구절이 나오는데, 요즘 미드를 봐도 잘 나오지만 마약 단속을 시도하는 공권력의 수단이 얼마나 정교하게 발전합니까. 그런 와중에서도 마약 카르텔의 수법은 언제나 이런 법망을 피해 교활한 수단을 더 발전시키는 작태가 잘 드러나죠. 이익이 생기는 곳에 뛰어난 두뇌가 몰려들 수밖에 없고, 항해 기술의 발달 덕에 이런 밀무역의 무대는 전세계를 향해 넓어집니다. 이 와중에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들은, 기독교로 거짓 개종하여 생활의 터전을 지키려 든 유대 상인들이군요.

앞 단락에서 잠시 마약 밀수에 대해 언급했지만, 바로 이어지는 4장에서는 구 스페인 제국 식민지에서 어떤 과정으로 여전히 밀수가 성행했고, 이 오랜 밀수의 전통(?)이 현대의 마약 카르텔로 계승되는 과정, 그 와중에서 그런 현지의 독특한 풍조가 빚어낸 대중 문화에까지 화제를 옮겨갑    니다. 이 책의 가장 빼어난 점은 이처럼, 어떤 단선적 연대기 구성에 그치지 않고 지역을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현대사의 주요 이슈에까지 분석의 기조를 이어간다는 점이겠습니다. 네덜란드 장사꾼들. 그리고 잉글랜드의 라이벌들이 워낙 큰 이익을 남기는 꼴을 보다 못한 프랑스도 동인도 회사 하나를 창립하지만, 부패가 그들의 발목을 잡습니다. 여기서 "부패"라 함은 뇌물 수수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계약의 준수 등 폭넓은 신뢰의 기조가 사업가들 사이에 형성되었는지를 두루 가리킵니다. 라틴 계의 동인도 회사, 혹은 그보다 선배격인 스페인 제국의 체제가 본토에로의 영속적 번영으로 이어지질 못하고 일부 토호들의 배만 채운 채 흔적도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소재를 던져 줍니다.

로버트 만드린 같은 자는 바다에서뿐 아니라 육상에서도 자치국과 제국을 오가며 현란한 밀수의 기술을 뽐낸, 일종의 협객이나 의적처럼 떠받들어지던 괴한이죠. 저자는 에릭 홉스봄(물론 우리가 아는 그분)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기이하게도 왜 이런 "전설적인 밀수꾼"들이 범죄자로 인식되지 않고 민중 영웅 혹은 문예 속에서 이상화한 거물로 미화되었는지를 짚습니다. 화제가 여기에 이르고 보면, 대체 "밀수"가 얼마나 일반 민중의 생활에 밀접히 닿은 경제활동이었는지를 실감합니다. 제가 로버트 만드린의 예를 접할 때 언제나 떠올리는 인물은, 광해군 연간에 가도를 점령한 희대의 밀수꾼 모문룡입니다. 그를 원숭환이 처형한 건 황제의 국고를 축낸 대형 범죄자에 대한 당연한 의율이었는데, 이런 정당한 법집행을 이룬 그가 도리어 환관, 북경의 대상인들의 미움을 사 능지처참되고 만 건 이런 배경이 따로 작용해서입니다. 침체에 빠진 수도의 경기를 유례 없이 살린 그를 왜 죽이냐 이거였죠.

12장으로 가면 아예 필그림 파더스의 대의를 더럽히는, 조지 워싱턴 등 4인방(이른바 "국부[國父]"의 위상)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밀수에 가담했는지 적나라한 폭로가 자세히 언급됩니다. 임칙서의 실패도 결국은 교역에서의 거대한 이문의 향방을 놓고 배후에서 벌어진 파워 게임에서 정세를 바르게 읽지 못한 점도 지적됩니다.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 추동력은 당연히 이익에의 욕구이며, 이런 벌거벗은 욕구를 밀수만큼 극명하게 구현하는 집단적 경제 활동사도 따로 없음을 이 책은 너무도 재미있게 설명해 줍니다. 밀수는 예외가 아니라, 차라리 대세를 이루는 치명적인 몸부림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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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황홀한 역사 - 수의 탄생에서 현대 수학 이론까지 지식의숲 K
토비아스 단치히 지음, 심재관 옮김, 정경훈 감수 / 지식의숲(넥서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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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등 교육 과정에서 "말, 감성"이란 요소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 영역은 수학밖에 없지 않을까요? 하다못해 삭막한 물리만 해도, "빛은 과연 파동이냐 입자냐, 혹은 아인슈타인이 답을 정해 준 방식을 과연 답이라고 할 수 있느냐"를 놓고 하염없는 상념에 잠길 여지가 있습니다. 이런 걸 캐고캐다 보면 철학의 영역에 도달하고, 혹은 칸트, 헤겔, 마흐 철학만 깊게 파고들어도 꽤 소양 있는 수준의 물리학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반면 수학은 문제가 감춘 정답을 찾기 위해 최적의 경로를 모색하는 쾌감이 고작입니다. 이런 건 정적 속에서 깊은 상념에 잠기며 먼 궁극을 응시하는 겸손된 희열이 아니라, 말을 타고 사냥감을 쫓는 동적인 쾌감과 연결될 뿐입니다.

음 그런데, 대략 지금보다 백여 년 전에 활약한 이 책 저자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의 시대(는 우리와 마찬가지)보다 일정 시점 앞선 때에는 수학 교과서가 그저 공식과 문제 풀이 위주로 쓰여지진 않았다고 하십니다. 수학 교과서에 품위 있는 문장으로 인문의 교양을 곁들여 가며 두툼한 분량으로 어린 독자와 소통하는 점잖은 책을 상상하니 괜히 마음이 설레기도 하는데요. 국가가 베푸는 시스템 아래서의 교육이 "보통 교육", 즉 출신과 신분에 무관하게 누구나 시민으로서 최소 소양을 쌓을 수 있게 배려하는 양상으로 변하고, 이의 확산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보다 실용적인 편제를 차리다 보니 지금처럼 삭막한 모습이 되었다는 취지죠.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아마도 토비아스 단치히 박사님께서 "10대들에게 읽혀야 할 진짜 교과서는 이래야 마땅하거늘" 같은 계획을 품고 써 내려간 게 이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는 드는군요.

수학도 무슨 신으로부터 느닷 태블릿에 새김 받은 십계명 같은 게 아니라면, 사연과 인물과 사건과 가치관과 철학이 (표면에 드러나지만 않는다뿐) 다 지난 내력에 서려 있게 마련입니다. 숱한 사람들(좀 특별한 두뇌를 타고난 이들이긴 하지만)의 노고와 피땀이 서려 이뤄진 학문적 성과 중 안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괜한 감성의 개입이나 그로 인한 오해의 여지를 안 남기게, 깔끔하게 그 성과가 정리되어야 하는 영역이다 보니 그런 불친절한 모양새를 띨 수밖에 없었지요. 이런 수학의 진짜 모습을 어린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수학의 역사를 쉽게 풀어 쓴 책도 있고, 원리를 잘 표현하는 퍼즐 여럿을 섞어서 "생각하는 힘"을 사연과 함께 길러 주려는 의도의 책도 있습니다. 이 책은, 인간이 "수(數)"라는 언어를 계발시켜 온 과정에 보다 초점을 맞춰, 인문과 수학이 아직 별개가 아니던 시절까지의 힘겹고도 장엄하며 위대했던 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상(事象)에 사연, "스토리"가 빠질 수 없고, 토비아스 단치히 박사님이 파악하는 "수학이 살아 온 이야기"는 이런 내용인가 봅니다.

저자는 "수의 역사는 사유재산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을 것이다"라고 추정합니다. 이에 반대하는 이들도 많겠으며, 다만 수가 일상의 생활에 그토록 절실한 필요가 있으려면, 재산의 취득과 관리, 증식에의 강한 욕구가 생기는 게 우선이었겠다는 정도는 충분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이른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수뿐 아니라 최초의 표음문자도 페니키아 상인들에 의해 고안되었으니, 수가 처음 생겼을(발견 혹은 인식되었을) 때만 해도 그저 사람의 경제 활동을 돕는 수단으로 퉁쳐 여겨졌을 뿐 오늘날처럼 세련되고 정교하게 구분되지는 않았겠죠.

p66에 보면 삼각수의 발견 과정이 단순한 그림을 통해 제시됩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기에 의아할 정도인 피타고라스 학파의 "진지함"은, 자신들의 업적이 후세인들(현대인뿐 아니라 수 세기 후 세계문명 발전을 주도한 아랍인들 포함)에 의해 어떤 학문적 의의를 부여받으며 칭송될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겁니다. 수학만큼 "종교"와 거리가 먼 분야도 없을 것 같은데, 이들 고대 그리스인들은 초월과 피안에의 열망 그 비의의 발견과 묵시를 오로지 수를 통해 이루려 들었으니, 세상 만사의 통성과 본질은 당최 그대로인 게 없이 변화무쌍할 뿐입니다.

저자께서는 아랍인들의 업적을 소개하며, "왜 이들이 그처럼 인도의 흔적과 영향을 배제하려 들었는지 알 수 없다. 헬레니즘의 계승자를 자처하느라 의식적으로 브라만을 멀리한 것일까?"라고 하시지만 그저 반어적 언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헬레니즘 세계는 (비록 적대적이었다고는 하나)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어느 정도는 공감대가 형성된 "바다 저편"이며, 반면 힌두이즘의 아대륙은 "알 수 없고 혼란스러운 다신교의 난장판" 정도로 혐오와 경멸이 어린 시선이 끼어들었던 이유가 아니었을지요. 여튼 기독교인들은 "people of the book"이라며 그 예언자가 일정 예우를 당부한 바도 있으니 말입니다. 아바스 왕조는 그 존속 기간 동안 대체로 비잔티움과 팽팽한 외교적, 군사적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정수론은 매혹적이지만 그 이산적(discrete)인 성질 때문에 아직도 곳곳에 장벽이 가로놓인 분야이죠. 여기서 저자는 페르마의 정리를 잠시 독자에게 환기시키는데, 이처럼 이 문제는 수백 년 동안 "불가능에 가까운 문제"의 대명사처럼 인용되어 왔습니다. 감수자님의 주석에도 잘 나오듯, 1990년대 초반 옥스포드대 교수 앤드류 와일즈가 현대 수학의 성과를 총동원하여 결국 "옳음"을 증명해 냈죠. 외관상 그토록 간단해 보이는 정리, 명제가 그토록 까다로운 과정의 증명을 요한다는 게 경악스러울 뿐입니다. 소수(素數. prime number) 이슈도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부터 해서, 여전히 풀릴 공산이 희박해 보이는 여러 난제들과 함께 소개됩니다.

이 책은 저자분과 거의 같은 시대에 활동하던 버트란드 러셀이라든가, 수학에도 빼어난 재능과 소양을 지녔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등의 업적도 정성을 들여 서술합니다. 그뿐 아니라 푸앵카레도 여러 군데에서 다양한 맥락 속에 언급되는데, 이런 쟁쟁한 석학들과 같은 시대를 호흡한 저자의 책을 읽는다는 게 다소 신기한 느낌도 주는 대목이네요.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이니만치, 수학은 무오류이며 언젠가는 이 수학의 영향 하에 모든 학문의 언어, 나아가 모든 일상어까지 모호함이 일절 배제된 체제로 재편될 것이라는 강한 낙관적 신념을 가졌던, 당시 지성인들의 공통된 분위기를 반영하는 문장이 눈에 많이 띕니다.

어떤 집합에 마지막 원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수학은 "무한"이 개입하지 않는 한 완전한 무오류의 패러다이스입니다(무한이 포함되면 양상이 어떻게 바뀔지, 여전히 일체의 오류를 몰아내어야 한다는 게 수학자들의 소명이지만 최근에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하죠). "마지막 원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란, 보기보다 엄청, 일반인이 구체적인 상상을 해 내기 어려운 문장입니다. 마틴 가드너는 "무한 호텔"의 비유를 들며 "마지막 호실이 없는 숙박업소"에, 꽉 찬 객실마다 동시에 "자신의 호수 다음 방으로 옮겨 가십시오"라는 통지를 보내, 손님 하나를 더 들이는 게 가능하다는 설명을 합니다. 손님이 무한히 많으면, 손님들에게 방을 옮기라는 통지를 하는 데도 무한한 시간이 걸릴까요?(경비실에서 한 동 모든 세대에 인터폰으로 메시지를 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편, 손님들이 바로 옆 방으로 옮기는 행위를 동시에 벌인다면, 무한한 손님이나 1인의 손님이나 경우마다 소요되는 시간은 같을 것입니다. "무한"이란 이처럼 반드시 모든 연산, "행적"마다 무한을 끌고 다니는 게 아니라서 더욱 혼란을 줍니다. 0으로 나누는 게 정의되지 않는 이유도, 평이한 계산에 처음으로 "무한"이 끼어드는 대목이라서 그렇습니다.

8장에서는 수열을 다루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건 "급수"입니다. 급수는 수학과 학생들보다는 공대생들이 머리빠져라 공부하고 외워야 하는 파트인데(증명 과정이 이해가 안 되면 크라이직 공업수학 책 통째 다 외워야 하죠), 테일러 급수 등 "초월수"의 근삿값을 기계적이고 직관적인 프로세스로 구해내는 그 모습이 매우 매혹적이죠. 이처럼 이 책은 점잖은 어조 속에, 수학만이 제공할 수 있는 매력과 신비한 아름다움을 곳곳에서 강조합니다. 수열이 흥미로운 이유는 독특한 패턴이 드러나기 때문이며, 현대 수학 중 가장 재능 있는 이들로부터 헌신의 대상이 되는 "프랙틀"도 이 "반복"의 묘(妙) 그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분야입니다. 음.. p213을 보면 감수자께서는, 저자가 언급한 제곱근 계산 알고리즘에 대해 "개평법"이라 단언하시면서, "그 원리도 모르고 가르치긴 하나 계산 효율이 낮다"고 혹평하십니다. 아마도 이 언급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과정을 염두에 두신 것 같고요. 기계가 아닌 사람이 수행하기엔 제법 재미도 있을 뿐더러, 하다 보면 제곱근의 원리까지 곱씹게 되기도 합니다. 저로서는 동의하기가 좀 어렵네요.

p139에 보면 국제 정치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저자의 생각 편린이 엿보입니다. 여기 말고도 그는 루이 14세 본인이 직접 털어 놓은 속셈으로 "외교에 있어 병합만큼 좋은 수는 없어!"라고 했던 일화를 인용합니다. 실제로 루이 14세는 번영하던 소국 네덜란드와 어떤 교류, 협력을 이뤄 자국의 이익을 꾀하는 번거로운 방책보다, "그냥 삼켜 버리는" 고르디우스의 매듭 끊기 식 강경책을 구사했고, 이는 수백 년 후 나폴레옹 등 정치가의 선택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여튼 이런 국제 정치학상의 "병합"과, 저자가 역점을 두어 설명하는 "불변의 원리"가 서로 무슨 연관을 맺는지는, 독자들이 깊은 숙고를 하여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p150을 보면 감수자께서 "이건 사실 당연하여 증명이 불필요한 명제이다"라고 하시는데, 수학적 센스가 있는 독자라면 이 감수자님의 지적이 타당하다고 다들 여길 겁니다. 그런데 구태여 누가 "왜 당연해?"라고 묻는다면 좀 설명이 궁색할 수 있죠. 이 책을 열심히 읽은 독자로서 제가 한 마디 덧붙인다면



만약 우변의 a가 유리수라면, 그 유리수는 어떤 유리수의 거듭제곱으로 당연히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 거듭제곱근 중 하나가 b라면 이 식은 이제,



로 바뀌는데, 좌변의 x나 우변의 b나 같은 유리수 집합 안의 원소이므로, 양변은 결국 문자만 바뀌었을 뿐 같은 의미이고, 따라서 아무 내용이 없습니다. 이런 걸 항등식이라고 하죠. 그런데 이 책 본문 바로 위를 보시면 이 식을 두고 "방정식"이라고 합니다. 항등식에 지나지 않는 걸 방정식이라고 하니 모순이 아닐 수 없죠. 감수자님의 지적이 이런 이유에서 타당한 겁니다. 이처럼 이 책은, 원저의 부주의나 오류도 한국어판 감수자께서 일일이 메타적으로 발견해 놓았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p169에 보면 감수자님의 재미있는 지적이 하나 더 나옵니다. 주석에서 "그렇지 않다"고 하신 건 저자의 "... 원과 같은 넓이를 지닌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게 불가능하다"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그럴 리가요), 본문에서 설명된 내용만으로 "불가능 증명"이 이뤄진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2차뿐 아니라 4, 8, 16차,.. 모두에서 "불가능"이 밝혀져야, 본문처럼 "최종적으로 불가능"을 단언할 수 있죠. 일일이 모든 짝수차에 대해 개별 증명을 할 수는 없고(책 앞에서 나온 대로 무한이니까), 감수자께서 말씀 하신 대로 "대수(algebra)적 수가 아님"을 들어 일반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라는 도구가 대단히 편리하며,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정연한 체계를 보이지만 유일한 혼란이 바로 "무한" 논의에서 발생하므로, 이 책은 챕터 를 가리지 않고 이 토픽을 "전방위적으로 공략"합니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대상을 바라보며 분석하려 드니 여러 무리가 따르는 게 당연하지만, 역으로, 무한에 대해 이처럼 깊은 생각에 접어들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근원적 낙관을 내포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게오르그 칸토어의 유명한 말 "수학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처럼, 수학에 몰두하는 인간은 사고와 사색의 위대한 힘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절대를 근사(近似)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이 이런 심원한 주제를 숙고한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는 사실이, 이 고전을 읽는 행위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고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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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미술관 - 길 위에서 만난 여행 같은 그림들
박준 지음 / 어바웃어북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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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 닿는 대로 각처의 미술관, 박물관을 들르는 건 여행자의 특권입니다. 강대한 권력자는 정치 투쟁의 정점에 선 후 거대한 건축물, 조형물을 짓지만, 풍요의 탑을 쌓은 시민들은 경기 활황의 끝에서 (이상하게도) 예술가의 산고가 낳은 작품의 전당을 찾아 그 기교와 분투의 혼에 경배하곤 합니다. 덕분에 타지를 찾은 이방인은 지친 혼을 달래기에 적합한 객잔을 이런 미술관에서 마련하기도 합니다.

박준 선생님은 자신이 세계를 둘러보며 방문한 여러 미술관에 대한 기억을, 자신이 찍은 사진들과 함께 책 속에 예쁘게 펼쳐 놓고 있습니다. 미술관이라는 시설, 건물, 고유의 개성과 구조도 좋은 화젯거리지만, 그 미술관에서 자신이 가장 인상 깊게 본 작품, 혹은 그 미술관을 대표, 상징한다 할 만한 마스터피스를 주제로 잡아, 자신만의 감회와 평가, 이에서 비롯한 인생에 대한 그의 소회를, 독자로서 이해하고 공감하는 맛이 특별한 책입니다. 아주 범속하게 평가하자면, 간만에 돈 들여 나선 나의 해외 여행, 현지에서 이 미술관은 적어도 들러서 이런 작품 정도는 밀착거리에서 봐 주고 감흥을 느껴야 손해가 아니라는, 어떤 가이드 정도로 활용하기에도 그만이라고나 하겠습니다.

모두 칠십 개가 넘는 꼭지, 화제로 이뤄진 구성이라 아니 그만큼이나 세계에 다녀 볼 만한 갤러리가 많았구나 새삼스런 각성도 듭니다. 전반부는 "미술관에서 꾼 꿈", 후반부는 "만난 사람" 이야기로 가를 수 있는(제목도 그리 붙었듯) 편제고요. 이야기의 배경이 된 갤러리들이 몇 겹치는 게 있긴 해도 워낙 세계 곳곳의 알찬 미술관을 속속 맛보고 오신 기록이라, 독자가 체감하기로는 칠십 군데 이상의 여행기를 한 권에 압축해 접한 것만 같습니다.

이 책을 쓰신 시점에도 여전히 체류하신다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쉬른(Schirn) 미술관에서 그가 만난 작가는 오노 요코입니다. 이 미술관은 다른 기획측에 비해 그녀의 성취를 후히 평가하는 듯, 회고전도 자주 열고 이 책에서 알 수 있듯 작품도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존 레논의 대단히 재치있는 표현처럼 "가장 유명한 무명작가"였던 그녀는, 유명 아티스트의 "안 어울리는" 배필로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을 뿐 예술가로서의 평가는 박하기 짝이 없었고, 그런 까닭에 이 미술관의 태도는 우리 눈에 각별히 두드러질 수밖에 없네요. 불안에 잠식당하고, 정처없이 떠밀려가는 것만 같고, 그러면서도 근거 없는 자기애는 넘쳐나는 듯 여튼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한 그녀에 대해 박준 선생은 오히려 공감을 표합니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요소 중 하나는, 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주친 알바생 미케니아처럼, 작품의 감상과 사람과의(그저 스쳐지나갈 뿐인 제한된) 만남에서 받은 느낌을 묘하게 버무려 서술하는 그의 독특한 태도입니다.

프랑크푸르트에는 미술관 내부 말고 거리에, 조나선 보로프스키의 그 유명한 거대 조각 <해머링 맨>이 있죠. 요즘 같은 제목을 단 어느 소설이 화제인가 본데 소설을 읽고 나서 무식한 소릴 안 하려면 이처럼 현대 미술에도 어느 정도는 소양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박준 선생은 "외로우니까 여행을 하지만, 여행을 함으로써 더 외롭기도 하다"며 묘한 소회를 털어 놓습니다. 근데 우리 모두는 답을 찾으려고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하나 더 추가하려고 답을 찾아 다닙니다. 저 덩치 큰 "해머질하는 남자" 역시 다른 데다 뭘 박아 넣으려고 망치질을 하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의 가슴이 어디쯤 있는지 찾으려 청진기를 들이미는 부질없는 수고를 하는 중이죠. 여기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보로프스키와 "통한" 건데, 현대 미술가들은 이처럼 단순한 데서 대중과 소통 접점을 찾기에 마음만 열려 있고 거짓만 없으면 누구나 뛰어난 청중이 될 수 있죠.

이 책에 실린 상당수 작품과 그에 딸린 감상은 뉴욕의 여러 미술관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에밀리에의 키스>를 보면 확실히, 저자님 말씀대로 "안아서는 안 되는 어떤 여인에 대한 불측한 욕망"이 잘 드러납니다. 자신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잘 표현했기에 당대 평론가나 관람객으로부터 욕도 거하게 먹는 건데, 이런 예술가들이 몇 세대 후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의 대상이 되는 것도 아이러니죠. 더 잘 알려진 예를 이 책에서 하나 더 찾으면, 바로 <풀밭 위의...>를 그린 마네의 일생입니다(요건 파리 오르세 미술관). 여기 실린 많은 예술가들이 지독히 척박한 삶을 산 사실과 대조적으로, 마네는 일생 동안 물질적 풍요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질 나쁜 여성에게 성병이 옮아 어이없이 생을 마감한 그를 두고 저자는 "여자에 관해선 종 어리석을 수 있는 게 남자들"이라 하시지만, 어디 남자가 어리석은 게 그일뿐이겠습니까.

김춘수의 시에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라는 구절이 있죠. 저자께선 런던의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이런 데가 있다는 것도 전 처음 알았습니다)에서 특히 이백 년 전 처음 카이로에 발을 디딘 에드워드 윌리엄 레인의 조상을 소개합니다. 아랍의 문화에 이방인으로서 깊은 이해와 동감을 표시한 이들은 T E 로렌스라든가, 리처드 버튼 경 같은 이들이 유명하죠(물론 현대 진보 담론에선 "오리엔탈리즘"으로 비판받지만요). 여기서 그는 "신부의 면사포를 막 걷어올리려는 동방의 신랑"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터번을 두른 그의 앉은 모습은 신부의 자태를 막 감상하려는 설렘보다, 혹 예상치 못한 충격과 조우하지는 않을까 불안감이 다분히 서린 인상이네요. 이런 분들은, 본향인 서유럽(대체로는 그 중에서도 영국이군요)에 완전히 속하지도 못하고, 자신이 제2의 정체성을 찾은 타향에서도 여전히 겉도는, 정체성의 근원적 미정(未定)에 시달리는 영혼이죠. 저자께서 별달리 긴 소회 없이 이 낯선 남성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의도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됩니다.

저자님은 일본의 여러 미술관에 들른 자취도 이 책 곳곳에 진하게 남깁니다. 저는 특히, 한국의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런 일본의 마이너 갤러리의 고유한 매력이 많이 담긴 게 좋았습니다. 나오시마 베네세하우스를 이 범주에 넣으면 실례 혹은 과오일까요? 여기서 저자는 리처드 롱의 <내륙해 유목 서클>이란 작품을 소개합니다. 바로 뒤에 소개되는 뒤샹의 변기가 이미 그 파격의 단초를 마련했었지만, 한참 뒤 "창작"된 이 작품 역시 그저 정체 불명의 나뭇조각을 이리저리 묶어 놓은 거나 외관상 마찬가지죠. 음... 저자께선 이 작품에 특히 "익명의 슬픔"이란 의의를 마련하시는데, 아니 나뭇조각이란 그 존재만으로도 별반의 효용 없음과 시선으로부터의 소외에 슬픔이 느껴지는데, 아예 출처마저 불명확하다면(어디, 어디로부터 건진 잔해입니다요 라든가), 이들의 모임이란 진정 무상성과 미미한 존재감의 극치 아닐까요. R 롱과 직접 대화를 나누신 건지, 아니면 다른 출처에서의 인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하찮아 보이는 나뭇조각조차, 진실은 그 존재의 유일성을 과거에 간직한다는 게 차라리 충격입니다. 샤워 줄을 목에 감고 어느 작품의 컨셉처럼 자살하려다, 모방이 아닌 자기 길의 색다른 모색("줄을 풂")으로 자기 생을 되찾았다는 저자의 고백처럼, 극단에 이르러 비로소 깨닫게 된 소름끼치는 유일성이란, 모든 걸 비운 후에야 진정한 환희로 맞아집니다.

이 책에는 무려 칠십 개가 넘는 꼭지가 실린 만큼, 매우 잘 알려진 거장들의 친근한 작품도 저자님만의 해석을 통해 독자들의 주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술 서적이나 방송 프로그램을 거친 게 아닌, 맨눈과 기타 오감으로 현장에서 본연의 모습으로 만난 작품들은, 대개는 여행자에게 객지에서의 조우와 "소통"을 제공하기에, 벌거벗은, 외로운, 그러면서도 존재의 충만한 날것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여행과 미술의 온전한 감상이란 그래서 불가분의 관계이며, 이 책은 이 두 체험이 어디서 절묘한 교점을 이루는지 가르쳐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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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자서전 - 바람만이 아는 대답
밥 딜런 지음, 양은모 옮김 / 문학세계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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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의 청년기, 장년기에 그의 음악과 그에 실린 저항의 혼을 마음껏 공감하며 그를 지지하고 사랑한 세대라면, 지금쯤은 밥 딜런만큼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는 주변에서 어르신 대접을 받을 만한, 나이 지긋한 분들이실 것 같습니다. 그런 어른들도, 때로는 예언자처럼 심오하고 때로는 지상의 어느 투사보다 단호하고 거칠며, 때로는 사춘기 소녀처럼 섬세하고 때로는 어느 문호보다 난해한 그의 내면을 속속들이 이해한다고는 쉬이 자신하기 어렵겠습니다. 국외자로서 정말 불측한 한 마디를 하자면, 간혹 그의 기인 같은 행보는 수수께끼 같은 장막에 자신을 감춤으로써, 신비주의로 상품 가치를 높이려는 "의도된 마케팅"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번 노벨상 수상이 발표되고 나서도, 그는 즉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그렇다고 대중이나 미디어로부터 은둔하지도 않은 채, 예정된 공연을 그대로 이어가는 등, 일반에 새겨진 이미지대로 "과연 그답게 세속의 영예에 대해 초연한"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가타부타 대답이 없은 채 수상예정자와 위원회와의 소통이 이어지지 않자, 스웨덴 한림원 측은 다소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죠. 이로부터 며칠 후, 딜런은 "말문이 막힐 만큼 영광스런 일"이라며 처음으로 일성을 내놓았는데, 뭔가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수상 거부" 같은 파격적 반응을 혹 보일 줄로 (괜히 삐딱한) 기대를 건 일부에서는, 실망스럽다며 딜런 역시 속물이라는 등 성급한 성토가 나오기도 했죠.

사르트르는 "작가(널리 예술가 포함)는 무엇인가의 도구가 되는 걸 거부해야 한다"며 이 커다란 영예를 거절하기도 했는데, 밥 딜런은 그런 제도권 철학자보다도 "야인성"이 부족했던 걸까요? 그에 대한 딱떨어지는 답은 아무도 쉽게 못 내놓을 겁니다. 다만 이 자서전처럼, 그닥 다변도 달변도 아닌, 과묵형에 가까운, 그야말로 오로지 작품으로만 말하는 타입에 가장 가까운 밥 딜런이란 인물에 대해, 자신의 생애와 내면 세계에 대해 이만큼이나 길게, 자세하게, 포괄적으로 털어 놓은 "문자 기록"은 매우 드물고, 앞으로도 어떤 책 모양새의 직접 증언이 나오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이 자서전은 (그의 팬이건 일반 독자에게건 문화 연구가에게건 간에) 매우 진귀한 존재입니다.

혹시 밥 딜런이 쓴 이 회상록은, 밥 딜런의 작품이나 수수께끼 같은 행보만큼이나 난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분이 있다면, 최소한 그런 걱정은 붙들어놔도 될 것 같네요. 역자께서는 후기에서 이 책을 두고 "의외로 솔직"하다는 평가를 하십니다. 이 말은 밥 딜런이 여태 거짓말쟁이 같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난해한 언어로 표현하는 게 전혀 아닌, 마치 대학 신입생이나 사춘기 소년이 "잘 모르겠다. 이러이러하게 다가왔다. 힘들었다. 예뻤다. 좋았다" 같은 솔직한 소감을 툭툭 던지듯 털어놓는, 쉽고 공감가는 문장으로 자서전을 채운다는 뜻입니다. 독자인 저도 읽으면서 "밥 딜런이 이만큼이나 격의 없이 소통하는 인물이었나?" 하는 의외의 감상이 밀려 오더군요.

저 개인적으로 몰입해서 읽은 대목은, 그의 청소년기, 그리고 성년기의 문턱에 막 들어설 시절을 아무 가감 없이, 또 특별한 의미 부여 노력도 없이 툭툭 던지듯 회상하는 전반부였습니다. 그가 유대 혈통이라는 점은 다들 알고 계실 텐데, 저항 정신 가득한 포크의 거인으로서 우리에게 각인된 어떤 이미지와는 달리, 어린 시절의 그는 "출세하고 싶고, 원하는 성공을 어른이 되어 이루고 싶은" 의욕 가득하고 야무진 꿈을 지닌 소년이더군요. 이건 그의 진정한 자질이나 개성의 반영이었을지, 아니면 유대계 가정이 일반적으로 자녀들에게 심어 주는 "향상에의 욕구"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세속의 타락한 가치를 일절 부정하고 비웃는, 이후의 음악세계가 지향한 바와는 정말 대조적이죠.

이 시절 로버트 앨런 지머먼(유대계 독일 이민자의 후손인 그의 본명) 소년은 꿈이 컸던 만큼 좌절도 컸습니다. 우리로서는 상상이 안 가지만 어린 그는 사관학교 계열에 진학하여 입신하려는 장래를 그렸는데, 부모님은 대뜸 이런 의욕을 꺾고 다른 쪽을 꿈꾸라는 현실적 충고를 하시네요.

"너의 성엔 de도 von도 붙지 않는단다. 그런 배경으론 입학 지원을 해도 합격이 어려워."

사관학교나 ROTC에 대한 인식이 시큰둥한 우리 감각으론 이해가 안 되지만, 사실 미국에서 장성으로 전략가로 큰 명성을 남긴 이들 대부분은 명문가 출신의 자제들이 많았고 지금도 아주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고작 공부 하나 잘해서 명문대에 진학하는 게, 사실은 한국 같은 일부 사회에서나 누릴 수 있는 혜택이죠. 소년은 (이 역시 지금 우리로는 상상이 안 되는 모습인데)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대체 애가 그런 책을 뭐하러 읽나 싶을 만큼, 분야와 범주를 가리지 않고 남독 다독하는 소년이더군요. 이는 그의 왕성한 지적 욕구를 보여 주기도 하지만, 고전 독해 실력이 탄탄해야 명문대 진학이 가능한 미국의 현실(그때나 지금이나)을 감안하면, 미래에 대한 야무진 대비의 일환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 애가 정작 "너의 미래는 그리 넓은 가능성을 지니지 못했단다" 같은 말을 부모님께 들었다면, 얼마나 낙담이 컸겠습니까. 좀 농담을 섞자면, 밥 딜런의 작품에 스며 있는 그 깊은 슬픔이 혹 이때의 좌절에서 비롯한 건 아닐지, 또 현실에 대한 거친 저항도 이때 배양된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네요. ㅎㅎ 물론 이렇게만 말하면 불경스럽게도 그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폄하가 될 우려가 있지만요.

밥 딜런의 회고가 재미있는 건, 자신이 꽤 어렸을 적의 기억일 텐데도, 그 책을 읽을 당시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는 표현을 책에서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물론 책에 대한 얘기 말고도, 자신이 이후 대중문화계에서 인정을 받고 다양한 인물들과 교류하고 고독한 그 나름의 투쟁을 이어갈 때의 회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은 2004년에 집필되었는데, 이때 벌써 그의 나이 육십대 중반입니다. 메모나 일기 없이 그저 회고만 충실히 기록하기도 쉬운 작업이 아니죠. 이 자서전의 원제는 <Chronicles>인데, 제목에 충실하게도, 성장기부터 1960년대까지 그의 생이 밟아온 길을 소상히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정말로 "연대기"라면 밥 딜런의 골수 추종자가 아니고선 따라가기 지루하겠지만, 자신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던 기획자, 동료 예술가, 지인들과의 만남과 "그 느낌"의 회고가 중심이라서, 인간 밥 딜런의 내면과 감정을 엿보는 맛에 한 장 한 장이 재미있습니다.

프로이트에 대해선 "잠재의식의 제왕"이라며, 우습기도 하고 어린 소년의 소박한 딱지 붙이기 버릇이 그대로 드러나는 평가를, 육십 노인이 되어서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독일의 전략가 클라우제비츠에 대해선 "구식이지만 치밀하다"고 단평을 하는 등, 언제나 살아 있는 생기로 텍스트나 사물, 외부 세계를 접하는 그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문장이라서 독자로서 잠시 생각에 잠기게 하더군요("어떤 소년이었길래 이런 감성을 지니며, 노인이 되어서까지 그 기억을 간직할까?"). 덜루스라는 추운 지방의 소읍에서 뉴욕으로 상경할 무렵의 자신을 그는 가진 것 없는 떠돌이 청년으로 묘사합니다. 이때 동시 상영 극장에서 본 영화가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과 <라 돌체 비타>였는데, 아무리 같은 감독의 작품이라지만 단 한 마디로 "영혼을 팔고 세속적인 것에 열중하는, 비열한 괴물 같은 사내 이야기"로 요약하는 게 과연 그다운 관점이다 싶더군요. 두 영화를 다 보았지만 그렇게는 주제가 잡히지 않았기에 이런 그만의 시선이 더 참신하게 다가왔습니다. 언제나 참신했지만 나이 들어서도 그런 자신만의 개성이 전혀 타락하거나 감쇄하지 않았기에 더 흥미로운 점입니다.

자신만의 독보적 세계를 구축한 예술가라면, 특히 나이 들어 평판이 확고해진 이후 타인의 영향을 그 젊은 시기에 받았다는 걸 인정하기에 인색할 수도(때로는 부정직할 수도) 있는데, 밥 딜런은 아직도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총각이 "그렇쥬 뭐"를 너스레떨듯 솔직하기 짝이 없습니다. 분석하지도 않고 포장하지도 않고, 내가 그 서툴렀던 시절 누구와 엮이며 기분이 이랬고 그 누구에 대한 평가는 이랬다며, 아직도 소년인 양 감정을 털어놓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가 "문학적으로" 무엇을 성취했는지는 평가가 분분할 수 있으나,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당대, 그리고 지금의 대중과 소통하는지는 책을 읽으며 독자로서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쓴 책이라기보다, 전혀 가리는 바 없이(언제나 그랬듯) 자신을 표현하는 한 인간에 대해 알 수 있는 진솔한 기록을 만난다는  기대로 이 책을 펼치면 좋을 것 같습니다. 1970, 80년대를 다룬 후편은 과연 언제나 나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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