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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속도 - 산업혁명보다 10배 더 빠르고, 300배 더 크고, 3,000배 더 강하다!
리처드 돕스.제임스 매니카.조나단 워첼 지음, 고영태 옮김, 맥킨지 한국사무소 감수 / 청림출판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흔히 우리가 착각하는 것과 달리, 속도는 수치적 측면 외에도 방향성까지 같이 강조되는 개념입니다. 절댓값만 문제되는 측정량을 스칼라, 방향이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걸 벡터라고 부르죠. 우리가 미래(가깝건 멀건)을 주시할 때, 얼마나 빠르게 다른 목적지를 향해 돌진하느냐만 염두에 두진 않습니다. 어디를 향해 가는 중인지를 더 심각하게 살피고 이동하는 행동 주체라야, 특히 이런 미래의 전망을 전략 대상으로 삼는 경우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지금이, 문명이 시작된 이래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괴적 격변의 시대라고 진단합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레이 커즈와일이 그 도발적이고 발칙한 어투로 "당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은 홍수에 떠밀리는 무력한 부유물처럼, 덩치가 크든 작든 떠밀려갈 것이다."라고 단언한 후, 학자, 대중 저술가, 강사 등이 자신들의 책과 강연에서 입을 모아 외치는 기조이긴 합니다.
이 책(의 저자들)이 내세우는 주장이 다른 점이 있다면 첫째, 최상위 논점으로 잡은 토픽들이 미세하게나마 (다른 책들과) 차이 나는 포섭 범위를 가지며, 둘째 브렉시트 등 최근의 중요 사건, 모멘텀을 논의 중에 귀납하려 애썼으며(물론 이 책의 원서는 2015년 중에 발간되었으므로, 브렉시트 논의만큼은 이 한국어판[서문]에 한해 추가된 사항이겠습니다), 셋째 변화의 방향성을 뚜렷이 서술함과 동시에 그 파괴력의 파장까지 (다양한 사례와 함께)강조했고, 넷째 이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다른 책에 비해 "산업간 연계가 보다 고도화한 현실"을 (대중서의 한계 안에서) 최대한 부각하려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네번째의 특징 덕분에, 독자들 중 거시경제학, 특히 산업연관론 백그라운드를 지닌 분들에게 이 책은 각별히 재미있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선지식 없이도 이 대목은 독자의 눈높이와 (지적) 수요에 맞게 그 대의가 이해될 것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No Ordinary Disruption입니다. 그 앞에는 "There is", 그 위에는 "any more"가 생략된 걸로 보아 "더 이상은, 예사로운 파괴는 없다." 정도로 여길 수도 있고, 아니면 뒤에 "~ should be expected." 정도가 생략되어 "무난한 파괴는 꿈도 꾸지 말라(당신이 안주하려 들 현실은 인정사정 없이 파괴될 것이다." 정도로 새길 수도 있습니다. 그 뒤에 붙은 부제가 이 책의 주제지요. "(변화를 이끄는)네 가지의 힘 - 기존의 트렌드를 모두 파괴할". 20세기 들어 세계 경제는 여러 차례의 몰락과 위기를 거치며 이만큼이나 성장했고, 그 변화의 과도기에서 취약 계층은 물론 경영자와 정책 당국자들이 겪은 아픔과 좌절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반면, 이런 과거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이에 대처하는 이들이 최소한으로 의지할 연속성이랄까, 지침, 혹은 토대 비슷한 것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저자들이 강조하는 건, 지금부터 우리가 맞게 될 엄청난 변화의 물결에서는 그런 것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무척 살벌한 경고입니다.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의 제목은 "그래도 희망은 있다"입니다. 어찌 보면 이 책의 주된 논지와는 잘 안 어울리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저자들께서 주장하는 바는, 여태 철칙이라 여겼던 모든 규범이 무너지고 일말의 확실성도 없어 보이는 현실에서, "그래도 절망할 일은 아니다"라는, 이성적이고 유연하게, 합리적으로 모든 도전과 위험에 대응하면, 기존의 번영 수준을 유지하거나, 혹은 여유 있는 생존의 레벨에 도달할 희망은 여전히 (그런 현명한 행동 주체에게)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난폭한 랜덤 워크에 맡겨져, 노력을 하건 말건 합리적 사태 파악이 가능하건 말건, 아무에게나 뜻밖의 행운이 떨어지는 (반대로 말하면 누구에게나 재앙이 닥칠 수 있는) 식으로 미래가 전개되지는 않으리라는 토닥임입니다. 특히 이런 언급을 한 걸 보면 저자들에게도 브렉시트 가결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나 봅니다(트럼프 당선까지 목도한 지금은 과연 어떨까요?).
속도는 방향성을 포함한 개념이므로, 속도의 실체를 알려면 무엇이 뒤에서 이를 추동하는지를 살피는 게 먼저입니다. 그 첫째는 도시화인데, 특히 저자들은 중국(과 동남아, 그리고 인도)의 도시들에서 어떤 거센 변화의 추세가 보이는지에 주목합니다. 이런 도시들은 자국의 낙후된 지역보다, 미국의 뉴욕 같은 가장 번화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개성을 닮아가고 있다는 지적이 특히 눈길을 끕니다. 이런 신흥 도심에서 시장 조사를 하는 기업들이, 그저 도시의 "국적"에만 현혹되어, 거주민들의 취향과 선호를 엉뚱하게 파악해서는 안 됨을 뼈아프게도 짚는군요(쉽게 말해, 호치민이나 리우의 트렌드를 파악하려면, 같은 나라의 농촌이나 오지가 아닌, 차라리 도쿄나 파리의 결과를 참고하는 편이 낫다는 겁니다). 이들 도시에서는 여러 역량과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이 "밀집하여 거주하기에", 개개인의 기량 그 단순합보다 더 큰 폭의 혁신과 더 빠른 속도의 변화가 목격됩니다. 이렇게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도시를 여럿 가진 나라가, 21세기의 변화와 대세를 선도하며 성장 자체도 가파르게 이룰 것임을 책은 분명히 짚습니다.
다음으로는 파괴적 혁신, 일찍이 없던 "파괴적인 양상으로, 기존의 성과가 거의 무의미할 만큼" 혁신을 이루는 배경에, 12가지의 주요 팩터가 자리함을 강조합니다. p69에 보기 좋게 도식화되어 있는데, 12가지(혹은 그 이상, 그 이하로 정리해도) 주요 요소는 다른 책에서도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이 책에서 주목해야 할 건 그 12가지를 무슨 상위 범주로 나누느냐 하는 그 기준이죠. 1) 사물의 구성 요소 변화, 2) 에너지에 대한 생각의 변화, 3) 인간을 위해 일하는 기계, 4) IT의 활용과 발전법, 이 네 가지 범주가 그것입니다.
저는 이런 상위 분류가, 다른 책에 비해 학문적 근거를 갖추었고, 인식의 과정에서 더 차분한 접근을 보이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3)을 보면 그 하위에 첨단 로봇, 무인 자율주행 자동차, 3D 프린팅 등을 배치하는데, 그 흔한 "인공지능"이란 단어가 이 페이지에 전혀 안 보입니다(물론 본문에선 등장합니다). 책의 저자들은 현재 마케팅 차원에서 지나치게 과장 홍보된 이 개념의 무차별 적용을 자제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유능한 로봇(드론 포함)의 등장만으로도 인간의 삶은 충분히 개선되고, 동시에 많은 일자리들을 더 나은 능률 발휘로 대체할 것입니다. 1)에서 (요즘 대중서들에서는 간과되는 경향인) 신소재 개발을 뚜렷한 한 아젠다로 올려 놓은 것도 보다 현실적인 프레임으로 보입니다.
고령화 추세는 어찌 보면 저런 로봇화의 급속한 부각과 앞뒤가 맞물린 방향성입니다. 젊은 노동력 공급이 감소되고 육체 노동의 수요는 여전하니, 로봇이라도 나서 빈틈을 메워야죠. 반드시 원가 절감과 비능률 요소 제거만이 근본 추동력은 아닙니다. 이런 고령화에 대응하는 노력은 특히 이 문제를 일찍부터 겪어 온 일본에서 두드러집니다. "현실이 된 나비효과"는, 한 가지 변화가 파급되는 경로가 너무도 다양해져, 일견 동떨어져 보이던 산업 섹터에서 걷잡을 수 없이 얽히고설킨 파장이 이어짐을 지적합니다. 저자들은 그 정치적 함의와 무관하게, "세계화"의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변형적 등장 예를 여럿 지적합니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도시화 역시, "세계는 통합되고 긴밀히 연결되어 간다"는 전제를 깔아야 의미 있어지는 지적입니다.
새로운 소비자가 세계 경제를 이끈다는 지적은 딱히 충격적인 내용은 아니고요. 앞에서도 언급된 대로 신흥국, 신흥 도시의, 신흥 중산층이 선진국의 세련된 소비자들의 대세를 따라가되, 자신만의 분명한 요구와 개성도 내세움으로써 글로벌 기업의 전략 전술 설정에 큰 영향을 줄 것이며, 이런 미세한 차이를 예측, 적응하는 데 실패하면 어떤 기업도 생존 못 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책에서는 LG 냉장칸이 각국의 실정에 따라 어떻게 구조를 바꾸는지, 네슬레가 중국 시장에서 얼마나 더 달아지는지 등을 예증으로 내세웁니다.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주장은 1) 철저히 현지화한 마케팅 기법을 발견하며, 2) 특히 인적 자원보다는 자본 분배를 유연하게 이뤄낼 것을 당부하는 대목입니다. 이 책에서는 LG의 사례가 성공적 대응의 예로 자주 거론되던데(저 앞에서는 음식물 쓰레기통에 RFID 태그를 장착한 유플러스의 사례를 실음) 여기서도 현지화에 성공한 가전팀의 사례가 소개됩니다.
p169의 "수요가 늘어나도 가격이 떨어지는 시대"는 최근 몇 년 간이 그러한 추세였으며 지금부터는 반대로 바뀐다는 지적이니 독자들이 읽으면서 오해가 없어야겠습니다. 원자재 가격은 (이 책 저술 시점 기준) 지속적으로 오르는 중이며, 그 추세에는 분명한 동력이 작용한다는 저자들의 지적은 팩트에 근거했을 뿐 아니라 담론적으로 타당합니다. 옥수수 생산이 (예전에는 전혀 예상이 안 되던 패턴으로) 에탄올의 공급 과정에 대거 영향을 끼친다는 실례는, 산업간 연관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고도화되는 무서운 저변의 현실을 입증합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 원유가가 이런 "원자재 가격의 추세적 상승"에 포함된다는 지적에는 반대합니다. 전통적 원유 생산 방식은 이미 추세적으로 경쟁력을 잃는 중이며, 파쇄법의 개발(앞으로도 그만한 혁신은 계속 나올 것입니다)로 인한 (셰일유 등) 새로운 생산 방식의 점유율이 점점 높아짐도 자명하며, OPEC 내부의 역학 관계 등 정치적 요인이 이런 거대한 산업적 대세를 거역할 수 없음은 강조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죠.
경계선이 흐려지고, 전례 없는 파괴적 속도로 기존의 틀이 붕괴되는 지금, 미래에 어떻게 각 개인과 정부(정책 결정자)가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 저자들은 다양한(그러나 친근한) "인문적 소양에 기반한 충고"들을 내놓습니다. 변하는 건 세상과 외재 변수이며, 변하지 않아야 할 건 그런 변화에 적응하는 인간의 지혜와 의지입니다. 인류는 여러 차례의 급격한 변화를 맞으면서도 생활 수준과 복리가 퇴보하기는커녕, 그 반대로 총체적 향상과 (장기 관점에서) 더 고른 부의 확산을 이뤄 왔습니다(최근 몇 년 간 양극화가 진행된 건 사실이지만). 이런 급격한 파괴적 변화가 진행되며, 인류의 지혜가 바른 방향을 찾아 나간다면 오히려 이전의 적폐를청산하고, 보다 많은 이들이 고르게 누리는 행복상이 미래를 수놓을 것입니다. 여태까지의 도전과 시련도 결코 만만치는 않았기에, 지금까지 잘 적응해 온 지혜로운 인류의 미래엔 "여전히 희망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