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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 짧지만 우아하게 46억 년을 말하는 법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지음, 이상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7월
평점 :
꼭 짧다고만 할 수 없는 356페이지의 책을 내내 유쾌하게 읽었지만 다 읽고 나니 약간 비장해지기도 합니다.
이 책은 태초의 빅뱅, 지구의 탄생, 300만 년 전 처음 등장한 "우리와 같은 외모를 한" 조상들, 7만 년 전에 처음으로 네트워크 방식으로 전략을 짤 수 있는 뇌를 갖게 된 인류의 등장, 1만 2천 년 전 농경 혁명을 통해 처음으로 정착 생활을 하게 된 계기 등에 대해, 짧지만 논의 체계 전체를 잡는 언급을 한다는 점에서 빅히스토리론과도 한 맥이 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으로서의) 문명과 역사에 대한, 즐거우면서도 우아한 스타일의 이야기들입니다. 한편으로, 문명사 전반에 대한 통합적 시야를 바탕에 깔고 있기에, 우리 시대의 사상가나 지적인 기여자들, 예를 들면 레이 커즈와일, 리처드 도킨스, 그리고 (저자의 친한 친구라며 본문 중에 몇 번이나 자랑삼아 거명되는) 유발 하라리 등의 관점도 적정 수준으로 서술에 녹아 있습니다. 친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하라리의 주장 중 상당수가, 선사 시대와 먼 미래를 보는 저자의 문명관과 논점을 같이합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 혹은 역사를 요약해서 들려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대부분의 에세이나 대중서 들은 연대기순을 따르곤 합니다. 이 책은 그렇지 않고, 개요, 결정적 전기(轉機), 도시, 영웅론, 악당들(영웅과 종이 한 장 차이), 발명(기술론), 말의 힘, 사상, 예술 등으로 토픽을 나눕니다. 역사를 파악하는 여러 시야, 개념, 화제 등을 통해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총체적 모습을 바라보자는 건데, 이런 개성적인 편제는 다른 책에서는 보기 어려웠습니다. 개별 챕터도 흔히 보는 역사 개론서와 달리, 저자가 관심을 갖거나 큰 비중을 둔 주제 중심으로 매우 자유롭게 전개됩니다. 대부분은 품격 있는 말투에 담긴, 우리 동시대인들이 공유할 만한 보편타당한 상식적 결론, 문화 상대주의, 양성평등, 물질주의 배격,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적 시선, 미래지향적 사고, 관용과 포용을 중시하는 평화주의, 반(反)부시- 반 트럼프 주의(ㅋ) 등의 기조입니다.
저자는 휴양지에 가족과 함께 놀러갔던 체험을 화제로 꺼내며 책 서두를 엽니다. 틴에이저를 둔 평범한 아버지(사실 그렇지는 않은데, 이유는 리뷰 끝에서 밝히겠습니다)로서 그는, 역사적 장소에 관광을 와 현지의 유적과 호흡하며 실물과의 감개어린 만남 자체를 만끽하기보다, 자기가 여길 다녀왔다는 흔적을 인스타에 올리기 바쁜 자녀들을 보며 많은 상념에 젖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 서문에서 이어가는 상념은, 우리들 인류는 얼마나 많이, 큰 폭으로, 현재(현재 자체가 모호한 개념이라며 회의적인 태도입니다)와 달라질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책 본문 중에서 "그래도 우리들 조부 세대는,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예측이 가능한 시절이었다."라며, 변화 자체가 존재의 본질을 위협하는 조짐에 대해 일말의 불안감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리뷰 맨앞에서 말한 것처럼 책 대부분은, 우리가 대중 역사서에서 익히 접해 온 다양한 사건들을 놓고 저자만의 시원시원한 분석과 평가를 내리는 재미에 읽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 문단에서 얘기했지만, 저자의 역사관은 인간 본성에의 불안한 통찰과 옅은 비관주의에 어느 정도 손이 닿는 성격입니다. 이 때문에 브라이슨의 저작들보다는 심각하게 읽히고, 문장은 더 우아합니다. "중요한 사건일수록 더 늦게 알아차린다" 같은 그의 견해는, 대체 무엇이 역사 근본을 바꿔 놓은 결정적 계기이며, 어디까지나 그저 우연의 장난인지를 두고 제기되는 오래된 질문에 대해 우리 동시대인으로서 현대적 감각과 체험이 더 반영된 해답에 가깝습니다. 이사야(아이자이어. 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 벌린 경, 로버트 그로세테스테(그로스테스트), 헤겔,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기까지 그가 신뢰를 보내거나 깊은 영향을 받은 사상가, 역사가들은 속한 시대도 다양합니다(제 생각엔 E H 카도 언급해 줬으면 했는데요).
시리아에서 발흥하여 한때 근동의 제국을 형성했던 제노비아 여왕에 대한 저자의 열렬한 지지와 선호도 눈에 띕니다. 탈 서유럽, 탈 남성 등 여러 관점에서 좋은 토의 소재를 제공해 주는 사례이겠는데요. 저자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실제 인물의 행적에 낀 거품과 신화를 과감히 제거하며(예: 그녀의 최후는 전쟁터의 죽음이나 포로로 잡힌 후 신전에 바쳐진 제물 처지가 아닌, 좀 깨지만 로마 원로원 의원과의 결혼 후 교외에서의 안락한 거주로 장식되었다), 위인을 평가할 때도 정확한 그의 행적과 영향까지만을 기준으로 삼자고 합니다. 이런 관점은 책 부록으로 실린 "잘못 알려진 상식" 여러 꼭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아무래도 우리 독자들이 눈 크게 뜨고 볼 만한 대목은, 대체 위대한 영웅과 저주받을 악당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고, 혹은 있어야 하느냐를 놓고 저자가 (적어도) 두 챕터에 걸쳐서 개진하는 지론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아주 통속적인 이유에서도 재미가 나게 마련이죠. 저자는 실제로 히틀러 체제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망명 생활까지 했던 집안 출신인데요. 그래서인지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 매우 긴 분량을 할애하여, 책의 여러 대목에서 자세히 논합니다. 물론 히틀러 개인에 대한 증오나 단죄보다, 그의 사례를 통해 역사 전체가 어떻게 합리적으로, 비판적으로 재정립될 수 있느냐는 데에 무게중심이 놓입니다.
"세계정신은 무엇이며 위대함의 본질을 규정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헤겔은 일찍이 "구태와 현상을 깨뜨리는 일체의 도약과 결단" 정도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기준에 의하면, 지옥과도 같았던 경제 공황과 국가적 열패감을 한순간에 떨쳐 버리게 한 히틀러가 정면으로 "위대함"에, 난감하게도 해당됩니다. 허나 저자는 망설이지 않고, "편협한 증오에 의해 추동되는 행동과 철학, 배금주의, 유대인은 물론 동족까지 혐오한 변덕스럽고 관용 없는 정신" 등을 거론하며 위인의 반열에서 히틀러를 끌어내린 후 준엄한 단죄를 시작합니다(거듭 말하지만 저자는 직접 피해를 입은 집안 출신이란 점에서 개인적 동기를 유대인들과 달리할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발 하라리하고도 친구?ㅋ).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드로스 3세 같은 이는 어떠한가? 여기에 대해 "자기 중심 과대망상, 근거없는 낙관주의, 선민사상, 대량 학살 책임" 등을 들어 저자는 (히틀러만큼은 아니라도) 역시 결격 판정을 내립니다. 그가 높이 평가하는 인물은, 당대의 기준으로 분명 패배자에 불과했는데도 이후 역사를 통해 영원한 영감과 각성의 근원으로 군림한 예수, 사도 바울이라든가, 인간에게 자유의 의미를 깨우친 모세 같은 인물들입니다. 혹은 구체제의 완강한 지배에 맞서 양심과 정의감, 용기의 가치를 일깨운 마르틴 루터, (저자의 표현으로, 그와 이름이 같은)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등을 꼽습니다. 시선이 서양에 꼭 편중된 건 아니라서 예컨대 기독교와 불교의 좋은 점만 한데 모아 잠시 중근동에서 큰 인기를 끈 마니 교의 가르침도 옹호합니다.
여기서 저자 특유의 비관주의가 눈길을 끄는데요. 그의 말에 따르면 왜 이런 좋은 종교가 한때의 흥성에 그치고 이후 장기적으로 발전할 발판을 마련하지 못했는지, 이것이 바로 역사의 맹목성이나 무작위성을 반증하는 대목이 아닌지 하는 것입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책 본문은 맥베스의 한 대사를 통하여, 인생은 별 것이아니고 무대 위의 백치처럼 의미 없는 분노와 헛소리를 떠들다 짧은 생을 마감할 뿐이라는 인용으로 마무리됩니다. 책에는 시애틀 추장의 유명한 항복 연설도 나오는데, 이 역시 비관주의와 허무주의를 진하게 표현한 내용이죠.
저자는 앞서 헤겔을 잠시 언급하며, "그는 슈투트가르트 출신 중에 우리 누나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라며 재담 섞인 소개를 합니다. 그 누나라는 분은 이제는 초로에 접어든, 한때 엄청난 과소비와 기행, 도도한 매너와 미모로 전세계적 화제가 되었던, 투른 운트 탁시스 공령의 어르신인(부군 요한네스 공은 일찍 타계) 글로리아 폰 쇤부르크입니다(물론 결혼 후에는 시가의 칭호와 성을 쓰죠). 시집을 잘 가셔서 존귀한 신분이 되셨는가. 그건 전혀 아니고 본래 유럽 역사책 읽다 보면 신성 로마 제국 관련해서 결정적 대목마다 잘 등장하는 쇤부르크 가문이 바로 이 저자와 그 누님(아홉 살 차이) 집안입니다(투른 운트 탁시스 가에 비해 명성, 재산 양면에서 별로 안 꿀립니다. 프린스와 카운트라는 형식상 위계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서도 글라우샤우 계의 현재 당주 신분인, 유럽에서 손으로 꼽을 만큼 귀한 백작 가문의 어른이 이 책 저자 본인이죠. "폰"도 이만저만 폰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유럽 역사의 산 증인과도 같은 명문가의 후손이 집필한, 역사에 대한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읽어 보면 뭔가 느낌이 좀 다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