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빈 동지 - 세상이 변화하기를 바라는 열망, 그 중심에 서다
로자 프린스 지음, 홍지수 옮김 / 책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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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는 트럼프 같은 국외자가 주류, 그것도 보수 정당 후보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었지만, 고령의 좌파 아웃사이더가 경선 과정에서 끝까지 유력 지지세를 유지하며 존재감을 확인시켰다는 점이 아마도 긴 시간이 지난 후엔 더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질 것 같습니다.

버니 샌더스 노인은 정치에 입문한 지 삼십 년이 되어가며, 거물급 정치인으로 발돋움한 지는 겨우 십여 년 정도지만, 그와 나이 차가 8년 정도 나는 어느 영국의 외골수 진보 성향 정치인은 그의 나이 삼십 대 중반부터 내내 의원 경력을 쌓으며 지금껏 근 사십 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궁을 지켜 왔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낙선 한 번 없이 의원직을 유지한 점도 대단하지만, 도대체 타협을 모르며 입문 당시의 노선과 신조를 거의 원색 그대로 지켜 왔다는 사실이 더 놀랍습니다. 이분은 이처럼 한사코 순수한 소신을 내세우며, "국회의원의 존재 이유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뽑아 준 지역구민을 정직히 대변하는 데에 있다"라는 원칙만을 최우선으로 강조했고, 지금도 그런 태도에 변함이 없습니다. 진보정당이라고 해서 이런 원칙파를 언제나 우대하는 게 아닙니다. 그의 고집이 너무도 강했던 터라, 지난 수십 년 동안 노동당의 주류, 수뇌부는 이분에게 그 연륜에 맞는 당직이나 정부 요직(2차 대전 이후 노동당도 오랜 기간 동안 정권을 잡았습니다)을 맡긴 적이 없습니다.

"저 동지가 당수 자리를 언젠가 맡을 날이 있을까요?"
"예끼, 농담도 분수가 있어야지."

"왜 그렇게 일반 유권자들과 오래 시간을 끌고 대화를 해? 지금 '제레미 짓' 하고 있냐(donig a Jeremy)?"

이처럼, 소신의 순수성을 지나치게 고집해도, 같은 진영에 자리한 동지들로부터조차 소외되기가 쉬운 게 세상사의 공통된 이치입니다. 그런데 그가 정치를 시작하고 근 사십 년이 가까워오는 지금, 헤럴드 윌슨, 제임스 캘러헌, 닐 키녹, 존 스미스, 그리고 고든 브라운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거물들이 이 거대 진보 정당을 주름잡았지만, 이분은 한직이든 문제아 역할이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의석 한 곳을 지키며 동시에 노동당의 오랜 가치와 이념을 수호해 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작년(2015) 9월, 이분은 노동당 안에서 최고급 의복을 빼 입고 출신 학교의 세련된 어투를 자랑하고, 평민들은 알아 들을 수 없는 미사여구를 입에 올리며, 신사의 우아함으로 좌파의 가치를 수호한다던 위선적 거물들 사이에서 그저 농담거리로만 여겨졌던 일을 드디어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전당대회에서 최다 득표를 얻으며 자신이 40년 동안 몸 담았던 당의 대표가 된 것인데요. 그는 지난 달 열렸던 재신임격 투표에서 또다시 재취임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이분의 이름은 제레미 코빈. 현재 영국의 근로 대중과 양심적 지식인들 상당수의 희망으로 떠오르는 정치인이죠.

이 책은 제레미 코빈의 일대기와 그에 대해 바르게, 혹은 그릇되이 알려진 사실들에 대한 차분하고 공정한 검증을 담습니다만, 반드시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일단 특정 이슈가 거론되면, 어린 시절의 제레미와 현재의 코빈, 혹은 청년 시절의 그가 어떤 입장이었는지 교차해서 조명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제레미 코빈 노동당 당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독자들뿐 아니라, 시민의 참여를 지향하는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그 구체적 이슈에 대해 저 서유럽 선진국의 좌파 정당, 그 정치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싶을 이들에게 아주 유용하겠습니다. 이 책은 그래서, 인물에 대한 책이자 이슈에 대한 책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노동당의 골수 좌파(좌파 중의 좌파) 한 인물을 통해 특히 1980년대(대처 수상 집권기) 노동당 전체의 역사를 둘러보고, 당연하게도 영국 최근세사를 동시에 분석하는 의의도 갖습니다. 책 맨앞에는 역자님이 간단하게 영국 정치 제도에 대한 개념잡기식 설명을 붙인 글이 나오는데, 정치제도나 헌법 사항에 대해 밝은 독자라 해도 최근의 개혁 과정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특히 2010년 이뤄진 법 개정은 영국의 내각제가 독일식의 "건설적 내각불신임제"에 꽤 많이 다가간 흔적이 역력하기에, 어떤 과정으로 이런 혁신이 이뤄졌는지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물론 이런 개혁은 상당 부분이, 코빈 같은 소신파 정치인들의 분투와 노력에 빚진 바 큼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제레미 코빈은 보통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뜻밖에도 현실 정치에 몸 담은 이들 중 가장 좌파적인 스탠스를 고집하는 인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코빈 가가 어떻게 중산층 가문으로 성장하였으며, 조부모와 부모 대에 윤택한 환경을 형성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밝힙니다. 노동당 유력 인사 중에는 이튼 스쿨, 옥스브리지 출신도 많고, 그 중에는 가문 대대로 세습 귀족을 지닌 이들조차 상당수입니다. 그러나 제레미 코빈처럼 도대체가 타협을 모르는 원칙을 고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요. 그의 먼 조상 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짐작대로 어려운 여건에서 고된 노동, 혹은 기술 발휘로 착실하게 돈을 모은 이들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풍이나 집안 내력이란 한 사람을 판단할 때 결코 무시할 수 없으며, 저런 환경에서 성장한 이였기에 체제와 시스템을 마냥 긍정적으로 보기란 태생적으로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레미 코빈의 부모는 흥미롭게도 집안, 특히 어머니 쪽 가문의 만만찮은 반대를 무릅쓰고 맺어진 연이더군요. 이 부분 관련 저자의 집요한 취재와 조사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이 부부는 특히 금슬이 좋았는지, 제레미의 손윗 형제 이름을 일일이 익혀 두느라 잠시 독서 속도가 느려질 정도였습니다. 피는 못 속인다고 이분의 형들 역시 정말 성격이 만만찮은 분들이고, 한번 누구한테 원한을 품었다거나 반대로 호의를 가졌다 하면 그 감정을 끝까지 가져가는 타입들이더군요. 전형적인 영국 중산층의 넉넉한 지원 덕에 그는 좋은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그의 타고난 기질은 주위와 융화하는 과제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머리가 좋지는 않았으나 대신 매사에 열심이고 진지했다." 이런 평가가 말해 주듯 그는 가슴 속에 담아 둔 소신이 새로 습득하는 지식을 무척 까다롭게 필터링하는 내면의 구조를 가진 인물이었고, 이런 까닭에 공부를 잘하지 못했으며, 결국 졸업도 못 하고 사회로 나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행로와 선택에 아무 미련도 갖지 않는 그였으며, 우리들도 당연 그라면 그러려니 하고 넉넉한 이해에 도달합니다.

제레미 코빈 같은 타입이 이성을 사귈 때는 어땠을까요? 유복한 집안에서 마련해 준 사회 진입의 발판을 잘 활용하지도 못한 채 불쑥 성년을 맞은 청년을, 그 어떤 여성이 호의적으로 봤을 리 만무할 것 같지만, 그의 첫째 부인 제인 채프먼은 "성실하고 신념에 불타는 남자였으며, 당시에는 외모도 준수하게 보였다." 라고 회고합니다. "첫째 부인"이라는 타이틀에 너무 구애받을 건 없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원래 이혼과 결별도 쿨하게 이루는 게 오랜 전통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고 예전에 이희호 여사가 "제가 보기엔 매력적이었어요." 라며 KBS 아침마당 프로그램에 나와 술회하고, 방청객들이 큰 웃음을 터뜨리던 장면이 기억났습니다. 제가 보기에 책 표지에 나온 사진, 그리고 유튜브 등에 올라온 영상에서 그의 모습은, 노인치고도 준수하며 위엄이랄까 인생을 알차게 살아온 이들 특유의 건강함이 물씬 풍기는 듯합니다. 뭐 어때서 그러시는지 ㅎㅎ

제레미 코빈 하면 그 과격한 소신에 걸맞게 행동거지나 정치 스타일도 꽤나 단선적이고 다변일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이런 선입견은 그를 직접 만나본 이들에 의해 여지없이 부정됩니다. 그는 심지어 첫째 부인과 헤어질 때에도, 직선적이고 격정 넘치는 상대의 의견 개진에 일절 응하지 않은 채 조용히 "반대"의 뜻만 표시하고 보내 줬다고 하는군요. 의원이 되고 나서 그의 입장에 반대하는 정치인이 "당신 내가 전직 프로 권투 선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라며 위협적으로 나오자 "나는 프로 달리기 선수라고 하죠."라며 그 자리를 그냥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는 토니 벤 같은 좌파 거물을 우상으로 삼았지만, 자신은 말도 서투르고 사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부족한, "전형적인 지방 의회 의원이나 하면 딱 맞을 타입"이었다고 합니다.

과시형 인물은 다변에다 방대한 지식을 과시하며 상대를 압도하려 애쓰는 게 보통인데, 이 제레미 코빈은 정확히 그 대척점에 위치한 사람이라 볼 수 있죠. 이 제레미 코빈이 정치를 갓 시작한 하원의원 시절, 대처 수상이 출석한 자리에서 직접 그녀에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취임하기 전 2700명도 채 안 되던 노숙자가 지금은 27,000명을 헤아리는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에 대한 그녀의 답은 "이즐링턴 같은 곳의 지방의회가 빈집을 활용하는 데 서툴러서 아닐까요?"였는데(이때 노동당 의석에서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고까지 책에 다 나옵니다), 이 말은 중앙정부 측의 반대당 집권 지역 실정에 대한 독설일 뿐 아니라, "지방의원 깜냥밖에 안 되는 자가 의회의 존엄도 모르는 무슨 턱도 없는 원색적 발언이냐"는 대처 수상의 불편한 심사가 드러난 발언이기도 하죠.

제레미 코빈은 이 책에도 나오는 것처럼, 노동당 내 주류 인사들에 의해 "출당"이라는 큰 위협적 조치를 당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대의정치는 본디 "무기속위임"이기 때문에, 지역구민의 개별 의사 변경(그런 게 측정 가능하다면)에 일일이 구애받을 필요는 원칙적으로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코빈은 그런 태도야말로 정치인의 무책임과 위선을 폭로하는 악폐라고 여겼기에, 언제나 지역구민의 의사를 현지에서 청취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고 실천에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런 게 당시 노동당 수뇌부의 눈에 아주 거슬렸던 겁니다. 여튼 자신이 몸 담고 자신의 자아를 확장하여 종신토록 헌신하고자 하는 당(黨)이 그 충의를 고깝게 본다면 이런 것만큼 당사자에게 서러운 일이 또 없을 겁니다. 앞서 말했듯 그런 전횡을 휘두르려 한 "높으신 분들"은 지금 간데없고, 백오십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노동당의 지휘와 기치는 지금 그의 몫입니다.

제레미 코빈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인물로 유명합니다. 소위 패션 좌파라고 부를 수 있는 인사들의 특징을 보면, 귀족이나 중산층 출신이면서 의식적으로 노동자 말투를 꾸며내어 대화하고 연설하는 타입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레미 코빈은 자신이 중산층 출신인 사실을 타인이 보기엔 필요 이상으로 부끄러워하는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그를 애써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는 게 특이합니다. 참고로 코빈 전 전 대에 노동당 당수를 지낸 고든 브라운 같은 경우 너무 티가 날 만큼 옥스브리지 출신이라 이것 때문에 표가 깎일 것을 우려한 이들이 있었을 정도였죠.

제레미 코빈의 한계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게, 그가 좌익에 입문할 때 지배적인 분위기가 그랬던 것처럼, EU(당시에는 EEC)에 대해 지나치게 적대적인 태도라는 점입니다. 이번에는 그는 브렉시트에 찬성했는데, 이는 주류 진보 진영의 스탠스와 동떨어진 태도일 뿐 아니라,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혐오스러운 구태"로 지적되기까지 합니다. 사실 이 점은 그의 나이(그가 속한 세대)를 감안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닌데, 어지간히도 한번 옳다고 마음 먹은 소신을 안 바꾸는 그의 퍼스낼리티를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긴 합니다. 그가 청년기를 보낼 무렵이면, 성장의 한계에 직면(특히 광대한 시장과 자원을 보유한 미국과 대조할 때)한 자본가들이 정치인들과 손잡고 저개발국의 잉여 저가 노동력을 흡수하려 고안한 장치로 시작한 프로젝트이긴 합니다. 그러나 지금 EU를 이렇게 인식하는 측은 거의 아무도 없고, 오히려 진보, 리버럴들이 차별 없고 국경 없는 세상을 이루려 활용(역이용?)하는 마당이 된 게 대세입니다.

한 인간에 대해 그 진실성과 깊이를 가늠하려면, 말로 내뱉은 바를 그의 일상과 삶 속에서 얼마나 실천을 해 내는지를 보고 판단하는 게 (가혹할 수는 있어도) 가장 확실한 기준입니다. 이런 기준에서라면 우리의 "코빈 동지"는 정치인에게 기대할 수 있는 중 가장 완성된 인격자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동료, 혹은 적대 진영의 인사들이 그를 놓고 평가하는 말 중 일관된 게 있습니다. "그가 이상으로 삼고 내세운 주장들은, 당시에는 아무도 동조자가 없었으나, 지금 돌이켜 보면 어느새 보편적 공감의 가치들이 되었다." 바로 이런 게 진보(progrssive)의 본래적 정의이며, 도덕적 기반이자 존재 이유입니다. 토니 블레어가 제3의 길을 내세우며 모두의 기대를 모았을 때, 자신의 자녀를 고급 사립 학교(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에 보낸 게 들통나자 많은 이들이 지지를 거두었습니다. 코빈은 반면 정색을 하고 공교육을 옹호하며 자녀에 대해서도 이 원칙을 그대로 적용했는데, 심지어 그는 (자녀가 아니라 아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예외가 없었으니(ㅎㅎ) 말 다했죠. 과연 우리 같으면 이런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산다며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 수 없기에 국내, 심지어 국외에서조차 이런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에게 무한한 갈채를 보내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 표지만큼이나 발갛게 상기된 가슴으로 책을 덮을 수 있는, 독자를 부끄럽게, 동시에 뿌듯하게 만들어 주는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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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이동 -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성공의 방식
데이비드 버커스 지음, 장진원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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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나 4차 산업 혁명이 초미의 화두입니다. 여러 사람이 다양한 트렌드를 내세우며 이게 미래의 대세라고들 합니다. 예언되는 모든 진보와 발전상이 실현되면 소비자로서 우리의 삶은 훨씬 풍족하고 만족스러운 미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생산자로서 기업의 위치는 파리목숨처럼 위태로워지며, 현명한 전략이 세워지지 않으면 언제 도태될 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경영자는 한시라도 놓칠 수 없습니다.

경영에 혁신이 필요하다는 건 곧 기존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걸, 즉 그간 잘해오던 노하우나 지혜마저 무분별하게 폐기할 수는 없습니다. 경영자는 대체 어떤 원칙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마인드와 조직의 체질을 점검해야 할까요?

여기에서 학자들, 혹은 실무가들의 생각은 갈립니다. 저자의 그것은, 우리 독자들도 한때 일각에서 강조되었던 참신한 아이디어라서 기억하고 있는, "리버스 혁신"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주장입니다. 즉, 복잡한 것, 번거로운 것을 일일이 유지하거나 집착하지 말고, 과감하게 제거하고 떨어 내어서, 필요한 핵심만 갖춘 채 앞으로 진격하라는 게 그 요지입니다.

직원들에게 이메일 이용을 금지하라면 황당하게 느껴지는 게 보통의 반응이겠습니다. 이메일은 업무상 처리해야 할 많은 용건을 담은 채 수신되거나, 반대로 거래처, 혹은 회사 내부에서 나에게 부여된 사무를 처리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이메일의 과도한, 혹은 분별 없는 접근이 멀티태스킹을 방해하고, 그 자체로 (이메일만이 유발하는) 스트레스를 준다는 것입니다. 업무 시간에 이메일 사용을 극히 제한하는 정책을 이미 도입한 곳은 폴크스바겐과 벤츠 등 독일 업체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이미 "좋은 내용을 담은 이메일은 그 효과가 미미하거나 식상하고, 나쁜 내용은 하루 내내 컨디션에 악영향을 준다"고 결론이 났다는군요.

한때 고객이 왕이라는 말이 (실천 여부와 무관하게) 유행했죠. 그런데 저자는 "고객은 2순위며, 1순위는 당신이 고용한 직원"이라고 하네요. 이 함의는 간단한 게, 직원을 잘 대우하면 업무 성과의 질이 높아지고, 신이 나고 사기가 오른 직원들은 고객을 잘 대우하며, 조직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생기가 돌며 자연스럽게 창의가 샘솟는다는 논리입니다. 책에서는 스타벅스의 예를 드는데, 저는 한국에서도 이런 모범적인 사례를 이제는 많이 접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일본 여직원들 친절하다고 칭찬 많이 하는데, 그렇게 강요된 분위기에서 나오는 기계인형 같은 매너가 고객 만족, 서비스 품질을 높인다고 보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친절보다, 아 이거는 제가 책임 지고 해결해 드리겠다면서 자발적으로 발휘되는 성의가 더 중요합니다. 제가 최근에 SKT 고객센터, 삼성전자 AS 등을 겪으며 실제로 느낀 바입니다. 점장이나 윗선에서 직원들을 존중하니까 이런 분위기가 자연히 조성되는 것 아닐까요? 인적자원관리 면에서 한국이 어떤 면에선 일본을 앞지르는 면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제안도 많이 나오는데요, 예컨대 어차피 일도 못하고 조직에 적응하려 들지도 않고 분위기만 해치는 직원은, 과감하게 보너스를 줘서라도 내 보내라는 겁니다. 이는 법적으로 정리해고가 어려운 한국에는 잘 안 맞는 설명이긴 한데, 그래서 예전부터 명예퇴직 제도를 따로 두기도 한 거죠. 미국에선 비교적 자유로운 해고가 이뤄지는데도 저자는 이런 제안을 따로 내놓는군요. 첫째 직원 입장에선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는 게 정답이지만, 소위 "매몰비용(지금까지 적응하느라, 업무를 익히느라 정 붙이느라 애쓴 게 어딘데)"이 신경 쓰이는 직원들은 서로가 괴로운 동거를 이어나가려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직원들에게 명분도 주고, 회사는 비능률적 요소를 제거하고, 둘 다 윈윈하는 길이 "돈 줘서 내 보내라"는 겁니다. 이 예는 자포스와 아마존을 통해 들고 있네요.

휴가는 가고 싶을 때 마음놓고 선택해서 가게 하는 게 직원 만족도를 높이며, 어떤 지침을 만들어서 규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넷플릭스에선 이게 성공했고, 반대로 트리뷴 퍼블리싱(시카고 트리뷴의 자회사)에서는 회사가 몇 푼의 이익을 위해 직원들에게 치졸한 거래를 시도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큰 실패로 끝났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회사는 어디까지나 직원들과 동료애, 신뢰라는 가치를 공유하며 "함께 나가자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거죠. 위의 "고객보다 직원이 우선"이라는 원칙과 일맥상통합니다.

경쟁금지란 그 회사를 퇴사한 직원이 향후 경쟁업체에서 동종 기술과 노하우를 활용할 때 소송에 걸릴 수 있다는 조항입니다(근로 계약의 일부). 그런데 IBM 등에서는 일찌감치 이 조항을 없애고 보다 편한 분위기에서 근무할 수 있게 했다는데요. 그 이유는 마치 대학교수처럼, 일류 직원들이 근무하는 IBM은 지식과 기술의 허브가 되어, 다른 기업들에게 존경받고 장래에 보다 넓은 pool로 타사의 인력까지 활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이디어의 출처는 사내와 사외를 가려서는 안 된다는 건데, 제 생각을 좀 추가하자면, 이런 경쟁금지 조항을 폭 넓게 적용하면 (아주 파격적인 개별 성과급을 책정하지 않는 이상) 오히려 직원들의 사기 저하를 부를 수 있다는 이유도 고려되었다 봅니다(열심히 해 봐야 내 것이 내 것이 안 되고 회사로 귀속). 한국의 소위 공밀레 타령도 여기서 나오는 건데, 다만 기밀 유출까지 가는 지경이면 당연히 어디서건 민사뿐 아니라 형사 소추의 대상이겠죠.

책에는 "과연 개방형 사무실이 (많은 혁신적인 젊은 기업가들이 주장하듯) 능률적일까?" 같은 소소한 질문부터 해서, 자신이 평소 경제와 사업, 인생, 미래상에 대해 가져 온 여러 다양한 견해를 솔직하고 알기 쉽게 털어 놓은 대목이 보입니다. 그가 강조하는 건 "자율성이 강조되고 책임도부여되는 조직, 아예 관리자가 없어도 돌아가는 조직"이 앞으로는 큰 성과를 내리라는 점입니다. 또한 회사 혹은 어느 조직이라도, 끈끈한 1차적 유대가 중시되는 소위 배태성(embeddedness)가 있어야 큰 성과를 낼 수 있다고도 합니다. 미국 기업 하면 대뜸 떠올려지는 여러 냉혹한 이미지가 불식되는 언급이기도 한데, 이런 걸 보면 우리도 고유의 장점은 잘 살려가면서 조직의 효율화를 기해야 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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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변화의 물결을 타라 - 3차 인터넷 혁명이 불러올 새로운 비즈니스
스티브 케이스 지음, 이은주 옮김 / 이레미디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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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AOL하면 한때 메신저의 대명사로 통했습니다. 메신저의 대명사일 뿐 아니라, 그 상품 브랜드이자 동시에 개발사의 명칭이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장을 연 벤처 기업, 혁신의 대명사로 (야후 등과 함께) 널리 존중되었지요. 한동안은 미디어와 일반 대중의 관심에서 다소 벗어난 듯 보였지만, 일선의 전면에 나서기보다 의욕 있고 아이디어가 좋은 신진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동시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소명을 직접 실천하는 "조용한 활약"에 몰두했더군요. 이런 분이 작금의 4차 산업 혁명, 혹은 제3차 인터넷 혁명에 대해 어떤 비전을 품고 계시는지, 미래(라기보다 차라리 현재)의 도전을 예비하는 젊은 세대에게 어떤 충고를 들려 줄지가 궁금했습니다. 당장 현재 잘나가는 분들의 감각도 중요하지만, 초창기 모든 가능성이 오픈되었고 동시에 무자비한 정글을 방불케 한 양상에서 승자로 군림했던 분이, 현업 최전선에서 잠시 물러선 후 차분히 관조하는 비전이 오히려 듣고 싶어지는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첫번째 스타트업(스타트업이란 말조차 생소했던 때)의 회고담을 들으면 국외자조차 안타깝고 참담해지는 그 기분이 바로 느껴지는 것 같더군요. 그가 아직 서른도 맞이하기 전 꾸려 나갔던 "모뎀 제조"는, 제아무리 첨단 기술을 보유했다 한들 시장에서 뒤처진 기술로 곧 퇴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56,000Mbps 규격을 최고라며 전화선에다 꽂고 부러운 눈으로들 보던 시절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러던 게 5년도 안 되어 노트북에 내장형으로 소켓만 보이는 식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아예 전화선 모뎀이 뭔지도 모릅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다른 분야로 눈을 돌려 자사가 지닌 최고의 기술을 시전해 보이며 대기업과 선을 대려 하지만, 대부분은 "케이스 씨, 당신의 의욕과 재능은 인정합니다만..."으로 어려운 말을 꺼내며 등을 돌렸습니다. 어렵게 마련한 거래선도 하루아침에 "이젠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차가운 말 한 마디로 끊기기 일쑤였습니다. 갑을 관계가 한국에서만 치사하게 횡행하는 게 아니라, 미국 실리콘 밸리(젊은 기업인들이 대세인)라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AOL을 창업해서 번듯한 트랙에 올려 놓은 후에도, 심지어 투자자들은 스티브 케이스가 너무 젊다며, CEO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그의 소회는 책 중에 대단히 정직하게 표현되어서 흥미롭습니다. 이런 일이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라, 구세대의 편견과 고집이 엉뚱하게 끼어들어 의욕을 꺾는 개탄스러운 현상은 미국에서도 흔하다는 점 다시 확인하게 되더군요. AOL이 하나의 신드롬을 일으키며 인터넷 문화의 중심으로 등장했을 때, 저자 스티브 케이스는 폭주하는 항의전화를 받으면서도 "우리(회사)가 이만큼이나 중요하게 되었나!" 같은 감격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가 회고하는 "제1차 인터넷 혁명"의 순간이며,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당시 우리는 유튜브였고 구글이었으며 동시에 페이스북"이었을 만큼 대단한 성황이었다는군요(인스타도 추가시켜야).

저자의 관점에서 "2차 인터넷 혁명"은 스마트폰이 주도한 모바일의 전면 부상입니다. 당시, 그리고 지금도, "인터넷"이란 공간이나 매체를 강조하기보다 "모바일 온리"로 완전히 개념을 바꾸는 추세가 업계나 미디어를 지배합니다만, 스티브 케이스는 과거 자신의 화려한 성공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는 모르나 여전히 "인터넷 중심"의 패러다임을 이 책에서 줄곧 유지합니다. 이런 관점이 저는 더 믿음직하다고 여기는데, 이런 시각이 모바일을 경시하지도 않으면서, 기기가 아닌 사이버 공간과 네트웍의 본연 기능에 더 주목하게 돕는 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적하는 3차 인터넷 혁명은, 사물인터넷, 나아가 만물인터넷이 주도하는 산업간의 폭발적 융합상입니다. 그는 이 3차 인터넷 혁명을 통해 특히 의료, 교육, 식품 산업에서 엄청난 성장세가 움트며 미래 경제를 이끌 것으로 전망합니다.

하버드 경영대 교수 크리스텐슨이 지적했듯, 지금은 파괴적 혁신의 시대입니다. 벌써 페이스북이 흔들리는 기미를 보이고, 트위터는 한때 넷의 총아로 각광받았으나 벌써 몇 차례나 결정적인 매각 협상이 결렬되는 등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야후나 라이코스는 아예 잊혀진 기업에 지나지 않는 작금의 실태를 보면, 저자가 냉철하게 꼬집는 대로 현재에 안주하는 기업은 반드시 내일이라도 그 태만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만 같습니다.

다만 그는 이처럼 변화가 극심한 시절일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공감대에 주목하라고 충고합니다. 기업은 지역의 거주민들이나 소비자와 소통을 강화하는 게 생존을 위해서도 영리한 선택이며, 자신 역시 청년기의 대성공으로 거둔 과실을 "케이스 재단"의 복지, 기부 활동으로 이웃과 함께 나누는 데 앞장선다고 합니다.

그는 현재 미국 정부나 미국의 주도적인 기업인들이, 변화하는 추세, "신 경제 환경"에 과연 제대로 적응하는 중인지 자문해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국의 예를 들며 "두려움을 모르는 기업인들의 도전"이 이어진다고도 하고, 중국의 무서운 부상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도 하는군요. 미국이 으뜸가는 퍼스트 무버였던 "1차 인터넷 혁명" 시기와는 달리, 현재는 아프리카, 유럽, 터키, 일본 등 전방위에서 변화를 선도하는 무서운 물결이 몰려온다는 게 그의 진단입니다. 미국인인 그는 "앞으로 미국이 다른 나라를 모방하며 질질 끌려다니는 미래야말로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가 아닌가!"라며 목소리를 높이는데, 여전히 혁신을 선도하는 입장인 미국 기업인이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우리야 더 분발해서 기량을 가다듬어야 하지 않을지요. 책 서문에 나온, 우리 시대 최고의 전기 작가로 이름 높은 월터 아이작슨의 코멘트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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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싸우지 않는가 - 저성장 시대를 돌파하는 강소기업의 3가지 전략
야마다 히데오 지음, 서라미 옮김 / 청림출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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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본주의 사회에서 "안 싸우고" 돈을 버는 사업가는 오히려 의심의 눈초리를 받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자 사이의 무한 경쟁, 완전 경쟁(혹은, 그에 가까운 경쟁)이 빚은 효율로 인해 오늘의 번영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쟁을 피해가거나 독점을 통해 경쟁을 저해하는 모든 행위는,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의 기준, 잣대에 의해 "범죄"로 규정되며, 실제로도 사법, 공법이 아닌 제3의 영역인 "사회법(중 경제법)"에 의해 규율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사업가 입장에선, 가능하면 피 말리는 경쟁 없이 편하게 돈을 벌었으면 하는 마음이 당연히 듭니다. 앞으로 도래할 "제4차 산업혁명" 이후에는 어떻게 그 양상이 바뀔지 미지수이지만, 자본이란 본래 덩치를 키우면 키울수록 시장에서 이로운 위치를 점하며, 일제강점기에도 "물산 장려 운동"이 벌어진 배경이, 도대체 조선인 사업가들의 손에 종잣돈이 좀 모이게나 해 보자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덩치를 부풀린 자본은 개인의 사업 시작(소위 breakthrough) 단계에서만 요긴한 게 아니라, 이미 덩치를 키울 대로 키운 자본이 다른 경쟁자를 다 쫓아내고 독점 체제를 구축하는 데에 더 유용합니다. 가격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반대로 가격을 나에게 가장 유리한 지점에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다면, 사업자 입장에선 그보다 더 좋은 상황이 없습니다. 반대로 소비자의 후생은 축소되며, 이 때문에 자본주의는 자체 생존을 위해 이런 독점 현상을 규제하며, 나아가 생산자들 간의 담합을 통해 이뤄지는 과점까지 제재합니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주제는 그러나 이런 탈법, 초법, 예외적 현상이 아닙니다. 경쟁이 없어지니 사업가의 마음이 편한 것까지는 같은데, 덩치를 키워 경쟁자를 쫓아내거나 (언제 배신할 지 모르는) 경쟁자들과 뒷거래를 하는(그래서 소비자를 등치는) 게 전혀 아니라,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나만의 사업 영역을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그 영역에서 나의 물건만 찾게 하자는 전략입니다. 다시 말해 "싸우고 싶어도 싸울 상대가 안 나타나, 오직 나 자신만이 경쟁 상대"인 블리스포인트를 가리킵니다. 이런 걸 가리켜 예전부터 블루 오션, 혹은 퍼플 오션 같은 말을 써 왔으나, 그런 용어들은 어찌보면 결과론으로서, 혹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그런 시장을 운 좋게 발견하는 사례에 가까웠습니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내용은 그런 사례보다, 진취적이고 혁신 친화적인 기업가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안온한 자신만의 시장을 만들었는지, 그 비결에 대한 것입니다.

저자가 지향하는 미래 이상적인 기업의 목표상은, 바로 강소기업입니다. "소"는 사이즈가 작아야(이게 앞서 언급된, 규모를 키워 독점의 장벽을 높이는 지지난 세기의 악폐와 대조됩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다는 함의이며, "강"은 경쟁력을 통해 다른 참여자의 위협을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는다는 뜻이겠습니다. "강소기업"의 육성은 예전부터 대만 같은 신흥국에서 강조해 온 정책 목표이자 미덕이었는데, 개발 독재기의 한국은 정반대로 재벌 중심의 중후장대형 산업 구축에 몰두했습니다. 저자의 견해로는, 이제 아이디어 중심, 톡톡 튀는 창의력 위주로 수시의 혁신이 필요하며, 이런 환경적 변화에 맞는 빠른 의사 결정이 가능하려면 강소기업 체제 외에 답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경영서를 쓰시는 저자들을 보면 1) 실무 최전선을 뛰다 나이 든 후 컨설팅 쪽으로 전환하신 분들 2) 처음부터 컨설팅 섹터가 주무대였던 분들 3) 학자 출신 세 부류로 대강 나눌 수 있는데, 이 저자님은 3)에 속합니다(컨설팅 쪽에서도 일정 경력 있음). 자신만의 파격적인 주장을 개진하신다기보다, 정평 있는 여러 다른 학자들의 견해를 촘촘히, 다양히 인용하시는 체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본디 경영자나 통치자의 유형도, 자신만의 개성과 일관성을 이어가는 타입(멋있긴 하죠)보다 주변의 말을 경청하고 센스있게 취사선택 잘 하는 타입이 끝에 가서 더 성공하는 것처럼, 이 책은 균형 감각과 조화 있는 분별의 미덕이 잘 발휘된, 실무자들을 위한 개념 찬 요약서 같았습니다. 만약 "틈새시장(niche)", "블루 오션", "비경쟁 전략" 같은 주제들에 대해 여러 책들을 참고하는 수고 없이 단 한 권만 독파하고 최대한 실리를 찾고 싶다면 이 책이 최고의 참고서이겠습니다.

일단 그는 잘나가는 선두기업의 기본 전략이 뭔지를 정리합니다. 선두기업이란 우리가 잘 아는 필립 코틀러의 정의에 기반한 개념인데, 리더/챌린저/니처/팔로워 중 "리더"를 의미합니다. 시마구치 미츠아키는 코틀러의 개념과 정의를 다소 수정하여 1) 주변 수요 확대(치약의 예를 드는 저자의 재치가 돋보이더군요) 2) 동질화 전략(챌린저의 혁신을 무용지물화) 3) 비가격 대응 4) 최적 점유율 유지 등입니다. 4)는 지나치게 시장 점유를 확대하려 들면 역효과(법적 제재도 포함)가 난다는 상황 인식에 기초합니다.

저자가 염두에 두는 "이상적인 기업"이 이런 선두 주자를 의미하지는 않음은 명백하죠. 이 책은 코틀러의 범주 중 니처를 염두에 두고 논의를 이어나갑니다. 작은 기업이 그 유리한 틈새 시장 안의 강자 지위를 유지하려면 여러 (변칙적으로 보이는) 지혜가 필요한데, 저자가 앞서 "선두기업의 전략"을 정리하고 넘어간 건 이유가 있습니다. 전략이란 나 혼자 멋지게 잘 짠다고 상대가 그 의도에 고분고분 응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좋은 전략이나 자원을 가지면 상대도 당연 그 점을 고려에 넣고 반응합니다. 저자는 그래서 "선두 기업- 대체로 규모가 크고 가용 자원 pool도 방대한 곳"이 내 시장에 못 들어오게 하려면, 1) 너무 이익률을 높이지 말고, 2) 너무 시장을 단기간에 키우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이익률이 높거나 시장이 갑자기 커지면 대기업 역시 전망을 좋게 보므로 곧바로 진입합니다. 이후 이 니처는 바로 약자가 되어 시장에서 퇴출되는 수순인데 남 좋은 일만 시키고 희생자가 되는 셈입니다. 시장을 빨리 키우면 투자자금이 빨리 회수되는 장점이 있지만, 이걸 보고 대기업들도 눈독을 들이므로 "그 이후"가 보장이 안 됩니다. 책에는 노래방 기기 시장, 의료용 가운 시장에서 실제로 일어난 재미있는 사례가 많이 나오는데, 이런 구체적인 예증 소개가 이 책의 최고 장점입니다.

특히 니처들은 기술니치(가장 이상적이지만 유지하기 어렵죠), 채널 니치(아주 좁은 경로만을 확보해 막고 있으면 대기업이 접근하기 어렵거나귀찮아서 간과합니다), 시공간 니치, 특수 니즈(수요) 니치 등의 전략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원도 적고 규모도 왜소한데 덩치 큰 대기업과 정면 맞대결을 하다간 자멸의 결과뿐입니다. 전환 비용 니치라는 전략도 있는데, 이 책에서는 캡슐 제조와 약품(펠릿 꼴) 투입을 전담하는 쿠오리커후스(퀄리캡스)社를 전형적인 예로 소개합니다. 이 사업은 첫째 이익률이 적정 수준이고, 둘째 정부의 인허가를 받기가 번거로우며, 셋째 기존의 니처가 쌓아온 평판이 확고한 데다 신규 사업자에 대해 소비자들(제약회사들)이 일일이 눈길을 주지 않고, 행여 작은 사고 한 번의 실수라도 바로 매장되므로 시장 진입을 감행하지 않는다는 거죠. 익숙한 건 그대로 몇 십 년이라도 같은 브랜드를 쓰는 예도 "전환 비용이 높은 예" 중이 하나로 드는데, 일본에서는 종이수첩인 "능률수첩"이 그런 브랜드 파워와 충성도를 유지하는가 봅니다.

선두기업이 강소기업에 빼내 들기 좋은 가장 좋은 전략은 "동질화"인데, 이는 쉽게 말해 "너희들이 갖고 있는 좋은 점은 (좀 치사하긴 해도- 자본주의는 원래 치사한 거죠) 우리가 바로 따라해서 없애 버리겠다"입니다. 여기에 강소기업(니처)가 응수할 수 있는 전략은 딜레마 전략인데, 2006년에 등장한 온라인 전용 보험사인 라이프넷의 사례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1) 영업사원을 통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가입하게 한다 2) 특약을 폐지하고 약관을 간이하게 한다 3) 원가 구조를 모두 공개하여 소비자에게 유리한 계약임을 분명히 밝힌다. 인데, 이걸 대기업에서 따라하다간 바로 타격이 옵니다(이른바, 자산이 부채로 바뀌어 버리는 결과). 그런데 제 생각엔 이 예는 일본의 실정에 제한된 것 같고, 실제로 삼성생명이나 동부화재 같은 경우 다이렉트 사업 부문도 바로 만들어서 이런 틈새시장까지 차지하려 드는 걸 볼 수 있고, 이들은 시장 규모를 천천히 키우는 전략을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으므로 다이렉트 섹터가 더 이상 니치도 아님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경쟁과 협력을 합친 新전략을 "코퍼티션"이라 부르는데, 저자가 이 책 중 원용하는 네일버프와 브랜든버거는 이미 이십여 년 전부터 게임 이론 분야에서 큰 업적을 쌓은 학자들입니다(당시 한 번역서에서 "나레버프"라고 표기한 걸 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네요). 이들의 연구를 재원용하자면 아메리칸 항공과 델타 항공이 경쟁 관계일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보완적 생산자 관계도 유지한다고 합니다. 이 역시 일반 대중들도, 삼성과 애플의 소송전이 격화되자 메모리 조달 계약을 해지하는 결과를 목격함으로써 역으로 이 둘이 그간 보완적 공생 관계도 이어왔음을 알 수 있었지요. 전적으로 특정 생태계에서 양자가 적대하기만도 오히려 어렵습니다.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는 게 마켓 메이커 전략인데, 저자께서는 라쿠텐 버스 서비스를 통해 이를 설명합니다. 우리 같으면 코버스 같은 버스 회사 연합(운송사업조합) 사이트에서 이를 전담하지만(만약 외주를 통하면 수익이 안 날 겁니다), 일본에서는 이 회사가 예매 업무를 대행하는데, 좌석의 쾌적도나 터미널 주변의 시설 정보도 제공하고, 혹 특정 노선이 수요가 초과되면 회사에 통보하여 증편할 수 있게 하는 등 부가 서비스를 통해 니처로서 입지를 굳힌 경우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부가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크지 않으므로 이렇게까지 온라인 예매 패턴이 진화하기란 좀 시일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양한 사례 소개와 연구가 책 읽는 재미를 몇 배로 늘려 주는 유익한 경영서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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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앞으로 5년
이경주 지음 / 마리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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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 혁명을 소개하고 대비를 촉구하는 책은 많지만, 이 책은 한국 최고의 기업에서 수십 년 근무한 전략기획통께서 다분히 한국 실정에 최적화한 현장 감각을 통해 우리 독자에게 최대한 쉽게 설명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4차 산업 혁명이 어떤 얼개와 기반, 분야, 트렌드를 통해 우리 삶을 통째 바꿔 나갈지에 대해 다양한 시각들이 있지만, 이 책은 3차 산업 혁명 당시 우리의 대응과 응전, 결과는 어떠했는지까지 차분히 돌아보면서,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미래상에 대해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지 보다 현장감과 적실성 있는 충고를 베풉니다. 저자 같은 분만이 겪을 수 있었던 기억과 체험, 평가가 책 곳곳에 스며 있어서, 한국 산업 발전사의 한 토막을 접하는 보람도 느껴 볼 수 있습니다.

4차 산업 혁명이 한마디로 뭔지 아직 정리가 안 된 이들도 많이 만나는데요. 다른 가십 거리는 잘만 암기하면서 정작 우리의 미래를 통째 바꿔 놓을 담론, 프레임에 대해서는 인식이 미진하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저자의 정의가 다른 책들의 개념 규정과 큰 차이는 나지 않지만, 기업인답게 좀 더 직관적이고 간명한 표현이 눈에 띕니다. "4차" 혹은 네번째가 뭔지 정확히 알려면, 그 앞의 이벤트나 과정, 단계에 대해서도 이해가 필요합니다.

1차 - 석탄의 (연료로서의 본격) 사용, 채굴 : 경공업 (주로 영국)
2차 - 전기의 발명: 대량 생산 혁명 (주로 미국)
3차 - 정보통신 혁명
4차 - 인터넷 기반 유비쿼터스 혁명

저자께서는 일단 3차 산업혁명에 대처한 우리의 자세가 매우 진취적이었고, 그 결과도 성공적이었다며 자평합니다. 지금은 잊혀진 용어가 되었지만 한때 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CDMA)란 말이 일반인 사이에서도 유행했고, 거칠게 말하면 이 기술의 "세계최초도입" 덕분에 PCS 단말기가 저렴한 가격으로 일반에 보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냉장고폰"들이 퇴출되고 점점 작아지면서도 기능성을 높인 모바일폰들이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지요. 어떤 신문은 이 당시 "세계 거대 자본들의 실험장으로 전락했다"며 비관적 논조를 펴기도 했는데, 그게 그릇되었음은 지금의 결과가 잘 말해 줍니다. 본래 전통적인 셀룰러 방식의 단말에서는 문자 전송이 안 되었는데(초기 011 가입자), CDMA 덕에 누구나 통화 뿐 아니라 간단한 텍스트 전송으로 소통할 수 있었던 것도 한국이 최초였고, 반면 일본은 이 단계에서 전통 방식을 고집하다 갈라파고스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저자는 이처럼 변화하는 환경에 진취적으로 임해야 풍족한 미래가 보장된다며, 그때와는 달리 한국은 미적거리며 일본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실태에 경각심을 촉구합니다.

저자는 1세대 오너, 창업자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 말은 잘못 오해하면 현대, 삼성, LG 등의 위대한 거물들을 존경하자는 뜻으로도 들리는데, 물론 그러지 말자는 게 아니라 그런 탁월한 돌파력, 배짱, 과감한 결단력, 미래를 보는 혜안을 가진 경영자가 현재 부족한 실태를 개탄하는 의도입니다. 으뜸가는 대기업은 거의 2세, 3세가 경영을 맡고 있는데, 이들은 그 선대가 보여준 과감한 기업가 정신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는 거죠. 어느 경제건 "사회는 곧 정글이며, 약자, 어린 자는 먹히고 짓밟히는 게 당연하다"는 결의로 대담한 개척 정신과 도전 결의를 가진 경영자가 필요한데, 또 그런 이들 중 살아 남은 적자(適者)가 주도하는 풍토 형성이 중요한데, 현 체제는 이런 "새 1세대 오너"들의 등장을 자꾸만 가로막고 있다는 겁니다. 기업 생태계 조성뿐 아니라 기업 내에서도 예컨대 마이크로소프트처럼 새 프로젝트와 아이디어 기안에 성공한 인물이 나타나면 그 사람을 중심으로 새 부서가 형성되는 등, 유연하고 자생적인 조직 문화가 만들어지는 게 매우 중요한데, 저자분이 일했던 시절 삼전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며 회고하시는군요.

M&A가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선진 기술과 노하우가 국내 기업에 활발히 수혈되는 게 중요하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한때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을 추진하다 크게 피를 본 삼성이고, 당시 이를 지켜 본 분의 발언이라 더 신뢰가 가는데요. 지금 중국은 거의 무차별적이라 할 만큼 공격적인 인수합병으로 그들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나갑니다. M&A는 사실 과거 정주영 창업자 같은 경우 대단히 부정적인 시선으로 이를 보기도 했고("기업가는 제 손으로 회사를 키워 나가야 함"), 이의 대가 중 한 명이었던 김우중씨가 현재 고전하는 결과만 봐도 그리 호의적인 전망을 키우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신중하고 체계적인 실사를 통해 성공적인 M&A를 일궈 내면 그건 그것대로 단계의 도약을 낳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올해 초 큰 화제를 낳았던 "알파고"를 언급하며 이는 영국으로부터 "딥마인드"를 5억 달러에 인수한 구글의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지적합니다. 그 막강한 구글도 처음부터 R&D를 할 수 없었는데, 우리 기업들이 하물며 원천 기술 개발에 나서기란 너무도 무모하며, 이런 현실을 타개할 길은 M&A밖에 없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죠.

기존의 낡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현재 일본 기업들은 자율주행차 기술 개발에 30조 원 가까이를 투자한다는군요. 일각에서 왜 대기업에 거액의 정부 예산을 퍼주느냐고 하는데, 현기차 한 군데가 그나마 미래를 대비한다며 애를 쓰지만 사세를 다 기울여도 2조 정도가 한계라고 합니다. 한국이란 경제 단위가 미래에 살아남고 변화와 발전을 주도할 수 있는지 거시 전략을 보다 큰 관점에서 고안하는 게 중요하며, 한국의 좁은 국경 안에서만 사안의 가치판단을 행하려는 태도는 우리의 가능성을 스스로 폐쇄하는 결과에 다름 아닙니다. 저자께서는 로그데이터가 쌓이면 수동운전- 자율 하이브리드에서 완전 무인 가동으로 진화할 텐데, 이때 "빈 자동차"는 새로운 비즈니스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차 안에 없지만 차가 나를 대신해서 현장을 살피며 정보를 모으고, 나를 대신한 센서들이 꼼꼼히 공간을 커버하는 유비쿼터스 세계가 지금껏 발견하지 못했던 숨은 차원을 열어주는, 연쇄적 혁명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야말로 인간이 물리적 제약을 극복하고 신처럼 어디에나 자재(自在)하며 모든 정보를 관리, 통제, 생산하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기반임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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