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 짧지만 우아하게 46억 년을 말하는 법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지음, 이상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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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짧다고만 할 수 없는 356페이지의 책을 내내 유쾌하게 읽었지만 다 읽고 나니 약간 비장해지기도 합니다.

이 책은 태초의 빅뱅, 지구의 탄생, 300만 년 전 처음 등장한 "우리와 같은 외모를 한" 조상들, 7만 년 전에 처음으로 네트워크 방식으로 전략을 짤 수 있는 뇌를 갖게 된 인류의 등장, 1만 2천 년 전 농경 혁명을 통해 처음으로 정착 생활을 하게 된 계기 등에 대해, 짧지만 논의 체계 전체를 잡는 언급을 한다는 점에서 빅히스토리론과도 한 맥이 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으로서의) 문명과 역사에 대한, 즐거우면서도 우아한 스타일의 이야기들입니다. 한편으로, 문명사 전반에 대한 통합적 시야를 바탕에 깔고 있기에, 우리 시대의 사상가나 지적인 기여자들, 예를 들면 레이 커즈와일, 리처드 도킨스, 그리고 (저자의 친한 친구라며 본문 중에 몇 번이나 자랑삼아 거명되는) 유발 하라리 등의 관점도 적정 수준으로 서술에 녹아 있습니다. 친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하라리의 주장 중 상당수가, 선사 시대와 먼 미래를 보는 저자의 문명관과 논점을 같이합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 혹은 역사를 요약해서 들려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대부분의 에세이나 대중서 들은 연대기순을 따르곤 합니다. 이 책은 그렇지 않고, 개요, 결정적 전기(轉機), 도시, 영웅론, 악당들(영웅과 종이 한 장 차이), 발명(기술론), 말의 힘, 사상, 예술 등으로 토픽을 나눕니다. 역사를 파악하는 여러 시야, 개념, 화제 등을 통해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총체적 모습을 바라보자는 건데, 이런 개성적인 편제는 다른 책에서는 보기 어려웠습니다. 개별 챕터도 흔히 보는 역사 개론서와 달리, 저자가 관심을 갖거나 큰 비중을 둔 주제 중심으로 매우 자유롭게 전개됩니다. 대부분은 품격 있는 말투에 담긴, 우리 동시대인들이 공유할 만한 보편타당한 상식적 결론, 문화 상대주의, 양성평등, 물질주의 배격,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적 시선, 미래지향적 사고, 관용과 포용을 중시하는 평화주의, 반(反)부시- 반 트럼프 주의(ㅋ) 등의 기조입니다.

저자는 휴양지에 가족과 함께 놀러갔던 체험을 화제로 꺼내며 책 서두를 엽니다. 틴에이저를 둔 평범한 아버지(사실 그렇지는 않은데, 이유는 리뷰 끝에서 밝히겠습니다)로서 그는, 역사적 장소에 관광을 와 현지의 유적과 호흡하며 실물과의 감개어린 만남 자체를 만끽하기보다, 자기가 여길 다녀왔다는 흔적을 인스타에 올리기 바쁜 자녀들을 보며 많은 상념에 젖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 서문에서 이어가는 상념은, 우리들 인류는 얼마나 많이, 큰 폭으로, 현재(현재 자체가 모호한 개념이라며 회의적인 태도입니다)와 달라질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책 본문 중에서 "그래도 우리들 조부 세대는,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예측이 가능한 시절이었다."라며, 변화 자체가 존재의 본질을 위협하는 조짐에 대해 일말의 불안감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리뷰 맨앞에서 말한 것처럼 책 대부분은, 우리가 대중 역사서에서 익히 접해 온 다양한 사건들을 놓고 저자만의 시원시원한 분석과 평가를 내리는 재미에 읽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 문단에서 얘기했지만, 저자의 역사관은 인간 본성에의 불안한 통찰과 옅은 비관주의에 어느 정도 손이 닿는 성격입니다. 이 때문에 브라이슨의 저작들보다는 심각하게 읽히고, 문장은 더 우아합니다. "중요한 사건일수록 더 늦게 알아차린다" 같은 그의 견해는, 대체 무엇이 역사 근본을 바꿔 놓은 결정적 계기이며, 어디까지나 그저 우연의 장난인지를 두고 제기되는 오래된 질문에 대해 우리 동시대인으로서 현대적 감각과 체험이 더 반영된 해답에 가깝습니다. 이사야(아이자이어. 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 벌린 경, 로버트 그로세테스테(그로스테스트), 헤겔,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기까지 그가 신뢰를 보내거나 깊은 영향을 받은 사상가, 역사가들은 속한 시대도 다양합니다(제 생각엔  E H 카도 언급해 줬으면 했는데요).

시리아에서 발흥하여 한때 근동의 제국을 형성했던 제노비아 여왕에 대한 저자의 열렬한 지지와 선호도 눈에 띕니다. 탈 서유럽, 탈 남성 등 여러 관점에서 좋은 토의 소재를 제공해 주는 사례이겠는데요. 저자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실제 인물의 행적에 낀 거품과 신화를 과감히 제거하며(예: 그녀의 최후는 전쟁터의 죽음이나 포로로 잡힌 후 신전에 바쳐진 제물 처지가 아닌, 좀 깨지만 로마 원로원 의원과의 결혼 후 교외에서의 안락한 거주로 장식되었다), 위인을 평가할 때도 정확한 그의 행적과 영향까지만을 기준으로 삼자고 합니다. 이런 관점은 책 부록으로 실린 "잘못 알려진 상식" 여러 꼭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아무래도 우리 독자들이 눈 크게 뜨고 볼 만한 대목은, 대체 위대한 영웅과 저주받을 악당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고, 혹은 있어야 하느냐를 놓고 저자가 (적어도) 두 챕터에 걸쳐서 개진하는 지론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아주 통속적인 이유에서도 재미가 나게 마련이죠. 저자는 실제로 히틀러 체제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망명 생활까지 했던 집안 출신인데요. 그래서인지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 매우 긴 분량을 할애하여, 책의 여러 대목에서 자세히 논합니다. 물론 히틀러 개인에 대한 증오나 단죄보다, 그의 사례를 통해 역사 전체가 어떻게 합리적으로, 비판적으로 재정립될 수 있느냐는 데에 무게중심이 놓입니다.

"세계정신은 무엇이며 위대함의 본질을 규정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헤겔은 일찍이 "구태와 현상을 깨뜨리는 일체의 도약과 결단" 정도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기준에 의하면, 지옥과도 같았던 경제 공황과 국가적 열패감을 한순간에 떨쳐 버리게 한 히틀러가 정면으로 "위대함"에, 난감하게도 해당됩니다. 허나 저자는 망설이지 않고, "편협한 증오에 의해 추동되는 행동과 철학, 배금주의, 유대인은 물론 동족까지 혐오한 변덕스럽고 관용 없는 정신" 등을 거론하며 위인의 반열에서 히틀러를 끌어내린 후 준엄한 단죄를 시작합니다(거듭 말하지만 저자는 직접 피해를 입은 집안 출신이란 점에서 개인적 동기를 유대인들과 달리할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발 하라리하고도 친구?ㅋ).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드로스 3세 같은 이는 어떠한가? 여기에 대해 "자기 중심 과대망상, 근거없는 낙관주의, 선민사상, 대량 학살 책임" 등을 들어 저자는 (히틀러만큼은 아니라도) 역시 결격 판정을 내립니다. 그가 높이 평가하는 인물은, 당대의 기준으로 분명 패배자에 불과했는데도 이후 역사를 통해 영원한 영감과 각성의 근원으로 군림한 예수, 사도 바울이라든가, 인간에게 자유의 의미를 깨우친 모세 같은 인물들입니다. 혹은 구체제의 완강한 지배에 맞서 양심과 정의감, 용기의 가치를 일깨운 마르틴 루터, (저자의 표현으로, 그와 이름이 같은)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등을 꼽습니다. 시선이 서양에 꼭 편중된 건 아니라서 예컨대 기독교와 불교의 좋은 점만 한데 모아 잠시 중근동에서 큰 인기를 끈 마니 교의 가르침도 옹호합니다.

여기서 저자 특유의 비관주의가 눈길을 끄는데요. 그의 말에 따르면 왜 이런 좋은 종교가 한때의 흥성에 그치고 이후 장기적으로 발전할 발판을 마련하지 못했는지, 이것이 바로 역사의 맹목성이나 무작위성을 반증하는 대목이 아닌지 하는 것입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책 본문은 맥베스의 한 대사를 통하여, 인생은 별 것이아니고 무대 위의 백치처럼 의미 없는 분노와 헛소리를 떠들다 짧은 생을 마감할 뿐이라는 인용으로 마무리됩니다. 책에는 시애틀 추장의 유명한 항복 연설도 나오는데, 이 역시 비관주의와 허무주의를 진하게 표현한 내용이죠.

저자는 앞서 헤겔을 잠시 언급하며, "그는 슈투트가르트 출신 중에 우리 누나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라며 재담 섞인 소개를 합니다. 그 누나라는 분은 이제는 초로에 접어든, 한때 엄청난 과소비와 기행, 도도한 매너와 미모로 전세계적 화제가 되었던, 투른 운트 탁시스 공령의 어르신인(부군 요한네스 공은 일찍 타계) 글로리아 폰 쇤부르크입니다(물론 결혼 후에는 시가의 칭호와 성을 쓰죠). 시집을 잘 가셔서 존귀한 신분이 되셨는가. 그건 전혀 아니고 본래 유럽 역사책 읽다 보면  신성 로마 제국 관련해서 결정적 대목마다 잘 등장하는 쇤부르크 가문이 바로 이 저자와 그 누님(아홉 살 차이) 집안입니다(투른 운트 탁시스 가에 비해 명성, 재산 양면에서 별로 안 꿀립니다. 프린스와 카운트라는 형식상 위계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서도 글라우샤우 계의 현재 당주 신분인, 유럽에서 손으로 꼽을 만큼 귀한 백작 가문의 어른이 이 책 저자 본인이죠. "폰"도 이만저만 폰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유럽 역사의 산 증인과도 같은 명문가의 후손이 집필한, 역사에 대한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읽어 보면 뭔가 느낌이 좀 다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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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으로 전환되는 변액보험 펀드관리
박재성 지음 / 스타리치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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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액보험 펀드에 대해 접해 보신 적 있습니까? 요즘 모두들 저금리에 신음하다 보니 각종 희한한 재테크 수단이란 어깨너머로라도 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겁니다. 믿을 수 있는 전문가의 권유와 재량에 맡기는 것도 물론 바람직하겠으나, 기왕이면 내가 사정을 잘 알아서 내 판단과 기준에 따라 투자하는 보람이랄까 재미도 작지는 않을 겁니다. 남의 판단에 의존하면 결과가 안 좋을 땐 사람 잘못 만나 망했다면서 후회와 원망이 크겠고, 결과가 혹 좋다면 지불해야 하는 수수료가 아까울 수 있습니다(성공적인 투자를 이끈 고마움은 간데없고 저런 건 나도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이기적인 아쉬움이겠지만).

일단 저자는 현재 재테크 수단으로 주식투자, 펀드 가입, 채권 보유 등 다양한 수단이 있음을 자세히 가르칩니다.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이 부분이 좀 깁니다. 지금 주제가 변액보험 펀드인데 이런 건 독자에게 왜 알려주는 걸까요? 첫째는 변액보험에 대해 공부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그런 분들도 물론 있겠으나), 독자가 염두에 두는 바가 현명한 재테크 비결임에 주목한 후, 왜 (저자의 관점에선) 변액보험 펀드가 최상의 방식인지 저자의 근거에 따라 설득하고자 하는 데에 포인트가 있죠.

둘째로는 (제 생각에는 이게 더 중요한데) 변액보험 펀드가 뭔지를 알려면 이 시스템이 발을 붙이고 돌아가는 전체 판세를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게 어떤 구조로 돈을 번다는 건지 최소한의 이해가 있어야, 자기 판단 하에 투자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변액보험 펀드란 결국 자신 역시 다른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를 한 후, 보험납입료 기금이라는 원천의 특성까지를 감안하여 신중하게 운용되는 펀드의 일종입니다. 주식에 투자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으니 수익성을 기대할 수 있고, 보험료 기반에서 운용되니 각종 규제를 받기도 하기에 경솔한 투기 심리에 휩쓸려 큰 사고가 나는 걸 방지할 수도 있으니 안정성 면에서도 추천할 만합니다.

이 정도뿐이라면 다른 유망한 투자 상품과 큰 차이가 뭐냐고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 변액보험 펀드는, 투자자 자신이 독자적이고 책임있는 판단에 근거하여, 다양한 라인업이 마련되었다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재테크뿐 아니라 요즘은 어느 시장 어느 섹터에서건 이 다양한 라인업이 중요하던데요. 구매자도 선호하고 판매자도 우리 샵(혹은 브랜드)은 라인업이 다양하다며 열심히 홍보를 합니다. 재테크를 주체적으로 하시는 분들은 이런 선택(옵션)의 여지가 많고, 자신의 판단으로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기민한 선택을 유연하게 내릴 수 있는 상품을 선호하죠. 변액 보험 펀드가 이 모든 수요를 다 만족시킬 수는 없으나, 최소한의 안정성이 보장된 선택지 중에서는 개인이 최대한 머리를 써 가며 자기 책임 하의 판단이 가능한 상품이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

안정성 외에도 이 상품은 단발성 투기와는 또 거리가 먼 게, 마치 환매금지형 펀드 일반의 특성처럼 일정 기간 동안 진득하니 꾸준히 투자해야 소기의 목적에 근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책의 취지부터가 이쪽에 있습니다만, 투자는 남의 말을 듣고 솔깃할 게 아니라 요즘처럼 정보가 많고 다양한 접근성이 마련된 시대에, 그저 안정성을 좇는다든가, 혹은 단기에 폭등하는 횡재수만을 노리고 묻지마 투자에 나선다든가 하는 후진적 행태에서 벗어나, 투자자 자신이 공부를 한 후 기민하게 변화를 추격, 혹은 예상하여, 자신만의 포트폴리오를 꾸리는 데에 이 변액보험 펀드만한 매개체가 없다는 게 중요합니다.

"기본을 알아야 투자가 가능하다." 그래서 이 책은 무작정 변액보험 펀드에 돈을 쏟아 부으라는 게 아니라, 기본기를 다진 후 물고기를 잡는 방법의 일환으로(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최상의 방법으로) 이곳을 주목하고 공부하라는 제안입니다. 처음 책을 펼치면 금리에 대한 기본 개념부터 차트 보는 법까지, 이미 유가증권 투자에 익숙한 분들은 조금 지겨울 수 있는 설명도 전개됩니다. 그런데 그게 다, 그저 결론만 내밀며 나만 따라오라구!를 외치는 무책임한 권유, 강요와 이 책이 차별됨을 알려 주며, 독자의 판단으로도 변액보험 펀드가 충분히 합리적인 대안임을 자연스럽게 설득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활자가 크고(너무 크지 않나 싶게) 편집이 시원하고 깔끔한 게 최고 장점입니다. 또한 보조 자료와 도판이 올컬러라서 정보가 한눈에 잘 들어옵니다. 제가 좀 단정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설령 변액보험 펀드에 전혀 관심 없는 분들, 혹은 어떤 이유에서건 변액보험 펀드만은 절대 손 안 대겠다고 결심한 분들(투자는 어디까지나 개인 마음이죠. 누가 터치를 하겠습니까)도, 주식 투자에 대한 기본기가 아직 아쉽다 싶으면 이 책을 펼치셔도 됩니다. 저자한테 설득 안 당해도 되니까, 이 책 읽고 공부하시면 됩니다. 잘 아는 사람도 새로 깨닫거나 관점이 리셋되는 게 분명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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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비앤비 스토리 - 어떻게 가난한 세 청년은 세계 최고의 기업들을 무너뜨렸나?
레이 갤러거 지음, 유정식 옮김 / 다산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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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중개하는 이베이". 한국에서는 "옥션"이란 브랜드로 사업을 벌이는 이 업체는 말 그대로 갖가지 아이템의 중개업 그 대명사처럼 되어 버린 세계 굴지의 지식기반 기업입니다. 에어비앤비가 아직 존재가 미미했을 시절에는 자신들이 뭘 하는 기업인지 알리려고 저런 "대명사"가 필요했을 텝니다. 이제 본인들이 굴지의 기업으로 거듭난 현재에는, "에어비앤비"가 다른 기업(과거의 에어비앤비처럼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막 발돋움하는 스타트업)의 홍보 캐치프레이즈 속에서 대명사로 쓰이기 시작하는 모습이네요. "개 혹은 설비를 빌려주는" 혹은 "설비를 임대하는" 각양각색의 에어비앤비가 소소한(혹은 거창한) 산업 섹터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합니다. 돈 한 푼 없던 가난한 대학생들의 신화적 창업 사연이, 비단 경제 활성화뿐 아니라 젊은이들의 꿈과 야망을 키우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에어비앤비라고 하면 한국에선 무슨 브랜드나 기업인지 처음 들어봤다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예컨대 우리 나라에서 쏘카나 슈어카라고 하면 차 없는 이들, 혹은 여러 사정 때문에 자기 차를 끌어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장 차를 이용해야 할 이들에게 유용한, 렌트카 산업이 미처 커버하지 못하는 구석을 쓸어담는(아마도 앞으로는 렌트카 산업을 대체할 듯한), 공유경제의 선도, 선두 주자로 인식이 되어 있겠습니다. 에어비앤비는 이 아이디어를 "숙박시설"에 확장한 업체입니다. 차는 차라고 해도 누가 "집"을 그리 서비스에 제공하겠으며, (정식 서비스 업체도 아닌)남의 집에 들어가 그 편의도가 어떤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들어가려는 이가 있겠는가, 당장 저부터도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니 이 스타트업이 처음 발을 내디딜 때 모두가 미쳤다며 만류하던 게 너무도 당연합니다. 한국에서는 이 비슷한 게 여기어때 같은 앱 서비스 업체가 여럿 있으나, 이들은 모텔 등 기존의 숙박 시설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단계에서 아직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에 근본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 스타트업의 발상은 얼핏 어이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낯선 이들과 소통을 확산하고, 전혀 공감과 교감이 기대되지 않을 법한 분위기, 장소, 시간에서 타인과 유대를 이루려는, 현대 미국과 서유럽 젊은이들의 숨겨진 수요를 정확히 짚었다는 데에 성공의 비결이 있습니다. 차량 공유 서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차는 "마이카"라야 하며, 이곳은 "집"을 연장한 나만의 공간이라야 한다는 생각이 왜 없겠습니까? 또 젊은이들이라고 해서 다 실업과 불안정 고용 상태에 시달리며 차 한 대 뽑을 여유조차 없이 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같은 도착점을 향해 달리며 수다도 떨고 관심사도 공유하면서, 감정의 힐링도 이루고 내가 이 광대한 세상에 홀로 고립된 게 아님을 재확인도 하는 겁니다. 돈 아끼는 게 주목적이 아니라 세상과 하나가 되는 그 체험이 "공유경제"의 핵심이며, 여기에는 물론 부차적으로 자원 절약, 환경 보전 등의 가치도 포함될 겁니다. 이른바 "윤리적, 체험 위주의 소비"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죠. 쏘카 등 차량 공유 서비스의 성장이 현재 한국에서 소강 상태인 건 이 점, 즉 타인과의 교감이라는 포인트가 아직 성숙된 여건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싼 값에 숙박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좋지만, 젊은이들에게는 근본적으로 낯선 타지에서 낯선 호스트들, 또 자신처럼 게스트 처지인 낯선 이들과 웃고 떠들며 소통하는 자체가 큰 보람이고 추억이죠. 에어비앤비가 성공한 건 이 추억과 소통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했다는 그 아이디어가 시장의 핵심을 강타했다고 봐야 합니다. 아이디어만으로는 물론 성공할 수 없고, 마치 카카오톡 메신저가 초창기 고객들의 불평과 요구에 일일이 친근감 있게 응대하며 "우리는 여러분 소비자들 덕에 커나갑니다"란 초심에서 이탈하지 않는 자세를 분명히 각인시켰듯, 이들 역시 고객과 밀착하는 경영 패턴으로, 단지 위신이나 편익의 우월함이 아닌, 소비자의 마음 속에 자리하는 기업으로 성공적인 마케팅을 펼쳤습니다.

위기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 책 2장에도 자세히 나오듯, EJ라는 아이디를 쓰는 어느 여성은 "내가 도대체 에어비앤비에 비용을 지불하고 얻은 게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그녀의 집에 머물다 간 게스트가 아주 악질적으로 숙박 기간을 채우고선, 뻔뻔스러운 호평을 남기며 "이 사용 후기로 보상이 다 된 셈"을 혼자 강변하고 떠난 거죠. 사실 이런 아이디어(숙박 시설 중개)를 누구나 떠올릴 수는 있어도 실행에 옮기기를 꺼려지는 게, 대체 호스트와 게스트의 선의를 어떻게 담보하느냐는 겁니다. 웬 못된 집주인이 게스트에게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고, 위 EJ라는 호스트처럼 몹쓸 게스트에게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교감도 좋고 추억도 바람직하지만 이걸 사업체로서 항구적인 영위가 가능할지는 극히 의문인데, 여기서 "아이디어는 그저 아이디어일 뿐 사업으로서의 성공은 전혀 별개 문제"임이 다시 증명되기도 합니다. 에어비앤비의 위대함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라기보다, 허점 투성이인 사업 계획을 실제 장애를 헤쳐가며 정착시킨 그 실행력과 성과에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딴 사람들이 손댔으면 보기좋게 망하고 손털었을 가능성이 더 컸다는 소리입니다.

문제가 거기서 그치면 다행인데, 낯선 사람들이 한곳에 머무르다 보니 인종 차별 이슈까지 또다시 점화되며, 문제가 한번 이쪽으로 번지면 그건 개인간 다툼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정치 문제로까지 비화되기 십상입니다. 이런 위기가 어디 사업체 전체 범위에서 한두 번 벌어지겠습니까? 문을 닫아도 열두 번은 닫았을 판인데, 에어비앤비는 지금도 세계 굴지의 벤처기업으로서 안정적 수익의 창출은 물론, 존경과 희망의 대상으로까지 손꼽힙니다. 이게 그저 아이디어를 운 좋게 먼저 떠올렸다거나 밀레니얼 세대의 기호를 잘 공략했다는 간단한 일반화로 정리하고 말 일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은 또 무슨 안 좋은 소식이 있나요?" CEO가 출근하여 이것부터 물어야 할 형편이라면, 여러분들은 과연 사장이 되고 싶습니까? 그러나 체스키에게는 두 가지 자질, 혹은 (책의 표현에 따르면) 두 가지 스킬이 있었다(p205)고 저자는 단언합니다. 하나는 우두머리 노릇하는 기질, 다른 하나는 호기심입니다. 아마도 전자는,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자신이 해결하고 마무리짓는 책임감으로 발전했을 테며, 후자는 문제를 그저 일시적 땜빵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 차원에서 교훈을 얻고 근본적 개선을 도모하는 학문적 체질의 유지에 기여했을 겁니다. 아이디어는 쉬워도 그의 현실화가 어렵다는 점, 우리 모두가 깊이 새기고 교훈으로 삼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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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머니 - 자본은 어떻게 정치를 장악하는가
제인 메이어 지음, 우진하 옮김 / 책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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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기 전에는 표지 이미지만 보고 작지만 두꺼운 책이겠거니 지레짐작했었는데, 막상 손에 쥐고 보니 사이즈도 큰데다 두껍기까지 합니다. "후와, 이걸 언제 다 읽지?" 어, 근데, 금세 다 읽어 버렸네요. 엄청 재미있었습니다. 재미있으면 암만 책이 두꺼워도 빨리 읽히지요. 재미있을 뿐 아니라, 유익하고, 상식이 많이 늘었으며(상식이 느는 비결은 게임 다음으로는 재미있는 책 읽기인 것 같아요), 무엇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어떤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자유"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의지에 따라 백 년 인생을 마음껏 누리고 살다 죽음을 준비해도 하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에 어떤 합리적인 제약, 혹은 모두의 합의를 통한 자제가 끼어들지 않으면, 모두가 불행해지기도 하는 게 현실입니다. 나도 자유롭고 너도 자유롭기를 추구하면, 결국 힘 센 자의 자유만 존중받는 걸로 나쁜 결과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법과 도덕이 어느 사회에나 필요한 건데, "자유방임주의"를 표면에 내 걸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부도덕한 일부 기업 때문에 세상은 간혹 혼란과 무질서를 맞기도 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코크 가문, 그 중에서도 찰스 코크와 데이비드 코크, 두 형제가 그런 떳떳지 못한 흑막의 주인공들입니다. 두 사람 다 나이는 꽤 많고, 내일이라도 타계 소식이 세계의 전파를 탄다 해서 이상할 게 조금도 없는 고령자들입니다. 동생 데이비드 코크는 트럼프보다 고작 몇 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 한참 남은 청년 세대의 미래까지 (나쁜 쪽으로) 좌우하며 검은 영향을 길고도 진하게 남기려 든다는 게, 이런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이 어두워지곤 했습니다.

코크 형제뿐이 아닙니다. 미국은 1990년대 들어 각종 규제 혁파를 외치며 돈의 흐름을 통제하던 그간의 법률과 행정규칙을 대대적으로 손 본 적이 있습니다. 왜 이런 법이 생겼냐면, 불건전한 투기 자본이 설치기 시작하면 질 나쁜 선동에 놀아난 일반 소액 투자자(대중)만 나중에 피해를 보고, 그 여파가 일반 중산층과 서민에까지 닿기 때문이죠. 헌데 뭔 까닭인지 "작은 정부, 최소의 규제"가 시대정신이 되다시피하며 방만한 금융 정책이 일상화되었습니다. 뒤에서 극소수의 일부 부자들이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립니다. 우리가 잘 봐 왔던 대로, 2008년에는 이 무모한 장난질이 드디어 부작용을 일으켜, 세계적 범위의 대공황 발생으로 전 지구 경제가 주저앉나 싶었을 정도였습니다(제 생각에는 오바마와 다른 나라 지도자들의 현명한 대처로 그나마 피해가 그 수준에서 멈춘 것 같지만요).

이 책에는 우리가 여태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그야말로 막후에서 미국과 세계를 움직여 온 여러 부자들의 이름이 주루룩 등장합니다. 저는 처음에 "상어"라는 이름이 나와서, 와 그 이름답게 정말 나쁜 사람이겠구나 하고 더 집중해서 해당 대목을 읽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사모 펀드의 타이쿤인 폴 "싱어"를 잘못 읽은 거였는데요 ㅎㅎ 이 사람은 트럼프보다 두 살 위고 아까 그 데이비드 코크보다는 네 살 아래입니다. 이상한 노래는 좀 그만 부르시고, 세상을 더러운 공기로 오염시킬 게 아니라 하루빨리 퇴장을 좀 하셨으면 좋겠는데, 아직도 정의를 실현시키기엔 시민과 청년의 힘이 많이 미약한 것 같습니다. ㅠ

코크 가문이 무서운 건, 그저 코크 인더스트리 한 기업, 한 가문만 이끄는 게 아니라,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정례적 회합을 통해 대기업(대체로 비뚤어진 반환경적, 반사회적 태도를 지닌) 수장들의 의사를 통일시키고 여론을 조작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어서입니다. 이 중에는 우리 귀에 익은 유수의 다국적 기업도 있습니다. 벡텔이라든가, 스티븐 코헨의 SAC라든가 하는 이름은 우리 귀에도 익은데, 대중에게 노출되고 공개된 기업은 그나마 간접이라도 사회적 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덜 위험합니다. 진짜 위험한 건, 슈워츠먼 같은 이가 지배하는 정체 불명의 지주회사인 "블랙스톤" 같은 것입니다. 작년 롯데 경영권 승계 문제가 크게 이슈화했을 때, 뭘 하는지도 모르는 일본의 광윤사라는 작은 법인이 이 재벌 기업의 소유 구조 최상위에 서 있음을 다들 뒤늦게 알고 충격을 받은 거나 비슷합니다.

이들은 추상적으로 지구의 미래를 위협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기업의 횡포로 쑥대밭이 된 솔트빌이란 마을의 예가 이 책에는 나옵니다. 속이 검은 기업들이 환경을 망치는 쪽으로 정계와 사회의 분위기를 조장한다 한들 나와는 무슨 상관인가 싶은 분들은, 이 책에 나오는 애팔래치아 산맥 버지니아주 방면에 위치한 솔트빌(이른바 기업의존형 촌락)이라든가, 미네소타 로즈마운트 등에서 벌어진 엄청난 환경 재앙에 관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도널드 카슨 같은 이는 오랜 시간 코크 인더스트리의 고용인으로 일하다가 치명적으로 건강을 해친 예인데, 이 역시 백혈병으로 사망한 삼성전자 노동자인 황유미씨를 떠올리게 합니다.

책이 재밌다고 한 건 좀 다른 의미에서의 씁쓸한 이유도 있습니다. 사회를 향해 탐욕의 손길을 뻗는 기업, 그 기업이 일개 가문에 의해 좌우된다면 기업의 건전성도 의심스러울 뿐 아니라 그 가문 자체가 과연 화목하겠는지 우려가 생기는 게 당연한데요. 이 코크 가문은 안타깝게도 가정사 면에서 그리 행복한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형제 중 윌리엄 코크 같은 인물은, 경영권과 기타 이해 관계 충돌 때문에 예의 그 코크 브라더스에게 소송을 걸기도 했습니다. 이분은 데이빗 코크의 쌍둥이 형제이기도 한데, 다른 형제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으며 기부도 활발히 하고 보다 대중과 소통하는 쪽으로 진로를 잡아 왔습니다.

중세 왕실의 비극적 동족상잔 스토리를 방불케 하는 이런 비화가 펼쳐지는가 하면, 역시 유력 가문에 편승하여 자신만의 야망을 달성하고자 애쓴, 무려 27세 대학원생 시절부터 구체적 출세의 꿈을 품은 사연도 독자들을 착잡하게 만들며 전개됩니다. 저는 책을 읽으며 혹시 저자가 코크 인더스트리 사 쪽으로부터 소송이나 당하지 않을지 걱정되었는데요,책은 여태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코크 사를 상대로 맹렬한 투쟁을 벌인(코크 사 역시 그들을 상대로 법정 투쟁을 벌인) 여러 다른 고발자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정리합니다. 덕은 외롭지 않고 이웃이 있다(덕불고 필유인)는 말도 생각나고, 한편으로 책이 정말 논픽션인데도 무협지처럼 재미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책이 마냥 재미있기만 하냐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유방임주의의 사상적 원조는 하이에크라고 봐야 하겠는데요. 이 책은 한 세기 전 자유주의 진영의 거두였던 그의 입장에 대해서도 요령껏 유익한 소개를 담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한 게, 코크 인더스트리를 비롯 보수주의 진영 연구재단이 그 영구한 뿌리를 이 사상가의 주장에 두고 있으며, 특히 책에도 나오는 올린 재단 같은 경우 "마르크스와 케인즈는 내가 보기에 차이가없다"는 유명한 언명처럼, 철저한 기업 위주의 구조로 세계가 재편되어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을 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그래서 경제사상의 거대한 흐름도 때때로 짚는데, 그 중에는 토마 피케티처럼 현재의 큰 줄기 하나를 형성해 가는 소장파 경제학자도 있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우리의 현재가 서 있는 현실, 그를 설명하는 각종 경제사상 사이의 갈등과 대립점이 어디인지, 지적인 기반도 마련 가능합니다.

왜 화석 연료를 그들은 싸고돌까요? 모든 기업이 이처럼 다 지난 시대의 산업 기반에 악착같이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지난 미 대선에서 실리콘 밸리는 노골적으로 민주당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미래 세계 경제가 지식 기반 위에서 중추적으로 작동할 것임을 감안하면 코크 인더스트리처럼 전근대적 원리와 신념 위에서 움직이는 기업이 좌지우지하는 세상이 얼마나 암울할지는 더 지켜 보지 않아도 자명합니다. 젊은이들이 이끌어나갈 세상을 낡아빠진 생각이 좌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환경과 세상은 우리의 깨인 눈과 마음과 행동이 지켜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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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평전 - 삼균사상가
김삼웅 지음 / 채륜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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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조소앙 선생은 책 첫머리에 나오듯 본명이 "용은"입니다. 김삼웅 저자께서는 "아호가 본명보다 더 유명한 경우"라고 규정하는데, 이런 경우가 한국에서 아주 흔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대체로는 독립 운동가들의 경우, 한 번의 의거로서 이름을 떨친 분들을 제외하면 "아호와 본명이 함께 유명한"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안창호 선생, 김구 주석 등에 대해 그 호를 함께 기억합니다. 오히려 "도산 안창호" 등으로 자주 부르지 이름만 거론하는 적이 더 드뭅니다. 심지어 독립 운동과는 매우 거리가 먼 어느 작가에 대해서도 "춘원 이광수"로 호칭하는 게 더 잦을 정도죠.

"조소앙"을 본명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도, 그 함자 앞에다 "삼균주의"를 마치 대명사나 수식어처럼 붙일 만큼, 그의 독창적인 이념은 유명합니다. 만약 "삼균주의"를 모르는 이가 있다면, 아마 "조소앙"에 대해서도 모를 가능성이 더 큽니다. 대개 김삼웅 작가님의 전작 평전들은 이처럼 인물 이름 앞에 아호를 붙인 제목으로들 나왔는데, 이 책만큼은 "소앙 조용은 평전"이란 문구가 어색했는지 보다시피 이런 제목입니다.

조소앙 선생의 일생과 그 의의를 새기자면 필수적인 전 단계라 할 것이, 대체 삼균주의가 무엇이며 그의 현대적 해석과 자리매김은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삼균주의가 오늘날에 와서 다시 재조명 받는 이유는, 남북이 서로 비생산적이고 파멸적인 대치를 이루는 지금, 양쪽 모두에서 큰 거부감 없이 수용하고, 상당한 공감을 형성할 만한 이념적 중간지대를 모색할 만한 사상이랄까 이데올로기가, 이 이른 시기에 조 선생이 마련해 놓은 것만큼 성숙하고 큰 체계를 지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소앙 선생은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바와 달리, 38선 이남, 오늘날의 경기 파주(당시 지명 교하라고 책에 나옵니다. 물론 이 지명은 오늘날에도 행정 구획만 달리해서 살아 있습니다)에서 탄생했습니다. 김구와 이승만보다는 십여 년 아래 세대이며, 몽양 여운형 등과 비슷한 또래입니다. 독립 운동가들이 대개 출신 성분이 다양한데 경기 일대에서 부농 출신으로 생계에 큰 곤란이 없었으며 조부모로부터 정통 한학을 교육받았다는 내용 말고는 그의 가계에 대해 자세한 바가 밝혀지지 않은 듯합니다. 그가 중요 인물로 부상하게 된 건 대한 제국 체제 하에서 영재 소년들을 선발하는 과정에 그가 두각을 나타내어 어린 나이에 황실(고종 칭제 이후) 후원을 받아 엘리트 교육을 이수했으며, 이후 일본 명치 대학에 입학하여 서양식 현대 문명에 눈을 뜨게 되고부터입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전통 한학과 근대 문물에 대한 이해"에 고루 밝은, 균형 잡힌 지성을 갖춘 보기 드문 인재로서 그를 높이 평가합니다. 제가 파악하기로는 김삼웅 저자가 특히 소앙의 행적과 사상에 후한 점수를 주는 까닭이, 1) 중상층 부농 출신으로서 자신의 영달과 출세에 집착하기보다,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민족의 앞날이 밝게 창달될 길이 무엇인지에 천착하고, 이를 실천할 방안을 연구한 점 2) 사상적으로는 오늘날의 시선으로도 급진 좌파에 가까운 혁신 노선이었다는 점 3) 방략가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 막연한 주의주장이 아닌 구체적 수치를 거론하며 방법론을 구상한 경세가였다는 점(대원칙뿐 아닌 디테일을 제시한 정책 전문가였다는 점) 등입니다.

2)와 관련해서는 특히 독자로서 제가 재미있게 본 게,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을 두고 소앙은 "광주 혁명"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광주 혁명"이라고 해서 "웬 5.18 예언?"이란 생각도 잠시 스쳐갔는데, 그건 물론 아니고 당시 민중들이 일제의 폭압적 처사에 들고 일어난 의의를 그 정도로 높이 평가한 소이겠죠. "학생"을 굳이 뺀 이유는 소앙 본인부터가 학생 시절부터 열혈 혁명 분자로 활동해 온 동질감이 있기에, 어린 학생들이 구태여 "학생"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물론 "그 학생"들보다야 자신이 3. 40년 가까이 선배지만, 영원한 학생으로서의 정체감이 그의 내면에 자리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책을 좀 넘겨 가며 김이 약간 빠지는 게, 이분은 심지어 이하응의 집권마저 "혁명"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입니다. 이하응의 혁신 조치가, 종래의 구체제(심지어 자기 기득권마저 못 지킬 만큼 낙후하고 부패했던) 폐단을 일소한 면이 있긴 하나 오늘날의 어느 학자도 그의 집정을 "혁명"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 용어가 그리 엄정한 기준에 따라 쓰이지는 않았구나 하는 다소의 실망이랄지. 이후 김옥균 등의 갑신정변도 그는 "귀족, 벌열 출신에 의한 혁명"으로 주저없이 명명합니다. 오히려 3. 1운동은 그의 시각에서 "실패"로 보였는지 혁명 범주에서 제외됩니다.

3. 1운동 실패의 원인을 그는 "평화적 수단"에서 찾을 만큼, 그의 성향이나 사상이 온건하다거나 절충, 유화적이라곤 도저히 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는 이런 말도 합니다. "젊은이들이여, 오늘날 가장 유망하고 장래가 안정적일 직업은 바로 혁명가로서의 삶이다." 어느 혁명 노선에 가담하든, 혁명 자체를 어떤 관점에서 보든, 혁명가만큼 극도로 불안정한 삶이 없음은 자명할 텐데 정말 역설적인 표현이며, 이 한 마디가 그의 성품과 지향성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그는 상당한 반대 의사 표명,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하긴 확고한 반공 노선을 걸었던 백범 밑에서(국무령 시절) 외무부장을 지낸 분이기도 하니요.

책은 장덕수 암살 등 해방공간에서 그의 활동은 아주 자세히는 다루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야당 성향으로 유명한 성북구에서 소앙은 전국 최다 득표를 기록하며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그 이전 한독당과 결별하면서도 백범과는 연계를 유지하며, 백범과는 차별되는 노선으로 단정을 지지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한독당 분당이 어느 정도는 백범의 묵인 하에 이뤄졌으리라는 추측을 내어놓습니다. 하긴 이후 백범의 방북 행렬에 그도 김규식 등과 함께 수행했으니 말입니다. 단 책에서는 이 부분(남북 협상)에 대해 역시 그리 소상히는 저술하지 않습니다.

보통 백범의 사망 당시 "서거"라든가 심지어 "시역'이라는 말을 쓰는 이들도 있었는데, 소앙은 진술에서 담담히 "김구의 피살"이란 표현에 그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성명서와 저술 속에서 "...향후로는 명망가 중심의 결사체가 아니라, 이념과 노선 중심으로 정당이 만들어지고 활동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같은, 시대를 근 반 세기는 앞서간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적은 대로 그는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2대(代)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는데, 저자의 분석에 의하면 새로 원 구성이 될 때 국회의장 피선이 유력했다고 합니다. 이러던 게 느닷 6. 25가 터지고, 그는 납북 인사 대열에 끼고 만 불운을 맞이했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죠. 책에서는 최신 연구 결과로 러시아측 보고서를 인용하며 "김일성의 노선에 협조 않던 그가 자살을 선택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계획 경제를 통해 머리와 꼬리가 함께 번영해야 국가가 일어설 수 있음"을 일관되게 주장한 그의 노력 덕에, 사실 우리 현행 헌법도 제헌 당시부터 사회적 시장경제 이념을 지향한다 봐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그의 지조와 소신 때문에 김일성이도 끝내 그를 포섭, 회유하는 데 실패했던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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