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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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G 웰즈의 <타임 머신>을 읽어 보면, 먼 미래에 인간이 엘로이와 몰록 두 가지 종(種)으로 분화하여 대립, 적대하는 쪽으로 진화한다는 설정이 나옵니다. 두 종은 용모, 기질만 다른 게 아니라 서식하는 지역까지 빛과 어둠으로 완전히 나뉩니다(A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타고난 체질과 지능 따위가 신분 요소이며 서식지가 크게 강조되는 차별 요소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건 "진화"라기보다 퇴화에 오히려 가깝죠(엘로이, 몰록 모두에게). 퇴화는 두 종의 대립, 항쟁으로 멸종의 비극이 가까워졌다는 결과론적 의미뿐만 아니라, 과정의 불건전함까지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아울러, 바람직하지 못한 이런 퇴화는 악의 배태이자 종말이라 평가할 만도 하죠.

"다른 지구(地區)의 삶을 한번이라도 들여다 본 적 없이 세계관이 형성된 사람은, 법을 만들 자격도, 판단, 적용할 자격도 없는 겁니다."

레오 마샬은 특권 신분의 자제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이들만이 입학할 수 있는 프라임 스쿨의 수업 시간에서 교수에게 이렇게 일갈합니다. 대개 이런 소설에서 지배층, 특권층은 빼어난 용모, 지능, 품성 등을 타고난 행운아이며, 그런 이들은 엄격한 시험을 거쳐 입학생을 선발하는 학교에 입학하고, 그 학교에서 특별한 사람으로 길러져 체제를 수호, 관리하는 운명이죠. 이런 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란 19세기의 소위 "사회적 진화론" 비슷한 색채를 띠게 마련입니다. 이런 이념은 (이 소설 속의) 상위 지구인 1지구만 (뿌듯한 자부심으로) 누리는 게 아니라, 저 아래 하위 지구 거주자들에까지 대체로 패배주의의 한 형태로 널리 퍼지는 게 보통입니다. "가장 우수한 자, 가장 적합한 자(the fittest)만이 살아남게 마련이다." 적자 생존 기제를 이렇게 표현하는 건 대체로 사회적 진화론의 지지자이며, 반대로 새뮤얼 베케트 같은 이는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며 아주 음울하고 비판적인 어조로 작품 속에 피력한 바 있습니다.

위에 잠시 언급한 레오 마샬은 프라임 스쿨의 재학생이지만, 동료 학생들 주류의 가치관과는 다소, 아니 많이, 동떨어진 상념에 침잠하고, 이를 행동으로까지 옮기는 타입입니다. 이런 성향은 아무래도, 비판적인 성향의 컨텐츠를 많이 제작하는 그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브이 포 벤데타>에도 결국 체제를 전복하는 단초는 미디어 제작자들이 만든다는 식인데, 이 소설 속에도 그런 크리에이터들의 각별한 사명 같은 게 은근 암시됩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 다윈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을 뿐 아니라, 용기 있고 일단 바른 판단이 섰다 하면 누구의 의견도 개의치 않고 직접 위험에 뛰어드는, 모두의 신뢰를 얻을 자격이 있는 품성의 소유자입니다. 다윈은 레오와 그 부친들 대(代)부터 서로 아는 사이이기까지 합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 부모들도 정통 성골 신분이 아닌데도 사회적으로 꽤 높은 직위까지 올랐으며(물론 한 사람은 정부 섹터, 다른 사람은 미디어 분야의 유력인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 아들들을 프라임 스쿨에 합격시켰다는 사실입니다(전자보다 후자가 더 어렵다고들 합니다).

프라임 스쿨에 다니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위 두 사람, 그리고 다윈 영이 첫눈에 반한 여학생 루미, 얘네들 집안은 세대간에 그리 화목한 분위기가 자리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자신의 출신성분과 지향점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표면적 상황 설정, 둘째(이게 진짜 중요하지만) 이런 회의로 가득한 성장 배경이, 주인공들(모두 3대째의 어린 학생들)이 이 사회와 세계의 바른 진상, 그리고 과거의 미스테리에 대한 정확한 해결과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성장통 노릇을 하기 때문이죠. "진정 진화된 종(種)은 자신을 포함한 일체의 현상, 존재를 회의할 수 있어야 한다." 원래 확신과 폭주는 그저 백치들의 특권일 뿐입니다.

프라임 스쿨에 다니는 학생들은 태도도 의젓하고 의복에도 위엄이 서려 있어, 누구라도 그 특권적 신분을 알아 볼 정도죠. 엄격한 학풍에서 교육 받고 졸업한 후에는, 설령 그 부모님들이라 해도 "자신보다 더 성숙한 어른 같은 자녀들"에게 함부로 말을 건넬 엄두를 못 내고, 학생들은 어느 새 가족들보다 동료들 사이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는 게 보통입니다. 다윈과 루미 역시 이런 그들의 소중한 행운과 의무감을 잊지 않는 명철한 정신의 소유자들이지만, 글쎄 진정 탁월한 영혼이란 모든 것을 한번쯤은 의심해 보는 그 자질에 자리잡고 성장하는 법이죠. 30년도 넘게, 이제는 자신의 아들이 그 나이에 갓 도달할 정도인, 어려서 죽은 자신의 친구 그 추도식에 매번 참석하는 문교부 차관 니스 씨,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진 속 말고는 본 적도 없는 "제이 아저씨"를 거의 인생의 지향으로 삼다시피한 다윈, 속 시원히 미스테리의 진상에 파고들 마음을 못 먹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처음에는) 출신 성분에 대한 경멸로 표현하는 루미, 이런 루미를 사랑하다 못해 존경심까지 품는 다윈... 역시 이런 소설은 일단 주인공들이 매력적이라야 합니다.

이 소설은 이런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괜히 사연을 복잡하게 꼬지 않고(레이 아저씨의 죽음, 그리고 이 체제가 꽁꽁 숨겨 온 비밀을 추적하는 내용인데도) 모험심과 애정으로 추동되는 흥미진진한 사건들을, 뒷장을 더 넘겨보지 않고 못 배길 만큼 재미있게 풀어 들려 줍니다. 과연 그런 끔찍하고도, 동시에 슬퍼지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다가도 의분에 떨며 분연히 일어서게 만드는 "진실"이 숨어 있더군요. 비겁한 어른들이 채 직시 못하고 가려 온 진실을, 나와 연인의 양심 말고는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는 아이들의 손에 의해 밝혀지게 하는 것은 신의 섭리, 혹은 속 깊은 작가의 치밀한 계획이었겠습니다. "The Child is the father of the Man." 다윈 영 네 집안 어르신들이 이 소설 중에서 자주 거론하는 저 명언은 계관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그의 대표작 <무지개>의 한 행에 배치한 구절인데, 그 역시 이 소설의 다윈 영처럼 명문학교 출신이었죠. 엄청 두꺼운 분량인데 하도 술술 잘 읽혀서 세 번이나 마치고 난 후 이 서평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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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천재가 되는 단 세 가지 도구 - 세상에서 가장 쉬운 문제 해결의 기술
기시라 유지 지음, 기시라 마유코 그림, 정은지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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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가 "생각하는 힘"이며, 그래서 이 종(種)에 붙여진 학명이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하지만 종 전체에 균일하게 주어진 능력이라기보다는, 어떤 개체는 영리하게 생각을 잘 해내고, 어떤 개체는 열심히 따라는 하는데 성과가 좋질 못합니다. 재주가 뛰어나거나 성과를 잘 내는 사람은 그런 능력을 타고 났거나, 아니면 남다른 노력을 통해 선두주자를 추월합니다. 천재가 노력파를 못 이긴다고도 하는데, 이는 그 천재가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의 트랙에만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노력파는 처음에 주어진 트랙이 불운했음을 알고, 노력을 통해 옮겨 간 유리한 트랙에서조차 머물기를 거부하며 계속의 상향을 추구합니다. 노력파가 천재를 이기는 길은 이것 외에는 없다고 봐도 됩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ToC(theory of constraints)는, 갖가지 상황적 제약 속에서 어떻게 하면 최상의 성과를 올릴지에 대한 방법론인데, "생각을 잘 해내고 주어진 과업을 잘하는 천재"가, 그렇게 따라하고 싶지만 잘 못하는 다른 이들에게 "이 순서대로 하면 나처럼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이론화한 업적입니다. 자신이 잘 하는 일이라도, 그걸 알고리즘화하여 만인과 공유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전형적인 경영학 이론의 과제인데, 이를 고안한 주인공 엘리야후 골드렛 박사는 물리학자라는 점이 특이하죠. 이미 학문 간의 장벽은 무너진 지 오래고, 인접 학문의 빼어난 시사점이나 영감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학자는 자기 자리조차 지킬 수 없는 현실을 보여 줍니다.

엘리야후 골드렛 박사가 정립한 ToC도 탁월한 업적이지만, 이것조차 어려워하는 이들을 위해 기시라 씨 부부가 함께 예쁜 모양으로 만들어낸 이 책은(남편 유지 님이 글을 쓰고, 아내인 마유코 님이 삽화를 그렸습니다), 정말 어린이들이라고 해도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독자 친화적인 컨텐츠를 담았습니다. 어떤 주제나 이론을 쉽게 표현하여 설명하는 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아도, 해당 토픽을 완전히 통달하듯 이해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또한, 순수 학문의 성과를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는) 평범한 일상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난제를 해결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도록 쓸모 있게 가공하는 일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사천 명의 군중에게 물고기 한 마리 분의 식사를 제공했던 일만큼이나 "나눔과 봉사의 큰 보람"을 빚는 소중한 프로젝트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저자들이 밝힌 대로, 일머리가 아직 덜 무르익은 신참 회사원들에게 쓸모 있는 도구를 제시하며, 심지어 공부가 마냥 힘들기만 한 초등학생도 이 책을 읽고 "자기 주도 학습법"에 비로소 눈을 뜨일 만큼 친절합니다.

세 가지 도구는 책의 편제에 따라 1) 가지 2) 구름 3) 목표 나무 를 가리킵니다. 먼저 1) 가지(branch)를 보면, 일단 회사의 말단 사원뿐 아니라 CEO들까지 뭔가 화끈한 각성이 올 만한 주장으로 시작하더군요. 잠시 인용해 보면,

"...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복잡한 문제를 전체로서 마주하길 두려워한다. 전체로서의 문제가 두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문제를 잘게 쪼개려고 한다. 잘게 쪼개진 문제는 부분적인 해답을 찾기 쉽기 때문에, 일부의 문제만 최적화시켜 놓고는 전체를 다 해결한 듯 안심한다...."

어떻습니까? 만약 문제를 모조리 방치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안심이 안 될 겁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일부에 대해서만 정확한 답을 찾아 놓고는, 나머지는 운에 맡겨 버리는 게 보통인데, 이런 태도가 대부분 좋지 못한 결과를 맞는 건 애초에 바른 (종합적) 대책을 세워 놓지 않았으므로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저자는, "복잡한 문제는 복잡한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저자는 우선 문제를 분석할 때, 무슨무슨 사항이 있는지 박스(상자)로 구분하고, 박스 안에 사항을 채워 넣으라고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위에서 지적된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와 다를 게 없습니다. 서투른 의사 결정자도 여기까지는 해 놓죠. 그리고 박스들 전체를 보지 않고, 박스 두어 개에만 주목한 후 그에만 알맞은 해답 발견에 골몰합니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정확한 답이 전체로서는 그릇될 가능성이 크다는 건 앞에서도 지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 중요한 건, 상자들 서로의 관계가 어떤지 표시하는 "화살표"들입니다. 화살표는 어느 상자가 다른 어떤 상자의 원인(혹은 결과)인지를 표시합니다. 각자 따로 놓일 때에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자들이, 이제 화살표에 의해 관계가 밝혀짐으로써 분명한 의미를 부여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나나"가 있는데, 그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화살표 중 "이미 현실화되었거나", "현실화할 가능성이 큰 것"을 특별히 서로 묶어 놓은 표시가 "바나나 모양"이라서입니다. 독자인 제 생각으로 이는 "메타 화살표"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 엘리야후 골드렛 박사의 원저에 그런 말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책의 저자들께선 "다 그려 놓고 소리 내어 읽어 보라"고 하시네요. 이렇게 소리 내어 읽은 후 어색함이 느껴지면, 그건 문제의 분석이 상자, 화살표, 바나나 어느 단계 중 제대로 안 이뤄진 구석이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확실히, 무언가를 검증할 때 한 가지 감각에만 의존하면 자기 타성에 젖어서, 보이는 것만 보이고 잘못된 구석이 체크되질 않습니다. 검증은 공감각적인 과정이어야 하고, 이로써 익숙한 루틴이 간과하는 허점이나 모순이 보다 쉽게 발견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압권은 개인적인 판단으로 2부 "구름"인 것 같더군요. 이 "구름"의 기능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이거냐 저거냐 양자택일의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두 가지 선택지를 동시에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는 딜레마에 빠질 때, 어떻게 하면 가장 현명한 결정을 할 것인지 그 방법론을 제시하는  겁니다. 사실 회사에서건 개인적 용건이건, 이 "딜레마"를 똑똑하게 잘 넘기는 사람이 바로 인생의 성공자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누차 강조하는 건, 일회용이거나 그 적용 범위가 제한된 "지식"에 집착할 게 아니라, "고기를 낚는 법"을 알려 줄 "생각하는 지혜"를 키우자는 목표죠. 공교롭게도 탈무드가 그 최초 출전인 이 말("고기 대신 고기 낚는 법")의 실천적 방법론을, 역시 유대인인 엘리야후 골드렛 박사가 가르쳐 주는 셈이기도 합니다.

이 역시 상황을 박스와 화살표로 나눠 그림으로 표시하는 게 우선입니다. 물론 바나나도 여기저기 쳐야 할 텐데, 그 전에 박스 사이의 관계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를 먼저 곰곰히 따져야 합니다. 먼저, 양립할 수 없는 두 상황을 D와 D'로 놓습니다(친절하게도 저자는 ' 기호를 프라임으로 읽어야 한다고까지 가르쳐 주시네요). 그 다음 단계, D와 D'가 무엇을 바라고 하는 행동인지 파악하고, 앞에다가 각각 B와 C로 둡니다. 마지막으로, 본인이 바라는 바(이것을 저자는 "요망"이라고 합니다)인 B와 C의 최종 목표가 뭔지를 생각하고, 대체로 이것은 공통된 A일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첫째, D와 D'가 딜레마지만(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하지만), 최종 목표는 A로 같을 수 있다.
둘째, D는 B가 아니며, D'는 C가 아니다. 즉 각각의 딜레마 상황과, 그 딜레마 상황이 직접 요망하는 바는 같지 않다.

이 점이 참 중요합니다. D와 D'는 양자택일 관계(딜레마)임이 분명하죠. 그런데 D와 B가 친한 것처럼, D와 C도 친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D와 C가 딜레마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게 중요합니다. 처음에 꼼짝없이 딜레마로 출발한 게, 화살표를 따라가다 보면 중간 지점에서 의외로 서로 교차하는 부분이 많다는 겁니다. 이 겹치는 부분을 집중 공략하면, 이거냐 저거냐 선택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아도, 두 목표를 모두 달성하는 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쉽게 말해서, 절벽이 살벌하게 갈라진 협곡에서 괜히 모험을 하지 말고, 두 능선이 가장 가깝게 맞붙는 데서 건너갈 생각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 외에도 1) 사람은 누구나 선의를 가진 존재이니 생각의 괴리를 좁힐 생각부터 하고, 결코 사람 자체를 적대하지 말라. 생각이 싫은 거지 사람이 싫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이란 그 사람이나 자신이나 언제든 바뀔 수가 있다. 2) 사람 사이는 항상 승과 패가 갈리는 게 아니라, 둘 다 승리자가 되는 쪽으로 끌고 가야 한다 3) 내 생각이 옳다고 집착하는 바로 그 태도가 잘못이다. 등 처세에도 유익할 사고 방식을 먼저 가지라고 조언합니다. 故 엘리야후 골드렛 박사는 이를 두고 "과학자가 가져야 할 자세"라고 했는데, 기업이든 가정이든 타협점과 해결책을 찾아야 할 모든 사람이 반드시 유념해야 할 가르침이겠습니다.

3부에서는 "야심찬 목표 나무"가 다뤄지는데, "제약 이론"의 핵심은 본래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제약이란 곧 장해물인데("해[害]"를 더 강조하는 단어겠죠), 이 장해가 있음을 괜히 불평하지 말고, 장해물마다 작은 목표를 설정하여, 그 작은 목표를 우선 달성한 후 큰 목표를 이루라는 전략입니다. 사실 큰 목표를 한번에 이루기란 오히려 어려운데, 그 목표를 잘게 쪼개서 더 정밀히 접근하라는 듯 장해물이 설정되었으니 이걸 오히려 고마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쁜 조건을 반대로 선용하라는 발상부터가 이미 성취하는 이의 길(吉)한 마인드셋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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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로 본 경영의 착각과 함정들 - 건강한 한국 기업을 위한 피터 드러커의 제언
송경모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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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는 경영학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방대한 저작을 남긴 경영사상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경영에 "사상"이 개입할 여지나 있을까 의심을 갖는 게 더 흔한 인식일 텐데요. 드러커 박사님은 이런 인식이 오히려 그릇된 속물적 태도임을 분명히 계몽이나 하듯, "혁신"이라든가 "사회적 책임", "동반 성장" 같은 개념을 그 이른 시기부터 명확히 규정하며, 대중과 CEO 모두에게 상생과 건전한 성장에 대한 이상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공을 초월하여 보편 타당한 지표를 가르쳐 준 그의 저작이라 해도, 한 권의 분량에 압축된 내용을 독자가 접하거나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 의문도 적잖게 들었는데요. 이 책을 읽고 나니 "음 이 한 권으로 드러커를 마스터했다"라는 생각보다는, "확실히 오늘날에는 드러커(의 가르침)란 이렇게, 혹은 이런 내용들을 중심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라는 느낌이 확실히 오긴 했습니다.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21세기에 재조명되는 드러커의 교훈에선 이런 지점들을 눈여겨 봐야 한다"라든가, "여태 못 읽고 지나친 드러커의 함의 중에 이런 것도 있었구나" 같은 느낌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종래 고도성장기에 일자리를 구하기도 쉬웠고, 마냥 편한 보장이 제공되는 건 아니라도 "평생 직장" 개념이 (일본처럼) 자리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정규직"은 우리들에게 낯설기만 한 단어이며, 지금도 노동계에선 "모두의 정규직화"라는 의미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기도 합니다. 헌데 그렇게나 예전에, 드러커 박사가 "비정규직의 중요성"을 논한 적이 있었을까요? 서구나 북미에선 그때부터 비정규직 고용 형태의 비중이 컸었기에 (우리 막연한 인식과는 달리) 이 점에 대해 언급할 필요성이 분명히 있긴 했을 것입니다. 저들의 고용 환경에서 일상화된 패턴 중 하나이기에 이런 한 마디가 나왔던 게 당연하지만, 그런 사정(비정규직의 보편화)이 아직도 낯설고 적대적인 우리로서는 좀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드러커는 "비정규직도 분명 소중한 지적 자본 중 하나"라고 규정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회사가 당신을 실망시킨다면 과감하게 자유로운 유목민이 되는 길을 택하라."고 권유까지 하시는 저자님이지만, 독자로서 꽤 망설여지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도 4대 보험은 있어야죠.

아무리 헌법으로 보장된 국민주권의 시대라도, 회사에서 민주주의가 절대 보장 안 된다는 건 누구나 다 압니다. 뿐만 아니라 사장님들은 종종 그 직원들의 "부족한 인성"까지 교정하려 듭니다. 회사는 특히 한국에서, 이익을 내기 위해 모인 파트너쉽이나 2차 집단이라기보다 원칙 없는 학교 같은 느낌도 줍니다(요즘은 학교라고 해도 선생님들 자의가 지배하지는 않죠). 보통 경영 관련 서적에서 가능하면 지배적인 리더십을 따르라고 충고하지 이런 문제적 상황을 지적하는 태도는 보기 힘든데요. 저자께서는 "CEO가 선의의 계몽군주는 아니다.'라며 드러커의 주장을 정면 인용합니다. 사실 이 (드러커의) 한 마디는 올해 초 선거 국면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비대위원장 김종인 씨의 전횡을 지적하며 조국 교수가 꺼낸 표현이기도 합니다. "군주는 선의건 악의건 현대 조직에서는 필요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죠. 민주화한 조직에서 개인의 창의가 최대한 발현되고, 조직 소기의 목적을 보다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육의 본질은 직원의 연수가 아니라 경영자 개발이다" 드러커의 한 마디 중 이것보다 파격적인 언명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에 따르자면 소위 "목적에 의한 경영(management by objectives. MbO)"의 관점에서, 당면 과제에 효용을 제공 못 하는 모든 자원은 다 낭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저자께서는 재미있는 비유로, "드러커"라는 이름은 중세 네덜란드어로 인쇄업자라는 뜻인데, 이때만 해도 인쇄업 기능이란 평생 한 번만 배워둬도 그 자손들까지 쓸 수 있는 기능이었습니다. 하지만 드러커의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노동자나 경영자라도 지금처럼 어제의 지식이 오늘의 휴짓조각으로 급속히 변하는 시대는 겪어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드러커의 대안은 "지식을 배우지 말고, 배우는 방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드러커는 생전에 일본의 "개선"이라든가, "온 더 잡 트레이닝"에 주목하고 구미의 경영자들에게 적극 도입을 추천했죠. 노동자들, 직원들이야말로 그들 자신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현장에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다"는 게 요지입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무엇을 배울지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게 경영자가 아니라 노동자, 직원임은 또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들에게 자율권, 참여권을 주고 혁신을 스스로 이뤄나가는 주체로 키우는 기업, 경영자 스스로가 무지를 인정하고 함께 기업을 꾸려 나가는 기업이야말로 이 혁신의 시대에 생존이 가능하다는 뜻이겠습니다.

블룸버그에서 혁신 지수 1위로 한국을 올려 놓았다는 뉴스는 저도 몇 달 전 웹에서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찍부터 드러커가 파악한 혁신의 개념은 이런 관점에서 보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그는 첫째 혁신은 위험하지도 않으며, 둘째 뛰어난 아이디어나 기적적인 행운에 의하지도 않고, 셋째 천재의 전유물이 아니며, 넷째 내부에서만 일어나지도 않으며 업종의 현황에 반드시 밝아야 할 필요도 없으며, 다섯째 (개인적으로 이게 중요하다고 봅니다만) 영리 기관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여섯째 공무원이든 학자든 누구라도 일으킬 수 있는 게 혁신이라고 합니다. 혁신은 심지어 어린 청소년의 반짝하는 아이디어에서도 유발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하는군요. 혁신의 이런 본질을 꿰뚫지 못한 채, 혁신이 그저 근로자나 사회 다른 섹터 성원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의욕을 꺾는 데만 구호처럼 동원된다면 우리 나라는 곧 보잘것없는 변방의 활기 없는 소국으로 전락하리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드러커의 가르침이나 혁신에 대한 이런 통념이, 보다 실질적이고 보편의 가치를 지향하는 경영 목표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잘 확인할 수 있는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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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사라지는 시대 - 디지털 기억은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는가
애비 스미스 럼지 지음, 곽성혜 옮김 / 유노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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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의 본질은 "기억"이라고 해도 큰 과장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두뇌에서 쌓아온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진다면(그리고 다른 무엇으로 대체되기까지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우리가 마주하던 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억은 그 사람이 앞으로 특정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어떤 환경과 자극에 대해 어떤 감성적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서도 가장 큰 영향을 끼칩니다. 만약 그 사람이 자기 머리에 저장해 두는 기억에 대해 대강의 그림이라도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가깝고 먼 장래에 대해 예측이 가능할 것입니다. 기억은 그래서 그의 과거일 뿐 아니라 미래의 청사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존재의 핵심을 규정하는 기억에 대해, 뜻밖에도 저자는 "인간 문명의 역사는 곧 기억의 외주화의 역사이다"라고 규정합니다. 이런 개념 규정에 전혀 낯설었던 독자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무도 생각 못한 영역을 가리키는 탁월한 정의(定義)"라고 바로 느낌이 왔습니다. 사람의 기억 용량에는 한계가 있고, 따라서 기술 수준의 도약이나 습득한 지혜의 효과적인 전승, 전달을 위해서는 작은 뇌의 물리적 처리 능력에 마냥 기댈 수가 없고, "외주화"를 반드시 이뤄야 합니다. 기억의 외주화가 이뤄지고 나서 인류는 그 깨달은 지혜의 항구적 보존, 혹은 시공을 초월한 "공유"가 가능했고, 이 덕분에 문명은 비약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책은 이런 관점에서, 어떻게 과거에 인류가 "효과적인 외주화"를 이뤘는지 그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조명합니다. "배우는 방법을 배움"이야말로 지혜 중의 지혜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애써 터득한 지혜를 외주화하여 개인의 한계, 시공간의 장벽을 넘어서게 하는 그런 지혜 역시, "메타 지혜"., 혹은 "지혜의 진정한 정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내용은 역사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참으로 흥미로운 내용일 뿐 아니라, (저자의 말씀처럼) 엄청난 저장 기술 발달(디지털 혁명)으로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이하고 있는 인류가 어떻게 이 고비를 슬기롭게 넘길 지에 대해서도 좋은 시사점을 제공해 줍니다.

저자는 방대한 지식, 데이터(의 저장)가 곧 "권력"이 될 수 있음을 독자들에게 상기합니다. 이 책에 나와 있지는 않으나 이슬람의 정복자들이 이집트에 쳐들어와서 저지른 만행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운 것인데, 그 장본인이 남긴 말 "꾸란과 같으면 필요 없는 동어반복이고, 꾸란과 다르면 그릇된 이단이다."가 유명하죠. 하지만 이 현상 이면에는 지식을 통제하고 해석하는 집단의 권력을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음도 또한 분명합니다.

인간은 호기심이 있었기에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무척추동물들의 평탄하고 모순, 갈등 없는 삶으로부터 멀리까지 궤도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진화는 마냥 고등생물로서 우월하고 안전한 생을 보장해 주는 경로가 아니며, "아담과 이브 설화"에서 보듯 위험하고 예측 불허의 개척을 요하는 새로운 생으로 옮아가는 도전 과정이었습니다. 거친 환경에 폭 넓게 적응하고 그로부터 성과를 얻어 내기 위해서는, 인간은 축적된 지혜와 기술을 "외주화"하여, 동료와 후손에게 효과적으로 공유시킬 필요가 있었지요. 이런 수요가 성공적으로 충족되었을 때, 인간은 무한한 성취감을 느끼며 눈 앞에 이뤄진 성과 외에도 앞으로의 험난한 도전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추가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인들은 "기억의 외주화"가 부른 착시 현상을 차라리 경계해야 한다고도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책만 가득 쌓아 두고 그 책 속의 지식이 책을 소유한 자신에게 당연히 체화되어 있으려니 하는 착각이, 그 당사자를 구제 불능의 바보로 만든다며 따끔한 경고를 날렸습니다. 저자께서 이 일화를 인용하는 의도는 명백합니다. 방대한 지식에 대해 바로 모바일 기기를 통해 접근할 수 있고, 특별한 수련 없이도 바로 쓸 수 있게 가공된 지식을 어느 누구나, 심지어는 (소액의 데이터 이용료 말고는) 거의 치르는 비용도 없이(텍스트 정보는 바이트를 적게 소모하죠) 습득 가능한 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인공지능이 요즘처럼 세간의 뜨거운 화제가 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전에는 막연한 설정으로 인간이 묻는 질문에 기계음을 섞어가며 척척 대답을 내어주는 로봇이나 안드로이드, 혹은 엉뚱하게도 자동차 등이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했지만, 저런 기술이나 존재가 현실화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는 다들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특히 구글 사가 선도하는 구호처럼, "빅 데이터를 통한 학습 능력을 갖춘 중앙 정보 처리 장치"가 이를 곧 현실화할 수 있을 듯 기대가 팽배하죠. 그러나 이런 기술이 바로 상용화하여 돈만 주면 사고 쓸 수 있을 만큼 두뇌(인공지능이 모방해야 할) 구조가 이론적으로 해명되었는지도 미지수일 뿐 아니라, (괜한 호들갑이겠지만) 그런 인공지능이 보편화했을 때 오히려 인류가 맞게 될 위기는 전혀 예기치 못한 재앙일 수 있다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볼 수 있는 혜택이 손에 잡히기도 전에, 그 부작용만큼은 여기저기서 그 단초가 감지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재앙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은, 기억을 태평하게 외주화한 인간- 제 삶의 주인이어야 할 - 들이, 집단적으로 바보가 되어 간다는 징조입니다.

지금 우리가 외주화를 위탁한 매체는, 분별력도 없고 맹목에 가까운 식욕만 가진 디지털 디스크입니다. 반면 과거의 종이, 책, 파피루스 등은 그를 기록하는 인간의 지성과 판단, 재량이라는 에이전트를 거친 기록이며, 무작위 무차별의 정보 난장판이 아니었습니다. 저자는 "모든 걸 다 기억하는 남자"의 예를 들며, 고통스럽게도 선별적으로 망각하는 능력을 잃게 된 인간은, 그 정보(기억)의 홍수 속에서 아무것도 취사선택할 수 없게 되며, 마침내 무엇을 알아 볼 수도 표현할 수도 없어 기억의 장악은커녕 백치가 되고 만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남자"나 결과에 있어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정상적인 우리 사정과 무슨 관계냐고요? 지금의 디지털 매체는 "어떤 것도 잊지 않고 유실하지 않고 모든 것 -사실뿐 아니라 거짓, 욕설, 사기, 허위 정보, 무의미한 헛소리 등 일체 -를 기록, 기억합니다. 이런 매체에 외주화를 맡긴 우리 인간은, 나중에 이 중에서 무엇을 버리고 취해야 할 지 거의 선택의 마비지경에 빠지기 쉽습니다. 저자는 그래서, 무슨 정보를 걸러야 할 지 "필터링의 효율화"를 의미하는 "디지털 리터러시(문해율)"을 강조합니다. 앞으로 정보의 진위와 효용을 판독하지 못하는 인간은 과거의 문맹자나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정보와 가용 자원이 많을수록 더 바보가 되기 쉽다는 이 기막힌 역설, "기억의 외주화"로 문명사를 정의한 저자의 혜안 덕분에 더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문명이 발달한다는 건 어찌 보면 이런 뛰어난 스승이 얼마나 많이, 자주 배출되느냐 같은, 양이 아닌 질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 것 같아요. 간만에 너무나도 유익한 책 한 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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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당 정인보 평전 - 조선의 얼
김삼웅 지음 / 채륜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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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인물이라면 자신의 분야 하나에서 남다른 업적을 쌓아 뒤에 오는 이들의 발걸음을 매우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경우를 대개들 떠올립니다. 독립 운동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며, 하나의 쾌거나 지속적인 조직 활동으로 이족의 압제 하에 신음하는 동포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던져 준 이들을 그런 이유로 반 세기가 넘도록 영웅, 선열로 떠받드는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조선 반도에 당시 살았던 삼천만 생령의 일상이 얼마나 힘들었겠고, 오늘날의 우리는 의무감과 애국심, 자긍이 얼마나 깎였겠습니까?

위당 정인보 선생은 그러나 이 책(평전)만 읽어 봐도 알 수 있듯, 어떤 범주에 넣고 우리가 내내 기려야 할지 판단이 다소 어려운, 다방면에 걸쳐 위업을 이루고 겨레의 정신을 일깨운, 거대한 생을 산 포괄적 스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인보 선생의 함자를 들으면 대뜸 떠오르는 게 무엇입니까? 치밀하고 완성도 높은 평전 작가(우리가 이미 다른 여러 저작, 명작을 접했기에 잘 알죠)인 김삼웅 선생도 책 중에서 언급하듯, 나이 든 세대에게는 그 배운 국어 교과서에 실린 여러 명작 시조로 잘 알려진 문학가이기도 하고, 저희 세대 같은 경우는 국사(근현대사)의 강점기 파트에서 "얼 사상"을 설파한 사상가, 민족 운동가로 널리 인식되었죠. 그의 업적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언론인, 역사학자, 유학자로서의 양명학풍 계승자로서, 비단 "민족 운동의 거목"으로서의 뚜렷한 위상을 떠나서라도 후학들에게 잔뜩 연구할 과제를 던져 준(물론 후진의 발걸음을 크게 가볍게 해 준 연구 업적도 지대하게 남긴), 현재 진행형의 실천적, 이론적 목표이자 지향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도 여러 편이 인용되었지만, 그는 일단 조선 최고라 할 만한 학풍의 명문가, (김 저자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학문의 가문"에 태어나 그 시대 환경이 허락할 만한 최상의 교육을 받은 인재였습니다. 양명학이라 하면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러선 다소 비주류 스탠스의, 조심스러운(반체제로 오인 받지 않기 위해) 학통 접근의 자세가 필요한 진영이긴 했으나, 여튼 핵심 집권층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면면한 평판과 진지한 기풍의 가문이었음은 부인 못 합니다(p16에 직근 가계가 잘 도시되었습니다). 이건승, 이건창 양씨 형제(이 이름들은 국사 교과서에서 작지 않은 비중으로 강조된 암기 사항입니다)가 어린 시절 정인보에게 끼친 영향 역시 책에 잘 설명되어 있고요. 그 모계 역시, 조선에서 학문과 입신 출세 면에서 공히 높은 평가를 받는 유서 깊은 가문이었죠.

단 이 책을 읽으며 작은 의문이 들었는데, 그 모친에 대해 "참판을 지낸 달성 서씨 성건호의 딸"이란 소개가 있으나 일단 성건호란 이름을 가진 분이 "달성 서씨"가 될 수는 없고요. 제가 업무 중 작은 시간 날때마다 여러 다른 책을 뒤져 보았으나 어디서 이런 출처가 나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두번째로, 그 모친께서 "달성 서씨'인지, "대구 서씨"인지는 책 전체를 통틀어 모호한 부분입니다. 저자께서는 여러 차례 "달성 서씨"로 못을 박으시는 것 같으나(이 부분이 중요한 건 이후에도 계속 나오듯 위당이 그 모친에 대한 애틋한 정과 효성이 지극했기 때문입니다. 완성된 인간은 이처럼 기본적인 혈육에 대한 존중이 확고한데, 비천한 정신이 이를 이해 못 함은 당연함), 정작 위당이 직접 쓴 글(책 중 인용문들)에서는 명시적으로 "대구 서씨"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대구 안에 달성이라는 지명이 있으니(이것 역시 엄밀히 말하면 틀린 표현입니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면 해당 종문 인사들이 엄청 화내십니다. 보통 잘 모르는 이들이 "대구 서씨"를 그저 "달성 서씨"에 포함시켜 범칭하는데, 전자와 후자가 분명히 분파되었고 특히 전자 측에서는 아예 선조 대부터 구별되는 계열이라 주장하는 분들도 있으니 신중해야 하죠. 대구 서씨는 특히 경남 고성 일대에 집성촌을 이뤄 살며, 현재까지도 그 자제들이 명문대 합격률이 높아 고장에서 명성이 자자하니 이게 다 오랜 가문 내력의 소산입니다.

일단 위당은 통렬히 겨레에게 민족혼을 일깨운 위인이라, 책 편제에 무관하게 독자로서는그의 얼 사상(책에서는 제10장)을 우선 짚고 싶네요. 저희 세대는 "박은식의 혼 사상, 정인보의 얼 사상"을 항상 짝으로 두고 필수 암기하게 교육 받았는데, 정신에 이렇게 키워드가 한번 형성되면 성인이 되어서도 학습과 사색, 심화 탐구의 동기가 생기니 저런 주입식 교육도 결코 나무랄 건 아닙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무슨 정인보 선생의 그 심오한 체계를 한 학기에 걸쳐 가르칠 것도 아닌 이상 말입니다. 신채호의 낭가사상은 이 두 흐름과는 조금 성격과 좌표가 달라 한 단계에서 함께 논할 류는 좀 아니죠. 그는 이 얼 사상의 정초를 닦을 때 문일평, 안재홍 등과 협력했다고 책에 나옵니다만, 이분들은 문우(文友)이자 같은 기관에 몸 담고 언론 활동을 편 동지들이기도 하죠. 위당뿐 아니라 어느 민족운동가의 생애를 살필 때에도, 초심은 꿋꿋하고 재능도 탁월했으나 혹심한 탄압에 결국 훼절한 안타까운 사례가 많이 보이지만, 이분의 경우에도 그 훌륭한 분들이 하나하나 곁에서 멀어져 가는 과정이 못내 안타까울 뿐입니다.

김삼웅 저자께서는 정인보 얼 사상의 핵심에 대해, 소장 연구자인 최지연 교수의 석사학위 논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첫째 그의 사관은 정신사관이다. (유물론적 조류와 거리를 두었다는 뜻이겠죠)
둘째 그는 실학파(조선 후기)와 1910년대~20년대의 민족주의 학파를 직접 계승한 입장이다. (이는 그가 멀게는 실학파와 양명학의 거두들, 가깝게는 신채호의 학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적자임을 강조하죠)
셋째 1910~20년대 민족주의 학파가 빠진 함정인 영웅중심 사관을 극복하고, 역사의 중심에 다중과 집단으로서의 민족이 놓여야 함을 강조했다.
넷째 "얼 사상"으로 타율성론을 타파하려든 확고한 반식민주의 입장이다. (당연하죠)

특히 셋째와 관련, 이 책에서 다양하게 인용(이 책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된 그의 저술을 보면, 이런 경향성을 직접 비판한 대목이 실제로 보입니다. "외국의 영웅을 추숭하며 나옹이니 화옹이니 떠들지만..." 이때 나옹은 당시 표기로 나폴레옹, 화옹은 워싱턴을 가리키죠. 물론 이 언급은 충무공 이순신의 추숭을 강조하며 나온 것이니만큼 그 역시 영웅주의 사관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닌가 같은 역비판이 가능하지만, 충무공만이 갖는 역사 속에서의 특수 위상도 감안해야 공정한 접근이 가능하겠습니다.

고 천관우 전 동아일보 사장은 (이 책에도 인용되듯) 대략 1930년대의 트렌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죠. 1) 이병도 중심 실증주의 2) 백남운 등 마르크스주의 사관 3) 실학, "국학" 유파를 계승한 신 민족주의 사학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며,
이 중 위당이 3)에 속함은 두 번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재 신채호와는 동료이자 십여 년의 나이 차를 둔 일종의 사제관계이기도 했다고 저자는 평가합니다. 재미있게도 위당은 자신만의 관점을 담은 "단재론"을 펴고 있어 우리 독자들이 시대상과 인물관을 동시에 찬찬히 살필 기회를 제공합니다. 위당은 단재의 천재성을 두고 극구 높이 받드는 평가인데, 그의 옛스러운 표현을 최대한 현대식으로 바꿔 요약한다면 1) 남이 못 보던 기이한 점을 문헌에서 잘 발견한다 2) 복잡한 논의 속에서 지엽말단을 제거하고 요점을 잘 파악한다 3) 숨겨져 있는 흐름을(때로는 의도적으로 위장된 속에서도) 그대로 통찰한다 등입니다. 이 책은 아마도 독자들이 가장 어려워할 만한 대목이, 당대의 명문장가로 손꼽힌 위당 자신의 인용문 속에, 너무도 고풍투의 표현과 어휘가 다수 포함, 활용되고 있다는 이유가 있겠죠. 그런데 위당의 재능 그 정수는 바로 이런 기발하고 적확한 표현력에 있으므로, 후학들의 눈 어두움, 배운 바 없음을 오히려 자책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정인보 선생은 특정 세대에게는 시조시인으로도 널리 알려진 분인데, 이 책에서는 우리 시대 연구자로 김인환 교수, 지난 시대 정인보 연구 권위자이자 본인이 시조 시인이기도 했던 고 이태극 교수 등의 글을 자주 원용하여 독자에게 좋은 관점을 제공합니다. 이태극 교수님은 바로 저희 세대가 배운 교과서에 작품이 자주 등장한 문인이기도 해서 특히 반가웠습니다. 옛 유가의 거학들이 자주 강조한 대로, 수신제가 이후에야 치국평천하인 법으로, 사람이 그 혈육과 존속에 대한 삼가고 받드는 마음이 없다면 그 천박한 입에서 나오는 온갖 미사여구와 명분이 다 허언에 불과할 뿐입니다. 특히 <자모사>(연시조)에 표현된 그의 간곡한 효심은, 어디서 위대한 정신이 민족과 인류 보편의 가치에 대한 타당하고 지극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사람이 세상에 나와 제 활개를 폄에 있어 가정 교육의 바탕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닫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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