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거 - 행동의 방아쇠를 당기는 힘
마셜 골드스미스.마크 라이터 지음, 김준수 옮김 / 다산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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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혹은 법학이나 기타 "인과 관계"가 논제로 끼어들 수 있는 모든 학문 영역에서, 원인(remote cause. 原因이 아니라 遠因입니다), 근인(近因. approximate cause), 그리고 trigger(최근접 동기, 촉발인), 이 삼단계 구조를 인용하곤 합니다. 사리를 판단함에 있어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를 밝혀 내는 건, 가장 본질적이고 강력한 설명의 본체입니다. 이 부분이 해명된다면, 나머지는 모두 부차적인 단계에 불과하죠. 어떤 결과를 빚은 "먼 이유", "가까운 이유", "결과를 발생시킨 직접 닿은 계기", 이 세 가지가 시원하게 밝혀지면 이론은 거의 완성됩니다.

그러나 마셜 골드스미스는 자기계발에 있어, "먼 이유나 가까운 이유"를 밝히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봤습니다. 그런 심오하고 근본적인 탐구는 순수 학문의 영역이며, 설사 그게 무엇인지 밝혀진다 해도 당사자의 생활에서 직접 유익한 결과를 낳는 데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본 겁니다. 총알이 총구에서 발사되는 이유는, "인간의 탐욕 혹은 악의"라든가 "작용 반작용의 법칙, 인화를 유발하는 화학 반응" 따위가 아닌, 가장 상식적이고 실천적인 지점을 꼽으라면 바로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일 것입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발사되며, 이곳을 손 안 대면 총알이 최소한 원거리까지 발사될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 역시, 어느 지점을 손 대면 바로 "행동으로 옮겨질 만한" 어떤 내적 동기, 습관, 자극 기제가 분명히 있습니다. 저자는 바로 이 방아쇠와도 같은 지점을 찾아 집중 공략하여(아니면 반대로, 그런 행동이 더 이상 유발 안 되게 장애물을 설치하든가)행위자의 삶, 일상, 습관을 바꾼 후 성과를 내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셜 골드스미스뿐 아니라 (그가 이 책 속에서 지인이라며 몇 번 언급하는 사치 같은) 다른 일류 자계서 저자들도, 책을 쓸 때 일방적이고 추상적인 설교로 일관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때, 독자나 청중이 지루해하며 별반 감화를 받지 않을 것임이 너무도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쓰는 기법은 거의 언제나, 자신이 직접 인터뷰한 유명인사, 성공 사례로 꼽을 만한 모범적인 인생 들의 사례를 인용하는 방식입니다. 이 책에도 그런 태도의 관철이 예외가 아닌데, 사치, 블룸버그 시장, 보잉 회장 앨러리 등의 구체적 예가 실려 있는데, 이렇게 책을 쓰면 다른 사람이 표절하기가 상당히 힘들어지기도 하죠.

"트리거"에 대한 위와 같은 정의는 사실 영어 네이티브에게는 일일이 반복하지 않아도 자신들이 방대한 발화(發話) 환경에 노출되어 온 결과 당연하게들 알고 있는 겁니다. 4장에서 골드스미스가 정리하는 이 개념의 정의는, 이런 전제를 먼저 바탕으로 깔아야 그 풍성하고 정확한 의의가 (특히 비영어권의) 독자에게 다가오겠습니다. "간접적 트리거"라는 것도 원인, 근인에 비해서는 훨씬 가까운 거리에 놓인 거고, 요걸 손만 댔다 하면 바로 총알이 튀어나오듯 결과의 양상이 바뀐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습니다(그게 아니라면 이미 "트리거"가 아님). 가족 사진을 볼 때 전화를 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그 사람에게는 이런 행위가 트리거라고 간주될 수 없습니다. 반면 "옛 생각"은 독립해서 그것만이 자극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트리거"가 되지 못합니다.

요약하면, 가족사진이 "옛 생각"을 직접 자극→ 옛 생각은 전화 거는 행위를 직접 유발 (그러나 가족 사진이나 그 어떤 다른 매개 없이 옛 생각이 정상적인 두뇌에 느닷 떠오르진 않음. 만약 그렇다면 일종의 정신 이상), 뭐 이런 기제를 거쳐 (행위자가 콘트롤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트리거(비록 간접적이긴 하나)가 "가족 사진 보기"가 되는 거죠. 트리거의 또다른 특징은 그래서 "행위자가 쉽게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라야 합니다. 그게 아니고 내면의 자제, 절제, 조절에서 행위 변화가 가능하다면 일상인이 아니라 득도한 고승이죠. 골드스미스는 고통스럽고 달성 가능할 법하지도 않은 아득한 내면에서가 아니라, 쉽게 발견가능한 일상과 주변에서 계기를 찾아 나를 변화시키자는 주장을 하는 겁니다. 자계서 본연의 기능이 그런 것이기도 하겠고 말입니다.

"트리거는 예상한 것일수도, 예상 못한 것일수도 있다." 예상이 되는 건데 왜 이를 콕 짚어 내어 생산적인 실천 과정에 편입하지 못할까요? 만약 어떤 이가 성과를 제대로 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골드스미스의 관점에서라면) 이런저런 트리거를 많이 찾아서 실천화한 사람이라는 겁니다("맞아, 난 이렇게 하면 달라지더라고."). 그러나 많은 이들은 트리거를 "귀찮게" 일일이 찾아서(설사 알고 있다 해도) 습관을 교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당사자가 그저 편하게 느끼는 루틴, 타성이 있는데, 자계서뿐 아니라 많은 두뇌과학 토픽 서적에서 언급하듯 대개는 이런 루틴에 그저 따르는 걸 자기 판단, 자발적 결정에 의한다고 착각하는 거죠. 골드스미스가 명시적으로 그 말을 하진 않아도, 루틴이 그저 당연한 게 아니라 의심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마땅하며, 트리거는 그 결과로 루틴 대신에 들어간 모듈이라는 주장을 결국 이 책에서 하는 겁니다. 이렇게 "예상 가능한 트리거를 일일이 찾아내어서 대신 이식한 사람"은, 이제는 "예상 못했던 트리거"도 눈에 보이고 찾아 내며 이를 일상에서 핵심 계기로 활용까지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트리거"는 범용 만능 계기를 하나 찾아서 그날부로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니라, A의 트리거, B의 트리거, ..... Z의 트리거, 알레프의 트리거,... 등등 거의 무한에 가까운 일상의 나쁜(혹은 좋은) 습관에 따라 개별 트리거가 다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범용 트리거를 찾고 싶은 사람은 역시 절에 들어가서 스님과 함께 수행을 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면서부터 훌륭한 부모님께 훈육을 받아 좋은 트리거만 몸에 배어 있다면 그 사람은 따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행운아이겠습니다. 11장에서 "하루 질문" 등 표를 만들어서 트리거 생성의 점검을 권유하는 건 다 이런 전제 아래에서 도출되는 실천적 방침입니다.

20장은 다소 "감동적으로" 이뤄지는 책의 마무리인데요. 이렇게 일상에서 소소한 습관 하나라도 생산적인 교정이 이뤄진 사람은, "어, 저 친구 봐?"라며 주변에 어떤 자극을 주는, 공동체와 사회의 트리거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정도가 된 사람은 저자 골드스미스처럼 책 쓰고 강연 다니면서 올린 소득으로 안락한 생활을 보상 받는 건데, 뭐 그런 단계까지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일단 직장에서 가정에서 내 자신이 만나는 문제라도 시원하게 해결하는 인생이라면, 먼저 자신의 몸이 성취로 인한 정직한 상쾌함을 맛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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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핑크 출애굽기 강해 아더 핑크 클래식 4
아더 핑크 지음, 지상우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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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이하 이 책의 표기를 좇아 "아더"로 씀) 핑크의 생애와 저작을 읽으면 저는 언제나 이런 느낌을 받습니다. 올바르다고 믿는 원칙과 소신을 위해 구태여 주변과 마찰을 빚어가면서, 협소한 자아의 욕구와 만족이 아닌 "더 큰 이상"의 실현에 기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하는 것.  그 과정과 결과가 개인의 아집과 독선에 그치지 않았음은, 그가 교계에 남긴 신학적 업적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현재의 실태를 보면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남에게 듣기 좋은, 솔깃한 말만 골라 하는 건 특별한 노력을 요하지 않는 법이죠. 엘리야나 이사야, 나단 같은 이들도 대중에게 호응과 존경을 얻은 게, 감언이설과 공감을 빙자한 선동 따위를 통해서가 아닌, 진실과 실체를 향한 갈구와 선포가 그 비결이었음도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typology는 비단 신학에서뿐 아니고(신학에서의 등장이 가장 시기적으로 먼저인 것도 아니며), 현존하는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방법론, 혹은 유파로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진영"입니다(예를 들어 언어학에서는 유형론, 고고학에서는 형식론). 하지만 다른 학문 분야에서 발전한 방법론이 신학의 이 입장 태동과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더군다나 "모형론"은 (비판도 많이 받습니다만) 신학에서 꽤나 입지가 탄탄할 수밖에 없는 "태생"을 갖췄는데, 이는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신약 텍스트 중에서, 거의 직접적이라 할 만한 "모형론적 언급"을 수 차례 하고 있음("모형론"이란 용어 자체가 아니라)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뿐 아니라, (스승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이 당연한) 사도들도 여러 대목에서, 현대 용어로 "모형론적 태도"로 볼 수밖에 없는 깊숙한, 그리고 울림 깊은 발언을 어려 차례 행합니다. 만약 "모형론적 방법론"이 어떤 이유에서 송두리째 신학(중 주석학)으로부터 퇴장하는 일이 혹 생긴다면, 신학의 전 체계가 붕괴하리라는 예측도 그리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초기 유력 교부들 중 여럿은(비록 다수는 아니라 하더라도), 본디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타나크")을 기독교의 경전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까지 했습니다. 이런 교부들의 태도는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기독교인 기준이라 해도) 아주 수긍이 안 가는 건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나중에 목사님이 되실) 신학생들 입에서 나오는 "성경(聖經)이 성경(性經)인가?" 같은 대화를 듣기도 했는데, 물론 경박한 표현인데다 그게 당사자들의 최종적 결론은 아닌 줄 알지만, 여튼 구약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미약한 인간의 지혜라서인지는 모르나) 상당히 부담이 따르는 게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구절들은, 설령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들어도 "무슨 말인지 당최 알 수 없는" 경우도 수두룩합니다. 경전의 문면(文面)이 이런 형편이기에, 성경을 읽을 때(마르틴 루터 이래 평신도들 누구나 성경에 접할 수 있으며, 또 그게 의무의 일환입니다) "주석과 해석"이 없으면 소통이 거의 불가능하고(깊은 신심과 영성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또 그게 주석학자들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텍스트를 해석하고 이에 주(註)를 다는 근대적 기법과 지혜는 역사적으로 다른 어떤 학문보다 먼저 기독교 신학에서 비롯, 발전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는 법학에서의 주석서(Kommentar. 영어의 commentary) 서술법이 있죠.

모형론은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구약의 상당수 사건과 선언, 기술(記述), 증언은 신약의 교리와 계명을 본따서 이뤄진 것이란 전제에서 시작하는 해석 태도입니다. "모형"이라는 말 자체가(신학뿐 아니라 일상언어에서도), "모방해서 만든 꼴"이란 의미죠. 시간적으로 먼저 이뤄진 일들(과거)이, 어떻게 이후의 진행(미래)을 모방할 수 있느냐며 의문이 생기는 게 또한 당연하지만, 지금 우리는 신학의 방법론을 주제 삼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연대적 순서가 시대구분적 합리성에서 벗어난다"는 핑크의 다른 맥락 언명도 있습니다. p452:17). 앞서 언급한 대로, 무엇보다 신약의 복음서 등이, 구약의 이러이러한 구절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이러한 행적과 가르침을 예비하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그러한 사건의 발생을 "예언함"이었다는 식으로, 거의 직설적 서술을 행합니다. 주일학교 교리 시간에 아주 열성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던 신도들은, 자신이 소박하게나마 이해한 대부분의 성경 해석론이 알고보면 "모형론이 그 전부나 마찬가지였음"을 비로소 깨달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형론은, 기독교인이 성경을 받아들임에 있어 어느 정도 "기본적이고 원칙적인 자세"라고 해도 과언이 역시 아닙니다. 물론 그 무차별적인 적용에 있어서는 크나큰 신중함, 자제가 필요하겠지만요.

"둘은 언제나 분리의 숫자이며, 셋은 언제나 현시(manifestation)의 숫자이다." 아더 핑크가 즐겨쓰는 문장인데, 최소한 전자를 위해 인용되는 예 중 different, diversion에서 di- 어근이 그런 의미임은 세속적, 언어과학적 맥락에서도 타당해서 재미있습니다. 책에 그런 말은 없습니다만, 삼위일체에서의 3 역시 현시(顯示)로건 암시로건 묵시로건 간에, 이런 영원의 진리와 조우할 때 울림이 예사롭지 않은 숫자이죠. "삼 개월이 되던 날, ...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삼 개월이 아니라 삼 년, 삼십 년이 지나도 이 모세의 백성들이 얼마나 지도자, 구원자의 속을 썩이는지는 문제아가 그 부모의 속을 태우는 게 애교로 보일 만큼이죠. 그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 구해 놓았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인데, 여튼 신학적 문제에서 "과연 시내(시나이) 산에 도착했을 때 모세의 섭리시대가 시작(dispensation)되었다는 확증이 있는가?"라는 오랜 물음을 아더 핑크는 도전적으로 내어 놓습니다.

그는 특히 p286 중간쯤에서 "어느 평판 있는 주석자"의 문장을 길게 인용하고, 이를 놓고 신랄하다 할 만한 어조로 비판을 시작하는데, 이 27장에서는 이에 관한 논의가 대부분을 이룬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참고로 많은 분들이 큰 관심이 없으시겠지만, 지금은 거의 잊혀진 이 "주석자"가 누군가 하면, 대략 아더 핑크의 시대보다 반 세기를 앞서 산 에드워드 데넷이라는 존경받는 학자, 성직자였습니다. 이 책뿐 아니라 다른 번역본, 혹은 영어 원문에도 명시적 언급이 없어서 정보 삼아 이 서평에 기록해 둡니다. 참고로 p468:10, p484:2 등에는 이 이름이 나오지만(이때에는 그 인용 주장이 핑크 자신의 의견과 같은 취지라 이름을 바로 밝힙니다), 데넷 말고도 다른 여러 주석자들(코츠, 라이다웃[이 번역서에서는 "리도우트"라고 쓰더군요], 솔타우. 크레인, 불링어, 브라이트)이 언급되는 터라,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 줄 독자가 눈치채긴 힘들겠죠. 참고로 이 번역서는 소결(summary)을 편제상 따로 구분하지 않고 제72장으로 다뤘고(다른 章과 동등한 지위로 봄), 원서나 번역서나 참고 문헌 목록이 없는데 이는 주석서의 성격, 편집상 이유입니다. 근엄하고 신실하기 짝이 없는 핑크의 문장과 어조에 다소 주눅이 들 수 있지만, 성경 구절의 진의가 항상 궁금했던 신도들(혹은 일반인들)에게 매우 유익한 가르침을 담은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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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 (완역판) - 그리스도 이야기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47
루 월리스 지음, 심은경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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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많은 어르신 세대에게는 (요즘 말로) "인생 영화"나 마찬가지인 작품이 1959년작 <벤허>일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여튼 청교도들이 건국의 아버지로 받들어지는 미국에서는 크게 흥행에 성공하고 격찬 받은 게 이상할 것도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 신도 인구가 절대 다수라고는 할 수 없는 한국에서까지 그만큼 호응이 좋았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하게 느껴지기도 하죠. 그런데 이미 만들어진 지 반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관람해도, "과연 그럴 만하다"는 게 세대를 초월한 보편적 반응일 것입니다. 확실히 저 고전 영화는, 감동적인 주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부각시키는 매우 영리한 전개를 취합니다만, 그런 기술적 분석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신비스러운 스토리텔링의 마력"을 지닙니다.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의 완성도를 달성한 저 대작을 한번 보고 나면, 그 영화가 원작 소설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아는 사람도, "혹 영화를 본 감흥이, 소설이 취하는 설정상의 부분 차이 때문에 깨어지지나 않을지" 하는 마음에 책을 펴길 주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니면, 19세기풍의 장편 소설이란 외관이, 그 분량의 위압감, 표현 개성의 이질감 때문에 현대의 독자를 지레 밀어내는 면도 없지 않거나 말이죠. 사실 윌리엄 와일러의 저 명작이 워낙 모든 면에서 완벽하기 때문에, 그 총체적 감흥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분들은 다른 매체를(그게 원작 소설이라 해도) 구태여 파고들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그래도요, 저렇게나 강렬한 영감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명작의 원동력이, 꼭 감독의 연출 솜씨나 배우들의 연기, 혹은 각색 단계에서의 재해석 센스, 뭐 여기에만 그 출처가 있지 않으리라 믿는 분들은, 이 오리지널 장편을 꼭 읽어 보시길 추천 드리고 싶어요. 이 장편은, 그저 "영화 <벤허>의 원작", 그 이상의 문예적 깊이와, 작가의 경건하면서도 치열한 성찰의 결과, 성취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분들은, 영화와는 어쩌면 별개로 자신의 영성을 튼튼히 다지는 데 멋진 컴패니언을 하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와 이 "원작" 소설은 전개와 설정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입니다. 몇 가지만 좀 짚어 보면,

영화에서 선량하기 그지 없는 명문가의 모녀가 그토록 참혹한 운명을 맞은 데 대해, 많은 관객들이 사정 없는 비판을 메살라에게 가하는 게 흔한 반응이며, 또 지극히 당연하죠. 저는 와일러 감독의 그 영화에서, 캐릭터 메살라가 (아무 직접 원한이 없는) 모녀(자신의 모친, 혹은 여동생과도 같은 이들)에게까지 저런 해코지를 하는 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악인이라 그렇다고 단순하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편하죠), "메살라형 악인"은 노리는 결과만 깔끔하게 달성하는 경로를 취하지 애써 저런 사디스트식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는 이유에서입니다(만약 그런 성격이었다면 와일러 감독이 앞부분에서 더 복선을 깔았을 테고). 그런데 이 소설을 읽어 보니, 여기서는 꽤나 다변으로 스타일이 바뀐 메살라가 충분히 그런 음모, 비열한 시도를 할 만큼 성격이 구축되었더군요. 이 점은 영화가 (구태여 비판을 하자면) 좀 실패한 부분이고, 반대로 소설에게는 상대적으로 더 설득력을 갖췄다며 평가해 줄 만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소설은 반대로 좀 과잉 설명을 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영화에선 별 존재감도 없던 "신임 총독"이, 소설에선 이름까지 제시되며 제법 적극적 역할을 하는데, "암살 시도로 충분히 오인 받을 만한" 사고를 당한 후, 화풀이를 겸해서 불법적으로 벤허 가문의 재산을 모두 탈취한다는 설정이 있어서입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총독쯤이나 되면 법적 절차를 밟아서 몰수할 수도 있을 텐데(ㅎㅎ), 저런 무리수를 둬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여튼 머리가 나쁜 건지 도둑질이 천성인 건지 이 신임 총독은 그 방법을 택하고, 여기에 메살라가 공범처럼 가담합니다. 이미 설정된 메살라의 성격만으로도 충분히 악행을 저지를 만한데, 차라리 총독이 주범이라 할 만큼 범행의 은폐에 더 적극적이고, 이 과정에서 그 오랜 시간 동안 모녀가 유폐되어 몹쓸 병까지 생겼다는 게 소설 속의 진로입니다. 이 총독의 이름은 "그라투스"인데, 이름값을 전혀 못한다고나 봐야겠죠.

영화에서는 유다 벤허 개인의 "로마에 대한 적대감"이 그리 선명히 표출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유대 명문가의 자제로서(이 소설에서는 "왕자"라고 번역되는데, 王子가 아닌 王者로 해석해야겠죠?), 또 정통 민족주의, 유대교의 가르침 속에서 자라난 청년 답게, 이민족 제국의 폭압에 대한 반항심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정치적 대립보다, 개인의 악행에 대한 응징을 기독교적 가르침으로 순화하는 쪽에 초점이 놓였고, 제국의 질서는 은근 주인공 청년을 돕는 환경으로 더 부각되는 편입니다. 영화에서는 메살라의 전차를 놓고 "저건 그리스식이다!"라며 그 공격적으로 변형된 구조에 대중들이 경악하는 장면이 있는데, 원작 소설은 정반대로, 벤허의 전차가 "축대가 낮은, 실용적이고 튼튼한" 그리스식입니다. 소설에서 "로마적인 것"은 거의 노골적으로 악(惡)의 상징이며, 유다 벤허는 열혈 청년들을 모아 게릴라전을 펼칠 준비까지 합니다. 하지만 영화에선 "그분이 나의 손에서 칼을 뺏어가셨어."라는 유명한 대사처럼, 이 내적 갈등이 좀더 깔끔하게, "한큐에", 해결됩니다. 소설에서의 벤허는 내면의 복수심과 분노를 제거하는 데 몇 단계를 더 거치죠.



와일러의 영화와 달리 이 소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시모니데스 캐릭터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벤허 가문 종가에 거주하지도 않고, 무역으로 크게 번성한 안디옥(안티오크)에서 지역의 대부호로 군림하는데, 이 성공의 종잣돈은 그라투스 총독의 혹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주인 가문의 재산 본체 소재를 굳게 비밀로 지켜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딸 에스더도 영화에서처럼 순종적이고 말 없는 아가씨라기보다, (최소한 소설의 첫 등장에서만큼은)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란 딸내미답게 자기 생각을 분명히 드러내고 감정 표현에도 솔직합니다. 이러던 게 나중에는 아이라스(Iras)라는 연적 겸 강력한 안티테제를 만나 성격이 (와일러 영화 속의 하이야 해러릿에 수렴하듯) 변하는데, 뭐 이런 건 작가의 분명한 의도가 구현된 결과겠네요.

와일러의 영화에서는 마리나 버티가 (아주 잠시) 연기한 플라비아 캐릭터가, 극 중 미미하게나마 요염함, 섹시한 분위기 창출을 맡습니다. 세 시간에 가까운 긴 러닝타임 중 이 정도 양념은 있어 줘야, 미리엄, 티르자, 에스더 3인의 여성으로 이어지는 숨막힐 정도의 경건- 정숙 라인에 균형을 맞추겠죠. 그러나 소설에서는, 무려 동방박사 벨타사르의 친딸로 설정된 (예의) 아이라스가 등장하여, 갈등과 대립의 상당 부분 원인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아이라스는 안티오크에서 벤허를 처음 만나는데, 그 인연(..)이 예루살렘에까지 이어지며 무대의 반을 주름잡습니다. 작가의 의도는 이런 강력한 악녀 스탠스를 부각하여, 이교적 타락과 세속주의적 경향 모두를 비판하는 데 있었겠죠. 이 아이라스는 경건하기 짝이 없는 소설 속에서 일종의 미스테리격 반전을 형성하는 데 기여도 합니다만("벤허에 무슨 반전이 다 있었어?"), 전체적으로 이 시도가 그닥 큰 성공은 아니라고 보입니다. 아이라스의 입을 빌려 길게 풀려지는 이집트 신화 두 꼭지도, 여튼 이런 반전을 염두에 두고 보면 복선 노릇을 한다고 봐야겠죠.



이 소설에서는 공간적 무대로서 로마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로마는 여기서 개인의 평화와 자유를 억압하는 거대한 악의 집결체로 내내 적대되기 때문에, 구체적 로케이션으로서의 역할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봐야겠죠. 과거를 회고할 때 간간이 누가 로마에서 벤허의 권투선생이었다는 식으로 간접 언급될 뿐인데, 영화에서는 반대로 집정관의 귀환 때 무려 개선식까지 열어 주죠. 이는 고작 해적을 상대로 거둔 "피로스의 승리"였다는 점에서 사실 고증 미숙에 가까운데, 원작 소설에선 전혀 다루지 않습니다. 벤허가 동료 죄수들의 족쇄까지 다 풀어준다거나, 집정관의 목숨을 노리는 해적 두 놈을 제거하는 장면도 소설에는 없고, 바다에 빠지는 과정도 집정관의 구조가 목적이 아니라 그저 실수로 떨어진 걸로 되어 있더군요. 퀸터스 아리우스(이 책에서의 표기를 따릅니다)가 청년 유다 벤허를 입양하는 과정도, 영화에서는 무슨 황제가 원로원의 동의를 받니 마니 고작 그런 개인 사정을 자기 직권으로 해결 못 하고 쫀쫀하게 구는데, 소설은 당사자의 말 한마디로 끝이라서 독자가 보기에 후련합니다.

역사적 고증의 측면에서, 소설은 독자를 압도한다 할 만큼, 엄청난 배경지식을 거의 매 챕터 매 문장마다 살포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루 월레스 장군을 "퇴역 후 깊어진 종교적 신심으로 느닷 명작을 쓴 늦깎이 작가" 정도로 생각하는데, 만약 그런 이력뿐이라면 (정말 신이 강림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이런 대작이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소설적 기교 면에서 다소 투박한 면은 있지만, 인물과 풍경 묘사의 세심함이라든가 그 기술(description)을 일일이 의도한 메시지에 투영하는 솜씨는, 전문 문필가급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죠. 부제는 "그리스도 이야기"라고 되어 있지만(또 그 깊은 신앙심의 표현과 부각에 비추어 타당한 작명이기까지 하지만), 이 소설은 당대 인문 교양과 지식의 총체라 할 만큼 풍성한 육신까지 구비한 구조입니다. 물론, 예를 들어 동방박사 3인의 출신지라든가 준비한 예물 등을 설명한 대목에서, 통설적 입장이 따르는 정보와는 심각한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차피 구비 전승에 유일 정통은 없는 거고, 그런 설명들이 "루 월레스 장군의 독자적 연구 결과"라고 봐 주지 못할 것도 없죠. 장군은 전업 군인이 아니라, 명문대에서 젊은 시절 소양을 쌓은 다음 변호사 개업까지 거친, 당대 일류의 인문 지식인이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강감찬 장군처럼, 문관 출신이 자질과 관록을 바탕으로 장년 이후 시기에 무공(남북 전쟁에서의)까지 쌓은 케이스라고나 할까요.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윌리엄 와일러가 남긴 그 대작 영화의 근거, 저본, 원작이지만, 영화와는 별개로 웅대하게 성취, 건설된 문학 작품으로 따로 평가를 해 주는 게 마땅하겠습니다. 여전히 감동적이지만 방향과 색깔이 조금 다르고, 소양 있는 독자가 문학에서 마땅히 기대함직한 체험을 (누가 군 출신이랠까봐) 더 살뜰히, 더 자상히, 그리고 더 넉넉히 베풀고 있습니다. 고대 세계 동서의 교류 지점에서 인류가 어떤 모습으로 거닐었는지(심지어 중국 이야기도 쬐끔은 나와요), 지금이나 그때나 온갖 악인과 비위와 모순이 판치는 험악한 세상에서 순수한 청년 벤허(성장도상에 있는 보편적 인간형이죠)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지, 그리고 (부제에 나온 대로) "그리스도 그는 누구였는지", 얼핏 보아 불가능할 것 같은데도 이 세 가지 엄청난 질문에 모두 답해 주는 "성실하고 위대한 문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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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첫사랑
빌헬름 마이어푀르스터 지음, 염정용 옮김 / 로그아웃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귀한 신분과 태생을 지닌 이들은 주위에 주는 인상과 기품부터가 다릅니다. 민중은 대개 큰 복을 갖고 태어나 근심 없이 성장한 왕재(王材)들에게 환호를 보내는 게 보통이지, 어떤 타도의 대상이나 저주의 객체로 삼으려 들지는 않습니다. 후사가 단절되었을 때 외국의 존엄한 핏줄이라도 모셔 와 국가의 긍지로 삼으려 드는 게 유럽의 지난 역사에서 오히려 상례였습니다. 다만 그 군주가 제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따스한 정치를 베푸리라는 기대가 그 전제로 붙습니다. 정녕 왕권이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게 아닌 이상, 군주의 위엄과 복락은 생각보다 위태한 조건부 특권입니다.

<황태자의 첫사랑>은 예전 세대 어르신들에게 각별한 추억과 낭만의 문예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발표된 지 한 세기를 훌쩍 넘긴 이 오래된 작품은, 빌헬름 마이어-푀르스터의 원작 소설이나 희곡 포맷보다. 두어 손을 더 거쳐 각색된 오페레타라든가 영화 버전으로 더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마이어-푀르스터는 (유감스럽게도) 비평, 대중 호응 양면에서 성공한 작가가 아니었고, (의외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현저한 재평가가 시도된다든가 하는 경향도 못 됩니다. 다만 그의 작품들 중 특히 이 소설이 독문학의 한 교본처럼 동아시아(의 독문학계)에서 큰 인기를 누리며 받아들여졌습니다. 공교롭게도 작품의 배경과 소재가, 대단한 선진국으로 여겨진 독일의 유서 깊은 대학가와 그 낭만을 다룬 터라, 대학 문화가 아직 생소했던 이 지역에서 각별히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된 것 아닐까 짐작합니다.

이 짤막한 소설의 주제가, 과거에 대한 짙은 향수를 가진 어르신들이 그리 여기듯, "신분을 초월한 아름다운 사랑"일까요? 독자로서 저는 오히려 그 원제목에 눈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싱겁게도 두 어절 "카를(칼) 하인리히". 이 소설은 알고 보면, 후계자 시기의 "졸업"과 젊은 주권자로서의 "입문기"를 겹치듯 겪고, 아울러 평민들과 무람없이 어울리며 세상의 맨모습을 잠시나마 엿본 청춘기의 황태자에 철저히 초점이 맞춰진, 아름답고 순수한 성장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성장물도 고통스러운 현실과의 조우가 남긴 상처라든가, 이후의 어떤 위안으로도 망각이 불가능한 좌절 따위가 내내 유령처럼 당사자의 뒤를 따르는 성장 스토리도 있겠지만, 이 소설은 그런 요소가 전무하다시피합니다. 물론 "반달리아" 학우회의 키 큰 학생과 겨뤄 얼굴에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그런 것쯤은 젊은 군주의 고운 피부에 패용된 장난스런 훈장 정도로 봐 줄 수 있겠죠. 중반 이후 선왕(황태자의 백부입니다)이 붕어했을 때, 우리 젊은 후계자의 안색이 유독 침통하여 백성의 동정을 한몸에 받았을 때, 사실은 이 상처가 (의도치 않게) 효과적 소품 노릇도 했겠고 말입니다.

소설의 전반부는 그간 궁정에서 황태자의 교육을 담당한 위트너 박사의 엉뚱하고 천진스런 불평과 고민이 주도하는 3인칭 관찰자 시점입니다. 농부의 소생으로 거친 식사에 위가 단련된 이가, 어쩌다 궁정까지 불려가 분수에 넘는 호강을 하다보니 각종 예법에 스트레스 받으랴, 기름진 식사에 일일이 적응하랴 그 나름으로는 큰 고생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정녕 돌이킬 수 없는 회오를 안겨 준 건, 태자를 키우느라 자신의 한 번뿐인 청춘기를 소진했다는 뜬금 없는 각성이었습니다. 그나마 선량하고 기품이 뛰어난 태자가 자신을 부친처럼 따랐으니 망정이지, 다른 어디에서 그 영어의 세월이 강요한 지루함을 보상받을 수 있었겠는지요. 재미있는 건 태자의 사실상 후견인으로서 일거수일투족을 감독해야 할 그가, "이 어린 청년(차라리 소년에 가까운)에게만은 그 청춘의 본능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풀어주고 싶다"는 제 나름 큰 결심을 하고, 하이델베르크의 어느 학우회에의 가입을 허락해 주는 대목입니다(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비콘 강을 건넘"). 여기까지가 분량상으로도 플롯상으로도 대략 절반의 지점인데, 이를 계기로 태자 역시 "다른 인생"에 한 발을 들여 놓습니다.

"첫사랑"은 첫사랑이 맞습니다. 처음 식당에서 긴 줄을 서 기다릴 때 주문 방식을 몰라 당황하는 태자에게, 키 작고 귀여운 아가씨 케티(애칭 케트헨)가 편의를 봐 주던 그 순간이 둘의 첫만남이었습니다. 태자의 주변을 서성이며 학생의 본분이란 깡그리 잊고 온갖 못된 짓은 다 가르쳐 주는 폭한 같은 대학생들이지만, 이 "커플"이 과연 "선"을 넘었는지는 독자로서 대단히 회의적이며,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두 주인공처럼 눈빛으로 손짓으로 마음을 나누는 그런 사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첫사랑은 진짜 첫사랑(순수 문예적 의미에서)이 맞는 셈도 되겠는데, 이들의 나란한 손잡음은 태자가 백부의 임종을 지키려 칼스부르크로 소환됨에 따라 넉넉히 예견되었던 종막을 맞습니다. 정말 <춘향가>의 묘사보다도 훨씬 못할 만큼 담백하고 심심한데, 우리가 <소나기>를 두고 끈적한 표현과 설정이 많아서 좋아하는 게 결코 아닌 까닭과 같겠네요.

늙은 식당 종업원 켈러만이 큰 마음 먹고 국경을 건너 한때 단골로 모시던 대학생 손님 "작센- 칼스부르크 대공"을 알현하러 옵니다. 이제는 군주가 된 태자가 그윽한 눈길로 묻습니다. "그, 식당에서 시중 들던 케티는, 내가 지금 다시 하이델베르크를 찾으면 만날 수 있을까?" "당연합죠." 한참 뜸을 들이고 다른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무심한 듯 묻습니다. "내가 떠나고 나서 그 여자애, 케티, 걔는 어쩌던가?" "많이 울었습죠." 현지에서 끝내 건강을 회복 못 하고 저세상 사람이 된 박사의 묘도 찾을 겸, 젊은 군주는 다시 철도편으로 서쪽을 향합니다.

잠시 사족을 좀 달자면, 사실 소설 속에서도 누누이 나오듯 작센-칼스부르크는 작은 공국에 불과합니다. 누구나 짐작 가능하듯 실존 작센-코부르크 공국을 모델로 삼은 가공의 정치 단위고요. "프로이센의 승인이 없어도.." 운운하는 대목이 암시하듯 이곳은 호엔촐러른 가문이 세습하는 독일 제국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카를 하인리히의 실제 신분은 "황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만, 여튼 이 소설의 주인공은 거의 한 세기가 넘게, 예전 세대분들에게 "황태자"로 눈감아져 통용되었으므로, 또 어차피 가공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사연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아득하고 친근한 감정의 환기를 겪게끔 우리들도 이분을 그리 모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공연히 불경스레(?) 족보와 법도를 따질 게 아니라 말이죠.

소설의 묘사는 구식 영탄조도 많았지만, 과감한 생략으로 독자에게 상상을 자극하는 게 좋더군요. "이봐, 왜 그 식당에 다들 발길을 끊은 거지?" "모르겠습니다. 대학가에서 그런 일은 흔하죠. 맥주가 맛이 떨어졌다든가 하는 이유로요." 옛 친구들인 학우회 회원들을 우루루 데리고 들어서자, 한때 하이델베르크 최고의 아이돌이었던 케티가 원망스런 눈길을 줍니다. "이제 다시 우리 식당에 오는 건가요? 나쁜 사람들." 그러고서 마치 유령이나 본 듯, 케트헨은 굳어 버립니다. 군주는 담담히, "이제는 예전의 귀여움이 안 느껴진 채, 나이든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케티였다."고 표현하네요. 왜 학우회가 식당을 바꿨는지도 이로써 짐작 가능한데, 케티는 일찍부터 밝혀 온 대로 십여 년 나이 차가 나는 비엔나의 어느 남성에게 곧 시집갈 계획입니다. 청춘은 이처럼 누구에게나 한 순간 격렬한 설렘으로 머물다 벚꽃처럼 아쉽게 지는 거죠.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아마도 마지막이 될 밤을 보내며, 젊은 군주 역시 자신의 철없던 시절과 영원한 작별을 고합니다. 슬픈 묘사가 딱히 없는데도 독자를 오래 애상에 잠기게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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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척추 이야기
도은식 지음 / 스타리치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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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숱한 짐승과 생명체 중에 대지를 꼿꼿이 서서 다니는 존재는 인간이 거의 유일합니다. 이렇게 직립이 그 숙명이자 특권인 인간에게, 척추와 허리가 말썽이라면 그건 단지 신체 일부에 통증이 있고 병질을 앓고 하는 정도의 지경이 아닐 겁니다. "살 맛 자체가 안 나는, 지옥 같은 고통"이라 당사자가 토로해도 그게 절대 과장이 아닌 줄 압니다. 이게 꼭 노인들한테만 찾아오는 고생도 아니고, 나쁜 자세라든가 개인이 처한 환경에 따라 어느 연령대에서도 치를 수 있는 질환, 증상이죠.

승풍파랑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으시는 도은식 박사님은, 밀도 넘치는 반생 동안 "그저 의술이 아닌 인술(仁術)"의 발휘를 직업인의 철칙으로 삼고 직분에 충실하신, 한국이 자랑스레 내세울 만한 신경외과 전문의입니다. 현재 더조은병원 원장님으로 여전히 시술을 베푸시면서, 생의 근본 조건을 뒤흔드는 고통에 신음하는 많은 환자들에게 희망을 되찾아주는 보람으로 하루하루를 채우시는 멋진 분이죠. 저도 논현동 인근 지나치면서 자주 건물 외관을 접하곤 합니다.

일단 선생님은 (자신이 있으셔서 하시는 말씀이겠지만) 허리가 아프다 싶으면 바로 권위 있는 병원을 찾아 오라고 하십니다. 보통 한국인들이 허리가 아프다고 할 때, 정해지다시피한 코스가 있죠(이 서평에다 적진 않겠습니다만). 그런데 이게 선생님의 관점에선, 괜히 치료의 적기, 골든 타임만 놓칠 뿐 전혀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는 겁니다. MRI 촬영 사진만 봐도 한눈에 증상을 파악할 수 있는, 정규 교육 과정에서 합당한 훈련을 받은의사를 찾아야지, 괜히 이것저것 해 보다 정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찾는 게 신경외과라는 식은 금물이라는 주장입니다. 더군다나, (바람직하든 아니든 간에) 한국 최고의 두뇌가 몰려있다시피한 洋醫 섹터를 두고 다른 어떤 수단, 전문가를 찾는 게 무슨 소용이겠냐는 말씀도 하십니다.

모든 양의, 신경외과가 일단 환자가 찾아오면 수술부터 권하고 본다는 것도 잘못된 통념이라고 하시는군요. 올바른 의사라면 환자의 증상에 따라 다양한 처방과 치료 코스를 권할 뿐, 무작정 수술이 방법이 될 수도 없을 뿐더러, 환자들이 지레 겁을 먹는 게 더 큰 문제라고 합니다. 선생님은 또한, 환자에게 헛된 희망을 주고 과잉치료로 유도하는 일각의 행태에 대해서도 크게 비판하십니다. 양심적인 의사라면, 치료의 적기를 놓쳤든 다른 근본적 원인 탓이든, 환자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 줘야 한다는 거죠. 어느 병원에 가 보면 "설명을 잘하는 의사가 되겠습니다"라고 크게 써붙여 놓았습니다. 이건 이것대로 바람직한 덕목이고, 선생님은 "화술이 뛰어난 의사보다는, 치료 수완이 좋은 의사를 택하라"라고도 하십니다. 이 책에는 은연중에, 의사 중에서도 양심적인 분들, 경험 많고 기술이 뛰어난 의사들이 따로 있음을 전제로 깔고 들려 주시는 충고들이 많더군요.

그간 척추 수술은 흉터가 크게 남고 여러 부작용이 있어 환자들이 가급적이면 꺼리는 선택이 되어 온 게 사실입니다. 책에서는 최신의 시술이라 할 여러 다른 기법을 소개합니다. "정상적인 근육과 뼈의 손상, 그리고 수반되는 통증을 최소화"하는 옵션으로 미니후방고정술이 있다고 하는데요. 일단 책에 나온 대로 "수혈이 따로 필요 없다"거나, 무엇보다 통증이 적다는 게 특히 노인 환자분들에게 장점인 듯은 보입니다.

척추체 성형술이라는 것도 눈에 띄는데요. 골절이 발생한 부위에 시멘트를 채워 넣어 지지해 주는 방식인데, 빠른 퇴원이 가능하고 흉터가 없다는 게 장점이라고 합니다. 피부 절개가 없고, 국소마취만으로 시술 가능하다는 게 역시 노인 환자분들에게 메리트가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개인적으로 들은 바로는, 심부정맥을 통해 폐(肺) 색전(塞栓)이 일어날 수 있다고도 하던데요. 그래서 확실한 진료, 치료를 기대하려면 지인을 통해 선생님을 소개받아야 합니다. 명의라고 소문난 게 아닌 이상 모르는 병원에는 되도록이면 가질 말아야 해요. 그래서 사회 생활에는 인맥이라는 게 중요하다는 뜻도 되겠고요.

참 존경스러운 면이, 선생님은 대기실에서 어떤 자세로 앉아 있는지 모습만 보고도 벌써 증상 원인 등이 감이 온다고 하십니다. 가장 안타까운 건 환자들에게 수술을 권할 경우, "이 의사가 또 한 건 올리려고 하는구나" 같은 불신부터 대뜸 보이는 세태인데요. 그건 그럴 만도 한 게, 지난 신해철 사건에서 보듯, 도대체 그 정도 경력과 평판을 쌓은 의사가 과오를 범하면, 누굴 믿고 의존하겠냐는 생각이 들어서죠. 그래서 선생님은 먼저 의사들이 "많이 고민"할 필요가 있으며, 환자에 따라 가장 적합한 의사를 추천해 줄 만큼 "협진 체제"가 공식, 비공식으로 갖춰질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장성 면에서 접근해도, 가장 규모가 큰 척추 질환 분야에서 병원들이 협조 체제를 갖춰야만 개개 의사들이 과잉 설비 투자로 도산하는 결과를 막고, 환자는 환자대로 양질의 치료를 받는 win-win 이펙트를 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병원장은 CEO이기도 하므로, 경영인의 자세로 병원을 돌보는 게 의사들에게 필요하다고 충고합니다. 당신도 그런 코스를 밟았지만, 많은 의사들은 최고경영자 과정에 등록해서 그저 인맥만 쌓는 게 아니라, 실제로 진지하게 경영 기법을 공부하여 자신의 병원에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여기서 또 두뇌의 수월성론이 나오는데, 가장 우수한 두뇌를 갖고 의사가 된 만큼 경영 쪽에서 수완을 못 보일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선생님 자신은 우수 논문 제출로 표창도 받으신 적 있다고도 하시네요. "산업의 중심이 이미 3차 부문으로 넘어간 지 오래인 만큼" 병원도 과감한 투자와 합리적 경영 마인드가 도입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무조건 영리화, 반공익화와 연결시키는 사회 인식도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의료수가는 어차피 법에 따라 정해진 바 의사 개인이 함부로 받을 수도 없다고도 하시고, 다만 관행처럼 통하는 리베이트 수수는 필히 근절되어야 함도 강조하십니다.

책에는 일러스트와 함께, 매일 10분 정도의 간단한 운동으로 미연에 척추 질환을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제시됩니다. 바른 자세는 어찌 보면 바른 마음에서 나오고, 모든 병을 키우는 근본 원인은 조바심, 주위와의 트러블, 괜한 집착 등 마음의 요인이 큽니다. 97세 환자에게 시술하여 완치시킨 도 원장님 같은 분은, 평소에 캄보디아 등 취약지대를 순방하며 봉사하시는 등 사회적 책임을 항상 염두에 두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우리도 남을 원망하고 주변을 탓하기보다, 먼저 내 자신의 마음가짐을 깨끗이 간직하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지 않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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