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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용도 (양장)
니콜라 부비에 지음, 티에리 베르네 그림, 이재형 옮김 / 소동 / 2016년 7월
평점 :
사람은 그가 속한 곳(where he/she belongs)에서만 최우선의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그가 성장하며 사귄 친구, 그의 평판을 보증해 줄 지인들, 그가 이뤄 온 업적들(크든 작든),... 그의 존재는 그의 본향에서야 제 색깔을 지니고, 그의 말은 그의 동아리 안에서 제 의미를 드러내죠. 이런 익숙한 환경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을 보다 편안히, 그리고 유창하게(fluently) 규정하지만(define), 정작 당사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에서 빠져 나오려 가끔 몸부림치는 다른 감정의 덩어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고, 때로는 불안 속에 스스로를 묻습니다. 이때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게 바로 여행입니다.
여행 속에서 발견하는 게 참다운, 그간 억눌려 왔던 자아일 수도 있고, 과거 어느 순간 극복되었던 퇴행의 흔적일 수도 있습니다. 수치로야 한 길도 안 되는 연약한 인간, 그 육신과 동반하는 마음의 복잡한 구조와 규모란 우주의 그것과도 맞먹고, 이 때문에 이를 다스리는(다스리려 하는) 주인의 심사란, 반란이 심한 속주를 다스리는 총독의 고뇌로 가득합니다. 정말 피치자를 제압하려 드는 관리이건, 부모의 마음으로 상처를 돌보려는 구호자이건, 제 목적을 달성하려면 현지를 방문 그 정확한 실상을 살펴야 합니다. 여행은 그런 의미에서, 타지에 임할 때 바로 드러나는 타자 같은 자아와의 맞대면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 자신을 파괴할 권리"를 과감히 자신들에 부여한(니콜라 부비에 본인의 말. 책에서 인용합니다), 두 젊은이들의 여행록입니다. 지금은 벌써 다른 세상으로 건너간 그들에게 독자로서, 소박하게, 하나 부러웠던 건, (이런 놀라운 책, 혹은 당대 평자들의 표현처럼 "경이의 책", "지혜의 책"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차치하고라도) 제네바에서 카불까지 피아트를 몰고 기나긴 횡단을, 비교적 자유롭게 이룰 수 있었다는 그 사실이었는데요. 냉전이 한창이었을 당시에 오히려 가능했던 여행 방식이고, 지금은 이 코스 곳곳에서 정정이 불안한 나라들의 불쾌하고 당혹스러운 말썽, 나아가 참극들이 거의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이런 장도(長途)의 여정이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할 형편이라서죠. 만약 이런 계획을 누가 세우고 실천했다간, 부정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뜻에서 당사자의 "육신"이 파괴되기 십상입니다. 껍질을 깨고 더 성숙한 영혼으로 거듭남이야 바람직하겠지만...
아마 당시 티토가 다스리고, 인종청소니 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지옥도를 지상에 펼쳐 보이기 훨씬 이전이었겠지만, 유고슬라비아(지금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등 여러 후신들로 쪼개진)를 통과하며 이처럼 낙천적이고 활발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들. 물론 본인들의 표현대로, 이미 경화되고 박제화하여 마음이 그 안에서 질식할 듯한 껍질을 깨는 중이라 준(準)전시상황의 내면이긴 했겠지만 말이죠. "헝가리 국경에서 마케도니아까지" 모든(全) 전(前) 유고인들이 한데 모여 다시 "콜로"를 출 수 있고, "빵가루를 입힌 갈비, 백포도주, 고기 만두"를 먹을 그 날은 언제 다시 올까요. 헤세를 직접 접대하기도 했던 부비에 씨의 모친의 (그 악명 높은) 요리솜씨가 동반되어야 하겠지만 여튼 자리는 흥겹고 신나며, 뭔가 근원의 안식과 여흥이 자리할 듯합니다.
이 책에도 잘 나오듯 앙카라는 아나톨리아 한복판에 위치한, 신생 공화국(신생이라니! 그러나 이 말이 차라리 과분할 만큼 어려웠을 시절)의 수도로 새로 데뷔한, 이들의 표현에 의하면 "목가적이라는 말의 뜻이 뭔지 새로 가르쳐 줄 만한" 풍경을 그 옆에 낀, "아르카디아를 연상케도 하는" 고장이었습니다(지금이야 뭐..). 히타이트 유적이 지근거리에서 화제에 오를 만큼, 메소포타미아 제국(諸國)이나 비잔티움 황조가 오랜 동안 국고의 텃밭, 국세의 기반으로 삼은 땅임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하죠. 숭그를루를 지나치기 전 왜 바빌로니아(현 이라크 남부)가 화제에 오를까 궁금하다면, 본디 이 땅들(터키니 이라크니 하는)이 서로 그만큼이나 잇닿은 역사를 지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한 대접과 정직함, 친절함 등은 언제나 터키인들이 잃지 않는 좋은 매너라오." 흠, 그래서, 호의를 악의로 보답한, 이때로부터 이십 년 후의 앨런 파커 감독 같은 사람은 좀 크게 반성할 필요가 있겠네요.
"아제르바이잔 타브리즈"라는 표현을 들으니 위화감이 확 느껴집니다. 물론 이곳은 지금도 (높은 자치권이 보장되며, 소수 인종으로서 여전히 큰 발언권이 보장되는) 동 아제르바이잔 주에 속해 있지만, 지난 역사의 대부분은 페르시아 제국의 여러 수도 중 하나로 기능해 왔죠. 테헤란보다 더 유서깊을 이곳은 그만큼이나 "페르시아적 정체성"도 공유한 곳이니. 저자 두 분은 이곳, 아르메니스탄(이렇게 부르니 정말 낯서네요), 신생 쿠르디스탄(당시 기준. 책에도 나오지만 잠시 부각되었다가 팔레비 왕조에 의해 소멸)을 쌍둥이 같은 처지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둘은 처한 상황이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도 다릅니다. 책에도 나오듯 마치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니콜라 부비에는 이란(그때도 이름은 이란이었습니다)에서 돈이 떨어지자 베르네와 함께 "알바"를 시작하는데, 현지의 약사 세파보드히가 문법적으로 틀린 프랑스어를 말하자 고쳐 주는 대목이 재미있네요. "à dans le 라고 하지 마세요. 도시인 타브리즈 앞에는 그냥 à만 쓰는 거에요. 국가 앞에는 en를 쓰고 말이죠." 그나저나, 왜 그는 이곳에서 사는 게 힘들다고 했을까요? 프랑스도 당시라면 형편이 팍팍하긴 거의 마찬가지였을 텐데(미처 몰랐던 듯).
이들은 이곳 북서부 이란(현대 기준)에 꽤 오래 머무릅니다. 마하바드 교도소에 머문 건 무슨 터키의 빌리, 지미, 맥스처럼 누명을 쓰고 "수감"이 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잠재적 말썽거리를 통제하려 든 교도소장의 "사실상 연금" 시도지요. 교도소를 찾아와 "계약 이행의 문제(헉)"를 놓고 불평을 토로하는,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창녀에게서 이 청년들은 "생의 활기와 맹목적 도약"을 감지하고, 꼭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실행에 옮기지는 않음). 그녀를 다루는 소장의 태도를 보면 이 시절 이란의 행정이 더 문명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 같으면 어딜 감히! 기둥에 묶여서 채찍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죠.
이스파한, 테헤란 등은 모두 지난 시절 제국의 수도들이었습니다(하계, 동계에 따라 수도 여럿을 둠). 이곳에서 여러 지인들(이미 그전부터 연락을 하던 이들인 것 같네요)과 교감한 후, 두 청년은 광야나 험준한 산지로 드디어 문명을 떠나 발길을 돌립니다. 이란 중동부에 보면 사람이 거의 안 사는, 산악과 사막이 죽 펼쳐진 광활한 지대가 있는데, 거기 한복판이 야즈드 사막입니다. 시라즈를 지나 이란 동단의 케르만 주에 도착하고, 이때에도 여전히 차도르를 쓴(세속주의 통치자였던 수상 모사데크 치하였지만) 여인들이 구수한 죽을 끓여 객들을 대접합니다. "묘석보다 더 큰(이런 표현들이 재미있어요)" 기록부에 서명하고 국경의 세관(복무하는 군인들은 차림이 단정치 못했다는데, 국가 기강의 해이를 반영하는 묘사일 수 있죠)을 통과한 후, 그들은 드디어 광활한 옛 제국의 영토를 벗어납니다.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가 시작된다는 반가운 표지판이 눈에 띄지만(그들은 계속 피아트를 타고 여행 중이죠), 이곳 아프가니스탄 역시 사정이 호의적일 리 없습니다(당시에도). 이란 남동부, 인도 북서부,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는 소수 인종으로 발루치 족이 사는데(아주 넓은 자치구를 이룸), 이 이름에는 "불운"이란 뜻이 있다는군요(저는 이 책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일부러 이름을 그렇게 붙여야 불운이 알아서 피해간다는 기대인데, 우리도 아이들 이름을 험하고 천하게 붙여 유년의 질병 등 우환을 쫓으려는 민간 풍습이 있었죠.
"한 청년이 강을 건너가네
얼굴은 한 송이 꽃 같고
엉덩이는 복숭아 같아
하지만 이럴수가, 난 수영을 못한다네."
울림이 알쏭달쏭한 이 지역 민요지만, 아마도 이 책 화자인 두 분과 테렌스는 심심상인으로 뜻이 통했나 보죠? 여기는 아프간이다 보니 본토인이라 할 그 유명한 유목 민족 파슈툰인이 다수입니다(책에서 "파탄 인"이라 표현하는). 지금하고는 상전벽해라 할 만큼 풍습과 풍광이 차이나는데, 한때 영국 세력권(제정 러시아와 다퉜죠)에 있었던 이곳이니만치 심지어 (갓 즉위했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상화가 발견되는가 하면, "기니로 주시오, 기니로!" 란 말에서 드러나듯 여전히 화폐로서 영국 금화가 통용되네요. 그도 그럴 것이, 영국령 인도에서 철수한 옛 식민지 거주자들을 자히르 샤가 여러 면에서 편의를 봐 줬기 때문이죠. 이로부터 몇 년 후면 민중 혁명으로 축출되지만.
"신비주의자(아마도 수피를 가리키는 것 같네요)도 이 세계의 비밀을 여전히 모르는데
도대체 술집 주인이 어떻게 그걸 그렇게
잘 가르쳐 줄 수 있는지 궁금하네...."
14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하페즈가 남긴 한 구절인데, 이 사람은 부비에, 베르네 두 청년이 몇 달 전 지나쳐 온 시라즈 태생입니다.
바부르 황제가 언제 카불을 다스린 적 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는 델리를 식민지로밖에 여기지 않았고, 그의 후손들은 그래서 끊임 없이 "본향에 돌아가 칸으로 군림하길" 바랐던 거죠. "사람이 사는 세계의 중심"이었던 매혹적이고 융성한(지금은 그러나?) 이곳 카불에서, 박트리아 왕국의 마지막 왕 헤르마이오스는 "앞면에 인도 글자, 뒷면에 중국 글자"가 새겨진 동전을 주조하게 했다고 부비에는 서술합니다. 엄연히 아프간인들 자신의 역사인데도 이를 까맣게 잊어버린 무슬림들이 안타깝다고 하는데, 사실 여기도 그간 인종적 부족적으로 많은 사건들이 교차한지라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죠.
힌두쿠시의 험준함, 반짝이는 잎새의 버드나무가 울창한 카이바르 고개의 녹음을 지나 그들은 인도의 문턱에 도착합니다. 모든 지점은 다른 두 영역의 접촉, 인연의 산물이며, "지속성, 세계의 투명한 명증성, 평온한 귀속"(p660)의 증명입니다. "탄젠트는 구상할 수도 없고 중명할 수도 없는 접촉이다"란 플로티노스의 말을 부비에는 인용하는데, 지구 반의 반 바퀴를 돈 기나긴 여정도, 혹은 보리수 아래에서 우주의 원리를 직관한 석가모니도, 인간 내면의 굴곡 많은 모습을 책 몇 십 권의 분량으로 다 표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비의는 어느 정도 궁극의 미지로 남아야 생산적인 각성을 우리 아둔한 인간에게 제공할 수 있습니다. 방위와 지향 그리고 인문의 다른 얼굴로서 동(東)은 아마도 이들 프랑스 청년들에게 영원한 과제의 단서로 남아 있었을 것 같네요. 그게 곧 "어떤 가르침을 위한 세상의 쓰임새"이기도 하겠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