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호기심을 위한 미스터리 컬렉션 - 당신이 믿는 역사와 과학에 대한 흥미로운 가설들
맹성렬 지음 / 김영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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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앞에 겸손할 필요가 있다는 말은 언제나 사람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위대한 학자나 사상가들의 업적, 노력, 유산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만, 과연 그 가치를 합당히 평가할 자격이 있어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요? 그보다는, 내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 세상이 그런 이들의 기여와 성취에 대고 공인된 권위를 바치기에, 나 역시 그런 대세에서 이탈하지 않겠다는 제스처라든가, 아니면 이 정도씩이나 학문에 대한 존경, 신뢰를 보내는 자신을 두고 "그 역시 많이 배운 사람"이라며 타인들이 인정해 주길 바라는 아주 속물적인 동기가 작용하지는 않을지요.

어떤 학문적 진리나 법칙의 참된 가치를 알아보려면, 그 사람이 뭘 평가할 만한 충분한 소양과 지혜를 갖추는 게 우선입니다. 그러려면 많은 공부와 수양이 요구될 테고, 이 단계를 안 거친 채 무엇인가를 찬양하거나 혹은 맹렬히 반대한다면, 그 사람은 그저 사이비 종교를 열심히 믿는 신도나 다를 바 없습니다. 어떤 주장의 진위를 평가하려면 기존의 지식과 논란에 대한 충분한 이해, 그리고 흔들림 없이 공정한 논리적 기준이 필요합니다.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정돈된 인식의 틀에 의해 판단이 가해져야 하고, 이에 자신이 없으면 섣불리 뭐가 옳다 그르다를 남 보란 듯 목청 높일 게 아니라 겸손하게 "의견 유보, 잘 모르겠음" 정도에서 그쳐야 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과격한 판단을 즐기는 사람은 뭔가 불순한 의도가 따로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가 현재 과학적 진리, 통념, 상식으로 간주하는 많은 사항들은, 훗날 혹은 가까운 장래에 청천벽력 같은 새로운 증거나 치밀한 이론의 출현으로 한순간에 기반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믿어야 할 건 증거와 논리일 뿐이며, 그럴싸한 설명이나 아름다운 비유란, 언젠가는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할 가설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 "생각"이란 "합리적 의심"에 가까운 의도였습니다. 이 책에서 우리 독자가 만나는, 발칙하고 대담한 의문 제기, 혹은 대안에 가까운 "썰들"의 전개는, 물론 대수롭지 않은 농담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천재적인 직관(비록 지금은 치밀한 근거를 못 갖췄더라도)이었다며 열렬한 지지, 재평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 독자들은 독자만의 특권으로, 정교한 논리와 튼튼한 근거에 의지하여 얼마든지 저자의 주장에 재반박을 가할 수도 있겠고 말입니다. "Nothing lasts forever."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는 법이며, 영원한 진리가 있다면 오직 이 말 하나뿐입니다.



"신대륙의 발견"이란 사건은 저들 서유럽인들이 자신들 중심으로 구성한 세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갖습니다. 감자, 담배, 코카나무를 비롯해 특정 작물, 그리고 여러 종의 동물들은 1492년 콜럼버스의 탐험 이전에는 구대륙이 전혀 모르던 존재였으며, 그 이전에 모종의 교역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고히 굳은 상식과 믿음에 반하는 터라, 이는 뭔가 사실과 소재를 다루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다는 식으로 무시되곤 했죠. 하지만 스베틀라나 발라바노바, 로잘리 데이비드, 미셸 레스코 등(공교롭게도 모두 여성들이군요)의 문제 제기에 의해 이집트(구대륙) 미이라에서 (신대륙에서나 자생하던) 식물의 니코틴, 코카인 성분이 발견되었죠. 이를 계기로 혹시 고대부터 대륙 사이의 물자 교역에 열심히 나선 종족이 따로 있지는 않았는지, 현재 통념으로 받아들이는 세계사의 줄기에 중대한 구멍 하나가 뚫렸던 건 아닌지 의문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대륙 논의 이래, "잃어버린 고대사"에 대한 탐구와 상상은 (그토록 많은 비웃음과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태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추종자들을 유지해 왔죠.

저자께서는 이 오래된 의문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논의 성과와 저자 본인의 독창적 가설을 섞어 꽤 치밀한 줄거리, 혹은 대안을 제시합니다. 이 토픽과 직접 관련은 없습니다만, 그레이엄 핸콕이 쓴, 어떤 일련의 책들이 이끈 열풍 덕분에 "뭔가 설명이 필요한, 그러면서도 열정적인 탐구자들이 내어 놓는 설명은 왠지 사이비 같은" 난감한 이 주제에 대해 다시 근래 들어 주목이 이뤄졌다가 지금은 다시 주춤해진 느낌입니다. 개인적으로 1) 빈약한 근거만으로 무작정 환상을 우기는 태도도 문제겠고 2) 여튼 기존의 학설로 설명이 안 이뤄지는 현상에 대해 그저 언급만 해도 무작정 사이비라며 매도하는 태도 역시 큰 문제입니다. 후자의 경우 막상 (그들이 지지한다는) 주류학설에 대해 물어보면 꿀먹은 벙어리인데(암기한 몇 마디 구호만 빼고), 그저 목소리만 높이고 과격한 태세만 취하면 뭔가 신분상승이라도 하는 양 한심한 착각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죠. 가설이나 제안에 대해 찬성을 하든 반박을 하든, 인적권위에의 의존이 아닌 구체적인 논거를 들며 담론에 참여해야 합니다.



독자로서 제 생각에는, 일단 모든 교역과 활동이 콜럼버스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진다는 고정 관념만 버리면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나 봅니다. 기록에 없다고 증거가 안 남았다고 실체까지 없었으리라는 단정은 무리입니다. 마치 잃어버린 고리 몇 때문에 진화론이 통째 부정되는 게 아니듯 말입니다. 아마도 이 문제는 남아있는 유적도 없고 믿을만한 기록도 없으니, 한반도의 고대사 디테일마냥 영원히 해결되지 못할 미스테리로 남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대인들이나 그 직근 후대인들에게 어떤 크레딧을 못 받았다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교역에 종사한 종족 혹은 집단(저자께서는 구태여 "종족"으로 한정하십니다만)"이 아예 부정될 이유는 없죠. 증거가 없으니 논증을 컨스트럭트하기도 힘들고,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또 안 되고, 이런 딜레마는 인문역사학의 영역에 한두 개가 남아 있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고고학에 기여할 수 있는 인접 분야의 기술 발전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고, 그 전까지는 모두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존중하며 신중한 논의에 머무는 게 필요합니다. 누가 이런 문제에 대해 손쉬운 단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UFO 이슈는, 이 책에도 나오듯 다소 뜬금없는 전향적 태도를 보인 힐러리 클린턴 전 장관의 말처럼, "unexplained aerial phenomena", 즉 "설명이 어려운 공중 관측 현상들"로 바꿔 설명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미확인은 둘째치고 그게 과연 비행 물체이기나 한지도 확인이 어렵고, 보도되거나 (당국에 의해 감춰졌다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모든 사건이 같은 성격을 가졌다고도 못하기 때문이죠. 그냥 "설명이 힘들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지도 모릅니다.

레이건은 사실 엘리트 코스를 제대로 밟은 다른 정치인과 성장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어리석은 이들이 현혹되기 쉬운(이 자체가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만) UFO 따위나 믿는다며 폄하되기도 했고, 혹은 반대로 그분이야말로 우리들의 믿음을 공유한다고 일각으로부터 기대를 받은 면이 있습니다. 책에도 나오듯이 본인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이를 언급한 적이 없는데, UFO를 심각히 여긴다면 누가 그런 후보에게 신뢰를 갖겠냐는 우려 때문에 자신의 신조(확실치 않습니다)를 숨겼는지도 모르죠. 레이건이 재임 중에 "감당 못 할 진실(책 후주에 나오듯 원 표현은 handle입니다. 꽤 모호하죠)" 운운한 것도, 워딩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해석이 갈립니다. 전 사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좀 걱정도 되었는데, 저자께서는 뒤의 후주를 보면 가장 보수적(즉 레이건은 그딴 문제에 관심 없다)인 입장의 해석을 오히려 타당하다고 여기시더군요(그래서 안심했습니다). 음모론이건 반 음모론이건 어느 선을 넘지 않고 "상식선의 의문"을 제기해야(혹은, 무작정 떼를 쓰는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반박해야) 그게 "지적 호기심"으로 옹호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대통령도 모르는, 군부 수뇌부끼리만 대물림하여 공유하는 외계인에 대한 비밀(외계인과 UFO는 엄밀히 말해 별개 이슈입니다)이 있는가?"란 질문에 대해서도, 무슨 군부 파워 엘리트들이 대통령도 따 시키는 실세다, 이런 결론까지 비약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국가기밀로 분류된 사항은 현직 대통령도 오픈 못 하는 게 당연하고요(법으로 강제되니까). 고위 장성들이 군 통수권자의 명령과 위계까지 무시하는 건 아니죠(그랬다간 바로 파면). 위의 코카인 고대 무역(?)처럼 뭔가 미스테리한 사건이 있었던 건 맞겠지만, 파일 까 봐야 특별한 건 안 나온다고 봅니다(로스웰 외계인 같은 것). 이런 건 오히려 시원하게 공개해야 쓸데없는 억측이 잦아들겠죠. 행정의 다른 모든 분야처럼, 투명성이 공정성과 정의를 담보하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B급 오락물이지만 <스피시즈 2> 같은 영화에서도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건방진 놈, 내가 대통령한테 당장 전화해서 조치하도록 하겠어.""마음대로 하십시오 의원님. 그런데 이 문제는 대통령도 전혀, 전혀 감당 못할(This is way beyond the President. Way beyond) 중대 문제거든요?" 이것도 무슨 미국의 권력 구조에 미묘한 뭣인가가 있다는 증거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영화의 각본가도 그런 믿음을 가졌기에 대본에 이런 장면을 집어 넣었겠죠. 원인과 결과를 반대로 혼동해서는 곤란합니다.

길버트 머레이 교수의 실험에 대해선, 물론 그 실험에 허위나 조작이 끼어들지 않았겠음은 믿어야겠지만, 한 개인의 특수한 예로 전체로까지 일반화하는 태도는 무리라고 봅니다. 프로이트와 융 사이의 갈등은 책에서 설명하시는 그런 이유(초상현상에 대한 견해차) 말고도, 다른 학문적 입장의 차이라든가 하는 요인이 끼어든 줄로 압니다. 다만 이 두 거물 학자들이 "이론을 실천으로 옮기기라도 하듯" 입양과 결별 과정에서 권위 상실 운운하는 설명은 흥미롭긴 했습니다. 파울리 박사의 활동 반경 주변에서 일어난 독특한 현상 역시 다른 설명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바그다드 유적에서 발견된 전지는 이른바 Out-Of-Place Artifacts, 줄여서 우파츠(ooparts)라고 부르는, 역시 설명이 쉽지 않은 경이로운(그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기술 중 하나죠(이건 전 몰랐는데 이런 흥미로운 사례가 이것 말고도 꽤 많다고 합니다. 다만 미스테리해진 이유는 각각이 다 다를 수 있으므로 이런 사례를 "우파츠"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묶어 둬야만 하는지는 의문이네요). 역시 이런 문제는 고고학, 역사학, 공학과 자연과학적 통찰이 두루, 균형감 있게 개입해야 하므로 해결이 까다로운 게 당연합니다.

단지 생존에의 목적에 적합하다는 이유로 그처럼 경이로운 형태 변이를 이룰 수 있는가? 이 이슈도 그간 너무 소모적인 논쟁이 별 성과도 못 내고 감정싸움, 목소리 크기 경쟁으로만 이뤄져 좀 질리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는 첫째 수십 억년의 시간 단위란 어차피 인간이란 종의 인식 범위를 벗어납니다. 시간만 오래 지난다고 그런 마법이 이뤄지는가? 그러나 "오랜 시간"의 스케일이, 미미한 필멸의 존재인 인간의 어림으로 가늠되는 수준이 아니므로, "이상하다"는 이유만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건 근거가 빈약하죠. 이 점에서는 차라리 도킨스의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으며, 다만 저자도 지적하듯 그런 극단적인 결정론을 곧바로 "과학적 태도"로 여기는 건 역시 극단적인 어리석음의 표출에 불과합니다. "기계론=유물론=과학"의 등식은 절대 성립하지 않습니다.

양자통계학의 성과가 저자의 말씀처럼, 생명체 메커니즘 안에만 존재하는 모종의 "옴살"적 구조의 존재를 증명, 혹은 암시하는지는 더 연구가필요하다고 봅니다. 아울러, 저자는 왜 물리학은 반드시 정확하고 경성이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시지만, 이는 반대로 타 학문의 연구와 성숙이 거듭되어 물리학의 정합성에 수렴해야 할 문제지, 그 반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입장과는 정반대인) 최재천 교수님의 "선언"도 역시 너무 시기상조라는 느낌이구요. 저자께서는 "폐차장의 회오리바람이 부속품을 끼워맞춤"의 예를 드시는데, 역시 수십억년 단위의 세월을 감안하면 확률 계산을 다시 할 필요도 있고, 하필 저 예가 특정 진영에서 즐겨 쓰는 비유라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 조금 불편했습니다.

첨성대의 미스테리는 제가 고등학생 때도 국사 선생님이 언급하신 이슈라서 다시 복습하는 감회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왜 결론을 안 내시지?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 라고 불편해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모든 문제가 그리 관변적으로 편하게 오 엑스가 다 척척 결론나는 게 아님"을 가르쳐 주신 고마운 의도였다고 여겨지네요. 이 책에 나온 여러 주장도 그런 좋은 의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절충설은 항상 옳은 법이지만(?), 저자의 주장은 현재까지 나온 모든 주장의 장점만 잘 모은 설득력 있는 가설인 것 같습니다(주변의 광선을 차단하고 누워서 관측해야 오히려 잘 보임& 인도산 불교 문명과 점성술의 세트 유입).



7장이 참 흥미로웠습니다. 저자의 결론에 동의하고 안 하고를 떠나, 존 바딘과 브라이언 조지프슨의 양립할 수 없는 이론상의 충돌에서, 어떻게 후자의 양자 관통 이론이 승리를 거뒀는지에 대한 설명은, 이전 바딘의 통설적 입장에 대한 이해까지 가장 쉬운 언어로 독자에게 이해시켜 주는 멋진 시도였습니다. 그 전에 학부 교과서를 슬쩍 엿볼 때는 참 어려웠는데 역시 대가의 솜씨로 접하니까 머리에 쏙쏙 잘 들어오더군요. 양자 현상(두 군데에 확률 분포로 동시 존재 등)이 거시계에서도 가능하다는 암시는 바딘 같은 확고한 전통주의자로서 도저히 수용 못할 결론이었을 겁니다. 이 파트를 잘 읽어 보면 바딘이 꼭 최종적으로 패배했다는 게 아니라, 조지프슨이 결국 노벨상까지 받아낸 그 이론적 성과를 좀 극단적으로 밀고 가는 바람에 결국 그의 이단아적 행보를 예측하고 그토록 배척했다는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론의 디테일은 틀렸어도 학자 개인의 성향에 대한 거부감과 경계는 (주류 입장에서) 타당했다는 거죠.

물론 우리 독자들은 저자의 선호와 시점 덕분에,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한 지지를 보내듯 조지프슨의 행보를 응원하게 됩니다(ㅎㅎ). 유리 겔라(이분은 현재 좀 심각할 만큼 평가의 저하가 이뤄졌습니다. 거의 사기꾼 취급)를 지지하기까지 했다는 그의 이후 행적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최고의 두뇌, 최상의 경력을 가꿀 수 있었던 이가 안정된 미래를 과감히 포기하고 구태여 가시밭길로 접어든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냐는 시각, 또 나이 들면서 총기가 흐려지고 뭔가 정신적 문제를 겪었다는 시각(저자는 공평하게도 이런 시각까지 다 언급합니다. 무조건 그가 맞다는 게 아니라)이 다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양자컴퓨터다." 양자현상의 정의가 지나치게 확대 적용되는 것도 경계해야겠지만, 확실히 최근의 이론적 성과는 뭔가 전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함을 누구에게나 납득시키는 듯합니다. 중요한 건 어느 한 극단으로 치달을 때 과학의 붕괴, 미신화를 낳거나, 반대로 명백한 증거를 애써 무시하는 또하나의 사이비로 타락(설명이 안 되는데도 설명된다고 우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난제를 하나하나 해결할 수있는 유일한 희망은, 오직 논리와 근거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순수한 지적 호기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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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 세계적 물리학자 파인만이 들려주는 학문과 인생, 행복의 본질에 대하여
레너드 믈로디노프 지음, 정영목 옮김 / 더숲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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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레너드 믈로디노프 박사는 학부생 시절(아니, 그 이전 청소년기)부터 은사(성함, 실명은 생략되어 있습니다)의 각별한 기대를 안고 이후 석박사를 마친 후 칼텍에 교수직을 얻어낸 기대주였고, 지금도 칼텍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중견 학자입니다. 이런 분도 칼텍에 갓 자리를 잡았을 때는 "과연 이 길이 내 길인지."하는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었나 봅니다.

이 책은 아직 서른이 채 되지 않은 젊은 시절, 칼텍이라는 전당에서 리처드 파인만, 그리고 머리(이 책에선 "머레이"로 표기하며, 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르겠습니다) 겔만 두 천재 석학과의 짧은 만남을 소재로 삼아, 인생의 지표를 흔들림 없이 설정하고 목표에 매진하려면(혹은 반대로 과감히 방향전환을 이룬 후 좋아하는 일에만 푹 빠져들려면) 어떻게 해야 현명히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들려 주는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유머러스하게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라며 누가 묻지도 않은 답을 먼저 내어놓는데, 이는 독자의 오해를 피하고자 하는 진지한 의도가 아니라 작가로서 픽션 창작에 전념하며 살고 싶었던 자신의 한때 희망(이는 부분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에 대한 약간의 풍자적 회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말 제목은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이며, 원제는 "파인만의 무지개"입니다.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에서처럼,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보거나 머리 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설레고 부풀어오르는 대상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입니다. 파인만뿐 아니라, 광학(이 저자분도 처음 전공이 이 분야였습니다)을 연구한 그 앞 시대의 선구자들은, 처음 물리현상에 관심을 두고 평생을 헌신할 때 "무지개(혹은 다른 무엇이든)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 분야를 파기 시작했고, 혹 뜻이 흔들리거나 회의가 느껴질 때마다 "그 아름답고 설레는 것"을 다시 상기하며 자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는 거죠. 적성과 욕구 사이에서 저자(포닥 시절의 젊은이)가 갈등할 때, 파인만은 이런 충고를 던져 줍니다. "가서 원자의 전자현미경 사진을, 아주 세심히 들여다 보게. 그냥 보지 말고 아주 세심히 말야."

파인만이나 겔만 같은 한 세기에 한두 명 날까말까한 천재는 아니라도, 저자 정도의 영재 코스를 밟은(우리 관점에서는 그냥 천재입니다) 이라면 남보다 확실히 우월한 자신의 열정을 매 순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진로에 대한 회의와 갈등은 우리 같은 평범한 이들이나 겪는 거겠고요. 그런데도 이제 창창한 경력을 막 시작하려는 이 청년은 왠지 자신이 없습니다. 몇 년 용 좀 쓰다, 간신히 낸 학문적 실적과 성과에 시큰둥해하는 대학 당국으로부터 쌀쌀맞게 해임 통보를 받거나, 아예 이 거대한 학교에 발령 받은 자체가 행정착오일 수 있다며 좀 과한 침체 상태에 빠집니다. 작가가 되고 싶은 소망은 (독자로서 제 생각엔) 그저 현실도피의 핑계인 것 같고, 속마음은 "이런 천재들 사이에서 내가 어떻게 버틸까?" 같은 중압감이 지배한 것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여태 탄탄대로를 걸어 온 그로서는 이런 느낌을 생전 처음 겪는 바이겠습니다.



이 책은 물론 파인만과의 짧은 접촉과 그로부터 받은 가르침(파인만 본인으로서는 그런 의식이 없었겠으나)을 주로 돌아보지만, 파인만 못지 않게 강렬한 개성과 비중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파인만보다 십여 년 아래인) 머레이 겔만입니다. 파인만도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 안 되는 괴벽과 까탈스러움의 소유자지만, 겔만은 전형적인 만능 천재이자 부르주아적 취향까지 함께 가진 유형이므로, 길 잃은 젊은이에게 자상한 멘토링을 해 줄 마음 따윈 전혀 갖지 않았을 겁니다(이 책에는 "나를 바라보거나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시간이 아깝다는 듯한 태도였다" 같은 말도 있습니다). 여튼 저자는 그런 겔만도 혼자 "사숙"하며(가끔 방문해서 대화도 나누는데, 이는 연구실이 가까이 위치해서인 이유가 큽니다. 나중에 "더 친분 있는 이를 곁에 두고 싶다"며 방이 바뀌게 되죠 쩝), 그런 겔만의 개성이나 철학으로부터도 교훈을 이끌어 내며, 겔만이 선배 파인만을 보는 시각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스승" 파인만(물론 저자와 파인만은 사제관계까지는 아니었으나)에 대한 탐구를 행하기도 합니다.

재미있게도 그나마 친분을 텄던 파인만을 두고는 내내 "파인만"으로 호칭하는데(딕이나 리처드가 아닌), 더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겔만은 계속 "머레이"로 부른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는 책에서 저자만 유지하는 태도는 아니고, 칼텍에서 구성원들의 분위기나 태도를 반영한 거겠습니다만. 저자와 파인만 자신의 규정대로, 세상에는 두 종류의 학자가 있습니다. 겔만(뿐 아니라 학계의 주류를 형성하는 모든 이들) 같은 그리스인 타입, 그리고 파인만 같은 바빌로니아인 타입(둘 다 비유적 의미입니다). 전자는 조화로운 전체 체계를 세워 두고 모든 각론이나 현상이 이 체계에 잘 맞아야 이론을 진리로 인정합니다. 후자는 그렇지 않고, 우리가 상식과 감각으로 겪는 개별 현상이 우선이며, 이로부터 도출되는 원리나 법칙이야말로 진리의 초석으로 여깁니다. 전자는 완결된 증명을 중시하고, 후자는 효용성을 강조합니다. 사실 이런 태도라면 "양자역학"은 바빌로니아인들의 전유물이라야 하지만, 겔만 같은 천재는 놀랍게도 자신이 아예 표준 모형의 기초를 놓아 "말이 안 되는 현상을 설명할 체계"를 하나 새로 세워 버립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인들"도 양자역학에 대해 괜한 패러다임의 갈등이나 거부감에 시달리지 않고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었다고 해도 되죠.



그러나 파인만은 이런 태도에 대해 다 불필요한 허식이거나 심지어 환상, 기만으로까지 평가합니다. 개별 현상이 잘 설명되는 이론이 최고이지 기존의 체계에 뭘 맞출 필요가 뭐 있냐는 겁니다. 같은 천재라도 이런 타입은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세부 분야에 푹 빠지는 반면, 겔만 같은 이는 (그 특유의 부르주아 취향까지 작용해서) 자연과학뿐 아니라 모든 분야, 역사, 문학, 고고학까지 다 섭렵하고 하나의 체계를 이뤄야 직성이 풀리는 거죠. "쿼크"도 겔만이 제임스 조이스의 고전 <피네간의 경야>에서 따온 이름이며, 그는 한자나 산스크리트에도 해박하여(이 책에서는 마야 문자 천착에 대한 언급이 두 번 나옵니다. 두 번 다 다분히 그의 현학을 비꼬는 맥락에서) "사성제, 팔정도" 같은 이름도 붙인 게 그입니다.

파인만 스타일은 영국식 경험철학(귀납법 위주)과 통하고, 반면 겔만 스타일은 대륙의 합리론(연역법 위주)과 닮아 있습니다. 파인만이 그처럼 "끈이론"을 싫어한 것도, "근거도 없이 이론을 위한 이론을 만드는 허세"라는 판단을 그로서는 내려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어지간히 자신의 장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지, 저자는 존 슈워츠를 두고 "모두가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는 저런 연구를 몇 년째 이어가는 걸 보니 누가 뒤를 봐주는 게 틀림없다"는 주변 분위기에 합류하죠. 물론 이건 다분히 농담조로 한 말이지만, 충격적이게도 정말 실력자 스폰서가 있었음이 책 후반부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바로 겔만이었는데, 끈이론을 전폭 지지하지는 않아도 "저 친구들 길에 뭔가 놓여 있음"을 직감하기도 했고, 보편 이론을 완성한 후 개별 사례를 접근, 포섭시키는 그들의 방법론에 "그리스인"인 그가 공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파인만의 불후의 업적 중 하나는 책에도 나오듯 "경로 적분론의 완성"입니다. 경우의 수를 다 더하면(적분하면) 확률이 나온다는 건데, 이 기법이 "발견"되기 전에는 엄청 복잡한 계산이 필요했죠. 너무 간편해서 사람들은 그 타당성을 의심했는데, 그래도 실제 써 보니 너무도 실용적이라 쉽게 배척도 못하는 게 반대진영이었습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파인만 식이 아닌" 보편적 언어를 통해 메타 증명을 하고 나서야 이 업적은 업적으로 평가되었습니다(이건 수학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이걸 생략하면 골드바흐의 추측도 측이 아니라 법칙이 되어야 합니다. 다만 파인만은 물리학자지 수학자가아니므로...). 파인만은 근데 이런 게 너무 싫었던 거죠. 그는 엄격한 이론보다 자기 직관(천재니까)을 더 믿었고 이런 상상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싶어했습니다. 그의 상상은 그저 상상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는 이런 스타일 덕분에, 예를 들어 왜 1980년대 중반 챌린저 호가 폭발했는지 명쾌히 기술적 원인을 짚어내어(그의 전공은 이런 공학 계통과 거리가 꽤 먼데도, 해당 분야 엔지니어들이 못 찾은 걸 이론물리학자가 규명했다는 게 진정 경악할 일입니다. 그 실무자들은 다 뭐가 되는 건가요ㅠ)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파인만과 겔만 두 분이 이처럼 개성이 다르지만, 이 책에 잘 나오듯 두 분 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또 지극하다는 게 공통점입니다. 책은, 지성의 첨단을 걷는 이런 학자들도, 우리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감정에 지배되고, 그 와중에서도 인간의 길과 가치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피와 육신을 지닌 존재"임을 잘 가르쳐 줍니다. 진로 모색 때문에 고민이 많을 학생들이 읽으면 참 좋을 책 같습니다(입자물리학에 대한 이해는 덤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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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구조 교과서 - 에어버스.보잉 탑승자를 위한 항공기 구조와 작동 원리의 비밀 지적생활자를 위한 교과서 시리즈 10
나카무라 간지 지음, 전종훈 옮김, 김영남 감수 / 보누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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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누구에게건 "하늘을 나는 것"은 가장 소박하고 아름다운 꿈 중의 하나였습니다. 용감하고 잘생긴 조종사들이 주인공들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라도 방영되면 커서 파일럿이 되겠다는 아이들이 학급에서 절반이 넘곤 했죠. 실제로 초고도, 초음속 비행이라는 격무를 수행하고, 언제 돌발할 지 모르는 비상사태에 기민히, 단호히 대응해야 하는 조종사라는 직업은 결코 낭만적으로 볼 일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일상을 사는 축복받는 인류에 속합니다. 하지만 수천 km 떨어진 다른 대륙에 몇 시간 만 들여 날아가는 "비행 교통"이 어떤 원리로 가능한지 설명해 보라고 하면 아무도 쉽게 입을 못 뗄 것 같습니다. 대형 여객기의 경우 동체가 얼마나 큰 기기입니까. 그런 무거운 물체가 빠른 속도로 창공을 날아 목적기까지 수많은 승객을 실어다 주고, 운항 시간 동안 기내에서는 영화 감상이나 맛있는 식사 등 쾌적한 문화체험까지 즐깁니다. 이런 기적 같은 혜택을 우리는 중력만큼이나 당연한 세상의 원리처럼 아무 의문 없이 누립니다. 비행기의 활강이야말로 중력의 가혹한 섭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가장 놀라운 인간의 성취인데도 말입니다.



많은 현대 문명의 이기들은, 대개 뚜렷한 과학(기초과학, 자연과학)상의 원리 몇(하나 혹은 두엇)의 발견, 확립만으로 성큼 우리 곁에 다가온 것들이 많습니다. 핵분열의 관측과 상대성이론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초기 핵무기만 해도 그저 자연과학상의 성과에만 바로 기댄 부분이 그처럼 컸지만, 비행기의 구조와 운행 원리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이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 먼 과거에 상당 부분 이론적 탐구를 해 냈습니다만 실용화에까지는 터무니없이 못 미치는 수준이었죠. 라이트 형제가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가동 가능한 기기의 실물 설계와 비행에 성공했을 뿐, 어떤 방정식이나 실험실 속의 간명한 법칙과 도그마 몇으로 "짠!"하고 실체를 갖춘 게 아니었습니다. 엔지니어들이 자연과학자들에 대해 "당신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우리들만의 직역"이라며 자랑스러운 예증으로 써 먹는 게 이 비행기 발명, 개발의 역사이기도 하죠.



이런 분야는 그만큼, 교과서에서 잘 다듬어진, 직관적 설명 몇 마디로 "이래서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거야."라며 손쉽게 가르치기, 혹은 독자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비행기의 구조와 운항은 그만큼, 현장의 엔지니어들이 "비행"이라는 구체적 목표에만 전력을 기울여, 어느 정도는 행운의 덕도 따랐기에 발견, 정립할 수 있었던 매우 복잡한 원리에 바탕을 둡니다. 이런 비행기의 구조를,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대중서 몇 권 읽고 머리에 쏙 정리해 넣어두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 기술자들도 방대한 구조를 조감하기보다 자기 전공만 파악하는 게 보통이죠. 그래서, 나무는 물론이고 숲도 볼 줄 아는 이런 도사님이, 알기 쉽게 그림과 다양한 예까지 결들여 지은 책을 접한 우리 같은 독자는 운이 좋다고 하겠습니다.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를 재미까지 붙여 가며 "아 그런 거였어?" 같은 깨달음의 쾌감까지 느끼게 돕는 멋진 책입니다.

물체는 웬만해서 허공에 뜰 수 없습니다. 중력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죠. 중력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그건 이미 물리계에 속한 존재가 아닌 어떤 신령스러운 초월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 무거운 비행기, 웬만한 집채보다 무거울 그 기기가 하늘에 떠서, 그것도 자기 의사와 목적대로 운신을 자유로이 하며, 목적지에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는가. 사실 웬만한 교양서나 인터넷 정보(권위 있는 기관에서 운영하는)를 봐도, 그리 명쾌히 이해가 안 되는 게 보통입니다. 이 책은 일단 서두에서 "어떻게 날 수 있나?'에 대한 물리학적 원리(들)를 가르친 후, 이후 전개되는 다른 구조 설명(이나 토막상식, 재미있는 이야깃거리 등)을 통해 응용 복습을 시켜 줍니다. 저는 이 책에서 특히 이 점이 좋았습니다.



학생들을 위한 참고서라고 해도, 앞에서 배운 원리나 정석이 뒤로 가면 다른 토픽에 묻혀 흐지부지되는 수가 많죠. 이 책은 앞에서 언급한 원리, 설명이 뒤로 가도 거듭 적용, 심화, 환기된다는 점이 가장 돋보입니다. 독자는 앞에서 공부한 내용을 쉽게 잊지 않게 되고, 한 가지 원리가 스토리처럼 여러 상황에 녹아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비행기 같은 복잡한 기기의 구조를 친근히 기억,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가 얼마나 복잡한 자연과학, 공학적 원리의 얽힘과 응용과 융합에 기대는 구조인지를 생각하면 이처럼 책이 잘 읽힌다는 게 거의 놀라울 정도지요.

설명도 교과서적으로 단조롭거나 기술적으로 복잡하지 않고, "이건 한마디로 뭐다!"처럼 명쾌합니다. 예를 들어 부력은 그냥 떠오르는(나를 환경이 떠오르게 하는) 힘이고, 양력은 내가 애를 써서 내가 떠오르는 힘이라는 식입니다. 유체 속에서 둘 다 물체를 떠올리는 이유라는 점에서 헷갈리기 쉬운데(다 물리학 고교 1학년 수준에서 배웁니다만, 둘이 뭐가 다르냐고 애들이 물으면 과연 명쾌하게 구별해 줄 자신 있으신가요?), 저자는 "당신들이 헷갈려할 만하고, 그래서 처음부터 분명히 구별시켜 줄 테니 개념부터 잡고 시작하라"는 듯 전략적 티칭을 시도합니다. 가려운 걸 긁어주는 코칭이란 바로 이런 걸 두고 이름이죠.



우리가 중고교 교과서에서 배운 불변의 원리도 상기시켜 주며 "학창 시절에 배운 당신의 소양과 지식은 결코 헛되이 쓰이지 않는다. 이처럼이나 절실한 현실과 요긴하게 직결된다"라고나 하듯, 그저 쉽고 캐주얼하게 풀지만은 않고, 이처럼 정석과 기본에 충실한 게 또 장점이고 신뢰를 부릅니다. 가장 근본 핵심은 (우리가 로켓의 원리라며 배우기도 한) 작용반작용의 법칙이죠. 이 토픽에서 자연스럽게 항력 계수 이야기가 나오고, 양항비 토픽으로도 무난하게 넘어갑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항공대 출신 친구하고 대화하다 그가 공부하던 교과서를 흘깃 볼 일이 있었는데, 전공서적에서 구경한 항력 계수 설명은 굉장히 쌀쌀맞고 드라이합니다. 쉬운 내용도 지레 정나미가 떨어져서 멀리할 지경이죠.

이 책은 같은 내용을 설명해도 뭔가 직관적으로 턱 감이 오게 풀어 주는 게 제일 맘에 듭니다. 예컨대 "양력은 비행기의 무게와 같고(정확히 말하면 "비례하고"), 추력은 항력과 같으므로, 결국 양항비는 무게와 추력의 비율이다." 란 서술이 있는데요. 이렇게만 떼어서 인용하면 뭐 무슨 소린지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책 앞에서부터 레고 조립하듯 하나하나 기초부터 설명을 해 주기 때문에, 책의 호흡에만 충실하면 "아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겠다" 같은 안심이 확실히 따라오는 공부고 독서입니다(추력, 항력은 알기 쉽게 다 설명이 베풀어지고요).

교과서 전공 서적 읽으면서 제일 짜증나는 게, 책 뒤의 내용(용어, 개념)이 뜬금없이 나온다든가(그래서 읽지도 않은 뒤를 또 참고해야 함), 항목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안 되고 단어사전처럼 동떨어진 설명 방식이 보통이어서 읽어도 머리에 잘 남지를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이 책은 저자가 선행 원리를 뒷부분까지 밀접히 한 꿰미에 연결을 시켜 나가는 내러티브라서, 최소한 책만 성실히 따라간 독자라면 이해를 못 할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비행기 구조란 게 무슨 장난도 아니고 당장 정비업무나 조종사 역할에 투입될 만큼 심화된 내용은 아닙니다. 요즘 "교양의 궁극은 과학"이란 말이 유행하듯, 이 책은 "비행기가 어떻게 뜨고 날며, 그 속이 어떻게 생겨먹었나?" 같은 상식선의 의문을 해결하기에 딱 알맞은 난이도와 구성입니다. 그 이상의 지식은 생업이 그쪽이 아닌 이상 알 필요는 없겠으며, 중등 교육 과정에서 자연과학 이수단위만 충실히 마친 분이라면 (드라마의 후편처럼) 더 알아야 할 결말을 좇는 기분으로 즐겁게 이해할 만한 내용이 담겼습니다.



엔진이 내는 힘은 과연 얼마 정도인가, 또 이 문제를 설명하면서 "순 추력"과 "총 추력"의 개념 차이까지 자세히 알려 줍니다. 물론 추력이라는 비행체(정확하게는 유체) 고유의 개념이 핵심이므로, 이 지식을 자동차 엔진에까지 유추 확장하는 건 좀 무리지만, 여튼 사이드로 자동차 엔진의 속성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상식이 는다고 할까요). 우리가 또 아주 소박하게, 헬기(프로펠러 동력 비행체)와 비행기의 장단점과 고유 영역은 어디서 극명히 갈리는지도, 그냥 남자들끼리 아는척하면서 단편 상식으로 떠드는 범위를 넘어, 체계적이고 원리적인(또 망라적인) 설명이 나와서 좋았습니다. 이로써, 어느 속도 이하/초과부터 헬기와 비행기가 선호되어야 하는지 결론도 명쾌해지고 말이죠.

예전에 어느 혁신가가 세그웨이라는 "탈것"을 개발하여, 자동차나 스쿠터의 장점만 가진 채 출퇴근 수단의 대안으로 만들겠다고 한 적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다 알듯 실패로 끝났지만, 그 핵심을 이루는 자이로스코프 원리는 여전히 많은 매니아들의 관심사이며 또한 엔지니어들의 영원한 화두죠. 이 책은 특히 비행기 계기판 구조 설명에서 이 자이로스코프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가르쳐 주는데, 자이로스코프 원리 일반에 대해 아주 생생한 응용사례라서 기존의 지식을 늘리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올바른 책은 개별 제품 설명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처럼 다른 영역의 이해와 학습에까지 많은 도움을 준다는 점, 나아가 삶의 지혜, 세상을 보는 눈 자체를 확장시킨다는 점도 다시 깨닫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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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미래의 자동차를 지배할 것인가 - 세계 최고 자동차 전문가가 말하는 새로운 모빌리티의 세계
페르디난트 두덴회퍼 지음, 김세나 옮김 / 미래의창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20여년 전만 해도 내 차를 소유한다는 것, 이른바 "마이 카, 혹은 오너드라이버" 상태로 진입한다는 게 일종의 신분 상승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까지 있었습니다(지금은 왠지 이런 말 자체가 촌스럽기도 하고 잘 쓰이지를 않습니다). 이제 자동차 소유는 너무나 당연한 옵션이 되어 버린 단계이기도 하고, (이 책에서도 자주 언급되거니와) 한국 같은 중견 국가에서 어느 정도는 자동차 소유가 포화단계, 혹은 임계 수위에 다다른 느낌이기도 합니다.

한편 젊은 세대, 경제활동 신규편입 그룹의 기대 소득 전망이 비관적으로 바뀐 데다, 공유경제를 지향하는 우버 등의 혁신 업체 진출, 자율주행 기제의 얼마 남지 않은 도래 등이 함께 작용하여, 과연 가까운 장래라면 자기 소유 자동차를 얼마나 유지할지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예측이 지배적입니다. 우리 느낌으로는 주거공간의 연장, "내 집, 내 사적 공간의 확장으로서의 애마"가 그리 쉽게 사라지게 방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SNS에서의 프라이버시 포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듯 새로운 세대는 "뭐하러 돈 들여 내 차를 갖지? 출근길은 그냥 여러 사람이 어울려 잠시 고생하면 그만이겠고." 정도로 가볍게 생각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솔직히 근래 나오는 책들 읽어 보면 대부분이 트렌드 예측을 이런 식으로 몰고 가는 게 사실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책들은 일반론이거나 거대 트렌드 관측에만 전념해 온 저자들의 솜씨지 자동차 전문가가 쓴 건 없다시피했거든요.


사정이 정말 이렇다면 자동차 산업의 미래는 매우 어두울 수밖에 없겠는데, 과연 그럴까요? 제법 두꺼운 이 책 전체 맥락을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와는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첫째 "인간이라는 종에게, 더 개선된, 더 쾌적한 모빌리티의 추구는 숙명이다." 둘째 따라서 자동차란 지금이나 미래에나 언제나 그 곁에 있어 줘야 하는 친구이다. 셋째 자동차 산업은 지금이나 미래에나 만족스러운 혁신에 성공할 것이며, 성장 가능성은 오히려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이 정도입니다. 극히 일부의 추세징표나 막연한 느낌만으로 절대 미래를 속단하지 말라는, 저자(독일인입니다)의 치밀한 분석과 단호한 충고를 담은 게 이 책입니다.

과거 고도성장기에도 물류 운반을(이는 이 책의 주제가 염두에 두듯 개인적, 여가 활용적 이동이 아닌, 주로 산업 물자의 이동이 목적이었죠) 주로 어떤 수단에 의존할 것인지 정책 설정을 두고, 고속도로 건설과 (기존) 철도 시설의 확충(복선화 등) 둘 사이에서 심한 갈등, 대립이 있었습니다. 정형화, 중앙집중화, 대규모화를 지향하는 철도 수단은 그러나 벌써 그 시점부터 시대에 뒤떨어졌었음을 우리는 지금 절실히 확인합니다. 이 책 역시, 혁신에 둔감하고, 라이프 스타일 트렌드에 반하고, 융통성이 부족한 철도 교통의 미래는 암울하게 잡습니다. 육상 교통의 유일한 경쟁자인 철도 산업의 전망이 이처럼 좋지 못하다면, 그 반사효과로도 자동차 산업은 더욱 활기를 얻는 게 당연합니다. (독자로서 개인적 생각이이라면 두 산업은 대체재보다는 보완재적 성격인데, 그렇다 해도 자동차 수요의 근원적 부분을 철도가 대신하지 못하리라는 점은 오히려 또 당연해지죠)

자동차 산업의 무한 질주에 대해 기존에 비관적이었던 또하나의 유력한 요소를 들라면, 환경 오염을 향한 심각한 공적 여론, 비판입니다. 이미 KTX 등 고속 전동차 운용이 주류가 된 한국에서도, 기차 하면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증기기관, 디젤기관형이 아직도 대뜸 떠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책에서는 "자동차를 제외한 모든 운송 수단은 이미 전기동력형으로 모두 바뀌었다"고 잘라 지적합니다. 희한하게도 구시대적(?) 디젤 엔진(환경 오염의 주범)에 여전히 의존하는 건 자동차뿐이라는 겁니다. 이런 점만 보면 친환경 트렌드에 역행하거나 혁신에 둔감한 건 오히려 자동차 섹터이며, 기업의 탐욕과 타성, 사악한 로비를 통한 현상 유지 음모 때문에 이 반환경적인 스탠스가 근본적으로 고쳐지질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앞으로 모든 분위기가 바뀔 것이고,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업계의 경직된 태도가 이미 심대한 전환점을 맞았다고 지적합니다. 이 책이 쓰여지기 몇 달 전 터진 폭스바겐 등의 소위 "디젤게이트"가 큰 계기를 마련했고, 그보다 몇 년 전 도요타의 대량 리콜 사태도 산업의 지평이 바뀌는 데 일정 모멘텀으로 작용했다는 거죠. 다시 환기하자면 저자는 (여태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의 본거지로 여겨진) 독일의 전문가인데, 특히 미국 진보 여론의 온상인 캘리포니아 같은 곳에서 운전자의 안전, 친환경 가치, 탄소 연료에 대한 반감 등을 선도적으로 끌어 온 업적을 높게 평가합니다. 이런 여론이 안착시킨 법제적 제약은 오히려 엔지니어들의 반성적 혁신을 폭발적으로 이끈 면마저 있다는 겁니다.

저자는 경력상 자신이 개인적으로 직접 겪은 사례를 놓고 흥미로운 실화를 하나 들려 줍니다. 대중들은 업무와 여가 선용에 기능상의 실질적인 필요, 혹은 주관적 만족과 달콤한 환상, 이 둘 중 어느 동기를 통해 자동차를 구매하는 편일까요? 밀착적 경험을 통해 만난 결론이니 더 단호할 수밖에 없지만, 저자의 견해는 주저없이 후자입니다. 포르셰 터보 911 모델의 마케팅과 장기 전략 파트에서 근무하며, 저자(가 속한 팀)는 종전 지나치게 운전자의 숙련 기술과 "힘"에만 의지해야 했던(다른 말로, 안전사고가 날 위험이 컸던. 명시적 설명은 책에 없으나 아마 모델이 안은 근원적 위험 때문에 제조사에선 소송 리스크를 인식했을 겁니다) 이 모델의 엔진파워를 희생하는 대신 보다 쉬워진 조작이 가능한 쪽으로 전략 수정을 해야할지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시실제로 그런 험한 조작을 도로 환경에서 쓸 데가 없어도, 운전자들은 잠재적, 혹은 환상의 기회만으로도 만족하며, 이는 대부분이 브랜드가 부여하는 주관적 착시라는 점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소비자들의 성향은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 영향을 줄까요? 여기에 대해서 저자는 다소 모호한, 혹은 엇갈리는 태도인 듯합니다. 우선 왜 자동차 산업이 미래에도 창창한 전망이냐 하면, 이런 모빌리티의 환상, 나만의 애마가 나를 다른 세계로 인도해 주리라는 벅찬 감동은 미래라고 해서 쉬이 개개인의 내면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저는 제발 이 예측이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반면, 도심 한복판의 근사하게 잘 빠진 자동차 전시장의 쇼윈도를 보고 몰려드는, 또 딜러의 현란한 말솜씨에 넘어가 감성적, 충동적으로 구매 결정을 내리는 시대는 (이 책 다른 파트에서 상술되듯) 또 이미 저물어간다는 거죠. 새로운 시대에는 소비자들이 인터넷에 명시된 성능과 디자인의 세부 사양을 보고 결정을 내리며, 알리바바나 아마존 등 새로이 등장한 플랫폼이 이런 식으로 대체 불가의 "구매 플랫폼"을 선점하고 확고히 장악하면, 자동차 메이커는 "되놈에게 돈 벌어다 주는 곰"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지적입니다. 마치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제조업 관계, 혹은 기민한 앱 개발자와 통신사 사이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프레임이지만, 솔직히 그 지경까지 갈 수도 있다는 예측에 대해선 개인적으로 반대합니다. 벤츠나 아우디 같은 브랜드 파워보다, 모바일 기기에서 홈으로 설정한 알리바바 등 리테일 벤더 환경의 익숙함과 신뢰도에 끌려 구매를 결정한다? 글쎄요.

"자동차 업계의 교황"이란 어마무시한 평가를 받는 저자답게, 특히 엔진과 마력의 상관관계, 이를 둘러싼 자동차산업 외적 요인의 추세적 영향 분석이 매우 쉬운 말로 잘 풀어져 있어 도움이 크게 되었습니다. 특히 근래의 추세는 친환경 지향의 규제와 맞물린 "연비 중시" 그리고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뜻밖의 행운으로 여겨졌을) 유가의 지속 하락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흐름이 맞물려 여러 흥미로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세에 적응해 가는 양상, 전략도 유럽이나 미국, 일본 업계가 다 제각각이라는 점을 저자는 흥미롭게 짚습니다.

우리 한국 소비자들도 다 동의하는 것처럼, (저자의 모국인) 독일 메이커들의 가장 큰 메리트는 단연 파워풀한 엔진에 있을 뿐 아니라, 컨셉이 분명히 잡혀 있어 소비자에게 구매욕을 부르는 디자인에 있습니다. 이러던 게 최근 연비 중시, 친환경 규제가 업계의 과제로 부각된 가운데, 적응을 서두르다 여태 없던 엄청난 실패로 드러난 게 "디젤게이트"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사태를 구조적 모순과 한계 탓에 필연적으로 불거진 것으로 파악합니다. 곧, 실무진과 현장 최전선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직근 상급자, 최상위 관리자에게 정직히 보고하는 조직 문화에 어떤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겼다고 보는 거죠. 구체적으로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대신 질소산화물(이른바 NOx, 즉 NO, NO2, .... 등) 분량이 늘어났는데 이 결과를 조작한 게 게이트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는 독일뿐 아니라, 그보다 몇 년 앞서 터져 세상을 시끄럽게 한 도요타 리콜(소위 리콜의 리콜) 사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상명하복 정서가 강한 일본 기업이 더 심각한 내연문제를 안고 있겠죠. 한때 안돈 시스템, 즉 하급자에게도 즉시 전 공정을 중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어 품질 향상을 꾀한 놀라운 경영 혁신으로 전 세계에 감동을 준 그들이지만, 공개된 장점은 후발 주자들이 또한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법이니 말입니다. 이처럼 조직의 투명성, 또 사회적 책임의 엄중한 추궁은 미국이 법제 마련에서 가장 잘 되어 있다고 저자는 칭찬합니다. "우리(이 책에서 "우리"는 모두 독일을 가리키지만, 우리 한국 독자들도 같은 시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죠)는 저들 미국이 시행하는, 가장 엄격한 징벌적 배상제 같은 걸 받아들여 기업의 체질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바람직한 규제는 오히려 혁신을 부른다" 이게 일관된 저자의 기조 중 하나입니다.

미국인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에 대해서도 저자는 마찬가지로 쓴소리를 내놓습니다. 한참 후에야 진상이 밝혀진 오토파일럿 시험 조치를 두고 이름입니다. 우리도 한때 네티즌들 사이에서 유행한 말처럼 "소비자가 무슨 베타테스터인 줄 아냐?"같은 따끔한 비판을, 테슬라의 경솔한 태도에 대해서 던집니다. 한편 전기차의 혁신에 따른 여러 부대 상황도 저자는 예측하는데, 정비소라든가 기존 디젤 엔진 구동 자동차가 무대에서 퇴장함에 따라 함께 없어질 여러 직업을 놓고 하는 말입니다(전기차나 자율주행차는 잔고장이 적다는 점 감안). 한편 스마트카(엔진 구동 방식과는 무관하게 또 대세가 될) 운행에 따르는 위험은 아무래도 소프트웨어 해킹 리스크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pc나 모바일 기기 펌웨어 업데이트를 그냥 집에서 하듯, 코드를 연결시키고 파일을 내려받아 적용한 후 재부팅하는 장면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기발한 표현을 많이 합니다. "지역이라는 코르셋을 입고 있는"이라든가(글로벌 코드에 빠르게 적응 못하는 기업 문화 비판) "사공은 많고 배는 적다"(중구난방식으로 충돌하는 미래전략 구상) 등 주로 자국 기업을 향한 비판이지만, 한국 역시 현기차 그룹의 실적과 성패에 수많은 이들이 생계를 의존하는 나라입니다. 이런 저자의 신랄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비판은, 독일 기업보다 기술력도 자본도 마케팅 노하우도, 확보한 자원도, 심지어 든든한 내수시장이나 능률적이고 청렴한 정부 시슼템까지, 모든 면에서 부족한 한국의 담당자들도 뼈를 깎는 마음으로 자성하며 경청해야 할 충고입니다. 자동차가 과연 미래에도 중추 산업일까? 저자는 주저없이 긍정의 답을 내놓습니다. 그렇다면 담대하고 지혜로운 인력들 역시, 아직도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이 지상(地上)의 모빌리티 비어클 산업에 자신의 미래를 헌신할 가치가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죠. 특히 정부 차원의 지원과 원대한 비전의 수립도 절실한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그저 답답한 마음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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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차이나 - 급변하는 중국 시장, 현지 기업에서 답을 찾다
김도인 지음 / 미래의창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에도 잘 나와 있듯, 중국이 문호개방, 산업화에 본격 진력한 건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가 계기였습니다만, 이미 그보다 훨씬 전부터 한국(남한)에서조차 현지 진출의 단꿈에 부푼 이들이 많았습니다. 국교가 수립되지 않았던 데다 엄연히 적성국이란 인식이 건재했는데도 재계, 정계, 심지어 교육계 인사까지 중국 한 번 안 다녀온 이들이 없을 정도였는데요. 특히 사업가들은 벌써 그때부터 다들 습관처럼 입에 올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당 젓가락 하나씩만 팔아 넘겨도 대체 얼마냐?" 여기서 젓가락이라 함은 가장 척박한 시장에서 이문조차 덜 남기고 파는 장사의 대유겠습니다.



그때로부터 벌써 사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또 사업실패를 겪고 초라하게 귀국한 이들이 주변에 엄청 보이는 현실이지만, 중국을 향한 시선이라면 아직도 저 "젓가락 타령" 단계의 인식에 머문 한국인들이 대부분입니다. 한국에 놀러오는 관광객들의 초라한 행색, 거칠고 무례한 매너 때문에(중국에 다녀온 우리측 관광객들이 현지인들로부터 받는 인상도 대개 비슷하지만) "미개인" 정도로 쉽게 낮잡고 말기까지 합니다. 거기까지는 뭐라 할 일이 아닌데(사실이니까요), 이런 사람들이 모여사는 시장은 땅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쉽게 공략할 수 있겠다는 근거없는 낙관론이 팽배한 현실(아직까지도!)에까지 이르면, 여기서부터는 심각한 인식 교정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분들이 읽으면 딱 좋을 유익한(그러면서도 읽기 쉬운) 가이드가 있다면 바로 이 책이겠습니다.

일단 사업가들이 유념해야 할 건, (책 저자께서 한 마디로 잘 정리한 대로) "중국 시장은 크고(그래서 일단 설렙니다), 그러나 어렵다."입니다. 왜 그럴까요? <택리지>를 저술한 실학자로 우리가 잘 아는 이중환은 이런 글을 남긴 적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비록 땅이 좁으나 지형이 변화무쌍하고 풍습과 인속이 다양하여 결코 작은 고장이라 할 수 없다..." 한국에 이런 말이 적용될 것 같으면, 위도, 경도상 엄청난 범위에 걸쳐 뻗어 있으며 풍속과 기후는 물론 인종 분포마저 다양한 "대륙"에 대해서는 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아래의 인포그래픽 컷을 보십시오.



중국은 한 개의 단일 시장이 아니라, 십여 개의 외국으로 구성된 복잡한 리그에 가깝습니다. 단일 통화 유로를 쓴다고 유럽 28개국(EU)을 같은 개성으로 파악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중국 시장의 실정은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저기보다 만만하지 않습니다.

과거, 한국에서 성공한 가전제품, 인테리어, 심지어 주방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품목들은 중국이나 유럽 등지에서도 큰 인기를 끌곤 했습니다. 애플이 패러다임 시프트를 이루기 전 피처폰 시장에서도, 만약 잡스의 놀라운 혁신이 한 5, 6년 뒤에만 이뤄졌어도 삼성전자가 세계 패권을 노키아로부터 빼앗는 국면까지를 우리가 다 지켜 봤을 겁니다. 까다로운 한국 소비자의 입맛에 맞추느라 디자인, 성능 양 면의 혁신에 그 가진 역량을 다 쏟아부어야 했던 기업들의 실력이, 하도 호되게 단련되다 보니 해외 어디서도 다 통할 지경이 되었던 겁니다. 연예기획사들이 주도하는 한류 열풍은 또 어떻습니까. 독한 시장에서 자란 기업이 그 살인적인 경쟁에서 살아남는다면 이만큼이나 고생한 보람도 생기는 거죠.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은, 이제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어려워진 시장"(과거 한국 시장이 저처럼 장난 아니었던 것과 비슷하게)인 중국에서 살아남은 기업들에게선, 뭘 배워도 배울 게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만 말해도 "음, 중국에 진출한 P&G라든가, 이베이라든가, 아디다스라든가, 다임러 AG(주식회사) 등으로부터 배우란 소리구나."라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한국인들이 대부분이겠죠. 여기서부터 이 책이 다른 책들과 가치가 달라지는 대목인데요. 저자는 "(물론 그런 기업들로부터도 여전히 뭘 배워야 하겠지만) 중국에서 성공하고 싶으면 정말 시장에서 살아남거나 대역전극을 펼쳐 승자로 현재 군림하는 중국 기업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게 우리 자존심을 뭔가 건드릴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또 서푼짜리 자존심(대부분 근거도 빈약한)과 거액의 성공을 냉큼 바꿀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건 어지간한 거짓말쟁이나 바보 아니고선 다 순순히 인정하겠죠. 불공정하다기보다 "쉽지 않았음"을 순순히 인정하는 게 (한국에 돌아온 실패한 사업가들뿐 아니라) 구미의 외자 기업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된 건 첫째, 중국인들이 개방, 개혁, 경제성장 초창기에 외국 기업들을 향해 과감히 시장을 내어 주고 도박에 가까운 시도를 한 게 보기 좋게 먹혀든 결과입니다. 그들은 외국 기업들이 어떻게 시장에 연구, 접근하고, 현지인들의 기호에 맞는 제품을 제조, 유통시키는 지 면밀히 관찰했습니다(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갖가지 첨단 기술과 노하우도 엄청 빼돌리고 훔쳤습니다. 우리도 과거 일본으로부터 더 고난도의 도둑질을 했으므로 뭐라 욕할 형편도 못됩니다만). 그들이 배운 건 이뿐이 아니라, 거대 조직(회사)를 관리하는 경영 기법도 포함됩니다. 한 십 년 전만 해도 중국인들이 입을 모아 하던 말이 "특히 한국 기업에서 배울 건 그 기막힌 인사(인적 자원) 관리 기법이다"였습니다. 이에는 노사관계 관련 테크닉(....)도 포함되는데,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강성 노조로부터 호되게 단련된 한국 대기업들이니만치 당연하다고도 하겠네요.

"바다의 상어와 강바닥의 악어가 바다에서 싸우면 당연히 전자가 이긴다. 하지만 무대가 양쯔강이라면 승부는 모르는 거다." 이 말은 전자상거래 시장을 놓고 세계 굴지의 기업, 또 당시만 해도 중국 시장을 좌지우지하던 1인자 이베이를 향해, 고작 초라한 학원 영어강사 출신 마윈이 자신만만하게 내놓았던 십여년 전의 출사표입니다. 외국 애널리스트들이나 미디어뿐 아니라 중국인들조차 저 사람 근거도 없이 큰소리만 친다고 비웃었습니다. 타오바오왕(淘宝网, 도보망. 우리식 한자로는 淘寶網이라고 씁니다. 이렇게 쓰면 어떤 중국인은 "아니 왜 고대문자를 쓰고 그러세요?"라고 또 눈이 휘둥그레져 반문하겠죠)은 이른바 C2C 섹터에 과감히 도입한 결제 시스템입니다.

마치 에스크로처럼, 개인간 직거래에서 벌어질 수 있는 리스크를 중개판매자인 알리바바가 보증하겠다는 안전장치입니다. 우리가 지금 포털의 모 카페라든가 이런저런 대형 커뮤니티에서 얼마나 많은 사건사고가 빈발하는지 살펴 보면, 이 시스템이 얼마나 소비자들로부터 환영 받았을지 상상할 수 있죠. 현재 한국의 예스24라든가 알라딘 중고책방하고는 또 좀 다른 시스템인 게, 이런 곳에서는 벤더가 업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도보망의 성공을 발판으로 소비자의 신뢰를 마련한 알리바바는, 중국 대중 보편으로부터 사랑받는 플랫폼의 위상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그렇다고 손쉽게 한번 다진 1위 자리가 마냥 지속되는 게 아닙니다. 이 책은 날카롭게도, 1위와 2위의 순위 교체가 특히 최근 몇 년 들어 얼마나 빈번히 일어나는지까지도 통계수치로 제시합니다. 진짜 무서운 건 이런 부분입니다. 외자기업이 슬슬 피로감과 한계를 느끼고 철수할 때, "이 중국은 관청의 개입, 편파 행정, 외국인 혐오감정 때문에 도저히 안 되겠다"며 불만을 내뱉는 모습이 그리 많지는 않다(있긴 있습니다)는 게 중요합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거나 어리석어도 돈은 정직하고 똑똑하다는 게 진리입니다. 시장이 그토록 편파적이거나 불공정하다면 어떤 외국 자본도 다 나름 판단을 하고 승산을 점친 후 결정을 내리겠으므로, 실정이 그렇다면 이 못된 중국 시장에 다시는 속아서 안 들어오겠다는 게 대세로 정해집니다. 현실은 그게 아니라, 중국 기업 서로간에도 피터지는 경쟁이 벌어지며, 밀린 기업은 외국 것이건 중국 기업이건 실력이 없어서 밀렸음을 그네들도 잘 알기에 꾸역꾸역 들어오는 거죠. 중국 당국도 이를 잘 알기에 선을 넘지 않고, 오히려 더 자본주의적 색채로 시장을 다루고 있고 말입니다.

중국 기업들의 혁신은 마케팅이나 제조 섹터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혁신의 궁극은 조직의 혁신, 경영 기법의 환골탈태까지 가 봐야 그게 진짜 혁신이라고 평가하겠는데, 이 책은 하이얼(海爾) 그룹의 장루이민張瑞敏(장서민. 이 상서로울 "서" 자는 한국 인명에도 많이 쓰이는 글자인데 유독 중국에선 발음이 "루이"네요) 회장의 예를 들며, 아예 그룹 해체에 가까운 과감한 결단을 내려, 총수나 기조실은 그저 "벤처 캐피탈" 정도의 역할에 머물고 나머지는 모두 현장에서 뛰는 계열사들에게 전적인 재량권을 주는 방식으로, 충격적인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는 겁니다. 이처럼 (특히 오너로서는 더욱 더 힘들고 거부감 느끼는) 권한 배분을 단행한 건, 뭐 배경은 다릅니다만 최근 한국 삼성그룹의 미래전략실 해체와도 어찌보면 궤를 같이하는 겁니다(저는 꼭 이게 정치적 상황에 떠밀린 결정이라기보다, 재벌 해체라는 생색도 낼 겸 전부터 검토하던 옵션을 이번에 단행한 거라고 봅니다. 최근 증시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도 한번 보세요. 돈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더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하려면 종전의 방식으로는 어렵다는 거죠. 소니가 왜 저 모양이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자명합니다. 여튼 경영혁신의 과감한 도전이 이 정도까지 이르렀으니, 누가 중국기업의 도약과 변신과 비전에 대해 그저 짝퉁이라며 비웃을 수 있겠냐는 거죠.



매킨지 등 유수의 국제 컨설팅 섹터에서도, 재벌 포함해서 점점 경쟁력을 잃어가는 한국 기업이 꼭 본받고 교훈을 챙겨야 할 벤치마킹대상으로, 바로 이런 중국 기업들을 꼽는다는 점,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참 앞서가던 우리가 어느새 대세에서 밀려, 규모도 자금력도 기술도 부족해지는데다 하물며 경영 기법이나 민첩한 기업가 정신마저 뒤떨어지게 되었다는 건 다소 참담하기까지 합니다. 어떤 이들이 "숙명적인 내수 시장의 협소함"을 못내 한탄하는 것도, 기업을 호되게 단련시켜 줄 거대한 소비 대중의 사이즈가 그만큼이나 천혜의 조건이었음을 다시 상기시켜 줍니다(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의 굴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근거리에 중국을 두고 여튼 최근까지 가장 큰 혜택을 입은 경제권이기도 합니다. 반한 혐한 감정이 위험수위를 넘은 게 요즘지만, 동시에 한국만큼 친근하고 많은 의식, 문화상의 공통기반을 가진 외국도 (중국인들에게는)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배울 건 과감히 배운다는 자세로 시장과 경제 현실에 대응하면, 우리에게는 위기보다 기회가 더 많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 책은 다른 중국 관련 대중서와 달리, 풍부한 사례를 소개하되 저자가 구축한 분명한 맥(脈), 맥락 속에서 설명을 해 내가기 때문에, 사례 소개로 그치는 다른 독서와 달리 다 읽고 나면 독자 머리 속에 뭔가 전략의 틀이 잡힌다는 게 뚜렷한 장점입니다(인문 고사를 적절히 예거하기 때문에 잘 읽히는 재미도 있습니다). 이런 책은 읽다 보면 저자의 주장이 어째 앞이 다르고 뒤가 또 다르다는 당혹스러운 느낌이 없는 게, 분명한 틀을 잡고 주장과 사례를 개진, 설명하기 때문이죠. 또한 저자가 본래 광고 홍보 섹터에서 일한 분이라, 특히 중국 대중에게 성공적으로 먹혀 들어간 브랜드들을 놓고 자세히 풀어 주는 후반부도 저자의 장기가 드러나서 유익했습니다. 일반 사업가들도 앞으로 성공하려면 (꼭 중국 시장이 아니라도- 물론 향후 중국 시장을 빼고선 어느 다른 시장을 운위할 구석도 없긴 하지만) 어떤 감각을 키우고 어떤 영역을 공략, 주목해야 할 지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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